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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21. 2022

‘건희의 꿈’은 이미 이루어졌다.

누가 감히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쥴리의 꿈’이 아니라 ‘건희의 꿈’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의 팬들은 김건희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논문이나 강의 경력과 관련된 academic excellence에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는 주의를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그의 인기는 박사학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천박함’에 인기의 비결이 있다.


박사학위와 강의 경력을 내세우지만 정작 김건희가 쓴 논문에 사용한 어휘는 통상적인 박사나 교수가 사용하는 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이미 <열린공감TV>에 공개된 대로 오히려 김건희의 말투와 문장 구조는 저잣거리의 이른바 ‘가방끈이 짧은’ 아줌마와 아저씨의 것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김건희의 인기 비결이다. 저잣거리의 ‘아줌마’와 ‘아저씨’에게는 논리적 설득이 필요 없다. 직관적이고 정서적인 접근이 문자 그대로 ‘먹힌다.’


김건희 문제의 해결의 가장 골치 아픈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 국가의 정치가들은 대부분이 기득권자이고 엘리트에 속한 무리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대부분이 ‘아줌마’와 ‘아저씨’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다. 이들이 삶을 자력으로 개선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사실 더 잘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통계적으로도 근로자들의 실질 평균 임금은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가장이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사고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다. 근본적인 이유는 돈이 없어서이다. 국부는 증대했지만 그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빈부 격차는 더욱 악화되었다. 상위 10%의 수입과 재산이 있는 계층을 빼고는 한국 국민의 대부분은 ‘가난하다.’ 그 가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부채를 늘여갈 수밖에 없기에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잣거리의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사회와 같이 상대적 박탈감에 매우 민감한 국민들로 구성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분노하는 대열에 집값 폭등과 역차별을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여겨 좌절한 이대남이 끼어들었다. 이미 그 이전에 자신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의 ‘한남’들에게 절망한 이대녀들이 먼저 그 대열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나이와 학력 재산 상태는 달라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분노의 ‘배설’ 욕구이다. 이들은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무능력으로 ‘가난한’ 삶을 살게 된 현실에 분노하며 그것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문자 그대로 폭발 직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노를 배설하고 싶지만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바로 김건희가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김건희는 사실 이런 분노하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재산을 가진 ‘엄마’가 있다. 그 덕분에 이미 넘치는 부동산을 지니고 있고 서초동 검찰청 근처에 실거래가 25억 원 정도 되는 아크로비스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Yuji’ 수준의 논문이지만 박사이고 대학에서 10년 넘는 강의 경력도 있는 문자 그대로의 ‘잘 나가는’ career woman이다. 객관적 조건만 본다면 김건희는 분명히 그런 분노하는 계층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한국 사회의 안드로메다 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김건희를 지지한다. 그것도 가진 것 없고 집도 없거나 ‘겨우’ 한 채 있는 분노하는 계층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현상’이 바로 한국 사회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계점에 이른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분노이다. 그리고 이 분노하는 이들의 분노를 더욱 키운 것은 바로 ‘내로남불’하는 사회적 엘리트들이다. 결정적으로 그 분노를 폭발하게 만든 것이 이른바 ‘강남좌파’인 조국과 관련된 사태이다. 물론 ‘조국 사태’의 본질은 여당과 야당, 정부와 검찰, 그리고 여당 내의 권력 투쟁이다.


그러나 ‘분노한 이들’은 그 깊은 사정은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불리한 상황을 야기한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밖에서 찾아 분노를 배설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마침 조국이 나타났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줄 알았던 좌파마저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자식의 영달을 도모했다는 생각이 마침내 그들의 분노가 극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조국은 아무리 보아도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 아무리 법적으로 ‘조국 사태’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이루어져도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미 화산은 터진 것이다. 그리고 분노가 폭발하면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흔히 국민의힘은 원래 기득권자들의 이익 증진을 추구하는 수구 세력의 정당인데 이른바 사회의 ‘하위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지지가 많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분노는 당연히 하위 계층에 더 많이 응축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노하는 이들은 기득권자들을 좌파든 우파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한다. 그래서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하늘 위에는 분노와 저주가 떠돌고 있다. 마치 1848년 유럽의 하늘 위에 공산주의의 망령이 떠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김건희는 이른바 ‘사이다’가 되고 있다. 분노한 계층의 고구마 열 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풀어주는 바로 그 사이다 말이다. 물론 김건희는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분노한 계층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할 좋은 도구를 김건희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이다. 그 의식과 정신을 김건희가 본능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김건희는 그들이 하고픈 말을 지금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한 이들은 김건희나 윤석열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도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속이라도 시원하니 말이다. 지금 이들에게는 해결책이 아니라 분노의 배설이 훨씬 급하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김건희를 내세워 그들의 분노를 특히 ‘익명’으로 배설할 수만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대선 정국은 이성이 아니라 광기, 합리가 아니라 부조리가 판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대안도 논리적 설득과 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데도 여당과 이재명 캠프는 논리적 설득에만 주력하고 있다. 분노한 이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조국이 촉발한 ‘내로남불’에 대한 분노를 잠재울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당의 내부적 역학구조의 한계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내로남불’은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이기 때문에 조국이든 김건희든 극복은 불가능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자기 보호 본능에 가장 충실한 법이기에 자기 합리화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가 없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이 사회,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본질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김건희도 인간이기에 이러한 자기 보호 본능에 충실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건희 자신도 본능에서 나오는 내로남불의 논리로 무장된 세계관을 지니고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김건희를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찐 도사가 김건희가 좋아하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여 ego를 내려놓고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곧 참다운 자신의 본질을 깨닫도록 해준다면야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생각을 빌려서라도 박사를 받아야 속이 풀리고, ‘겨우’ 강사 자리를 놓고도 온갖 문서 위조를 일삼는 여자에게 그런 득도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니 답이 없어 보인다.


도대체 이러는 김건희의 꿈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쥴리의 꿈’과 얼마나 다를까? 그 사람의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무의미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궁금하니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일단 여기에 필요한 자료는 <열린공감 TV>가 넉넉히 마련해 주고 있으니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김건희의 과거가 유흥계에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여자가 말하는 대로 결혼 전의 여자의 ‘과거’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더구나 윤석열이 좋아하는 ‘법대로’의 기준으로 보아도 혼인의 정조 의무를 위반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나의 관심은 오히려 그의 가방끈과 관련된 것이다. 그의 인생을 보면 참으로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학력 ‘세탁’에 대한 집착이 보인다. 그토록 바라던 학사, 석사, 박사의 꿈을 꾸었고 일단 이룬 모양새이다. 비록 이른바 ‘명문대’는 아니어도 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강사의 꿈을 꾸고 노력을 기울인 것이 확인된다. 그 과정에서 온갖 거짓 서류를 꾸며가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으로 김건희가 꾼 꿈이 예술계에 관련된 기업의 사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코바나 텐츠라는 회사를 세워 그 바닥의 내로라하는 이들의 ‘협조’를 얻어내었다. 여기에 윤석열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삼성과 같은 대기업도 굽실댈 정도였으니 꿈은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끝으로 확인된 김건희의 꿈은 클래식 음악을 틀고 도사들과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한 자들이 천공 도사, 항문 침 도사, 그리고 이른바 ‘건진 도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보면 건희의 꿈은 박사, 강의, 기업 운영, 그리고 ‘도사’와 나누는 고준담론으로 정리된다. 추가적인 것이 있겠으나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김건희는 이미 이 꿈을 다 이루었다. 그러니 야망이 큰 김건희에게는 그 이상의 꿈이 또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추측을 더 해보니 김건희가 스스로 자기 입으로 토해낸 대로 청와대에 입성하면 자기의 기분을 건드린 언론을 손볼 꿈이 남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꿈이 다섯 개로 정리되는데... 다섯. 이 숫자가 우연이 아닌듯하다. 그래서 인가? 전화번호 끝자리도 다섯, 강사료 지급도 105만 원 어지간히 5를 좋아한다. 그런데 왜 5일까?


김건희가 점을 잘 본다고 자랑할 정도이니 숫자의 의미도 점술로 이해하는 것 아닌가?


사주학에서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숫자가 음양오행의 틀 안에서 해석된다. 그래서 박근혜를 아바타처럼 부려먹은 우주의 기를 모으던 최순실도 오색을 응용한 ‘오방낭’이라는 부적을 박근혜의 취임식 때 온 사방에 매달고 난리를 친 바가 있다. 그런데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였는지 3년 정도 지나자 둘 다 감옥에 가게 되었다. 아마 색깔을 잘못 사용하여 천지신명의 화를 돋우었나 보다.


중국에서 온 점술에서 사용하는 다섯 가지 색깔은 흑색과 백색과 더불어 청색, 적색 그리고 황색이다. 이는 음양오행의 오행에 붙는 색깔이다. 곧 수금목화토의 순으로 흑, 백, 청, 적, 황의 색을 연계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 순서대로 북, 서, 동, 남, 그리고 중앙을 의미한다. 또한 그 순서대로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의 사신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색인 황색은 중앙, 곧 황제국인 중국을 의미한다. 그래서 점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김건희가 숫자 5를 애용하는 것은 한반도에서나마 황제의 자리에 있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겠다. 한국에서의 다섯 번째 숫자인 5는 황색이고 중앙이니 곧 과거 중앙청 뒤에 있는 청와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정도의 추론을 해보니 영부인에 관심 없고 윤석열이 당선되어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김건희의 발언의 진정성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친오빠까지 윤석열 캠프에서 활동한 것을 김건희 스스로가 말한 것을 보아 중앙에 있기로 작정을 한 모양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럼 오빠가 마침내 이룰 건희의 다섯 번째 꿈의 ‘제5원소’가 되는 것인가? 이렇게 우주의 다섯 기를 모아 자신이 그 중앙에 서면 언론도 쉽게 손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서는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전 우주의 생명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타노스의 건틀릿에도 인피니티 스톤이 6개이니 말이다. 중국에서는 5가 완전수이지만 서양에서는 6이 완전수이니 김건희는 완전을 향하여 다시 여섯 번째 꿈도 꿀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더욱 흥미가 발동한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조선 말기의 민비처럼 자신의 오빠를 비롯한 친척을 불러들여 조선 왕조의 국정을 주무르듯 한 것을 따라 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러면 백성의 생사여탈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으니 욕망의 극치감을 맛보게 될 터이니 말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른바 ‘쥴리의 꿈’이 저잣거리에서 회자되었을 때만 해도 김건희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른바 ‘천한 X’가 발칙한 꿈을 꾸고 있다는 판단에서 말이다, 그리고 감히 ‘짝퉁 경국지색’의 사달을 흉내 내는 깜도 안 되는 여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작금에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한 마디로 김건희의 꿈은 무죄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김건희는 ‘죽을죄’를 지은 자가 아니다. 불교적으로는 그저 무명으로 속세의 근원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적으로도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적어도 한국 사회에는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된 성경의 에피소드에서 예수가 이미 정답을 말하지 않았던가? 신약성경의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요한복음의 정본에는 없고 나중에 누군가가 끼워 넣은 이야기로 특히 죄지은 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간통 현장에서 걸린 여자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기세 등등하던 인간들 가운데 늙은이부터 먼저 돌을 내려놓고 차례로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고 예수와 그 여자 단둘이 남은 상황에서 예수는 그 여자에게 말한다. 그리스어 성경 원본을 보자. Οὐδὲ ἐγώ σε κατακρίνω: πορεύου, [καὶ] ἀπὸ τοῦ νῦν μηκέτι ἁμάρτανε. 한국말로 직역하면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겠소. 가시오. 그리고 이제는 나쁜 길을 걷지 마시오.’ 정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예수가 여자에게 반말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라. 더 이상 죄짓지 마라.”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권위적인 번역을 하면 사랑 자체인 예수의 참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는 정 반대인 꼬장 한 꼰대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러니 번역은 늘 조심해야 한다.


각설하고...


흔히 김건희를 논할 때, 특히 ‘쥴리’와 연계하여 논할 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런 예수의 용서의 논리를 들먹이게 된다. 과연 누가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는 말이냐면서. 과연 김건희를 단죄할 만큼 ‘깨끗한’ 사람이, 특히 ‘깨끗한 여자’가 한국에 얼마나 될 것이냐는 논리로 말이다. 김건희의 성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김건희의 얼굴에 ‘손’을 여러 번 댄 흔적이 누가 봐도 보이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요즘 한국 사회에서 얼굴에 ‘칼질’을 전혀 안 한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고등학교 졸업 선물이 ‘최소한’ 쌍꺼풀 수술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관행 아니던가? 그래서 성형 안 한 사람만 김건희의 성형 의혹에 대하여 돌을 던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부동산 투기, 주식 투기에 관한 의혹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돈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돈에 초연하고, 돈과 관련된 죄가 전혀 없어서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말이다. 아마도 김건희와 그 무리들은 이러한 질문에 당당히 아니라고 말하며 나설 사람이 한국 사회에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죄를 지었으면서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전두환 버전으로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고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불현듯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 나와 설칠 때가 다시 떠오른다. 그 당시 박근혜는 대선 토론에서도 비논리와 중구난방식의 안드로메다 화법으로 저잣거리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러나 대구경북을 주축으로 한 한국의 수구세력은 한국 선거 사상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다. 박근혜가 51.6%라는 과반수의 득표율을 보이며 당선된 것이다.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박근혜가 승리를 거두었다. 안철수가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중도 하차하였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실 이 득표율은 박근혜의 아버지이자 군사독재 정부에서 철권을 휘두르던 박정희도 거두지 못한 엄청난 성과이다. 그리고 문민화된 이후의 한국의 역대 대선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이다. ‘우주의 기’를 모아 정치를 하고 ‘세월호 사건’으로 채 꽃 피워보지도 못한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일시에 스러져 가도 머리를 매만지는지 아님 다른 급한 일이 있든지 간에 7시간이나 늦게 공개석상에 나선 그 박근혜가 말이다. 그리고 그 박근혜를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 합법적으로 선출하였다. 히틀러를 독일 국민이 합법적으로 선출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박근혜나 히틀러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했거나 안 했거나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치렀다.


그런 기억 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의 당선보다 김건희의 등장을 더 두려워하는 세상이 되었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를 김건희와 윤석열의 관계에서 유추해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증거’들이 그런 두려움을 확증해주고 있다. 도사들과 점술이 김건희의 삶에 깊숙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확증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이번 20대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한국에 없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대로 지극히 병든 사회에서 잘 적응한 사람이 바로 김건희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방식은 차이가 있어도 이 병든 사회를 ‘치유’ 하기보다는 그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적응하고자 애쓰는 자들이 한국에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김건희가 ‘명백히 부실한’ 논문을 제출했어도 그것을 받아들여 석사, 박사 학위를 ‘남발한’ 교수와 국민대와 같은 학교가 한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김건희가 운영하는 코바나 콘텐츠가 상당히 허술한 회사임에도 분에 넘치는 기획전을 개최해도 그것을 통 크게 지원한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이 분명히 한국에 존재한다. 김건희가 저잣거리 여인의 말투로 마구 감정을 배설을 해도 그것을 ‘걸 크러쉬’로 받아들이며 환호하는 팬클럽을 만들고 난리 치는 인간이 분명히 한국에 존재한다. 게다가 김건희가 아무리 성 매매하는 여자의 수준으로 성폭행에 관한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해도 그것을 대신 변명해주는 범죄 심리 전문가로 자처하는 경기대학교의 이수정 교수와 같은 인간이 분명히 한국에 존재한다. 게다가 김건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옹호하는 국민의힘의 성상납 의혹으로 이미지를 한방에 구겨버리고도 뻔뻔한 이준석 당대표와 같은 애늙은이가 한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서 20대에 집을 살 수 없다고 분노하며 윤석열에게 이른바 ‘묻지 마’ 지지를 하는 MZ세대나 집값이 올랐다고 기뻐하면서도 세금을 조금 올렸다고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도 ‘무조건’ 정권 교체를 외치는 60대가 한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상황이 이런데 김건희만 ‘잡으면’ 한국 사회가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고? 어불성설이다. 사회가 문자 그대로 ‘미쳐 돌아가니’ 김건희 같은 여자가 당당하게 한국 정치와 사회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김건희는 죄가 없다. 김건희는 이 병든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인간일 뿐이다. 김건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심지어 김건희가 말한 ‘박사 하고 사업하느라고 쥴리 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로 들릴 정도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먼저 나서서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다 알면서 그저 <열린공감 TV>의 무운만을 비는 나는 참으로 비겁해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으나 소용이 없나 보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지금 괴로워하고 있나 보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이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별이 바람에 스친다. 82년 전 윤동주 시인이 탄식한 그 하늘이 여전히 차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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