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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27. 2022

이준석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이 새삼스러운가?

이준석의 언행은 뿌리 깊은 사회적 병리현상의 표상일 뿐이다.

그래도 명색은 여전히 국민의 힘 대표라는 자가 만만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해도 국민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문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준석이 다음과 같은 자기가 만든 용어를 내키는 대로 사용하여 감정을 배설하고 있다.


“이준석을 여성혐오자로 몰아도 정확히 여성혐오를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못하고, 장애인 혐오로 몰아도 무슨 장애인 혐오를 했는지 설명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 되었을 때 언더도그마 담론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정작 소수자 정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해당 성역의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강도만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은 담론을 건드리기를 싫어하게 되고 주제 자체가 갈라파고스화 되어버리는 방식으로 끝난다. 그런데 정작 아무리 소수자, 약자 프레임을 지속해도 이미 여성이 절대 약자라거나 장애인이 절대 선자라는 프레임은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정의당이나 민주당이 아무리 여성주의를 외쳐도 광역단체장 상당수와 당대표까지 성비위로 물러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담론을 포기 못하고 계속 들고 가는게 복어 파라독스다.  그리고 결국 이런 파라독스를 이기지 못하고 질주하면서 민주당은 여성의 성기를 찢겠다는 사람을 내세워서 여성표를 공략해야하고 비대위원장이 원내대표의 멱살을 잡아야 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보수당의 당 대표가 이런 ‘미친 소리’를 해도 멀쩡하다니 과연 이게 나라인가 싶다. 독일이었으면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을 것이다. 이준석이 이런 궤변을 늘어놓아도 대한민국의 이대남이 그를 지지하고 그 어떤 정치가도 이준석을 ‘두들겨 패지’ 못한다는 현실이 기가 막히다.


이준석이 개인적 트라우마로 여성과 장애인을 혐오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여성을 지독히 혐오하는 자가 이른바 ‘성상납 추문’에 걸려들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 있게 말하는 대로 장애인을 혐오한다는 물증을 잡을 수도 없으니 장애인 혐오자라고 고소, 고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예 대한민국 법에는 장애인 혐오자 처벌법이라는 것도 없지 않은가? 대통령을 빨갱이 간첩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도 무죄 방면되는 나라 아닌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약아빠진’ 이준석이 말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사회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그들에 대한 ‘혐오’라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 차원의 문제로 만들어서 아예 이성적 토론의 장 자체를 파괴시켜버리고 있다. 정말 잔머리 굴리는 데 도가 트인 모양이다. 이것도 ‘건진’이가 알려준 것인가? 설마? 이런 식으로 여성과 장애인 혐오의 프레임으로 논지를 전개할 경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선진국이 되기 위한 중요한 잣대의 마련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에 대한 합리적 논의는 시작할 수도 없게 된다.


이렇게 사회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개인윤리, 더 나아가 개인의 감정의 영역으로 ‘추락’시켜버리는 전략은 전형적인 나치의 괴벨스가 즐겨 사용한 데마고그 방식이다. 객관적 자료들이 말해주는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사실은 감춘 채로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감정 대결로 몰아가면서 결국 국민의힘의 주요 지지층인 기득권층과 수구세력에 더하여, 역차별을 당한다고 분노하는 ‘멀쩡한’ 이대남들의 표를 수호하겠다는 수작이 너무 뻔히 보인다. 6월 지방선거에서 또 갈라 치기 전술로 치고 나가고자 하는 얕은 속내가 너무나 뻔히 보이는 것이다.


현재 국회의 여소야대의 구도에는 도저히 ‘쨉’이 안 되니 지방 정부에서라도 세력을 확보해서 2년 남은 총선에서 복수를 하려면 서울 시장 보선과 대선에서 먹혀든 갈라 치기 수법을 계속 써먹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한심한 갈라 치기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국민의힘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는 이준석이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아무리 북 치고 장구 치며 ‘미친 듯이’ 날뛰어도 그에 호응하여 손뼉을 쳐주는 관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이대남이 여전히 그를 ‘예뻐해 주고’ 있으니 저리 기고만장하는 것이다.


이준석이 대한민국의 이대남들의 역차별 피해의식을 이용하는 데 여성만이 아니라 장애인까지 등장시키는 그 얕은꾀를 누가 모를까? 그러나 그 이대남들의 의식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해야 마땅하나 이른바 사회의 ‘어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그들을 꾸짖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깊이 병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이대남들은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왜 더 ‘우대’를 받아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조치가 공정과 정의에 위배된다는 해괴한 논리만을 제기한다. 이대남들이 태생적으로 사악한 이기주의자들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대가 바로 공정과 정의라는 내용의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치원 때부터 그저 ‘국영수’에만 올인하며 ‘하늘’(SKY)에 오를 생각만 하고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사회적 약자의 배려에 기본이 되는 사회윤리의 원칙을 배웠을 만무 하다. 그러니 이대남이 본래 사악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사악하여 그들의 정신이 사악해진 것이라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노는 물이 더러운데 어찌 물고기가 깨끗할 수 있을까?


한국에 널리 퍼진 신화가 있다. 어릴 때부터 국영수에 올인하고 그 결과로 내신과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하늘’(SKY)에 오르면 이른바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신화 말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서울대 법대’를 나온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우리를 실망시킨 자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부터 천재로 명성을 높인 김기춘과 우병우만이 아니다. 법조계와 정계를 지배하고 있는 ‘하늘’(SKY) 출신의 이른바 ‘엘리트’의 작태는 이미 대중에게 널리 회자되는 안주감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파당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어제오늘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하늘’(SKY) 출신의 ‘비장애인이며 남성인’ 엘리트가 ‘통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통치를 받는 ‘신민’들의 꿈은 그런 부도덕한 엘리트의 타도가 아니라 그들의 리그에 편입하는 것이다. 곧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사회의 극소수에 속하는 엘리트의 세계에 들어가 입신양명하며 호의호식하는 것이 대한민국 ‘신민’들의 소망인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민중’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다. 서양의 민중은 타락한 엘리트를 몰아내는 혁명으로 사회 정화를 이루어 왔다. 혁명의 결과는 민중의 뜻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부패한 엘리트를 몰아내는 데는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는 그러한 혁명이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역사가 너무나 일천한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를 몰아낸 민중의 혁명 정신의 역사가 채 60년도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IMF 이후 이른바 ‘각자도생’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집단의식으로 고착된 이후 그러한 민중 혁명의 주요 세력인 학생들의 정신이 ‘물질주의’와 ‘성과주의’에 오염되면서 이제는 그 ‘혁명’의 동력도 상실되어 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집단의식은 그저 ‘하늘’(SKY)에 올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득권 무리에 편입되어, 인륜을 저버리는 한이 있어도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살다’ 죽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남녀노소나 빈부의 차이가 없다. 권력과 돈을 탐닉하는 것이 더 이상 타락한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닌 지가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많은 ‘평민’의 꿈도 40대 이전에 수십억 재산을 모아 FIRE족이 되는 것이다. 곧 늙기 전에 떼돈을 모아 여생을 ‘즐기며’ 살다 죽는 것이 꿈이 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인간관도 미국식으로 기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것이 될 밖에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군대도 안 간 여자가, 생리 휴가를 철저히 찾아먹는 여자가, 육체적으로 힘든 야근이나 당직은 절대로 안 서려고 하면서 같은 월급을 같이 받으려고 하는 여자가 이대남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여자가 왜 군대를 안 가고, 왜 생리를 하고, 왜 육체적으로 약한지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피상적 관찰을 통한 편견으로 여자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비장애인인 자신이 편히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인들이 불편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장애인들을 위하여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사회복지의 명목으로 ‘빼앗기는’ 것이 억울한 것이다. 맘껏 명품에 돈을 지르며 ‘내돈내산’의 삶을 사는 것이 지극한 쾌락이요 궁극적 삶의 의미가 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미친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고사하고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방법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대로 지극히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한 것이 건강의 징표가 될 수 없음에도, 병든 사회를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다 죽는 것이 꿈인 사람으로 넘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더구나 한 사회의 미래라고 하는 이대남들이 그 모양이니 말이다. 이런 정신을 지닌 이대남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국영수에 올인하여 경쟁자보다 1점을 더 얻었으니 그만큼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조금이라도 역차별을 당한다고 느끼는 순간 분노하는 바로 그 이대남들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우리는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왜 도와야 하는 것일까? 이대남들이 역차별을 느낄 정도로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윤리의 근본 원칙에서 나온다.


서양, 특히 독일의 사회윤리의 기본 원칙에는 세 가지가 있다. 바론 인간 존엄의 원칙, 연대성의 원칙, 그리고 보조성의 원칙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모두 기독교 사회론에서 나온다. 모든 인간의 존엄은 1948년 발표된 국제연합 <세계인권선언>의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이 명기되었다.


All human beings are born free and equal in dignity and rights. They are endowed with reason and conscience and should act towards one another in a spirit of brotherhood.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이다.


Everyone is entitled to all the rights and freedoms set forth in this Declaration, without distinction of any kind, such as race, colour, sex, language, religion, political or other opinion, national or social origin, property, birth or other status.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기독교와 불교, 흑수저와 금수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엄의 개념이다.


이렇게 무차별적인 인간 존엄의 근거는 바로 기독교의 인간관에서 나온다. 곧 모든 인간은 imago dei, 다시 말해서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의 존엄을 지닌 자로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인간관의 핵심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변형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다시 한번 더 변형되어 이른바 ‘개독교’가 된 한국에서 이러한 평등의 정신은 교회 안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성직자와 신자를 철저히 구분하는 것도 모자라, 목사는 독재 국가의 ‘어버이 수령’ 수준이고, 그 아래 장로, 집사, 권사가 층층시하로 굳건한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조차 형제자매가 아니라 반드시 계급으로 호칭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엄연한 현실이다.


기독교 인간학에서 인간은 모두 신의 모습을 지닌 신적 존재이다. 그래서 신의 대접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기에 ‘하늘’(SKY)  출신과 ‘지잡대’ 출신, 남자와 여자, 금수저와 흑수저, 취업자와 실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청년과 노인, 호남과 영남, 진보와 보수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인간 존엄의 근본적 이념과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 평등 정신은 없다. 다만 ‘차별 대우’에 대한 질투와 분노만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돈’을 벌지 못하는 무능력자, 장애인, 전업 주부를 위하여 돈을 버는 ‘능력자’들이 ‘희생’을 하는 상황을 이해하거나 나아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조차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는 논리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말하는 ‘일’은 매우 좁은 의미의 ‘임금 노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노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논리임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한 논리 아닌 논리가 먹히고 있다. 예수가 말한 ‘일’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하늘나라의 완성을 향해 노력해야 하는 인류의 의무를 말한 것임에도, 근대 이후 발생한 자본주의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사회윤리의 두 번째 원칙인 연대성의 원칙은 바로 이 인간 존엄의 원칙에서 나온다. 곧 내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는 인종, 성별, 종교, 재산, 출신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인권헌장>이 말하는 형제애, 인류애가 나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움은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차등의 원칙’(principle of difference)에서 구체화된다.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나보다 약하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보조성의 원칙은 상대가 원하는 만큼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 사회윤리의 원리를 논하는 것 한 학기 강의로도 부족하다. 그래서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겠다. 필요하다면 내 ‘브런치’에 <사회윤리란 무엇인가? I>의 제목으로 올려놓았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이준석의 언행으로 드러난 한국사회의 병리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윤리적 시민 의식 개혁이 절실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는 것인데 한국에 만연한 이른바 ‘개독교’의 현상으로 기독교에 대한 혐오가 팽배한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예수가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희망이 없다. 이 지독히 병든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방법이 안 보이는 것이다. 이준석이 당 대표에서 곧 쫓겨나겠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자가 이준석보다 더 나을 가능성이 있을 리 만무하니 더욱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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