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에게도 ‘별의 순간’이 오나?

결국 올것은 오고 마는 것이다.

by Francis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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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별 새끼별 나란히 나란히 Ⓒ pixabay



최근 여론 조사에서 차기 대선 후보가 거의 정해진 모습이다. 이재명 대표가 부동의 1위인 것은 이제 고정 변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한동훈 장관이 2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의 절반도 안 되는 지지율이다. 그리고 그 아래 '조무래기들'은 지지율이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조무래기'의 면면을 보면 정치권에서 한동훈 장관의 '대선배들'이다. 그런 관록을 한동훈 장관이 추풍낙엽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연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고, 그가 대권을 쥔다면 나라가 어찌 될까? 이제 '겨우 4년 밖에' 안 남은 윤석열 정부의 공과를 가릴 차기 정부의 수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나의 운명이 크게 바뀔 것은 뻔하다. 사실 대한민국 국민은 정권교체의 후유증을 지금 절실히 체험하고 있다. 문제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정권이 바뀐지 1년 밖에 안 되었지만 상전벽해가 되었다.


과거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로 거론 될 때 그를 이른바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로 선정한 미국의 저명한 주간지 <TIM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But if Yoon has big aims internationally, he will also need to prove himself at home. The populist leader promises to heal economic and political divides, something that will be necessary after a campaign in which he inflamed divisions by weaponizing anti­feminist rhetoric to gain support. Not everyone is confident in his abilities. A poll released in early April by Gallup Korea found that only 55% of respondents expect Yoon, who won by a razor-thin margin, to do a good job in office.


간단히 번역해 보자


“그러나 윤이 국제적으로 큰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해도 국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이 [윤석열이라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정치적 분열을 치유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는 [대선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반페미니스트적인 구호를 무기화하여 [사회적] 분열에 불을 붙인 대선 캠페인 이후에 필요할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의 능력을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갤럽>이 4월 초에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55%의 응답자만이 아슬아슬한 표차로 당선된 윤이 집권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윤석열 후보 측에서 처음에는 <TIME>이라는 유수의 잡지에, 그것도 ‘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 of 2020’이라는 어마어마한 제목의 인물로 선정된 것을 기뻐하며 서둘러 언론에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위와 같은 그에 대한 평가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자 슬그머니 그 선전을 거두었다. 그 후 1년. 이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장기 침체기에 들어섰다. 아직 그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20%p의 하락세를 막을 길은 아직 안 보인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흥미로운 표현이 나왔다. 바로 윤석열이 ‘표퓰리스트 지도자’(populist leader)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퓰리스트를 추종하는 것을 ‘표퓰리즘’(populism)이라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위키피디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Populism refers to a range of political stances that emphasize the idea of the people and often juxtapose this group against the elite. The term developed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has been applied to various politicians, parties and movements since that time, often as a pejorative. Within political science and other social sciences, several different definitions of populism have been employed, with some scholars proposing that the term be rejected altogether.


A common framework for interpreting populism is known as the ideational approach: this defines populism as an ideology which presents "the people" as a morally good force and contrasts them against "the elite", who are portrayed as corrupt and self-serving. Populists differ in how "the people" are defined, but it can be based along class, ethnic, or national lines. Populists typically present "the elite" as comprising the political, economic, cultural, and media establishment, depicted as a homogeneous entity and accused of placing their own interests, and often the interests of other groups—such as large corporations, foreign countries, or immigrants—above the interests of "the people". Populist parties and social movements are often led by charismatic or dominant figures who present themselves as "the voice of the people". According to the ideational approach, populism is often combined with other ideologies, such as nationalism, liberalism, or socialism. Thus, populists can be found at different locations along the left–right political spectrum, and there exist both left-wing populism and right-wing populism.


역시 간단히 번역해 본다.


“표퓰리즘은 민중의 생각을 강조하고 종종 이 집단을 엘리트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여러 정치적 입장을 나타낸다. 이 용어는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이후 다양한 정치인, 정당, 운동에 종종 경멸적인 의미로 적용되어왔다. 정치학과 그 밖의 사회과학에서는 표퓰리즘에 대하여 다양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일부 학자는 이 용어를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표퓰리즘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틀은 관념론적 접근법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민중’을 도덕적으로 선한 세력으로 제시하며, 부패하고 이기적인 자로 묘사되는 ‘엘리트’와 대립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표퓰리즘을 해석한다. ‘민중’을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표퓰리스트의 [의미에] 차이가 있지만 계층, 민족, 국경을 바탕으로 할 수 있다. 표퓰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엘리트’를 정치, 경제, 문화, 언론계의 기득권층을 이루는 동질적인 실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엘리트는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거나, 종종 대기업, 외국, 이민자와 같은 이질적 집단을 ‘민중’의 이익보다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는다. 표퓰리스트 정당이나 사회 운동은 종종 자신을 ‘민중의 목소리’로 내세우는 카리스마가 넘치거나 지배적인 인물이 주도한다. 관념론적 접근법에 따르면 표퓰리즘은 종종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된다. 이렇게 표퓰리스트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발견될 수 있기에 좌파 표퓰리즘과 우파 표퓰리즘이 모두 존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윤석열 후보는 표퓰리스트라고 부르는 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분명히 이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을 선택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민주당의 ‘부패하고 무능한 엘리트’에 맞서 ‘민중’의 한을 풀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제는 그 윤석열 후보 자신이야 말로 한국의 대표적인 엘리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고시를 패스했으며 검사가 되어 그 조직의 최정상인 검찰총장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 표퓰리스트는 맞지만 참으로 묘한 표퓰리스트이다. 더구나 한국의 ‘민중’의 절반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TIME>이 말한 대로 윤석열 후보는 반페미니즘 구호로 이른바 ‘이대남’의 표를 확실히 얻어 0.73%p 차이의 신승을 거둔 반쪽자리 표퓰리스트이다. 윤석열 후보는 사회적 기득권을 모두 누려온 전형적인 엘리트이면서 동시에 표퓰리스트가 되는 매우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그를 선택한 것은 분명히 ‘민중’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의 당선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기득권층인 언론이 윤석열 대통령의 가신이자 충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동훈 장관을 벌써 차기 대선 주자로 밀기 시작하고 있다. 한번 성공한 방법을 또 사용할 모양이다. 이런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 몫을 하는 자가 다름 아닌 김종인이다. 그가 이미 윤석열을 두고 써먹은 '별의 순간'(Sternstunde)을 이제 한동훈 장관을 대상으로 재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지지율로 보아서는 한동훈 장관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두렵다. 윤석열 후보도 겨우 0.73%p 차이로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통계도 사주도 상식도 초월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으니 한동훈 장관이라고 안 되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막강한 기득권층인 언론이 밀고자 한다면 ‘민중’을 선동하는 표퓰리즘이야 문자 그대로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한 나라의 정치인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자들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아 니라에서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장관이 인기가 있다면 그래서 대선에서 연이어 당선이 된다면 그들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에 알맞은 인물이라는 소리이겠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를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국민의 수준은 누가 돌보아 준다는 말인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전라도와 경상도, 부자와 빈자도 모자라 이제는 여자와 남자로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갈라진 ‘민중’은 서로를 ‘개돼지’라고 부르며 물어뜯고 있다. 그러는 사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과 같은 최고의 엘리트들은 그 민중의 분노와 대립을 이용하여 더욱 엘리트적인 삶을 보장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매우 내밀한 친분이 있다는 명분으로 매우 부패해 보이는 ‘엘리트’들이 장관을 하겠다고 뻔뻔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나서고 심지어 전혀 엘리트가 아닌 자도 윤석열 대통령 지근 거리에서 곁다리로 그들의 엘리트적인 삶에 묻어가는 것이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아마 정치학자들도 표퓰리즘과 연계된 이런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릴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분명히 민주당의 ‘부패하고 무능한 엘리트’를 혐오했으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더 지독한 기득권층에 있고 도덕성이나 능력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윤석열 후보를 선택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검증이 전혀 안 된 한동훈 장관을 마치 ‘민중’을 즐겁게 해주는 탤런트나 운동선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추종하는 이 ‘민중’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극도로 혐오하였다. 무지몽매한 ‘민중’을 속여서 ‘중우정치’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제도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여기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아마 무릎을 치지 않을까? ‘내가 맞았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점술에서 운명을 이야기 하면서 종종 비행기 사고의 비유를 든다. 대형 여객기가 추락하여 수백 명의 사람이 한날 한 시에 죽는 사고가 가끔 일어난다. 이런 사건을 두고 과연 그 비행기에 탄 모든 사람의 사주가 한날한시에 죽을 운명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사주를 보면 그렇지 않다. 다양한 사주를 지닌 사람들이고 그들의 대운도 각각 다르다. 최고의 운에 들어선 사람도 있고 최악의 운에 들어선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를 두고 도사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재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 가운데 그날 비명횡사를 할 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우연히 한 비행기에 탄 멀쩡한 사주를 타고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커다란 사고는 결코 사주로 해석이 다 되지 않는 법이다.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서방 특히 미국에서는 러시아가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저런 사달이 난 것이라는 해석을 정치가와 언론이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전의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다면 그렇게 일방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무능한 젤렌스키는 정치적으로 매우 궁지에 몰려 있었다. 젤렌스키는 이런 궁지에서 탈출할 극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젤렌스키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과 관하여 서방과 러시아에 보낸 메시지가 달랐다. 푸틴도 국내적으로 쉽지 않은 정치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국내적으로 위기에 처한 정치 지도자가 손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국제적인 분쟁이다. 국제적 분쟁은 표퓰리스트 정치가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국제적 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쉽게 민중을 선동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부패하고 무능한 엘리트’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그 표퓰리스트 엘리트를 추종하는 민중만이 죽어나가거나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그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현재 젤렌스키와 푸틴의 정치적 인기는 각자의 나라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민중’은 매일 죽어나가고 수천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고 국제 경제의 파탄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세계의 정치, 경제, 언론의 ‘엘리트’들은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관심이 없다. 그저 립서비스와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들을 지지하는 ‘민중’의 안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계의 많은 ‘민중’은 그런 ‘엘리트’를 추종하는 표퓰리즘에 빠져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닌 것만 같아 그거 기가 막힐 뿐이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리 되었을까? 정말로 이러다가 앞에서 말한 그 ‘비행기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닐까? 그저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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