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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Nov 13. 2022

김건희가 오드리 헵번을 따라 한다고?

껍데기는 이제 그만 가면 좋겠다.

윤석열 김건희 커플이 해외에 나갈 때마다 우리 국민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정례화되다 보니 국민들의 기대치가 매우 높아졌다. 그래서 나도 예의 이번에는 어떤 즐거움이 주어질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번에 동남아로 간 이후 아무런 소식이나 사진이 언론에 올라오지를 않아서 지난번 MBC가 “국회 이 새끼들이 날리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떻게 하나”라는 자막으로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일로 단단히 학습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여 약간 실망하던 차였다. 그런데 김건희가 국민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 솔선수범을 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눈물이 저절로 샘솟는다.

   

게다가 언론이 이 기사를 다루는 분위기가 시시각각 달라져서 더 흥미를 돋우고 있다. 먼저 <세계일보>의 현화영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김건희 관련 기사를 올렸다. “김건희 여사, 앙코르와트 관광 대신 심장병 환아 찾았다.” 그래서 김건희가 외국의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고 그 즐거운 동남아 관광도 고사하는 기특한 선행을 베푼 줄 알고 기사도 읽기도 전에 감동이 복받쳐왔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약간 싸한 느낌이 몰려왔다. 일단 수행 기자가 전혀 없다. 그래서 사진과 기사가 전부 대통령실이 제공한 것뿐이다. 그리고 동남아 관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번 회의에 참석한 각국 지도자의 배우자가 거의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공식 일정을  그냥  패스한 것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정을 걍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실천한다니 가슴이 다 벅차올랐다. 휴 머 니 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단어 아닌가?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사진이었다. 사연을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라서 12명의 아이 중 이미 4명이 사망했고 그 심장병 환아는 심장 수술을 이미 받았고 얼마 전에는 뇌수술까지 받았단다. 그런데 피부에 흠결이 전혀 안 보이는 희멀건한 얼굴의 김건희가 그 병색이 완연해 피부가 거무튀튀해진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아주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영빨'이 피어오르는 순간인가? 내게는 느닷없이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그 조각상,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가 연상되었다. 참으로 숭고한 분위기의 사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조선일보>를 찜 쪄먹는 천하의 <이데일리>의 김화빈이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순방 동행 김건희 여사, 오드리 헵번과 똑 닮은 사진 화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사진을 보고 피에타를 연상한 사람은 나 밖에 없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올린 사진을 자세히 뜯어보고 탄복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실 제공 사진/UNICEF 트위터 사진

    

김건희의 주름  한점 안 보이는 밀가루 색 피부와 전형적인 '얼짱 각도'로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초점이 무한대로 열린 동공의 화려한 컬러 사진에 비해 오드리 헵번의 사진은 흑백인 데다 칙칙하고 근심 가득한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송곳처럼 찌르고 그 곱던 얼굴이 늙어 주름이 가득한데도 보톡스나 파운데이션으로 가린 구석이 전혀 없다. 아! 그 당시에는 보톡스가 없었나? 그리고 오드리 헵번의 몸도 자신이 안고 있는 아이만큼이나 앙상하다. 문자 그대로 피에타(Pietà)! 비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연민의 감정이 저절로 샘솟게 된다. 김건희가 안은 아이와 오드리 헵번이 안은 아이는 모두 세상의 슬픔을 상징하는데 두 여자의 겉으로 드러난 행색은 천양지차다. 그래서 너무나 비교가 된다. 그런데도 자세와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너무 흡사하다. 역시 기자의 직관력과 감각은 놀라울 따름이라는 감탄을 하면서 기사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기사도 그런 유사한 분위기를 확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 속 김 여사는 오드리 헵번과 마찬가지로 단정히 묶은 머리에 카라가 달린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있다. 사진 속 표정 역시 걱정과 근심이 담겨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드리 헵번이 안고 있는 흑인 아이의 신원도 알뜰하게 소개하고 있다.    

 

“영화계 은퇴 후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했던 오드리 헵번은 지난 1992년 소말리아 바이도아 소재 유니세프(유엔 아동기금) 급식센터를 찾아 영양실조 아동을 안고 있는 모습이 찍혔다.

특히 해당 사진이 촬영된 당시에 그가 암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지면서 말년의 모습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남았다.”  

   

기사에 소개된 대로 이것은 오드리 헵번이 1993년 대장암으로 64세에 죽기 1년 전인 1992년에 찍은 사진이다. 지금 김건희가 50세이니 사진으로만 비교한다면 ‘겨우’ 13살 차이밖에 안 난다. 그런데 김건희는 주름 한 점 없이 곱디고와서 오드리 헵번은 김건희의 엄마 나이로 보일 정도다. 당시 오드리 헵번은 국제연합의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며 엄청 고생을 할 때이니 딴은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니세프는 문자 그대로 세계의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기관이다. 원래 1946년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Children's Emergency Fund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으나 1953년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 약자로 UNICEF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오드리 헵번이 이웃을 위해 자선활동을 시작한 것이 1954년이다. 그의 나이 25살 때부터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직접 몸으로 뛰기 시작한 것은 1988년이다. 그 이후 1992년 12월까지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1개월 후인 1993년 1월 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오드리 헵번의 삶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헨리 나웬이 쓴 책 <상처받은 치유자>에서 권유하는 성자의 삶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김건희는 25살 무렵에 무슨 일을 했나 보았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석사 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 강의도 하고 박사학위도 하고 사업도 하고 분주하게 살았다. 김건희가 “박사 하고 사업하느라고 쥴리 할 시간이 없었다.”라고 한 바로 그 시기이다. 그렇게 김건희가 박사하고 사업하던 나이에 오드리 헵번은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위에서 말 한대로 수십 년 동안, 비참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하여 단순히 이른바 ‘얼굴 마담’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직접 봉사하고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기부하며 살았다. 그래서 사진이 잘 말해 주는 것처럼 얼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행로를 보낸 두 사람이 이번에 이렇게 비교가 되다니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화빈이 나를 한 방 더 먹여 어지럽게 만든다. 김건희가 이번에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이전에 세계적인 인물의 모습을 보인 적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 사정을 김화빈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편 대통령실은 지난 5월 대통령 전용기 좌석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윤 대통령 옆에 선 김 여사의 모습을 공개했는데 김 여사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와 유사한 컨셉을 취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함께 올린 사진을 보면서 탄복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MBN)

     

<이데일리>는 이런 수준의 사진을 직접 제작하기 힘든 모양이었는지 MBN에서 빌려왔음을 친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위조와 변조와 사기가 범람하고, 뻔히 들리는 말도 절대 안 했다고 뻗대고, 생때같은 사람이 수백 명씩 죽거나 다쳐도 내 책임 절대 아니라며 폼 나게 자리던질 생각이나 하는 이들로 넘쳐 나는 한국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의 글을 Ctrl+C, Ctrl+V 해서 도저히 논문이라고 할 수 없는 '잡문'을 그것도 '짜깁기'해 놓고도 석사, 박사 학위를 잘도 취득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수줍은 고백을 하는 김화빈이 눈물 나도록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재클린 케네디(오나시스)의 삶을 오드리 헵번의 삶과 비교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김건희를 통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참으로 하늘의 뜻은 신비하여 인간의 지혜로는 예측이 불가능한 모양이다.   

  

대학교 교양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논리학에서 삼단논법의 오류 가운데 ‘매개념 부당 주연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크라테스다.” 이런 식의 오류를 말한다.

    

이를 위의 기사에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오드리 헵번이 아픈 아이를 안고 있다. 김건희가 아픈 아이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김건희는 오드리 헵번이다.” 재클린의 경우도 마찬가지겠다. “재클린은 케네디 대통령이 일할 때 흰 옷을 입고 옆에 서 있었다. 김건희는 윤석열이 일할 때 흰 옷을 입고 옆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김건희는 재클린이다.” 삼단논법의 전형적인 매개념 부당 주연의 오류다. 인격과 품격은 글처럼 Ctrl+C, Ctrl+V가 불가능한 것이니 당연히 오류가 날 밖에 없는 법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적 오류는 굳이 논리학을 배우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아무리 성형하거나 흉내 내거나 위조하거나 표절해도 누구나 그러한 성형, 흉내, 위조, 표절의 대상과 동일화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대상이 진선미를 갖춘 존재라면 더욱 힘든 법이다. 사실 진선미의 씨앗은 모든 인간이 타고 난다. 현재 80억 명에 육박하는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외 없이 진선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사이에 진과 선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지고 미에만, 그것도 껍데기의 미에만 집착하는 집단의식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기준도 획일적으로 정해졌다. 곧 현재 대한민국의 미의 기준은 이른바 ‘강남 성형외과’ 의사들이 정해 놓은 것이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있는 커다란 눈, 오뚝한 코, 꼬리가 올라온 입술, 뾰족한 턱, 도톰한 귓불, 그리고 무엇보다 창백한 피부와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다. 그래서 얼굴을 찢고, 뼈를 깎고, 머리카락을 심고, 보톡스를 주기적으로 주사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온 몸을 찢고, 깎고, 몸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을 찔러댄다.  물론 가발은 덤이다.


2020년 통계를 보니 한국 남성의 2% 여성의 18%가 성형 수술을 했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 1994년에만 해도 4%만이 성형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26년 만에 거의 4.5배가 늘었다. 특히 30~40대 여성의 80%는 취업과 결혼을 위해 성형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조금 오래된 자료지만 2011년 국제미용성형외과의사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Aesthetic Plastic Surgeons)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 10,000명당 6.5명이 성형을 하고 있단다. 이는 병원에 기록된 성형 '환자'의 통계만 다룬 것이니 실제로 성형을 받은 사람의 숫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그래서 단연 세계 1위이다. 2020년 자료를 보니 한국에 관한 통게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성형외과 의사의 숫자가 2,582명으로 세계 5위다. 미국이 7,000명으로 1위이다. 그러나 인구 비율로 보면 한국은 5%로 미국의 2%의 2.5배나 많은 성형외과 의사가 얼굴을 찢고 턱뼈를 깎으며 먹고살고 있다. 가히 세계 1위 국가의 면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인들의 집단의식이다. 1994년, 2004년, 2015년, 2020년의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86~88%한결같이 인생이나 운명에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외모가 인생만이 아니라 운명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한 이가 겨우 10%대 초반에 머무는 나라이니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다 보니 개인이 가진 자원과 시간을 외모에 투자하게 되고 이른바 내면의 가치와 아름다움에는 ‘개 사과’나 주게 된 모양이다.

    

물론 외모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위선이다.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정하는 기준에 대해서 이성적인 합의가 전혀 없는 한국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적 집단의식은 분명히 병든 사회의 지표가 된다. 쌍꺼풀 진 큰 눈과 오뚝한 콧날, 작은 얼굴과 뾰족한 턱, 긴 다리와 큰 키, 모두가 ‘서양인’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그 서양인도 사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허구의’ 서양인이다.   

그런데 이제 그 서양인의 기준에 맞추어 찢고 깎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의 자태까지 모방하는 집단의식마저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면 속된 말로 이제 막가자는 것 아닌가? 물론 올바른 껍질과 자태를 모방하다 보면 정신도 닮아갈 수도 있는 일이겠다. 건전한 육체 안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껍데기만, 그것도 칼질하고 톱질하는 것도 모자라 주기적으로 보톡스로 주름을 펴는 껍데기만 남은 사회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주책일까?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그렇지 않은가? 지금 대한민국은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 남녀, 부자와 빈자, 토착 왜구와 빨갱이, 좌파와 우파, MZ와 꼰대가 서로 죽자고 싸우고 있는데, 사실 그 모든 것은 껍데기 아닌가? 그 껍데기가 성형수술도 덤으로 가져가 다 ‘날려버릴’ 날이 과연 올까? 그래서 오천 년을 이어온 그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는 일이 일어날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 신령님께 비나이다. 모든 껍데기를 ‘날려버리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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