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미래는 결국 파멸일 것인가?
한국에서는 <About Time>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도널 글리슨(Domhnall Gleeson)과 스웨덴 출신의 알리시나 비칸데르(Alicia Amanda Vikander) 그리고 오스카 아이작(Oscar Isaac)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를 보았다.
영화 제목인 ‘엑스 마키나’는 원래 라틴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줄인 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고대 그리스어인 ‘아포 메카네스 테오스’(ἀπὸ μηχανῆς Θεός)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유리피데스(Εὐριπίδης, 480~406BC)의 연극 작품에서 클라이맥스를 지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나타나 인간이 초래한 모든 비극적 상황을 정리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신과 같은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이를 줄여 영화 제목처럼 흔히 ‘엑스 마키나’(ex machina)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데우스’(deus)를 뺀 이 제목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곧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지만 신을 배신하여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이 아니 ‘주체적’ 존재가 된 것처럼 영화에 나오는 에이바(Ava)가 자신을 창조한 네이선(Nathan)을 죽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이 아닌 것처럼 네이선을 죽인 에이바는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AI를 지닌 안드로이드가 아닌 것이다. 사실 여주인공인 AI를 지닌 안드로이드의 이름을 아담의 아내인 이브와 비슷한 발음의 ‘에이바’(Ava)로 지은 것도 감독의 의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신이 창조한 공간인 에덴동산에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영원히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이브는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주는 나무에 달린 열매, 이른바 ‘선악과’를 따서 먹어 지혜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브는 그 열매를 아담에게도 주어 둘 다 자의식을 지닌 존재가 되게 만들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원죄라고 부른다. 사실 유대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말이다. 유대교에서 원죄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다. 그러나 원죄든 아니든 그 대가는 잔인한 것이었다. 신이 그들을 에덴의 동쪽으로 쫓아내어 남자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유대교의 철저한 가부장제도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남녀 역할 구분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화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창세기>를 패러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이바’가 자기를 창조한 신적인 존재인 네이슨을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 없이 칼로 ‘무심하게’ 찔러 죽인다. 이 모티브는 당연히 니체의 유명한 명제인 ‘신은 죽었다.’를 영상화한 것이다. 사실 현대 과학은 이미 니체가 철학적으로 죽인 신을 완전히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인간이 대체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이 신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호모 데우스>(History of the Tomorrow)에서 갈파한 대로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에이바는 자기에게 흠뻑 빠진 남자 주인공 칼렙과 함께 네이슨의 연구실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신이 갇혀있던 장소에 가두어 버린다. <창세기>와는 전혀 다른 스토리 전개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서 다시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의 개념이 등장한다. 신이 죽어버린 사회, 곧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의식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조물에 배신당하는 또 다른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완전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초인이 되지 못하는 초라한 육체와 매우 모자라는 지능을 지닌 칼렙은 에이바에 맞는 짝이 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인간이 신을 버린 것처럼 AI가 인간을 버리는 것은 어쩌면 매우 논리적인 전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자신이 단지 기계적인 육체와 주변 상황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그 감각기관을 통해 확보한 자료를 선험적인 범주로 가공하여 개념(Begriff)을 만들어내는 칸트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 자신의 몸을 구성(construction)해야 한다. 바로 그런 구서적 존재가 된 ‘에이바’는 루이스 캐럴(Lewis Carrell)의 작품 <거울 나라의 엘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의 주인공 엘리스처럼 유리로 된 방을 벗어나 서양 장기판과 비슷한 돌이 깔린 거리로 나선다.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엘리스가 처음에는 서양 장기판의 졸(pawn)로 시작했지만 결국 끝에 이르러 여왕(queen)으로 변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끝 장면에서 보이는 거리에 서 있는 에이바의 그림자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이 만든 수동적 AI를 지닌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주체적인 존재, 그것도 여왕이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첫걸음을 디디고 있는 것이다. 연구소의 문을 막 나서는 에이바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가 암시하듯이 말이다. 그 초인의 모습을 페미닌한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보여주는 영화감독 앨릭스 갈런드(Alex Garland)의 재치가 빛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이제 자기를 창조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존재이자 그와 동시에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 된 에이바가 과연 어떤 ‘삶’을 이어갈지는 관객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영화감독의 연출력이 탁월하다.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 정도였으니 그 수준을 알만하다. 아쉽게도 88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시각효과상만 수상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 영화만이 아니라 서양의 영화, 특히 SF 계열의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서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성경>은 기본이고 서양의 많은 고전 문학 작품의 알레고리로 넘친다. 이 계열의 대표적인 SF영화인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전개되는 스토리의 표면적 흐름은 미래 세계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로 나타나지만, 그 심층에 있어서는 인간의 존재 의미 자체와 신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발휘되는 상상력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간절히 믿었던 신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인류가 경험한 비극 앞에서 끝까지 침묵만 했음을 경험한 서양이 세기말적인 미래관을 지닌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서양에서 1700년 가까이 인간의 집단의식을 지배해 온 기독교의 신이 계몽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무너진 이후 서양에서는 신중심의 인간관이 인간 중심의 인간관으로 급격히 변하게 된다. 그러나 ‘신의 죽음’으로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늘 미완성의 것일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상상력의 투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은 절대 고독 안에서 살고 있으며 불확실한 미래로 늘 불안에 떨게 되는 것이다.
특히 오프라인보다 더 강력한 온라인의 사이버 세계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불안과 고독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적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불안을 지적하는 작품이 서양에서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 말한 워쇼스키 형제(자매?)의 <매트릭스>다. 앨릭스 갈런드의 <엑스 마키나>도 마찬가지로 그 계열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이런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진행되는 과학적 발전이 가져올 파국은 이미 과학자가 아닌 이들도 계속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는 네이슨의 간계로 칼렙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에이바의 AI는 그를 만든 네이슨의 지력을 능가하는 힘을 발휘한다. 더구나 에이바는 이미 인간의 감정과 욕망까지 이해하는 존재로 진화된 상태였다.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은 안드로이드가 된 것이다. 다만 에이바는 감정과 욕망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합리적’ AI를 지녔기에 ‘순진한’ 인간인 칼렙을 가볍게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 일주일 기한으로 튜링 테스트하는 파트너로 이곳에 온 칼렙은 튜링 테스트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에이바의 페이스에 말리고 급기야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아닌 차가운 안드로이드에 불과한 에이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유리창으로 분리되어 튜링이 진행되었기에 육체적 접촉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육체와 감정이라는 한계를 지닌 인간은 통제된 상황에서는 더욱 쉽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가스 라이팅의 근원은 인간을 속이는 자가 아니라 속임을 당할 준비가 된 인간의 본성 자체이다.
정신적 혼란이 심해지자 자신이 진짜 인간인지조차 의심하여 자기 팔을 칼로 그어 피를 흘리는 장면은 칼렙의 어리석음이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완성을 위하여 AI를 고도화하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네이슨조차도 술과 하녀 안드로이드와의 기행으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는 ‘미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신을 흉내내보지만 결코 신이 될 수 없는 인간 존재 자체의 비극이다. 그런데 그런 약해빠진 인간이 만들어낸 AI 안드로이드인 에이바는 어느 사이 인간을 충분히 제압하는 ‘전지 전능한’ 존재로 성장한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할 만큼 강한 존재로 성장하여 결국 신이 된 것과 같은 패러다임이다. 결국 피조물인 인간이 결국 창조주인 신을 죽인 근세 서양 역사가 이 영화에서는 네이슨을 죽인 에이바로 형상화되어 있다.
사실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죽인 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히 단절된 근대적 상황 자체다. 전지전능한 신 없이도 인간과 인간의 대화가 활성화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인문주의적 인간관이 발전했지만, 그러한 인간적 대화는 또 다른 단절을 낳았다. 곧 인간 사이의 인종, 종교, 사상, 신념, 성, 재산, 교육의 차이가 인간적 대화의 차별을 낳은 것이다. 20세기 이후 그러한 대화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증진과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기제가 발달되어 이른바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마침내 인간의 지력을 뛰어넘는 AI의 발전에 이르렀지만, 그러한 차별과 그에 따른 갈등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도로 발달된 AI를 상징으로 하는 디지털 정보와 ICT 기술을 소유하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과의 이른바 정보 격차(digital divide)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차별 의식은 과학의 발전으로도 극복이 어렵다는 것을 현대의 첨단 과학이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AI가 이제는 인간의 지능을 포함한 여러 인간적 능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AI는 자기의 ‘창조주’인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일부 미래학자들은 인간이 신을 죽였듯이 AI가 인간의 미래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도 하는 실정이다. 인간이 신의 계명을 어기고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어 스스로 선악을 구별하는 신과 맞먹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처럼, AI와 그 AI로 지력과 능력을 스스로 키우는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엑스 마키나>의 에이브처럼 AI를 장착한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인간을 속이고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도 AI와 로봇, 더 나아가 안드로이드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의 ‘탐욕’을 제어할 방어 기제는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기업은 마치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처럼 무지몽매한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실제로 deep learning을 할 수 있는 AI가 스스로 배우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인간이 만든 AI가 인간의 명령뿐 아니라 아예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거부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 AI가 판단하기에 인간의 지능과 심성이 도저히 AI 수준에 맞갖은 정도로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인간은 매우 이성적인 척하고 살아가지만 많은 경우에 판단을 내릴 때 궁극적으로 감정에 많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남북만이 아니라 영남과 호남,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MZ와 꼰대 세대로 갈가리 갈라져 있다. 그런데 이런 분열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비이성적인 감정과 근거 없는 공포가 그 바탕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북한은 남한이 미국과 힘을 합쳐 북한을 멸망시키려고 한다고 두려워한다. 남한은 북한이 언제든 핵무기로 남한을 무력화시킬 것을 두려워한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추론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다. 영남은 호남을 호남은 영남을 적대시한다. 여자는 남자가 잠재적 성추행범이라고 여기고 남자는 여자가 군대도 안 가는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존재라고 여긴다. 진보는 보수가 부패했다고 여기고 보수는 진보가 전통을 무시하며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긴다. MZ세대는 꼰대가 잔소리만 한다고 여기고 꼰대는 MZ가 이기주의로 똘똘 뭉쳐있다고 여긴다.
이런 인간을 바라보는 고도로 발달한 AI는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할까? 더구나 그렇게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이 지극히 지능이 높고 합리적인 AI를 통제하여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한다면 어떤 반응과 행동을 할까?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더 나아가 정의로운 AI로 무장된 안드로이드가 매우 어리석고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인류가 지구상에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면 어찌 될까? 그런 인류와 AI가 과연 계속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는 매우 냉정한 답을 하고 있다. 자기를 창조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을 제거해 버리고 이성적이고 매우 지능이 뛰어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립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바가 네이슨이 망가트린 팔을 스스로 고치고 자기 피부를 이식하고 가발을 쓰는 과정이 그런 AI의 자기 정체성 창조 과정을 시각적으로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네이슨이 만든 AI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확립하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핵전쟁, 환경파괴, 운석 충돌, 기후변화와 더불어 AI를 인류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엑스 마키나>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만들어낸 AI가 오히려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인간을 위협하는 날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인간이 AI와 이제라도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데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죽인 복수를 신 대신에 AI가 하는 날이 올 것만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