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Don't Look Up>을 보았다.
지독히 병든 인간 사회의 종말이 결국 혜성과의 충돌일까?
by Francis Lee Jan 3. 2022
김건희의 '개사과 V.2'를 보고 나서 계속 기분이 너무 나빴다. 단지 그 ‘여자’가 너무 뻔뻔하게 ‘쇼’를 해서만이 아니다. 사실 각본에 짜인 것처럼 윤석열이 비공식적인 유튜브에 나와 아내를 두둔하는 발언 쇼를 하고 국민의힘이 그 각본에 맞추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더 역겨웠다. 스스로 남자 같이 털털하다고 대놓고 ‘설쳐대는’ 김건희를 놓고 뜬금없이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연약한 아내’ 코스프레를 시키니 탈이 안 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하게도 국민의힘의 선거대책반에 속한 인사들이 이 개사과를 계기로 김건희 ‘사태’를 마감하려는 얕은 수작을 부리니 더 구역질이 안 날 수가 없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 ‘실존주의적’ 구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기분을 설명할 단어가 적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 <Don’t Look Up>을 보고 마침내 단어를 찾았다. 바로 ‘가치의 전도’이다.
한마디로 ‘김건희 게이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많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모든 가치가 뒤집어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김건희’가 있다. 다만 그들의 남편이 어마어마한 ‘대선 후보’가 아니기에 드러나고 있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지금 윤석열 사단에 붙어 있는 똥파리들도 김건희의 과거 행적이 반드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권력이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건희는 그 스스로 말하는 대로 ‘악마’가 아니다. 그는 희생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그를 악마화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김건희는 크리슈나 무르티의 말대로 ‘지극히 깊이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려고’ 노력해보다가 결국 실패한 ‘가련한 여자’ 일뿐이다. 그래서 억울할 것이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그런 맘이 저절로 들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른바 ‘페미의 논리’로 김건희가 ‘희생자 코스프레’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인가? 김건희의 등장 후에 소셜 미디어에서 나도는 ‘천박한’ 견해에는 그가 들렀을 법한 미장원이나 병원이 어딘가를 추론하는 이야기에 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사실과 진실, 더 나아가 진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모순적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가운데 보게 된 <Don’t Look Up>에서 어떤 실마리를 발견한 느낌이 든다.
영화 <Don’t Look Up>에서 재난의 핵심 원인인 혜성은 진실의 상징이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가들은 그 진실조차도 자신들의 탐욕의 충족의 극대화를 위하여 이용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 진실을 덮어버리다가 하루아침에 돌변 하여 선거 전략을 위하여 철저히 이용한다. 그러나 그 어떤 욕망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지구는 혜성과 충동하여 인류는 종말을 고한다. 그런데 그 욕망 덩어리들인 자본가와 정치가들만이 냉동인간으로 생존하여 인류 문명의 종말 후에도 공룡들이 지배하는 지구로 귀환한다. 결국 인류의 탐욕의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사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게다가 천하의 메릴 스트립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2시간이 넘는 ‘대작’ 영화치고는 여운이 깊지 않다. 일단 영화가 너무 소란스럽다. 감독의 연출 의도가 너무 ‘날 것’으로 드러나서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없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 깊이 병든 사회를 묘사하려면 경박하고 소란스러울 수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회심하고 가정으로 돌아온 민디 교수가 최후의 만찬을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장면도 킷취에 가깝다. 물론 죽음을 선고받은 인간이 최후에 보이는 것이 수용이라고 퀴블러-로스가 갈파했지만 이런 인간 심리를 이 영화는 너무 가볍게 다루었다. 다만 지구 종말도 정치적 책략에 이용하는 대통령 역할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디카프리오의 연기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 더불어 제니퍼 로렌스의 담백한 연기도 훌륭했어도 영화 자체는 뭔가 조립을 하다만 레고 모빌의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감독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패러디에 집중하다 보니 메시지 전달을 소홀히 한 모양이다.
그저 그런 이 영화를 다른 시기, 곧 대선 정국이 아닌 때에 보았다면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김건희의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연기’를 보고 속이 계속 불편하던 차에 앞에서 말한 대로 어떤 실마리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2시간 넘는 시간을 소비하며 정주행 한 것의 보람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찌 한국 정치판만 썩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 아닌가? 미국의 정계의 부패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권력과 돈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는 미국 정치계의 정설이니 말이다. 그런 세상에 발을 담그면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랜들 민디 교수처럼 신경안정제인 자낙스를 먹지 않고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 세상에서 버티려면 연기를 잘하는 것은 필수인데 그러지 못하면 구토를 일으켜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 세상에서 잘 버틴 여자 앵커의 이른바 ‘인생 훈장’이 더욱 돋보인다. 두 번 이혼하고, 전직 대통령 두 명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지고 그것도 모자라 국무장관과도 캐주얼하게 섹스하고... 그런데 그런 것이 ‘훈장’이고 그 덕분인지 돋보이는 씩씩한 직업여성으로 잘 나가고 있다. 물론 현실에 그런 사람이 많이 있을 리는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확률적으로 혜성에 머리를 맞아 정신 줄을 놓을 정도 아닐까?
이 영화 <DOn’t Look Up>에서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케이트 디비아스키라는 이름의 박사과정 학생이 발견한 지름 10km 정도의 크기의 혜성이 진짜로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날아와 6개월 14일 만에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 자체는 아니어도 인류 문명의 종말을 가져온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스피노자처럼 사과나무 한 그루를 더 심어야 할까? 아니면 민디 교수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최후의 만찬을 할 준비를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영화에 나온 권력 중독과 쾌락 중독에 걸린, 곧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한 이들처럼 뻔뻔하게 죽기 직전까지 ‘연기’를 해야 할까?
김건희와 윤석열만이 아니라 국민의당의 나머지 똥파리들의 ‘연기’를 보면서 적어도 그런 ‘짓’을 따라 하고 싶은 맘은 없다. 그리고 똥파리들에 붙어 한몫 보려는 가세연의 거머리들처럼 살고 싶은 맘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지독하게 병든 사회에서 날뛰는 이들이 마치 코로나의 ‘슈퍼 전파자’처럼 사회 전체를 완전히 병들게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그 일이 만만치 않다. 영화 <Don’t Look Up>의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권력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똥파리들은 혜성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국민들에게 하늘을 올려보지 말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혜성, 곧 진실을 바라보고 깨달으라고 외치는 일만도 벅차다. 그리고 그 진실을 대중이 바라본들 무슨 대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사회를 더 나아가 세상을 압도한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사실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이른바 ‘개돼지’들이다. 그들이라고 진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인지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없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권력병’에 걸린 자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앞장서서 변명한다. 왜 그러는가? 단지 분노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역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년>에서 박종철을 ‘턱 하고 쳐서 억하고 죽게 만든’ 자들의 우두머리로 나온 김윤식이 연기한 대공수사처의 박 처장 말이다. 그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온 형이 결국 배은망덕하게도 한국전쟁 때 ‘빨갱이’가 되어 죽창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찔러 죽인 비극적인 가정사를 겪은 자가 한국의 근대사를 볼 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자에게는 전두환이 마련한 ‘병든 사회’는 얼마나 좋은 핑곗거리이겠는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자신의 개인적 분노를 배설하는 데 이른바 ‘빨갱이 잡이’만큼 좋은 명분은 없으니 말이다.
윤석열을 지지하는 무리의 ‘농도’는 이제부터 더욱 짙어질 것이다. 그 절대 숫자가 줄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언론이 아무리 선전선동을 해도, 아무리 김건희가 코푸는 ‘연기’를 해도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양심과 ‘감’이라는 것으로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윤석열의 핵심 지지자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버틸 것이다.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실은 혜성과 같다. 어차피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그들의 세상’은 종말을 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신적으로 이판사판 아니겠는가?
과연 우리 현실에서는 어떨까? 만약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화 <Don’t Look Up>에서처럼 약탈과 방화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주인공 민디 교수 가족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마주하는 이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본래 인간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일에 당면하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에 이르는 최후를 마주한 인간의 심리적 변화를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가 1969년에 쓴 책 <On Death and Dying>에서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퀴블러-로스는 인간이 대부분 denial, anger, bargaining, depression, acceptance의 단계를 거쳐 죽음이 이른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면 보통 ‘오진 아냐?’하며 부인(denial)부터하고 보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전문가인 의사의 암 선고조차 의심하게 된다. 그다음에 나타나는 분노(anger)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왜 하필 내가?’라는 마음에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신에게 저주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죽을병에 걸렸음에도 다른 이들은 멀쩡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은 잘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번 더 그 운명을 피할 방도를 찾아보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 신과도 협상(bargaining)을 벌이며 한 번만 살려주면 여생을 착한 일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울증(depression)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체념과 더불어 마침내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수용(acceptance)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차라리 맘을 편하게 먹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이런 과정을 ‘착실하게’ 거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단계를 거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이 다섯 가지 단계마다 머무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정과 분노의 단계에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영화 <Don’t Look Up>의 민디 교수의 가족들처럼 바로 수용의 단계로 건너뛰기도 한다. 혜성이 충돌하기 몇 시간 전인데 언제 이런 과정을 착실히 밟을 시간이나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의 본성(personality)과 인성(character)이 지문과 마찬가지로 다 다른 법인데 어찌 동일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래서 퀴블러-로스의 이 5단계설은 문자 그대로 설에 머물고 있다. 많은 학자들의 반박도 있었다. 내 주변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관찰한 결과로도 그 모든 사람이 이 다섯 단계를 ‘착실하게’ 거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퀴블러-로스의 주장은 과학적 실험으로 뒷받침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퀴블러-로스 자신도 이 다섯 단계가 반드시 단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실토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의 책 <On Death and Dying>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다섯 단계설은 널리 유행하는 모델이 되었다. 퀴블러-로스는 그의 사후에 출판된 케슬러(David Kessler, 1959~)와의 공동 저술서 <Life Lessons: Two Experts on Death and Dying Teach Us About the Mysteries of Life and Living>, <On Grief & Grieving: Finding the Meaning of Grief Through the Five Stages of Grief>를 통하여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실직과 같은 사회적 충격을 극복하는 과정에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다섯 단계설이 과학계의 지지를 받아 학문적 이론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이 된 퀴블러-로스의 다섯 단계론은 특히 대중 매체에서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다. 아무리 학자들이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해도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그럴듯한 것이라면 계속 지지를 얻기 마련이다. 인간의 정신을 과학으로만 재단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종교만이 아니라 미신이 인간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 특히 정치계를 보니 누구도 죽음을 담담히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만이 아니라 이미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을 넘긴 김종인도 ‘죽을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오늘도 ‘권력병’의 증후군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놓고 볼 때 김건희와 윤석열은 20년 내지 30여 년을 더 살 수 있다. 이제는 정리할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마치 냉동인간의 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처럼 자신의 과거 세탁에 골몰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형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현재 윤석열 사단은 풍비박산 일보 직전에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윤석열과 똥파리들이 김종인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선대위 전면 개편에 나설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 신지예를 버리고 그와 정면 대립한 이준석도 돌아온다고 하는 데 ‘성상납’을 둘러싼 추문으로 그의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돌아와 봐야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불가능할 것이다. 오합지졸을 놓고 순열조합을 아무리 해봐야 그 나물의 그 밥 아니겠는가? 문제의 핵심은 윤석열 자신과 그의 아내 김건희인데 그 둘을 놔두고 그 어떤 변화를 가져오든 별무소득일 것이 뻔하다.
지난번 글에서 윤석열의 운을 예측하면서 자월(子月)에 좌충우돌이 격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이 정도로 험한 꼴이 벌어질 줄은 사실 나도 몰랐다. 이제 대선까지는 축월(丑月)과 인월(寅月)만 남았다. 윤석열 사주에서 본다면 인성과 재성이 들어온다는 것인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둘둘 말은 호스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아내 때문에 온갖 사달로 시달리는 그에게 결코 좋은 운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승부가 난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인간이 한번 욕심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안 보이기 마련이니 끝까지 버틸 것이다. 윤석열의 언행을 보면 마치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다니는 것 같다. 곧 "Don't look up!"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이들에게 혜성이라는 진실을 올려다 보지 말라고 하기 전에 이미 자신에서 진실을 외면하라고 열심히 최면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설마 영화에 나오는 그 악마 같은 자본가와 정치가들처럼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여 인류가 전멸한다고 해도 냉동인간으로 살아남는 법이 있다는 것을 윤석열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김한길과 공모하여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신당 창당으로 '영생'을 도모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정치계라는 바닥은 한번 발을 디디면 죽기 전까지는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아편굴인가보다. 그러지 않고야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비틸 수 없는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