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돌아가는 세상이 답답하여 머리를 식힐 겸하여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2006년 나온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보았다. 원제가 <El laberinto del fauno>이니 그저 ‘판의 미로’이면 충분한데 아마도 친절한 번역가 분이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 모양이다. 주인공의 이름과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3개의 열쇠를 강조하였다. 멕시코 출신 감독인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1964~)는 오히려 나도 즐겨 본 영화 <헬보이> 시리즈와 <블레이드 2>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오락 영화만 잘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2017에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로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도 영어 제목이 <The Shape of Water>인데 번역하는 분이 매우 세심한 부제를 추가하였다.
<판의 미로>도 <셰이프 오브 워터> 못지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아카데미상 촬영상, 미술상, 분장상을 수상했으니 말이다. 다만 제작비 1,900만 달러에 흥행 수입이 8,300만 달러였으니 제작비 2,000만 달러에 흥행 수익으로 거의 2억 달러를 올린 <셰이프 오브 워터>의 ‘대박’까지는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암튼 두 작품 모두 권력에 맞선 순수한 개인의 행복을 ‘괴물’의 도움으로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판의 미로>가 좀 더 직접적인 10대 소녀의 환상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숫자가 많은 ‘어른’들의 동화에 속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가 더 많은 관객층을 확보한 보양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원래 동화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어른을 위한 '전쟁 고발' 영화임에도 한국에서는 <나니아 연대기>와 <해리포터> 등의 인기가 높은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여 마치 아동용 영화인 것처럼 소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화의 내용과는 정 반대의 짓을 영화 수입업자가 저지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각설하고...
이 영화의 배경이 스페인 내전 이후인 1944년의 여전히 불안정한 스페인이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종교와 인간성에 대한 보편적 메시지로 넘쳐난다. 독재자인 프랑코를 대변하는 인물인 비달 대위, 그와 재혼한 카르멘의 전 남편의 딸인 오필리아, 그리고 책에 중독이 되다시피 한 주인공 오필리아의 환상 속에 등장하여 비밀을 알려주는 신화적 존재인 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델 토로가 직접 쓰고 감독을 한 작품답게 영화의 스토리가 매우 짜임새 있고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잔인한 장면이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전달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정도는 실제 전쟁의 참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국제 뉴스 화면에 너무 많이 나와서 전쟁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졌으니 더욱 그럴 법도 하다.
사실 스페인 내전은 그 이름과는 달리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전쟁과 남북한의 한국전쟁 사이에 벌어진 극한적인 좌우 대립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의 성격을 지닌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특히 가톨릭 교회는 나치 히틀러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재자 프랑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슬람에 오랫동안 점령당했던 스페인은 기독교 문화의 회복을 추구한 이른바 ‘레꽁뀌스따’(Reconquista) 정책의 중심 세력인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전폭적으로 허용하였다. 이를 매우 ‘어여삐’ 여긴 로마 교황은 스페인의 국왕에게 종교재판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하였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이슬람교에 대한 극단적 배척은 물론 그 유명한 마녀 사냥과 유대인 학살을 특히 스페인에서 마음대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매우 문명적이고 이성적인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를 보면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라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 독재자와 손을 잡는 것은 물론 직접 무고하고 무력한 이들을 대상으로 살육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 연구로 밝혀진 바대로 대부분의 ‘마녀’는 무고하고 무기력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그런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 없이 여전히 여성 차별의 가장 선두에 선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도를 구현한 남성중심주의 집단의 성격을 전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어느 개인의 결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가톨릭 교회라는 조직 자체의 내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시대정신과 집단의식이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데다가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고 긴 시간 동안 자행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이제 가톨릭 교회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더 나아가 게토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내부에서조차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만 구조적 모순으로 그런 변화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조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런 가톨릭 교회의 ‘만행’을 이 <판의 미로>에서 매우 잘 비꼬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인 오필리아가 판이 약속한 그 ‘달의 왕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배다른 남동생을 위하여 ‘순교’하고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기희생이 마지막 남은 시험이 되었다. 순결한 피는 동생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예수의 희생과 동일한 모티프이다. 그래서 비록 영화에서는 오필리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좌에 앉아있고 그 옆자리에 오필리아가 초대되는 모양이지만 결국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상 왕국의 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추문에 휩싸여 있지만 가톨릭 교회가 여전히 기세 등등한 스페인과 멕시코의 합작 영화에서 이런 모티브가 나올 수 있다니 감독의 용기가 놀랍다. 물론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가톨릭 교회는 서양의 문화, 특히 대중문화에서 비웃음 거리가 된 지 오래이기는 하다. 그래도 천하의 스페인과 멕시코의 문화권에서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 대단하다.
물론 이 영화를 꼭 종교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흔히 말하는 대로 이 영화의 장르가 ‘dark fantasy’이니 내전과 세계대전이 이어지는 어두운 시기에 사춘기를 맞이한 10대 소녀의 정신적 방황과 탈출의 구도로 보아도 무난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때와 장소가 맘에 들지 않으면 대부분 ‘꿈’을 꾸기 마련이다. 특히 현실의 고통이 심할수록 그 꿈은 더욱 화려해지고 그에 대한 집착 또한 강해져서 나중에는 그것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확신까지 들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자기 확신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도 등장시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신화적 존재인 판을 자신의 환상 세계에 들여오고 여기에 더하여 열쇠 3개가 필요한 ‘달의 왕국’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제 판은 완성되었으니 굿판만 벌이면 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인간은 꿈의 세계에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더더욱 정밀하게 꾸미면서 결국 이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리플리 증후군’이다. 사실 리플리 증후군은 콩글리쉬이다. 이 말이 나오게 된 것은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1921~1995)의 작품인 <재주 많은 리플리 선생>(The Talented Mr. Ripley)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가난한 리플리(Tom Ripley)가 부자인 디키(Dickie)의 삶을 모방하다가 결국 디키를 살해하고 자신이 디키가 되어 살아간다. 결국 디키 집안의 결정으로 거액의 유산까지 물려받은 리플리는 언젠가 경찰이 자신을 체포할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서도 다시 리플리가 되어 부자의 삶을 이어간다. 이 소설이 모티브가 된 대표적인 영화가 알랑 들롱(Alain Delon)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이다. 가난한 알랑 들롱이 부자인 로네(Maurice Ronet)의 삶을 훔치는 장면, 특히 요트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의 사인을 연습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남은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소설과 달리 비극으로 종결된다. 아무래도 1960년 프랑스의 도덕률은 아직 구체제에 머물러 있는 탓이겠다. 제2차 대전 이후 1969년까지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통치한 골수 보수 가톨릭 신자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드골 장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물러나기까지는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이 살아 있는 프랑스라고 해도 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권위가 붕괴되어가고 있는 21세기에는 그런 구차한 각색이 필요 없어 보인다. <판의 미로>에서는 가톨릭 교회도 군대도 모두 민중의 뜻과는 거리가 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세력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악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아니 더 나아가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설파한 선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만 되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한 때 가톨릭 교회는 윤리와 도덕을 수호하는 강력한 도성이었고 군대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자였다. 그러나 이제 가톨릭 교회의 사제의 아동 성추행과 돈과 관련된 비리로 도덕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여겨지고, 군대는 언제든 쿠데타를 통해서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할 수 있는 이기적 집단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모로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진실’이 21세기에 들어서야 드러난 것일 뿐, 사실 권력을 독점하던 가톨릭 교회와 군대는 늘 부패했었다. 다만 과거에는 정보를 권력자들이 독점하고 더 나아가 정보의 왜곡과 변형을 수시로 했기에 민중이 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드골조차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프랑스 엘리트들조차 그의 독단적인 언행을 혐오하던 기피인물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황에서 강화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민중들은 그에 현혹되어 그가 거의 독재자나 다름없이 권력을 휘두르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비단 프랑스만이 아니다. 독일의 아데나워 역시 독재자나 다름없는 장기 집권을 했지만 국민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분명히 독재자였지만 실제적으로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던 인물들이다. 민중의 무지와 세뇌가 그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는 법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늘 그랬다. 지나고 보면 독재자의 만행이 드러나고 지탄을 받기 마련이지만 막상 그 일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국민들의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의 이른바 ‘깨어 있는’ 시민들은 이단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히려 오해, 더 나아가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런 경우 이러한 시민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을 하든지, 아니면 <판의 미로>의 주인공인 오필리아처럼 내면으로 ‘도피’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방법이든 대세를 막지는 못한다. 저항이 아무리 강해도 이른바 ‘때’가 이르지 못하면 독재자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는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적 모순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스로 몰락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독재자가 그렇게 몰락할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때가 무르익으면 민중이 힘을 모아 봉기하여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게 된다.
히틀러조차도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년 전부터 많은 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스스로 마감했다. 물론 민중의 힘이나 측근의 계획으로 독재자가 몰락의 길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결국 독재자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간다. 박정희의 경우도 부하들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느라 충성 경쟁을 벌이도록 하였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김재규는 그저 박정희의 타살을 가장한 자살을 돕는 조연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독재자의 전횡으로 타의에 의한 삶의 질곡을 강제적으로 겪게 된다. 문제는 이 질곡의 힘이 너무 강하여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개인은 그 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내면으로 숨어들어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판의 미로>의 주인공 오필리아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다만 그 내면에서 만난 판은 뜻밖에도 단순히 정신적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더 나아가 오필리아가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신의 환대를 받는 길을 열어주는 안내자가 된다. 외부의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단순히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으로 도약하는 전환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적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찾는 것이지만 외적으로 볼 때는 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필리아의 해방은 지상에 남은 자들의 눈에는 죽음으로 보일 뿐이다. 다만 그 죽음이 타인을 위한 희생이기에 일반 사람들이 좀처럼 흉내 내기 힘든 순교가 된 것이다.
어쩌면 오늘도 힘들게 하루를 보낸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을 막연히, 또는 잠재의식 속에서 꿈꿀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월의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신이나 초월자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단순히 세상과 정신적으로 단절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이 세상은 막상 떠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조차 창조하고 나서 세상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고대 이래로 정신적 스승들은 정신이 육신을 앞서는 고귀한 것이라고 가르쳐 왔지만 사실 ‘세속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평범한 이들에게는 정신과 세속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육체야 말로 실존의 전부일만큼 소중한 것이다. 영적 세계, 더 나아가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육신을 버리는 것은 엄청난 결단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생존의 의지를 본능으로 지니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무한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고장 난 정신도 가지고 있으니 순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내세의 불확실성과 인간 정신의 나약성에서 세속 세계에 대한 의존이 강화되다 보면 결국 집착이 야기되고 이 집착의 대상은 인간의 충족하기 힘든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한 결국 파멸을 맞이하고 말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파멸은 후세에게 거의 학습 효과를 주지 못한다. 파멸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인간은 일단 욕망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되면 눈이 멀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수의 이웃사랑과 자기희생의 메시지가 옳은 것이라고 하여도 인간의 삶이 일회성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 이웃의 작은 형제라고 하여도 나 아닌 ‘타인’을 위하여 ‘바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 본능을 어기는 것이니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매우 커다란 결단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천국을 근거로 그러한 희생을 ‘독려’하는 교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었다. 천국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순교’를 할 용기가 날 수 있겠는가? 물론 지고지순한 정신에서 나오는 자기희생을 give and take의 ‘거래’로 해석하는 것이 지나친 추론일 수 있다. 그러나 homo sapiens sapiens가 신적 존재 수준의 완전한 사랑을 구현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비논리가 아닌가?
그래서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의 자기희생도 결국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순결한 ‘동생’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고 그 보상은 천국의 신 옆자리가 되는 구도로 해석된 것이다. 물론 오필리아가 신의 옆자리를 의도하고 목숨을 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신의 섭리 차원에서 오필리아의 희생은 궁극적인 영생, 그것도 영광 속의 영생이어야만 신의 ‘체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욕망에 눈이 어두워,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음에도 이 ‘지저분한’ 세상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며 악착같이 살아남는 삶의 무의미성을 이 영화가 동화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은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다만 기독교를 패러디한 마지막 장면은 가톨릭 국가나 다름없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정서에서 신성모독에 가까운 충격파를 일으킬만한데 별로 반응이 없다. 이제 가톨릭은 그 정도로 힘을 잃은 늙은 종교가 되었나 보다. 신과 예수에 경도되어 한 때 신학에 몰두하던 나의 입장에서는 입맛이 매우 쓰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으로 나를 위로해 본다. <판의 미로>가 약속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