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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을 보았다

단 하루가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by Francis Lee

영화 <Before I Fall>을 보았다. 한국어 제목은 <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이다. 개인적으로 평생 철학과 기독교를 공부한 사람이라서 당연히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와 영생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런 내게 이 영화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주인공인 Sam으로 나온 Joey Deutch는 내가 처음 본 배우이지만 역할을 잘 해내었다. 그래서 필모그래피를 보니 6살인 2010년부터 이미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 아마 어머니가 배우이고 아버지가 영화감독이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연기를 익힌 것 같다. 세상은 넓고 인물은 많다.


그런데 통계를 보니 2017년 개봉한 이 영화의 한국의 관객 수는 34,497명. 한국인의 입맛에는 별로였나 보다. 500만 달러의 저예산 독립영화이고 할리우드에서 만든 것 같은 액션 장면도 없으니 일반 영화 팬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법도 하겠다. 그러나 원작 책도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아 팬들이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전 세계에서 1,300만 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니 독립영화치고는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의 내용은 한글 제목이 잘 말해주듯이 환생을 하는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묘사한 것이다. 원래 Lauren Oliver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되풀이되는 하루,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똑같은 하루를 벗어나려고 여러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Juliet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결말은 기독교와 불교를 잘 조화한 것 같아서 작가의 폭넓은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우리 모두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며 매일 살아간다. 마치 영원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언젠가 결국은 다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 하루도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저주하고, 무시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며 시간을 보냈다. 마치 상대방이 사라지면 내가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문제는 늘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Sam은 Ashley를 중심으로 한 4인방의 일원이 되어 남들, 특히 약하고 별 볼일 없는 동료 학생들을 놀리고 왕따 시키는 재미로 살아간다. 그렇게 놀림감이 되는 학생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원인을 제공한 이들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날 교통사고 후 다시 하루 전날에 환생을 하는 체험을 통하여 결국 모든 소동의 궁극적 원인은 바로 자신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실 그렇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동의 원인은 나의 주관적 판단으로는 모두 남에게 있다.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나와 관련된 사람과의 사달에서 내가 전혀 무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게도 잘못이 분명히 있고 때로는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여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루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저는 이 사회에서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승자가 되어야 하고 어차피 zero sum 사회에서 패자가 되면 내가 먹을 것이 없다. 그러니 단단히 마음을 먹고 열심히 싸울 법도 하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그런 현실의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시시포스의 무한 반복되는 바위 굴리기와 같은 무의미한 인생을 되풀이하지 않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살려고 하지 말고 죽으려고 해야 한다는 진리 말이다. 이는 예수가 설파한 내 이웃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의 고귀한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부처가 말한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한 보살행과도 연관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궁극적으로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는 '이기적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생존본능을 이길 만큼 본능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듯이 적어도 일곱 번은 다시 태어나야 겨우 그러한 자기희생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감스럽게도 단 한 번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물론 종교적 차원에서 기독교는 영생을 불교는 환생을 설파하지만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누가 과연 그 경지를 체험했겠는가? 그저 밀란 쿤데라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모두 아무런 연습 없이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 어설픈 연기를 하다가 감독의 지시에 따라 다시 그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슬픈 배우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뿐이다. 그것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씁쓸한 회한의 마음을 품고 말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다음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삶을 매우 슬프게 만든다.


사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천국을 가든 환생을 하든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비록 동일한 인물을 만난다고 해도 그 '때와 장소'는 지금 여기가 아니니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하는 삶은 결코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도 전혀 다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강물처럼 흐르고 지나가 돌이킬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다가 결국 허무하게 삶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잘할 수 있을까? 시시포스처럼 모든 꾀를 부려 죽음을 피하려고 해도 오히려 영원히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저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시시포스는 꾀를 부려 죽음의 신 타나토스에게 족쇄를 채워보고 저승의 신인 하데스를 속여보지만 오히려 저승에서 영원히 바위를 언덕 위로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인간이 신을 능멸한 대가일까? 그러나 사실 그가 왜 형벌을 받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천하의 호메로스도 잘 모른다. 그 진실은 그저 전설 속에 묻혀 있다.


물론 Albert Camus는 그의 책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오히려 그런 형벌을 기꺼이 수행하는 인간 시시포스의 모습에서 삶의 부조리의 모티브를 찾아내고 그를 신에 맞선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나도 이런 카뮤의 실존주의적 해석을 더 좋아한다. 신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지만 인간은 무조건 당해야 하는 형벌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정도로 지혜로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카뮤와는 달리 과거 동독에서 Günter Kunert나 Volker Braun과 같은 작가에게 시시포스는 사회주의 제체에서 신음하는 국민들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공산주의 독재 체제에서 약속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의 천국'이 아니라 무한한 노동착취를 당하는 지옥에서 신음하는 국민들 말이다. 신화의 해석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늘 여기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나 시시포스도 시대에 따라 다른 인물로 다가올 수 있겠다.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도 사실 시시포스의 바위가 주어졌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의 바위도 모자라 끝이 안 보이는 코로나 사태와 늘 비관적인 경제 전망이라는 두 개의 바위 덩어리가 더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대선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여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과연 어떤 희망이 남아 있을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 다시 언덕 위로 굴려 올릴 바위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심정은 하데스의 시시포스와 무엇이 다를까? 일곱 번 죽다 살아나면 길이 보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도 추운 겨울밤 하늘의 황소자리에 떠 있는 시시포스의 아내가 포함된 7명의 자매가 모여 있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바라보며 시시포스와 인간의 운명을 생각해 본다. 정말로 세상이 참 춥다. 길지도 않은 인생에 언덕 위로 굴려 올려야 할 바위가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한 개만 굴려도 되는 시시포스가 차라리 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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