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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를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이제 사랑은 꿈인가?

by Francis Lee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고 한국에서는 ‘당선자’가 국민을 괴롭히는 너무 수상한 시절이라 마음이 매우 어지러운 때에 내 마음을 정화시켜주기를 바란 영화가 <조>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으로 나온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를 매우 좋아하니 그가 나온 영화는 다 좋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배우는 역시 프랑스의 이사벨 아자니다. 그러나 세이두도 좋다. 내 순진한 욕심이다. 그러니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이두가 나온 영화를 볼 때마다 늘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이두는 그냥 배우 자체이다. 서양의 많은 배우들의 공통점은 배우가 배우답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나라처럼 얼굴 자랑, 집 자랑,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학력 자랑을 하지 않는다. 그저 배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양의 배우들을 더 사랑한다. 공자가 말한 정명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배우다워야 하는 것 아닌가? 왕이 왕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세상. 공자가 꿈꾼 그런 세상과는 한국 사회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국에 넘쳐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취미나 부업에 불과하고 주업은 돈과 학력 자랑과 부동산 투기인, 배우 아닌 배우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특히 유럽의 배우들을 좋아한다. 사실 이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부업이 주업이 되고 주업이 부업이 되어가고 있다. 비단 연예계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집단의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검사가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사업가가 되어 업자들과 거래한다. 그러면서 부업으로 국회의원을 하고 공직에 오른다. 참으로 기가 막힌 세상이다.


각설하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 이제 로봇도 인간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인간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로봇이 인간처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조>의 주인공인 조가 찾고 있다.


사실 인간은 사랑에 매우 서툴다. 사랑을 간구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을 두려워한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보다는 사랑의 실패에 따른 고통을 두려워한다. 과연 사랑은 무엇일까? 로봇인 조는 인간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느끼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육체의 사랑을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여행도 하고, 수영도 한다. 그러면서 느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인간에게 감사한다.


존 레넌의 노래가 생각난다. <Love>. 존 레넌이 오노 요코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온 노래라서 그런가? 첫사랑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wanting to be loved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reaching love

Love is asking to be loved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we can be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Love is needing to be loved


사랑은 현실이고 접촉이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 자유로워지고 살고 싶은 욕망이 솟아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원하고 요청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 영화 <조>에서 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 암시하듯이 말이다. 로봇도 다치면 아프다. 수술대 위에 누운 조는 사랑하는 남자 콜에게 묻는다. What about us? 그렇다. 사랑에 빠진 존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계’를 걱정한다. ‘나’도 ‘너’도 아닌 나와 네가 만들어낸 그 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힘든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러한 사랑을 약속하는 ‘사랑의 묘약’을 찾는다. 영화 <조>에 나오는 Benysol이라는 화학약품과 같은 것을 말이다. 이 약을 먹으면 전혀 모르던 사이에서도 완전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과연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며 가짜 사랑은 무엇일까?


우리는 도대체 왜 사랑을 하는가? 물론 생물학자들은 이미 답을 구해 놓았다. 종족 보존을 요구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놀음에 넘어가는 것이 사랑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렇게 세월은 간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사랑의 빛도 바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유전자의 놀음에도 안 넘어가는 ‘신인류’가 탄생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수고를 피하며 성적 쾌락만을 누리고, 정략결혼을 통해서라도 부와 권력을 추구하며 이른바 부귀영화를 꿈꾸는 자들 말이다. 20세기 말, 특히 한국에서는 IMF 사태 이후 이러한 ‘신인류’가 폭증하였다. 사랑은 개나 줘버리라며. 사랑의 ‘현실’을 인정하라며 오히려 큰소리친다. 그런데 이들도 사실 별 볼일은 없어 보인다. 결국 이들도 늙고 병들어 죽어가니 말이다. 유전자에 굴복한 삶이나 이기적 욕망에 굴복한 삶이나 결론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랑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부수물인 성적, 물질적 쾌락과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기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달콤한 ‘열매’를 따 먹어도 결국 인간은 외롭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영화 <조>에서는 모든 인간이 Benysol에 중독되어 간다.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을 할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약물에 의존하면서까지 진정한 사랑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약에게 깨어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와 외로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현실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늘날 ‘신인류’에 속하는 여자는 남자가 돈과 권력을 더 많이 쟁취할 때 더 큰 사랑을 느끼고, 남자도 여자가 성형을 해서라도 얼굴과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야 사랑을 더 많이 느끼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얼굴 성형도 모자라 위조를 해서라도 학력마저 세탁을 해야 사랑을 더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권력과 돈과 성형이 서로 어울리는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이 건강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한국 사회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런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누구나 잘 알지만 일단 그 길에 들어선 이상 그저 관성에 따라 나가는 수밖에 없나 보다.


그런데 방황의 끝자락에서 다시 만난 조와 콜은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이미 약에 중독되어 약이 없으면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콜과는 달리 약이 전혀 통하지 않는 로봇인 조가 오히려 인간인 콜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줄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진 관계는 고장 난 기계처럼 회복되기 힘든 법이다.


더구나 많은 여자들이 강남의 비슷한 성형외과에서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환골탈태하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조>에서 조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로봇 여자들이 가득한 방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만도 했다. 콜이 ‘차세대 조’를 ‘자신의’ 조로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 그 ‘차세대 조’가 콜에게 ‘그의 조’가 소중하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바로 그 조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조를 복사한 것이 자신이라면서 말이다. 그러자 콜이 말한다. 내가 아프게 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 조라고. 그래서 그 조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 아프니까 사랑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성형과 권력과 돈으로 메꿀 수 없다. 이미 그런 아픈 사랑을 포기하고 부귀영화를 택한 자는 전혀 알 리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작 조는 엉뚱하게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약속하는 이른바 ‘텐 프로 마담’의 권유로 창녀가 되는 길을 택한다. 물론 돈이 아니라 정체성 혼란에서 오는 절망에서 선택한 길이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조는 현재의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고 싶지 않은 상황에 이른 조이기에 그는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한 자만이 돈과 권력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창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혼이 맑은 조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창녀가 될 수 없었다. 아무나 창녀가 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 조를 찾은 콜은 진정한 사랑을 고백하고 조도 이를 받아들인다. 해피엔딩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암시하는 것은 디스토피아다. 완벽한 첫사랑을 약속하지만 그 효과가 겨우 몇시간에 불과한 약물에 인간들이 중독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로봇이 참다운 사랑을 인간에게 일깨워주는 그 모순에서 나는 절망을 본 것이다. 사실 우리 시대가 이미 그런 디스토피아에 들어서 있지 않은가?


돈과 권력을 위해 남자나 여자나 몸과 더불어 인간성까지도 기꺼이 시장에 내다 파는 ‘창녀의 시대’에 접어든 대한민국에서 조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결국 영화로 도피하는 길 밖에 없나 보다. 참으로 마음이 더욱 쓸쓸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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