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기도 없던 신혼 시절 내가 1박 2일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가 집에 혼자 있어야만 했다. 텅 빈 큰 집에 혼자 있기가 무서웠던 아내가 우연히 영화 Vanilla Sky를 눈물을 흘리며 보았고 다음날 귀가한 남편에게 꼭 볼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보고 나서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반드시 보여 주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시작부터 교통사고가 나는 부분까지만 보여 주었다.
사실 나는 톰 크루즈(Tom Cruise, 1962-)를 너무 좋아하기에 그가 나오는 영화는 거의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내 마음을 특별히 사로잡았다. 천방지축의 바람둥이 부자 도련님에서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을 찾기 위하여 자살을 감행하고 차라리 냉동인간이 되기를 자청하는 고독한 영혼의 연기를 매끄럽게 해냈다.
2001년에 나온 Cameron Crowe(1957-)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사실 이미 1997년 Alejandro Amenábar(1972-) 감독이 만든 스페인 영화‘ 눈을 떠요’(Abre los ojos)의 미국판 리메이크 버전이다. 그런데 여주인공인 페넬로페 크루즈(Penélope Cruz, 1974-)는 두 영화에 모두 나왔다. 스페인판 오리지널도 보았는데 아무래도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몰입하기 힘들었다. 물론 톰 크루즈에 흠뻑 빠져 있어 다른 배우가 눈에 차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물론 ‘Abre los ojos’는 전편에 흐르는 그 어둠이 매우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만든 것이 몰입도를 매우 높인다. 영화의 달인들이 모인 곳이니 어련하랴.
이 영화 시작과 끝에 나오는 말 ‘눈을 떠요.’는 마치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하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처음 보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여러 번 보아야 비로소 식별이 된다. 영화에 대한 내 눈을 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몇 차례 보았고, 6번 정도 본 다음에는 강의가 있을 때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보았다. 그러니 다 합치면 수십 번을 본 셈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배우 키아누 리브즈(Keanu Reeves, 1964-)가 주연한 영화 ‘메트릭스’(Matrix, 1999)를 본 숫자와는 비교가 안 된다. 독일 유학 시절에 처음 본 것까지 합치면 이 영화는 백 번 이상을 본 것 같다. 내 아내도 메트릭스를 매우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키아누 리브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아내도 메트릭스를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두 영화 모두에 뉴에이지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아내도 좋아하는 것 같다.
스페인 영화의 직설적인 제목과는 다른 ‘바닐라 스카이’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모네(Claud Monet, 1840-1926)가 1873년에 그린 ‘Seine ât Argenteuil’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르장퇴유 지역의 센 강가의 풍경에서 배경이 되는 하늘이 주는 느낌은 평화롭다. 그런데 그 하늘의 색깔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왜 하필 이 그림일까? 사실 파리지앵들이 자주 찾는 이 목가적인 지역에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11개의 그림을 이 지역을 배경으로 그렸다. 파리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2km밖에 안 떨어진 아르장퇴유는 원래 7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이 수도원은 프랑스혁명 때 가톨릭 교회에 염증을 느낀 민중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한 역사적인 것이 이 그림을 택한 이유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영화에서 바닐라 스카이는 비현실적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자동차 사고로 얼굴이 심각하게 망가진 데이비드와 소피아가 클럽에서 만나 한바탕 소동이 난 다음날 아침 길거리에서 일어난 데이비드를 소피아가 일으켜 세우는 장면부터 모두 데이비드의 꿈, 자각몽이다. 바로 그 장면의 하늘이 바닐라 색인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내를 울게 만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하늘이 바닐라 색이다. 이는 다 데이비드의 꿈이니 그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자각몽을 조작하는 것은 Life Extension 회사이다. 그런데 완벽한 자각몽을 만들어내다가 기술적 결함이 발생하여 이를 고치기 위하여 그 꿈 안으로 들어온 기술자의 도움을 포기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데이비드는 정말로 다음 생에 소피아와 둘이서 고양이로 만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자각몽 안에서 완벽한 얼굴과 직업으로 소피아와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데도 다 포기하고 눈을 뜨기로 한 데이비드의 결정을 이끌어 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죽은 지 150년이 흘러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도 자신의 친한 친구도 없는 현실로 돌아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완벽했던 자각몽에 문제가 생긴 것은 기술적인 것이라기보다도 데이비드의 양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줄리 지아니의 진심을 무시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양심의 가책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인연법에 대하여 되풀이 생각한다. 사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아내를 다음 생에서도 또 만나고 싶다. 아주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생에서 아내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 나를 만난 이유로 시집에서 당한 억울한 일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촉발된 우울증, 기대에 못 미치는 남편의 능력. 그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니 이생에서 해원 할 수 없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꼭 갚고 싶다. 만약 부부로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고양이로 만나서라도 살고 싶다. 소피아의 소망처럼 말이다.
물론 인연법을 중요시하는 불교뿐 아니라 차안의 세계에서의 인간의 행위와 피안의 세계에서의 심판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정립해보려고 애쓰는 기독교에서도 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가망성은 거의 없다. 인간의 소망은 그저 하늘에 모였다가 스러지는 구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야 말고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냉동인간이라도 되어 '현실적인' 내생을 기약해보려 애쓰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는 짓 아닌가? 100년의 세월이 흘러 많은 질병을 치유한다고 해도 인간의 세포 차원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변화를 어찌 다 통제한다는 말인가? 과학적 상식으로도 도저히 영생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렇게 연장된 생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논쟁의 끝은 무엇이겠는가? 그저 ego를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든 신의 섭리든 더 큰 운명의 수레바퀴를 관조하는 것이 아직은 현명한 조치로 보인다. 이제 와서 눈을 뜬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넬로페가 스페인어로 속삭이던 Abre los ojos, '눈을 떠봐요'라는 말은 참으로 유혹적이다. 나도 눈을 떠보고 싶다. 영원한 세계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