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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 아더스>를 보았다.

교회는 왜 유령의 집이 되고 말았나?

by Francis Lee


2001년에 나온 <The Others>는 감독, 각본, 음악을 혼자 다 맡은 사이코 드라마 전문의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난 스페인 감독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ábar, 1972~)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수작이다. 오스카 상을 받은 <Mar adentro>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2001년에 나온 <Vanilla Sky>의 원작으로 그가 감독한 1997년 작품 <Abre los ojos>도 매우 감동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The Others>는 작품성만이 아니라 흥행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영화로 그의 필모그래피에 빛나는 업적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으로 나온 니콜 키드먼(Nicole Mary Kidman, 1967~)이 차분한 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계속 잘 이끌어 갔다. 이 영화에 출연할 때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였음에도 젊음의 빛이 변함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니콜이 벌써 지천명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다. 참으로 무정한 것이 세월이다.


이 영화의 시작점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라는 것은 구시대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그레이스 스튜어드가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묵주는 그가 '죽어가는' 가톨릭 교회를 상징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여성이다. 교회의 주인인 예수의 배필이기 때문이다. 교황청에서도 교회의 대명사는 늘 여성 단수로 사용해 왔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두 자녀와 더불어 살고 있던 대지가 넓은 우중충한 저택은 교회의 건물을 상징한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매우 음울한 건물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그레이스는 두꺼운 커튼으로 햇빛을 차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햇빛은 계몽주의 이후 찬란히 빛을 발한 인간의 이성의 빛을 상징한다. 그 이성의 빛으로부터 그레이스의 자녀가 상징하는 교회의 자녀, 곧 신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교회의 현세적 주인, 곧 성직자들의 강박증을 그레이스가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신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은 지상에 구현된 천상 예루살렘이고 세상은 악마의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두 자녀 가운데 아들인 니콜라스는 어머니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데 비하여 딸인 앤은 뭔가 삐딱하다. 두 아이는 교회 안에서 말을 고분고분히 잘 듣는 신자와 뭔가 집안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신자를 상징한다.

그런 집에 느닷없이 찾아와 하인의 역할을 한 세 사람은 당연히 구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의 정신을 깨우치려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과거의, 더 정확히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교회 신자들이다. 그 깨달음은 다름이 아니라 그 집의 '새 주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레이스가 인식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등장과 더불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로 그레이스는 비로소 그 집에 ‘다른 이들’(the others)이 있다는 현실을 자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마 그레이스는 여전히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그러자 마침내 참다못한 딸 앤이 엄마에게 진실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이 집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이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아이의 이름은 빅터(Victor)였다. 빅터는 그 집이 자기들 것이라고 선언한다. 당연히 빅터는 이름이 말하는 대로 교회를 접수하러 온 새로운 정복자(victor), 곧 세속주의다. 교회 건물 안에도 스며든 세속주의는 이제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는 가톨릭 교회를 상징하는 그레이스에게 나가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그레이스에게 세 사람의 하인 가운데 나이 든 여자인 밀스 부인이 과거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과거에 그 집에서 폐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고 확신한 그레이스는 하인 가운데 늙은 남자인 터틀 씨에게 빅터라는 이름의 무덤이 근처 공동묘지에 있는지 확인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심란한 그레이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까이에 있는 신부를 찾아 문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안개가 심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변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레이스에게 세상은 전혀 알 수 없는 안개에 싸인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안개를 뚫고 전선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여겼던 남편 찰스가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머무는 동안 남편은 늘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 별로 없다.


그 와중에 그레이스는 거실에 자기 딸인 앤의 첫 영성체 때 입었던 옷을 어떤 늙은 여자가 입고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딸이었다. 그러자 앤이 동생에게 엄마가 ‘그날’처럼 미쳐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생 니콜라스는 누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소동이 있고 나서 아버지 찰스는 그 집을 다시 떠나버린다. 이번에는 영원히 말이다. 당연히 남편은 그 집, 곧 교회의 원래 주인이었던 예수를 상징한다. 예수조차 그 집에 머물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정은 영화 끝에 밝혀진다.

남편도 떠나버린 다음 날 그동안 햇빛을 가렸던 커튼이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린다. 하인들이 일부러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그런 짓을 했다고 믿은 그레이스가 그들을 당장에 내쫓아버린다. 그날 밤 아이들은 몰래 나가 무덤에 있는 비석이 그동안 그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유령이었던 것이다. 그레이스도 방 안에서 그 하인으로 일했던 이들의 죽은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견한다. 그 세 사람, 곧 밀스 부인, 터들 씨, 그리고 소녀였던 리디아는 189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들의 유령에 쫓겨 집으로 달려온 두 아이는 2층의 침대방에 숨지만 오히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한 할머니에게 발견된다. 집에 다시 돌아온 밀즈 부인의 충고에 따라 2층 침실에 올라온 그레이스도 그 할머니를 발견한다. 그 할머니는 빅터의 부모를 포함한 ‘살아 있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제 그레이스는 진실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할머니는 현실 세계와 영계를 이어주는 영매였다. 그리고 그 영매를 통해 빅터의 부모는 전에 그 집에 살던 그레이스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전에 먼저 딸 앤과 아들 니콜라스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빅터의 가족이 아니라 그레이스와 앤 그리고 니콜라스가 그 집의 유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빅터의 가족은 유령인 그레이스 가족이 내는 소리에 고통을 당해온 것이 진실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아챈 그레이스에게 밀즈 부인이 충고한다. 앞으로 새 주인이 이 집을 찾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이 집에 계속 머물 예정이라면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레이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저승에 가지 못한 원귀가 되어서라도 자기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이미 죽어서 유령이 된 아이들을 이제 와서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주문처럼 되풀이하여 말한다. 'This house is ours.' 그러자 자녀들도 조건반사적으로 그 말을 따라 한다.


다음날 아이들이 일어나 해를 마주하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집을 떠나는 빅터의 가족을 바라보는 세 사람은, 아니 세 유령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다. 깊은 애정으로 말이다. 사실 그 집의 원 주인은 그레이스가 아니다. 마치 기독교 교회가 최초에 건물을 마련할 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을 빼앗아 기독교 교회로 전용한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렇게 빼앗을 때 보상도 안 했다. 기독교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국교로 선포한 로마제국의 최고 정치 권력자인 황제의 위세를 빌려 맘대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남의 것을 멋대로 빌려 자기의 성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 건물이다. 그러니 이제 기독교가 쇠락했으니 다음에 오는 '새 주인'에게 집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고집을 부린다. 그렇게 그 집의 유령으로라도 남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인가 요즘 사회에는 '기독교의 유령'이 넘쳐나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해가 찬란히 빛나는 아침임에도 창가에 서서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을 결심을 한 세 사람의 음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분위기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기독교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적국의 국민을 죽이는 일을 앞다투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그 적국의 신부와 목사도 똑같은 신, 똑같은 예수의 이름으로 무기와 전사를 축복하였다. 탱크를 축복하고 비행기를 축복하고 군인들을 축복하였다.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말이다. 특히 독일의 가톨릭 교회는 히틀러가 제3제국을 선언하자 기독교의 제3천년기가 온 것이라고 흥분했다. 그래서 주일 미사 때 주교와 신부는 히틀러를 따를 것을 공공연히 강요하였다. 개신교라고 나을 것이 없었다. 독일 개신교가 변명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겨우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정도였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KZ, 이른바 집단수용소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4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독일의 제도 교회인 개신교도 가톨릭도 히틀러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다. 종전 후에 기독교가 내세운 변명은 참으로 추레했다.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협조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뭐라고 반응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를 떠나는 신자들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인 교회의 추한 모습이 잊힐 만한 때에 터진 사제와 목사의 아동 성추행 사달은 진작에 죽어가던 기독교 교회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뻔뻔하다. 참회는 입으로만 하고 그만이다.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고 피해 보상에는 한없이 뜨뜻미지근하다. 그러면서 이미 다 벌거벗겨진 교회의 본모습은 찬란히 빛나는 이성의 태양 아래 다 드러났는데도 버틴다. 그리고 <디 아더스>의 그레이스처럼 외친다. ‘이 교회에 속한 부동산과 재산은 내 꺼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그레이스처럼 교회의 신자들을 질식시켜 버리고 자신도 이미 유령이 되었다는 진실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 교회는 사회의 유령이 되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유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서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리고 이제 껍질만 남은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다.


그런 교회의 위선과 교만과 무지를 <디 아더스>는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예수의 고뇌를 떠올리지 않을 수없다. 과연 예수가 자기 이름으로 세워진 지금의 교회를 본다면 그리고 그 교회 안에 들어선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천 년 전에 유대교 성전에 들어서서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2-13)


그런데 이제 기독교 교회 안에는 유령이 된 강도들이 설치고 있으니 더욱 골치 아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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