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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를 보았다.

과연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까?

by Francis Lee
스크린샷 2023-03-21 205851.png 영화 <The Matrix> 스크린 샷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키아누 리브스와 톰 크루즈 둘 뿐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는 거의 다 보았다. 특히 <매트릭스>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마르고 닳도록 보았다. 물론 <바닐라 스카이>도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워낙 SF와 심리극이라 그런가 보다.

<매트릭스>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각기동대>가 비교되지만 <매트릭스>만의 고유성은 바로 네오가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매트릭스>를 동서양의 여러 철학을 비빔밥으로 만든 SF로만 본다면 단순히 기독교의 패러디나 하나의 뉴에이지 물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워쇼스키 형제/자매의 의도는 관객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영화감독은 영화로 승부를 거는 존재일 뿐이다. 재미를 주고 존경과 더불어 돈과 명성을 거머쥐는 것이 궁극 목표다. 그러니 관객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력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즐거워서 기꺼이 대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면 그만인 것이다.


현재 4편까지 나왔지만 형 만한 아우 없는 것 같다. 1편 곧 <매트릭스>가 최상의 품질의 작품이었음은 여전히 유효한 사실이다. 2~3편은 그런대로 볼만한 비주얼이었지만 4편은 문자 그대로 망작이었다. 마치 어릴 때 사귄 애인을 만난 기분 아닌가? 물론 워쇼스키가 일부러 그런 망작을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어쨌든 유감이다. 특히 키아누가 <존 윅>에서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여파도 크다. 마치 존 윅이 잠깐 네오가 된 느낌을 주니 말이다. 수염이라도 깎고 나왔으면 나았을까? 유튜브 숏에 나온 키아누를 보니 그 수염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각설하고.

개인적으로 <매트릭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20세기말에 나온 최고의 명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1999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들, 곧 네오와 모피어스가 그들의 절정의 나이에 보여준 ‘미모’가 박제된 작품이다. 그 당시 35세인 키아누의 말끔히 면도한 얼굴은 그가 왜 ‘미남’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로렌스 피시번은 38살보다 훨씬 늙어 보였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돌에 새겨지게 되었다. 둘의 나이가 비슷한 것을 두고 네오가 예수이고 모피어스가 세례자 요한이라는 해석도 있다. 요한이 예수보다 6개월 더 일찍 태어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요한이 예수를 보고 자신은 그의 신발의 끈을 맬 자격도 없는 존재라고 겸손을 떨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를 추앙하는 무리들이 나중에 만든 전설에 불과하다. 예수는 오히려 요한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가 요한과 마음이 맞지 않아 독립하여 별도의 집단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구하러 가기보다는 도망가버렸다. 예수와 요한의 관계는 갈라진 다음 매우 나쁘게 끝난 것이다.

그런데 <매트릭스>에서는 모피어스가 거의 주문처럼 네오를 두고 ‘He is the One.’을 되풀이하여 말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의심해도 그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모피어스만큼이나 네오가 메시아라고 믿고 있던 트리니티는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를 죽을 때까지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서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기르는 삶을 ‘마지막 유혹’으로 제시하지만 말이 안 되는 전설이다. 과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였을까? 예수 생존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 법적 부부가 아닌 채 동거만 하는 사실혼 관계는 존재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애인으로 삼았다면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유대교 사제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실을 걸고넘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와 마리아가 부부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를 전설로 만든 이들이 있지만 이는 전설도 아니고 그저 소설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과 극작가가 맘대로 쓰는 소설이니 <매트릭스>에서는 네오와 트리니티가 ‘깊이 사랑하는 사이’여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가 시온에 남은 마지막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미남이라서 사랑할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매트릭스> 영화의 화면을 계속 채운 네오의 미모는 남자인 나도 반할 정도였다. 그러니 트리니티가 그를 마음껏 사랑해도 전혀 억지 설정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서양 영화에서 기독교, 특히 예수를 형상화한 작품은 차고도 넘친다. 예수가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만이 아니다. 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매우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에수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서양은 결코 예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어도 무시할 수가 없다. 2000년 가까이 배타적으로 국교가 되어온 종교이고 그 국교의 교주가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흔적을 서양에서 지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기독교가 그 위세를 과거만큼 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말이다. 두뇌가 2000년 동안 세뇌되다 보면 자신이 세뇌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기 마련이다.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인물로 매도당하는 니체의 작품도 결코 예수를 깎아내린 적이 없다.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자. 이 영화에서 네오의 역할은 메시아다. 시온에 숨어서 그들을 구해줄 영웅을 기다린 이들에게는 그렇다. 그러나 예수와는 달리 네오는 자신이 the One이라는 자각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전트 스미스의 총에 맞아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는, 곧 부활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을 의심한다. 물론 예수도 서른 살이 되도록 메시아의 삶을 산 적이 없다. 그리고 이른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40일간 광야에서 악마와 영적 싸움까지 한다.

그러나 2~3편에서는 시온의 전사들을 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지나친 영웅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1편 만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원래 인간은 게을러서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영웅’이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 여기에 더해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큰 일, 곧 자연재해나 전쟁, 전염병과 경제적 파탄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나서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 ‘운명적인’ 사태가 벌어지니 더욱 그런 영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적 존재의 도움을 바라고 더 나아가 미신을 믿게 된다. 점을 보고 부적을 쓰고 심지어 굿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성 종교도 별다르지 않다. 예수 탄생과 관련된 점성술만이 아니다. 예수나 부처나 스스로 노력을 해서 문자 그대로 ‘성인’이 되라고 가르쳤지만 그런 ‘어려운 일’은 두 사람에게만 맡기고 그저 예수상과 부처상 앞에서 빌고 또 빈다. 솔직히 가장 쉬운 방법이니 말이다. 그것도 효과가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묵주와 염주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아예 십자가나 염주를 목에 걸고 다닌다. 신의 은총과 부처의 가피가 있기를 기원하면서.

<매트릭스>에 기독교적 요소만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네오의 alter ego, 곧 소프트웨어 회사에 근무하는 토마스 A. 엔더슨은 사실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것이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이다. 아무리 좋은 회사를 다녀도 탈출을 꿈꾸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결국 회사원은 노예다. 여기에서 인간이 처한 이중적 한계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 최고의 대기업 회사원이 되어도 결국 고용주인 자본가의 노예일 뿐이다. 연봉이 억대를 넘는다 해도 노예 생활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용주가 나가라면 나가야 한다. 그것도 군말 없이 말이다. 더구나 그런 ‘번듯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사회생활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뇌에 심어준 환상이다. 그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고 해도 네오와 같은 the One이 아니라면 바로 하수구에 내던져지고 마는 또 다른 노예에 불과하다.

많은 종교에서 나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각성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매트릭스>에서 볼 수 있듯이 무조건 각성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각성하고 나면 오히려 파멸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에이전트들과 만나 네오를 잡을 계략을 꾸미는 자리에서 사이퍼가 한 말이 진실에 가깝다.


Ignorance is bliss. 물론 이 말은 사이퍼가 먼저 한 것은 아니다. 탁월한 연기로 율리우스 시저에게 상까지 받은 Publilius Syrus(BC85~43)가 한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원래 노예였으나 탁월한 지식과 말솜씨로 주인의 눈에 들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공부를 하여 마침내 연극배우와 작가가 되었다. 그의 글을 모아 편집한 일종의 명언집인 <Sententiae>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In nil sapiendo vita iucundissima est. 곧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장 기쁜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 속담으로 바꿔본다면 ‘모르는 것이 약이다.’ 정도가 되겠다. 사실 그렇다. 인간은 그저 먹고 자고 싸는 일에만 전념하는 유아기 상태에 있을 때 근심 걱정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될 생각을 안 하고 그저 먹고 마시고 자는 일에만 골몰하는 이들이 생각 밖으로 많다.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삶의 지혜를 구해봐야 골치만 아프다. 더구나 정답도 없는 것을 뭐 하러 고민하는가? 그저 비싼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셔대고 기분이 좋아지면 해외 명품을 몸에 처바르고 살면 그만 아닌가? 물론 얼굴도 뼈를 깎고 보톡스를 정기적으로 맞고 그래도 안 가려지면 화장을 떡칠하면 되니 말이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별거 없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나대는 기쁨으로 ‘플렉스!’를 외치면서 말이다. 진리? 정의? 공정? 그런 거에는 ‘개 사과’나 줘버리고 말면 그만이다.


사이퍼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나서 Ignorance is bliss.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전에 다음과 같은 말 한다.

You know, I know this steak doesn't exist. I know that when I put it in my mouth, the Matrix is telling my brain that it is juicy and delicious. After nine years, you know what I realize?

어느 정도 깨닫고 9년 동안 노력을 하고 나서도 이 모양이다. 사실 우리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만 배워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을 알자고 굳이 면벽참선이나 수도 생활을 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는 다시 전자와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전자와 쿼크는 형체가 없다. 그러나 형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구성하는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와 쿼크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에너지다. 공간을 채우지만 형체가 없기에 무게도 없는 에너지다. 그런데 그 에너지 덩어리가 움직이고 말하며 희로애락을 느낀다. 그리고 오늘도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그 살아 있는 것이 정말 ‘나’인가? 아니면 매트릭스와 같은 인공지능이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래서 내가 먹고 자는 것도 다 꿈에 불과한 것인가?


진리를 찾아 속세를 버리고 신부나 승려가 된 ‘남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이퍼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 특히 40~50대가 되어도 ‘진리’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간 확신이 없을 경우 고민이 심해진다. 이른바 ‘다른’ 남자들은 그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자식도 있고 사회에 진출하여 출세도 하는데 나는 뭔가... 그런 깊은 실존적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젊을 때는 뭔가 잡힐 것 같아 ‘용맹정진’이라는 것을 해보지만 그 생활을 몇십 년 하고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인생 별거 없다.

그래서 사이퍼처럼 후회하는 것이다. 왜 하필 그때 빨간 약을 먹었을까? 차라리 파란 약을 먹고 다 잊고 살걸. 그러면 이런 고통도 안 당하고 그저 모르는 게 약이라는 ‘진리’대로 살 것인데. 인생 어차피 별거 없다는 것을 50이 다 되어야 느끼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공자 같은 경지에 있는 남자도 50줄에 들어서야 비로소 知天命을 논하게 된 것 아닌가? 정말로 나 자신도 살아보니 인생 별거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이퍼처럼 중간에 ‘진리’를 포기하고 노선을 갈아탄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 장면에서 사이퍼가 에이전트 스미스와 ‘거래’를 한다. 시온에 접근하는 비밀번호를 아는 자, 곧 모피어스를 넘겨주는 대가로 지금의 모든 진리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자기를 돈 많고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하는 법이다. 그리고 매트릭스가 사이퍼를 다시 power plant에 집어넣고 매트릭스 안에 다시 노예로 만들겠는가? 이미 버그가 되어버린 사이퍼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시궁창이다.

무지가 축복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지도 고통이다. 본래 인간에게는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고통일 뿐이다. 고통의 근원은 무지이지만 불교의 사성제(四聖諦)에 관한 이론이 말해주는 대로 집착 자체가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古諦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픔이 아니다. 만족하지 못하여 느끼는 고통이다. 그렇게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執諦다. 부처는 이러한 집착을 극복하는 방법, 곧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쳐 준다. 그런데 그 여덟 가지 방법 앞에 붙은 바를 정(正)이 문제다. 무엇을 기준으로 바르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대부분의 진리 탐구는 막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진리 탐구’에 대한 집착은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나의 집착이 되어 버려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퍼와 같은 ‘비겁한’ 변명을 한다. 무지가 축복이라고. 그러나 무지는 가장 커다란 저주일 뿐이다.

득도의 길이 쉬울 리가 없다. 그리 쉽다면 부처가 온 지 2,500년 예수가 온 지 2,000년이나 지났으니 인류는 이미 열반의 세계나 하늘나라에서 춤추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데 면벽참선을 100년 하고 하안거 동안거를 알뜰히 챙겨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미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외쳐봐야 하늘나라는 더욱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트리니티의 네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네오의 트리니티에 대한 사랑이 인류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종교에서 그토록 혐오하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진리를 가까이하려면 여색을 멀리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그래서 부처나 예수는 물론 공자와 맹자도 여색을 멀리하지 않았던가? 더 나아가 집안 돌보는 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천하영재(天下英才)를 얻어 그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암만 뜯어보아도 여자를 심지어 아내를 알뜰히 사랑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유교만이 아니라 불교나 기독교에서도 여자를 알뜰히 사랑하는 것은 전혀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탐구하려면 여자를 멀리할수록 좋단다.

그런데 과연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트리니티의 ‘키스’로 부활한 것이 맞나? 아니면 부활이 이미 확정되었는데 ‘키스’라는 의식이 필요했을 뿐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과연 남녀의 ‘올바른’(正)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사랑이 무너뜨릴 수 있는가? <매트릭스>를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답의 실마리라도 얻기 위해 오늘도 나는 또 <매트릭스>를 감상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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