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전부일까?
사실 이 영화는 이미 한 번 보았다. 전에 볼 때에 내가 느낀 인상은 너무 ‘영국적인’ 영화라는 것이었다. <어바웃 타임>처럼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일상적인 그래서 ‘사소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한 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최대한 집중을 하면서 보았고 처음 받았던 느낌과 다르게 다가왔다. 역시 무엇이든 정성을 기울이면 숨겨진 것도 볼 수 있는 법이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루이자(루) 클라크의 역할을 한 에밀리아 클라크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다. 연기력에서 거의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 특히 이 영화에서 송충이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그의 눈썹은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탁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미소로 다가갈 것만 같은 커다란 입은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켜버린다.
과연 남자 주인공처럼 잘 나가던 삶이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의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완전히 ‘마비’가 된다면 어떨까? 그것도 전신마비라면 말이다. 정신의 통제를 전혀 받지 못하는 몸의 상태는 분노와 좌절을 넘어서 절망에 이르게 만든다. 그리고 절망은 키엘케고르가 말한 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런 이미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남자 주인공 윌 트레이너의 역할을 찰스 댄스가 담담하게 해내고 있다. 이 주인공의 이름의 발음이 암시하는 대로 의지를 시험하는 운명적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우 담백하게 보여 주었다. 큰 감동을 주는 연기는 아니지만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죽음과 장애 앞에서 전혀 궁상을 떨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애처롭기까지 하기에 말이다.
과연 나라면 이미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 남은 6개월을 어찌 보낼까? 6개월 후에도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이 확실한 경우에도 더 살고자 하는 의지와 이유가 생길 것인가? 삶과 죽음이 늘 같은 시공간 안에 공존하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 조금 먼저 조금 후에 갈 뿐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말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 차례인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조금’의 차이가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보통 인간에게는 영원과도 같다. 그래서 생존 본능에 충실한 인간은 그 조금에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것이다.
흔히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 창조적 변화는 거의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근원적인 촉진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랑의 힘은 기적을 종종 낳는고 말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아예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자기력의 변화까지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사실 기독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서양 문화에서는 예수가 primordial 한 사랑의 전형을 제시한 것임을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그 빛을 잃은 지금도 예수의 사랑은 여전히 그 타당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 비포 유>에서는 온전한 사랑조차도 마비된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에 대한 혐오를 삶에 대한 의지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매우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주인공은 성을 소유하고 개인 제트기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력을 지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체가 ‘마비’된 현실에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할 여유는 없었다. 흔히 육체와 물질보다는 정신과 영혼이 더 고귀하고 소중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육체와 물질이 정신과 영혼을 지배한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sana mens in corpore sano라고 단언한 것이다. 육체가 망가지면 정신도 망가지는 법이다. 아무리 정신 승리를 외쳐보려고 하지만 현실은 냉정할 뿐이다. 물론 장애인들의 삶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은 political correctness의 차원을 넘어선 인류애의 경지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그토록 다정했던 여자 친구가 불구가 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하며 ‘행복’을 찾는 상황에서 자신이 타인에게 더 이상 행복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처절히 자각했을 법도 하다. 그러한 자각은 결국 자신의 삶의 ‘유용성’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남자 주인공은 결국 안락사가 합법화된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만다.
사실 안락사는 현대 생명윤리에서 자살과 더불어 가장 논쟁이 되는 주제이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한다는 것을 대죄로 여긴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전히 자살한 자의 장례 미사를 거부한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 완화 치료로도 감당이 안 되는 육체적 고통 자체의 경우는 물론 그에 수반되는 정신적 고통도 종교적 결단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법이다. 내가 똑같은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 경우에, 고통을 당하는 타인에게 인내와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한 일이기까지 하다. 물론 종교에서는 죽을 만큼 심한 고통 가운데 신적 체험을 하는 성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 신과의 만남이 촉진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된 인간에게 과연 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지옥보다 더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에게 너의 생명은 내 것이니 계속 그 현실적 ‘지옥’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신이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말기암이나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너의 그 격심한 고통도 신의 뜻이니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참된 위로가 될까? 물론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 가운데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영웅적으로 견뎌낸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예외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성인 반열에 오른 것 아닌가?
그런데 다시 한번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남자 주인공을 살리기 위한 가족과 루의 노력이 헛된 것이 될 정도로 그의 죽고 싶은 마음이 왜 그토록 강력했던 것일까? 목 아래로 완전한 전신마비를 겪는 처지에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비참함에 대한 남주인공의 좌절은 루의 ‘진정한’ 사랑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나? 물론 이 영화에서 루의 남자 주인공에 대한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오해가 불러일으켜질 만하다. 넉넉하지 못한 그리고 변변한 배경이 없이 생계를 돕기 위해 오래 일하던 빵가게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처지인 데다가 실업자였던 아버지마저 남주인공이 소유한 고색창연한 성의 관리인으로 취직하는 모습은 한국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자가 돈 많은 장애인 남자를 만나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마저 차 버리는 모습에서 가난한 여자와 부자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그저 그런 상황을 이 영화에서 연상할 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에서는 그러한 정황이 좀 더 명료하게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는 루의 사랑이 좀 더 순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남주인공에 대한 루의 동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지 못하여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본다.
과연 진실한 사랑은 무엇인가? 그런 사랑은 정말로 죽음을 무릅쓸 수 있나? 사실 답이 없는 이러한 질문을 왜 인간은 계속하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엄연한 현실에서 사실 언젠가 지나가 버리는 열정적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사랑을 한다. 도대체 왜 사랑을 하는 것일까? 생물학적으로는 답이 간단하다. 마치 컴퓨터의 ROM 안에 지워질 수 없게 새겨진 BIOS처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조건 사랑을 하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궁극적으로 짝짓기에 이러 출산과 양육과 직결된다. 무미건조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종족 보존을 위한 도구로 프로그래밍이 된 것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인 것이다.
20~30대에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러 밤을 새우고, 그가 없는 세상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렇게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랑을 ‘과학적으로만’ 분석하기에는 뭔가 서운하고 아쉽다. 그토록 나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고 밤을 새워가며 괴로워하게 만든 것이 ‘고작’ 호르몬이라고 한다면 어쩐지 억울하고 허무하다. 게다가 그런 열정적인 과정을 통해 만난 짝과 생식활동을 하고 난 결과물인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니. 인생이 ‘고작’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혼인에 이은 출산과 양육을 포기한 삶이 더 가슴 뛰고 보람 있는 것인가? 그저 사랑은 마음의 불이 타오르는 순간부터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애틋한 순간까지만 아름다운 것인가?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런 하이틴 소설류의 사랑은 문자 그대로 소설인 것이니 말이다.
영화 <미 비포 유>는 그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추억을 가슴에 담은 여주인공이 죽은 남주인공이 남긴 편지를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읽는 마지막 장면은 애틋하기보다는 오히려 씩씩한 새 출발을 암시하는 듯하다. 더구나 그림 공부라는 새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유산도 물려받았으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영화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너를 만나기 전의 나’로 다시 돌아오는 여주인공의 당당한 모습에서 아픈 사랑의 추억은 거의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Me before You> 다음에 이어진 소설의 제목이 <After You>인 것인가? 아무리 아름답고 슬픈 사랑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잊힌다. 흔히 말하는 대로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하니 말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해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사실 슬퍼할 틈이 없다.
그런데 종족보존의 본능과 분리된 사랑도 어쩌면 가능한 일 아닐까? 앞에서 말 한 대로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변화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가능할 수도 있어 보인다. 어차피 사랑의 대상은 외부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 나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한 이가 죽고 나서도 그를 잊지 못하고 삶이 다 하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가는 것이리라. 마치 영원한 사랑이 있다는 확신을 얻은 듯 말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그런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그만인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소멸시켜버린다. 그래서 차라리 남자 주인공처럼 어차피 소멸될 사랑을 처음부터 만들지 말도록 하여, 지연된 아픔이 연장되는 상황을 막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영원한 이별의 순간에 마주해야 하는 커다란 슬픔과 아픔을 마치 예방주사처럼 생각하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 또한 일종의 ars moriendi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버린 사랑을 어찌해야 하는가? 그 이루지 못할 사랑이 매일 밤 찾아온다면 어쩌란 말인가? 슬픈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은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불교에서 보면 그저 한바탕 꿈에 불과한 인생에서 사랑도 무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속세의 삶을 지속해야 하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그리 만만하게 뛰어넘을 수 있지 않다. 무명이기에 오히려 노래 가사처럼 사랑의 기쁨은 잠시뿐이고 사랑의 슬픔은 영원한 것 아닌가? 이래저래 질풍노도와 같은 사랑조차도 인간을 슬픔과 고통 속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죽은 남자 주인공의 유서와 같은 편지를 읽고 나서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에서 오히려 작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래. 까짓것. 한 번 더 살아보자! 다짐해보면서 말이다. 혹시 아는가?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될지?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