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때부터 팬이 된 앤서니 홉킨스는 역시 나를 속이지 않았다. 배우 앤서니가 아니라 ‘완벽한’ 치매 환자 앤서니였다. 올리비아 콜먼은 내가 독일 유학 때 옆집에서 보았던 ‘흔한’ 아줌마처럼 보였다.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의 편집 능력에 경의를 표하고 무엇보다 그가 크리스토퍼 햄프턴과 공동 집필한 각본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는 앤서니와 올리비아가 문자 그대로 ‘다 한’ 작품이다. 한 마디로 이 두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예술가이다.
Florian Zeller. ‘겨우’ 1979년생인 이 프랑스 감독은 내게 낯설다. 그의 이력을 보니 소설가, 극작가, 연극과 영화 감독,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이다. The Father는 그의 첫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에서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골든 글러브에서도 4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제작비가 ‘겨우’ 600만 달러이고 수익도 고작 2,400만 달러이니 어마어마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아카데미의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원래 The Father는 2021년 영화로 나오기 훨씬 전인 2012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1838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연극 극장인 Théâtre Hébertot에서 Le Père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던 연극 작품이다. 이 연극에서는 Robert Hirsch가 아버지로 Isabelle Gélinas가 딸로 나왔다. 이후 영어로 번역된 각본을 바탕으로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최근까지 45개 국가에서 연극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이런 배경을 보니 2021년의 The Father가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에서 배경은 그냥 ‘집’이다. 그런데 치매 환자인 앤서니에게 그 집은 상상 속의 집과 현실의 집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영화 초반부에 나타난 집은 앤서니의 상상, 아니 그보다는 치매로 퇴화하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착각’의 산물이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하여 파리에 가려는 계획도 취소하고 재택 간병인을 수소문하는 딸의 효도는 지극하다. 그런 딸의 집을 자기 집으로 여기며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는 앤서니는 오만방자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기억의 파편이 맞지 않는다. 간병인의 모습이 죽은 딸과 중첩되기도 하고 사위가 갑자기 낯선 사람으로 변하여 장인을 때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제 만난 딸을 닮은 간병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전혀 낯선 여자가 간병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혼란 끝에 결국 앤서니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말이다. 이는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 데이비드가 자각몽에서 깨어나는 것과 비슷한 전개 과정이다. 현실을 자각한 앤서니에게 다가온 '집'은 요양원의 작은 방에 불과했다. 딸은 자신을 돌보고자 파리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위와 함께 이미 몇 달 전에 파리로 건너가 잘살고 있다. 그리고 앤서니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이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던 상태였다. 인생에서 현실은 언제나 잔인하다. 이 현실의 잔인성을 자각하는 순간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진다. 앤서니도 예외일 수 없다. 간호사의 어깨에 기대어 보고 싶은 엄마 생각에 흐느끼는 앤서니의 모습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불교에서 갈파한 인생의 본질인 생로병사는 잔인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간다. 그리고 갖은 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는다. 생과 사를 연결해주는 것은 기쁨과 희망이 아니라 노화와 질병이다. 그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의 새로운 세포분열이 20세 정도까지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세포가 노화되니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늙어간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드는 것이 늙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많은 질병에 시달리게 되니 이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데다가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치매에 걸리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나 편히 죽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치매’는 현대에 들어와서 새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 온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노망’으로 알려진 증상이다.
사실 인간의 수명이 더 연장되지만, 치매를 불러일으키는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질환의 근본 치유책이 없는 이상 치매 환자는 더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치매 환자를 가족이 돌보는 것은 단순히 효도라는 도덕률과 인내심과 배려라는 인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도 생애 말년에 여러 해에 걸쳐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기에 그 문제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효도와 인간적 도리로 직접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해 보지만 치매가 인지 능력만이 아니라 인격마저 퇴화시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면 현재로서는 결국 요양원이 최후의 선택이 된다. 그런데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아무리 치매로 인지 능력과 인격이 퇴화되어도 인간의 정서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어머니께서 치매 말기에 이르자 언어만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대화가 전혀 불가능했지만 어떤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은 문자 그대로의 느낌이라 지금도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느낌’은 장례식 때까지 이어졌다. 어머니의 관을 왼쪽 옆에 두고 앉아 예식을 치르는 데 관속의 어머니와 내가 영적으로 이어지는 그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윤리학과 신학을 40년 넘게 공부하고 17년 동안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이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치매는 인간의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만, 여전히 생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영적인 차원은 손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학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이런 영계에 관한 이야기는 미신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직접 체험한 나로서는 치매로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존엄한 영역이 남아있다는 확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영적인 영역이 사후세계로 이어지는지 아닌지는 독일 튜빙엔에서 10년 동안 공부한 신학 박사인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영화 The Father에서 현실을 자각한 앤서니는 ‘엄마’가 보고 싶어 통곡한다. 영화에서 1937년생의 노인인 앤서니가 말이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Anthony Hopkins도 1937년 12월 31일생이다. 만으로 84세. 인간의 평균 수명을 넘기고 치매에 걸린 노인이 여전히, 또는 새삼 ‘엄마’를 찾는다. 나도 60이 넘었지만 돌아가신 지 3년이 넘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 가끔 흐느껴 운다. 물론 아무도 안 보는 자리에서 말이다. The Father를 보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울었다. 나도 ‘엄마’가 여전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엄마’를 통해 나온다. 예수나 부처도 ‘엄마’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는 진리다. 그런데 예수와 부처는 죽을 때 엄마를 찾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발치에 모인 세 명의 마리아 가운데 그를 낳은 마리아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마리아와 자신의 제자 요한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굳이 신약성경 원어인 그리스어본 성경을 '잘난 척하며' 자주 인용하는 이유는 한글 번역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 구절에서 예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Γύναι, ἴδε ὁ υἱός σου. 직역하면 이렇다. “여자야. 봐라. 네 아들이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Ἴδε ἡ μήτηρ σου. 직역하면 이렇다. “봐라. 네 엄마다.” 사실 그렇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는 마리아를 엄마로 불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분명히 자신을 낳아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처도 열반에 들 때만이 아니라 생전에 ‘엄마’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물론 불경에는 <부모은중경>이 있지만, 이는 중국의 대승불교에서 유교의 효 개념을 불교에 도입하여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원시 불교에서 인간의 모든 관계는 다 업장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의 해탈에 방해만 되는 소멸해야 하는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중생의 처지에서 예수와 부처의 경지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60살 때만이 아니라 앤서니처럼 80세를 넘겨도 ‘엄마’ 생각에 울먹이게 될 것 같다. 그 생생한 증거가 나의 아버님이시다. 현재 94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엄마’를 찾으시며 눈시울을 적시곤 하신다. 그러니 나도 80이 되든 90이 되든 ‘엄마’가 그리워 가끔 통곡도 할 모양이다.
사실 ‘엄마’는 생물학적 존재만이 아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몇 겁의 인연으로 만난 영적 존재라고 확신한다. 내가 비록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신학박사이고 지금도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믿고 있지만 말이다. 그 인연법으로 맺어진 ‘엄마’는 사실 ‘나의’ 엄마가 아니다. 내 동생들과 공유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더 큰 ‘모성’(maternitas)의 현현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를 흔히 ‘terra mater’라고 한다. 이는 로마 신화의 Terra 또는 Tellus에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Γαῖα)와 같은 신적 존재이다. 그렇다. 개별 존재로서 인간으로 나타난 ‘생물학적 엄마’는 많은 인간적 단점을 지닌 존재이지만 ‘모성의 엄마’는 신과 다름 없는 완벽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엄마’가 그립고 그 품에 안겨 통곡하고 싶다. 치매에 걸려도 마찬가지이다. ‘엄마’는 인지, 곧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정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정서는 인간의 두뇌가 그 생물학적 기능을 멈추어도 남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종교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엄마’는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그 사실을 앤서니가 The Father에서 잘 보여 주었다. 사실 프랑스어나 독일어에서는 Le Père나 der Vater처럼 정관사가 자연스럽게 붙지만 영어에서는 the가 붙는 것이 어색하다. 그런데도 굳이 The Father로 제목을 붙인 이유는 영화에 나오는 바로 그 앤서니 한 사람만이 앤의 아버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라고 추측해 본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지상에서의 생물학적 기능에 멈추어버린다. 보편적 모성에 대응하는 보편적 ‘부성’의 개념은 철학이나 신학에서 매우 낯설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아버지는 신과 동일한 존재이기에 지상에서의 아버지의 존재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자렛의 목수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는 결코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늘에 '진짜' 아버지가 있으니 요셉은 예수를 기른 ‘그 아버지’(the Father)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보편적 ‘부성’(paternitas)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영화의 제목은 The Father이지만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엄마’라는 진리를 이 영화를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끝에서 앤서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마’라는 단어가 영화 앞부분에서 전개된 앤서니의 착각과 환상이 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엄마’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자녀의 완전한 보호막이다. 그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는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치매에 걸려 인지 능력이 퇴행하면 그 어린이다운 의식이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자신이 아버지로 불리는 어른임을 자각하게 되고 ‘엄마’의 부재를 인식하는 순간 ‘그 아버지’(The Father)는 하염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 진실을 이 영화에서 앤서니가 완벽하게 표현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