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매우 감동적으로 본 경험으로 <헤어질 결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또한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가 <아가씨>의 김민희 수준의 팜므파탈의 모습이 나올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렜다. 박해일도 안정된 연기로 잔잔한 감동을 전하는 배우이기에 더욱 기대가 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리에 강력하게 남는 것은 배우의 연기와 영화의 주제보다는 탕웨이의 어눌한 한국어였다. 아무래도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언어로 고생을 한 경험이 너무나 강력한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다. 이 영화로 박찬욱이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외국에서 한국어 대사로 이루어진 영화를 높이 평가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자막을 활용했다고 해도 탕웨이의 어눌한 한국어가 주는 그 멜랑콜리한 느낌을 외국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 영화에서 배우가 한국말을 하는지 중국어를 하는지를 구분할 능력도 없지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시아인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서양인에게 아시아인끼리 대화에 번역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외국인과 사랑을 나누는 데에는 사실 언어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언어는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두 주인공의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은 서래의 서툰 한국어 때문이 아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동기는 비슷할 것 같지만 천차만별이다. 외모는 물론 목소리, 태도 그리고 때로는 손가락 끝의 미묘한 움직임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사랑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인간은 그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한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도 사랑하는 상대방의 언어가 외국어인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번역기가 필요하다. 남녀의 사랑에는 만국 공통의 언어가 있기에 통역이 전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언어가 인간의 사유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 ‘사랑해’라고 말할 때와 독일 사람이 ‘Ich hab’ dich lieb.’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바다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에는 늘 안개가 피어오르게 된다. 물론 같은 언어권의 사람들끼리의 사랑에도 이런 언어의 안개가 존재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같은 언어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언어가 다른 연인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매우 짙다. 그래서 그 안갯속에서 방황하다 보면 결국 사랑 자체가 연인을 지치게 만든다. 그 지침의 순간에 사랑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둘 다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서래와 해준의 사랑도 결말에 이를 때까지 도무지 안갯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개는 결국 서래가 해준과 아니 더 나아가 세상과 영원히 헤어질 결심을 하도록 이끈다. 안갯속에서는 사랑인데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사랑이 아닌데 사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참된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의도가 영화를 이렇게 흘러가도록 만든 것도 있겠지만 원래 사랑이 사람을 그런 안갯속을 정처 없이 방황하도록 만드는 속성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안갯속에서 방황하는 고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럴 거면 차라리 사랑을 하지 말걸’ 하는 후회를 강요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 헤세(Hermann Hesse)의 ‘안갯속에서’(Im Nebel)를 읊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글로 직역해 본다.
Seltsam, im Nebel zu wandern!
묘하다, 안갯속을 방랑하는 것은!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덤불 하나 돌 하나가 다 외롭다,
Kein Baum sieht den andern,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Jeder ist allein.
모두 다 혼자다.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한때 내게 세상은 친구들로 넘쳤다,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내 삶이 아직 환했을 때 말이다.
Nun, da der Nebel fällt,
이제 안개가 드리우고 보니,
Ist keiner mehr sichtbar.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Wahrlich, keiner ist weise,
정말로, 아무도 지혜롭지 못하다,
Der nicht das Dunkel kennt,
어둠을 모른다면 말이다,
Das unentrinnbar und leise
피할 수 없고 은밀한 어둠은
Von allen ihn trennt.
사람을 모든 것에서 떨어뜨린다.
Seltsam, Im Nebel zu wandern!
묘하다, 안갯속을 방랑하는 것은!
Leben ist Einsamsein.
인생은 고독한 존재다.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이를 모른다.
Jeder ist allein.
모두가 외롭다.
그러나 아무리 단어가 아닌 그 뜻을 번역해 보려고 해도 헤세의 언어를 한국어에 다 담아낼 수 없다. 내 언어 능력의 한계가 크지만 언어에 지배당한 나의 사유의 한계가 더 큰 문제다. 그래서인가? 정훈희의 <안개>가 내 가슴을 더 저민다. 독일어로 직역해 본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Ich gehe allein auf dieser Straße im dichten Nebel.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Es gibt einen Schatten seiner verlorenen Liebe.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Vergeblich denke ich an die vergangene Erinnerung.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Trotzdem sehnt sich mein Herz nach ihm.
아~
ach~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Wo ist er hin?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Allein im Nebel irre ich zerstreut umher.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Als ich mich umdrehe, stoppt mich eine leise Stimme.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Lieber Wind, verwehe den Nebel!
아~
ach~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Wo ist er hin?
안개 속에 눈을 떠라
Wach auf im Nebel,
눈물을 감추어라
Verstecke deine Tränen!
독일어로 번역해 보아도 똑같다. 정훈희가 전하는 그 애절함은 단어에 담기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하면 좀 나을까?
I walk alone on this street in dense fog.
There is a shadow of his lost love.
To no avail, I think about the past memory.
Still, my heart is yearning for him.
oh~
where has he gone away?
Alone in the fog, I wander about absent-minded.
Turning around, a low voice stops me.
Dear wind, blow away the fog!
oh~
where has he gone away?
Wake up in the fog,
hide your tears!
역시 아니다. 정훈희의 쓸쓸한 정서가 전혀 안 느껴진다.
언어는 안개다. 언어가 없다면 오히려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서래와 해준이 외국어를 번역해 주는 앱이 아니라 마음을 전해주는 메타언어로 대화를 했다면 서래가 영원히 헤어질 결심을 하고 차가운 바닷가 모래 위에 홀로 앉아서 서서히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 쓸쓸함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헤어짐이 서래가 덧붙인 <산해경> 이야기의 속편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으로 스스로 위로를 해본다. 참으로 쓸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