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희와 송혜교가 이응복 감독의 <자백의 대가>라는 시리즈에 출연해 콜라보를 이룬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에 한소희가 송혜교를 두고 SNS에서 '이제는 내거야'라는 메시지를 남겨 더욱 흥미를 돋우고 있다. 사실 현재 한국의 팜므파탈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니 그들이 보여줄 아름다움에 기대가 크다. 더구나 <자백의 대가>가 살인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물이라니 벌써 흥미진진하다.
한소희라는 배우는 필모그래피를 작성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4년밖에 안 된다. 나이가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한국 대표 여배우의 계보를 잇는 당당한 자리에 섰다. 지금 그는 사주를 보고 싶을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문자 그대로 ‘뿜어내고’ 있다. 사실 이 글 시리즈는 원래 지천명을 넘긴 한국의 내로라하는 미녀를 다루고자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준에 맞는 미녀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40대로 나이를 낮추었으나 그나마도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이제 나이를 불문하고 사주를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한 미녀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 기준에 맞추어 찾아본 첫 미녀가 바로 한소희다.
사주를 보자.
O무을갑
O신해술 곤명 3대운
현재 2016년에 시작한 임신 대운에 들어서 있다. 43세부터는 화목운으로 급격한 대운의 변화가 온다. 원국에 관살혼잡이니 남자관계가 복잡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페미니즘의 시대이니 조선 시대의 여성관과 결혼관은 깨진 지 오래다. 무슨 걱정인가? 내 생각대로 살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제는 일부종사가 아니라 나만 좋다면 다다익선의 시대 아닌가? 또한 일단 결혼만 하면 남편의 전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주이니 좋다. 많은 남자를 사귄 다음 한 남자를 정해 배필로 삼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한소희에게는 진정성이 있다. 성형으로 완전히 새 얼굴을 만들어 돈 많은 남자나 후리는 박 아무개나 성형을 전혀 안 했지만, 가식덩어리인 김 아무개와는 차원이 다른 아우라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배우는 부업이고 부동산 투기가 주업인 김 아무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배우다.
한소희가 <마이 네임>에서 보여준 윤지우/오혜진의 연기는 그를 스타의 반열에 올린 <부부의 세계>의 여다경의 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마이 네임>에서 보인 이중적인 정체성을 굳이 <부부의 세계>에서의 불륜녀의 이미지와 대비시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다. 그냥 한소희의 정체성이 다양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한소희의 본명이 이소희였다는 것도 그의 다양한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연예인들이 예명을 선택할 때 성만을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소속사의 권유가 있었겠지만, 한소희의 바이오그라피에서 부모의 존재 의미가 희미한 상황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가족 관계를 보니 외할머니와 여동생만 있다. 울산 여고에서 울산 예고로 전학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재학 중 30만 원만 들고 무작정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소녀 가장’의 이미지도 매우 강하게 부각된다. 생존 자체를 위해 닥치는 대로 모든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니 더욱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정식 데뷔가 그의 나이 22세인 2016년이니 적어도 4~5년의 인고의 세월을 거친 흔적이 그의 모순적 외모에서 풍겨 나온다. 매우 연약한 분위기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눈매에서 흘러나오는 우수에는 단순히 신파조의 동정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something different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연기에서도 진정성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연기의 가면 이전에 인생의 가면을 쓰고 나대는가? 그런 바닥에서 이런 진정성을 보이는 한소희의 희소성은 마치 황량한 가을 들판에서 발견한 늦게 핀 장미와도 같다. 스타덤에 올라 번 돈으로 먼저 외할머니가 편히 머물 집을 샀다는 소식이 그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수작’이 아니라고 믿을만하다. <너의 이름>에서도 여전히 연기가 완성되지 못한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오히려 한소희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배우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연기를 위해서라면 체중을 얼마든지 늘리고 줄일 줄 아는 사람에게 당연히 기대를 걸 수 있겠다.
한소희가 유명해지는 만큼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의 험담도 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겨우’ 담배와 문신이다. 참새들은 언제나 지저귀는 법이니 신경 쓸 일도 아니다. 물론 한소희는 ‘그때의 모습도 나고 지금의 모습도 나다.’라는 멋진 대답으로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한소희다운 발언 아닌가? 가식과 기만과 위선이 넘치는 사회에서 그런 한소희가 더욱 보석처럼 빛나 보인다.
원래 famme fatale은 서양의 예술과 문학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유혹하여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결국 파멸에 이르는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고대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 클레오파트라(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BC69~30)나 로마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BC10~AD54)의 셋째 아내였던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 AD17/20~48)를 들먹인다. 그러나 억지다. 실질적으로 여자에게 부정적 의미의 famme fatale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유럽 중세의 기독교다. 툭하면 아무런 방어권이 없는 여자를 마녀로 몰아가서 불에 태워 죽인 그 기독교 말이다. 그나마 여자의 권리가 어느 정도 보장되던 로마제국이 붕괴하고 기독교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와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유럽 중세에서 여자는 모조리 아담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 이브의 후예였다. 이브가 famme fatale의 원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바로 그런 famme fatale의 후손이다. 이브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 자들이 바로 그 이브의 후손인데도 마치 자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인양 허세를 떨던 것이 중세 기독교의 이른바 ‘성직자’들이다. 이런 위선과 가식의 남성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이 바로 famme fatale의 개념이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내세운 인문주의와 기독교의 세계관을 파괴시킨 산업혁명 이후에도 여자에게 고전적인 죄인인 famme fatale의 굴레를 씌우는 버릇은 여전히 남았다. 참으로 고약한 일 아닌가? 여자가 뭔 죄를 그리 졌다고 그리 난리란 말인가.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빛을 보지 못했을 것들이 말이다. 근세 예술 작품에서 전형적인 famme fatale는 모차르트의 <Die Zauberflöte>(1791)에 나오는 밤의 여왕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famme fatale은 낭만주의에 들어서면서 그 절정에 이른다. 괴테의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에서 젊은 베르테르를 자살로 몰고 간 유부녀 로테,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 1775~1818)의 <The Monk: A Romance>(1796)에서 30세의 자칭 ‘경건한’ 수도승 암브로시오를 유혹하여 결국 파멸로 이끄는 마틸다는 하나 같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여자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드(Marquis de Sade, 1740~1814)의 <Juliette>(1797)에서 쥴리에트는 승리하여 행복한 famme fatale이 된다.
소설만이 아니라 famme fatale은 미술에서도 남성중심주의적 판타지의 산물로 등장한다. 슈투크(Franz von Stuck, 1863~1928), 뭉크(Edvard Munch, 1863~1944),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famme fatale을 미술적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대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여성을 남자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한계를 드러냈을 뿐이다. 여자는 궁극적으로 ‘죄인’이었다.
die Sünde, Franz von Stuck(1863~1928)
Madonna, Edvard Munch(1863~1944)
20세기에 들어서도 이런 남성적 시각의 famme fatale에 대한 환상은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famme fatale은 소설에서도 지속적인 모티브가 되지만 무엇보다 영화로 시각화된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정형화된 famme fatale의 이미지는 특히 할리우드에서 계속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feminism이 시대정신이 된 상황에서 famme fatale도 이제는 새로운 형태, 곧 neo famme fatale이 나올 법도 하다. 구 시대의 famme fatale이 단순히 남성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불과했다면 neo famme fatale은 feminism의 정신으로 자신의 진정성, 곧 integrity를 온전히 지킬 줄 아는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속하는 배우가 한소희가 되기를 바란다. 겉으로 보여준 모습이 내면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5살부터 외할머니의 손에 자라고 부모는 전혀 관여 안 한 그의 당당한 성장기만으로도 충분히 neo famme fatale로 불릴 만하다. 그리고 <부부의 세계>로 이른바 ‘뜨고’ 나서도 여전히 과거에 인연을 맺은 이들과 변함없이 관계를 유지한다는 ‘증언’이 진실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어머니라는 자가 이른바 ‘빚투’로 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사달을 벌였지만 정면 돌파한 모습도 아름답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한소희의 미모는 이른바 과학이 정한 것이 아니다. 황 아무개와 김 아무개가 한 때 컴퓨터와 성형외과 의사들이 정한 ‘최고 미녀’라는 소문이 났었다. 그러나 얼마나 우스운 평가인가? 미의 판단은 전적으로 미적 대상과 미적 관찰자 간의 합의로 내려지는 법이다. 컴퓨터와 의사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한소희의 얼굴은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비대칭의 미가 오히려 한소희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 준다.
허상에 불과한 성형외과 의사들의 기준에 맞추어 오늘도 얼굴을 찢고, 뼈를 깎고, 이빨을 다 갈아버리고, 주기적으로 주사를 맞아가며 과거와 현재의 자기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감추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아무 데나 나대기 좋아하는 여자들로 넘치는 나라에서 한소희의 비대칭의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165cm의 적당한 키는 세계적인 모델과 배우들에 맞서서 오히려 동양의 미를 드러내는 데 장점이 될 수 있다. 몸무게는 45kg을 기준으로 출연 작품의 요구 사항에 따라 10kg 정도의 오차 범위를 보인다니 더욱 기특하다.
적지 않은 여자 배우들이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고 말을 하는 순간 환상을 깨는 경우가 많은데 한소희의 조용한 말투와 적당한 음색은 그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 가식 없는 목소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편히 만들어 무장해제시켜버리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영애처럼 지나친 하이톤의 느낌을 주지도 않고 이효리처럼 걸걸한 느낌을 주지도 않는 보기 드문 중용의 목소리다. 도대체 어릴 때 ‘고생한 티’가 조금도 안 난다. 툭하면 어릴 때의 ‘칼국수나 수제비 전설’을 팔아먹는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진정성, 곧 integrity가 목소리에서도 드러난다. 참 특이한 배우다.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공로가 매우 큰 것 같다. 그렇다면 사주에서 정관이라는 말인데 을목이 해중 갑목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연간의 갑목이 제대로 뿌리는 내리니 편관의 힘이 당연히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점쟁이들은 흔히 결혼 생활이 관살혼잡으로 불길하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무토가 그리 만만한 일간이 아니니 남자에 관해 충분히 검증을 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 외할머니도 관성 아닌가? 남편 자리를 미리 보고 싶으면 외할머니와의 궁합을 보면 된다. 고마운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신금 식신이 공망이 되어 자녀성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임신 대운에서 잘 나가고 있으니 이 또한 쓸데없는 걱정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의 연예계에 참 보기 드문 미모와 연기력을 두루 갖춘 배우가 나온 것이 고맙다. 그저 주변의 입방아에 흔들리지 말고 연기가 천직이니 계속 그 길을 가며 정진하기를 바란다. 배우는 배우여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배우가 부업인 배우 아닌 배우가 너무 넘쳐난다. 중심이 없어서다. 중심이 없다 보니 연기에 올인하기보다는 적당히 광고 찍고 번 돈으로 부동산 투기나 해대는 것 아닌가? 사주에서 인격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관성이다. 한소희의 관성이 힘이 넘치니 ‘잡스러운 무리들'과 휩쓸리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연예계가 타락과 직결되는 바닥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달이 자주 일어나는 곳 아닌가? 그런 자리에서도 당당히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한소희가 homme fatale에 맞선 neo famme fatale로서 이 땅에 진정한 feminism의 시대를 열 수 있을지. 한 번 기대를 걸어본다. 한소희가 <부부의 세계>와 <마이 네임>에 이어 <자백의 대가>에서 연기와 삶의 neo famme fatale 경지에 이르는 변증법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