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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31. 2023

프롤로그: 쾰른

쾰른

쾰른의 야경



“시청사 탑 위에 올라 건물들과 더불어 내 생각과도 적당히 어울리는 음울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 펼쳐진 이 멋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센강 연안의 루엥시나 쉘데강 연안의 앤트워프시와 같이 강폭이 상당히 넓어서 건너기 쉽지 않은 강변에 자리 잡은 다른 모든 도시처럼 쾰른 또한 강줄기를 따라 팽팽한 활시위 모양을 하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건물들은 서로 촘촘하게 붙어 있고 마치 접힌 카드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길은 좁고 건물에는 합각머리 장식이 보인다. 그 지붕들 뒤로는 성을 둘러싼 붉은 반구형 해자와 벽돌로 쌓은 성벽이 어디서나 보인다. 이는 마치 철갑처럼 도시를 둘러싸며 결국 강으로 이어진다. 강 아래쪽으로는 ‘튀름첸’*이, 그리고 강 위쪽으로는 멋진 ‘바이엔투름’이 있고 톱니 모양의 장식이 있는 탑 아래에 서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주교 동상은 라인강을 축복하고 있다. 튀름첸과 바이엔투름 사이의 강변을 따라 1마일가량 도시 건물들의 창과 벽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 길게 늘어진 집들 중간쯤에는 커다란 주교*가 있다. 강폭이 매우 넓은 곳에 세워져 물결을 거슬러 우아하게 구부러진 이 다리는, 칙칙한 건물이 빼곡히 들어찬 쾰른 지역과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도이츠 지역을 연결해준다.     


* ‘튀름첸’[Türmchen, 역자주 - 흔히 Weckschnapp으로 알려진 Kunibertsturm 탑을 의미함]     

* 주교[Schiffbrücke, 舟橋, 역자주 - 1822년에 지어져 1915년까지 사용된 Deutzer Schiffbrücke를 말함]     


쾰른의 도시 중심에는 지붕들과 ‘작은 탑’, 꽃으로 장식한 애틱 사이로 다양한 형태의 교회 지붕이 27개나 솟아있다. 여기에는 쾰른 대성당 말고도 웅장한 로마네스크식 교회가 4개 있다. 그 모습이 각기 다른 이 교회들은 장엄함과 아름다움에서 대성당 못지않다. 북쪽의 상트마르틴 성당, 서쪽의 상트게레온 성당, 남쪽의 상트아포스텔른 성당, 동쪽의 산타마리아 임카피톨 성당은 반구*와 매우 다양한 탑이 큰 매듭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쳐 있다.


* 반구[半球, apsis, 역자주 - 중세 성당 건축에서 입구와 반대되는 끝부분의 둥근 공간. 주로 경당이나 제의실이 위치함]     


도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의 모든 것이 살아서 고동친다. 다리 위에는 오가는 사람과 탈것으로 넘치고, 강은 돛단배로 뒤덮이고, 강가에는 돛대가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길마다 소음이 넘치고, 창문마다 이야기꽃이 피고, 지붕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푸른 나무들이 칙칙한 건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단조로운 슬레이트 지붕과 벽돌집 사이로 15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석조 귀족 저택이 보였다. 이 저택은 꽃, 과일, 잎사귀가 양각된 프리즈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포도가 눈길을 끈다.     


이 커다란 공동체 주변으로 활발한 상거래 덕분에 무역도시가 발달하고, 그 위치 때문에 전쟁이 자주 발발하고, 강을 이용한 해운의 발달로 라인강 줄기 전체를 따라 이어지는 풍요로운 지역이 형성된다. 이 지역은 네덜란드 국경에서 끝나고 동남쪽으로는 ‘시벤게비르게’*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전설과 동화의 멋진 요람인 바로 그 시벤게비르게 말이다.”     


* ‘시벤게비르게’[Siebengebierge, 역자주 - Bonn의 동남부에 크고 작은 50여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간 지역]     


1840년에 빅토르 위고는 쾰른을 이렇게 봤다. 곧 ‘무역과 꿈의 도시’로 본 것이다.     

 

이로부터 36년 후인 1876년 1월 5일 아데나워가 태어났을 때도 그 도시의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돛단배와 증기선이 지나가도록 낮과 밤에 한 시간 동안 열고, 밀물 때나 강이 얼었을 때 완전히 거두어들인 그림 같은 주교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쾰른 대성당 옆의 튼튼한 ‘격자 다리’가 라인강 양쪽 연안을 연결했다. 이 다리에 인도도 있었지만, 쾰른시민이 몇 년 동안은 ‘다리 관리인’에게 2페니를 내야만 일요일 중앙역에서 출발하여 톱니 장식이 있는 네오고딕 양식의 문을 지나 라인강 동안의 도이츠 지역으로 산책하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고정식 다리는 원래 쾰른민데너철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철교로, 쾰른을 루르지역과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프로이센의 중심지와 연결해주었다. 지금은 쾰른에서 별로 눈에 뜨이지 않지만, 이 튼튼한 철골 구조물은 그 당시의 기술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간지 《라이니셰 차이퉁》의 편집장 칼 마르크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철도야말로 19세기의 참다운 혁명적 힘이라고 말했다. 사실 1848년 혁명 이후 마르크스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아데나워가 어릴 때 쾰른에서는 그 기술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앞장서서 쾰른을 철도 중심지로 바꿔놓은 인물이 바로 구스타프 메비센이다. 그는 미국 철도회사의 거물들과 비견될 만한 인물로, 쾰른을 1860년대 독일 서부지역의 교통 중심지로 만드는 업적을 이루었다. 당시 독일 서부에서 자웅을 겨루던 두 철도회사가 쾰른에서 만나, 평화로웠을 때는 석탄과 철광석 산업 제품을 운송하고 전시에는 군대와 탄약과 말 여물을 운송했다.      


또한 쾰른은 또 독일 서부의 큰 상업 도시로 한편으로는 브뤼셀, 앤트워프, 런던과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스트팔렌의 산업지역에서부터 베를린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쾰른의 경제는 여전히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활동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이들은 힘든 시절에는 종종 한탄도 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며 도시가 번영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철도 건설이 쾰른을 산업 시대로 이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태어난 1876년에 시청 탑에서 쾰른 항만을 건너다보면 아주 멀리까지 늘어선 크고 작은 굴뚝이 숲을 이룬 넓은 신축 공장지대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굴뚝들은 전혀 걸러내지 않은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며 공기를 더럽히고 있었다.     


도시 주변에는 설탕 정제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었다. 특히 슈톨베르크 형제의 것이 유명했다. 이 공장은 아노슈트라쎄에 고딕양식 성채 모양으로 지어진 것으로 안뜰에 높은 굴뚝이 솟아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산업 시대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기업은 도시 성벽 외곽에 모여 있었다. 라인강 상류 쪽으로는 바이엔탈과 촐슈톡에, 하류 쪽으로는 에렌펠트와 니페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는 목화 방적공장, 고무제품공장, 삼실방적공장, 선반공장, 그리고 유명한 라인유리공장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금속 가공공장도 점차 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80년대 초반에는 에렌펠트에 헬리오스사가 들어서면서 미래기술이 꽃피게 되었다. 조명시설, 증기 발전기, 교류발전기, 변압기를 생산하며 [독일] 서부지역에서 크게 성공하던 이 회사는 결국 파산했다.     


새로운 산업지대가 라인강 건너편의 도이츠, 뮐하임, 칼크, 핑스트 지역에 대규모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쾰른의 핵심 산업지역을 구축한 이들은 주로 산간 지역 출신 사업가, 기술자, 수공업자, 숙련공이었다. 칼크에는 훔볼트기계공장이 있었는데 1876년부터 1,4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압연기와 증기해머 앞에서 일했다. 도이츠에는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가 세운 커다란 도이츠가스엔진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토는 쾰른 세르바스가세에서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한 인물이다. 고트리프 다이믈러*가 1872년 이 공장의 기술부장으로 일한 바 있다. 1877년부터는 최대 100마력의 힘을 발휘하는 ‘신형 오토 엔진’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페터 클뢰크너가 이 두 회사(훔볼트와 도이츠)를 샀다. 그 후 아데나워가 쾰른시장일 때 이 두 회사는 KHD가 합병해서 쾰른 최대의 대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이 그룹의 회장이었던 귄터 헨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민당(CDU) 내의 기업계 파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고트리프 다이믈러[Gottlieb Daimler, 역자주 - 다이믈러 벤츠 자동차 회사 설립자]    

 

아데나워가 청년이던 시절에 펠텐&기욤 가문이 세운 칼스베르크는 이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으로 그 공장건물은 뮐하임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칼스베르크는 1824년에 요한 테오도르 펠텐과 그의 사위인 프란츠 칼 기욤(Franz Karl Guilleaume)이 밧줄을 만드는 공장으로 시작했다. 나중에 펠텐의 손자로 상공회의소 위원이었던 프란츠 칼 기욤(Franz Carl Guilleaume)이 칼스베르크를 점차로 철사와 통신케이블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전시에는 부차적으로 철조망도 생산했다.


이렇게 쾰른 주변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는 공장과 사무실, 철도, 창고, 노동자 집단거주지가 속속 들어섰다. 많은 기업은 독자로 생존하거나 다른 회사와 병합되었다. 적지 않은 기업이 부실해지거나 파산하기도 했다. 경기 변동에도 불구하고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제 쾰른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기술사무소, 공장건물, 사무실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쾰른은 여전히 꿈꾸는 것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과거의 영욕이 아직 남아 있는데 어찌 꿈을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프로이센 황실의 낭만주의자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현수교’를 설계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자세히 피력했다. 곧 이 다리를 건너는 이들이 ‘고딕양식’과 ‘중세 정신’에 다가가도록 다리가 쾰른 대성당의 사제석을 똑바로 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말 위에 올라탄 모습의 동상은 이 다리를 오가는 이들이 호헨촐러른 가문 출신으로 쾰른을 매우 사랑했던 이 위대한 인물을 수십 년 동안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오랜 실랑이 끝에, 대성당 주변을 널리 둘러싼 것은 결국 아름다운 식물정원이 아니라 ‘중앙승객역’(Hauptpersonenbahnhof)의 과자공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냉혹한 은행가, 보험회사 직원, 산업 설계사, 상업전략가와 같은 사람들이 일했다. 쾰른의 상업과 산업은 수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그 직원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유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철강업 분야의 기업만도 쾰른에 2,000여 개나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근대화에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중심이 있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고 전략적인 결정이 내려지며 많은 기업의 운명이 정해졌다.     


그 중심은 금융 구역인 ‘안 데어 도미니카너른’과 ‘운터 작센하우젠’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작센하우젠 은행 연합의 주도권을 1848년 초반의 어려운 때 구스타프 메비센이 장악하여 수십 년에 걸친 중요한 시기에 라인란트 지역의 산업 부흥을 이끌었다. 살 오펜하임 2세 금융 재벌가 출신의 에두아르드 폰 오펜하임 남작은 작센하우젠 37번가에 자기만의 도시궁전을 세웠다. 그 근처에는 다이히만, J. H. 슈타인, A. 레비, I. D. 헤르슈타트와 같은 또다른 은행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러한 기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원래 중개업, 운송업, 포도주 판매업에 손을 대 라인과 베스트팔렌 지역 산업에 투자하거나 기업을 이끌면서 성공을 거두고 때로는 파산하기도 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는 은행들이 높은 수익을 낼 만한 모든 분야에 투기자본을 댔다. 철도산업과 기계 제작과 광업을 비롯하여 그 무렵 칼크와 라더베르크, 그리고 약간 떨어진 레버쿠젠에서 성장하던 화학산업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곧이어 쾰른 은행가들의 활동은 좁은 라인과 베스트팔렌 지역을 넘어서 금융의 중심지인 베를린과도 연계를 맺었다. 그러고 나서 드레스데너방크, 디스콘토회사, 도이체방크와 같은 베를린의 커다란 주식회사 형태의 은행들이 자신과 같은 민간은행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은행가 가운데 몇몇은 아데나워의 전기에 계속 등장한다. 특히 부(副)상공위원 루이스 하겐은 아데나워의 출세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자기 성씨를 레비로 바꾼 아브라함 로엡의 손자로 1920년대에 많은 사람이 쾰른 2대 시장으로 거론한 바 있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 런던에 있는 디스콘토 회사에 근무한 다음 앤트워프에서 일하다가 1919년에 쾰른의 샤프하우젠은행협회의 대표가 되었다. 끝으로 1933년 히틀러와 파펜을 연결해준 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긴 쿠르트 폰 슈뢰더 남작도 있다. 그 또한 아데나워와 가까운 인물로 J. H. 슈타인 은행의 주주로 이 은행이 영국은행을 포함한 런던에 있는 은행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 한몫했다.    

 

이렇게 아데나워가 태어나기 사반세기 전 쾰른 근대화의 주역은 산업가와 은행가였다. 그런데 이들은 1876년까지만 해도 중세 도시 성곽이라는 석재 갑옷을 걸친 한 도시에만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그 도시는 자기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산업이 자리 잡은 주변 지역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쾰른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4,400m 크기의 웅장한 도시 성곽은 독일 최대의 중세 요새는 점차 자랑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황제가 친히 1180년에 친히 성곽 건설과 거대한 성문 건축을 승인한 사실을 쾰른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어떤 외적도 이 성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자랑스러워하는, 백골이 진토가 된 조상들은 과거에 시민들에게 추방되었던 쫓겨난 대주교의 공격을 1286년 울레포르테 야간 방어 전투로 막아냈고, 1794년에 프랑스 혁명군이 무혈입성할 때까지 이 도시의 자유를 지켰다. 나중에 노회한 아데나워는 1960년대에 미국 텔레비전 방송국의 의심 많은 기자와 인터뷰할 때 이 사건을 거론하며 독일이 이미 수백 년된 민주주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아데나워가 태어난 발두인슈트라쎄 6번지의 소박한 집은 도시 성곽에서 채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발두인 가 6번지에서 몇 걸음만 가면 하넨 성문에 이르렀다. 이 성문을 거쳐 로마·독일 황제가 대관식 거행을 위해 아헨으로 향하였다.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당했다. 곧 훈족, 프랑크족, 노르만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42년 5월 31일에 영국군이 쳐들어왔다. 그럼에도 커다란 성벽의 보호로 7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었다. 최근에 흙벽과 전초 요새로 보강한 이 성채는 쾰른이 전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자유제국도시’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에 비하여 뉘른베르크의 성백과 그 이후의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같은 호헨촐러른 가문 사람들은 소소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1815년 라인란트를 점령한 프로이센 군대는 장구한 세월을 견딘 이 성벽을 마치 자기들 보물인 양 수호했다. 그러다가 근대적인 대포가 발달하자 성벽 앞에 흙벽과 포곽을 쌓아 본래의 효과적인 방어기능을 보강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포스텔 수도원에 주둔한 총독부는 쾰른(Cöln, 1918년까지의 공식 표기법) 성곽의 방어력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힐 가능성을 모든 면에서 철저히 검토하지 않고서는 그 도시에서 성벽의 관통이나 성문의 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곽 안 모든 도로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1901년에도 군부 관료들은 쾰른시가 라인강 오른쪽에 전찻길을 놓으려 하자 제동을 걸었다. 식물원 자리가 자기들이 접근하기에 더 편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관료들은 쾰른시가 보상금 차원에서 그들이 필요한 추가 방어시설 건설에 1백만 골드마르크를 낸다면 별수 없는 일 아니냐고 했다. 전찻길이 실제로 매우 급한 것이었기에 시 정부는 그 돈을 지불하고는 이를 비밀로 했다.     


사실 1864년부터 산업계와 시민들은 점차 과격한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빈이나 바젤, 마인츠, 코블렌츠와 같은 다른 모든 중세 도시에서 내세운 것과 같았다. 이 도시들은 그 불편한 도시 성곽을 진작에 없애버렸다. 쾰른도 결국 ‘카페스바우어른’에 있던 마지막 남은 정원까지 없애버렸지만, 도심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만큼 주민으로 넘쳤다. 1820~1830년대부터 도시 관통 도로와 성문들 옆에 쓰레기를 몇 미터 높이로 쌓아놓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시의 위생 상태는 약간 개선되었다. 그러나 성벽은 여전히 신선한 대기의 흐름을 방해하였다. 특히 성벽 가까이에 있는 지역은 숨이 막힐 지경이고 먼지가 쌓여있었다.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도로 확장이 불가능했다. 모든 교통수단은 3.5미터 넓이의 성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게다가 성문을 지나는 이 길들은 방어 기술의 차원에서 전부 굽어있었다. 마구 건설되는 산업지역과 주거 지역에 매우 필요한 순환도로의 건설은 성벽을 부수지 않는다면 불가능했다. 또한 교통을 남북으로 이어주고 도시 서부에서 서쪽 라인강의 항구와 다리에 이어지는 길을 열어줄 도심을 지나는 넓은 관통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성벽 전체나 일부라도 무조건 제거하여 도시를 대폭 확대할 것을 강요하던 투기적인 건설 이익을 노리는 투자자본이 아니었다면, 그 오래전 시절에 매우 긴급해 보이는 그러한 생각을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분명히 받는다. 1869년에도 이미 엘츠바커 형제 금융가는 성채 전체를 430만 은화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구입할 것을 제안했다. 1870년대에는 프로이센이 그 부동산의 구매로 막대한 이익을 노리던 벨기에의 여러 채권단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모든 이를 만족시킬 만한 해결책에 이르기는 힘들었다. 어찌되든 쾰른은 요새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주둔군 지휘부의 뜻에 따르면 성채는 기껏해야 500~600m 정도만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철로가 요새 지역 안에 놓이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쾰른이 포위될 경우 그 철로로 탄약과 그 외의 보급품을 직접 요새 안으로 실어 날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흔적은 오늘날 쾰른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81년 쾰른시는 결국 자발적으로 1881년 11,749,000마르크를 지불하고 프로이센으로부터 약 120.85ha에 이르는 성곽 지역을 사들인 것이다. 쾰른시는 이 땅을 부분적으로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희망을 지녔다. 그러나 사실 쾰른시는 중세의 그림 같은 돌로 된 띠를 새로운 벽과 맞바꾼 것이었다. 이 벽은 신도시를 둘러싸며, 미래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매우 요란스러운 것이었다. 이는 곧 도시를 둘러싼 철로가 놓인 댐으로 이 철로에는 화물역과 조차용 선로가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 도시의 미래가 도시 확장에 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분명한 사실이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은 중앙당(Zentrum) 소속의 보수주의자이자 정치가인 아우구스트 라이헨슈페르거였다. 그런데 논쟁은 주로 몇몇 아름다운 커다란 고성의 보존에 관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국 이 성들은 결국 프로이센 정부가 약탈해 갔다.   

  

사실 1881년 6월 11일에 시작된 구 성벽의 해체는 일종의 축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희망찬 기대를 할 만했다. 시 정부, 산업계, 사업계는 마침내 그들의 소원을 이룬 것이고, 셈이고, 건설업계는 엄청난 계약을 맺게 될 것이며, 건설업자들은 수년 동안 일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관철한 당시 시장이었던 헤르만 베커는 “붉은 베커”라고 불렸다. 그가 1852년에 벌어진 중요한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적 직무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는 시민사회와 화해했다. 곧 이제 그는 새로운 쾰른 사람의 자세로 ‘운명에 대한 사랑’을 선포한 것이다. “600여 년 전 우리 조상은 이 도시를 담장으로 둘러쌌습니다. 이 도시는 자기 과거의 모습을 이루어준 것에 대하여 그동안 쾰른을 지켜준 이 성벽에 감사드립니다. … 쾰른의 확장을 위하여을 넓히려고 그분들이 지어야만 했던 것을 이제 우리는 쾰른이 작아지지 않도록 부수어야 합니다. … 쾰른 만세!(Alaaf Cöln!)”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쾰른의 교통 문제에 관한 이러한 급진적인 대책이 용서받기 힘든 잘못이었다는 사실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게 되었다. 요새는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지속 가능한 교통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미래를 향한 도약이 어찌 달리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또한 감상주의에 물들지 않고 그 당시에 필요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쾰른에 사는 모든 계층의 시민 대다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소년 콘라트 아데나워가 자랐다. 나중에 드러난 아데나워의 태도를 보면 그가 확실한 근대화를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읽어낼 수 있다. 비록 그 자신이 산업화와 그에 필요한 교통문제의 해결을 유적을 세심하게 보호하는 일과 결부시켰음에도 말이다.     


아데나워의 유년 시절에 쾰른은 커다란 공사판이었다. 인구 증가에 매우 필수적인 도관을 땅속 여기저기에 묻었다. [라인강 양안의] 도로를 연결하는 다리들은 구도시에 숨통을 터줬다. 성채와 구도시와 성곽 사이에는 이른바 ‘도시 확장’, 곧 쾰른 신도시가 세워지고 끊어진 성벽 사이의 토지에는 멋진 순환도로가 건설되었다.     

새 쾰른을 만든 사람은 주역은 요제프 슈튀벤이었다. 아헨의 도시 건설관이던 그는 1881에 쾰른시에 초빙되어 당시 독일에서 유일무이한 과업을 부여받았다. 곧 도시의 한 구역 전체를 최신의 도시 건설공법으로 설계하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나폴레옹 3세 휘하에 있던 하우쓰만 남작의 정신을 지닌 광적인 기술관료라고 일컫는다. 슈튀벤의 무조건적 근대주의가 나중에 불러일으킨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1880~1890년대의 쾰른에서는 뭔가 만들어보겠다는 용감한 의지가 발휘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 순환도로를 건설한 이들이 지닌 것과 같은 정신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혁명적이고 즉각적인 계몽을 불러일으켰다. 당장 필요한 것은 교통이 원활한 도시였다. 쾰른에서 남북을 관통하는 넓은 도로가 당장 건설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순환도로는 교통의 중요한 동맥의 역할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도로를 통하여 마차철도와 마차, 그리고 얼마 후에는 자동차로 신도시와 마찬가지로 구도시에도 쉽게 이를 수 있었다. 구도시의 신선한 대기의 흐름을 막는 구부러진 골목과는, 달리 순환도로 길가에 있는 고급 저택에는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수준의 빛과 깨끗한 공기가 넘쳤다. 32m에서 114m에 이르는 도로 폭은 2차선 도로의 시설을 갖추기에 충분했다. 이 도로 주변에는 높이 도드라진 중앙지대에 심어진 두세 줄로 늘어선 가로수로 신록이 우거졌다.     

 

그렇다고 해서 도로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멋진 주택이 줄지어 있는 순환도로는 10개의 개별적으로 형성된 도로들에 연결되었다. 그 도로들의 폭은 서로 달랐고 그 길 끝에는 각각 공원같이 식물이 우거진 슈테른플라츠 표석이 있었다. 이는 [일종의] 기념비로 장식한 볼만한 장소였다. 이 모든 것이 완성될 때까지 20년이 걸렸다. 19세기 말 이 건설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는 기독교 교회, 유대교 회당, 그 밖에 오페라 하우스나와 호헨슈타우펜바트와 같은 대형 공공건물이 세워졌다. 쾰른의 유복한 시민들은 이제 시각적으로 매우 훌륭한 멋진 도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서부 독일의 우아한 세상에서 루돌프플라츠에 있는 오페라를 보러 세계적 도시들의 [통상적인] 교통수단인 전세 마차로 그 멋진 길을 달려갔다. 이 길은 모든 쾰른 사람에게 파리와 빈, 베를린, 브뤼셀 같은 대도시와 맞먹는 수준의 문명에 이르렀다는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도로 시설 한가운데에 남겨진 남은 중세 시대의 요새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채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녹음 속으로 사라져버려서 마치 잘못 놓인 무대장치처럼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쾰른은 이제 진보의 정점을 향하여 전진하게 되었다.  

   

도시 확장에는 필연적으로 확실한 계획적인 통합정책이 수반되기 마련이었다. 당시 독일제국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쾰른도 주변 마을에 무질서하게 들어서는 산업 시설과 노동자의 집단거주지, 도로망을 최대한 신속하게 행정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시 정부는 그곳에서 운영되는 기업에서 법인세를 걷고자 했고, 기업들은 그들 나름대로 도심과 연결되는 교통의 확실한 개선을 요구했다. 인구가 넘쳐나자 곳곳에 주거지와 더불어 산업 시설 단지가 필요했다. 또한 도시 관리시설과 모든 이들이 곧 알게 된 것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연공원, 근린 휴양시설, 스포츠 센터가 필요해졌다.     


도시가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확대는 아데나워 시대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잠시 멈추게 되었다. 1880년대에는 라인강 서안 지역이 쾰른시에 편입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라인강 강변의 우측 지역에 있는 근린 산업지역도 쾰른시에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는 뮐하임과 메어하임이 쾰른시에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쾰른은 주변에 널려 있던 모든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1871년에 129,000명이던 쾰른시 인구는 1914년에 635,000명으로 늘어났다. 시 재정수입도 4배 증가하여 경제력이 강화되었으나 그만큼 문제도 늘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산업 발전과 건설 계획 수립이 필요해졌다. 도시 기반 구축에 엄청난 재원이 동원되었다. 도로를 비롯한 근거리 교통시설, 학교, 휴양시설이 필요했다. 행정과 예산 차원의 부담과 더불어, 커다란 대도시 지역에서 공동의 삶을 이끌어 가야 하는 계층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가운데 정치적 문제도 발생했다.     

 

1914년까지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기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한꺼번에 몰려온 후에 어느 정도 정체되었지만, 여전히 활발한 변화는 프로이센 제2의 산업도시에 비교적 지속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내적 논리가 담겨있었다. 곧 명백한 생산적 결과를 낳고, 지도층이든 대다수의 민중이든 사회적 처지가 달라도 낙관적인 진보에 대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신념은 20세기의 재난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기술에 대한 열광, 거대한 산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경제 발전이라는 힘에 대한 믿음, 강력하게 추진되는 변화 과정의 계획적인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퍼지던 시절의 쾰른에서 바로 아데나워가 성장하여 성인으로 자란 것이다. 아데나워가 황제 통치 아래에서 이러한 국가의 시대정신을 유치원 때부터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가 쾰른시장으로서 그리고 이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으로서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늘 새로운 구상을 하고 시도해 보도록 그를 이끌어준,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 추진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근대화의 변화와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이를 역동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은 영원한 가르침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아데나워는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의 역동적인 시대에 배운 것이다.     


아데나워가 성장한 옛 쾰른은 산업화의 미래를 향하여 막 출발한 대도시만은 아니었다. 그 시대의 대부분 시민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미래에 대한의 약속을 더 의식하고 있었다. 쾰른은 1815년에 프로이센에 귀속되었다. 이중 박공의 관공서 건물이 늘어서 있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크레인 기둥이 서 있는 활기찬 호이마르크트 한가운데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블레저와 알렉산더 칼란드렐리가 제작한, 말에 올라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황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무려 85만 마르크의 제작비가 든 이 동상은 라인란트와 프로이센의 통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라인 다리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빌헬름 1세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둘 다 주석으로 제작된 것으로 말 위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빌헬름 1세의 동상은 20세기의 모든 풍상을 모두 이겨내어 마침내 커다란 호헨촐러른 다리 옆에서 이제는 더 이상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한 도시를 내려다 볼 운명에 놓여 있었다. 또한 쾰른은 물론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동상도 세워야 했다. 그 제작비는 열정이 넘치는 시민들이 부담했다. 비스마르크의 동상은 아우구스틴플라츠에 세워졌고, 몰트케의 입상은 1881년 세단전승기념일에 라우렌츠플라츠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호헨촐러른 가문이 쾰른을 그 왕국의 가장 고귀한 자랑거리임을 보여주고자 세운 가장 커다란 기념물은 마침내 1880년 완공된 도시의 하늘 위로 솟아오른 쾰른 대성당이다. 이는 꿈이 돌로 형상화된 이 성당은 높이가 156m로 당시에는 잠깐이나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이 대성당의 완성은 19세기 기술력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1842년에 공사가 재개되면서 쾰른만이 아니라 독일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이 대성당에는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동기가 함께 흘러들었다. 괴테의 영향을 세심하게 반영한 설계로 술피츠 보이세레는 중세 종교성의 보편 정신을 이 대성당에 새롭게 구현하고자 했다. 건축위원회에 함께 참가한 많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도 그렇게 이해했다. 요제프 괴레스와 그를 추종하는 독일 민족주의 운동은 대성당 건축의 재개를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제국의 상징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적이며 재산이 많고, 동시에 중세에 매료된 상류층 시민들은 기념비가 되는 대성당 건축을 독일과 자기 의무로 여겼다.    

 

때로는 서로 간섭하는 이러한 다양한 동기들은 프로이센 황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황제라는 인물이 대표하는 정치적 의지를 통해 결합하여 라인란트와의 유대가 명문화되기에 이르렀다. 1870~1871년에 벌어진 ‘통일전쟁’ 때부터 호헨촐러른 가문은 신중히 처리하면서도 매우 강력한 열정으로 쾰른 대성당 자락에서 독일의 통일과 위대함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자금줄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거창한 대성당 건축의 축제를 자신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특히 1880년 10월 15~16일에 걸친 준공 축제에서 그리했다. 이 성대한 마무리 준공 축제는 온전히 프로이센 황실의 정치적 의도가 고스란히 깔려있었다. 황실 가족, 수많은 독일의 유명 인사, 많은 군인, 그리고 여기에서 황실의 광채를 누려보고자 많은 기부를 한 쾰른의 상류층에 둘러싸인 빌헬름 1세는 마침 자기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인 이날에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독일제국의 완성과 그 위대함을 기념했던 것이다. 베르사유에서의 황제 등극을 선포 이후에 번영하는 제국의 기초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효과적인 과시가 있다면 바로 이 행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대성당은 단순히 쾰른이 자랑하는 교회 건축물만이 아니었다. 이 대성당은 20세기 중반까지 라인지역에서 독일이 자기를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그 이후의 시대에도 황제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쾰른의 여러 계층 백성의 알현을 허락했다. 황제의 마지막 방문은 아데나워가 이미 시의회 의장이던 때인 제1차 세계대전 바로 직전에 이루어졌다. 빌헬름 2세 황제,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가 호헨촐러른 다리 축성식에 참석하고자 쾰른을 방문했다. 전쟁 이전의 이 시대는 백성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서 커다란 불꽃놀이를 하는 가운데 막을 내렸다. 이 행사에서 황제는 언론을 통하여 즉시 널리 퍼진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평생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당시 프로이센 군의 쾰른 주둔은 결코 단순히 상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걸어서, 또는 차를 이용하여 그 도시에 들어가려면 먼저 두꺼운 방어선을 통과해야 했다. 1880년대 초반에는 깊은 교통호, 포진지, 포문이 있는 12개의 커다란 요새가 쾰른시를 가로지르는 라인강 좌측 강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머지 4개의 요새는 도이츠 지역에 있었다. 요새 시설 주변의 약 600미터 폭의 공간에는 농사를 짓거나 식물을 심는 일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는 방위군이 방해물이 없는 사선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신도시마저 비좁아지자 시 정부는 베를린의 전시 정부와 비밀 협정을 맺어 그 요새 시설을 최대한 주변 지역으로 밀어내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거두어 1908년에 결국 도시를 위한 넓은 ‘내부 요새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새로운 ‘분리 요새들’이 도심에서 약 5km 떨어진 지역에 세워졌다. 일반에 개방된 요새 일부는 아름다운 녹지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강력한 외부 공격을 거의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쾰른은 여전히 요새이고 그렇게 남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라인강 왼쪽 강변의 도시 지역에는 42km에 걸쳐 8개의 요새, 14개의 중간기지, 119개의 군사 방어거점이 늘어서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초중등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쾰른에 7개의 보병연대, 포병, 기마대가 있었다. 15만 명의 시민이 사는 도시에 군인이 약 1만에서 1만 2천 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도시 중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개방된 수도원에 주둔했다. 흔히 교도소처럼 보이는 병영 옆으로는 빵집과 탄약고, 장교클럽, 군대 영창이 있었다. 그 당시에 군대는 자연스러운 일상에 속한 것이었다. 또한 다양한 사회 계층에서 사교적 요소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했다. 장교들은 시민계층의는 젊은 시민층 여성에게 구애하고, 하사관이나 사병들은 하녀나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쾰른 사람들에게는 군부나 군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군사적 정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쾰른시민에게 병영은 학교나 교회, 술집, 수공업자, 공장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속하는 것이었다.     

  

행정 차원에서 이 도시는 라인지역에 속했다. 그러나 지방장관은 총사령관과 함께 쾰른이 아니라 코블렌츠에 주재하고 있었다. 주의회는 뒤셀도르프에서 소집되었다. 쾰른에는 고등법원과 지방 국세청, 지방 산파만 있었을 뿐이다. 이 도시에 이렇게 국가 행정기관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들어 프로이센 정부가 라인란트 지역의 가톨릭 대도시에 대한 혐오를 보이고있다는 악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815년에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에 병합될 때 그저 적당한 행정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 대신 이 도시는 도시 관리에서 커다란 자유를 만끽했다. 1856년 쾰른시는 도시조례로 시정의 독립적 운영에 폭넓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투표권이 있는 시민들은 시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 시의회는 자체적으로 시장 후보를 선출했다. 물론 그 임명은 왕이 했지만 말이다. 전체적인 통치는 왕이 임명한 행정장관의 몫이었다. 쾰른의 요새로서의 성격은 도시에 제한을 가했다. 여러 관련 사안에 대하여 군사령관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도시 행정기관은 시행법률에 따라 많은 과제를 처리해야 했다. 여기에는 조선소, 항만시설, 다리, 시장, 도시 관리와 교통 문제 처리, 건설과 주택, 보건시설과 병원, 초중등 교육 기관과 전문대학, 사회구호시설, 음악관, 박물관, 극장, 도서관 관리가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적지 않은 부분이 국가의 간섭과 맞물리기도 했고 갈등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인·하르덴베르크 개혁의 효과로 이 도시는 자체적인 정치적 의지, 자기 행정 능력에 대한 자부심, 자기 주도성,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엄격하고 올곧은 프로이센식 행정 정신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도시에 내면화되어 스며있었다. 비록 도시의 관리들은 다른 도시에서 행정에 관련된 업적을 쌓거나 쾰른의 법조계에서 일하는 인물을 시장으로 선출하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때로는 이른바 ‘쾰른 사단’에 속했던 아데나워의 전임자인 막스 발라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센 지방장관을 초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쾰른이 대체로 행정적인 측면에서 별문제 없이 프로이센 국가에 통합되었다는 것이 단순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피상적 모습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가? 이 라인강 언저리의 대도시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라인란트의 ‘프로이센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특히 베를린과 그곳에 확립된 관료제도에 대한 무언의 반감이 피어올랐던 것은 아닌가? 특히 라인지역의 가톨릭 세력이 프로이센에 통합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그토록 끈질기게 맞선 것은 아니었나? 이러한 질문은 특히 아데나워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는 사실 그는 1918과년과 1919년 사이, 그리고 1923년에 다시 발생한 ‘라인란트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의 제국에 대한 아데나워의 태도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라인지역의 역사 연구는 라인란트와 프로이센의 관계를 강조하여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그들 사이의 긴장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극단적인 양상을 띠지 않았던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한 해석은 때로 한편으로는 민족자유주의나 독일민족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관점의 역사서술에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계인 중앙당(Zentrum)에 가까운 역사학자들이 이전에 자주 제시한 것이다. 다층적인 정치적, 심리적 관계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먼저 상투적인 생각을 접하게 된다. 이는 올바른 관찰과 과장이 동시에 섞인, 상투적이지만 또한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916년에 쾰른시가 발간한 《1815~1915 프로이센 지배 아래의 첫 백 년 100년 동안의 쾰른》이라는 책에서도 알렉산더 바켐이 언급되어 있다. 이 사람은 쾰른 토박이로 상소법원에서 오랫동안 법관으로 근무했고,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쾰른시장을 역임했다. 아데나워 시장의 먼 선배 바켐은 탁월한 법률가이자 자의식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쾰른시의 연감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켐은 시의회가 “그의 자의식, 나아가 탁월함을 느끼게끔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전혀 강제성이 없는 방식으로 실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쾰른에서 그러한 인물에 대하여 가지는 신화적인 상상에서 볼 때 ‘동부에서 온 시장’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바켐은 업무를 매우 철저하게 수행하고 더욱 빈틈없이 하여 모든 직원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들은 교실 책상 앞에 앉은 학생과도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기서 ‘동부 사람’이라는 도발적인 구호는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무뚝뚝하고 철저히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지칭하며, 한 마디로 권위를 내세운다는 뜻이다. 이는 프로이센 지역 출신으로 쾰른시에서 일하는 관리들에 대해 직감적으로 예상되는 것이지만, 쾰른시장에게서도 느닷없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1924년에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했다. 1924년에 아데나워는 1886년부터 1907년까지 쾰른의 수장을 역임한 위대한 선임자인 빌헬름 본 폰 베커를 추모하는 기념사를 읽었다. 아데나워의 연설은 깊은 존경심이 담긴 것이었으나, 베커의 정치관이 ‘근본적으로 서부보다는 동부의 관점’에서 길러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실 이는 당연하였다. 베커는 탕거뮨데 출신으로 개신교 신자였고 장학관의 아들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커다란 모범으로 삼는 이 사람이 철저히 ‘프로이센’의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덕성을 지녔음을 증언했다. 그러한 덕성에는 ‘활동력’과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대한 ‘온전한 헌신’, ‘자립심과 극기심’, ‘높은 의무감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꾀부리지 않는 성실성, 집요한 목표 추구’가 포함된다.     


긍정적으로 볼 때는, ‘동부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은 프로이센 차원의 공무에 대한 이해를 국가적 차원의 엄격한 기능적 덕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하인리히 폰 트라이취케가, 한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자기 저서인 《19세기 독일사》에서 찬미한 것과 같은 정신이 나타나 있다. “새로운 북부 독일의 가문은 … 엄격하고 강인하며 거친 땅의 힘든 경작과 한계 상황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단련됐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자 유형의 영리함과 독립심이 있고 이웃 슬라브 민족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는 데 익숙하고 남부 독일 사람 특유의 선한 쾌활함과 무뚝뚝함에 비견될 정도로 무뚝뚝하고 단호하다.”      


비판적 차원에서, 사실 라인란트인 지방 사람들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동부·프로이센의 정서가 지배욕, 지방 특유의 완고함, 권위주의와 비민주성, 참을성의 부족으로 보였다. 특히 보편성을 내세우며 알프스산맥 너머, 곧 로마 교황청에 정신적 조직적 중심을 둔 가톨릭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동부적’ 국가관이 자라난 사회적 조건을 쾰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프로이센적인 것’ 안에는 전통적인 봉건주의적 가치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는 프로이센 중심 지역의 정체된 사회관계에 뿌리를 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이센의 관료주의, 관료 집단, 과거의 프로이센 경제가 오랫동안 그 동력을 끌어냈다.     


그런데 라인란트·쾰른이 ‘프로이센적인 것’에 대해 보인 태도는 프로이센적인 것 자체만큼이나 양가적이었다. 곧 그 프로이센적인 것에는 독일 이상주의와 더불어 프로이센의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여러 지역에서 자유, 사해동포주의, 고전교육, 역사적 특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강하게 뒤섞이게 되었다. 이에 맞서는 것이 쾰른이라는 ‘서부’였다. 쾰른에 회자되는 견해에 따르면 이는 경제와 사회의 역동적인 근대성, 세계를 향한 개방성, 처세에 능한 유연성, 영리함, 삶을 누리는 기쁨, 화려한 과시, 개성, 그리고 어느 정도 다양한 견해, 자유주의나 엄격한 완벽주의의 특징을 지닌 가톨릭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서부’는 [로마] 제국의 도시였던 과거 전통에 자부심이 있고 슈타인과 하르덴베르크가 관철한 자치권을 굳건히 보존하고자 했다. 라인란트 사람들은 [1815년 이전의] 구 프로이센보다 더 오래전부터 문명의 차원에서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괴레스는 프로이센인들에게 “너희는 리투아니아 사람들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행정적 능력, 특히 해방전쟁과 통일전쟁에서 보여준 대로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     


쾰른이 프로이센에 100년 넘게 속하면서 다양한 차원에서 교류와 혼합의 과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통합의 경향이 강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호헨촐러른 가문은 라인란트를, 특히 쾰른을 제일 먼저 손에 넣고자 했다. 결국 동부 신생 세력의 정치적 야망은 서양 문화가 넘치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여 더할 수 없이 반가운 광채를 얻었다. 19세기 전반의 낭만주의, 특히 라인 낭만주의는 프로이센이 그 광채를 누리도록 허용한 것이다. 확실히 첫 10년 동안 주저하던 쾰른 사람들은 점차로 ‘프로이센스러운 것’에 적응하게 되었다.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의 지배 아래에 놓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독일의 관세동맹에 속한 지역은 활기가 넘치는 경제 영역으로 함께 발전하여 라인적이고 프로이센적인 것의 공생이 더욱 강화되었다. 처음에는 라인지역에서 불신이 팽배했지만 결국 프로이센은 [제국] 서부지역의 경제 성장 촉진에 확실히 이바지했다. 자세히 살펴 보면 많은 쾰른시민도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쾰른과 프로이센은 서로 가까워졌다.     


철도는, 기업가와 시의원들이 침대가 있는 야간열차를 타고 대도시인 베를린에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두 도시의 관계가 점차 깊어지고 자본의 유대도 강화되었다. 진보적인 쾰른의 은행가, 공장주, 상인들은 1848년 혁명 이후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인사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폭넓은 분야를 발견하게 되었다. 베를린은 더 이상 멀리 있는 프로이센 군주와 관료제도의 요새가 아니라 기업을 운영하는 교양 있고 행정적, 정치적 발전을 생각하는 쾰른 사람들이 쾰른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다른 독일 도시보다 더 잘 아는 곳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센 행정 당국, 제국 관리나 베를린의 대기업 경영진과 은행 인사들이 점점 더 쾰른 인사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나아가 이들과의 비공식적인 협업도 가능하게 되었다. 쾰른 출신 인사나 지방 관리, 또는 정부 장관으로 일하는 많은 구 프로이센 출신의 인사들은 라인란트 지역을 지지하는 인사가 되고 쾰른의 친구가 되었다. 쾰른에서의 삶이 멕켈렌부르크나 오더부루흐보다 더 안락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시장으로 일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자산을 자주 활용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이해 충돌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자주 눈에 뜨이지만, 이 책에서 더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통합이 지배적인 추세였다. 결국 민족의 이념과 외교적 이해관계가 중요한 법이다! 현실적으로 쾰른은 프로이센의 군주와 군대의 보호 말고는 프랑스의 공격을 막아낼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에서 당한 민족적 굴욕감은 쾰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해방전쟁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 1840년의 또 다른 반프랑스 정서, 1870~1871년 전쟁 때의 애국적 근본주의 추세, 이 모든 것이 여론을 형성했다. 나중에 제국 수상에 오른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는 1870년 7월 프랑스의 선전포고 때 쾰른 철도 역사에서 체험한 잊을 수 없는 시간을 기억한다. 그 당시 쾰른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 열광은 빌헬름 1세가 군부대 앞에 섰을 때 더욱 거세졌다. “45분 동안 이어진 만세 소리가 단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대성당 주위로  [당시의 독일 군가인] ‘라인강의 파수꾼’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이러한 수준의 집단 히스테리적인 사건은 흔히 평생 지속되는 근본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쾰른에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1840년부터 프로이센과 독일 전체에서 쾰른시가 그 대성당과 더불어 프랑스에 맞선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에 라인란트 지역에서 법원 서기로 근무한 젊은 니콜라우스 베커는 1920년대까지도 심금을 울렸던 다음과 같은 시를 신문에 기고했다.     


“그들은 자유 독일의 라인강을 빼앗지 못 하리라.

그들이 탐욕스러운 까마귀처럼 지저귄다고 해도 소용없으리라.

라인강이 조용히 물결치는 그 푸른 옷자락을 걸치고 있는 동안에는,

뱃사공이 그 물결을 저어나가는 동안에는.”     


그런데 분명히 온 사방에서, 특히 라인란트 지역에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이런 광적인 애국주의에 맞서 프로이센의 군사 조직에 대한 일종의 시니컬한 반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쾰른의 카니발 행렬에서 매우 은근하게 나타났다. 이 도시의 기업가들 또한 독일 내수 시장과 맺은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양 여러 나라와 맺은 경제적 관계도 냉정하게 계산에 넣고 있었다. 분명히 쾰른의 단골손님들이 모인 식당의 식탁에서는 결코 억누를 수 없는 불평들이 쏟아져나왔다. 곧 행정부에 구 프로이센 출신으로, 특히 개신교 신자인 관리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프로이센 내무부의 정책이 확실히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았지만, 학계에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문젯거리였다. 그러나 빌헬름 1세 황제의 통치 시대가 길어질수록 쾰른에는 제국 전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유층과 식자층에서 프로이센의 봉건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어떤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는 군 복무, 학생 단체, 청년회를 통하여 더욱 촉진되었다. 프로이센에 가장 매료된 이들은 당연히 쾰른 부유층을 제일 대표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들의 눈에는 프로이센이 시민적 평등, 소수자 보호, 해방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양한 정서와 근대화 속도가 원인이 된 보이지 않는 불연속선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프로이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1918년의 붕괴가 있기 전까지는 쾰른에는 독립운동이 전혀 없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가끔 제기하는 이들은 그 제국을 떠나기보다는 개혁을 원했다. 자유주의적 제헌 국가의 정신에서 지방자치, 소수자 보호, 시민 이익의 요구를 강화하는 방법을 통한 개혁을 원한 것이다. 늘 프로이센 내부 개혁이 논의되었지만, 단 한 번도 쾰른이 프로이센 황실에 속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1830년대에 ‘쾰른 소동’으로 처음 가시화되고 1870년대의 가톨릭과 베를린 정부 사이의 문화투쟁*으로 심각해진 갈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프로이센의 종교정책이 야기한 혼란이 심화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영향을 미치고 상호불신이 깊어져서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언제든 갈등이 첨예화될 것이었다. ‘교황지상주의’, ‘제국에 대한 적대감’, ‘암흑’과 같은 저급한 개념들은 이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민족주의자, 더 나아가 반가톨릭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급격하게 퍼지게 되었다.      


* 문화투쟁[Kulturkampf, 역자주 – 1871~1878년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제국 수상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도한 정책]      


트라이취케가 문화투쟁의 새로운 영향을 받은 관점에서 쓴 《19세기 독일사》에서 라인란트는 교황이나 주교 지팡이를 상징하는 ‘목장(牧杖)의 지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쾰른시민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음흉한 ‘교황지상주의’의 음모에 늘 속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음모의 주동자는 독일 밖의 저 멀리에 있는 로마에 앉아있고, 파리 정부는 추악한 이익을 추구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독일민족주의자, 민족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선거광고에도 다시 등장했는데, 국가사회주의자, 곧 나치가 이를 제대로 이용했고 오늘날에도 역사서술에서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가톨릭계인] 중앙당(Zentrum)의 선전도 주기적으로 그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적개심은 문화투쟁에서 ‘베를린’과 프로이센 국가권력에 맞서는 수세적인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논쟁에서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당수의 자격으로 [독일 서부의] 영국 통치지역에서 한 연설에도 중앙당(Zentrum)이 주장한 내용의 고전적 요소들, 예를 들어 프로이센 관습법에서의 ‘국가 만능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1874년 3월 31일 쾰른 경찰 서장 프리드리히 레오폴드 데벤스가 파울루스 멜커스 대주교를 체포하여 ‘클링엘퓌츠’ 교도소에 7개월간 감금한 사건은 다수의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비록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프로이센 정부가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대성당의 완공을 기념하는 요란한 축제에는 대주교가 불참하고 사제들과 교회 신자들이 차갑게 등을 돌린 상태에서 거행되어야만 했다. 이는 아우구스트 라이헨슈페르거가 그들에게 ‘품위 있는 절제’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현직 프로이센 장교였던 요한 콘라트 아데나워는 친구 집 발코니에서 당시 4살인 셋째 아들 아데나워가, 흰 수염이 난 친절한 얼굴의 황제가 박수받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절대로 막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때도 그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곧바로 쾰른에서는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반가톨릭주의자들이 문화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된다.  1875년 성체성혈대축일 행렬*에 대한 국가보조금의 삭제를 베를린 정부가 아니라 시의회의 자유주의적 다수파가 의결했다. 그 자유주의자 가운데에는 반가톨릭파로 전향한 요한 함스폰도 있었다. 그로부터 50년 후에 젊은 아데나워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던 그는 베를린에 있는 AEG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성체성혈대축일 행렬[Fronleichnamsprozession: 역자주 - 가톨릭교회에서 거행하는 성체 거동 행사]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쾰른의 자유주의자들은 왕정 시대에 교통안전 문제를 핑계로, 가톨릭 교구에서 [성체] 행렬을 거행할 때 마른 잎사귀를 길바닥에 뿌리지 못하게 하도록 노력했다. 이 행렬은 오래전부터 성지 주일에 쾰른시의 로마 시대 때 세워진 지역에서 거행해 오던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쾰른의 강성 자유주의자들보다는 관대한 정부가 그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이리하여 문화투쟁은 초등학교 관리자가 종교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종교 계통의 초등학교 대신에 종파를 초월한 학교를 도입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이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도 또한 프로이센의 문화부가 탁월한 지혜를 발휘하여 그들의 시도를 저지했다.     


그러나 학교 문제는 그 이후에도 중앙당(Zentrum) 지부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정치적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에 관하여 독설이 난무했는데 무엇보다도 파당적인 언론에서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적인 신문인 《쾰르너 슈타트안자이게》는 선거 시기에 레더가 이끄는 중앙당(Zentrum) 언론의 ‘무례하고’ ‘증오에 찬’ 논조에 맞서 반박을 가했다. 레더는 자기 논조를 주로 《쾰니셰 폭스자이퉁》에 펼쳤다. 그런데 이 신문은 그 기사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투쟁은 분명히 특히 쾰른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 정부, 그리고 프로이센의 여러 지방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문화적 개신교주의에 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국가와 자유주의적 개신교에 대한 불신과 전투적이며 방어적인 근본주의적 태도가 그 이후에 쾰른의 중앙당(Zentrum) 지부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프로이센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운동’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열린 제국의회에서 중앙당(Zentrum)은 보수정권을 지지했다. 그러자 쾰른 중앙당(Zentrum) 지부에도 ‘한심한 복합적 요소들’이 섞이게 되었다. 페터 라이헨슈페르거는 이를 독일 중앙당(Zentrum) 전체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가톨릭이때때로 프로이센과 제국에서 ‘희생자’가 되었기에 그들은 제국과 프로이센에 대한 충성을 지속해 나타내어야만 했다.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김에 그들은 국가의 내적 형태를 그들의 상황에 따른 이익에 맞추어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제국은 그들의 모든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쾰른의 교회 지도자들도 프로이센에 충성했다. 비록 그들이 교회의 권리와 자율성을 끈질기게 보존할 줄 알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될 때, 일단 자기 의견을 제시한 다음에는 곧바로 베를린 정부와 갈등을 벌이지 않는 생존방식을 찾으려는 자세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20세기 초반부터 그들은 쾰른의 주교 선출에서 자기 활동 권한을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받아들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서품된 강력한 애국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인물들인 하르트만 주교와 슐테 주교를 내세워 전시와 전후 시대의 위기 때 제국 정부와 프로이센 정부에 의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라인지역, 특히 쾰른의 가톨릭계가 철저히 반프로이센적인 근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층적이다. 중앙당(Zentrum)과 더불어 쾰른의 고위성직자들도 이미 문화투쟁 때부터,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그 투쟁이 종료된 이후에 호헨촐러른 가문과 그 가문의 고위직 관리들보다는 배타적인 자유주의자, 그리고 배타적인 데다가 무신론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더 위험한 적으로 인식했다. 호헨촐러른 가문과 그 가문의 관리들은, 국가를 떠받들며 전반적으로 오히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가톨릭 신자들과 그 조직을 확실히 애호하게 되었다.      


독일의 가톨릭은 구조적으로 소수파에 속하고 이는 쾰른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속으로 두려워하며 미래를 관망하고 있었다. 곧 프로이센에 보편 선거권이 도입되면 가톨릭 사제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반성직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다수파를 장악하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가톨릭에게는] 보수적이며 개신교파인 황실이 이러한 상황에서 거의 연합군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가톨릭 측은 이러한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데 쾰른의 가톨릭계는 정치적으로 전혀 일치를 보여주지 않았다. 정치활동을 하는 가톨릭 신자가 모두 중앙당(Zentrum)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은 자유주의 진영에 속했고, 또 다른 이들은 아예 지지하는 당이 없었다. 아데나워의 전임자였던 막스 발라프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그는 1918년 혁명 이후에야 정당에, 그것도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가입했다. ‘쾰른다운’ 것은 ‘가톨릭다운’ 것이며, 이는 곧 ‘중앙당(Zentrum)’에 속하는 것이라는 등식은 전혀 맞지 않았다. 쾰른시민의 5분의 1 정도만 개신교이고 2%가 유대교 신자라는 현실에도 그랬다. 중앙당(Zentrum) 내부에서조차도, 심지어 중앙당(Zentrum)과 게레온슈트라쎄에 거주하는 대주교 사이에서도 특히 기독교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경제 정책과 사회정책에 관한 논쟁에서 어느 편에 들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사회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를 이해하면서 사회적 결정 요인들의 필연적 작용력을 확신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프로이센과 프로이센이 이끄는 독일제국에 대한 쾰른과 그 가톨릭 신자들의 다양한 색채의 변화무쌍한 태도를 적확하게 평가하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실 여러 주요 인사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들의 [현실] 정치는 그들에 대한 교과서적인 지식에 근거한 편견을 지닌 이들을 깨우쳐 주는 데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젊은 아데나워가 성장하며 자기 앞길을 찾던 시절에, 완전한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라인란트 지역의 이 대도시는 온전한 개성을 지닌 하나의 프로이센 도시였다. 쾰른에서는 베를린이나 황실의 주요 도시들과는 다르게 시민들이 이론의 여지 없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독일과 서유럽에서 모두 그러하듯이 시민성이라는 일반 개념에는 더 상세한 사회적 스펙트럼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통상적인 유형으로는 생생하며 긴장 넘치는 다양성을 다 담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민적’이지 못한 계층을 구분하는 것은 그 당시가 그 이후의 시대보다 훨씬 쉬웠다.     


어느 사이에 상류층은 여러모로 귀족과 같은 생활양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표 격이 되는 인물들은 자기 돈으로 어떻게 해서든 귀족의 칭호를 얻고자 했다. 그럼에도 귀족과 부르주아는 완전히 구분되는 별개의 세계에 속했다.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마담 네뱅 뒤몽의 차가운 태도이다. 시종 의전관이었던 뒤몽은 황제 알현을 위하여 늘어선 줄을 보고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폐하, 여기까지가 귀족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날카롭고 자신감 넘치며 커다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폐하, 여기부터는 돈이 들어옵니다.”  

    

사실 쾰른 상류층의 많은 이들은 그 당시에 오펜하임, 기욤, 다이히만, 슈니츨러와 같이 귀족이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귀족의 족보 없이도 사회적 피라미드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 부를 의식적으로 과시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출신 성분과 돈이 더 강하게 결합되기는 했다. 그러나 쾰른에서 사람들은 돈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적 피라미드의 기저에 놓인 이들에게는 계급 차별이 더 심했다. 1918년의 선거법 개정이 있기까지 프로이센에는 사람들을 3개 계층으로 나누는 차별적인 선거법이 존재했다. 여기에서는 먼저 시민과 비시민이 구분되었다. 그리고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도시에 자기 집을 소유한 이들이나 연소득 400탈러 이상인 이들에게 주어졌다. 아데나워가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 다니던 1891년에는 286,000명의 쾰른 주민 가운데 16,683명만이 선거권을 지녔다. 제재를 통한 이러한 정치적 차별은 그나마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 당시 쾰른 주민의 절반이 되는 여성들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아예 투표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자녀들의 숫자가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이론적으로 선거 연령에 속한 남자는 대략 6만에서 7만 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3분의 1 또는 5분의 4 정도가 차별당하고 시민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들로 농촌에서 올라온 일용직 노동자, 가정집 또는 공장의 하인이거나, 가내수공업자들이었다.     


또한 3개의 계층별 선거권은 [그 당시] 시민계급이 전혀 단일한 사회 계층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의회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계급은 1891년 기준 겨우 567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은행가, 공장주, 상인, 고위 법률가, 고위 관리, ‘연금 생활자’들이었다. 제2계급은 2,858명의 쾰른 남성이었다. 여기에는 상당히 높은 시민계층에 속하는 상인, 공장장, 법률가, 의사, 고위성직자, 편집장이 있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13,258명은 소시민으로 불렸다. 이들은 중소기업 사장, 중하위 관리나 직원, 빌헬름 황제 시절에 급여가 상당히 많은 전문직 노동자가 있었다. 전체적인 부가 증가함에 따라 하층민들 가운데 수천 명이 소시민이 되었고, 다시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상류층에 올라서기도 했다. 계층 상승에 이르는 직업은 한편으로는 산업경제에 속하는 직업과 무역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을 받은 모든 시민이 가지는 직업이었다. 여기에는 고등교육과 대학 교육이 요구되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중하위 관리 집안의 자녀들이 교육을 통해서 시민계급으로 올라가거나 시 행정이나 국가 행정 분야의 전문 엘리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 해당 되는 사람이 바로 아데나워였다.      


당시의 시민계층 간의 지위 차이는 그 이후보다 더 세분되어 있었다. 사회의 정상에 속하는 이들은 으리으리한 외양과 넓은 계단이 있고, 겨울이 되면 야회가 열리는 귀족적 살롱이 있는 궁전 같은 저택에서 살았다. 여름에는 가능한 경우 고성을 개조하거나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은 화려한 궁전을 별장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 오펜하임이 소유한 본 근처의 코멘데 라머스도르프, 슐렌더한, 바쎈하임에 있는 것이 유명했다. 기욤이 소유한 저택은 오버베르기셴의 말거스도르프 성이다. 루이스 하겐은 1890년대부터 쾰른 부르주아의 정상에 확실히 올라서는 데 성공하여 20년 동안 최고의 가문을 이끌었는데 비를링호펜 농장의 성에서 살았다. 그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무실 집기의 검소함과 사회적 성공의 화려함이 잘 대비되었다.  

    

쾰른 대자본가들의 생활양식은 분명히 부유한 시민계층의 상당히 많은 가정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재산을 어느 정도 모은 시민들은 시대의 유행을 따라 구시가에 새로운 집을 짓거나 도시 주변의 상류층이 사는 지역에 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적당히 돈이 있는 임차인들은 그들이 가진 것에 못지않게 좋은 집에 살면서 대출금을 갚아나갔다. 그리고 도시 근교의 신흥주택가도 인기가 급상승했다. 예를 들자면 쾰른 남부의 마리엔부르크와 서부의 린덴탈이 그랬다. 이러한 대저택의 상류층다운 생활양식은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다. 대부분 자녀가 많은 이러한 집안의 가사노동에서 2~3명의 하녀가 ‘주인마님’을 도왔다. 이러한 방식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아데나워 시장의 집에서 3명의 하녀가 일한다는 것은 굉장한 사치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그의 지위에 있는 시민들에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19세기 말까지도 그리 많지 않았던, 돈이 넉넉한 이들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려고 기꺼이 빌라를 구매하거나, 연금 생활을 롤랑에크나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하였다. 이곳은 라인강이 가장 부드럽게 흐르는 낭만이 넘치는 지역이었다. 20세기 초반부터 부유층은 여행을 가가나 휴양지를 즐겨 찾았다. 해마다 바트가슈타인이나 바트메르겐트하임, 또는 뷜러회헤로 여행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최소한 신혼여행으로라도 블루멘리비에라, 플로렌스, 베니스를 찾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베르너오버란트나, 발리스, 슈바르츠발트나 북해 해수욕장으로 여행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아데나워가 장거리 휴가 여행을 다닌 것은 그 당시의 관습에 충실한 것이다.     


쾰른에서 오래전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사교 생활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단체회관이 사교의 중심지로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중 가장 화려한 것이 국립 공연장이며 사교회관이었던 귀르체니히였다. 이 건물은 19세기 중반 도시건축 관리였던 라쉬도르프가 최대한 화려하게 재건축한 것으로 그 내부는 햄튼 코트나 웨스트민스터 홀을 라인강 주변에 재현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영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우구스티너플라츠에는 ‘사교 모임’을 위한 카지노도 있었다. 이곳의 정자와 구주희 경기장에는 손님들로 넘쳤다. 유명한 합창단이 소속되고 쾰른 사투리를 쓰는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는 ‘볼켄부르크’도 있었다. 프리메이슨 회원들은 아포스텔른 수도원의 로겐하우스에 모였다. 그들을 위해서는 로게 미네르바 레나나에 구주희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독서클럽이나 가톨릭 청년회관을 다녔다. 이 집은 청년회 지도신부인 아돌프 콜핑이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 곧 부유층에 속하는 시민과 소시민에 속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 시기에 쾰른 카니발은 제국 전체에서 유명하였다. 많은 이들이 오래된 전통으로 알고 있는 이 카니발은 사실 1823년에 쾰른의 카니발 전통을 다시 회복시킨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행렬, 토론, 쾰른 사투리 지킴이가 되살아났다. 이 카니발에서는 누구보다도 부유층 시민들이 축제를 벌이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이 카니발에서는 풍자적이지만 그 깊은 내면에는 매우 진지한 ‘kölscher-Alaaf-Kult’, 곧 ‘쾰른식 인사 예식’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예식의 대단한 인기는 그 어떤 정치가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그 카니발에서 나오는 풍자극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그러하였다. 아데나워 시장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외세가 토박이 쾰른 사람들의 자의식을 더욱더 강하게 자극할수록 쾰른 사람들은 그들의 오래되거나 새로운 사투리의 보존에 더욱 힘썼다. 그 사투리는 그 풍자와 감상적인 특성으로 쾰른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쾰르너 헤네쉔’에 가서 ‘과부 클로츠’의 목각 인형극을 보거나 밀로비치 극장에서 공연을 즐겼다. 쾰른의 공무원들은 ‘구 쾰른 향우회’를 세우고, 고문관이었던 파스텐라트는 [일종의 시 경연대회인] 독특한 ‘꽃놀이’를 도입하였다. [헤네쉔 극장의 목각 인형극 주인공인] 튀네스와 쉘은 쾰른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빌리 오스터만의 노래 곡조를 흥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유서 깊은 [쾰른] 지방 문화유산의 일부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정부가 주도한 오락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안락하고 전체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만족한 시민계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시민들은 산업 시대의 커다란 변화를 다음과 같은 생활 철학으로 마주하였다. ‘Et hät noch immer joot jejange.’ 이는 쾰른 사투리로,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 살아왔다’는 뜻이다.     


단체 내부, 특히 가문 사람들과 가문들 사이에서는 이미 다양한 시민계층이 섞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아데나워 가문이 혼인을 통해 관계를 맺은 베르크하우스, 바이어, 발라프, 발렌, 카르다운스 가문의 직업은 그 당시 쾰른의 상류층에 속하는 많은 재산과 높은 학력을 지닌 계층이 흔히 가진 것이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도시 건축관인 요한 페터 바이어 이외에 많은 법률가(공증인, 변호사, 법관, 법학자), 성직자, 수도회 장상, 사강사, 예술상이 있었다.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 의미는 중요한 것이었다. 외부인들은 이른바 ‘쾰른 사단’만을 볼 뿐이지만,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대가족 안에 상호 공감대와 더불어 서로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얼마나 많이 넘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잘 연출된 가족사진에 잘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러한 가문에 태어나거나 그 가문과 혼인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독하게 살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 가운데 예술가나 지식인으로서 의도적으로 사회적 ‘아웃사이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도 자기 사회적 기능이 있었다. 그는 세례식, 혼인식, 커다란 생일잔치, 장례식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실하고 사교성이 있는 사람은 이 가족적 유대 안에서 자신을 도울 사람을 반드시 만나기 마련이었다. 크게 확대되고 있는 사회 안에서 이 시민적, 가족적 유대도 라인란트와 루르지역에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쾰른의 토착적 특성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대가족의 의미는 상류층을 훨씬 넘어서서 소시민이나 노동자 계층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들의 족보가 문서로 확정된 것은 아니어도, 아데나워의 부모 집안도 이와 같았는데, 그들은 상당히 노력을 기울여 조상의 계보를 찾아 족보를 채웠다. [사회적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소시민 가정은, 많은 경우에 먼 시골 출신이기에 라인강의 대도시에 여러 세대에 걸쳐 각인된, 쾰른 주변 저지대, 본 지역, 산간 지역에 퍼진 농촌과 소도시에서 맺은 관계도 함께 가져왔다. 피상적 면 만 보는 관찰자의 처지에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대중사회에는 뿌리 없는 노동자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들도 많은 연줄이 있고, 붕괴된 사회조직과는 거리가 멀며 여전히 시골과 유대를 맺으며 여기에서 최소한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았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겪는 쾰른 사회에서 이들은 가족적 유대, 단체, 직업적 지위와 그 역할만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결속을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는 19세기 후반의 쾰른에서는 바로 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곳에서 눈에 뜨였다. 아주 오래된 성당도 있었다. 그 담장은 비록 이교도의 신전에 세운 것은 아니어도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은 것이었다. 로마 후기 시대에 상트우르술라 성당 주변에서 전설적인 11,000명의 처녀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지도자는 브르타뉴 왕국의 공주인 우르술라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트게레온 성당의 역사는 콘스탄틴 대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타 마리아임카피톨 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의 궁전이 있었다. 상트쿠니베르트 성당은 7세기에 선원들의 수호성인인 클레멘스 성인이 축성한 교회가 서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오토넨 왕가가 세운 것으로는 상트판탈레온과 상트안드레아 성당이 있다.      


중세 시기 전체에 걸쳐 이 모든 성당의 원래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 건물들은 개축되어 기독교 건축의 새로운 보화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쾰른 대성당, 상트체칠리엔 성당, 상트아포스텔른 성당, 상트게오르그 성당, 상트세베린 성당이 있다. 이 모든 성당과 또 다른 많은 성당에는 귀중한 보화가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보화인 석조 작품, 목조 작품, 미사 제구, 성화들은 제대 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빛으로 생기가 넘친다. 새 시대에 많은 확장 공사가 있었고, 그림에 덧칠하고, 더 낫게 만들려다가 망치기도 하였다. 쾰른에서 사람들은 전통에 충실한 신앙심과 성당에 시대정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늘 방황하였다. 프랑스의 침략 시대에는 많은 것이 소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다른 독일 도시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쾰른에서 교회는 수백 년에 걸친 그들의 전통에서 나온 석재와 예술로 표현된 보화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의 통치 시대 이후의 전후 재건 시대와 통합 운동은 대중신심을 더욱 강화하고 깊게 하였다. 19세기 쾰른에서는 다양한 종교적 노선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성인 공경, 대중 선교, 꼼꼼한 형식적 기도문, 엄격한 가정 윤리, 일상생활의 양심적인 성화를 통하여 확실히 [가톨릭교회의] 교황지상주의 파벌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젊은 아데나워가 자라난 교회는 반근대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지만 가장 근대적인 집단 심리 통제 수단으로 신자들을 동원할 줄 알았다.     


쾰른은 1840년대부터 단체 중심 가톨릭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를 위하여 쾰른 근처의 케르펜에서 태어난 아돌프 콜핑 신부는 청년 지도신부로서 다양한 구호기관을 설립하고 대중 잡지도 발간한 인물로서 대성당 보좌와 미노리텐키르케*의 주임으로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활동했다. 칼 마르크스가 세운 계획인 정치적 혁명화에 맞서 콜핑 신부는 양심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뿌리를 상실할 위험에 놓인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공동체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동체의 주요 요소는 가족, 미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톨릭 단체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이 단체에서는 평신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콜핑 신부,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이렇게 하여 쾰른을 사회적 가톨릭교의 보루로 만들었다. 1870년대 이후 쾰른은 또한 [가톨릭] 중앙당(Zentrum)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880년대에는 가톨릭 노동자 운동도 결성되었다. 그 지도자는 상트마르틴 성당의 신부 요한 페터 오버되르퍼였다. 이미 1887년에 쾰른의 가톨릭노동자협회의 회원은 3,500명에 이르렀다.     


* 미노리텐키르케[Minoritenkirche, 역자주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소속 교회]     


1890년대 말은 기독교 노동조합의 설립에 최적기로 보였다. 그러나 이 노조는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노조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노동조합이 적대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당(Zentrum)의 시민 세력과 주교들 가운데 보수적인 이들이 이들을 의심하였다. 이 주교들은 노조가 원칙적으로 교파를 초월하려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다. 브레스라우 교구청의 코프 추기경은 독일 주교들 가운데 보수파의 수장으로서 ‘서양의 오염’에 관한 험담을 하였다. 어찌 되었든 가톨릭 노동자 계층은 채 20년도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상당히 조직화 되었다. 1913년에 들어서 쾰른에 있는 기독교 노동조합 동부 지파의 회원은 11,000명에 이르렀다.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추구했던 활동적인 쾰른·뮌헨·글라드바흐 노선은 쾰른에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대주교의 지지도 받았다.     


성체성혈대축일이 되면 쾰른의 가톨릭 신자들은 연례행사로 대규모의 행렬을 거행하였다. 시 참사회 국가자유주의 진영의 지도자였던 법률고문관 베른하르트 팔크는 유대교 신자이지만 쾰른 사람으로서 가톨릭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친교를 유지한 인물이기에 그 행렬을 [다음과 같이] 인상 깊게 기억했다. “‘관대한’ 쾰른 이외의 독일의 그 어떤 다른 지역에서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열광적인 화려함이 넘치는 대규모 행렬에서 가톨릭 학생회, 공무원회, 상인단체, 청년회, 노동자회, 학술단체, 청년 클럽, 청년단체, 어머니회, 미혼여성회, 그리고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폴란드인들도 현수막과 깃발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힘과 세계적인 영향력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 것은 1909년의 세계성체대회였다. 이 대회로 수많은 추기경,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이 쾰른에 모여 쾰른 대성당에서 화려한 개막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톨릭교회는 쾰른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 신자들을 조직하고, 이끌고, 훈련하고, 통합시켰다. 물론 교회 내부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다. 1870년대 초반에 구가톨릭교회*는 독자노선을 택하였다. 노동자 논쟁은 중앙당(Zentrum)과 가톨릭교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본대학교 신학부가 주도한 신학적 근대주의가 쾰른에서도 여론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전체적으로는 쾰른 가톨릭교는 개혁적이든 보수적이든 통합적이고 안정을 가져오면서 시민 시대의 활동력에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쾰른에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던 이 시기의 많은 악과 타락은 쾰른의 가톨릭계의 영적인 본질을 통하여 비판되고, 완화되고, 교정되었다.     


* 구가톨릭교회[Altkatholiken, 역자주 – 가톨릭교회의 진보적인 변화에 반대한 극보수적인 파벌이 따로 세운 가톨릭교회]     


사실 자의식이 강한 쾰른의 유산계급에 속하는 시민들은 물질주의만이 아니라 후하게 기부하는 기쁨을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황제 시대의 쾰른 문화는 시민적 후원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기부에서 선행을 통하여 대중의 존경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아도취 가운데 하는 이러한 후원만큼 가장 고귀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은 없다.     


매우 부유한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들의 자산 일부를 여러 재단에 기부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 지원하는 기쁨은 단순히 크게 소문난 몇몇 커다란 기부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구스타프본메비센 재단은 상업전문학교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 학교를 바탕으로 1919년 쾰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남미의 동물 가죽 교역으로 부자가 된 요한 하인리히 리히아르츠는 몇 년에 걸쳐 90만 마르크를 기부하여 작은형제회 교회에 그의 이름을 딴 발라프-리히아르츠 박물관의 건설하는 데 필요한 120만 마르크라는 엄청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였다. 그 당시에는 크고 작은 재단들이 계속 설립되었다. 이 재단들은 박물관, 음악 후원, 자선, 교육 기관, 건설협회, 대성당 건축회, 낡은 교회의 복구, 극장, 기념물, 동물원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많은 시설은 부자들이 자기가 사는 도시의 영광과 복지에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다. 부유한 도시들인 쾰른,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브레멘, 뉘른베르크, 단치히 시민들의 기부는 당시에 절대군주들과 품위 있는 경쟁을 한다고 의식하였다. 그들은 절대군주들의 주요 도시들인 베를린, 드레스덴, 뮌헨, 슈투트가르트, 칼스루에, 다름슈타트, 바이마르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에 걸맞게 이러한 능력 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또한 그들의 강력한 정치적 입김은 쾰른시의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3개 계층별 투표권 제도를 도입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쾰른시는 1800년대 후반에 독일 미술품 수집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대성당 참사 알렉산더 슈뉘트겐은 구쾰른 출신의 몸집이 큰 인물로 예술품 수집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에서 귀중한 기독교 예술품을 수집하였다. 1910년 그는 명예시민이 되었고 박물관의 명칭은 그의 이름을 땄다. 또 다른 위대한 수집가는 아돌프 피셔 교수였다. 그는 쾰른시에 동아시아 박물관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19세기는 역사적 자의식, 수집, 보존의 시대만이 아니었다. 이 세기는 무엇보다도 독일 음악의 시대였다. 그래서 황제 시대의 쾰른시는 무엇보다도 음악 도시로 유명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쾰른시민들은 여러모로 음악 애호가가 되었다. 1930년대까지 귀르체니히 교향악단을 세우고 니더라인 음악 축제를 시작한 다음부터 그러하였다. 지휘자 페르디난트 힐러는 음악학교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들을 이 도시로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베르디는 쾰른에서 1873년 ‘레퀴엠’을 지휘했고, 샤를 구노가 쾰른을 방문하였고, 요하네스 브람스는 1874년에는 승리의 노래를 가지고, 1879년에는 교향곡 2번을 가지고 귀르체니히를 찾았다. 그리고 곧이어 젊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멋진 피아노 연주의 밤을 마련하였다 그의 생애 마감에 이를 때까지 늘 그랬듯이 이때도 많은 여성 팬 무리가 그를 따랐다.   

  

쾰른의 음악계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870~1880년대에 리하르트 바그너를 찬미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갈라졌다. 바이로이트의 반유대주의자를 상종하지 않으려 한 힐러는 귀르체니히에서 바그너 음악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하였다. 비평가들은 그를 거부하였고 쾰른은 바그너 음악에 대한 보수적인 반대자들의 보루로 여겨졌다. 그러나 음악적 시대정신을 이길 장사는 없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열정적인 바그너 오페라 애호가였다. 바그너의 팬들은 글로켄가쎄 거리에 있는 시립극장에 모여 ‘마이스터싱어’를 들으며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니벨룽의 반지’는 결국 전막이 상연되지 못하였다. 관객의 일부가 소동을 벌인 것이다.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바그너의 음악이 쾰른의 극장 공연 프로그램을 독차지하였다. 귀르체니히에서는 힐러의 뒤를 이어 인기 있는 후계자인 프란츠 뷜너가 지휘하였다. 이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음에도 관객은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다. ‘죽음과 변용’의 리허설 때 두 명의 여가수가 특이한 음조에 압도되어 기절하여 실려 나가기도 했던 것이다. 쾰른 음악 생활의 이 위대한 시기에 쾰른시는 자체적인 시립 교향악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이 교향악단은 곧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쾰른의 예술계와 문화계를 살펴보면 소중히 간직해온 오래된 것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다양한 열정적인 관심이 있었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그 가치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며 논쟁을 벌였다. 이는 후세가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별도 연맹 전시회’라는 커다란 폭탄이 터졌다. 마티스, 블라맹크, 피카소, 몬드리안, 그리고 ‘디 브뤼케’와 ‘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에 속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다시 한번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많은 이가 단순한 화단의 혁명과는 다른 어떤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에드바르 뭉크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여 주소서.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나이다.” ‘과거 세계’는 쾰른에서도 그 종말을 맞이하였다. 쾰른에서 커다란 축제로 기념하던 시민 시대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저물어갔다.     

아데나워가 성장한 도시가 시민정신의 특징을 지녔다고만 여긴다면 이는 당연히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그 당시 쾰른은 어떤 사회적 상황의 시각에서 그러한 발전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나는 도시였다. 재산과 학식이 있는 시민들의 영향과 존재 방식이 비판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1914, 1918, 1923, 1933, 또는 1945년의 시각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수십 년 동안의 긴장과 어긋난 발전이 매우 파국적인 것이었다는 틀린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황제 시대에 종합적이며 균형을 이룬 이성적 발전 능력이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쾰른은 진보의 최첨단에 있었던 것이 자명하기에 시대적, 내적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당시 독일과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 [쾰른도] 산업 시대의 사회 문제가 여전히 미결인 채 남아 있었다. 황제 시대의 쾰른 사회는 계급사회였다. 구스타프 메비센이 쾰른의 금융가에서 시민적 자유주의의 정신과 방법으로 도시 근대화를 시작했을 때 1840년 도이츠 지역의 카세마텐에서는 아우구스트 베벨이 프로이센 하사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쾰른의 유산계급이, 유서 깊은 부자든 신흥 부자든, 자기 부를 자랑할 생각으로 자신을 ‘돈 많은 귀족’이라고 뽐내고 있을 때, 아돌프 콜핑 신부는, 착취당하고,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이고, 형편없는 급여를 받거나 아예 실업자 신세에 있는 젊은 육체노동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술과 범죄와 무신론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자기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이센 관료층에는 부유한 관리, 법관, 부장검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데나워의 아버지와 같은 관청 서기도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여섯 식구를 잘 먹여 살리고 자식들이 잘 자라도록 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공무원으로서 라인강의 동안과 서안의 기업에 다니면서 경기 변화에 철저히 종속된 노동자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신도시에는 부유한 시민계층이 사는 화려한 거리가 있었고, 뮐하임, 칼크, 폴, 니페스, 에렌펠트 지역에는 산업노동자들이 사는 연립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를 바라보든 계급간의 대립, 엄청난 수입 격차, 사회정책 차원의 균형이라는 중차대한 과제, 빈민구호 문제뿐만 아니라, 교통, 주택건설, 교육 문제도 있었다!    

  

이처럼 그 당시 시청이 처리해야 할 도시 정책 차원의 과제는 엄청났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한 논란은 모든 자유로운 공동체에서 지방정책과 관련해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세 계급으로 나눈 선거권 제도를 통하여 1880년대 말까지 자유주의자들이 시의회에서 다수파를 차지하였다. 쾰른의 자유주의도 자유주의자들이 잘 나갈 때도 있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음을 모두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를 드러냈지만,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의 시의회 파벌로서 협력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세계관의 차원에서 위험한 적인 중앙당(Zentrum)이 부자들과 한편이 되는 노선을 확실히 따르도록 계속 몰아갈 수 있었다. 과세 등급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은 부동의 1등급이었고 중앙당(Zentrum)에 속한 이들은 3등급이었다. 과세 등급에서 2등급의 자리를 놓고는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1918년 혁명 이전의 30년 동안은 중앙당(Zentrum)이 전체적으로는 다수파를 차지하였다.   

  

독일사회주의민주당, 곧 사민당(SPD)은 복권된 다음에도 빌헬름 시대의 지방 정치에서 전혀 눈에 뜨이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세 계급으로 나눈 선거권 제도였다. 또 다른 이유는 중앙당(Zentrum)의 조직력이었다. 중앙당(Zentrum)은 쾰른에 강력한 사회주의 파벌을 지니고 있었다. 쾰른 가톨릭 신자의 선거 행태는 사회적, 경제적 처지보다는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앙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을 통하여 더욱 잘 조직화하였지만, 산업노동자 계층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제대로 정치적 압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라인강 동안의 대규모 산업단지가 1914년에야 비로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과 중앙당(Zentrum)은 서로 한편으로는 세상에 잘 알려진 세계관 논쟁을 벌일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이 쾰른의 복지와 성장에 주력하도록 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다 보니 서로 논쟁을 되풀이하는 분야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만 교육제도에 관해서는 계급적 반목이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배척하려고 노력하였고 이에 중앙당(Zentrum)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원칙에 관한 논쟁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쾰른시가, 사망한 로스차일드 고등법원장의 유산을 인수하면서 100만 마르크라는 엄청난 돈을 받았지만, 화장장을 지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아데나워가 쾰른의 운명을 책임질 때까지 이어졌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사회민주주의자들[사민당(SPD)을 의미함]이 화장을 옹호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보았지만, 중앙당(Zentrum)은 회장을 철저히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 자유주의자들[Liberale 역자주 – 이 당시는 현재 자민당(FDP)의 전신인 국가자유주의 정당(Nationalliberale Partei, NlP)을 의미함]     


당연히 물질적 이해관계가 정당정치의 전선을 자주 형성하였다. 특히 선거에서 격렬한 대결의 대상이 된 조세 등급에서 제2등급에 관련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잠재적 고객은 당연히 높은 소득세의 부담을 지는 자본자산가였다. 반면에 중앙당(Zentrum)은 소형 주택에서 살면서 중앙당(Zentrum)에 동조하는 자산가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수공업자들의 이해가 관련되는 경우 중앙당(Zentrum)의 시의원들이 가장 선두에 섰다. 이에 반하여 상공회의소가 제시하는 요구 사항은 초기에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중앙당(Zentrum)도 때로는 시민권의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다만 이러한 노력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는 경쟁자들을 시청에 불러들일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정도에서만 이루어졌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시의 인사정책에 관한 줄다리기였다. 여기에는 교육 기관도 해당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중앙당(Zentrum)이 이 문제를 얼마나 탁월하게 처리했는지를 분통한 마음으로 늘 되풀이하여 목격하여야만 했다. 자유주의자인 팔크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보통은 매우 친화력 있고 상냥한 중앙당(Zentrum) 지도자도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차갑게 변했다. 그 지도자는 이 자리에 자기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그 자리를 놓고 [중앙당(Zentrum) 지도자가] ‘연합회 회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KV*의 간부 직함이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에게 고타*가 주는 의미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 KV[역자주 - 1861년에 수립된 독일어권 가톨릭학생회총연합(Kartellverband katholischer deutscher Studentenvereine)를 지칭하는 속어]     


* 고타[Gotha, 역자주 – 독일귀족외교관명부(Gothaischer Hofkalender)를 지칭하는 속어]     


* [역자주 – 다시 말해서 가톨릭 학생회라는 ‘시시한’ 가톨릭 조직의 간부가 정통 귀족 외교관 학교 출신의 엘리트 수준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중앙당(Zentrum)이 주장했다는 의미임]     


이렇게 정치적 논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1870년대의 문화투쟁에서 있었던 논쟁을 한번 들여다보면, 1848년 혁명부터 1918년의 혁명에 이르는 70년에 걸친 쾰른시의 역사에서 당파 싸움은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였다는 것을 즉각 발견하게 된다. 이의 상당 부분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대부분 파악해낸 훌륭한 시장들의 수완 덕분이다. 시장들은 처음에는 미적거리던 시의회의 다수파를 근대화 사업에 찬성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쾰른은 19세기 중반부터 이른바 ‘시장직무법’을 제정하였다. 1856년의 라인 시 조례는 지방정부가 이원적인 ‘시정법’ 제도든지 아니면 시장직무법을 선택할 자유를 허용하였다. 쾰른시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이는 프랑스식 시정 체계의 요소를 지닌 것으로 쾰른이 프랑스에 복속되던 시절에 경험한 것을 취합한 것이다. 이러한 지방자치법에서 시의 우두머리와 3개 계급으로 나눈 투표권 제도를 통하여 선출된 시의회의 관계는 여러모로 입헌 군주와 의회의 관계를 닮았다. 12년 임기로 선출되는 시장은 결국 행정 수반이 된다. 그는 전업 의원들에게 정해진 고유한 업무 범위를 지정해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은 실제로는 결국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의회에 맞서 시장은 단독으로 시정을 대표하였다. 시장만이 시의회의 모든 결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시장은 본래 시정을 감시해야 하는 시의회를 이끌었다. 이 또한 시장에게 추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당시 시장은 필연적으로 기업가의 역할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쾰른시가 더 많은 기업적 과제를 수행해야 할수록 경제 관리자로서의 시장의 의무와 권리도 무거워졌다. 시장은 도시 관리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했다. 먼저 1873년부터 가스 시설을 설치하고, 이어서 전기 시설, 여기에 수도 시설과 하수도 시설을 마련해야 했다. 교통 문제는 시장의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고 단계별로 그의 책임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소와 항만은 지속적인 근대화가 필요하였다. 새로운 다리의 설계와 건설도 그의 책임이었다. 1899년 쾰른시는 그때까지 ‘쾰른 전차 익명회’(Societe Anonyme des Tramways de Cologne)가 지닌 마차 운영권을 넘겨받고 이를 결국 전기 마차로 바꾸며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필수적인 교외 선로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장은 많은 복잡한 경제 사업을 자기 지휘 아래에 놓고, 동시에 기존의 폭넓은 전통적 업무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교통계획, 건축, 의료와 위생, 구호, 교육시설, 예술과 교육이 포함되었다.     


입헌 군주가 자기 국가와 맺은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장은 자기 시를 대외적으로 대표하였다. 이는 프로이센의 모든 관련 장관, 베를린의 제국 정부의 장관, 라인지역의 지방장관, 이웃 지역의 지방장관들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협상을 의미하였다. 쾰른 정도의 주요 도시의 대표로서 그는 프로이센 귀족원의 위원이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지방의회의 위원이 되었다. 또한 지방 대표 단체들에서 쾰른을 대표하였다.    

 

쾰른시 수장의 기업적 업무에서 외부 접촉의 수행 또한 늘어났다. 근대적 대도시에 중요한 쾰른 지역 기업과 연합회, 은행과 보험회사, 민간 교통업체, 건설회사, 에너지회사, 그리고 수많은 기업과 접촉하였다. 그의 책임에 놓인 이러한 직무의 수행에서 그는 두 단체의 감시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국가 감독관청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회였다. 그러나 노련한 시장은 자기 행정 권한을 보존할 수 있었다.     


감독관청은 지속적으로 규율의 적용, 촉구, 제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시가 자율적인 기관으로서 복잡한 업무를 주도적이며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바랐다. 시의원은 동등한 권한을 지녔고 관할 영역이 광범위하여 많은 것을 다루지만 모든 결정이 점차 복잡해지기에 대부분 업무를 시 행정의 기획과 계획과 추진에 맡겼다. 여기에 더하여 시장의 임기가 최소한 12년인데 비하여 시의원의 임기는 6년이었다. 그리고 그 누가 거미처럼 도시행정이라는 그물 위에 앉아 많은 정보를 활용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파벌과 이익집단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책략을 동원하여 언론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노련한 시정의 우두머리를 공격할 수 있었겠는가? 시장을 통제하려는 시의원은 늘 존재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 이후 빌헬름 베커 때부터 시의 정상에 있는 인물들이 자기 존재감을 부각하게 시키려는 욕망은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장이 거의 군주와도 같은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은 아데나워의 작품이 아니다. 1886년부터 1907년까지 과단성 있는 업적으로 시장의 업무를 수행한 사람은 바로 빌헬름 베커였다. 그가 시장이 임명될 때만 하여도 19세기 중반에 불붙은 에너지가 모든 우려를 불식시킬 것인지는 제대로 예측할 수 없었다. 쾰른 성곽은 이미 무너졌지만, 확장과 근대화에 관련된 모든 과제는 여전히 해결책이 필요하였다.     


1956년 미국 출신 벨기에 사업가인 대니 N. 하이네만은 자기 친구인 아데나워에게 쓴 장문의 편지에서 그 당시 쾰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저는 1890년대 초반 처음으로 쾰른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쾰른은 저의 느낌으로 대도시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지방 도시였습니다. 대주교, 본에 있는 대학교, 귀르체니히, 카니발, 라인강, 라인강의 선박 운항, 커다란 철도 허브, 은빛 로엔그린의 무대 의상을 한 샤로테 훈과 에밀 괴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도이츠 지역에 있는 산업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 저는 모든 방마다 주철 난로가 있고 모든 투숙객이 그 난로에 석탄을 채워야 하는 에른스트 호텔도 알고 있습니다. … 이러한 쾰른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당신의 선견지명과 용기가 그러한 발전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쾰른은 빌헬름 베커 시대에 이미 프로이센의 제2의 도시가 되었다. 아데나워가 1949년부터 세계적인 정치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면 지방사 연구가들은 빌헬름 베커와 아데나워를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가장 중요한 쾰른시장으로 기렸을 것이다. 빌헬름 베커는 황제국의 초대 대도시 관리자였다. 쾰른시의회가 그를 시정의 우두머리로 선출한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는 학식 높은 지방정부 관리였고 이미 10년 동안 뒤셀도르프의 시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그가 쾰른시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두 개의 중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나는 라인강 좌안과 우안에 위성도시를 확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쾰른을 20세기의 근대적 대도시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 업적은 그의 임기 시작과 더불어 시정을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1813년 쾰른에는 공무원 숫자가 59명에 불과했다. 그 숫자는 빌헬름 베커 시대에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1924년에 몇 개 연대에 해당하는 규모의 시 공무원, 직원, 노동자를 다스렸다. 그 숫자는 남녀 합쳐서 4,902명에 달했다!    

 

쾰른 주변 넓은 지역의 계획적인 확장은 베커의 후계자인 발라프와 아데나워가 본격적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업의 성공적인 구상은 베커의 작품이다. 라인강 좌측의 많은 변두리 지역과 우측의 도이츠와 폴 지역을 편입시켜 1888년에 시의 행정구역이 11배로 확장되었다. 당시에 독립적으로 남아 있던 라인강 우측의 뮐하임과 메어하임을 포함한 산업단지의 도시 편입은 그가 추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도시 면적은 11,106ha에서 19,674ha로 확대되었다.     


활동적인 시장은 대규모 사업을 위하여 시의회를 설득하는 데에 때로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주변 지역을 편입시키는 것은 ‘매우 가난한 집안’과 혼인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의 통합을 위하여 지불하는 비용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러한 부담은 기존 도시의 근대화와 결부된 엄청난 지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한 지출 덕분에 1882년 겨우 143,000명이었던 인구가 1907년에 들어서서 436,000명으로 늘어나 거의 25년 만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통시설, 위생시설, 보건시설, 학교, 교육시설, 그리고 모든 문화 시설의 건설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주민들을 위한 여가 시설을 마련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도시 숲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 당시 지방 정치 혁명가들에게도 교훈이 되는 것이었다. 일련의 중요 연설에서 베커는 소시민이 탁 트인 자연을 즐기려면 기차를 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노동자 가정, 하급 관리, 상점 여점원, 매매직원에게 최소한 일요일만이라도, 아니면 일요일 오후만이라도 힘든 일과 생활에 필수적인 것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려면 걸어서도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대규모 시설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넓은 숲과 푸른 들판, 그리고 자동차와 말과 보행자를 위한 길, 커다란 호수, 놀이터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사치가 아니라 사회정책적으로 필수적이다! 소시민이 자기 노동과 근심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필요한 생기를 회복하는 데에는 숲이 적합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들은 술집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데나워 자기 유년 시절에 있었던 지방정책의 중요한 결정을 회고하면서, 그는 이러한 계획이 ‘마치 화약과’ 같았다고 하였다. 이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베커는 강철 같은 의지를 관철하여 쾰른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 도시 건설 사업을 이루었다.   

   

많은 과제는 효율적인 시정을 전제로 하였다. 베커는 행정 도구를 마련하여 그의 더 유명한 후계자가 이를 활용하도록 하였다. 시의 새로운 재정 정책도 필수적이었다. 시의회는 근대화 노력의 맥락에서 오히려 보수적인 기관으로서 당연히 자기 의뢰인들의 세금을 최대한 줄여주고자 하는 의지로 넘쳤다. 베커는 시의원들에게 장기 발전의 전망을 설득하기 위하여 늘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의 성장을 기대하며 도시가 부채를 짊어질 용기를 내도록 하였다. 그는 비판자들에게 맞서며 라인의 도시들, 특히 쾰른은 ‘가난한 동부’의 도시들과는 다르게 부채를 청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그가 옳았다. 그의 현명한 후계자인 막스 발라프는 재정 정책적으로 부채 청산절차를 시작하였다.    

 

베커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곧 장기적인 수익을 예상한 부채로, 그의 두 번째 후계자인 아데나워는 사업을 추진했다. 중등학생, 대학생, 젊은 법률가, 나중에 베커의 시장 임기 말기 시절에 이르기까지 아데나워는 어떻게 한 탁월한 인물이 많은 반대를 물리치며 자기의 고향 도시를 용감하고 현명하게 합리적인 발전을 이룩하도록 하는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선임자를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자기 독립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은 거의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가 이 시간 동안 보여주고 보여줄 것은 자기가 태어난 집 이외에 쾰른의 개성 덕분에 이룩한 것이다. 이 매력적인 생기 넘치는 도시의 고동치는 리듬은 그 자기 삶의 멜로디가 되었다. 그의 내면적 성장에 관한 증언은 많지 않다. 그러나 쾰른이라는 도시의 다양함, 아름다움, 근대성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러한 다면적인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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