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23
혁명과 점령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가 언제 깨닫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독일제국의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 또한 회의와 희망을 오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문제에 관한 그의 얼마 안 되는 공개적인 언명은 대부분 절망적인 식량 배급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1918년 1월 10일에 그는 1917년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7년에는 기록적인 풍년이 들었다. 이는 순전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동안의 독일의 운명을 여기에 걸 수는 없다.” 독일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그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곧 자급 자족적인 지역 단체를 통한 식량 배급의 지방분권화였다. 다시 말해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쾰른에서 이미 시행해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무엇보다도 부유한 지방에 유리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베를린을 수없이 방문하면서 또한 [베를린에서 보낸] 수많은 공문을 받아보면서 관료주의의 운영방식을 연구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이러한 언급을 나중에 아데나워가 베를린과 동독에 대하여 취한 행동에 관한 논란에 비추어 보면서 단순히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흔적만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엘베강 동부의 고위 관리들에 대한 거부감이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당시나 그 이후에나 결정적인 동기는 따로 있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시민적이며 주체적인 지방자치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지방자치를 수립한 이후에 이 전쟁 때만큼 지방자치에 매우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 적은 없다.”
아데나워도 인정한 대로 이는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관계를 통제하려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식욕은 배가 부를수록 오히려 더 느는 법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미래를 위하여 “시민계층이 자치기관을 통하여, 마땅히 요구할만한 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라인란트 사람이 베를린에 대고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 시대에 자의식이 있는 도시 시민이 거대한 관료주의의 간섭에 맞서 제기한 주장인 것이다. 이 관료주의는 그 관할권을 전시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에서 도출하고는 그 권한의 요청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어찌 되었든 1918년 1월의 시작을 돌아보면 분위기가 희망으로 가득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전쟁의 시기가 “전쟁 발발 이후 바람직하고 영예로운 평화를 기대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낙관주의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붕괴한 것이다. 그리고 제한 없이 잠수함을 동원한 전투가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군의 최고사령부는 동부 전선의 군대를 철수시킨 독일 돌격대 병력을 1918년의 결정적인 춘계 공세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스스로 말한 대로, 그는 다른 모든 신중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몇 달간의 여유를 찾도록 해준, 러시아 차르 제국의 내적 붕괴를 매우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군주제적 유럽과 시민계급이 지배하는 유럽의 실망하는 눈길 앞에서 1905년 혁명 이후 두 차례나 어떤 세력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 세력이 지하에서 꿈틀대는 것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쾰른 지역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참한 도시 근교에 사는 굶주린 노동자 집단, 겨우 일부만 체포할 수 있었던 과격한 선동가들, 전투 의욕을 잃은 군인들, 그리고 꿀꿀이 죽 표면을 떠도는 커다란 기름 덩어리 같은 극소수의 ‘전쟁 부자들’과 ‘자본가들’에 대한 무엇보다도 후방에서 점차 확산되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러시아와 달랐다. 노동자 계층은 다수당인 사민당(SPD)과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여전히 따랐다. 그들의 정서, 그에 못지않은 그들의 애국심을 아데나워는 빌헬름 솔만, 장 메어펠트, 아우구스트 하스와 같은 쾰른 사민당(SPD) 인물들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정확하게 알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시민들의 궁핍이 심해지고 지배계급인 정부가 군사적, 정치적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데나워는 독일과 유럽이 마주한 문제는 오래된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운이 좋게 또는 요행으로 이룩한 평화가 이러한 사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1918년 3월 초에 그는 시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들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국가들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이 전쟁이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사회적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격렬해지고 심각해졌다. 정치가들은 전쟁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임금 노동자 계층’(아데나워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을 기피하였다.)의 사회적 문제만을 알아본 것이 아니다. 여러 ‘계급들’이 ‘급격한 몰락’을 체험하였다. ‘극소수만이’ 전쟁으로 갑작스러운 상승을 맛보았다. 사람들은 또한 ‘사회 문제 일부에 속하는 여성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경제 영역에서의 대규모 합병’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아데나워의 해결 방안은 매우 통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상황이 장기적이고 복잡한 적응 과정을 통해서만 새로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제시한 구호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대립과 이해 충돌의 극복.” 그러나 이에 전제되는 것으로, 그가 이러한 점에서 바란 것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규모와 내적 관계에 대한 근대 사회학적이며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편견 없는’ 분석이었다. 그래서 그는 1918년 초에 ‘사회연구소’의 건립을 제안하였다. 이에 관하여 쾰른 상과대학의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에커르트가 매우 상세한 제안서를 제출한 바가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나중에 언젠가는 쾰른대학교 수립에 필요한 여러 기둥 가운데 하나로 이 연구소를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구상이 환상이 아니기에 빌헬름 솔만이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찌 되었든 프로이센 대도시의 시장이 이 전시에 엄청난 사회적 변화에 그토록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은 시대의 징표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아데나워가 타협적인 정책을 통하여 학문적, 이성적 설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한 점이다.
아데나워는 쾰른만의 문제를 국가 전체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능력을 빠르게 획득했다. 황제국의 붕괴 이전에 이미 그는 최고의 지도층에 올랐고 정치, 국가 행정, 경제 분야에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프로이센에서 베를린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수장으로서 그는 모든 쾰른시장이 누릴 수 있는 직위도 획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라인지역 지방의회의 의원이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관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18년부터는 프로이센 귀족원 위원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시장으로서 경제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루이스 하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그 당시 늘 아데나워 가까이에 있었고 1919년부터는 시의회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결별하고 중앙당(Zentrum)에 입당하였다. 또한 루르지역 경제의 거물들도 쾰른시장에 관심을 보였다. 아데나워가 1918년과 1919년에 사이에 라인란트에서 매우 빠르게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튀센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거의 읽기 힘든 글씨로 쓴 친서를 그에게 보냈다. 그래서 시장 사무실에서는 그의 편지를 타자기로 정서하여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휴고 슈틴네스와 알베르트 푀글러도 그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라인 갈탄 회사의 사장에 복귀한 파울 실버베르크는 아데나워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1903년 쾰른 지방법원에서 동료 변호사로 일한 바 있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과 국제 경제에 뛰어난 전문가이며 아데나워와 밀접한 친교가 있던 베를린의 AEG회사 회사의 요하네스 함스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쾰른시장은 탁월한 행정 능력만 지닌 것이 아니다. 높은 국가 직위에도 어울릴 사람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경제적 문제에도 “매우 조예가 깊다.“
거의 30년 연배인 함스폰과의 긴밀한 유대, 정확히 말해서 우정 관계는 최소한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스폰은 그 당시 이미 AEG회사의 경영진에 속한 인물로 1840년 쾰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시의회에서 활동하였고 1881년부터 1887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이었고 AEG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유니온 전기회사를 운영하고 AEG회사의 이사도 역임하였다. 그는 1910년부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이회사의 감사였다. 일찍부터 그는 서유럽국가들, 곧 프랑스, 벨기에, 영국과의 관계를 도모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수출에 전념하고 해외 투자도 주도하는 AEG회사는 독일 산업의 한 분야를 대표하는 회사였다. 그래서 이 회사는 밀접한 국제 협력이 필요하기에 이 회사의 경영진은 전시와 전후 시기에도 전쟁 발발 이전에 맺었던 좋은 관계를 촉진할 줄 알았다. 1917년부터 눈에 뜨이게 늘어난 아데나워와 함스폰 간의 서신 왕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쾰른시와 AEG회사 간의 기존의 상호 경제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확실히 매우 깊은 인간적 교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회한 함스폰은 자기 고향 도시의 활기찬 젊은 시장이 분명히 맘에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를 그의 다양한 국제적 인맥을 동원하여 여러 방식으로 돕고자 하였다. 그의 딸은 쾰른 대학의 칼 크라머와 혼인하였다. 전시 기간부터 두 사람은 아데나워가 베를린을 방문할 때마다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때로는 아데나워가 반세에 있는 함스폰의 거처를 찾았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자주 발생한 파업으로 ‘카이저호프’에 있는 관사에 들어갈 수 없을 때 그리하였다. 아데나워도 자신과 쾰른을 위하여 함스폰이 수행한 ”많은 공적“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예를 들어 영국 점령 시기에 쾰른을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발행하여주고, 1921년에는 함스폰에게 쾰른대학교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함스폰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분명히 전후 독일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함스폰은 그가 서유럽에서 맺은 경제적, 개인적 인맥으로 쌓은 보물 같은 풍부한 경험을 아데나워에게 전해주었다. 다른 모든 정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이를 주의 깊게 받아들였다. 그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관계가 쾰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미 전시에 주고받은 서한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1962년까지 아데나워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니 N. 하이네만이다.
하이네만은 사우스캐롤리나의 샤로테에서 1872년에 출생한 미국 시민이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전기기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후에 6년 동안 유니온 전기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그 가운데 1년은 코블렌츠에서 일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슈첸호프에 발전소를 세우고, 전차를 도입하며, 또한 1897년에 전성기에 있던 프로이센의 육군 대령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당시에 제8군단 참모총장인 파울 폰 힌덴베르크였다. 그리고 그는 유니온 전기회사에서 함스폰을 알게 되었다.
몸집이 작고 활기차고 고집이 세며 상상력이 풍부한 하이네만은 어디에서도 오래 머물지를 못했다. 그는 뉴욕, 쾰른, 본, 로마, 나폴리, 베를린, 파리, 브뤼셀, 런던에서 일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하느님과 세상을 배웠다. 그가 사귄 인물에는 9살에 만하임을 떠나 미국으로 왔으나 독일어 발음을 전혀 잊지 않은 모르겐타우의 부친,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고문으로 일한 하우스 대령, 영국 외무장관인 조지프 A. 챔벌린, 프랑스 대통령 알렉상드르 밀랑, 벨기에의 레오폴드 3세 왕, 물리학자인 하인리히 헤르츠, 사업가인 아우구스트 튀센과 발터 라테나우, 화가인 앙리 드 툴르즈 뢰트레크, 시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있다.
이 광적인 기술자는 1905년 브뤼셀에 있는 운송 산업 금융회사 ‘소피나’에 취직하였다. 당시에 이 회사 직원은 3명이었다. 50년 후에 하이네만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무렵에는 직원이 4만 명으로 늘었다. 은행가들은 이 제멋대로인 인물을 두려워하였다. 은행가들과는 달리 그는 돈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스 퓨르스텐베르크는 그가 교양이 높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고, 훌륭한 그림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드러난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같이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를 기술교육을 받은 정신을 지닌 어느 정도 말썽꾸러기인 자로 여기는 은행가들과 거래할 때, 그는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들이 그에게 고분고분하기에 그는 쉽게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하이네만이 지역 교통 분야, 철도사업, 화학, 발전소 건설 등으로 사업을 무차별적으로 확대해가면서 교분을 쌓게 된 정치가들을, 그는 은행가들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경제는 발전을 추구하고 정치는 무질서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발전에 대하여 무한한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미래 기술과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자연과학과 기술이 대부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죽을 때까지 확신하였다. 그는 자기 인생 경험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처럼 모든 것은 경제에 달려있다. 그리고 다시 경제는 학문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결국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20세기 초반에 자기 기업의 빠른 성장의 기초를 놓은 이 사람은 1907년 함스폰의 소개로 아데나워를 알게 되었다. 이전에 AEG회사의 사장은 이미 그에게 그 젊은 쾰른 사람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나 함스폰을 통하여 계속 친교를 나누었다. 함스폰은 20세기에 유럽에서 독일이 주도적인 경제력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은 강인하고 기술적 창의력으로, 넘치며 그 음악과 시로 사랑받을 만한 나라가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와도 사업을 잘 이끌어갔지만, 이 두 나라가 20세기 초반부터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두 국가들은 기술을 천시하고 근대화 능력이 독일보다 뒤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이네만과 아데나워는 서로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매우 현실적인 사업적 배경이 있었다. 하이네만은 독일의 지방에서 식량 배급 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아데나워는 이 분야에서 쾰른에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그들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다. 하이네만은 브뤼셀에 머물고 있었지만 독일 점령 세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쾰른 경제의 사각에서 볼 때 벨기에는 1830년의 국가 수립 때부터 특히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매우 중요한 나라였다. 독일 서부 전역, 특히 쾰른은 그 영향력을 운하의 끝까지 확대하고 앤트워프 항구에 연결될 수 있었다. 라인·루르지역의 상업과 산업계가 그 당시 독일이 벨기에를 합병하려는 뜻을 줄기차게 지지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라인지역의 중앙당(Zentrum) 지도층도 자기 당의 다수가 벨기에를, 특히 운하의 항구를 독일의 영향권에 포함시키는 것에 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접근의 강도와 형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또한 전쟁의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벨기에가 독일의 위성 국가로 존재해야 한다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주도권 개념을 내세우는 사람들 이외에도 인적 유대를 통하여 호헨촐러른 왕조와 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나 무조건적인 병합 계획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부분적으로 공개되기도 하였다. 노회한 율리우스 바켐이 《쾰니셰 폭스차이퉁》에서 물러난 이유가 칼 바켐이 이끄는 이 중앙당(Zentrum)의 중요 신문이 단호하게 병합 노선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고민이 되는 부분은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벨기에가 다시 독립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데나워가 이 논란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합리적인 벨기에 정책을 지지하는 이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은 벨기에 민족,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가 [프로이센] 제국과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데나워의 편지 한 통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 편지에는 쾰른에서 자신이 하이네만과 만난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그가 시장이 된지 정확히 3개월이 된 그가 함스폰에게 1917년 12월 11일에 보낸 편지이다. “어제 하이네만 이사님이 브뤼셀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 반 동안 모든 주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이 무척 흥분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화협정을 맺고 나서 문화적, 경제적 유대를 우리 이웃 국가들과 다시 맺는 노력의 중심지가 쾰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분은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분은 벨기에로 돌아가자마자 벨기에의 몇몇 유력 인사들을 접촉하여 보고 나서, 자기 노력의 결과를 제게 전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계획을 논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하이네만에게 희망을 불어 넣은 소식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각은 분명하다. 서유럽 권역에서 독일이 교섭을 하는 데에 쾰른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그 당시 흔히 그랬듯이 비관적으로, 이미 패배를 계산한 것인지, 아니면 타협을 통한 평화를 가능하게 여겼는지, 또는 적당하고 합리적인 의미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여겼는지도 또한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쾰른과 그 도시의 시장에게 그러한 생각을 밀고 나갈 기회를 매우 빨리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드러났다.
1918년 가을과 겨울에 일어난 혁명과 군대의 붕괴의 여파가 라인란트에 몰아쳤어도 쾰른에서는 일단 사정이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1918년 7월 라임스 근처에서 벌어진 제3차 루덴도르프 공격이 실패한 다음에야 쾰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공공질서의 급격한 붕괴와 전투 사기가 신속하게 저하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걸친 전투가 지속되던 겨울에 범죄율이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대규모의 도적질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공장에서도 물건을 훔쳐갔다. 그중에도 [동력] 벨트를 가장 많이 훔쳐 갔다. 1918년 초가을에 쾰른 지역에 체류하는 탈영병들의 숫자는 16,000명에서 18,000명에 이르렀다. 9월이 되자 법률고문이었던 뫼닝(Möring)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서, 시민자위대의 수립만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10월이 되자 스페인 독감이 도시를 휩쓸었다. 10월 14일부터 23일까지만 사망자가 324명에 이르렀다. 학교는 14일간 휴교에 들어갔다. 시 공무원들과 쾰른 기업의 종사자들은 집단적으로 질병에 걸렸다.
전방에서는 흉보가 날아들었다. 휴전 협정서 교환과 더불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떨어져 나간 사실은 파국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킬에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쾰른시청에 도달한 이후 아데나워는 거의 자기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 이외에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총독이자 육군총장인 폰 크루게와 다수당인 사민당(SPD)의 빌헬름 솔만이었다. 베를린의 에버트와 샤이데만과 마찬가지로 사민당(SPD)의 이 온건한 대표는 그의 당원들과 함께 사민당(SPD)의 노동자 무리와 노동조합 지도부의 일탈을 사력을 다하여 막고 있었다.
9월 9일 토요일 대규모 군중대회가 예고되었다. 주제는 ‘시대의 명령’이었다. 9월 6일 혁명이 킬을 넘어서서 함부르크와 하노버까지 밀어닥쳤다. 솔만은 이제 사민당(SPD)의 아성인 쾰른-뮐하임의 군중집회에서 시대의 요청을 요약한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그 결의안은 모든 정치범의 석방, 호헨촐러른 왕가의 즉각적인 퇴위, 모든 성인 남녀의 투표로 선출된 국민의회의 신속한 수립, ‘대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통하여 쾰른 지역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운동이 피를 보지 않고 질서 있는 절차를 통하여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감옥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거부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시청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그때부터 정당의 대표들과 함께 앞으로의 진로를 정하기로 한 결정을 견지하였다. 이렇게 모두 상호 견제를 하였다. 그 어떤 측도 독자노선을 걷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사람들은 시민방위대의 수립과 쾰른시민들을 향한 선언을 논의하였다. 기독교 노동조합의 대표들은 소동이 발생하면 강력한 제제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가운데 한 명은 그 당시에 이미 과격한 민족주의자인 야콥 카이저였다. 솔만은 무기사용에 대하여 경고하고 위급한 경우에는 사민당(SPD)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만 공공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총독부를 향하였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노쇠해 보이는 육군총장인 크루게를 만났다. 그는 매우 무감각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킬에서 출발한 해군들이 감옥에 갇힌 군인들을 풀어주기 위하여 쾰른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데나워에게 전했다. 아데나워는 쾰른 요새의 6만 군인을 지휘하는 그에게 혁명 주동자들을 실은 기차가 쾰른 중앙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폭도들을 넓게 트인 선로 구간에서 체포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만약 해군들이 일단 역에 들어오게 된다면 쾰른 사람들을 통제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루게는 그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그저 붉은 완장을 차고 기차에서 내린 이들이 차단막을 지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중화기 부대 1개 중대가 역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곧 그들을 철수시켰다. 이는 모든 무력 사용을 거부한 온건한 사민당(SPD) 인사들의 요청에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이때가 바로 아데나워 스스로가 군사를 통솔하는 장군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특별한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솔만의 기분을 달래기 위하여 그의 사민당(SPD) 동료인 필립 샤이데만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는 10월부터 마지막 황제국의 제국 수상인 막스 폰 바덴 왕자의 정부에서 국무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전보에서 아데나워는 감옥에 갇힌 군인들에 대한 조속한 사면 조치를 권유하였다. 사람들이 밀집된 중앙역에서는 다수당인 사민당(SPD) 사람들, 독립사민당(USPD) 대표들, 해군 병사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호헨슈트라쎄와 노이마르크트에서는 20세기 들어서 사람들이 점차 익숙해져야 했던 흔한 혁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 무장한 사람들을 가득 채운 트럭들이 있고, 소리 지르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밤이 되자 세 개의 교도소 문이 교도관의 아무런 제재 없이 열렸다. 죄수 가운데에는 28명의 정신병에 걸린 중대범죄자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만행은 그다음 며칠 동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이 되자 쾰른시민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솔만과 그의 동료들의 결정에 따라 군사령관은 군이 차단한 노이마르크트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아데나워는 군사령관에게 아포스텔른 김나지움 마당에 야전포병 1개 중대를 배치하고 포격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그 명령을 거절했다. 이후로 프로이센식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데나워는 종종 이 포병 중대의 중대장이 그 당시 몇 주 후에 이야기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 중대장이 상관에게 발포해도 좋은지 문의하자 그 상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장교는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어야 한다.” 총독은 새 권력자에게 최대한 신속하게 통행증과 자동차를 받고는 사라졌다.
모든 쾰른 성채 안의 전체 병영은 신속하게 폭동에 동참하고 군대 규율은 무너졌다. 교통의 요지와 커다란 광장에는 붉은 완장을 찬 군인들이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무기를 탈취하고 장교들의 견장을 찢어 버렸다. 이는 독일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특히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군인들이 죄수복을 입고 나무 신을 신고 있는 모습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노이마르크트에는 다수당인 사민당(SPD)의 솔만을 포함한 지도 인사 5명과 독립사민당(USPD)의 대표 5명을 노동자·군[공동]위원회에서 군중이 ‘선출’하였다. 귀르체니히에서 시민단체가 5명의 군인을 ‘추가로 선출’하였다. 며칠 뒤에 3인의 사민당(SPD) 소속 시위원 가운데 한 명이며 나중에 헤센-나사우의 지방장관이 된 노조위원인 아우구스트 하스가 베른하르트 팔크에게 말하면서 혁명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줄 몰랐다고 하였다.
솔만은 이제 확신에 차서 시장을 찾아 그와 상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 대담에서 그가 본 아데나워에 대한 인상은 다음과 같다. “그는 쾰른 공무원의 으뜸가는 대표였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 위에 서 있었다.” 이제 솔만은 의식적으로 시장 곁에서 상황을 살피고 상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 대화에 관한 그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는 쾰른 관청의 첫째 대표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상황에 대처하였다.”
구체적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아데나워는 노동자·군[공동]위원회가 각각 시청 안의 대강당인 슈락흐텐살과 뮤셸살의 사용을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9월 8일 오후 3시에 서로 만난 노동자·군[공동]위원회는 중심가에 있는 회합 장소, 타자기, 전화 교환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직인의 사용도 허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 대가로 그는 시청에 붉은 기가 게양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가 처음 발표한 문서 가운데 하나에서는 혁명운동 관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그 과정을 질서 있게 이끌고자 하는 노력을 잘 엿볼 수 있다. “이 문서를 지닌 이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도록 노동자·군[공동]위원회의 위임을 받았다. 누구든지 이 문서를 보유한 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쾰른, 1918년 11월 8일, 노동자·군[공동]위원회.” 이 문서에는 노동자·군[공동]위원회의 두 위원인 푹시우스와 룽게가 서명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 하나는 ‘사민당(SPD) 연합, 쾰른시와 지역’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프로이센 왕의 문장이 화려하게 장식된 쾰른시의 직인이었다. 이 문서가 아데나워를 위하여 발행된 것인지 아니면 공공 안전 위원회의 두 명의 위원장을 위하여 발행된 것인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프로이센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시장이 온건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혁명적인 쾰른 사민당(SPD)과 과감히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베를린에서 공화제가 선포되기 하루 전에 구체제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수상이 된 아데나워와 관련하여, 전혀 확실하지는 않은데도, 흔히 ‘고독한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8일의 결단은 결코 그의 단독이 아니라 논의와 전화 대화를 통하여 내린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한 결단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권위의 공백으로 스스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도전을 마주한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가 급진적으로 변화된 상황에 전광석화와 같이 적응하는 능력을 지닌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첫 조치는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상황에 부닥친 굶주린 군 관계자들에게 밥을 제공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사람이 혁명군이든 탈주병이든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든 관계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폭도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혁명에서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이 부수 현상이 곧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아데나워와 함께 시청에 머물러 있던 팔크는 이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 생생한 보고를 하였다. “아데나워의 집무실 창문으로 우리는 보았다. 비참한 남녀 무뢰배들이 시청 근처의 알터마르크트에 있는 창고를 약탈하고는 물건을 들고 하펜가쎄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 뻔뻔한 작태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지만, 그저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이 마음의 상처는] 오랫동안 남았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가 사태를 통제하려면 기능하는 관리체계가 필요했다. 다수당인 사민당(SPD)의 지도로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위원회에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득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이때가 아데나워가 이 혁명의 날들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집무실에서 마치 폭풍우를 만난 배의 선장처럼 냉정하게 권위 공백의 위기를 극복한 순간이다.
팔크는 탄복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데나워는 매우 탁월한 감각으로 쾰른시의 복지위워회를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에서 우리 시 지도자들은 사민당(SPD) 인사와 무소속인 이들과 날마다 시청의 29호 사무실에 모였다.” 아데나워가 주재한 이 위원회에는 모든 계파의 지도급 시의원들, 국가관리들, 쾰른 경제계 인사, 기독교 노동조합 대표, 노동자위원회, 군위원회 관계자가 함께 모였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나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여기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 여기에는 주둔군의 급여 지급, 그들의 제대, 폴란드 노동자들의 압송, 쾰른시민의 군복무 면제, 외국인 실업자의 추방, 해외 이주자, 이 박멸 문제, 창녀촌의 폐지, 우유 배급, 라인강 선박 운항, 노동 증명서, 법정 폐점시간, 식량 통제, 점령 시기에 시민들이 취할 태도에 대한 결정이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나중에 쾰른 대학교 초대 총장이 된 크리스티안 에커르트 교수의 진두지휘로 복지위원회는 시민 방위군의 소집도 결정하였다. 이들은 나이가 들었거나 젊은 퇴직 군인들로 일당 15마르크를 받고 일하였다. 이들이 하는 일은 날마다 경계를 서고 대규모의 도시 보급창고와 군영을 약탈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사민당(SPD) 의원을 포함한 시의원들은 시장의 안정된 권위를 인정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 당시의 소란스러운 몇 주 동안 베를린 정부나 최고 군지휘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혼란스러운 것뿐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노동자·군[공동]위원회와 손을 잡은 아데나워를 실질적인 쾰른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숙고와 결단으로 실제로 노동자·군[공동]위원회는 물론 복지위원회를 결합하여 각자의 권한이 너무 튀어 보이지 않도록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연히 쾰른시 역사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요제프 테디에크라는 쾰른 법률가가 1918년 11월 20일에 쓴 쾰른의 혁명을 묘사한 편지는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고 있다. “다행히도 그 상황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아데나워 시장이 그와 함께한 사민당(SPD) 시의원들을 잘 대우하며 탁월한 책략을 발휘하여 사태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볼셰비즘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공무원들은 군위원회의 통제 아래 업무를 수행했고 변호사가 감독관 역할을 하였는데 우리는 그의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범죄자들은 차츰 다시 체포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많은 소동을 피우고 난 다음이었지만 말이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가 첫 주에 시장에게 얼마나 만족했는지에 대하여 그 위원회 위원장으로 아데나워의 ‘고문’ 역할을 한 하인리히 쉐퍼가 11월 21일 의회에서 이야기하였다. 그가 이 자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이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는 지난 긴박했던 날에도 용감하게 자리를 지켜주시며 노동자·군[공동]위원회와 연합하여 우리 고향 도시에 평화와 질서를 되찾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시장님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시장님’께서도 쾰른의 혁명가들과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한 주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교외와 시청 앞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시위했다. 협상이 계속 결렬되었고 동부로부터의 식량 조달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약탈과 폭력이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자동차 절도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도시는 제대하거나 퇴각한 군인들로 넘쳤다. 게다가 경제적 생산성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실업률의 가파른 상승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평생 질서에 광적으로 집착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대규모적인 혼란을 시장 시절에 처음 맞이하는 커다란 도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였다. 후일에 그를 비판하는 이들조차도, 그가 위기 때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늘 인정하였다. 그것을 그가 이제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1917년 늦여름에 그를 시장으로 선출한 이유는 탁월한 행정 지도자의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그는 혁명기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냉정함, 탁월한 정치적 감각, 확고한 지도자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빌헬름 시대의 권위가 모든 곳에서 소멸되고 있는 가운데 쾰른시민들은 시청에 일종의 공화주의적 군주가 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고전적인 지도 방식과 새로운 지도 방식을 동시에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시대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방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대다수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한 새로운 공화적인 지도 방식도 있었다. 이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 곧 정당, 노동조합, 기업, 기존의 중심 권력과 혁명 세력의 중심 권력 사이의 균형을 매우 세심하게 맞춘 것이다. 이성적인 설득력, 타협, 술수로 넘치지만, 합법적인 방법의 동원, 이러한 것들이 빌헬름 이후 시대의 지도 방식이었다. 그러한 방식이 이제 쾰른에 등장한 것이다.
후일에 아데나워를 지켜본 모든 사람이 차례로 확언하는 대로 아마도 그의 확고한 자신감은 자기 지도자로서의 지위가 무너진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나서,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자기 안전도 보장받은 사실에서만 연유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나중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자존감을 특별히 타인의 냉정한 평가에서만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 평가는 때 따라 다르지만, 그가 어리석거나 감정적이거나 교조적이라는 것이었다. 또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기도 하였다.
혁명의 물결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자마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휴전 협상 조건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도시의 사기도 충전하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대가 다시 군기를 회복하여 시내를 행진하고 라인강 다리들을 건너갔기 때문이다.
휴전협정의 조건은 무엇보다도 쾰른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그 조건에 따르면 독일은 3주 이내에 점령지역에서 물러나고 라인 서부지역을 비워주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영국 점령군이 진주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관계자가 서로 가까이 뭉쳤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빡빡한 일정에 매우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였다. 2개 군단, 특히 제6군단과 제7군단의 약 50만 명의 병사와 30만 마리의 말이 쉬지 않고 밤낮으로 행진하여 좁은 라인강 다리들을 건너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포로가 될 처지였다.
첫 군대 무리가 들어오자 모든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 마치 1914년 8월의 영화가 다시 한번 거꾸로 상영되는 듯하였다. 도시 전체가 깃발로 뒤덮였다. 검정 하양 빨강의 삼색기, 거기에 더해 공화파의 검정 빨강 황금색 깃발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붉은 혁명기도 보였다. 공공건물에 어떤 깃발을 달아야 하는가 라는 어려운 문제를 주제로 복지위원회에서 긴 토론이 이어졌다. 이 토론은 문자 그대로 쾰른 스타일로 마무리되었다. 황제국의 구 깃발과 공화파의 깃발 그리고 쾰른시의 깃발이 평화롭게 나란히 걸렸다.
아데나워는 시의회에 ‘수십만 명의 용감한 전사들’을 따뜻하게 환대할 것을 요청하며 그에게 전혀 힘들지 않은 애국심에 넘치는 말을 덧붙였다. “전선에서 오래 싸운 우리의 형제들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4년이 넘도록 일찍이 역사에서 본 적이 없는 영웅적인 용기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전투에 참여하여 그들의 고향과 집과 농장을 몸으로 지키고 돌아옵니다. 그들은 패배한 것도 아니고 타격을 당하지도 않고 돌아옵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 모두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짐도 하였다. “우리는 온 마음과 정신으로 … 그들이 독일을 위하여 우리 라인란트를 위하여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 이전 쾰른에 주둔했던 65사단이 11월 27일에 아헤너 토어에 도착하자 도시민 전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데나워는 감동적인 언어로 귀향하는 군인들에게 쾰른 시민 전체를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쾰른으로 돌아온 사단들 가운데에는 그 사단장이 ‘붉은 유령’[곧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결심을 단단히 한 일도 있었다. 상당히 온건한 노동자·군[공동]위원회에 대한 습격으로 [군대의] 질서 있는 퇴각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을 정확히 알고 있는 아데나워는 그의 모든 기지를 동원하여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무기력한 총사령관 대신에 사령부의 오토 슈빙크 대위를 쾰른의 브뤼켄코프로 파견하였다. 그곳에서 그가 퇴각과 무기 반납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나중에 이 재능 있는 인물을 매우 칭찬하였다. 마찬가지로 오토 대위도 시장을 칭찬하였다. 시장은 자기 시청 집무실 책상에 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마치 전투 상황에서처럼 명령을 내렸다.
쾰른시는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을 위한 숙영지를 확보하고, 숙식을 마련하고, 제대 군인들을 위한 수용소를 설치해야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채의 저장 창고였다. 그곳의 물건을 최대한 빨리 팔고, 보관하고, 운송하여 폭도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혁명 시기에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기 마련인 술은 라인강에 쏟아 부었다. 그 가운데에는 725,000리터의 위스키와 1,400개의 바구니병에 든 프랑스 코냑도 있었다.
슈빙크 중대장이 유일하게 남긴 사후 서면 보고서에는 통속극과 같은 후송 작전의 결말이 기술되어 있다. “12월 3일 마지막 독일 연대가 쾰른을 떠났다. 당당한 대성당 발치 주변에 일련의 참전용사들이 늘어섰다. 아름다운 소년합창단이 땅바닥을 때리는 12월의 빗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 독일 조국을 위한 만세 소리가 다시 한번 성당 꼭대기 위로 울려 퍼졌다. 마지막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행진하며 쾰른 역사에서 멀어져 갔다. 소년들은 ‘안녕히 가세요!’라고 소리쳤다. 어른들은 [패전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했다.” 끓어오르는 애국심, 슬픔, 미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구 제국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였고,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그들은 아직 불안해했다. 무엇보다도 점령지역과 점령되지 않은 독일 지역과의 일시적 분리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있었다.
라인강 서부지역은 전승국 군대가 점령하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서 라인강 동쪽 지역으로 3개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이는 각각 쾰른과 코블렌츠와 비스바덴을 포함한 마인츠와 연결되었다. 노르트라인지역은 벨기에 점령군 산하에 있었다. 쾰른, 본, 아헨과 같은 대도시는 그 주변 지역과 더불어 영국군에 점령되었다. 이 지역에 접하여 코블렌츠와 트리어를 포함한 지역을 미국이 점령하였다. 미군의 철수 후에 이 지역은 프랑스가 넘겨받았다. 라인팔츠와 자르 지역은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였다. 행정은 점령군의 지휘 아래 지역 관청이 운영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잠정적인 조치가 영구적인 단절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영국은 1918년 12월부터 1926년 1월 31일까지 7년 동안이나 쾰른 지역에 머물렀다.
마지막 독일군의 철수 이후 공공질서가 다시 한번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 약탈과 침입이 자행되었다. 아데나워는 영국 군대가 빨리 진주하기를 고대하였다. 그는 주둔군 사령관에게 위압적인 기마병과 그들을 호위하는 괴물 같은 탱크를 최대한 빨리 그리고 위세를 떨치며 쾰른 도시 전체를 행진하도록 요청할 요량이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하는 효과를 거둘 심산이었다.
영국 장교들은 12월 6일 정오 무렵에 장갑차를 타고 쾰른시청사 앞을 지나갔다. 나이가 들고 나서도 아데나워 수상은 40년도 넘은 그 당시의 영국 점령군 사령관에 대하여 지녔던 깊은 존경심을 여전히 기억했다. 그의 이름은 라슨 장군으로 확실히 흠결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나눈 첫 대화와 일련의 논의에 대하여 우리를 잘 알고 있다. 아데나워가 그 대화를 통역관에게 잘 기록해 놓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왜 이 시기에 영국군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점령을 모든 연관되는 불행 중에 그나마 가장 사소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시장 또한 자존심 있고 근엄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점령군은 점령군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첫 몇 달 동안은 패전 직후의 몇 주 동안과 마찬가지로 행정적, 경제적 압박이 심했다. 총 55,000명의 영국군이 쾰른에 주둔하였다. 1920년부터는 영국의 군대가 절반으로 줄었다. 완전 철수 1년 전인 1925년에는 겨우 9,160명만 남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일단 쾰른에 있는 88개의 학교, 52개의 호텔, 2,000여 채의 개인 주택, 폐쇄된 공장건물이 압류되었다. 이는 이니스킬링 드래곤스, 노쓰엄버랜드 퓨시리어스, 카메론 하이랜더스, 왕립 장총 부대, 블랙와치 연대, 캐나다군, 구르카군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거리의 질서는 양호했고 사건은 많지 않았다. 공식 통계를 보면 점령 기간 살인은 18건, 교통사고 사망은 81건, 강도와 상해 폭력 사건은 977건, 기물 파괴는 4,000여 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범죄의 대부분은 처음 몇 주 동안 발생하여 아데나워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전선에서 영웅답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군인들이 엄청난 술을 마시고 그에 따른 사고를 저지르는 것은 거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엄격한 보안 조치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였다. 이 조치는 점령군 사령관과의 많은 협상을 통하여 점차 완화되었다. 저녁 7시부터 아침 5시까지 내려졌던 통금은 곧 해제되었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대로, 쾰른에서 신분증명서나 경찰에 신고할 필요 없이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그리고 비점령 지역으로 여행을 하고자 할 경우에는 통행증이 필요했다. 영국 야전사령관 헤이그가 서명한 명령에 따른 조치는 많은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곧 쾰른에 사는 모든 성인은 영국 장교에게 경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장은 처음 회의 때부터 영국 측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 더 논의를 거친 끝에 이러한 전횡은 폐지되었다. 자존심이 강한 아데나워는 그러한 요구에 대하여 평생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일은 초기에 쾰른 지역과 라인란트의 나머지 비점령지역이 단절된 일이었다. 루르지역과 맺은 다양한 경제 관계가 붕괴되었다. 귀향자들과 더 이상 수요가 없는 군수 공장에서 일했던 직업이 없는 노동자들은 실업률 증가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는 신속하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18년 12월 말에 이미 쾰른에는 25,000명의 실업자가 있었다.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시 정부는 신속하게 긴급 노동 프로그램을 수립하였다. 4,000명의 남자가 도시공원에서 흙을 개간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임시 조치였던 이 프로그램은 1920년 초반 내내 지속되었다. 식량 사정도 심각해졌다. 봉쇄 조치로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차단되어 식량 재고분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1919년 1월 초에 아데나워는 루시앙 샤세느라는 한 프랑스 기자와 첫 외국 인터뷰를 하였다.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바람에 내용이 모두 담기지는 않은 문서가 남아있다. 프랑스 기자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 씨는 크고, 강인하고, 매우 냉정하며 사려 깊은 인상을 주었다. … 현재 독일 대도시의 행정을 관리하는 무거운 책임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고 있었다.” 시장은 매우 어두운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는 봉지 하나를 들고 왔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일주일 먹을 분량의 식량으로, 감자 3.5.kg, 전시빵 2kg, 고기나 소시지 200g, 지방 50g, 잼 200g, 밀가루 75g, 설탕 150g, 커피 대용품 75g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5주 정도 버틸 분량만 남아있었다.
이 봉쇄가 독일에 앞으로 평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반론에 대하여 이 프랑스 기자는 당시의 군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는 독일 군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군인들이 쾰른을 지나 행진할 때 본 것이 있었다. 군인들의 옷은 남루하고, 신발이 낡았으며, 야위었고, 무장이 보잘것없었다. 병영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독일군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심리적 충격도 더해졌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용감하게 싸운 이 군대는 그들을 완전히 초토화 시킨 엄청난 최후의 일격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최고 군 통수권자인 빌헬름 2세가 이해할 수 없고 치욕스러우며 비극적인 도주를 감행한 것입니다. 전면전에서 그러한 도주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든 저항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교들조차 자기 부대를 이탈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독일] 제국의 힘이 무너지고 기근과 실업이 이 나라를 볼셰비즘으로 몰고 갔다. “날마다 … 전쟁이 한 달 이상 우리를 망쳤습니다. 생각해 보시오. 혁명이 퍼져나가기에 얼마나 좋은 토양이 마련되었는지. … 볼셰비즘이 [독일에서] 확산한다면 당신 나라로 퍼져나가는 데에 얼마 안 걸릴 것이오!”
영국 점령군 사령관인 퍼거슨 장군에게도 아데나워는 같은 어조로 경고하였다. 1918년 12월 30일에 있었던 대화의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결론적으로 시장께서는 불길한 볼셰비즘의 위험에 대하여 절실하게 경고하였다. 그러한 위험은 영국과 프랑스의 민중들에게도 전염될 수 있는 것이었다.” 쾰른 상공회의소 의장 자격으로 이 대화에 참여한 루이스 하겐 또한 경고하였다.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할 자금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만 평안해 보일 뿐이니 모든 위급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하였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그들의 주인의 손아귀에 놓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간절하게 경고하였다. 그리고 영국군이 민간인 지역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압류된 개인의 주택들은 물론 노동자 집단거주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점령군 사령관은 250명의 경비병을 노벨빌렌 암 링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점령군이 혁명에 물드는 것을 경고하여 개인 주택의 불편한 압류를 해지하려했다고 가정해보아도, 그 당시 그는 심각한 소동이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아직 베를린의 상황이 불확실하였다. 루르지역에서 경계경보가 전해졌다. 전염병처럼 퍼졌던 11월 혁명에 대한 기억은 그의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제국의 내적 붕괴의 경험이 아데나워에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을 키워주었다고 추측할만한 근거가 있다. 그러한 감각은 그의 평생 간직되었다. 이후로 볼셰비즘은 아데나워에게 결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질서가 흔들렸던 1918년과 1919년 사이의 매우 위험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쾰른과 독일의 미래가 극히 불확실해 보이던 이때 아데나워는 자기 대도시인 쾰른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영국 점령군 사령관은 모든 중요한 문제는 직접 시장과 상의할 것이라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밝혔다. 여기에는 경찰 업무도 해당되었다. 사실 이는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1918년 12월 12일에 퍼거슨 장군과 나눈 첫 대담에 대하여 만족해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서류에 남겼다. “끝으로 사령관은 나와만 상의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모든 규정의 준수에 대하여 단독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수와 경찰서장에게 사령관의 이러한 결정을 통보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대에 중요한 사안은 나에게 통보하도록 명령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성격대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영국 측이 작성한 구속력이 있는 회의록 작성을 요청하였고 결국 그가 바라던 결정 사항을 받아내었다. “사령관은 시장과 직접 문제를 협의하고자 한다.”
영국군은 노동자·군[공동]위원회도 아데나워에게 귀찮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위원회가 혁명 기간에 월권행위를 하였지만, 그 태도는 ‘전체적으로 좋았다.’고 언급하였다. 노동자·군[공동]위원회는 쾰른시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솔만과 그의 동료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시장이 영국의 힘을 빌려 그들을 궁지에 몰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노동자·군[공동]위원회가 ‘약 100명의 무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지도자는 경찰과 친밀하다.’라는 말을 무심하게 덧붙임으로써 안전에 민감한 점령군 장교가 단호한 조처를 하도록 사주한 것이 되었다. 한 영국 소령이 즉각 그들의 체포를 명령하였지만 결국 그 명령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영국군이 진주할 때부터 시청에서 쫓겨나 정치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승전국에] 점령된 쾰른시에서 중요인물이 되었다. 영국군은 그를 독일 측의 적합한 대표로 여겨 그를 존중하고 그의 의견을 경청했다. 중앙당(Zentrum)은 자기 당원인 아데나워가 비록 당 조직의 정상에 있지 않았지만, 그의 지도자 자격을 인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유주의 정당이 앞으로 어찌 될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팔크 법률고문을 동료로 여겼다. 사민당(SPD)과 아데나워는 서로에게 빚을 졌다. 사민당(SPD)이 쾰른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으로 그 힘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사민당(SPD) 동지들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쾰른 경제도 정치 영역의 결정에 좌우되고 시장 덕분에 연명하였다. 이 시기에 하겐은 솔만과 아데나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가 다양한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 시기의 그의 삶의 모토였다. 이를 위하여 어디든 최대한 함께하고 복잡한 문제에 관련되거나 중요할 수도 있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는 분명히 모든 차원에서 안전을 도모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보고서, 비망록, 민감한 대화와 관련해서는 증인을 불러들이는 것을 통하여 시의회의 모든 당의 지도부, 영국군, 프로이센 정부, 제국 정부와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전략적으로 다양한 길을 열어두는 뛰어난 기술을 익혔다. 또한 그는 이제 공개적으로 충분히 바르게 이야기하여, 의도한 효과를 거두되 나중에 책잡히지 않을 정도만 이야기하는 드믄 능력도 개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미묘한 뜻을 담은 말투의 대가가 되었고 매우 단도직입적인 것과 절차적 유연성을 결합시킬 줄 알았다. 한마디로 이 시기에 그는 자기 정치가로서의 장인 자격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물론 그도 그때나 그 후에나 그는 여전히 실수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배우는 것을 평생 멈추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과도기적 위기 때부터 20세기의 안정된 시기까지 그의 활동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은 이 정치적으로 타고난 대기만성의 재능이 그제야 온전히 전개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라인란트운동 1918~1919
1918년 11월 쾰른에서 혁명과 군사적 붕괴, 그리고 아데나워가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린 공화국의 수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라인란트 운동도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그 시작부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고 지금까지도 늘 되풀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자료와 학문적 2차 문헌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주역의 생각과 동기와 목적을 완전하게 재구성해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자명하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이루어지고 나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고 새로운 제국 헌법이 1919년 6월 제정될 때까지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이에 따라 라인란트 문제에 관한 쾰른의 입장도 수시로 변하였다. 또한 이에 관련된 많은 이들 가운데 주도적 인물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라인란트 운동이 추구했던 ‘라인공화국’이 제국 연합에 머물지, 아니면 독자적인 완충국가, 곧 제2의 벨기에가 될 것인가? 이 공화국에 라인강 왼쪽 지역만 포함될 것인가 아니면 추가로 베스트팔렌과 헤센-나사우, 어쩌면 올덴부르크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이 목적을 이룩할 것인가? 엄밀한 법적 절차를 따라 제국과 프로이센의 관련 기관과의 완전한 합의나 라인란트의 정치 세력들의 자율적인 합의, 또는 프랑스와 영국의 도움으로 목적을 이룰 것인가?
목적과 절차의 불명료성은 상황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라인란트 운동은 세 가지 점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났다. 첫째로 독일 내부의 혁명 과정, 둘째로 독일제국 영토의 재구성, 셋째로 라인강 서부지역의 미래와 관련된 전승국의 정치가 여전히 불분명하였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로 혁명 기간의 불확실성은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연맹원들이 제압당하고 1919년 1월 19일 국가의회가 선출되면서 사라졌다. 이때부터 11월 혁명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입헌국이 설립되는 길로 나아가는 전망이 밝아진 것이다. 최소한 잠시동안만이라도 라인란트 지역에서도 더는 반민주적인 공산주의 세력의 승리나 내전을 예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로 제국의 재구성, 그리고 어쩌면 프로이센의 분할에 관한 문제에서 비록 어떤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1919년 2월과 3월에 명확한 법적 조치가 마련되었다. 1919년 2월 10일에 임시 제국 통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새로운 국내 질서는 오로지 바이마르의 국가 회의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었다. 1919년 3월 13일 국가 회의는 국무총리 샤이데만의 국정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 성명은 “모든 강화조약 이전에 이루어진 국법에 따른 개편은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라인지역의 주들과 제국의 관계에 관한 규정” 또한 “온전히 독일 내부적 사안”으로 명시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프로이센의 분할 문제도 가능하다면 바이마르 의회가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최소한 절차적으로만이라도 분명히 해야 했다.
셋째로 점령군의 라인란트 정책은 가장 오랫동안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1919년 5월 7일 베르사유에서 전쟁 당사자들 간에 체결된 평화협정은 라인란트의 병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승전국의 정부들은 쾰른과 마인츠의 교두보를 15년간 점령하고 라인란트의 영구 비무장을 규정한 조치에 만족하였다. 이와 관련된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인지는 협의가 끝나지 않았다. 사실 이는 거의 가망성이 없었다. 1919년 5월과 6월 초에는 아무도 독일제국이 그 평화조약을 받아들일지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라인란트에도 분명히 훨씬 열악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점령이 15년 동안만 진행되는 경우에라도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독일제국에서 분리시킬 위험이 있지 않겠는가?
베르사유조약이 6월 28일 체결되자 어찌 되었든 당분간은 사태가 명확해졌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제 독일의 관점에서 ‘라인공화국’을 평화의 증진을 위하여 논의할 만한 방안으로 보이도록 해야 할 합리적인 외교적 동기가 사라지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라인란트 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은 중앙당(Zentrum)의 주요 일간지였던 《쾰니셰 폭스차이퉁》의 소유주와 편집진이 제기한 것이다. 라인공화국 설립을 위한 노력에 대하여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반대한 자유주의자였던 프리츠 뷔르게만이 이미 1919년에 밝혀낸 것처럼 “이 생각의 고안자”는 엘사스 지역 출신으로 본에 머물고 있던 요제프 프로베르거였다. 그는 1868년 설립된 세속사제회인 <우리의 사랑하올 아프리카의 성모님 또는 나비제리 추기경의 백인 사제 선교회>의 독일 관구장을 1911년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이 수도회의 본원은 알제리에 두고 주로 마그레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뛰어난 동양학자로 알려져 있고 스페인을 잘 알고 있으며 당연히 프랑스와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11년부터 그는 《쾰니셰 폭스차이퉁》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편집장은 칼 회버 박사였다. 그 또한 라인 운동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두 명의 언론인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들이 프랑스의 앞잡이라는 의심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물증은 제기할 수 없었다. 이 일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다음 베를린의 역사학자 헤닝 쾰러는 케도르세에 있는 프랑스 외무성의 문서에서 이 대형 신문이 프랑스에서 흘러들어온 돈으로 매매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독일이 붕괴되기 이미 반년 전에 그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첩보원의 이야기는 마치 서머셋 모옴의 《영국 첩보원》이라는 책에 나오는 것과 같다. 네덜란드의 중계인이 총 100만 마르크로 매입하면서 잔금 40만 마르크는 계약 체결일인 1918년 6월 초에 지불했다는 것이다! 거래를 성사한 대가로 15,000마르크가 중개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프랑스군 해외 첩보국의 작전은 그때까지 강하게 유대를 맺어온 중앙당(Zentrum) 신문을 프랑스가 주도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증거에 따르면 이 거래가 그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클레망소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고 쾰러의 의견에 따르면 휴전 이후 《쾰니셰 폭스차이퉁》이 견지한 노선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쾰러의 주장이 발표되자마자 그의 연구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다. 그 정도로 커다란 신문을 사는 데 겨우 1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신문의 소유주인 바켐 형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편집부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개인이 지닌 바켐의 명함 한 장이 유일한 문서 증거로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명함에 나온 이름의 머리글자는 바켐 형제 가운데 누구와도 관련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거래가 이루어진 시점이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승리가 가까운 것처럼 보이던 때였다. 그리고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와 병합을 옹호하는 중공업 기업가들에 매우 호의적인 《쾰니셰 폭스차이퉁》과 같은 신문이 즉시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노골적으로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논조를 바꿀 수 있었겠는가? 설사 비록 증거는 없지만, 바켐 가문의 누군가가 조국을 배반하는 허접한 일을 꾸몄다고 쳐도 그자가 겨우 몇십만 마르크 때문에 명예를 버리면서까지 들키면 목숨이 위험한 일을 과연 저질렀을까?
1980년 장-클로드 몽탕은 《근현대사 리뷰》라는 잡지에 논문 하나를 기고하여 요란하게 알려진 쾰러의 주장을 철저히 분해해 버렸다. 프랑스 측의 자료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하여 그는 《쾰니셰 폭스차이퉁》의 소유자가 프랑스에 매수당했다는 주장은 확실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모든 사실을 밝혀냈다. 확실히 프랑스 외무성은 1918년 11월 그 계획을 포기하였다. 그 신문의 ‘끝까지 버티자!’는 노선은 프랑스가 파악하기에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탕은 또한 휴전 이후에 《쾰니셰 폭스차이퉁》이 내세운 라인공화국 설립에 대한 요청은 프랑스 정보국의 원격 조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프랑스 외무성이 독일첩보부의 계략에 빠진 것인가? 이에 관하여 여러 가지 동기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 한 가지도 증명할 수는 없다. 몽탕이 추측하는 그러한 독일의 공작은 바켐 가문이 또는 그 가문의 어떤 한 사람이 인지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은 아닐까? 그의 정치적 의도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바로 위에 나온 추측이 맞는다면 어찌 되었든 그 신문이 독일의 패배 이후에 프랑스의 탄압을 두려워한 나머지 프로이센을 멀리하는 노선을 걸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어찌 되었든지 《쾰니셰 폭스차이퉁》의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 특히 프로베르거 자신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라인공화국’의 요청은 독일이 패망한 지 몇 주 안 되어 파리에서 구성된 정책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당시 영국이 점령한 쾰른에서 벌어진 일에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기만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프로이센 독일 황제국의 정치적 파산에서 벗어나 보려는 지역적 복잡한 상황과 결부된 전략적 술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쾰니셰 폭스차이퉁》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동기로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을 제시하고 오랫동안 선전했다는 점이다. 《쾰니셰 폭스차이퉁》을 지지하는 이들은 파리에서 오는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정보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는 프로베르거 같은 자에게서 직접 얻었다. 그러한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라인강을 국경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관철할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라인공화국’의 수립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애호하는 민족자결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쾰니셰 폭스차이퉁》에 따르면 프랑스의 병합 음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프로이센으로부터 라인란트를 분리하는 것이 또한 제국연합에서 얼마나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이 무너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쾰니셰 폭스차이퉁》 내부의 작은 집단은 목적 지향적인 조직적 여론몰이로 ‘라인공화국’에 대한 생각에 확실히 동조하는 큰 무리를 매우 빠르게 끌어모으고, 그들의 생각을 공개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제 프로이센과 제국에서 다수당이 된 사민당(SPD)과 급진적인 독립사민당(SPD)이 연합하여 정부를 구성했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어디로 발전해 나갈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프로이센 정부가 분명히 정교분리적인 노력을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노력은 새로운 문화투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으로 라인지역 중앙당(Zentrum)의 대다수와 협력하여 ‘베를린 볼셰비키주의자들’에 맞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린에서 벗어나자’는 구호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름 아닌 칼 트림보른과 같은 중앙당(Zentrum)의 노회한 거물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연로한 쾰른 출신 인사는 라인 중앙당(Zentrum) 지역 위원장으로 1917~1918년 제국의회의 중앙당(Zentrum) 지도자, 막스 폰 바덴 제국 수상 아래 제국 내무부 장관, 독일 가톨릭 민족연합회 제1의장을 역임하였다.
영국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에 쾰른시민연합회 안의 ‘라인공화국’ 지지자들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하였다. 트림보른도 연사가 되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또한 제국의 정신을 강화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호헨촐러른 왕조와는 … 프로이센과 함께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은 사라졌습니다. … 구 프로이센에대한 충성의 의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없습니다. … 이제 위대한 독일제국이 커다란 연방국으로 분할되어야 하는지 … 이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국민과 모든 당이 조직을 통하여 결정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매우 존경받는 중앙당(Zentrum) 지도자가 비교적 분명하게, 비록 그 절차에 대하여 신중히 처리하기는 하였지만 새로 나누어져야 할 제국의 연방국으로서의 ‘라인공화국’의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라인란트 운동에서 트림보른이 구현한 독일제국에 충실한 이러한 흐름은 외교적이라기보다는 내정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중앙당(Zentrum) 반대파들은 그러한 주장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구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칠흑같이 검은” 서독 공화국의 건설을 준비한 것이다. 사실 ‘시민연합회’의 대회에서도 ‘라인공화국’을 제창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 없었다.
여전히 불투명한 이 계획은 중앙당(Zentrum) 안에서도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빌헬름 마르크스는 11월 4일의 그 유명한 대회에서 쾰른 출신으로서 그 계획의 특징을 매우 잘 판단하였다. “쾰른 사람들은 모두 어찌되든 [국가 문장의] ‘새’ 한 마리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쾰른 사람들이 내가 부재하는 동안에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버렸습니다! 쾰른 사람들이 일단 분리에 관하여 가나다를 시작하며 먼저 ‘가’라고 말하면 승전국 인사들 앞에서 편안하게 그 가나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까? 일단 ‘가’라고 말하고 나면 승전국 사람들이 그 나머지에 대하여 계속 흥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이렇게 그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 이후에 이 반론은 다양하게 변형되어 논쟁적인 토론을 거치게 되었다. 제국 연합회들의 많은 ‘라인공화국’ 옹호자들은 이 계획을 베를린에 있는 볼셰비키 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고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여긴데 비하여, 반대론자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생각해 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여기에는 공화국을 독일제국의 연방국으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룩셈부르크와 같은 독립국가가 되는 길, 그리고 심지어 언젠가는 프랑스의 승자들이 이끄는 과정을 거쳐 [프랑스와] 병합되는 가능성도 내다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이들이 중앙당(Zentrum)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점차 더욱 정당 간의 불화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이미 12월 6일 사민당(SPD)은 대규모 항의 시위를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독일민주당(DDP)의 당수도 함께하였다. 동시에 민중대표회의는 프리드리히 에버트를 대표로 하여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계속 막연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은, 이 새로운 건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든 간에 몇 달 동안 많은 영향력 있는 라인란트 인물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영토를 소유한 귀족 계층에서도 어느 정도 지지 의사가 나왔다. 그들은 토지개혁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농촌 사회는 대도시의 혁명 물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쾰른 경제계의 견해처럼 적극적인 숙고로 나아가는 경우도 뚜렷해 졌다. 여기에서는 특히 몇몇 은행가들이 머리를 모으며 모든 방향으로 그들의 촉수를 내밀고 있었다. 악소문도 돌기도 하였다. 곧 ‘운터작센하우젠’ 지역에 있는 금융가의 인물들이, 예를 들어 하인리히 본 슈타인 영사 또는 알베르트 안 상무위원과 같은 인물들이 독일 시민으로 룩셈부르크 국제 은행의 감사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상실할 것을 몹시 근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프랑스 측에서 추진하고 있으며 4월 말에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막강한 상공회의소 의장인 루이스 하겐이 이 문제를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과 함께 외무부에 제출한 25면에 달하는 제안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최소한 이 시점에서는 라인강 서부 국가나 완충국의 설립을 분명히 거부하였다. 여기에는 경제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는 라인강 서부와 동부지역의 경제가 불가분으로 엮여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라인지역 경제가 제국 전체에 주는 중요한 의미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보아도 완충국 설립은 잘못된 것이다. 승전국은 그러한 완충국을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반길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의 룩셈부르크를 모범으로 하는 해결책, 곧 정치적으로는 독립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제국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방법은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가망이 없는 일이다. 하겐의 결론에 따르면 승전국의 의도는 “라인란트의 얼굴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고 완충국으로 고립되는 것은 제국에나 라인란트에나 결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고 있는 완충국이 라인강 서부지역만을 포함하는 것이든 아니면 라인란트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이는 매우 분명한 견해 표명이다. 그리고 하겐과 같은 명민한 경제계 인사가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는 라인지역의 은행계와 산업을 루르지역과 베를린의 은행계와 산업과 연결해 주는 데에 자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또한 그의 관점으로는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은 제국의 틀에서도 좀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프로이센과 단절하는 것을 찬성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눈에 뜨일 정도로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모든 계획과 논란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이는 제국의 상황이 불확실했고 무엇보다도 승전국이 어떤 생각을 관철할 것인지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 협상을 첫 단계에서 이루지 못하면 교전을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다. 프로이센과 제국 정부의 시각에서, 그리고 중앙당(Zentrum)의 정치적 반대 세력의 관점에서, 특히 쾰른의 자본가들이나 보수적인 대지주들을 매우 비열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라인란트 운동’의 다양한 분파들의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활동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프랑스 관할 지역에 있던, 그러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인 검사 아담 도르텐 박사는 1919년 초부터 점점 더 노골적으로 프랑스의 꼭두각시로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혼란스럽고 때로는 모호한 활동들 가운데 어디에서 있었는가? 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기에 모든 이들이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혁명 이후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상황에서 쾰른시의 운명을 책임지는 일을 점점 더 부담스럽게 느꼈기에 그는 모든 측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제국의 붕괴라는 눈사태가 여전히 계곡에 휘몰아치고 있을 때인 1918년 11월 9일 아데나워가 장문의 기록으로 남긴 것처럼, “시청으로 많은 중앙당(Zentrum)에 속하는 인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가운데에는 시의원인 뫼닝, 링스, 마우스, 볼링, 그리고 고위성직자인 카스테르트, 《쾰니셰 폭스차이퉁》의 편집장인 훼버 박사, 그리고 그때까지 만나본 적이 없는 프로베르거 박사가 있었다. 프로베르거 박사는 자기 정보에 따르면 점령군이 라인지역을 프랑스에 넘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 라인지역에서 독일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프로이센과 분리하여 특별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찾은 인사들은 내가 그들을 다른 정당들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고 느껴서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다음 며칠 동안 나는 그러한 완전한 거부의 태도에 대하여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민당(SPD)의 메어펠트와 솔만, 자유주의 정당의 팔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들도 상황을 직접 파악하도록 프로베르거 박사와 직접 만나도록 조치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동 논의와 토론을 통하여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라인지역을 프로이센에서 분리시키는 것에 대한 책임이 중차대한 것이기에, 먼저 다른 한편으로 라인란트가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 확실한 경우에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 논의에서 서부독일공화국은 독일제국과 연합되고 라인강 우측 지역과 최대한 단단히 연결되어야만 프랑스에 맞서는 데 충분한 저항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동의하였다. 그러한 경우가 닥치게 된다면 라인지역, 라인-헤센, 라인팔츠와 헤센-나사우의 대부분 지역, 베스트팔렌, 올덴부르크 일부가 그에 포함되기를 바랐다. 이 사태에 관하여 나와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의 공통된 확신에 따르면, 그러한 넓은 영역에서는 모두의 번영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교와 파벌들이 혼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그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지닌 생각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진심이라고 여길 수 있다. 나중에 가서 ‘라인공화국’을 절대로 반대하게 된 솔만과 팔크와 같은 정치가들은 시장이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문제를 부주의하거나 심지어 분리주의적으로 다루었다고 비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완전히 구체화한 아데나워 입장의 요점은 이미 나온 것이다. 만약 국제 정세가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프로이센과 분리한다. 이 새로 수립된 체제를 독일제국의 연방국으로 편입한다. ‘라인공화국’은 라인강 좌측과 우측 지역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결코 중앙당(Zentrum)의 공화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데나워는 요점을 정리하였다. “나는 사제와 성당 관리인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 형태보다는 사회주의적 공화국을 선호할 것이다.” 눈에 뜨이는 것은 그가 매우 정치적인 이 문제를 처음부터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늘 당파를 초월한 논의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점이다. 사민당(SPD)과 자유주의 정당이 모든 완충국에 대한 계획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진 만큼 그는 이를 믿고 중앙당(Zentrum)의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도 다른 당의 힘을 빌려 이끌고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흔히, 아데나워가 ‘라인공화국’에 동조한 것은 베를린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 제국의 수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쾰른 이외에 정기적으로 머물면서, 우리가 확보한 모든 문서를 바탕으로 추론해 볼 때, 편하게 느낀 독일 도시는 베를린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쾰른시장 재임 시기에 휴가 때를 제외하고는 매달 2~5일 정도 베를린에 머물렀다. 대부분 그는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아침이면 베를린 안할터 역에 도착하고 카이저호프 호텔의 ‘늘 쓰던 방’에 머물렀다. 그 방에는 조용한 침실과 작은 작업실이 있었다. 대부분 그곳에서 조식하면서 대담이 이루어졌다. 그러고 나서 여러 위원회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내각 청사에서 통상적인 회의가 있었고 저녁이 되면 레갈 다이너스에서 정치적 사교 모임이 있거나 극장 방문이 이루어졌다. 자주 언급되던 베를린 반대 효과라는 것은 적어도 1934년 이전에는 그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의 프로이센 국가에 대한 태도 또한 중립적인 것이었다. 그는 프로이센 국가의 다양성을 알고 라인지역의 관점에서 볼 때 덜 바람직하거나 문제가 되는 측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 재임 시기에 그의 마음 깊이 자리 잡게 된 반감을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는 없었다. 이는 사실 어느 모로든 표현되었어야 했다. 결국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자기 의견을 마음속에 숨기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른하르트 팔크는 공공연히 프로이센을 옹호하는 라인란트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그의 기억은 간명했다. “아데나워는 결코 훌륭한 프로이센 사람은 아니었다.” 그 현명한 [아데나워라는] 라인란트 사람이 불손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이제는 고목이 된 구 프로이센에 대하여 거리감을 두는 것을 누구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아데나워의 라인란트 정책이 프로이센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아직은 증거가 더 필요하다. 그의 독일제국에 대한 태도는 더욱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팔크는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이 그가 독일 민족정서와 독일 조국에 대한 충성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 충성은 쾰른 땅과 라인지역의 고향에 대한 사랑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데나워가 1918~1919년의 위기에서, 그리고 또다시 1923년에 ‘라인란트 공화국’이라는 개념에서 파악했을 장점은, 그 당시 그가 짊어져야 할 부담과 불확실성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당시 쾰른시장은 대비해야 했다. 여기에서는 프랑스의 정책에 대한 근심이 베를린에서 볼셰비키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1919년 말에는 최소한 잠깐이라도 그러한 [볼셰비즘에 대한] 근심에 [모두] 사로잡혀 있기는 하였다.
1918년 12월 말에 아데나워가 라인란트의 객관적인 상황을, 무엇보다도 전승국의 점령에 따른 장기적인 위험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는 영국 최고사령부의 위임을 받은 루그라는 이름의 대위가 12월 22일 아데나워를 방문하고 나서 작성하여 외무부에 전달한 대화록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 시장은 베를린이 경청해야 할 구원 요청을 한다. 제국의 지역과 경제적으로 분리되면 견디기 힘든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고 하였다. 곧 실업, 기근, 소요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점령군의 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지나친 약탈을 벌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숙고를 거친 정치가 숨어 있던 것이다! 점령군 사령관 퍼거슨은 주지사에게 선포하였다. “서쪽과 쾰른 사람들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 전체적인 그림에서나 개별 사안에서나 결론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전승국의 장기적인 계획은 라인란트를 제국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서쪽을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 제국은 ‘베를린 스스로 관계를 끊고 모든 것에서 물러나며’ 그러한 추세를 촉진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제국은행은 전쟁채권을 더 이상 상환하지 않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 베를린은 최대한 빨리 봉쇄를 차단하고 즉각 평화협정을 수립할 것을 촉구해야 했다. 그래야만 ‘구제’가 가능할 것이었다.
비록 제국 정부가 라인란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계속 다짐하였지만 실제로는 전혀 또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을 아데나워는 그 이후 몇 달, 그리고 몇 년 동안 자주 하였다. 프로이센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이 홀로 버려졌다고 느끼는 점령지역 대표의 무기력한 분노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라인란트가 서쪽을 지향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지닌 점령군의 주둔이 길어질수록 조만간 민중의 저항 의지가 줄어들게 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을 아데나워는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시민들을 그렇게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쾰른 사람들은 아직 제국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희망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다가오는 파국으로 그들은 서쪽에서 기꺼이 내미는 손을 잡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일단 서쪽과 끈을 맺게 되면 베를린에 대한 거부감은, 베를린 사람들이 볼 때 베를린에 대한 두려움의 상황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속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이 보고서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아데나워는 ‘서쪽을 향하는 것’은 라인란트에 위험이 된다고 여겼다. 이것은 멀리 내다보는 영국과 프랑스 정책의 목적이다! 그는 여전히 영국이 프랑스의 의도에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핵심이 되는 단어는 ‘희망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루그 대위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그가 상황을 얼마나 진지하게 판단하는지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완충국이 되면 최소한 다시 한번 독일에 합치게 될 전망이라도 지니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시장은 병합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는 국민투표로 합법화 될 것이고 이 투표에서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투표자들의 의도가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상황을 그토록 암울하게 평가하는 이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렇게 평가할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최선은 제국 정부가 봉쇄, 그리고 비점령 지역과의 경제적 단절을 해제하는 것이다. 위급한 경우에는 제국을 새롭게 재편하여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이에 대하여 루그에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승전국이 단절을 관철하게 된다면 완충국은 완전한 병합보다는 여전히 더 나은 선택이었다.
아데나워의 비관적인 상황판단에는 12월 9일 전령을 통해 전달된 그뢰너 장군의 소식이 영향을 미쳤다. 그 소식에 따르면 라인란트가 프랑스에 병합될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곧바로 제국의회 의장인 페렌바흐에게 전보를 보내어 조속히 제국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실 11월 28일 포크 원수가 1917년 11월에 프랑스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보낸 비망록에는 라인강을 경계로 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 이후로 다양한 완충국들의 수립에 관련된 영향을 미쳤다. 그 국가는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프랑스의 영향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1919년 3월 말에 파리 정부는 이러한 노선을 추구하였다. 아데나워가 근심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데나워를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기회주의자로 여기는 이들은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점을 지적한다. 첫째로 아데나워는 《쾰니셰 볼크스자이퉁》 주변의 제국을 등진 독립주의자들의 목적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그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아데나워는 태도가 최소한 불분명한 이들이나 집단이 큰 목소리를 내는 회의나 상담에 자주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셋째로 무엇보다도 1919년 3월까지 그가 도르텐 박사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 상황에서 멀리 있는 이들에게는 불신과 오해를 야기했고 야기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비난에 대하여 결국 그의 의무는 모든 이에게서 정보를 청취하고 주도권을 쥐는 것이라고 그때마다 반박하였다. 아데나워가 지속적으로 조언을 구한 당 지도부는 이에 대하여 그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도르텐과의 관계도 유지되었다. 이 사람은 프로베르거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를 공격하며 아데나워가 1900년 피서 여행 때 한 번 만났다고 하는 자기 숙모를 들먹이기까지 했다. 분리주의자였던 검사가 쾰른시청을 세 차례 방문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아데나워가 프랑스인들을 공개적으로 만나기 이전에 일어났다. 마인츠와 비스바덴에서 독립운동 정치의 차원에서 커다란 활동을 전개한 도르텐은 아마도 쾰른 밖에서는 중요한, 쾰른시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듯이 행세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이미 리비에라에 정착하여 살아가던 도르텐은 1937년 자기 기억을 글로 남겼다. 그 책의 제목은 통속극과 같은 《나의 반역》이었다. 이 원고는 1945년 다른 형태로 프랑스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많은 회고록에서 흔히 나오는 것보다 더 강력한 자기합리화와 절반의 진실이 잔뜩 섞여 있었다. 여기에서 도르텐은 프랑스 대중에게 자기 계획이 좌절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한 큰 ‘검은 괴물’은 아데나워였다. 아데나워는 “타고난 기회주의자이며 음모꾼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가능한 경우에는 안전한 둥지에 머물렀다.”
도르텐의 주장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1919년 1월말에 결국 영국군 지역이든 프랑스군 지역을 포함한 점령지든 상관없이 ‘서부 독일 자유국가’를 세우고자하는 의도를 이미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도르텐은 마인츠의 프랑스 본부에서 파리의 의도에 관하여 정확한 것을 알아낼 것을 아데나워에게 확언하였다. 또한 남부 라인지역의 큰 도시들의 시장들을 ‘서부독일공화국’의 문제에서 아데나워와 연결하도록 할 것을 확언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관점에서 그가 잘 모르는 ‘검사 도르텐 박사’와 나눈 두 차례의 대담에 관하여 언급하는 가운데 첫 번째 대담에서 도르텐이, 전혀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경솔한 인상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두 번째 대담에서는 도르텐이 건방지게 굴어 그의 인격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보게 된 대로 아데나워가 이 골칫덩어리를 처음부터 멀리하지 않은 것이 그의 평생의 정치 여정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이 실수는 아데나워가 에커르트 교수에게 마인츠와 비스바덴에서 그 [도르텐] 변호사에 관하여 뒷조사해주라고 부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훨씬 더 조심했음에도 극복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를 매우 좋게 본 베른하르트 팔크도 아데나워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하였다. “그는 낯선 사람에게 건전한 불신을 가지고 다가간다. 그러나 곧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려버린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하여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너무 빨리 승진하다 보면 추락도 빠른 법이다. 그는 사람을 너무 빨리 잃는다.” 불신과 회의는 아데나워의 긴 인생에서 늘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러나 도르텐의 경우에는 위험에 대한 본능적 감각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다. 도르텐이 얼마 안 되어 커다란 반역자의 본색을 드러내자 아데나워는 그와의 접촉을 평생 단절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소규모의 사람들과 아데나워가 나눈 대화를 녹취하거나 뜻풀이를 하여 기록한 것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들의 관심을 끈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자기 본심을 철저히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경청만 하며 침묵하거나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대화 상대편을 흔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가 대화에서 얼마나 자주 매우 막연한 상황분석을 제시했는지를 보면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그의 대화상대는 그러한 분석에서 악의적인 이상한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었고, 그의 인격에 대한 신랄한 판단, 사태의 진행에 대한 비관적인 불평을 제기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는 분명히 많은 논의를 통하여 바른 길을 찾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자기 생각을 시험하고 수정하고, 또한 당연히 대화 상대방의 생각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긴장이 풀어지면 그는 대화를 매우 즐기면서 때로는 거의 무절제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가끔은 놀라운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자기 뜻을 그렇게 형성하는 방식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단점도 있다. 대화 상대자도 자기 나름대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 형식의 숙고, 곧 매우 유보적인 태도로 포장된 생각이 최종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삼자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럴 수는 있지만 늘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아데나워는 곧 탁월하고 신중한 전략가라는 명성을 제대로 얻게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으로 대화 상대방의 주의를 끌어야 할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당연히 먼저 질문 형식의 미루는 태도나 신중한 ‘만약 … 그렇다면’이라는 식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관심에 관련된 말을 듣고 싶어 하였다.
라인란트 운동에 관한 도르텐의 보고서에는, 분명히 증거를 대고 반박할 수 있는 거짓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아데나워에 관하여 쓴 것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아데나워에게 말한 각각의 내용은 재구성이 불가능하다. 아데나워의 행위와 추구하는 것 뒤에 음험하거나 단순히 의심스러운 의도가 있을 것으로 여기는 비판적인 사람들이, 뛰어난 사기꾼의 기록에서 직접 당사자가 말한 것 이상으로 좀 더 큰 사실을 바로 알아내고자 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비록 당사자가 말한 것도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아니어도 말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그 당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스바덴의 검사와 몇 시간 대화를 나눈 것 때문에 너무나 큰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1919년 1월 말에 아데나워가 관찰, 판단, 숙고의 단계에서 벗어났음이 확인된다. 한편으로 그는 이제 ‘서부독일공화국’이 독일제국 안에서 프랑스의 라인 정책을 막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회의의 수립만이 그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분명한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곧 2월 6일 바이마르에서 시작될 헌법 논의의 영향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1월 28일 당과 접촉한 다음에 2월 1일에 승전국이 점령한 라인지역에서 독일과 프로이센 국민회의에 선출된 모든 의원들, 그리고 더 나아가 라인지역 지방위원회 의장단과 아헨, 본, 크레펠트, 뮌헨-글라트바흐*, 노이스, 라이트, 자르브뤼켄, 트리어, 코블렌츠의 시장들을 쾰른시청에 초대한 것은 철저히 자기 논리에 따른 것이다. 시장들을 초대한 것은 프로이센의 헌법 초안에 자극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초안은, 일정한 주민을 대표하는 모든 지역연합회의 대표에게 기존의 연방국에서 분리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주도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곧 헌법준비위원회에 들어가는 라인지역의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서부 독일 연방국의 의도를 그가 마련한 절차에 따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뮌헨-글라트바흐[München-Gladbach, 역자주 – 현재의 Mönchengladbach]
나중에, 예를 들어 도르텐과 같은 사람은 아데나워가 이 회의를 소집한 목적이 ‘라인공화국’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 독일민주당(DDP)의 반대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쾰니셰 폭스차이퉁》은 2월 1일 아침에 라인란트 의원들이 ‘세계사적 분기점 앞에’ 서 있다고 주장하며 라인란트 의원들은 라인지역 자유국가의 수립을 국민회의 개최 전에 최대한 추진하여 그 수립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데나워가 한 연설을 정밀하게 읽어보면 그가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즉흥적으로 말하거나 위험한 독립 계획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매우 심사숙고하여 논리적으로 쓴 ‘독일제국과 연합한 서부독일연방국을 무조건 수립하자는 호소문이었다. 이 국가는 가능하다면 라인강의 동쪽과 서쪽 지역 모두를 포괄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연방주의적 생각이 동기로 작용하지 않은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심지어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제국이 하나의 통일 국가가 되어 연방국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어 나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남부 독일 국가들이나 전승국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당시 왜 그가 통일론자가 되었을까? 그가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주장한 것처럼 제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프로이센의 우월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결정적 동기는, 프로이센을 분리하여 제국이 좀 더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구성하려는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 당시 제국 안의 분위기는 어떻게 해서든 연방국의 요소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는 그가 바라는 부작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요 동기는 외교적인 상황판단과 그에 따른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아데나워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두 파벌이 싸우고 있었다고 한다. 한 파벌은 국수주의자들로 라인강을 정치적 경계선으로 삼기를 바랐다, 다른 파벌은 라인지역을 일종의 완충국으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이를 어찌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독일은 전혀 힘이 없습니다. … 미국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별 조처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영국만이 남는다. 비교적 이른 이때 이미 아데나워는 프랑스-영국 연합국이, 승리로 마무리된 종전 이후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압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날카롭게 파악하였다. 프랑스가 “우리의 산업이 발달한 엘사스·로트링겐지역”을 확보하여 강해지면 영국에 심각한 경쟁자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강국이었다. 식민지를 둔 대립과 영국의 안정 요구를 고려해 보면 미래는 비교적 분명해졌다. “그래서 영국은 지나치게 강력해진 프랑스에 맞서 대륙의 약해진 강국인 독일과 연대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따를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국이 단독으로 프랑스의 라인지역에 대한 계획에 맞설 것이라는 희망이 도출된다. 실제로 이는 1919년 4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전쟁 반대론자의 의견에 따르면, 프랑스만이 아니라 “프로이센 또한 유럽의 악령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센은 문화에 적대적이고 공격을 즐기는 군사주의를 애호하였습니다.” 영국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라인지역 계획을 차단하는 데 성공할 기회는 오로지 프로이센의 와해와 서부 독일의 연방국의 수립으로만 마련될 것이었다. “이러한 서부독일공화국은 그 크기와 경제적 의미에서 새로운 독일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에, 그에 맞게 독일의 외교 방식에도 그 공화국의 평화에 우호적인 정신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연설은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곧 한편으로는 미래의 바이마르 헌법 준비 위원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퍼거슨 사령관의 직무대리인 시드니 클리브 장군을 통하여 자기 입장을 영국 정부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2월 1일의 회의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고 분명히 그러한 두 가지 의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아헨 시장 파르비크만이 어느 정도 다른 생각을 지녔지만, 만장일치로 라인란트를 제국에서 분리하려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서부독일공화국’이라는 주제에 뜻을 모았다. “프로이센의 분할에 관하여 깊이 숙고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구성한 위원회에 독일제국과 연합하고 독일 국민회의를 바탕으로 하여 수립될 독일 헌법에 기초한 서부독일공화국의 수립 계획 작업을 위임한다.” 이 위원회에는 모든 중요한 당의 대표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아데나워가 의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독립파들을 교묘한 책략으로 배제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르텐의 회고록의 많은 부분과 아데나워의 ‘반역’에 대한 분노가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후로 프랑스인들은 아마도 도르텐이 이야기한 것에 영향을 받아 아데나워를 프랑스의 라인란트 정책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로 여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클레망소도 자기 회고록에 쾰른시장에 관한 불쾌한 감정을 몇 줄 남겼다.
‘라인란트 운동’이라는 주제는 이제 최소한 쾰른에서는 거의 종료된 것이 되었다. 여전히 라인란트의 독립적인 행보를 염두에 둔 집단은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정책이 실제로 1919년 4월부터 아데나워가 바라던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자신은 쾰른에 주둔하는 영국 대표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최대한 스스로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파리는 독일과의 평화 조약에 관하여 논의하는 가운데 런던의 강력한 반대에 당면하게 된다. 또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반대 진영에 섰다. 앵글로·색슨 측은 합병 계획에도 반대했지만, 라인강 왼쪽에 자율적인 프랑스의 위성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하였다. 승전국 정부들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해결안이 마련되고, 이 안은 1919년 5월 7일 베르사유에 도착한 독일 평화협상 대표단에게 제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프로이센에 속한 라인란트는 (자르지역을 제외하고는) 독일제국에 남게 되었다. 다만 라인강 서부지역은 라인강 동부의 교두보와 함께 15년 동안 승전국의 점령 아래 놓이고 라인강 동쪽에는 폭 50km의 비무장 지대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승전국의 새로운 구상은 아데나워의 마음을 전혀 달래주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였다. 라인란트가 15년간 승전국의 점령 아래에 놓여 제국과 분리되는 것에 대한 그의 근심은 더욱 심화되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이 공고되고 나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한 달 내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2월 1일 회의의 기조연설에서 제시한 방안이 승전국의 라인란트 계획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없는지에 관하여 영국의 의사를 타진해보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영국 측의 대화 상대는 클리브 장군이었다. 그도 비슷한 암시를 주면서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발언하였다.
아데나워는 포흐 원수의 본부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시도하였다. 쾰른에는 작은 규모의 프랑스 장교들로 구성된 ‘연합군 육상 해운 위원회’가 주둔해 있었다. 5월 말에 이 위원회 위원장을 만난 아데나워는 모든 당사자에게 유익하게 될 서부 독일 연방국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전달하였다. 그는 이 연방국 동쪽에 있는 프로이센보다 더 민주적일 것이며 제국의 내치와 외교에 친평화적인 의미에서 영향을 미치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이 국가가 제국에 계속 속하면서 평화[협정]의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전에 영국을 상대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대화에서도 그러한 제안을 연합군 측에서 해야 한다는 점을 프랑스 측에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래야만 독일에서 그가 바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도르텐과 같은 인물을 통하여 프랑스가 라인 정책을 망쳐버리지 않도록 해야만 그러한 생각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화의 내용은 상부로 보고되었지만, 아데나워의 생각은 당시 프랑스의 정책에는 맞지 않았다. 도대체 [그 당시] 아데나워가 누구란 말인가? 베르사유조약 비준 몇 주 전에 그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제국 정부와 국민회의 다수파만이 다룰 문제였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생각은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데나워는 제국 수상인 샤이데만에게 클리브 장군의 희망에 찬 것으로 보이는 말을 전하면서 현 사태에 대한 자기 생각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하고, 제국 정부가 베르사유조약 초안에 대한 반대 제안을 하는 데에 서부독일공화국에 관한 구상도 반영하도록 촉구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그는 샤이데만에게 간곡하게 경고하였다. 평화 조약이 “원안대로 비준되어 승전국이 … 15년 동안 또는 그 이상 무기한으로 라인란트의 점령을 유지할 권리를 얻고 내정 간섭의 전권을 받게 된다면 독일이 라인란트를 잃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샤이데만은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클리브 측이 준 정보를 속임수로 여기고 평화 조약의 기본 골격은 완화될 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알베르트 국무차관은 라인지역을 어차피 잃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라인공화국에 라인강 오른쪽 지역을 더하게 되면 제국은 더 큰 영역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1919년 2월 1일 수립한 서부 독일 정치 위원회를 그해 5월 30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집하였다. 여기에서는 확실히 그 출처가 매우 의심스러운 정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 점령지역의 총사령관인 망젱 장군이 마찬가지로 일종의 타협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책임지는 것을 솔직히 힘들어했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그는 결코 민중의 대변인이 아니었고, 이미 전개된 상황을 볼 때 “최소한 예측이 가능한 차원에서” 라인란트를 잃게 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책임을 더 이상 지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는 위원들에게 다짐하기를 베를린의 정부에게는 그 위험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생각에 베를린 정부는 슐레지엔과 단치히의 운명에만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이 말이다.
아데나워에게는 모든 예측 가능한 사태의 전개가 똑같이 위험해 보였기에 그의 비관주의는 특히 심각했다. 평화조약이 비준되면 상황에 떠밀려, 특히 목적을 의식한 프랑스의 정책으로 [라인란트가] 제국에서 분리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가 평화조약 서명을 거부한다면 프랑스가 자기 관할지역의 지지자들을 통하여 ‘라인공화국’을 선포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전투의 재개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독일의 라인란트에 종말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결국 그 회의에 모인 이들은 외무장관 브로크도르프-란트차우 백작과 베르사유 평화협상 독일 대표단에게 조언을 전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조언에 따르면 제국 연맹 안에 ‘서부독일연방국’을 수립하면 평화협정에 따른 라인란트의 운명이 훨씬 나아질 것이었다. 외무장관은 그 일을 추진할 것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검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제국의 틀 안에서 하나의 라인공화국이 수립된다면,” 그가 손으로 회의록에 덧붙이기를, “그와 동시에 평화조약에 명시된 점령과 독일로부터의 경제적 단절이 중단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면 전승국이 그러한 국가를 특별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점진적으로 독일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상황이 급박해졌다. 1919년 6월 1일 토요일에 도르텐은 프랑스 총사령관인 망젱 장군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와 벨기에 점령지역에서 ‘라인공화국’의 선포를 감행한 것이다. 비스바덴에서 일어난 반란은 분명히 이 라인란트 운동 당파에게 모든 면에서 굴욕이 되는 일이었다. 프랑스가 비스바덴의 지방의회에서 꼭두각시 공화국을 선포하도록 뒤에서 선동했다는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이 일로 독립 ‘라인공화국’의 생각이 종말을 고하게 된 것뿐만이 아니다. 독일 연맹 안의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도 이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도르텐의 쿠데타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상황에서 영국군은 자기 담당 지역에서 누가 주인인지를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클리브 장군에게 강력한 제재를 해줄 것을 권유하였다. 클리브 장군은 매우 침착한 조치를 택하였다. 반란이 일어난 날 그는 쾰른 언론의 편집장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비스바덴에서 일어난 일을 커다란 제목도 붙이지 말고 아무런 논평 없이 보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말하자면 명시적인 무시였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영국의 클리브 장군의 부탁으로 한 영국군 장교에게 선언문 내용을 받아 적도록 하였다고 말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국가 형태의 어떤 변경도 금지되었다.
6월 1일의 사건을 어떤 식으로 전하든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데나워가 드디어 도르텐이 대표하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명백하고 확실한 견해를 밝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19년 6월 6일 라인의 대표단이 베르사유에 머물던 브로크도르프-란트차우 백작과 대담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일치기 방문이었다. 파리에서 몇 시간 동안 중간 기착을 하면서 그는 자녀들을 위하여 커다란 풍선 몇 개를 구매하였다. 그와 함께 여정에 오른 사람은 쾰른 지방장관 칼 본 슈타르크였다. 그는 3주 후에 점령지역의 제국 특명 관리가 된다. 그리고 루이스 하겐, 중앙당(Zentrum)의 정치가인 트리어의 루드비히 카스, 코블렌츠의 프리드리히 뢰나르츠, 쾰른 사민당(SPD)의 빌헬름 솔만도 동행하였다. 브로크도르프-란트차우 백작은 그에 앞서 베를린의 당국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제국 연맹 안의 ‘라인공화국’의 수립으로 평화조약의 내용을 완화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막연한 정보를 ‘승전국의 미끼’라고 지칭하였다. 기록에 보면 “그 라인의 신사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크도르프-란트차우 백작은 쾰른 사람들에게 좀 더 압력을 넣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밤에 대표단과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쾰른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쾰른에서 다음 날 아침 폰 하르트만 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은 백작에게 프랑스에 유리한 분리주의 운동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였다. 이곳 쾰른에서는 오히려 프랑스에 대한 깊은 증오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제들은 모두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도 하였다. 근본적으로, 백작이 받은 인상으로는 라인란트는 평화조약 비준을 예상하고 심지어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여전히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평화조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은 동안에, 장기적인 점령 기간에 분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악몽이 그가 대담한 행보를 취하도록 재촉한 것이다. 그는 제국 위원인 프란츠 폰 불을 통하여 프랑스와 접촉하여 영국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측에 해결 방안을 마지막 순간에 제시해 보려고 하였다. 1919년 6월 16일에 그는 폰 불에게 위임장과 함께 문서 하나를 전달하며 그것을 활용하도록 부탁하며 말했다. “귀하는 그 내용 가운데 전달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권한이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그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랑스는 미래의 재건과 보장을 원합니다.” 프랑스는 독일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해야 안전이 확보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토화된 독일은 프랑스가 바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낼 상황이 안 될 것이었다. “독일의 상황은 파산 지경에 이른 상인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채권자가 (곧 전승국이) 상인에게 청산 절차 이후에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전망을 마련해 주지 못하면, 그리고 채권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청산절차에서 파산자의 협력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커다란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파산된 자의 재산에서 겨우 몇 퍼센트만 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그런 식의 “섬멸 정책”은 목적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독일과 같이 숫자가 많고 강한 민족을 영원히 섬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압력이 강할수록 반응도 격렬한 법이다. “그러니 독일이 다시 강해진다면 프랑스에 복수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데나워가 출발점으로 삼은 지점이다. “독일 내부 구조의 변화가 프랑스에 미래를 보장하는 데 충분할 것이고 또한 독일에도 충분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독일제국의 틀 안에 있는 라인공화국이 근본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독일연방국으로서 그러한 라인공화국을 수립하면 프로이센의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그 결과로 독일제국의 정치적 성격이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국가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라인연방국의 목소리가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이 라인연방국은 서쪽과의 외교에서도 중재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놀라운 정보가 당도하였다. 그 정보는 베르사유 회담에 관한 브로크도르프-란트차우스 백작의 다음과 같은 보고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베르사유에 파견된 평화회답 대표단은 국내 정치와 외교적 이유로 그러한 라인공화국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다. 우리가 참여한 가운데 작성된 성명은 같은 달 7일자 《쾰니셰 차이퉁》에 게재되었는데, 이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리고 이 땅에 들어선 평화회담 대표단과 정부의 의도를 외국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평화조약의 조건이 완화되어 [독일이] 그 조약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예측 가능한 시간 안에 [전쟁 피해] 배상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게 될 때 그러한 방법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라인공화국 수립과 동시에 평화조약의 그러한 완화조치를 통해서만 독일과 이웃 국가 사이의 지속적인 평화가 가능하다.”
《쾰니셰 차이퉁》에 게재된 문제가 되는 기록에 따르면 라인지역 주민들은 “정치적 성향, 사회적 지위, 종교의 구분 없이, 제국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르텐과 그의 측근이 문서로 작성한 선언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졌다. “여기에 나온 라인란트의 대표들은 평화협정 대표단과의 대담에서 제국 정부가 통일을 위한 노력과 거기에 따르는 바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라인지역의 문제를 라인지역의 의원들과 함께 독일에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확고한 인상을 받았다.” 이것이 프랑스에 대한 경고였다 하여도, 결코 매우 분명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파리는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았다.
28일이 되자 베르사유조약이 조인되었다. 프란츠 폰 불이 1919년 7월 9일에 쓴 편지는 아데나워에게 프랑스 측의 접촉 인물이 보인 관심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그리고 현실이 보여주듯이 아데나워의 비관주의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점령에 따른 부담이 그 이후에 심각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이 점령한 쾰른은 상당히 유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그때부터 비점령지역의 독일 경제와 영국과 벨기에의 국민 경제 간에 일종의 다리가 연결된 것이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1923년 루르지역을 점령하자 쾰른 만의 영국 점령한 지역은 많은 이에게 일종의 ‘성인들의 섬’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나름대로 이 난처한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형편이 나쁘기 보다는 좋은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알아챘다. 쾰른의 근대화를 위한 그의 원대한 계획이 증명한 대로 그는 단호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이룩할 줄 알았다. ‘서부독일공화국’이라는 생각은 조용히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바이마르의 헌법 논의에서 프로이센을 나누려는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것이다.
프로이센은 1919년 초부터 노골적으로 쾰른 친화 정책을 펼쳤다. 베를린 정부가 쾰른의 많은 요청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연합국에] 점령된 도시의 외교적으로 드러난 상황이 프로이센과 제국과의 더욱 긴밀한 결속을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아데나워가 1920년 12월에 라인지역 지방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을 수 있고 1921년 5월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당시에 중앙당(Zentrum)의 핵심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아데나워 자신만이 아니라 내외적으로도 쾰른의 최고 대표가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그가 자격이 있다고 믿은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아데나워에게 개인적인 만족도 가져다주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영역을 방해하여온 뒤스부르크의 시장이었던 칼 야례스와 훨씬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종전 때부터 쾰른을 독일제국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로 만들고자 한 그의 원대한 계획은 프로이센 정부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빠른 진전을 이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곧 녹지대 조성 사업이나 대학교의 설립, 또는 항구의 건설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서부독일공화국’에서 프로이센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라인국 계획도 도움이 되었다. 베를린 정부는 이를 통하여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어려움에 처한 쾰른을 위하여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거의 잊힌 라인국 계획을 다시 한번 잠깐 들고나왔다. 1923년 여름과 가을에 루르지역의 점령으로, 소극적 저항의 실패 이후 그리고 제국 전체의 위기 속에서 인플레이션이 몇 달 동안 라인란트를 어느 모로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완전한 경제적 붕괴를 막기 위하여 이번에도 위기의 산물인 ‘서부독일공화국’의 계획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다시 한번 포기되었다. 상황이 예상치 않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서부독일공화국’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아데나워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었다는 확신은 그리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쾰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다시 손을 대는 긴급조치였다. 그가 가끔 입에 올리는 근거도, 곧 ‘서부독일공화국’이 제국 연맹 안에서 돋보이는 ‘평화 친화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과대평가할 일이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서유럽 열강에 맞서 제기한 주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병합 정책이 특히 라인란트와 루르지역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누구보다도 아데나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그는 라인란트 사람들의 이른바 ‘평화 친화적’ 태도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오히려 원래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정서를 등에 업은 것이었다. 이 정서는 그 당시에 서유럽 열강에 널리 퍼진 것으로 제국을 상대로 이성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에 방해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사실 처음부터 대화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핵심에는 처음부터 실패한 ‘서부독일공화국’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장기적으로 효과가 더 좋은 것은 다른 시도였다. 그것은 시장 재임 초기에 시작된 것이다. 곧 정치적 논쟁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국가적인 공통된 경제적 관심사를 논의에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가장(Pater familias)
쾰른시장으로서 세상의 모든 구석과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에 맞서 싸우는 동안에도 그는 사생활을 새롭게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 1919년 8월 25일 그는 쾰른 대학 교수인 피부과 전문의 페르디난트 친써의 딸인 구시 친써와 혼인하였다. [그의 형] 한스 아데나워가 혼인성사를 거행하였다. 쾰른에서는 여전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기에 신혼여행은 롤랑스에크에서만 하였다. 그곳에서 보내는 짧은 신혼여행 기간에도 이 젊은 여인은 쾰른시청에서 다녀가는 인사들을 통하여 자기 미래에 놓인 것에 빨리 적응하였다. 이 여인은 자주 자기 의붓딸인 리아 아데나워에게 자주 말하였다. “절대로 시장하고 결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이후 29년 동안의 행복한 혼인 생활을 한 이 부부와 관련된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 깐깐하고 안팎으로 엄청난 긴장 속에 있는 남자가 더 나은 아내를 찾을 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매우 컸다. 19살이나 차이가 난 것이다. 첫 번째 혼인에서 난 자녀들은 각각 9살과 7살이었다. 게다가 친써 가문의 종교인 개신교가 그들의 결합에 장애가 되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여자가]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이미 서로를 오래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친서의 집은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있는 아데나워의 집 곁에 있었다. 엠마 아데나워가 살아 있을 때부터 두 집안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아데나워의 자녀들은 그 이웃집을 왕래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열린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작품을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와 아데나워가 좋아하는 이중창의 민요는 이웃 간의 정을 돈독하게 하였다.
사생활에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의 정원사와 장미 애호가의 모습으로 대중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정원 가꾸기는 그가 평생 매우 애호하던 일이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는데 여기에 더하여 음악을 즐기는 것도 남달랐다. 아데나워 자신은 악기를 연주할 줄 몰랐다, 그 대신에 그의 가족 전체가 중산층의 가정음악을 즐겼다.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에도 한 동안 독일 가정이 이를 즐겼던 것처럼 말이다.
화목하고 다정한 집안 출신의 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은 노쇠한 홀아비를 다시 사교계에 나서도록 이끌었고 콘서트와 극장에 끌고 가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설 줄도 알았다. 한마디로 아데나워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핵심적인 의미에 공감한 것이다. 1922년 아데나워가 뮌헨에서 개최되는 가톨릭의 날을 앞두고 유물론을 극복할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아데나워의 집안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 그리고 각 가정 안이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째 의무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우리 가정 안에서 기독교의 삶을 실천해야지만 이러한 근본 원칙을 공공 생활에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시 아데나워는 적응력이 뛰어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서 새 종교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데나워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과도 매우 잘 지냈다. 양육은 언제나처럼 엄격했고 신앙심은 무엇보다도 가부장적으로 지배하는 아버지를 따랐다. 자녀들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들이 읽는 책도 세심하게 통제하였다! 주일마다 가족은 삼위일체 병원에 있는 소성당으로 가서 정확히 9시에 시작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단식 계명을 엄격히 지키고 종교적 축일과 성인 축일의 관습도 중요하게 여겼다.
신혼 초에는 엠마 아데나워가 보여준 질병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였다. 1921년의 임신과 관련하여 신장병이 나타난 것이다. 아이는 생후 4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질병은 일시적이었다. 얼마 후에 쾰른시의 생활이 정상화되자 아데나워 가정의 삶도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3년 파울 아데나워가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 1925년에는 로테 아데나워, 1928년에는 여동생인 리베트가 태어나고 1931년에는 막내아들 게오르그가 태어났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휴지 기간에, 아데나워는 해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긴 휴가를 가지고자 했다. 점점 늘어나는 가족과 함께 아데나워는 해마다 최소한 4주에서 6주 동안 쾰른을 떠나 조용한 휴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정치적 상황과 통화(通貨)의 상황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하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슈바르츠발트로 갔다. 아데나워 가족이 횔렌탈 근처에 있는 노이슈타트의 프리덴바일러 온천에 머물렀다. 1923년에는 호헨 뫼르의 남쪽 비탈에 자리한 슈바이그마트 온천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서는 비젠탈과 라인탈을 넘어서 스위스 중부지역까지 내다보였다. 푄 현상으로 날이 맑을 때는 웅장한 알프스의 모습도 보였다. 1924년부터는 해마다 스위스 발리스 주의 셩돌랑에 있는 퐁 선생 호텔에서 휴가를 보냈다. 아데나워는 전쟁 이전부터 이 ‘멋진 피정의 집’(buon retiro)을 발견하고는 학우였던 요하네스 호리온과 같이 갔었다. 그는 나중에 라인지역 지방장관을 역임하였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자기 자녀들이 학교다니는 동안에 자신이 직접 자녀들을 돌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압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 없을 때면 업무에 지장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마련한 가족 모임에서 그는 아이들을 위하여 자기 교육 기술의 집약된 힘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었다. 1923년에 쓴 매우 귀한 편지에서 그는 지방 교육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그의 아들들이 며칠간 결석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의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나의 두 아들인,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니는 8학년 콘라드와 4학년 막스의 교육에 저의 휴가 동안만 전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체계에 따라 교육하였다. 발리스 주의 산으로 둘러싸인 적막한 곳에 있는 해발 2,000미터 높이의 셩돌랑에서 그는 일주일 동안 날마다 동일 목표를 향하여 걷는 계획표에 따라 산책하였다. 세상과 단절된 피서라는 명칭이, 아이 대부분에게는 그곳에 이미 10여 차례나 다녀간 아버지보다 덜 즐거운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찾는 온천과 호텔은 완전히 중산층을 위한 것으로 지금이나 그 당시의 개념으로나 전혀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피쉬탈에 있는 셩돌랑은 아무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이들만 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는 인사들 가운데에는 비행기 설계사인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공작, 대원수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성층권 비행사이며 심해탐험가인 오귀스트 피카르,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 네덜란드의 사업가인 A. F. 필립스, 스위스의 거상이며 예술 후원가인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릴케가 발리스의 뮈조트성에 머물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다. 여기에 더하여 1924년 이탈리아 파시스트에 암살당한 자코모 마테오티도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고요함과 좋은 공기는 아데나워의 만성적인 두통을 완화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따랐다. 19세기 중반까지 기록된 것을 보아도 스위스 여행가들에게 셩돌랑으로 오르는 길은 주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산기슭의 정거장인 레스퐁티스 역의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까지는 기차가 버스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대가족의 전성기 때는 짐을 나르기 위하여 12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호텔도 걸어서 도착해야 했다. 대부분 예약이 만료되는 2층의 방들에는 수도가 없었다. 사람들이 저녁에 모여 놀거나 책을 읽는 집회실도 매우 소박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아름다운 경치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것은 그 무엇에도 비길 바가 없었다. 그는 호텔 주인인 피에르 퐁도 좋아했다. 이 두 사람은 자연요법을 주제로 지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줄 알았다.
질병과 건강 문제는 이 시절의 아데나워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장남과 장녀는 자기들이 50살도 못살까 보아서 두려워하였다. 대부분 그는 일종의 식이요법을 실천하였다. 그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는 기인으로 비쳤을 것이다. 셩돌랑에서 그는 보통 우유와 장미잎차를 마셨다. 그래도 가끔은 그도 포도주를 홀짝거리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은 그것을 아데나워가 술에 취한 식탁 친구에게 비밀을 캐묻는 매우 세련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는 그가 당뇨병을 앓으면서 약 15년 동안 익힌 오래된 습관이다. 유능한 풍크 교수는 40살이 된 아데나워를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는 아직 인슐린이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절제는 그의 제2의 천성이 되었다.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모든 즐거움을 절제하고 가능하면 일과를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규칙적으로 지내는 것이 이 도시관리자의 일상이 지향하는 바였다. 아침은 아내와 함께 먹었다. 그러고 나서 8시 2분 정도에 셰퍼드를 데리고 15분이나 그보다 조금 더 도시공원을 산책하였다. 아데나워는 개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고양이는 질색이었다. 셰퍼드가 버릇이 없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셰퍼드가 죽고 나자 로트바일러를 샀다.
정확히 9시 15분 전에 그는 커다란 마이바흐 자동차에 올라 시청까지 타고 갔다. 낮 1시 45분에 그는 다시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자기 집에] 나타났다. 여기에서 이 부부는 나이가 많은 세 자녀와 점심을 먹었다. 어린아이들은 보모와 함께 특별히 만든 어린이 밥상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는 인상적인 ‘가장’의 낮잠 시간이 되었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는 지붕이 있는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누워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귀마개를 귀에 끼우고는 약 30분 정도 잠을 청했다. 때로는 침대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시청으로 갔다. 원칙적으로 그는 늦게 퇴근하였다. 부부는 흔히 밤에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출을 오래 하지 않고 대부분 10시 30분 정도에 귀가했다.
매우 규칙적인 일상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의 기분은 날씨만큼이나 변화가 심하였다. 이는 그가 쾰른의 만(灣)에 머무를 때면 거의 벗어나지 못하던 두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욱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 성질은 훈련된 극기로 대부분 가라앉혔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 사이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해심이 많고, 잘 도우며 유머가 있고 때로는 개구쟁이 학생같이 굴었지만, 주기적으로 신경질적으로 되거나 자학적이 되고, 게다가 권위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경향을 보였다. 그의 업무에 대한 근심이나 건강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짧은 여가와 휴가를 통하여 이 위대한 인물을 달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 과업을 부여받았고 1933년까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쾰른을 서부 독일에서 가장 근대적인 도시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에게는 본래 낯선 것인 개인적 안락, 개인적 취향, 정치적 유대, 심지어 가정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쾰른의 근대화
아데나워의 매제인 빌리 수트는 1918년 패망 직후 들은 것으로 여겨지는 연설에서 아데나워가 한 말을 기억해냈다. “정치적 재난의 시대가 뭔가 새로운 것을 이룩하기에 특히 적합하다.” 아데나워가 직접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생각해 낸 말이다. 시장이 쾰른에서 그리고 곧이어 제국 전체에서 유명해진 모든 커다란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상력과 추진력을 지닌 모든 이에게 그러한 위기의 시대는 사실 유일무이한 좋은 상황을 제공한다. 쾰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도 여러 조건이 유리하게 변했다. 수십 년 동안 쾰른시의 수장의 악몽이었던 요새가 승전국의 뜻에 따라 갈려 나갔다. 이렇게 하여 도시 계획을 위한 훌륭한 전망이 트이게 되었다. 더 나아가 베르사유조약의 규정에 따라, 제국이 한자 도시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을 향한 화물열차의 운송비에 종래와 마찬가지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효율이 높은 내륙 항구를 신속히 건설하게 되면 화물 운송의 일부는 쾰른을 거치도록 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라인강을 통한 화물 운송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인-쉘데운하와 연결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전후에 서쪽의 이웃 국가들, 곧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비록 해협 건너에 있지만 영국, 게다가 매우 망설이기는 했지만, 프랑스까지 독일과의 경제 교류의 필요성이 재인식되었다. 여기에서 쾰른을 거점으로 한 영국의 교두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상적인 거래 중심지이며, 또한 수익이 많은 투자처가 되었다.
동시에 병합의 열매도 무르익었다. 지금까지 쾰른에는 라인 오른쪽 지역의 병합에 따른 장점을 도시 발전과 대규모 산업기지 정책에 활용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병합을 위한 가장 최근의 노력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뿐이다. 이제야 아데나워는 발라프가 뿌린 씨앗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대규모 발전 계획을 위한 경제적 상황도 근본적으로 매우 유리해졌다. 전후 첫 1년 동안에는 소비재와 투자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서 강력한 성장 동력이 나왔다. 제국 정부의 ‘느슨한’ 통화 정책으로 성장을 위한 초기의 유리한 재정적 조건이 마련되었다. 인플레이션의 심각한 결과가 곧 뒤따르기는 했지만 융자를 받아 커다란 계획을 시도할 충분한 자금이 마련된 것이다.
끝으로 쾰른시는 대학교를 세울 계획을 실현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잃고 난 다음에는 본이 제국 안에 남은 라인 왼쪽으로 유일하게 대학을 지닌 도시였다. 점령지역 안에 또 다른 경제적 중심지를 마련하는 것이 라인지역에서 독일의 문화적 자기주장이라는 이해관계에서 긴급히 요청되었다. 최소한 이러한 논리로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모든 곳에 커다란 가능성이 보였다.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적극적인 성취의지가 전제되는 것이다. 모든 계획적인 숙고의 출발점은 쾰른 요새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아데나워는 스라소니와 같이 이를 기다려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1918년 12월 2일, 독일의 마지막 연대가 호헨촐러른 다리를 건너 동쪽을 향하여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정확히 하루 전에 아데나워가 주재하는 행정회의의 회의록에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라인강 서안과 동안의 요새 지역의 강제수용: 이 회의에서는 시장의 기조연설 이후에 만장일치로 다음 사항이 합의되었다. 곧 시의회는 라인강 서안과 동안의 요새 지역에 대한 강제수용권을 관할 국가 기관에 요청할 것을 결의문으로 제출할 것이다.” 토지 투기를 미리 조장하지 않기 위하여 이 계획은 조용히 진행될 것이었다.
요새지대는 쾰른의 라인간 오른쪽과 왼쪽 지역을 두 개의 긴 띠의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폭이 800~1,000m 정도인 외부 요새 띠에는 외곽진지, 반원형 요새, 흙구덩이, 성채의 창고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일체의 건축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사격 시야가 확보되었다. 외부 요새 띠를 따라서 내부 요새 띠가 있었다. 이것 또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쾰른시가 전쟁 이전에 부분적으로 사들여 고급 주택지역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이제 외부 요새 띠가 허술해짐에 따라 당연히 내부 요새도 완전히 다른 계획이 필요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는 추가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만족할 만한 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도시의 서쪽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갈탄 야적장이 이미 상당히 낡아서 채굴지역이 점점 더 도시 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먼지, 배기가스, 환경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자명했다. 동시에 쾰른을 둘러싼 ‘환상철도’의 관통이 서부의 새로 확보된 대지 일부를 산업기지로 활용할 매력적인 가능성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는 바람이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관계로 도시 건설의 차원에서 가장 커다란 죄악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려면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해야 했다. 곧 미래의 산업 기지를, 어느 모로든 요새 띠를 따라 라인강까지 밀어내야만 북쪽에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라인강 항구와 연결되어야 했다. 기존의 도시 면적이 산업기지와 관련된 노동자 가족을 위한 거주지를 건설하는 데에 부족하기에 쾰른 북쪽의 보링엔지역을 병합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계획은 1922년 실현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계획의 수립과 실행은 1919년부터 1923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계획에서 주도적인 인물은 프리츠 슈마허 교수였다. 그는 공상가이지만 동시에 매우 까다로운 도시설계사로, 아데나워가 매우 중요한 1920년부터 1923년까지 3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쾰른으로 초빙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계획을 추진하는 힘은 아데나워의 몫이었다. 슈마허는 아데나워와 지속적인 논의를 하면서 전체적인 건설 계획을 세웠다. 그가 1923년에 출간한 《쾰른, 대도시 개발 문제》라는 책으로 이러한 담대하고 그 당시로 볼 때 혁명적인 근대 도시와 지역 개발 개념이 제국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슈마허가 1919년 처음으로 쾰른을 방문할 때 이 도시가 그 당시의 긴박한 문제로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점령, 실업, 비점령 지역과의 경제적 분리의 위험, 인플레이션, 그리고 여러 계층의 실질소득의 감소가 이미 심각한 도시 발전 과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시장의 그 담대한 계획에 대한 회의가 널리 퍼져있었다.
그래서 슈마허는 모든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내가 [쾰른에] 오면 내가 담당해야 할 모든 것이 비누 거품처럼 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들 하였다.” 그런데 아마도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을 것이다. 정상적일 때라면 이 문제가 엄청나 보였겠지만, 오히려 비정상적일 때만 발전의 전망이 보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문화정책의 모든 결정적인 전환은 혼란한 때 가능하다. 이때는 굳어진 것을 짧은 순간에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에 부드러워진 덩어리를 만져서 형체를 부여할 용기를 지닌 사람이 없다면 통탄할 일이다.”
이 사람이 바로 아데나워였다. 슈마허의 묘사는 아데나워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매력을 조금이나마 연상하도록 해준다. 그런데 그의 회고록은 1935년에 나온 것으로, 정치적으로 이미 매장당한 시장을 슈마허가 여기에서 영원한 문학적 기념물로 만든 점에서 그를 칭찬할 만하다. “아데나워는, 표준적인 관계의 강압을 벗어날 때, 그리고 범상한 재능으로는 무기력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예상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완전히 전개되는 탁월한 특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럴 때 아데나워에게는 전략가의 상상력과 위대한 배우의 열정이 깨어난다. 나는 한 독일 도시의 이 시장이 질서 있는 관계 안에서 부여된 철저히 규정된 강압 아래에서 있었다면 그의 성격의 가장 강한 측면이 그저 묶여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자주 자신에게 물었다. 그가 이전 시대에 살았더라면 두 가지의 특성으로 뛰어난 위대한 고위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는 호전적인 정치가로서 독일 역사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기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굴의 건설 의지를 실행에 옮길 줄 아는 힘이다.”
전체 계획의 입안으로는 과제의 한 부분만이 해결되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올바른 것으로 인식된 것을 재빠르게 실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베를린 정부와 국민의회는 이에 맞는 입법기관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그다음 단계는 쾰른시 자체의 지방 정치 차원의 새로운 건축 계획의 관철이었다. 이와 나란한 많은 문제가 이웃한 기초자치단체들과 지방관청들과의 협상이었다. 영국군, 그리고 또한 코블렌츠에 있는 연합군의 라인란트위원회가 기존의 요새 띠의 형태에 대한 최종 동의를 해주어야 했다. 제국 철도 계획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야했다. 새로운 계획에 산업과 상공업의 동의도 얻어야 했다. 끝으로 엄청난 계획을 위한 자금 마련의 문제가 있었다. 모든 것은 사실 여기에 달려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수년 안으로 압축하여 근대적 쾰른을 만들어낸 일이 남긴 서류 더미를 뒤져보면, 그 계획에 천착했던 한 인물이 모든 설득과 유혹의 수단, 그리고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데나워가 애호한 것은 그린벨트 계획이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이를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의 씨앗은 대도시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아데나워 자기 인생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 말에 이른 오늘날에서 볼 때 이는 생태적 개념의 선취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감성, 동경, 계획을 반영한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잿빛 도시에서 벗어나 숲과 들로 나아가네!’라는 노래가 지어졌다. ‘반더포겔’ 곧 청년도보운동, 가족주말농장운동, 토지 개량 계획, 녹지가 있는 단독주택 [건설] 촉진이 이러한 방향을 지향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늘 밖으로 나갔다. 엠마 바이어의 신혼여행에 관한 일기장에 보면 활기차게 그린 그림들로 시작된다. 이 그림들은 신혼부부가 처음 구매한 집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담고 있다. 그 경치는 꽃들이 흐드러진 정원, 나무, 정자, 그리고 멀리 보이는 초원에까지 이어진다. 먼지 덮인 도시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다. 엠마는 자연에 어느 정도 중독된 남편의 기본적 성향을 표현하고 있다. 그 남편은 대규모 과수 플랜테이션 한 가운데 있던 프리츠도르프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나 농작물 수확 시기에 메쓰도르프에 머물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난 다음 자연에 중독된 도시의 아이는 담장 뒤의 먼지 가득한 지역에서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이제 아데나워도 자기가 어릴 때 지닌 꿈을 사회 전체를 위하여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은 이미 빌헬름 베커가 시장일 때 촘촘히 들어선 집들 사이에 자연을 들여오려고 한 쾰른의 도시 계획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가 구체적인 계획을 떠올린 것은 그가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그곳의 궁전 정원에 감탄했던 때이다.
먼저 그는 계획을 추진하는 데에 점령군의 관료제도의 기계적 사무 처리의 장벽에 부딪혔다. 연합군 라인란트위원회의 군부는 쾰른의 요새 시설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모든 것을 폭파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결과로 야기될 파편 조각이 널린 대지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는 채로 말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먼저 완전한 파괴 계획을 막아야 했다. 도시가 돌과 콘크리트 더미의 사막에서 매력적인 근교 휴양지역을 만들 자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에 있던 영국군은 아데나워와 슈마허의 설명에 설득되었다. 코블렌츠에서 의견을 제시해야 했던 프랑스 측에는 아데나워가 베를린에 머물던 요하네스 함스폰을 통한 많은 편지와 대화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이전에 맺어 놓은 좋은 인맥으로 그는 프랑스 대사관에 접촉 인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오랜 친구였던 대니 N. 하이네만은 멀리에서 접촉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했다. 함스폰은 1920년 11월에 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로랭과 함께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그는 금융계의 감찰관의 경력으로 은행계와 사업계에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양국의 경제 관계의 재건에 힘을 보태고자 하였다.” 프랑스 대사는 긴 대화를 나누면서 시장을 독일 측의 소통을 중시하는 정치가로 인식하게 되자, 쾰른시의 제안한 이전 요새 지역의 사회적 활용 계획에 대한 점령군의 반대를 완화시키는 데에 기꺼이 손을 보태기로 하였다.
그런데 베를린 당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하였다. “우리 제국 관청의 산만함은 무시무시할 정도이다.”라고 함스폰은 1921년 7월에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그러나 쾰른시 내부에서도 몰이해가 존재하였다! 1919년과 1920년에 제정된 제국 법률은 시정부가 공용환지와 공용수용을 대규모로 실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사실 요새 띠 내부의 대규모의 건설 계획이나 그린벨트 시설은 사유재산을 강력하게 침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기 농업의 일부에 손실을 보았다고 느끼는 약 1,000명에 달하는 소유주가 도시의 계획에 반대하여 몰려들었다.
아데나워는 언론을 통하여 쾰른 주민에게 직접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1920년 7월 8일 그가 《쾰르너 슈타트-안차이거》 신문에 직접 게재한 논설의 제목은 ‘쾰른의 생존 문제 – 라인강에서 시작하여 라인강에 이르는 숲, 들판, 잔디밭’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에게는 1020년 4월 기준 ‘쾰른법’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쾰른의 미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쾰른은 이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쾰른이 앞으로 돌이 깔린 넓은 황야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 주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이제 결정해야 한다.”
아데나워는 특히 그 당시 쾰른에도 만개하던 자전거 동호회를 자기의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이는 쾰른의 모든 운동 애호가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비록 자신은 운동을 하지 않거나 할 수가 없는 많은 이들처럼, 아데나워도 스포츠에 대한 특별한 지속적인 배려로 스스로 위안으르 삼은 것이다. 그 당시에 제국 전역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시장들은 이러한 동호회가 지닌 간접적인 정치적 활용이 가능한 잠재력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쾰른의 경우 분리주의자들의 폭력적인 공격이 있는 경우 긴급하게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세워진다는 점이 추가 되었다.
그린벨트 시설의 핵심은 뮝거스도르프 경기장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세운 많은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기장도 짧은 기간 안에 실현한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그 당시 상황에서 대규모적인 것이 되었다. 쾰른의 운동 시설은 그 크기, 시설, 근대성에서 제국 안의 모든 비교 대상에 비해 우위에 섰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장기적인 목적으로 쾰른을 올림픽 경기 주최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1936년 올림픽 경기 개최 신청을 결국 관철하지 못하였다. 베를린이 당첨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요새 외곽이나 다른 모든 쾰른 도시 개발 지역에서 1919년부터 대규모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불안과 가속화되는 인플레이션을 앞두고 완성되었다. 슈마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모든 것이 수포가 될 듯이 보일수록 아데나워는 엄청난 에너지를 동원하여 모든 노력을 독려하였다.”
이렇게 1920년대 초반의 도시 개발은 모든 곳에서 새로운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데나워에게는 영국군이 쾰른을 점령하고 있다는 상황이 도움이 되었다. 모든 길에서, 다시 한번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구면인 함스폰이 자기 역할을 하였고, 아데나워는 산업계도 쾰른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데에 영국의 도움을 청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산업기지 건설에서 그가 남긴 가장 커다란 업적은, 포드 자동차 공장을 새로 지은 쾰른 항구시설 근처의 라인강 언저리 고지대에 유치한 것이다. 헨리 포드 1세는 1930년 직접 쾰른에 와서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1927년에는 시트로엥과 협력하여 한 프랑스 회사의 지점을 쾰른에 유치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회사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룩셈부르크의 자본은 지속적으로 투자처로서의 쾰른에 관심을 보였다.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해외 투자자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ARBED가 칼스베르크 콘체른에 성공적으로 합병되었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와의 유대는 서쪽에 있는 외국을 연결해 주는 유용한 다리가 되었다. 1926년에는 네덜란드에서 근대적 화학섬유산업이 쾰른으로 몰려들었다. ‘글란츠슈토프-코털드스 회사’의 주식의 절반은 네덜란드 주주가 그리고 그 나머지는 영국 주주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의식적으로 서쪽의 국가경제와 맺은 유대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촉진하였다.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프랑스, 벨기에, 독일 경제의 유기적인 유대 관계”는 4반세기 후에 곧 1945년의 패망 이후 독일 정책의 새로운 길을 정의하고자 할 때 그의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의 중점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과 외국 산업의 ‘유기적인 유대관계’라는 개념과 그 실천은 1920년대 초에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는 ‘서부독일공화국’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수준으로 아데나워의 고유한 해결 방책이었다. 이 방법 이외에는 독일과 전승국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서 경제적 유대 관계는 늘 단순한 계획 이상의 것으로, 이른바 살아있는 쾰른의 현실이었다. – 특히 1918년과 1919년 사이의 전환점 이전 수십 년 동안 그러하였다.
서쪽 경제와 맺는 다리와 교통의 교차점으로서의 쾰른의 기능은 지리적으로나 지역 산업의 구조에서 보아도 매우 탁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무후무한 외교적 상황이 이러한 여건을 더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발전은 멀리 내다보는 시장의 근대화 정책이 없었다면 그토록 질풍처럼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산업 정책과 교통 정책의 이해관계를 독일의 외교적 요구와 일치시킨 장본인이다. 그것을 독일의 여론이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그는 작은 규모로 외교정책 모델을 개발하였다. 이는 4반세기 이후에 커다란 스타일로 실행된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린벨트, 내부 요새, 항구 건설, 전시장, 산업 기지 정책 계획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 해에는 또한 쾰른을 경쟁상대가 없는 독일 서부의 문화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는 결심을 보인 해이다. 여기에서 기존의 것과 단절 없는 연결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래서 쾰른의 음악계를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음악학교의 설립만이 아니라 아데나워는 박물관도 세우고 특히 쾰른 대학교의 신설도 이룩한 것이다.
시립 대학교의 건설을 위하여 아데나워는 자기 임기 전체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서 그가 학계와 맺은 관계는 학문의 실용성에 대한 기대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러한 기대에 맞는 것이 1901년 구스타프 본 메비센이 설립한 재단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매우 성공적인 독일 최초의 상업전문학교이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대학교 설립의 강한 추진력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미 아데나워의 시장으로서의 권한으로 설립한 사회정책 연구소도 직간접적으로 실천을 지향하는 학문에 대한 이해에 맞갖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에도 시의 이익에 관련되는 연구를 위하여 뛰어난 교수를 초빙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브루노 쿠스케의 연구물인 ‘경제적, 사회적 실체로서의 대도시 쾰른’이다. 시장은 거의 명령조로 독촉을 하고 연구소에 겨우 몇 달간의 시한을 주었다. 이 연구는 정확히 1928년에 ‘프레사’ 전시회 시작과 함께 인쇄물로 출판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독일 서부의 역동적인 중심점이라는 개념이 아데나워의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다. 이 도시는 경제, 행정, 의학의 현실을 강력하게 지향하는 대학교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매우 영리한 사람으로 오로지 현실적인 것만을 지향하는 대학교로는 기존의 독일 대학교들 사이에서 커다란 명성을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적, 예술사적 취향 덕분에 그는 현실적 목적과 무관한 인문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심을 지니게 되었다. 현대의 세계관에 관한 논쟁에서 대학교가 방향 제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학계의 대가인 막스 쉘러나 국가경제와 사회학의 대가인 레오폴드 폰 비제와 같은 인물이 쾰른으로 오게 된 것이다.
신설 대학교는 경쟁 상대들의 비난을 흔히 듣게 된다. 곧 중앙당(Zentrum)이 교수진의 세계관에 지나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그가 교수 초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라면, 현명하게도 어느 정도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매우 보수적인 경향을 지닌 독일 대학교들 사이에서 쾰른 대학교는 비교적 공화정에 충실하고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매우 조심스러운 설립 단계는 혁명기와 겹쳤다. 프로이센 정부에는 새로운 대학교로 라인란트의 모든 이탈 추세를 막을 추가적인 제재 방안을 손에 쥐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아데나워를 정점으로 한 쾰른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학교 수립의 민족적 기능을 기꺼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1918년 12월 21일자 건의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고, 1919년 1월 17일 아데나워가 쾰른 전문대학과 의학대학의 강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 계획이 지금까지는 애향심에서 촉진된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휴전과 이와 관련된 사건들로 라인지역의 독일 정신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프랑스의 무력적 성과와 연계되어 경계해야 할 서쪽 문화의 도전에 맞서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 질 것입니다.” 라인지역의 독일적 정신생활 – 이 또한 대학 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1919년 6월 12일에 한 설립 기념식 연설은 그러한 애국주의적 목표 설정을 내세우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목표는 나중에도 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이 대학교가 “우리 민족의 회복 작업에 기여할” 사명이 있다고 여긴 것만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는 분열과 폭동의 정신, 곧, 스파르타쿠스 운동과 볼셰비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경직된 독일 민족의 자기주장을 뛰어 넘는 유럽적 과제를 그 대학교에 제시하였다. “평화협정이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여기 라인강에서, 곧 유서 깊은 민족들의 도로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독일의 문화와 서쪽의 민주주의 문화가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유럽 민족들이 각자의 것을 올바르게 보존하는 것을 뛰어 넘어 모든 유럽 문화에 공통되는 것을 인식하고 가꾸지 못한다면, 문화적 접근으로 민족들을 다시 일치시키지 못한다면, 이러한 길에서 유럽 민족들 간의 새로운 전쟁을 막지 못한다면, 유럽은 세계적 패권을 영원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의 안녕을 위한 지속적인 민족간의 화해와 민족공동체라는 고상한 작품의 추구는 쾰른 대학교의 특별한 과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쾰른 대학교는 모든 유럽 문화가 본질적으로 동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대학교는 모든 유럽 민족들 간에는 궁극적으로 분열보다는 공통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참다운 유대, 민족들의 발전이 좀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이 대학교의 숭고한 사명이 될 것입니다.”
1919년 6월 중순, 베르사유조약의 체결을 앞둔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함 시기에 이 연설은 단순히 대학교 정책의 요청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 연설에는 외교정책의 신조가 표현되어 있다. ‘화해’, ‘접근’, ‘민족들의 공동체’, ‘민족들의 유대’와 같은 구호들은 그때부터 아데나워의 1920년대 기조연설에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절대로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우월성이나 무익한 단절에서가 아니라 교류의 능력에서 그 매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럽 공통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토양에서 자라고 번창한 민족 문화들이라는 이러한 생각에서 어떤 이는 이미 ‘민족 국가들이 [연합한] 유럽’이라는 상상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이로부터 40년 후에 드골 대통령이 제안한 개념이다.
제국 차원에서 나타난 정치적 두각
1920년대 초반의 아데나워의 일반적인 정치사상에 관하여 우리는 확실히 관료주의적인 것만을 배우게 된다.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그의 국내 정치에 관한 생각들이다. 그는 [정치에 발을 들인] 첫날부터 그는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그의 김나지움 1학년에서 3학년까지의 동창으로 마리아라흐 수도원장인 일데퐁스 헤르베겐과 같은 군주제를 옹호자들과 대화는 가능하였다. 그러나 입헌정치에 관한 견해 차이는 간과할 수가 없었다.
1922년 8월 뮌헨에서 개최된 가톨릭의 날에서 아데나워는 의장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뮌헨의 비하엘 본 파울하버 추기경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는 거의 노골적으로 비텔스바흐 왕조의 부활을 추구하였다. 대니 N. 하이네만은 그 당시 우연히도 뮌헨에 와 있었는데 30년이 지난 후에도, 아데나워와 파울하버가 서로 얼굴을 붉히며 헤어지던 모습을 기억하였다.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의 발전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 외무장관이었던 발터 라테나우의 암살 이후 그는 함스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희 생각으로는 우리는 3년 전에 비해 내부적으로 훨씬 더 분열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예상치 못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 것 같습니다.” 1922년의 가톨릭의 날에 그는 자기 깊은 비관주의적 상황판단에서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그는 사회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 것으로 보았다.
“먼저 전쟁의 무게와 굶주림이 몇 년 동안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부담이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모든 것을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고난은 끝이 없고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참한 상태에 놓인 채로 또다시 4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죽어갔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쇠약해져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서야 한다면 슬픈 일일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의 어르신들! 그분들은 오랫동안의 노동으로 모아 놓은 것이 완전히 가치 없게 되어 비리고,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굶어죽을 일밖에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경악스러울 만큼 확실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비극을 더 나은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휘황찬란한 유물과 겉치레로 우리를 속여 알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한 그 뒤에 우리가 우리의 곤경과 곤궁을 감추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여기에서는 개선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고 유리한 전환의 전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이러한 희망 없는 싸움에 짓눌리고 지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놀랄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국은 물질만 생각하고 망각과 마비만 추구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받는 이 민족에게 그런 식으로 마련된 토양에서는 유물론과 물신주의가 자라나고 부도덕과 권위의 상실이 만연해질 것입니다. 유물론, 부도덕, 권위의 상실은 우리 민족에게 널리 퍼진 질병입니다.”
이 문장에는 아데나워의 시대 비판의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당연히 이는 또한 중앙당(Zentrum)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아데나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궁핍한 시절에 관해서도 1922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20년대 초반에 자신과 신앙을 같이하는 이들의 대규모 행사에서처럼 절망을 이토록 거칠게 토로한 적은 없다. 그가 여기에서 진단한 사회의 상처는 단지 세계 대전의 결과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거의 50여 년이 넘은 비기독교적인 기본원칙의 엄청난 영향,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유물론의 두드러진 지배가 있었던 것이다! “기술적 진보와 이를 통한 부의 축적은 “전통, 정신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의 의미와 그에 대한 이해를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 당시 그가 보기에 특히 사악한 것은 대도시였다. 경험에 따르면 “정신적 국민 질병”이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여기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속도로” 시골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근본적인 대도시의 질병은 그 시민들이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도시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처럼 마음을 안정시키는 균형, 긴장 완화, 활기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은 땅, 곧 자연과 관련될 때 늘 보장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작은 공동체에 속할 때 얻는 의지처가 없습니다. … 오늘날의 대도시를 낳고 키워온 여러 세대를, 독일 민족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법률제정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는 진보와 근대화에 그토록 몰입하는 대도시 시장이 하기에는 놀라운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추측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분열된 성격을 지닌 것인가? 대도시 사람임에도 계속 자연에 끌리는 것인가? 역동적인 도시 수장이 자시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직무 해결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가? 진보를 믿는 이가 그 진보로 민족이 타락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인가? 쾰른의 그린벨트 계획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이어서 그가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곳에 작용하는 유물론은 국제적인 관계도 해친다. “유물론이 퍼뜨린 씨앗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최악의 열매는 바로 전쟁입니다. 유물론과 뗄 수 없이 결부된 민중의 지배는 그러한 전쟁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된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 이에게는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이 무시무시한 재난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 앞에서 아데나워는 그곳에 모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호소하였다. 곧 가정 안에서 기독교 생활을 실천하려는 노력, 가톨릭 신자들이 일치하여 강하게 나서기, 여론에 가톨릭 종교의 ‘활동과 공로’를 설명하기, 가톨릭 신자들이 아닌 이들 가운데에서 동료를 찾기, 대도시의 개혁, 법과 정의의 원칙에 따른 국제 관계의 재편을 호소한 것이다.
이 연설에서는 대도시의 개혁에 관한 생각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그는 쾰른 도시 개발 계획에서 지침으로 삼은 이상향을 간단히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대도시를 장기적 관점의 점진적인 노력으로 하나의 유기체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유기체에는 하나의 상업 중심지가 있고 그 주변을 소도시, 마을들이 둘러싸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면 대도시의 시민들도 땅과 자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확실한 의지가 되는 작은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독일을 쇄신하자는 호소는 용감해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올바른 말로 들린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대라는 묘사는 사실 장황하게 마무리되고 너무 압축적인 것이었다. 45살이 된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제국 수상이 되고 싶다는 유혹이 처음으로 그의 마음에 솟아오를 때였다. 그를 잘 아는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제국 수상 후보로]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하였다. 그래서 그는 1920년 2월에 루이스 하겐이 제국의 각료였던 도이치에게 퇴임하는 제국 재무장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후임으로 아데나워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말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아데나워에게 전한 함스폰은 여기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였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귀하가 고난에 찬 제국 재무장관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쾰른에서 차지한 높은 자리를 포기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의견도 제시했습니다.” 이는 제국 정부의 정상에 오를 길이 열릴 때마다 늘 나타나는 주요 장애를 지적한 것이다.
제국의 수상과 장관의 재임 기간은 짧았다. 구스타프 슈트레세만은 1923년 가을에 제국 수상직을 단 3개월만 역임하였다. 빌헬름 마르크스나 하인리히 브뤼닝과 같이 정치적으로 장수한 수상들도 각각 내각을 2년 내지 2년 반 정도 유지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시장이라는 인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도자 인재풀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9~1920년에 소집된 국민의회의 421명의 의원 가운데에는 9명의 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치 생활이 정상화되자 시의 수장이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어떤 시장이 제국 의원과 시장 직무를 동시에 지속해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이에 반하여 프로이센 국가회의의 위원직과 시장 직무는 잘 결합하였다. 사실상 장식적인 이 회의에서의 활동은, 이들이 그렇지 않아도 많은 베를린에서의 스케줄을 국가회의의 모임에 맞추어 조절할 수 있었다.
제국의회와 내각에서 전임 시장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제국 내각에는 전임 시장 3명이 각료로 임명되었다. 바이마르 시대 전체에서는 총 102명의 장관이 300개의 각료직을 돌아가며 수행했다. 그 가운데 8명만이 전임 또는 현직 시장이었지만 이들은 이 기간에 총 44개의 각료직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정부 구역의 시장 코너’에서 최고의 스타는 전임 에센시장 한스 루터였다. 그는 9개 부서의 각료를 역임했다. 그 가운데 제국 수상직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뉘른베르크 시청에서 고위 정치가의 반열에 오른 오토 가이쓸러는 15개 부서의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동료인 카셀 출신의 에리히 코흐-베저, 뒤스부르크 출신의 칼 야레스, 전임 콘스탄츠 시장인 헤르만 디트리히는 각각 5개의 각료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때가 되면 지방 수장의 자리와 제국 정부의 자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많은 이들은 그 결정을 선거권자들이 선의로 내리도록 하였다. 그 선거권자들은 그들이 제국 정치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시장직에서 물러나도록 한 바가 있다.
아데나워에게는 제국 수상직에 대한 제의가 1921년 5월 처음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곧 이어 두 차례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다. 1921년 5월 제국은 다시 한번 외교적 위기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승전국 정부는 베를린에 최후통첩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독일제국은 1,320억 골드마르크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그리고 미지급된 금액을 최종 상환하며 전범들을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루르지역을 바로 점령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제국의 두 번째 산악 지역인 오버슐레지엔은 바르샤바의 선동으로 독일제국의회의 폴란드 출신 의원인 보이체흐 코르판티의 봉기로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렌바흐 정권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 당시 제국 수상이라는 지위는 외교적인 측면에서나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나 특공대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순수한 시민 정권이 들어서게 될지 아니면 중앙당(Zentrum)이 다른 당파와 힘을 합쳐 사민당(SPD)과 연정을 이루어야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여러 후보자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를 들어 1921년 잠시 프로이센 수상을 역임한 아담 슈테거발트는 이미 분명한 거부 의사를 비쳤다. 5월 9일 밤에 열린 중앙당(Zentrum) 당내회의에서는 쾰른 출신의 당내 좌파인 외무장관 하인리히 브라운스가 사민당(SPD)도 수용할만한 명백한 수상 후보로 아데나워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그때 아데나워는 우연히도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다. 늦은 밤에 프로이센 의회 식당에서 아담 슈테거발트, 하인리히 브라운스, 트리어 출신의 루드비히 카스, 특파원인 루돌프 텐 홈펠이 참여한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자리를 뜨게 되었다. 이제 일단 모든 것에 대하여 한 잠 자고 나서 생각해 보고 그다음 날 오전에 당의장에게 자기 의견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위기가 더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노령의 중앙당(Zentrum)의장인 칼 트림보른은 독일제국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대담을 하고 나서 사민당(SPD)이 연정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에버트는 이에 대하여 몹시 격분하여 자기 당과 중앙당(Zentrum)에 다음과 같이 통보하도록 하였다. 곧 그는 “두 당이 13시까지 내각을 수립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유럽 전제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자신은 직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원칙적으로 제국 수상의 직무를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다만 사민당(SPD)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웠다. 여기에는 간접세를 크게 높이는 조세정책의 전환, ‘당분간’ 사회화의 포기, 9시간 노동제의 재도입, 수상의 재량에 따라 내각을 임명할 권한과, 내각을 나중에 교체할 수 있는 전권을 보장할 것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여러 마리의 ‘성우(聖牛)’가 도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민당(SPD), 노조, 1920년에 에르츠베르거의 후임으로 재무장관이 된 요제프 비르트를 중심으로 한 중앙당(Zentrum) 내부의 좌파들이 힘을 모아 비호하던 정책들이다. 더구나 아데나워는 여기에 더하여 자기가 제시한 것이, 단서를 내세운 [수상직] 거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새파란 초보’가 아니었고 이러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해야만 시민 정당들과의 연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앙당(Zentrum) 좌파 세력의 커다란 저항에 맞서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상황이 변한다면 나중에 다시 한번 이와 같은 조합을 위하여 나설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은 아닐까?
얼마 후에 아데나워는 이것이 단순한 전략이었다는 추측을 강력히 부인하였다. 그는 그러한 수준의 결단을 내릴 때는 자기 생각을 매우 솔직하고 숨김없이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페터 슈판 의원은 즉각 반응하였다. 곧 그들은 비르트와 다시 손을 잡고, 다시 말해서 중앙당(Zentrum) 좌파를 대표로 하는 중도 좌파 연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트림보른 또한 아데나워의 계획에 사민당(SPD)이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어서 개최된 당 원내회의에서 국무총리 슈테거발트가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안정적인 내각을 구성하려면 아데나워가 제국 수상으로 적임자이나 그것이 안 되면 비르트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중앙당(Zentrum)의 여러 의원이 아데나워를 지지했지만, 사민당(SPD)은 자기 당이 제국 수상 지명을 요구하고 슈트레세만의 독일인민당(DVP)과는 협력하지 않을 것임이 알려졌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데나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 당시 상황에서는 비르트 아래에서 사민당(SPD)과 함께 가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당 수뇌부의 다수파의 전략에 함께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전에 이들은 우파로 기우는 해결책은 관철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하였다고 여겼다. 점령군의 최후통첩이 내려진 상황에서 사민당(SPD)과의 긴 협상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제국 수상의 직무를 맡게 되면 초주검이 될 것임을 눈치채었기에 처음부터 그러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제시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조건이었다.
이 일은 언론에 신속하게 보도되었다. 하루 8시간 노동제를 폐지하라는 요구가 알려지자 쾰른의 사민당(SPD)과 노조는 이구동성으로 시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도시 전철 조합원 회의에서는 아데나워를 ‘가장 반동적인 중앙당(Zentrum) 파벌’에 속한 자로 여기며 아데나워의 제안을 ‘독일 전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였다. 쾰른시의회의 사민당(SPD)은 이와 관련된 질의서를 시장에게 전달하였다.
아데나워는 쾰른의 노동자들이 ‘최고 지도자’에 대하여 낸 목소리에 맞서 자기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하였다. 왜 그들이 자기에게 직접 와서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차별성을 부여하면서 하루 8시간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그의 제안은 결국 전승국에 지불할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한 잠정적인 방안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유일한 방책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자기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독일의 노동자 계층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잠정적으로 바꾸는 것 보다는,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라도 독일의 존립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쾰른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그 어떤 도시에 비해서도 좋은 노동 조건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기 사회적 신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논란은 곧 다른 문제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쾰른의 사민당(SPD)이나 노조가 하루 8시간 노동제에 대한 아데나워의 태도를 잊을 수는 없었다. 여하튼 그들은 그 당시에 이미 아데나워가 사민당(SPD)의 인사 정책에 대하여 처음부터 반대하였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1919년 10월 3개 계층으로 구분된 선거권 제도가 철폐된 뒤에 실시된 첫 시의원 선거로 의석수 분포가 완전히 달라졌다. 중앙당(Zentrum)은 49석, 독일다수결사민당(MSPD)은 43석, 독립사민당(USPD)은 7석을 차지하였다. 독일민주당(DDP) 소속의 ‘자유노동공동체’와 독일인민당(DVP)은 함께 13석을 차지하였다. 독일국가인민당(DNVP)에는 2석이 돌아갔다.
선거 결과를 고려하여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에 3인의 배심관 자리를 제안하였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혁명기에 현명하다는 것이 증명된 인물들이었다. 아우구스트 하스는 금속노조 출신으로 1917년부터 시의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18년 말의 중요한 주간에 노동자·군[공동]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인리히 쉐퍼는 학력이 없는 노동자로 한때 노동자·군[공동]위원회에서 시장이 파견한 감사로 일을 했었다. 아데나워는 이 두 사람의 노고를 위로했다. 누구보다도 하스는 시의원으로서 쾰른시의 이익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요한 메어펠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1918년과 1919년 사이 겨울에 프로이센 정부와 쾰른 대학교 설립에 관하여 협상하면서 쾰른시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시민 정당이 그리 반기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데나워는 이 학식 높은 마구 제작자이며 언론인으로 오래 활동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프로이센의 사민당(SPD) 정권과 늘 좋지만은 않은 관계와, 지방의회에서 사민당(SPD)이 오랫동안 다수당을 차지해온 현실에서 아데나워는 실용주의적인 쾰른 사회당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이미 아데나워가 얼마나 열심히 기업과의 유대를 추구하고 찾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포괄적인 근대화 계획을 놓고 볼 때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루이스 하겐이 자기 출세에 기여한 역할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이 두 사람의 유대는 매우 긴밀한 특징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하겐은 1919년부터 중앙당(Zentrum) 당원이 되었다. 이외에 또 다른 기업가들도 아데나워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아데나워 또한 그들을 위하여 힘을 썼다. 아우구스트 튀센과 그의 유명한 악필은 이미 화제에 올랐다. 제국의회의 중앙당(Zentrum) 소속의 플로리안 클뢰크너는 1921년 5월 아데나워를 강력하게 제국 수상으로 밀었다. 그 당시 클뢰크너는 당내의 기업가 파벌과 기독교 노조 파벌의 신뢰를 확실히 누리고 있었다. 중앙당(Zentrum)이 자금난에 시달릴 때면 1933년에 이르기까지 클뢰크너 회사가 가장 손을 벌리기에 편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염료 회사인 바이어에 적을 둔 칼 뒤스베르크 각료 또한 긴밀한 연줄이 되어주었다. 더 나아가 이제 아데나워는 휴고 슈티네스와도 연줄이 닿았다. 그는 그 당시 독일 서부의 광산업에서 최고의 거물이었다. 이러 저러한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단편적인 것만 접할 뿐이다. 거의 모든 핵심 사항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다루어졌다. 그 장소는 베를린의 ‘카이저호프’나 쾰른의 시청사였다. 때로는 아데나워가 직접 라인과 루르지역에 있는 재력가의 집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해서든 아데나워가 자기 정치적 중심을 서서히 옮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쾰니셔 폭스차이퉁》이 자신을 제국 수상으로 밀고 있는 ‘중공업계의 총아’로 묘사한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빌헬름 솔만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솔만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당연히 나는 귀하가 중공업계가 밀고 있는 후보라고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귀하가 몇 년 전에는 매우 민주주의적이고 상당히 사회적인 관점을 지닌 것에서 어느 정도 물러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슈티네스와의 관계는 사민당(SPD)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가 되었다. 슈티네스는 노조와 한때 잘 지내다가 서로 갈라섰다는 징표로 점점 더 조직화된 노동자 계층과 정면으로 맞서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1920년 5월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사안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중공업 기업가들과의 비밀 회담에서도 이를 논의할 정도였다.
아데나워가 독일과 유럽 서부지역의 이웃 국가, 곧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와의 경제적 유대의 가능성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단순히 슈티네스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슈티네스의 콘체른은 이미 전쟁 이전부터 로트링겐과 벨기에 지역에서 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슈티네스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독일의 병합 정책, 특히 벨기에와의 병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이러한 상황의 당연한 귀결이다.
독일의 패전에 대하여 이 콘체른의 주인과 그의 주요 이사진은 모순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독일인민당(DVP)과 연대했던 슈티네스가 강한 민족주의적 발언을 한 것이다. 슈파에서 열린 배상금 회담에서 그는 1920년 7월 ‘승리자들의 광기’를 비난하는 탁월한 연설을 하였다. “나는 적국의 대표단을 직접 보기 위하여 일어섰습니다.” 이는 모든 독일 민족주의자를 환호하게 했지만 이와 동시에 승전국 대표들에게는 의심과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독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이 땅딸막한 슈티네스는 커다란 두개골과 제대로 다듬지 않은 검은 콧수염, 그리고 꿰뚫어 보는 눈빛을 지녀, 빌헬름 시대 말기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전형적인 인상의 세련된 기업가라기보다는 고대 아시리아의 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대표 기업가들은 슈티네스가 프랑스 철강 사업의 강자들과 서로 이익이 되는 협정을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협상은 배상금조로 내어줄 석탄의 가격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석탄 부족에 시달리는 프랑스에 석탄 공급을 강화하고 로트링겐과 루르지역 사이의 석탄과 광석의 물물교환을 재개하는 문제도 논의하였다. 이 경제 지역은 1918년 말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의 정치계와 경제계의 거물들이 루르지역의 석탄을 강압적으로 거머쥐어 자국의 석탄 수요를 메꾸고자 한다는 사실을 슈티네스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계약을 통한 강제적인 석탄 수송이든 군사적인 점령을 통해서든 말이다. 그는 모든 강압적인 조치에 그의 베스트팔렌 사람다운 본성의 매우 억센 강인함으로 맞서기로 결심하였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 산업계에서 생각이 다른 이들과 거래 계약을 맺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곧 패권주의 정책보다는 합리적인 이해관계의 균형을 더 바라는 이들 말이다. 영국과 미국의 경쟁에 맞서 이전의 카르텔을 회복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무익한 대결 정책보다 훨씬 전망이 밝아 보이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1920년과 1922년의 독일과 프랑스의 경제 협상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를 슈티네스로부터 직접 알아낼 수 있었다. 1922년 가을의 휴고 슈티네스와 마르케스 드 뤼베삭의 협상에서 포괄적인 조정안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뤼베삭은 ‘황폐화된 지역의 재건을 위한 협력 총연합의 의장’으로서 북부 프랑스의 파괴된 지역을 위한 많은 건축 자재를 확보해 주겠다는 슈티네스의 확약을 얻어내었다. 그다음 몇 주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 간의 기업합동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이 기업합동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기업들이 함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대신에 파리의 앙리 푸앵카레 총리는 루르지역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그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프랑스나 독일이나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겨루기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슈티네스와 그 이외에 라인 갈탄 회사의 파울 실버베르크나 연합 철강회사의 알베르트 푀글러를 접촉한 것은 쾰른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더불어 독일과 서방 국가들과의 균형 정책에 관한 관심에서, 사태가 돌아가는 것에 관한 정보를 얻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쾰른의 시장은 완고한 프랑스의 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를 그 당시 슈티네스가 유명한 슈파에서 개최된 대표 회담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솔직히 나타내었다. 뮌헨에서 개최된 가톨릭의 날에 초대된 외국 손님들은 1922년 8월에 매우 명백한 말을 들었다. “중세와 근세 유럽의 역사에서 베르사유조약의 강제 규정만큼이나 모든 인간적, 모든 기독교적 근본 원칙에 모순되는 문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용적, 도덕적 빈곤에 대하여 그 조약문을 작성한 이가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저는 다시 한번 간절히 호소합니다. 프랑스는 우리를 고문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신앙을 함께하는 우리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며 그가 지지하는 대화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프랑스에 맞갖은 다른 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프랑스는 착각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