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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03. 2023

쾰른시장 2

1923~1933

1923년의 위기     


1923년 1월 11일에 프랑스와 벨기에 육군사단은 루르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루르지역 공격하는 명분은 [독일] 제국이 배상금 지불을 지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푸앵카레가 주도하는 프랑스 정부가 독일과 힘을 겨루기로 작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이유는 독일로부터 여러 해 동안 더 이상의 배상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무엇보다도 현금 지불에 대한 모든 기대를 무너뜨렸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생산적 담보물’, 무엇보다도 석탄 공급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 더하여 파리는 [독일] 제국의 완전한 경제적 무력화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2년 말에 독일은 이미 다시 과거 1913년의 수준에 이르는 양의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피부로 느낄 정도로 독일에 맞설만한 수준의 중공업을 키우고자한 프랑스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로트링겐을 다시 병합하고 프랑스 자본이 룩셈부르크와 자르란트의 철강 산업을 점차 더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러하였다. 프랑스는 자체적인 중공업 진흥에 실패한 것이다. 루르지역 점령 이전 시기의 프랑스 철광석 광산의 총 채굴량은 1913년 [철] 생산량의 48%에 머물렀다. 또 다른 원인은 독일의 제련 공장이 로트링겐이나 룩셈부르크에서 채굴한 광석의 가공 직업을 거부한 데에 있다.     


프랑스가 ‘대결’할 준비가 된 것은 또한 프랑스 외무성이 내린 국제 관계에 대한 분석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영국과의 협약 조건은 매우 완화되었다. 런던은 독일을 합리적으로 다룰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독일과 소련의 라팔로 협약은 세계대전의 두 패전국의 연대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가 동부 유럽과 중부 유럽과 맺은 동맹체제가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루르지역의 점령은 프랑스와 독일제국 사이에 일종의 ‘냉전’을 야기하였다. 새로운 민족주의의 물결이 독일을 휩쓸었다. 이는 1919년부터 [프랑스에] 점령된 라인란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정부는 ‘수동적 저항’을 선포하였다. 이는 50년 후에 평화연구가들이 ‘사회적 방어’로 명명한 방책이었다. 광업계의 노동자 계층은 파업에 들어갔다. 공무원, 기업가, 기술자들은 점령군 관청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제국 정부는 수동적 저항을 유지하기 위해 포괄적 [배상금] 지급으로 독일 화폐를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점령 세력은 그들 나름대로 자체적인 운송체계를 도입하고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 사이에 경계선을 세우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1919년 상반기에 한 번 시행했던 것처럼 현지의 프랑스 군부, 특히 코블렌츠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국 라인란트위원회 위원장인 폴 티라르는 프랑스와 벨기에가 점령한 지역의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하였다.     


쾰른 지역은 여전히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도 쌓여가고 있었다. 이미 1919년에 그랬듯이 식량 조달이 위협받고 있었다. 매우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 상공회의소장인 하겐은 수로를 통하여 네덜란드와 팔츠 지역으로부터 과일과 채소의 공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쾰른에서도 심각해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볼 때 1919년 초에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것으로 우려한 상황이 이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와 이에 편승한 벨기에가 일방적으로 독일에 맞서는 정책을 밀고 나갔다. 독일은 효과적인 저항을 하기에 너무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아데나워는, 세력 과시의 끝에는 라인강 왼쪽 지역에, 지속적인 또는 최소한 장기간에 걸쳐 제국으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을 수반하는 굴복이 이루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영국의 점령이 시작된 첫 달부터 계속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영국이 그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장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영국이 기존의 점령지역에 계속 주둔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쓰든지 민중의 소동이나 분리주의 무리의 무장 공격을 막아야 했다. 전면적인 내전의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되면 런던 정부가 기존의 지역에서 퇴각할지 모를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 군대가 쾰른 지역에 주둔하게 되고 이에 따라 독일 라인란트의 종말이 거의 확실해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여도 상황이 말해주는 대로 영국군의 주둔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동시에 런던, 그리고 어쩌면 워싱턴도 프랑스의 일방적인 무력 정책을 좌절시키도록 촉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해결책은 생각의 방향에 달린 문제였다. 이 생각은 그가 오래전부터 적절한 것으로 여겨온 것이다. 곧 자발적이고 동등한 권리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협력을 이루면서, 불가피한 경우에는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수립한 ‘라인공화국’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자기 대규모 건설 계획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프리츠 슈마허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모든 자금 관계가 흔들리고 있어서 건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실제로 독일 전체에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추가 승인을 받지 않고도 모든 것을 더욱 빠른 속도록 추진하였다. 엄청난 호화 건물인 ‘메세’ 곧 전시장조차도 말이다.” 그래서 사실 영국 점령지역인 쾰른에서는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루르지역보다 더 잘 나갔다. 루르지역에서는 프랑스와 벨기에가 ‘수동적 저항’을 조직적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쾰른도 독일제국의 생존 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시청 건물로 시장을 방문하게 되면, 그는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늘어놓았다. 라인란트의 미국 총사령관 헨리 T. 앨런 장군은 연합군 라인란트위원회 의장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둔지에 진군하자마자, 아데나워와 대담을 나눈 영국 측 위원회 위원의 보고서를 접수하였다. 이 위원은 자기 인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독일을 멸망시키고 유럽이 나폴레옹 시대로 돌아갈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주력 국가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의 비관주의는 매우 심각해서 러시아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국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을 정도였다.” 폴란드 총영사도 아데나워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의도적으로 비관주의를 내세우는 것인가? 당연히 아데나워는 “독일을 그런 식으로 분열시키면 유럽 전체가 지속적인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한 자기 예측이 프랑스 외무부에 전달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프랑스 외무성이나 바르샤바에 있는 이들은 혁명을 치른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독일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볼셰비키 혁명에 길을 내어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에게 이는 어찌 되었든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체념하듯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였다. 만약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독일 땅이 전쟁터가 될 것이고 독일은 주체가 아니라 무기력한 객체가 되고 말 일이었다. 그런데 서유럽이나 폴란드에서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프랑스가 [전쟁] 배상을 기대하는 나라를 순식간에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 국가적 지혜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플레이션과 초여름의 대결이 걷잡을 수 없이 첨예화될 때 영국의 연락 장교는, 쾰른시장이 이미 잘 알려진 그 자기 생각을 다시 제안하였다고 런던에 보고하였다. 곧 [독일] 제국의 내부적인 재편을 통하여 라인란트를 프랑스 점령 세력의 파국적인 압력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고등 판무관 대리인 루퍼트 S. 라이언 대령이 아데나워에게 5월 말에 그 오래된 계획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을 때, 아데나워 자신은 독일이 강자의 입장에 선다면 자신이 그러한 생각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놓고 볼 때 자기 생각이 그리 큰 골칫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 제국은 2~3개의 나라로 갈라질 위기에 처해있고, 이는 유럽 전체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제국을 분리하는] 생각이 프랑스 측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독일이나 라인란트 지역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당장 거부했을 것이다. 또한 제국 정부가 이러한 의도를 밝힐 것으로 예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제국은 곧 전복되고 아마도 사민당(SPD)이 정부를 와해시킬 것이다. 사민당(SPD)은 독일의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더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였다. 오로지 영국 정부만이 그러한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안을 한다고 해도 매우 신중하게 진행해야 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계속 숨길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그 당시 코블렌츠에 있던 [프랑스] 티라르의 본부에서도 비슷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1918~1919년의 라인란트 운동에 대한 연방정부 방식의 해결책을 받아들여 포괄적인 자체적인 계획에 접근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 것이다. 이는 아마도 민중연합의 비호 아래 연합군 군대가 주둔하는 계획과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 측의 아데나워에 대한 역질문은, 사실 티라르와 그의 동료들과의 사전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동안에 티라르는 독일이 기력이 다해야만 비로소 내부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룰 준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푸앵카레는 1923년 여름에 여전히 라인란트 계획에 대하여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코블렌츠에서는 아데나워를 여전히 그리고 너무도 당연히 제국 통일의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위험이 없는 국법에 따른 해결책으로 티라르가 촉구하는 분리주의를 막아보려는 독일의 정책을 옹호하는 약아빠진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1923년 내내 쾰른의 시청에서 상황 파악을 위하여 시도한 것은, [독일] 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간의 공식적 소통이 오랫동안 단절된 이유로 어느 정도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베를린은 루르지역이 점령된 이후 파리 주재 대사를 소환하였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어떤 경우든 간에 ‘수동적 저항’을 포기할 때만, 곧 그가 분명한 승자가 되어야만 새로운 질서에 관한 대화에 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베르사유조약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연합국 명령을 발표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양자 간 대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인란트의 대표성 있는 독일 대표단과 점령군의 대표단과의 접촉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점령과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현장의 대화를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 측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총체적인 해결책의 윤곽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베를린이 협상에 나서야 할 일이었다.   


1923년 가을에 위기가 급속하게 그 정점으로 치닫게 되었다. 8월 13일 슈트레세만이 제국 수상이 되었다. 그의 내각에는 쾰른의 사민당(SPD) 출신인 빌헬름 솔만이 내무장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7월 말부터는 1달러에 대한 독일 환율이 1백만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통화량은 44조 마르크까지 늘어났다. 독일 화폐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 지방 정부의 재정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중산층은 몰락해갔다. 그때까지 수출과 고정자산의 매각으로 겨우 버티던 산업계도 마찬가지로 파산의 위기에 몰렸다. 작센과 튜링겐에서는 급진 좌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바이에른에서는 급진우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연정을 이룬 내각의 수반인 슈트레세만은 9월 26일 수동적 저항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저항에는 9월 초에 날마다 4천만 골드마르크가 소요되었다. 전임 에센시장이었던 루터 제국 재무장관은 렌텐마르크[Rentenmark], 곧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렌텐 은행에서 발행한 마르크화를 도입하여 통화개혁을 이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조치가 점령지역에 대한 추가적인 지불로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라인란트의 독일 지역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상황을 보면 결과는 하나였다. 라인지역 자체적인 화폐의 도입이었다. 이에 따른 정치적 분리의 전개를 담보로 하면서 말이다.  


이리하여 라인란트는 프랑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푸앵카레가 얼마나 치고 나갈지는 전적으로 그의 눈대중과 국제적인 정세에 달린 문제였다. 슈트레세만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앵글로·색슨 강대국의 간섭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에 희망을 두었다. 점령지역의 현실적 어려움을 당장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뒤스부르크에서는 칼 야레스가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선전하였다.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을 무효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령지역의 경제활동에 대한 책임은 점령 세력이 단독으로 져야 한다고도 하였다. 이에 맞서 지방정부의 지도자들은 독일 민족의 이익을 인식하였는데 이는 연방제위원회의 형태로 가장 잘 종합되었다. 쾰른에서는 독일인민당(DVP) 소속 제국의회 의원 몰덴하우어 교수가 외교 정책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점령지역에서 점령군과 직접 협상을 벌이는 ‘자치 단체’를 수립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위기에 대한 극좌파나 극우파가 제시한 대응책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은 아니어도, 매우 가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 히틀러는 죽기 살기로 저항할 것을 주장하며 루르지역이 불타올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무법자가 그러한 일을 일으키기까지는 22년이 더 걸렸다. 그는 1945년 초에 니벨룽의 전쟁에 관한 들뜬 환상을 품고 에첼의 불타는 홀에서 독일의 통수권자로서 이를 실현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차원과 공산주의 차원의 민족주의가 ‘점령군 자본’에 맞서는 투쟁에서 통일 전선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1923년 가을 독일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였다.    


아데나워가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어떤 길로 나아갔는가? 그는 쾰른과 점령지역 모두에서 공공질서가 또다시 무너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1918년 11월이 곧 되풀이될 것처럼 보였다. 바로 굶주린 이들의 폭동, 약탈, 볼셰비키주의 추세의 급속한 확산 말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방정부와 기업의 지불 능력의 회복이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민중이 이성을 유지할 것이었다. 여기에서 제국은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제국이 그럴 준비가 되지 않으면, 지역의 정치계와 경제계 대표가 한편으로는 점령 세력과 협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 정부와 협상하여 라인지역의 [자체적] 통화를 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남게 된다. 이 무렵 쾰른에서 아데나워 다음으로 일종의 ‘제2의 왕’이었던 루이스 하겐은 즉각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면서도 제국 정부와의 조율에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독일의 모든 잠정적인 대표들이 서로 협조하지 못하여 당연히 프랑스 점령군의 조작에 놀아날 수 있는 상황에서 점령 세력과의 희망이 없는 협상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한 회의체 가운데 하나가 1921년 수립된 점령지역 경제위원회였다. 아데나워도 이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슈티네스는 다시 한번 프랑스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의사를 타진했다. 기업가와 경제단체들은 개별적으로 생존 방안에 대하여 협상을 벌였다. 이는 11월에 이른바 미쿰(MICUM) 협상을 이끌어내었다. 이를 통하여 점령군에게 현물을 대주는 대가로 기업 활동이 재개되었다. 시장, 일반인, 지역 유지 등은 점령군 장교들에게 각자의 관심사와 해결책을 전달하였다. 여기에 더해 거의 범죄자와 다름없는 분리주의 단체의 사악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시청과 관청 건물을 무단 점거하여 압력을 행사하라는 티라르의 독촉을 더욱 과격하게 받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제국 정부로부터 협상 권한을 부여받은 합법적인 위원회를 수립하여 이 위원회에 자신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순수한 연방국의 해결책을 여전히 관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데나워의 의구심이 더욱 커졌지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국 연합 안의 라인-루르 국가는 비록 고유한 지위를 지닌 것이라고 하여도, 생각할 모든 가능성 가운데 여전히 가장 바람직하였다. 이는 라인-루르지역의 광산업계와 룩셈부르크, 벨기에, 프랑스의 광산업계가 ‘유기적인 유대’를 맺는 개념과 결부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슈티네스를 그의 가장 중요한 동맹군으로 여겼다.     


9월 14일 티라르는 결국 아데나워와 제1차 협상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이 협상은 영국 라이언 대령이 중재한 것이다. 슈트레세만은 9월 7일, 곧 ‘수동적 저항’이 와해되기 전에 아데나워에게 이 대담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 대담의 주제는 점령군에 파피어마르크*를 선불하는 문제와 라인지역 자체 화폐의 발행 문제였다. 서로에 대한 불신은 매우 컸는데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는 ‘불쾌하고 고집 센’ 아데나워가 ‘수동적 저항’을 지속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짐작하였다.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폭스 원수의 절친한 친구인 티라르가 1919년부터 자기 코블렌츠 본부에서 라인란트를 제국에서 분리시키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국법에 따른 해결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지 못하면 파리 정부에도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누가 누구를 책략으로 이길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독일 측이 나쁜 패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파피어마르크[Papiermark, 역자주 - 골드마르크의 금태환 중지 후 발행된 화폐, 렌텐마르크로 대체되었다.]     


프랑스가 보기에 아데나워는 영국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용납할 수 없는 프랑스의 라인란트 정책에 맞서기 위하여 런던을 최대한 판에 끌어들이려는 아데나워의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1945년과 1963년 사이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당시에 자기 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경쟁을 조심스럽게 부추기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프랑스 측의 대화상대인 로랑 대사에게 자신이 프랑스 언론이 보도하듯이 그렇게 나이브한 친영국파와 반프랑스파의 인물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런던이 프랑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막으려 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이해와 협력을 저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와 티라르의 제1차 대담에서는 서로 탐색하는 것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가능한 국법에 따른 해결책을 받아들이도록 상대방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분리주의 집단을 지원하여 결국 ‘건전한 독일인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였다. 티라르는 이 대담을, 프랑스 대표가 그 당시 점령지역의 대표들과 가진 여러 접촉 가운데 하나로만 여겼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최소한 제국 정부의 이해와 묵인으로 이루어진 탐색인 동시에 영향력 있는 프랑스 측 인사와 유대를 맺는 기회로 여겼다.  


그다음 몇 주 동안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슈트레세만 정부는 점진적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루르지역 기업가들의 대표들이 프랑스 대표와 물자 공급을 협의하도록 허용해야 했다. 이리하여 파리는 루르지역을 ‘생산적 담보물’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었다. 10월 20일과 24일 제국 정부는 재무장관 루터의 제안으로 즉시 라인과 루르지역에 자금 지불을 중단하자는 기본원칙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루터는 최대한 빨리 이 결의안을 실행에 옮길 것을 재촉하였다. 슈트레세만은 내각 앞에서 매우 자포자기적으로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투쟁에 더 이상 재정 지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목적은 서로 미워하지 않고 좋게 헤어지는 것입니다.”     


점령 세력과 더불어 사는 생존방식을 찾기 위하여, 제국 수상은 이제 라인란트에서 점령군과의 협상을 위한 관리국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 위원회는 그때그때 제국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만 활동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을 볼 때 이러한 문제가 많은 임시위원회의 권한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슈트레세만은 여기에서 그 지역의 대표로 이루어진 집단이 베를린의 암묵적인 동의로 원래 제국이나 프로이센의 소관인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된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여기까지가 하겐에서 회의가 개최되기 전날까지의 제국 정부의 견해였다. 이 회의에서는 제국 정부와 점령지역의 대표들이 공동 회담을 통하여 진로를 정할 예정이었다. 이미 10월 24일에 이 지역의 정치계와 경제계의 주요 대표들이 비점령지역인 엘버펠트-바르멘에서 의견 교환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회담에 모였다. 10월 25일 제국 수상인 슈르레세만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엘버펠트-바르멘에서의 예비 회의에서 정확히 무엇이 다루어졌는지는 더 이상 자세히 재구성해 볼 수는 없다. 아래에 나오는 설명과 회고는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데나워가 이 대담에서 라인국의 수립을 다시 한번 주장했다. 그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배상 문제의 해결, 라인란트 위원회의 해체, 점령군의 퇴각이었다. 아마도 여기에 추가하여 라인란트를 독일제국에서 분리하는 것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제국이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부담을 덜게 될 것이었다. 야레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분명히 새로운 국가의 수립을 원하였다. 국법에 따른 변화의 운명에서 우리는 현실만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19년 겨울과 연초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은 아데나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법적인 해결책으로 점령이라는 부담을 결정적으로 줄이도록 하자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프랑스가 이를 추가적인 요구를 위한 구실로 삼을 것으로 보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를 살라미전술로 불렀다. 곧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목표에 이르고자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날에도 하겐에서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소란스러운 논의가 이루어졌다. 라인-베스트팔렌 대표단의 구성에 관한 것만큼이나, 채택해야 할 정책에 대한 논의도 혼란스러웠다. 엘버펠드에서 이루어진 예비 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참가자는 각자의 견해 표명을 주저하며 가정만 내세웠다. 아데나워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날 제국 수상이 함께 한 자리에서 전날 중단된 회의 내용을 요약 보고하자 야레스는 이를 노골적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제안된 모든 것은 그저 탐문하는 성격에 불과합니다.”라고 단언하였다.   


회의 시작에 앞서, 이 회의를 소집한 야레스는 다른 사람들의 것과 함께 전일 아데나워가 제시한 의견도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야례스가 정리하여 보고한 내용에 대하여, 아데나워 자신이 여기에서 진행된 토론에서 수정 사항을 제시한 것을 감안해보면 제국의회 의원인 에르켈렌츠의 기록이 나중에 매우 논란이 된 아데나워의 연설을 매우 정확하게 되풀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제국 정부가, 몰덴하우어 교수의 제안대로 점령지역의 대표들에게 핵심적인 문제(통화, 예산, 조세)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여서, 그들이 제국과 프로이센을 대신하여 결정하고 협상하도록 하다면 이는 무법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될 뿐이라고 아데나워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제국이나 프로이센의 주권뿐 아니라 라인란트의 주권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점령지역이 그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스와의 협상을 진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점령지역에 새로운 합법적 형태가 수립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가장 유연한 해결책은 프로이센과는 분리되지만 [독일] 제국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은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제국에서 분리되는 것도 논의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국은 평화조약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제국의 나머지 영토에는 점령군이 더 이상 없게 됩니다. 또한 라인란트위원회도 해체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령지역이 자치를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관련 당사자들이 여기에 함께할 때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제삼자가 요약한 형태로 전달한 생각들을 보고한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점령군 당국과의 모든 협상을 위한 자기 기본 요구 사항을 다시 한번 하나하나 정확히 표현하였다! 필요한 경우에 협상은 오로지 제국 정부와 프로이센 정부의 동의로 진행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이해를 염두에 둔 것이어야 했다.     

그 전날 하겐에서 아데나워가 한 것이라고 비공식적으로 전해진 발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슈트레세만과의 논쟁이었다. 이 제국 수상은 속기사를 대동하였다. 그래서 이 논쟁에 관한 속기록이 전해진다. 슈트레세만은 긴 입장 표명으로 일종의 공시선서*를 하였다. 그는 명확한 태도를 밝히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였다. 곧 “나는 독일제국의 수상으로서 현재의 제국에서 독일제국의 구성원이 분리되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거부합니다. 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제국의  재정 상황에 대한 침울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먼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 공시선서[公示宣誓, Offenbaungseid, 역자주- 채무자가 채권자를 대상으로 재정 상태를 거짓 없이 공개했다는 선서]     


제국은 이미 기력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다음과 같은 막연한 확약은 있었다. “정치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경제적 여건이 마련된다면 당연히 점령지역도 원칙적으로 독일 국가 영역 전체에 보장된 급부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요한 항목으로는 실업수당과 제국 공무원 임금이 있다. 그러나 제국이 얼마나 더 이를 지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는 누구도 답을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수상은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와의 단절은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프랑스가 악의 세력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신중한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제국 정부가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 조차도 프랑스와 대화할 희망은 전혀 없었다.     


슈트레세만은 제국의 비참한 내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갑자기 전혀 아무런 동기도 없이, 비록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고 아데나워는 발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데나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러분, 너무 언짢게 여기지는 마시기 바라지만, 라인국의 수립에 대한 어떤 결정으로 라인지역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입니까. 이 지역 전체가 정치적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프랑스 측의 압박과 제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여기에 라인국이 수립되어 [프랑스가] 기뻐하며 라인국을 특별히 잘 대할 것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신다면, 제 생각으로는 전체 상황을 오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프랑스가 다시 살아난 독일에 맞서 라인지역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여기에 자국의 주력 군대를 지속적으로 주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 독일의 라인국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점령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을 불신하는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 저는 이제 라인국이 [수립되면] 단번에 석탄세를 더 이상 지불하지 않고 배상금으로 보내는 석탄 수송을 중단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광석화와 같은 이러한 결론으로 아데나워가 애호하는 생각을 논의에서 제외하고 나서 슈트레세만은 결국 무심한 척 본론을 끄집어내었다. “정부가 프랑스와 벨기에와 협상할 능력을 상실하여, 제 말씀은 프랑스의 태도로 정부가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이제는 여러분이 도르텐, 스메트스, 마테스와 같은 분리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주도권을 넘겨주지 말고 이 협상을 이끌어갈 위원회를 스스로 구성할 필요가 있는지를 정하는 것은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관계자가 다 모일수록 더 좋은 일입니다.”    


제국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이보다 저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먼저 라인란트의 분리를 호탕하게 거부하고는 재정 정책적, 내치와 외교적 공시선서를 하고, 그 사이 아데나워의 해결안에 대해 신속한 공격을 하고는 라인란트 사람들에게 거창한 빌라도의 흉내를 냈다. ‘자 당신들 보았지!’라고 말이다.     


아데나워는 정중하게 답변하면서 미리 양해를 구하였다. 자신이 중앙당(Zentrum)을 대신하여 그리고 점령지역 도시 단체들의 요청에 따라 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슈트레세만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슈트레세만이 제국 수상으로서 라인란트를 제국과 분리하는 것에 관한 모든 논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라인과 루르지역이 독일에 속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완전히 동의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점령지역의 상황은 어떠한가?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인 쾰른에서만 실업자가 14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더하여 자금 부족과 식량 조달 문제도 발생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첫 번째 반란 기도는 라인지역의 대중에게 거부당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곧 “두 번째 반란 시도가 있다면 이전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나쁜 상태에 있는 대중에게 첫 번째 때보다 타격이 클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 안 되어서 “열악한 사회적 상황으로 매우 심각한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 첫 번째 대답을 마무리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제국과 국가는 비록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고 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막아보려고 시도할 것인가?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에게 반격을 가했다. 곧 그는 “제가 수상님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저는 당사자들이 프랑스와의 협상을 이끌 위원회를 수립하여 도르텐과 스메츠같은 사람 대신에 프랑스와 협상을 하도록 이끄는 것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상 각하, 우리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행위가 시작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러한 협상은 라인과 루르지역이 더 이상 프로이센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결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동안은 더 이상 제국에 속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협상이 설사 시작이 된다고 하여도 제 생각으로는 상황은 당사자들과 협상 대표들을 반드시 궁극적인 분열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프로이센과의 분열이든 아니면 제국과의 분열이든 말입니다. … 제게는 이러한 중간노선이 최소한 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저의 친구들과 그에 관하여 한 번도 이야기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일단 이것을 해보자.’라는 식으로 말하며, 마음속으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저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미루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제국 수상의 아픈 데를 더욱 쑤시게 하려고, 아데나워는 회의 중간의 휴식이 끝난 다음 자기 [중앙당(Zentrum)] 동료들의 요청으로 슈트레세만을 비판적인 개별적 질문으로 궁지로 몰아갔다. 그 질문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슈트레세만이 빈 자루를 들고 하겐에 왔으며 아무런 명료한 지침도 없이 점령지역이 스스로 알아서 문제를 처리하라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데나워도 당면한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와 협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루 전만 해도 그 자신이 긴급한 경우에는 그러한 협상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요청한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가 자신은 보호하면서 슈트레세만을 ‘음흉한 페터 [곧 거짓말장이]’로 몰아가려던 것인가? 아니면 그는 슈트레세만이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것에 분노한 것인가?     


제국의회의 정치적 음모는 그에게 너무나 자명해 보였다. 제국의회는 연방국 수립을 통한 해결책, 곧 잠정적인 분리라는 방안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아닌 제국 수상 자신이 라인 지방의 협상위원회의 구성에 동의한 것이다. 그러한 협상의 포괄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말이다! 여기에서 제국 수상은 마지막으로 솔직히 자신이 현재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철면피하게도 한마디 덧붙인 것이다. “그 결과를 이끄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라고 말이다. 사실 슈트레세만은 매우 심각한 논조로 라인국 수립 계획에 거는 모든 희망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몸을 사리며 정치가들과 경제계 인사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협상이 곤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슈트레세만의 의중에는 결국 비점령지역의 단기적인 생존에 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것이었다. 그러면서 라인란트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곤경에서 벗어나는지를 지켜볼 심산이었다. 협상이 제국의 비점령 지역에 불리한 해결책에 이르게 된다면 베를린에서는 언제든지 협상단이 자기 책임으로 협상을 하였고 매우 유감스러운 방식으로 제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고 밝히면 될 일이었다.     


슈트레세만의 시각에서는 아데나워 또한 분명히 표리부동한 인물로 보였다. 아데나워가 스스로 계속 충실하게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그가 영국의 힘을 빌려 그리고 또한 영국을 거쳐 프랑스를 이용하여, 자신이 일종의 기적적인 방책으로 여기는 국법적 해결책을 끌어들이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러한 아데나워가 이제는 제국의 틀 안에서의 연방국적인 해결책에 관한 모든 협상이 룩셈부르크를 모델로 하는 자율적인 라인국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그에게 몇 년 전부터 이야기해오던 것 아닌가? 이 교활한 시장이 매우 의도적으로 협상위원회의 구성을 추구한 것은, 오로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미 그에 동의한 제국 수상을 애매모호한 자로 드러내고자 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슈트레세만이 눈짓으로는 점령지역이 적들과 협상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정말로 그토록 버릇없이 굴 필요가 있었는가?     


여기에서 서로 다른 임무를 지닌 두 인물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에서는 제국에 대한 충성과 지방분권주의의 갈등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과 라인란트의 대립을 알아챌 수가 없다. 그 대신 제국 전체를 바라보아야 하는 제국 수상과 자기 고향 도시만이 아니라 점령지역을 우선 ‘곤경’에서 구해내면서도 제국의 이익은 해치고 싶지 않은 라인지역의 대표 사이의 역할 갈등은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큰 모임에서 충돌하기보다는 서로 만나서 미리 조율하였더라면 그들의 미래 관계가 다르게 설정되었을 것인가? 전혀 아니다. 이 두 사람은 각자 관점에서 나름대로 완전히 합리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왜 아데나워와 슈트레세만이 최소한 이 충돌 이후부터 서로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를 새삼 놀라워할 것 없다. 슈트레세만은 매우 흥분하여 하겐의 회의가 끝나고는 실신하기까지 하였다. 이 회의는 관계자들 [곧 당파를] 대표하는 15인 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소란스러운 토론으로 막을 내렸다. 협상해야 하지만 무엇에 관하여 협상할지는 매우 불투명한 채로 남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날 파리에서 푸앵카레 수상은 티라르에게 분리주의자들의 무제한의 지지에 대한 긍정적 신호를 보내라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독립 라인국의 수립을 가속하려는 속셈이었다.     


11월 초에 이른바 ‘탈퇴파’들이 쾰른을 공격하였다. 영국 주둔군과 독일 수비대와 경찰이 그들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시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큰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11월 2일 자기의 친구인 함스폰에게 쓴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런던과 파리에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민중들은 지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라인란트의 문제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만이 살길이 되었다. “이것이 단순히 독일, 프랑스, 벨기에, 라인란트만이 다룰 문제로 남는다면 우리는 지고 말 것입니다.” 아데나워 개인적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저는 아직 병에서 회복되지 못한 사람으로 육체와 정신을 매우 피폐하게 만드는 소용돌이에 빠져있습니다.”    


11월 13일에 아데나워와 슈트레세만은 다시 한번 충돌하였다. 이번에는 베를린에서였다. 점령지역의 상황은 그사이에 절망적으로 되었다. 2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공무원에게 급여를 지불할 돈이 더 이상 없었다. 또한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와 가치 없는 화폐도 문제였다. 1923년 11월과 12월에만 쾰른시는 17~18조 마르크의 긴급 자금을 방출했다. 기업들은 사실상 지불 불능 상태에 빠졌다. 라인란트 사람들은 라인지역의 금태환은행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외국 자본이 45% 투입되었는데 그 가운데 30%는 프랑스 은행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베를린의 저항 의지는 무너졌다. 11월 15일 새로운 렌텐마르크가 도입되었다. 제국 내각은 이와 동시에 점령지역에 대한 자금 지불 중단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좋든 싫든 라인지역의 태환은행 설립 계획을 승인하기로 하였다. 다만 그 기한을 정하였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인사들은 점령지역의 관할 위원회에 조세권을 허용하기로 하였다.     


쾰른 사민당(SPD) 소속의 솔만을 끝으로 점령지역에 대한 희생을 각오한 지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각료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로 제국 내무장관이 된 사람은 당시 뒤스부르크 시장이었던 칼 야레스였다. 그가 고안한 것이 이른바 ‘침몰이론’이다. 그는 또한 이제 베르사유조약 선포를 마무리하고 점령군 세력에 점령지역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게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래서 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라인국의 수립이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결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슈테거발트의 전임자이자 동시에 후임자였던 오토 브라운의 면전에 대고 소리쳤다. “어떻게 귀하는 프로이센의 수상으로서 두 개의 프로이센 주를 프랑스에 넘겨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오토 브라운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11월 13일에 하루 종일 이어진 슈트레세만이 이끄는 일부 각료들과 아데나워가 이끄는 라인란트 지역의 대표단 간의 논쟁의 극적인 단계들에 대한 문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데나워 자신이 1950년대 초반에 자기 전기 작가인 파울 바이마르에게 말한 것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에 점령지역의 포기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날의 회의 후반부에 관한 의정서를 보면 그의 기억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여러 차원에서 뜨거운 대화가 오갔다. 메어펠트 부관은 당의 동료이기도 한 제국 대통령 에버트에게 달려가서 내각 결정에 반대하여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불쌍한 독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자신도 앞으로 어찌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와 재무장관인 루터와의 충돌은 특히나 격렬하였다. 루터는 새로운 통화를 점령지역에서 밑 빠진 독에 물붇는 식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라인란트는 한두 가지, 심지어 세 가지의 새 통화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 그러나 제국의 재무장관이 새 통화를 살리고자 한다지만 그는 배상금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라인란트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주장에 강력하게 맞섰다. 이렇게 열띤 논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진땀을 흘리던 슈트레세만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두 사람의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11월 13일 오후 6시로 예정되었던 점령지역에 대한 지급정지에 관련된 제국 정부의 기자회견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노선은 이미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다. 신속한 지급정지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점령지역의 시각에서 볼 때 여전히 프랑스와 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이 시기가 그때였다. ‘15인위원회’는 지역 대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곧바로 티라르와 점령군 부담금 변경에 관한 협상에 들어갈 것임을 회의록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제 무대는 코블렌츠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협상위원회와 함께 다음날 티라르와 만났다. 쾰른 측의 여러 인사들이 대담을 준비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칼 요제프 슐테 추기경이었다. 그는 티라르가 자신을 초대한 것을 좋게 여겼다. 그러는 사이에 아데나워가 사실 라인국 건설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티라르에게 전달되었다. 처음에는 대화가 특별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티라르는 프랑스가 분리주의 집단을 후원하는 바람에 프랑스의 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라인란트의 프랑스 병합을 배제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추가로 3개의 독립국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상되는 [국가] 재구성의 국법적 형태에 관한 그 자기 생각을 더 자세하게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라인란트 주민들의 자결(自決)이라는 개념을 논제로 제시하였다.   


베를린에서 새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다양한 차원에서 나란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뭐가 뭔지 모를 경기에 참여한 여러 인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슈트레세만은 앵글로·색슨 측이 프랑스에 압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렸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독일 측 협상 대표들인 레오폴드 폰 훼쉬, 루이스 하겐, 휴고 슈티네스, 알베르트 푀글러는 모두 협상의 여지를 넓히기 위하여 떠보고, 꾀어보고, 겁박도 해보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가 해결책의 조건을 일일이 지시할 것이라는 불길한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그래서 슈트레세만이 11월 23일 퇴임하자 사민당(SPD)이 사태를 뒤집었다. 사민당(SPD)은 제국 정부가 작센과 튜링겐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자의 봉기를 강력하게 제압하고 동시에 바이에른 지방의 우파들의 음모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심산이었다. 모두가 음울해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제국 정부가 신속하게 들어섰다. 이 정부에 슈트레세만은 외무장관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이 정부의 수장으로는 빌헬름 마르크스가 들어섰다. 중앙당(Zentrum) 소속 정치가인 그는 아데나워보다 13년 연상이었다. 1863년에 쾰른에서 교구 소속 상트우르술라 학교의 학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인란트의 사법행정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뒤셀도르프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제국 내각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림부르크 지방법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가톨릭 단체에서 여러 가지 명예직도 겸하였다. 파울하버 추기경은 그를 때로 ‘가톨릭학교의 보니파치우스 성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1899년부터 그는 프로이센 의회에 속하였고 1910년부터는 독일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균형 잡힌 법관다운 기질에 대하여 모든 이가 호감을 보였고 이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신뢰할 만하고 상식적이며 이성적이면서도 전혀 두드러질 것이 없는 이 인물을 제국의 위기가 절정일 때 제국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점령지역의 라인란트 주민들은 안심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 독일제국의 정상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1918년 12월 라인지역 중앙당(Zentrum)의 많은 사람이 ‘라인공화국’이라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을 때 그는 이러한 추세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반응하며 거리를 두었다. 1919년 6월 그는 베르사유조약의 체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는 매우 일찍부터 [설득을 위한] 대화를 선호하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루르지역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수동적 저항을 통하여 버티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선봉에 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1923년에 재정적 어려움이 심각해지자 개인이 소유한 모든, 금, 다이아몬드, 진주를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줄 것을 제국 정부에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마르크스가 제국 수상에 임명되자 베를린에서의 아데나워의 정치적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두 인물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잘 알고 존중해왔다. 단순히 그들이 본에 있을 때 가톨릭학생회의 회원으로 함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데나워는 마르크스가 라인연방국에 관한 자기 생각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 생각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는 좋으나 현실적으로 관철될 수 없다.“ 라고 간단명료하게 평가하였다. 이는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처음으로 자기 해결 방안의 타당성을 탐문하듯 검토해 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는 앞으로 제국 수상은 알지만 당분간 슈트레세만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될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아직 직무를 시작하지 않을 때인 11월 29일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티라르와 마주 앉았다. 티라르는 마침내 라인국 문제 해결책을 그의 관점에서 처음으로 간단히 문서로 만든 서류를 내밀었다. 사실 이제는 아데나워가 포기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 서류가 말해주는 것은 그의 포괄적 해결안의 개념이 프랑스 측의 목표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하면서 직접 손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썼다. 티라르는 라인란트에 자체적인 의회, 통화, 외교 대표가 있는 여러 국가의 자율적 연방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라인란트 주민들은 독일 국적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연방 체제 안의 모든 국가는 제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회의 의원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라인국을 수립하는 대가로 점령군 주둔 부담금이나 전쟁 배상금의 감면을 요청하려던 아데나워의 모든 기대는 명시적으로 거부되었다. 철도도 연합군의 통제 아래 놓여야 했다. 다만 문서의 이곳저곳에서 완화 조치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제국 전체 사이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늘 되풀이하여, 그의 계획의 주요 목표로 내세운 보상금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가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전혀 지치지 않고 자기 태도를 고수하며 티라르를 건너 뛰어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하여 파리와 직접 접촉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사실 함스폰은 11월 초에 [아데나워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2월 4일 그의 주선으로 프랑스 기술자인 아르누라는 사람이 쾰른시청사로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프랑스의 도로와 다리 관리 수석 기술자를 역임한 인물로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인 로랑의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는 분명히 파리의 지도층과 좋은 인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푸앵카레가 자기와 친한 장관을 통하여 아데나워의 방문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확신에 차서 전했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가면 그가 당장 정부 수장에게 개인적으로 보고를 하고 다시 연락을 취하겠다고 한 것이다.      


두 사람은 곧 티라르의 제안이 잘못된 것이라는 데에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자기 생각을 개진하면서 자신과 슈티네스와의 유대관계를 언급하였다. 슈티네스는 자기 콘체른의 주식 25%와 로트링겐회사의 주식 25%를 맞교환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그날 밤으로 베를린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제국 수상에게 이야기를 전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의 입장과 슈티네스의 설명서를 아르누에게 전달하면 다시 아르누가 아데나워의 비망록을 직접 푸앵카레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아데나워는 확신했다.     


아데나워가 그다음날 제국 수도에서 코블렌츠에서의 실패에 대하여 보고해야 했지만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베를린에서 사람들은 코블렌츠와의 대화 채널이 이미 너무 달궈져 있고 아데나워가 화내겠지만 베를린이 직접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음날 제국 수상인 마르크스와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굴욕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푸앵카레를 사적으로 만난 일을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보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원래 그렇듯이 여전히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아데나워가 사적으로 탐색을 지속하도록 허락하였다. 프랑스가 자국의 공식적인 대표인 티라르를 통하여 무엇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제국 수상은 티라르가 의사를 타진하면 다시 한번 그와 협상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제국 정부의 위임은 아니지만 제국 정부와 접촉하며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티라르가 파악하도록 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티라르에게 상황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문서화해서 전했다. 그리고 아르누는 이 문서를 푸앵카레에게 전달하였다. 그 문서 안에는 연방국 방식의 해결책의 모든 장점이 다시 한번 폭넓게 상술되었다. ‘완충국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지속적인 평화협정은 제가 착안한 방식으로만 확립될 수 있습니다. 곧 서부 독일의 제국 안에서의 영향력 강화와 독일과 프랑스의 공통된 경제적 이익의 확보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방식의 연방국이 누리는 모든 특별한 지위는 비생산적인 것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제국 안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동의는 배상 문제, 점령군 문제, 라인란트위원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때 확보될 것이었다. “이러한 연방국은 점령에서 벗어나고 라인란트위원회의 구속에서 벗어날 때만 독일 정치에서 프랑스와의 지속적이고 평화로운 협력의 의미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자신과 제국 수상과의 친분 덕분에 이제는 티라르에게도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대화상대가 되었다. 이 대담에 관한 아데나워의 12월 15일자 보고서를 보면, 그는 연방국적인 해결책이 있다고 하여도 이는 오로지 1천2백만 인구를 지닌 남부 라인지역을 포함하는 라인-베스트팔렌 국가의 형태일 때만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티라르는 아데나워에게 그러한 국가의 수립이 프랑스가 평화조약으로 얻어낸 안전보장을 담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쾰른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데나워는 아르누가 보낸 지나치게 낙관적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르누와 로랑이 푸앵카레와 30분간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많은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매우 이성적이고 신중한 것이었습니다.” 티라르는 이 방문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었다.     


12월 14일자로 함스폰에게 보낸 장문의 보고서를 보면 어찌 되었든 푸앵카레가 아데나워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총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그리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곧 베스트팔렌 주민들은 보다 ‘동부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라인국 수립 계획을 베스트팔렌이 매우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이는 처음부터 아데나워의 계획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리고 팔츠 지역이 진정으로 라인국에 흡수되기를 바랄 것인가? 그러고 나서 푸앵카레의 요점이 나온다. 어떤 환상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황폐화 된 프랑스는 5년 동안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하기보다는 화폐 발행으로 조작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는 인류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기였다! 그러서 점령군은 매우 오랫동안 주둔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데나워가 제안한 국제경찰은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 새로운 라인국의 헌법이나 새로운 조약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연방국이 수립되어도 점령군은 자체 계획의 전개나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상금과 안보가 문제였다! 아르누는 이 쓴 약을 많은 교언영색으로 포장을 했지만 진실은 변함이 없었다. 곧 프랑스 총리는 매우 정중히 표현하기는 했지만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아데나워가 이러한 새로운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완고함에 그저 경탄하게 된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성격을 나중에도 발견하게 된다. 자기 노력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 그는 함스폰에게 그때 [프랑스] 니스에 머물고 있던 아르누에게 다시 한번 편지로 아데나워가 슈티네스와 접촉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게다가 티라르는 협상을 좋게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아르누 자신이 협상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티라르를 별로 신뢰하지 않음에도 아데나워는 12월 27일 다시 한번 그를 찾았다. 이 대화에서 그는, 나중에 마르크스와 슈트레세만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완전히 달라진 티라르를 보게 되었다. 연방국 문제에 관하여 그들은 서로 이견을 좁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티라르는 이 연방국의 크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작은 규모의 [독립]국가의 수립에 대한 요구를 재차 제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1924년 1월 초에 아데나워는 자기 계획에 따른 포괄적인 해결책이 천천히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슈티네스와 푀글러는 프랑스 전문가들과의 대화에서 보상 문제를 나란히 다룰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이 문제에서 돌파구가 마련된다면 제국의 내부적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 의견도 누그러질 것으로 보였다. 루이스 하겐이 함께 공을 들이고 있는 라인지역의 태환은행의 설립을 위한 협상은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제국 정부는 여전히 모든 것을 뒤로 미루기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제국 수상 마르크스가 결국 자기편을 들 것이고 슈트레세만의 노골적인 불신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수상은 아데나워의 노력을 분명히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정도 가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슈트레세만은 처음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마르크스는 함스폰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주고받은 편지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다리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1월 초에 아데나워와 슈티네스는 제국 수상이 있는 자리에서 철저히 비밀로 하는 공동 면담 시간을 가지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1924년 1월 9일 이 두 사람은 푀글러와 실버베르크와 함께 제국 수상 관저에서 수상, 외무장관 슈트레세만, 재무장관 루터와 마주 앉았다. 내무장관 야레스와 쾰른 중앙당(Zentrum)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인 노동부장관에 오른 브라운스도 함께하였다. 아데나워는 새롭게 모든 내용을 끄집어내며 배상 문제, 점령, 라인위원회, 서부독일연방국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하였다. 또한 푸앵카레의 심중을 떠본 일과 티라르와의 대화에 관한 내용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서부독일연방국 수립에 관한 구상을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프랑스 측의 진지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심을 나타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의심은 분명히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분열될 위험과 그에 따른 라인지역의 완충 국가의 수립 문제는 즉각적인 조치가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슈티네스 무리와 프랑스 경제 대표단의 보상에 관한 대화를 통하여 포괄적인 해결책이 가능할지가 문제로 대두될 것이었다.  


이어서 슈티네스와 푀글러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보상 문제의 출구를 찾기 위한 독일과 프랑스의 광산 콘체른 간의 긴밀한 자본 교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제국에 주는 최대의 장점은 현재 상황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제국 예산에서 현찰로 배상하는 대신에 프랑스의 요구를 현물 조달로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제국이 이에 참여하는 기업에 손실을 보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공경제와 개인경제의 이해관계가 이 경우에도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될 것이었다.     


이 전략 회의에 대한 설명이 간략한 것은 제국 정부가 여기에서 설명된 계획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에는 제국 수상인 마르크스도 포함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프랑스는, 시작은 우리가 하도록 해놓고는 나중에 결정은 자신이 할 것입니다. 저는 성과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4년 전인 1918년 12월 4일 그는 쾰른의 시민단체에서 ‘라인공화국’의 계획에 관하여 이미 똑같은 뜻을 피력한 바가 있다. 야레스는 자기 뜻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곧 그는 아데나워의 생각을 ‘불길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오래전부터 확정한 상황판단을 견지하였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슈트레세만의 동의였다. 그는 최근의 분위기가 푸앵카레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프랑스의 프랑화의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푸앵카레의 노선은 국내 정치적으로 격렬한 논란이 되었다. 4월 5일 프랑스에서는 의회 의원 선거가 있었다. 사람들은 푸앵카레를 수장으로 하는 민족연합당(Bloc National)이 선거에서 패배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만약 [독일] 제국 정부가 라인연방국 수립이라는 생각에 이제라도 동의한다고 선언한다면 이미 흔들리고 있는 푸앵카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리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볼 일이었다!     

슈트레세만이 이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의 결정 덕분에 배상문제에 대한 다른 포괄 규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규정은 실제로 1924년 8월에 도스 플랜*으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외무장관은 제국은행총재 히알마 샤흐트가 연말에 런던에 갔었고 그곳에서 영국은행 총재인 몬테규 노먼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렌텐마르크 발행을 위한 대규모 자금지원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샤흐트가 나중에 주장하기를, 이 대담에서 라인 지역 태환은행 설립 계획도 논의가 되었다고 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위한 영국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기대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영국 은행계가 뒤로 물러나자 프랑스 은행들은 프랑화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측의 관점에서 볼 때 라인국의 이러한 핵심 요소가 자본의 부족으로 마찬가지로 좌절될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 도스 플랜[Dawes Plan, 역자주 – 미국 재무장관 도스가 작성한 독일 배상금 관련 보고서]     


독일 측의 관점에서는 사실 신중하게 기다리는 정책이 유리하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와 슈티네스는 사적인 접촉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권한 위임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는 당연히 제국 정부와의 긴밀한 접촉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파국적인 상황으로 라인란트에 외교적 활동을 강요하던 때가 이제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제법 분명해졌다. 앞으로는 독일과 프랑스 문제가 결국 다시 각자의 법정, 곧 각국의 정부에서 다루어질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푸앵카레 또한 이제 사태를 그렇게 파악하며 대처해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일단은 모든 것이 전과 마찬가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난국 타개의 주인공’(Deus ex machina)처럼 이날 소피나(SOFINA)의 의장인 대니 N. 하이네만이 브뤼셀에서 베를린으로 왔다. 이는 아마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함스폰이나 아데나워의 주동으로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안면이 없던 프랑스 기업가를 시장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밀랑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데나워에게 슈티네스와 푀글러가 정말로 독일 내각으로부터 협상 전권을 부여받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그러하다고 말했지만, 슈트레세만이 슈티네스와 푀글러를 협상가로 내세우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밤 아데나워가 쾰른행 야간열차에서 슈티네스를 만난 자리에서 슈티네스는 곧바로 파리로 갈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차표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그래서 슈티네스는 차표를 반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1월 9일의 면담 이후, 제국 외무장관은 아데나워가 쾰른시청사에서 자기 등 뒤에서 얼마나 부지런하게 협상을 벌여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슈트레세만은 이제 1월 9일의 비밀협상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회담 현장에 함께하였던 법률 고문관인 뫼닝은 며칠 뒤에 마르크스와 야레스가 서명한 회담 의정서에 외무장관의 서명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라인지역의 다른 인사들의 부탁도 있고 해서 제국 수상인 마르크스를 통하여 그 서명을 독촉하였다. 이는 슈트레세만에게 다시 한번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생각에 정치적 상황에 더 이상 맞지 않는, 시도에 맞설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슈트레세만은 1924년 1월 16일 제국 수상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다시 한번 아데나워의 계획에 반대하는 모든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에게] 베르사유조약의 규정에 대한 추가적인 보증에 대한 프랑스의 요구 이상의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프랑스를 상대로도 이러한 요구를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 상황에 따라 두 달이 지나면 붕괴될 수 있다고 한 아데나워의 예언 또한 마찬가지로 틀린 것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슈트레세만이 보기에]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독일의 이익을 손상시키고 예를 들어 목표로 하고 있는 금태환은행의 설립을 위한 외국의 지원과 관련하여 진행 중인 협상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외무부에서 진행 중인 교섭의 내용을 관련 인사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외무장관의 자격으로 철저히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개인 자격의 협상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며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슈티네스를 중심으로 한 집단에 권한을 위임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독일 기업의 어떤 위임을 근거로, 우리가 하필이면 슈티네스 콘체른에게 독일 기업을 대표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이끌 권한을 부여했는지를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결국 프로이센 수상에게는, 사실상 자기 나라의 존립에 관련된 그 대담에 관한 보고가 전달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트레세만이 이끄는 독일인민당(DVP)은 라인연방국 건설에 관한 모든 계획에 대하여 가능한 한 비판적으로 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장관과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계획에 이것은 독일 측에서 나온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측의 최후의 일격은 1월 19일에 나왔다. 곧 티라르가 아데나워에게 마지막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통보한 것이다. 프랑스 측은 배상 문제에 관한 대화에, 회쉬가 파견한 독일 대표가 슈티네스와 푀글러를 공식적인 협상 담당자로 임명해야만 그들과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하였다. 푸앵카레는 그러한 전문가 협상이 일단 시작되고 제국 정부가 나중에 설명한다면 기만당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의 생각에 이는 단순히 사적인 인물들 간의 대화일 뿐이었다.     


아데나워라는 인물과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서 이러한 상황분석에 이르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분리주의적 경향을 동기로 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 달 동안 진행된 대화는 제국 정부의 여러 계층과 지속적인 피드백을 이루었다. 이의 필요성은 한편으로는 점령지역의 긴급 상황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 관련된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정부 간 협상에서 프랑스 측이 지속적인 거부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서부 독일 측에는 핵심 인물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때로는 가늠하기 힘든 이 대화에 루이스 하겐, 휴고 슈티네스, 라인란트의 다른 정당들의 중요 정치가들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쾰른의 시청사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라인란트의 임금’이라고 하는 그 시대와 그 이후에도 이어진 상상은 과장된 것이다, 물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아데나워의 정치적 기질에 맞고 그 자신 또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또한 그가 날마다 변하는 상황, 베를린에서 전개되는 생각, 프랑스와 영국이 보내는 신호, 여기에 더하여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정치계와 경제계의 다양한 흐름에 주도적으로 반응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게 이 일에 관여하는 법을 알았기에 후세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단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가가 모든 일을 다 처리했다는 비록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비록 열심히 일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아데나워는 이 일에서 주도적 인물은 결코 아니었고 그때그때마다 압력과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에 끼어들게 된 것뿐이었다.     


그래도 괄목할만한 것은 경제계의 특정한 대표적 인물들과의 긴밀한 협력이다. 아데나워는 일의 성격에 따라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자신이 부분적으로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일에 얽히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는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그와 함께하는 경제계 지도자들의 판단력이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는 하겐, 슈티네스, 푀글러, 또는 실버베르크와 같은 인물들을 활용하였고 그 또한 그들을 위하여 소용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금융가나 슈티네스 콘체른의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아집과 쾰른에 대한 개인적 이해가 너무나 컸다. 그가 보기에 특히 파악이 힘든 것은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경제관계와 경제적 이해였다. 이 문제에서 그는 그와 친분이 있는 함스폰과 같은 원로들의 충고에 의존하였다. 그는 그들이 사심이 없고 도덕적이라고 확신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제적인 거대금융과 대기업의 정책에 문외한인 이 쾰른시장이 ‘유기적 연결’과 같은 단순한 기본적 생각만 가지고 얼마나 무작정 이 정글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그가 공식적인 채널 이외에 사적인 인맥을 활용한 점이다. 사실 그는 이미 그 당시부터 위급한 상황에서는 비정통적인 수단을 활용하는 것도 옳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총리에 맞서 고도의 정치적인 책략을 시도하는 프로이센 시장이라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주목할 만한 것으로, 아데나워 성격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중에도 그는 외교 정책적인 음모를 꾸미는 경향을 쉽게 버리지 못하였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은 그의 이 첫 번째 외교 정치적 외유에서 그의 깊은 비관주의만큼이나 두드러져 보였다. 제국과 프로이센의 존망의 위기가 이미 극복된 1924년 1월에도 그는 여전히 독일의 붕괴와 점령지역의 저항 의지의 심리적 와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에 아데나워의 계산된 비관주의나 심지어 음흉한 분리주의적 기도를 감추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를 오해하는 일이다. 그 이후에도 그는 어느 정도 파국적인 세계관에 기우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활동을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런데 비록 상황을 좀 더 침착하게 관망하는 방법이 더 적절함에도 그가 무엇 때문에 자주 무모한 지원 수단을 동원하거나 이에 집착하는 것의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여기에 기술된 내용들을 보면, 아데나워와 슈트레세만 사이에 나중에 그토록 심한 혐오가 존재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각자 노련한 정치가들이지만, 상대방이때로는 애매하거나 심지어 그릇된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이 하겐에서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거나, 또는 1923년 11월 중순에 점령 지역에 대한 자금지원을 중단하려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슈트레세만은 1923년 11월부터의 자기 외교정책이 운좋게도 결국 [독일을] 재앙에서 벗어나도록 해준 것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아데나워가 1924년 1월이 되어서도 이미 현실적으로 끝난 구상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고 여길만했다.  


위기가 끝난 다음 이 일을 돌아보면서 당연히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다. 사건에 함께 했던 정치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생각에 그들을 특히 신뢰할 만한 국가적 인물로 만들어준 여러 장면이나 발언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자기 맞상대들의 언행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법이다.      


칼 야레스가 제국 대통령이 되고자 할 때인 1925년 초에 이미 아데나워도 관여한 일에 대한 공개적인 논란이 벌어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라인란트의 소멸을 예상하려고 들지 않았다. 1925년 4월 5일 루이스 하겐의 집에서 모인 사람들은 진행 과정을 더 이상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기로 어렵사리 합의를 이루었다. 모든 관계자들은 이제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공로를 각자 주장하였다. 중앙당(Zentrum)은 당시 제국 수상인 빌헬름 마르크스를 점령지역의 구원자로 칭송하였다. 사민당(SPD), 독일민주당(DDP), 독일인민당(DVP)은 자기 당에 공로를 돌리고 상대방의 잘못을 상기시키고자 하였다.     


후일에 아데나워는 1923년 11월 13일 베를린에서 [라인란트] 점령지역을 포기하는 것을 자기가 막았다고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루터와 슈트레세만을 그의 주요 반대자로 묘사하였다. 헨리 베른하르트 영사는 1932년 슈트레세만의 유고 가운데 일부를 출판하면서, 슈트레세만이 1923년 가을 자기 한계에 이르렀고 라인란트를 아직 구할 수 있을지를 의심했다고 보여주는 모든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데에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에 관한 1925년 5월 16일 자 일기도 남아있었다. “개인적으로 아데나워는 쾰른을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인물이다. 그러나 늘 제국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1930년대 초반부터 나치가 쾰른시장에 대한 비방전을 시작할 때, 그가 분리주의를 옹호했다는 비난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미 1932년부터 베를린의 출판업자인 발터 바크마이스터는 그 당시의 사건에서 아데나워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일을 막 시작하였다. 결국 1933년에는 분리주의라는 선동적인 구호는 라인지역의 중앙당(Zentrum) 전체를 비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나치당은 아데나워를 대역죄와 반역죄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래서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쾰른의 검사 한 사람은 특히 니스에 머물고 있던 도르텐 박사에게 달려가서 아데나워에게 불리한 자료를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소할 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여러 출판물에서 아데나워와 빌헬름 마르크스는 분리주의자로 비난받았다. 뒤셀도르프의 시립 문서관리소장인 파울 벤츠케가 1933년 10월 《쉬드도이첸 마나츠헤프텐》에 기고한 글과 1934년 발터 일게스 소령의 조작 문서의 제목은 ‘라인지역 중앙당(Zentrum)의 대역죄’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구동독의 공산주의 저자들은 이를 악용하였다.     


아데나워와 마르크스는 이러한 비방 문서들의 출판에 불안을 느끼면서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마르크스는 아데나워와 공동명의로 제국 수상실의 라머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에 대한 비난에 응답을 할 수 있게 공무 기밀의 누설 금지 명령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청원은 괴벨스가 지휘하는 나치 선전선동부에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 위하여 전달되었으니 그곳에서 무시되었다.   


그 자기 안전을 위하여 이제 아데나워는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쾰른에 주둔한 영국군 지휘부에서 정치적 유대를 담당한 줄리안 피고트와 접촉하였다. 그는 당시에 영국 철강 수출 연합회에서 근무하며 그사이 런던의 ‘외교단 의전관’이 된 시드니 클리브 퇴역 장군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와 관련한] ‘면죄부’*를 작성하였다. 이 면죄부는 쾰른시장은 분리주의 운동에 대하여 늘 강력하게 반대자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 ‘면죄부’[Persilscheine, 역자주 – 독일 군인들의 은어로 징집명령서를 의미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하던 시기에는 정치적 무죄를 입증하는 문서를 의미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 범죄와 무관함의 증명을 의미하였음. 원래 Persil은 독일의 유명한 비누 상표임.]     


[자신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구상을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활동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프랑스의 라인란트 정책에 맞서고 분리주의 운동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945년의 [나치 독일의] 붕괴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 구상의 미래지향적 핵심을 표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곧 프랑스 측의 안전보장 요청을 산업적 유대로 충족시키고, 또한 프랑스가 바라던 완충국가의 수립 대신에 전체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와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서유럽과의 평화로운 협력을 이미 찾은 것으로 여겨서, 제국연방 안에서 서부 독일 주를 수립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과 제국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루르지역의 위기 때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서, 최악의 경우에는 점령지역의 잠정적인 분리 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이에 동조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배격하였다.     


오늘날 독일 시장은 현대의 임금이다.”     


국제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안정되었다. 1924년부터 [유럽의] 모든 주요 도시들에서 대화를 중시하는 정치가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런던에서는 1914년부터 최근까지 국가의 전쟁 참여를 반대해온 램세이 맥도널드가, 파리에서는 평화주의적 이념을 지향하는 흐름을 대표하는 에두아르 에리오와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베를린에서는 빌헬름 마르크스와 구스타프 슈트레세만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렌텐마르크는 신속하게 자리를 잡았다. 1924년 8월 런던에서 개최된 [전쟁] 배상 회담은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독일제국이 매년 25억 골드마르크를 배상금으로 지불할 의무를 지게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점령지역에서 [연합군이] 의무적으로 철수하는 계획이 합의된 것이다. 루르지역에서 [점령군은] 1년 이내에 철수하여야 했다. 쾰른 지역에서는 [점령군이] 1926년 1월 31일까지 철수해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배상 협정으로 이제 미국의 자본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본시장에 투자한 이들에게 1920년대 경기가 좋은 시절에 얻은 이익 일부를 독일에 투자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독일 지방정부에 대한 단기차관도 포함되었다.     


쾰른에서는 모두 한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경제 상황이 안정되었다. 제조업이 다시 정상화되기까지는 2~3년 걸리기에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다. 쾰른에서 1923년에는 5만 명, 1924년에는 5만 4천 명, 1925년에는 여전히 2만 1천 명의 실업자가 있었다. 그래서 위기 대처 조치를 지속해야 했고 이는 시 재정에 계속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개선되리라는 근거 있는 전망이 나타났다. 아데나워의 기간 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라인 항구의 물동량이 점차 증가하였다. 슈티네스와 하니엘 회사의 라인 선단에 속하는 석탄 수송선이 강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모든 사람에게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산업들이 들어섰다. 자동차도 늘기 시작하였다. 이는 비좁은 시내에 그 당시까지는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교통문제를 야기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운송 가격을 낮추고 일자리를 만들었다.     


도시의 운명은 이제 명백해졌다. 공장 굴뚝과 고층 건물이 그때까지 도시를 지배하던 교회 건물을 가리며 쉼 없이 들어섰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쾰른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사람들은 라인지역의 대도시가 시각적으로 말끔해졌고 이전보다 활기가 넘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삶의 질도 이전보다 개선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유서 깊은 건물들은 다시 잘 돌본 상태로 돌아왔다. 라인강의 좌측과 우측은 유기적으로 함께 성장하였다. 대규모 전시장은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린벨트는 국내외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 상당한 호응을 거두었다.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산더스는, 그 당시 아데나워 시장이 어느 정도로 쾰른의 환골탈태를 이루어냈는지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독일 서부의 경제 중심지이며 동시에 전통이 남은 쾰른, 그리고 그 박물관과 교회는 다시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을 감탄시키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과 후반의 쾰른은 그 당시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대의 학자들과 교수들은 1933년부터 1945년에 걸친 홍수 이후에, 새롭게 세운 대학교에서 (1389년에 세워진 구 쾰른 대학교는 1798년에 폐교되었다.), 그들의 학문적 시작을 되돌아보면서 그 당시 빨리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서 상당한 정신적 번영을 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제2의 고향을 찾은 자유주의 정치학자인 존 허츠는도 나중에 뒷날 그 시절을 회고했다. 당시에는 그때는 칼 슈미트,와 한스 켈센, 오이겐 슈말렌바흐, 막스 쉘러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독문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데어 레이엔은 그 당시 신설된 철학부가 독일 최고 수준에 있었다고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거듭하여 좌파로 더욱 기울던 한스 마이어는 자본주의 비판자도 쾰른 대학교에서는 심심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어찌 되었든 성공적인 설립 이후 쾰른 대학교는 순식간에 대규모로 성장하였다. 1922/23년도 겨울학기에 쾰른 대학교는 프로이센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교가 되었다. 비록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아데나워에게 재정적으로 커다란 부담을 주었지만 대학교 건물 신축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 내각 핵심부의 그 누구도 라인란트가 더 이상 제국 안에 머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2~3년이 지나자 이를 다 잊거나, 최소한 그러한 생각을 몰아내게 되었다. 영국 점령군은 이제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는 1952년부터 1955년 사이에 서방 연합군 측의 점령군이 [독일에] 주권을 돌려주기 전과 비교할만한 일이었다. 독일제국은 다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라인강 연안의 도이츠 지역에서 개최된 1924년 5월 11일 전시회 개막식에 제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참석하였다. 이 행사의 주최자도 자리를 빛냈지만, 그는 저명한 초대 손님들이 돌아가자마자 국가 원수가 참석한 자리에서 벌어졌던 모든 문제를 매우 꼼꼼하게 적은 목록을 보여주며 자기 직원들을 몰아세웠다. 아데나워는 이미 자기 전임자인 발라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거의 1년 후에 그는 이미 에버트를 위한 조사를 낭독하여야 했다. 그는 그 조사에서 공화국과 여러 측면에서 공격당한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해 지속적인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분께서는 대통령직에 대한 존엄과 위상을 내외적으로 부여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군부의 신뢰를 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실천하신 모범적인 방식으로 상황의 내적 안정과 강화, 국민 개개인과 전체의 안녕에 필수적인 권위의 개념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이바지를 하셨습니다.”     


전시회의 개막과 제국대통령의 방문은 현대적인 쾰른의 연속되는 자기과시 과정의 단순한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는 늘 시장의 자기과시이기도 하였다. 1925년 여름에는 라인란트의 대규모적인 1천년 기념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라인지역의 다양한 역사에 관한 커다란 행사였다. 1926년 1월에 쾰른은 새로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영국 점령군이 물러난 것이다. 아데나워가 과거의 중앙당(Zentrum)에 집착하기에 그와 더 이상 친분을 유지하지 않았던, 1946~1947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를 역임한 루돌프 아멜룬센은 그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월 말일 늦은 오후에 영국군이 대성당의 도시를 떠났다. 6시간 후에 종소리가 12번 울리면서 대성당 앞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자정 축제가 열렸다. 쾰른 사람들은 성당 앞 광장과 근처의 거리와 자리를 가득 채웠다. 창가 자리를 차지하려면 100마르크를 지불해야 하였다. 12번째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거룩한 대성당의 높이가 낮은 정문 앞에 있는 넓은 옥외 계단 앞에서 콘라드 아데나워는 이 도시의 사장으로서 연설하였다.  ‘여러분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쾰른은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간결하고 탁월했다. 그리고 그는 1880년 10월 막 완공된 대성당 발치에서 83세의 빌헬름 1세 황제가 서서 에밀 리터스하우스의 경축 칸타타 연주가 끝나고 나서 유명한 대성당 연설문을 낭독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축제가 마무리 되자 쾰른 하늘에는 … 새로 제작한 24톤 무게의 베드로종의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독일에서 제일 큰 종으로, 전시에 전쟁물자로 사용된 황제종을 대신하여 3년 전 5월 달에 주조된 것이다.”     


50년 전 바로 그 자리에 황제가 등단하였던 사실을 언급한 것은 결코 전적인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사이 쾰른의 여론에서 아데나워는 일종의 군주로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자인 요하네스 카이저 박사처럼 너무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데나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로 3년 후에 시의회에서 아데나워에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속설에는, 여기에서 농담하면 안 되는 것인데, 귀하[아데나워]께서는 쾰른에서 프로이센 왕이나 제국의 황제보다 훨씬 더 발언권이 세다고 합니다.”     


1926년 1월 5일 아데나워는 마침 50세 생일을 맞이하였는데, 대성당에서 자정에 거행된 해방 기념 축제는 어찌 되었든 그의 삶의 정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축제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3월에 귀르체니히에서는 커다란 해방 기념 만찬이 진행되었다. 귀빈으로는 신임 제국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베르크, 그리고 아멜룬센이 꼭 집어 표현한 대로, 전임 총사령관 옆에는 사민당(SPD) 소속으로 프로이센의 수상인 오토 브라운이 앉아있었다. 그의 부친은 병영 관리인이었다. 아데나워는 손으로 직접 제작한 초대장을 발송하였다. 600개의 식탁 위에는 각각 요한 마리아 파리나가 제작한 향수병 한 개, 파인할스 담배회사가 제작한 특별 축하권련이 놓여있었다. 그 권련을 감싼 중간 띠에는 아데나워의 두상이 새겨져 있었다.   


역사를 의식한 아데나워가 자기 소망을 이룬 것으로 보였다. 여기 귀르체니히에서 그의 전임자들은 수백 년 동안 제국의 권력자들을 대접해왔다. 15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 황제, 그리고 막시밀리안 3세와 칼 5세 황제, 1848년에는 쾰른 대성당 정초식 600주년 기념식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왕, 그리고 독일제국 섭정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이 영접받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는, 그로부터 얼마 후 사망한 요한 함스폰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해방 기념축제에 관한 기사를 귀하께서는 여러 신문에서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엄청난 행사였습니다. 주민들의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아데나워 자신은 또다시 병에 걸렸다. 그래서 몸을 가누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모든 일이 끝나자 그는 일단 먼저 8일 동안에 걸쳐 ‘고데스베르거 호프’로 내려가서 AEG회사 회사에서 일하던 추밀고문관 도이취가 그에게 보낸 몇 권의 추리소설을 탐독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 요양하기 위하여 그 아름다운 봄 날씨를 유용하게 즐기고 싶었다.”     


그 당시 그는 전혀 삶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당뇨병 때문에 그는 여전히 엄격한 식이요법을 실천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찬란한 시절에 찍은 많은 사진을 보면 그의 체격이 새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위기 동안 아데나워는 금욕주의자나 되는 것처럼 건강이 나빠 보였다. 나중에 그가 한 말에 따르면 쇠약한 중환자를 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제 말끔히 면도한 얼굴은 영양 상태가 좋고 심지어 살쪄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가 실린더 모자나 중절모를 쓰고 만족한 듯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따금 게오르게 그로츠가 그린 부르주아를 신랄하게 풍자한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다닌 대학교의 학과들은 마치 평화 시대나 된다는 듯이 1919년부터 1923년 사이에 그에게 4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는 이를 매우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그 이후 박사 칭호는 그의 이름에 붙어 다녔다.     


기쁜 일이 이어졌다. 1926년 부츠바일러호프에 있는 신축 쾰른 비행장이 축하 비행과 더불어 운영에 들어갔다. 아데나워는 축하 비행을 하고 나서 상당히 [육체적] 충격을 받은 듯이 비틀거리며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1928년에는 독일 체조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같은 해에 순양함 ‘쾰른호’의 성대한 명명식을 시장이 거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해는 ‘프레사’ 전시회로 유명한 해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도시가 이러한 종류의 대규모 문화 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론의 모든 측면에 관한 포괄적 정보를 제공하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준비하고 진행한, 이 언론 전시회는 그 당시에 유럽 전체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귀빈들을 맞이해야 했다. 말하자면 거만한 눈길의 소비에트 연맹의 관료들도 있었다. 이들 때문에 아데나워는 우파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또는 그 당시 프랑스 교육부장관이던 에두아르 에리오도 귀빈이었다. 프랑스를 대하면서 아데나워는 이제 자신이 화해의 정치가임을 매우 강조하였다.     


에리오를 환영하는 만찬에서 한 아데나워의 연설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저는 외교관도 아니며 정부의 대표도 아닙니다. 저는 자유인이며 시민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우리는 풍요로운 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발달한 기술 수단이, 우리 시대의 대중이, 우리 시대의 조직 능력이 파괴를 목적으로 사용될 때 인류의 어떤 재능이 위협으로 변하는지를 목격하였습니다. 과거의 유럽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 곧 인류의 새로운 시기의 문턱에 서있습니다. 모든 나라의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노력할 때 이 새로운 시대는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리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진지하고 지속적이며 헌신적으로 바라고 노력하며, 비난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평화와 화해라는 사상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녀야 유럽이 몰락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혐오하고 군비를 축소하며 화해를 도모하고 모든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 평등한 권리를 지닌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모든 민족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사상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비록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처음에는 많은 의심과 신중함으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 길이 넓게 열렸고 목표는 높습니다. 우리는 단계적으로 전진할 것이고 후퇴도 있을 것입니다. 높은 곳을 기어오르고 깊은 곳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들 간의 화해, 모든 민족의 평등, 모든 민족의 안녕이라는 목적은 오직 이러한 길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의 역사가 이날 밤 매우 독특하게 소개되었다. 이러한 길을 가는 이가 아데나워와 에리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의 훌륭한 축사는 전임 제국 장관으로 후에 드레스덴의 시장이 된 독일민주당 소속의 빌헬름 퀼츠가 하였다. 이 정치가는 1875년생으로 아데나워와 동년배였는데, 전후인 1945년 베를린과 동부지역의 자민당(FDP) 당수가 된 인물이다. 자민당(FDP)은 기민당(CDU)의 야콥 카이저의 외교정책과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그는 1948년에 서거하는 바람에 독일통일사회당*과의 협력으로 체면을 깎이는 일을 면하게 되었다.     


* 독일통일사회당[SED, 역자주 – 구동독의 집권당]   


에리오는 귀국한 다음 아데나워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저는 깊은 우의를 느꼈습니다. … 평화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며, 독일과 프랑스라는 두 나라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 제가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에 대한 확신이 지난번의 기억할만한 날들을 보내는 가운데 더욱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 수상으로서 1950년대 초반에 프랑스 의회의 의장이던 에리오를 만나기 위하여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전쟁 시기의 그가 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를 변함없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에리오가, 아데나워가 그 당시 자기 모든 서방 정책의 근간으로 삼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누그러뜨리게 된 것은 아니다.     


아데나워 자신도 이제는 유럽의 우방들을 공식적으로, 또는 더 많은 경우에는 사적으로 방문하였다. 그의 첫 외국 방문은 1929년 초의 영국 방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의 아들 콘라드가 영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유럽의 모든 교통업계에서 인맥을 지닌, 브뤼셀의 대니 N. 하이네만은 아데나워가 이용하는 열차와 정기여객선에서 여행 중인 군주와 같은 대접을 받도록 조치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국을 한번 방문하고자 하였지만, 영국이 쾰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은 그러한 방문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같은 해의 가을에는 암스테르담을 공식 방문하였다. 쾰른의 기록 문서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호기심 있게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을 방문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네덜란드 방문에 관한 3페이지 분량의 비망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문서는 그가 건축양식과 주택단지에 대한 인상을 요약한 것이다. 1930년에는 앤트워프를 공식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정치가인 프란스 반 카우벨레르트가 시장이었다. 그는 쿠덴호페의 범유럽 계획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앤트워프의 방문은 민감한 문제였다.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한 시기가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로) 플라망드르 사람들이 독일에 대하여 매우 친밀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금은 매우 신중히 처신해야했다. 그는 이 방문 때 차량을 이용하였다. “지방 관리가 그러한 자동차 여행을 통하여 마을과 도시를 지나면 여러 가지로 더욱 흥미로운 것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로마 방문도 계획했었지만, 실행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1929년과 1930년에 뵈멘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칼스바트에서 각각 3주 동안 휴양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는 빈의 박물관 관람도 함께 하였다. 그 이외에는 가족과 함께 해마다 스위스에 머물렀다. 먼저 4~5주 동안 [스위스의] 셩돌랑에 머문 다음 이어서 며칠은 투너세에서 보냈다. 아데나워는 스위스에서 가장 편하게 지냈다. 쾰른에 있는 스위스 총영사인 프란츠-루돌프 폰 바이쓰는 그를 특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대가족과 함께 마치 국빈처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세관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스위스국철(SSB)에서 예약된 칸을 사용하였다. 아데나워의 쾰른 사무실은 잔무를 처리하며 독일 측 세관에서도 유명 인사를 위한 특별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를 보면 슈트레세만이 이야기 한 것이 결코 허풍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독일의 시장은 사실 대기업가들과 더불어 현대의 임금이다.”  


아데나워가 서방을 방문하여 특별한 소득을 얻은 것은 없다. 그는 그저 여행을 좋아하고 세상을 돌아보는 모든 기회를 활용한 것뿐이다. 특히 ‘프레사’ 행사가 아데나워에게 다방면의 인맥을 맺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당연히 서유럽의 화해정책을 추구하는 정치가들과의 접촉이 그의 유럽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도 정당들의 많은 대표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범유럽주의에 강력하게 맞서면서도 이 이념의 전선에 가장 앞장서는 쿠덴호페-칼레르기 백작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쾰른시장은 많은 명예직도 수행하였는데 범유럽주의 연합 독일 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한 것이다. 로카르노와 토이리에서 대화, 브리안트-켈로그-협정을 고려해 볼 때 아데나워의 관점에서는 유럽의 화해를 추구하는 정치가들과 유럽 학자들의 공동 국제단체가 무익한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9월 선거의 물결이 벌써 107명의 나치당 출신 의원들을 제국의회로 몰아간 1930년 늦은 가을에도 아데나워는 대니 N. 하이네만을 쾰른으로 초대하여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원고를 괴레스하우스 인쇄소를 통하여 인쇄하여 그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어찌 되었든 하이네만의 등장은 분명히 사업적 배경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부채로 시달리는 쾰른시를 위하여 해외차관 도입을 절실히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하이네만은 쾰른의 교통산업과 조달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화해정책의 전망이 급속히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아데나워의 통합정책에 비추어 보면, 늘 낙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 미국인의 생각은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후렴구이자 선취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브리안트의 유럽 계획은 마지막 파급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평화로운 국제 협력에 관한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좌절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쾰른시청의 한자 회의실에서 이루어진 이 강연에 참석한 프랑스인 장 드 팡제의 보고서가 우연히 남아있다. 그는 그 당시 외부에서 온 방문자가 그 방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를 전해주고 있다. “나는 이 멋진 한자 회의실을 바라보고 있다. 이 회의실 안에는 14세기의 가장 순수한 예술기념물로 용골모양의 둥근 나무 천장이 있고, 오버슈톨츠, 하르데푸스트, 크바터 마크트와 같은 귀족 가문의 문장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발표자 뒤에 주각(Piedestal)위에 서 있는 왕들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 쾰른으로 라인지역의 여러 도시가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 [한자]동맹에는 분쟁을 조정하는 중재재판소가 있다. 이 동맹은 13세기에 세워졌으며 ‘거룩한 평화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 이 회의실에서 유명한 한자 동맹의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니슈니-노브고로드*에 이르는 해상로를 지배하고 국가를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할만큼 강력했다. 놀라운 모범 사례가 아닌가! 우리도 모든 엘리트를 보호하고 독재 국가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강력한 상설 조직을 다시 수립할 수 있을까? 하이네만 씨가 호소하는 유럽의 건설에 대한 호소가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가!”   


* 니슈니-노브고로드 [Nischuni-Nowgorod, 역자주 – 러시아의 북서부 볼가강변에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주도. 러시아 제5의 도시]   


하이네만의 1시간 15분에 걸친 강연 제목은 ’새 유럽의 개요‘였다. 그는 기술자의 시각에서 새로운 유럽연방의 이념을 설명하였다. 그는 응용학문과 자본의 조합이 50여 년 동안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산업 시대의 광대한 모습을 전개하였다. 시청의 한자 강의실에서 이러한 미래를 전망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던 아데나워와 방청객에게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살아있는 존재로” 보였다. “이 존재 안에서 철도, 증기선, 전신, 비행기와 같은 연결선은 일종의 혈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유기체의 심장은 두 개의 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유럽에 (런던, 파리, 베를린 사이에), 또 다른 하나는 미국에 (뉴욕과 시카고 사이에)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산업이 발달한 지역은 이미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적,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유기체는 정치적으로는 갈라져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크든 작든 모든 국가는 자율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유럽의 무질서와 불평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대립은 현대 유럽의 심각한 질병입니다.” 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치료할 수 있는가? 사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저는 유럽을 당연히 정치지도자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산업계와 사업가들의 협력으로 기술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적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의 안녕이 다른 모든 이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처럼 연방국을 수립하면 유럽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은 미국 역사의 교훈을 잊은 데서 나왔다고 하였다. 결국 내부적인 경제적 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미국의 남북전쟁 때 동맹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기술적 조직형태인 엄청난 대륙횡단 철도, 행정 조직인 ‘주간 통상 위원회’, 금융 조직인 ‘연방준비제도’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 삼중 기초 위에 미국 연방이 성립한다고 하였다.     


유럽이 미국의 모범에서 적절한 교훈을 얻으려면 비슷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였다. 먼저 재정적, 행정적, 기술적 전제를 충족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확고한 헌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행제도는 금본위를 바탕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관세 장벽은 폐지되어야 하고,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이 제안한 것처럼 지속적인 행정적 협력이 [유럽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인 지불정산을 위한 은행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와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여전히 대부분이 산업화되지 않은 중동부 유럽과 동부 유럽이, 충분한 전기 공급과 도로망 구축을 통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1억 4천만 명의 대규모 시장이 열리게 되고, 그래야만 산업과 농업의 필수적인 균형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통합된 유럽이 미국에 위협이 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모든 미국인은 24개로 갈라진 정치적 단위들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통일된 유럽 대륙을 선호할 것이다!     


하이네만은 그의 강연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기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위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유럽 경제 세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상인, 고위 관리, 대기업가, 노동자회나 농민회의 지도자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단합하여 구대륙의, 파괴된 경제적 균형을 다시 살려내어야 합니다. 유럽연맹은 설립될 것입니다. 이는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30년 후인 1961년 11월 28일 하이네만이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유럽] 공동시장에 관한 글을 읽고 … 1930년 쾰른에서 내가 한 강연 원고를 다시 읽어보면 나의 선견지명에 대하여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최소한 경제적으로라도 통합된 유럽이 아니라 히틀러가 먼저 등장하였다. 무솔리니와 스탈린은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네만의 예언이 현실이 되기까지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우회로를 거쳤다. 그가 1930년 11월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유럽적 인물들은 청중석에 앉아서 그가 이 자리에 서도록 강요하였다. 강연을 마친 후 그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저는 귀하가 시작한 정치적 여정을 지속하면 귀하께서 커다란 업적을 이룰 것으로 믿습니다. 경제생활에서의 귀하의 지위와 귀하의 국적에서 귀하의 발언이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한해 동안 유럽 차원의 협력이라는 생각이 관철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스스로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매우 안락했을 시골에서 공증관으로 살기로 결심한 운명은 벗어났다. 그러나 바이마르 시대의 좋은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이어진 죽음의 위기에서도, 모든 것은 그가 쾰른의 시장이라는 자리에 만족했으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1926년에 다시 한번 쾰른의 시청사에서 베를린의 수상 관저로 자리를 옮길 마지막 기회가 왔다. 그러나 수상직에 오르는 데에는 의회의 상황만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옳은 길인지에 대한 아데나워 자기 회의도 방해가 되었다. 1926년 5월에 제국 수상 한스 루터가 물러나자 제국의회의 각 정당은 합종연횡을 다시 시작하였다. 사민당(SPD)과 독일인민당(DVP)과 손을 잡는 대연정을 지지하는 중앙당(Zentrum)의 일부 의원들은 다시 한번 아데나워를 후보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전혀 뜻이 없었지만 제국의회의 중앙당(Zentrum) 대표 대리인 아담 슈테거발트와 전화 통화를 한 이후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쾰른시장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힌덴부르크가 쾰른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좋은 인상을 남겼다. 아데나워는 새벽 한 시 반까지 아담 슈테거발트와 또 다른 당 대표 서리인 테오도르 폰 구에라르트와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협상을 벌였다. 분명히 제국 수상이었던 루터의 운명이 아데나워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게다가 [제국 수상이 되면] 쾰른을 떠나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전임 시장이었던 발라프는 그에게 지속해 경고하였다. 이제 지속적인 ‘당의 애증’에 시달리는 제국 수상의 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계속 제국의 정책을 위하여 결정을 내리든가 아니면 그 당시 이미 가능성이 보였던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정치적] 좌절 이후 산업계에서 좋은 자리를 얻게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신과 함께 베를린으로 온 아내와 호텔방에서 긴 시간 동안 논의를 하였다. 또한 우연히 같은 날에 카이저호프 호텔에 머물게 된 하이네만과도 논의하였다. 아내 구시 만이 아니라 하이네만도 그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원하지 않았다. “저는 귀하가 제국 수상직을 받아들이면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이네만이 회고하면서 말하였다. “귀하는 모든 다른 전임자들과는 다른 수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데나워도 풋내기 후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후보자는 다른 정당의 대표 정치가들과 대화를 통하여 자기 가능성을 탐색해보거나 더 높일 시간은 얼마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은 당 수뇌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자기 당 동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대화에서 회피할 수 없는 두 개의 암초가 있다는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먼저 대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여소야대 내각이 다시 한번 구성될 것이었다. 사민당(SPD)과 독일인민당(DVP)의 대립은 당분간 극복하기 어려웠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일국가인민당 (DNVP)의 슈트레세만과 중앙당(Zentrum)에 대한 거부감도 여전히 컸다. 둘째 암초는 슈트레세만 자신이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이끄는 내각에 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 그의 아들 볼프강 슈트레세만은 그의 부친이 밤에 당무 회의를 마치고 기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이야기하였다. “오늘 우리는 아데나워가 제국 수상이 되는 것을 막았다.”     


아데나워는 이 대화에 관한 메모를 하나 남겼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슈트레세만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문서로 만든 이 메모는 그 이후에도 자주 인용되었다. “그분은 나의 로카르노 협정에 관한 입장을 이미 알고 있다. 로카르노 협정 체결 이후 내가 내적으로도 온전히 다시 현실로 돌아와 독일을 위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고자 하였으나 독일 외교의 변덕과 양다리 걸치기 정책,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방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독일은 완전히 무장해제 된 민족으로서 나의 생각으로는 될 수 있는 한 다른 나라의 모든 분쟁에서 최대한 떨어지도록 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제네바의 협상도 우리 측에 불리하게 끝나서 당연히 다시 새 정부의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외교정책을 마냥 좋게만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슈트레세만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각에서 슈트레세만과 함께하면, “내가 그와 소통을 못할 때” 어려움이 불가피할 것이다.     


“독일 외교의 변덕과 양다리 걸치기 정책”에 대한 불쾌한 심정에서 여러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아데나워는 1950년대에 [독일의] 모든 동서간의 양다리 걸치기 정책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이 국제연맹의 비준을 지지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는 볼셰비즘의 러시아를 겨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후세의 해석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이 소비에트 연맹에 맞서 무조건 서방 세력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사실 외무장관 슈트레세만은 1926년 4월 24일 독소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기록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슈트레세만의 외교정책 스타일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로카르노 협상의 결과 자체도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못마땅한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한 슈트레세만이 바란 대로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 이후 국제연맹에서 그가 기대한 정도의 의석을 독일이 차지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결코 서양의 양대 강국과 함께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독일은 적당한 때를 기다여야 한다는 발언은 아데나워가 그 당시에 [독일이] 소극적으로 기다리며 [상대방이] 요청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데나워도 슈트레세만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아데나워는 슈트레세만과 화해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였다. 1958년에도 아데나워는 한 기자의 “슈트레세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많은 의미가 담긴 대답을 하였다. “그러한 개인적인 질문에 저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저는 슈트레세만이 선의를 지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 필요한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말기에는 질병으로 매우 쇠약해져서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는 1926년 초에 쾰른을 떠나지 않아도 되어 기뻤다. 아데나워에게 [제국 수상이 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게 된 다음에, 그는 《포시쉐 치이퉁》에 실린 게오르크 베른하르트의 글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데나워가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게 된 것은 심히 유감이다. 쾰른시장은 까다로운 성격을 지녔지만, 그는 한 인물 하는 사람이다.” 그가 베를린에서 인정받은 것에 취한 것인가? 사람들은 그 이후로 그가 쾰른 의회를 지금까지 보다 더욱 권위주의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927년부터 1929년에 걸쳐 건설한 뮐하이머 다리를 둘러싼 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 시[건설]위원회의 위원들 다수는 강에 기둥을 세운 비교적 구식인 격자다리의 건설에 찬성하였다. 그에 비해 아데나워는 모양이 아름답지만,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드는 현수교를 선호하였다. 비록 분명히 다른 관점들도 중요했지만 그가 말한 대로 무엇보다도 순전히 미적인 이유에서였다. 다리의 대부분 부품을 생산한 회사인 펠텐 & 기욤 회사의 게오르크 차프 총감독은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가 현수교를 찬성한 것은 “쾰른 산업에 일자리를 보장하려는” 자기 뜻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아데나워의 맞수였으며 기민당(CDU) 사회상임위원회의 동료이고 기독교 노동조합운동에서 활동했던 요하네스 알버스는 이 논쟁이 정점에 이를 때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칼스베르크와 폴릭사의 노사협의회 노동자 대표들을 위하여, 이 [다리 건설] 계획에 필요한 일자리가 쾰른에서 마련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이를 통해 쾰른 노동자들에게도 일자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시의회의 최종 결정에서 결국 공산당 의원들의 찬성을 얻어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지 그가 레닌그라드에 있는 현수교의 아름다움을 찬미했기 때문이라는 풍문이 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KPD) 당원들에게 펠텐 & 기욤 회사의 노사협의회의 주장이 시장의 속이 뻔히 보이는 과찬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그 당시 쾰른의 지역 정치의 이 ‘유명 사례’(causa celebre)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 당시에 아데나워가 얼마나 비타협적인 완고함과 노련함으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밀고 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독일연방 수상으로서 체험한 것은, 굴욕을 당하거나 대립적 사안에 대한 투표에서 패배한 정당은, 오랫동안 앙심을 품다가 결국은 복수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쾰른시의회의 사민당(SPD)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냉담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아데나워와 사민당(SPD) 당대표인 로베르트 괴를링거가 서로 편치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쾰른의 사민당(SPD)이 당원들에게 사민당(SPD)의 의견이 시정에 반영되었다고 보고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사실 그러한 조치는 사민당(SPD)을 “진정시키고 긍정적인 노력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데나워 시장이 시의회에서 그를 지지하는 다수표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부터 [쾰른시의회에는] 중앙당(Zentrum) 30명(1919년 49명). 사민당(SPD 11명(이전의 독일다수결사회민주당[MSDP], 1919년 43명), 공산주의 정당 16명(이전의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 1919년 7명), 자유주의 정당 11명(1919년 13명), 독일국가인민당(DNVP) 5명(1919년 2명)의 시의원이 있었다. 그리고 소수인 중산층 정당(Mittelstandspartei)에는 15명의 위원이 있은 데 비하여 민중-사회주의 블록(Völkisch-Sozialen Block, VSB)의 의원은 2명에 불과하였다. 1919년에 비하여 권력이 중도 우파 쪽으로 기운 것이다.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서로 대립하고 있기에 아데나워는 비교적 안정적인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자기 계획에 대한 중앙당(Zentrum)의 중도파의 지원과 더불어 중앙당(Zentrum)의 우파적인 시민 세력과 사민당(SPD)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뮐하이머 다리에 관한 커다란 논쟁은 아데나워의 공적 이미지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 1929년 지방선거에서 모든 당파의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황금의 1920년대’라는 그럴듯한 모습은 그 당시 쾰른도 겪고 있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법률 고문관이던 뫼닝은 1928년 초 시의회에서 보낸 지난 25년의 회고에서 시장의 격려사에 감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오늘과 비교해 보면 어쩌면 그때가 황금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1928년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1928년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최고의 해였는데도 말이다!     


1927년 말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의 로베르트 괴를링거의 통렬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는 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신랄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쾰른에서 지방 정치가 추진하는 커다란 일들에서 몇 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니, 무계획적인 일을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어 우리 당이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시 근교의 공공시설의 건설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통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대회와 전시회를 자주 열다보니 도시에 지나친 부담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시장이 시의회와 보좌관들과 맺은 관계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보좌관들의 재량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전체를 바라보는 책임 있는 조언자가 없다고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쾰른의 재정 상태도 문제였다!     


중앙당(Zentrum) 내부의 절친한 링스도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는 늘 하던 대로 꼼꼼하면서도 힘에 넘치는 편지로 그를 훈계하였지만, 이번에는 만만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시장에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어 시장을 존중하지만, 그의 뜻을 따를 수 없을 것 같다고 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그는 쾰른시의 지나친 재정 지출에 대하여 경고를 하여왔던 것이다. 숫자를 보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1924년 1억 8천만 마르크, 1925년 2억 3천 370만 마르크, 1926년 2억 6천 200만 마르크, 1928년 3억 2천 160만 마르크! 5년 만에 1억 4천 100만 마르크가 늘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계속 나가는 것을 멈추도록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아데나워는 공개적인 비판을 들으면 더욱 공격적으로 나갔다. 중앙당(Zentrum)에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당이 견해 차이를 놓고서 그와 논의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가 ‘고작’ 당대표인 링스가 보낸 편지만을 받아보았다는 것이다. “그 편지에는 완전히 틀린 숫자가 나와 있고 그 논조는 이러한 그릇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중앙당(Zentrum)은 자유주의 정당의 연구회와 협정을 맺고는 “부주의하게 나의 제안을 부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상처받았다고” 느낀 것이다.    


이 논쟁에서 늘 되풀이되는, 아데나워가 펼치는 시정의 약점이 문제가 되었다. 곧 돈이다. 시장은 인플레이션이 있었음에도 커다란 안이함과 운으로 그의 대규모 계획 가운데 일부를 관철하였다. 1923년까지의 통화가치의 하락은 이중으로 도움이 되었다. 한편으로 쾰른은 제국의 다른 지방 법인과 마찬가지로 부채의 많은 부분을 탕감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1919년부터 1923년 사이에 지속된 투자는 부분적으로 [명목 가치는 그대로이나 실질 가치는 줄어든] 인플레이션 된 화폐로 지급된 것이다. 그러나 1924년 이후 이는 불가능해졌다. 그때부터는 시 재정은 해마다 수입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해마다 시의회에서 예산에 관한 매우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모든 주장과 해결 전략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로 ‘공공서비스 국가’에서의 지방 재정 정책에 반영되었다.     


아데나워는 쾰른 재정 파탄의 책임은 무엇보다도 먼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려는 엄청난 중앙집중적 야심”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베를린은 복지정책을 목적으로 지방정부에 계속 무거운 부담을 지우며, 지방 공무원의 급여에 관한 강제적인 지침을 하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정부가 자본시장에서 필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국가적 재정지원의 확대이다. 이와 동시에 사회보장 지출을 축소해야 했다. 첫째 방법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쾰른은 여유가 있는 지방정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방법은 타격을 받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당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게 될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나중에 그가 독일연방 수상이 되었을 때도 사회보장국가의 부담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면 바로 채택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곧 사회보장 비용을 진짜로 어려운 이들에게만 지출하고 제도의 악용이나 무임승차를 철저히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불필요한 경비의 ‘과감하고 철저한’ 절감을 주장하면 어쩔 수 없이 좌파 정당과 정면충돌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중앙당(Zentrum) 내부에서도 커다란 불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는 시정부가 비용을 경감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가스나 전기 요금의 인상을 제안할 때 더욱 심해졌다.    


베를린의 감사실의 시각에서는 쾰른의 재정 문제는 분명히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 베를린의 사람들은 전쟁으로 여러 분야가 뒤쳐진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혈기 넘치는 시장이 자기 도시에서 지나친 근대화 계획을 단번에 실행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특히 화려한 전시장 건설을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지방에서 너무 잘나가면 [전승국에 대한] 보상 문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제국 정부는 독일의 지불 불능을 철저히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가장 커다란 적수인 슈트레세만은 1927년 11월 27일 야레스에게 보내 편지에서 “아데나워가 멋진 전시장 건물을 짓고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을 설치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면, 그리고 이제 쾰른에 새로운 라인 박물관을 짓게 된다면” 배상 부담금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이냐고 말하였다.     


어찌 되었든 쾰른은 1920년대 중반부터 찬란하고 분명히 생산적이지만 사치스러운 지방 재정 경제의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그 모든 것을 추진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인지방위원회, 독일시의회, 프로이센국가위원회에서의 그의 강력한 위치 덕분에 그는 자기 계획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물리칠 많은 응원군을 동원할 줄 알았다. 때때로 그도 실패하였다. 예를 들자면 외곽 지역으로 도시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쾰른군’(Landkreis Köln)을 삼키려고 하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에서 많은 것을 관철해냈다.    


그는 베를린의 중심 부서에 대하여 사용한 설득, 반박, 선제 처리, 압박을 조합한 방식을 쾰른의 시의원들을 상대로도 활용하였다. 반발하면 그들은 시장의 장광설을 들어야 했다. 그들은 결국 시장이 제안한 계획을 승인하여야만 했었다. 그리고 그 이외에 1925년과 1928년 사이에는, 필수적인 세금 인상과 임금 인상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늘 새로운 사치스러운 계획들을 들고나왔다. 여기에는 뮐하이머 다리, 인공호수인 아헤너 바이어 근처의 대학교 건물 신축, ‘프레사’ 전시회, 도이츠 지역 강변의 구 기마부대 막사에 지은 주박물관이 있다. ‘프레사’ 전시회 비용으로만 799,748.36 제국 마르크가 들었다. 


장단기 부채를 지는 것이 손쉽고 거의 필연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여기에서 쾰른은 다른 지방도시와 마찬가지로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달러 외채라는 독일에 내린 황금같은 비로 피상적인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1929년 가을 세계 경제 위기의 차가운 폭풍우 속에 날아가 버렸다. 제국은행 총재인 히알마 샤흐트는 수시로 경고를 내렸다. 베를린의 제국 관리들 측에서 보면 그는 아데나워와 가장 정면으로 대립하던 인물이었다. 쾰른의 엄청난 건설 사업의 자금은 제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 부채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든 경제 성장이 크게 이루어질 때나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심각한 불황은 카드로 지은 집 전체의 붕괴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이러면 교통과 전시 관련 분야, 그리고 교역에 미래를 보고 투자한 것이 이익을 주기 보다는 이자 지급으로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는 것이다. 세금 징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동시에 실업자들을 위한 수당 지급은 무거운 짐이 된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소소한 호황에 열광하도록 만든 사치스러운 지출이 비난받아 마땅한 경솔함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아데나워의 웅장한 계획의 빛과 어두움은 이렇게 서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1929년 가을의 위기 이전에 이미 아데나워는 자신에 대한 쾰른의 여론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에 맞서 시민회의의 중앙당(Zentrum) 동료들 앞에서 거창한 연설로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자기 동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1929년에 아데나워는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단 한 표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민당(SPD)은 노골적으로 그를 공격하였다. 솔만의 《라이니쉐 차이퉁》은 아데나워에게 “르네상스 시대 사람의 대단한 뻔뻔함”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도 노골적으로 시장에 맞섰다. 시장의 재정 정책이 조만간에 경제계에 세금 부담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늘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지인 《쾰르니쉐 차이퉁》을 발간하는 자유주의 계열의 네벵 두몽 출판사가 보기에 아데나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해졌고, 경제계에서도 [아데나워의] 퇴진 운동이 벌어졌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이 위기를 벗어났다. 그는 운이 좋았다. 지방선거가 1919년 11월 17일에, 다시 말해서 세계 경제 위기가 막 시작될 무렵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중앙당(Zentrum)은 35석을 확보하여 1924년보다 5석이 늘었다. 사민당(SPD)도 22석으로 늘었고 공산주의자 정당은 13석에 머물고 말았다. 독일인민당(DVP)은 10석, 좌익자유주의 민주파(Demokraten)는 3석으로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합쳐 1919년의 의석을 회복하였다. 군소 세력인 우파연합은 2석을, 그리고 나치당(NSDAP)은 4석을 확보하였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명분으로 분리해 나간 분파 정당들의 대표는 (지금까지의 15석에서 줄어든) 8석만을 확보하였다.     


1929년 11월 17일 아데나워의 재선은 사실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졌다, 다시 한번 선거에 이기기 위하여 그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바닥짐을 어느 정도 덜어내야 했다. 라인-베스트팔렌 발전소의 감사실 감사로 활동하면서 받는 수고비 9,200마르크를 시공무원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독일은행의 감사로 활동하며 받는 10,700마르크도 마찬가지로 시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도이체방크에서 받는 보수는 여론의 비판을 많이 받았던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가 두려워할 만한 맞수가 선거에 출마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중앙당(Zentrum), 독일인민당(DVP), 민주파만이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마체라트는 규정에 따른 행정대리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49표를 받았다. 47표의 반대표에는 사민당(SPD)의 것도 포함된다. 게다가 독일인민당(DVP)과 민주당은 선거 공약을 파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기간에 그들은 아데나워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선거는 1949년의 첫 독일연방 수상의 선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때 아데나워가 아슬아슬한 표 차로 당선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는 늘 그랬듯이 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더나아가 아데나워는 중도 세력과 온건 우파의 연정에 의존하였다. 무엇보다 사민당(SPD)이 그를 반대하고 극좌파와 극우파도 반대하였다.     


여하튼 그의 제2기 시장 임기는 조금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데나워는 얼마 안 가서 삶의 어려운 과정으로 들어서게 된다.     


세계 경제위기의 소용돌이     


공산주의자와 나치주의자의 선동 도구에는 오래전부터 아데나워가 제후 수준의 급여를 받는 동안 구호대상자들은 기아에 시달린다고 하는 비난이 핵심을 이루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세계 경제 위기의 영향이 깊어질수록 시장의 급여, 판공비, 생활양식에 대한 비난이 격화되었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에 아데나워가 주식시장 붕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시의 재정 파탄이 명확해진 가운데에서도 그는 개인 차원의 경제적 오판의 파괴적인 결과를 어느 정도 수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오판은 그에게 단순히 심리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부담을 안겼다.     


모든 곳에 시체를 파먹는 독수리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그의 재정보좌관이며 매제인 빌리 수트와 함께 심각한 타격을 받은 쾰른시를 어떻게 해서든지 꾸려가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그 자신도 개인적으로 한계 상황에 몰렸다. 1928년까지 그는 상당한 재산을 이용하여 현명한 가장으로서 가계를 이끌어 왔다. 1911년 지은 막스-브루흐-슈트라쎄의 집 이외에도 그에게는 1927년 말 기준으로 약 1백만 마르크의 자본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도이체방크 쾰른지점이 관리하고 있었다. 은행은 그의 재산을 최우량 주식과 채권으로 이루어진 포트폴리오에 투자했다. 이 은행 지점장이었던 안톤 파울 브뤼닝 박사는 ‘상류’ 계층에 속하면서도 아데나워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는 당시에 아데나워의 개인 계좌를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쾰른 은행가의 전문 능력에 대하여 1920년대 후반까지 철저히 신뢰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예를 들어 1924년 7월 셩돌린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이 노련한 은행가에게 자기가 보유한 일부 주식의 지정가격을 알아서, 신중하게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매를 하는 주식의 숫자는 많지 않았고 아데나워는 그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선호하였다. 여기에는 “기계 기중기 제작회사, 엘버펠더 염료회사, 쾰른 가스, 뒤셀도르프 기계 회사”가 있었다. 그러나 1928년에는 미국의 주가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몇 달 전부터 부유한 시민계층은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곧 어떻게 하면 미국 자본시장의 멋진 기회를 활용하여 최단시간에 독일에서 얻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자산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아데나워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수시로 은행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늘 성공적인 투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불운은 1928년 2월 페어아이닉테 글란츠슈토프베르케의 총재인 프리츠 블뤼트겐 박사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시장의 한 연회에서 그는 아데나워 옆에 앉아서 아메리칸 벰베르크 회사와 아메리칸 글란츠슈토프 회사의 주식으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 두 회사는 독일의 글란츠슈토프베르케의 자회사였다. 아데나워는 흥분하여 메뉴판에 간단히 계산을 해보고는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도이체방크에 맡긴 주식과 채권 포트폴리오에서 비록 확실하지만, 상대적으로 소박한 수익을 얻는 것에 만족해온 것이다. 블뤼트겐은 미국 회사의 주식을 매우 훌륭하고 안전한 투자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편지로 다시 한번 이를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틱세리아 데 마토스 은행의 팸플릿을 동봉하였다. 그 당시 그 주식은 명목가치보다 20%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었다. 중기적으로 이 주식의 배당금은 주당 10달러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주가 상승을 통한 수익도 배제될 수 없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아데나워는 그때까지 대규모 ‘투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브뤼닝 지점장에게 자기 재산을 안심하고 그러한 주식에 ‘투자해도’ 되는지 물었다. 브뤼닝은 아데나워에게, 블뤼트겐이 적접 주는 정보만큼 정확하고 확실한 것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몇 달 안 되어 도이체방크를 통하여 자기 모든 동산을 팔아, 알려지지 않은 두 미국 회사의 주식을 사는 모험을 시도하였다. 이 주식의 가격이 이미 1928년 5월부터 떨어지기 시작하였음에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브뤼닝은 아데나워에게 이제라도, 주식이 이익을 남길 때 팔라고 조언하였다. 어차피 나중에 주식 가격이 내려가면 다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주식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고 날마다 주식시세를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도 투기자산에 자본을 무조건 장기 투자하는 잘못된 생각을 지속하였다. 그는 다만 주식을 팔지 말라고 한 브뤼트겐의 조언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1928년 10월 블뤼트겐은 미국에서 아데나워에게 전보를 보내어  벰베르크 회사 주식을 아메리카 회사 주식과 교환하라고 조언하였다. 이 회사가 신주를 발행하여 구주에 신주인수권을 부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주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결국 엄청난 현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이제야 아데나워에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도이체방크의 브뤼닝에게 자문을 구하며 도이체방크에서 융자를 더 받는 것이 위험하지 않은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위험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어차피 유가증권이 담보로 기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이체방크는 신주인수금을 대신 지불하였다. 그에 대하여 각각 구주와 아데나워의 남은 동산을 담보물로 삼았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페어아니닉텐 글란츠슈토프 회사는 미국에 새 회사인 아메리칸 레이온 코오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하며 아메리칸 벰베르크와 아메리칸 글란츠슈토프 회사 지분을 이 새 회사에 모두 투자하였다. 독일의 글란츠슈토프 회사와 미국 자회사 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에 관한 판단이 완전히 상실된 지 오래였다.     


이때부터 주가는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아데나워는 그가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는 편지나 구두로 블뤼트겐에게 최소한 재산의 일부라도 남겨 은행 융자금을 갚기 위하여 주식을 모두 팔아버리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재촉하듯 물었다. 그러나 블뤼트겐은 늘 아데나워를 진정시키는 세밀한 정보를 주며 아데나워가 사태를 관망하도록 하였다. 이 모든 일이 그 무시무시한 1929년의 ‘검은 금요일’이 오기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은행의 붕괴가 이 주식의 폭락을 부채질하였다. 얼마 안가서 은행 부채가 주식 가격을 크게 상회하게 되었다. 1930년 여름에 아데나워는 도이체방크에 140만 마르크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내부자들끼리 이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루이스 하겐은 이에 관한 소식을 듣고 1930년 여름 아데나워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데나워는 도이체방크가 그에게 엄중히 경고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그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사태는 모든 측면에서 파국적이었다. 결국 그가 도이체방크와 개인파산을 논의하게 되면서 특히 단기융자에 관한 중요한 협상이 두드러진 문제가 되었다. 그는 시장으로서 이 협상에 임해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들려왔다. 이는 1929년 시장 선거가 있기 전부터 들려오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1927년 도이체방크의 감사로 임명되었다. 블뤼트겐도 이 은행의 감사였다. 아데나워의 수고비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선동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더구나 그가 1929년 말에 이 수고비를 시금고에 넣게 되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고통스러운 일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당시 아데나워를 구하는 데 함께 한 이들이 모두 누구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도이체방크의 감사인 아데나워의 지불불능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면, 이 은행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와 개인적 친분이 있고 1929년에 디스콘토 회사와 도이체방크의 병합 때 함께한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루이스 하겐과 더불어 이 구조 활동에서 핵심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와 도이체방크 모두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정황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업적, 정치적, 개인적 근거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가 국제적인 주식투기의 광야로 성공적이지 못한 외유를 한 문제가 어느 정도 남의 눈에 안 뜨이게 해결되었다.     


페르드멩게스는 도이체방크의 쾰른지점에서 [아데나워의] 투기 실패로 입은 손실을 베를린에서 떠안도록 할 것을 도이체방크 중앙본부에 제안하였다. 아데나워의 동산 일부는 쾰른에 남았다. 이와 동시에 베를린 본부가 손해의 상당 부분을 떠안고 엄청난 액수의 돈을 쾰른의 아데나워의 계좌로 입금하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는 재산을 잃게 되었고 어떤 최종 조처가 내려질지는 1930년 가을 초반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투기 실패의 정치적 부담은 확실히 남게 되었다. 은행에서 소문이 두 차례 퍼져 나왔다. 1930년의 소동 속에서 이는 독일국가인민당(DNVP)과 나치당에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바이마르 ‘체제’의 모범적인 대표가, 투기로 거대 은행에 종속되고 부채가 많은 쾰른시의 운명도 그 은행의 선의에 매달려야 할지 모른다니 말이다! 도이체방크의 감사가 한편으로는 은행을 감시하는 대가로 사례금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투기로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이러는 동안 [정치] 무대 뒤에서는 1,200만 마르크가 넘는 단기차관의 담보에 관한 불편한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돈은 쾰른의 외국 자금이 빠져나간 뒤에 도이체방크가 중간에 빌려준 것이었다. 프로이센 정부는 재무장관 회프커 아쇼프와 아데나워의 당 동료이기도 한 복지부장관 하인리히 히르트시퍼를 내세워 법의 경계선 안에서 도이체방크와 어려운 규정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여전히 브뤼닝이 지점장으로 있는 도이체방크 쾰른 지점은 쾰른시가 원하는 금액의 융자를 약속하였다. 다만 융자 기간은 길지 않았다. 도이체방크는 일종의 담보로 ‘프로이센금고’가 발행한 1,200만 마르크짜리 어음을 받았다. 이리하여 법적 구속력은 ‘프로이센금고’와 도이체방크 사이에서만 성립되었다.     


이러한 거래에는 분명히 법적 하자가 있었다. 원래 ‘프로이센금고’, 정확히 말해서 프로이센중앙조합금고는 법적으로 지방정부에 융자해줄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서 실제로 융자가 이루어졌는지에 관하여 법적으로 다툴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관계자는 매우 불편한 심정으로 이 일에 관여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프로이센 정부는 거의 파산 직전인 쾰른시를 도와야만 했다.     


얽히고설킨 융자 협상은 1931년 중반부터 연장 문제가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결렬되고 말았다. 도이체방크의 지점장들은 그들의 민간은행이 정부의 농간에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신중한 재정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신중해진 장관들이 형식법적인 논리로 모든 책임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는 먼저 쾰른시를 독촉하였다. 쾰른시가 돈을 갚아야만 도이체방크는 ‘프로이센금고’에 1,200만 마르크를 반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쾰른시는 거의 지불 불능 상태에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퇴임까지 논의가 되던 이 전체의 과정에서 ‘프로이센금고’가 있는 프로이센 정부와 도이체방크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였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와 재무장관인 오토 클레퍼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시장은 기술을 발휘하여 자기 개인적인 경제적 위기와 쾰른시의 재정적 위기를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도이체방크를 통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상황은 불리한 채로 여전히 지속되었다. 복잡한 속내가 부분적으로만 공개되었음에도 그러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가 자기 어려운 경제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했던 배경은 이러하였다.     


1931년 말 쾰른시의회에서 나치당의 지원 아래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한 의원이 긴급 제안을 제출하였다. 아데나워의 정적들은 그가 개인적으로 도이체방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 것이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이 금융기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시장이 쾰른시의 이익을 더 이상 합당하게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긴급 제안의 서두에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아데나워와 베를린의 도이체방크 사이의 거래를 문제로 삼았다. 도이체방크의 간부 임원인 오스카 슐리터는 은행을 대표하여, 공동출자분과 적지 않은 양의 유가증권을 인수하여 아데나워의 부채를 탕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슐리터는 거래 체결을 마치고 나서 도이체방크는 아데나워가 아니라 은행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수한 주식으로 언젠가 수익을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결국 은행은 궁지에 몰린 아데나워가 은행에 손해배상 청구의 압력을 제기할 것을 우려한 것도 사실이었다.     


1931년 2월 26일 쾰른시청에서 열린 격렬한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먼저 독일국가인민당(DNVP)이 제기한 그의 재산 상황에 대한 긴급 제안에 대하여 복무규정을 근거로 군색하게 반박해야 하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과제를 수행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사실대로 설명해야 했다. “여기에서 쾰른시의 이익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재정적으로든 그 이외의 이유로든,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에게 거래 정지된 계좌는 전혀 없습니다.” 베를린의 도이체방크의 이사회는 2월 7일자 서한으로 이러한 해명에 대한 전권을 [아데나워에게] 부여하였다.     


이 사건은 그토록 현실적인 아데나워 안에도 도박의 본능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때로 이 본능이 그를 휘어잡기도 한 것이다. 이번에는 확실히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제 개인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시장 직무의 매우 힘든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1933년 2월 직무에서 쫓겨날 때 그는 무엇보다도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시장의 곤경은 세계적인 불황 가운데 벌어진 그저 개별적인 사건이었다. 이 불황은 이제 쾰른시 전체를 강타했다. 1930년 말 쾰른에서 이미 60,300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약 500개 기업이 파산하여 기업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국 수상 하인리히 브뤼닝이 비상조치를 시행하여 이끄는 공공업무는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급격한 세수 감소와 더불어 엄청나게 늘어난 사회복지 대상자를 위한 지출은 재정적 여유를 거의 없애버렸다. 아데나워는 1932년 가을, [상환]기한일이 다가오면서 쾰른시 위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것을 보았다. 이 기한 안에 단기 부채 4천만 마르크를 상환해야 했다. 1931년 6월에 실업자가 66,715명이고 1932년 6월 실업자는 99,293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멀리 내다보는 시정을 논할 수 없었다. 시의 재정 상태는 구멍 난 배와 같았다. 한 곳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을 힘들여 막으면 다른 곳에서 두세 개의 구멍이 다시 생겼다. 시장은 청원인이 되어 이 법원에서 저 법원으로 순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지불유예, 단기융자, 돌려막기를 위하여 프로이센 재무부, 라인지역의 지역은행, 민간은행과 협상을 벌였다. 해외차관은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었다.     


브뤼셀의 대니 N. 하이네만은 궁극적으로 쾰른시의 교통사업과 급양사업에 뛰어들어 이를 자기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호감을 지녔으나 곧 마음을 바꾸었다. 소피나(SOFINA)가 대주주가 되어야만 [시업에] 참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하이네만은 그 대신에 베를린의 베바크를 인수하였고 나중에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쾰른의 발전소에 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귀하는 아마도 손해를 입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은행가들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어떤 집단과도 함께하지 않았고 귀하와 협상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귀하는 저와 너무 가까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 쾰른은 발전소를 팔지 않았고 이에 만족했습니다. 저는 제가 귀하와 협상을 해야 했다면 매우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귀하는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둘 다 만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지방정부는 더 이상 자구책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노력은 제국 정부와 프로이센 정부에 좀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고 긴축정책을 바꿀 것을 요청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제국 수상 하인리히 브뤼닝과 충돌하였다. 원래 그는 당 동료인 브뤼닝을 제국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중앙당(Zentrum) 의장 루드비히 카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데나워가 브뤼닝이 수상으로 취임한 직후 그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브뤼닝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매우 용기가 필요한 길을 진지하게 가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 전에 여기 쾰른에서 한 연설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충돌한 이유는 브뤼닝의 근본 노선 때문이 아니라 제국 정부와 쾰른시의 상이한 관심사 때문이었다. 1930년 7월 아데나워는 장문의 개인적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제국 수상이 지방정부의 곤경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예상으로는 1930년 가을과 겨울에 실업자 증가로 지방정부의 재정 상황은 파국에 직면할 것으로 보였다. “지방정부는 보조금을 더 이상 지출하지 못하여 심각한 소동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심각한 [사회적] 소동, 이는 아데나워가 1918년 11월[의 혁명]을 경험한 이후 종종 엄습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러한 징조와 관련하여 매우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그는 제국은행 총재 루터 주변에 주의를 당부하고 보냄과 동시에 소동이 벌어질 경우 내각의 붕괴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에는 단순히 시민만이 아니라 정부의 미래가 달린 것이었다. 그의 충고와 청원은 간단했다. 브뤼닝이 ‘이 사건’을 함께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제국의회는 도시들을 위한 세법[개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가을이 되면 이미 제국의회가 그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브뤼닝은, 지방정부가, 특히 여기에서는 쾰른시가 현재의 곤경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베를린에 있는 몇 안 되는 정치가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편지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1930년 12월이 되자 첫 격돌이 벌어졌다. 제국 수상의 장기적인 경제 안정 정책에는 지방정부의 실질적인 조세 감면과 지출 제한에 관한 기본 입법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프로이센 정부는 특정한 지방정부에 대하여 일련의 강제 예산 편성을 확정하였다. 1970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브뤼닝은 자신이 보기에 아데나워는 이에 관하여 매우 뻔뻔한 자세를 취했다고 말하였다. 제국 정부가 발표한 정책에 반하여 “국가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는 그가[아데나워가] 긴급조치의 의도에 맞서 12월 20일의 기한 직전에 자기 지방정부의 실질 조세를 [오히려] 인상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 브뤼닝에게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사죄의 편지는 여기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데나워의 주장에 따르면 실질 조세를 올리지 않았다면 쾰른시가 앞으로 15개월 동안 지급불능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실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더 나아가 사민당(SPD)조차 세금 인상에 동의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다름 아닌] 브뤼닝이 재무부가 아데나워의 조세 인상을 승인하도록 조치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브뤼닝은 이에 관하여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 당시 제국 수상실의 국무장관이던 헤르만 퓐더는  두 사람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1931년 9월이 되자 새로운 탄원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제국 전기회사가 쾰른시 연금공단에 관심을 가지도록 주선하여 부채를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제국 수상이 이 기회에 충고해줄 수도 있는 일 아니었을까? 이러한 도움을 청원하면서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례적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였다. “어찌 되었든 저는 쾰른시가 몇몇 경우에 지나친 점이 있었고, 많은 부채와 높은 자산 가치를 동등하게 여겼으며,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부채를 사치스러운 소비를 낳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아데나워가, 프로이센 복지부 장관 히르트시퍼와 함께 실업을 극복하기 위한 일자리 마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제국 수상을 설득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은 어찌 되었든 수긍이 가는 일이었다. 브뤼닝이 실패하자, 당연히 아데나워는, 상황을 더 잘 파악하여 오래전부터 엄격한 긴축정책이 몰락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들과 한 편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에 쾰른시장이 중앙당(Zentrum) 우파에 속한다고 여긴 것은 틀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특히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루드비히 카스와 접촉하였다. 1929년 11월과 1930년 4월에 아데나워는, 트리어의 고위성직자인 이 중앙당(Zentrum) 의장을 쾰른의 주교좌성당의 수석 사제로 초빙하려고 계속 시도하였다. 아데나워가 직설적으로 ‘우유부단하기보다는 유약하다.’고 평가한 슐테 대주교는 이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교좌대성당 참사회는 이를 방해하였다. 카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제국의회의 혼란, 사민당(SPD)과 독일인민당(DVP) 내부의 심각한 동요”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의회주의적 책임을 지는 제국 정부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포기하고 바이마르 제국 헌법의 제48조에 근거한 대통령제로의 이행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헌법 정책에 관련된 이러한 쟁점에 대한 아데나워 당시의 사람들의 판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그 당시에 기본법에 관하여 언급하였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맡겨진 지방정부 정책에 관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지배적인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이 계속 흔들렸다.  


중앙당(Zentrum)의 다른 인사들의 헌법 정책의 근문 문제에 대한 테도만큼이나 아데나워의 나치당의 대중운동에 대한 태도도 매우 불확실했다. 1930년 9월의 제국의회 선거는 제국 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 괄목할만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 되었든 나치당은 여기에서도 1929년 11월 17일 지방선거에서의 보잘것없는 4.6%라는 득표율을 뛰어넘는 17.6%를 달성하였다. 1932년 7월 31일의 제6차 제국의회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24.5%이나 되는 득표율을 보였다.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중앙당(Zentrum)도 다시 득표율을 올려 28.2%를 달성했다.     


1930년 9월 14일의 ‘선거 참패’로부터 3일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는 대니 N. 하이네만에게 차분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선거의 결과가 제가 보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겉으로 보기보다는 그리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독일에 매우 과격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나치주의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경제 상황이 조만간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모든 상황에서 벌어지는 위험을 극복할 최선이자 유일한 방책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언사에는 자기합리화적 낙관주의가 작용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바로 이 무렵에 하이네만을 설득하여 쾰른시에 필요한 2,500~3,000만 마르크의 융자를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해외채권자들의 우려를 증폭시킬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이네만은 선거에 대하여 자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어떤 선전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한 말을 살펴보아도, 그는 히틀러 운동의 성공을 무엇보다도 경제적 절망의 표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늦어도 1932년에는 아직은 궁핍하지 않은 시민계층에 속하는 많은 이들도 나치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찾아야 했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말인가?    


아데나워는 격렬한 지방 정치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과 고도의 정치적 결정을 구분할 줄 아는 정치가였다. 쾰른에서 나치당은 1929년부터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세웠다. ‘아데나워는 꺼져라!’ 시장은 ‘검은’ 쾰른, 곧 부자들만을 위한 쾰른을 구현한 인물로 여겨졌다. 나치 기관지인 《베스트도이쳐 베오브악터》와 시의회의 소수의 나치 무리들은 지속해서 비방전을 추진하였다. 이들이 내세운 구호에는 비사회적 긴축 정책, 과시욕과 낭비, 말도 안 되게 높은 아데나워와 의원들의 급여, 개인의 이익과 시 이익의 불투명한 결합과 같은 것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스위스에서, 실제로는 소박한, 여름휴가를 보냈고 그 가운데 한 번은 차를 빌려 산길을 넘어섰다는 사실조차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 비난의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아데나워를 향하여 퍼부어 왔던 것들이다. [1918년] 혁명 이후 시의회의 대회의실에서는 늘 비방과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져 왔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것을 세련되고 가벼운 아이러니로 받아 넘길 줄 알았다. 1947년 이후 아데나워가 이전에 의원을 역임한 적도 없으면서 토론을 세련되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이들은, 그가 쾰른시의회에서 15년 동안 단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극우파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극좌파보다 더 큰 파괴력이 있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아데나워는 쾰른의 모든 과격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이미지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1933년 초에 아데나워가 파면된 일을 쾰른 사람들이 무심하게 넘겨버린 것도 이러한 [그의] 명예훼손을 위한 캠페인의 결과였다.     


[나치 시대] 대관구 지도관 레이 그리고 그의 후임인 그로헤와 그의 패거리들에 맞서며 아데나워가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을 옹호한 것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나치당의 주요 반유대주의자들은 심지어 아데나워 자신이 유대 혈통이라고 믿기까지 하였다. 요하네스 폰 레어스가 출판한 선동잡지인 《유대인들아 스스로를 돌아보라》에는 ‘유대 혈통’이라는 제목으로 그 명단을 나열하였다. 여기에는 칼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립크네흐트, 뮌첸베르크, 벨라 쿤(콘), 레빈-니센, 슐레징거, 그르첸신스키, 굼벨, 오스카 콘, 쿠르트 로젠펠트, 트로츠키(라이바 브라운슈타인), 에르츠베르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데나워가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쾰른의 커다란 허풍쟁이가 낭비 등으로 쾰른을 망쳐버렸다.” 아데나워가 제1부관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유대공동체와 매우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쾰른시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 이유로 아데나워를 비난하고 있다. 또한 그가 모든 깨어있는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경제, 문화, 학문 분야에서 [유럽 사회에] 동화된 유대인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도 비난을 받았다. 아데나워를 ‘유대 혈통’으로 여기지 않는 나치주의자들조차도 그를 시온주의 운동에 동조하는 인물로 여겼다.   


사실 시온주의는 쾰른에 가장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쾰른에서 명망을 얻은 산업변호사 막스 보덴하이머는 1891년부터 정치적 시온주의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시온주의 운동의 쾰른지부는 제국 전체에서 가장 선두에 선 단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독일 ‘프로 팔레스티나’ 협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루드비히 카스는 또 다른 당 동료로 전임 제국 수상인 요제프 비르트를 그 회원으로 추천한 바가 있다. 이 협회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배타적인 유대 국가 건설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이주하여 조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미 매우 상당한 ‘죄목’에 쾰른 나치당은 아데나워의 민족적 태도에 대한 잘 알려진 의심도 추가하였다. 나치당은 암시적으로나 공개적으로 그를 분리주의자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범유럽 주의에 관한 호의도 그의 독일인답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슈트레세만이 곤경에 처할 때면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아데나워가 한스 루터와 칼 뒤스베르크, 그리고 200명의 유명 인사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영-플랜*에 반대하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 사실이어도 극우 정치가들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 영-플랜[Young-Plan, 역자주 - 1929년 미국의 영(O. D. Young)이 이끄는 위원회에서 발표된 것으로 독일의 전쟁 부채를 358억 골드마르크로 줄이고 59년 동안 나누어 내도록 제안한 것으로 나치가 극렬 반대한 계획]     


나치당의 선동과 거짓을 아데나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극좌파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하고 유연하게 대응하였다. 공개적인 공격은 삼갔다. 그는 시의회 운영 규정을 들어 많은 것을 제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치 제국 내무장관이던 칼 세베링이때때로 훈령을 통하여 시행했던 것처럼 ‘반국가 단체’가 시립 회관이나 장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는 조심스럽게 [나치 정권을 대비해] 보험을 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시정의 책임자로서의 자기 관할권을 지킨 것이다. 비록 나치당이나 독일공산당(KPD)을, 후에 말하는 것처럼, ‘제한하는’ 일에 어느 정도 주저한 바는 있었지만 말이다. 1930년의 제국 선거에서 [니치당과 독일공산당은] 각각 17.6%와 17%를 득표하고 1932년의 제6차 제국 선거에서는 각각 27.1%와 14.7%를 득표하였다. 곧 이 반민주주의적 정당은 각각 쾰른시민의 2분의 1과 3분의 1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에 대하여 민주주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이 나이브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도 이미 너무 늦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제3제국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1945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방어력 있는 민주주의’의 확실한 예방적 방어 조치의 옹호자가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치당의 대중운동과 그 지도자에 대한 아데나워 특유의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으면 그 과정 중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그 당시 그의 견해 표명은 지금까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파국이 종료된 이후에야 회고적으로 표명한 의견은 존재한다. 여기에서 그는 나치당의 지도자의 정신 상태를 그의 사회적 상황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나치 무리는] “거의 대부분 뿌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 또는 괴벨스의 경우처럼 시험을 통과했지만 직업을 얻지 못한 사람도 있다. 히틀러는 직업이 없었고, 괴벨스도 직업이 없었다. 괴링도 직업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 능력도 일자리도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뿌리가 뽑힌 이들이었다.”  


그는 히틀러 운동의 등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그의 의견은 그 현상을 해석하는 모든 요소를 거의 모두 조합한 것이다. 여기에는 황제국가의 붕괴 이후 권의 위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현명치 못한 정책’,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독일에서도 이른바 ‘중산층’에 타격을 준 인플레이션이 있다. “[이는] 가장 든든하고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최고의 요소였으나 … 이제 독일 민족이 단지 패전, 권위의 상실, 아직은 영향력이 없어 존중받지 못하는 새로운 권위의 창출, 시민계층의 붕괴로 커다란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나치당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난폭하고 방자한 이 모든 존재가 [땅] 위로 솟아나게 된 것이다.” 진짜 놀라운 것은 [독일] 민족이 “갑자기 미쳐버린 듯”한 현실을 겪은 일이다.     


아데나워는 히틀러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그는 히틀러를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다. 가끔 라디오 연설을 들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데나워가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단 한 번도 히틀러가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대중에게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는 원래 자신이 그런 것이든 아니면 측근, 곧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 괴벨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든 뭔가를 보여준 인물이다. 의지와 개성이 강한 인물,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나는 그것이 그의 내면에서 솟아났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가 평생 연극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또한 괴링도 “연극배우였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즐겼으며 최대한 요란을 떠는 것을 좋아하였다. 나는 히믈러가 괴링보다 더 사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3제국의 붕괴 이후 여러 차례 발표한 기조연설, 예를 들어 1946년 3월 24일 쾰른 대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그동안 성숙해진 그의 시각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아데나워는 히틀러의 전체주의 국가에 잠시나마 대중이 열광한 것 또한 독일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판단에 따른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는 이제 “프로이센이 국가를 극단적이고 과장되게 이해한 것”이 오랫동안 독일에 유혹이 되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사회의 최상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러한 유혹은 제3제국에 와서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정신적인 소속감이 사라진 것도 한몫을 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독일이 1914년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신앙이 부족하고 기독교에서 가장 멀어진 민족”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반기독교적인 정당이 잘 나가던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회주의가 터를 닦아 놓은 지역에 나치당이 만연하게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정치지도자들의 무기력도 더해졌다. “내 생각으로는, 나치 세력이 힘을 받아 권력을 쥐려고 할 때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그 권력을 잘 활용했으면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실패했고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근본적으로 아데나워는 그가 늘 함께 이야기하던 많은 다른 정치가나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와 관련된] 이 불행한 일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였다. 1931년 말 대니 N. 하이네만이 그에게 쓴 편지에서 루이스 하겐이 그를 찾아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 대하여 한마디도 할 줄 몰랐습니다. 너무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인간이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답신을 하였다. “저는 어떤 효과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이전에, 세상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이러한 예측대로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 예언이 어느 정도 불길하게 들어맞을지는 1931년 가을에 그는 당연히 알지 못하였다.      


1932년 1월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가 당황한 모습이 나타난다. 비록 그가  유럽의 30년전쟁 이후에도 경제적, 문화적 분야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프리델의 ‘문화사’ 강의에서 위로받기는 했지만, 다시 회의적인 생각을 덧붙였다. “저는 1918년 이후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지금처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독일이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그리고 유럽이 어떻게 벗어날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이네만은 브뤼셀이나 이탈리아, 또는 미국에서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보내며 전체적으로는 그의 낙관주의를 견지하였다. 벨기에 왕과 왕비도 그와 함께 매우 즐겁고 재미있는 날을 보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가들은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 많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비이성으로 출렁거리는 바다의 파도가 점차 가라앉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발생한 장애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웃을 좀 더 잘 알았다면 진작 서로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신뢰를 잃지 않고 지금보다 서로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저는 정치와 군중심리가 모든 경제적 통찰보다 더 오래 [상황을] 지배하게 되리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생각에 반박하였다. “저는 귀하가 말씀하신 정치와 군중심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만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지도자들이, 평화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공통된 이해에 서로 도달하게 된다면 대중은 곧바로 그들을 따를 것입니다. 대중은 매우 쉽게 [지도자를] 믿습니다. 렌텐마르크를 생각해 보십시오, … 사람들은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엇인가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이미 그 이전에 하이네만이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그 당시 이미 널리 퍼진 강한 인간들에 대한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현재의 위기는 몇몇 강력한 지도적 인물들이 몇 년 동안 인기를 잃을 각오가 되어있어야만 종식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이네만은 독재자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브뤼닝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곧 루스벨트가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독일에서는 산사태가 막 계곡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현재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전후] 재건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 선출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에 필요한 용기와 힘과 대중의 신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이 서신 교환에서 ‘강력한 지도적인 인물’을 통한 위기 해결이라는 주제를 논의하는 것을 피하였다. 그 당시에 흔히 사람들은 그가 곤경을 벗어날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추구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 속한다고 여겼다. 아데나워의 반대파들은 그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추파를 던졌다고 여러 차례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관에 근무한 해롤드 니콜슨은 커다란 위기가 발발하기 전인 1929년 3월 14일 다시 한번 시청사로 쾰른시장을 방문하고 나서 문학적인 수준이 있는 편지를 좋아하는 자기 아내 빅토리아 색빌-웨스트에게 편지를 썼다. “어젯밤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나서 나는 시장을 방문했소. 그의 이름은 아데나워로 현재 독일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오. 그런데 베를린에 의회민주주의가 작동을 안 하게 되면, 아데나워를 초대하여 그가 일종의 파시즘을 도입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소. 현재 그는 쾰른에서 철권을 휘두르고 있소. … 내가 여기에 와서 보니 그의 사무실에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있소. 비서관들은 서둘러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문을 열고 쏜살같이 들어와서는 바로 쏜살같이 문을 닫고 나갔소. 전화소리가 울릴 때 어떤 사람이 나보고 비키라고 하였소.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더니 서로 속삭이다가 다시 급히 나갔소.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소. 그러나 밖에서 서두르고 소근 대는 소리가 나는 것과 그의 커다란 집무실 안에 [들어가 보면] 갑작스럽게 고요해지는 것의 대비는 매우 인상적이었소. 갈색 얼굴에 영리한 눈을 지닌 이 특이한 몽고인은 창문을 등에 지고 자리에 앉아 매우 느리고 부드럽게 이야기 하며 천천히 벨을 눌렀소. ‘피레트리 박사 좀 들어와 주시겠어요?’ 그러고 나서 놀란 피에트리 박사에게 차가운 정중함으로 다가가는 것이 마치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과 같았소. 이는 전혀 내게 맞는 방식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이를 한번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방식이었소. 내가 그러한 방식을 곧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한번 시도해 보도록 하겠소. 여기에서 핵심 술책은 자기 주변이 성급하고 소란스럽게 돌아가도록 만들면서 정작 자신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있는 것이오. 또 하나의 술책은 부하에게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요. 그러면서도 마치 [사망의 위험이 있으니] ‘만지지마시오!’(chi tocca muore!)와 다름없는 뜻으로 갑자기 깜짝 놀라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오.”     


이 편지는 그 당시 매우 바쁜 시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연히 이 편지가 아데나워가 파시스트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 [이탈리아와 교황청이 바티칸 시국의 자치권을 인정한 조약인] 라테라노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무솔리니와 파첼리 대사에게 보낸 축하 전보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다.     


자신을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제 내각의 수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아데나워가, 그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방식의 대중에 영합하는 대중운동을 의도했으리라고 추측하기는 어렵다. 1918년 혁명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번에도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곧 히틀러 운동에 대한 물리력 행사 또는 이에 필요한 인적 자원이 부족할 경우 책임을 적절히 분담하는 것을 통하여 혁명적 힘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가 이미 잠시 민주주의자의 독재라는 차선책을 실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것은 그저 말로만 전해진다. 1932년 초 마인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중앙당(Zentrum) 지도부의 회의에서 히틀러에 대한 선전전을 다룰 때 아데나워도 의견을 발표하게 되어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 자신과 앞서 말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앞서 말한 사람들은 선전을 통하여 히틀러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화약과 납으로 이루어진 언어밖에 몰랐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와 [히틀러와] 조만간에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1년 후에 자신에 관하여 우리와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토 클레퍼는 제국 수상인 폰 파펜의 ‘프로이센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에 그가 내각의 일부 동료들과 남부 독일의 주지사들과 함께 프로이센에 제국특사를 파견하는 것을 막는 계획을 논의했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제국 정부 인사들과 나치당의 지도부 일당의 체포와 비상사태 선포, 그리고 5개의 큰 주들의 주지사들로 구성된 지도부의 수립이었다. 또한 아데나워와도 이와 관련하여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였다. 이 대화에 대하서는 나중에 중앙당(Zentrum) 소속 정치가인 칼 스피커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곧 이 경우에 프로이센 정부를 쾰른으로 옮기고 국고도 이곳으로 옮기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헌납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데나워는 자기 생각으로 그에 대한 주요 책임자들로 판단되는 인물들로 하인리히 브뤼닝, 오토 브라운, 칼 세베링을 빼놓지 않았다. 제국 대통령 폰 힌덴베르크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정치적 등불이 되지 못하는 인물”이므로 그에 대한 비판은 최소한에 머물렀다. 프란츠 폰 파펜에 대해서는 비판을 더 가했다. 그는 ‘지나친 공명심이 있고 원칙이 없지만 폰 힌덴부르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무지하기에 나는 늘 그를 판단할 때 정상을 참작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여러 가지로 상냥한 사람 됨됨이와 신심이 우러나는 언변은 사람들이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데나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곧 그는 민주주의의 독재에도 함께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에 당 지도자들이 부분적으로 히틀러를 ‘길들이는’ 환상을 품은 중앙당(Zentrum)의 역할에 대하여 침묵하고 넘어갔다. 그 당과 같은 방향이었던 자기 생각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1932년 7월에 발생한 제국 수상 파펜의 이른바 ‘프로이센 쿠데타’를 사민당(SPD)과 노조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이후에는 아데나워도 나치당이 프로이센 정부에 진출하는 것에 더 이상 걸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중앙당(Zentrum)의 보수 파벌의 영향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쾰른의 은행계에서도 의문스러운 작용이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으로는, 쿠르트 폰 슈뢰더라는 남작이 있었다. 그는 혼인을 통하여 민간은행인 폰 슈타인의 은행 주주가 되었다. 그의 사촌인 브루노 폰 슈뢰더를 통하여 그는 영국에 있는 J. 헨리 슈뢰더 회사와도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사이였다. 이 민간은행은 영국은행의 총재인 몬테규 노먼과 친분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뉴욕의 J. 슈뢰더 은행 법인과도 사업적 친분을 맺고 있었다. 쿠르트 폰 슈뢰더는 처음에는 나치당원이 아니었지만 강력한 민족주의자로서 조만간 나치당이 정부를 장악하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라며, 사업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하는 기업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 집단에서는 대기업들이 다음과 같은 동기로 하나로 모였다. 곧 사업적 계산, 나치당의 사회주의적 요소의 완화에 대한 기대, 확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정치적] 보험을 들어 놓으려는 심정이 있었다. 1931년 여름부터 쿠르트 폰 슈뢰더는 빌헬름 케플러를 통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발터 풍크를 통하여 히틀러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프란츠 폰 파펜과도 친분이 있었다. 슈뢰더의 아내도 점점 더 노골적인 나치당원이 되었다. 이는 친밀한 아데나워 가족과 페르드멩게스 가족과의 사교적인 친분에 점점 더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1932년 8월 2일 슈뢰더의 집에서 중앙당(Zentrum) 정치가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에서 앞으로 어떻게 조치를 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1932년 4월에 나치당은 프로이센 총선에서 325석 가운데 162석을 차지하였다. 나치당이 독일제국에서 이 핵심 국가의 다수당이 되는 데에는 단 1석이 모자랐다. 프로이센의 오토 브라운이 이끄는 사민당(SPD)은 이제 나치당과 독일공산당(KPD)으로 이루어진 다수를 상대로 맞서야 했다. 사민당(SPD)이 정권을 쥐고는 있었지만, 정국의 운영은 마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 수상인 폰 파펜은 1932년 7월 20일 프로이센을 통합해버리고는 자신이 프로이센의 제국 특사의 직위를 맡았다.    


1932년 8월 2일의 회합에 관하여 아데나워가, 쿠르트 폰 슈뢰더의 레터헤드가 있는 종이에 직접 손으로 쓴 기록이 남아있다. 거기에 보면 중앙당(Zentrum)은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하는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연합 정권의 등장을 “용인하고 그 정부의 활동에 대하여 완전히 중립적인 판단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브뤼닝의 실각 이후 중앙당(Zentrum)에 널리 퍼져 있던 파펜에 대한 비난을 잘못되었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회의 이후 셩돌랑으로 휴가를 떠나 중앙당(Zentrum)과 히틀러 사이에 벌어진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파펜은 베르사유 협정의 독일 대표단의 의장이었으며 파펜과 슈뢰더를 이어주고 있던 쿠르트 폰 레스너 남작을 통하여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아데나워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그 당시 제국 수상은 히틀러가 장악한 정권의 등장을 막으려 하였고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위원장인 아데나워로부터 새 프로이센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늦출 것이라는 확답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물론 아데나워의 전략적 입장은 상황의 변화에 따르게 되어있었다.    


레스너의 1932년 8월 30일자 비망록을 보면 그 당시 아데나워의 노선의 요점을 알 수 있다. 이 노선은 아데나워가 그에게 스위스의 비수와에서 가진 7시간에 걸친 비밀 논의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① 제국 정부는 제국의회를 수립해야 한다. 불신임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새 총선을 내년 초까지 미루어야 한다.

② 제국 정부는 긴급조치를 통하여 프로이센 경찰을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어 경찰이 정당 간의 싸움과 공격에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③ 그는 결코 경찰력이 히틀러 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제 파펜의 대통령 중심제 내각이 히틀러 운동을 정부한테서 멀리 떨어지도록 조처를 하기를 바란 것이다. 나치당을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프로이센 경찰이 파펜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나치당과 중앙당(Zentrum)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제국의회의 해산과 새 총선이 이어졌다. 프로이센 문제의 해결은 지체되고 있었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나치당을] 길들이기라는 개념을 다시 언급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공을 프로이센 측에 넘기고 싶어 하였다. 그 사이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제국 수상이 되고 난 1932년 12월 12일 루드비히 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12월 8일에 있었던 중앙당(Zentrum) 대표들의 회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곧 “나치당이 제국 정부에 들어가는 문제에 관하여 긍정적인 의미에서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프로이센에서 나치당과 정부를 구성하는 일을 중단할 것인지, 아니면 프로이센에서 최대한 빨리 정부를 구성하여 제국특사의 귀환을 도모할 것인지를 논의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장은 급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 수상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지방장관으로 선출될 경우에 제국특사를 소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원칙적으로 이제는 프로이센의 혼란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프로이센의 상황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책임이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허용되는 즉시 프로이센에 나치당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여 제국 정부가 제국특사를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 나치당이 제국 정부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한 추후 협상은, 내 생각으로는, 프로이센에서 진행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하고 어쩌면 촉진해야 일로 보입니다. 또한 나치당이 먼저 프로이센의 덜 위험한 자리에서 그들이 실제로 매우 높은 자리에서도 업무를 수행할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1933년 1월 30일에 다른 연정을 통한 히틀러 주도의 제국 정부의 수립이 이루어졌다. 이 분기점은 쿠르트 폰 슈뢰더의 집에서 1월 4일 히틀러와 파펜의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슈뢰더는 자기 공명심 목적을 이루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쾰른 지역의 지방경제고문과 산업상공회의소 의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6개월 동안 중앙당(Zentrum)의 대부분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근시안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가 쾰른에서 수년에 걸쳐 나치당의 선전을 직접 접해보았고, 나치당의 지도부 무리들에 대한 불길한 공포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실 이제 그는 중앙당(Zentrum)이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제 그는 히틀러에게 [정치적] 책임을 맡기면 [히틀러] 자신도 망가지거나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렸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던가! 하필이면 프로이센에서 제국특사보다, 권위주의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독재적이지 않은 제국 수상인 폰 슐라이허 대신에 [나치당의] 괴링의 정부를 선택하다니!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정당-권력층의 무지를 12월 12일에 쓴 이 편지보다 더 잘 말해주는 증거는 없다. 이 편지가 아데나워 생전에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1945년 이후 그에게 분명히 피해를 줬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자신이 히틀러와 나치당 지도부 무리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데에 매우 심각한 판단력 부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그의 깊은 내면에서는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쾰른의 상황은 문자 그래도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프로이센 쿠데타’ 이후에 얼마나 커다란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전반적인 정치적, 경제적 파탄을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쾰른시는 1932년 가을 지불불능 상태에 빠졌다. 1932년 6월 27일 마침내 의결된 1932년도 시 재정 계획에서는 2,500만 마르크를 결손 처리하였다. 그러나 조세 수입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1932년 9월 30일 당해 연도의 결손처리액은 3,4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결국 1932과 1933년 사이의 겨울 시기에 채권자회의에서는 쾰른시가 쾰른 지방채권의 소유자들에게 어떻게 배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게다가 87,000명이 실업자였다. 쾰른에서도 나치돌격대, 붉은전선투쟁연대, 경찰이 그 시대의 방식으로 시가전을 벌였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때를 전후한 시기가 특히 불안했다. 내전을 벌이는 이들의 기지들에서는 사망자와 중상자들을 ‘피의 증인’으로 찬미되었다! 시의회가 소집되자 의원들은 [1918년] 혁명 시기와 1923년에 익숙해진 시청앞 광장의 ‘기아 데모’ 장면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이 데모는 여러 극우 정당이나 극좌 정당들이 주동하였다.     


극단주의자들이 거리의 테러를 저지르는 동안 쾰른 중앙당(Zentrum) 지도부에 아직 남아 있던 버틸 힘은 ‘괴레스하우스’의 파산으로 고갈되어버렸다. 라인란트 지역에서 가장 컸던 이 가톨릭 출판사는 《쾰니셔 볼크스차이퉁》도 발간하고 있었는데 이미 1930년 초반부터 흔들려왔다. 출판사 경영진은 1920년대 한창 잘 나갈 때 과도한 투자를 하였다. 제국 수상인 브뤼닝도 자주 성가시게 만들었던 회생 조치들은 적자만 키웠다. 정치적으로 매우 안 좋았던 이유는 이 출판사의 파산에 중앙당(Zentrum) 지도부의 일부가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법률고문 휴고 뫼닝을 비롯하여 고위성직자 루드비히 카스, 출판업자인 율리우스 슈토키 영사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출판사의 소유주들에게는 이 기업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사실이 지나치게 늦게 통보되었다. 1933년 2월 3인의 경영자들이 체포되고, 아데나워를 경제적 곤궁에 빠뜨리는 데에 한몫한 은행지점장 브뤼닝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브뤼닝이 저지른 사건으로 쾰른의 다른 모든 가톨릭 지도층과 마찬가지로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페르드멩게스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종교의 탈을 쓰고 비난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사기극을 벌였습니다. 저 또한 지금 생각하면 매우 아까운 금액을 사실상 매우 불쾌한 상황에서 사기당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저는 매우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와 그의 신앙심에 대하여 의심해왔습니다. 저는 그래서 댁의 부근에게도 조심할 것을 당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그가 경박하고 단정하지 못하며 진실되지 못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잔인한 범죄자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데나워가 이러한 내용을 글로 옮기던 때가 이미 1933년 5월 4일이었다. 이제 히틀러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아데나워는 시장직에서 쫓겨나 아이펠에 있는 마리아라흐 수도원에 피신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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