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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05. 2023

히틀러의 '제3제국'

1933~1945


완전한 추락  

   

1933년 1월 30일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아데나워가 3월 13일 시장직에서 쫓겨난 급박한 주간에 그는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기 온 기질에 따라 그는 가장 곤란한 상황에서도 계속 전략을 발휘하여 모든 방면으로 해결책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멈추어 선 채로 투쟁하면서도 결국 몰락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장으로서 보낸 마지막 6주 동안 베를린과 쾰른 두 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1933년 2월 1일 제국의회가 해산된 이후 히틀러 정부의 시각에서는 프로이센에서도 새 총선이 벌어질 날이 가까워진 것으로 보였다. 1932년 4월에 이미 프로이센의 의회에서 매우 아슬아슬하게 다수당이 되는 것에 실패한 다음, 나치당의 지도층은 3월 5일 제국 선거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 총선을 통하여 다수당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센 의회의 해산은 ‘삼자 회의체’에서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 회의체는 의회 의장,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 현직 [프로이센] 지방장관으로 구성되었다. 오토 브라운이 현직에 있는 한 그와 아데나워가 함께 의회 해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32년 7월 20에 브라운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인 아데나워가 반대하여도 이론적으로는 의회 해산이 가능해졌다. 나치당이 이제 의회 의장인 프란츠 폰 파펜에게 제국특사로 한스 케를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지방장관 자리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그 당시 파펜의 소송대리인이었던 칼 슈미트와 함께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헌법소원에서 제국 정부가 승소하였다. 그러나 1932년 여름과 가을에 파펜이나 그의 후계자인 폰 슐라이허 장군은 프로이센 정부에 나치당이 진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 후에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나치당에 속한 지방장관인 케를과 프로이센에서 제국특사로 활동한 부수상 폰 파펜은 삼자 회의체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제도 시대’의 마지막 남은 대표였다. 그러나 1933년 2월 6일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협상에서 그는 의회 해산에 동의하는 것을 계속 거부하였다. 그는 먼저 헌법을 고려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와 동시에 궁극적으로 의회가 현재의 구성으로도 제국과의 ‘동질성’을 방해하지 않을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토론과정을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가능하다면 프로이센 정부 구성에서 중앙당(Zentrum)이 포함되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아데나워는 이 토론을 마치면서 자기 생각으로는 제국특사인 폰 파펜이 프로이센 헌법 제14조에 따라 프로이센 지방장관을 대신하여 의회 해산에 관한 결의에 참여할 권한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 자신도 이러한 합법적이지 못한 결의안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회의실을 나가자 파펜과 케를은 1933년 3월 4일부로 프로이센 의회의 해산을 결의하였다.     


아데나워는 다른 분야에서는 쉽게 넘어가지 않고자 했다. 2월 25일 그는 파펜이 있는 자리에서 괴링에게 프로이센 경찰에 대한 ‘발포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고자 하였다. 이 명령은 많은 습격을 합법화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항의이며 법적 저항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데나워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커다란 물결을 몇 개의 모래 자루로 막을 수는 없었다. 새 정부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진정시키고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는 늘 일단 좋은 선거 결과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실천한 것이다. 또한 모든 측면에서 ‘민족혁명’을 정당화하고 중앙당(Zentrum)이 쓸모가 있는 동안에는 신중한 관용 정책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쾰른에서 대결이 벌어지는 자리는 대부분 정부의 선거 캠페인에 맞서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국의회 선거가 있은 지 1주일이 지난 3월 12일로 시의원 선거가 함께 치러지는 ‘프로이센 선거’ 날짜가 정해졌다. 이 선거전에서 아데나워는 중앙당(Zentrum)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는 시장이 아니라 정당 정치인이 된 것이다. 1945년 나치 붕괴 이후의 그의 새로운 역할을 이미 이때 준비하고 있었다. 2월 7일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그는 쾰른의 대규모 선거유세에서 주요 연사가 되었다. 위기 상황에서 당이 다시 과거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아데나워가 중앙당(Zentrum)의 구호인 ‘진리와 자유와 법을 위하여’를 지지하고 ‘법과 헌법을 근거로 하여’ 위험하고 파멸적인 생각에 반대한 것은 단호하였고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1933년 초에 이는 폭풍우 속에서 울리는 교회 종소리와 같았다. 게다가 쾰른에서는 사람들이 누가 가장 위험한 적인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두려움에서 독일국가인민당(DNVP)을 가장 격렬하게 때리고 있었다.     


1933년 2월 17일 히틀러가 대규모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다. 제국 수상이 순수한 선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데 아데나워는 그를 공항에서 영접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다만 너무 모욕적으로 느끼지 않게 하려고 부관인 하인리히 빌슈타인을 공항으로 보냈다. 그는 공항시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참가한 행사에서는 시 건물에 깃발 장식을 내걸지 않았다. 또한 히틀러를 환영하는 의미의 라인강의 밤 조명도 켜지 않았다. 시 소유인 라인강 다리 교탑에 걸려 있던 두 개의 나치 깃발을 시 직원을 시켜 내리도록 하였다. 히틀러가 등단할 전시장 앞에는 나치 깃발을 거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깃발이 설치되었다. 도이츠 지역의 소방대가 먼저 출동하여 그곳에 깃대를 설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1933년 초에 조롱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베스트도이쳐 베오브아흐터》는 이러한 조치를 나치당에 대한 아데나워 “깊은 거부감”이라고 비판하면서 “아데나워 씨는 그러한 도전 때문에 앞으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히틀러의 선거 연설이 있던 전시장 입장권의 가격은 암시장에서 100마르크까지 치솟았다. 그의 연설은 쾰른 중앙당(Zentrum)에 대한 유일한 선전포고였다. 참다운 의미의 자유선거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있을 수 없었다. 사민당(SPD)의 《라이니셰 차이퉁》은 2월 6일부터 3일간 정간되었고 중앙당(Zentrum)의 《쾰니셔 폴크스차이퉁》은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정간되었다. 쾰른의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의회 건물 방화 사건 이후로 법의 보호를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적 암살, 행진 거리 싸움이 다시 벌어졌다! 또한 나치돌격대가 흔히 보여주던, 다른 정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가 자행되었다. 게다가 나치돌격대와 나치친위대 소속의 제복을 입은 보조 경찰들이 투표소마다 서 있으면서 선거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 예상되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시위원회 의장으로서 마지막으로 부수상인 폰 파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이제 역사적 기록 문서를 위하여 쓰인 것이 되었다.     


나치당이 쾰른 투표자의 3분의 1의 지지를 받은 제국의회 선거 이후 모든 둑이 무너져 버렸다. 3월 12일 지방선거가 있던 시기에 나치당에 반대하는 이들은 더 이상 생명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빌헬름 솔만은 3월 9일 모차르트슈트라쎄에 있는 ‘갈색 건물’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사민당(SPD) 인사들도 체포되었다.    

 

나치당의 지방선거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아데나워를 몰아내자! 흑색과 적색의[곧 중앙당(Zentrum)과 사민당(SPD)의] 부패한 다수파 [지배]를 끝내자! 나치당 인물을 쾰른시청으로 보내자!” 아데나워는 시가 관리하는 건물에도 나치 운동의 깃발로 장식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전시장에서 진행된 히틀러의 선거 연설을 한심한 소리로 무시했던 중앙당(Zentrum)의 정부 의장인 한스 엘프겐이 아데나워에게 전화로 보고하며 나치 깃발을 공공건물에 게양하는 것을 경찰력으로는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사저로 전화가 쉴 사이 없이 왔다. 전화한 사람은 협박을 일삼았다. 아데나워의 장남인 콘라드는 쾰르너 링게에서 ‘아데나워를 쏘아버리자!’라고 쓰인 [삐라를] 직접 상자에 모아온 경험이 있다.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는 나치 돌격대 남자들로 이루어진 ‘보조 경찰’ 단원이 ‘보초’를 선다며 주둔하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이를 즐겨 하였다. 그리고 시장집의 욕조에서 목욕을 할 수 있었기에 더욱 즐거워하였다. 라인 지방 방식의 권력 접수였다!     


아데나워는 긴 연설을 준비하여 쾰른 전시장에서 거행되는 중앙당(Zentrum)의 마지막 집회에서 15년 동안의 치적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완성된 초안은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매우 놀라운 문서이다. 민족의식이 있고 질서와 효율을 생각하는 시장이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다. 1918년의 실패 이후의 몇 주, 몇 달 동안의 공적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정치가로서의 업적이 이어졌다. 그린벨트 시설, 근대화, 산업단지, 문화 시설 건축이 나열되었다. 부채가 과중해진 문제는 경제 위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이 모든 내용은 마치 그가 시의회에서 이미 여러 차례 연설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상세하게 또 부분적으로는 부기 장부 정리하듯이 꼼꼼하게 정리되었다. 결론에 가서 그는 자신이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비난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비난이 그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1945년 이후에는 더 자주, 제국 수상 사무실에서 슈트레세만과 ‘지연정책’에 관하여 충돌했던 1923년 11월 12일의 극적인 장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 전체 내용은 1926년 당시 여전히 제국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쾰른에서 한 연설 가운데 두 문장을 인용하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 결론에서는 모든 라인란트 사람의 모범적인 단결과 조국애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설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회가 공공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개최 직전에 취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러한 자기변명을 전단지를 통하여 퍼뜨렸다. 이 전단지는 정치적 몰락 한가운데 있던 아데나워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 공정함과 자의식이 모욕당했다는 내용이 지배적이었지만 그 근거는 방어적이었다. 곧 자기 명예가 손상된 시장의 변명서였지 결코 한 정치가가 투쟁을 호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전투함의] 함교를 점령한 무뢰한들에 맞서 최후의 투쟁을 호소하는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쾰른에 관한 것과 최근의 시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들에만 한정되었다. 그리고 모든 자극적인 언사는 신중하게 삼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이 글은 아데나워가 이미 시장의 역할에서 은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그 임무를 수행하고, 모든 방면으로 나갔지만, 더 높은 정치로 도약하는 것은 삼갔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그는 1941년까지 쾰른시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65세의 나이로 가장 훌륭한 쾰른의 수장으로 존경받으며 은퇴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산산조각이 났다. 더 높은 정치에서 좌절하였기 때문이다. 내치와 외교 그리고 경제 정책에서 실패하였다. 그는 국제적인 타협에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이 아데나워 시장은 쾰른시의 역사에서는 큰 장을 차지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제국 역사에서는 기껏해야 글의 ‘각주’ 정도로 머물렀을 것이다. 매우 자제력이 있지만, 그 이유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 의미는 뜻하지 않게도 바이마르 공화국이, 그를 포함한 지도층 전체와 더불어 모든 면에서 조난을 당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지 못했고 그가 초래한 파국이 없었다면 아데나워 수상이라는 인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쾰른시장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독일과 세계에서의 독일의 위치에 대하여 좀 더 큰 스타일로 구상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큰 정치의 놀잇감으로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1933년 3월의 파국은 그에게 숨겨진 기회였고 또한 혼란한 상황은 지방 [정치]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미래에 관한 생각을 할 여유가 그 당시 아데나워에게는 확실히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전시장에서의 중앙당(Zentrum) 대회 대신에 노이마르크트에서 밤에 나치당의 대규모 대회가 열렸다. 선거 구호는 ‘아데나워를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이 대회의 스타 연사는 빌헬름 2세 황제의 4남으로 나치 돌격대 대장이 된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 왕자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비꼬는 투로 완전히 부당한 것은 아닌 ‘아우비’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치를 떨며 큰소리로 외쳤다. “제국 직속 남작 폼 슈타인이 흑적[중앙당(Zentrum)-사민당(SPD) 연정]의 시청의 부패와 실정에 대하여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3월 10일까지 아데나워는 시청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에 충실하였다. 그런데 그는 나치돌격대가 밤에 그를 노이마르크트로 끌고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군중에게 그를 보여줄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 전날 빌헬름 솔만에게 벌어진 일이 그에게도 일어날 것이란 말인가? 그동안 그는 독일에서 추락한 저명 인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많은 좋은 이웃들이 거리에서 그를 보면 비켜 갔다. 그의 아내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의 시체 냄새가 그에게서 났다.     


쾰른 중앙당(Zentrum) 서기인 페터 요제프 쉐벤을 대동하고 그는 밤에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차를 타고 쾰른을 떠나 본에 있는 친구에게 갔다. 그는 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쉐벤과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그는 다시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인사에 화답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친구들을 올곧고 충실하게 대하고자 하였다. 그의 자녀들을 만약을 대비하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호헨린드 병원으로 보냈다. 이 병원은 이후에 벌어진 위험들에서 구원의 방주와는 다른 역할을 하였다. 아데나워의 부인도 집을 떠났다.     


3월 12일 일요일에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사람들은 아데나워에게 다양한 경로로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충고하였다. 지방장관은 그에게 일단 2주간 휴가를 낼 것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사태를 끝까지 끌고 나갈 요량이었다. 그가 쾰른에서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등장한 것은 3월 12일 일요일 오전 귀르체니히에서 거행된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들을 기리는 행사였다. 사람들은 그를 마치 나병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기피하였다. 비록 나치당으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자기 상사에게 잘하던 부관 에버하르트 뵈너는 그를 옆으로 끌고 가 폭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 일은 다음 주 월요일 오전으로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경찰서장에게 시청의 보호를 요청하자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마치 축출된 왕처럼 그는 당당하게 다시 한번 자기 사무실에 들어가서 작별을 고하였다. 그러고 나서 시청 정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 열쇠는 자신이 간직하였다. 그 열쇠는 아데나워 사망 후에 뢴도르프에 있는 집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그 이후 다시는 그 시청사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 건물은 영국의 테러 공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선거에서 이제 쾰른 나치당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사실 많은 유권자는 두려움에 떨며 집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까지 나치당 의원이 4명이었으나 이제 39명이 되었다. 나치당과 연대한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흑-백-적 전선은 5석을 차지하였다. 독일인민당(DVP) 소속으로 유일하게 선거에 당선된 시의원은 나치당으로 옮아갔다. 한 명의 사민당(SPD) 의원도 당적을 바꾸었다. 이리하여 ‘민족혁명’은 46석 이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중앙당(Zentrum)은 27석, 사민당(SPD)은 13석, 공산주의 정당은 10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의원들은 ‘휴가 중’으로 선언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당과 그와 연대한 의원들은 여전히 소수파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다수당과 맞서게 될 뻔하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물러나든지 아니면 강제로 쫓겨날 뻔한 것이다. 그것이 법적 수단이든 아니면 물리적 폭력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3월 12일 밤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로이센 내무장관인 괴링에게 쾰른 상황에 대하여 소원(訴願)을 제기하고자 했다. 나치돌격대의 감시를 속이기 위하여 그는 자기 관용차를 월요일 아침 9시에 자기 집으로 오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침 7시에 경비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의 친구 페르드멩게스는 차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도르트문트의 베를린 행 급행열차를 타는 곳으로 태우고 갔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자기 집무실에 도착하였다. 그 건물은 행정 구역에 있었다. 그 건물에서 두 집 건너에 괴링이 거주하고 있었다. 경찰은 여기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쾰른시청사 앞에서는 [나치당] 당원들의 행진이 있었다! 대관구지도관인 요제프 그로헤는 시청을 점령하고서 지방장관에게 아데나워에게 당분간 휴가를 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헤는 시청사 발코니에서 아데나워가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보호검속’ 상태에 있던 사민당(SPD) 의원인 프레스도르프와 메어펠트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으로 다부진 체격의 귄터 리젠을 임시 시장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높은 보수를 받지 않고 명예직으로 시장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는 실제로 괴링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괴링은 아데나워를 맞이하면서 그가 쾰른 계좌에서 가져간 500만 마르크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아데나워는 격노하며 이를 부인했고, 라디오를 통하여 소식을 접한 쾰른에서 벌이진 완전히 불법적인 일들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였다. 특히 정부와 경찰서장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둘 다 경찰이 쾰른시청사를 보호하여 줄 것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괴링은 히틀러 총통의 방문 때 나치 깃발을 뽑아버린 일을 비판하였다. 아데나워가 변명하려고 하자 괴링은 대화를 끝내며 전임 국무장관인 칼 크리스티안 슈미트에게 조사를 이끌도록 명령하였다고 확언하였다.     


아데나워의 직무 박탈을 형식법적인 근거로 정당화하려는 새 정부의 노선은 이리하여 확실해졌다. 아데나워는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맞서기 위하여 아직 동원이 가능한 법적 수단을 활용할 것을 결심하였다. 리젠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그에 대한 비판에 관한 청문회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임시 시장은 3장짜리 편지로 대답하였다. 그 논조는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 편지를 잘 간직하면서 그 봉투에 간결하게 ‘범죄자의 편지’라고 적었다.     


리젠의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아데나워 씨, 당신은 범죄자입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민중에 대하여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잘못으로 그들을 엄청난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신앙의 전문가였으면서도 우리 신앙에 대하여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이 도시를 망가뜨려 도시에 대하여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부하들에게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영향이 없었다면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가장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정과 아내에게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의 무지로써 매우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 하느님과 당신과 접촉한 모든 사람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피고이고 나는 원고입니다. 그리고 민중이 당신의 재판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베를린으로 남편을 찾아온 아데나워의 아내는 리젠이 방문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그것을 매우 뻔뻔한 일로 생각하였다. 1948년 리젠은 아데나워에게 ‘사면장’을 발급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범죄자의 편지’는 나치의 대관구지도부가 그에게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33년 아데나워에게 리젠의 편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제 국가 행정의 냉정한 맷돌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제국 대통령은 4월 4일 아데나워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아데나워의] 직무 정지를 목적으로 한 공식적인 징계 절차를 시작했음을 통고하였다. 아데나워는 즉각적인 효력으로 잠정적인 직무 정지 조치를 당했다. 그의 급여는 1933년 5월 1일부터 절반으로 삭감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열 가지 이유를 근거로 하였다. 이 이유는 모두 그가 지방 정치에서 그동안 벌여온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프로이센 은행’에서 1,200만 마르크를 융자하기 위한 거래, 쾰른시 쓰레기 처리 시설과 관련된 심각한 부정, 부동산 거래에서 특정인에게 특혜를 베푼 일, ‘직무 수당’과 공관 관리에서 특혜를 누린 일, 1928년 ‘프레사’ 행사에 과도한 비용을 지출한 것, 비합리적인 재정 정책, 친인척 특혜, ‘개인적인 주식 투기사업을 하고 그에서 발생한 손실을 만회한 일’, 1931년 긴축조치를 따르지 않은 일, 1932년 자신과 부관에게 임의적으로 급여를 추가 지불한 일이 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고발에 대하여 18장에 달하는 문서로 매우 세밀하게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는 그가 이후 몇 년 동안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필요로 했던 많은 문서가운데 첫 번째로 작성한 것이다. 쫓겨난 아데나워를 매우 실망시킨 것은 쾰른 중앙당(Zentrum) 의원들이 지방장관의 비난에 맞서 그를 변호해주지 않은 일이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비열한 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아데나워 편에 선 사람에는 슐테 추기경이 있다. 그는 부수상인 폰 파펜에게 아데나워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당혹스러운 잘 모르겠다는 반응만 받았을 뿐이다. 아데나워를 편든 또 다른 이는 수상실의 전임 국무장관으로 여전히 뮌스터의 지방장관이었던 헤르만 퓐더였다. “귀하가 귀하의 고색창연한 시청사에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보면서 얼마나 비통하고 분노하였는지 모릅니다.” 국가 권위의 대표, 곧 지방장관 엘프겐이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최소한 그에 대하여 책임이라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 놓고는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은 비열한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시 맞이하게 된 혁명의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지역 대표가 국가권위의 안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즉시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늘 그렇듯이 자기 내면의 감정을 최소한만 내비치었다. “나는 요즘 이를 꽉 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 귀하의 추측은 정곡을 찔렀습니다. 국가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은 추락했고, 제가 간청한 도움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쾰른시는 모든 지출을 잠정적으로 중단하였다. 도이체방크도 아데나워의 계좌를 일단 막는 것이 가장 현명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결국 브뤼닝 지점장도 얼마 전에 체포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거의 돈 한 푼도 없이 빌헬름슈트라쎄에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그의 주변에서는 베를린 전체가 ‘민족적 각성’이라는 봄의 환희에 휩싸였다.    

  

그를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예외였다. 또한 대니 N. 하이네만도 그를 찾았다. 쫓겨나기 이틀 전에 아데나워는 몇 달 동안 소식이 없던 한 사업가의 긴 편지를 받았다. 그는 현대의 메르쿠리우스 신이나 되듯이 유럽과 미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이네만은 그가 3월 20일 무렵에 베를린을 들를 예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히틀러나 그의 권력 획득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오로지 경제에 관한 생각만 썼다. “귀하가 병환을 거의 이겨내시고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독일에 계시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에서 이 편지를 기억해냈다. 이 편지에 대하여 그는 3월 11일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처지에서 답을 썼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업무 차 2~3일 동안 제국 수도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인 그는 이제 잘나가던 시절의 관저에서 난민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네만은 다시 한번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4월 11일 자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이 손으로 쓴 편지는 아데나워와 하이네만이 그 전과 후에 주고받은 많은 편지와 더불어, 독일군이 1940년 브뤼셀에 입성할 때 소피나(SOFINA)가 주도한 대규모 서류 소각 조치의 화를 모면하였다. 이 편지는 실각 이후 그의 기분을 말해주는 확실한 문서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신을 교환한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귀하는 제대로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매우 강력한 선동과 모함으로 쾰른을 떠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여기 베를린에 피난해 와야 했습니다. 저는3월 13일부터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보유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4월 25일까지 머물 예정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여기도 떠나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쾰른으로는 당분간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좋아하던 이들이 [나치들에] 사주 되고 있습니다. 나의 아내는 제 곁에 있고 자식들은 쾰른에 있습니다. 이제 이것이 16년 동안의 시장으로서의 헌신전인 노력과 1918년 혁명에서 쾰른시를 살려낸 공로와 라인란트가 독일에서 분리되는 위험에서 막아낸 결과입니다! 이를 돌아보면 기가 막힙니다. 더 이상 과거의 직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운이 좋다면 적은 금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업도 없고 변변한 소득도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7명의 자식을 생각하면 제가 더 괴롭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살아갈 수 있는 일과 수입을 마련하도록 나를 도와주시기를 귀하에게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안 좋지만 혹시 귀하가 나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로 너무 간략하게 이야기 하면서 나의 상황이 내외적으로 절망적이라고 귀하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날 쓴 두 줄은 좀 더 위급한 것이었다. “저는 여기에서 난민입니다. 저는 현재 빌헬름슈트라쎄 64번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귀하를 카이저호프에서 만나기는 힘이 듭니다. 그곳에서 저는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으로 길게 쓴 편지에 아데나워는 늘 하던 식으로 “진심으로 삼가 인사를 드립니다. 귀하의 [아데나워]”라고 마치며 서명하였다. 그러나 4월 12일에 구호 요청을 바라는 편지에는 ‘인사드립니다.’라는 형식적인 인사로 편지를 마치고 있다. 아데나워는 편지의 맺음말을 늘 신중히 골랐다. 그는 자기 곤궁을 부끄러워하여 심리적인 거리를 둔 것인가? 그는 좋은 시절에 사귄 친구가 또 등을 돌릴 것을 두려워한 것인가? 그러나 하이네만이 정말로 빌헬름슈트라쎄 64번지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아데나워가 평생 잊지 못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나는 집에 많은 현금을 보관한 적이 없다. 나는 위기에 당면하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값나가는 물건을 처분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좋은 친구 대니 N. 하이네만이 [멀리 미국] 코네티컷 주의 그린위치에서 찾아왔다. 하이네만은 유대인이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어도 이미 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어려움이 빠지지 말라고 1만 제국마르크를 건네주었다.” 아데나워는 이 장면을 그의 《회고록》 제2권에서 묘사하며, 1952년 9월 10일 브뤼셀에서 맺은 독일·이스라엘 협정과 연관을 지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외무장관 모세 샤레트 맞은편에 앉아있을 때 이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서 벌어진 다른 일도 회고하였다. 1934년 크라우스 교수가 그를 찾았다. 그는 사민당(SPD) 쾰른시 당위원장 헤르타 크라우스 박사의 부친이었다. 헤르타 크라우스는 그 당시 이미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의 큰 도움 덕분에 가족들은 당분간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민을 준비하고 있던 크라우스는 모아 놓은 돈이 조금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아데나워에게 주었다. 아데나워는 감격하여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당연히 돈은 받지 않았다. 30여 년이 지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나는 쾰른시장으로서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하이네만과 크라우스 교수만이 내가 쫓겨난 다음에도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구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레위 19,18]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하이네만은 한번 도운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도움이 더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결국 이 자존심 강한 남자는 그에게 3년 동안 신세를 져야 했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 제국의회는 [히틀러를 위한]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아데나워는 4월 7일 법률고문인 뫼닝에게 전보로 그가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위원 선거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고 알렸다. 4월 26일 새로운 국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는 아데나워에게 매우 현실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집무실을 떠나야 했다. 여기에서 그는 독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기를 절망하면서도 마치 태풍의 눈에 있는 듯이 홀가분하게 지냈다.     


이제 그에게는 하이네만이나 페르드멩게스와 같은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가 숨을 수 있는 두 개의 도피처만이 남았다. 바로 그의 가족과 교회였다. 4월 17일 그는 오랜 학교 친구로 마리아라흐 수도원 원장이 된 일데퐁스 헤르베겐에게 수도원에 한두 달만 피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고요함, 특히 영적 분위기 안에 머물고 싶네. 내게는 지금 육체적, 정신적인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네. 나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네. 그저 조용히 쉬고 싶을 뿐이네. 그래서 식사도 내 방에서 하고 싶네. 호텔에서는 내가 필요한 고요와 은둔을 찾기 힘들 것이네. 당연히 비용도 지불하겠네. 또한 당연히 자네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겠네. 내가 그곳에 머물 수 있다면 정말로 감사하겠네. 그러면 자네는 내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네.”     


정치적으로 헤르베겐은 지금은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레고리오 전례를 쇄신한 것으로 유명한 확고한 왕정주의자인 이 수도원장은 이해 초에 군주정치가 조만간 복고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포츠담의 날’ 행사가 거행 된지 4주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혁명’의 주최 측과 어느 정도 지근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데나워에게도 안전을 상당히 보장하는 일도 되었다. 헤르베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가 자네를 환대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네. 자네가 조용히 맘을 정리하고 편해지도록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기꺼이 초대하네. 자네가 언제든 와도 좋다네. 자네의 진실한 친구 헤르베겐.”     


생존 투쟁     


1933년 3월 13일 쫓겨난 이후부터 1937년 8월 쾰른에 마침내 평정이 회복될 때까지 4년 반 동안이 아데나워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말씀드리는’ 은총을 하느님이 부여한 사람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안 남은 친구들에게 가끔 고백하기를 그는 이 시기에 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에 이를 때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내 마음 상태를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고 그저 한 마디면 되네. 내게 가족과 종교적 신념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목숨을 끊었을 것이네. 정말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확실한 거주지도 없고 건강이 악화한 채로 아데나워는 쫓겨나고 나서 1년여 동안 그의 정적들이 직무 관련 형사소송절차를 통하여 그를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하는 것에 대비해야 했다. 새로운 직업적 토대를 마련해보려는 절망적인 시도는 금방 좌절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돈 걱정이 모든 문제에 앞섰다. 학창 시절부터 그는 돈을 마련하는 일에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는 딸린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9명으로 이루어진 가정의 가장이 되어있었다.      


나치돌격대가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쾰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자녀] 가족은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쾰른의 호헨린트 병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자신은 4월 마지막 주일에 아내와 함께 마리아라흐 베네딕트 수도원을 향해 떠났다. 여기에서 사람들을 그를 재워주었다. 그 방은 사람들이 베네딕트 수도원의 객실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았다. 품위가 있지만 전혀 사치스러운 방이 아니었다. 크고 부분적으로 어두운 목재로 장식된 방이었다. 높은 창문이 나 있고 양탄자가 깔려있으며 전등이 있는 소박한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위의 십자가상과 벽에 붙어 있는 기도 의자가 그 방이 수도원의 서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수도원 성당은 후기 낭만주의 건축예술의 진주와 같았다. 하인리히 2세 궁정백이 1093년 이 수도원을 세웠다. 지리적으로 이 수도원은 쾌적한 들판과 라흐 호수의 어귀에 있는 활엽수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지만 자동차와 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수사들처럼 정해진 리듬에 따라 합창 기도, 밭일, 도자기 만들기, 그림 그리기, 또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싶지 않은 손님은 주변 숲을 산책하거나 호숫가를 따라 걸을 수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은 버스 행렬을 이루어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잔디로 뒤덮인 호숫가에는 아직 캠핑족들이 들어서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미사에 자주 참여하면서도 오르간 연주자석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래야 방문객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산책을 가고 싶을 때는 수도원의 작은 문을 통해 갔다.    

 

목가적인 삶이었던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생애에서 마치 1916/17년에 그의 전처 엠마가 죽은 이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깊이 하는 시기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 당시]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커다란 파국을 맞이하였을 때는 업무의 압력을 엄청나게 받았었다. 우울할 틈이라고는 일요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때 아데나워가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했는지를 제삼자의 기록을 통해서만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재와 전쟁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두 번의 서신교환 내용이 보존되어 남아있다. 한 편지에서는, 다른 경우에는 대부분 말이 없고 닫혀 있던 이 사람의 내면을 문서로 만들어진 발언을 통하여 열어주고 있다. 특히 1933/34년에 대니 N. 하이네만과의 서신 왕래가 매우 잦았다. 이 편지들은 온전히 남아있다. 여기에는 주로 아데나워의 경제적 생존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련의 장문의 편지는 쾰른의 [로베르트의 아내인] 도라 페르드멩게스와 주고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모든 관심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나치 혁명과 1933년 초와 여름의 외교정책, 자기 생존을 위한 싸움, 가족, 수도원 분위기, 강의, 오페라 공연 감상에 대한 회상, 마리아라흐 주변의 경치, 나무와 식물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이미 아데나워 부부와 페르드멩게스 부부는 특히 두 분야에 공통된 관심을 보였다. 바로 쾰른의 극장과 원예의 즐거움이었다. 1933년에 페르드멩게스 부부는 실질적으로 아데나워 부부를 도와준 극소수의 쾰른 친구에 속하였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나치 돌격대의 감시를 피해 좁은 자동차로 아데나워를 빼돌려 베를린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페르드멩게스 부인은 5월에 마리아라흐에 있는 아데나워를 방문하고, 편지로 그를 격려하고, 쾰른에 고립된 [자녀] 가족과 접촉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여자를 무한히 신뢰하였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러한 생각은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에게도 함께 작용하는 역할을 했다. 은행가인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유대계 은행가와 연줄이 있기에 이 시기에 매우 신중해야 하였고 그래서 아데나워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본인의 직접 증언 이외에도 제삼자의, 특히 가족들의 보고도 있었다. 아내 구시는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나이가 든 아들들과 남편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펠드멩게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가 자기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이 외로운 남자가 정서적으로 안정된다고 이야기하였다. 아들과 나누는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되어 장성한 아들들과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논의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1933년 여름, 그 당시 10살이던 아들 파울은 며칠 동안 수도원에 머무를 수 있었다. 1933년 크리스마스 축제 때 아데나워의 식구들은 기차를 타고 쾰른에서 안더나흐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우편버스를 타고 마리아라흐로 갔다. 눈이 내린 아이펠 수도원에서 다시 만난 가족은 촛불을 밝힌 대성당에서 자정미사를 드리고, 쫓기고 있는 이와 그 가족은 그레고리오 성가에 도취되었으며, 크리스마스 나무 아래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 이전과 이후에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정치적으로 중요해진 아데나워의 인생에서, 이때는 이 장소에서 독일 전통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소박함이 전개되었다. 아데나워가 며칠 뒤에 하이네만에게 쓴 편지에서, 심각한 때였지만 “성탄절은 여기에서 이 상황에서 나름대로 매력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날 이후로 가족들의 마음에는 그 수도원이 깊이 새겨졌다. 어린 자녀 몇 명은 그곳에서 혼인식을 거행하였다. 파울 아데나워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입회할 생각을 오랫동안 품다가 결국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공부를 하면 그가 1945년 이후 부모, 특히 아픈 모친 곁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수도원의 고요함 속에서 이따금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나중에 이 고요한 오아시스를 그리워하였다. 1949년의 정부 수립의 혼란 속에서 그는 볼마르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란 속에서 저는 가끔 마리아라흐를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려봅니다.” 독일연방 수상 시절에 그는 수도원 성당의 서쪽 내진(內陣)에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마리아라흐의 수사들은 뢴도르프의 체닉스벡 8a번지에 있는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에게 라흐 호수에서 잡은 커다란 잉어를 선물하였다.      

[나치 집단의] ‘민족적 각성’이 진행되던 시기에 마리아라흐는 세상만사와 단절된 명상의 장소가 전혀 아니었다. 아데나워를 기꺼이 [수도원에] 머물도록 했던 일데퐁스 헤르베겐은 1933년 초에 그 당시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에 물든 가톨릭 신자에 속하게 되었다. 《베스트도이쳐 베옵아크터》는 기쁨에 넘쳐 1933년 5월 30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헤르베겐이 쾰른에서 선포하기를, 민족과 국가가 “위대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통하여” “민족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1933년 7월 21~23일까지 마리아라흐에서는 부수상인 폰 파펜이 참석한 가운데 가톨릭 아카데미연합회의 제3차 사회학 특별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는 히틀러의 새 국가를 열정적으로 찬미하였다. 아데나워는 7월 말에 쓴 편지에서 이 모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 세미나, 더 나아가 교황청과 히틀러 정권이 맺은 협약에 관한 자기 의견을 말로 전달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리아라흐에 ‘유배당한’ 것처럼 느꼈고 한번은 ‘나의 망명’이라는 표현을 글로 적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흐름을 매우 긴장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그러한 흐름이 독일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자기 개인적인 삶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히틀러 정권이 어떻게 될지에 관하여 그는 1933년 여름이 될 때까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페르드멩게스 부인에게 1933년 5월 4일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움직임이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안에 매우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뭔가를 분명하게 바라볼 확실한 입장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페르드멩게스 부인이 말한 지금까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의견에 대한 답을 하면서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 함께 일할 것을 강요하게 된다면, 최소한 매우 강력하게 강요한다면 … 그는 적절한 방식으로 이를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분명해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가 교회의 투쟁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데나워는 진작 알았다. 193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그는 “개신교의 쇄신”에 흥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운명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고 한 것이다. 페르드멩게스는 개신교 집안이었다. “부수적인 현상이 기쁜 것만은 아니지만, 기쁘게도 제대로 된 사람이 뽑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데나워가 나중에 답신한 페르드멩게스 부인의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사람은 4월 25일 히틀러가 개신교회와 관련된 업무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쾨니히스베르크의 군종교구 목사인 루드비히 뮐러일 것이다. 그 당시 개신교 내부의 많은 사람들은 비교적 믿을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밝혀진 대로 틀린 판단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조만간 정치권력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교회와 충돌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굳건하게 버틴다고 해도 이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제가 부인에게 근본적으로 혼란스런 이 시기에 다른 모돈 것과 마찬가지로 이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나중에 쓴 편지에서도 그는 개신교의 운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나치당과 히틀러가 용납하지 않은 제국 주교인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빙 사이의 갈등과 프로이센에 교회특사를 파견하는 일이 일어난 다음인 6월 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신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언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까요?” 일주일 뒤인 7월 5일 그는, 이전에 몇 번 한 것처럼, 신문 기사를 스크랩 한 것을 페르드멩게스 부인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덧붙이기도 했다. “부인과 남편께서는 개신교회에 벌어지는 일에 관하여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까요? 제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새로운 삶을 이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양심의 가책이 따르게 될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슬퍼집니다.”     


이 서신 교환 내용을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주로 《프랑크푸르터 차이퉁》과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그리고 프랑스 신문들의 기사를 보고 생각을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교협약에 관련된 협상 그리고 7월 20일의 제국정교협약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 대신에 중앙당(Zentrum)에서 전개되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논평을 하였다. 그 논평은 매우 날카로운 것으로 어느 정도 슬픔이 배어 있었다. “중앙당(Zentrum)을 위해서 저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중앙당(Zentrum)은 지난 세월 동안 새로운 정신을 절적한 시기에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6월 29일 아데나워가 한 말이다. 7월 5일 그는 말을 이어갔다. “중앙당(Zentrum)은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사이에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감정으로 이를 환영합니다. 한편으로는 제 마음에 부담이 덜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적 색채가 있는 정당의 존재가 어찌 되었든 필요악이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좋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알고 계신 것처럼 오래전부터 중앙당(Zentrum)의 지도부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을 함께 한 정당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오늘 여기 이웃 마을의 가톨릭 신부가 체포되었습니다. 트리어 교구의 신부들이 쾰른의 동료들보다 더 투쟁적입니다.”     


아데나워에게는 국내 정치의 변화만큼이나 불투명한 것이 국제정치였다. 히틀러 정권은 권력 획득의 초기 단계에서 그들이 평화를 지향하는 뜻을 지녔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노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걸맞게 아데나워도 1933년에 쓴 편지에 보면 제국 정부의 외교적 모험에 대한 걱정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독일 제3제국의 초기 단계에서 그가 더 근심한 것은 무역정책에서의 취약한 입장이었다. 1933년 6월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회의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이 회의에서] 우리가 언급할만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정치적 신뢰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제네바협상을 보십시오. 우리는 달러화와 파운드화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국가의 물건을 수입해야만 그 국가도 우리 물건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밖의 외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무슨 좋은 일이 우리에게 생기겠습니까? 결국 런던회의는 협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제네바협상에 미루고 [결과가] 뒤집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말입니다! 천천히 그리고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선포되었던 것들이 갑자기 드러날 때가지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저는 제가 말씀 드린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조속히 파산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어둡게 서술된 생각 뒤에는 계산이 깔려있다. 국제정치 상황이, 히틀러 정권이 제정신을 들게 하든지 아니면 굴복시키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제국의회에서 히틀러가 대단한 ‘평화 연설’을 하기 하루 전날인 5월 16일 아데나워는 여전히 어두운 국제외교적 전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외교적 측면은 분명히 심각합니다. 내일 개최되는 제국의회의 회의가 외교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는 이 상황에서 탈출구가 없을 것이라고 아직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길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매우 안 좋은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영국 수상 맥도널드가 제네바에서 논의하던 군비축소에 관해서도 희망과 회의가 엇갈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국제적인 체계에 심각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고 생각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국가들 서로의 지위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러시아의 활발한 정치도 그 일부입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이 완전히 돌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히틀러가 유럽 전체의 권력 체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사실은, 제3제국이 막 시작한 이 무렵에 아직은 그가 예측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에게 좀 더 명백한 사실은 독일 자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혁명적 특성이었다. 히틀러 정권에서 경제와 식량부 장관을 지낸 알프레드 후겐베르크가 6월 말에 사임하고 그가 이끌던 독일국가인민당(DNVP)을 해산하자 아데나워는 6월 29일자 편지에서 이에 대하여 신랄한 어조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제 어찌될까요? 후겐베르크가 물러나면 주식이 오르고 연금이 삭감될 것입니다. 이제 ‘이자 노예살이’에 대한 투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국가인민당(DNVP)이 사라지면 중앙당(Zentrum)이 살아남을 날도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 후겐베르크는 독일 의회주의의 종말을 이끈 자로 역사에 남게 될 것입니다.”  

   

자기 궁핍한 상황과 책과 꽃에 관한 이야기를 몇 장 쓰고 난 뒤에 아데나워는 다시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다시 한번 정치 이야기를 할까요? 모든 혁명은 파괴를 낳습니다. 혁명은 반드시 파괴를 불러옵니다. 무엇을 얼마나 파괴하느냐만 문제가 될 뿐입니다. 혁명이 그토록 많은 것을 그토록 빠르고 철저히 파괴하여 새로운 건설을 완전히 또는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면, 혁명 상태가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안정과 새로운 건설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파멸이 올 것입니다. 일단 기다려봅시다. 그러나 때가, 곧 안정과 건설의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이 편지의 앞부분에 요약되어 나온다. “저희 생각으로는 군주제가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호헨촐러른 가문 사람이든 어쩌면 히틀러라도, 일단은 종신 제국 대통령이 되었다가 그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의 움직임이 안정된 길에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덧붙였다. “끝으로 정치에 관한 부탁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나치 당원과 논의하지 마십시오, 논의하면 손해만 볼 뿐입니다.”   

  

호헨촐러른 왕가의 왕정 복고에 관한 생각이 그 즈음 아데나워를 보호하고 있던 헤르베겐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데나워에게 반프로이센 정서를 가리키는 것을 어디에서든 찾아내려는 이들은 이러한 자유로운 사유의 유희를, 호헨촐러른 왕가의 복귀와 연결해 음미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아데나워가 그 당시 많은 이들이 빠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히틀러가 차라리 적절한 요소일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933년 초반과 여름에 사람들의 정신을 전반적으로 어지럽게 만든 것은 완전한 반나치주의자인 아데나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특정한 노선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응은 그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5월 2일 그는 대니 N. 하이네만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이제 거의 일주일 동안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요함과 외로움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점차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일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돌아가는 정세를, 곧 유럽과 미국의 정세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가 몇 달 동안 수도원의 조용한 생활 리듬에 적응하고 난 다음에도,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여전히 힘들어 했다. 1934년 3월 4일 베를린에 오래 머물고 나서 다시 돌아와서는 그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아직도 깊은 겨울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안개가 짙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사순시기의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르간은 주일을 제외하고는 재의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연주되지 않습니다.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는 매우 무겁습니다. 7주 동안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며칠 동안은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성탄절은 상당히 잘 지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다시 적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할 준비가 되었다. 페르드멩게스 부인은 아데나워가 마리아라흐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읽었다. “저를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곳의 고요와 고독, 온전한 영적 분위기, 곧 종교와 경건의 분위기, 자연, 예술, 학문의 분위기는 제게 아주 좋습니다. 저는 이를 분명히 느낍니다. 저는 고독과 고요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내적으로 준비하려고 성실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인도 좋아하는 힐티(가 그의 책에서 ‘삶의 단계’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저는 삶의 또 다른 단계에 오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첫 주에 그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이었다. “자두나무와 배나무의 꽃은 이미 졌습니다. 호숫가에 잔뜩 늘어선 사과나무는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룻밤 만에 너도밤나무 숲이 푸르러졌습니다. 여기 숲 속에 있는 것과 같이 그토록 아름다운 물망초를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푸릅니다. 작년에 바덴바덴의 메르쿠어 산에서 매우 아름답게 피었던 하얀 야생화가 여기에도 피어있습니다.” 이틀 후에, 매우 말수가 적은 아데나워가 거의 찬가를 부르게 되었다. “올해 초에 자연 전체를, 제가 자연 안에 살고 있는 이곳에서처럼 이렇게 관찰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매우 감동받고 자연이 이 6주 동안 펼친 엄청난 힘에 놀라고 있습니다. 거의 날마다 전혀 다른 모습이 전개됩니다. 자연은 이 시기에 정말로 엄청난 것을 이루어냅니다. 이제 14일이 지나면 하지입니다. 동지가 훨씬 의미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면 자연은 다시 다음 봄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처럼, 비록 엄격하지만, 지속적인 계절을 지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인내심을 단련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두려움이 솟아납니다. … 당연히 퇴보가 있겠지만 진보도 있습니다. 인간은 평생 다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육체보다는 정신이 더 편한 것 같습니다. 긴장이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합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경제적 생존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명상적 분위기는 때로 그의 생각을 마비시켰다. “저의 직업적인 일에 관한 것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곳에서는 그것을 거의 망각하고 있지 않나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합니다. 아직 힘든 싸움이 저를 기다리고 있지만 현재 그 싸움을 매우 혐오하여 그에 맞설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내적 성찰과 패배의 날들, 그리고 때로는 절망의 때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1933년 5월 중순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저는 며칠 동안 매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외교적인 상황, 제 가족의 미래, 저의 미래의 직업,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저의 현재 상황에서 오는 굴욕감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도착한 귀하의 편지는 딱 알맞을 때 저에게 더욱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귀하께서 제가 상황을 잘 통제할 것이라고 확신하신다면 저도 그러한 확신을 지니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 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상에서 저지른 모든 죄에는 죗값이 따릅니다. 이 원칙에는 조금의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저는 귀하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미래가 다시 한번 매우 어두워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그저 내적으로 최대한 강해져서 생존할 힘을 기르는 것뿐입니다. 저는 커다란 맥락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고, 지상의 생존을 인간의 삶의 일부로 여기도록 노력하고, 가시적인 것으로도 당신을 드러내시면서 그 위에 서시고 그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굳게 믿으면 이 시기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수도적’ 성찰을 한다고 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성찰을 하기에 여기 분위기가 딱 알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생각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설명에서 보여주는 대로 아데나워는 문맥의 [논리적] 연결 없이 그러한 ‘수도적 성찰’에서 다시 정치로 이야기가 넘어가고 또다시 경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 저는 너도밤나무 숲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8일 전에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비로소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가기에 태양이 비치고 있습니다. 또한 멋진 만, 호수와 북쪽으로 멀리 펼쳐진 전망이 보입니다. 귀하의 부친께서 여기를 산책하신다면 매우 좋아하실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8마리의 노루를 보았습니다.” 결론에 가서는 다시 자기 처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면증과 약간의 무기력감은 떨치기가 힘듭니다. 귀하께서 매일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최대한 마음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시기가 닥칠 것입니다.”     

1933년 6월 말에 아데나워는 매우 현실적으로 자신이 이제 개인적 몰락을 준비해야겠다고 보았다. “저는 저의 미래에 대하여 부인께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페르드멩게스 부인이 알아야 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저는 부인의 견해에 동감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저의 신경이 전체적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공무원법 제4조에 근거한 신청은 저에게 내적으로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굴욕에는 현재의 저의 상태가 주는 완전한 굴욕, 제가 머물고 있는 상황입니다. … 한마디로 온전함과 안정된 수익이 현재 저에게는 전혀 먼 이야기입니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제 가족은 결국 어떻게 될지 말입니다.”     


아데나워의 장인인 친써 교수는 튀빙겐에서 쾰른으로 그 주에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는 대관구지도관인 그로헤를 “만나서 도대체 나를[아데나워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고 조롱하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서” 온 것이다. 친써가 그로헤와 6월 말에 나눈 대화가 잠시 소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대화는 아데나워가 최소한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주제로 하였다. 공식적인 면직 조치로 아데나워는 1933년 7월 초에 이미 직업을 잃어버렸다.      


아데나워의 베를린 방문이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앗아갔다. 그는 베를린에서 “최악으로의 완전한 급변”에 당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7월 24일 그는 [최종적인] 면직 처분을 받았다. 연금 규정에 관한 문제는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 더욱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곧 아데나워 수입의 상당 부분이 원래 관사를 사용하지 않은 대가로 지급됐었다. 이 돈으로 그는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있는 아름다운 집의 주택담보 융자금 원금과 높은 이자를 지불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권한은 그가 해직되면서 떨어져 나갔다. 또한 아데나워가 직무 성격 차원에서 수행하던 감사직에 대한 사례금도 사라졌다.      


앞으로의 모든 것은 이제 형사소송의 전개에 달려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아데나워의 시장 시절에 관련된 문건들이 먼저 쾰른에서, 그리고 프로이센 내부무의 관련 부서, 그리고 끝으로 여기의 한 위원회에서 매우 정밀하게 검토되고 있었다. 최종 결과가 어찌 나오든 간에 아데나워는 1933년 7월 말에 그의 시민으로 사는 삶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이 충격에 대한 그의 첫 반응은 그가 그 당시 의지하고 있던 페르드멩게스 부인에게 보낸 7월 27일자 편지에 나와 있다. “부인께서 제 아내와의 전화 통화로 들으신 대로 아내가 어제 저의 파면 처분 고지서를 제게 전달해주었습니다. 하루 전날에 제 아들이 전화로 그 문서를 제게 읽어주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나서 저는 우리가 올해 초에 함께 갔던 산에 올랐습니다. 거기에서는 호수와 먼 곳까지 아름다운 경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주저 않아 저의 업무 성과의 결산을 해보았고 그 결과에 만족하였습니다. 제가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누구나 잘못은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다만 저는 확신합니다. 제게 주어진 과제에 대하여 옳게 생각했고 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저의 고향과 독일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선거 구호에서 동시대 사람의 평가보다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는 늘 저의 원칙이 되어왔고 자금도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꾸짖어야 하는 점도 있습니다. 저는 일에 중독되어 저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등한시했습니다. 그래서 제 가족에게 미안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저의 가족 전체가 강인하고, 저의 가정의가 깜짝 놀라며 확인하여 준 대로 저의 몸이 버텨준다면 뭔가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합니다. 저는 어른이 되면서 늘 생각을 잘 하고 먼 미래에 대해서까지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주 하느님께서 제게 엄청나게 힘들고 무거운 진실을 전해주셨습니다. 곧 자기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진리 말입니다. 저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분이 좋습니다. 힘든 시기가 올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매우 흥미 있게 읽은 《카부르》에 관하여 나중에 다시 한번 부인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수동적 본성의 징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수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잘 해쳐 나왔습니다. 부인께서 아시는 대로 ‘한 번 실추된 명예는 더 이상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의 적들은 누구도 제가 명예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적으로 저는 몇 달 전부터 저의 업무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2년 전부터 저의 내적인 태세를 갖추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는 확고한 원칙을 수립해왔습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글로 표현하기 보다는 말로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실추된 명예’라는 말은 아데나워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미 이전의 편지에서 그는 그 당시 읽은 책에서 발견한 ‘매우 좋은 격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곧 ‘잃어버린 권력은 되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명예는 아니다.’라는 격언이다. 7월 27일의 특이한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된 것이 아니다. 아데나워는 갑자기 ‘일자리 창출과 금융정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자기 가정과 페르드멩게스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더니, 이 편지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그가 좋아하는 주제로 넘어간다. 바로 식물이다. “플록스와 헬레니움. 부인의 정원을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정원도 그 정원과 똑같이 가꾸었습니다. 그 정원을 내년에도 가꿀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부인께서는 제가 식물에 빠진 것에 대하여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모든 식물이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힘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그리스 사람들이 모든 꽃에는 드리아데스* 가 살고 있다고 한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 말을 상당히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미신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트리어 성지순례에 관하여 매우 분노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기에 전시된 재킷은 가짜입니다. 제 생각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거룩한 재킷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것으로 돈벌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많은 순례자들이 거기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있지만 말입니다.”   

  

* 드리아데스[Dryade, 역자주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정령인 Δρυάδες]     


세상과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을 완벽히 포기하지는 않는 그러한 생각들에서 마이라라흐에서 개최된 프란츠 폰 파펜과의 세미나와 정교협약이라는 정치에 관한 생각으로 건너뛴 다음 다시 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나서 결론적으로는 추신을 덧붙이고 있다. “부인께서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시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저는 아직 날 오징어를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코스모스》 잡지를 한번 살펴보시라고 보내드리겠습니다. 저렴한 정기구독을 권유합니다.”     


이러한 편지 내용에서, 이 다차원적인 인물이, 쾰른과 베를린의 새로운 주인들이 이 사람을 완전히 버렸고 망가뜨렸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달 뒤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혹시 귀하께서 파리에서 열린 국제 사회민주주의 회의에 관한 기사를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민당(SPD)이 이끄는 사회주의운동은 국제적으로 비틀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임 독일 사민당(SPD) 당수인 벨스가 한 연설은 매우 약해 보입니다. 그가 한 말인 ‘복수’는 제 생각에, 제가 보기에는, 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품위가 없으며, 또한 많은 이들에게 이를 포기하기가 원래 무척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용기를 내었다. “제가 여기에 얼마나 더 머물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은 거의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인내를 시험하는 매우 힘든 때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금까지의 삶 전체가 겉으로 보기에 확실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구름이 드리운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합니다그리고 그에 필요한 강한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와 나란히 이루어진 하이네만과의 매우 세속적인 내용이 주가 된 서신 교환이 보여주듯이 그는 1933년 초부터 경제적으로 더 이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1933년이 지나갈수록 상황은 더욱 힘들어졌다. 1930년만 해도 그의 연간 수입은 모두 합쳐서 108,250제국마르크에 달했다. 이제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아무런 돈도 지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쾰른에 있는 집의 주택담보 대출금은 계속 갚아 나가야 했다. 많은 밀고 당기기 끝에 1933년 11월 1일부터 쾰른시로부터 월 1,013.80제국마르크를 연금으로 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조차도 다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받아야 하는 주택 보조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 돈에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내고 토지세도 납부하려던 것이었다. 1935년 5월 초에 그는 자기 아름다운 집과 관련된 비용 지급이 너무 지연되어 잠정적으로 집달관이 투입되어야 했다.   

  

모든 것은 형사소송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1934년 6월까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매우 불확실했다. 아데나워는 자기 변호사로, 에센의 유명한 형사사건 변호사인 프리드리히 그림 교수를 선임하였다. 그림 교수는 매우 뛰어난 법률가로서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인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새 권력자들도 그를 좋게 보았고 높이 평가했으며 그를 나치당에 천거하였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림은 매우 올곧은 사람으로 1900년대 전반기의 정치적 흐름을 파악한 인물이다. 체제가 바뀌었고, 모든 새로운 체제는 정치적 사법기관으로 정적들을 탄압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훌륭한 변호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1923년의 루르투쟁에서 그는 ‘소극적 저항’의 선두에 나서서 싸웠던 이들을 변호하여 유명해졌다. 이어서 그는 일부 ‘정치적 암살자들’을 변호하였다. 이제 전혀 다른 부류의 정치적 사법기관의 희생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에센시에서 그는 유대인 변호사들을 위하여 변호에 나섰다. 쾰른에서는 대규모의 괴레스하우스 재판에서 전임 법률고문관이었던 뫼닝을 열심히 변호하였다. 그리고 이제 아데나워도 그를 찾았다. 그림은 마리아라흐에 1주일간 머물면서 그의 의뢰인의 변호 준비를 하였다. 매일 밤 ‘수도원의 위풍당당한 수도원장’인 일데퐁스 헤르베겐은 그가 보호하고 있는 인물과 나치당 소속의 변호사와 포도주를 마셨다.   

  

이 사건 전체는 당연히 무엇보다도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소하게 넘길 수 없는 점은 아데나워의 주식 투기, 곧 실패로 끝난 개인적 일이었다. 그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에서 쾰른이라는 대도시를 그토록 잘 운영했던 이 인물이 개인적인 일에서 그토록 부주의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른바 분리주의에 대한 혐의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그림이 전문가였기에 아데나워에게 철저히 질문하였다. 자기 ‘회고록’에서 그림은 아데나워에게 불투명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데나워가 국가반란의 의도를 추구했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그림이 이러한 생각을 그의 나치당 동료에게 전달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기묘한 것은, 하필이면 히틀러의 아데나워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총통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두 건축가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알베르트 슈페르와 헤르만 기슬러였다. 슈페르는 1945년 이후 사민당(SPD)으로 전향하였고 기슬러는 고집불통이었다. 이 두 사람은 히틀러가 아데나워 시장에 대하여 경탄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히틀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분리주의자였고 그의 철저한 가톨릭주의 때문에도 당을 거스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시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어낸 시장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증명한 바가 있다. 그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는 또한 쾰른시의 구조를 잘 파악하여 강제적으로 도시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졌다. 물론 여기에는 돈이 들었다. 그리고 빚 때문에 그는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쾰른시는 이 빚을 청산하게 되었고 쾰른시민들은 이러한 아데나워의 업적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금 박탈이 아니고 말이다.” 독재자의 이러한 마지못한 칭찬은 아데나워의 명성에 보탬이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그 당시나 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언짢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첫해에 히틀러의 이러한 긍정적 태도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 히틀러가 쾰른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 이러한 칭찬을 늘어놓으니 말이다. 이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은 1936년이 되어서야 처음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아데나워에 대한 형사재판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는 사이에 아데나워는 분리주의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전임 영국 점령군 장교들을 동원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나치 정권은 그 당시 영국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데나워는 [영국] 관련자의 설명이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만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영국 철강 수출 협회에서 근무하고, 연합국 라인란트위원회에서 오랫동안 영국 위원을 역임했던 줄리안 피고트가 쾰른을 떠난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그와 연락을 취하였다. 피고트는 1934년 2월 쾰른을 지나가는 길에 아데나워의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1934년 4월 3일에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1920년 11월부터 1925년 2월까지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아데나워가 분리주의운동에 대하여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러고는 오히려 아데나워는 헌법을 따라 라인란트와 프로이센의 병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한 것이다.     


관리의 직위로 볼 때 그 당시 쾰른의 총독이었던 클리브 장군의 ‘사면증’이 더 중요하였다. 클리브는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1월까지 쾰른에 머물고 난 다음에는 여러 고위 외교직을 역임하였다. 1934년 가을부터 그는 외교단을 위한 런던 주재 의전관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왕가와 외교부를 연결해주는 직위였다. 클리브는 1934에서 1935년에 걸친 연말연시 때 베를린에서 아데나워를 만났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피고트와 마찬가지의 의도로 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레오폴드 폰 회쉬는 이에 관하여 베를린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클리브가 잘 알려진 친독 인사이며 그가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이 내용을, 동일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제국과 프로이센 내무장관인 빌헬름 프리크에게 전하였다. 또한 총통 대리이기도 한 제국 장관 루돌프 헤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아데나워에 대한 형사소송이 그동안 이미 종결되었지만, 이러한 활동이 효과를 보아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은 다시 대두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이 소송은 1934년 6월 4일 쾰른시 정부의 형사 법정에서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중단되었다.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슐테 추기경은 진심이 담긴 축하 편지를 아데나워에게 보냈다. 그러나 쾰른시와 아데나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그 이후에도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데나워는 여러 법률가와 접촉했다. 여기에는 자기 동생인 아우구스트 아데나워, 쾰른의 변호사 프리드리히 만슈테텐, 1933년 그와 함께 쫓겨난 부관 에른스트 슈베링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재판 이외의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형사소송이 종결된 뒤에도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상황이 매우 심각해지면 아데나워는 지니고 있던 그림 몇 점, 막스-부르흐-슈트라쎄의 정원 대지를 팔았다. 아데나워 부인이 보석을 잃고 나서 받은 보험금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1936년 초에 이르기까지 대니 N. 하이네만은 아데나워가 가짜 주소를 사용하도록 하고 또한 수천 마르크의 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파면당한 직후에도 아데나워는 경제계에서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1933년 여름과 가을에 아데나워는 하이네만과 긴 서신 교환을 하였다. 그 편지에서는 소피나 콘체른에서 일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아데나워는 마리아라흐에서의 고독한 가운데에서도 전성기 때처럼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고 이에 하이네만, 페르드멩게스, 푀글러, 플리크가 함께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오펜하임과 레비 은행그룹의 공동출자자였다. 이 은행은 비슷한 이유로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있었다. 페르드멩게스는 1933년 6월의 아데나워처럼, 알베르트 푀글러와 프리드리히 플리크가 이 은행에 출자하도록 하였다. 이 세 사람 모두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탁월한 증언을 하였다. 먼저 페르드멩게스. “그는 매우 뛰어난 성품과 고전적인 능력이 있는 은행가이고 매우 건실하고 신중한 인물로 투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적 가능성에 대한 냄새를 맡는데 탁월하고 사람을 매우 잘 다룰 줄 알았다.” 푀글러에 대해서도 찬사 일색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근본이 되어 있는 인물이다.” 끝으로 플리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시겐 출신이지만 이제는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자수성가한 인물로 매우 큰 철도와 철강화사인 ‘막스휘테와 샤로텐휘테’를 운영하는 산업가이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내가 직접 체험하여 알고 있듯이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데에 매우 편하고 그와 친한 페르드멩게스에게서 늘 들은 바대로 인간으로서 사업가로서 점잖고 진실하다.”     


이 4인방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는가? 그는 브뤼셀의 사업가로부터, [자신에 대한] 송금 유예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하이네만이, 잠정적으로 송금할 수 없는 자본을 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네만이 여기에서 자기 경험과 인맥을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귀하는 이제 단점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그 문제에서 어떤 형태로든 귀하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할 것입니다. 단점은 일견 보이는 것만큼 그리 큰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당연히 그러한 사업의 동업자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자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업 관련 지식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기에 어떤 형태로는 이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페르드멩게스가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는 일을 앞에서 말씀드린 인사들과 함께한다면 새 사업은 분명히 잘될 것입니다. 저는 이를 확신합니다.” 아데나워는 페르드멩게스는 이 계획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데나워가 1933년 6월 18일, 이 제안을 문서화하면서 뭔가에 씌운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때마다 늘 장애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한다. “저는 여전히 마리아라흐에 있고 여기에 당분간 더 머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기간을 줄이기 위하여 모든 노력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몰락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가족과 헤어진 것과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하이네만은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대신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의 편지가 도달하였다. “어제 저는 프로이센 내무부의 공무원 지위의 복위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라 쾰른시의 직무에서 파면되었습니다. 이 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래의 정치활동으로 언제든지 우리 민족의 국가를 위하여 무조건 헌신할 것을 보증할 준비가 안 된 공무원은 직무에서 파면될 수 있다.’ … 여기에 더하여 이미 모자라는 저의 연금이 3/4로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법 조항에 따라 1923년도에 이미 받은 연금액 가운데 8,000제국마르크를 환불해야 합니다. 더욱 나쁜 소식은 임시 쾰른시장이 저를 민간인으로서 라인브라운회사의 감사로 계속 남도록 하려는 나의 동료의 계획을 강력한 반대로 좌절시켰습니다. 쾰른시는 라인브라운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당분간 앞으로 몇 달 동안은 귀하의 도움으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의 직업과 벌이를 생각해 볼 때 미래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4월의 대화에서 하이네만에게 넌지시 제시한 계획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가? 그리고 레비 은행에 관한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귀하는 현재 저의 처지에서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생각에 크게 만족할 수 없었다.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자기 사업 정책의 원칙적인 이유에서, 소피나가 은행업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페르드멩게스와 이야기는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시된 계획은 제 생각에 실행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9월 중순 이전에 그는 독일로 올 수 있었다. 하이네만은 자기 손으로 직접 쓴 편지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친애하는 친구여!” 아데나워는 이미 1933년 5월 31일 편지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여전히 아데나워였다. 그는 반대가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그와 서신 교환을 한 것을 페르드멩게스에게 알리면서 “여러 가지 조합의 가능성을 조용히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고 말하였다. 결국 “저의 아내는 매우 용감하고 저의 자녀들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지치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이네만은 더 많은 도움을 신속하게 주어야 한다는 제안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아데나워에게 진실을 말하였다. “귀하가 실망하게 해드릴 것을 알면서도 저는 귀하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페르드멩게스와 하이네만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하이네만이 9월 중순에 현재 머무는 브리오니에서 라인란트로 오면 그 자신이 하이네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하이네만에게 자기 궁핍한 경제 상황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하였다. 그는 현금과, 1933년 12월 31일까지 받을 돈까지 합쳐서 8,350제국마르크가 있었다. 그 시점까지 주택담보 대출금, 세금, 변호사비로 지불한 금액이 13,750제국마르크였다. 게다가 쾰른시는 때에 따라 8,700제국마르크의 환급을 요청할 태세였다. 아데나워 자신은 쾰른시에 21,700제국마르크의 금액을 청구한 상태였다. 그러나 “쾰른시는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그 밖의 이유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데나워는 1934년도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는 21,000제국마르크의 적자였다. 막스-부르흐-슈트라쎄의 집과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매달 2,000제국마르크 이하로는 지출을 줄일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직 재산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데나워의 아내가 지닌 약간의 주식과 채권 말고는 거의 모든 돈이 쾰른에 있는 집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쾰른시가 직간접적인 주택담보 대출로 그 집에 대하여 총 103,000 제국 마르크의 채권이 있어 이를 이용하여 그 집을 몸땅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도이체방크와 디스콘토 회사에 대하여 각각 20,000제국마르크와 120,000제국마르크의 금액을 청구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있는 문제였다.    

 

아데나워와 서신교환을 하고 있는 상대방은 ‘미래의 전망’을 주제로 1933년 9월 아데나워에게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먼저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있는 집을 팔거나 세를 놓는 방법이 있었다. 그 집은 현재 아데나워에게 짐이 되고 있었다. 그는 그 집을 적어도 200,000제국마르크 이하로는 팔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거래에서 이미 150,000제국마르크를 손해 보는 것이고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고 나면 겨우 100,000제국마르크가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다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집의 매매나 임대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데나워는 “본인을 완전히 충만하게 할,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자리를 다시 얻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에는 제게 그러한 제안을 할 준비가 된 친구가 몇몇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시골에 가서 몇 년 동안 지내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상황이 그러한 노력을 하는 데에 더 이상 걸림돌이 없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저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일자리와 수입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일에서도 저의 친구들은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위에 언급한 이유로 현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귀하가 유일하게 제게 관심을 베풀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그는 다시 한번 그를 도울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회를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가) 귀하가 저를 통하여 레이트 전선회사와 대규모 계약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 계약으로 제가 레이트 전선회사에서 사례금을 받도록 말입니다. 레이트 전선회사는 귀하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 큰 회사는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매우 수준이 높습니다. 페르드멩게스 씨는 감사실 실장이거나 아마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이트 전선회사에서 제가 계약 중개 건으로 사례금을 받는 일이 눈에 안 뜨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제가 혹시 귀하 그룹의 해외 자회사의 감사실이나 그에 해당되는 부서에서 일하도록 귀하께서 힘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다) 독일의 상황 때문에 감사실에 취업할 수 없다면 독일 자회사와 관련된 일에서 감정이나 판정을 내리는 일을 제가 할 수는 없을까요?”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하이네만이 쾰른의 은행그룹에 투자하는 계획을 언급하면서 페르드맹게스와의 대화를 제안하였다. 이 은행은 주식회사로 구조를 바꿀 예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데나워가 감사실에 파견되어 특정 임무를 위탁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하이네만이 어쩌면 막스-부르흐-슈트라쎄의 주택담보 대출금을 넘겨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두 가지가 확실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이네만이 [해외로] 송금할 수 없는 자본을 독일 안에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가 도이체방크의 솔메센 박사와 상의하여 이것을 그의 정당한 요청으로 인정받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아데나워는 매우 불길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러한 요구가 인정되면 제게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죽고 난 다음 제 가족의 운명을 고려할 때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요청에서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아데나워가 하이네만에게 그의 주식 투기에 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고백해야 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가 그러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감사실에서 일하고자 하는 계획의 실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네만과 같은 골수 사업가가, 자기 자기 자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사람을 올바른 양심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어지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데나워는 두 가지 이유로 도이체방크의 쾰른 지점장인 브뤼닝을 비판 하였다. 먼저 아데나워가 브뤼닝에게  20,000제국마르크를 건네주면서 도이체방크가 쾰른-에렌펠트에 있는 라이니쉐 스프리츠구쓰베르케에 자본 투자 지분의 일부를 사 줄 것을 부탁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뤼닝이 1933년 5월에 체포되자 아데나워는 쾰른 지점에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답변을 요청하였다. 은행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도이체방크는 이러한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뤼닝이 20,000제국마르크를 어디에 썼는지는 은행이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은행은 20,000제국마르크에 대하여 은행 지점장이었던 브뤼닝의 허락 받지 않은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브뤼닝이 쾰른 지점장으로서 아데나워를 속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미국의 글란츠슈토프 회사 주식에 투기한 이야기를 하였다. 베를린의 도이체방크의 대표와 그는 1931년 2월에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이다. 이 계약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는 서로 아무런 대금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은행에 액면가로 60,000제국마르크인 라인브라운 기업 연합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2년 동안 정산이 이루어지고 그에게 배당금이 지불되었다. 그러나 1932년 12월 은행은 이 주식마저도 압류했다. 그 근거로 그 당시의 [채무] 청산에서 다른 부서에서 관리하던 주식은 계산에 넣지 않았고, “은행은 아데나워 소유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 당시 합의 정신에 맞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법을 근거로 하든 정의를 근거로 하든 아데나워의 생각에 따르면 그에게는 약 120,000제국마르크의 시장가치가 있는 라인브라운 주식에 대한 권리가 있었다. 그 은행이 인조 비단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는 데에 신중하게 조언해주었다면 그는 자기 모든 자본을 잃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은행에 제출한 배상 청구를 위한 10면에 달하는 포괄적인 설명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나는 지금 여유가 있기에 사건 전체를, 법률문제까지도 상세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은행에 대하여 모든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사실 그는 소송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보다 그는 올바른 규정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중개인으로 대니 N. 하이네만이 필요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도이체방크는 글란츠슈토프 회사의 사장인 블뤼트겐 박사에 대한 심문에서도 도움을 주어야 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이와 관련하여 하이네만에게 부탁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압적이고 저를 거의 절망으로 이끄는 상황이 저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친구를 옹호해야 한다는 저의 결심을 계속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이네만이 그토록 긴 복잡한 문제의 목록을 대하고 나서, 대화를 회피한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9월 중순 마리아라흐를 방문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이제 곧 금전 거래가 중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7년 자기 첫째 아내가 사망하고 나서 정서적으로 심각했던 때 이미 그랬듯이, 그는 정확히 3월 1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기껏 해보아야 17줄에 불과하였다. 이는 파면당한 이후 그의 기분의 기복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집에 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6개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나의 가장 깊은 내면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였다. “앞으로 6개월 후에 독일이 어떤 모습일지, 그때 나는 어디 있고 내 가족은 어디에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     


그는 이제 오로지 하이네만이 그를 제대로 도와줄 유일한 인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바쁜 사업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고 답신을 짧게 보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데나워를 최대한 빨리 찾아보겠다고 정식으로 맹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아데나워의 탄식하는 소리도 들렸다. “자는 지난 7개월 동안 사람들이 저에게 어떤 비난과 비방을 했는지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 이 시간을 견디어 낼 뿐입니다. 내 가족과 미래가 전혀 불확실하고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거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3월 12일 이후 수면제가 아니면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고 약을 먹어도 몇 시간만 잠들 뿐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의 저항력에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저의 불쌍한 아내는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용감하게 버티고는 있지만 거의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쾰른에 가면 바로 체포될 것이기에 쾰른에 있는 집을 팔거나 세를 놓지 못하더라도 본이나 고데스베르크로 이사가서 가족이 함께 이 시기를 견뎌야 할 것입니다.”     


자기 처지에 대한 이러한 매우 솔직한 설명은 다시, 무엇보다도 도이체방크의 이사진을 통한 도움을 청하는 말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아데나워는 자신이 보기에 ‘혐오 인물’(bête noire)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드러난 브뤼닝 지점장이 1931년의 청산절차를 통하여 은행에 추가로 111,000제국마르크의 손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이네만은 아데나워가 한계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리아라흐를 반드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약속 날짜를 마침내 잡았지만, 아데나워는 형사재판 때문에 급히 1주일 동안 베를린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일주일로 예정된 기간이 한 달로 늘어났다. 베를린에서 아데나워는 칼스슈트라쎄에 있는 마리아-빅토리아-병원에 머물렀다. 이 또한 [그 당시 아데나워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시민사회는 이 인물에게서 멀리 떠났다. 다양한 시설을 관리하는 교회만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데나워는 그곳에서 하이네만을 가다렸다. 그리고 거의 반년 동안 바라던 만남이 마침내 12월 15일에 이루어졌다. 경제계에서 직업을 얻고자 하는 신기루가 다시 나타났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소피나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의 모든 인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에 맞갖은 능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소피나의 한 그룹에 속한 가즈퓨렐 회사이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최소한 3년 동안 거기에서 일을 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4년 1월에 드디어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내게 한 줄기 빛이 보였다.” 4년 동안 쾰른에서 부관으로 근무하고 그 당시에는 AEG회사 이사로 일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슈펜라트는 법학 공부를 마친, 아데나워의 장남인 콘라드에게 수습 직원 자리를 제안하였다. 그는 또한 앞으로 AEG회사의 임원인 헤르만 뷔허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아데나워를 돌볼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곤궁에 빠졌을 때 자기를 도운 사람이 누군지를 잊지 않았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독일연방 수상이 되어 옛 제국의 수도로 오게 되었을 때 그의 곁에는 늘 슈펜라트가 있었다. 그의 조언은 베를린에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뷔허와 하이네만 모두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데나워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 사기업이 특히 외국인 소유의 사기업이 정치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 회사가 손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었다.      


1934년 1월부터 아데나워는 이따금 마리아라흐에 머물렀다. 관청에서, 아데나워가 수도원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은 없다고 수도원에 통보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1934년 첫 달에는 주로 베를린에 머물렀다. 이때는 부르그그라펜슈트라쎄 1번지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병원에 머물렀다. 다시 형사재판이 열렸다. 2월 말에 그는 이 사건이 어느 정도 잘 풀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헤르베겐 수도원장은 그사이에 히틀러 총통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생각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풍자적으로 말했다. “제가 여기에 없는 동안 솔직히 말해서 진짜 신들의 황혼이 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도피처가 더욱 불안한 곳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가 다시 가족과 합쳐야 할 궁극적인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쾰른으로 돌아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였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이나 본에 정착해야 할지 망설였다. 1934년 3월 4일 마리아라흐에서 이 문제로 조언을 구한 페르드멩게스 부인에게 아데나워는 베를린이 좋을지 아니면 본이 좋을지 저울질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베를린이 본에 비하여 확실히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그곳의 공기가 어쩌면 신경을 거스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저는 거리가 멀리 있으면 저를 라인란트에 연결하는 끈이 느슨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데나워가 이 편지를 쓸 무렵 그는 이미 다시 베를린으로 갔었고 이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말했다. “제가 ‘쾰른 탈출’을 감행한지 1년 되는 날, 곧 3월 13일을 저는 베를린에서 기념할 것입니다.”     


이제 아데나워는 “베를린과 포츠담 중간의 반제 뒤에 있는” 노이바벨스베르크에 세를 얻어 살기로 결심하고 5월 초에 가족 전체를 데리고 그리로 이사했다. 이 집의 주인은 해외로 이주한 사람으로 이 첫 임차인이 나치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았다. 경제계에 자리를 구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베를린이 가장 나을 일이었다.     


마리아라흐를 떠나기 전에 하이네만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그는 글란츠슈토프 주식에 얽힌 투명하지 못한 사건을 규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 사건의 결과 자신이 건질 것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블뤼트겐 박사도 파산하였던 것이다.     


마리아라흐를 떠나면서 아데나워는 ‘고상한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하였다. 요하네스 손님 신부가 아름다운 전축을 선물 받은 것이다. 마리아라흐의 신부들은 매우 친절한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귀하는 거의 우리 회원이나 다름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아데나워는 다시 자기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지내게 되자 매우 기뻐하였다. 많은 것이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1934년 6월 4일 아데나워의 형사재판이 공식적으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가족과 조용히 함께 지내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아데나워는 늘 이러저러한 리스트에 올랐다. 그리고 ‘룀 쿠데타’가 정권을 반대하는 이들을 잡아들이는 핑곗거리가 되어 아데나워도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6월 30일 하루 내내 베를린에는 체포와 정치적 암살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아데나워의 새 거주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전임 제국 수상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그의 아내가 집에서 총을 맞았다. 아데나워는 가톨릭 운동의 지도자이며 부수상인 폰 파펜의 심복인 에리히 클라우스너 국장이 정권이 사주한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자기 불안을 숨기기 위하여 아데나워는 [볼테르의] 《캉디드》에 나오는 충고를 명심하였다. “우리 정원이나 돌보자!”(il faut cultiver notre jardin!) 이제, 그리고 또한 취업이 금지된 앞으로 몇 년 동안 완전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아데나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정원일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꽃을 피우고, 잡초를 뽑고, 관목을 다듬으며 눈으로 보기에 뭔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을 하였다. 나치의 비밀경찰에 체포될 때도 아데나워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당시 모든 새로운 소식에 따르면 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모든 것이 무탈하게 지나갔다. 사람들이 비록 그를 도중에, 그리고 심문할 때 겁을 주기는 했지만, 이는 예방 차원의 구금이었다. 아데나워는 다른 29명의 사람과 함께 포츠담에 갇혀있었다. 어쩌면 모든 구금된 자들을 풀어주라고 한 히틀러의 7월 2일 자 명령이 그를 살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 무렵에야 비로소 히틀러의 위험성에 관하여 여전히 남아있던 모든 착각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나치의] 권력 획득 때까지 나치 운동과 그 기묘한 오스트리아 출신 총통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나치가 법과 질서를 무시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명이 언젠가는 정상적인 시대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1918~1919년도 결국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던가? 분명히 아데나워는 나치당이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잔인하게 국가와 사회를 제압했는지를 경악하며 깊이 인식하였다. 그러나 1934년 6월 30일의 사건은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로 다가왔다. 자랑스러운 독일제국의 정부가 냉혹한 살인자 무리의 폭력 앞에 놓인 것이었다. 그때부터 아데나워는 독일에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고 여기며 11년 동안 그의 생명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는 확신 속에 살았다.     


6월 30일 저녁부터 7월 2일 저녁까지 잠시 구금된 일은 아데나워가 시각을 넓히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체포된 이들 가운데에는 장군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데나워가 시장이던 시절에 쾰른 성채의 총독이 11월 혁명기에 보여주었던 비참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가슴에 새겨 놓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군대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집단과 관련하여 그를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할 때 이를 거부한 근거에는 이러한 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경험도 포함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평화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헤르베겐 수도원장이 1934년 8월에 그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자 아데나워는 베를린에서 사라졌다. 1934년 9월 초에 그는 다시 한번 그가 좋아하는 스위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렌츠키르흐에서 멀지 않는 카펠에 있는 춤 슈테르넨 식당에 나타난 것이다. 9월 중순에 그는 다시 노이바벨스베르크도 돌아왔다. 경제적 사정은 여전히 나빴다. 아니 더 나빠졌다.      


‘제국살해의 밤’이 있던 첫 주에 아데나워가 은신처를 여기저기 찾던 무렵에 당 동료인 루돌프 아멜룬센을 만났다. 이 사람은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같이 다닌 동창이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프로이센 정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도 쫓겨나서 이제는 가끔 아데나워를 몰래 찾아오는 사람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숲 속을 산책하며 시대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가운데 아데나워가 아멜룬센에게 그의 생각에 나치가 얼마나 더 권력을 쥐고 있을지 질문하였다. 아멜룬센은 이제 매우 비관적으로 되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한 2년은 더 가겠지!” “이 반역자들”을 잡기 위하여 암살자들이 오지는 않았다. 제국군대는 나치에 충성하였다. 교수들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기업 운영자들은 돈을 긁어모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활하게 굴었다. 힌덴부르크는 구트 노이데크 저택, 곧 “독일의 가장 작은 강제수용소”에서 잘 보호받으며 머물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소리쳤다. “2년이라니! 세상에!” “그러면 나는 너무 늙어 다시 관직에 오를 수가 없겠네! 자네는 아직 젊어 필수적인 재건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열심히 해보게나.” 13년 후에 이 두 사람은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아멜룬센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첫 주지사가 되었고 아데나워는 야당인 기민당(CDU) 당수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러나 아멜룬센의 기억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록 아데나워가 이제는 나치 운동의 심각한 위험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그는 ‘룀 쿠테타’ 이후 상황이 곧 바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지닌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1934년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아데나워는 새로운 지도자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고 느끼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호형호제하는 드문 친구였던 브뤼닝 지점장은 공금횡령 혐의로 쾰른에서 재판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기 협의에서 벗어나고자 아데나워가 주식 투기에 가담했으며 그 대가로 55,000제국마르크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거짓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일도 아니었다. 시장이 자기 거래 은행을 통하여 주식 투자를 하는 것이 왜 금지되어야 할 일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가 직무와 사업을 부당하게 연결하였다는 협의를 뒤집어씌우려는 의도가 자명했다. 특히 의심스러운 사실은 아데나워가 공판에서 증인으로 심문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관구지도부가 바라는 대로 법원은 몰락한 ‘제도권의 거물’이 쾰른의 공개 석상에 나서는 것을 막은 것인가? 일단 아데나워를 비공개적으로 심문하여, 여기에서 한 그의 발언을 근거로 쉽게 기소하기 위한 것인가?   

  

변호사인 아우구스트 아데나워는 대성당 고위성직자인 한스 아데나워의 관저에서 임시 심문을 진행할 것을 법원장과 합의하였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에는 통속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사실 통속극에는 드물지 않게 영웅이 몰락하는 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성당의 서쪽을 바라보는, 천장이 높은 건물에서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관과 검사 각각 1명, 그리고 사법 경찰관 2명과 변호사를 대동한 피고인 브뤼닝이 들어섰다. 브뤼닝의 발언 내용은 작은 뇌물을 주었다는 비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문제가 되는 투기 소득과 연루된 돈을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기 위하여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 두 사람은 그 돈이 쾰른시가 돈거래를 하면서 도이체방크에 특별한 혜택을 베문 것에 대한 사례금 조로 준 것이라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나치가 몇 년 전부터 쾰른시장을 상대로 비난해온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교도소에 들어갈 것이 확실했다.     


아데나워는 두 가지 점에서 유리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마리아라흐에 머무는 동안 자기 도이체방크 계좌의 거래내역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변호사 경력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거짓말하는 피고인을 다그쳐서 그가 스스로 무너져 진실을 말하도록 하는 방법을 말단일 때부터 배워 올라온 사람이다. 심문은 6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아데나워가 모서리에 걸린 십자가상을 손으로 짚으면서 범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격렬하게 말을 토해내면서 상황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귀하가 거룩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걸고 귀하에게 요청합니다. 진리를 존중하십시오!” 브뤼닝은 무너져 버리며 아데나워가 옳다고 시인하였다. 또한 원고 측 대리인도 그를 비난하였다. 이는 이 재판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브뤼닝이 증언을 고수하면 스스로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브뤼닝은 아데나워에 대한 고소를 철회하였다. 피고인을 협박하여 이끌어 낸 거짓 발언을 바탕으로 아데나워에게 다시 부패혐의를 뒤집어씌우려던 검사 측의 시도는 이리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지칠 대로 지친 아데나워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935년이 되자 독일은 더욱 강력한 나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기꺼이 머물고자 했던 베를린은 제3제국에 대한 집단 광기로 더욱 낯선 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그가 개인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없게 되었다. 가족 모두는 라인란트에 대한 향수에 걸렸고 집 계약도 4월 말에 만료됨에 따라 새 거처를 구하게 되었다. 여전히 쾰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쾰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늘 마음은 라인을 향하였다. 시벤게비르게나 그 맞은편에 있는 라인지역인 바트 골드베르크에서 롤랑스에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골드베르크는 그 당시 나치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보였다. 그래서 차라리 라인강 오른쪽에 집을 구하는 것이 나았다. 그곳 사람들이 아직은 좀 더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곳의 집세가 훨씬 저렴하였다. 이는 1935년의 곤궁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쾰른 공원의 관리소장인 요제프 기센이 아데나워의 집을 찾는 일을 도왔다. 그는 쾰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아데나워 집안의 셋째 법률가인 아들 막스는 뢴도르프에 집을 얻었다. 그 집은 작은 계곡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그 집은 현재 아데나워가 묻혀 있는 발드프리드호프에서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가족 가운데 누구도 그곳이 두 번째 고향이 될 줄 몰랐다. 아데나워가 이사하기 며칠 전인 1935년 4월 17일, 베를린의 봄꽃전시회에서 페르드멩게스 부인에게 보낸 카드가 아직 몇 장 남아있다. 언제나처럼 활짝 핀 꽃밭에서 그는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4월 25일에 이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부인 구시는 쾰른으로 출발하여 그곳에서 모든 짐을 부치고 아데나워는  고데스베르크에 있는 레온하르두스슈티프트에 머물렀다. 4월 29~30일에 뢴도르프의 집에 입주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하늘만이 알 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용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항할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 꽃 옆에서 있는 이 시간이 숨통을 트이게 합니다.”   

  

본래 늘 명랑한 아데나워는 뢰벤부르거 슈트라쎄 76번지의 새로운 집에 대하여 매우 흡족했다. 입주하기도 전에 그는 하이네만에게 다음과 같이 집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우리가 앞으로 살 집은 매우 작고 소박하지만 위치는 너무 훌륭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가 포기해야 했던 것을 충분히 보상해 주기를 바랍니다.” 페르드멩게스 부인도 아데나워가 5월 5일에 “공기 좋은 휴양지 뢴도르프”에서 쓴 기쁨에 넘친 카드를 받았다. 그 카드에서 아데나워는 그곳에 있는 소성당과 드라켄펠스를 자랑했다. “찬란한 봄이 우리의 지난 몇 주간을 보상해주고 있습니다. 짐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습니다. 집의 많은 것에 아직은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 푹 파묻혀 있습니다. 자연은 지금 한창 매력을 내뿜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대가족에게 [필요한] 많은 방이 있었고 한 달에 110제국마르크인 집세는 아데나워의 부족한 돈으로도 낼 만한 액수였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돈이 없었다. 그러나 이 낙원과 같은 환경에 있는 집이 딱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그 집은 뢴도르프 개천 옆에 있었고 낡았으며 그림자가 졌고 축축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자녀들이 여러 병에 걸려 걱정을 더 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뢴도르프에 정착한 주민들은 친절하였다. 그래서 생활 수준은 낮아졌어도 평화가 찾아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채 석 달이 지나기도 전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 시작은 우스운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뢴도르프에 정착하게 되자 포츠담의 비밀경찰이 아데나워의 감시[활동]을 은밀히 쾰른 행정구역의 비밀경찰에게 인계하였다. 그러나 쾰른 비밀경찰은 7월 말이 되도록 활동을 하지 않고 대관구지도관가 그 역할을 맡았다. 시그부르크의 지역 담당자가 시그부르크 관구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가 자질구레한 중상모략의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용할만하다. “호네프 지구당에서 제게 보고하기를 얼마 전에 뢴도르프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 사격회가 얼마 전부터 뢴도르프에 정착한 전임 시장 아데나워를 위하여 가끔 잔치를 벌일 때 세레나데를 불렀습니다. 이 청년들은 아데나워를 기리기 위하여 깃발을 휘두르는 공연을 하고 여기에 소방대악단이 함께 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끝 곡으로 이 악단은 바덴바일러 행진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당의 조사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80제국마르크와 100제국마르크짜리 포도주를 선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청년회의 회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나치주의를 반대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방대악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악단은 나치 행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대관구지도관과 군수에게도 통보하였습니다. 대관구지도관은 이 청년회를 해체시키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하에게 그 청년회의 해체를 조속히 시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시골에서 벌어진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이성적인 경찰서장인 부트가 실시한 매우 겸연쩍은 조사 결과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지위가 높은 시민을 위하여 깃발 휘두르는 공연을 하는 것은 이 지역의 관습이었고, 청년회는 사전에 이것이 허용되는 일인지를 문의하였다. 더구나 아데나워는 자신이 완전히 물러나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행사를 거행하는 것을 주저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아데나워는 이를 승인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녀들에게 뭔가 즐거움을 다시 주고자 하였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온전히 조심하지는 못하고 참석자 명단에 ‘무명씨’라고 기록하였다. 이 잔치의 참가비는 5제국마르크였는데 아데나워는 8제국마르크를 지불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포도주 몇 잔을 돌린 것이 전부였다.   

  

이 보고서로 그 사건은 사실 종결되어야 할 일이었다. 또한 깃발 공연을 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결코 정치적 행사가 아니었다. 소방대악단이 총통이 좋아하는 행진곡을 연주한 이유는 이 곡을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규정을 벗어난 금액의 지불도 없었다. 아데나워의 유명한 절약 정신과 그의 경제적 곤궁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전혀 가당치 않은 상상이었다! 지역 담당자는 이성적으로 반응하였으나 대관구지도관는 군수에게 아데나워를 쾰른 행정구역 밖으로 추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8월 10일의 조치로 시행되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최종 결정권이 있는 쾰른 지방장관인 루돌프 딜스와 친분이 있었다. 딜스는 괴링을 위하여 비밀경찰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던 결정적인 시기에 나치 정권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 돌격대의 잔인한 테러를 어느 정도 막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나치친위대와의 권력 투쟁에서, 그는 비록 명목적으로는 나치친위대의 고위직에 있었지만 결국 패배하고 쾰른으로 좌천되었다. 상당한 바람둥이이며 냉소주의자이고 기회주의자이기도 했지만, 결코 그릇이 작은 인물은 아니었던 딜스는 아데나워의 형과 마주 앉아 전체주의적 독재 시대에 현명한 정치적 처신에 대하여 한수 가르쳐 주었다. 그가 말하기를 그 사건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대관구지도관는 희생양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베를린도 그를 옹호하였다. 아데나워가 딜스에 맞서 뭔가를 도모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조롱할 것이었다. 아데나워를 구할 방도가 있을까? 그는 차라리 총통학교가 2개나 있는 행정구역 변두리로 가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나치당의 가장 거친 남자들’이 있는 곳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당에 아데나워의 이사에 관하여 알려 [아데나워가] 바른 태도를 보일 것임을 보증하는 것은 어떤가? 그러고 나서 딜스는 클리브 장군의 일과 관련하여 좋은 충고를 하였다. 최선의 방법은 아데나워가 공식적으로 외무부에서 서한을 받아, [정권이] 영국이 원하는 것을 고려하여 아데나워에게 아무런 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외무장관인] 리벤트로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아우구스트 아데나워의 우려에 대하여 딜스는 그저 아데나워가 권리를 보장받을 것이라고만 하였다. 아데나워가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말이다! 그의 충고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누가 배후에 있는지를 대관구지도관가 모르게 하면서 청원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쾰른에서 추방되는 것은 잠시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볼 때는 큰일은 아닌 것이었다. 이는 1935년 여름 제3제국에서 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다시 가족과 떨어져야 했다. 그는 다시 마리아라흐에서 한 달간 피신해 있었다. 그리고 좋았던 시절에 즐겨 찾았던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노이슈타트에 있는 상트 엘리사베트 요양소에 4주간 머물렀다. 끝으로 그는 뢴도르프에서 8km 떨어진 웅켈에 있는 가톨릭 신부들의 팍스 요양원에 10개월 동안 머물렀다. 만약 교회의 수도원, 요양소, 병원이 없었다면 아데나워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딜스와 같은 냉소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몇 달 동안 조용히 지내면서 별것 아닌 것으로 넘겨버렸을 우스운 교훈 거리가 아데나워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갔다. 가족이 그를 자주 찾아왔고, 아들 파울이 웅켈을 매일 방문했지만, 이 조용한 지역은 안개가 자주 끼고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데나워는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이제 그도 59살이나 되었다. 그의 마음은 2년 반이나 진행된 어려움으로 평정을 잃어버렸다. 지속적인 불면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돈 문제가 그를 계속 괴롭혔다. 1935년 가을에 독일의 새 지배자가 이 반체제 인사를 재판 없이도 작고 아주 편협한 트집 잡기로 망가뜨리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1935년의 절망을 뒤돌아보며 탄식하였다. 그 당시 [영국의] 조지프 콘라드가 쓴 《태풍》이라는 책이 그에게 견디어 낼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날이 불투명한 가을날들에 아데나워가 그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라인의 경치만 바라보고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마리아라흐에서 오로지 깊은 정신적 생각에만 몰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 생명력 있는 남자의 끈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뢰벤부르거 슈트라쎄 76번지의 임시 거처로 옮겨 막 짐을 풀자마자 1908년 그의 서랍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발명품을 다시 만지기 시작하였다. 쾰른시청사에서의 업무가 그의 한가한 시간마저 앗아가 버리자 그가 서랍에 넣어둔 것들이었다. 1935년 5월부터 그는 여전히 남은 몇 안 되는 친구들과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에 관하여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다. 베를린의 AEG회사에서 일하는 프리츠 슈펜라트에게는 편지를 무척 많이 보냈다. 전보로 그를 재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그를 뢴도르프로 초대하여 자기가 발명한 것이 상업적 응용이 가능한 것인지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집착해온 증기반동기계에 대한 구상을 다시 꺼내 들었다. 회의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달린 것이다.      


아데나워는 3년 동안 ‘화덕에서 나오는 배기가스와 그을음을 통한 공기 오염을 막는 방법과 시설’에 매달렸다. 그는 이른바 ‘대도시의 안개 제거’, ‘위에 있는 굴뚝을 차단하고 아래로 하수구와 연결하기’ 위한 탁월한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생각의 기술적 측면에 대하여 그는 1935년 9월 쾰른시 소재의 ‘슐리터 산업 회사’와 서신 교환을 하였다. 또한 그 당시 런던의 ‘새 대영제국 연구소’에 근무하는 매우 유명한 에른스트 예크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베를린정치학교를 설립하여 학장을 지내다가 영국으로 이민을 간 인물로서 이 특허가 가능한 생각을 영국에서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런던의 왕립 특허사무소와 이전에 좋은 경험을 한 바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절정이 이를 무렵인 1918년 6월 26일 당시 쾰른시장은 ‘소시지 보존 처리’에 관한 제131402호 특허증을 교부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특허증의 영어 제목은 ‘소시지 육류와 그와 유사한 식품의 구성물과 생산의 개선 방법’이었다. 아데나워가 쾰른에서 거행된 대규모 탄광 연맹 전시회인 ‘새시대’의 총무로서 알게 된 예크는 1937년 5월 1일자로 그가 존경하는 전임 시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명한 웨일즈의 탄광회사에서 고전적인 영국식 예절을 갖춘 거절을 당했다는 내용의 아데나워가 유감스럽게 여길 소식을 전했다. “그의 방법은 어느 정도 혁명적인 것이라서 커다란 불편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원문 각주 79는 오류] 그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예크는 시드니 클리브 경의 인사를 전했다. 클리브는 그를 만날 때마다 아데나워의 근황을 물었다고 한다.      


아데나워는 또 다른 발명에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정원을 사랑하는 아데나워는 모든 종류의 해요제프 기센충을 싫어했다. 해로운 딱정벌레, 유충, 곤충들을 전기로 제거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커다란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이러했다. “동물의 유기조직에 전기가 작용하는 것은 식물 유기조직에 끼치는 작용과는 다르다. 이러한 발달의 차이를 바탕으로 이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전기는 동물 유기조직을 죽이지만 식물에게는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전기가 흐르는 솔이 이러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그가 이전이나 이후에도 관심을 기울인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의 절차를 밟았다. 그는 먼저 쾰른의 요제프 기센과 베를린의 프리츠 슈펜라트와 같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슈펜라트는 AEG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리고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아데나워를 위하여 일했던 륄프 박사가 다시 소환되었다. 그에게는 이미 나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의 이전 특허변호사였던 율리우스 에프라임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그는 1935년 9월 19일의 편지로 문의에 대해 답변하면서 그가 특허 신고를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아데나워가 특허를 자기 아들인 막스의 이름으로 하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결국 콘라드 아데나워가 발명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아데나워는 자기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하고 실제적인 실험을 준비하면서, 관련 기계를 주문하고 믿을 만한 물리학 전공 학생을 구하였다. 그는 실험에서 전기충격으로 죽은 곤충들을 잡는 일을 할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반대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비웃으며 무시하였다. 예를 들자면 슈펜라트가 편지로 그에게, 작은 곤충을 죽이는 데에 큰 곤충보다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한 의견이 있었다. “내 생각에 도츨러 씨가 만든 공식은 틀린 것이다. 이 공식이 맞는다면 예를 들어 젖먹이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른보다 4~5배나 높은 전압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아데나워는 이 발명의 경제성 문제에 대해서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하지 않으면 그가 염두에 둔 AEG회사와 같은 기업의 관심을 도저히 끌어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제국특허청은 다시 한번 회의적인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생각을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계속 되풀이 추구하였다. [특허 신청] 편지는 1943년이 되어서야 발송되었다.    

 

친지들은 그의 발명에 대한 열정을 몰래 비웃으며 이를 작업치료법, 곧 작업을 통해 정신 건강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은 이 생각을, 그가 추구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진지하게 여겼다. 그리고 어쩌면 성공적인 특허로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늘 그에게 뭔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세프 기센과 해충을 잡기 위한 전기 솔을 들고 밤마다 자동차로 돌아다니곤 할 때 아데나워는 마주 오는 자동차의 전조등 때문에 눈이 부시 것이 거슬렸다. 그래서 그는 ‘자동차 운전자, 특히 트럭 운전자를 마주 오는 자동차의 전조등 때문에 발생하는 눈부심으로부터 보호하되 자기의 차선을 보는 데 지장이 없는 장치’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매달렸다. 

    

종종 아데나워는 자기 재능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기술적 자연과학적 능력에 대하여 전혀 비판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트 본 라이볼트 박사의 후계자인 A. - G. 파브릭은 1936년 7월 10일 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와 같은 비전문가는 이 분야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데나워는 1938년 2월에 아헨의 티스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사위인 라이너스는 아데나워를 티스 박사와 연결해주었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아데나워에게 도움을 주었다. “오늘 저는 이른바 기관차 실험으로 귀하를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그에 관한 생각을 오랫동안 방치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이 저의 확신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제가 완전히 이해한 귀하의 반대 의견도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발명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것을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명백해진다. 한편으로 ‘아데나워가 도대체 제3제국 시대에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부분적인 대답이 될 수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발명가인 척하여 완전히 비정치적인 활동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자기 본심을 위장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는 추론은 여기서 배제된다. 오히려 여기에서 드러난 사실은 실질적인 일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는 것이다. 그가 도시행정 업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문자 그대로 과거에 사랑하던 것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일은 그가 중책을 맡은 시장이 되기 이전에 그를 사로잡았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이러한 깊은 좌절의 시기에 그가 일단 굳게 마음먹은 계획에 대하여 매우 엄청나게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론이 제기되면 그는 반박을 시도하였다. 그 반론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면 자기 생각을 그에 적응시키고 다른 길을 찾으며 수정하였다. 법적 수단이 필요하게 되면 그는 이를 끝까지 활용하였다. 곧 제국특허청에 반론을 제기하고 기한 연장을 신청하였다. 이 관청의 경험이 많은 기술자의 관점에서 아데나워는 그들이 너무 잘 아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곧 약간 미친 발명가로서 통상적인 관료주의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며 원칙적인 반론에 귀를 닫아버리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사실 아데나워가 지닌 것으로 나중에도 가끔 드러나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명의 수준을 어찌 평가하든지 간에,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일마저 없었다면 사실상 거의 감당하지 못했을 1935, 1936, 1937년을 견디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때 쾰른이나 본 그리고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만났으며,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차를 태워주었다. 이는 운전할 줄 모르는 아데나워에게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파울 프랑켄이다. 그는 여기에서 언급해야 하는 인물인데 나중에 이 시기의 아데나워에 관해서 매우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연방정치교육원 원장을 지냈다. 그와 아데나워는 1936년 1월 5일 아데나워의 60살 생일에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였다. 프랑켄은 60회 생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날의 주인공과 부인 구시와 더불어 리아 아데나워가 동승하였다. 아데나워가 길 안내를 하여 자동차는 니더란슈타인에서 모젤탈을 거쳐 코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음식점에서 4인분의 음식을 주문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마리아라흐로 헤르베겐 수도원장을 찾았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나치 정권의 기피 인물 명단에 올라 있었고 몇 달 동안 은신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과연 70살, 더 나아가 75살 생일을 축하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80살이나 90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1936년은 외면적으로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2월에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2주 동안 베를린의 프란치스코 병원에 머물렀다. 몸에 아픈 곳이 있어서 폰 베르크만 교수에게 철저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검진 결과 모든 불안 증상의 원인은 신경에 관련된 것이었다. 1936년 8월초에 쾰른 행정구역으로부터의 추방 조치가 해제되었다. 아데나워 부부는 안심하고 튀빙겐의 친써 가정으로 차를 몰고 가서여 2주 동안 머물렀다. 그의 자녀들이 학업을 마친 것도 희망적인 일이었다. 장남은 오슬로의 AEG회사 지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막스 아데나워는 부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 외국을 돌아보고 난 딸 리아는 외국어 통역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인 아데나워의 근본 원칙은 매우 분명했다. 그의 자녀들은 가능하다면 외국에서도 잘해낼 수 있어야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쾰른시와의 협상도 계속 이어졌다. 대관구지도관였던 그로헤는 그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1936년 12월에 일어났다. 당시 쾰른시장이었던 리젠이 소리소문없이 쾰른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의 후임자는 나치당의 경제계 파벌 출신인 32살의 법률가 칼 게오르그 슈미트 박사였다. 그는 확실히 비교적 올곧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전에 쾰른 산업·상업회의소의 주간사였다. 1945년 이후 산업·상공회의소의 의장이었던 쿠르트 폰 슈뢰더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는 아데나워를 몰래 도왔다.    

 

1937년 중반에 이르자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 쾰른시와의 배상 문제는 긴 협상 끝에 타결되었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큰 손해를 보고 있었다. 쾰른시는 그사이 둘로 나뉜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있던 집을 헐값에 인수하였다. 그러면서도 쾰른시는 아데나워가 불법적으로 수령한 업무 수당을 환급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모든 계산이 마무리 되고 아데나워는 1937년 10월 153,886.63마르크를 돌려받았다.     


게다가 서류 절차상 아데나워는 일종의 혜택을 누렸다. 나치 소속 시장인 슈미트는 몸소 자기 선임자 [아데나워]와의 최종 협상을 어느 정도 중립적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본에서 진행한 것이다. 협상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아들마저 아데나워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어려움을 당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그의 후배 시장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 당시 아데나워의 모든 신경은 온통 자기 가족의 미래에만 쏠려있었다. 아데나워의 아들 나이의 젊은이는 이 만남의 성격을 잘 이해할 만큼 성숙한 사람으로 그의 큰 선배인 아데나워에게 이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는 4년 후에 심각한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2남인 막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53년 쾰른시의 시행정 관료가 되는 데에는 더 이상 나치당의 거물의 승인이 필요 없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1937년의 배상이 끝난 다음에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는 그전에 이미 대지를 구매하여 뢴도르프 체닉스벡에 집을 지었다. 뢴도르프 개천가에서 건강에 해로운 집에 살던 경험을 거울삼아 이제는 해가 드는 높은 지역에 집을 지었다. 드디어 그는 몇 달 동안 그의 모든 상상력과 기획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거리가 생겼다. 당시 아직은 어린 공학석사였던 그의 처남인 에른스트 친써가 이 조화를 이룬 집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이 집은 1937년 성탄절 직전에 완공되었다. 30~40년 후에 수많은 사람이 이 집을 마치 미국 초대 대통령의 생가 마운트버넌과 마찬가지로 여기며 순례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아데나워 자신도 그 당시에는 그가 여기에서 조용한 은퇴 생활을 누릴 수 있을지를 전혀 확신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일단은 바로 그러란 은퇴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역사가 그를 잊은 것처럼 보인 것이다.     


뢴도르프의 은퇴자     


외적으로 [1939년까지의] 마지막 평화 시기와 1944년까지 이어진 전시는 아데나워의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때였다. 그는 뢴도르프에 틀어박혀 있었다. 세월이 점차 안정되어갔다. 특별히 정해진 스케줄 없이 지냈다. 잠을 거의 잘 수 없었기에 일찍 일어나서 정원을 돌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에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시벤게비르게로 산책을 가고 다시 발명에 몰두하였다. 밤에는 라디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그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은퇴자의 삶을 영위하였다. 10월부터 실트섬에서 근로봉사를 하고 있던 아들 파울에게 1941년 11월 20일에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이렇게 자기 하루를 설명하였다. “오늘 밤에는 폭우가 다시 땅을 흠뻑 적셨다. 나는 언덕에 서 있던 사과나무를 잘랐다. 햇빛을 너무 가리고 열매를 맺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나무를 잘라버리니 과수원 뒷자락 전체가 완전히 변한 것 같다. 매우 아름다워졌고, 지금까지에 비해 이제는 나무를 심은 태가 난다. 지금까지 이 과수원은 화단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식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그렇게 많아진 이유는 모든 것이 너무 우거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다스에서 유실수가 도착하였다. 내일이나 월요일에는 뵘에서 온 장미도 도착할 것이다. 장미는 나 혼자 심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 이번 주에 할 일이 너무 많다. 내가 생각한 기술적인 것을 종이에 자세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타자기로 쓰면 35장 정도 될 것이다. 토요일에는 그 젊은 티스가 아헨에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는 나와 함께 내 생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불분명한 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의 설명을 아헨에 있는 자기 부친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밤늦게까지 편지를 써야 할 모양이다. 편지를 보내기가 쉽지는 않다. … 비록 잠깐이지만 여기에 두 차례 서리가 내렸으나 정원에 꽃이 만발하였다. 장미, 국화, 제비꽃, 팬지꽃이 피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탄매괴가 피었다. 정원에 있을 때 나는 네 생각을 아주 많이 하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가 다시 한번 서로 아름답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제2차 세계대전과 가짜 전쟁* 발발 이전의 온화한 날의 사진에는 검게 타고 유연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누구도 그를 60살로 보지 않았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탄압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 사진들은 아데나워가 한계 상황에 있을 때 찍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마리아라흐의 수도원 정문에 모자를 쓰지 않은 채로 서서 있었는데 매우 마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면 사람들은 저절로 사형 선고받은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쓸쓸한 벽에 기대어 총살 대원들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 해 노이바벨스베르크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 사진은 아데나워가 두 어린이와 함께 베를린의 동물원에서 찍은 것이다. 그 사진에서는 퀭한 눈을 한 키 큰 늙은 남자가 마치 내면에 침잠한 모습으로 수줍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 가짜 전쟁[drôle de guerre, 역자주 – 독일이 전격전(Blitzkrig)으로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기간인 1939년 9월부터 1940년 5월까지의 상황을 풍자한 개념, 미국에서는 phony war로 지칭]   

  

고통이 그를 망가뜨리고 모욕을 가져다주었지만, 또한 그를 단련시켰다. 노이바벨스베르크에 살던 시절의 또 다른 아데나워 사진을 보면 이를 알아볼 수 있다. 모자를 쓰고 겨울외투를 입고 집중하는 표정의 정신적으로 단련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바위 위에 근엄하게 서 있다. 1920년대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익살이나 웃음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깊은 진지함과 그에게서 가끔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먼 데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제 다시 한번 변했다. 외투를 입고 빳빳한 테가 있는 검은 모자를 쓰고 반쯤 완공된 집 앞에 서 있는 집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는 건축업자가 있고 뒤로는 뢴도르프 교회의 탑이 보인다. 궁핍한 시절은 지나갔다, 본래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 비록 은퇴한 시장이지만 말이다. 집을 건축하고 정원을 가꾸는 동안에는 그를 사로잡은 새로운 과업이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관심 대상은 가족이었다. 그는 91년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곧 보게 될 손자들을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첫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녀들은 모두 집을 떠났다. 장남인 콘라드는 노르웨이에 있는 AEG회사 지점에서 잠시 일하고 있었다. 막스 아데나워는 1937년 초에 미국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딸 리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바로 결혼하였다. 중산층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둘째 부인과 낳은 4명의 자녀를 대상으로 이제 그는 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교육기술을 개인적으로 실시해 볼 기회가 생겼다. 가족들의 단합은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 전시에 폭격이 시작되자 가족들은 모두 뢴도르프의 집으로 모였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무게를 지닌 ‘가장’(pater familia)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을 부드럽게 대하였다.    

  

이 대가족의 멀고 가까운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 범위에서 쾰른은 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나서 아데나워는 한 때 잘나가던 시절의 대부분 친구와 친지들이 멀어진 것에 대하여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대응하였다. 대부분 제3제국과 거리를 두거나 엘라와 베네딕트 슈미트만처럼 새 정권에 희생된 사람들만이 아데나워와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거의 본 지역에서만, 특히 대학교 주변 사람들 가운데 새로운 친지와 친구들 무리가 생겼다. 그들은 대부분이 그들의 가톨릭 신앙의 입장에서 나치주의를 거부하는 이들이었다. 현실 정치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들은 자기 신념과 두려움을 나타내고 가끔 괴링을 비꼬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늘 비밀스러운 정치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차라리 정치색이 없는 문화생활 분야에 깊이 몰입하였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문화사가 요제프 부슬레이가 아데나워가 매우 좋아하는 대화 상대였다. 아데나워 가족은 1937넌 남부 독일의 문화 유적을 찾아 자동차 여행도 하였다.  

   

이 당시에 본의 치과의사인 요제프 폴마르와의 관계도 상대적으로 밀접했다. 아데나워는 마리아라흐에 있는 그의 형을 통하여 그를 알게 되었다. 그의 형이 이 수도원의 초대 수사였다. 1938년 폴마르와 아데나워는 발리스에 있는 셩돌랑으로 자동차 여행을 갔다. 1944년 9월 아데나워가 호헨린트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숨어 있고자 할 때, 그는 폴마르의 집에서 잠을 잤다. 우연히 알게 된 본 지역의 친지 무리에는 수공업자회의소의 법률고문이었던 프리츠 슐리부쉬도 있었다. 뢴도르프에서도 친한 이웃이 생겼다. 여기에는 1941년부터 알게 된 프로이센 정부의 차관을 지낸 슐뤼터가 있었다.     


이 새로운 인맥은 몇 년 동안의 정치적 고립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때로 제3제국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1945년 가을에, 작가로 일하는 마리아 쉴터-헤름케스가 아데나워의 기민당(CDU) 창당 계획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바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가 다는 아니었다. 나치 정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나치의 부러진 십자가의 억압 아래 놓인 일상은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모임에서의 대화, 신중한 비타협주의, 전체주의 국가 체계에서 아직 정치화 되지 않는 분야로 물러나기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과연 그 당시 아데나워가 저항집단과의 관계가 어떠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저항은 정부에 대하여 단순히 내적으로 거부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겪으며 어려움을 당한 탄압이나 괴롭힘과는 어느 정도 다른 것이다. 그 당시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었다. 곧 제3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기를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쇄신 계획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 국가 조직  안에 [저항] 세포 조직을 심기, 탄압당하는 이들, 특히 유대인을 위한 조직적인 지원, 히틀러에 저항하는 쿠데타를 목적으로 한 투쟁 조직의 구축, 외국과의 접촉, 직접 제작한 전단지와 몰래 들여온 신문을 실제로 보급하기를 들어 볼 수 있다. 저항의 전단계로 볼 수 있는 활동에는 1933년에 쫓겨나고 때로는 구금되기도 하였던,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유대를 유지하는 것이 있다.     


나치 시대 초반에 아데나워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접촉하였다. 이때만 해도 아직 제3제국의 경찰 조직이 완비되지 않았었다. 많은 이들은 히틀러가 곧 파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당시에 본과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는 중앙당(Zentrum)에 몸담았던 이들의 온전한 둥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가 전임 제국 수상이었던 빌헬름 마르크스였다. 루돌프 아멜룬센은 약간은 비꼬듯이 말했다. “그는 본의 조용한 저택에서 그의 회고록을 양심적으로 아름답게 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으로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1920년대에 제국식량부와 재무부의 장관을 역임한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도 바트고데스베르크에 살면서 매우 좌파적인 민중 정당의 수립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프로이센 중앙당(Zentrum)의 전임 당수였던 알베르트 라우셔 교수도 이 무리에 속하였다. 또한 출판업자인 발데마르 구리안도 있었다.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의 정치학과 교수로서 영향력과 명성을 날렸다.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플리터스도르프에 있는 루돌프 아메룬센의 집이었다. 여기에는 베니딕트 슈미트만 교수와 그의 아내 엘라도 참석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와도 늘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불운이 닥쳤다. 나치돌격대 무리가 1933년 5월 1일 그들의 집을 습격하고 쾰른의 폭도들이 즐거워하도록 지붕이 없는 화물차에 그들을 태워 ‘구금’하였다. 슈미트만은 6주 후에 풀려났지만, 당연히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연맹주의 잡지인 《고향과 민족》은 정간되었다.   

   

본과 고데스베르크에 모이던 사람들에는 아헨 출신의 빌헬름 파르비크와 베스트팔렌의 전임 지방장관인 요하네스 그로노브스키도 있었다. 아데나워도 룀 쿠테타 이후 아멜룬센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만 안 되어 이 무리에 속하는 대부분 사람이 나치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나치당의 지배가 안정될수록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하였다. 아데나워는 1935년 뢴도르프에 정착하면서 음모를 꾸미기 위한 모임으로 여겨질 만한 모든 것을 피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이른바 ‘깃발 행사’와 관련된 사건이 보여주듯이 매우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가끔 가톨릭 ‘저항’과 연결해주는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울 프랑켄으로 1936년 강제 해산된 ‘독일 가톨릭학생회 총연합’의 회장이었다. 1933년에 33살이었던 그는 이념적으로 중앙당(Zentrum)의 기독교 사회주의 계파의 요제프 요스, 베른하르트 레터하우스, 하인리히 쾨르너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 활기찬 남자는 나치가 라인란트를 장악하고 난 이후에 중앙당(Zentrum) 출신 반정부 인사들의 접촉 네트워크를 조직하였다. 그는 건의서 작성에도 참여하였고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재판 없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전쟁 중에는 뮌헨 출신의 요제프 뮐러와 비슷하게 카나리스 제독의 보호 아래 있었다. 요제프 뮐러는 나중에 기민당(CDU)의 공동 설립자이며 당수를 지낸 인물이다. 카나리스 장군은 프랑켄을 잠시 로마로 파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바티칸과 관계하고 비밀히 영미 외교관들과도 접촉하였다. 나치 비밀경찰은 새로이 프랑켄의 계략을 알아냈지만, 그는 잠적하여 살아남았다.  

   

프랑켄은 오래 알고 지낸 동료인 아데나워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지속적으로 돌보았다. 프랑켄에게 자동차가 있었기에 아데나워를 태우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자신을 도운 사람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1935년과 1936년에 프랑켄은 쫓겨난 아데나워 시장을 위하여 여러 사람을 연결해주었다. 그들은 가톨릭 차원에서 저항운동을 조직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대부분 신중하게 처신하였고, 개인적으로 프랑켄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용기를 내보기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요제프 요스, 베른하르트 레터하우스, 알로이스 뎀프 교수와 공개적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일요일 오후 ‘하우스 에르니히’에서 커피를 함께 마신 것이다. 이 집은 나중에 아데나워가 수상이 되었을 때 프랑스 대사와 자주 찾은 곳이다. 1935년에 이루어진 이 만남에서 아데나워는 사람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배웠다. 하필이면 이 일요일에 제국 중앙당(Zentrum)에 근무하던 여성들이 커피 마실 것을 약속했다. 그들 가운데 한명은 나중에 독일의회 의원이 된 헬레네 베셀이다. 이 커피 만남이 끝나자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945년 이후에도 커다란 의미를 주었던 일은, 1936년 중반에 프랑켄이 주선하여 이루어진 아데나워와 야콥 카이저의 만남이다.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같은 당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카이저는 수준이 낮은 인물이었다. 그는 카이저를 이미 1920년대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서부독일 기독교 노조의 쾰른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그 이후에 그는 나치 노동전선과 계약을 맺고 기독교 노조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래서 카이저는 본의 아니게 그가 과거에 몸담은 조직을 와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어디든 합법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이전의 노조 동지들과 만나 저항운동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1936년 야콥 카이저와 하인리히 크뢰너를 중심으로 한 이 무리는 전임 뒤셀도르프 시장인 로베르트 레르의 중개로 제국 군대의 고위급 장성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여기에는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장군과 베르너 폰 프리취 장군이었다. 이들은 라인란트 점령과 스페인 내전과 같은 히틀러의 모험적인 외교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불만이 구체적인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프랑켄이 주도한 카이저와 아데나워의 만남의 배경이 되었다.   

  

1936년의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 프랑켄, 카이저, 쾨르너가 걸어서 뢴도르프를 찾아왔다. 아데나워는 얼마 전에야 비로소 웅켈을 떠나 자기 가족에게 돌아가 뢰벤부르거탈에서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아데나워 부인은 프랑켄과 쾨르너에게 포도주를 대접했다. 아데나워와 카이저는 3시간에 걸친 대화를 마쳤다. 그 대화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기회에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어떤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카이저-네브겐 부인과 파울 프랑켄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카이저가 아데나워에게 제국 안의 저항운동 네트워크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하면서 최근에 장성들과도 연계를 맺은 것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카이저의 확신으로는 군대가 도와주어야만 분위기 전환이 가능하였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십여 년 후에 그 당시 아데나워의 반응을 기억하였다. “똑똑한 얼굴을 한 장군을 한 사람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데나워는 군대의 도움으로 정권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카이저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추구하는 길은 분명히 세계대전을 이끌 것이고 결국 파국으로 끝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국 카이저는 아데나워로부터 협력하겠다는 말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세 사람의 방문객이 걸어서 오버돌렌도르프로 돌아가는 길에 매우 단호한 카이저는 아데나워와 나눈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를 고려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1943~1944년에 카이저는 프랑켄을 통하여 아데나워와 다시 한번 만남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대화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아데나워가 전반적으로 주저한 이유가 카이저의 두드러진 민족주의와 프로이센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프랑켄의 말에 따르면 프랑켄 지방의 가톨릭 신자였던 카이저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프로이센적인 바이에른 사람이었다.”  

   

프랑켄이 아담 슈테거발트와 주선한 대화는 더욱 유익하지 않았다. 1939년 안드레아스 헤르메스가 과거 중앙당(Zentrum) 지도자였던 빌헬름 엘페스를 통하여 아데나워에게 줄을 대고자 하자 아데나워는 그의 방문을 거의 무례할 정도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음모와 관련된 이 만남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 지역에서 미국 측 지역위원으로 근무한 조지 N. 슈스터는 그가 쾰른 저항 단체에 속한 두 사람과 함께 1938년 자정에 체닉스벡에 있는 집을 방문한 일을 회상하였다. 전화로 추천한 이 미국인은 어둠 속에서 뢴도르프의 정원의 숲을 지나 언덕을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아데나워는 새벽 1시에서 3시까지 그와 이야기하고 대답하였다. 자세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슈스터는 아데나워도 저항에 동참하고자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아데나워는 매우 신중하게 처신했지만 말이다.     


히틀러의 많은 적과 마찬가지로 눈을 밖으로 돌렸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내부적으로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서방 열강의 ‘유화’ 정책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였다. 그 당시의 관련 자료는 없지만, 히틀러가 라인란트를 점령한 것에 대하여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생기면 아데나워는 자주 다음과 갈이 말하곤 하였다. “그 당시 저는 저의 거주지, 쾰른 행정구역에서 쫓겨나 웅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진격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새벽 5시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저는 말했습니다. ‘이제 유럽은 끝났다!’” 오히려 서양 민주국가들의 수반들이나 외교관들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나중에 외국의 대화 상대들이 [아데나워] 독일연방 수상에게 독일 사람들의 연대책임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그는 늘 그들 정부의 공동 책임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프랑켄과 쾨르너는 간단히 포기하지 않았다. 1942년 말에 그들은 각각 다른 때 아데나워를 면담하면서 다시 한번 그들의 계획으로 아데나워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단호하게 경고하였고 그를 개인적으로 어떻게든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라이프치히 시장을 역임한 칼 괴르델러가 모든 측면에서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소문이 퍼지는 것이 극히 위험한 일로 여겼다. 1943년 가을에 그는 프랑켄이 괴르델러와 카이저를 쾰른의 회합에서 만날 것이라면 자신과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프랑켄과 쾨르너와의 접촉은 켤코 끊지 않았다. 1943년 가을 이 두 사람과 만나고 1944년 초에 쾨르너와 따로 만났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만남은 본의 요제프 폴마르의 병원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아데나워가 폴마르에게 간략하게 전한 대로 쾨르너는 카이저의 부탁으로 아데나워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저는 거부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상황은 자명하였다. 아데나워는 저항운동과 관련된 이들 가운데에서도 비밀 엄수를 확실히 하는 소수의 사람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괴르델러의 활동과 공적인 인물이 음모에 가담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고 여겼다. 라이프치히의 전임 시장에게 점점 더 많은 줄이 연결될수록 아데나워는 이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았다. 괴르델러와 카이저가 100여 명에게 국가 전복 계획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데나워는 고개를 저으며 그 계획이 더 이상 비밀로 지켜질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얼마나 부주의한 짓인가! 또한 1945년 이후 이전에 독일 내각에서 차관을 지낸 프란츠 테디에크가 1943년 가을에 들은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독일의 장성들은 명령하고 명령을 듣는 것만 배웠다. 그들에게는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의지도 재능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저항운동에 의미 있게 참여할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많은 저항운동을 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는 공직으로 뒷받침받지도 못하고, 그에게 어느 정도 독립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개인적 분야의 직업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활동과 관련된 토론은 비생산적이고 동시에 위험한 일이었다. 대가족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그 유용성에 대하여 어찌 되었든 확신할 수 없는 토론이나 활동에서 일단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껏해야 이런저런 저항운동 단체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운동이 실패하는 경우 그것은 사형을 의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러한 저항운동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의 생각에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할 일이었다. 그러니 모든 것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결국 이 범죄자 정권이 파국으로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진행 과정을 보면 그러하였다. 그는 저항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용기에 대하여 존경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현명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의 냉정한 현실주의는 1938년과 1944년에 이루어진 저항운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만약 7월 20일 이후 나치 비밀경찰이 확보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면 아마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핍박당하는 사람에 속하기는 했지만, 저항운동의 주변에만 머물렀다.     


‘아데나워와 독일의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는 1945년 이후 정치적 논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괴르델러의 활동과 군사적 저항에 대한 아데나워의 깊은 불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야콥 카이저, 안드레아스 헤르메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테오도르 슈텔처와 같은 생존자들은 그의 당 동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생존자들조차도 아데나워의, 비록 무관심한 것은 아니나 비판적 방관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7월 20일 이후에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 아데나워가 두 가지 점에서 옳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성공 가능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괴르델러의 저항운동과 관련된 능력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아데나워가 옳았다. 아데나워는 이미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신중하고 조심하였기에 그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다. 때로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하느님의 기적”이라고도 하였다.   

  

뢴도르프에 물러나 있던 시기가 결코 순전히 은퇴자의 안락한 생활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안심하게 되는 때도 있었다. 1938년 초에 아데나워는 브뤼셀로 잠시 여행을 가서 대니 N. 하이네만을 만났다. 그리고 다른 때도 아니고 국제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1938년 여름과 1939년에 그는 두 차례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1938년 7월 8일부터 8월 말까지의 첫 번째 여행에서 그는 아내와 더불어 그가 좋아하는 셩돌랑에 머물렀다. 좋은 시절에 사귀었던 이들 가운데 그 당시 몇 안 남은 친구였던 쾰른 주재 스위스 총영사였던 프란츠-루돌프 폰 바이쓰는 1933년과 마찬가지로 이 여행의 준비를 해주었다. 아데나워는 즐거워하였다. “셩돌랑은 언제나처럼 놀랍고 웅장하다. 우리에게 여기는 모든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리고 오우키에 있는 하이네만을 만나기 위하여 자동차로 제네바 호수도 들렀다. 그리고 하이네만과 더불어 “아무 걱정 없는 아름다운 날”을 보냈다. 세계적 위기가 그 정점에 달하자 아데나워는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1939년 여름은 달랐다. 이번에는 위기가 바로 휴가 기간에 터졌다. 일전에 아데나워는 엘라와 베네딕트 슈미트만 부부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최대한 빨리 외국으로 나가라고 간곡히 조언하였다. 전쟁이 발발할 때를 대비하여 체포할 사람의 명단이 이미 작성되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며칠이라도 숨어 있으면 위험이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데나워 부부는 7월 8일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1939년 9월 7일, 곧 전쟁 발발 후 7일째 되던 날 브레겐츠로 돌아오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뢴도르프에 있는 자녀들은 매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 부부가 일단은 셩돌랑에 머물고 있었다. 하이네만과 다시 만나기로 한 계획은 분명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려 깊은 사업가는 8월 말에 더 이상 브뤼셀을 떠나지 않고자 했다. 사방에서 뇌우가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데나워에게 500스위스프랑을 보내어 아데나워가 좀 더 그곳에 머물 수 있게 하였다. 아데나워 부부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올텐 근처의 슈닌츠나흐 요양소에서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스위스 국철은 8일 동안 거의 군인들만 실어 나르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데나워가 뢴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그가 예상한 대로 슈미트만이 9월 1일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이 용감한 사람의 최후에 관한 소식이 아데나워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오라니엔부르크의 강제수용소에서 밟혀죽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의 이름은 누군가가 명단에서 지운 것으로 보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독일 가정에 닥친 전형적인 전쟁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아들들은 차례대로 징집되었다. 막스는 프랑스와의 전투에 이미 참여하여 다치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이후인 1940년 6월에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있을 때 이미 파국을 확신했다고 한다.   

  

1950년대 말 아데나워는 수상 관저에서 차담(茶啖)을 나누는 자리에서 [전쟁 발발] 당시에 만연하던 ‘나치의 광기’를 그의 생각에 매우 잘 보여주는 예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9년 초에 그는 군 지도부에서 보기 드물게 현명한 군인이었던 한스 폰 클루게 장군과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얼마 안 되어 시작될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독일이 패전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클루게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나라를 하나씩 공격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과연 다른 나라들이 독일이 마지막 나라를 점령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미국의 산업 생산 능력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클루게는 자신도 그것을 늘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총통이 대기업인 Krupp회사에 비포장도로에서도 달릴 수 있는 차량을 제작할 것을 명령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Krupp회사는 그러한 차량을 대량으로 생산하기까지는 2년이 걸릴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차량을 빠른 시일 안에 만들 수 없을 것이고 전쟁인 그 이전에 종료될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지나친 전쟁 추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미 체험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미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히틀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이제 말씀드리지만 전 세계가 한 나라를 상대로 한다면 그 나라는 전쟁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그 당시 실트섬에 주둔하고 있던 아들 파울에게 아데나워는 1941년 12월 11일자 편지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일본과 미국도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한심한 세상이다!”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와 멀리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나란히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아데나워가 1940년 6월 6일 쓴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밤은 먼데서 오는 소식으로만 방해받고 있다. 불쌍한 본 지역의 주민들은 이번 주에만 벌써 두 차례나 불안한 밤을 보냈다. 노이쓰에서는 항구가 공격당했다. 베어한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막스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어머니는 건초열로 고생하고 있다. 날이 매우 뜨겁고 건조하다. 체리는 아직 많이 열리지 않았다. 날이 너무 건조해서다. 딸기는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다. 얀이 이미 첫 번째 수확을 했다. 장미들도 피었다. 한마디로 여기에는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14일이 지나면 낮이 가장 길어진다. 9월쯤에는 영국을 점령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년 초가 되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핌에게서 카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독일 관청에 대한 칭찬이 담겨 있었다. 그 공장들이 여전히 돌아간다고 말이다.”   

  

1941년 1월 5일 아데나워는 65세 생일을 맞이하였다. 이때 그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암시적으로 전했을 뿐이다. 비교적 공개적인 편지를 쓰던 시기가 지났다. “나는 그날을 가까운 친족들과 보냈다. 성찰이나 회고는 최대한 억제하고 앞만 보기로 했다. 내 생각에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과 세상이 점점 알수 없게 된다.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포스터 사본》 마지막 페이지에 인용된 잠언까지 남길 생각은 없다. 나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세상의 일에]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다.”     


생일날 쓴 편지에 인용된 책 제목에서 아데나워가 이날 죽음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인들의 진면목》이라는 책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던 분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변모의 기적을 체험하면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이것을 두 번 체험했다. 결코 잊지 못한다.” 그리고 쾰른시장이었던 슈미트의 죽음에 대한 간결한 소감이 이어진다. 그에게 아데나워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었다. “불쌍한 쾰른은 시장 복이 없다. 그런데 사실 그 도시도 오래 버텼다.” 여기에 이어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설명이 나온다. “사람들은 초봄과 정원을 가꾸는 일을 그리워한다. 어쩌면 이는 바보 같은 짓이다. 초봄에는 많은 혼란이 와서 사람들이 겨울의 고요함을 동경하며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뒤에는 평화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다.”    

 

원래 즐거운 날에 쓴 이 편지에 있는 자포자기적인 논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 1941년에 혼란이 올 것을 예상하는 데에는 특별한 예언자의 자질이 필요 없다. 그 당시에는 평화도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히틀러를 유럽의 지도자로 만드는 그러한 평화가 확실히 올 것인가? 이 세상과 그 인간이 아데나워에게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공격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이러한 신중한 편지에도 가끔 빈정대는 투가 나왔다. 그는 동부 전선이 점점 더 불안해지던 1942년 1월 3일 파울에게 편지를 썼다. “너희는 그렇게 많이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현재 너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군대의 보고에 따르면 그곳에서 매우 힘든 전투를 벌이며 우리가 계획적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의 생각은 다른 모든 나치 반대자와 마찬가지로 분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전투하고 있는 군대와 한마음이었다. 아데나워는 아들 파울에게 쓴 편지에서, 추락사한 영웅 베르너 묄더스 전투기 조종사가 가톨릭 청년운동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언급하였다. “묄더스가 열정적인 새 독일인, 나아가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여기에 그의 입관 사진을 동봉한다. 이 사진은 《푈키셴 베옵아흐터》에 나온 것이다. 그의 몸 위에 놓인 십자고상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목전에 둔 동부전선의 군대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용감한 사람들은 전투와 어려움을 훌륭하게 견디어 내고 있다. … 그들은 정말로 용감한 사나이들이다. 과연 우리의 군대다!” 전쟁이 더욱 심화될수록 평화로운 뢴도르프에도 근심이 깊어졌다. 사방에 벌어지는 비행기 공습, 아들들의 운명, 전반적인 정치적 상황, 대도시가 비행기 폭격으로 안전하지 못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두 아들의 가족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딸과 그 두 자녀도 데려왔다.  

   

그의 발명에 대한 열정도 결국 식어버렸다. 전쟁이 발발하던 해에는 여전히 [발명을 위한] 구상을 하였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특히 자신이 고안한 물뿌리개 주둥이의 개량을 위한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는 처남인 라이너스에게 이 모델을 제작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이는 특허 신청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이 불타오르고 독일군이 볼가강과 수에즈 운하까지 진군하였다가 다시 후퇴하고 있는 사이에 이 뢴도르프의 은퇴자는 불굴의 의지로 [물뿌리개] ‘주둥이’와 ‘곤충 박멸 기계’에 관하여 제국특허청과 서신 교환을 하였다. 또한 그가 제출한 기한 연장 요청에 대한 답신도 받았다.   

  

“요구하신 모델의 제작에 현재 상황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1943년 3월 23일 편지에서 그가 한 말이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1943년 8월 16일 그는 ‘현재 서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유로 다시 기한 연장 요청을 하였다. 이때 무솔리니가 무너지고 이탈리아 남부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공중전은 변함없이 격렬하게 벌어졌었다. 제국특허청에서도 그사이에 국가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한 연장 신청은 엽서를 통하여 승인되었는데, 그 엽서 위에는 ‘석탄 도둑’이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 기한 연장 요청이자 40년 동안 먼저 황립특허청, 이어서 제국특허청과 지속된 서신 교환의 종결에 관하여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다. 아데나워는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1943년 11월 6일 다시 한번 편지를 썼다. “1943년 2월 24일자 편지로 요청하신 모델을 제작하기로 한 기술자가 최근 은퇴하였습니다. 저는 새로운 기술자를 찾아야 하오니 제출 기한을 1944년 1월 18일까지 연장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물뿌리개 주둥이’의 특허와는 다른 과제가 아데나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뢴도르프에서도 모든 일이 중첩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에 대한 근심이 컸다. 식량과 연료를 구하는 일도 어려웠다. 게다가 학교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근심도 있었다. 그의 딸들은 논넨베르트에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분별이 없어진 교사들이 있었다. 끝으로 나라의 앞날에 대한 지속적인 근심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혼자 살기에 BBC, 프랑스 칼레의 군방송, 라디오 베로뮌스터 등의 외국 방송을 들을 수가 있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그에 따라 더욱 어두운 전망을 하고 있었다.      


그가 1942년 5월 31일의 쾰른 구도심의 파괴에 관하여 어떤 직접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도시 재건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1943년 가을 쾰른대학교의 독문학 교수인 폰 데어 레이엔이 그를 방문하였을 때 그의 어조는 더욱 침울했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손님에게 자신이 쾰른에 가보았다고 말하였다. “생각 좀 해보세요. 제가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어요. 그 속에서 길을 찾아보려고 무척 노력해보았어요. … 저의 평생의 작업이 쾰른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제 다 무너져 버린 거예요.”     

내가 살아남은 것은 하느님의 기적이다.!”     


1944년 7월 20일 이후 아데나워가 체포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는 상황이 심각해졌다. 베셀링 근처에 있는 오어펠트에 사는 조경사인 기센을 체포한 다음, 먼저 나치 비밀경찰의 조치가 있었다. 기센은 아데나워 가족에게 식량을 마련해주던 사람이었다. 아데나워는 1944년 7월 21일 그가 ‘국가방위력에 손실을 입힌 협의’로 체포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화로 통보받았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셀링에 있는 정유공장이 폭격당한 이야기를 부주의하게 언급한 것이 검열에서 확인된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매시간 언제든 나치 비밀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들은 급하게 움직였다. 식량을 숨기고, 편지를 불태우고, 라디오 주파수를 제국방송에 맞추었다. 문제가 되는 책들은 다 치워버렸다.     

7월 24일 나치 비밀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때 벌어진 일은 3일 후에 아데나워가 그 당시 묑헨-글라드바흐에 머물고 있던 딸 레아에게 보낸 편지에 설명되어 있다. 그는 딸에게 경찰이 조사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도움을 받아 나치 비밀경찰이 읽어보아도 문제가 없도록 내용을 작성하였다.      

“지난주에 쓰기 시작한 편지를 몇 차례 중단한 끝에 드디어 완성했다. 그 편지는 지금 내 책상 위에 편지 봉투 안에 들어 있다. 우리는 점심 식사 중이었는데 1시 15분이 못되어 본에서 온 7명의 나치 비밀경찰과 나치친위대 보안국원이 집안에 들어서며 집안을 수색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네게 보내려던 편지를 열었고 그들은 그 편지를 압수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동의하였다. 가택 수색은 오후 4시 30분까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나의 방을 걸어 잠갔다. 월요일 오전 10시에 가택 수색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낮에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오후 5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집 안에 있을 것으로 여긴 식량에 대한 수색은 별무소득이었다. 그들은 내 방에 보관한 서류들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그 서류들은 양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1933년부터 나의 서신, 업무 서류, 은행 서류 등을 거의 모두 보존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고 간 일부 편지들에만 관심을 보였다. 시간이 부족하여 내 집에서 검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람들이 내게 말하기를, 내 편지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처를 취하게 될 경우에 그에게 불편하게 되겠지만 먼저 내게 통보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야 그 일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바르게 행동하였다. 이 모든 일이 시간을 빼앗고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앞으로는 아무것도 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내가 이런 조사를 받지 않을 것이고 그들도 일을 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현명한 조치로 여겼다. 사실 모든 것을 쌓아둘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중에 읽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바서만의 책과 그와 비슷한 내용의 책들, 그리고 운드셋의 책도 가져갔다. 그 책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택 수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르망디 전선이 붕괴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차부대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1주일 내내 독일의 서부전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부에서는 독일 중부군단이 파국을 맞이하였다. 소련은 바르샤바까지 진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4년 8월 23일 제국 전체에서 ‘철창’ 작전이 전개되었다. 과거 중앙당(Zentrum), 사민당(SPD), 기타 민주주의 정당들의 주요 지도자들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도 체포되었다. 그 근거는 매우 오래된 명단이었다. 그 명단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미 사망한 자도 많았고 [나치당의] 저명한 당료가 된 이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일단 본에 있는 나치친위대 보안국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약 200명의 체포된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라인강 강가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쾰른의 전시장 건물에 마련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로 구금된 이들, 교도소에 있던 이들, 러시아 포로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스위스 공사가 8월 23일 베른에 보고한 것에 따르면 이제 라인란트에는 ‘명백한 테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아데나워에게는 행운과 불운이 동시에 따랐다. 그곳에 구금된 이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가 공산주의자인 오이겐 찬더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에 [나치] 집단수용소에 갇혀있었다. 그는 시그부르크 교도소에서 이미 9년을 복역했다. 사실 과거에 잘 나가던 시절에 그는 아데나워 밑에서 일하던 5,000여 명의 직원에 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가끔 그가 막스-브루흐-슈트라쎄에 있는 집의 정원을 가꾸기도 했기 때문이다. 찬더는 이제 68살 된 [아데나워라는] 사람을 부축하였다. 아데나워는 동요 없이 모든 것을 견디고 있었지만, 다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시철망에 다쳐 염증이 생긴 눈으로 이리저리 오가거나 눌러앉아 있었다. 아데나워는 의상실로 이감되었다. 거기에는 다른 방처럼 빈대가 득실거리지는 않았다. 찬더가 알아보니 아데나워의 이름이 적힌 수용자 카드에는 ‘귀가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생각에 아데나워는 집단수용소로 보내질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찬더는 아데나워에게 아픈척하라고 충고하였다. 아데나워는 두 사람의 의사에게서 ‘악성 빈혈’의 진단서를 받고 쾰른의 호헨린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병원은 1933년 그의 가족들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그의 구금 생활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수용소 의사의 진단에 따라 그는 ‘수용과 체포 불가’ 판정받고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에게 온 평화를 믿지 않았다. “그에 관한 의견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무렵에 1944년에 전쟁이 종료될 것 같은 기미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7월 23일에 압수당한 편지에서 이미 그해에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그 이유도 달았다. “우리의 신무기 덕분”이라고 한 것이다. 미군은 이미 뤼티히, 마스트리히트,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아이젠하워가 망설이는 바람에,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이 반년이나 더 지속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9월 11일 미국 85첩보 기병대 소속 순찰대는 슈톨첸부르크 근처의 오우르를 지나 독일 서부장벽의 벙커에 이르렀다. 첩보 부대의 1944년 9월 2일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독일군은 전혀 조직적인 군사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도망치고 무질서하며 사기가 떨어진 전투 병력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무기나 다른 장비도 부족하였다.” 

    

얼마 전에 겨우 벗어나게 된 체포의 물결을 경험하고 난 아데나워는 전쟁 말기에 몸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호헨린트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일은 그 당시의 전략적 상황을 볼 때, 나중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진행한 것은 아니다. 아데나워는 그와 친분이 있던 본 출신의 한스 슐리부쉬 소령의 도움으로 9월 20일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 공군 장교는 호헨린트 원장에게 위조된 군사령관 명령서를 보여주었다. 그 명령서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취조를 위하여 베를린으로 호송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먼저 자가용을 타고 베셀링으로 이동하고 거기에서 본에 있는 치과의사인 폴마르에게 갔다. 자동차 안에서는 이 좋은 가을날에 전선의 대포소리가 멀리 들렸다. 슐리부쉬는 이를 “자유의 북소리”라고 하였다. 그는 이 모험을 감행한 결과로 그의 아들과 더불어 1945년 4월 처형당했다. 아데나워는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그리고 본의 호프가르텐에서 폴마르 박사와 함께 논의를 벌였다. 아데나워와 슐리부쉬는 미국이 곧 들이닥칠 것으로 믿었다. 폴마르는 그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 상황판단에 대한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폴마르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 날 베스터발트에 있는 하켄부르크에 있는 니스터 뮐레 여관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로테 아데나워는 그곳 근처에서 근로봉사를 마쳤다. 이 여관의 주인인 요제프 뢰디흐는 아데나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숙박부에는 베버 박사라고 썼다. 그러고는 직원들 가운데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의 가족에게도 불운이 덮쳤다. 아데나워의 부인과 딸들은 아데나워가 체포된 다음에 가장을 빼내기 위하여 남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쾰른에 있는 스위스 영사관이 불타고 나서 뢴도르프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여 옮겨온 총영사 폰 바이쓰는 그의 인맥과 차량을 동원하였다. 아데나워의 사위인 발터 라이너스도 함께 노력을 기울였다. 아데나워의 부인은 마음을 굳게 먹고 사위와 함께 롤랑스에케에 사는 쿠르트 폰 슈뢰더 공작을 찾아갔다. 그는 1933년 이전에 알게 된 아데나워의 친구였다. 그는 여전히 쾰른상공회의소 의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부인의 부탁을 분명히 거절하였다. 이 집의 안주인인 사람은 매우 열렬한 나치 당원이었는데 아데나워 부인을 보고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전할 생각도 안 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 부인인 전시장의 수용소나 호헨린트의 병원을 수시로 방문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병원에서 탈출할 때도 구시 아데나워가 함께하였다.      


나치 비밀경찰은 아데나워가 호헨린트를 빠져나간 것을 알자 그의 부인을 체포하였다. 부인은 먼저 호네프로 그리고 나서 바로 쾰른의 나치 비밀경찰본부로 끌려간 다음, 결국 브라우바일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고는 16살과 19살 된 딸들이 체포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남편이 있는 것을 밝히라는 협박을 받았다. 남편과 딸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전혀 알 수 없고 자책으로 시달리다가 결국 우울증에 빠져 흥분한 나머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왼팔의 동맥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빨리 발견하여 생명은 구했다. 그러나 심리적 충격은 지속되고, 감옥에서 나오면서 약물 복용의 후유증으로 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고통은 그녀가 일찍 죽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데나워는 다시 체포되어 브라우바일러 교도소로 송치되었다. 교도소의 의사가 아데나워에게 그의 아내도 같이 갇혀있다는 사실과 현재 상태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들은 결혼 25주년의 은혼식을 같은 교도소의 다른 감방에서 보냈다. 10일간의 구금 이후에 석방되기 직전에 아데나워 부인은 남편을 잠깐 만나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정신적으로 여전히 충격을 받고 왼팔에 붕대를 감은 채로 뢴도르프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 상황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10월 2일부터 아헨을 둘러싸고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브라우바일러의 나치 비밀경찰대장은 아데나워가 교도소에 들어올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발 자살은 하지 마시오. 당신은 이제 68살이고 어차피 인생은 끝난 것 아니겠소.” 아데나워는 구금 생활을 하면서 채포된 사람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는 미국 기자에게 그 당시 그 교도소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수 있었다. “내가 있던 비밀경찰의 교도소에는 당시에 67명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2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어요. 그리고 한 사람은 총살당했습니다. 모두 독일 사람이었어요. 이는 많은 숫자였습니다. 심지어 16살 된 어린이들도 교수형에 처해졌어요.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에 그들은 입고 있던 히틀러 재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어요. … 내가 있던 감방은 사람들이 고문당하던 방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곳이었어요. 그 방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이었는데 소리가 다 들렸어요. 그리고 저는 여러 날 동안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짚더미 위에 누워야 했어요. 그 모든 것을 들으며 함께 느낀 정신적 고통 때문에 말입니다. …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 당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는 악마가 정말로 있고 악이 실제로 힘을 지녔다는 것을 말이죠.” 이 트라우마는 아데나워의 마음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횡설수설하면서 뢴도르프의 침실의 창살이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그들이 이 늙은이를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    

 

아데나워의 가족이 다시 나섰다. 이번에는 차남이 아버지를 구했다. 막스 아데나워는 1943년부터 육군 소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10월 4일 누이동생 리베트가 그에게 전보를 보냈다. “막스 아데나워 주소지로 연락하여 급히 뢴도르프로 돌아오라고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현재 부모님의 모두 집에 안 계십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상관인 라일레 중위에게 직접 사정을 전하였다. 그는 나치 비밀경찰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알기에 10월 24일 4주간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이틀 후에 막스 아데나워는 브라우바일러에 있는 부친을 방문하여 베를린의 비밀경찰과 직접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히 전하였다. 마르크 브란덴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파울 아데나워도 그곳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경제계의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에는 AEG회사의 프리드리히 슈펜라트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비밀경찰 지도부와의 직접적인 인맥이 없었다.    

 

결국 막스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마인에케슈트라쎄에 있는 담당 실무자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호헨린트에서 탈출한 것 이외에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에 정신이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비밀경찰 관리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기에, 68세 된 사람이 단순히 그 자리를 떠난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1944년 11월의 독일에서 나치 비밀경찰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변명이 통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투 중인 군인이 고향에 있는 친척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체포되어 구금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결국 아데나워에 관련된 서류가 비행기 공습으로 지하실에 옮겨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이다. 비밀경찰의 관리들은 최대한 빨리 서류를 국가보안본부로 전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파울 아데나워와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이 일의 진행 상황에 대하여 신경을 계속 썼다.     


그러는 사이에 전선은 점차 쾰른을 향하여 좁혀져 왔다. 10월 21일에 이미 아헨이 함락되었다. 11월 19일 미군 제1사단과 제9사단이 휘르트겐발트에 대규모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미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내륙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든지 바로 처형될 수도 있었다. 미군이 쾰른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3월에도 클링겔퓌츠 교도소에서는 90명의 정치범들이 교수형을 당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하필 11월 26일, 그의 영명축일에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1944년 11월 24일 아들 막스에게 보낸 3장짜리 편지의 내용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편지를 보면 이 노인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막스에게! 네게 나의 귀환을 알리는 전보를 이미 받았기를 바란다. 11월 26일 공습경보가 발령되어 방공호에 있으면서 우연히 옆에 있던 K.B.에게 나의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당신이 원한다면 오늘이라도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석방명령서를 받았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또 말하기를 석방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베를린에서 전보가 왔는데 그 내용에서 왜 아직 나의 석방을 통보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 물건들, 곧 돈, 가방, 멜빵, 슬리퍼는 일요일이라 돌려받을 수가 없었지만, 그 호의에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가 서명할 수 있는 책임 진술서에 서명을 하고 나는 거주지나 연락처에 관한 어떤 서류도 제출하지 않고 악수만하고 석방되었다. 한번 너도 생각해 보거라. 내가 얼마나 경쾌한 마음으로 바이덴을 향하여 가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지를. 그는 무척 따뜻하고 진심으로 나를 환대하며 작은 화물차를 ‘주선해’ 주었다. 그 차로 나는 저녁 6시 30분에 바이덴을 출발하여 프레켄, 브륄, 본을 거쳐 갔다. 쾨니히스빈터에서 우리는 대단한 홍수가 난 것을 보고는 마르가레텐호프, 뢰벤부르크, 호네프를 거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밤 9시 45분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쾨니히스빈터에서 나는 전화로 소식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의] 영명 축일에 아주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너의 노력과 수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브라우바일러에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다른 것을 모두 제쳐두고 무엇보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전선이 기분을 매우 나쁘게 했다.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할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었다. 쉴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이곳도 폭격을 많이 당하고 있지만 브라운바일러보다는 훨씬 덜하다. 그곳에서 살이 11~12파운드나 빠졌다. 그리고 심장에도 약간 무리가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모든 것이 다시 좋아질 것이다. 특히 우리가 전쟁 지역에 있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잘 있거라. 사랑하는 막스야. 진심으로 인사를 전한다! 너의 아버지가 쓴다. … 우리의 무덤들이 무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나는 회의적이다.”     


이때부터 경찰이 더 이상 아데나워를 감시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그는 전쟁 말기에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르드멩게스가 1960년에 아데나워에게 보고하기를 비밀경찰이 쾰른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제거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이 다시 한번 작성되던 것이었다. 대관구지도관 그로헤와 라인지역 지방장관이며 대관구지도관인 데르보펜 사이에서 이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로헤는 아데나워를 살려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센의 대관구지도관는 자기 뜻을 관철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밀경찰이 쾰른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바람에 자신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아데나워가 1960년에 말했다.   

  

이제 알게 된 대로, 아데나워는 자기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어느 사이 14명으로 늘어난 식구들, 곧 아내와 딸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의 생존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 대가족의 가장 어린 구성원은 1945년 1월 중순에 세상에 나왔다. “로라는 매우 용감하였다. 출산이 임박해서도 일을 하였다. 1월 9일 화요일 새벽에 4시가 다 되어서 우리를 깨웠다. 구시와 나는 딸을 데리고 높이 쌓인 눈을 헤치고, 멀리 전선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호네퍼 병원으로 걸어갔다. 로라는 산통이 이미 심해져서 우리는 5분마다 멈추어 쉬어야 했다. 11시가 다 되어 아이가 태어났다. … 여기의 교통과 보급 상태가 정말 어려워졌다. 철도는 말하자면 완전히 끊어졌다. 전기 열차도 부분적으로 끊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안개가 매우 심하게 껴서 공기는 매우 조용하였다. 특히 밤이면 더 그랬다.”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 노인은 이제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커다란 정치적 미래에 관한 생각도 없었다. 1962년 미국 CBS 방송국의,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 기자가 아데나워를 인터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전쟁이 있던 시기에 귀하의 미래가 어떠할 것으로 보셨습니까?” 대답은 매우 올바른 것이었다. “어떤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기다릴 밖에요. …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상이 나치로부터 구해지기만을 기원하고 희망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이후에 어찌 될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바로 앞에 다가온 앞날이 그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말하자면 미국과 영국의 전략 계획이었다. 그 전쟁 시기의 모든 독일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느 사이] 아마추어 전략가가 다 되어 있었다. 그는 제국에 대한 연합군 공격의 두 주요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벨기에 항구와 평지에서 루르지역과 북독 저지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인츠를 지나서 프랑크푸르트 주변의 넓은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라인 중부에는 지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질 수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뢴도르프는 비교적 안전해 보였다. 그러나 미군이 3월 7일 레마겐 철도를 온전하게 손아귀에 넣으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3월 8일 아침 아데나워의 누이인 릴리 수트가 매우 만족해하는 목소리로 웅켈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기에 미군이 왔어.” 그래 며칠 동안은 [연합군의] 독일 내부로의 진격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에르펠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드라켄펠스가 천연의 요새로 장애가 되었다. 시벤게비르게 지역 양쪽으로 벌어진 돌파전투에서 뢴도르프에 있는 집들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미국의 전쟁 지도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는 융단 폭격의 좋은 목표였다. 

    

그런데 그러한 전투가 결국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길을 가면서 장기 계획을 크게 변경하지 않으려는 아이젠하워의 결심이었다. 레마겐에 대한 습격이 성공하자 그는 교두보를 빨리 확보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확보되면 라인강 전선을 당초 예상한 5월에 감행하려던 것보다 앞선 3월에 점령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비 병력이 쾰른·프랑크푸르트 고속도로가 뚫리는 것을 막기 위한 전투에 동원되어, 교두보 확보는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서방연합군의 주도 병력은 니더라인과 베스트발에서 팔츠를 향하여 계속하여 진군하였다. 여기에서도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는 라인강 도하와 돌파가 이루어졌다. 몽고메리가 이끄는 군대는 3월 23~24일에 베젤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그의 휘하에는 거의 100만 대군이 있었다. 3월 22일 오펜하임에서 라인강을 건너는 것으로 정점을 이룬 팔츠 지역의 점령에도 성공하였다. 이에 비하여 레마겐 지역의 교두보 확보는 독일 지도부가 마지막 군사력을 모아 중부 라인지역에서 다 소모해 버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단기적인 전략적 목표는 고속도로였다. 이를 차지하면 시벤게비르게 지역을 쉽게 남쪽으로 우회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데나워에게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연합군이 호네프 남쪽으로 라인강을 빠르게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대로 수 주일 동안 라인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더라면 라인강 우안 지역 도시와 마을들은 완전히, 또는 거의 파괴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투는 비교적 길게 지속되었다. 아데나워 집 뒤의 숲에는 독일군의 참호가 늘어서 있었다. 호네프에는 미군 첨병들이 들어섰다. 라인강 건너편은 이미 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뢴도르프는 여전히 독일군이 지키고 있었다. 아데나워와 그의 식솔들은 거의 8일 동안 집 뒤에 있는 작은 방공호에 피해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가끔 집과 정원으로 기어 나오고 들어갔다. 그는 당당한 침착함으로 식솔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위기 때 빛을 발하였다. 5명의 프랑스 포로가 탈출하여 그의 집을 찾았을 때도 그는 침착하게 그들을 벙커에 숨겨주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벙커에는 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집 마당에는 유탄이 날아들었다. 집은 두 차례 폭탄을 맞았다. 아데나워 스스로 평생 한 이야기에는 폭탄 세 개가 그를 향하여 날아오다가 한 개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그 여파로 나머지가 바람에 날려 그를 비켜 가게 되었다는 것도 있다.   

  

최악을 벗어나게 된 이유에는 쾨니히스빈터, 호네프, 뢴도르프에 야전병원이 들어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독일군은 지나치게 무분별한 방어를 시도하지 않았다. 미군은 라인강 건너편의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그 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폰 바이쓰 총영사에게 그곳에 많은 부상자가 있다고 알렸다. 이 외교관은 ‘뢴도르프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스위스 깃발을 단 배를 타고 군대사절로서 라인강을 건넜다. 이는 독일 측에게는 환자를 실어 나르고 나서 도망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미군 측에게는 드라켄펠트 남쪽 지역을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점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약 50명의 독일 수비대가 물러나고 또한 호전적인 사관후보생들도 내륙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뢴도르프, 호네프, 쾨니히스빈터는 어느 정도 공격을 당했지만 파괴당하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미래의 독일 수상도 가족과 더불어 제3제국을 몸에 상처 없이 무사히 견디어 냈다. 물론 그의 아내인 구시 아데나워가 입은 상처는 예외로 하고 말이다.     


레마겐 다리를 빼앗기기 하루 전에 쾰른의 폐허 속에서 버티던 마지막 저항 진지도 무너져 버렸다. 겨우 4만 명의 사람들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버티고 있었다.  

   

[미군의] 점령으로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해방은 라인란트에서도 일단 파괴, 폭력, 절도를 의미하였다. 전투에 참여한 군인이든 풀려난 러시아와 폴란드 포로들이든 또는 강제노역자든 말이다. 뢴도르프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미군의 점령 초기에 미군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 것은, 그가 들은 많은 습격에 관한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은 천천히 정상화되어 갔다. 전쟁의 공포는 지나갔다. 그리고 점령에 따른 고통이 시작되었다.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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