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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10. 2023

정당 지도자 1     

1945~1949

Theodor Heuss 대통령과 아데나워


폐허 속에서 방향 찾기     


영욕으로 가득한 인생을 이미 살아온 69세의 아데나워에게 이제야 비로소 인생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20년 후에 여론은 그를 이미 역사 속의 인물로 여기고, 많은 노인이 그렇듯이 아데나워도 자신을 점점 더 역사적 인물로 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끔 그에게 그의 인생의 단계를 어떻게 나누어 보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1917년까지와 1917년부터 1945년까지로 나누기보다는, 나치가 등장한 1933년까지, 나치시대, 그리고 독일의 패전 이후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933년까지는, 아데나워가 쾰른시의 역사책에 기록된 아데나워가 더 이상 아니었다. 쾰른과 관련한 아데나워의 중요성을 제외해 보아도, 57살까지의 그의 삶 또한 사회사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다룰 때 프리즘으로 색을 나누듯, 황제시대, 제1차 세계대전, 혁명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긴 기간은 무엇보다도 한 인간의 인성이 형성되는 기간이었기에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아주 늦게 유럽에서 중요한 정치가가 되었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아데나워는 그의 인생의 둘째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곧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었다. 여느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오늘날 그의 운명은 시대를 초월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격변으로 고통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고 나서 한 때 영향력 발휘한 인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사대가 바뀌어도 지배자의 비열함과 박해당하는 이들의 두려움과 고통은 변함이 없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시대에도, 17세기 영국의 내전 때도, 프랑스 혁명을 거쳐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독재로 바뀌던 때도, 그리고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데나워는 굳이 말하자면 실존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그리고 그 이후에 핍박받았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 시기에 굴욕을 당하고 상처를 입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구속에 맞서 싸우는 데에 깊이, 무조건성, 담대함, 날카로움을 얻게 되었다.     


아주 고령에 이른 사람으로서 그는 3월 16일에 1945년의 봄의 햇살을 맞으며 자기 집 테라세로 걸어 나왔다. 그 햇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전체주의적 독재가 무엇인지 이제 깨달았다. 1933년만 해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비열함도 체험하였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유혹당하고 약한 존재인지, 그러면서도 무엇이 의지가 되고 질서를 잡아주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족, 친구, 교회, 입헌국가라는 제도,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확신하는 지도자가 통제하는, 자유를 수호하는 군대였다. 이리하여 사실 그는 수백만 명의 다른 유럽 사람과 독일 사람들이 체험한 것을 그대로 체험하였다. 그러나 이 체험이 이후에 그가 인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에 관련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벌어진 일과 얻게 된 통찰은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었다 하여도 그전에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933년부터 1945까지 박해받았던 이 인물이 4년 후에는 새로운 독일의 정상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체주의를 자기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도록 체험해 보았기에 이제 그는 전체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서독의 좌파와 우파에서 매우 폭넓은 공감대를 확보한 여론이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아데나워가]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의 자유주의적 확신을 처음부터 평화주의적 태도보다 앞세우게 되었는지가 눈에 뜨이는 점이다. 이 평화주의적 태도는 많은 다른 유럽인들, 특히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절실하게 강조한 것이다. 그는 1945년 3월 16일 처음으로 자신을 방문한 미국 점령군 장교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다짐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 국민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앞세워야 한다고 느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이들이 이를 위하여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였고, 두들겨 맞은 독일이 20세기 후반에 전쟁 능력을 증명할 생각이 얼마나 없는지도 분명히 느꼈다. 더구나 그는 전쟁의 잔인함보다는 전체주의적 독재의 무자비함을 더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이는 얼마 후에 그가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 군사적 자주성을 주장하고, 평화주의가 근시안적인 그릇된 태도라고 비난하고 나서는 데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집과 사무실 주변에는 이제 많은 사람이 급히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나치 관련 범죄에 대한] ‘사면증’을 받고자 하거나,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통하여 출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인생의 제3막을 여는 단계에서 힘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는 다만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사람, 잠재적 거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잠재력을 과연 발휘할지 또 어떻게 발휘할지는 1945년 3월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잠재력에도 미국과 독일이 동시에 관심을 보였다. 쾰른과 본 지역을 점령했던 미군 제1군단에는 정보부 특별수사대인 전략사무국(OSS)과 대적첩보부대(CIC)가 속해있었다. 이 기관은 체포해야 할 나치정권 아래 있던 관리들의 블랙리스트만이 아니라 히틀러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로 주요한 지도자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화이트리스트’도 작성하였다. 쾰른 지역의 ‘화이트리스트’에는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아데나워, 콘라드: 바트 호네프, 호네프의 전임 시장. 나치에 반대하여 구금된 인물로 연합군이 접촉할 가치가 있음(1919년부터 1933년까지 쾰른시장을 역임한 아데나워, 콘라드와 동일 인물로 보임)”      

얼마 후에 아데나워는 그가 독일의 ‘화이트리스트’에 ‘제1번’으로 올라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5월 13일에 쾨니히스빈터-호네프의 군사경찰에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는 딸 로테가 9시 통금 규정을 어겨 구금되어 있었다. “저는 쾰른 행정 지역 점령 사령관의 지시로 이 도시의 시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적첩보부대의 기밀 정보에 따르면 독일 화이트리스트에 제1번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는 5월 8일 페터슨 중령이 보낸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사실을 군사경찰에만 알린 것이 아니다. 《쾰니셰 차이퉁》의 해외 특파원 생황을 오래하고 그 당시 베른에 머물고 있던 한스 뢰링은 똑같은 소식을 아데나워에게 들었다. 아데나워는 1945년 7월 초의 편지에 자신이 독일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데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인물인지에 관하여 썼다.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당신에게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워싱턴에서 작성한 화이트리스트에 제1번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라인란트 지역의 영향력 있는 점령군 장교들과 대적첩보부대 요원들이 아데나워를 그 지역의 지도적 인물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아이젠하워가 있는 사령부도 그에게 장교들을 보내어 조언을 구하였다. 그가 ‘독일 화이트리스의 제1번’이라는 정보가 그에게 처음부터 좀 더 커다란 그림을 그릴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미국 정보국의 장교들과의 첫 대화 때부터 그의 판단에 대하여 뭔가 대가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그만이 알 뿐이었다.     


1945년 3월에는 점령군의 뜻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제3제국에 협력하지 않은 독일 사람들도 처음에는 정치 생활을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 망설이는 가운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데나워는 이미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정치적 거물이 되어 있었다. 곧 미국이 지명한 쾰른시장이었다. 미국은 그가 1945년 5월 4일 정식으로 시장 직무를 시작할 때까지는 ‘자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독일 측의 정치적 조합에도 점령군의 입장이 모든 계획에서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이미 정당 수립과 새로운 정부 구성이 시작되기도 전에 점령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그가 시장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의무감, 오랫동안 억압된 성취욕, 쾰른에 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 그러한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1965년 대림절 때 아데나워는 그의 비망록을 작성하는 비서 안네리제 포핑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시 쾰른시장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지.”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악한 행정 전문가는 현재 상황에서는 누가 쾰른시장이 되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6개월 동안의 경험이 이를 온전히 증명하였다.    

 

그는 쾰른시장직에서 자기 재량으로 언제든 물러나도 좋다는 것이라는 조건으로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45년 7월의 여러 편지에서 그가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결국 나의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1945년 7월 6일 런던에 머무는 것으로 여겨진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한스 뢰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철저히 파괴된 도시를 관리하는 것과는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솔직히 나타내었다. 그러나 뢰링은 그를 돕고자 하였다. 그사이에 영국이 6월 21일에 쾰른을 인수했다. 그래서 런던의 언론, 정부, 경제계의 “현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현장에서 독일의 문제를 연구하도록 주선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훌륭한 조언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저의 판단이 전혀 야심에 눈이 어두워 내린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그저 쾰른시의 시장이 되거나 시장으로 있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이 도시의 재건을 그 시작만이라도 제대로 이루어낼 때까지만 말입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를 신속하게 찾아낸 것은 미국인의 조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연합군이] 뢴도르프를 점령한 지 단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체닉스벡에 군용차가 나타났다. 쾰른의 점령군 사령관이 파견한 투후스 중령과 에머슨 대위가 나타났다. 그들과 동승한 이들은 호네프시의 시장과 예술사가인 베르너 보른하임이었다. 보른하임이 그 첫 주간의 일들을 자세히 전해준 사람이다. 아데나워는 뻣뻣하지만 진중하게 장교들을 맞이하였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27년 전 쾰른시청사에서 있었던 비슷한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42살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난 12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이었다.     


그 남자들은 아데나워에게 점령군 사령관과 쾰른시민들의 이름으로 그가 시장직을 다시 맡아주기를 청하였다. 아데나워가 제3제국 시대에 꿈이 있었다며 바로 이것이었다. [나치라는] 갈색의 홍수가 지나고 나서 다시 한번 쾰른의 시장이 되어보는 것이었다. 확실한 점은 그가 폐허를 관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제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수락하였고,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의 세 아들들이 아직 군대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뒤에서 자문하는 이의 역할을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잠정적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비록 사람들이 그에게 간청을 하며 바로 모셔가고자 했지만 말이다.  

    

아데나워와 미군 장교들이 서로 외국어로 힘들게 대화하고 있는 방으로 이제 잘 차려입고 언제나처럼 기분이 좋은 총영사 폰 바이쓰가 방에 들어섰다. 그는 자신이 뢴도르프의 전투 상황이 바람직하게 전개되는 데에 자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자임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가 오래전부터 아데나워를 존경해 왔기에 미국 장교들이 은퇴한 아데나워를 다시 쾰른시장으로 앉히려는 뜻에 힘을 보탰다. 그는 자신이 아데나워를 며칠 안에 쾰른으로 모시고 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미군들은 일단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갔다.   

   

이날 프링스 대주교도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쾰른에서 4차례 폭격을 당하고 오래전에 거처를 뢴도르프로 옮겼었다. 그래서 쾰른 신부들 가운데 일부와 아데나워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아데나워에게 최대한 빨리 쾰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프링스 대주교가 문밖에 당도하자마자 대적첩보부대도 나타났다.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제 아데나워가 다시 살아났다. 그의 어린 자녀들은 그들의 부친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고는 놀라워했다.     


3일 후에 미국인들이 다시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인물이 파견되었다. 바로 쾰른 총사령관의 부관인 슈바이쳐 대위였다. 45세인 그는 전쟁 전에 뉴욕 대학교 건축과의 도시 계획 전공 교수였다. 슈바이쳐는 아데나워를 설득하여 며칠만이라도 쾰른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와 그의 아내는 미군이 점령한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상트 엘리자베트 병원에 마련된 거처에서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     


쾰른으로 가는 길은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었다. 찬란한 봄 햇살은 요즈음과 같이 변함없었다. 호네프와 롤랑스에케 사이에는 부교가 놓여있었다. 라인강에는 부분적으로 안개가 끼어있었다. 멜렘을 향한 길은 마치 커다란 수건이 드리운 듯 맞은편의 시야를 가렸다. 모든 곳에 초근대적인 [군사] 장비들이 엄청난 홍수를 이루며 1945년 봄 미군이 점령한 독일에 말문이 막히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본에는 군대의 수송 이외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설계하고 히틀러가 개통한 쾰른을 향한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곳이 음울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아데나워가 다시 쾰른에 도착하였다. 거의 12년 만에 그가 여기에서 쫓겨난 이후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도시사령관 힐레스와의 첫 대담에서 전형적인 아데나워다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 중령은 아데나워가 서 있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보른하임에게 눈짓하며 의자를 가져오도록 하고는 그 의자에 앉으면서 ‘자 그래서요!’라고 말하였다.     


이제 아데나워의 지략이 나올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시장이 되어 아들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면 시장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눈치챘다. 만약 아데나워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택할 요량이었다. 아데나워가 원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하여 그의 매제인 수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이미 3월 16일부터 시정을 이끌고 있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그가 원하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하고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그는 일단 조용히 ‘자문’의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 일을 맡게 되면 그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쾰른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주말에는 뢴도르프에 있게 될 것이었다.     


미군 측은 그의 신중함을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첫 대담이 있은 지 며칠 후에 아헨의 시장이었던 프란츠 오펜호프가 비밀 결사대에 암살당하였다.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라인강 건너편에는 여전히 숫자는 줄었지만, 모델 장군 휘하의 독일군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첫 며칠 동안 아데나워는 [쾰른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는 아펠호프플라츠에 있던 나치 비밀경찰 본부로 가자고 했다. 그 건물의 모든 문은 열려 있었다. 종이와 서류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한쪽 벽에는 여전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사진을 내리도록 하고는 두 손으로 책상 모서리에 내리쳐 부수어 버렸다. 한 나치 비밀경찰 관료의 책상 위에 있던 청동으로 된 책상등을 기념품으로 들고 와서는 뢴도르프의 방에 놓아두었다.  

   

현재 미군사령부 페터슨 중령이 주둔하고 있는 린덴알레 70번지에 있는 [미군이] 징발한 빌라에는 과거에 은행장인 안톤 브뤼닝이 살았었다.     

 

아데나워 부부가 동시에 바라본 막스-부르흐-슈트라쎄는 황폐해졌다. 멜라텐 공동묘지에 있는 아데나워의 부모와 전처인 엠마 아데나워의 무덤은 무사하였다. 한마디로 시내 전체가 폐허 자체였다. 도시를 다시 제대로 재건하기 힘들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우려는 더욱 강화되었다. 밤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자동차로 도시의 모든 구석을 찾아갔다.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절반 정도 파괴된 대성당을 찾아가 요리시설을 세울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지 않고는 수리 작업을 할 노동자들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브라우바일러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하였다. 구시 아데나워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늘 그를 방공호에 마지막으로 들어가도록 했던 것을 기억했다.     


도시의 모습이 어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는 가끔 외국의 친지에게 알렸다. 1946년 4월에 그가 매우 간단명료하게 그 모습을 설명할 때 그의 논조는 매우 절망적이었다. “쾰른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현재 시민의 숫자가 다시 50만 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 가운데 3분의 1이 지하나 어느 정도 파괴된 건물 구석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많은 독일 도시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쾰른만큼 파괴된 대도시는 없었습니다. 대성당은 여전히 서 있지만 지붕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천정의 많은 부분이 주저앉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다시 복구 중입니다. 시청 건물은 남아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전실은 남아 있고 탑 일부가 있을 뿐 나머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귀르체니히에는 건물을 둘러싼 4개의 벽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비참한 기억에 지나치게 흔들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거의 모두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과제가 파괴된 도시에 쌓여있었다. 가장 심하게 폭격당한 지역에서는 5월의 뜨거운 날에 여전히 심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이미 3월말과 5월초 사이에 아데나워는 미군이 점령할 때 주민이 32,000명인 시의 임시 시장의 역할을 눈에 뜨이지 않게 수행하였다. 독일에서 나치 지배 이전 시대의 인물과 다시 연결된 곳을 찾으라면 바로 여기 쾰른이었다.     


제국의 전쟁 협상이 마무리되자 아데나워는 시장직을 이제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점령군 사령관 페터슨은 아데나워에 대하여 더욱 좋은 인상을 받아 그에게 수락을 독촉하였다. 파괴된 쾰른의 관리라는 엄청난 문제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던 미군 관리들은 당연히 흠결 없는 정치적 명성을 지닌 독일인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직무를 받아들이면서 그가 원하면 언제든 그만둘 것에 대한 미국 측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이제는 별로 기뻐하는 내색 없이 제안을 수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고문으로 있던 기간에 그는 시장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제적으로 그는 미국이라는 점령 세력을 회의적으로 대하였다. 게다가 4월 말에는 영국이 쾰른을 포함한 독일 북서부 대부분 지역을 넘겨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와 함께 그가 해야 할 일의 대체적인 윤곽이 잡혔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령부에 있는 한 장교가 그에게 알려준 바로는 루르지역과 함께 라인·마인 지역을 관리할 ‘4인위원회’가 구성될 계획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여기에 함께 할 것인지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다려보겠다는 신중한 대답만 하였다.   

  

아데나워가 5월 3일 주둔군 사령관인 페터슨 중령과 진행한 중요한 협의 말미에 그가 결국 시장직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면서 그 [‘4인위원회’] 계획에 관하여 문의하였다. 5월 25일 그는 폰 바이쓰에게 연락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미군의 답답한 태도에 그는 이 일에 조금도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누군가가 아데나워가 마음속으로는 이제 쾰른을 그에게 너무 작은 무대로 여긴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아데나워의 활동을 단순히 경력과 권력 획득의 관점에서만 파악한 저자들이 그들의 많은 저서에서 함부로 혀를 놀리는 것에 그가 놀아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복잡한 인물을 그리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날이 갈수록 쾰른에서 수행하는 직무가 모든 지역의 재건이라는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은 일을 완수하는 데에 충분한 가능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과거 자기 직무를 잠시 접수하기로 쉽게 결정한 데에는, 독일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의 지위를 두 사람이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두 사람은 1933년 이전의 독일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고 또한 아데나워도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이다. 라인지역 지방장관으로 한스 푹스가 임명되었다. 그는 1874년생으로 아데나워와 거의 동년배이고 아데나워처럼 중앙당(Zentrum) 출신이며 이 직무를 이미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맡아서 수행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사무실은 처음에는 본에 있다가 영국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하고 나서는 뒤셀도르프로 사무실을 옮겼다.     


영국은 이 자리를 처음에는 아데나워에게 권유하였다. 영국이 보기에 푹스는 ‘작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폰 바이쓰에게 자신이 푹스를 지방장관으로 밀었던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거의 단절되었다. 그러나 푹스가 4월 29일 호헨린트 병원에 나타나서 그를 다시 과거 직위에 올려놓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데나워는 그가 잘 부려 먹을 수 있는 관리를 두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푹스는 곧 커다란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직무를 마치 주지사인 것처럼 행사하면서 아데나워와 호흡이 전혀 맞지 않게 되었다. 10월 초에 영국군이 그를 물러나게 하자 아데나워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푹스는 처음부터 이전의 당 동료들과 함께 [라인주의] 주정부를 확실히 장악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 바이마르 시대의 3두 정치가 가운데 마지막 인물은 고위 관리였던 클레멘스 부쉬였다. 그는 1945년 5월 최고의 지위 가운데 하나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황제 시절에 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66세로 연금 생활 대상자가 될 나이에 있었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그는 알텐키르켄의 시의원으로 일하였다. 1922년부터 1936년까지는 뮌헨에 있는 제국 재정부의 심판관으로 일하였다. 이제 미군 당국은 아데나워의 권유로 그를 쾰른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시 개인적으로 정치적 끈을 조정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비스마르크 시대에 ‘학교’를 다니던 나이 든 사람들이 이제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라인란트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였다. “세상에는 유능한 사람이 매우 드물게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고 나치당의 엄청난 영향으로 후진도 양성되지 못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아래에 있던 첫 6개월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로 아데나워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려는 노력은 곧바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미국과 영국의 서류들은 체계적으로 평가되지 못했고 부분적으로는 접근조차 안 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아데나워의 서한들은 그의 생각과 정서를 그저 매우 우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여줄 뿐이다. 그 자신이 ‘회고록’에서 이야기할만한 것으로 간주한 내용에 대해서는 활기찬 분위기로 상세한 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다양한 차원에서 [머릿속으로] 계산한 내용은 거의 파악할 수가 없다.      


그나마 가장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데나워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스위스 총영사 폰 바이쓰의 상세한 보고서였다. 그는 제3제국 시대에도 아데나워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었다. 이 총영사는 1943년 중반부터 쾰른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뢴도르프와 바트고데스베르크에 머물면서 자기 직무를 이어갔다. 194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다시 쾰른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4년 늦여름과 가을에 아데나워가 체포되었던 동안에 그는 열심히 그의 가족을 돌보았다. 그래서 1945년부터 의회위원회가 구성 되던 시기까지 이 두 가정은 매우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였다. 아데나워와 폰 바이쓰는 1945년과 1946년에 거의 정기적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함께 만나 커피를 마셨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매우 유익하게 여겼다. 폰 바이쓰는 그가 나눈 대화가 정치적인 내용을 지닌 경우에는 그 상세한 내용을 다 기록하여 본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다채로운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 보고서는 아데나워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연합군의 점령 초기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가 무엇을 비판했는지, 무엇에 대하여 우려했는지, 이 혼란스러운 과도기에 대화를 통하여 이런저런 경우에 어떻게 인맥을 통하여 정치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는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당시 자기 정치를 추구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외교관의 보고서가 아데나워의 생각을 얼마나 정확히 묘사했는지,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나 아데나워의 생각에 자기 상황판단과 의도를 가미했는지를 개별적으로 파악하기는 때때로 어렵다. 사실상 그는 얼마 후에 베른에 있는 그의 직속 장관으로부터 강력한 소환명령을 받았다. 그가 근처에 있는 바트엠스에 주둔한 프랑스 점령군 장교가 드골주의적인 독일 정책을 영국 점령지역에 전하려는 의도에 아무 생각 없이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천은 물론 마인츠 예술사가인 베르너 보른하임이 1980년대 초반에 출판한  보고서이다. 그는 전쟁 말기에 호네프에 거주하면서 아데나워와 유대를 맺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쾰른에서 새로 일을 시작한 첫 주에 일종의 개인적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많은 회합에 같이 데리고 갔고 나중에는 쾰른의 도시행정과 관련된 문화정책 과제를 맡겼다. 보른하임의 보고서와 스위스 외교관의 보고서는 서로 보완하고 여러 가지로 서로의 내용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래서 연합군 점령 초기 아데나워의 생각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주요한 특징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곧 모든 면에서 혼란과 불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초기에 그는 미군들의 습격에 크게 실망하였다. 폰 바이쓰는 3월 24일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데나워 박사님의 설명에 따르자면 호네프와 뢴도르프에 주둔한 미군들은 고데스베르크에 있는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게 행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압류된 주택들을 하나같이 약탈하고 모든 것을 잘게 부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매우 우려되는 것은 미군에 소속된 이들, 특히 흑인들이 많은 여자들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30년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쾰른에서도 일어났다. 그리고 무질서한 군인들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전쟁 중에 독일로 끌려온 이주민들이 여름이 될 때까지 특히 시골에서 계속 난동을 피웠다. 아데나워는 선의를 지니고 매우 교양 있는 쾰른 점령군 사령관인 페터슨 대령에게 이에 관하여 민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군인들에게 반독일적인 선전을 통하여 증오심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유럽에서 전투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얼마나 난동을 부렸던가? 그러니 이는 만행에 대한 통상적인 상호 복수라는 것이었다.

     

식량 사정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한 결론이 내려졌다. 하루 1,150칼로리의 식량 배급은 몇 달 전에 그가 직접 나치 비밀경찰의 수용소에서 받은 양과 동일하다고 지적한 것은 아데나워가 한 말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였던 동안에는 900칼로리만 배급하였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귀하는 나치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고 한다.    

 

4월 9일 폰 바이쓰 총영사는 다시 한번 아데나워를 만났다. 그는 며칠 전 쾰른에서 돌아왔다. 그는 자기 고향인 도시에서 3일 동안 중요한 회의와 대화를 하였다. “그는 나를 철저히 믿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곧 미군의 등장 때문에 독일의 미래가 매우 어둡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쾰른 주둔군 사령관이 아데나워를 철저히 신뢰하고 그가 쾰른시의 이익을 위하여 제안하여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미군들의 등장이 모든 곳에서 시민들의 커다란 불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민들이 미군이 해방군으로 진주한 것을 매우 환영하였고 그들의 주둔을 나치 폭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미군들은 파괴와 절도, 그리고 교만하고 빈간적인 행동으로 매우 인심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만약 바뀌지 않는다면 볼셰비즘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나치주의를 낳을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신치히, 레마겐, 크리프에 있는 포로수용소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커다란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수용소에 대하여 라인란트 전체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30만 명의 포로들이 제대로 된 숙소가 없이 노지에서 야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사포 보조원으로 복무하던 여군도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밤낮없이 쓰레기더미에서 덮을 것도 없이 누워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폰 바이쓰는 그곳에서 날마다 60내지 100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 자신은 3월 중순만 해도 정말로 자유로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곧 사라졌다. 이제 그는 자신이 타격을 입은 민중 대변인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앞으로 10년간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곧 자기 흠결 없는 정치적 명성을 바탕으로 기꺼이 ‘겁 없이 떠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도 모든 나치 지도자에 대하여 냉정한 판단으로 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쾰른의 미국 주둔군 사령관과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는 나치 군부를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치 협력자에 대해서도 그의 거부감은 깊었다. 4월 중순에 사제들을 대표하여 이전의 [나치] 당원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쾰른 대교구 수석 사제 그로쉐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첫째로 그러한 주장이 미국을 상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게다가 모든 [나치] 당원들은 그들의 비겁함으로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로쉐는 이에 대하여 반박하며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이들이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하여 협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제 오랜 세월에 걸쳐 고전적인 변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데나워의 생각에 따르면 무차별적인 탄압도 민중이 승인한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생각을 곧 바꾸게 되었다. 이미 5월에 그는 [미국] 대적첩보부대(CIC)가 나치 비밀경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 명백해 보였다. 방법의 차원에서 나치당의 탄압은 매우 관료주의적인 완벽주의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에 비하여, 이 점령군 통제의 초기에는 아데나워가 지난 12년간 체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점령당한 독일은 여전히 집단수용소 (오늘날의 구금수용소), 강압된 자백, 정치적 밀고, 염탐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이 진주한 지 얼마 안 되어 뢴도르프의 우체국이 아데나워의 전화를 도청하기 시작하였다. 우체국장은 이 사실을 아데나워에게 직접 알리기를 주저하였다. 그는 아내를 고해소에 보내어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고해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저는 고해가 아니라 보고하고자 합니다!”[그래야 신부가 고백성사 비밀 누설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신부는 아데나워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당신 전화기가 도청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에게도 모든 과거 [나치] 당원을 무차별적으로 공직에서, 그리고 원래 의도대로 경제적인 역할로부터도 몰아낼 것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 특별히 현실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4월 초부터 아데나워는 모든 [나치] 당원들을 시 행정 업무에서 몰아내는 것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분노를, 폰 바이쓰가 있을 때 드러내었다. 도시 상수도관리부서의 21명의 전문 인력 가운데 단지 3명만이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공무원의 90~95%가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해직되면서 행정의 효율만이 거의 완전히 마비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결과도 따랐다. 다른 인력의 부족을 이제 상당 부분은 공산주의자들로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식으로 하다 보니 나치 관변 단체인 ‘베어볼프’에 대한 동조 분위기와 신나치주의가 어쩔 수 없이 자라나게 되었다. 또한 당초의 나치 탈색 조치를 엄격히 적용한 결과 보건 분야도 마비되었다. 112명의 의사 가운데 102명이 [나치] 당원이었던 것이다.     


이미 4월 중순에 아데나워는 모든 사소한 나치주의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파면시키는 것에 대하여 미국 측에 경고를 보냈다. 6월에 상황은 거의 참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아데나워가 결국 미군 점령기 말기에 점령군 최고 사령관인 아이젠하워에게 직접 건의서를 보냈다.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무차별적인 취업 금지 조치를 변경할 것을 건의 하였다. 곧 명백한 노선이 수립되었다. 아데나워는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이 노선을 유지하였다. 죄인에게는 엄격하게 벌을 내린다. 적극적인 나치주의자는 중요한 자리에서 몰아낸다. 나치 당원이 아닌 자들도 나치 탈색 조치에 포함시킨다. 특히 산업계에서 나치당에 많은 자금을 기부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사소한 나치주의자들은 무죄 방면한다. 다만 이들에 대해서는 독일 법원이 심사하여 결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덕적 동기나 감정이 담긴 발언과 현실 정치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3제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1945년 초에 아데나워는, 1930년부터 1933년 사이의 [나치에 동조한] ‘과거의 전사들’을 다 싸잡아서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오도된 이상주의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1939년 이후 나치당에 가입한 이들을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가장 멍청한 자라도 나치가 어찌 될 것인지는 알 수 있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이 문제에 오래 매달릴수록 상당히 정치적인 시각이 대두되었다. 독일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진짜 범죄자들, 특히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만 처벌하고 수백만 명의 동조자들은 사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그가 [민중의] 비겁함을 비난했던 것은 단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유약하고, 특히 경찰국가에서 그러하다는 사실에서 마음속으로 거리를 멀리 두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주의가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1945년 초와 여름에 막무가내로 구는 군중들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1945년 6월 말에 폰 바이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그러한 자들은 아데나워가 확보한 신뢰할만한 소식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중부 독일과 북부 독일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교화 조치가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점령군 당국자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라 전체에 만연하였던 정치적 암살의 물결이 일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전시에도 믿을 만한 독일 포로를 무장시켜 이들이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가 1945년 여름의 독일의 심리적 상황에 대하여 내린 판단은 스테픈 스펜더가 1946년 가을에, 곧 아데나워가 유럽의 저명한 정치가가 되기 훨씬 전에 출판한 아데나워와 나눈 긴 대화에 대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영국에서 온 방문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는 독일 문화를 라인과 루르지역과 마찬가지로 납작하게 짓눌러버렸습니다.” 독일은 정신적으로 사막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영적 가치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질적인 재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도 하였다. 쾰른의 문화적 전통을 지닌 도시가 이러한 측면에서 선두에 나서기 위해서는 “최고의 교육 기관, 최고의 책, 최고의 신문, 최고의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4~25세 나이의 청년들이 특히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아데나워는 이 대화를 다음을 강조하는 말로 마쳤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 “라인지역의 유명한 가톨릭 신자”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펜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힘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수수한 인상을 주었다. 얼굴은 길고 마른 타원형이고,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지고, 눈은 가늘고 빛이 났으며 작은 주먹코에 피부는 붉은 색이었다. 그는 매우 젊어 보였고 성공적이고 사려 깊은 젊은이의 느긋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스펜더는 인사 할 때 그가 한 말을 기억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이름을 전에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펜더의 윗세대에 속하는 사람과 인터뷰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듯이 아데나워는 아직 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18년부터 1926년까지 영국이 [독일을] 점령했던 시기에 대하여 쉽게 향수에 적을 수 있었다.     

아데나워와 쾰른에서 관련을 맺은 미국 장교들은 어찌 되었든 전체적으로 볼 때 선의를 지니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이었다. 아데나워는 1920년대에 영국 점령 시기에 영국의 클리브 장군이나 줄리앙 피곳과 맺었던 것과 유사한 관계를 쾰른 점령군 사령관인 페터슨 대령과 발전시켜 나갔다. 페터슨은 바이에른 지역을 지휘하기 위하여 쾰른을 떠나게 되자 아데나워의 뢴도르프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점령국 인물과 친분을 맺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독일연방 수상이 되어서도 페터슨이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편지에 ‘진심을 담아’ 답신하였다. 이는 아데나워의 마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를 본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초기에 만난 또 다른 미국 군인인 슈바이쳐 대위는 1948년 2월에 마찬가지로 친절한 편지를 받았다. “여기 라인강 지역에 꽃이 만개할 때 부인과 함께 한번 오시기 바랍니다. 이 무렵의 라인강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좋은 시절이었다고도 할 것이다. [그들이 몸담은] 직무적인 관료주의에 비해 볼 때 이러한 장교들의 인격은 매우 훌륭하였다. 1945년 1월에 아데나워가 한 말을 분석해 보면 점령 초기의 미군정의 행정적 무능력에 대한 깊은 실망에 관한 내용만 읽을 수 있다. “미국인들은 독일인의 정서에 대하여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행정 업무에 관한 한 완전히 어린애들이다. 쾰른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를 차마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6개 정도의 예를 나열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로 한 미국 대위가 순전히 단독 재량으로 임금이 동결된 수공업자 임금을 무조건 35% 인상한 일을 지적하였다. 5월 초에 아데나워는 본에서 온 젊은 슈마허-헬몰트와 미군과 겪은 나쁜 경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중에 자민당(FDP) 소속 시장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형이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런 그가 미국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미국인들은 커다란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러자 아데나워가 대답하였다. “네 맞습니다. 아주 커다란 못된 아이들이죠.”   

  

행정 구조가 매우 유동적이었다. 점령군 행정이나 독일의 행정구조 수립 계획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쾰른에 주둔하는 주요한 장교들 가운데 한 사람도 올바른 전망을 하지 못하였다.     


모든 개별 사안에 대하여 교통시설의 재가동이나 식량이든, 또는 교육 기관이나 작은 경제 활동의 촉진이든, 모든 것과 관련하여 늘 많은 간섭을 받아서 시행정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점점 더 좌절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 심각한 폐해만이라도 막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자면 쾰른에 사는 16세에서 66세까지의 모든 사람을 도시 재건을 위한 강제 노역에 의무적으로 동원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적인 대책을 세우고 미래의 재건 활동을 위한 기초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때때로 아데나워는 이전에 익숙해진 방식으로 행정적인 책무를 수행하거나 차라리 과거의 계획을 다시 시도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자면 주변 지역에 있는 베르기쉬-글라드바흐나 벤스베르크를 쾰른시에 통합하는 계획을 들어 볼 수 있다. 언제나처럼 그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면 자신이 제안한 것의 불가피성을 믿었다. 그는 쾰른이 심하게 파괴되어 주변에서부터 재건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주변 지역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이 기회에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생각을 구현하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다. 곧 쾰른 중앙역을 도심에서 먼 곳으로, 곧 쾰른 대성당과 호헨촐러른 다리로부터 멀리 이전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가 이성적인 계획은 생각할 수도 없는 때였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했다. 여전히 계속 짓밟히고 있는 파괴된 개미 집단을 잘 조직된 곤충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점령군의 행정을 통상적인 행정 기술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술은 잘 기능하는 법체계, 예측할 수 있는 정치 관계, 명백하게 규정된 책임 소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초반 몇 개월 동안의 지속적인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은 아데나워의 장기 분야인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이 결코 보람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때때로 본에 라인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주지사청을 본에 설립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라인헤센과 라인팔츠도 담당 지역으로 둔다는 것이었다. 미군 대령인 존스톤은 브롤탈에 있는 퇴니스슈타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관청을 일종의 큰 규모의 내각처럼 만들어 각 부서의 지도자들을 장관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당황했다. 도대체 누가 이 고위 관리들의 급여를 지급하겠는가? 아데나워는 장문의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이 건의서에서 미군 측에 기존의 행정이 어찌 보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6월 21일에 영국군이 쾰른, 뒤셀도르프, 아헨 행정구역을 넘겨받았다. 라인 남부 지역은 프랑스 점령군 당국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미군들이 물러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7월 초가 되자 벌써 폰 바이쓰는 주말에 아데나워를 방문한 것에 관하여 베른에 보고하였다. “그는 이번에 매우 지쳐 보았습니다. 영국군과의 협력을 전혀 다르게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월 5일이 되자 아데나워는 후회하는 논조로 그 당시 뮌헨에서 일하고 있는 슈바이처 대위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그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제 두 개의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십자가가 분명히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1918년부터 1926년까지의 비교적 좋았던 경험은 되풀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점령 초기에는 아데나워가 다른 지역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서 그곳에서는 사정이 좋을 것으로 예상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뜨이는 점은 전쟁 말기의 러시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측면에서 그가 쾰른 전시장 건물에 있던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몇몇 러시아 포로들과 만난 것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월 초에 전략사무국(OSS)의 한 미군 장교에게, 그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러시아의 커다란 업적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때 아데나워는 특히 대중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에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이 나치와 다른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었다.      


오토 슈마허-헬몰트는 5월 5일 아데나워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말한 것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그의 일기에 담겨있다. [아데나워가] 스탈린이 “독일의 친구”라고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미군보다 점령지에서 더 바른 행동을 하였다고도 말하였다. 이러한 스탈린에 관한 언급은 1945년 5월 9일 스탈린이 선전의 의도로 널리 퍼뜨린 연설에 대한 반응일 수가 없다. 스탈린은 러시아가 “독일을 산산조각내거나 멸망시킬” 계획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 말에는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독일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스탈린이 은밀한 독일 숭배자였다는 배경지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의] 이러한 견해는 그 당시 그가 또한 품었던 처칠이 ‘독일 증오자’라는 확신과 뚜렷하게 대립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아데나워는 러시아인들이 독일에서의 그들의 과업을 잘 수행하고 미군들은 완전히 아무런 준비 없이 업무에 임했다고 믿은 것이다.     


집단수용소에 감금된 경험으로 아데나워의 독일 공산주의에 대한 인상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 언급한 전략사무국 장교는, 공산주의 동조자의 숫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들이 러시아와 분리된 정책을 추구한다면 협력을 할 수 있다는 [아데나워의] 말을 들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대적첩보부대(CIC)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한 것인가? 예를 들어 찬더와 같은 인물과의 만남이 아데나워가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든 것인가?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정전이 되자마자 커다란 관광버스를 부켄발트 집단수용소에 보내어 구금되어 있던 찬더와 다른 쾰른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6월 말에 되면 이러한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는 러시아가 점령 이후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아데나워는 연설에서, 대중이 곧 익숙해지게 된 그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폰 바이쓰 총영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7월 초에 아데나워는 폰 바이쓰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러시아가 베를린을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약탈하여 그곳에 있는 대기업에서 빼앗은 기계와 전문노동자와 기술자를 러시아로 압송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당시 베를린에 고압 전류 산업의 70%, 저압 전류 산업의 80%가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시설의 손실이 독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필연적인 결과로 베를린의 대규모 은행과 대기업은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에 새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비상정책을 지속하였다. ‘중앙위원회’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러시아 점령지역은 분열되었다. 아데나워에게는 러시아 점령지역에서는 통일된 발전이 단 한 번도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들은 소식으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 전체나 일부가 덴마크의 영토로 편입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브레멘을 물자 하역항으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함부르크에서는 도시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러시아에 점령된 독일 지역이 작은 조각으로 분열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의 단기 부채도 문제였다!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가 한 말에 따르면, 전문가들의 추산으로 [단기 부채가] 1조 제국마르크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츠담 회담 한 달 전의 아데나워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부채가 급증할수록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가져올 것에 대한 아데나워의 근심은 더욱 심해졌다.     


아데나워는 이미 미국의 점령 기간에 점령군 당국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맞서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좌파로 기우는 추세가 여러 곳에서 확산되었다. 그가 보기에 독일 사람들은 좌절하고 서방 세력의 점령에 대한 음울한 증오로 가득 찼다. 상황에 따라 그러한 증오는 더욱 강화될 것일 뿐이었다. 그의 확신으로는, 겨울이 오면 참담한 기근이 몰아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결핵이 창궐하고 있었다. 추운 계절에는 전염병의 위험이 더 증가하게 되어 있었다.      


1945년 7월 6일 그가 대니 N.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그리고 장래는 매우 어둡습니다.” 이때 그는 베른에 있는 한스 뢰릭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매우 비관적인 내용을 썼다. “저는 독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이 점점 더 우려됩니다. 러시아는 철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영향 아래에 있는 독일의 [동쪽] 절반의 관리에 [연합군] 중앙 통제 위원회의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내다보는 영국과 미국 측도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독일의 이 지역에서 식량 보급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점령지역의 행정은 매우 커다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저는 현재 이 지역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군정청의 대다수 사람은 악의를 지니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독일에 대한 지식과 행정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남아있는 독일이 유럽에, 특히 중부 유럽에, 이와 더불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매우 비참한 첫 단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하가 관심 있어 하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인데 산업지역에 대한 지원이 통상적으로 10%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0% 가운데 7%p는 프랑스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머지 3%p 만으로는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철도운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용 연료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이번 겨울에 독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 될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기아부종이 벌써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관적인 상황판단을 근거로, 그가 독일의 내부적 조직에 대하여 이 무렵에 시험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소한 [연합국] 국가들의 점령지역별로 최대한 커다란 규모로 구성된 행정적 통합 구조였다. 아데나워는 1945년 3월 28일 전략사무국(OSS) 소속 장교인 저스트 러닝을 초대하여 이에 관련된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남은 지역, 서부 독일(베스트팔렌과 라인란트 지역), 남부 독일로 구성된 연방국을 염두에 두었다. 이 대화에서 그는 자기비판도 하였다. 곧 1923년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문제에서 슈트레세만과 대립하였던 것이 과연 참으로 옳은 판단이었는지를 지난 수년 동안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두 개의 독일이 문제가 되었다. 하나는 본질적으로 로마 [제국] 문화에 영향을 받은 독일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은 독일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프로이센을 이런 식으로 4개의 연방주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버리면 비독일적인 프로이센의 영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라인란트는 독립 국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강력하게 첨언하기를 라인란트가 결코 프랑스의 통제 아래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보다는 차라리 영국이나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한 아데나워의 부인도 마찬가지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곧 프랑스는 기회만 온다면 라인란트와 그 문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짧고, 검증되지 않은 기록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략사무국’(OSS)의 미군들이 아데나워의 미묘한 견해를 밝힌 내용을 정확히 문서로 남겼는지는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45년도에는 자신이 이전에 경험한 정치와 그 이후에 펼친 정치와는 제대로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한 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그 당시 상황은 일주일 단위로 바뀌었다. 그 변화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독일에 있는 그 누구도 정확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보른하임 또한 이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독일의 터무니없는 분열이 결국 미수복지라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일종의 연방국을 조심스럽게 제안하였다. 라인란트-베스트팔렌, 중북부 독일, 바덴-바이에른, 끝으로 독자 생존이 어려운 오스트리아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페터슨은 라인란트, 마인 지역, 루르지역에 도시 재건과 식량 배급과 관련하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아데나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보른하임은 계속 글을 이어갔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아데나워에게 왜 그런 기회를 거부하였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야 나중에 라인란트가 곤경에 처해 독일을 떠났다는 비난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보른하임의 보고서가 좀 더 정확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아데나워가 연방국에 대한 자기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한 점은 같다. 라인란트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에 관한 생각은 두 이야기에서 서로 어긋나고 있다.     


프로이센을 특별히 비판하는 논조는 새로운 것이다. 이러한 논조가 그 지역을 당시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러시아를 신뢰하는 마음을 지녔던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제3제국 시대의 경험이 그의 태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인가? 또는 당시 1945년 직후 서부 독일과 남부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식민주의 독일과 서유럽적이며 로마적인 독일의 깊은 문화적 차이에 관한 생각이 영향을 준 것인가?      


템플러 장군 휘하의 젊은 영국 장교인 노엘 아난은 1945년 12월 초에 뢴도르프로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그는 그 문제에 관한 멋진 대화를 나눈 것을 기억하였다. 아난은 [정치] 무대에서 정치적 끈을 조정할 줄 아는 드믄 참모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문 역사학자였는데 [군대] 동원에서 해제되면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아데나워에게 말했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계속 가르치고 연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영국이 독일 정책에서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줄 수 있습니까?” 아난은 그 노신사가 요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스스로 답을 주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바로 빈회의에서 한심하게도 영국이 프로이센을 프랑스에 맞서 제2의 나폴레옹이 라인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방패로 삼은 일입니다.”     


그렇게 그가 꼭 집어 한 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데나워가 이제 프로이센을 비판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은 여러 발언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아데나워 생각의 주요 근거는 상당히 초기에 지니게 된 러시아에 대한 불신이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과 영국이, 독일에서 벌어지는 러시아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여긴 것도 그 근거가 되었다. 베를린과 프로이센 지역에서 러시아가 사주하는 모든 영향력에 맞서고자 미국과 영국을 부추기기 위하여, 너무나 잘 알려진 이 두 나라의 프로이센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독일이 막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19세기가 시작될 때부터 이어져 온 과정을 검토하고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아데나워도 그러한 어느 정도 전략적인 생각에 맥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공산주의 러시아가 독일의 핵심 지역에 자리를 잡고 서쪽으로 침투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었다.      


1945년 6월부터 아데나워의 모든 입헌정책적 생각들은 러시아의 정책과 앵글로·색슨의 정책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관찰에 비추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분명히 러시아의 강력한 집착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고, 서양 세력에 대해서는 근시안적이고 모순적인 것만을 보았다.      


7월 초에 그는 또 다른 [국가] 구조에 관한 생각을 말하였다. 이번에는 ‘합동통신’*을 통하여 그 생각이 알려졌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1. 통화의 안정. 마르크의 평가 절하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2. “독일 국민에게 어떤 영역이 독일에 남게 될 것인지를 알려야 한다.” 3. “일종의 독일 중앙행정부를 구성하여 연합군의 군정청과 함께 독일을 통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4번째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독립적인 3개의 자유 국가들로 구성된 독일 연방국을 수립하여야 한다. 이 각각의 국가는 독일 서부에 있는 중부 독일, 서부 독일, 남부 독일의 커다란 점령지역과 일치한다. 이 세 자유 국가들은 동일한 화폐와 법률을 사용하고 서로 세관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각각의 국가는 연방정부에서 각각의 국가를 대표하는 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     


* 합동통신[United Press, UP, 역자주-1958년 이후 국제합동통신(UPI)]     


이러한 생각의 윤곽은 포츠담 회담이 개최되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통제위원회 개념을 선취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프랑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성숙한 국가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볼 때 점령지역이 미래의 중요한 정치적 단위가 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러 자리에서 그는 연합군의 점령이 20~25년 동안 유지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폰 바이쓰는 베른에 보고한 내용에서 아데나워가 하노버에 이르는 라인란트 지역을 자생력이 있는 국가 형태로 만들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그렇게 해야만 [독일이]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는 라인란트가 동부 독일과 확고하게 결합되지 않으면 프랑스로 떨어져 나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프랑스가 확실한 제4의 점령 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9월까지 아데나워는 어쩌면 쾰른과 아헨도 프랑스 점령지역에 속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다. 폰 바이쓰 총영사는 바트엠스에 있는 가스통 비요트 장군과 그 휘하의 장교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어뜯는 것이 아데나워라는 사람이었다. 잘 어울리지 못한 영국에 대한 실망이었는가? 새 주인과 조심스러운 유대를 맺어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는가? 단순한 호기심이었는가? 의문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실 그는 이 스위스 외교관이 재촉하자 드골주의자인 가스통 비요트 장군과 만날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가스통 비요트 장군이 영국 점령군을 의식하여 아데나워보다 더 신중했던 것이거나 그가 파리로 가야 할 만큼 매우 중요한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8월 4일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폰 바이쓰의 주선으로 가스통 비요트를 직접 만나려던 계획이나 8월 25일 스위스 총영사가 아데나워와 함께 바트엠스로 가서 그를 만나려던 계획이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측에서는 [독일] 시장이자 겉으로 보기에 지도적인 정치가와 나누는 이 매우 민감한 대화를 영국 통치 지역에서 장군 휘하의 장교들에게 맡기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여겼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1945년 8월부터 10월 초까지 총 여섯 차례 프랑스 장교들과 만났다. 8월 4일에는 가스통 비요트 장군의 참모인 마이외 중령을 만났다. 만난 장소는 폰 바이쓰가 거주하는 바트고데스베르크에 있는 빌라 링스도르프였다. 이는 폰 바이쓰가 가벼운 사적인 식사 초대 형식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8월 25일에도 스위스 총영사의 주선으로 바트엠스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때는 가스통 비요트 장군 측이 접대하였다. 9월 1일에는 구솔 대위를 만났고, 10월 6일에는 프랑스 측의 ‘라인란트-헤센-나사우 군정청 고위 대표’인 구로 중령을 다시 폰 바이쓰의 집에서 만났다. 이외에 아데나워의 스위스 친구는 이틀 연속 이어진 대화에 대하여 보고를 하였다. 아데나워는 9월 중순에 쾨니히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지역 군정청 참모인 한 대위와 대화를 나누었다. 총영사의 보고서가 정확하다면 이 만남은 9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본인이 직접 참석한 이 대화에 관하여 폰 바이쓰는 베른의 외무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야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다. 1945년 9월 9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타자기 종이 한 장에 가득 적힌 긴 비망록을 삽입하였다. 이는 아데나워가 구솔 대위와 대화를 마치고 9월 2일 일요일에 작성한 것으로, 폰 바이쓰가 9월 3일 바트엠스로 갈 때 구솔 대위, 그리고 또한 가스통 비요트 장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 부탁은 이루어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9월 22일 자 보고서에도 또 다른 거의 비슷한 길이의 비망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아데나워가 폰 바이쓰에게 9월 17일 전해준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비망록을 가스통 비요트 장군의 대리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폰 바이쓰의 추측으로는 이 비망록도 라인지역 지방장관인 푹스 박사에 관한 생각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9월 16일 일요일에 아데나워를 만났었다. 이 비망록은 곧 바트엠스로 전달되었다. 프랑스 측의 수신자는 이 두 비망록을 즉시 가스통 비요트 장군에게 속달로 전달하였다. 이 두 비망록의 내용은 아데나워의 유고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접촉의 의도와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것이 없다.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던 두 보고서에 대하여 1986년 공개하도록 조치가 이루어졌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첫째 비망록이다. 이는 바트고데스베르크의 빌라 링스도르프에서 가진 대화에 관하여 구솔 대위에게 전달한 것이다. 비망록의 작성 날짜는 9월 13일로 되어 있다. 또한 둘째 비망록도 흥미 없지 않다. 이 문서는 10월 6일 밤에 이루어진 라인란트-헤센-나사우 지역 군정청 고위 대표인 구로 중령과의 뜻깊은 만남에 관한 기록이다. 이때는 아데나워의 짧은 시장 재임 시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 보고서는 전체적으로 폰 바이쓰의 보고서와 내용이 일치한다. 그러나 비밀에 싸인 과정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을 끌어낼 만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 대화는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이 문서는 쾰른시장이 물러나기 오래전부터 이미 자기 고향 도시의 행정에 관한 것 이상으로 훨씬 폭 넓은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측의 동기는 매우 명료하다. 가스통 비요트 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영국이 점령한 라인란트 지역에서 드골 대통령의 라인 계획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드골은 9월에 가진 인터뷰와 프랑스 점령지역 순회 방문을 통하여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곳곳에서 만난 명사들을 예절을 갖추어 대하였다. 이는 독일의 서쪽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프랑스 친화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드골은 서유럽의 긴밀한 협력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염두에 둔 것은 [사실] 세련된 프랑스 지배 구조라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폰 바이쓰는 자기 소속 본부의 명령 없이 이 모든 일에 관여하였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함께 도모한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뛰어난 정치가로 여기는 아데나워가 모든 면에서 잘 나갈 수 있도록 도우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 자신은 어떠했는가? 당연히 그는 1920년대 중반에 독일·프랑스 화해를 위하여 노력했던 것을 기억하였다. 헤리엇, 브리앙, 그리고 라발의 친구로 ‘프레사’ [전시회]에 온 사람들, 아데나워는 이들 모두와 여러 기회에 쾰른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꽉 막힌 상황에서 솔직하고 사적인 대화를 가스통 비요트 장군과 나눈다는 것이 매력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는 프랑스 대통령인 드골과도 매우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가스통 비요트 장군은 폰 바이쓰에게 독일과 프랑스의 지속적인 갈등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드골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라인란트와 경제적으로 친밀해지는 정책을 추구한 것이다. 매력을 발휘한 아데나워의 부인도 함께했던 드골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아데나워는 드골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다짐하였다. 곧 “아데나워는, 몇 가지 조건이 있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경제 협력에 모든 점에서 동의한다고 한 것이다.” 가스통 비요트 장군 휘하의 최고 참모인 마이외 중령은 이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하였다. 곧 매우 감동하였다고 말하면서, 자기 인생에서 프랑스 사람 가운데 독일·프랑스 관계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만큼이나] 그렇게 명료하고 올바른 태도를 밝힌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사실 이 프랑스 사람의 생각은 아데나워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과 같을 수 있다. “물론 특정한 조건을 전제”로 하면서 말이다.     


프랑스 측 인사는 아데나워의 후의에 기뻐하며 그에게 쾰른대학교 도서관에 약 90만권의 장서를 돌려주고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물품 대부분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쾰른대학교 총장 크롤은 바트엠스로 달려와 이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낚시는 던져졌고 분실된 보화들이 쾰른으로 반환된 것에는 바람직한 파급 효과가 따랐다. 게다가 이는 대화에 대한 바람직한 기념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 점령군 측은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다.     


바트엠스를 방문한 아데나워가 비록 가스통 비요트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쾰른대학교의 재산은 확인하였다. 그러나 여러 상자가 강제로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그 건물을 경비가 감시하였다.      

8월 4일에 개최된 아데나워와 마이외의 대담 이후, 본질적인 의미의 두 번째 정치적 대화는 9월 1일에 이루어졌다. 구솔 대위는 아데나워가 여러 차례 폰 바이쓰를 통하여 가스통 비요트 장군과의 만남을 요청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가 영국 점령지역에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이는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구솔 대위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데나워 선생은 그의 동포와는 많이 다르게 매우 훌륭한 자질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그는 단순한 정치가 이상의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경험은, 신중히 판단해야 하지만, 존경스러운 것이다. 나치 시대에 겪은 고통을 통하여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서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69세이지만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하고 자기 지성과 주도면밀한 생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매우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가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길을 걸어가며 ‘지혜’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소한 그는 그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구솔 대위의 [아데나워에 대한] 긍정적 인상이, 폰 바이쓰가 사전에 전달한 정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닐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곧 특히 쾰른시장에게서 [이미] 1945년 9월 1일에 서부 독일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인물을 발견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구솔 대위에게 중앙당(Zentrum)의 기회주의에 맞서 싸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 기회주의가 중앙당(Zentrum)을 중도주의로 이끌고 프로이센화 정책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였다. 과거 정치적 동지들의 오류와 그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3제국에서 박해받았지만, 그의 많은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외국으로 ‘도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며 그는 인생에서 도달한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비록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잘못을 저지른 그의 동포와 함께 죄의 짐을 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는 라인란트의 주민들이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돕고자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 존엄의 회복,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길로 용감하게 나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현실 문제로 돌아왔다. 쾰른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민중의 요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가오는 겨울에 대하여 커다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구솔 대위이 영국 점령지역에 석탄이 부족하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자 아데나워는 영국이 석탄 공급을 방해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산업 전체를 파괴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그에 반하여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프랑스는 다른 정책을 추구하고 있기에 라인란트 전체가 프랑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면 은혜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데나워가 진심을 털어놓으며 구솔 대위가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냐고 묻자 그는 정확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 프랑스는 라인란트에서 프랑스의 경제를 보완할만한 경제적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라인 경제와 프랑스 경제를 서로 짜 맞추면 이는 프랑스에 이익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정책을 영국과 도모하게 되면 영국 산업계는 그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정책이 여전히 이기주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1945년 루닝과 나눈 대화에서 [아데나워가] 드러냈던 프랑스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데나워는 라인란트를 프랑스로 넘기는 결정이 곧 내려질 것이라고 보아 그때를 대비하여 자신이 할 역할을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그는 영국의 정책을 정말로 불신하여 프랑스를 여기에 끌어들이고자 한 것인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너무 과장하지는 않으면서 구솔 대위에게 프랑스의 지혜로운 점령 정책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양차 대전 사이의 프랑스의 라인란트 정책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정치적 요구는 강력하였지만, 협상과 군사적 안보에서는 약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그 예로써 1936년 3월의 일을 들 수 있다!     

구솔 대위는 연합국인 영국이 이 비판적인 독일인을 의무적으로 보호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 부정적인 판단을 고수하였다. 1945년의 영국인들에게는 1918년의 영국인들이 지녔던 사려와 교육 수준과 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제헌 정책에 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구솔 대위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구솔 대위에게 ‘작은 독일 국가들로 이루어진’ 연방주의에 관한 생각을 설명하였다. 현재 어려움에 부닥친 지역은 라인란트라고도 하였다. 여기에는 라인 북부 지역도 포함되고, 또한 추가로 루르지역, 시거란트, 뭔스터란트의 농경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국가는 경제적 문화적 활동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일 것이었다.   

   

그런데 혹시 프랑스가 공산화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가? 구살 대위는 서둘러 프랑스 공산당이 훌륭한 애국자들이라는 사실을 단언하였다. 게다가 세계의 상황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아데나워는 그에게 커다란 근심거리였던 독일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라인란트에 대하여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을 펼친다면, 친프랑스적인 독립 라인란트와 관련하여 라인 북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였다.    

 

폰 바이쓰 총영사의 보고서에 9월 2일 자 비망록으로 삽입된 글은 그 전날 대화의 메아리와 같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데나워의 핵심 단어들이 등장한다. “경제적 협력과 연계를 통하여 지속적이고 매우 밀접한 문화적 접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협력의 열매가 당연히 당분간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에 유익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열매를 심리적인 이유로 [굳이] 처음부터 라인란트가 맛보지 못하게 할 것도 없습니다.” 이는 [아데나워가] 대화 상대에게 독일 측에도 무엇인가 유익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주지시킨 것이다. “라인란트는 처음부터 근거 있는 희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고 또 이렇게 하여 라인란트의 노력이 라인란트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날에 있었던 구솔 대위와 나눈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근본적으로 좀 더 비유적인 말을 하였다. “젖소에서 젖을 짜내고자 한다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유대가 일단 이루어지게 되면 그 유대를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그가 27년 전에 쾰른시청사의 한자 회의실에서 전개했던 그의 구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시청사는 이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구상은 바로] 라인란트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 북부 지역을 이 영역에 포함하지 않는다면 나쁠 것입니다.” 이 지역이 어떤 형태의 것이 될 것인지, 그 지역의 국법적인 성격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아데나워는 그 영역의 확장에 관해 이야기는 할 줄 알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에서 가장 바람직한 전망은, 이 영역에 라인란트 전체,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경제적으로 라인란트에 속한 모든 산업 지역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곧 가능하다면 뮌스터와 시거란트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미 현재 독일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도가 그려졌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산업지역에 대한 국제적 규정은 경제적인 감시에만 해당하여야 하며 그 산업지역이 이 지역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제적 감시에서 프랑스에 결정적인 발언권이 주어져야 합니다. 프랑스가 여기에 가장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독일·프랑스 경제의 이러한 경제적 접근이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에도 가능할지는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다시 중요한 조건들이 언급되고 있다, 처음부터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의 마음을 배려해야 하는가는 처음부터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바로 독일인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앞으로 프랑스 군대와 미국과 영국 군대를 위한 식량 조달이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느 정도 무절제한 징발도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 배상 문제도 확립된 계획에 따라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라인란트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라인란트의 통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수익 창출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는 전형적인 아데나워의 비망록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해결책을 위한 관심을 일단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 자세한 사항은 앞으로 풀어갈 문제였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대화 상대가 자기 생각에서 아데나워를 확실히 중요한 인물로 고려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게 된다. 화해정책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또한 이 비망록은 그에게 경탄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 쾰른시장이 영국 점령군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데나워는 이미 [그가 짊어져야 할] 프랑스라는 십자가에도 그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예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십자가의 대가만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며칠 뒤에 그는 폰 바이쓰에게 바덴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작은 도시인 오펜하임만 해도 7,000명의 점령군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9월 11일 인터뷰에서 드골이 밝힌 구상과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독일의 상황이 파국적이라고 말하였다. [독일에서 수행할] 계획은 “무엇보다도 독일에서 아직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드골주의자 장교와 나누는 대화가 나중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현재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45년 9월 12일과 13일 쾨니히 장군을 대신하여 바덴바덴에서 온 엘사스 출신의 대위와 나눈 대화에서, 그리고 10월 6일의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는 라인-루르국의 건설과, 여기에 더하여 두 개의 서부 독일 국가의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아데나워의 커다란 걱정거리는 러시아의 정책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러시아의 정책은 독일 동부지역에서 독자적인 길을 가며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새로운 제국의 수립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트엠스와 바덴바덴에서 파견된 특사와 가진 접촉에 관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폰 바이쓰 총영사의 보고서는 폰 바이쓰와 아데나워의 개인적인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결국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9월 26일 폰 바이쓰는 18페이지짜리 건의서를 베른으로 보냈다. 그는 이 건의서에서 독일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자기 구상을 펼쳐 보였다. 그는 ‘라인국’으로 불리는 커다란 나라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헤센, 바덴 북부가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는 통이 크게도 프랑스의 동부 국경이 슈바르츠발트 등성이까지 밀고 들어와야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엘사스 지역이나 바덴 지역이나 똑같이 알레망인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리하여 러시아 점령지역을 제외하고 본다면 독일은 라인국과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이라는 세 개의 느슨한 연대를 이루는 연방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격동의 시대에 따른 예상으로는 독일이 발칸 반도의 국가들처럼 되는 것이 구체적인 현실로 보였다!  아마도 9월 26일 작성한 이 제안서는 폰 바이쓰가 쓴 것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아데나워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뢴도르프에 보존된 유고에는 그저 이 제안서의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구조정책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앞에서 설명한 지역이 국가법 차원에서 나머지 독일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게 하면 미래에 일어날 복잡한 일의 씨앗을 심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가 점령한 독일 땅은 “이전 독일 지역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그 자체적인 발전 과정에 있으며 “라인국”의 건설을 전제로 한다면 서부 독일에 두 개의 작은 국가의 성립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폰 바이쓰는 글을 계속 이어 나갔다. “현재 드러난 대로 러시아가 제국주의적 추세로 나아갈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여기에서 러시아는 그것이 과거의 [원래] 독일이라는 상상을 견지할 것이고, 세 [서부 독일] 국가들, 특히 라인국이 이 독일과의 통일을 추구할 것도 매우 확실합니다. 라인국은 서쪽이 아니라 정확히 동쪽을 향할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 곧 ‘독일이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가능성의 배제, 서유럽의 지도적 세력으로서의 프랑스의 경제적, 정치적 힘의 강화’에는 라인국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과 느슨한 국가법적 연대를 이루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더 나은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체적인 입법권, 자체적인 외교 대표, 그리고 어쩌면 중립국의 요원들로 구성된 국제 경찰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분명히 아데나워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스위스 외무부에 보낸 온전한 건의서와는 달리 “구성된”이라는 단어 앞에 다른 문장으로 끝나고 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 손으로 직접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 미국 그리고 중립국(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이 건의서 발송 나흘 전에 폰 바이쓰는 아데나워와 쾨니히 장군의 특사가 나눈 대화에 관한 9월 22일 자 보고서를 보냈다. 이 대화에 폰 바이쓰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폰 바이쓰에게 그 비망록을 가스통 비요트 장군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제로 전달하였다.  

   

아데나워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이 비망록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대목은 다음에 나오는 부분이다. “루르국, 더 정확히 말해서 라인국의 수립으로 독일의 나머지 지역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은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가 포츠담 결의를 거슬러서 수립한 이 지역 자체의 예비 내각은 러시아가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라인국의 수립으로 남은 지역에서 두 개의 국가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3개 국가들은 영연방과 유사한 느슨한 국제법적 형태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 3개 국가들 모두는 각자의 외교정책을 추구할 수 있다. 특히 각자 재외 대표를 둘 수 있다.”     


아데나워가 썼다고 하는 이 비망록의 둘째 부분은 논란의 소지가 덜 하다. 여기에는 독일의 ‘탈산업화’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이와 관련된 계획이 실현되면 “라인국의 산업은 미국과 영국의 산업에 대하여 더 이상 경쟁력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라인국 수립으로 추구하는 목적, 곧 효율이 높은 라인지역 산업을 통하여 프랑스 경제력 강화가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지역은, 라인국 주민들의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질병의 온상이 될 것이다. 이는 이웃 국가들에 위협이 되고 심리적, 정치적 접근을 어렵게 할 것이다.”    

 

폰 바이쓰는 그가 프랑스 장교와 매우 정치적인 접촉을 한 것에 관한 소식과 이에 관련된 그의 10월 5일자 보고서에 대하여 베른 정치부서의 강력한 질책을 받았다. [폰 바이쓰의] 그러한 행동은 외국에 주재하는 스위스 총영사의 의무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귀하가 이 문제에 관하여 베른의 지시를 받았다는 인상을 주는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하는 의무가 귀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하가 이미 매우 노골적으로 게다가 적극적으로 분리주의적 흐름에 동조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귀하의 활동을 승인하지 않으며, 귀하가 관계 당사자들에게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거나 이 일과 관련하여 어떤 중재도 하지 말도록 긴급하고도 분명하게 권고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자기 부서에서 심하게 질책당한 총영사는 지나치게 아데나워의 생각을 반영했기에 비난받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폰 바이쓰는 “나의 상사의 판단을 제외하고는 나의 행동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9월 22일 자 보고서에서 아데나워의 비망록으로 제출한 서류를 작성한 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50페이지에 달하는 10월 27일 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945년 9월 22일 자 보고서에서 저는 처음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이 보고서 제3면에서 명백히 밝혔습니다.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에서 수립될 3개 국가는 ‘영연방과 유사한 느슨한 국제법적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완충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 3개 국가 사이의 국가법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영연방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표현이 국가법적 관계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는 통상적인 조언을 넘어서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았습니다. 이 국가들에 자체적인 외교사절을 둘 권리를 부여하자고 조언한 것이 부서에서 지적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라인-루르국는 자체적인 경제 질서를 분명히 따를 것입니다. 이에 따라 외교 대표는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러시아의 여러 국가나 대영제국의 연방국들에도 자체적인 외교 대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자기변명을 하는 편지 어디에도 아데나워의 비망록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비망록과 1945년 9월 8일 보고서에 관해서 그는 그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저는 저의 이 보고서 2~3면에서 이 지역에 관한 [쾰른]시장 아데나워 박사의 이전 계획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는 그 대화가 그러한 이전의 정책의 연속에 관한 것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고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 정책은 결코 완충국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추가로 저는 아데나워 박사가 제가 설명해 드린 프랑스 장교와 나눈 대화에서 분리주의의 추구를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나아가 거부하였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장교도 동의한 대로 그는 분리주의가 서유럽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이끄는 데에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폰 바이쓰 총영사의 보고서에 나오는 이 부분은 매우 커다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문서고에서 그 문제가 되는 비망록이 발견되었지만, 특별히 추가된 내용은 없었다. 이 비망록도 폰 바이쓰 총영사가 전달한 아데나워의 메모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를 모든 차원에서 추리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한 해명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아데나워가 기탄없고 활기 넘치는 은밀한 관계를 드골주의자 장교와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데나워에 대한 영국의 깊은  불신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당연히 다른 점령군들의 대표와 그러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분명한 것은 이 대화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후반을 거쳐 쉬망플랜*으로 구체화된 개념에 이르는 아데나워의 유럽 구상에 관한 일종의 상수(常數)를 엿볼 수 있다.     


* 쉬망플랜[Schuman Plan, 역자주 – 로베르 쉬망이 주창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요 자원 공동 관리 계획, 유럽연합(EU)의 수립을 촉발함]     


러시아가 자기 관할 영역에서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고, 이와 동시에 베를린에서 서부 독일 지역을 자기 영향권 아래 두고자 할 것이라는 생각은 서부 독일 지역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구상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프랑스가 추구하는 노선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결국 커다란 라인·루르국의 수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이에 반하여 드골은 프랑스와 인접한 국경 너머에 서로 유대 관계가 거의 없는 작은 국가 단위들이 수립되는 것을 원하였다. 또한 아데나워가 루르지역과 인접한 다른 지역들의 연결과 탈산업 정책의 포기를 주장한 것도 그 당시 프랑스의 구상과는 달랐다.     


어찌 되었든 프랑스 관리가 비밀을 지킨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프랑스 측과 비밀 접촉을 가진 것에 대하여 이후에 오랫동안 많은 추측이 난무했고 그가 드골 장군과 직접 마리아라흐 수도원에서 만났다는 소문까지 났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아무도 모른다. 가스통 비요트 장군은 9월 중순에 파리로 전출되었다. 프랑스 점령지역이 북쪽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예상은 현실화하지 않았다. 아데나워 자신은 1945년 10월 초에 영국이 매우 심각하며 루르지역을 포함한 라인란트의 점령지역을 절대로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프랑스 측의 대화 상대와 의견 교환을 한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나중에 유명해지게 된 10월 5일의 《뉴스 크로니클》과 《미국연합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곧바로 뒤스부르크 시장인 하인리히 바이츠에게 전달한 생각에도 담겨있다.      


그 인터뷰에서 이미 몇 가지 구상이 제시되고, 곧 그 구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바이츠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 인터뷰에서 영국 점령군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독일인들이 요리에 쓸 석탄조차 주지 않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죽고 병들었으며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드골이 자브뤼켄에서 독일인들은 서유럽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 어떤 영국 정치가가 독일인을 서유럽 사람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발언한 적이 있었던가!     

라인-루르국의 수립 계획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이 국가는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은 독일 지역과 유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지역이 서로 분열될 때 소련은 자기가 점령한 지역을 독일제국으로 선포할 것이고 갈라진 지역들은 자동으로 이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과 다시 결합하고자 노력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독일 서부에 3개의 국가가 수립된다면 이 국가들은 서로 국가법적 관계를 맺고 궁극적으로는 연방국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의 경제, 특히 라인-루르국의 경제는 프랑스와 벨기에와 연결시켜서 공동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수립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인터뷰 끝에 가서 기자들은 그러한 경우에 쾰른이 프랑스에 점령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그럴 필요는 없고 말하며 그것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다면 더 높은 목적을 위하여 그도 감수하여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10월 5일 뢴도르프에서 이루어진 이 인터뷰에서 아데나워는 쾰른시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의견을 표명한 것이 되었다. 그다음 날 그는 파면되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인리히 바이츠에게 보낸 10월 31일자 편지에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미래의 그의 외교정책에 일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가 그때까지 대화나 기껏해야 사적인 편지에서 표현했던 내용을 이제 매우 구체적인 구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러시아는 독일의 동부 절반, 폴란드, 발칸 국가들, 그리고 어쩌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일부를 손아귀에 넣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다른 점령국들과의 협력을 점차로 더욱 거부하면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히 자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국가들에서는 이미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경제원칙과 정치원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동유럽에서 러시아 지역과 서유럽의 분리가 현실화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지도가 이런 식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아데나워의 모든 외교정책이 진행되어야 했다. 이로부터 6개월 후에 그는 같은 사안을 좀 더 강경하게 표현하였다. “위험이 커졌습니다. 아시아가 엘베강에 이르렀습니다!”   

  

바이츠에게 보낸 문서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소련이 점령하지 않은 독일 지역은 서유럽에 통합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이 곤경에 빠지면 서유럽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프랑스와 영국도 포함됩니다. 러시아에 점령되지 않은 독일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다시 건강해지도록 만드는 것은 이러한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두 국가가 이끄는 서유럽에도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부 독일,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가 경제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국도 이 경제적 연합에 동참하기로 한다면 바람직한 목표, 곧 ‘서유럽국가들의 연합’에 크게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독일의 국가법적 형태에 대하여도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합리적인 국가법적 형태가 아직 마련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수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중앙집권적인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연방국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했다!  

   

5월 7일의 사건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나자 아데나워가 전후 상황을 탐색하며 자기 입지를 확인하던 단계가 끝났다. 세세한 부분에서 그의 상황판단은 변한 것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기본 노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원칙적으로 서유럽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대한 오래된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상황판단에 대한 기초적인 현실은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냉전이었다. 그리고 그의 외교정책 구상의 핵심 단어는 ‘유럽’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 자기 제한된 쾰른 사람의 역할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그의 생각이 점점 더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파괴된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치계의 정상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아데나워에게 주어질 수도 있는 큰 호의를 영국 측이 베풀지 않는다면 그가 그러한 계획을 수립할 만한 인물이 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실 영국은 그를 [시장] 자리에서 쫓아냈다.


해방군의 파면 조치     


아데나워의 생애에서 영국 측이 그를 면직시킨 배경에 대해서만큼 소문이 많았던 일도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측도 나중에, 고집 센 이 [아데나워라는] 노인과 관련된 특히 1950년대 말 이후의 어려움들이 그들에 대한 그의 원한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스스로 묻곤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만의 술책을 발휘하여 때때로 자기 분노를 드러내며 영국인들이 직접 또는 제삼자를 통하여 그러한 안 좋은 사건을 떠올리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와 같은 사람은 1960년대 초반에 아데나워가 실제로 그 굴욕적인 퇴출에 대한 앙심을 결코 털어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페르드멩게스 자신도 영국인들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려고 이용한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1946년 이후의 아데나워의 영국에 대한 정책을 수년 동안 추적해 보면 실제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충돌을 다른 매우 그럴듯한 동기로도 설명할 수 있다. 트라우마에 따른 복수심을 전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자세히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1950년대까지 유럽의 통합에는, 프랑스만큼이나 영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아데나워의] 지나친 언사들을 추적해 보면 그가 영국에 대해서 만큼이나 프랑스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연히 그를 시장에서 쫓아낸 공수여단장이 그 공로로 별과 견장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독일이 수여하는 최고의] 연방공로십자훈장을 받을만했다는 사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1962년 그는 미국 방송국 CBS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귀하는 쾰른시장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독일연방 수상이 될 수 없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결코 아닙니다. … 그랬다면 그들은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나쁠 수도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쾰른시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몇 주도 안 되어 그는 하인리히 바이츠에게 쓴 편지에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내가 당한 일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건에 대하여 아데나워 자신이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가 있다. 여단장인 바라클로프는 세련되지 못한 처신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 당시 영국과 독일 관계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쾰른시 주둔군 사령관 대리였고 후에 해외 특파원이 된 콜린 라슨은 1980년에, 아데나워가 한 이야기가 모두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영국이 지명한 시의원들의 시의회 개원 때부터 아데나워와 쾰른시 군정 대표인 J. 앨런 프리오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의회에서는 다양한 정치 노선들이 드러났다. 프리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도시행정에 대한 불만 사항을 접수하고 있습니다. 

    

가) 도시행정이 편파적으로 이루어져서 현실적인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나) 이전의 나치주의자들이 다시 등용되고 파시스트에 맞섰던 이들은 별 볼 일 없는 자리에 배치되었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긴급 조치가 조속히 마련되고 실시되어야 했다. 곧 주택 건설과 긴급 수리, 집단 급식과 연료 보급, 보건사업 실시였다.      


아마도 프리오는 고위층에서 이 시장을 대단히 불만스럽게 여긴다는 소식을 듣고 냉정함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의 아데나워의 업적에 대한 칭찬의 말이 전혀 없었다. 아데나워가 거의 6개월 동안 시장으로 일을 했음에도 말이다.     


아데나워는 그의 답변에서 이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령군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었다. 사실 그는  [독일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책임이 있는 “괘씸한 이들”에 대하여 심한 말들을 하면서 1945년 3월 이후부터는 자주 1945년 히틀러의 파괴 명령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그 명령은 특히 사악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명령은 전쟁 상대방에 대한 복수와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독일 민족을 더 깊은 고통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적 책임이나 집단적 수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귀하와 저는 이러한 고통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이 기회에 아데나워가 묘사한 쾰른 상황의 모습은 영국을 겨냥한 교묘하게 위장한 바늘이 들어 있었다. “라인강 오른편에 서 있으면, 폐허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면, 창백하고 지쳐 고통으로 여위고 그들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것들을 질질 끌며 오는 수많은 귀향자 사이에 있으면, 강물 속에서 한때 그토록 아름다웠던 우리 다리의 으스스한 폐허를 바라보면, 그리고 저 건너에서, 라인강 왼편으로 널린 한때 행복한 사람들이 살았던 집들이 폐허의 바다로 변한 것을 보면, 거의 천년 가까이 서 있던 건물들과 교회들을 보면, 무엇보다도 홀로 우뚝 서 있는 대성당, 우리의 대성당이 더러워지고 일부 파괴된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쾰른 대성당이 “더러워지고 일부 파괴된 것이다.” 누가 대성당을 더럽혔는가?     


이 연설은 반항적인 자기주장의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어려움에 맞서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대성당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첨탑들은 굳건하게 하늘 높은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몸을 숙이면서, 깊이 숙이면서, 그러나 여러분, 결코 굽히지 않고 말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아데나워와 영국 측은 날카롭게 대립하였었다. 영국은 그린벨트를, 바로 그가 만든 그린벨트 안의 나무들을 겨울용 장작으로 사용하고자 다 베어버리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그 대신에 영국이 압수한 석탄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어서 충분히 공급해 주라고 요구하였다.     


노르트라인지역의 군 통수권자인 존 바라클로프 여단장은 아데나워가 시장직을 떠나기 사흘 전 쾰른에 나타나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갈 것을 요청하였다. “쾰른은 영구 점령지역 안에서 가장 정리가 안 된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 지휘관은 오래 전부터 아데나워를 채근하여 왔다. 그러나 시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정치적 음모나 꾸미고 모두에게 여전히 뻔뻔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도시 담당 사령관인 앨런 프리오는 정치적 본능을 지닌 성실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시에는 사업가였다. 폭격이 있었을 때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 바라클로프가 쾰른을 방문한 지 사흘이 되던 날 그의 부관인 라슨은 뒤셀도르프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아데나워를 즉시 링슈트라쎄에 있는 본부로 데려오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아데나워는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헌병들이 그를 쫒아갔다. 그들은 아데나워가 애도를 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슐리부쉬 소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쾰른으로 소환되었다. 그 사이 뒤셀도르프에서 온 바라클로프도 도착하였다. 그러고는 영화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바라클로프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빨간 머리의 라슨 대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너무 성급한 조치라고 경고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왼쪽에는 유명한 농부 집안 출신인 캐링턴 대령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통역관이 서 있었다.     


자신을 서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데나워는 의자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라클로프는 간단히 말했다. “서 계세요!” 그러고 나서 해임서가 낭독되었다. 이 서류에는 12개 조항이 들어 있었다. 질책의 내용은 건물들의 원상회복 미비, 잔해 처리의 미비, 월동 준비의 미비였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은 바라클로프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저의 판단에는 귀하가 쾰른시민을 위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파면, 도시 출입 금지, 게다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종류 활동의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이 조처의 수용은 서명으로 확인되었다. 임시 시장직은 빌리 수트가 수행하게 되었다. 그가 아데나워와 친척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여단장은 분명히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데나워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여민 채로 그의 얼굴 근육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라클로프는 해임서를 책상 위로 밀어 넘겼고 아데나워는 오른손으로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서류에 서명하였다. 그가 들은 것에 관해 할 말이 있냐는 질문에 아데나워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방을 나갔다.     


처음부터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정치적 음모가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아데나워는 파면된 날 밤에 구로 중령에게, 그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기민당(CDU)의 등장을 막으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사민당(SPD)에도 의심이 가는 인물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의 파면 뒤에는 한 독일 사람의 음모가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는 현재 영국이 주는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는 나치친위대 국가보안국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사실 과거 사민당(SPD) 소속 그의 정적이었던 로베르트 괴링거가 이미 7월에 영국 측에 넘긴 서류가 있었다. 그 서류를 보면, 사민당(SPD)과 공산주의자인 노동자 계층은 “아데나워, 수트, 슈베링이 쾰른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수행하는 정책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과거 중앙당(Zentrum) 소속 도당(徒黨)들이 가톨릭 재단 학교를 다시 설립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6월 28일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보내는 건의서를 미군정청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 서류에는 나치의 근절을 위한 엄격한 규정들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를 검토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나와 있다.     


아데나워는 이 편지가 그의 파면에 작용하였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에 요약해서 담았다. 영국 측의 문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괴를링거의 비판은 그 당시 점령군정청에서 정치적 문제를 담당하던 윌리엄 스트랭의 보고서에 실제로 기록되었다.     


1945년 8월 초부터 런던에서 노동당이 집권하였다. 새로 들어선 정부와 그에 따른 점령군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점령 직후에 보수적인 성직자들의 추천으로 여기저기에 사람들을 임명하였으나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정치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베를린의 통제위원회와 영국 지역 군정 본부가 있는 민덴에는 노동당 의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들은 당연히 ‘진보’ 세력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라고 현지의 장교들과 정치적 고문들을 다그쳤다.     


9월 중순에는 뒤셀도르프의 시장인 빌헬름 퓔렌바흐가 물러나고 사민당(SPD)의 발터 콜프가 들어섰다. 그는 나중에 프랑크푸르트 시장도 역임하였다. 10월 2일에는 지방장관이었던 푹스가 물러났다. 이와 더불어 영국 측이 이제 모든 요직을 사민당(SPD) 인물로 채우려고 한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는 소문에 불과하였다. 영국 측은 푹스의 후임으로 과거 아데나워의 정적이었던 뒤셀도르프의 로베르트 레어를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독일국가인민당(DNVP) 소속으로 나치당을 반대한 인물로 확인되었다.      


영국군 점령본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톨릭 정치가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영국 노동당은 그들을 반동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분명히 본부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바라클로프는 아마도 단독적으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원격 조정의 단서는 지금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원격 조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황에도 맞지 않는다. 그 당시 후계자가 전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눈에 뜨이는 점은 베빈의 문서에 들어 있는 ‘독일’ 항목의 4개 문서가 1945년 10월초부터 2049년까지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9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영국 측은 헤르만 퓐더를 새 쾰른시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또한 중앙당(Zentrum) 출신이기에 아데나워와 여러모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아데나워가 전후 쾰른시장으로 재임한 시기는 나중에 그가 그 업무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본다면 아데나워가 스스로 물러나는 가운데 커다란 잡음이 일어날 것이 분명히 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8월에 자기 정치적 미래를 기민당(CDU)의 전신인 기독교민주당(CDP)과 함께할 것을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기민당(CDU)은 그 당시 전국에 조직을 만드느라 분주하였고 쾰른은 그 중심지에 속하였다. 그 당시의 서신, 특히 드골주의자인 장교와의 접촉이 보여주듯이 아데나워는 쾰른시장에서 파면되기 이전에 이미 모든 면에서 쾰른을 넘어서 자기 입지를 구축하려는 뜻이 있었다. 요란한 파면 사건 직후 바트엠스에 주둔하는 프랑스 장교와 다시 한번 접촉하고자 한 아데나워를 만난 폰 바이쓰 총영사는 10월 13일 스위스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할 줄 알았다. “그러한 조치가 아데나워 씨에게 타격을 입혔는지는 몰라도 … 제가 보기에 그날 그의 기분은 드물게 좋아보였습니다. 그는 그해 겨울에 어떤 어려운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로 중령의 보고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는 아데나워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저는 시장에서 파면되었다고 해서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제가 화가 나는 것은 저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조치입니다. 이러한 금지 조처는 개인을 넘어서서 기독교민주당(CDP)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민주당(CDP) 대변인입니다!”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파면은 그에게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었다. 보란 듯이 굴욕적으로 당한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다운 자존심이 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더구나 파면의 이유가 무능과 직무 유기라는 것이 그를 특히 기분 나쁘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그에게 정치적으로도 타격을 입힐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1933년에 체험했던 것이 되풀이되었다. 그가 쾰른을 떠날 때 아무도 배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여비서만이 분기탱천하여 바라클로프에게 감동적인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아데나워가 쉴 틈 없이 임무에 충실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쾰른에 주둔하는 영국군들은 그 비서의 번역 솜씨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라클로프는 그 비서도 마찬가지로 파면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여러 사람이 보낸 위로의 편지를 받았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슬픔과 잔해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무를 계속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마음이 따르지 않습니다. … 그럼에도 저는 영국이 공정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귀하에게도, 바로 귀하에게도 정의의 날이 다시 찾아오리라고 확신합니다.”   

  

특히 아데나워에게 타격이 큰 것은 쾰른시 출입 금지조치였다. 브라우바일러에 구금 된 때 이후로 구시 아데나워는 골수염에 시달렸다. 이는 백혈구 생산이 억제되어 몸이 감염을 막는 물질을 더 이상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되는 병이었다. 그의 남편이 파면될 때 그는 호헨린트 병원의 울렌부르크 박사의 병실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프리오와 라슨은 아데나워가 아내를 방문할 수 있는 허가증을 몰래 발행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앞으로의 인생에 가장 막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 조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파면된 지 이틀만에 군정청에 정확한 이유를 알려 주라고 요청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일련의 언론인들과 정치가들에게 자신이 참으로 잘못이 없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당연히 그는 10월 5일의 유명한 인터뷰가 거의 확실히 영국군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기분 나쁜 것은 프랑스 장교와 잦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누설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 일인 것처럼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연합군의 점령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기자들과 정치가들이 자주 뢴도르프와 쾰른으로 저를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질문에 대한 저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미래 모습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대화가 정치활동 금지 조치에 포함되는 것으로 앞으로 제가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오지 않았다.     

쾰른의 군정청 지도자들인 프리오와 라슨과 그들의 힘이 넘치는 여단장 사이에는 결국 격렬한 갈등이 벌어졌다. 런던에서 프리오에게 질문이 빗발쳤다. 라슨의 말에 따르면 프리오는 그의 마지막 월간 보고서에서 그가 만나본 모든 정치가 가운데 아데나워가 유일하게 전후 첫 독일연방 수상이 될 자질을 갖춘 인물로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확실히 멀리 내다볼 줄 아는 탁월한 지혜를 지닌 이 장교는 라슨과 함께 에센에 있는 화려한 빌라 휘겔로 차를 몰고 갔다. 여기에서 바라클로프가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프리오는 자기 상관을 멍청이라고 하였다. 그가 히틀러 이전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가를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게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확언으로 그의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은 이 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프리오는 즉시 직위에서 해임되고 진급에서 제외되었으며 전시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사태가 거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바라클로프는, 전능한 제랄드 템플러 장군이 자기 실기(失機)를 잘못으로 여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중요한 사람이 뢴도르프를 방문하였다. 그는 마이클 토마스라고 하는 젊은 영국 장교였다. 그러나 그의 원래 이름은 울리히 홀랜더로 베를린의 문화계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은 ‘라인하르트 뷰넨’의 감독이며 문화비평가였다. 그의 모친은 빈 출신이었다. 제3제국의 반유태주의로 독일에 더 이상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던 1938년에 토마스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베를린에서의 달콤했던 예술가의 삶을 뒤로하고 먼저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폴란드 사단에 배치되어 독일 공격에 함께하여 독일에 진주한 다음 이제는 템플러 장군의 정보 담당관으로 일하면서 독일의 중요 인물들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독일을 잘 아는 교포들은 그들의 상관을 돕는 차원에서 폐허가 된 독일 곳곳에서 풀이 다시 자라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연고로 그가 10월 10일에 뢴도르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의 아들 파울은 군복 입은 사람을 보고는 놀라서 집으로 돌아가 자기가 본 것에 대하여 아버지의 설명을 들었다. 아데나워는 다시 완전히 자신에게 도취되었다. “우리의 경우에도 공수부대 장군이 특별히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란다.” ‘외무부’의 지침이 온 것이었다는 것인가? 아데나워가 몰래 드골 장군과 만난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그의 양심의 가책이 발동했다! 그는 자기 영국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영국의 신사 정신이 분명히 쇠락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탄식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보세요. 저는 이제 늙었습니다. 저는 전혀 정치적 야망이 없습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주장하였다. “아데나워 박사님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실제로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영국 장교복을 입은 이 베를린 출신 사람이 맘에 들었다. 그 이후에도 아데나워는 이 사람과 즐겨 대화를 나누고, 그가 특정한 일로 비공식적으로 윗선에 줄을 대고 싶을 때마다 자주 “친애하는 귀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 아데나워에게 접근한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이 이 관계를 주선하였다. 언어의 재주가 없는 아데나워에게도 점령군 행정의 내부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막 독일연방 수상으로 오르는 길에 들어선 아데나워에게 그런 인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이민자들은 대화에서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을 모두 이해하기에 그들과의 대화는, 힘들게 통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대화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그에게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영국인 한 사람을 더 알게 되었다. 뢴도르프에 나타난 또 다른 영국인은 27세의 노엘 G. 아난 중령이었다. 제대하고 몇 년이 지나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로 독일연방 수상의 방문을 맞이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런던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매우 존경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제 그는 아직 젊은 장교로서 정보 업무를 담당하며 통제위원회 정치부에서 ‘키트’로 불리는 크리스토퍼 스틸 옆에서 일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스틸은 앞으로 아데나워 근처에 자주 나타나게 될 또 한 사람의 영국인으로 클리브 경의 사위였다. 그는 1949년 고등판무관 대리로 임명되었으며 1957년부터 1963년까지 본 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하였다. 아난과 스틸은 1945년 가을 베를린의 통제위원회에서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점령군청에 있는 적지 않은 영국인들에 속하였다. 사람들은 러시아와 협력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과의 단절을 예감하고 갈등이 벌어지는 경우를 예상하여 믿을 만한 독일 정치가들을 찾고 있었다.     


아난은 모든 행동 가짐에서 아데나워의 마음에 쏙 든 영국인이었다. 그는 예절을 지키며 게다가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데나워와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하자, 아데나워는 그의 전형적인 대화 수법을 발휘하여 그렇게 할 수 없어 유감이라고 하면서도 그에게 웅켈까지 차로 같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웅켈은 프랑스 점령지역이 시작되는 도시였다. 그곳에서만 비로소 그가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영국 점령지역에서는 전쟁 법정에 서게 될 위험 때문에 모든 정치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난은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놀란척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영국 측에서 그의 정치적 역할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또한 아난이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곧 아데나워에 관하여 매우 오래전 라인란트를 점령하던 시절에 나온 정보가 있는데, 이에 따르자면 그 당시 아데나워가 영국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데 어찌된 일이야고 물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를 강력히 반박하였다. 그러면서도 다시 장광설을 늘어놓더니 영국을 유럽 국가로 여기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힘들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지난 세기의 역사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미 한 말을 되풀이 하였다. 곧 프로이센이 라인지역의 수호를 목적으로 1815년 라인란트로 진출하도록 한 영국 정책은 실패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통제위원회에서의 영국의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인가? 곧 1915년 이후의 독일 역사에 대하여 오랜 세월 자라난 회의를 표현한 것, 이 시기에 아데나워가 한 다른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프로이센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 것인가?     


확실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데나워가 여러 대화 상대들에게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의 반프로이센적인 상투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당시 베를린과 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을 정치적 보루로 삼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불신을 간접적으로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가볍게 간간이 던진 말의 진짜 무게는 종종 측정하기 어렵다. 외국인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아데나워는 말을 너무 많이 했고 그 말들이 흔히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아난은 이 대화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키트’ 스틸과 더불어 그는 이제 아데나워의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데나워가 쾰른 행정구역에서는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지방 주둔군 사령관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지나치게 성급하게 그의 행동에 맞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호전으로 아데나워는 영국 점령지역 기민당(CDU)의 지도자들에 관한 결정이 내려지는 중요한 때 때맞추어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전략을 꾸미게 되었다. 여러 정치가가 혼자, 또는 두셋이 모여 [아데나워가 있는] 이른바 ‘라인지역의 오버잘츠베르크’*를 방문하였다. 이는 나중에 기민당(CDU) 소속으로 [영국 군정 아래에 있던] 뒤셀도르프의 고위시정관리자가 된 발터 헨젤(Walter Hensel)이 비꼬는 투로 한 표현이다.     


* ‘라인지역의 오버잘츠베르크’[rheinische Obersalzberg, 역자주 – 히틀러의 고향 마을 이름으로 풍자한 것]     


12월 중순이 되자 정치활동 금지 조치가 모두 해제되었다. 1945년 12월 7일 아데나워는 뒤셀도르프로 긴급 초대되었다. 여기에서 아난 중령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 유명한 정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였다. 의도는 자명했다. 영국이 파면된 전임 쾰른시장에게 다시 그들의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제 바라클로프가 떫은 사과를 베어 물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는 8일 후에 아데나워에게 뒤셀도르프의 슈탈호프로 초대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면서 ‘매우 정중한 형식으로’ 아데나워에 대한 모든 금지 조치, 제약, 제한 조치를 공식적으로 철회한다고 전하였다.   

  

이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기민당(CDU) 설립 과정이 이른바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기민당(CDU)의 첫 ‘전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윌리엄 아난의 초대로 아데나워가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아데나워의 정치적 해금 소식은 [독일 서부] 세 곳의 연합군 점령지역에서 그곳에 모인 기민당(CDU)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이와 동시에 기민당(CDU)의 영향력 있는 조직의 대표들은 라인지역 기민당(CDU)의 지도자들을 교체하는 일과 영국 점령지역에 기민당(CDU) 위원회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모았다. 아데나워 문제에 깊이 관여한 일로 자기 부서에서 크게 비판받았던 폰 바이쓰 총영사는 이제 12월 28일 거의 승자가 된 듯이 베른에 보고서를 보냈다. “아데나워가 영국 점령지역 전체 안에서 기민당(CDU)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 아데나워 박사는 현재 아무런 새로운 직책이 없지만 이 좁은 지역을 훨씬 넘어서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겨우 한 달이 지난 1946년 1월 22-23일에 아데나워는 헤르포르트에서 영국 점령지역 안의 기민당(CDU) 운영위원회 임시 의장에 당선되었다. 2월 5일 그는 또한 라인지역 기민당(CDU) 지방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그는 지위가 지역 회의에서 추인되었다. 이제부터 대중은 전혀 새로운 아데나워를 알게 된다. 곧 그는 정당지도자가 된 것이다.     


아데나워의 권력 쟁취    

 

독일의 여론에서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독일연방 수상으로서의 이미지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매우 깊고 지속적이어서 수십 년 동안 [유일한] 독일연방 수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후임자들은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1933년 이전까지 그는 라인란트 지역에서만 돋보이는 인물로 알려졌었다. 제국시절에 정치적인 정보에 밝은 사람들만 그를 뛰어난 시장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1945년 이후에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1946년 3월부터 제헌위원회가 소집된 1948년 9월까지 그는 영국 점령지역 안의 기민당(CDU) 대표였다. 그 말고도 당지도자들과 주지사들이 있었고 기민당(CDU)과 중앙당(Zentrum)에는 이미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십여 명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독일이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1945년 기민당(CDU), 기독교민주당(CDP), 기사당(CSU)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정당 조직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초기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던 집단이 하나로 뭉친 당이 될 것인가? 어떤 이념이 궁극적으로 관철될 것인가? 어느 지역과 인물이 중심이 될 것인가? 1945년, 그리고 1946년과 1947년에도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1949년 총선 때까지도 국내외의 어떤 사람도 새로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의 연합정당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는 대연정 안의 4중주단의 하나의 악기인 제1 바이올린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정부라는 교향악단에서 야당 의석의 일원이 되어 야유 소리를 낼 것인가? 기민당(CDU)이 1949년부터 여당으로서 아데나워의 당이 된다는 것은 본의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는 날카로운 관찰자의 눈에도 제헌위원회 시기에는 그렇게 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그 위원회의 의장이 국내외 기자들의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1949년까지도 아데나워는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영국 점령지역에서는 1946년부터 최소한 기민당(CDU)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나 그 지지자들에게는 아데나워가 유명 인물이었다. 그들은 선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 아데나워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1946년 이후 점령 독일제국에서 활동해온 모든 고위 정치가는 그를 신중하게 대하여야 할 인물로 여겼다.   

  

그러나 독일연방 수상 선거가 끝난 다음에 대부분의 사람은 눈을 비비면서 뒤늦게 놀라 깨닫게 되었다. 곧 연금을 받을 나이에 들어선 전임 시장이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엄청난 역동성과 행운에 힘입어 전후 독일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준비를 쉼 없이 했던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런저런 해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아데나워가 쾰른에서 기독교민주당을 수립할 때부터 기민당(CDU) 안에서 ‘주도 세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대적하여 재미를 보지 못한 경쟁자들이나 그들에게 정보를 얻은 언론인들이나 연구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데나워는 냉정한 마키아벨리주의자라는 것이었다. 곧 그는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는 매복하고 있다가 당내의 경쟁자들을 한 사람씩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관계자가 남긴 문서로 마련된 자료에 접근할 수 있고 전후 관계에 관한 다차원적인 연구가 이미 충분히 이루어져서 아데나워가 정상에 이른 길과 기민당(CDU)의 성공에 미친 그의 중요성에 대한 그림을 어느 정도 믿을 만하게 그려볼 수 있다.     


아데나워가 전후의 정치적인 재건에 대하여 처음 이야기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전략사무국(OSS) 요원인 저스트 루닝의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루어케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히틀러가 제국 수상의 관저에서 베를린의 방어를 지휘하고 있었던 1945년 3월 28일에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나치주의자들이 패전에 당면하여 어떤 광기를 보일 수 있었는지를 사람들이 이미 목격하였던 터였다. 전후 독일의 정치 생활이 어떠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조심스럽게 답변하였다. 그의 생각에 독일에서는 전후 정치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연합군 군정청에 [독일의] 모든 정치활동을 억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생각에 모든 독일 사람은 정치 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이전에 재교육이 필요하였다. 나치가 그들을 중독 시켰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원래 있던 정당들을 통하여 정치 생활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그의 생각으로는, 정당들을 통합하여 그 숫자를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앙당(Zentrum)의 미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공산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그다음 몇 주 동안 아데나워는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정치 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관찰하고 더 나아가 영향력을 미치는 데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 낮에는 임시 행정사무실에서 그리고 밤에는 숙소로 이용하는 호헨린트 병원에서 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그를 찾았다. 그는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있던 본과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공식적으로 방문을 허락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가서 미국과 영국 측의 묵인을 받았다. 어찌 되었든 초기에 그는 쾰른 지역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미국 측이 5월 초에 주지사와 행정장관을 각각 1명씩 임명하였다. 그러나 1920년과 1930년대 초반을 기억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은 그 당시 쾰른시장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라고 달라지겠는가?   

그래서 새 정당의 설립을 구상하는 세력은 가장 먼저 그를 탐색하고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갈라지고 사람들이 무관심한 라인란트에서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이외에 3개의 정치적 구심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일단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1945년 기민당(CDU)의 잠정적 강령에 나온 ‘기독교와 서양의 생활가치’에 기초하여 교파를 초월하는 정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 세력은 처음부터 둘째 세력과 충돌하였다. 이 둘째 세력은 과거 중앙당(Zentrum)의 깃발 아래 다시 모여 사실상 교회를 중심으로 삼은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조직으로서의 정당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더해 셋째 세력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들로 전후 초기에 교파적 장벽을 없애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민주당(CDP)의 설립을 이끌어낸 첫 토론회는 아데나워가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까운 쾨니히스빈터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레오 슈베링이 참석하였다. 그는 수려하고 늘 약간 구부정한 모습을 한 사람으로 아데나워와 거의 동년배인 1883년생이었다. 직업적으로 그는 언어학 박사로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남는 시간을 모두 중앙당(Zentrum)과 비정치적인 영역에 있는 가톨릭단체를 위한 봉사에 썼다. 이미 1912년에 그는 독일 가톨릭 평신도연합회 쾰른 지부장을 맡았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그는 프로이센에서 중앙당(Zentrum) 의원을 지냈다. 1934년 나치는 그의 교직을 박탈하였다. 1944년 그는 나치 집단수용소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그가 나중에 기민당(CDU)이 지하묘에서 솟아오른 것임을 강조한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쾰른이나 베를린의 기민당(CDU) 창당 세대는 그를 박해를 이겨내고 순교자들의 희생으로써 자기 정치적 위상을 깨치게 된 초대 그리스도인에 즐겨 비유하였다. 사실 기민당(CDU)은 누구보다도 먼저 가톨릭 노동자운동 출신으로 일련의 인상 깊은, 피의 증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쾨니히스빈터에서 기민당(CDU)의 씨앗이 된 둘째 인물은 빌헬름 바르쉬였다. 원래 법관이었던 그는 1933년 파면되었다. 슈베링과 바르쉬는 1945년 4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일련의 깊은 대화를 나눈 다음 중앙당(Zentrum)이 과거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이마르 공화국 때 가톨릭 정당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자가 아닌 유권자들의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 드러났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쾰른 중앙당(Zentrum)에서 이러한 현상을 이미 한 차례 발견하였다. 그러나 ‘[자르란트] 기독교인민당’(CVP)과 함께하려던 시도가 교파주의 전통으로 좌절되었다. 또한 1933년 초에 있었던 아름답지 못한 일들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중앙당(Zentrum)과 다시 유대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도록 하였다. 새로운 중앙당(Zentrum)이 1933년 3월 22일에 히틀러에게 모든 독재 권력을 부여하는 전권위임법에 찬성한 과거의 중앙당(Zentrum) 전통에 서 있다면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4월 초에 슈베링이 뢴도르프로 아데나워를 찾아와 그가 초교파적인 정당 수립 계획에 동의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차갑게 대하였다. 악수도 없었고 다시 만난 기쁨도 없었다. 슈베링은 [아데나워의] 매우 어두운 미래를 진단하는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아데나워는 정치적으로 나서보려는 의사를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주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얼마 안 되어 곧 드러났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슈베링이 정치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 프로이센 의회의 시시한 의원이었던 자가 아데나워와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과 맞먹으려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대화를 마친 후에 슈베링은 아데나워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는 중앙당(Zentrum)을 배제할 수 없는 정당 형태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한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연합군 측은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잘되기를 빈다고 말하면서도 이 일이 잘못 나가고 있으며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어쩌면 그는 내 생각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5월 중순에 슈베링은 쾰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한주일 내내 논의가 이어졌다. 이 회의에는 중앙당(Zentrum) 청년 조직인 빈트호르스트연맹과 가톨릭 노동자 운동 출신 사람들이 특히 전면에 나섰다. 쾰른의 콜핑하우스에서 열린 6월 17일 제1차 총회에서는 18명의 중앙당(Zentrum) 전임 당원들이 참석하였는데 일종의 사전 결의가 내려졌다. “중앙당(Zentrum)과 함께 앞으로 나가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새로운 기독교 정당이 중앙당(Zentrum)에 속했던 인물들만이 아니라 개신교인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다만 개신교 인사들을 일단 찾아서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창립 절차는 분명히 영국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지만 강력히 추진하여 과거의 중앙당(Zentrum)이 부활하기 전에 완료된 사안이 되도록 해야 했다. 새로 창립된 정당 이름은 기독교민주당(CDP)이었다. 정당 강령에 대해서는 발버베르크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한동안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정강에 관한 회의를 주재하였다. 수도회 관구장인 라우렌티우스 짐머는 그 수도회에서 6월 23일 첫 회의를 개회하였다. 그 건물은 쾰른에서 약 15k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 개신교 인사들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요하네스 알버스도 곧 합류하였다. 나중에 그는 기민당(CDU)의 여러 사회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짐머는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1932년부터 그는 독일 도미니코회의 관구장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치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때부터 나치에 강력하게 대립하였던 인물이다. 이리하여 그는 ‘외환 재판’과 연관하여 먼저 클링겔퓌츠 교도소에, 그러고 나서는 올덴스부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1936년 1월에 석방되었다. 여전히 올곧은 판사가 독일에 있었던 것이다. 1941년부터 그는 베를린의 저항 단체와 유대를 맺었다. 7월 20일 이후 그는 지명수배되었지만, 영국군의 올덴부르그 지역에서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한 사람으로 에버하르트 벨티 수사가 있었다. 그는 이 회의를 체계적인 논의로써 이끌었다.    

 

이른바 그 ‘하얀 추기경’은 전후 독일의 정책을 확실히 좌파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이때부터 1947년까지 모든 정강에 관한 회의에서 이 개념을 주장하고 결국 정강 회의의 제2차 회기에 새로운 정당을 ‘기사당’(CSU)으로 지칭하자는 제안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 대부분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반대한 것이다. 짐머는 어찌 되었든 화가 나서 정강위원회를 박차고 나가면서 그의 수도원에서 더 이상 회의를 개최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사람들은 곧 그의 활동 영역이 단순히 기독교 민주당(CDP)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 아돌프 그리메, 로베르트 괴를링거는 중앙당(Zentrum)에서 사회주의적 계열에 있던 칼 슈피커와 함께 발버베르크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런데 짐머는 좌파 그리스도인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힘을 합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보려했으나 실패하였다.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문제였다. 결국 이 문제로 모든 것이 좌절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이때 그는 두 가지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나는 새로운 기독교 정당의 정강-정책적 방향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전후 독일의 정당체계에서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슈마허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민주사회주의나 새로 설립된 중앙당(Zentrum)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전선을 형성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정강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자 창당 발기인들은 1945년 7월 말에 다시 한번 그를 찾아와 창당에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쾰른 행정부가 임시로 거주하고 있던 알리안츠 생명보험회사 건물의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중앙당(Zentrum)’이라는 당명 자체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좀 더 기다려보고자 하였다. 다만 조만간 계획하고 있는 영국 지역 동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특히 개신교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 볼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당명에 ‘기독교 민주’보다 ‘기독교 사회’가 들어가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다.     


나중에 진행된 것에서 밝혀진 대로 아데나워는 그러한 정당 설립에 관한 생각 자체보다는 창당 발기인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그들은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능력이 없는 이류나 삼류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더 싫었던 점은 그들이 교사이며 오랫동안 라인란트 중앙당(Zentrum)이 사무총장이었던 빌헬름 하마허와 처음부터 관계를 끊고자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하마허는 과거 중앙당(Zentrum)을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두 개의 기독교 정당이 수립되어 동일한 유권자를 상대로 하고 게다가 성직자들의 지지를 두고 싸우게 될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곧 중앙당(Zentrum)과 기독교민주당(CDP)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사회주의라는 개념과 그 내용을 불신하였다. 사실 나치도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내세웠다. 그리고 완전히 관료화된 경제에서 국유화의 요청은 그의 현실적 감각에는 맞지 않았다. 이제 경제를 되살리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와는 반대되는 강력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의 커다란 걱정거리는 지나치게 좌편향된 (더구나 두 개나 되는) 기독교 정당이 사민주의 세력에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이 사민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미 사민당(SPD)이 있는데 또 다른 사회주의 정당이 나오면 다수당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로부터 1년 후에 그가 말했다. “사회주의라는 구호로 우리가 5명을 얻으면 20명이 도망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교가 어떤 노선을 택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아데나워는 전후 초반기에 쾰른의 고위성직자들과 거의 날마다 만났다. 주교가 없는 자리에서 자기 입장을 표명했던 쾰른의 수석사제인 그로쉐와 아데나워는 [주교가] 돌아오자마자 긴 대화를 나누며 창당에 관련된 근본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생각에 기독교의 도움이 없으면 민중이 엄청난 야만에 빠지게 될 것으로 보였다! 사제들도 세상의 건설에 책임을 느껴야 했다. 그로쉐는 그 당시에 초교파적 정당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지지하였다.   

  

프링스 대주교는 자기 교구에 복귀하자 아데나워처럼 먼저 호헨린트 병원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와 아데나워는 자주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프링스가 늘 흡족해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5월 2일에 거행된 첫 성체성혈대축일 행렬을 마친 다음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그 당시 쾰른의 라인 동부와 서부에 거주하던 7만 명의 주민 가운데 약 2만 명이 이 행사에 참석한 것에 대하여 만족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자기 보좌관인 보른하임에게, ‘높으신 분’에게 최근에 유행하는 튀네스와 셸의 농담을 말씀드리도록 청하였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행렬을 마친 셸이  튀네스를 만나 비난하는 투로 말하였다. [강한 쾰른 지역 사투리로] “이거 봐 말 좀 해봐. 행렬할 때 네가 안 보이던데!”(Sach ens, ich han dich nit in de Prozession jesenn!) 튀네스가 대답하였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었어. 나는 당원이었던 적이 없거든!”(Dat han ich nit nüig – ich wor nitin de Partei!) 어찌 되었든 이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이 서로 서먹하게 대했는지 아니면 친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창당에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대주교가 일차로 어떤 노선을 가고자 하는지를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내세우는 정당, 말하자면 독일공산당(KPD)과 사민당(SPD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기독교 정당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 정당이 과거 중앙당(Zentrum)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민주주의적인 창당 집단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불명확했다. 교회는 현명하게도 이 두 세력 간에 다리를 놓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떤 지지든 간에 근본적인 전제는 [가톨릭]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1945년 6월 초 베를린에서 열린 제1차 서부 독일 가톨릭주교회의에서 [가톨릭 주교들은], 계급투쟁을 선전하면서 비록 종교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에 적대적인] 세계관을 정당의 정강으로 삼는 모든 세력에 맞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데나워가 파악하기에 무신론적인 좌파 정당에 맞선다면 신부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민주주의’인가 ‘중앙당(Zentrum)’인가의 문제는 가톨릭교회를 고려해 볼 때 최대한 오랫동안 솔직하게 설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어찌 되었든 주교들은 중앙당(Zentrum)을 과거의 형태로 부활시키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잘 알아보는 감각을 지닌 아데나워는 빌헬름 하마허에게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하마허는 중간에 낀 상태였다. 한편으로 그가 파악한 바로는 기독교민주당(KDP)의 설립이 정상 궤도에 들어섰고 라인란트의 가톨릭 사제들도 전체적으로 호의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협의를 한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앙당(Zentrum)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이들과 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칼 슈피커가 걸리적거렸다. 슈피커는 1933년까지 프로이센 관리와 제국 관리를 역임하였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해외로 이주하였고 영국에서 노동당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후 독일에서 중앙당(Zentrum)의 이름을 걸고 그와 비슷한 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당이 종교와 무관하게 노동자 계층의 유권자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게 하려면 당명에 ‘기독교’라는 명칭이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재단의 학교 [설립] 요청을 거부하고자 하였다. 그를 반대하는 하마허와 그의 동료들은 이를 상표 위조라고 비난하였지만, 슈피커의 입장이 매우 강경하여 모든 합병에 관한 논의를 저지할 수 있었다. 결국 중앙당(Zentrum) 내부의 불화는 기독교민주주의 계파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와의 협상은 어긋났다. 아데나워도 슈피커와 같은 인물을 정중히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중앙당(Zentrum) 소속 정치가들이 정당정책적인 새로운 방향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 아데나워도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 이외의 제3세력, 곧 자유주의 세력과도 유대를 맺었다. 그가 있는 곳과 매우 가까운 구머스바흐와 그 주변에서 1945년 초에 ‘독일민주운동’(DDB)이라는 단체가 수립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는 오토 슈마허-헬몬트라는 젊은 기자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제3제국에서 본에 있는 반체제 집단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는 담당 장교들이 이 젊은이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살펴보았다. 5월 초에 그는 아데나워를 찾았다. 그의 시민운동 단체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자신과 잘 통하게 된 가톨릭계 출신인 이 사람과 대화하면서 아데나워는 중앙당(Zentrum)을 다시 살리는 것은 ‘전혀 추천할만하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는’ 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하의 운동은 바른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저도 기꺼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다만 저는 … ‘기독교’라는 명칭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아데나워와 자민당(FDP) 설립자들과의 협상에서 드러난 대로 ‘기독교’라는 명칭은 아데나워에게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비록 아데나워가 교계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러하였다.     


이제 독일민주운동(DDB)은 그 당시 영국 점령지역 전체의 시민자유주의 진영에서 나타난 많은 단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다. 1945년 10월 영국 군정이 그들에 맞서는 대책을 취하자 대부분이 해산되었다. 슈마허-헬몬트 자신은 자민당(FDP)에 속하면서도 나중에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갈등을 막후에서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 늘 아데나워의 지근거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5년 여름에는 자유주의 단체에서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다. 자유주의 진영에 속했고 아데나워와도 친분이 있었던 아우구스트 드레스바흐와 같은 인물은 기민당(CDU)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개신교 인사들의 온건한 독일민족주의나 자유주의 정당들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초교파적인 기독교 정당에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였다. 눈에 뜨이는 점은 문화투쟁에 따른 중앙당(Zentrum)의 설립은 독일 정당사에서 가장 커다란 실패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데나워가 나중에 기민당(CDU) 설립 시기를 되돌아보며 분명히 밝힌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외교정책에는 매우 뛰어났지만, 내치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탄압으로 “독일에서 중요한 자유주의 정당이 수립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래서 양대 교단의 심각한 대립이 정당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에 존재하는 정치적 역량이 정치 스펙트럼의 좌측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우측에 있는 민족주의자들에 대하여 강력하고도 자신 있게 맞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치적 중도파들, 곧 기독교파든, 자유주의자든, 온건파든, 시민주의자든 관계없이 1933년에 60년 동안 지속된 실패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1945년의 유리한 상황에서 개신교 인사들이 초교파적인 통합정당을 수립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 시도는 가톨릭 측이 자기의 정책의 기독교적 성향을 교리적으로 선포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강을 유연하게 수립하여 보수 개신교든 진보 개신교든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정당의 이름에서 기독교의 기본원칙에 대한 신념이 확실히 드러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세속적 사회주의나 세속적 자유주의와의 경계가 흐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기독교 정당이 교회에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 비하여 나치의 유혹에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빠져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미래의 과제는 나치 협력자들과 이와 관련되어 세뇌된 젊은이들을 책임 있는 기독교 정책에 동의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 알고 있는 사실은 수많은 과거 나치주의자와 협력자들을 빼낼 수 있는 정당이 다수당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특히 정치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개신교 신자들을 책임 있는 기독교 정당의 강력한 품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기독교민주당(CDP)은 개신교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수립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나치주의나 아데나워의 생각처럼 “전체주의로 기우는” 사민주의나 공산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었다.     


이는 경제 질서와 사회정책에 관한 기본적인 결정과도 결부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개신교 신자 계층은 의심의 여지 없이 좌파 정당에 맞서는 든든한 시민들이었다. 좌파 정당은 갈색 [나치] ‘국가 만능주의’를 너무나도 기꺼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대체하려 할 것이 뻔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민주당(CDP)이 기독교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세우는 정당으로 선거에 임한다면 그러한 계층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된다면 평범한 개신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은 세속적인 자유주의 정당이나 보수 정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과거 가톨릭 노동자 운동에 관여한 이들과 좌파 가톨릭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과제였다. 아데나워에게는 1945년의 상황은 기독교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이 공공연한 비사회주의 정당으로 상황을 돌파하지 못하면 과거의 분열을 되풀이 하여 결국은 급진 좌파가 승리를 거두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쾰른에서의 창당 위기가 있은 다음에, 그리고 베를린의 기민당(CDU)이나 헤센의 기독교민주당(CDP)이 강력한 사회주의 계파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노선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아데나워의 대답은 그의 이론적 의견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적 활동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곧 그 당시 좌파로 기우는 가톨릭 요소를 시민적 개신교 신자들, 특히 경제적, 행정적으로 유능한 시민 세력을 통하여 설득하면서, 동시에 시민적 우파를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통하여 하나로 묶으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사실 이는] 위험한 줄타기 곡예였다!   

  

이러한 근본적인 생각이 여기에서는 매우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곧 유동적인 정치 생활에서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는 추상적인 생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아데나워가 이 시기에 주고받은 많은 서간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기조연설과 체계적인 초안들도 알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곳에서 그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아데나워 곁에는 기민당(CDU)의 창단 단계에서 그 정당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인사가 등장하였다. 그가 바로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였다. 페르드멩게스는, 아데나워가 기독교 민주주의 인사들에게 간절히 바란 두 요소들의 이상적인 조합을 이룬 사람이었다. 곧 그는 경제적, 시민적 요소와 개신교적 요소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무엇보다도 훌륭한 개신교 인물로 인식하였다. 그 젊은 은행가가 런던과 앤트워프에서 오래 활동한 다음에 1919년 샤펜하우젠 은행에 입사하여 쾰른에 주거지를 마련했을 때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인 성금요일에 자기 집 근처에서 축구 경기가 개최된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그는 이에 관하여 시장에게 민원을 제기하였다. 시장은 자신도 이를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한다고 답을 하고는 곧바로 시가 관리하는 장소에서 축구 경기가 개최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페르드멩게스의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리하여 페르드멩게스와 아데나워의 친분이 시작되었다.     


페르드멩게스는 이미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쾰른에서, 사실 독일 서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서로 함께 할 일이 많았다. 또한 이 두 사람의 가정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는 제3제국 시대의 역경도 이겨내었다. 페르드멩게스는 고백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험에 빠진 오펜하임 가문의 은행이 제3제국 시절을 견디어 내도록 돕고 7월 20일 이후 체포당하여 마크 브란덴부르크 지역에 있는 그가 소유한 건물에 구금되었다가 종전 이후 다시 쾰른으로 왔다.    

  

아데나워는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워 까다롭게 굴던 미국 측에 페르드멩게스의 정치적 해금을 위하여 영향을 미쳤다. 쾰른으로 돌아온 다음 그는 상공회의소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이전에 아데나워가 페르드멩게스를 위하여 노력한 것처럼 페르드멩게스도 부퍼탈의 기민당(CDU) 설립을 위한 개신교 모임에서 오토 슈미트의 동의를 얻고자 애를 썼다. 다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드멩게스의 아들은 제3제국이 아직 완전히 붕괴하기 전인 1945년 2월 막데부르크 지역에서 자기 아들과 작별하면서 부친이 한 말을 기억하였다. “네가 라인란트로 오게 되면 아데나워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살펴보거라. 그는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낼 유일한 사람이다.” 이에 따라 페르드멩게스는 1945년 가을에도 아데나워가 새로운 정당을 이끌어갈 최선의 인물이라고 여기고 모든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치적으로 아데나워를 밀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나름대로 페르드멩게스의 인맥을 활용하여 중요한 회의에서 때로 영향력을 미치는 노조 사무총장, 언론인, 시공무원, 교사, 그리고 또한 경제계에서 조예가 깊은 인물들도 끌어들였다.     


이 모든 것은 1946년 초와 여름에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슈베링, 쉐벤, 샤르미첼, 바르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공식적인 창당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8월 19일 쾰른의 기독교민주당(CDP)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에 별도의 당지부가 설립될 뻔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두 지역을 대표하는 하나의 조직을 수립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아데나워는 라인지역의 지부가 곧 설립될 것이고 사태가 진행되는 것을 볼 때 슈베링이 지부위원장을 맡게 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그 자리에 맞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창당을 최대한 미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늦어도 1945년 8월에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 당원들이 원칙적으로 기독교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앙당(Zentrum)은 그러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독일 전체에서 특히 베를린에서도 기독교민주당(CDP)이 설립되거나 설립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제 모든 일은 발기인 집단이 정치관이나 인물에 따른 대립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라인지역의 기독교민주당(CDP)에 가입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이전인 8월 21일에 아데나워는 뮌헨의 시장이었던 샤르나글에게 정당 노선에 관한 포괄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중앙당(Zentrum)이라는 명칭과 그 조직은 포기해야 했다. “새 정당의 근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국가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 오랜 세월 동안의 발전을 통하여 형성된 기독교를 기초로 한 원칙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②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③ 전향적인 사회 개혁과 사회적 노력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가톨릭 측이든 개신교 측이든 지역을 초월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 새로운 정당이 정당 정책과 외교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였다. 정당 정책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에 맞서야 했다. 그들은 최소한 라인란트 지역에서는 이미 정치적인 협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은 외교적으로 러시아의 영향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한 정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비기독교적인 정당에 맞서 기독교의 원칙의 대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우리 민족이 다시 기독교 원칙에 따라 살아야만 도로 건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그렇게 되어야만 동방, 곧 소련의 국가형태와 이념 세계에 맞서 강력한 저항을 할 수 있게 되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외교적으로도 서유럽에 연결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기민당(CDU)에 대하여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정당 정책 차원의 요구 사항에서 “러시아가 점령한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독일 전체에서 최대한 훌륭하고 잘 알려진 인물을 얻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적이고 민주적인 세력의 계획적인 단합을 통해서만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에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 정당은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은 독일 서부지역을 공개적으로 대표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편지는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6월 베를린의 창당 발기인들이 설립한 기민당(CDU)을 거절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말로 표현한다면 ‘거리를 둔 것이다’. 정강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이념만을 다루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세밀하게 정한 원칙과 요구 사항을 폐기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몇 달 후에 오토 슈미트에 대하여 같은 내용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저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쓸데없이 확언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차원에서 샤르나글이 나서서 바이에른에서 단결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쾰른에서 특사를 파견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한때 독일민주당(DDP)에 몸담았던 함부르크의 루돌프 H. 페터센 시장은 자민당(FDP)으로 이미 당적을 바꾸고 난 다음에 아데나워가 보낸 당부편지를 받았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새로운 정당의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명칭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저는 이 문제로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를린에 계신 분들이 선택한 것처럼 [당명에] ‘연합’이라는 명칭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민당(CDU)이 러시아의 압력으로 어떤 길을 택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명을 정하면 결국 반대자들에게 아주 좋은 명분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슈베링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라인란트에서 최대한 빨리 출발선을 떠나 당지도부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아데나워는 창당 절차를 처음부터 지역을 초월하는 차원에서 착수하여 실제로 단합된 정당이 설립되도록 일을 진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잠정적으로는 독일 서부지역의 정당으로 말이다! 이 편지는 그가 이미 이 시점에서 곧 영국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6주 전에 쾰른 지역의 경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이미 독일 내정 전체를 동서 대립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중앙당(Zentrum) 창당 세력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아도 쾰른에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마허는 속이 뻔히 보이는 의도로 아데나워에게 너무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전히 이 두 사람은 상대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슈베링이 아데나워에게 1945년 9월 2일 거행되는 라인지역의 기독교민주당(CDP) 창당식에 참석해 주라고 요청하였으나 아데나워는 결국 냉정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이 세력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게다가 쾰른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관점에 머물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는 주일에 뢴도르프에서 매우 중요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창당식에 참가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 지도부에 선출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아데나워는 이미 전임 뒤셀도르프 시장이며 그의 오래 정적이었던 로베르트 레어와 굼펜베르크 남작의 조언을 접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라인란트의 지방당 제1위원장 자리를 맡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한 것으로 보이다. 그를 대신하여 실무담당 사무총장이 업무를 수행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굼펜베르크가 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뒤셀도르프에서 구두로 사전 협의가 있었고 이 협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아놀트는 아데나워를 지도자 자리에 올려놓고자 하였다. 사실 뒤셀도르프에 있는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중앙당(Zentrum)에 가입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아데나워는 정중하게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상황이 레오 슈베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쾰른의 콜핑하우스에서 열린 창당 회의에는 약 200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7인으로 구성된 ‘의장단위원회’와 23명으로 구성된 ‘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위원회의 업무는 레오 슈베링이 이끌었다. 그는 또한 당내 서열 1위가 되었다. 이 의원회에는 아데나워, 요하네스 알베스, 안네 프랑크 교장, 폰트-겔드렌 출신의 농부인 데세레어스, 로베르트 레어,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곧 바로 의장위원회가 임시기구인지 아니면 궁극적인 지도부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벌어졌다.      


이 기간에 벌어진 일의 모습은 특별히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다. 여전히 많은 곳에서 어려움이 늘고 있었고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우려가 그들의 활동에 방해가 되었지만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에 속했던 인물들을 주축으로 한 비교적 소규모의 세력들이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음모 가득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그들의 목표 추구에서 보여준 진지함은 참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1945년 여름과 1946년 초반 사이에 제국의 모든 곳에서 정당정치의 게임에서 사람들이 패를 섞고 나누었다.     

그러나 당연히 조직구조는 아직도 유동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사이에 확대된 의장 위원회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아데나워는 위원 자격으로 단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하였다. 곧 ‘기독교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쾰른강령’*을 바탕으로 이른바 첫 번째 강령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뒤셀도르프의 대표들과 부퍼탈의 대표들은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였다. 요하네스 알버스는 이 회의에서 ‘포괄적인 사회화’를 주장하면서 ‘쾰른강령’에 들어 있는 생각만을 언급하였다. 회의록에는 많은 의미가 담긴 “아데나워와 페르드멩게스는 반대하였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알버스는 이후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 약간의 내용을 변경하였다.     


* 쾰른강령[Kölnerleitsätzen, 역자주 - 1945년 6월 17일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 설립을 추진하는 이들이 11명의 소위를 구성하여 창당 프로그램 초안을 작성 임무를 부여함. 이들이 작성한 문서를 7월 1일 '독일 기민당(CDU) 프로그램 예비 초안'이라는 명칭으로 채택함. 이 문서는 기민당(CDU) 창당에 결정적인 기초가 됨]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라인지역의 기독교민주당(CDP)에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잠정 중단하였다. 그가 [시장에서] 파면되는 바람에 이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쾰른 대표들의 반응은 명백하였다. 슈베링의 편지의 어조는 일종의 조사(弔詞)와 같은 진지함이 있었다. 그 편지에서 슈베링은 아데나워의 파면에 대하여 ‘진심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지역 위원장이 슈라이버가 그의 베스트팔렌 동료인 칸넨기써에게 보낸 편지에는 좀 더 솔직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제 아데나워라는 짐과 쾰른 토박이인 쾰른의 유명인인 클륑겔이 떨어져 나갔으니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0월 16일이 되자 아데나워는 속으로 고소하게 여기면서, 슈베링에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영국 군정청의 통보에 따라 아데나워가 라인지역 정당의 당직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다. “비록 제가 한 때 쾰른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하지 말아야 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아데나워를 떨쳐낼 수가 없던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지낸 몇 년 동안의 세월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스트레스가 많은 업무의 압력이 없는 가운데 라인지역의 기독교민주당(CDP)의 강령을 스스로 작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파면된 지 며칠이 지나 그를 방문한 마이클 토마스에게 아데나워는 벌써 그가 작성한 강령을 읽어주었다. 이를 ‘뢴도르프 강령’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토마스가 아데나워에게 잘 작성된 문서이기는 하지만 “점령군부에 깊은 인사를 드립니다.”라는 표현을 지워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강한 쾰른 사투리로] “자네 말이 정말 옳으이.(Da habense eijentlich janz recht)라고 대답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영국 특사에게 자기가 쓴 글을 낭독함으로써 바라클로프가 이성이 마비되어 새로운 정당의 지도적 두뇌를 지닌 인물을 광야에 쫓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아데나워가 이 시간을 강령 작성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결코 정치적으로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한 점에서 그의 원칙적인 생각은 라인지역 기독교민주당(CDP)의 주도적인 세력의 생각과 구분되었다.     

헤름케스-슐터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작성한 문서는 쾰른강령의 수정이 아니라 반론 초안이었다.     

여기에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상이한 판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종종 강조되었다. 사실 이 두 초안은 1945년의 파국적인 상황이 보여주는 것에 대한 상이한 판단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문서들에서는 가톨릭 사회론에 대한 매우 다양한 원칙적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비록 아데나워가 자기 생각의 이론적 뿌리를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1945년에는 아직 근대적인 가톨릭 사회론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소한 두 가지의 뚜렷하게 상이한 원칙들이 존재하였다. 첫째로 발베르크의 도미니코회가 지향하던 것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근원을 둔 공동체를 개인에 우선하는 원칙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의 이론가들은 공공복리에 관한 사회철학적 기본원칙에서 비교적 정밀한 질서정책적 행위 지침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반하여 1931년 반포된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40주년>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사상을 지닌 자유주의 학파는 근본적으로 과연 사회의 원리가, 정치에 엄청난 수준의 정책 실현의 여유를 부여하는 규정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예수회가 인격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둘째 학파에 경도된 인물에 아데나워도 들어 있었다.    

 

아데나워의 이론적 토대가 철학적인 반성에서 마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토대가 현실적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은 분명하다. 1945년의 모든 기독교민주당(CDP)의 강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초안에도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혐오가 반영되어 있었다. 비록 그러한 국가가 멸망했어도 말이다. 여기에서 미래의 국가와 사회의 건설에 필수적인 기본 사상으로 기본권의 수위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아데나워는 자기 초고의 제1부를 직접 손으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에는 나중에도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I. 개인과 국가     

① 기독교 윤리와 문화, 참다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국가적인 삶을 담보하고 충족시켜야 한다. 인간의 존엄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국가권력이 제한할 수 없다.

② 정치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권리.

③ 모든 이를 위한 정의, 평등권, 법안정성.

④ 민족과 국가에서 가정의 근본적인 중요성의 인정.

⑤ 집과 가정 안에서의 활동에서 여성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직업과 공공생활에 대한 여성의 참여.

⑥ 다수가 소수에 대하여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소수에게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국가와 사회는 개인이 평가한다. 이것이 기독교 인격주의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개인주의는 가정에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고 민족과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도덕률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CDP) 안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아데나워는 전체주의의 위험이 히틀러 운동의 와해로 사라진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전체주의적 국가와 사회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옷을 입고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가면을 쓰고 말이다. 경제 질서의 재건에서 이에 대해서도 조심해야만 하였다. ‘필요한 것의 충족’, ‘정의로운 공평’이 매우 중요한 목표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가 다시는 의문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경제는 쾰른강령에도 마찬가지로 나와 있는 것처럼 ‘필요한 것의 충족’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적인 추가 조항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창의력의 발산과 전개”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관한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화라는 말도 전혀 안 나온다.  

   

이리하여 아데나워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졌다. 또한 이렇게 분명하게 정리되고 언어적으로 정제된 강령이 어쩔 수 없이 양이 늘어난 타협의 산물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타협의 산물은 쾰른과 뒤셀도르프의 창당 세력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자기 강령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을 영국군이 제한하는 동안에는 수립과정에 있는 정당의 주도 세력들이 아데나워의 시대를 선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가 레오 슈베링을 중심으로 한 무리에게 자기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서 열심히 노력한 레오 슈베링의 한계가 드러났다. 그는 라인지역과 베스트팔렌 밖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또한 누구도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가 경제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행정에 대해서는? 외교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정당정책에 관한 논의에서도 그는 매우 단순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모든 에너지는 중앙당(Zentrum)을 능가하는 것에만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재건에 대해서는 사민당(SPD)의 칼 세베링과 마찬가지로 ‘당을 초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직력이 강한 사민당(SPD)에 맞서는 강력한 대응 세력이 형성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초반기에는 이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영국 점령군이 기존의 정당들에 지역 조직을 구성하라는 압력을 가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점에서 더 앞서 있었다. 그래서 런던에는 영국군이 점령한 지역의 독일인들이 정당정책적으로 발전이 더디어 지역을 초월하여 뜻을 모으는 일에 뒤처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라인과 베스트팔렌 지역의 기독교 민주주의 진영 인사들에게는 매우 힘든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들이 기독교 민주주의자 조직이 구성될 니더작센 지역에서도, 곧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이어 한자 도시들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지도자급 인사들을 동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사무총장을 임명할 것인가? 질문에 질문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분명한 답이 있었다. 레오 슈베링은 그의 모든 자질을 살펴볼 때 그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보니 선택에 어려움이 있었다. 라인지역 정당에 유망한 인물로는 칼 아르놀트와 로베르트 레어가 있었다. 무게가 있는 레어가 확실히 라인란트를 넘어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맡을 만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후보가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영국군이 그를 라인지역의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지도적인 정당정책적인 역할을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레어는 개신교 신자였고 독일민족주의 진영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3제국 시절에 가톨릭 저항 세력의 존경을 많이 누린 바가 있어 그러한 점을 억지로 그에게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기민당(CDU)에는 중앙당(Zentrum)을 흡수하거나 아니면 와해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 일에는 당내의 가톨릭계 지도자가 적합하였다. 그런데 하필 과거 중앙당(Zentrum)에서는 가톨릭계 인사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가톨릭 사제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도 급한 일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레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사실 과거에 포메라니아 지역의 기사영주였고 브뤼닝의 내각에서 장관을 했던 한스 슈랑에-쉐닝겐에게도 상황은 불리하였다. 그는 이 무렵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서 기민당(CDU)을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쩌면 2년 후였다면 칼 아르놀트가 분명히 지도자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 늦가을과 겨울의 시점에서 그는 당 지도자의 역할이 자신에게는 무리라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01년 비버라흐에서 태어난 슈바벤 사람인 그는 원래 제화술(製靴術)을 배웠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12년 동안 그가 택한 고향인 뒤셀도르프에서 기독교 노동조합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3제국에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할비흐 & 아르놀트’라는 회사를 운영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라인 저항운동의 회의에 은밀히 참여하였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는 1944년 ‘기터 작전’*으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 모든 것으로 그는 전후 독일에서 남부럽지 않은 출세를 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비록 출세는 했지만 전후 9개월이 된 시점에서는 아직 정당정치에서 커다란 역할을 맡을 정도는 아니었다.     


* 기터작전[Aktion Gitter,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 후 1944년 8월 22~23일에 나치 게슈타포가 실시한 대규모 체포 작전]     


이제 제3제국이 종말을 고한 다음에, 라인란트에는 정치적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 부족하였다. 과거제국 수상인 브뤼닝은 멀리 미국에 있었고 가끔 편지를 통하여 뜻을 모으는 과정에 관여하였다. 전직 수상인 빌헬름 마르크스는 82세의 노인이 되어 본에 살면서 이미 노령에 따른 어려움을 겪었다. 아데나워가 시장이던 시절의 과거 중앙당(Zentrum) 소속 정치가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데나워 스스로 가끔 누가 남아 있는지 둘러보았다. “링스 씨는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올여름에 90세가 된다. 그의 쾰른 집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지역으로 피난을 왔다. 그는 몇 달 전에야 몰래 러시아 점령지역을 넘어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견딘 고난이 너무 심하여 나중에 몸이 말이 아니어서 우리는 그가 잘못될까 보아 근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몸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 뫼닝 씨도 아직 살아있다. 그는 이제 82세이다. 눈이 완전히 안 보이지만 정신은 여전히 멀쩡하다. 팔크 씨는 1944년 브뤼셀에서 사망하였다. … 팔크의 가족들은 점령 기간 내내 브뤼셀에서 숨어 지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확실한 암초만 가득했다.    

 

어찌 되었든 제3제국을 아데나워만큼이나 꿋꿋하게 버텨낸 인물도 있었다. 헤르만 퓐더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데나워가 파면되고 나서 그는 3년 동안 쾰른시장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영국과 미국 점령지역에서 행정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 그는 뒤처져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몇 명의 전직 시장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1045년 이후 정치적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는 하인리히 바이츠가 있다. 그는 1933년 트리어의 시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제는 뒤스부르크의 시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데나워가 파면 된지 채 3일이 지나기도 전에 뒤셀도르프의 점령군은 이미 바이츠를 아데나워의 후임으로 당 지도부에 추천하였다. 로베르트 레어도 이와 같은 지위에 속했다. 또한 아헨의 빌헬름 롬바흐도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라인란트 출신 인사가 베를린에서 커다란 정치적 경력을 쌓고 있었다. 1945년 겨울까지는 안드레아스 헤르메스가 기민당(CDU)의 뛰어난 차기 주자로 부각되었다. 체격이 당당한 이 남자는 외국에도 매우 잘 알려진 인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러 내각에 참가하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는 ‘녹색 전선’*을 이끌었다. 그리고 제3제국 시대의 어려움을 능숙하게 이겨냈다. 그는 1933년에 체포되었으나 그 후에 콜롬비아로 건너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벡과 괴르델러를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에 속하였고 1944년 7월 20일 사건 이후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점령군이 그를 풀어주었고 잠시 베를린 시장 직무 대리를 맡았다. 1945년 6월 그는 베를린 기민당(CDU) 설립에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성격이 무난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러시아와도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1945년 12월에 이미 토지개혁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양심의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농업전문가로서 토지개혁이 바보 같은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할 경우 소비에트와의 갈등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아데나워와 전혀 친분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 녹색전선[Grüne Front, 역자주 -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맞선 보수주의 정치 운동. 베르사유조약의 개정과 기업 연합의 경제적 이익 추구 주장]     


그의 대리인은 야콥 카이저였다. 그도 7월 20일 이후 운이 매우 좋아 살아남은 적극적인 저항운동 세력에 속하였다. 그나 헤르메스도 라인란트를 잊은 적이 없다. 이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유대를 맺고 베를린에서 내세운 지도력을 고향에서도 발휘하고자 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모든 길이 아데나워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있는지를 알게 된다. 1933년 이전에 이미 그는 공화국의 지도자 인재군에 속하였고, 이제는 다른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나이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제3제국 시절 그의 명성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그리고 그의 과거의 활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물론 막강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먼저 헤르메스가 있었다. 또한 퓐더도 조만간 경쟁자 무리에 합류할 수도 있었으나 현재나 앞으로도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슐랑에-쉐닝엔은 주의해야 할 인물이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하인리히 브뤼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헛간이 텅 비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지도부 안에서 시류에 휩쓸리고 있던 3세대, 4세대 후계자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이 놀라워하던 그의 벼락출세에서 무엇보다도 두 가지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면서 그 자신이 현재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확인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멀리 내다볼 줄 아는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아데나워 정도의 지도적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바트고데스베르크의 교육대학에서 개최된 제국회의에는 약 200명의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영국, 미국, 러시아 점령지역과 베를린에서 모였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에 뛰어난 지도자적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중요한 연설은 베를린에서 온 안드레아스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다른 사람이 낭독해야 했다. 그는 여행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에 그는 동부 기민당(CDU)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토지개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많은 시선을 끈 연설은 마리아 세베니치가 한 것이다. 그는 쾰른 출신으로 공산주의에서 시작하여 사회민주주의를 거쳐 이제 기독교 민주주의자가 되기까지 방황하며 걷던 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헤센의 기민당(CDU)에서 활동하였다. 헤센은 기민당(CDU) 사회주의자 계파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있던 곳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1947년에 니더작센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에게 내려진 정치활동 금지 조치로 아무도 기조연설을 요청하지 않았기에 잠깐 얼굴만 비친 다음 파울 프랑켄을 대동하고 산책하러 나갔다. 고데스베르그의 ‘제국회의’는 그 당시에 사회주의의 강령이 얼마나 강력한 매력을 지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 운영’, ‘국유화’, ‘경제 운영에 대한 노동자 계층의 동등한 영향력 행사’ 등이 거기에서 작성된 결의안에 들어 있는 핵심 개념들이다. 이 회합은 헤르메스와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베를린의 ‘제국지휘부’가 이제 이념에서든 조직에서든 독일 서부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를린이 정한 당명이 환호 속에서 채택되었다. ‘기독교 민주주의 연합’(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곧 기민당(CDU)이 채택되었다. “이 이름은 독일제국 전체에 적용됩니다.”     


이제 아데나워는 한 가지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그 누구도 라인지역 기민당(CDU)에서 자리를 끝까지 지킬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능력 있는 의장을 얻고 싶다는 바람은 이 시기에 명백히 당내 우파에 속한 정치가에 대한 이념적 거부감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사실 무대 뒤에서 페르드멩게스가 주선한 데에 따라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직접적인 천거는 칼 아르놀트와 분명히 기민당(CDU) 좌파에 속하는 소수의 인사들이 하였다.    

 

12월 접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인제 와서 자세히 재구성해 볼 수 없다. 12월 28일에 이미 폰 바이쓰 총영사는 자기 정부에 아데나워가 아마도 영국 점령지역 전체의 기민당(CDU) 지도자가 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8월에 이미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뒤셀도르프에 있는 지도 세력이 이 일을 주동하였다.     


결정적인 면담은 하필 아데나워의 70세 생일에 벌어졌다. 10년 전에는 마리아라흐에서 일데폰스 헤르베겐과 함께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일을 지냈다. 그 당시에는 그가 70살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라인지역 지방당 대표단을 뢴도르프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를 영국 점령지역 위원장으로 추대할 생각이 있다는 뜻을 전했다. 나중에 친하게 된 당 동료 칼 아르놀트와 더불어 요하네스 알버스, 크리스티네 토이쉬, 막스 폰 굼펜부르크 남작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민당(CDU) 내의 좌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당 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도 그를 지역 당위원장으로 추대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 뜻깊은 면담이 있은 다음 날 편지에서 우리는 아데나워의 생각이 라인란트를 훨씬 넘어서고, 영국 점령지역도 훨씬 넘어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대담에 참석한 인사들에게 다시 한번 그가 영국 점령지역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현재와 미래에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들”을 요약하였다. “예를 들어     

㉮ 중앙당(Zentrum)과의 통합,

㉯ 바이에른과 프랑스 점령지역의 기민당(CDU)과의 밀접한 관계 수립 … (아데나워는 프랑크푸르트의 기독교 민주주의자들과의 긴밀한 관계에 그리 강한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 영국 점령지역과 다른 지역들 안의 국가 질서, 외교 문제,

㉱ 언론,

㉲ 경제적 미래.”     


이 편지의 수신자는 아데나워가 “상황이 허용된다면” [라인] 지역당의 위원장직을 맡을 의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에 필요한 자질을 지니고, 저의 완전한 신임을 받으며 자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전권위원이 필요하였다. 아데나워는 누구를 임명할지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전임이며 현임 부장인 에른스트 슈베링이었다. 그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의원직을 역임하면서 아데나워 휘하에서 말단에서부터 근무한 사람으로 아데나워와 더불어 파면된 사람이다. 그는 변호사로서 쾰른시의 배상금 협상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능숙하게 처리한 바가 있었다. 이제는 의원으로서 쾰른시정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1949/50년과 1951부터 1956까지 쾰른시장도 역임하였다. 그런데 슈베링의 임명에는 하나의 심각한 흠이 있었다. 그는 곧 권력에서 멀어지게 된 레오 슈베링의 동생이었다. 에른스트 슈베링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아데나워가 당의 정상에 오르는 길을 처음부터 스스로 도모한 것인지, 아니면 당내 중진들이 그를 설득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은 정치를 상당히 모르는 사람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일은 원래 대부분 관련 정치가의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든 참석자가 정한 시간 계획은 어찌 되었든 매우 정확했다. 1월 8일에 라인지역의 기민당(CDU) 수뇌부가 영국 점령지역의 지역고문단 추천자 명단을 확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격렬한 논쟁이 있은 다음에 사전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서 당내 세력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아데나워, 아르놀트, 페르드멩게스, 그리고 뢴도르프에서 면담을 한 세 사람이 포함되었다. 레오 슈베링은 이제 직무대리 후보로 천거되었다.     


다음 몇 주 동안에 다양한 인물들이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슈베링은 자기 자리를 놓고 여전히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부퍼탈 세력의 지도자에게 [영국] 점령지역 위원회 직무대리 자리를 제안하여, 그 세력과 연합을 통한 자기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베를린에서 자리를 잃고 바트고데스베르크에 거주지를 마련한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는 영국 점령지역에서 기민당(CDU)의 대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쾰른 당원만이 아니라 베스트팔렌 당원들과 협상을 벌였으나 이미 며칠 늦었다. 모든 지역에서 이미 지역 위원회 대표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한스 슐랑에-쉐닝겐도 자기 관심을 밝혔고 레오 슈베링은 어려운 처지에 몰리면서 그를 지역 대표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아데나워에 맞서 라인 지방 당대표로 나서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슈베링은 기독교 민주주의자 가운데 또 다른 신성인 헤르포르트의 시장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홀츠아펠은 슐랑에-쉐닝겐처럼 독일 민족주의 세력의 온건파 출신이다. 그리고 베스트팔렌에서 세력을 구축하며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때 지역 위원회의 26명의 위원을 헤르포르트로 초대를 한 것이다. 슐랑에-쉐닝겐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된다면 이 기민당(CDU)의 개신교 정치가가 기회를 엿보고자 한 것이다.   

  

1946년 1월 22일 아데나워를 지역 기민당(CDU)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헤르포르트의 오래된 시청에서 이루어진 만남에 관하여 여기에 참석한 이들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 기록이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아데나워가 최고 연장자 의장으로서 모든 것을 막후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은 자주 묘사되었다. “회의 의장의 자리가 아직 비어 있었다. 갑자기 아데나워 박사가 연단에 나서며 그 의자에 앉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187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최고령자입니다. 반대하는 분이 안 계신다면 제가 최연장자 의장이 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하며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 하여 홀츠아펠은 처음부터 저지당했다. 그는 자신이 초청자의 자격으로 의장 자리를 제안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는 토론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제외되었다. 그는 베를린의 당 동료와 함께 초청되어 이 토론에 참가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하인리히 포켈이 있었다. 그는 1933년 이전에 중앙당(Zentrum)에서 오랫동안 사무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에서 온 손님들은 영국 점령지역 기민당(CDU)의 당원이 아니기에 점령군정 규정에 따라 지역위원회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군정청 대표인 도너 중령은 이 회의에서 인사말을 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 엄격한 규정을 딱 잘라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손님들은 일단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참석할 수 있었다. 화가 난 헤르메스는 홀츠아펠과 점심 식사 중에 안심되는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 회의에서 대표선출을 연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포켈과 함께 돌아갔다. 그러나 곧 그가 알게 된 대로 너무 서둘렀다. 사실 다음 회기까지 잠정적이지만, 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아데나워가 제1 당대표, 홀츠아펠이 제2 당대표, 폰 굼펜베르크 남작이 원내대표로 각각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직은 곧 끝나지 않았다. 아데나워와 홀츠아펠은 각자의 직무를 지역위원회가 해산된 1950년까지 계속 수행하였다.     


슐랑에-쉐닝겐 또한 절차상의 하자로 제한받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당 출신의 칼 슈뢰터는 자기 지역의 상황이 2월 4일 회의가 지나야 정리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와 또 다른 대표인 슐랑에-쉐닝겐을 단순한 참관인으로 간주했다.    

 

헤르포르트에서의 회의 후에 아데나워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내용이 담겨있었고, 보수주의자인 슐랑에-쉐닝겐에 맞서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또한 이 편지는 아데나워가 그 당시에 정당 정책의 발전에 관하여 스스로 정리한 생각이 담겨있었다.     

비판의 단서가 된 것은 슐랑에-쉐닝겐이 북부 독일의 당 동료들에게 보낸 일련의 회람이었다. 이 회람 가운데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 가운데 오른쪽, 곧 우파에 속하는 모든 이를 규합해야 한다.” 기민당(CDU)은 결코 ‘잡탕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러 부류를 끌어모은 것’을 바탕으로 삼으면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가 없다. ‘잡탕’은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슐랑에-쉐닝겐이 추구하는 대로 기민당(CDU)을 ‘우파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지를 물었다. 그는 오히려 ‘기민당(CDU)의 가장 넓은 계층의 강력한 반대에 당면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우파 인사라고 지칭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매우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의 생각으로는 모든 정당이 여러 정당이 모여 하나의 확고한 틀을 갖추기 전까지는 피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에서 어떤 정당들이 수립될지는 아직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이다. 더 나아가 정당이 과연 세워질지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이 굳이 미리 명기하고 싶어 한다면 기민당(CDU)을 참다운 의미에서 “중도”[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슐랑에-쉐닝겐은 이미 헤르포르트에서 그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이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그는 시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영국군정 측이 그에게 ‘식량 농업 중앙사무소’의 소장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성향과 능력에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민당(CDU) 당대표직과 겸임할 수는 없었다. 헤르포르트 회의가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우파 정당’이라는 주제에는 이미 이전의 사연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민당(CDU)을 ‘우파 정당’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난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헤르포르트에서 홀츠아펠과 굼펜베르크와 더불어 하노버의 크리스티안 블랑크가 아데나워를 지명되었을 때 베스트팔렌 지방당 원내대표인 요제프 칸넨기써가 그렇게 본 것이다. 흥분한 칸넨기써는 그러한 인물들이 당대표진에 속하게 되면 ‘우파 정당’의 인상을 주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노력하고 싸워온 것이 아니며”, 노동자, 여성, 젊은이들이 이 “새로운 위대한 기독교 민중 정당”의 대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잘 알려진 라인지역 가톨릭 신자”로 개신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분리주의 [소문] 때문에도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비난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나치조차도 저에게 그런 비난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칸넨기써는 헤르포르트 회의 이후에도 한동안 확신하였다. 그의 의사가 관철되어 아데나워를 임시로 [당대표로] 선출한 것이 “새로운 정당이 우편향되는 위험”을 막게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임시 당대표 선출 이외에도 이 역사적인 회의는 두 가지 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흔히 새로운 정당의 당 위원회가 그렇듯이 헤르포르트의 대표 모임에서는 권력을 의식하여 “지역위원회가 선발 예정인 당대표와 본래의 전체 지역 당대표를 맡게 되는 것이며 개별 지역 지도자들을 지배하는 권한을 지닌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였다. 이 내용은 회의록에 기록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이제 자신이 작성한 당강령을 제시하였다. 당위원회는 강령-편집회의를 소집하였다. 새로 임명된 당대표는 당장 다음 회의에 지역 전체에 대한 강령을 결의하기로 하였다. 아데나워는 2월 7일 뮌헨의 샤르나글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이제 먼저 강령을 작성하고 추인받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새로운 정당으로서 최대한 빨리 강령을 마련하여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초안을 첨부하여 그 내용의 방향이 바이에른이 받아들일만한 것인지에 관하여 답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뢴도르프 강령’이 지금까지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에서 마련한 강령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완전히 확신하였다. 슐랑에-쉐닝겐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아데나워에게 들었다. “우리가 세운 것과 같은 새로운 정당은 먼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당의 근본이념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정리한 강령 조항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2월 말에 개최되는 지역위원회의 회의에서 우리가 발전시킨 것이 이러한 결과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데나워는 확실히 헤르포르트에서의 성과로는 아직 아무것도 최종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베스트팔렌이 매우 주저하고 있었다. 베스트팔렌의 원내대표인 요제프 칸넨기써는 사무총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자 의견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를 제1 당대표로 선출한 것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는 정치지도자가 될 만한 그릇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게다가 그는 베를린의 인사들을 “매우 형편없이” 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헤르메스에게 편지를 썼다. 요하네스 그로노브스키가 “보기에 결국 아데나워 씨는 지역위원회를 쾰른의 시의회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뵙니다.” 그래서 베스트팔렌 인사들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곧 아데나워의 ‘당 독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데나워가 헤르포르트에서 지역위원회 의장 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라인란트 지방당의 논란은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월 21일의 회의에서 슈베링은 아데나워가 없는 자리에서 당지도부가 그를 결국 당대표로 확실히 선출하기를 바랐다. 칼 아르놀트를 선두로 한 아데나워 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의 과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얼마 전에 뢴도르프에 함께하였던 미하엘 로트는 마리아라흐에서 보낸 ‘아데나워를 옹호하는’ 편지를 낭독하였다. 결국 거기 모인 사람들은 아데나워를 포함한 지방당 지도부를 선출하기로 합의하였다. 당대표 선출에 관한 문제는 다음 회기로 미루기로 하였다.     


결정은 2월 5일 크레펠트-외르딩겐에서 내려졌다. 사전에 아데나워는 부퍼탈 출신의 경건한 개신교 신자인 오토 슈미트를 만나서 개인정치적으로 뻔한 협상을 벌였다. 그 당시 슈미트는 아데나워의 강력한 맞수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와 충돌하였다. 아데나워는 라인란트 지역당의 제1 당대표가 되었고 슈미트는 두 명의 직무대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쾰른에서 슈베링을 지지하였던 두 사람 사이에서 당대표의 입지가 흔들릴 때 정치 세계에서 너무나 흔히 목격되는 해임 공작이 벌어졌다. 이제 아데나워는 비교적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아데나워를 지지하는 사람은 24명이었고 슈베링을 지지하는 사람은 5명이었다. 이에 따라 당대표회의에서는 커다란 충돌이 발생하였다. 그 자리에서 슈베링의 지지자들은 오토 슈미트의 [나치 시절] 민족주의와 관련된 과거를 비판하였다. 슈베링은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다음날 요하네스 알버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어제는 기독교 노동자들에게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반동들이 승리한 날이었습니다.” 그는 기민당(CDU) 좌파가 그를 곤경에 빠트렸다는 사실을 통탄하였다.     


아데나워는 패배자의 분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빌헬름 바르쉬는 한편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한 답변서를 받았다. 그는 2월 6일 자 서한으로 사후 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에게 걸리적거리는 사람에게 그런 식의 편지를 쓰는 데에 늘 뛰어났다. 그는 모든 비난을 단호히 반박하면서 경멸조로 말했다. “저는 투표 결과가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해주었다고 믿습니다.” 슈베링이 1962년 외르딩에서 열렸던 회의를 다시 한번 회고하며 이를 확언하였다. “1946년 2월 5일은 아데나워의 ‘권력 장악’이 있던 날이다.”     


아데나워의 승리는 지역의원회의 제2차 회의에서 완료되었다. 1946년 3월 1일 네하임-휘스턴에서 개최된 회의에 모인 대표들은 이론의 여지 없이 아데나워를 지역 당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라인란트 지방당의 내부 정리가 분명히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이제 명백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서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은 아데나워의 ‘뢴도르프 강령’을 일부 수정하여 기민당(CDU)의 정강으로 채택하였다.  

    

기민당(CDU)은 이제 네하임-휘스텐에서 정강을 채택하였기에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럽의 가장 대표적인 교통의 요지인 네하임-휘스텐은 기민당(CDU) 정당 역사에 남는 도시가 되었다. 회의 장소로 그 지역의 수녀원을 물색하였다. 대표들이 매우 지쳐 도착하게 되기에 잘 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회의는 수도원 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쾰른시장 시절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발언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천천히 자기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최후의 발언을 하였다. 이때 그는 밤에 자기 방의 책상에 앉아서 강령에 마지막 손질을 하였다.   

  

강령에 관한 논의에서 앞으로 중점 사항이 될 핵심 문제인 사회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당내의 사회주의자 파벌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우위에 있기에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경제의 부분들을 사회화하는 중요한 문제는 현재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독일 경제가 아직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화에 관하여 나중에 정할 규정에서 경제적, 정치적 관점들, 무엇보다도 공공복리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석탄이 전체 독일 국가 경제에 가장 중요한 상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업의 사회화를 요구합니다.”     


그는 이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당정강은 “사회화는 … 현재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명제를 거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기민당(CDU)의 사회주의 계파의 요청을 고려해 보면 그러하였다. 게다가 그 문제를 먼 미래로 미룰 준비가 된 것과, 이와 동시에 제기된 광산의 사회화 사이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었다. 그러나 기민당(CDU) 좌파는 일단 만족해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야콥 카이저 중심의 ‘제국 기민당’(Reichs-CDU)의 도움으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정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제기된 훨씬 더 어려운 문제는, 정강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가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부퍼탈의 창당 세력에 속하는 오토 슈미트와 충돌하였다. 개신교 진영의 고백교회 출신의 이 대표는 1945년 가을에 진행된 정강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정강 조항의 삽입을 관철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와 민족들의 주인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힘과 율법이 되신다. … 구원과 부활은 국민들 사이에 기독교의 활력이 작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적, 독일적, 사회적 민주국가를 신봉한다.”   

  

이제 새로 선출된 당대표는 그의 직무대리가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게 되었다. 라인-베스트팔렌의 초안에 비하여 아데나워의 초안에 “기독교적 요소”가 약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아데나워의 답은 냉정했다. 이는 이제 지역의원회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한 것이다. 이 위원회에 오토 슈미트는 전혀 속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당정강을 [기독교] 신앙고백이 되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의 전략적인 단기목표는 한창 창당 작업에 있는 자민당(FDP)과 니더작센지방당(NLP)과 통합하는 것이었다.    

 

자민당(FDP)에서는 누구보다도 빌헬름 하일레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시민 정당의 수립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하일레는 그의 평생 경쟁자였던 테오도르 호이쓰와 마찬가지로 프리드리히 나우만 계파 출신이다. 한때 제국의회에서 독일 민주당(DDP)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는 니더작센의 호야 백장령에서 군의원을 지냈고 1946년 초 오프라덴에서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재미있고 독특한 사람이다. 대지주로 한 때 《힐페》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고, 유럽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고 벨프 가문 출신으로, 확고한 연방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의 당내 경쟁자인 프란츠 블뤼허와 프리드리히 미델하우페가 그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그가 기민당(CDU)을 이끌만한 인물이었다.     


하일레가 점령지역 당대표로 선출된 다음에 아데나워를 찾아와서 두 당을 합치는 가능성을 협상해보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깜짝 놀랐다. 장문의 편지, 미델하우페가 동석한 뢴도르프에서의 만남, 함부르크의 영국 점령지역 의회에서 이루어진 추가적인 만남 등을 통하여 협상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슈베링이 있을 때 걸림돌이 되었던 ‘제국일치’라는 정강 조항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뢴도르프 강령’에 나온 “제국의 일치는 보존되어야 한다.”라는 아데나워의 표현이 하일레에게는 충분하였다. 또한 학교 문제에 관해서도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당명은 여전히 논란이 되었다. 하일레는 ‘기독교’라는 단어를 삭제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아데나워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협상은 4월에 파기되었다.     


오토 슈미트가 바란 것처럼 기독교적 목표를 강조하게 된다면, 그 당시 매우 전망이 밝아 보이던 이 통합 협상을 놓고 볼 때, 새로운 장애가 발생할 것은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영국 점령지역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여기며 자민당(FDP)이나 니더작센지방당(NLP)이 아직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고 있었고 이러한 조직들, 각각의 집단들 또는 유권자 가운데 그들에 동조하는 이들의 표를 얻는 방법은 기독교의 근본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나치게 종교적인 발언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정강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관하여 북부 독일에 조직을 구성한 기민당(CDU) 자체도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였다. 기민당(CDU)의 영향력에 흔들리는 자민당(FDP)과 나중에 독일당(DP)으로 명칭을 변경한 니더작센지방당(NLP)과 마찬가지로 기민당(CDU) 자체도 특정 지역에서는 이러한 진보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아데나워는 헤르포르트에서 자기 생각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 그는 기민당(CDU)이 조직에서나 선거에서 오직 기독교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온건하게 제시해야만 우위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그 이상은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토 슈미트의 바람은 거부되었고 이에 대하여 그는 크게 화를 냈다. 그는 근본 원칙에 관한 편지에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고 네하임-휘스텐의 새로운 정강이, 결국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데나워의 비협조적인 지도 방식도 비판하였다. 지난 15년 동안의 경험을 하고도 그가 아직도 명목적으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랍니다.”    

 

이 직무대리의 당대표에 관한 이러한 식의 불평은 그 이후로도 자주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려는 자세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기민당(CDU)의 지도부에서의 라인지역당 당대표의 무게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레오 슈베링은 나중에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회의를 거듭할 때마다 지구당에 대한 [영국 점령지의] 지역위원회의 권위가 눈에 뜨이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오토 슈미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그 당시의 자기 노선을 견지하면서 더 멀리 볼 줄 아는 정치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크레펠트-위르딩겐에서 이미 그는 “권력을 지닌 아데나워를 매우 강력하게 체험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당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아데나워를 추대한 이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아데나워는 라인지역 지방장관인 로베르트 레어에게 강력하게 불평하였다. 그가, 선거로 수립된 의회의 전 단계로 새로 수립된 지역위원회에서 기민당(CDU) 당원들의 명단 작성에 앞서 아데나워가 당대표로서 정견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민당(CDU)의 지지율과 인적 구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1946년 내내 지속되었다. 여기에 다른 갈등 요소가 더해지다가 결국 봉합되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아데나워가 당대표로서 공직에 있는 당 동료들에게 자기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다른 당직자들도 이러한 아데나워의 태도를 곧 느끼게 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지사인 칼 아르놀트와 나중에 미국·영국 공동점령지역의 기민당(CDU) 원내대표를 맡게 된 프리드리히 홀츠아펠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다시 아데나워의 그 잔인할 정도로 철저한 문서 검토와 형식적 세부 사항에 대한 깐깐함을 다시 엿볼 수 있다. 이는 아데나워가 시장이었을 때, 그가 이런저런 자리에 앉혔던 모든 인물을 놀라게 했던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리에 오르자마자 라인란트 지역당 사무소를 자기 휘하에 두고 지역당 당대표에 걸맞은 조직체계 마련에 착수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오른팔은 요제프 뢴스였다. 아데나워는 쾰른시정에서 이 35세의 젊은이를 부관으로 높이 평가하였었다. 아데나워는 뢴스가 처음에는 좌파 이념에 매달렸었다는 것에 괘념치 않았다. 결국 그 당시 기민당(CDU) 안에서 어느 정도 과장된 사회주의적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 젊은이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좌파적 추세가 자기 주변에서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뢴스는 강력한 당조직을 구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948년 그는 쾰른시의 의원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일단 검증이 된 자기 사람들을 돌보았다. 1953년부터 뢴스는 외무부 인사부장으로서 아데나워 시대에 기민당(CDU)에 인물이 오랫동안 넘쳐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인력이 1966년 이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나중에 헤이그 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미 1947년에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은 사민당(SPD)과 나란히 매우 강력한 당조직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인 아데나워 시대가 시작된 1949년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당대표 직무대리였던 홀츠아펠은 1949년 6월 별로 자랑하지 않는 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일하게 기능을 수행하는 당 조직은 [영국 점령지의] 기민당(CDU) 지역위원회였다. 우리는 현재 우리 [중앙] 기민당(CDU)의 중추가 되고 있다.”   

  

아데나워는 그의 첫 기조연설을, 반쯤 파괴된 쾰른대학교 대형강의실에서 많은 사람을 앞에 놓고 하게 된 것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였다. 이 연설은 그가 그 이후 몇 년 동안 온 사방에서 선포한 모든 기본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     


그곳에 모인 4천 명의 청중은 여기에 한 노인이 한 세기 전체의 역사를 다루며 폐허를 벗어날 방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데나워는 이 이전과 이후 그 어느 연설에서도 이때처럼 탁월한 언변과 집중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     


먼저 그는 1932년을 회고하였다. 1932년 9월에 실시된 마지막 자유선거 때만큼이나 나치의 목소리가 낮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재난, 근본적이고 악마적인 폭력의 맹위가, 죄가 있는 사람이든 죄가 없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주는 것이 있었으니 이미 1914년부터 1924년까지 힘든 시기를 겪어 보았던 것이다. 자기 시장 시절의 공적에 대한 적당한 회고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질문을 제기하였다. “1918년에 수립된 [바이마르] 독일 공화국이 겨우 15년만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871년 수립되자마자 곧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그 당시 유럽의 여느 나라에 비하여 그토록 강하고 튼튼해 보이던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이 47년 뒤인 1918년에 벌써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토록 형편없는 제3제국이 세워질 수 있었는가? 어떻게 전쟁이 “처음에는 그리 혁혁한 전승을 거두다가 필연적으로 패배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아데나워가 매우 장황하게 웅변적으로 제시한 질문들을 제기하는 방법은, 자신이 그 당시 독일인의 심정에 대하여 전문가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나치를 단죄하고 있지만 동시에 전쟁 때 보여준 ‘용기와 의무에 충실한 것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엄청난 범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지나간 독일 역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도 자부심을 가질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저는 1933년 이래로 독일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마음속 깊이 부끄러웠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행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제, 이제 저는 독일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랑스럽습니다. 1933년 이전에도, 1914년 이전에도 이 정도로 자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강한 용기’다. 독일 민족은 이러한 용기로 자기 운명을 짊어지고 갔다!   

  

그런데도 의문이 남는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어떻게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는가? “저는 죄의 고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양심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자기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재건을 향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관료들, 고위 장성들, 대기업가들’의 죄가 크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폭넓은 지지가 없었다면 권력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독일 민족은 수십 년 동안 “국가를 우상으로 만들고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개인, 그 존엄, 그 가치를 이 우상에 바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국가 만능주의”의 이념사적 근거가 제시되었다. “유물론”에 관해서는 국유화와 연관시켜 언급하였다. 군국주의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본론에서 벗어난 “프로이센 국가 이해”에 관한 이야기도 간단히 하였고 계급투쟁도 다루었다. 세 문장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그는 인종차별, 나치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한 묶음으로 얽어버렸다. “나치주의에는 칼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가장 덜 물든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정신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부터는 긍정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기민당(CDU)이 기독교 자연법의 근본 원칙을 되살릴 것이라고 하였다. 기민당(CDU) 정강의 근본 원칙은, 사실 아데나워의 정강인 것으로 인간의 유일무이한 존엄, 인간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교육, 민주주의, 경제의 기본원칙이 연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아데나워는 근본 원칙에 대하여 일단 충분히 말하였다. 단 하루 만에 훌륭한 정당 연설가가 된 그는, 이제 그의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쿠르트 슈마허와 사민당(SPD)에 집중하였다. 사민당(SPD)이 ‘기독교에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독교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슈마허는 그들이 과거에 한 대로 선동적인 방식에 매달렸다. 사민당(SPD)의 성명에서는 ‘과거 프로이센 정신’이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말이 다시 옆으로 새 나갔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신앙이 부족하고 기독교에서 멀어진 민족입니다. 이는 1914년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베를린이 많은 소중한 특징을 보여주었지만, 그 당시 이미 저는 베를린에 오면 늘 이교도의 도시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 이어졌다. 여러 의미를 담고, 정신적으로 매우 까다롭고, 마사여구가 없는 가운데에서 분석과 웅변과 선전을 잘 섞고 있다. 잘못을 단죄해야 하지만 협력자나 군인은 물론 나서지 말아야 했지만, 그들을 배척하지는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로 인도된 이들과 조용히 대화해야 하지만 선전해서는 안 된다.     


연합군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다. “독일 민족은 나치의 죄에도 불구하고 독일 역사의 이 단계에서 홀로 단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독일은 점령군의 처지도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가 수십 년 전부터 주장해온 화해의 개념을 조망하고 가리키고 있다. “저는 … 1920년대에 지속적인 평화의 보장을 위하여 프랑스, 벨기에, 독일 경제의 유기적 결합을 주장하였습니다. 동일한 경제적 이익을 나란히 추구하는 것이 민족들 간의 선린관계에 가장 건강하고 지속적인 기초가 되고, 또한 늘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몇 년에 걸쳐 생각을 준비한 취리히 연설을 하기 반년 전에 아데나워가 매우 중요한 구호를 언급하였다. 이 연설은 그 반대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였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통일국가. … 유럽 통일국가는 독일의 서쪽에 있는 국가들에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속 가능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유럽 통일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독일을 갈라놓지 않고도 이러한 이웃들에 충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제국, 곧 중앙집권적 제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군국주의는 사망을 고했습니다. 독일의 경제적 충족과 안정, 민주주의와 민족 화해 원칙에 대한 독일의 지지, 독일과 영국을 포함한 서방 이웃의 경제적 이익의 결합이 있습니다.”     


새로 선출된 당대표의 앞으로 4년을 대비한 일종의 시정연설로 여겨도 될 수 있는 이 연설의 결론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쾰른식으로 말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앞에서 이어진 두 시점에 관한 파노라마와 같은 전망과 사방에 대한 공격 이후의 [이탈리아] 희가극에 나오는, 마침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진지한 뜻을 지닌 것이다. 쾰른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중앙역이 이 자리에 남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허용할 경우 이 도시의 불구화가 영속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데나워의 참모습이다. 독일과 유럽에 대한 포괄적인 계획안, 장대한 아이디어를 전개하면서도 쾰른의 중앙역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그에게 남아있던 21년 동안의 역사가 보여준 대로 쾰른 중앙역을 쾰른 대성당에서 떨어뜨리는 것보다 혼란에 빠진 민족을 유럽에 통합시키고 대륙을 안심시키기가 실제로 더 쉬운 일이었다.     


쾰른대학교에서 한 연설은 출발 신호였다. 당대표는 어느 모로 고향 도시의 제단에 제물을 바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가 시장일 때 유명했던 그 무서운 속도로 다시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덜덜거리는 ‘호르흐’ 자동차를 타고 쉬지 않고 지역 곳곳을 돌아다녔다. 선거유세, 당대표 회의, 당대회, 다른 정당 대표와의 협상, 영국군과의 협상, 지역위원회 회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회에 참석하였다. 쾰른에서 많은 편지가 도착하였고 주말에는 뢴도르프에서 편지가 지역으로 발송되었다.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이제부터 서부 독일 정치의 모든 측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많은 이들에게 정치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다. 영국 점령지역 안에서의 당직에 더하여 그는 함부르크 점령지역 위원회와 라인지역 지방위원회 의원, 1947년부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지역 기민당(CDU) 지역당대표, 기민당·기사당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 위원, 4개 점령지역과 베를린 협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위원회들에서 그는 당시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정치가와 행정 수장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점령군청의 고위직 인사들과 더불어 그들의 연락관들과도 접촉하였다. 이들은 1949년까지 적잖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시장 재임 시절부터 폭넓은 개인적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전후에 출세한 인물들과도 알고 지내게 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대등하게 지냈다. 그의 시야가 더 넓어질수록 그의 자신감도 남몰래 더욱 커져만 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윌리엄 스트랭이었다. 그는 베를린 영국군정청에서 고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15일 그는 아데나워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쿠르트 슈마허와 야콥 카이저와 함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수립에 관한 설명을 듣기 위하여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스트랭은 아데나워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신중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런던에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정치적 인물입니다. 아마도 그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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