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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10. 2023

정당 지도자 2

1945~1949

당대표    

 

어떤 자질이 아데나워가 당대표로서 경쟁자들을 물리치도록 하였을까? 이미 몇 가지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곧 그 당시에는 중요한 요소였던 직무 연배, 1933년 이전에 쌓은 명성, 그의 추종자들의 후광, 지략, 강인함, 조직력, 이성적 엄격함, 정신적 육체적 강인함, 그리고 또한 자기 생각이 옳고 의롭다는 것에 대한 추호의 의심이 없는 놀라운 자기확신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더 많다. 그는 전체적인 정치 지형을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지역위원회에 제출한 비밀보고서를 분석해보면 그가 4개의 점령 세력 간의 대립을 파악한 본능적 확신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제 관계, 경제적 상황, 독일의 헌법 발전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그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 정당제도의 상호의존성과 중요 인물들의 의도와 한계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가능한 변화 추세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상황을 잘못 판단했을 때 그는 언제든 적절한 보완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설득력 있는 논리로 더 나은 것을 [그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 그는 전후 초기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모든 힘을 기울여 바람직한 변화를 도모하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다른 대부분의 정당 정치가와는 달리 그는 상황에 좌우되는 전략적 사고를 따르기보다는 주로 장기적으로 이룩하게 되는 바람직한 발전에 관한 생각을 장기적인 시각의 전략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전후 첫 시기에 외교를 가장 우선시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승국이 [독일의] 전체적인 발전을 좌우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전승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1945년 중반부터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유럽과 독일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서유럽 열강이 아직은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기민당(CDU)을 포함한 비공산주의 정당의 지도자들도 상황을 잘못 판단하거나, 상황판단에 맞는 강력한 결론을 이끌어낼 힘이 없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사람들이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는 자기 당 동료들에게 먼저 내부적으로, 그리고 1947년 중순부터는 매우 공개적으로 자기 정치적 세계관을 선전하였다. 그가 쉼 없이 주장하는 것에 따르면, 정당정치적인 결정이라는 것이 원래,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적 상황에 관련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주요한 위험이 러시아에서 나오기에 모든 논의가 소비에트의 영향력에 맞서는 것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1946년 중반에 그는 모스크바가 “독일공산당(KPD)과 사민당(SPD) 일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서 주도권 장악”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가 반사회주의 블록을 구성하기 위하여 강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뮌헨의 샤르나글, 함부르크의 페터센, 자민당(FDP)의 하일레를 포함한 여러 사람은 대화와 장문의 편지를 통하여 불만을 호소하였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권력을 추구하는 독일공산당(KPD)과 독일공산당에 호의적인 사민당(SPD)의 활동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여름에 수립된 정당 체계는 양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45년 9월 1일 함부르크의 시장 페터센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했다. “최근에 전개되는 일에 후환이 따르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곧 한편으로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수립된 정당인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DP)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이 서있습니다.” 사민당(SPD)은 독일공산당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쾰른에서 진행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쾰른에서 아데나워의 오랜 정적인 괴를링거가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일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민당(SPD)의 우파 세력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태가 전개되는 데에 따라 기독교 민주주위 정당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칼 슈베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실제로 1946년 2월과 3월에 [독일] 동부지역과 동베를린에서는 독일공산당과 사민당(SPD)이 연합하였다. 이는 어느 모로는 분명히 강제 통합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당(SPD)의 주도적 인물들과 많은 풀뿌리 당원이 자발적으로 추구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해 상반기에 그가 두 가지 차원에서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는 쿠르트 슈마허가 런던의 망명위원회와 관련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무조건 분리하고 당 내부적으로도 이를 관철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이 1945년 여름과 가을에 양당 대화를 통하여 사민당(SPD)에 지속적으로 요청해왔다. 둘째로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은 단일한 반사회주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던 반사회주의 정당들의 통합 과정이 1945/46년 겨울에 멈추게 되었다. 자민당(FDP), 니더작센 지방당(NLP), 그리고 바이에른의 기사당(CSU)조차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반사회주의 정당은 느슨한 개념 이상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또한 기민당(CDU) 자체도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판단과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서방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하여 그러나 베를린의 당 본부에서는 아데나워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였다.    

 

게다가 1946년 여름 파리 외무장관회의에서 소련이 독일 민족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민족주의라는 카드를 들고 나오고자 하는 의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결과 대표적인 민주주의 경향을 보인 베를린 기민당(CDU)의 야콥 카이저가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1919년 2월 1일 쾰른의 한자강당에서 라인지역의 저명인사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놀라움으로 지역당위원회의 지도부는 이 전임 시장이 어떻게 외교정치가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당의 모든 책략을 국제정치라는 큰 차원에서 억제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러시아는 이제 “독일을 위하여 독일 국기를 높이 게양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는 독일인들이 민족주의라는 주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러시아는 분명히 이를 통하여 독일민족 전체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추구한 것입니다. 곧 러시아가 공공연하게 정한 대로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통일된 독일의 정책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괄호를 친 문장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곧 ‘러시아의 주도 아래’ 말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그의 생각에 영국이 예상치 못하게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수립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근거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결정을 매우 환영하였다. 그러나 쿠르트 슈마허는 아데나워의 찬성만큼이나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비록 그가 독일의 경제적 통일의 회복을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여겼지만, 이제 “차선책으로 러시아의 점령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세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통일된 경제생활을 영위하도록 해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는 그들이 점령한 서쪽 3개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허용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전승국의 외교정책은 1948년까지 분명히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는 급격한 전략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영미 세력은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프랑스는 부정적인 역할을 물고 늘어졌다. 원칙적으로 서방으로 기울은 아데나워는 서방 세력이 그들 나름대로 공정한 정책을 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야만 [독일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비로소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는 합리적 협력이라는 제 생각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쿠르트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와 동시에, 독일민족이 매우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무조건 프랑스나 영국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어떤 노선을 추구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가 이 시점에서 이미 프랑스에 크게 기울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1945년 가을부터 그는 편지를 통해서나 내부적인 토론에서 계속 안보 트라우마와 심각한 경제적 이해관계에 지배당하는 프랑스 정치의 근시안적인 측면을 비판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프랑스가 단독으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는 서유럽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당 동료이며 나중에 독일 중립주의의 선봉에 서서 이를 세상에 알린 울리히 노아크 교수에게 1946년 4월 8일에 보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귀하가 오로지 프랑스만을 유럽을 이끄는 강대국으로 여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봅니다. 프랑스는 생물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러한 역할을 하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저는 유럽을 영국과 함께 프랑스가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결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유럽에서 강대국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유럽의 단독적인 지도적 강대국으로 묘사된다면 영국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받아들일 만한 정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쾰른의 변호사인 만슈테텐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아데나워가 어려웠던 시절에 신뢰할만한 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저는 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무서워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또한 영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무서워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분명히 독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이러한 발언의 맥락에서 그가 분리주의자라는 의심을 배격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담겨있기도 하다. 곧 그러한 생각에서 그는 이미 이 초기에 자기 유럽정치에 관한 시험적인 접촉을 이끌어보려고 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아데나워가 1945년 여름부터 머리에 담고 있던 유럽 지도에서, 대륙은 이미 둘로 갈라져 있었다. 서유럽이 어떻게 정리가 될지 아직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한 가지는 필수적이었다. 베를린의 기민당(CDU) 지도부가 독일 서부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베를린의 기민당(CDU)이 인정하든 않든 간에 이 당은 분명히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한다면 당의 동료든 아니든 간에 안드레아스 헤르메스, 그리고 1945년 말부터는 카이저와 레머가 이끄는 ‘제국 기민당(Reiches-CDU)’이 베를린과 동부지역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처음으로 쾰른 지역 밖으로 촉수를 뻗치기 시작한 1945년 8월과 9월 초부터 1948년 초까지 전략적 상황은 계속 변했지만, 근본적인 구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베를린 기민당(CDU) 지도부는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독일 전체 지역의 기민당(CDU)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 아데나워는 서부지역에서 당의 내부적인 연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아데나워에게 베를린의 당료들의 가장 못마땅한 점을 나열해 보라고 한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먼저 주도권을 요구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는 [베를린의] 당 지도부가 서부지역에서도 발언권을 지니게 될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서부지역의 기민당(CDU) 조직, 무엇보다도 영국 점령지역의 조직은 보통 선거를 통하여 가장 인상적인 정치 세력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에 비해서 지역 규모가 작은 동부에 있는 기민당(CDU)이 주도권을 주어야 하는가? 또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카이저와 레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기민당(CDU)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파벌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아니면 거의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파벌이 이미 잠정적으로 와해된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목적의 선포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독일 전체에서 강화시키게 될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이 스스로 외교적, 경제정책적으로 ‘동과 서를 이어주는 다리’로 여겨야 한다는 야콥 카이저의 구호를 매우 불신하였다. 얼마나 오만불손하면서도 부주의한 말인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 영국의 역할이다. 아데나워는 영국 통제위원회가 베를린의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무리에게 호의적이며 때가 되면 영국 점령지역의 당 지도자에 맞서도록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더 나아가 어쩌면 당내의 사회주의 파벌과 힘을 합쳐서 아데나워를 몰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영국 측은 노동당 정권 아래에 있는 공무원과 관리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념적인 공감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 측이 베를린의 기민당(CDU) 지도부에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일 정책에 관한 숙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부지역의 사민당(SPD)은 1946년 초부터 활동을 금지 당했다. 이 지역에 남은 유일한 비공산주의 세력은 동부 기민당(CDU)이었다. 언젠가 독일의 동부와 서부가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든 지역의 기민당(CDU) 지도자들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모로는 소련도 받아들일 만한 집단 지도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카이저가 이끄는 기민당(CDU)은 원칙적으로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와 협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세우는 매우 강력해 보이는 두 정당이 독일사회주의통일당*과 독일공산당(KPD)에 맞설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 독일사회주의통일당 [SED, 역자주 – 후일 동독의 독재정권을 수립한 당]     


여기에서 다시 카이저와 레머의 지도자 능력에 대한 아데나워의 불신이 대두된다. 아데나워가 베를린에 있는 당 동료들에 대한 커다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기에, 그의 진단으로는 카이저와 레머가 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 당내 권력 투쟁에서 [아데나워]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분명히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겨우 기독교 노조지부 서기를 역임한 자가 이제 기민당(CDU)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아데나워를 화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직무대리인 에른스트 레머가 이전에 독일노동자조합과 사무직협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는 [히틀러를 위한] 전권위임법에 찬성했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조직적으로 동부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는 베를린의 중앙당(Zentrum)이 공격하고 있다고 여겼다. 1945년 여름부터 특사가 서부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의 설립자들이 베를린의 지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이 열심히 활동하는 베를린 출신 변호사인 오토 렌츠였다. 그는 헤르메스와 카이저와 마찬가지로 6월 20일 사건 때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5년 후에 아데나워는 그를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선전기구 설립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아데나워는 1953년 선거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처음에 렌츠는 그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하인리히 크로네 또한 이 시기에는 아데나워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베를린 ‘제국지도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1950년대 초반부터는 아데나워 정책의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였다.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제국모임’은 베를린의 당대표인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를 지도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시도였다. 러시아의 미숙함 때문에 이 기도가 좌절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쫓겨난 안드레아스 헤르메스의 시도 뒤에는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표 자리를 노리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는 베를린의 지도부가 시도한 새로운 전략이었다.     


여기에서 헤르메스가 성공하지 못하자, 영국 점령지역의 새로 선출된 기민당(CDU) 당대표, 곧 아데나워는, 이제 야콥 카이저가 영국과 미국 점령지역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적 정책에 동의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모든 기민당(CDU) 세력에게 제국 수도에 있는 기민당(CDU)이 당분간 합법적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고 맹세하도록 주장질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는 1946년 3월에 새로운 ‘제국회의’를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할 계획까지 세웠다.     


카이저는 일단 베스트팔렌과 라인란트에 있는 노조 세력의 지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조직 출신이기도 하였다. 베를린의 당대표가 3월 중순에 영국 점령지역으로 오자 뒤셀도르프, 에센,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의 사회위원회가 대대적인 환대를 하였다. 이와 같은 시간에 카이저 휘하의 사무총장인 게오르크 데르팅거는 영국 점령지역의 군협회와 주협회의 주소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데르팅거는 오토 렌츠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조직력을 지닌 변호사였다. 아데나워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카이저를 중심으로 자기를 구석으로 몰기 위한 당내의 반대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눈치를 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다. 곧 카이저가 영국 점령지역에 힘차게 발을 내디딘 것은 실제로 영국 점령군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는 영국 비행기를 타고 왔다. 영국 통제위원회는, 영국 점령지역 안의 기민당(CDU)의 사회주의 노선을 보호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을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즉각 반응했다. 그가 오랫동안 서신 교환을 통하여 공을 들여온 남부 독일, 특히 바이에른과의 연합이 이제 구체화 되었다. 1946년 4월 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아데나워와, 미국 점령지역에 있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지도급 정치가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방장관인 테오도르 슈텔처를 대동하였다. 기사당(CSU)은 지역당 당대표인 요제프 뮐러와 본 프리트비처 대사를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는 1933년 워싱턴에서 독일제국을 대표하였던 인물이다. 힐퍼트 장관은 헤센의 기독교 민주당원들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노르드바덴 지역의 기민당(CDU)을 대표해서는 주지사 대리인 하인리히 쾰러가 참석하였다. 뷔르템베르크 기민당(CDU)을 대표해서는 앙드레와 에르싱 장관이 참석하였다. 누가 이들을 초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이룩한 합의는 놀라운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독일 정당정치의 발전에 중요한 이 모임의 회의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데나워의 비망록을 통하여 알려졌다. 그는 이 만남이 끝나자 참석자들에게 그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이 회의에 이어서 카이저와 가진 회담에 관한 보고서도 전하였다.   

  

슈투트가르트에 모인 인사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기민당(CDU) 단체들을 하나의 당으로 합칠 것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 당의 명칭에 ‘기독교 연합’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것에도 합의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영국군 당국에 관련 제안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그럴듯하게 적었다. “모든 참석자는 베를린과 러시아 점령지역의 기민당(CDU)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또한 앞으로 당 지도부는 베를린이나 러시아 점령지역 안에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도 합의하였다.” 사실 이는 베를린의 당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베를린이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독일 전체의 당 지도부가 위치하는 곳이 될 수 없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당 지도부가 있을 자리를 정하도록 노력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라인강 줄기를 따라 있는 지역에 있어야 했다.” 헤센에 양보하였다. 헤센은 카이저가 ‘사회주의 질서’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였지만, 베를린과 모든 프로이센적인 것에 대하여 커다란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발터 디르크스, 오이겐 코간과 같은 당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얼마 후에 《프랑크푸르터 헤프텐》에 기독교 민주주의의 언론계 대변인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럽통합 운동의 근본주의적 민주주의 파벌의 선구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지역을 초월한 정당을 수립하기 위하여 진지한 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점과 중심은 서쪽에 있어야 했다. 이리하여 베를린과 [독일] 동부지역의 기민당(CDU)은 곁가지로 남아야 하는 것이었다.     


카이저의 계획의 근저에 놓인 ‘베를린에 동부와 서부의 종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공산당 선언(manifesto communismus)은 위대한 업적이다.’와 같은 생각은 거부되었다. 이 회의에서 만장일치를 보인 의견은 ‘우리는 사회적이다.’나 ‘기독교 사회주의’와 같은 구호를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 구호를 받아들일 때 혼란과 불만만 초래할 뿐이었다. 특히 기사당(CSU)이 그러할 노릇이었다. 다만 사회정책 계획을 조속히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카이저가 계획한 제국모임은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아데나워에게 그러한 결정을 야콥 카이저에게 전하는 일을 맡긴 것에 대하여 그는 불평하면서도 만족해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비공식적이지만 서부지역 기민당(CDU)의 대변인이 되어 카이저에 느긋하게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영역에서 사냥할 용기를 내게 되었다. 며칠 후에 카이저는 뢴도르프로 아데나워를 방문한 자리에서 자기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이 비망록은 그다음날 긴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이 토론에는 칼 아르놀트도 참여하였다.  

   

한 때, 곧 1936년 여름에 뢴도르프는 야콥 카이저가 아데나워와 불편한 만남을 가졌다. 이번의 토론도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카이저는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는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의 좌파 세력을 대표하는 아르놀트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당명을 ‘기독교 연맹’으로 바꾸자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지방당들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를 승인을 하게 되는 연합군들도 반대할 노릇이었다. 카이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명에서 ‘민주주의적’이라는 형용사를 지워버린다면 기독교 정당을 그저 반동들의 집단이라고 중상모략하는 반대 정당들에 공격할 빌미를 거저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베를린의 기민당(CDU)이 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도 하였다. 이에 아데나워는 자기 뜻을 철회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미군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들을 설득할 것을 약속하였다. 여기에서 카이저는 매우 중요한 양보를 하였다. 곧 그가 미군 점령지역의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는 것에 원칙적으로 그에 전혀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이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과는 다르게 말이다.  

   

카이저가 계획한 ‘제국모임’이라는 명칭도 그 용어가 불확실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이 점에 대해서도 반대를 제기하였다. 카이저는 어찌 되었든 서부지역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초대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들은 회의의 결정 사항에 대하여 아무런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데나워는 다른 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야콥 카이저가 독일 동부지역의 문제에 관하여 소련과 폴란드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노선을 택하였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이 그를 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다른 이들을 통하여 접하게 된 아데나워는 그의 남부 독일의 당 동료들에게 베를린과 러시아 지역에서의 기민당(CDU)의 명성을 최대한 강화하는 일을 권유하였다. 어찌 되었든 카이저는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곧 “독일의 서부와 더불어 남부 지역은 독일이 다시 주권을 찾고 나서 베를린이 새 독일의 정치 중심지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당명에 ‘기독교 연합’이 들어가는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아데나워는 사실 그가 관여한 모든 안건에서 카이저의 반대를 물리치게 되었다. 당명에 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어리석은 생각에 대하여 뒤늦게 수정을 가하고자 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아데나워가 동부지역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이라는 비난을 할 수가 없었다. 베를린을 수도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에 아데나워의 입김이 얼마나 작용한 것인지, 그리고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기민당(CDU)의 보수 계파의 강력한 요청을 얼마나 대변한 것인지는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어찌 되었든 카이저는 서부지역의 지방연합체들이 베를린 조직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1947년 말까지 상황이 자신에게 이롭게 변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돌아간 다음 그는 영국 측에 서부지역의 반동들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고, 아데나워는 서유럽 세력이 베를린에 머물지 않고 독일이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12) 카이저는 이를 핑계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실을 알고 있다. 곧 아데나워가 1945년 중순부터 독일이 실제로 분리될 것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현실 정치에 대한 상황판단에서 나온 처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베를린 반대 정서’나 러시아에 대한 평생에 걸친 거부와 같은 억지로 끼워서 맞춘 동기 가설을 들먹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국 점령지역의 당대표와 베를린의 당지도부가 그 이후 몇 달에 걸쳐 주고받은 논쟁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이 싸움에서 결코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7년 초반까지 4개 전승국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데나워가 아니라 카이저가 기민당(CDU)의 지도적 인물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 점령지역 안의 아데나워에 대한 지지 세력이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바이에른의 기사당(CSU)에서는 극보수적인 연방주의자들과 당대표인 요제프 뮐러 사이에 격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뮐러는 야콥 카이저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 점령지역에 카이저를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데나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자인 요하네스 알버스와 칼 아르놀트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대표단에서 아데나워의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과거 독일민족주의 계파에 속했던 프리드리히 홀츠아펠도 자주 베를린을 방문하였다.   

  

쾰른과 베를린 사이에 당쟁 중지 결의가 가끔 맺어졌지만 늘 깨졌다. 아데나워는 자기 지역 단체를 외부와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가 1946년 9월 첫 지방선거에서 격렬한 선거운동을 벌인 끝에 압승을 거두게 되어 그의 지위가 당분간은 공고화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신생 기민당(CDU)은 단번에 49.1%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사민당(SPD)은 30.2%로 2위에 머물렀다. 어느 시대든지 정당의 지도자에게는 선거의 성과가 최고의 무기가 되는 법이다. 아데나워는 ‘사회주의적이 아니라 사회적인’(sozial, nicht sozialistisch ist) 정책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아데나워의 선거 승리 전에 요하네스 알버스는 친구인 야콥 카이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민당(CDU) 저변의 분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를 경배하고 있습니다.” 당내 좌파 지도자인 알버스 자신도 성공을 거둔 당대표의 노선에 자기 입장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당 동료들과 벌인 거의 2년에 걸친 논쟁에서도 이 대립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외부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적어도 선거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가 사태의 전개 과정 전체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근본 원칙의 문제에 대해서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7년 4월에 개최될 예정인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외무장관회의를 염두에 두고 베를린은 기민당(CDU)의 지방당 단체들의 통합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기민당(CDU)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독일이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뉘는 것을 막고, 그리고 어쩌면 제국 정부의 수립에 이를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할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모든 정황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방당 대표들의 매우 중요한 회의가 2월 5일과 6일에 걸쳐 타우느스의 쾨니히슈타인에서 개최되었다. 카이저는 이제 기민당·기사당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의 구성을 강력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이 기구의 외교대변인으로 삼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것이 외교정책과 또한 미래의 당지도자를 미리 결정하는 일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회의 참가자에게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카이저는 헤센과 기사당(CSU)의 지지를 확언하였다. 그곳에는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아데나워가 너무 강해졌다고 우려하는 정치가들도 있었다. 당의 모든 실력자가 쾨니히슈타인에 모여들었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인 아데나워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그래서 이미 5개 상임위의 구성이 결정된 다음이었다. 여기에는 외교상임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이저는 다시 한번 매우 공개적으로 1945년 여름 베를린에서 ‘제국 전체 차원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혔다. 제국의 수도는 궁극적으로 그 어느 점령지역에도 속하지 않고 차라리 통제위원회가 있는 곳이 좋고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하였다.     


외교상임위의 의장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바이에른 측에서는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주미 대사를 역임한 폰 프리트비츠와 가프론 남작을 후보로 천거하였다. 에른스트 레머는 야콥 카이저를 추천하였다. 이에 아데나워 진영에 속하는 인사는 결정을 하루 미루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폰 프리트비츠는 후보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이제 에른스트 레머는 노골적으로 나서며 이 직위를 카이저에게 수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베를린 측 인사들은 깊이 상처받았다고 느낀 것이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서부지역에서 베를린 측의 움직임에 대한 불신을 이끌었던 모든 사례를 제시하였다. 마침내 아데나워 자신도 이 소동에 끼어들었다. 그는 폰 프리트비츠를 매우 뛰어난 전문가로 여겼다. 그러면서 야콥 카이저의 외교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게다가 또 문제가 있었다. 과연 날마다 ‘연합군의 압력을 받을 수 있는’ 베를린 인사에게 대변인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이 말의 핵심에는 물론 두 가지 외교정책적 구상의 대립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었다. 곧 서부지역의 지향과 ‘동부와 서부의 균형과 다리’의 대립이었다. 이를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그랬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베를린 기민당(CDU)의 단골 [정치] 논쟁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벌써 다시 검은 제국군대의 수립’에 관한 한심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매우 격양되었다. 카이저 진영의 각료인 카첸베르거는 공동위원회의 대표단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여기에서도 논쟁은 마찬가지로 벌어졌다. 카이저는 이제 그의 성격대로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 자신이 ‘운명적으로 그 자리를 맡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나중에 자세히 알게 된, 헤센의 기민당(CDU) 출신인 에리히 쾰러는 이전에는 그에게 그렇게 간언하더니, 인제 와서는 카이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하였다. 이제 쾰러는 카이저와 레머에게 직접 문의하였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의 깊은 이유가 카이저가 당 전체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카이저와 에른스트 레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카이저는 급한 성격으로 자주 곤경에 빠지곤 하였는데, 이번 경우에도 발끈하였다. 그는 자기 요청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데나워는 물고기처럼 냉정을 유지하며 더 이상의 토론이 무의미하다는 설명과 함께 방을 떠났다. 실무적인 외무상임위의 수립은 좌절되었다. 폰 프리트비츠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자료를 모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깨진 도자기를 다시 풀로 붙이려던 베를린 인사들의 시도는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카이저의 주도권 요청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그가 계획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초당적인 ‘전국 대표단’을 구성하려던 것도 무위로 돌아갔다. 슈마허는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도자들과 함께 한자리에 앉으려는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아데나워도 모스크바회의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와해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 아데나워의 [행운의] 별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야콥 카이저는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1947년 레클링하우젠에서 개최된 지역 당대회에서 카이저가 발언하도록 허락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연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지도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세계사는 어느 모로 이 두 사람의 상이한 외교정책과 경제정책 계획에 대여 최후의 심판을 내렸다. 전승국들이 1947년 12월 런던회의에서 다시 아무런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기민당(CDU) 내부에서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아데나워의 비관적인 상황판단이 정확한 것이었고 카이저는 동유럽과 서유럽이 화해할 가능성을 오판하였던 것이다. 1947년 말에 소비에트 군정청은 그를 동부 기민당(CDU) 당수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이리하여 그의 권력 기반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아데나워가 그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1946년 가을부터 당내의 논쟁에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사민당(SPD)과의 관계, 영국 측이 강요한 라인과 루르지역의 광산업의 국유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연정 문제였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서로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에 결국 영국 점령지역의 당의 단합이 늘 걸려 있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여기에 참여한 계파나 대표 정치가들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 안에 깊숙이 내치 차원의 전선을 형성하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쿠르트 슈마허의 지도 아래 사민당(SPD)이 공산주의와 분명한 선을 긋고 난 다음에 조심스러운 탐색 단계가 시작되었다. 양당의 대표들은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지역위원회의 제정회의에 참석하였다. 영국 측은 이 정당 대표들의 회의를 식민지 통치에서 활용한 점령지역 주민대표들의 회의 형식에 따라 구상하였다. 곧 여기에서 사람들은 점령군이 논의 주제로 제시한 것, 또는 의견 제시가 허용된 사안에 대해서만 토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대표들은 제안할 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점령군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많이 내려지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당대표로 당선되자마자 이전의 함부르크 총사령부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는 군대 행사로써 개막식이 거행되었다. 밤에는 함부르크 시청 회의실에서 매우 격조 있는 만찬이 벌어졌다. 니더작센의 주지사 코프의 중재로 여기에서 아데나워와 슈마허의 첫 대담이 이루어졌다. 코프는 점령군에 맞서 독일의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일에 애쓰고 있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이때까지도 슈마허는 영국 측이 제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저항 세력의 순교자였다. 심각한 전쟁 부상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이 지배하는 동안 집단수용소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언변, 전승국 인사들에 대한 당당함,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재물을 수호하는 정당’인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에 대한 신랄한 비판, 마르크스주의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열정적인 국가사회주의를 선포한 것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 대화를 통하여 두 가지 근본 문제에 대한 괄목할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슈마허에게나 아데나워에게나 모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식량 사정 의 개선을 위하여 전승국이 포괄적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슈마허가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사민당(SPD) 측에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 것을 아데나워는 단호히 반대하고 그 결정을 차기 선거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다. 이른바 대결용 총을 나누어 가진 다음 아데나워는 연회장을 떠나 숙소인 페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이 너무 추워서 그는 옷과 망토를 입고 자야할 정도였다.     


정치극에 함께하거나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매우 싫어하는 두 거물 정당 대표가 충돌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러한 즐거움을 그로부터 6년에 걸쳐, 쿠르트 슈마허가 사망할 때까지 자주 누릴 수 있었다. 영국군 인사들도 이를 재빨리 간파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당시 중령이었던 아난은 1946년 여름 그 두 사람이 충돌한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하였다. ‘키트’ 슈틸은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당수를 베를린으로 초청하였다. 이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수립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아난이 그 두 사람을 모시러 왔다. “그렇게 나는 바람이 불던 오후 뤼베케 근처의 공항에 서 있었다. 내 곁에는 아데나워가 있었다. 침착하고, 검은 정장과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근엄하면서도 태연자약하였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성은 늘 나의 탄복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놀리거나, 우아한 언변으로 그의 생각에 영국인들이 다시 한번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할 때, 그의 지성에서 나오는 짓궂은 농담도 나를 감탄시켰다. 내 다른 편으로는 슈마허가 서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는 바람에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늘 그렇듯이 그의 왼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몸은 집단수용소에서 당한 고문으로 구부정하였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악마적인 에너지와 격정적이고 조급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 나는 이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서로 어떻게 인사하게 될지를 생각하며 긴장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라면 이 두 대립되는 정당의 지도자들이 틀림없이 고난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 예절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비행기 안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아데나워와 슈마허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마도 연령차도 여기에 작용하였을 것이다. 권의주의적인 아데나워가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사람이 주도권을 주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리라는 사실은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원래 3월 24일 기조연설에서 자기 대답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두 문장으로 다짐하였다. 곧 “독일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 진지한 협력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의 30분에 걸쳐 사민당(SPD)과의 논쟁거리를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특히 쿠르트 슈마허가 ‘주도권’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다. 슈마허는 지체 없이 반박하며 이후로 6년 동안 공개적으로 인신공격을 펼쳤다. 곧 기민당(CDU)은 ‘반동들을 모아 놓은 물통’이며 아데나워는 ‘모든 반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반동’이라고 외치고 다닌 것이다.     


9월 지방선거에서 급속하게 강화된 사민당(SPD)에 대한 인신공격에서 아데나워는 곧 바로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 있는 비난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곧 그는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사민당(SPD)이 영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실질적인 ‘여당’으로 행세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실질적으로 영국 지역에서 중앙 기관에 강력한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행사한 것과, 만연한 [사회적] 곤경을 동일시하였다. 영국군은 독일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으니 영국과 한패가 된 당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이토록 간단했고 이는 매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선거 전략은 이미 많은 영국 측 인사들이 그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상당한 거부감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1949년 연방정부 총선에서도 그는 여전히 영국 점령지역에서 써먹은 비난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곧 사민당(SPD)이 영국의 모든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곧바로 여기에 또 다른 교활한 중상모략이 더해졌다. 영국이 이념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독일의 경쟁력을 약화하기 위하여 사회주의를 독일에 심으려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이 두 가지를 확신했다고 분명히 여길만하다. 사실 그가 온 사방에 소동을 일으키고 매우 확신에 찬 중상모략은 하는 것은 그의 모든 선거 승리의 본질적인 비밀에 속한다.     


힘 있는 영국 인사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새해 초기부터 이미 영국 점령군 세력과 아데나워 사이의 분위기가 매우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한 달 동안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하였다.21) 그런데 런던은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영국은 식민세력이 파문을 선고한 사람이, 오히려 이를 통하여 자기 민중들 사이에서 거의 흔들리지 않은 명성을 누리게 되는 것을 식민지에서 자주 경험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영국 측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의 당내 반대 세력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마음껏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때로는 회의적이었다. 영국과 시민당(SPD)과 중앙당(Zentrum)은 기민당(CDU)의 당내 투쟁이 분당을 가져오게 된다면 싫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불화의 씨앗은 사회화에 대한 문제였다. 망설임 끝에 런던의 내각은 1946년 가을에 원칙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라인과 루르지역의 광공업의 국유화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단은 특정한 조건에 대한 해명이 전제되는 결정이었다. 독일 측에서는, 이와 관련된 법적 규정에 대한 책임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영국 군정 당국의 승인과 시행에 따르도록 하였다.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 심지어 기민당(CDU)의 좌파도 이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핵심 산업의 근본적인 쇄신을 시작할 길이 열린 것으로 보았다. 1946년 여름 루돌프 아멜룬센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는 이미 아데나워의 인생길에서 여러 차례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먼저는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서 아데나워의 1학년 동급생이었고 후일 나치 시대에는 함께 박해받았다. 아멜룬센은 가톨릭 사회개혁가인 칼 손넨샤인의 계파에 속하였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오랫동안 사민당(SPD) 주지사이었던 오토 브라운의 개인 자문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프로이센 내무장관이었던 칼 세베링과 그의 사위인 발터 멘첼과도 좋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원래 무당파였다가 나중에야 중앙당(Zentrum)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CDU)의 파벌보다는 사민당(SPD) 사람들과 중앙당(Zentrum)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사민당(SPD)의 강력한 개입으로 기민당(CDU)이 정부에서 완전히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사민당(SPD), 독일공산당, 중앙당(Zentrum)은 내무부를 기민당(CDU)에 맡기는 것을 거부하였다. 쾰른에서 아데나워의 오랜 적수였던 로베르트 괴를링거는 “참다운 민주화와 나치를 벗어나는 작업”이 기민당(CDU)이 내무부를 맡을 때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때문에 과거 우파 정당의 너무나 많은 당원이 기민당(CDU)의 그늘에 숨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기민당(CDU)은 정부와 거리를 두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1946년 9월 지방선거 결과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영국 측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의회의 의석을 선거 결과에 나타난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였다. 그래서 이제 기민당(CDU)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러나 아멜룬센의 정부에서는 좌파가 득세하였다. 뒤셀도르프의 시장이며 1946년 12월부터 주지사 직무대리를 지내던 칼 아르놀트는 여기에서 사만당과 중앙당(Zentrum)과 더불어 개혁적 협력의 길을 가는 대표자로 점점 더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게다가 그는 막후에서 영국과 야콥 카이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또한 그와 당 지도부와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는 아데나워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의회의 당위원장도 겸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도 갈등을 피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는, 기민당(CDU)이 커다란, 그리고 나중에 드러난 대로, 조급한 희망을 지녔던 1947년 5월에 예정된 지방선거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기민당(CDU)이 심각한 시련에 당면하자, 정강 논쟁이 새로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946년 초부터 경제-사회상임위는 아데나워의 뜻에 따라 서로 갈라지려는 세력을 통합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상임위에는 두 명의 위원장이 임명되었다. 노조 계파의 대표인 요하네스 알버스와 경제계를 대표하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그들이었다. 페르드멩게스는 지도적인 개신교 평신도로서 개신교 측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와 페르드멩게스 사이에 시행하려는 전략에 관한 사전 조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이 시기에 한 여러 연설을 통하여 당내 좌파에 양보하였다. 이른바 포용정책이었다. 아데나워는 여러 당내 회의에서도 매우 신중하면서도 분명히 경제·사회 정책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 문제를 갈등이 아니라 통합으로써 해결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날마다 아데나워는 주민들의 전례 없는 고통과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을 행정적으로 처리해야만 하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요구에 당면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늘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기업경제는 장기적인 전망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처럼 오랜 세월 동안, 국가관료 경제는 모든 것을 멈추게 만들고, 결국 기업 경제만이 복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해온 사람은 일시적인 재난 상황 때문에 자기 근본적인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었다.     


전략은 분명히 늘 바람직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46년 12월 리프슈타트에서 열린 지역위원회 회의에서 여러 제안을 하나로 묶어 구체화할 때가 왔다고 여겼다. 지방의회에서 얼마 후에 논의할 국유화 문제, 1947년 초에 예정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선거, 게다가 베를린 기민당(CDU)과 계속되는 다툼, 헤센과 바이에른, 그리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도 존재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당내 동료들은 이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일단은 다시 한번 작은 규모의 논의가 있은 다음에야 지역 차원의 위원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다. 1월 중순에 모든 일이 완료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우리는 두 달의 시간을 벌게 된다. … 이 시간에 우리의 생각을 모든 유권자와 여론에 알리게 될 것이다.”     


아데나워의 권위는 지방선거의 결과로 매우 강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에 큰 확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의 기본 노선을 발전시켰다. 대기업의 국유화를 그는 여전히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나치 국가 설립 초기에 국유화가 진행되어’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손아귀에 넣게 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산업의 거대화는 수십 년 전부터 독일 경제를 오도하였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국유화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거대한 괴물 기업’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거대 담론적인 세계관의 차원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유 아니면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전체주의 국가를 낳을 것이 100% 확실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에] 본질적으로 중소기업을 최대한 많이 육성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이러한 중소기업이야 말고 경쟁력 있고 위기에 강하며 노동자들이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개인적 관계를 맺기에 더 용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서 여전히 ‘뢴도르프 강령’을 내세우는 과거 아데나워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사이에 타협을 끌어냈다. 그리고 이제 그가 강력히 내세우는 방식은 이른바 ‘혼합 경제 기업’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생각한 것은 지방[정부]경제와 민간 경제가 공동으로 소유권을 지니는 방식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보쿰과 도르트문트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그가 보기에 사유자본은 분명히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렇게 여겨야만 “진정으로 자본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곧 북미대륙의 미국에서 자본을 확보할 수 있는” 전망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외채는 독일 경제의 재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영국 측의 국유화 계획은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생각으로 당내 좌파 세력의 기분을 맞추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매우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써 모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자기 특유한 확신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사태를 편견 없이 바라본다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해결책에 거의 이를 수 없다.”    

 

신속히 진행된 논의의 결과물이 유명한 ‘알렌 계획’(Ahlener Programm)이다. 이후로도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계획을 고안한 자가 아데나워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이는 아데나워 계획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1947년 1월 초에 마련된 공동경제 원칙과 자유주의 기본원칙을 결합한 내용이 담긴 5장짜리 제안서는 아데나워가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부퍼탈 지역 연합이 보낸 제안도 포함한 2차 초안도 아데나워가 작성하였다. 아데나워는 또한 적절한 때 요하네스 알버스와 화해하여 당내 좌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의 이해를 구하였다. 경제-사회정책상임위의 두 차례에 걸친 매우 중요한 회의는 쾰른과 페르드멩게스의 은행 건물에서 개최되었다. 기민당(CDU)의 역사에서 1947년은 또한 매우 특이한 해였다. 기민당(CDU) 좌파의 가장 유명한 계획은 그 핵심에서 아데나워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수립된 장소가 하필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의 은행 건물이었다!     


이 회의에서 핵심 인물은 아데나워, 알버스, 페르드멩게스였다. 이들은 여기에서 합의를 이루었다. 알버스는 사회주의와 사회화의 개념을 포기하였다.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공동 경제 질서’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는 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발베르크의 몇몇 요구 사항은 여기에 반영되었다. 자유주의의 기본원칙과 기독교 사회주의의 기본원칙이 나란히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제외하였지만 말이다.     

아데나워는 이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의 국유화 계획에 관하여 조만간에 벌어질 논쟁에서 그 계획이 구체적인 의미를 얻게 될 것임을 주지시켰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되었다. 어떤 콘체른이 기술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분배의 원칙’에 따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렌에서는 여기에서 ‘권력 분할의 원칙’이 나왔다. 곧 여기에는 기업의 독점적 성격을 방지하기 위한 카르텔에 관한 법률, 광산업과 철강 생산 대기업의 사회화, 경제계획과 사회적 형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공동 결정권’, 현재 상황의 어려움을 고려한 경제회의소를 통한 기획과 조종 업무의 수행이 관련되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아데나워는 이러한 계획으로 자기 당 내부의 노도 계파와는 거리를 더욱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여 훨씬 더 나아간 칼 아르놀트의 사회화에 관한 생각을 배척하고 자기 당이 영국과 사민당(SPD)의 계획과는 차별화된 반대되는 계획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베스트팔렌의 광산 도시인 알렌에서는 대체적으로 쾰른 은행가에서 시민 세력과 노조 계파 사이에서 합의된 타협안만이 인준되었다. 모두가 국가사회주의를 주적으로 간주하였고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삶에 현실적인 연대성을 보였다. 이 연대성은 방해가 아니라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어야 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이중의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곧 경제-사회적 정책의 근본 문제에서 분열상을 보인 자기의 당이 공동의 계획을 추구하는 기반 위에 바탕을 두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 이제 그는 의회에서의 논쟁에서나 지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CDU) 고유의 개념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기민당(CDU) 베를린 계파에게는 이제 아데나워를 조직적으로 방해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일단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의회의 당대표였기에 정당 정강의 조문을 법률안의 형태로 바꾸는 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싸움터는 뒤셀도르프 지방의회로 넘어갔다. 사민당(SPD)은 여론조사를 제안하였다. 4월에 있을 지방의회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자는 것이었다. “석탄 경제, 철광과 철강 생산의 중공업과 화학 관련 대기업을 공공재로 변환해야 하는가?” 이에 맞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이 6개의 제안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기초 소재 산업과 화학 관련 대기업의 재편, 기업가와 노동자 관계의 개혁, 소유관계의 공개에 관련된 것이었다. 의회의 의석 판도 때문에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은 일단 그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새 지방의회의 구성이었다.   

  

1947년 4월의 지방의회 선거는 어느 당도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민당(CDU)은 지방선거에서의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216석 가운데 92석을 차지하여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사민당(SPD)은 64석 독일공산당(KPD)은 28석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중앙당(Zentrum)은 20석, 자민당(FDP)은 12석을 확보하였다.     


이제 경제 정책에 관한 줄다리기는 주지사 자리와 결부되어 그때까지는 원만했던 아데나워와 아르놀트의 관계도 무너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아르놀트가 영국, 사민당(SPD), 중앙당(Zentrum)의 칼 슈피커를 중심으로 한 좌파가 주장하는 사회화 계획에 결사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민당(SPD)과 중앙당(Zentrum)이 연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이는 의회 상황으로, 이제 아르놀트는 당대표와 원내대표의 후견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주지사 자리에 가톨릭 노동자연합회의 의장인 요제프 고켈른을 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고켈른은 기독교 사회주의와의 싸움에서 맞서 탁월한 업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르놀트는 더 이상 무찌를 수 없는 적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만장일치로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의 임기는 9년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아르놀트가 오랜 협상을 거쳐 주로 좌파 정치가로 이루어진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여기에는 아데나워 집권 후기에 말이 많았던 인사들도 포함되었다. 크룹기업의 법률고문이자 대표적인 개신교 신자인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하인리히 륍케는 식량, 농업, 임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데나워 진영에 확실히 속하는 인사는 재무장관인 하인리히 바이츠 밖에 없었다. 사민당(SPD)은 내무장관 자리도 확보하여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변호사인 발터 멘첼이 임명되었다. 그와 제헌위원회와 독일연방의회에서 아데나워와 늘 충돌하게 된 인물이다. 경제부의 수장으로는 사민당(SPD)의 에릭 뇔팅이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드러난 대로 그는 독일연방의회에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충돌하게 된다. 그 사이에 중앙당(Zentrum)에 입당한 루돌프 아멜룬센도 내각의 좌파 진영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12월에 들어서서 크리스티네 토이쉬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쾰른 중앙당(Zentrum) 소속 정치가였던 이 기민당(CDU) 정치가도 얼마 안 가서 아데나워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악의를 가지고 이 여자의 이름을 [슬픈 금욕주의자라는 의미의] 트리스티네 코이쉬라고 부르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각은 완전히 영국 측이 바라는 대로 구성되었다. 이는 기민당(CDU) 원내대표의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원내대표로서 점점 더 증오하게 된 주지사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가운데 매우 지치게 되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당과 상당수의 의원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아르놀트는 영국, 사민당(SPD)과 중앙당(Zentrum)의 협력, 기민당(CDU) 내부의 일부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국유화의 문제에서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오랜 협상 끝에 드디어 1948년 8월에는 사회화에 관련된 법안도 마련되었다. 이 법안은 기민당(CDU)이 기권한 가운데 통과 되었다. 처음에 이는 순전히 상징적인 결정이었지만 1947년 8월 이후부터 이미 미국이 모든 국유화에 반대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미국이 내세운 공식적인 논리는 국유화로 독일 국민이 입법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국유화는 [독일] 경제를 되살리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클레이 장군도 의견을 제시하였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하여 칼 아르놀트는 1948년 8월에 이미 그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앞으로 수립될 독일연방공화국의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미국의 반대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미래의 입법자들이 좀 더 현실성 있는 안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연정에도 이정표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에서의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협력은 첫 독일연방공화국 정부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데나워는 자기의 구상과 차선책인 연정 모델을 대비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칼 아르놀트가 사회화의 문제를 알렌 계획에 제시된 것 이상으로 이끌고 나아가려고 하는 동안에는, [아데나워] 당대표는 영국 점령지역 안의 기민당(CDU) 경제 정책을 수호하기 위하여 열을 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위원회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시장경제 노선으로 돌파구를 마련할 기회를 모색하자 아데나워는 이러한 계획적인 타협안을 폐기하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연정과 관련하여, 그는 기민당(CDU)을 사민당(SPD)과 멀리 떨어뜨리기 위하여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그는 베스트팔렌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 동료인 아르투르 슈트레터를 법무장관으로 기용해 줄 것을 아르놀트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각에 영향력을 행사할 틈을 노릴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구스타프 하이네만이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이는 하이네만과 아데나워의 친분을 깊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 대신에 중앙당(Zentrum)의 요하네스 보로크만을 중심으로 한 우파 세력은 아데나워 구애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기민당(CDU)과 중앙당(Zentrum)의 연정으로 이루어진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는 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그 당시 우파로 매우 기울어져 있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자민당(FDP)과의 관계를 증진하고자 애썼다. 아데나워는 프리드리히 미델하우베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애썼다. 아데나워는 영국 점령지역의 자민당(FDP) 대표인 프란츠 블뤼허와 ‘진심 어린’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이는 아데나워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귀하는 백번 옳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조금 차이가 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이 같습니다. … 제게는 귀하와 직접 만나는 것이 언제나 기쁜 일입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정치에서의 어려운 의회 싸움은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는 얼마 안 되어 시작된 입법위원회와 독일연방공화국의 초기에 사태가 진전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아데나워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니던 이 당시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정치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일이 벌어지던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쉽게 잊게 된다. 국민들은 거의 완전한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원들의 숫자는 화폐개혁이 있을 때까지는 비교적 높았고, 정당의 위원회들에서는 과거 바이마르 시절의 수백 명의 당원들과 전쟁 세대의 수많은 젊은이가 쇄신된 민주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분명히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당에는, 세속적인 이유로 당원이 된 이들이 있었고 기민당(CDU)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정당 안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정치적 재활을 노리는 이들, 공직에 올라 보려는 이들, 정치적 경력을 쌓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노력은 그 당시 수많은 사람이 몰두하던 일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시 선거를 치르게 된 국민은 수십 년 동안 습관이 된 투표원칙에 따라 투표하였고 공산주의자들 제외하고 자유주의 정당들만 후보를 내어 많은 득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정한 사실은 연합군의 통제 아래에 있던 점령 시기에 격렬한 파벌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적 지배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연합군이 아무리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아 갔어도 이를 되찾을 준비가 분명히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상당히 폭넓은 정치적 무기력의 상황 속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수립되고, 계획이 마련되었다가 폐기되고, 연정이 수립되었다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194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확산되었다. 이때부터 서유럽 연합군 측은 독일이 자기 활동 영역을 극대화하고 국가 수립을 확실히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상에 있던 사람은 그 이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대중은 그러한 사람들의 출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는 어느 모로 관중이 거의 없는 다 낡은 석탄재를 깐 트랙에서 하는 경주와 같았다. 그 선수들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인물이 콘라드 아데나워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 오래전에 잊힌 당의 정강에 관한 논쟁, 당내의 권력 싸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의회에서의 책략과 음모는 특히 아데나워의 전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당대표가 되지 못하였고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독일연방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분명히 정치적인 전임 시장이 하루아침에 매우 탁월한 과단성을 지닌 영악한 당대표가 될 수 있었는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데나워는 본능적으로 전후 독일 정치체계는 정당을 통하여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코 의회나 정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평생을 지방의 국가 정부의 관료를 역임한 이 노회한 인물은 너무 서둘러 각료가 되고 싶은 유혹을 뿌리쳤다. 그가 당연히 요구했을 수도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내각에 진입했다면 영국 점령지역 안과 그 밖에서의 그의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을 것이다. 그는 또한 1948년 초부터 미국·영국 공동점령지역의 경제위원회의 의장으로 거론되는 것을 피하였다. 그 자리에 오르면 그의 직무대리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과 떨어지게 될 일이었다! 그는 직관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정당의 정강 작성 작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선거전에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하였다. 아데나워는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단 한 번도 선거전을 치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당대표가 선거의 결과에 따라 입지를 다지거나 몰락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몸소 무작정 싸움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하였다. 독설, 기지 넘치는 유머, 자기 의지를 매우 확실하게 표현하기, 가끔은 상대방을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불의한 짓,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말이었다. 전임 쾰른시의원들은 전임 쾰른시장이 이러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는 것을 노래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러한 역할을 자제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지저분한 것도 포함한 모든 허용된 술수를 단번에 익힌 타고난 선거꾼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기민당(CDU) 안에서 야콥 카이저, 칼 아르놀트, 한스 슐랑게-쉐닝겐, 베르너 힐퍼트와 같은 정치가들을 제치고 아데나워가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은 그들이 선거에서 아데나워와 논쟁을 벌이면서 보여준 정치적 기질을 아데나워의 기질과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적 능력도 인상적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1946년 초에 정치적 거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다른 유명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전시의 일반 시민보다 더 힘든 삶의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폭격은 물론 제외하고 말이다. 그 시기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뢴도르프의 식량 사정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형편없었다. 가끔 스위스에서 식량 꾸러미가 도착하여 다른 독일 가정과 마찬가지로 감사하게 받아먹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셩돌랑의 마크 퐁이나 루가노의 파울 실버베르크가 보내주었다.    

  

중앙당(Zentrum)의 빌헬름 하마허와는 정치 이야기만 나눈 것이 아니다. ‘엘브스와 하마허 회사의 경영자’는 ‘난방보일러 문제’를 해결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쾰른에서 오래 알고 지낸 인물로 나중에 독일축구협회 회장을 지낸 페코 바우벤스는 1947년 성탄절 직전에 간략한 사연의 편지를 받았다. “석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조속히 배달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탄절을 춥게 지내게 될 것입니다.” 영농가이며 나중에 연방의회에서 기민당(CDU) 의원이 된 헤르만 시머는 올덴부르크의 베흐타에 있는 도미니코회 관구장의 조카로 가끔 사과와 달걀을 차에 실어주었다. 뢴도르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무척 기뻐하였다. “여기에는 모든 카드가 있지만 달걀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제 아내는 달걀이 무척 필요했고요.” 아데나워 자신도 1946/47년도 겨울에는 단백질 부족으로 기아부종에 걸렸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치즈를 구할 재간이 없었다. 전후 독일의 일상은 아데나워 집안에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쉬지 않고 자동차로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때때로 자동차가 고장 나기도 하였다. 숙소로 사용한 추레한 호텔방은 대부분 냉골이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 당시 사진에 나온 아데나워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삐쩍 마르고 볼이 쑥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1946년부터 이미 80대에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60대에 지녔던 기질과 강인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가끔 그의 탄식을 들었을 뿐이다. 나 아데나워는 “과거 그 어느 때 비해 보아도 지속적인 여행 때문에 [지금] 더 많은 일과 육체적 활동을 하고 있다네.”     


그래도 그는 언제나 뢴도르프의 조용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녀와 손자 손녀들은 전쟁과 연합군 점령의 시기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들은 집에 같이 살거나, 분가하여 멀리서 살고 있었다. 장남인 콘라드는 라인-베스트팔렌 발전소의 이사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막스 아데나워는 KHD에서 근무하다가 194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쾰른시의원이 되었다. 파울 아데나워는 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로 집에 머물렀다. 어린 딸들도 공부하고 있었다. 막내아들 게오르크는 바트고데스베르크에 있는 알로이시우스 콜렉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인 구시가 야위어가지만 않았어도 건강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 혈액이 세균에 감염되었다. 그래서 자주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폰 바이쓰 총영사가 보내준 페니실린은 잠시만 효과가 있었을 뿐이다.     


1947년 6월 아데나워 부부는 다시 셩돌랑과 체르마트로 여행을 갔다. 1939년 9월에 이곳을 찾은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1947년의 상황에서 매우 커다란 혜택이었다. 이를 위하여 아데나워는 9개월 전에 매우 상세한 내용의 신청서를 영국군 당국에 제출하여야 했다. 영국군은 아데나워의 아내인 구시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이를 승인하였다. 리아와 발터 라이너스에게 하는 인사에서, 그는 여러 해 감방에 갇혀있다가 휴가를 얻은 사람의 편지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6월 28일 이후 우리가 사랑하는 셩돌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기가 막힌 날씨로 너무 아름답습니다. … 스위스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싸요. … 여기는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녀와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도 한 달 동안 여기에 지내도록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인생의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그의 아내가 몇 마디 덧붙였다. “꿈만 같아요! 멋진 도시의 풍경과 우리에 대한 친절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향이 떠올라요. 매우 즐겁지만 늘 목에 ‘응어리’가 느껴져요. … 여기 셩돌랑에서는 세상이 멈추어있어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는 곧 병원에 입원해야만 하였다. 엄청난 서한을 주고받는 것을 포함하여(1945년부터 1949년까지 약 6,100통) 여러 회의에 참석하는 업무에 아데나워가 온 힘을 기울이는 동안 뢴도르프와 본의 요하네스 병원에서는 이 노인에게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마치 1916년 같았다. 다시 한번 시간이 조금이라도 날 때마다 그는 병든 아내 곁에 머물렀다. 다행히도 이제는 자녀들이 장성하여 도움을 주었다. 마리아라흐에 있는 베네딕트회에 입회하려던 파울 아데나워는 이를 포기하고 본에서 모친 곁에 머물렀다. 1948년 3월 3일 그는 아데나워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아데나워는 깊은 충격을 받으면 자기 집무실에 머물면서 될 수 있으면 조문객을 만나지 않았다. 구시 아데나워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뢴도르프의 숲 공동묘지에는 많은 조문객이 모였다. 그러나 정치판의 불협화음은, 이러한 때도 계속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나서 요하네스 알버스는 아데나워가 보낸 한 단어로 ‘매우 존경하는’이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누군가 제게 매우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귀하께서 제 아내의 장례식에서 뒤셀도르프에서 온 헤른 켈러 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이곳에 모여듭니다. 그들은 아데나워에게 뭔가를 대하는 것이죠. 그러나 6주가 지나면 그는 이제 끝장이 날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아데나워는 이미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들조차도 그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의 3개월이 지나서 실버베르크에게 편지를 썼을 뿐이다. “사실 나는 매우 피곤하고 긴장이 되네. 내 나이, 지난겨울과 올해 초의 어려운 일들, 독일의 전체적인 어려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지.” 제국 수상이었던 브뤼닝이 그 무렵에 아데나워를 방문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매우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죽음이 그에게는 [사지] ‘절단’과 같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세상에 그가 뿌리를 둘 곳이 사실 없었다.”     


이제 매우 중요한 1948년 중반에 접어들었다. 1917~1918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개인적으로 마음속 깊이 매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그는 매우 어지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베를린의 위기는 급격하게 최고조에 달하였다. 어쩌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럽통합 운동은 최고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서부지역에 매우 바람직한 조건들이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도 소급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불확실성과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가족이 늘 곁에 있는 것 이외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할 일들이 그가 아내를 잃은 것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1949년 새해가 되자 아데나워는 완전히 눈이 멀게 된 법률고문관인 뫼닝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일이 산더미와 같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러 가지로 행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지 버틸 수만 있다면 제 일을 양심적으로 수행하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가 서부 독일의 정치 무대에서 핵심 인물로 더 높이 부상하게 될수록 권력이라는 독약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더욱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1948년 중반 이후 그에게서 좌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넘치는 활기와 명료한 정신, 심지어 일종의 기쁨을 느끼는 인상을 주었다. 늘 위기에 흔들리는 신생 정당, 그리고 동시에 ‘독일 민족’, 정확히 말해서 서부 독일 사람들을 격랑 속에서 이끄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마치 먼 옛날 한때 그가 고향인 쾰른에서 행복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을 행해 가는 길     


1946년과 1947년에 독일 동부와 서부의 관계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전히 토요일 오후마다 자신을 커피 타임에 초대하던 폰 바이쓰 총영사에게 아데나워는 1946년 7월 10일 편지 한 통을 보내어 자기 외교정책에 관한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현재 독일은 실질적으로 두 지역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베를린을 포함한 러시아 점령지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점령지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지역이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서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와 무관하게, 700년 전과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일 동부가 독일 서부를 통하여 경제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계몽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미 현재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1946년 8월 초에 이야기 한 대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점령지역 구분을 없애고 4개 강대국이 대표를 파견하여 구성한 통제위원회를 통하여 독일을 통일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래야만 독일을 과거의 모습대로 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독일이 양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둘째 해결책”은 통일을 회복할 수 없는 경우에 서부지역을 통일하여, 서유럽에 통합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확실한 예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두 가지 선택지 모두에서 동일한 제정정책과 외교정책의 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곧 다시 통일된 독일제국을 건설하든지 아니면 서부지역을 바탕으로 해서라도 말이다. 폰 바이쓰 총영사는 자기 정부에 아데나워가 설명한 기본 구상을 전달하였다. 이는 그 당시 기민당(CDU) 대표가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였던 구상이다. 비록 그에게 전한 것만큼 축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의 구상은 매우 상세한 것이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여기에 적을만한 것이다.   

  

“III) 추구하는 해결책     

① 독일은, 특히 동부지역에서도 국경이 크게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유: 독일의 인구가 넘쳐나서 경제적이나 정치적 차원의 확장이 필요하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이용할 능력이 없다.

② 점령 구역의 구획을 없애야 한다. 구획이 필요하다면 독일 전체를 관할하는 통제위원회를 수립해야 한다.

③ 독일은 최대한 분권화된 연방국이 되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일치를 이루는 데에 필수적인 한도 안의 권력을 지녀야 한다. 중앙정부의 자리는 서부나 남서부로 옮겨야 한다.

④ 독일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은 서부 독일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부 독일의 연방국이 수립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라인란트 전체, 베스트팔렌, 또한 오스나브뤼크, 라인헤센, 라인팔츠, 최소한 헤선-나사우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⑤ 이 국가들의 존립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 이원제

 ㉯ 이 국가에 루르지역이 포함되므로, 외국은 적절한 대표성을 지닌 경제대표부를 이 지역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서 필수적으로, 이에 맞는 호혜주의가 나오게 된다.

 ㉰ 서부에 있는 독일의 이웃 국가들이 이 국가를 별도로 통제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이러한 통제의 지속 기간과 그 규모를 제한하여야 한다. 일정 기간의 과도기가 지나면 이를 해당 국가의 대표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를 상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 점령 기간은 유기한이어야 한다.

⑥ 독일, 특히 서부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과의 상호 경제 협력은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하고 지속적인 기초가 된다. 공동 경제기구의 수립 문제를 검토하여야 한다.     

IV) III)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해결책이 러시아의 입장 때문에 불가능해진다면 III)에 설명한 조치를 서부지역의 3개국에만 적용해야 한다. III) ②~⑥항에 나와 있는 내용은 독일의 이 지역에만 해당한다.”     


여기에 나온 구상은 전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다. 곧 연방국적으로 수립된 [독일]제국이나 서부 독일만의 연방국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바람직 한 것은 전자이나, 당장에는 서부지역에만 적용될 것으로 보이는 해결책이었다.     


1946년 말 즈음에 아데나워는 잠깐이나마 독일 동부와 서부가 통일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기민당(CDU)의 지역위원회에서 추측하기를 아마도 외무장관위원회의 뉴욕회의에서 몰래 결정이 내려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협상 내용은 다음과 같을 수 있었다. 폴란드는 서방 강대국의 동의로 독일 동부지역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자기가 차지한 지역을 나머지 지역의 ‘경제 연맹’에 넘겨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매우 불확실한 일이었다. 아마도 프랑스가 1947년 초에 개최되는 모스크바회의에서 이를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모스크바가 예상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폴란드와 러시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런 식으로 “철의 장막을 수백 킬로미터 더 밀고 들어와”, 그 독일 지역이 철의 장막 안에 놓이게 되는 일은, 아데나워가 단숨에 말을 이어가며 강조한 대로, 결국 “모든 독일 사람에게 있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문제가 되는 이 지역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1922년 1월에 그는 브레스라우를 방문하여 눈이 쌓인 리젠산맥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방문하며 예정에 없던 단치히도 들렀다. 그의 자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동프로이센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이 지역을 빼앗기는 것에 대하여 점령기의 다른 모든 독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얼마 후에 체결될 연합국의 합의에 대한 전망으로 아데나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일이 중립국가의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결국 서유럽 열강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미국이라는] 먼 곳에 있는 퀘이커 재단의 펜들 힐 대학교의 빌헬름 졸만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해방은 잔인하고 힘든 환상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독일 국민은 망할 것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는 1946년 12월 30일 《라이니쉐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새해를 전망하면서 매우 어두운 비관론을 펼쳤다. 독일이 더욱 빈곤해지고 있는 것에서 아데나워는 전승국들의 행정적 무능력이나 피할 수 있었던 전쟁에 따른 심각한 인적 손실과 파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전승국들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곧 특허를 강탈해가거나 유능한 과학자들을 빼앗아 [독일에] ‘정신적 살육’을 자행한 것은, 전승국들이 산업 국가인 독일의 운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여긴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두 개의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끝장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승국의 [행위의] 주요 동기입니다.”     


여전히 너무나 생생한 ‘모건소 계획의 정신’*에 맞서 아데나워는 스위스를 모델로 하여 영구 중립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완전히 무장 해제되었고, 순수한 전시산업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동과 서 양 방면으로 장기적인 통제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스위스처럼 국제법적으로 중립국이 된다면 독일 국민 대다수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모건소 계획 [Morganthau Plan, 역자주 – 미국 제무장관 Henry Morgenthau Jr.가 제시한 전후 독일 무력화 계획. 이 계획으로는 독일, 특히 루르 지역의 군사, 산업을 초토화하고자 했음. 그러나 결국 소련과의 대립을 고려하여 이 계획은 포기됨.]     


이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독일의 중립화를 지옥에 직결되는 길로 여겨 싸워온 정치가에게는 매우 놀라운 생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평소에는 소원한 관계에 있던 프라이부르크의 <오이로파 출판사>에 있는 엘세서 박사가 [마침] 준비 중이던 독일의 영구중립화에 관한 책에 그의 생각을 잘 설명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실제로 아데나워는 1947년 2월 17일에 쓴 편지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독일의 중립화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아직 전혀 분명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이미 몇 달 전의 공개연설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중립국도 결국에는 무기를 사용하여 그 중립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중립성을 다른 국가들을 통해서만 보장받는다면, 자기 중립성을 자체적으로 내세울 상황이 되지 못한다면 이는 참다운 중립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 연합국이 독일에 자기 중립성을 지킬 권한을 부여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느 모로 효과를 거두리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합군 측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곧 독일이 중립성을 통한 독립을 누리는 데 필요한 평화에 대한 참다운 사랑의 증거를 아직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완전한 중립성을 독일 정치의 목적으로 삼는 것을 전적으로 환영합니다. 그 목적을 곧바로 이룩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독일 민족도 그러한 중립성의 의미와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과거에 주장했던 ‘통일유럽국’의 개념과 이러한 생각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많은 사람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외무장관위원회 회의를 염두에 두고 성급하게 평화조약을 맺자고 재촉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아데나워가 근심하는 것처럼 현재의 무법적인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시간은 독일에 이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1년 전에 독일 국민에게 강요되었더라면 그 평화조약은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바트고데스베르크에 있는 알로이시우스 콜렉의 후베르트 베허가 모스크바로 독일 전문가들을 파견하기 전에 평화가 결국을 강요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자 아데나워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소련이 불황을 예측한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소련은 1,200만에서 1,3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인구 밀집 지역으로 강제로 보내어 “이곳에서 불만의 씨앗과 무리가 생겨나고 침체가 더욱 심해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것이 전체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 계획은 “유럽 전체를 커다란 혼란과 경제적 불황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를 통하여 그 영향력을 독일, 프랑스, 대서양에 이르는 지역의 소국들, 그리고 영국에까지 확장할 수 있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46년 12월 기민당(CDU) 당대표단 내부 사람들에게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러시아는 잔인한 정책에서 나치와 히틀러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도 지금 사람들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한편으로 폴란드에 새로운 서부 국경을 확보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의 고위 정치관료들’은 기민당(CDU)의 일부 사람들에게, 러시아는 강한 독일을 원하기에 폴란드를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본 아데나워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러시아를 믿는 사람은 사기꾼을 믿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매우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서유럽 강대국에 동조하는 견해를 서둘러 내세우는 것을 매우 주저하였다. 독일은 러시아와 서방 강대국의 대립을 최대한 견디어 내되 “결코 러시아 측으로 기울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볼 때 상황이 매우 위급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서양의 민주국가들이 독일에 대한 파국적인 정책을 수정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미국 국무장관 번즈의 1946년 슈투트가르트 연설 이후, 미국은 어느 모로 긍정적인 징후를 보였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두 전승국은 더욱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영국의 산업이 “낡았고 독일과 미국의 산업에 더 이상 경쟁이 되지 않는다.”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의 생각에 “생물학적으로 지쳐 있었다.” 그리고 국민의 숫자도 적었고,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로 뒤처졌고 나태했다. 이러한 생각을 그는 전시 때부터 품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영국의 독일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은 지나치게 강한 경제적 경쟁자를 꺾어 버리기 위한 엄청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생산 제한, 해체, 파괴적인 국유화 조치를 통하여 그렇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 측에서 벌인 전쟁 선전의 여운이 남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당시에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프랑스는 그들 나름대로 독일을 분열시키고 서부지역을 지속적으로 자국의 통제 아래에 놓으려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는 점령지역에서 무자비한 착취를 하고 루르지역의 석탄도 [전쟁의] 손해배상으로 여겼다.    

 

동시에 독일의 곤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데나워의 외국 대화 상대들과 서신 교류를 하는 이들은 그가 끝없이 되풀이하는 탄식을 들었다. 그 탄식은 아무리 되풀이 하여도 그 진실성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독일은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경제는 부패했다. 국민은 절망과 무기력에 빠졌다. 그는 볼리비아로 이민 간 사회민주주의자인 언론인 에페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일에서 많은 사람이 더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감각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정신이] 황폐해지고 타락했습니다. 1918년의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면 결코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1946/47년 겨울에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유럽에 엄청난 추위가 몰아쳤다. 그래서 그의 비관주의는 더욱 심해졌고 이는 1947년 내내 지속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아데나워에게서 나중에도 찾아볼 수 있는 모순점이 발견된다. 확실히 그는 독일 사람들이 취약하다고 여겼다. 아데나워는 특히 외국에서 [독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공격이 지속된다면 많은 이들이 거의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적인 구호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자주 독일공산당(KPD)이 루르지역, 함부르크, 브레멘에 있는 대기업과 노동조합에서 근심스러울 정도로 강한 입지를 확보한 것을 지적하곤 하였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극우파들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영국의 독일담당부 장관인 파켄험 경에게 1947년 10월 말에 뢰팅겐성에서 가진 면담에서 [독일] 지방을 민족주의 분위기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더구나 이는 1918/19년 겨울보다 더 강한 것이었다. 연합국과 협력하는 당들은 부역자로 낙인이 찍힐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러한 말은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적인 비관주의가 섞인 것이었다. 곧 외국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독일에 대한 정책을 바꾸도록 부추기려던 것이었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어느 모로 독일 국민이 곤경을 견디어 내는 태도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루가노의 파울 실버베르크는 1946년 아데나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12년 동안의 나치 지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 국민이 당한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급진적인 정당에 기울어지지 않고, 여전히 독일민족 안에 존재하는 선한 자질을 매우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현재 처한 (기근, 질병, 추위, 주택 부족, 의복과 신발의 부족과 같은) 깊은 수렁을 잘 극복한다면, 독일 민족은 정화되고 또한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어 더 강해지고, 유럽과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다시 발언할 권한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파켄햄 경은 1947년 가을 기민당(CDU) 당대표와 함께, 파괴된 뒤셀도르프로 갔다. 그 길에서 파켄햄 경은 아데나워에게 같은 소리를 들었다. [영국] 노동당 정치가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 정치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는 독일의 경제적 부흥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더 나아가 자신 있어 하였다. 그는 독일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육체적 강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생물학적인 범주에서도 철저히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동포들에 대해서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독일 사람들의 심리가 수십 년 전부터 위험할 정도로 취약해졌고 이러한 취약성이 한동안 [독일] 상황의 주요한 위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했다. 나쁜 자질이 힘을 발휘하게 될지, 아니면 좋은 기질이 발휘될지는 외적인 조건에 크게 좌우될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허무주의에 빠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목표를 보여주고 희망을 불어 넣을 수 있는지 여부에도 달린 일이었다.     


아데나워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곧 독일을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에 결부시켜 궁극적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바로 안보 문제, 유럽 경제의 재건, 안정적인 통화 체계의 회복이 포함되었다.     

1945년 여름과 가을에 있었던 드골주의자 장교와의 어설픈 접촉 시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데나워는 이러한 사태 파악을 점령국에 전달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시도하였다. 곧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거나 얼마 남지 않은 전쟁 이전의 인맥을 재가동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대니 N. 하이네만과 클리브 경에게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몇 명의 이민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그 자기 가능성도 다 소진해버렸다.     


당대표로서 그는 1946년 초에 다른 인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군정청의 고위관리와 장군들, 영국 점령지역으로 온 런던의 정치가들에게, 1947년 중반부터는 동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미국의 점령군청에 자기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1946년 여름 그와 대화를 나눈 매우 중요한 인사들 가운데에는 윈스턴 처칠의 사위인 던컨 샌디스가 있었다. 샌디스는 자기 장인의 유럽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46년 9월에 스위스 취리히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처칠은 “우리는 미합중국과 같은 것을 유럽에서 이룩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전후 유럽[통합]운동이라는 눈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독일·프랑스 선린관계의 대변인을 자처하였다.    

 

우리는 그 당시 두 사람이 언제 만났는지 모르지만, 관련 내용은 폰 바이쓰 총영사의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샌디스에게 유럽을 재건하는 데에 필요한 독일·프랑스의 선린관계의 재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폰 바이쓰에게 말한 적이 있다. 아데나워가 쾰른 대학교에서 한 [미래] 계획에 관련된 연설이나 폰 바이쓰의 1946년 7월 10일 자 보고서에 나온 생각에 비추어 처칠의 취리히 연설을 해석해 보면, 아데나워의 생각이 던컨 샌디스를 통하여 처칠의 연설 내용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폰 바이쓰는 샌디스가 아데나워를 방문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점에, 아데나워가 품은 유럽에 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유럽에서의 모든 노력의 목표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유럽연합국 또는 그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 상황에 맞게 유럽의 일부를 통합하는 것, 아마도 단순히 경제적 분야에서만이라도, 예를 들어 관세의 통일과 같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에 관하여 논의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원칙적으로 처칠의 구상에 동의하면서도, 거기에서 암시된 독일의 미래에 관한 국가연맹적인 생각에는 반대하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영국의 야당인 보수당이 집권당의 사회주의자들보다 독일 문제 해결에 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아데나워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기대는 근심과 희망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 국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곧 [독일 국민이] 현실에 대해서는 상황판단을 잘 못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을 품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런던과 파리의 현실 정치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 당시 쿠르트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해를 추구하는 정치가들에게 희망을 걸고 가능성이 보이는 모든 것에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당연히 당시에 시작된 유럽[통합]운동이 마련해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 밖에서 벌어지는 유럽[통합]운동에 관심을 먼저 기울였다. 쫓겨난 자민당(FDP) 당수인 빌헬름 하일레가 1947년 1월 말에 아데나워에게 독일의 ‘유럽연합’(EU) [구상]에 찬성해 달라고 요구하자 아데나워는 반대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서유럽의 유럽[통합]운동의 다양한 모임에 관하여 외국의 고위 정치가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민당(CDU) 지도부의 다른 정치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모든 독일의 외부 접촉이 군정청의 관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모든 독일 정치가는 서방과 통제받지 않는 접촉을 하는 것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적절한 기회가 1947년 중반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 인사들의 첫 회의가 ‘신생 국제팀’(NEI)* 주최로 1948년 1월 말 룩셈부르크에서 열렸다. 여기에 아데나워도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누구보다도 프랑스 ‘대중공화정운동당’(MRP)의 모리스 쉬망과 스위스의 보수민중당(KV)의 당대표인 요제프 에셔를 만났다. 전후 처음으로 그는 여기에서 외국인 정치가들과 회의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폰 바이쓰 총영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이 참석하게 된 일은 매우 좋았습니다. 하루 전체의 의사일정이 할애된 독일 문제는 매우 객관적이고 유럽의 차원에서” 다루어졌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기회를 빌려서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서유럽과 독일·프랑스 협력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였다. 아데나워는 베네룩스 국가의 대표단은 독일과의 자체적인 무역 관계의 회복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표명하였다. 아데나워는 신생 국제 팀(NEI)의 독일 지부 수립을 시도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신생 국제 팀[Nouvelles équipes internationales, NEI, 역자주 – 전후 1947년 6월 설립된 단체로 유럽 차원의 기독교 민주주의자와 그 정당의 연합체. 1965년 유럽기독교민주주의연맹(UEDC)로 대체됨.]     

 

일련의 기독교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제네바에서 한자리에 모여 거행한 또 다른 회담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제네바회의’를 주도한 인물은 야콥 킨트-키퍼였다. 그는 자르란트 출신으로 1935년부터 스위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발이 넓고 경제적으로 자립한 인물로 전쟁을 전후로 하여 다양한 모임을 구성하였다. 이 모임은 기독교 조합의 정신으로 독일과 유럽의 재건을 추구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는 전직 제국 수상인 요제프 비르트, 프로이센 시대에 오랫동안 수상을 역임한 오토 브라운, 바이에른 주지사가 된 빌헬름 회그너 등과 ‘민주 독일’이라는 연구 단체에서 함께 일하였다.     


요제프 비르트와의 협력은 이제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의 사무총장인 부르노 되르핑하우스가 1947년 중반에 자기 계획을 이야기 하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되르핑하우스는 자신이 1946년 7월 쾰른의 헤르바르트슈트라쎄 17번지에 있는 점령지역사무국 사무실에서 아데나워와 나눈 특별한 대화에 대하여 회상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 대화를 시작하였다. “귀하는 야콥 카이저의 [독일의 동서 진영] 다리 [역할]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되르핑하우스는 그가 기대한 답변을 하였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소련은 독재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에 대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강력하고 단호한 정책으로 맞서야 합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서양에서 정치적 친구를 확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1948년 3월 말에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텅 빈 국도를 한참 달려 낭만적인 바덴 지역의 마을들을 지나서 아데나워는 일단 취리히에 도착하였다. 취리히의 ‘춤 슈토르헨’호텔의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위급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프라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미국의 언론들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아데나워를 인터뷰하면서 독일이 유럽 방어체계의 차원에서 분담할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소련이 실제로 그들의 탱크를 뤼벡과 함부르크를 거쳐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까지 쉽게 몰고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독일에 몇 개 사단이 동원되어야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묻자 아데나워는 “최소한 80개 사단”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이상 독일과 함께 추진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러한 별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언론에서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서유럽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의 주요 인사들의 모임의 서막을 [멋지게] 장식했을 것이다!    

  

1948년과 1949년에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제네바회의’에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에서 일련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이 참석하였다. 아데나워 이외에 야콥 카이저, 요제프 뮐러, 그의 당내 경쟁자인 프리츠 쉐프너, 헤센 기민당(CDU)의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베를린의 오토 렌츠가 참석하였다. 가장 유명안 프랑스 측 참가자는 대중공화정운동당(MRP)의 당대표이며 창립자인 조르쥬 비달이었다. 그는 사실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인 1948년 가을에 아데나워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 외무장관인 로베르 쉬망에게 이에 관하여 편지로 서둘러 소식을 전하였다.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상황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프랑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프랑스의 관계에 관한 그의 이야기에도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와 마찬가지로 저도 독일·프랑스 관계의 자세한 내용과 그 형태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그 이야기를 피하였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신중을 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와 그 이후의 만남에는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국가의 고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아데나워는 앤트워프의 전임 공무원이었던 카우벨레트도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제 그는 벨기에 국회 의장과 국무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다.28) 그는 독일·프랑스의 대화를 베네룩스 국가,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대표단이 포함된 단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는 독일의 재건에 진정한 경제적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프랑스가 안보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그러한 우려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 인사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농지의 심각한 훼손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1948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유럽운동의 헤이그회의에 참석한 것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실속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800명 정도의 참석자 가운데 약 50명이 독일 인사였다. 그 가운데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전임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에리오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독일 대표단을 특별히 환대한 윈스턴 처칠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과거에 처칠이 “독일인은 당신의 목을 조르거나 짓밟아 버릴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면서 소규모의 만남에서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종전 이후에 한 것치고는 그렇게 좋다고 볼 수 없는, 실버베르크에서 했던 평가를 간단한 문장으로 수정하였다. “처칠에 대해서 저는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제 너무 늙었습니다.”     


헤이그에서 열린 유럽 차원의 회의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얼마 후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단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결의안 가운데 만장일치로 채택된 제7항에 대해서 우리 독일 국민은 모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 회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곧 이 회의에서 사람들은 독일이 유럽연방에 포함되는 것만이 독일의 경제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유일한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아데나워는 9월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개최 예정인 의원회의에 참석할 의도로,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에 동감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제 그는 당 동료들에게 맹세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연방이라는 생각은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정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유럽연방은 독일 서부지역의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국민에게도 안도감을 줄 것입니다. 이 나라들은 여전히 독일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독이 러시아의 교두보가 된다면 이는 서유럽에 대한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서유럽의 통합은 또한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령 인도 등의 식민지에도 지원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세상에 “제3세력”이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력은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에는 대적할 수 없지만 “긴장을 완화하고 현재 커다란 위험 요소가 되는 유일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양대 강국을 중재할”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통합 운동에 신속한 진전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여기에 진정한 유럽의 구원과 독일의 구원이 놓여있습니다.”     


1948년 가을 아데나워는 마침내 유럽[통합]운동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로 그 자신과 독일에 매우 중요한 로베르 쉬망을 만났다. 유럽통합의 가장 중요한 세 명의 대표자인 아데나워, 쉬망, 드 가스페리는 모두 자기 나라의 변방 출신으로 이웃과의 선린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1950년대에 사람들은 매우 강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변방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이 강력한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로트링겐 출신의 포앙카레가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도 또 다른 사례가 된다. 그런데 로베르 쉬망에게 이러한 평가가 제대로 들어맞을 수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두 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늘 약간 구부정한 자세의 이 로트링겐 출신의 기업변호사는 마치 그가 맡은 사건이 곤경에 처한 듯 자주 약간 근심에 잠긴 변호사의 표정을 보이곤 하였다. 그는 독일제국 안에서 자라며 메츠, 베를린, 뮌헨, 본에서 공부하고 당시 본의 가톨릭 연합회인 우니타스에 가입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심성을 매우 잘 알고 독일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쉬망이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측에서 어떠한 기능을 담당했는지는 [프랑스] 의회에서 늘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신앙심 깊은 인물은 1947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매우 냉정하게 진압하였다, 그의 철천지원수인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그 당시에 독일 측에서 전시법관으로 활동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분명히 그는 후방기지 임무를 맡은 예비군 장교였으며 1919년부터 [프랑스] 모젤주의 주의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는 나치 비밀경찰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치 비밀경찰이 그가 아데나워와 결부되어 있다고 비난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었다. 그 두 사람은 1948년 10월에 모젤 근처의 바센하임에서 처음 만난 것이 확실하다. 그곳에는 라인란트-팔츠의 교만한 지사인 에티에르 드 보이스랑베르가 오펜하임 공작의 성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 점령지역에서의 프랑스 외무장관과 기민당(CDU) 당대표의 만남은 철저한 비밀 속에 이루어졌다. 이 당시 아데나워는 의회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쉬망은 군사 비행장인 니더밍에 착륙하였다. 보이스랑베르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쉬망 평생최초의 비행이었다. 아데나워는 커다란 자동차용 담요를 두르고 벤츠 자동차를 타고 왔다. 쉬망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2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주지사인 알트마이어와 아돌프 쉬스터헨도 합류하였다. 쉬스터헨은 그 당시 마인츠의 법무부와 문화부를 이끌고 있었다. 그가 만약에 1949년 초에 심각한 자동차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데나워와 더불어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고로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출세의 길에서 멀어졌다.  

   

결국 아데나워는 막강한 프랑스인을 대적하게 되었다. 쉬망은 언어적으로나 또 다른 의미에서도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아데나워와 쉬망은 50여 년에 걸친 독일·프랑스 역사의 부침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아데나워가 늘 주장하던 ’유기적 유대‘가 이루어져야 했다. 아데나워는 몇 주 후에 로베르 쉬망에게 보내는 진심을 담은 편지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저는 경제적 유대가 이웃 간의 바람직한 협력에 가장 확실한 바탕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48년 12월 24일 베를린에서 처음 만난 미국 대사인 로버트 머피에게 아데나워는 그가 나눈 대화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들려주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오래된 적대 관계를  [이제]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또 다른 공격에 대한 프랑스의 안보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공동의 노력으로 그것이 근거 없는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서부 독일 지역 독일인들의 정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동부 독일의 여러 지역에 사는 이들의 정서보다는 좀 더 나은 것이다. 이는 종교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 결과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와 쉬망은 그들의 정치적인 생각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일치한다고만 생각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그들은 생각이 같았다.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쉬망은 프랑스의 자르지역에 대한 정책을 우려하는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자르지역을 독일에 돌려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프랑스의 외무장관도 프랑스가 프랑스 점령지역 안의 교육시설에 관련된 조치가 지나친 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는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독일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이론을 전개하였다. 곧 독일은 먼저 ‘라인국’, ‘도나우국’, ‘엘베국’으로 불리는 세 개의 커다란 지역으로 분할된다는 것이었다. 이 세 개의 국가가 연방국의 관계를 맺을지 아니면, 국가연합의 관계를 맺을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였다.  

   

많은 부분에서 두 사람은 확신이 없었다.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아데나워의 비관주의는 한 달에 걸쳐 로버트 머피에게 설명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아데나워나 쉬망이나 신중한 여우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국가의 분명한 이해관계나 내치에 관한 자기 입장을 이상주의적인 과장을 통해 드러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대화에서 앞으로 더 쌓아갈 신뢰의 기반은 마련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가 매우 이른 시기에 유럽[통합]운동의 조류에 함께하였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과장할 필요는 없는 요소였다. 이 유럽[통합]운동이 결정적인 순간에 신속하게 동력을 얻지 못하였다면 아데나워의 유럽에 관한 원칙적인 생각은 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이 운동의 정치적 동기는 아데나워의 생각과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아데나워가 파리와 런던의 독일에 관한 공식적인 정책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48년과 1949년의 중요한 시기에 프랑스 측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안보정책이 힘을 잃고 화해정책의 원대한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민당(CDU)의 모든 주요 인물 가운데 아데나워는 유럽에 바람직한 기회가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인물들도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접촉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새로운 외교정책 개념을 전개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이는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헤이그회의에 사민당(SPD) 대표를 한 사람도 파견하지 않았다. 카를로 슈미트와 그의 동료들이 이러한 잘못을 조속히 수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기민당(CDU)은 이 시기에 문자 그대로 유럽 정당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데나워의 정책이 당내에서 논란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기민당(CDU)의 주요 정치가들은 1949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유럽[통합]운동이 마련해주는 커다란 기회를 여러 가지로 발견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1948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유럽[통합에 대한] 생각이 더 발전할지 아니면 열정을 지닌 지식인들의 선의의 노력으로 끝나고 말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1947년에는 독일 문제에 관하여 거의 전망이 불투명해 보이는 침체, 곤경, 불확실성이 강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1947년 중반부터 그 구체적인 가능성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던 유럽[통합]운동 이외에 이제 독일의 상황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두 번째 운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의 유럽 정책이 마셜플랜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미국을 유럽과 마찬가지로 대하였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려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미국은 독일을 희생양으로 삼아 소련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1919/20년 겨울을 거울삼아 미국이 철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장기적인 전망에서 나오는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서신 교환을 하던,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일부 인사들에게 간곡히 요청하던 것이었다. 그는 1946년 3월 빌헬름 솔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오로지 미국의 도움으로만 유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유럽의 구원이 미국에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국 안에서 널리 퍼뜨리는 데에 힘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근본적으로 아데나워는 미국을 포함한 서양 민주주의 공동체를 세계관의 통일로 바라보는 것을 가장 좋게 여겼다. 그는 1947년 8월 레클링하우젠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기민당(CDU)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서양, 기독교적 서양은 지정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정신사적인 개념으로 미국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서양을 함께 구해내려는 것입니다.”     


미국 점령지역의 주지사들이나 당대표들과는 다르게 아데나워는 처음에는 미국 점령군의 중요한 관리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 점령지역의 독일의 지도적인 인물들조차 미국의 독일 정책과 유럽 정책의 속사정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정책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원래 접촉을 자주 하면 영국 점령지역에 있는 당대표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늘어 분위기 파악이 이루어지게 되는 법이다. 아데나워는 관련 정보를 주로 신문 기사를 통하여 얻었다. 1948년 초에 그는 미군정청에서 일하는 급이 매우 낮은 인물인 슈바이처 대위를 통하여 자기 생각을 미군정청의 인사에게 전하고 또한 그 속사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점령지역이 수립되자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표는 프랑크푸르트를 자주 찾았다. 1948년 초여름에 의회위원회의 소집이 논의되면서부터 그는 고문관인 클레이 장군과 연락장교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였다. 이들은 1948년 9월부터는 의회위원회가 있는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제는 미국 측에서 아데나워의 의견을 구하는 일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는 미국 언론인들과 대화도 시작하였다. 그 기자들은 본에 상주하거나 라인지역의 사건 현장에 잠시 파견되기도 하면서 기사를 작성하였다. 1948년 12월 아데나워는 클레이 장군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미국이 영국 점령지역의 사안에 대한 간섭이 점점 더 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파악했음에도 1948년 여름까지 그는 미군정청과 그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46년에 이미 그는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안심시켰다. “미국이 독일의 경제를 재건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이 없는 일입니다. … 저는 장기간에 걸쳐 미국이 이 모든 사안에서 주도권을 쥘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의 민간 자본의 [투자에 대한] 희망이 그가 광업의 국유화를 그토록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마셜플랜에서 독일에 관련된 부분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개괄적인 것만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속하지 않은 다른 모든 독일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당연히 이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 주재하고 있던, 공동점령지역의 경제 담당관은 이에 관하여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정책에 대한 어느 정도 자세한 내용을 1948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1948년 5월에 직업 외교관인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을 측근으로 얻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관점에서 미국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워싱턴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미국의 연락 장교들에게 단번에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에서 블랑켄호른의 중요성을 전혀 과대 평가 할 수는 없다. 아데나워의 기본적인 [외교] 방향은 이미 1945년 여름에 확립된 것으로 그가 쾰른에서 지낸 시절의 경험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올바른 외교 노선을 인식하여 이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일과, 다른 한편으로 복잡한 정치적 일상 과제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여 이를 관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데나워 자신은 그의 평생의 훈련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숙고를 할 줄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실행에서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외교에서의 실행 차원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이때까지도 서툴렀다. 이는 그가 외교와 관련하여 그의 휘하에 있는 독일 인력을 다루는 데에 세부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는 점령 세력의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실무 차원의 인사 정책과 업무 절차에 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사실 여기에서 조만간 독일 국민이 마주해야 하는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업무 절차에 관하여 미리 알아서 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고위층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당대표인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고위층과의 직접적인 의견 교환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실무 차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근심하고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를 알아내려고 애써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가 고위층 인사들에게 제대로 맞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통상적으로 정부 수반의 조직에 속하는 외교적 직무 또는 외교관의 과제가 놓여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이러한 외교 업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부 독일이 지방 주정부의 주지사들은 이를 명확히 인식하여 1946년부터 공동점령지역에서 ‘평화문제독일사무소’를 수립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여기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부담이 없는 외교관들이 장기적인 추세를 관찰하고 관련 문서를 작성하며 또한 실무적인 문제에도 생각을 모으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사무소의 설립 추진을 1947년 클레이 장군이 중지시키고 결국 잠정적으로 미국 점령지역에 제한하여 설립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주지사들은 각자의 주정부에 외교 관련 사안을 다룰 부서를 수립할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직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일이어서 당연히 얼마 안 가서 정당, 주, 개별 점령지역들이 대립하는 긴장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같은 당대표의 시각에서는 서부지역의 외교 업무의 조직적인 시작과 관련된 근본 문제는 크고 작은 기구들을 모두 주지사가 관리하는 데에 있었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당수인 쿠르트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주지사와 점령지역 안의 자기 당 출신의 관리들에게 정치적인 요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 심지어 1948년 초까지 자기 참모진에 직업 외교관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외교관은 시급한 외교적 현안에 관한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데 아데나워에게 확실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이 1948년 5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아데나워를 위하여 부족한 외교 업무를 대신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사무총장으로 임명하고 1948년 9월부터 의회위원회 의장의 개인 고문 역할을 부여하여 무엇보다도 연합국의 연락 참모들과 밀접한 접촉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블랑켄호른을 요제프 뢴스의 후임으로 임명한 것을 통해 아데나워에게 기민당(CDU)의 조직 구성 이후에 이제 외교정책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로 대두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데나워가 장래에 정당 대표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국가의 수반이 되고자 한 숨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아데나워는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만 하다가 1948년 6월부터는 점차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외교정책은 이제 최고의 정부 직무의 기초 위에서 수행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대표의 지위에서는 기껏해야 과도기적으로만 이를 수행할 수 있을 뿐이었다.   

  

44세의 블랑켄호른이 1948년 초에 자기 미래를 당대표인 아데나워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을 볼 때 그는 이미 성숙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덴지역의 부유한 시민계층 출신이었다. 그의 부계 조상은 뮐하임에서 농업과 포도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조부인 아돌프 블랑켄호른 교수는 모든 포도 사업가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던 포도 흑벌레를 새로운 품종 개발로 물리치고 바덴 지역의 평범한 지역 포도주의 품질을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개선하였다. 그의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독일 포도주연합회의 회장으로서 포도주 양조학에 관한 그의 생각을 관철하는 데 성공하였다. 블랑켄호른의 부친은 기마부대 장교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장군의 참모로 복무하였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바덴지역의 보안경찰을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3년 그는 파면당하며 그 당시 아데나워와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기피하여 그는 바덴바일러로 물러나 살았다. 르네 쉬켈레가 이 도시의 ‘천상의 경치’를 놀라운 솜씨로 묘사한 적이 있다. 바로 쉬켈레의 집에서 그가 한때 머물렀었다.     

 

오버엘자스의 마지막 독일지역 장관을 지낸 인물의 딸인 모친 덕분에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은 외교계에 발을 디뎠다. 그의 삼촌인 한스 디에크호프는 1937년 말에 전임 제국 수상이며 미국 대사인 한스 루터의 후임으로 미국 워싱턴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블랑켄호른 자신도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워싱턴 대사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와 런던에서 공부한 다음에 1929년 25살의 나이로 외무부에 취직하였다. 여기에서 외무장관인 슈트레세만이 그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외교보좌관 후보 임명을 불허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는 학교 친구인 볼프강 슈트레세만의 추천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가 외무장관의 화해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나서 자기 부친을 홀대하자 바덴지역 출신의 이 자유주의 인사는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 아테네와 미국 워싱턴 D.C.에서 외교관으로 일했고, 1939년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겨울 전쟁’*을 헬싱키에서 목격했고, 나중에는 스위스 베른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고 외교정책적 고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기에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버텼다. 관절염을 핑계로 군복무를 면제받은 그는 제3제국의 말기 2년 동안에 외무부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며 보냈다.     

* ‘겨울 전쟁’[Winterkrieg,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벌어진 소련과 핀란드 간의 전쟁. 소련은 카렐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에 핀란드가 거부하자 소련군이 핀란드를 공격. 결국 모스크바 평화조약으로 핀란드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카렐리아 지역의 영토를 빼앗김.]  

   

그는 일단 어떤 사람을 믿게 되면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1942년에 그가 이 이성적인 젊은 외교관과 베른에서 나눈 대화에 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블랑켄호른은 게르스텐마이어에게 어떻게 하면 히틀러를 “가장 세련되게 구석으로 몰아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미 블랑켄호른은 베른에서 미국과 영국의 인사들과 어느 정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활기 넘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으며, 감정이입에 탁월한 이 외교관은 전후 독일에서 비교적 빠르게 다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함부르크의 점령지역위원회에서 사무총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7/48년 겨울에 그는 이 기구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아데나워의 부름에 따라 쾰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의 독일과 영국의 친지들이 그를 약간 깎아내리는 듯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하였다. 그들은 블랑켄호른과 같은 현명한 인물이 하필이면 아데나워와 같은 늙은 반동과 함께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와 블랑켄호른은 단번에 서로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아내와 사별한 이후 다시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할 때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모든 직원들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랑켄호른에게도 지나친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매우 까다로운 상사였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호감을 주는 성격을 지녔다. 또한 그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상황 파악’을 [정확히] 하는 재주를 타고났고 연합군 연락 장교들과 기자들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았다. 그러면서 자기 상사이자 주군인 인물이 국제적으로 각광을 받도록 하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면서도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사무총장으로서 정당정치 차원에서 모든 인맥을 동원할 줄도 알았다.     


이 유능한 외교관은 오버라인지역 출신인 덕분에 바덴의 국경 지역만이 아니라 엘자스, 그리고 프랑스와 유대를 맺을 수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독일의 정치 생활의 중점을 서부에 두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독일 서부에서는 사람들이 과거 프로이센 시대에 비하여 이웃 국가의 정서와 현실에 맞는 화해 정책의 필요성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슈트레세만이 주장하던 화해 정책을 1945년 이후에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예측하기 어려운 미국에 대하여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미래의 독일 외교정책의 주요 과제가 서유럽과 대서양의 관련국의 [이해를] 조율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뼛속 깊이 친영국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조국의 이익을 실용적이며 확고한 방식으로 과단성 있게 추구하는 데에 영국의 모범을 연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었다. 방향이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피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1948년부터 서부 독일이 문명 민족들의 공동체 안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처음부터 서양 전승국들 사이의 견해차를 이용할 줄 아는 매우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견해차는 이용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지속적인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승국들의 모스크바회의가 별무소득으로 끝나자 아데나워는 [독일] 서부지역에서 경제적, 정치적 강화 절차가 마침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크푸르트에 공동점령지역 중앙기구들의 수립을 시작하였지만, 의회와 유사한 경제위원회로 이 기구들을 제한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각각의 주별로 각 정당이 그 세력에 따라 대표를 파견한 것이다. 각 주의 이해관계는 단일한 주위원회에서 제시되었다. 이리하여 나중에 [독일에서 확립된] 이원제의 예비적인 형태가 이미 간결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 측은 이렇게 하여 ‘서부[독일]국’의 [수립의] 씨앗이 심어졌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 점령지역 기민당(CDU), 전국 기민당(CDU),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영국 점령지역 위원회 이외에 프랑크푸르트에 새로운 정치 기구가 자라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아데나워는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했다. 공동점령지역에서의 첫 시도는 1946년부터 이루어졌다. 이때는 아직 새로 설립된 기구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1947년 7월 새로운 조직적 절차가 진행되었다. 철저히 부서진 마인 지역 대도시에 아데나워는 점점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경제위원회 내부의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를 지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사 정책에 관한 고위급 결정에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1947년 여름에 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대로, 시민 세력의 목적에 좀 더 접근할 기회가 찾아왔다. 공동점령지역 경제위원회 안에서 사민당(SPD)과 기민당·기사당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는 각각 20석 이상을 차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니더작센의 독일당(DP)은 2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파는 4석을 확보하였다. 좌파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3석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사민당(SPD)과의 깊은 골 때문에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중앙당(Zentrum)은 2석을 확보하고 바이에른재건회(WAV)는 1석을 차지하였다.     


경제위원회는 집행위원 선출 권한이 있었다. 이 위원회에는 중앙부서들의 부장들이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8명의 부장 가운데 6명이 사민당(SPD) 소속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의 첫 독일연방 정부 수립 때도 그랬듯이, 기민당(CDU) 지지층에는 대연정 찬성파에 맞서며 ‘시민 세력’에 동조하는 이들이 존재하였다. 특히 남부 독일의 관료들 가운데에는 사회민주주의 세력과의 협력에 동조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주의회의 간접선거 결과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내부에서는 산업계, 중산층, 농업계가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차지한 20석 가운데 3석만이 노조 파벌에 속하였다. 그리하여 [니더작센의] 독일당(DP)과 기민당(CDU)의 연대가 가능해졌다.     


아데나워가 그런 식으로 상황을 이끌어 나아갔다. 먼저 기민당(CDU)은 경제부장의 직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외에도 다른 자리에 대한 사민당(SPD)의 후보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사민당(SPD)이 이를 거부하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에 경제부장 자리를 양보할 의사를 비쳤다. 다만 기민당(CDU)이 앞으로 적어도 3개 주에 경제장관 자리를 지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때까지는 모든 주의 8개의 경제부 자리는 사민당(SPD)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민당(SPD)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목적으로 삼았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치열한 협상과정에서 사민당(SPD) 측은 급격히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결정적인 투표에서 기권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사당(CSU)과 기민당(CDU)의 부장들로만 이루어진 집행부가 수립되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이때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직무대리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이 기민당·기사당 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의 기민당(CDU) 대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당대표인 아데나워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의 압력을 느끼게 되었다. 한스 슐랑에-쉐닝겐은 식량, 농업, 삼림부 부장이 되었다.    

  

1949년 가을에 독일연방 정부를 구성할 때와 유사한 일이 다시 벌어졌다. 이때와 마찬가지로 쿠르트 슈마허가 의도치 않게도 아데나워에게 가장 훌륭한 원군이 되었다. 슈마허는 먼저 대립각을 세우면서 대연정을 위한 실용적인 타협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1947년 7월 24일의 부장 선거 이후에 슈마허는 기민당(CDU)을 비판하였다. 기민당(CDU)이 이러한 결정으로 “사회주의, 더 나아가 사회적 노선을 포기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기민당(CDU)은 이제 “기업가들을 위한 정당”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기민당(CDU) 지역위원회의 소식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쿠데타가 좌절되었다. … 기민당(CDU)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다른 정당들의 단호한 태도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주주의를 구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매우 영리하게 처신하면서 이 문제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에 이어서 레크링스하우젠에서 열린 지역 전당대회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짧게 언급하였다. 그 이유는 자명한 것이었다. 다가올 겨울의 경제 사정과 식량 사정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곤경에 대하여 온전한 책임을 지게 될 한 정당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사민당(SPD)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이를 고통스럽게 경험한 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을 기민당(CDU)도 공동점령지역에서 훨씬 심각한 차원으로 마주하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홀츠아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설명하는 자리에서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프랑크푸르트의 중앙 기관들을 장악하는 것을 기민당(CDU)이 원치 않은 결정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결정은 모든 측면의 선의에서 그 어떤 궁극적 성격을 지니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미국과 영국의 군정청이 공동점령지역의 조직을 새롭게 개편할 때 시민 세력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 자신은 이에 크게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사민당(SPD)이 야당에 머물 것임을 처음부터 밝혔기 때문이다. 인사이동의 바람이 다시 불었다. 연합군 측이 1월 초에 기존의 경제부장이었던 요하네스 세믈러를 비판적인 언사를 했다는 이유로 신속하게 파면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신설된 ‘수석부장’과 경제부장의 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야 했다. 여러 사람이 ‘수석부장’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다시 논외의 인물이 되었다.     

이 문제는 쾰른에서 미리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와 환담하는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파벌 의식이 없는 쾰른시장인 헤르만 퓐더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자고 설득한 것이다. 사실 퓐더가 기민당(CDU) 안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이들이게] 불편을 끼치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는 그 당시 하마평에 오른 다른 후보들에 비하여 퓐더가 수석부장이 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였다. 그러한 후보들에는 바이에른의 주지사인 에하르트나 헤센의 재무장관인 힐퍼르트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퓐더에 대한 모든 반대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물리쳤다. 곧 퓐더가 모든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 가장 높으면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어려운 자리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민당(CDU) 원내대표인 홀츠아펠은 며칠 후에 경제위원회의 공개회의 자리에서 설명하기를, 퓐더가 무엇보다도 행정 업무의 조정자이며 연합군과의 협상을 주도하는 직책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놓고 강한 정치가로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면서 홀츠아펠은 아데나워가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와 환담하는 자리에서 그를 칭찬한 일을 약간 놀라워하면서 언급하였다. 

    

퓐더 문제에서 왜 아데나워 자신이 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자기 나이가 너무 많아 “현재 상황에서 볼 때 그토록 힘든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1948년 2월 29일 이러한 일을 논의하던 때 아데나워의 아내가 4개월 동안 본의 병원에서 불치의 병으로 입원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외국에서라도 스트렙토마이신과 같은 이러저러한 효과 있는 약을 구하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최대한 자주 본에 머물렀다. 그가 ‘현재의 처지에서’ 프랑크푸르트의 고위직을 차지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3월 1일 경제부장으로 선출된 것에 아데나워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자민당(FDP)이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아데나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중요한 것은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는 ‘시민 세력’의 단합이 유지되는 일이었다!     

서부지역에서 과연, 그리고 언제 독자노선을 걸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결단의 문제에서 아데나워는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야콥 카이저가 1947년 12월 마침내 소련의 군정청에 맞서자 아데나워는 [독일] 동부와 서부의 기민당(CDU) 대표들의 회의를 쾰른에서 개최할 것을 기꺼이 바랐다. 카이저가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위원회 위원 후보가 되는 문제에서, 아데나워는 이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는 여전히 카이저가 서부지역의 기민당(CDU) 안에서 좌파 수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초에 아데나워는 상황이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고 여겼다. 특히 식량 보급 문제를 그렇게 보았다. 그는 뉴욕에 있는 시몬 포겔에게 1948년 1월 말에 보낸 편지에서 [하루] 1,550칼로리를 기준으로 한 강제 식량 배급 조치는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 생각으로는, 미국이 미국·영국 공동점령지역으로 엄청난 양의 식량을 매우 신속하게 공수하지 않는다면 서유럽에 대한 마셜플랜 전체는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의 구원은 오로지 미국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놀라운 일은 오래전부터 [독일의] 서부지역에서 독자노선을 걸을 것을 주장해온 아데나워가, 정작 서양 국가들의 정부가 1948년 6월 초의 런던협약으로 서부 점령지역에서 [독일] 국가 수립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자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이다. 런던협약의 최종 성명은 그 당시 한 달에 걸친 협상의 결과로 나온 것으로 헌법제정회의의 소집 절차를 확립하고, 이 회의에서 마련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인준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루르지역에 대한 점령상태 선포와 국제통제위원회의 수립이 가시화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국가, 독일의 대표가 공동으로 구성한 통제위원회가 석탄과 철강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결정은 다수결로 내리도록 한 것이기에 독일의 기간산업이 오랫동안 외국이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 전개되었다.     


아데나워는 실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쾰니셰 룬드샤우》(에 자기 깊은 실망감을 드러낸 글을 썼다. 런던협약에서는 오로지 “통제, 통제, 통제에 관한 이야기만”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독일의 진정한 안보는 독일 국민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럽연방에 관한 생각과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에서 아데나워는 연합군 측의 문서에 관한 토론에서 오스월드 스펭글러의 말을 언급하였다. 스펭글러가 경제적 병합의 시대를 예측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번 조치가 [아데나워가 보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근면한 커다란 민족을 병합하는” 사례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런던에서 합의된 것은 국제법과 자연법을 모두 거스른다고 볼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마셜플랜이 루어규정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7월 5일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인 알프레드 모처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에 비하여 베르사유조약은 장미꽃다발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데나워는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고 보아 그의 처지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는 하노버로 가서 사민당(SPD)의 중앙당(Zentrum) 본부에서 독일 정당들의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하였다. 그 당시 슈마허는 중병에 걸려 있어서 에리히 올렌하우어(, 프리츠 하이네, 프리츠 헨쓸러와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사태에 관하여 이들은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사민당(SPD)도 사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민당(SPD)은 독일 정당들의 공동성명을 발표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이 당시 아데나워는 런던협약을 완전히 반대하는 입장, 그리고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이를 수용하는 입장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음울한 경고를 하였다. 곧 그가 보기에 “독일 국민에게는 협력의 거부로, 후세에 최소한 명예라도 보존하는 방법 이외에 아무런 것도 남지 않은 시기가 곧 올 것이 확실하였다.” 그러다가 또 다시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곧 “우리는 이러한 런던협상에 따른 제안을 바탕으로 하여 그 틀 안에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이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헌법을 마련하는 절차에 관하여 ‘런던 문서’에 명시된 규정도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다. 1948년 5월에도 아데나워는 헌법이 선거로 구성된 의회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뜻을 고수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타협의 여지는 남겨두었다. 주의회가 선출한 회의체에서 초안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초안에 대하여 정당들이 각자의 선거구에서 견해를 밝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민족회의 선거를 1948년 9월 1일까지 치르자는 의견을 이미 그 당시에 거부하였다. 그렇게 선거를 치르게 되면 급진 정당들만이 이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때 이후 다른 사람들도 내세웠던 것이다.     


아데나워의 반대 의견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부 독일의 주지사들이 관철한 노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지사들은 1948년 7월 8일부터 10일에 걸쳐, 서방 연합국 측의 계획에 대하여 태도를 밝히었다. 여기에 나타난 망설임은 [연합국 측의] 독일 정책에 대한 깊은 불신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주지사들은 연합국이 독일 정책에 관하여 수년 동안 서로 다툼을 벌여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 분열된 상황에서 서부 독일 사람들은 스스로 별도 국가의 수립에 적극적인 협력하여 역사 앞에서 분단의 오명을 뒤집어쓰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독일 전체를 지배할 전제 조건이 마련될 때까지, 그리고 독일의 주권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독일 헌법의 마련을 미루고자 노력한 것이다.  

   

국가 수립에 관한 문제에서 아데나워의 노선은 1948년 초와 초여름에 전혀 일관성을 보이지 못하였다. 1947년 10월 그는 런던회의가 좌절될 때를 대비하여 서부의 세 점령지역의 “최대한 신속한 통일”에 관한 나름의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잘 알려진 그의 구상이다. 1948년 4월 아데나워는 독일의 분열은 상서롭지 않은 위험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하였다. “동부지역에서 이미 완료된 독일의 동서 분열은 독일 서부지역의 통일을 재건하는 것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그 이후로 수십 년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노선으로, 그가 확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다른 자리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48년 4월 말 그는 엘방겐 지역에서 오이겐 코곤과 나눈 헌법에 관한 논의에서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코곤은 그 당시에 서부 독일 연방국의 수립을 매우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동부지역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연방헌법은 마련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단순한 전략적인 발언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서부 독일 지역의 정치적 재건의 조건이었다. 아마도 그는 잠깐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부 독일이 서양의 국제공동체와 협력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으로 그는 상황이 전개되는 현실을 훨씬 앞서가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는 [독일을 서양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대접하는 것은 [궁극적인] 목표일 뿐, 현실에서는 점령군을 힘들게 몰아내어야 한다는 것을 늘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당면한 국가 수립의 형태를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의 주요 근심거리는 그 당시의 일련의 편지와 입장 표명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경제위원회 의장인 에리히 쾰러가 아데나워에게, 그의 비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전하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런던의 제안’에 대한 확고한 태도에 관하여 저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저는 귀하에게 기회가 되는 대로 구두로 논의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은 다만 제가 베르사유조약 비준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고 거기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독일이] 서양의 국제사회에 동등한 자격으로 다시 함께하는 것의 전망이 무익한 통제로 어두워지게 되면 급진적인 독일 민족주의가 부활하게 될 것을 늘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데나워의 우려가 지나쳤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동서 갈등은 이제 이른바 숨이 막힐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1948년 6월 7일 ‘런던의 제안’이 공개되고 서부 독일 모든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격렬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6월 20일 오랫동안 기다렸던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조치는 서부 점령지역의 경제 재건에 필수적인 기초를 마련해주었지만, 동시에 독일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을 결국 단절하는 것이 되었다.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소련의 군정청은 6월 24일 [독일] 동부지역에 자체적인 화폐를 도입하고 이와 동시에 베를린에 있던 4대 승전국 관리위원회가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소련 군정청은 베를린으로 가는 모든 국도를 차단하였다. 이에 맞서 미국과 영국 측은 6월 26일부터 공수작전으로 대응하였다. 서부지역에서는 불길한 공포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다시 한번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한여름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과 불확실성의  국면에서 서부 점령지역의 연합삼국의 군정청 지휘부는 서부 독일의 주지사들에게 7월 1일 부로 런던에서 마련된 제안을 ‘프랑크푸르트 문서’의 형태로 전달하였다.     


독일의 주지사들은 이에 대하여 1948년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코블렌츠에 있는 ‘리터슈트르츠’ 호텔에 모여 이제 최종적으로 프랑스 점령지역도 독일 서부지역 연맹에 포함되어야 한다고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아데나워는 1월에 이미 총영사 폰 바이쓰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하였다. “이제 독일이 동부지역과 공동점령지역, 그리고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서부지역의 세 지역으로 분할되는 것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위험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대로 지연작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하여 클레이 장군은 분통을 터뜨렸다.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주지사들이 그를 따돌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군정청과의 재협상과 뤼델스하임에 있는 니더발트 사냥궁에서 열린 추가 회의를 통하여 비로소 9월 1일 ‘의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위원회는 ‘기본법’ 곧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이 법은 국민투표가 아닌 주의회의 의결을 통하여 발효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하였다. 8월 10일부터 23일까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킴제의 헤렌인젤에서 헌법전문가 회의가 열려 의회위원회를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모스크바에서는 소련의 정부와 서양의 대사 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는 [독일] 서부지역의 국가 수립이 취소된다면 스탈린이 베를린 봉쇄를 해제할 의사가 있음이 명백해졌다. 워싱턴에서는 아직 아무런 확실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모스크바에서의 대사들과의 회담도 무위로 끝났다. 그러나 의회위원회가 구성되고 나서도 미국 국무부에서는 1949년 초까지 4개 강대국의 군정청을 다시 수립하는 동시에 서부 독일 국가 수립 준비의 중지에 대한 숙고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노선을 지향하는 주도적 인물은 미국 국무부의 기획실장인 조지 케넌이었다. 이와 더불어 1949년 초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모든 논의와 계획은,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기폭제가 되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협 가운데 진행되었다.   

   

상황이 매우 심각해질 때마다 아데나워는 평소에는 그에게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대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책략을 포기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데나워가 상황을 새롭게 판단하는 데에는, 그 당시 클레이 장군의 참모부에서 고문관으로 있던 칼 요하임 교수와 나눈 긴 대담이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리드리히는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서부 독일 지역의 정치가들에게 상세한 ‘브리핑’을 하여 그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도록 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클레이 장군이 자기 생각에 관하여 당대표들과 직접 논의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점령지역 안의 모든 주지사와 관리들에 대하여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였다. 영국 측에서는 로버트슨 장군이 용기를 내어, 때가 되면 저절로 일이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워싱턴의 불확실한 분위기를 더 명료하게 파악하고 인식하였으며 프랑스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전략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7월 10일 개최된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회에 앞서 파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노선이 있습니다. 비달은 독일을 매우 반대하는 인물이고, 쉬망 장관은 좀 더 온건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드골주의 정당인 ‘프랑스국민연합’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존재하였다. 프랑스 정치가들은 다시 한번 책략을 동원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국민이 런던협약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파리에서는 독일 문제에 관한 불확실한 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1950년대 중반까지 아데나워를 늘 되풀이하여 불쾌하게 만든 일이다.     

주지사들이 아데나워의 영향력에서 매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자 그는 매우 불쾌하게 여기며 이에 대응하였다. 그들은 당대표의 노골적인 불편한 심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의 자주권을 의식적으로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칼 아르놀트와 맺은 관계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주는 대로, 사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놀랄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 당시에 아데나워는 바이에른의 주지사인 한스 에하르트와도 매우 냉랭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 두 사람은 기사당(CSU)의 당대표인 요제프 뮐러를 거부하는 데에는 일치를 보였다. 사민당(SPD)의 주지사에 대해서 아데나워는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리터슈트르츠’ 호텔에서 개최된 회의에 쿠르트 슈마허를 대신하여 에리히 올렌하우어가 그리고 기사당(CSU)을 대표하여 요제프 뮐러가 참석한 것이 아데나워는 특히 못마땅하였다. 주지사들은 원래 당대표 없는 회의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자신은 둘째 날 오후에야 비로소 주지사 알트마이어의 부탁을 받은 아돌프 쉬스터헨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굴뚝새들은 아직 일을 마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가 회의 장소에 도착하자 모든 것은 이미 종료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가 자기 반대 의견을 철회한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클레이와 로버트슨의 노선을 무조건 따르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매우 빈정대는 투로 이들에게 요청하였다. “최소한 그들의 표현이라도 온건하게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국가의 수립을 원칙적으로 거부한다고 표현한 한 문장을 명시적으로 삭제하기 바랍니다. 사태가 전개되면 가까운 미래에 그들은 자신이 내세운 설명을 스스로 부인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의회위원회의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에 속한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본부의 사주를 받는 사민당(SPD) 출신의 주지사들을 강하게 조롱하면서 그 자신은 처음부터 제1차 회의의 결의가 완전히 틀린 것으로 여겼다고 말하였다.    

 

1948년 6월 이후에 아데나워가 보여준 태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당 동료들 앞에서 아데나워는 8월 중순에 로버트슨과 비밀 회담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전쟁이 나지 않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는 어찌 되었든 로버트슨에게 직접 경고하였다. 곧 모두가 퇴로는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에 이어서 스위스에서 진행된 논의들은 그에게 매우 우려스러운 것으로 들렸다. 여기에서 그는 [스위스] 코에 있는 ‘도덕 재무장 운동 본부’에 머물고 있었다.     


의회위원회의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는 아데나워가 대단한 전략가임을 9월 15일 깨닫게 되었다. 하나로 정리된 의사록에 나온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국제적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시아는 떨어져 나가려고 하지만, 미국은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늦어도 1950년까지는 결정이 나야 합니다. 러시아는 독일만이 아니라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모든 위성 국가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리고 베를린은 얼마 동안 안정될 것으로 보입니다(실제로는 몇 달 동안만 그랬다). 러시아가 스스로 일찍 물러서지 않는다면 정해진 시기에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인 허풍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방 연합국 측의 결정 과정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토 슈마허-헬몰트의 기억에도 그러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발언이 있은 지 7개월 후에, 곧 의회위원회에서 진행된 헌법 논의가 거의 마무리될 시점에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결코 평화를 가져다 줄 나라가 아니었다. 충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11월 말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인사들에게 다시 한번 매우 비관적인 말을 했다. “매우 침착하고 혜안이 있는 사람들은 늦어도 내년 초에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상황이 분명히 그렇게 판단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데나워가 이전에 생각했던 독일의 방위 분담은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것이었다. 1948년 초에 프라하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에 아데나워는 80개 사단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독일군이 벌써 3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200개 사단을 운영한 것을 보아 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1948년 가을 루돌프 아욱슈타인이 뢴도르프로 그를 찾아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데나워는 아욱슈타인에게 그가 언급한 30개 사단이라는 숫자는 자기 추측에도 맞다고 하였다.  

   

1948년 12월 아데나워는 처음으로 한스 슈파이델 장군에게 환담을 요청하였다. 루돌프 파울스가 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었다. 블랑켄호른이 그에게 같이 일할 것을 권유하였고 전시에는 슈파이델 곁에서 당직장교로 근무하였다. 슈파이델은 이미 1948년 여름에 제안서를 작성하여 한스 에하르트 주지사에게 전한 바가 있다. 장군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던 아데나워는 군대를 힐난하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슈파이델은 이를 냉정하게 반박하면서 아데나워가 군대에서 근무한 적도 없고 저항운동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늘 그렇듯이 아데나워는 이해관계가 없는 대화 상대가 그의 의견에 반대하면 이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슈파이델 장군에게 블랑켄호른과 함께 현장에서 작성한 비망록을 자기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하였다. 그 비망록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라인강전선의 방어조차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고 나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나왔다. “유럽 총동원의 차원에서 독일의 참전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독일군은 다른 여러 서유럽국가 가운데 하나의 소규모 단위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독일은 유럽 군단 차원에서 단일 방위부대로서 참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이 문서를 받으면서 슈파이델 장군에게 자기 의견을 상술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1949년 초에 미국 연락참모부에서 근무하는 한스 시몬스에게 이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시몬스가 미군 본부에 전한 보고서를 보면 그 내용이 축약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데나워가 얼마나 세련되게 그 뜨거운 감자를 다루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재무장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연합군 측이 서부지역에 25개 사단을 조직하여 무장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데나워는 여러 소식통을 통하여 그가 이 점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무책임하게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일련의 대화를 나누게 될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슈파이델 장군과 긴 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도 포함된다. 그런데 슈파이델 장군은 프랑스의 입장을 탐문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독일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곧 그는 개인적으로 서부 독일의 안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깊은 확신을 지니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만 이러한 근심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IG염료아레알회사 건물에서 카를로 슈미트도 이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건물에 클레이 장군의 참모들이 일하고 있었다.     


클레이 주변의 장교들에게 이러한 보고서는 그들의 심기를 매우 크게 건드렸다. 캄벨 중령은 의회위원회 의장에게 슈파이델 장군과 그 어떤 것이든 독일 병력의 배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법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되풀이 될 때는 아데나워에게 제재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홀 장군은 이 보고를 접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리치필드 박사님 –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러한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독일의 재무장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데나워 박사에게 분명히 전달하여야 합니다.” 일단은 상황이 여기에서 정리되었다.     


이렇게 1948년 가을의 상황은 아데나워가 독일연방 수상이 된 초기 몇 년 동안에 일어나게 될 일의 모든 특징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핵심 국가가 정치적 자율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독일 내부의 충돌보다는 소련과 합의를 이루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대신에 ‘서부[독일]국가’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일에 제동을 걸며 온갖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미국과 영국이라는 세계 강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게다가 화해 정책에 찬동하는 파리의 일부 정치가들은 유럽통합에 서부 독일이 포함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유럽[통합]운동은 커다란 희망을 주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진행될 것인지는 여전히 하늘에 달린 일이었다. 독일의 재건은 시작되었고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많은 독일 사람에게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보다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정치적으로 관철될 것인지는 아직 예측할 수가 없었다.  

   

또한 마셜플랜도 그 초기 단계에 머물렀고 독일의 [산업]해체와 생산 제한, 그리고 연합국의 산업통제에서 불리한 조치는 정치적으로 미국 자본의 지원보다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베를린 문제는 서양 강국들에 달린 문제로 독일 사람들에게 이미 모든 미래 설계에서 방해물이 되었다. 독일의 방어 분담 문제도 암암리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곳에서 제3차 세계대전의 검은 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의회위원회 의장     


앞으로 무엇이 전개될지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1948년 초 아데나워는 독일연방 수상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었다. 상황이 달마다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위원회 회의 소집 하루 전에 아데나워는 파울 실버베르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이 위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요컨대 상황이 개선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본을 의회위원회 회의 장소로 정하는 것에 확실히 아데나워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추진한 사람은 차관인 헤르만 반더스레프였다. 그는 뒤셀도르프의 칼 아르놀트의 국무청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위원회 회의가 소집이 채 3주도 남지 않은 시점인 8월 13일에 비로소 전화회의를 통하여 이 날짜가 최종 확정되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프랑스 점령지역 안의 장소인 바트엠스나 코블렌츠를 제안하였다.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본을 회의 장소로 택한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이었는지는 곧 밝혀졌다.     


아데나워가 그 당시까지 서부 점령지역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이후에도 이런 일을 계속하였다.) 의회위원회의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슈투트가르트 주지사인 라인홀트 마이어는 이 초창기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도시에는 사람이 머물만한 장소가 전혀 없었다.” 얼마 안 가서 헌법의 아버지들로 불리게 된 이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낡았지만, 매우 비싼 개인 집이나 펜션, 또는 호텔에 머물렀다. 아데나워 자신은 밤이 되면 라인강 우측에 있는 뢴도르프 체닉스벡의 저택에서 머물 수 있었다. 이리하여 나중에 쿠르트 게오르그 키싱거가 말한 대로 그는 “건강과 회복을 위한 추가적인 자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평범한 의원들에게 민주주의적 정당에서도 그에게 좋은 자리에 있다는 인상을 주고 그의 노고를 덜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라인강 오른쪽의 높은 지역에 있는 집은 확실히 문제가 되었다. 라인강 다리들이 아직 파괴된 채로 있었기에 나룻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배는 밤이 되면 운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인강변이 짙은 안개에 쌓이면 아예 낮에도 운항하지 않았다. 만조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이로운 것으로 여겨져서 이미 9월 말에 그는 헤르만 반더스레프를 초대하여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일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를 편히 여깁니다. 그래서 떠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정적으로 본을 연방국 수도로 삼도록 하자는 제안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개의 제안서가 마련되었다. 그 제안서는 본이 연방국 수도가 될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긍정적인 답을 제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10월 27일 원로회의에서 이를 제안하였다. 아데나워와 의견을 같이하는 주지사인 칼 아르놀트는 그의 국무장관과 함께 연설하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수도로 정해지길 바랐던 프랑크푸르트는 서둘러 공식적인 이의 제기 절차를 시작하였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사람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 주에서 많은 것이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었다. 의회위원회에서 결정을 내리기 전인 2월 중순부터 이미 사람들은 사범대학교의 남쪽 부속건물과 북쪽 부속건물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짓기 시작하였다. 반더스레프는, 평소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던 노인인 [아데나워가] 건축 소음을 매우 기쁘게 여긴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공사가 한창인 이곳에서 제게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대회의실 신축 공사에서 나는 쇠망치 소리와 건물을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거시적인 정치에서 흔히 심리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아데나워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 그러하였다. 국가의 새로운 건설이 이러한 방식으로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되자 그는 헌법 논의에서 결과를 얻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이제야 본을 수도로 정하고자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정부의 중심을 서부 독일로 옮길 것을 요구해왔던 남부 독일과 서부 독일 정치가들에게는 1946년부터 익히 알려진 다양한 논리적 논거의 틀에서 힘을 받은 것이다.     


본을 수도로 정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는 고급 주택가에 넓게 주둔하고 있던 벨기에 점령군이 그 도시를 떠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48년 10월 8일 아데나워는 플랑드르 출신의 옛 동료 시장이며 현재 브뤼셀의 국회의장인 프란스 판 카우벨레르트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기 정치적 소견을 일부 밝혔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랑크푸르트가 매우 강력하게 수도가 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 본도 마찬가지였다. “저 개인적인 생각에서, 그리고 서방 강대국들의 관점에서보아도 본이 프랑크푸르트보다 우월합니다. 라인 서부지역과 독일의 서쪽에 있는 이웃 국가들 사이의 오랜 전통적 관계는 프랑크푸르트가 서부의 이웃 국가들과 맺은 관계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미래의 독일연방의회와 연방정부가 상대적으로 작은 [본과 같은] 도시에 자리잡는 것이 소란스러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의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아데나워] 의장은 일단 비밀리에 논의의 방향이 본을 향하도록 작업에 들어갔다. 본은 그 당시에 사실 이상적인 정부 도시는 전혀 아니었다. 코블렌처 슈트라쎄에 있는 ‘알렉산더대왕 박물관’의 안뜰에서 거행된 개막 행사의 외적인 분위기는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그곳에 전시되어 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이 되어온 박제된 동물들을 사람들이 힘들게 밖으로 옮기거나 천으로 가렸던 것이다. 그러나 박제된 기린을 가리기에는 천이 모자랐다. 그 기린은 주지사들, 의회위원회 위원들, 점령군 대표들의 대규모 모임을 내려다보았다. 1년 후에 아데나워도 몇 주 동안 독일연방 수상으로서의 직무를 이 대왕 박물관의 동물 세계 안에서 수행하였다.     


어찌 되었든 본의 경치가 많은 [부정적인] 것을 상쇄시켰다. 비록 헌법의 아버지들이 일단 회색빛의 가을과 겨울을 앞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밀접한 인맥도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당파를 초월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와 카를로 슈미트는 첫 대화에서 서로를 탐색하였다. 슈미트는 이 대화를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귀하에 대하여 주의하라는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말로 아데나워에 대한 소문을 은근히 비꼬았다. 그의 소문이 늘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긴 대화를 나누고 나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단지 나이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귀하는 사람을 믿지만 저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사람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하게 말을 했을 것이다. 카를로 슈미트는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에 대한 소문이 지속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경멸하는 아데나워라는 소문은 ‘시민회’, 라로셰, 골드베르크의 ‘아들러’와 같은 선술집에 저녁에 모인 의원들과 기자들의 주요 대화 주제였다.  

   

의회위원회에 들어올 때 아데나워가 어떤 태도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점령지역 당대표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정당 원내대표로서 의회위원회 위원 지명권이 있었다. 칼 아르놀트는 아데나워에게 이를 강력히 독려하였다. 아마도 그는 몇 달만이라도 아데나워에게서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의장으로 선출된 다음에 당동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처음에 저는 어떤 경우에도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당원”이 그에게 [의장직 수락을] 간청하였다. 아마도 누구도 그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31일 사범대학교 강의실에서 열린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회의에는 유명한 정치가들이 별로 많이 참석하지 않았다. 조언하는 역할만이 부여된 베를린 대표들에는 야콥 카이저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 기반은 이미 상실된 후였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는 아데나워 이외에 누구보다도 로베르트 레어가 평범한 의원들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라인란트-팔츠의 법무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아돌프 슈스터헨은 정치적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협조를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헤센주의회의 기민당(CDU) 당대표인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에게도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한 거물 가운데 한 사람은 기사당(CSU) 소속의 국무장관인 안톤 파이퍼였다.   

  

1933년까지 바이에른 인민당(BVP)의 사무총장을 역임한 파이퍼 학장은 기사당(CSU)의 강력한 가톨릭 파벌에 속하는 동시에 연방주의자였다. 그는 주 당대표인 요제프 뮐러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1947년 연방주의를 강력히 지향하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에 속하는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엘방거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헤렌제에서 개최된 헌법회의에서 탁월한 역할을 하고 나서, 이제는 연방주의라는 안건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려고 본에 온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기사당(CSU 내부에서의 바이에른 출신 의원들 간의 격렬한 투쟁만이 아니라 기사당(CSU)과 바이에른당(BP) 사이의 싸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싸움을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정치가들은 바이에른의 주 경계 밖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근심스럽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기사당(CSU)과 기민당(CDU) 연합 진영이 이때문에 취약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기민당(CDU) 정치가들 무리 가운데에서 결국 국무장관인 발터 슈트라우쓰가 무게 있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고령의 관리로 뒤에 물러나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27명으로 구성된 자기 원내교섭단체 소속의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아데나워가 이 위원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72세의 나이로 최연장자 의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당이 그를 의장으로 추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조속히 5명의 자유주의파 위원들과 2명의 독일당(DP) 위원들과의 접촉하는 것에 찬성하였다. 이는 사민당(SPD) 의장이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사민당(SPD) 소속 위원은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을 합친 것과 마찬가지로 27명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중앙당(Zentrum) 소속 위원 2명 공산당 소속 위원 2명이 있었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의장인 아데나워는 사전에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이견을 조율하기 위하여 공을 매우 들였다. 남부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의 주지사인 겝하르트 뮐러는 법학 교수인 카를로 슈미트가 기민당(CDU)에 배당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함부르크의 사민당(SPD)이 자리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합의를 위하여 겝하르트 뮐러와 요제프 뮐러와 손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의회위원회에는 사민당(SPD) 측의 온건파 가운데 추진력 있는 위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야만 헌법에 관한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말을 잘하고 동시에 헌법 문제에 해박한 인물을 위원으로 천거하게 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연정을 목적으로 한 음모를 눈치챈 것이다.     


의회위원회의 소집에서부터 자유주의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첫 대표단을 이미 추천한 뒤였다. 여기에는 테오도르 호이쓰, 토마스 델러, 헤르만 회프커-아쇼프가 있었다. 그런데 독일당도 한스-크리스토프 세봄을 대표 인물로 내세웠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빌헬름 하일러가 있었다. 그는 여러 당을 거쳐 결국 독일당(DP)의 벨펜 가문 파벌에 속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 정당의 유명 인물들이,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소속이지만 그가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 인사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의 뛰어난 지도적 인물로 부각될 수 있고 동시에 자민당(FDP)과 독일당(DP)과의 관계를 세심하게 돌볼 충분한 기회가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의 경우에, 여기에 모인 이들이 매우 분열된 오합지졸로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회의의 첫 회기 때부터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아데나워는 아돌프 슈스터헨을 원내대표로 선출하고 싶었다. 그라면 아데나워가 마찰 없이 업무를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은 즉시 안톤 파이퍼를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의회위원회가 주 정부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데나워의 권고는 무시되고 말았다. 의회위원회 회의를 14일 후에 개최하자는 제안도 전혀 반향을 얻지 못하였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베를린에 관한 동서 대화의 결과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아데나워는 실수까지 하였다. 그는 독일공산당(KPD)의 당대표인 막스 라이만이 준 정보를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라이만은 곧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데나워에게 확언을 했던 것이다. 원래 그렇게 지연하는 것은 아데나워의 기본 노선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동서의] 합의가 이루어져서 연합국 측의 주도로 [회의가] 중단이 되어버릴 때 대중의 반응이 어떠할지를 상상해 보면 그러한 지연은 이해할만하다. 그리고 헌법을 수립하고자 모인 정치가들이 이를 수용한다면 모욕적인 일이 될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의장인 아데나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위원회가 더 이상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면 말이다. 또한 아데나워가 공을 들이는 독일당과 연대하는 것도 무익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세봄이 기민당(CDU)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의장직과 관련해서는 일이 잘 진행되었다. 아데나워가 예상치 못한 사민당(SPD)이 아데나워를 의장으로 선출하는 데에 찬성하였다. 그 대신에 기민당(CDU)이 카를로 슈미트를 상임원원회 위원장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이었다. 사민당(SPD)의 슈미트는 나중에 이것을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말하였다. 군정청은 어쩔 수 없이 의회위원회와 그 합법적인 아데나워 대표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일이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단순한 대표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며 정치적 수완을 최대한 발휘하여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곧 자율적인 당대표이며 동시에 주의회의 선거로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당들을 대표하는 독일 최고 회의체의 의장이 된 것이다. 국민은 정당의 직위보다는 국가의 직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는 그의 공적인 면모도 격상시켜주었다. 그래서 그가 비로소 영국 점령지역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소감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옅볼 수 있다. 의회위원회는 “군정청이 주도하여 수립된 것이지만” 이제는 “위원회에 부여된 임무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기구가 되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고, “독일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합니다.” 그런데 헌법 전문에 명기된 것과는 달리 이 소감에서 아데나워는 우리가 “4,600만 독일 국민을 대표합니다.”라고, 곧 서부 독일과 베를린 서부지역의 국민만을 대표한다고 말하였다. 이 위원회의 과제는 완전히 분열된 독일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 체계”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잠정적으로는 독일의 일부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도 말이다. “여러분, 우리는 일단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지체하거나 분열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독일 전체의 통일을 다시 이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추진해야 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의회위원회의 통제권 밖에 있는 정당들에 달려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는 “하느님의 가호와” “의무감”으로 시작해야 하는 “역사적 때이며 역사적인 과제”였다.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는 징조가 보였다. 9월 1일에 군정청에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관계자들이 베를린에서 베를린 봉쇄의 해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는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었다. 아마도 군정청은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이 최대한 안 보여야 헌법 논의가 실제로 가장 믿음직해 보일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확실히 클레이 장군, 로버트슨 장군, 쾨니히 장군이 배석하게 된다면, 소련과의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의회위원회의 영광이 신속하게 사라지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군정청의 인사가 이 위원회에 참석하기는 하였다. 펩쉬 중령과 새푸 드 생통즈 중령, 그리고 프랑스 외교관인 장 라루와 같은 이름이 의회위원회 모든 위원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이 서유럽과 미국의 연합군 참모들은 대부분 뒤에서 은밀하게 활동하였다.     


무엇보다도 미국 측이 보기에 이 시기가 독일 출신 미국인 1세대가 이제 전면에 등장하여 역사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이때 클레이 장군 측근의 고문관이며 동시에 아데나워의 대화 상대였던 인물은 칼 요하임 프리드리히 교수였다. 그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학자로서 경력을 쌓을 결심을 한 바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미국 연락 참모 가운데 한스 시몬스와 즐겨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당시 56세로 [뉴욕의] 사회연구 뉴스쿨 대학(NSSR)의 학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베를린의 독일정치학교(DHP)에서 몇 년 동안 교수로 재임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프로이센 관리로서 1933년까지 리그니츠의 니더슐레지엔에서 사민당(SPD) 소속 주지사로 근무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새로운 직무를 격조 있고 의회에 관행적인 방식으로 시작하였다. 그 방식은 그가 쾰른시의회를 이끌고 프로이센 추밀원에서 일하며 습득한 것이었다. 그 당시 본에서의 일을 시작한 발터 헹켈스는 1949년 5월 거의 9개월 동안 아데나워를 자세히 살펴본 언론인들에게 각인된 그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연설가로서 아데나워는 “냉정하고, 완고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또한 “신랄하고 때로는 냉소적이었다.” 전체적으로 그는 설득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적지 않은 정적들은 그의 보수적 기본 태도로 고집, 그가 꾸미는 정치적 음모, 교활함, 예측 불가성을 들었다. 그런데 생존하고 있는 독일 정치가 가운데 그의 수준에 이른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사실 언론인들은 이때 비로소 아데나워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의 공적인 이미지를 호의적으로나, 거리를 두고 또는 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또한 해외 언론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인기 도서인 《중국에서 울리는 천둥》으로 유명해진 씨어도르 H. 화이트 기자는 기분전환의 차원에서 독일을 한 번 돌아보고자 요아힘슈트라쎄 12번지에 있는 연락참모부에 연락을 취했다. 여기에서는 안톤 F. 페브쉬가 [연락] 업무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군입대 전 민간인 시절에는 미국 시라큐스에 있는 오논다가 운송회사의 잘 나가는 사장이었다. 그는 독일 출신이라 [독일 사람들과] 통하는 바가 있었지만 원래 완전한 미국인으로, 자신이 곧 만나게 될 한스 시몬스나 에드워드 H. 리치필드, 또는 칼 요하임 프리드리히와 같은 정치학자와는 달리 정치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재능을 뉴욕 북부에서 사람들이 [뉴욕주의 수도인] 앨버니에서 정치가에게 어떤 압력을 가하는 지를 배운 것이다! 그는 본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일했다. “우리는 그들을 잘 관찰합니다. 그러고 나서 술을 사고 저녁도 대접하고 점심 식사도 같이합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화이트에게 인맥에 관한 상황도 이야기해주었다. 곧 아데나워는 ‘우리’ 편이고, 슈마허는 영국 편을 들고 있으며 카를로 슈미트는 주로 프랑스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편인 발터 울브리히트는 멀리 베를린에 앉아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히 본 시각이지만 그러한 확신에는 사실과 부합하는 핵심이 들어 있었다. 화이트는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실상 그는 독일의 사람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을 돌아다녔던 이 [화이트라는] 언론인에게 아데나워는 매우 동양적인 인물로 보였다. “진한 회색빛 옷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고, 낡고 뻣뻣한 분리가 되는 [목]칼라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비꼬거나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다루고 있던 헌법 정책에 관한 논란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에게 딱딱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화이트는 감동을 받기는 했지만, 아데나워가 마치 [건조해져서] 쭈글쭈글한 미라가 갑자기 말문을 터뜨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화이트는 그 당시 아데나워가 할 수만 있다면 1~2년 안에 정상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다.  

   

의회위원회를 이끌던 이 시기에 아데나워는 자신이 외국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여기에 화이트와 같은 언론인들은 그가 자주 접촉하는 서유럽의 기민당(CDU) 정치가들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그의 당 동료들이 걱정할 정도로 아데나워는 수시로 회의 장소를 떠나 스위스의 인터라켄, 코, 제네바, 또는 룩셈부르크에서 개인적인 대담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의회위원회의 국내 조직인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로 돌아와 넓은 세상을 알고 있는 듯이 으스댔다. 그리고 서방연합군 전체, 특히 프랑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의가 있을 때마다 엄청난 지식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아데나는 조르쥬 비달과 로베르 쉬망과 1948년 가을부터 사적으로 알게 되었고 윈스턴 처칠과도 친분을 맺었다.  

   

이전에 쿠르트 슈마허가 그랬던 것처럼 아데나워도 영국의 초청을 기꺼이 받고 싶어 하였다. 블랑켄호른은 미하엘 토마스를 통하여 이 일을 주선하였다. 파켄험 경과 로버트슨 장군과 같은, 아데나워와 잘 지내는 여러 영국 인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것이 아데나워의 영국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로버트슨은 한 마디 덧붙였다. 아데나워가 점점 더 “힘든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가는 것이 현실화될 것 같을 때마다 아데나워가 여기저기에서 런던의 노동당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말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영국 ‘외무부’ 독일담당부에서 아데나워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거리를 두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아데나워의 주요 정적은 사민당(SPD)에 존재하였기에 영국 정부가 사민당(SPD)에 동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가 사민당(SPD)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반대하는 이유에는 슈마허의 외교정책에 대한 불안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1948년 말에 하인리히 부릐닝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슈마허의 지도 아래에 있는 사민당(SPD)은 완전한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했습니다.”     


아데나워는 의회위원회가 그 시작부터 고위직 분배에서 사민당(SPD)의 전략에 말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였기에 근심하였다. 카를로 슈미트는 신속하게 상임위원회를 장악하였다. 반면에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은 잦은 내분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늘 단합을 호소하여야 했고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의 단호한 의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아데나워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9월 말에 함부르크에 있는 당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의회위원회의 정당정책적인 논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당파와 더불어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당내에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 노선을 따르도록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사민당(SPD)과 타협을 이루고자 한 것이 진심이었는지는, 비록 그가 헌법 논의가 끝나갈 무렵까지 아무리 진심이라고 단언했어도 의심스러웠다. 사민당(SPD)이 지나치게 연방주의적인 재정 조항을 거부하면서 1949년 3월에 이른바 의회위원회의 위기가 닥치자 그가 이전에 자주 언급한 합의를 위한 노력은 거의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사민당(SPD)이 기본법, 곧 헌법을 거부하자 우리는 모든 군소정당과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민당(SPD)과 노력을 해보지만 필요하다면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소리였다! 어찌 되었든 그가 4월 말에 카를로 슈미트와 대화를 나누어 결국 모두가 수긍할만한 방안을 대다수의 동의로 마련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논쟁의 대상이 된 헌법 [조항] 문제에 대하여 그는 매우 탁월한 자기만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바이에른에 맞서 미국의 상원을 모범으로 삼은 둘째 의회, [곧 이원제를] 수립하고자 오랫동안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연방참사회 모델에 대한 그의 반대는 이중적인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다. 곧, 당대표로서 그는 한편으로는 주지사 전체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당(SPD)에 맞서고자 한 것이다. 주정부가 연방참사회에서 각각 두 개의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그의 생각에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인’ 사민당(SPD)이 그들 마음대로 [독일]연방공화국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사민당(SPD)이 놓은 기초를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될 노릇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연방참사회 제도에 결국 동의하였다. 투표한 결과로 그의 주장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사민당(SPD)과 기사당(CSU)은 신속하게 합의를 이루어 아데나워를 속여 넘겼다. 그래서 한바탕 소동은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에 억지로 좋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가 [이 문제에 관하여] 고립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은 자민당(FDP)이 문화정책적으로 사민당(SPD) 측에 완전히 기우는 것을 차단해야만 했다. 그런데 헌법 논의가 시작되자 프링스 추기경이 기민당(CDU)에 입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데나워는 기뻐하였다. 그런데 물론 그 대가가 무엇일지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당과 그 자신은 달걀 위에서 춤을 추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부모의 권리를 헌법에 확실하게 삽입하는 것을 지지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결론 단계에서 자민당(FDP)과 사민당(SPD)과 완전히 갈라설 것을 각오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링스 추기경에서 쓴 그의 편지에서 이러한 생각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저는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입장이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합의된 내용의 헌법에 반대하는 것에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독일의 관점에든 외국의 관점에서든 서부 독일의 정치적 단결은 내치와 외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 부모의 권리에 관하여 모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헌법에 반대투표를 하라는 요구를 받는 이는, 이 법이 아직은 가결도 부결도 되지 않았지만, 제 생각에 엄청난 비난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곧 그런 사람은 독일 국민이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국민의 이익에 상반되는 행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 가톨릭교회에 미치는 피해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에 그러한 입장은 파국적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당에는 다음의 두 가지 선택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곧 주교들의 의견에 반하여 헌법에 찬성하는 것이나, 주교들의 의견을 따라 헌법에 반대하는 것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풀다의 가톨릭주교회의는 미하엘 켈러 주교가 촉구한 대로 이 일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분열의 시험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사회화에 관한 문제는 모든 관계자가 놀랄 정도로 소극적으로 다루었다. 사민당(SPD)은 의회위원회에서 이 안건에 결코 과반수의 찬성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 또한 헌법 제14조와 15조를 잘 다듬어서 실질적으로 이 주제를 제외하게 된 것에 대하여 만족해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면 그렇지 않아도 극도로 분열된 당파들 사이에 더 큰 불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든 관계자는 사회화의 문제가 첫 연방의회 선거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장 복잡한 문제로 끝까지 남은 것이 바로 연방주의의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의 범위에는 어쩔 수 없이 연합삼국과 의회위원회의 관계도 포함되었다. 클레이 장군과 그의 고문관들은 주의 권한 강화가, 헌법 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특히 연방주의를 선호하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 가장 비교조적인 나라가 영국이었다. 이리하여 연방주의 문제는 국가 건립을 내부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이에게 논쟁의 단초가 되었다. 말하자면 파리의 일부 파벌과 바덴바덴의 군정청, 그리고 쿠르트 슈마허에게 그러했다. 아데나워는 1949년 4월 슈마허가 헌법 [초안의] 가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논쟁은 자주 제기되었고 문서로 잘 정리되었다. 그래서 개별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까지 남아있다. 1948년 6월 ‘런던 의정서’가 공포된 이후로 독일 측의 인사들은 연합국 정부가 독일 헌법에 관하여 그 당시 알려진 것보다 더 세부적인 지침에 이미 합의하였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 이후에 진행된 모든 대화는 이러한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이는 모든 [의회위원회에] 참여한 정당과 의회위원회 자체에 단순히 민감한 사안 이상의 것을 의미하였다. 완성된 헌법이 거부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회의에 참여한 모든 정당이 서방 연합국의 의도를 알기 위하여 지나친 노력을 기울이게 되면 결국 아무도 바라지 않는 [외국에 대한] 종속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이 경우] 독일 국민이 받게 될 충격은 엄청날 것이었다. 그러나 의회위원회가 [헌법의] 허가 조건에 대하여 사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연합국이 헌법 초안조차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곤란해질 일이었다.     


이 문제에는 또한 정당정치적인 차원이 놓여있다. 개별 정당의 생각이 개별 서방 연합국의 생각과 같거나 다르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은밀한 상호 협조를 통하여 각자의 헌법 정책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유혹은 개별 연합국이나 의회위원회의 각 정당이나 마찬가지로 큰 것이었다. 그러한 유혹을 가장 크게 느끼는 정당이 바로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이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은 연방주의 구상에 대한 미국의 의견, 그리고 시급한 경우에는 프랑의 의견과도 조율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음모가 난무하는, 이제 본격적으로 벌어진 다양한 차원의 승부에서 아데나워는 타고난 거장의 면모를 발휘하였다. 블랑켄호른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날마다 정확한 정보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못지않게 세련되고 여러 의미를 함축한 신호를 교환할 줄 알았다. 사민당(SPD)의 카를로 슈미트, 발터 멘첼, 에리히 올렌하우어, 에른스트 로이터는 그와 비슷하게 전문적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아데나워는 다양한 경험을 해 온 데다가 이제 의장이라는 직위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진영의 막강한 당 지도자였다. 그래서 결국 누구에게도 문의할 필요가 없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비하여 사민당(SPD)은 매우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사민당(SPD)은 지도자 중심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전쟁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에 더하여 10여 년을 교도소와 집단수용소에 구금된 경력이 있는 슈마허는 1948년 초부터 1949년 초까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그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잃어서 병상에서 당을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삼자의 보고에만 의지하여 전략적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에서 여러 정당이 대립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에서 형성된 분위기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도 없었고 서방 연합국의 의사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파악할 기회도 없었다. 매우 심기가 불편하였지만, 그는 본의 시장인 에른스트 로이터가 미국 측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다. 로이터는 서부 독일만의 국가 수립을 서두를 것을 재촉하고 자기 본의를 감추는 데에 [영향력을] 활용하였다. 그는 사실 상황의 지연을 의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일과 독일 이외 나라의 관심이 점차 본으로 집중되던 시기에 슈마허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 세간에서 잊히고 있었다. 1946년에만 해도 그는 서부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정치가였으나 1949년에는 그저 여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12월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 자민당(FDP)과 맞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헌법 전문의 제3차 검토 회기에서 군정청 당국자와의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헌법의 특정 조항에 대한 연합국 측의 반대가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렇게 되면 좋든 싫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 정당의 체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2월 1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루어진 대화에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 협상단은 아데나워를 비난하고 나섰다. 아데나워가 이전의 약속과는 달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방의회 문제에 대해 교묘한 의문을 제기하여, 최선의 형태를 갖춘 헌법을 만들기 위한 의회위원회 정당 간의 논쟁에서 서방 연합국이 ‘심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아데나워는 쾰른시청에서의 논쟁에서 흔히 하던 대로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논리로 이를 반박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아데나워를 제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가 헌법 자체를 원하지 않고 추문을 일으키고자 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클레이 장군도 이른바 ‘아데나워의 위기’에 대한 판단에서 같은 시각을 보였다. 언론에서 한바탕 소동이 났고 여기에서 사민당(SPD)은 아데나워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게 구사된 언어로 심판을 내렸다. 곧 아데나워가 의원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데에 필요한 사민당(SPD)의 신뢰를 더 이상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데나워가 의회위원회 의장직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민당(SPD)이 이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미국 측은, 모든 소동을 하노버에서 꾸미고 있다고 추측하였다. 그리고 결국 본의 사민당(SPD) 대표들이 이 사건을 크리스마스 휴회기에 마무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하였다. 그러나 카를로 슈미트에게는 아데나워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후일 슈미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후일의 연방정부 수상 [아데나워]에 대한 사민당(SPD)의 깊은 불신이 이 사건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월과 4월에 있었던 의회위원회의 커다란 위기도 다시 한번 연방과 주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위기는 특히 위험해 보였다. 이 시기에 서방 강대국들이 소련과 베를린에 관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전체적인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3월 초에 군정청은 논란이 되는 사안에 관하여 정당 간에 어렵게 이룩한 합의가 서방 연합국의 원칙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재정에 관한 헌법 조항이 문제가 되었다. 이 포커 게임은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군정 당국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더 합리적으로 마련된 점령 규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재정에 관한 헌법 조항에 관한 문제는 군정청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슈마허는 자기 당이 이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내세우도록 하여 점령 세력에 맞서 독일의 자율성을 자의식을 가지고 지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소득을 누렸다. 연합국은 자기 입장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 전에 이미 영국 측으로부터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언질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정보를 얼마 후에 있을 선거 때까지 숨겨 두었다. 그 대신에 이 기간에는 자기 모든 영향력을 발휘하여 헌법 논의를 조속히 마무리 짓도록 하였다.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헌법에 관한 논의는 이미 충분히 진행되었다. 1948년 11월에 이미 그는 연방의회 선거가 1949년 3월과 5월 사이에 실시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 결론 단계에서 아데나워의 전략적 노선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다. 곧 가능하다면 사민당(SPD)과 합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인 카를로 슈미트는 이제 동맹군으로 보였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에는 헌법을 자민당(FDP)과 독일당(DP)과 연합하여 헌법 [초안] 마련을 마무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논의의 진행을 방해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헌법 초안이 기사당(CSU) 의원 대다수가 보기에 충분히 연방주의적인 성격을 지니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민당(SPD)과의 논쟁이 결국 어중간하게 마무리되자 바이에른 주의회가 헌법 [초안]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이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선거 결과에 부정적인 반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당에 신속한 결론을 내릴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클레이 장군은 5월 5일 자신이 군정 총독으로 재임하는 날이 8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연히 그는 성과를 거두고 자기 독일 임기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합국이 “소련에 양보하려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 어찌 되었든지 간에 만약 우리가 준비되기도 전에 일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우리당과 독일 전체를 위하여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사람들을 몰아쳤다. 이와 동시에 온 사방으로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결국 찬성 53명, 기사당(CSU) 6명, 중앙당(Zentrum), 독일당(DP), 공산주의자 각각 2명의 반대로 헌법이 가결되자 그는 성공적인 최종 투표에 관한 연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다. “실로 이렇습니다. … 우리 독일 국민에게 이는 1933년 이래 최초로 맞이하는 기쁜 날입니다.”     


그를 기쁘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은 연방정부의 잠정적인 소재지에 관한 투표의 결과였다. 이 문제는 몇 달 전부터 완전히 정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사민당(SPD)은 프랑크푸르트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아데나워의 무리는 본을 지지하였다. 본을 지지하는 주요 논거는 주변 상황이었다. 곧 본이 미국의 군정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카를로 슈미트마저 설득하며 말한 대로 그사이에 대규모로 확장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경제위원회의 행정조직은 정치적 문제를 파악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일단 본에서 작은 정부로 시작하여 대규모 시위를 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아데나워에게 중요한 문제는 자기 당이 일치하여 본에 찬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헤센의 기민당(CDU) 의원들을 본의 기치 아래에 모이도록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기사당(CSU)도 다시 한번 방해하였다. 투표 직전에 아데나워는 ‘신뢰할 만한’ 독일통신사(DPA)를 인용하여 “프랑크푸르트를 연방국 수도로 정하는 것은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뉴스를 의원들에게 읽어주고 나서야 마침내 대다수가 자기 편을 들게 할 수 있었다. 이 뉴스는 로타 루엘이 《슈피겔》에 기고한 대로 “뜨거운 프랑크푸르트 찬성파를 신선한 본 찬성파”로 만들어 주었다. 이 일에는 아데나워 이외에 본의 여러 언론인도 관여하였다. 예를 들어 본의 시장이기도 했던 오토 슈마허-헬몬트, 하인리히 뵉스와 그의 아내로 그 당시 데나 통신사(DENA)의 기자였던 엘프리데가 있었다. 찬성 33표와 반대 29표의 결과는 그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몰랐던 본이라는 도시에 관한 것치고는 전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나중에 본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던 주지사 칼 아르놀트는 그가 결국 마음을 바꾼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프링스 추기경도 기쁜 결과에 관한 [아데나워의] 편지를 받았다. “귀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계시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의가 막바지 단계에 이를 무렵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자리를 비워야 했던 아돌프 쉬스터헨은 기쁨에 넘친 전보를 받았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궤도 전환     


아데나워가 14년에 걸쳐 독일연방 수상직을 수행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의회위원회의 의장직에서 본의 연방정부 수상직으로 진출한 것은 필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고위 정치가들과 언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아데나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분명하였다.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정당으로 정부를 최대한 빨리 구성하는 것이었다. 1948년 11월 말에 그는 1949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그 일이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과 연합국의 헌법 논의에 관한 견해차만큼이나 국제 정세의 변화도 이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서방 연합국 정부가 결국 헌법을 발효한 다음에는 4개 강국 점령군 통치가 존속할 이유가 사라졌다. 1949년 2월 초에 에드워드 리치필드는 머피 장군에게 보낸 우려의 편지에서 서부 독일 국가의 수립이라는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 리치필드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손해를 최소화하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서방 열강은, 통일된 독일에서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과 대결할 때 의지해야 할 서부 독일의 정치가들을 불신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아데나워도 그 당시 상황을 바로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다. 헌법의 제정 직후와 발효 직전에 자기 우려를 영국 외무장관인 베빈에게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베빈은 1949년 5월 9일 베를린을 전격 방문하여 멜레 근처의 오스텐발데에서 아데나워, 아르놀트, 슈마허와 각각 별도의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로부터 2주 후에 파리에서 외무장관위원회 회의가 다시 개최될 예정이었다. 베빈은 이와 관련한 아데나워의 설명을 경청하였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아데나워라는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불신의 대상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독일 서부와 동부 전체의 자유선거와 정치적 자유를 올바로 제안하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비록 그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만 이는 오로지 유럽의 통일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적 자유와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할 것이어야 했다. 이는 아데나워가 이후에도 견지한 노선이었다. 그는 이때 과연 미국이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의심했다. 그가 생각하는 악몽은 모든 연합군이 퇴각한 다음, 동부 독일과 서부 독일이 통일되어 민주국가의 체제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서부지역이 [동독] 민정경찰과 공산주의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는 경우였다. 베빈이 아데나워를 비롯한 모든 독일인에게 자신이 그러한 위험을 알아채고 파리에서 소련에 맞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내세울 것을 다짐하자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안심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 회의가 다시 개최될 때마다 비슷한 우려를 나타냈다.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 대한 기억으로 아데나워는 두려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서방 연합국이 타협한다면 결국 독일이 손해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서방에 완전히 의존하는 그의 외교정책은 불신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6월 중순 서양 열강이 그들의 원래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어느 사이 브뤼셀로 돌아온 대니 N.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회담의 결론은 거의 확실히, 또는 어느 정도 부정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동부 독일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로 남는 한 서부 독일과 동부 독일이 어떤 유대를 맺든지 간에 독일에 대한 소련의 힘을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독일연방 정부의 수립과 선거에서 연합국 측이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한 불안 요소가 남아 있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여전히 정적은 사민당(SPD)이었다. “독일연방의회에서 사민당(SPD)이 공산주의 정당과 연합하여 다수파를 이루는 것을 막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연합하면 사민당(SPD)에서 독일연방 수상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이 상존합니다!” 여기에서 그가 우려하는 것은 사민당(SPD)의 세력이 아니라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연합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수 있는 문제였다. 이러한 불일치를 극복하지 못하면 사민당(SPD)의 선거 승리를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회위원회의 정당 세력 판도만을 볼 때 사민당(SPD)과 독일공산당(KPD)을 고립시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다만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시민정당들과의 연정에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그러나 의회위원회의 의석 구도는 안정에 대한 착시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마지막 지방선거가 1947년에 있었는데 그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지방선거만 있는 것과 총선도 있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프랑크푸르트 경제위원회에서 시민 정당들과 연합을 이루어낸 것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기민당(CDU) 내부에서 결정적인 노선변경이 이루어지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아데나워는 화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작센의 사회주의 당파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내의 정적인 칼 아르놀트와 베르너 힐페르트와 마찬가지로 서부 점령지역 통합에서 판을 완전히 새롭게 짜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강자로 부상하였다. 아데나워는 그가 공동점령지역의 경제부장으로 있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화폐개혁의 실험을 숨 죽이고 지켜보았다. 에르하르트라는 인물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 실험의 성공으로 그는 곧바로 프랑크푸르트의 경제 정책 노선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미 1948년 8월 말에 아데나워는 레클링하우젠에서 개최된 영국 점령지역 당대회에서 에르하르트가 단상에서 많은 의견을 발표하도록 허용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사회적] 시장경제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어느 정도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에르하르트의 정책이 첫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자 아데나워는 지방 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르하르트 교수께서 거의 6개월 전에 레클링하우젠에서 말씀하시며 매우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처럼 이제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것은 아주 멋진 연설이었고 말씀하신 것이 모두 맞아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습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그 말씀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안심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르하르트 선생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연구하시고 다루어온 원칙들은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    

 

에르하르트의 탁월한 점은 실행 능력과 대중을 사로잡는 설득력을 겸비한 데에 있다. 지금까지 기민당(CDU)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파벌에는 뛰어난 지도적 인물이 없었다. 페르드멩게스와 여러 경제계의 대표자들은 뒤에서 쉬지 않고 활동해왔다, 그들의 효과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당내의 사회주의 당파와의 싸움에서 1948년 초에 거둔 성과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서 이상적인 동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1947년까지 바이에른주의 경제부 장관을 지낸 프랑크 지역 출신의 경제학자인 에르하르트는 1948년 화폐개혁 이후 자주적이며 탁월한 사명 의식을 지닌 정치가가 되었다. 당파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큰 인물이 되어 있었다. 1948년 여름부터 1949년 여름까지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자기 당이 프랑크푸르트 경제부장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가장 강력한 비사회주의적 정당과 그 지도자의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충분히 인식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는 협력으로 서로 이득을 보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선거전에서 중요한 주제를 선점하게 되었고 동시에 인기도가 급상승 중인 간판스타를 [우군으로] 얻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선거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인기가 높은 에르하르트를 주요 선거 연사로 동원하였다. 1949년 총선 때만큼 이 두 사람이 마찰 없이 훌륭하게 협력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나서 무게중심이 바뀌었다. 이제 에르하르트는 좀 더 봉사하는 기능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다른 장관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는 여전히 주체적인 거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인정하기가 매우 싫었지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49년 자민당(FDP) 입장에서는 에르하르트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유리한 일이었다. 기민당(CDU)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민당(FDP) 행사에서도 자기 경제정책을 선전하였다. 자민당(FDP) 정치가들은 자유주의자로서 에르하르트를 경제부장으로 천거하였다는 사실을 종종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에르하르트는 뷔르템베르크-바덴 지역의 기민당(CDU) 후보로 나서서 울름·하이덴하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민당(FDP)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테오도르 호이쓰와 개인적으로 페어플레이를 할 것을 합의하며, 사민당(SPD)보다 우파에 속한 모든 정당과의 시장경제적 연대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장경제적 돌파구가 마련되자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내부에서 새로운 정강 논쟁이 불붙었다. 이 논쟁은 이미 1948년에 시작된 것이었다. 함부르크의 은행가인 휴고 샤른베르크와 뒤스부르크의 경제변호사인 프란츠 에첼은 1948년 4월 중반부터 점령지역위원회의 위임으로 경제 질서의 방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초안이 제출되자 요하네스 알버스는 새로운 방향의 모색을 일단 잠정적으로 중단시켰다. 아데나워는 신중한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르하르트가 성공을 거두자 아데나워는 기초당위원회에서 이루어진 정강 관련 논의를 들고나오면서 곧바로 점령지역 전당대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 결의안은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전당대회에서 한 탁월한 연설은 이에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전당대회에서는 “실패한 국가주도 계획경제와 통제경제에서 벗어날 것을 만장일치로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 전당대회는 기민당(CDU)이 경제위원회에서 택한 길을 흔들림 없이 지속하여 걸어가라고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 일단 당내 좌파들을 제압하였다. 1948년 10월 아데나워는 경제계획을 위한 새로운 [점령]지역간위원회를 소집하고 그 위원장으로 프란츠 에첼스를 임명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기사당(CSU) 의원들도 포함시키고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위원회의 위원들과도 의견을 조율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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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쾨니히스빈터에서 열린 [점령]지역위원회 회의에서 사회주의 파벌은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에르하르트는 탁월한 연설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경제부장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분은 연설을 통하여 사안을 최대한 간단명료한 개념으로 정리할 줄 아는 모든 성공의 비결을 실행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선거전에 나서게 되면 우리도 이렇게 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신속하게 에르하르트의 연설에 나온 주요 원칙들을 정리하는 위원회 구성을 제안하였다. 경제위원회의 원내대표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에게 이 위원회의 위원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정강에 관련된 이러한 기습적인 조치에 대한 저항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였다. 야콥 카이저는 여기에서 분명한 노선 전환을 시사하였다. 곧 에르하르트가 “자유주의자이지만 그가 연설에서 밝힌 생각은 참으로 나의 맘에 듭니다.” 처음에 반대 의견을 강력히 피력한 인물은 요하네스 알버스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대로 말하였다. “에르하르트 교수의 연설은 알렌 정강을 근본적으로 지양한 것이 분명하다.” 아데나워는 패배한 정적에게 명예롭게 물러설 길을 열어줄 줄 알았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이 사안을 잘 식별하고자 합니다. 알버스 선생님, 저는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한 모든 계획과 원칙에는 영원한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다만 당면한 중요 문제를 다룰 뿐입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하나입니다. 계획경제인가 아니면 시장경제인가? 지금은 이것이 문제입니다. 알버스 선생님, 이는 알렌 강령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알렌 정강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알버스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렇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나중에 전개할 사회적 정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눈에 뜨이는 점은 아데나워가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인위적인 개념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알버스는 ‘사회적’이라는 구호로 맥을 끊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모두가 흔쾌히 여기는 구호를 만들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합시다. 관료주의적 계획경제인가 아니면 사회적 시장경제인가?”  

   

이렇게 회의가 끝나면서 기민당(CDU)은 문자 그대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정당이 되었다. 이에 따른 후속 조치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프란츠 에첼이 이끄는 경제정책 원칙 마련 작업이 에르하르트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세심하게 보살폈다. 이제 기민당(CDU)은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정당으로서 선거판에 나서야 했다. 아데나워가 원한 것은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간결한 선거 프로그램이지, 효과 없는 어려운 논문이 아니었다. 위험에 몰린 당내 좌파의 노골적인 불만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흔들림 없이 지역위원회에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원칙을 결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민당(CDU)의 다른 지방 단체들을 어느 정도 달래가면서 경제 프로그램을 사회정책, 주택정책, 농업정책의 원칙과 더불어 7월 15일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대규모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 기자회견에서 주로 답변한 사람은 바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아데나워 바로 다음으로 말을 시작한 그는 ‘사회주의적 이단’에 대한 격렬한 공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기민당(CDU)은 아데나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4년에 걸친 사회주의 논쟁을 종식시키고 힘들었던 정강에 관련된 타협안을 마련했다. 16개 조항의 ‘뒤셀도르프 원칙’의 핵심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설명일 뿐이었다. 이에 비하여 시장경제 정강에 추가된 사회적 요소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 사회적 요소는 한편으로 독일의 사회국가적 전통의 뿌리 깊은 요소를 언급하고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피해보상, [노사] 공동결정, 사회보장에 관한 법적 형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기민당(CDU) 역사에서 새로운 점은 경제자유주의로의 결정적인 노선 변경이었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의 연대가 없었다면 그 변경이 그토록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연정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극복할 일이 기민당(CDU) 내의 사회주의 파벌과 벌이는 후방전투만이 아니었다. 보다더 어려운 문제는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대연정’에 대한 주지사들의 공감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 연정을 하면 기민당(CDU)의 사회주의적 파벌을 하나로 묶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칼 아르놀트 정부와의 2년에 걸친 치열했으나 그의 관점에서 별무소득으로 끝난 싸움을 통하여,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 기민당(CDU)의 연정이 이루어지면 사민당(SPD)의 경제 정책과 사회정책이 관철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서부 독일의 주지사들은 관점이 달랐다. 그들 대부분은 거의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재건의 어려움과 점령 세력에 맞설 수 있도록 주권을 회복하는 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대연정’을 필연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민당(SPD)과 기민당(CDU), 그리고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연정을 하는 대부분의 주 정부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생산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칼 아르놀트, 라인란트-팔츠의 페터 알트마이어, 남부 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의 겝하르트 뮐러는 기민당(CDU) 주지사로서 사민당(SPD) 장관을 내각에 두면서 상당히 좋은 경험을 한 이들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니더작센의 사민당(SPD) 소속 하인리히 코프와 헤센의 슈토, 그리고 베를린의 에른스트 로이터는 기민당(CDU)을 포함한 연정을 실행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연정의 방법도 있었다. (막스 부라우어의) 함부르크와 (빌헬름 카이저의) 브레멘에서는 사민당(SPD)이 자민당(FDP)과 연정을 하고 있었다. 뷔르템베르크-바덴에서는 자민당(FDP)의 라인홀트 마이어가 몇 년 전부터 모든 정당과 연정을 하고 있었고 잘 유지하고 있었다. ‘단독 정당’이 장악한 주 정부는 바이에른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기사당(CSU) 내각을 이끄는 한스 에하르트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덴에서는 레오 볼레프의 기민당(CDU) 정부가 독일인민당(DVP)과 사민당(SPD)에 맞서 정권을 유지하며 서남독일 국가의 수립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연방참사회가 헌법에 따라 어떤 권한을 행사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당연히 주 정부 차원의 연정 조건은 연방정부 차원의 정치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또는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이룬 주 정부의 모든 주지사는, 만약 연방정부 차원의 ‘소연정’이 구성되어 연방참사회가 입법에 관하여 논란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재촉을 받게 된다면 연정이 붕괴될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연정이 구성된다면 주지사들은 자기 주 정부에서 일 처리가 근본적으로 쉬워질 것이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주 정부 차원에서는 사민당(SPD)과 기민당(CDU)이 매우 온건하다는 것을 체험한 바가 있었다. 충돌하기에 급급한 당대표인 슈마허와 아데나워에 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평화적이고 화기애애한 공존이 본에서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독일 서남부 지역에서는 상황이 특히 복잡하였다. 여기에서는 내치에 관한 전통적인 논란이 서남부 국가 문제와 부분적으로 중첩되어 있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 그리고 또한 북부 바덴, 북부 뷔르템베르크, 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의 기민당(CDU) 지방연합의 대다수는 나중에 이루어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남부 바덴의 기민당(CDU)은 프라이부르크 출신의 국가의장인 레오 볼레프를 선두로 하여 격렬한 반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점령 세력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서남부 국가 수립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들의 위대한 목적이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으로 가장 잘 도달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아데나워가 일찍부터 고민한 문제는 서남부 독일에 연정 관계가 불분명한 채로 커다란 연방 소속 주가 수립될 때 이것이 연방참사회에서의 의석분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 서남부[지역]만이 아니라 모든 주 정부의 정치가 자체적인 원칙을 따랐다. 기민당(CDU), 기사당(CSU. 자민당(FDP)·독일인민당(DVP), 독일당(DP)의 주 정부 차원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의 연정 정책에 외압을 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표는 (자신이 주의회에서 기민당(CDU) 원내대표로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니더작센의 연정정책에조차도 자기 뜻을 행사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아데나워가 영향력을 제대로 미칠 수 있는 곳은 미국 점령지역과 프랑스 점령지역 안의 자의식이 강한 기민당(CDU) 소속 지방 단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직접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내분이 일고 있던 기사당(CSU)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주지사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경쟁심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클레이 장군이 미국 점령지역의 정치를 지배하는 동안에는 주지사들이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당대표에게 문의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프랑스 점령지역에서도 벌어졌다. 오로지 영국 점령지역에서만 사민당(SPD) 주지사와 기민당(CDU)의 칼 아르놀트가 오래전부터, 각자의 당대표인 슈마허와 아데나워 밑에서 쩔쩔매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점령지역의 주지사들은 서부 독일 국가 수립 단계에서 몇 달 동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당대표의 간섭을 최대한 멀리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주지사들이 싫어하는데도 아데나워는 의회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자기 직위를 활용하여 서방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합법적인 대변인을 자임하면서 자기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본의 ‘소연정’에 대한 주 정부의 구조적으로 제한된 저항은 개인적 거부감과 직결괸 문제였다. 그리고 이는 잘 알고 있듯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마련이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안에서는 칼 아르놀트만이 아니라 바이에른의 주지사인 한스 에하르트도 까다롭게 굴었다. 에하르트는 아데나워와 연대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고민을 늘 함께 나누었다. 1949년 아직 63살에 불과한 에하르트는 평생 바이에른의 법조계에서 고위직을 역임해왔고 1946년 12월부터 주지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그가 1947년 여름 뮌헨에서 소집한 독일 주지사회의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의 정치적 야망, 최소한 그의 정치적 성공의 의지는 바이에른주 경계를 분명히 넘어서 있었다. 그는 독일제국을 연방주의적인 형태로 재편하는 일의 선구자를 자처하였다. 그의 연방주의는 많은 다른 기사당(CSU) 정치가들에 비하여 온건한 편이었다. 바이에른인민당(BVP)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주지사들 사이에서 그는 급진적 연방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헌법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어찌 되었든 에하르트가 자임한 바이에른의 중재자 노선은 공격당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문에 그는 1949년 연방정부 구성 때 아무런 고위직도 제안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기사당(CSU)의 당내 문제로 너무 바빴다. 아데나워는 이미 1946년 말에 점령지역위원회에서 이렇게 조롱하며 탄식하였다. “바이에른의 상황은 바이에른 밖의 사람들에게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저라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9년 초 ‘갈등’은 다시 새롭게 정점을 치닫고 있었다. 알로이스 훈드하머를 중심으로 한 보수 파벌은 사무총장인 요제프 뮐러를 (이른바 ‘바이에른 하늘 위에 있는 검은 그림자’라며) 쫓아내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뮐러는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연방주의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너무 초교파적이고 매우 유약하며 지나치게 당관료적인 사람이었다. 뮐러에 대한 거부감은 아데나워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뮐러를 미래가 없는 ‘모험가’라고 여겼다. 그래서 1948년 11월 미국 대사인 로버트 머피에게 그렇게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기사당(CSU) 내부의 문제는 철저한 연방주의를 추구하는 바이에른인민당(BVP)이 기사당(CSU)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반발은 시민주의 유권자들이 있는 지역에서 특히 극심하였다. 바이에른인민당(BVP)로 신경 쓰이는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1949년 5월 19일 밤과 20일 사이에 바이에른의 주의회에서 다수결로 헌법을 거부한 잘 알려진 일 때문에도 어려움이 발생했었다.   

  

아데나워의 주요 관심사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기사당(CSU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기둥에 의존하고 있었다. 영국 점령지역 안의 기민당(CDU)과 바이에른 안의 기사당(CSU)이 그 두 기둥이었다. 가톨릭이 대다수인 바이에른이 떨어져 나가면 연방 차원에서 최대 정당이 되는 기회가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바이에른이 떨어져 나가서 사민당(SPD)이 앞서게 된다면 대연정을 하라는 압박을 견디기가 매우 힘들어질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느 모로 사민당(SPD)이 독일연방 수상 자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비록 얼마 전만 해도 에하르트와 이러한 첨예한 연방주의적 태도 때문에 충돌하였지만, 인제 와서는 뒤에서 요제프 뮐러 대신에 이 통합 능력을 갖춘 정치가를 기사당(CSU) 당대표로 미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뮐러는 아데나워를 두고두고 원망하였다, 아데나워가 1949년 5월 말 슈트라우빙(에서 그를 몰아내는 일을 원격 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뮐러는 바이에른에 대한 아데나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였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아데나워의 마키아벨리즘의 희생자로 역사에 남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비록 자기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고는 있지만, 보수적이면서도 예측가능한 인물인 에하르트와 일을 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려운 일들뿐이었다! 그럼에도 아데나워는 중요한 선거철에 기민당(CDU)과 기사당(Union)이 단합을 비교적 잘 이루도록 이끄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지방 당대표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선거위원회’ 의장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위원회를 핵심적인 조정기구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기민당·기사당협력위원회(Arbeitsgemeinschaft der CDU/CSU)를 설치하여 브루노 되르핑하우스가 이 조직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경제계에서 엄청나게 많이 거두어들인 선거자금이 여기로 모였다. 이 자금을 동원하여 중앙당(Zentrum)에서 기획한 선거 벽보와 그 밖의 선거 홍보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첫 대규모 선거 유세는 이 두 당의 모든 계파의 단합의 상징이 되었다. 1949년 7월 21일 아데나워, 에하르트, 하이네만이 연달아서 독일연방국 삼색기로 단장한 하이델베르크성 앞의 연단에 올라섰다. 이날은 매우 상쾌한 여름밤이었다. 기민당(CDU)은 5천 명의 군중을 모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든 독일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고위 정치가들은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나오는 행진곡에 발맞추어 입장하였다. 중간에 삽입된 곡은 [리하르트 헨리온의] ‘페르벨린 기마병행진곡’과, 오페라 <아이다>에 나오는 ‘승리의 행진곡’이었다. 이날 밤에 모든 사람은 ‘네덜란드 감사기도’를 노래하였다.     


“우리는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 기도드리러 나아갑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을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찬미합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적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공개적으로 그의 선거 전략의 기본 정신을 드러냈다. “선거 전체에 걸쳐서 우리의 주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될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8월 14일 어떤 경우에도 사회주의 경제의 탄생 시간이 도래하지 않도록 할입니다. 우리는 이를 막을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투쟁의 최고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이미 1949년 3월에 아데나워는 베른에서 국제의회연맹(IPU) 스위스지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중요한 연설에서 영국의 [독일] 와해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가며 비판하였다. 곧 런던이 독일 산업에 대한 음흉한 상업적 질투로 그러한 짓을 자행한다고 한 것이었다! 영국 측은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아데나워의 예정된 영국 방문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용히 다음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 공격은 주로 사민당(SPD)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국 점령지역에 만연한 모든 반영(反英) 정서를 자극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슈마허가 군정청의 헌법개정 의사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표명한 사실을 하이델베르크의 대규모 선거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명했지만, 그들은 허풍으로 여겼다. 사민당(SPD)은 사실 영국 군정청이 이미 [원대] 복귀 입장에 합의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는 영국 정부와 사민당(SPD)이 짜고 치는 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사민당(SPD)이 마치 뛰어난 민족주의적 정당이나 되는 듯 꾸미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임수가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상황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하였고 그 당시 선거에서 영국 정부가 사민당(SPD)만큼이나 강력한 적이라고 여겼다. 아데나워는 미국 권력층과 여러 인맥을 이루고 있다고 잘 알려진 브뤼셀의 대니 N. 하이네만에게, 점령 시기의 상황에서 볼 때 영국 정부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쓴 편지를 전했다. 8월 14일 총선의 결과는 “국제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선거가 사민당(SPD)에 유리하게 끝난다면 독일의 사회주의 정부는 영국의 사회주의 정부에 종속될 것입니다. 이 두 정부가 함께 새로운 유럽에 사회주의적 모습을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영국의] 노동당은 사민당(SPD)을 많은 돈으로 돕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서부 독일의] 세 점령지역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국 점령지역의 여론이 사민당(SPD)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놀아나는 일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라디오, 통신사, 신문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귀하도 저와 같이 생각하신다면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알려주십시오. 나의 정당인 기민당(CDU)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주의적이지 않고 사회적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영국이 독일 사민당(SPD)을 지원하는 것을 저지해야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사실 선거에서 기민당(CDU)을 가장 많이 도운 인물은 쿠르트 슈마허 자신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설을 날릴 때도 정치가다운 품위를 지킬 줄 알았다. 그러나 슈마허의 공격은 무자비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거전을 가톨릭교회와 정면 대결로 몰아가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슈마허가 가톨릭교회를 ‘제5의 점령군’으로 묘사하여 어느 정도 교회에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을 기민당(CDU)을 지지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가톨릭 유권자들에게 종교재단 학교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차이트》 신문사의 출판인인 게르트 부체리우스는 경제위원회에서 기민당(CDU)의 자유주의 계파의 최전선에 나서며, 나중에는 기민당(CDU)의 성직자들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첫 총선의 싸움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종교재단 학교 덕분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황했다.”  

   

결국 아데나워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소속의 여러 지방 단체가 어느 정도 단합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부 구성에 앞서 연합정책을 신중히 이끌어 나가는 일이었다. 이는 선거법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의회위원회에서도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문제를 가장 깊이 다루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안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소선거구제를 지지하였다. 이에 반하여 군소 시민 정당들은 이를 극도로 반대하였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선거법위원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리원칙주의적인 방안을 피하려는 뜻을 관철하였다. 여러 개별 주 차원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적합한 경우 이를 허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민당(CDU) 좌파의 야콥 카이저나 베르너 힐퍼트와 같은 일부 인사들은 봉쇄조항*을 마련하여 군소 정당의 출현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첫 독일연방의회에 충분한 의원을 보내도록 하려고 자기에게 반드시 필요한 우군을 살려주는 규정은 지지하였다.     


* 봉쇄조항[Sperrklausel. 역자주 - 독일의 경우 5% 미만의 득표율을 보인 정당의 원내 진출을 차단하는 조치]     


선거법 문제가 격렬한 협상 끝에 결국 자기 뜻에 거의 맞게 마무리되자 아데나워는 [정당간의] 선거 협력 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 성과는 크지 않았다. 각각의 군소정당마다 사정이 달랐다. 남부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인민당(DVP)으로도 불린 자민당(FDP)은 뷔르템베르크, 북부 바덴, 프랑켄, 노르드헤센, 시거란트 지역, 그리고 니더작센 선거구 일부 지역과 함부르크에서 시민주의 개신교 유권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만 실질적인 선거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 이외의 모든 지역에서는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지역 단체가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헤센 기민당(CDU) 지도부에서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 좌파가 헤센의 극보수주의적인 자민당(FDP)과의 연합을 극렬하게 반대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자민당(FDP) 당대표인 프란츠 블뤼허의 동의로 최소한 일부 논란이 되는 선거구에서만이라도 공동 후보를 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가톨릭 성직자들과 현지의 기민당(CDU) 활동가들이 이를 반기지 않은 것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자민련과의 선거협상 문제는 무엇보다도 기민당(CDU)과 중앙당(Zentrum)의 경쟁 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중앙당(Zentrum)을 ‘조각조각으로 조금씩 분해하려는’ 아데나워의 원래 전략은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총선 선거전에 앞서 기민당(CDU)과 중앙당(Zentrum)이 정면충돌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을 수 있는 선거 협상을 위하여 다시 노력을 기울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공정한 선거전’으로 불렀다. 의회위원회 위원인 풀다 주교회의 소속의 뵐러 신부는 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화해는 ‘[정당으로서] 동등한 권한’을 인정해 달라는 중앙당(Zentrum)의 요구 사항 때문에 좌절되었다. 중앙당(Zentrum)을 삼켜버리겠다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던 아데나워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더작센의 독일당과 선거 협상을 하려던 아데나워의 시도도 좌절되었다. 하노버의 기민당(CDU) 지도자이며 동시에 힌리히 코프가 이끄는 사민당(SPD) 정부 내각에서 주지사 직무대행이 된 귄터 게레케는 그러한 협상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이 모든 노력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협상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자민당(FDP), 독일당, 그리고 요하네스 브로크만을 중심으로 한 중앙당(Zentrum)의 보수파에게 아데나워가 포괄적 접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선거 전에 그들에게 선의로 투자한 것이 선거 후에 넉넉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아데나워에게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확신이 더해졌다. 다만 기민당(CDU) 과 기사당(CSU)이 최후의 우군을 동원한다는 전제에서 그러하였다. 20세기 초반의 오래전 청년기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쾰른의 아다 다이흐만은 1949년 여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을 거쳐 쾰른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레이 공작령에 있는 잉글필드그린에서 선거전을 치르고 있는 아데나워가 8월 4일에 쓴 간결한 편지를 받았다. “귀하가 귀국하게 되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8월 14일이 선거일이며 한 표가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거일 저녁에 아데나워는 가족과 함께 있었다. 몇몇 젊은 식구들은 스위스 코에서 개최된 ‘도덕재무장운동’ 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때맞추어 돌아왔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코에서 대회를 주최한 파어버 부부에게 기분에 들뜬 편지를 보냈다. 아데나워는 언제나처럼 유머를 잊지 않았다. “모든 아이가 더 잘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잘된 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아데나워의 아들인 막스의 아내] 기젤라 아데나워는 한술 더 떴다. “선거의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어찌될까요???”     


정신없이 일이 돌아가던 그 선거일 밤은 아직 한참 남았다. 경쟁적인 텔레비전 방송들이 투표가 종료된 지 30분도 안 되어 예측발표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조용히 잠자리에 들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아데나워가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경제제도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것이다. 비록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팽팽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던 경제위원회와 의회위원회와 달리 사민당(SPD)은 2위를 차지하였다. 139석을 차지한 기민당(CDU)과 기사당(CDU)이 다수당이 되었다. 사민당(SPD)은 131석을 차지하였다. 며칠 후 ‘뢴도르프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선거 결과 확실한 다수표를 얻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진영의 전체 세력이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DU)의 139석에 더해 자민당(FDP) 52석, 독일당(DP) 17석, 바이에른당(BP) 17석이 더해졌다. 연정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투표가 분명히 찬성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사민당(SPD)은 다시 한번 30%의 득표율을 달성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15석, 곧 5.7%의 득표율은 무시할 수준이었다.  

   

이에 아데나워는 선거 결과에 대한 자기 첫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선거 결과는 독일 국민 대다수가 사회주의의 흔적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선거는 사회주의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외국을 의식하여 그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민족주의도 분명히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결정적인 문장이 이어졌다. “이제 우리는 연방의회와 새 연방정부가 유권자가 부여한 임무에 따라 독일 국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약간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선거가 주문한 것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정당들의 연정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정에서 수상이 될 사람은 이 연정을 이룩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최선을 다해온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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