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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29. 2023

아데나워의 어린 시절

1876~1906

(* 앞으로 13회에 걸쳐 아데나워 전기를 싣는다. 모두 필자가 독일어를 직접 번역한 내용이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의 전기를 싣는다.  내용은 필자가 자료를 수집하여 직접 저술한 내용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모두 출판 예정 원고이므로 무단 전재나 인용은 저작권법에 위배된다.)

20세의 아데나워


초기   

  

아데나워의 출생증명서는 비록 19세기의 구식 형태의 것이지만 모든 중요한 정보를 매우 세밀하게 담고 있어서 그 내용을 정확히 되짚어 볼 수 있다. “문서 번호 80. 쾰른. 1876년 1월 6일. 아래 서명한 관리 앞에 오늘 출석한, 쾰른시 발두인슈트라쎄 6번지에 사는 항소법원 서기이며 중위로 예편한 가톨릭 신자인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출석하여 자기와 함께 쾰른에 사는 마리아 크리스티아나 헬레나 아데나워가 1876년 1월 5일 오전 8시 30분에 콘라드 헤르만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를 출산하였다고 신고하였음을 증명한다. 낭독하고 승인된 문서에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서명하였다. 담당 공무원(서명)”   

  

이렇게 아데나워가 진짜 쾰른 사람임이 문서로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라인의 대도시에 새로 정착한 쾰른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가족도 1세대 전에 이 도시에 정착하였다. 쾰른이 산업 시대에 들어서면서 서비스업 종사자도 늘었다. 이 분야에서 아데나워의 아버지도 중간 공무원의 자리를 얻었다. 아데나워의 외할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


아데나워의 족보는 지방에 먼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정치적 미래는 별로 보이지 않는 유서 깊은 도시인 본에도 연고가 있었다. 그 당시 대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독일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가정도 도시민의 정서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많은 아저씨, 아줌마, 조카, 사촌들이 쾰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본 주변의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가문은 사회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집안이 아니기에 대도시에서의 생존이라는 문제를, 농민이나 수공업자로서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근면, 절약, 신의, 인내와 같은 전통적인 덕목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족보연구가와 향토연구가들은 앞으로 그의 출신에 대한 다양한 잔가지들을 밝혀낸다고 하여도 이러한 핵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부계 쪽을 보면 콘라드 아데나워의 아버지는 본의 제빵사 가정 출신이다. 나중에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이 된 인물의 증조부인 야콥 아데나워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본에 정착하였다. 증조부는 본 서부의 에르프트니더룽에 있는 한 마을인 플레르츠하임의 ‘경작자’였다. 그의 조상들은 수 세대에 걸쳐 플레르츠하임에서 살면서 농부로 일하였다. 18세기 초반과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데나워라는 성을 지닌 사람을 뮌스터아이펠, 레마겐, 그리고 아이펠 산맥 줄기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1500년대부터 아데나워라는 성을 지닌 사람을 본 주변 지역에서 계속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이 여러 혈족은 모두 험준한 아이펠 지역의 작은 도시인 아데나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도시는 오늘날 뉘르부르크링 근처에 있다.      

아데나워의 증조부 야콥 아데나워는 26세 되던 해 본에서 성공을 찾을 결심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선제후국의 병영에서 멀지 않은 도시 성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 카세르넨슈트라쎄/마르가쎄의 모퉁이 집 옆에 있는 안데어카세르넨 375번지 집은 나중에 여러 차례 증개축을 하였다. 이 집은 1957년 본의 교통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옥스포드슈트라쎄에서 케네디 다리를 향해 난 2차선 도로를 달리면 아데나워의 조상이 살던 곳을 지나간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1801년에 출생한 콘라드 아데나워의 조부인 프란츠 아데나워는 1835년 빵집을 운영하였다. 이 자세한 사실을 밝혀낸 헤르베르트 베퍼는 이 집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빵집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빵집은 그 동네의 ‘최초이며 가장 오래된 명품 검은 빵을 생산하는 빵집’이라는 점을 선전하였다. 아데나워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쾰른 빵’을 생산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그 빵집을 운영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데나워의 조부는 새로 연 빵집과 더불어 본에 널리 퍼져 살고 있던 친척을 떠나 근처에 있는 메쓰도르프로 이사했다. 여기에서도 그는 제빵사의 자리를 찾았다. 나이 든 이들은 그의 집 지하실에 커다란 빵 굽는 오븐을 보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 마을을 둘러보면 현대적 주택이 많이 세워진 흔한 본 교외 지역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채의 목골가옥(木骨家屋)이 있고 돌십자가 한 개와 마을 구석에 있는 성모상, 19세기를 떠올리는 네오고딕 양식의 교회가 있었다. 메쓰도르프는 많은 작은 마을 가운데 하나다. 본의 외곽지역에 있는 그 마을의 농부들은 비옥한 땅에 곡식이나 감자를 심고 그 열매를 본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     


 프란츠 아데나워는 (1833년 주민등록장부에 그를 ‘아데나워’로 표기하였다.) 그 당시의 나이로는 상당히 이른 21살 때 6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1833년에 태어난, 아데나워의 아버지인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였다. 메쓰도르프에서 그 가족들은 운이 안 좋았다. 1837년 프란츠 아데나워의 아내가 사망하였다. 그 이전에 자녀 한 명이 이미 사망하였다. [아이가] 어릴 때 사망하고 [부모가] 재혼, 삼혼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첫째 부인이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프란츠 아데나워는 미장이의 과부와 재혼하였다. 1840년 채 30살이 되기 전에 과일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한 그는 돌볼 사람이 없는 두 아이를 계모 에바에게 맡겨야 했던 불운한 남자였다.  

    

어린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먼저 벽돌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른바 ‘메쓰도르프 성’의 어린 종으로 들어갔다. 이 집 주인은 페터 요셉 오스틀러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가족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때 그의 종이었던 아이와 나중에 관계를 맺게 된다. 동네 소문에 따르면 페터 요셉 오스틀러와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1870년부터 1년 동안 벌어진 전쟁 때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다음 세대에서도 이들은 활발한 관계를 맺었다. 나중에 아데나워의 4명의 자녀는 몇 년 동안 여름과 가을 휴가를 메쓰도르프에서 보냈다. 아데나워의 여동생인 릴리는 마르가레타 오스틀러의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아데나워 자신도 그녀의 매력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약혼설이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는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어찌 되었든 산업에 종사하는 소시민계층에서 다시, 그의 할아버지가 도시로 이주하며 떠났던, 농부와 들일을 하는 계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그는 군복무 이후에 직업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프로이센을 위하여’ 평생 직업군인이 될 생각으로 군에 입대한 것인지, 아니면 군 복무 기간의 정점인 ‘12년 복무자’가 된 다음 공무원 자리를 알아보려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이 군복무 서류는 여전히 남아 있기에 그의 인생행로는 어느 정도 재구성이 가능하다. 1851년 10월 1일 18살이 되던 해에 이 ‘키가 6피트 3인치’ 되는 청년이 3년 기한의 자원군으로 라인 보병 제2연대(28부대) 4중대에서 복무하였다. 1858년부터 그는 베스트팔렌 보병 제3연대(16부대)에서 근무하고 나서 1860년 파더본에서 창설된 베스트팔렌 보병 제7연대(56부대) 제9중대에서 근무하였다. 나중에 이 연대는 한때 명예연대가 되어 ‘팔켄슈타인의 새’라는 칭호를 받았다.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1860년에 하사관으로 승진하고 1861년에는 상사가 되었다. 그가 속한 연대가 덴마크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칼 베만 연대장이 1910년에 쓴 연대역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864년에 “우리 연대는 1864년 12월 12일의 최고 내각명령에 따라 쾰른으로 이동하라는 기쁜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 [연대에 속한] 대대들은 노이마르크트에 있는 군영에 머물렀다. 연대 역사서답게 이 책은 이야기를 더 이어간다. 장교단은 ‘대도시의 유혹’으로 다치지 않고 오히려 쾰른의 ‘고도로 발달한 문화’에 깊은 관심이 생겼다. “이 도시의 시민계층과 호흡이 잘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가정들과 사교적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콘라드 [아데나워] 상사는 이러한 점에서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지금까지 보존된 사진에 나온 대로 힘 있게 뻗은 콧수염을 한 당당한 군인으로 이 쾰른 주둔군 시절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헬레네 샤펜베르크를 사귀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은행원의 딸은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보다 16살이나 어렸으니 그 당시 15세 내지 16세였다. 샤펜베르크 가문 또한 군대와 인연이 있었다. 아데나워의 외할아버지인 아우구스트 샤펜베르크는 에어푸르트 지역의 바트사흐사에서 1818년 출생하였는데 원래 연대악단에 속하여 ‘오보에 연주자’라는 멋진 직함으로 쾰른으로 와서 정착하였다. 그의 부친도 바트사흐사에서 시 음악가였다. 그의 조상들은 전통적인 수공업자들로 그 가운데에는 대장장이, 가구공, 방앗간 주인도 있었다. 미래의 독일연방 수상의 튜링겐 출신의 외할아버지의 아내인 안나 마리아 쉘 또한 본 출신이었다. 외할머니의 부모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나중에 사람들이 가볍게 ‘독일 전체를 섞어 놓은 자’라고 표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중부 독일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자였고 개신교식으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안나 마리아 쉘의 많은 자녀는 가톨릭 신자로, 그것도 아주 경건한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이는 아데나워의 모친이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데나워는 자기 모친이 혼종혼*을 한 분이라는 사실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당시나 그 이후에도 이는 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로 보면 아데나워가 새로운 쾰른 사람인 것이다. 족보로 본다면 그는 차라리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순수한 라인란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수세대에 걸친 순수한 가톨릭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 혼종혼[Mischehe, 역자주 – 다른 기독교 종파 신자들 사이의 혼인]     


1871년 쾰른에 새로 가정을 꾸리기 전에 아데나워의 부친은 두 차례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1866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과 1870~1871년의 독·프 전쟁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데나워는 자기의 전기를 쓴 파울 바이마르에게 자기 가정에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부친이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은 채로 시쳇더미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의 손에는 적에게서 빼앗은 오스트리아 국기가 들려있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 전기가 출판되자마자 바이마르는 오스트리아 국기를 빼앗은 것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의심을 샀다. 이에 관해 이야기했던, 아데나워의 장남 콘라드 아데나워는 관련된 편지를 부친에게 보냈다. 그리고 카데나비아에서 머물던 그는 1962년 4월 2일 다음과 같이 자세한 답을 보낼 시간이 있었다.     

“1866년의 전쟁에서의 나의 부친의 무용담에 관하여 바이마르가 언급한 것에 관하여 나는 모른다. 내가 그 책에 나온 그 부분을 읽어보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내가 만약 그 내용을 읽었다면 그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부친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해본다. 부친께서는 내가 내 동생 한스와 함께 프리츠호프에서 휴가를 보낼 때 산책하러 가다가 중간에 앉아서 쉬면서 그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당시 장면과 부친께서 해주신 말씀을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부친께서는 쾨니히그래츠에서 입은 부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정말 형편없는 부상자 간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 당시 부상자들은 엄청나게 굶어야 했다. 나의 부친도 그러셨다. 부친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부친께서는 1866년에 ‘적에 용감히 맞선 것’ 때문에 소위로 진급하셨다. 그 당시에는 하사관 출신으로는 단 두 명만이 장교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께서는 장교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을 결심하셨다고 한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혼인하고 싶었으나 혼인허가에 필요한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하셨다. 부친께서는 1866년에 세우신 특별한 무공에 대한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의 부친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는 매우 겸손하시고 조심스러워하셨다. 부친께서는 당신을 내세우는 분이 전혀 아니셨다. 그 이후에 아버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다시 해주지 않으셨다. 나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부친께서 그 당시에 꾸며대거나 우쭐거리지 않고 오직 진실만 말씀해 주신 것으로 굳게 믿는다.”      


* 혼인 보증금[역자주 – 당시 장교는 혼인 시에 일종의 생명보험으로 ‘혼인보증금’(Heiratskaution)을 일시불로 국가에 내야 했음. 전투에서 본인이 사망하면 이 돈은 과부가 된 아내의 과부연금에 합산되어 지급되었음]     


이에 관한 사실은 연대사와 테오도르 폰타네의 쾨니히그래츠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한 서술, 그리고 [아데나워의 아버지]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의 제대증명서를 통해 검증해 볼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베스트팔렌 보병 제7연대(56부대)는 실제로 프로블루스라는 마을 근처의 고지에 있는 중요한 지역을 공격하느라고 쾨니히그래츠 전투의 한가운데에 투입되었다. 여기에서 56부대가 속한 제28여단은 12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깃발을 휘날리고 군가를 연주하며 “일치단결하여 매우 위협적인 기세로” 포포비츠 홀츠에서 프로블루스까지 1,500m를 은폐물 없이 구렁에 높이 쌓인 곡물 더미 언덕을 기어올랐다. 작센 제3여단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고지에서는 보병 부대의 엄청난 기총사격이 있었고 측면에서는 포격이 있었다. 요새화된 마을에서 벌어진 이러한 진지 공격과 그에 이어진 독일군끼리의 육박전은 이 전쟁 전체에서 피비린내가 가장 심하게 난 전투였다. 전투 시작 몇 분 만에 연대 장교 5명, 하사관과 병사 87명이 전사했다. 아데나워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은 머리에 총을 맞았고, 깃발을 든 병사들은 곧바로 차례로 쓰러졌다. 오스트리아 보충대의 반격을 커다란 희생을 치르며 막아내었다. 이는 프로이센 역사에 위대한 장면이 되었다!     


이러한 유혈이 낭자한 전투에서 깃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베스트팔랜 56부대의 여단기였다. 아마도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그 깃발을 든 마지막 군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복당한 오스트리아 깃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경우가 1871년 1월의 [프랑스] 디종에서 벌어진 겨울 전투에서도 발생하였다. 모든 프로이센 학생은 율리우스 볼프의 ‘61부대의 깃발’이라는 시를 외웠다. 이 시는 다음 구절로 끝난다.   

  

“다음날 리치오티가 보고하였네.

굳어진 속으로 꼭 잡은 깃발을 발견하였다고,

찢기고 총상을 입고 반쯤 불탄 그 손은

죽은 영웅들의 시체 더미 아래에 있었다네.”     


아데나워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역사서에 나온다. 2등 무공훈장을 받은 86명의 하사관과 병사들 가운데 그의 이름이 나온다. 연대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1867년 8월 10일 프로블루스에서 중상을 입은 아데나워 상사는 소위로 특진하였다.” 적에게서 탈취한 깃발의 장면은 여기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사가 소위로 특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이를 연대역사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사건 전체는 젊은 아데나워가 실제로 군인의 덕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부친은 희망에 가득찬 후손에게 영웅주의의 추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친척 가운데 한 청년이었던 한스 샤펜베르크는 1914년 김나지움 졸업반일 때 자원입대하여 아데나워의 중개로 장교후보생이 되었다. 그는 장교가 되기는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해진 채로 전쟁에서 돌아왔다. 아데나워는 1년 동안 많은 편지를 쓰며 이 가련한 젊은이가 어디든 정착하도록 이끌었다. 그 이후 아데나워 부친의 인생행로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가 소위로 임명되기 이전인 1867년 1월의 제대증에는 그가 “중상자이고 일시적으로 직업 활동이 불가능함”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1869년 10월까지 계급에 따른 연금으로 월 10탈러, 부상자 수당으로 월 2탈러, 장애 수당으로 월 5탈러, 사회보호증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3탈러를 수령하는 조건으로 쾰른에서 제대하였다.

    

이 모든 것은 혼인허가에 필요한 보증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 제대했다는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다. 이 시점을 1867년으로 놓고 볼 때 그렇다. 그러나 제대증, 연대역사서, 아데나워가 자기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는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건강을 회복한 그의 부친이 1870~1871년 전쟁에 다시 징집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때 그는 물론 소위로 징집되었다. 그는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재무 장교’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데나워의 부친이 남긴 서류에는 1873년에 발행된 증명서가 있다.    

  

8군단 총사령관인 괴벤 장군이 서명한 이 서류는 “라인 보병 제2연대(28호) 보충대 소속 소위이며 공병 부대 재무 장교인 콘라드 아데나워”에게 군인 목걸이가 달린 철전쟁기념훈장을 수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훈장의 양면에 있는 글씨는 두 명의 당당한 게르마니아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두 형상은 프로이센 문장이 새겨진 기둥에 기대고 서서 손을 칼 위에 얹어 놓고 있다. 이 영웅 형상의 예술적 수준은 그리 높지 않지만, 거기에 새겨진 글씨가 아데나워 부친의 인생길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뵈르트, 비옹빌, 그라베로테, 보몽, 세당, 스트라스부르크, 메츠, 아미엥, 오를레앙, 르망, 몽벨리에르, 생쾅탱, 파리, 퐁타흘리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모두 독일 8군단이 진군한 지역이다.     


이 증명서는 구전되던 이야기를 증명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오스틀러와 더불어 프랑스 출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연대는 1870년 8월 18일 그라베로테 전투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삼림 교전에 참여하였고, 메츠 요새의 포위 작전에도 함께 했으며 프랑스 북부로 진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 수상의] 부친의 경력에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역도 나온다. 그곳은 아미엥, 바포므, 생쾅탱이다.     


확실한 것은 이제 38살이나 된 이 예비역 군인은 전쟁에 완전히 지렸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전쟁 말기에 전열보병대의 정식 소위로 재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계획하는 처지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많은 ‘뽐내는 군인들’(miles gloriosus)과는 달리 그는 자기 전쟁 무용담을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앞으로는 자기 자식들에게 시민적 도덕을 주입할 때만 회고하기로 하였다.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가 쾰른의 노이마크트에 큰불이 나서 숙제를 안 하고 나가보려고 하자 가끔 성미를 부리던 이 늙은 전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네 옆에서 대포를 발사하더라도 너는 네 일에나 충실해야 해!”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17년 동안 프로이센 왕을 위하여 군인으로 복무하고 나서 1906년 사망할 때까지 30년 동안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법기관의 중급 관리로서의 통상적인 의무를 다하였다. 그의 경력은 느리고 화려함은 없었으나 꾸준히 향상한 것으로, 그의 교육 수준에서는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 결국 1873년에 그는 항소법원 서기로 승진하였다. 그때부터 아펠호프에 있는 지방법원이 그의 참된 고향이 되었다. 아데나워의 부친이 사법부에서 일을 시작할 때 쾰른의 이 최고 법원은 1820년대의 아름다운 고전주의적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건물은 그 당시에 아직 젊은 도시 건축관인 요한 페터 바이어가 지은 것이다. 그의 조카인 에마 바이어가 아데나워의 첫째 부인이 되었다. 1888년에서 1893년 사이에 마침내 네오고딕양식의 사법부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건물에서 요한 콘라드 아데나워가 은퇴할 때까지 일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데나워를 포함한 그의 두 아들도 최종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1883년 사법부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년이 흐른 다음 마침내 아데나워의 50을 넘긴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였음에도 비서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 지위에 머물렀다. 1891년 1월 18일 제국 건국 기념일에 그는 모두가 선망하는 4급 로텐독수리훈장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사람으로 크게 상냥하지는 않았으나 직무에 충실하고 양심적이었다.” 이는 법률고문이었던 베른하르트 팔크가 한 말이다. 그는 쾰른 고등법원의 제1법원서기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다. 이렇게 하여 팔크는 콘라드 아데나워가 설명하던 부친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팔크는 콘라드 아데나워의 부친이 특히 쾨니히그래츠 전쟁터에서 특히 용감하게 싸워 소위로 진급하였기에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선두에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매우 드문 최고의 인정이었다.” 집에서나 도시에서나 그의 무공은 관리로서의 모범적인 의무 수행으로 빛을 발하였다.     

이는 어린 아데나워가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본 부친의 모습이었다. 늘 옷을 단정하게 입고 품위를 지키며 엄격한 눈빛으로, 단정한 콧수염을 지닌 이 신사는 아침 일찍 정확하게 아펠호프에 있는 사법의 전당에 도착하고 저녁이 되면 별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프로이센 관리의 모범을 체현하였다. 욕심이 없고 질서 의식이 강하며 예의 바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우구스트 아데나워와 그의 동생에게, 그 자신이 높지 않은 직급의 관리로 일하고 있는 사법계에 들어설 의지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최소한 그의 장남은 그 자신이 이르지 못한 그 높은 자리에 오를 것으로 여겼다.   

  

부친의 생애는 서류로 파악할 수 있는 흔적을 남겼고 그의 아들인 아데나워가 묘사한 모습도 제삼자를 통해 확인되었지만, 지금까지 모친의 모습은 가장 성공한 아들과 장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해질 뿐이다. 가사를 돌보면서 하루 종일 노래를 흥얼거리던 활동력 있고 지칠 줄 모르던 이 여인은 가정의 영혼이자 원동력이었다. ‘엄청난 힘이 넘치는’ 라인란트 사람으로서 자기 아들을 가르칠 줄 알았다. 엄청난 힘이라는 표현은 아데나워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모친의 깊은 신앙심을 기억하면서도, 그 모친이때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큰소리를 지를 수 있는 분이었음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끔 무턱대고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아데나워는 자기의 전기를 쓴 바이마르에게 고백하기를 자신이 그러한 면에서 양친 모두에게 유전을 받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 남편과 아들은 그들의 아내와 모친보다는 성격이 더 좋았다.    

 

아데나워의 부친은 자녀 양육을 포함한 집안일은 자기 아내에게 모두 맡겼다. 아들 아데나워도 나중에 그대로 따라 하였다. 쾰른시장이며 나중에 [기민당(CDU)] 당수가 된 [아데나워에 대한] 가부장적인 훈육 방식에 관한 글을 읽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은 근검절약하며 굳세고 [부하들을] 엄격히 이끌면서도 성취 의지와 하느님에 대한 외경과 상호 협조로 넘치는 아데나워에게 그의 가정이 모범이 되었음을 쉽사리 알아채게 된다.     

나중에 아데나워의 모든 측근은 그가 십계명의 제4계명에 나온 대로 양친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기의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그는 날마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나면 차를 몰고 양친을 먼저 방문하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모친을 자기 집에 모시어 여동생 릴리와 함께 2층에서 살도록 했다. 뢴도르프에 있는 아데나워의 집 침실에는 양친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사진은 아데나워에 관한 모든 책에 실렸다. 부친은 프로이센 관리의 관행대로 뻣뻣한 옷깃과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하고 있고, 모친은 [성당에 가는] 주일의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모친은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나이든 여인이 단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아데나워의 부친은 1871년 8월 8일 쾰른에서 혼인하였다. 가족도 빨리 늘었다. 혼인한지 아홉 달 만에 장남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요한 루드비히 아우구스트(Franz Johann Ludwig August)였다. 이름의 순서와 조합을 보면 그 당시 얼마나 철저히 원칙을 지켰는지를 알 수 있다. 프란츠는 본에서 빵집을 운영한 친할아버지의 성함을 따고 요한 아우구스트 루드비히는 외할아버지의 성함을 딴 것이다. 아데나워의 외할아버지는 1906년에 88세를 일기로 쾰른에서 사망하였다. 나중에 아데나워의 아버지도 88세에 사망하였다.

     

요하네스 프란츠 리하르트(Johannes Franz Richar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스라는 애칭으로 불린 차남은 [장남이 태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태어났다. [후에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이 된] 삼남의 이름은 콘라드 헤르만 요셉이다. 릴리라는 애칭으로 불린 장녀인 에밀리 헬레네 마리아 루이제 아데나워는 1879년 초에 태어났다. 1882년에 태어난 다섯째 아이 역시 딸이었는데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나이가 비슷한 형제자매 사이에서 자랐다. 이들은 결코 자기만 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서로 의지가 되어 주고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었다. 쾰른의 소시민 관리 집안의 이 매우 추진력 있는 네 남매의 정서적 관계를 세밀하게 알 수 있는 문서적 근거가 지금까지는 충분히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로 구전되는 이야기와 그 후손의 이웃에서 들을 수 있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어린 아데나워가 단순히 강한 출세 의지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함께 단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형제자매들 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였고 이는 평생 지속되었다. 세 형제는 같은 학교인 쾰른의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니고 여기에서 아비투어를 마쳤다. 아우구스트는 법률가가 되어 성공적인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아데나워가 원래 아버지의 뜻이었던 은행원의 길을 가지 않고 형과 마찬가지로 법률가의 길에 접어들고자 한 것은, 그가 나중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학급 친구의 영향이 상당히 큰 것이었지만 그의 맏형의 모범이 큰 역할을 한 것일 수 있다. 당시 맏형은 아데나워보다 3년 먼저 아비투어를 마치고 이미 대학교 공부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처세에 능한 강인함에서, 이 장남은 나중에 훨씬 유명해진 동생 못지않았다. 그리고 법률가의 소양에서는 모든 면에서 동생을 능가하였다. 그는 최단기간 안에 교육을 마치고 부친이 마련해준 학자금 갚고 아데나워의 학비를 대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변호사 사무소를 세 차례나 성공적으로 개설하였다. 먼저 그가 예비군 장교로 본의 후사렌[기병대]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복무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10년 동안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제대하고 나서는 거의 혼자서 변호사 사무소를 운영해야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쾰른의 최고의 변호사 반열에 오르고 대학교에서 명예 교수직을 얻었다. 1933년에 그는 [법적으로]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고객 거의 전부를 잃게 되었지만, 국제 사법 전문가였기에 이 시기에 새로운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격 당하였으나 전후에 겔스도르프에 있는 그의 별장을 개조하여 사무실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 1952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으로서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형을 찾아와 성대한 80회 생일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두 형제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이미 오래전에 겪은 후였다. 형제 관계는 1933년과 1937년 사이에 매우 돈독해졌다. 그 당시 아우구스트 아데나워는 심각하게 궁지에 몰린 자기 동생의 가장 중요한 변호사가 되어 징계 심판 소송에서의 면소(免訴)를, 그리고 쾰른시와의 법적 소송에서 가벼운 결과를 이끄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데나워의 둘째 형인 한스 또한 중요한 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 아들이 많고 가톨릭 신앙이 깊은 가정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 또한 성직의 길을 가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형이나 동생과는 다르게 한스는 어릴 때부터 개방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인성을 지녔다. 1917년 그믐에 있었던 방송 인터뷰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영혼이 선한 거의 유약할 정도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    

 

한스는 신부 서품을 받고 나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본 남쪽의 ‘백작령’에 있는 과일이 많이 나는 마을인 프리츠도르프에서 사제로서의 사목 생활을 하였다. 아데나워의 가족들은 그곳의 사제관에서 자주 휴가를 보냈다. 아데나워가 아내 에마의 사망으로 홀아비가 되어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았을 때 한스는 자기가 활동하던 지역인 뒤셀도르프 근처의 라트에서 쾰른으로 주일마다 그를 찾아왔다. 그 당시 4~5세 정도의 어린아이였던 아데나워의 장녀인 리아 라이너는 사제복을 입은 삼촌이 내적으로 외로웠던 자기 부친과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 있는 빌라의 벽난로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기억하였다. 이 두 형제는 무엇보다도 상트블라시엔에서 영적으로 매우 가까워졌다. 아데나워가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여기에 석 달 동안 머물며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한스는 자기 동생을 몇 주 동안 방문하였다. 1922년 한스 아데나워는 쾰른의 대성당 참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그의 동생인 아데나워가 힘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스는 1937년 사망하였다.     


아데나워의 형제자매 중에 누이인 릴리의 인생이 아데나워와 가장 밀착된 길을 갔다. 릴리는 쾰른의 행정 법률가인 빌리 수트와 혼인하였다. 수트는 1909년부터 1915년까지 아헨의 지방법원에서 법관보로 일을 하였고 1915년에는 쾰른시청의 법률 보좌관으로 일하였다. 여기에서 수트는 아데나워 직속 부하 직원으로 있으면서 식량 보급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에 쾰른시청 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능력이 검증된 것이 확실하다. 수트가 선출될 때 친인척 등용에 관련된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사민당(SPD) 의원들도 그의 임명에 찬성하였다. 아데나워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그를 핵심 참모로 기용하며 시장직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의 확실한 능력과 개인적 충성을 믿었다.     


1920년대 말부터 아데나워가 점점 더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시장의 반대파들은 족벌주의를 들먹이며 수트를 바라보았다. 사민당(SPD) 당의장 괴를링거는 그에게 프랑크푸르트시 재정국장 자리를 받아들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수트는 떠나지 않았고 [나치 시절에] 아데나워와 함께 쫓겨났으나 아데나워보다 먼저 복권되었다. 미군 당국은 그를 1945년 3월 16일 도시관리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영국 당국이 아데나워를 파면시키자 그는 잠깐 시장 대리로 일하였고 은퇴할 때까지 쾰른의 도시관리관으로 일하였다.    

  

아데나워는 크고 작은 일에서 언제나 이 매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당수이던 1946년에 급히 멀리 갈 일이 있어 자동차가 필요할 때나 1950년 1월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이 처음으로 샤움부르크궁을 방문할 때도 그를 도왔다.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에는 정찬에 쓸 만한 은식기가 없었다. 그래서 수트가 쾰른에 있는 재고품으로 이를 조달하여야 했다.     


[프로이센] 제국이 건립된 이후 20년 동안 네 자녀가 검소한 생활 조건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 가정의 궁핍함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의 가장이 1873년 4월 13일 항소법원 서기로 임명될 때 정확히 연봉 700탈러를 받았다. 아데나워의 청년기 동안 그의 가정은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12월에는 몇 주마다 한 번씩은 일요일에 고기를 먹지 못했다. 그래야만 성탄절 때 나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되면 방 1개와 부엌만 따뜻하게 데웠다. 그의 모친은 바느질과 밀 먹인 천을 걷어 올리는 일로 번 돈으로 살림에 보탬을 주었다. 아들들이 다른 학생의 공부를 도와줄 나이에 이르자 이들이 번 돈도 가정의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아데나워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아데나워의 대부인 콘라드 톤거는 이 가정과 매우 밀착된 인물이었는데 자기의 대자에게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인 3만 마르크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이 돈은 공부에 쓰라고 준 것이다. 아데나워의 부친은 후일의 아들만큼이나 투자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톤거의 유산은 창업 투자 첫해에 큰 손해를 보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나마 남은 돈은 자녀들의 학비에 쓰일 것으로 먼저 형들의 학비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작 아데나워를 위하여 남은 돈은 별로 없었다. 그의 대부는 평생 간직할 추억을 남겨주었다. 콘라드 톤거의 금시계를 소중히 간직해온 아데나워는 나중에 대부의 유해를 쾰른에서 뢴도르프에 있는 공동묘지에 이장하였다.      


궁핍했던 유년 시절은 돈에 대한 아데나워의 관념에 평생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돈 절약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적이다. 그 절약 정신은 거의 인색함의 경지에 이를 정도였다. 벌이가 훌륭한 시장일 때도 그는 출장비에서 지출한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환불받았다. 그러한 일은 서류에서 읽을 수 있다. “1932년 10월 3일 쾰른을 위한 일에 1.75제국마르크를 선지급하였다. 이 비용을 환급받았다.” 그는 수상이 되어 연합군 고등 판무관을 뢴도르프의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이는 드물게 귀한 대접이었다. 속을 채운 빵과 도수가 높은 포도주를 대접하였다. 수상은 집에서 자랑스럽게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그가 전쟁 이전에 쾰른의 랑 양복점에서 맞춘 것이었다. 그의 딸이 일상복이 너무 낡은 것을 보고 새 옷을 사러 갈 때면 한바탕 소동을 피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인부들에게 그는 쫀쫀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어느 정도 후하게 베풀고 조용히 도와준 예도 있다. 아데나워가 수상일 때인 1959년에 쾰른에서 태어난 그가 1876년 1월 25일 세례를 받았던 상트마우리티우스 교회에  500kg이나 되는 청동종을 기증했다. 뢴도르프의 본당도 마찬가지로 가장 유명한 신자인 [아데나워의] 기부를 받았다. 이 교회에는 그가 수상으로 임명된 이후 그를 위한 귀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 고아원이 자선을 호소할 때 그 호소가 헛되지 않았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선행과 자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절약 정신은 일상에 깊이 스며있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인생의 첫 4분의 1 동안에 매우 궁핍한 어린 시절과 학교생활을 겪으며 명심하게 된 것으로, 매우 절실한 것이기에 그가 곧바로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그가 공부하는 동안에 달이 바뀌기 전에 한 달 용돈 90마르크를 모아서 그의 친구인 슐터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로 6주간 여행을 떠날 때도 그의 부친은 돈도 없는데 놀러 간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비용 지출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록을 모았다. 이 기록은 그의 사망 이후 뢴도르프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도 절약은 여전히 시대에 맞는 일이었다. 이는 하층민만의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들조차도 중요하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다른 큰 인물들도 푼돈을 낼 때라도 세 번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대니 N. 하이네만이 주고 받은 오래된 서신에서는 엄청난 부자인 늙은 아우구스트 튀센이 자주 언급되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그가 짐 가방을 가능하면 안 쓰려고 하고, 절대로 [기차의] 1등 칸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네. 또한 그는 나중에도 자기 자동차를 루르다리까지만 몰고 가서는 거기에서 내려 그 다리를 걸어서 걷었다네. 그 다리를 자동차로 건너는데 내야 하는 비싼 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말일세.”     


아데나워의 가족에게 절약은 단순히 윤리적 덕이 아니라 냉혹한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발두인슈트라쎄에 있던 2층 집은 좁고 어두웠다. 게다가 2층 전체와 아래층 절반은 세를 놓아야 했다. 아데나워는 자기가 17살이 될 때까지 형과 한 침대에서 자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몇 장 없는 그 당시를 보여주는 사진에는 주일날 성당에 가는 옷차림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바로 소시민들은 주일이나 축일에 자식들을 마치 인형처럼 차려입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후세에 감탄을 자아내려는 의도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집 뒤의 작은 정원에는 두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었다. 이는 그 당시 독일의 많은 도시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개의 사탕무가 심겨 있었고 잔디밭도 있었다. 사탕무는 빨래를 희게 하는 데 사용하였다. 나중에 아데나워 가족은 근처에 있는 샤펜슈트라쎄에 있는 셋집으로 이사했다. 여기에는 그 작은 정원조차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본성에 강력한 자연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시골로 가는 휴가 여행은 천국과도 같은 것이다. 휴가를 가면 메쓰도르프에서 멀지 않은 레세니히에 있는, 부친의 오랜 친구였던 인물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여관을 운영하며 성당 관리도 하였다. 휴가 동안에는 풀을 베는 일과 수확 일도 돕고 교회 창고에 진짜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시골 생활에 대한 동경은 평생 그에게 남았다. 정식 법률가가 된 아데나워는 몇 해 동안 시골에서 공증관으로 일하는 꿈을 구체적으로 꾸었다. 그가 시행정관이던 시절에는 도시 주변에 살았고, 시장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목가적인 뢴도르프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휴가는 시골이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서 보냈다. 그리고 이는 아데나워만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 당시 도시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리고 살던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데나워가 성장한 쾰른이라는 도시는 그의 첫 유년 시절의 이상향은 아니었다. 그는 그 도시의 역사에서 거대한 도시 성곽이 아직 온전하던 시기의 마지막 10년 무렵에 태어났다. 어린아이때 그는 중세 때 지은 폐허가 된 담장에서 놀았다. 야콥 샤이너가 하넨토어를 그린 그림에 1878년 당시의 이 성문의 모습이 나와 있다. 참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이다! 탑들과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고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산책하는 사람들과 아이들 몇 명이 그림 전면에 나온다. 두 마리의 말이, 먼지를 뒤집어쓴 철로 위에 놓인 말마차를 끌고 성문을 향하여 가고 있다.      


발두인슈트라쎄는 이 목가적인 풍경에서 단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 비록 그 당시의 아이들이 자라던 곳이 비좁고 매우 비위생적이었다는 생활 조건을 잘 알고 있어도, 그러한 낭만적인 폐허가 된 성벽과 골목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네나워의 개인비서인 안네리제 포핑가는 88세 되던 해에 한 인터뷰에서 자기 유년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가 어린 시절의 쾰른은 오늘과는 많이 달랐다. 마차와 말이 끄는 버스는 거리의 모습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이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요즘 세상처럼 그렇게 급하고 정신없지는 않았다.”     


아데나워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근세 시대가 열렸다. 도시 성곽은 폭파되어 그 잔해가 도시 밖으로 운반되었다. 중세가 현대까지 밀려 들어왔던 자리에 엄청난 건설 현장이 늘어서게 되었다. 외적인 생활 조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 태도와 가치체계는 주변 세계처럼 급격히 변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흔히 아름답게 채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나이가 들고 나서 말한 내용과 제삼자가 말한 것이나 문서로 재구성한 것은 모두 정확히 일치한다. 그 당시를 말해주는 단어는 규율과 극기, 궁핍, 부모님 뜻의 순종, 가정의 소중함과 따스함, 자연에 대한 향수였다. 여기에 더해 물론 신앙심의 실천이 들어 있다.    

  

아침과 저녁에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드리고, 주일 오전에 상트아포스텔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주일 오후에는 성체조배를 하였다! 부친은 거의 날마다 퇴근 때 쿠퍼가쎄에 있는 검은 마돈나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지내는 가족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도 있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 일이 벌어진 지 75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날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그날은 부친과 모친이 자녀들과 함께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부친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딸이 뇌막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친은 하느님에게 그 아이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지성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야 아들은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부친은 하느님에게 자기 자녀의 죽음을 간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측면에서도 그의 가정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수상의 직위에 있을 때도 외국 여행을 할 때 가능하다면 미사에 참석하였다. 기자들은 그가 파리, 워싱턴, 로마, 심지어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도 무릎을 꿇고 기도드린 사실을 보도하였다. 그는 가장 유명한 가톨릭 인사로서 자기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호네프시에서 시작하여 그라펜베르트 섬까지 진행되는 성체성혈대축일 행렬에 참석하였다.  

    

식사 기도드리는 일도 엄격하게 지켰다. 금식 계명은 쾰른시장의 집에서만이 아니라 나중에 뢴도르프에서도 양심적으로 지켜졌다. 죄의식이 그에게 주입된 것처럼 후에 그의 자녀들의 양심도 그대로 길러졌다. 자녀들을 꾸짖을 때 지옥의 형벌과 연옥에 대한 경고가 자주 함께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자녀들은 그의 부친이 지옥과 연옥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확신했다. 하느님에 대한 외경과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신앙심의 핵심 요소였다. 그런데 이 신앙심은 나이가 들면서 여러 교리에 맞서 내적 자유가 커지면서 비로소 줄어들게 된다.     


아데나워에게도 그의 정서에 깊이 뿌리내려서 가끔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신앙에 양면성이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외경이 그 한 면이라면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다른 한 면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것을 그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주로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한번은 1944년 감옥에 갇힌 그를 방문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들린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 강하지 않은 시대에 그러한 말에서 분명히 심리학적인 의미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아데나워 같은 권력지향적인 인물이 된 사람이 어린 시절의 신앙심을 그토록 오래 간직하고는 그러한 신앙심이 그의 정신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지니게 된 신앙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 다양한 모습을 한 남자의 개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부모와 살면서 길러진 신앙은 단순히 주일미사만 참석하는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다. 물론 주일도 특별히 신앙심의 영향을 받는 날이다. 무엇보다도 쾰른시장 시절에 관련되는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주일은 매우 지루하였다. 주일에는 상소법원 서기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아이들이 집에 오면 안 되었다. 아데나워의 자녀들도 다른 집에 가면 안 되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미사 참석이나 정기적인 고해성사만큼이나 엄격하게 지켜졌다. 눈이나 비가 온다고 해서 주중에 학교 미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가족이 주일 미사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신앙이 엄격한 집안이 다 그렇듯이 성도덕은 특히 엄격했다. 아데나워가 아이들이 읽는 책을 매우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모든 타락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어, 그 자신이 자랄 때의 관행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쾰른의 한 사업가가 시장에게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선물하자 그는 그 책을 돌려주었다. 그러한 저자의 책은 그의 집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여러 모로 볼 때 그는 자기 삶에서 그 당시 교회가 엄격하게 금지하던 혼전관계와 혼외관계를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장일 때나 나중에 수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그를 비난했지만, [외도와 관련된] 제6계명에 관한 것은 없었다.   

  

아데나워가 성장한 가정환경에 대하여 위에서 이야기한 것의 인상을 종합해 본다면 수상과 그의 명성을 선전하는 이들이 1950년대 초반부터 전하려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열심히 노력하는 소시민 공무원 가정으로 매우 깊은 가톨릭 신앙을 지녔으며 그 시작은 작고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전기 작가가 얼마든지 새롭고 어쩌면 놀라운 것을 찾아낼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진짜 사실이다. 쾰른, 본, 메쓰도르프, 레세니히에 살고 있는 친척들도 포함된 이러한 단합된 가정환경에서 후손들에게는 개인주의가 거의 발휘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관한 증언들은 매우 부족하고 주관적이다. 그 증언의 대부분이 아데나워 자신이 보증하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력은 고령에 이르기까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수고는 원칙적으로 그가 혼자서 다 하였다. 스스로 증언한 것이 우연히 찾은 다른 자료를 통하여 검증이 되는 경우에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아는 것을 결코 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스스로 증언한 것 말고는 몇몇의 일화적인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그 가운데에는 쾰른시 의료위원이었던 후베르트 로머가 있다. 그는 아데나워와 같이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녔다. 그가 한 이야기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아데나워가 생물학 책을 살 돈을 타내기 위하여 모친을 매우 끈질기게 졸랐다고 하는 이야기는 뭔가 말이 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두드러진 성격이 일찍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여길만한 징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매우 늙을 때까지 노새와 같은 억센 고집을 부렸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이 동물을 그토록 사랑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그가 보여준 모습을 굳게 간직하고 있다. 그 모습에서 아데나워는 완고하게 수백 가지의 다양한 논거를 펼치며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는 분명히 모든 아이가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할 때 기르고자 노력하는 재주가 아닌가?  

   

모친에 대한 자녀다운 복종은 그의 모친이 사망할 때까지 그가 익힌 가치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아홉 살, 열 살, 열두 살, 열네 살 먹은 아이들이 흔히 모험 이야기와 소설을 지독하게 탐독하는 것 또한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다. 칼 마이, 소피 뵈리스회퍼, 쥘 베른의 작품들 말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물론 학교에서 장난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정신적인 주모자이고 영악한 지도자였다. 여기에서는 아비투어 시험의 독일어 작문과 라틴어 번역 문제도 포함된다. 이는 아픈 브뤼게만 교사를 속여서 알아낸 것이었다. 그 이후의 체조 연습에서 ‘여우 중에서 여우’가 된 일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귀여운 짓들이고 어쩌면 아데나워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데나워가 어릴 때 자주 아팠다는 이야기가 어쩌다 나올 때 사람들은 이에 귀를 잔뜩 기울인다. “예를 들어 그는 6주 동안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년 동안 허리에서 다리까지 철심을 박고 있었다.” 가족들에게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가 폐결핵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 병은 그 당시에 드물지 않게 발생하였다. 많은 경우에 이는 영양의 부족이나 결핍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기관지도 평생 그를 위협하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의 폐가 다시 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질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늘 질병에 취약하였다.   

  

질병과 싸워야 했던 어린이가 일종의 냉소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데나워가 얼마나 심하게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결코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 앞에서 언급된 후베르트 로머는 아데나워가 늘 “괴팍스러운 청년의 인상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든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곧 아데나워 자신은] 어릴 때나 청년이 되어서나 매우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는 누가 말을 걸면 늘 얼굴이 붉어졌다.” 오래 전에 쾰른에서 아데나워와 함께 댄스 교육을 받았던 한 여성도 그를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서툴고 춤을 전혀 잘 추지 못했다.    

  

아데나워가 김나지움 학생일 때 때때로, 특히 여학생 앞에서 서툰 모습을 보인 것은 그의 보잘 없는 출신으로 쉽게 설명된다. 그러한 약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젊은이가 비교적 느리게 그리고 나중에야 비로소 자기 진짜 능력을 확신하게 된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매우 유명한 자제력은 여러 가지로 몸이 약하고 출신이 보잘것없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은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매우 포괄적인 결론을 끌어내기에는 아데나워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는 것이 사실 거의 없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에는 건강의 문제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병약해진 것은 주로 초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졸업 이후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소심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다른 증언에 반대된다. 그러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장난기가 있었고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대부분 고등학생과 비슷하였다.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비스마르크 시대와 빌헬름 시대 초기에 철이든 쾰른의 이 젊은이는 결코 천재도 그렇다고 타고난 지도자도 아니고 자기의 목표를 확신하는 자도 아니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의 모토였다. 곧 신앙심과 노력이었다.     


성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노력, 노력, 노력이라는 말을 아이들은 끊임없이 보고 들었다. 이에 맞게 학교를 열심히 다녔을 것이다. 학교 초기에 부친은 저녁이 되면 집으로 일찍 돌아와 스스로 자녀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그래서 자녀들이 바로 2학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아들들 모두는 부친의 바람대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모두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 합격하였고 아비투어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리하여 그들은 교육 피라미드의 상대적으로 매우 좁은 상위층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 가정의 아들들이 성공적으로 김나지움을 마친 것에 비하여, 그 당시 독일의 한 학년의 92%는 초등학교만 마쳤다. 아데나워의 부친도 그 이상의 교육을 결코 받지 못하였다. 그 나머지 8% 가운데에서도 다시 극히 일부만이 인문계 김나지움을 다녔다.    

 

김나지움은 단순히 대학 진학을 위한 사회적인 ‘발판’만이 아니었다. 쾰른에서 개신교계 왕립 프리드리히-빌헬름-김나지움이나 가톨릭계 마르첼렌 김나지움, 또는 아데나워처럼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닌 학생들은 강력한 계층 구조적인 사회에서 처음부터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도 김나지움을 다니는 학생은 교모, 재킷, 넥타이, 칼라로 동급생들보다 훨씬 우월해 보였다.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은 1860년 설립되었다. 유명한 쾰른 도시 건설 행정관인 라쉬도르프가 이 국립 건물을 1859년에서 1860년에 걸쳐 네오·로마네스크양식으로 상트아포스텔른 교회에서 멀지 않은 아포스텔른 수도원에 지었다. 이 건물의 여덟 개의 교실에서 각각 50명이 학생이 공부하였고 근대성의 첨단에 서서 물리학 실험실까지 갖추었다. 또한 두 개의 학생 감옥도 빼놓지 않았다. 교장, 수위, 성주, 교도소장은 이 벽돌로 지은 집 안에서, 말하자면 각자의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새 학교였던 것이 아데나워가 다니던 시절에는 이미 25년이나 된 낡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90살이 되었을 때도 아데나워는 그가 김나지움 1학년 때 외웠던 글을 여전히 기억하였다.    

   

“오~ 너 늙은 불평쟁이야.

오늘 너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구나.

너는 한시도 쉬지 않고 어린이들을 고문해 왔구나.“     


아데나워가 입학할 무렵에 그 학교 주변은 이미 번화한 지역이 되었다. 아포스텔른 플라츠 아주 가까이에는 시장이 있었고 현명한 관리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방서를 지었다. 그리고 학교 건물 바로 앞에는 말이 끄는 기차의 차고지와 정류장이 있었다. 그래서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대도시의 소란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업하는 교실을 파고들었다.      


이 교육 기관은 원래 주로 가톨릭 재단의 기금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포스텔른 교회에 있는 가톨릭 김나지움’이 교명이었다. 그러나 곧 국가의 재정 지원이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이 학교는 순수한 국가 기관이 되어 1876년 바로 아데나워가 출생한 해에 교명이 ‘아포스텔른 교회에 있는 왕립 가톨릭 김나지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교명은 전적으로 의도적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 학교의 정신적 목표를 들여다보면 학교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기독교·인문 정신과 프로이센·독일 애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학교 다니는 동안 계속 그 학교를 이끌었으며, 이 학교로 오기 전에는 본의 김나지움의 교장을 역임했던 아우구스트 발트아이어는 이미 그의 취임사에서 자기 그러한 의도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학교는 처음부터 교파를 초월하여 학생들을 받아들였지만, 가톨릭적 색채가 매우 강하였다. 처음에는 날마다 학교 미사가 거행되었고 1870년대 초반에도 여전히 일주일에 이틀, 곧 목요일과 주일에 미사를 거행하였다. 문화투쟁이 있기 전까지 학생들은 두 개의 커다란 깃발을 들고 성체성혈대축일 행렬에 참가했다. 해마다 11월 3일이 되면 설립자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였다. 1929년까지는 저학년 학생들이 첫 영성체 후에 김나지움으로 행렬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고는 거기에서 부모와 함께 교장의 축복을 받았다. 그에 못지않게 강조된 교육은 국가 의식의 고취였다. 해마다 황제의 생일을 기념하여 대강당에서 합창단의 공연과 더불어 예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은 상으로 책을 받았다.  

    

이 행사에서 수십 년 동안 이 학교에서 근무한 음악 교사였던 헤르만 크니퍼는 문자 그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학생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체칠리아 볼켄부르크 남성합창단을 위하여 끊임없이 작곡하였다. 도한 그는 음악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는데 일찌감치 아데나워의 관심을 이끌었다. 아데나워가 상급반이던 1890년대 초반부터 크니퍼는 자작곡을 공연하였다. 그 작품의 제목이 내용을 말해주었다. 1891년 (개시부, 전개부, 종결부, 트럼펫 팡파르로 이루어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의 세계 여행’을 연주하였다. 1892년에는 ‘조국을 위하여’를 초연하였고, 1893년에는 아데나워와 그의 친구들이 ‘학교에서 전쟁으로’라는 작품을 듣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70년 독일·프랑스 전쟁에 자원군으로 참전한 아포스텔른 김나지움 상급반 학생 3명의 무용담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 9년 동안 다니면서 애국을 강조하고 프로이센을 옹호하는 연설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깊이 마음에 새겼는지는 나중에 그의 동료들과 후손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가톨릭 정신이 깃든 쾰른의 시민계층이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프로이센에 대한 지속적이고 잠재적인 반감이 아데나워가 다니던 김나지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교황중심주의에 반대하여 생긴 제국의 가톨릭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가톨릭 정신과 프로이센-독일 정신이 잘 공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행사나 국가적 행사가 이 학교 일상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니다. 그 핵심 교육에서 이 학교는 독일제국의 수많은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인문계 김나지움이었다. 아데나워가 하급반과 상급반을 거치는 동안 고전어가 여전히 확고한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892년에 들어서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시간을 줄이는 대신 독일어와 체육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물리학 교육이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핵심 과목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총 36시간 공부하였다. 아비투어 시험 과목은 종교,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미술이 있고 선택과목으로는 역사, 지리, 수학, 물리학 체육, 음악이 있었다. 수업 시수가 가장 많은 과목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1893년 기준으로 둘을 합쳐 주당 14시간을 차지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전세대나 후세대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평생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가끔 학교를 풍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상일 때와 전임 수상일 때 그는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세 차례 방문하여 기독교 전통을 지키면서도 개방적인 정신을 지닌 학생들을 칭찬하였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지금 저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학교, 이 임시숙소에 있었고 여기가 어딘지 잘 압니다. 그러니 너무 나댈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유쾌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다.     

 

다른 이들의 기억도 비슷하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초대 주지사였던 루돌프 아멜룬센은 1900년부터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녔는데 그의 회고록에서 그 학교가 “빛나는 교육시설”이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렇게 대단하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데나워보다 10년 선배인 베른하르트 팔크는 학교를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 학교가 “즐거운 고전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개신교 종교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사가 가톨릭 신자였다. 최소한 학생들의 4분의 3은 가톨릭교회를 다니고 원칙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가정 출신이었다. 정통 유대 집안 출신인 팔크는 자기 인생에서 이 가톨릭 김나지움만큼이나 타종교를 참되고 진지하게 관용하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이 학교에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멜룬센은 일부 “폭력 교사들”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가는 귀가 먹은 수석교사였는데, “그는 날마다 여섯에서 여덟 차례 학생의 뺨을 때렸다. … 그가 내 친구의 고막을 터뜨리고 나서야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 당시의 유명한 학교들은 암기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나이가 들어서도 버질, 호라티우스, 호머의 긴 문장을 자랑스럽게 낭송할 줄 아는 세대에 속하게 된 것이다.      


고전어 교육이 얼마나 깊은 영향을 남겼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당시의 인문계 김나지움은 어문학적 이해력과 번역 능력의 훈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아데나워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우수’의 성적을 받은 아비투어 시험 성적표에 나온 평가 항목에는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훌륭한 문법 지식으로 그는 학교에서 베우는 작가들의 글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데에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고전 문학, 철학, 역사를 접하면서 인문계 김나지움이 요구하는 그 기억에 남는 교육 경험을 이 이상으로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스-로마의 정신적 유산의 의미에 대한 무한히 긍정적이지만 매우 일반적인 수준의 지식 이상의 것을 나중에 그에게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스스로 말한 대로 한 가지 점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아데나워가 아비투어 시험을 보던 해에 은퇴하고 그다음 해에 사망한 트리어 출신의 교사인 에른스트 페티트는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1878/79년 가을 학기에 ‘아테네와 아르고스 여행’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예술의 역사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주일날 아데나워와 몇몇 친구들은 페티트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그 교사는 직접 트로이에 가 보았고 최근에 발굴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감탄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헬레니즘 문화와 정신세계의 모습을 펼쳐 보였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예술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지닌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그림과 조각상을 수집하는 데 사용하고 복제물이 잘 나온 월간지도 구독하였다.    

 

아데나워의 예술에 관한 관심은 곧 고대에서 벗어났다. 그는 네덜란드와 후기고딕양식의 예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골동품을 전혀 수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수상으로서 나이가 들었을 무렵에 아테네를 국빈 방문할 때 선물로 받은 작은 조각상을 그의 집무실 서랍장 위에 놓아두기는 했다. 고전주의적 모티브가 있는 유일한 그림은 연방참사회 청사의 집무실 책상 뒤에 의젓한 자리를 차지한 그리스 신전을 그린 유화였다. 아데나워는 그 그림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주제가 아니라 그 멋진 그림을 그린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이렇게 그는 아포스텔른 김나지움 덕분에 1949년 이후에 얼마 안 되는 여유 시간에 즐기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곧 예술품을 제대로 알면서 다룰 줄 알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9년 동안의 학교생활에서 그 이상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는다면 몇 가지 더 지적할 수 있다. 현실 생활에서 거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은 사망할 때가지 독일 시를 읽고 낭송하는 데에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그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날마다 취침 전에 시 한 편 읽기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집단수용소에 있을 때인 1944년에 그는 아이헨도르프의 《백수건달의 생애》라는 시집으로 위로를 삼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 그가 감방에 있을 때는 학교 다닐 때 외운 여러 시를 기억한 것으로 버텼다고도 한다.     

아데나워의 비서 안네리제 포핑가는 아데나워를 기억하며 그 노회한 아데나워가 즐겨 암송하던 많은 밝은 시들과 매우 진중한 시들을 골라서 91번째 생일 기념 특별 시집을 독일 출판사를 통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많은 시는 그가 김나지움을 다닐 때 평생 간직하도록 전해진 것이다. 모아 놓은 시는 그 시대에 걸맞게 양이 풍부하였다. 거의 500페이지가 넘는 양이었다. 가장 선호한 것은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 조국에 관한 시, 발라드, 시상시, 그리고 교훈시였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인은 테오도르 폰타네, 페르디난트 프라이리그라트, 에마뉘엘 가이벨, 괴테, 하이네, 니콜라우스 레나우, 에두아르트 뫼리케,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플라텐,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실러, 테오도르 슈토름, 루드비히 울란트였다.     


이러한 많은 이름과 장르가 아데나워의 지적 재산을 이루었다. <방랑자의 밤의 노래>에 나오는 많은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와 목가적인 노래부터 테오도르 슈토름의 <멀리 떨어져서>에 이르며, 또한 많은 시상시로는 실러의 <희망>과 <종>, 괴테의 <물의 요정의 노래>, 대부분 비극적인 정조의 발라드로는 하이네의 <케벨레를 향한 순례>, <보병>, 괴테의 <툴레의 임금>, 플란텐의 <성유수트의 순례>가 있다. 하이네의 풍자적인 우울한 감상주의는 아데나워에게 냉정하고 반항적인 정조에 맞춘 성찰, 예를 들어 레나우스의 <세 명의 집시>에 분명히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삼중으로 보여주었네,

우리의 인생이 저물 때

인간이 어떻게 삶을 연기처럼 날려버리고 잠으로 때우고 망쳐버렸는지를

그렇게 인간은 삶을 세 번 무시했다네.”     


눈에 뜨이는 점은, 그가 나이가 들고 나서도 여전히 기억하며 애송하는 시 가운데에는 조국에 관한 시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가 어릴 때 넘치도록 읽은 애국주의적 구절을 이제는 읊지 않겠다는 것인가? 민족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어조가 그 당시에 이미 그의 마음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그가 쾰른시장으로 했던 공개 연설을 알고 있다면 그의 입에서 그러한 이야기가 당연히 나와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별쇄본에서 학교 숙제에는 나오지 않은 구절 몇 개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프리드리히 니체의 문장이 있다.    

 

“황새가 울어대며

도시를 향하여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간다.“     

리하르트 데멜, 요제프 바인헤버, 헤르만 헤세의 구절도 있다.     

“안개 속을 방황하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삶이란 고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타인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다.”     


아데나워는 서정시를 즐기는 것은 기억하고 암송하며 자주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젊을 때는 스스로 시를 지었다. 언제 시를 짓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시를 그만 쓴 시기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30대 무렵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가 시를 썼다고 하여도 그것은 서정시인의 어조였을 것이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 서정시인에게 처음 열광했듯이 말이다. 그의 서정적 감각은 그가 직업 세계에 들어서기 전의 정조에 고정되어 남아있다. 표현주의적 서정시인들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휴고 폰 호프만슈탈과 같은 신낭만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고트프리트 벤, 칼 크를로프, 파울 세란 등의 것은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서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던 때 받아들인 특성이 가장 분명하게 지속되어 그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보화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뮌헨에서 대학을 다닐 때 무대 예술, 곧 오페라, 드라마, 코미디를 처음으로 제대로 접하게 되었다. 중등학교 시절에는 그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오페라와 연극 공연을 보러 갈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비투어 시험을 볼 때 그는 그와 그의 20명에 달하는 친구들에게 미리 고지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작문 주제가 제시되었다.     


 ①독일인은 왜 라인강에 자부심을 품어야 하는가?

 ②괴테의 드라마에 나오는 타소와 두 여주인공.

 ③불행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불행에는 세 자녀가 있다. 바로 힘과 경험과 공감이다.     


아데나워는 첫 번째 주제를 시험 문제로 택하지 않았다. 이는 아데나워가 독일민족주의적이고 검사와 같은 냉혹한 엄격함으로 1918년부터 1924년까지 라인란트 정책을 시행했다고 비판하고자 벼르던 역사학자와 출판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 역사학자들과 출판인들이 이른바 제국의 포기를 들먹이며 그 고등학생을 몰아붙일 만한 언급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그가 세 번째 주제를 피해 간 것도 그의 영리함을 증명한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그가 60살이나 70살이 되었을 때야 훨씬 할 말이 많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8살 소년에게는 아니었다.      


둘째 주제를 가지고 그가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었다. 타소라는 인물의 매우 복잡한 심리와 귀족 여인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이해할 정신적 도구를 그 아비투어 응시생은 타고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 경험이 부족하기에 그러한 도구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가 이 주제에 대하여 숙고하기 위하여 수집한 것은, 주제별 아비투어 작문을 요청받은 젊은이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수준으로 그럴듯하게 정리되고 마련되었다. 그렇게 마련된 작문은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 가운데 레오노레 백작 부인은 가장 저속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실 그 성격조차도 나쁘다고 부를만한 수준은 아니다. 아름답고,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그 여인은 삶의 한 가운데에 서서 [상대방을] 쉽게 자기의 편으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여인은 흑심이 있고 오만했다. …”   

  

아비투어 시험을 보는 아데나워의 사유 세계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타소의 성격 분석 부분이다. “타소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시인의 두 가지 주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이는 감정과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그러나 이 소중한 은총 덕분에 그는 삶의 현실을 등지고 고독 속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그의 성격은 훈련과 단련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성격은 ‘세상이라는 폭풍우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의지와 결단력의 희생으로 발휘되는 법이다. 그에게는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확고한 목적을 위한 강력한 추구와 투쟁이 결여되어 있다.”     


아직은 그렇게 남자답다고는 볼 수 없는 이 학생이 쓴 글을 수십 년 후에 들여다본다면 마지막 문장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글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온전히 학생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타소라는 인물은 패망했고 그의 운명은 그를 평생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그에게 남았다. 그는 멋진 풀밭에서 세상을 향하여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시 예술이 그의 곁에서 위로가 되기에 그에게는 여전히 위로될 만한 미래의 전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아데나워의 이러한 심혈을 기울인 문장은 그때까지의 그가 보여준 독일어 실력을 밑돌았다. 아비투어 성적표의 총평은 이를 밝히며 그가 재능을 보인 과목에 [최우수가 아닌] ‘우수’의 성적을 준 이유를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 눈앞에 놓인 주제를 논리적인 사유의 흐름과 바르고 성실한 표현력을 동원하여 글로 전개하는 능력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지녔다. 구두시험에서도 그는 같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독일 최고의 작가들과 그들의 주요 작품들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시험과제의 작문 수준은 단순히 중급 정도이다.”     

그러한 점수를 받은 아데나워는 이전에 8학년 때도 독일어 교사에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훌륭하고 명료한 구성을 보여. 아데나워, 너의 강점은 구성이야!” 유고로 남은 것 가운데 아데나워가 아라비아 숫자나 로마 숫자로 정리하여 고령에 이를 때까지 활기 있는 글씨체로 종이에 적은 연설문이나 회고록의 많은 초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평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명료한 구성을 하는 것은 그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또 다른 과목에서도 지식을 쌓았다. 이 지식은 직업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지만, 그가 비밀로 했던 발명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물리학 과목에서” 그가 아슬아슬하게 ‘우수’의 평점을 받은 근거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여 상당히 만족할만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1890년대 초반에 매우 강조된 이 과목에 그는게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1904년부터 한가한 시간에는 다양한 발명에 몰두하여 결국 황립특허사무소에 직접, 또는 쾰른의 특허 변호사인 륄프 박사를 통하여 긴 편지 왕래를 하였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먼지 발생 제거’, ‘반동 증기기관’, ‘증기와 그밖의 것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개선된 실린더’, - 그가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그리고 강제로 은퇴하게 된 1935년부터 1943년 사이에도 다시 몰두하였던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서 열성을 보인 물리학 수업에서 분명히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무척 진지하게 여긴 발명이지만 모두 [비전문가적인] 자습을 통하여 만든 특징을 보여서, 특히 ‘반동 증기기관’ 같은 경우에는 특허청의 기술자들이 그이 발명품에 나타난 매우 기초적인 논리적 오류들을 끊임없이 지적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폭넓은 기초지식과 물리적-기술적 인과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 당시에 김나지움에서 가르치는 최첨단 과목에 대하여 그는 깊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후기 인생 과정을 살펴볼 때 그가 가장 흥미로워했을 과목인 역사는 어떠했을까? 졸업 성적표에는 역사와 지리를 묶어서 하나의 성적만 나와 있다. ‘우수’라는 성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곧 독일과 프로이센 역사에 관하여 그는 시대와 장소에 따른 인과 관계를 훌륭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지리 과목에서도 그는 요구 수준에 맞갖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간결한 평가로는 핵심적인 것을 알아낼 수 없다. 종종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에서, 또는 특히 삶의 끝자락에서 그가 회고록을 쓸 때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확언은 당연히 매우 조심스럽게 평가해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확신은 그가 받은 교육이 아니라 학생 때의 그와 그의 스승의 정치의식에 더 깊이 관련된다.     


그는 미국인 대화상대에게 독일에도 상당한 민주주의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할 때는 가끔 그 스승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매우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그 스승은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의 학생이었던 아데나워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자기의 공화주의적 경향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상적 공화주의 사상은 그 당시 독일 김나지움의 교사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테오도르 몸센이 공화정 시절의 로마를 글로써 감동적으로 묘사한 것을 알고 있다. 쾰른 자체도 1848년 혁명의 매우 두드러진 전통이 있는 도시이다. 공화주의 사상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 당시 김나지움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관직에 들어서고 나서 원칙적으로 입헌군주제를 근대 독일의 자연스러운 국가 형태로 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비스마르크조차도 1898년에 출판한 [자서전인] 《사상과 기억》에서 말한 대로 “공화국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국가 형태”라는 확신으로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통치자들이 학교를 어느 정도 ‘의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쾰른의 1888년 시의회 선거에서 김나지움 5학년들은 나이에 따라 선거에 참여하여 서로 치고받으며 선거 운동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에는 의견이 훨씬 더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아데나워는 70년 전을 돌아보면서 자기 부친이 열렬한 비스마르크 숭배자였다는 사실을 기꺼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형들은 비스마르크의 내정, 곧 사회주의적 법률과 문화투쟁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투덜거리며 수상에서 물러날 때 아데나워는 겨우 14살이었다. 비스마르크가 프리드리히스루에서 계속 독일 정치에 관여할 때, 그의 형들이 이야기를 주도하였고 가끔 토론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의 외교를 칭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매우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1957년 수상 시절에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가 뛰어난 외교 정치가였으며 형편없는 국내 정치가였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는 제국의 수립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통상적이었다. 곧 사회주의적 법률이 실패작이었다는 것이다. 그 법률만 아니었으면 국내 정치의 발전이 ‘훨씬 건전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아데나워가 문화투쟁을 강력하게 비판한 이유이다. 사실 그 당시 독일 서부지역에서는 이미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었음에도 문화투쟁이 독일에 커다란 자유주의 정당이 들어서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공격을 당한 가톨릭 세력이 중앙당(Zentrum)으로 단합하여 교파 간의 대립을 중재하는 데에 제대로 이바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회고하여 볼 때 전혀 비판의 대상이 안 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이었다. “외교적으로 독일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였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스마르크의 공로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 때문에 그러한 강력한 힘이 안에서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센에 대한, 나중에 매우 심각한 논란거리가 된, 젊은 아데나워의 태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점에 관해서도 전해오는 이야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데나워 동년배들의 그 당시의 분위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언 가운데 하나가 쾰른의 하인리히 레만 교수의 자기 인생에 대한 기억이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1876년에 태어난 레만은 아데나워와 함께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을 다녔다. 다만 그보다 한 학년이 어렸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지냈고 평생 서로를 존중하였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정교수이며 경제법 전문가인 레만은 쾰른 대학 설립 후에 새로 만들어진 법학과 교수로 가장 먼저 초대되었다. 초대 학자이던 크리스티안 에커르트의 후임으로 그는 1921/22년 가을 학기에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레만은 그의 아버지가 고등법원 판사로 쾰른에 부임하였을 때인 1891년 처음으로 쾰른을 방문하였다. 김나지움 6학년으로 전학하면서 그는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된다. “내가 김나지움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은 대부분이 독실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비스마르크와 독일이 프로이센에 속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학교의 역사 수업 시간에 토론이 이어졌다. 이 토론에서는 오노 클롭과 다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내세워 프리드리히 대제를 이상화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아데나워가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레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쾰른에서 태어난 가톨릭 가정 출신의 많은 학교 친구는 그 당시 아직은 어느 정도 프로이센 친화적인 정서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독일 종족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려주었다. 나는 아직도 내 학교 친구가 말한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우리 라인란트 사람들이 진짜 독일 사람이다.’ 프로이센인들은 오보트리트족, 벤데족, 슬라브족과 같은 민족으로, 그들은 약탈과 폭력으로 그 국가를 훔쳤다.” 게다가 레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프로이센을 반대하는 정서는 라인란트에서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서 문화투쟁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면서 중앙당(Zentrum)은 입법 기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어 비스마르크가 끼워 맞춘 신생 황제국에 속하는 것에서 누리는 경제적 이익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라인란트 사람들은 프로이센과 가톨릭에 친절하지 않은 문화정책에 대한 불신을 결코 거두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아데나워 또한 ‘매우 독실한 가톨릭 가정’ 출신의 친구 무리에 속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의 생각을 적당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서 시도되었던 가톨릭 정신과 프로이센 정신의 공식적인 공생에는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프로이센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학생 시절 아데나워가 제국의 수립이나 프로이센-독일제국 자체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1866년 이후 가톨릭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던, 작은 독일제국 수립에 대한 보편주의-오스트리아 친화적 파벌이 하던 비판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문화적인 거부, 곧 개신교·프로이센적 문화정책에 대한 유명한 비판과 사회주의적 입법에 대한 젊은이다운 반항은 어느 정도 확실한 추측이 가능하다. 학생 시절 아데나워의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감과 제국에 대한 불확실한 충성에 관련된 역사 편찬의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 안 되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그 당시에 쾨니히그래츠와 그라베로테의 원로원에서 강력한 독일제국의 수립에 대한 의기양양한 열광의 도가니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좀 더 설득력 있다. 그러한 열광은 당시 독일의 모든 주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라인란트 지역의 독일인들이 이 제국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바람은 이에 모순되지 않는다.     


아데나워와 그 당시 김나지움의 분위기에 대하여 전해져 오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바탕으로 상상해본다면, 어쩌면 매우 중요한 사실인 아데나워와 그의 친구들이 가장 조용한 중간 세대라는 것이 잊지 말아야 한다! 3월 혁명 이전과 1848년 혁명기의 바람은 이미 지나갔다. 제국이 설립된 지도 거의 20년이 흐른 뒤였다. 니체라는 인물은 내부자들에게만 이제 막 알려지든 기밀 사항이던 때이다. 반더포겔 운동*도 시작되던 빌헬름 후기 시대의 풍요롭지만, 긴장감 넘치는 문화생활은 아직 몇 년 후에나 시작될 일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위험과 몰락을 느끼고 있던 젊은 지식인들은 기반이 확고한 아포스텔른 김나지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개인적 독서도 당시의 청년 소설가들의 것과 유명한 저자들의 것에 머물렀다. 여기에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험소설가로 여기던 루디야드 키플링과 조지프 콘라드가 있다.     


* 반더포겔운동[Wandervogelbewegung: 역자주 - 1896년 시작된 독일 청년들의 조국과 자연에 대한 사랑 운동]     


특이하게도 아데나워가 다니던 김나지움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을 가르쳤다. 일주일에 14시간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워야 했고 아비투어 시험에서 독일어를 라틴어로 번역해야 했다. “우리는 키케로가 원고라기보다는 피고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어 회화 실력은 여기에서 키우지 못했고 영어는 아예 시간표에도 없었다. 아데나워가 외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경력을 쌓으면서 그런 나라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은 것은 평생 약점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의 동년배들 가운데 아데나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슈트레세만의 프랑스어 실력은 아데나워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자기의 약점을 잘 알았고 통역관 없이는 절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현실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자녀들의 유학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개인비서였던 안네리제 포핑가에게 몇 시간씩 영어 회화를 공부했다. 이는 영국 국빈방문 때 최소한 몇 마디라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이가 든 다음에 아데나워 수상은 먼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어느 정도 이국에 대한 동경을 지녔던 사실을 기억하였다. 그는 17~18세 무렵에 남미, 특히 “대규모의 독일 식민지”가 있어서 “기차 차장은 오직 독일어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 브라질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며 그의 생각은 잠시나마 그곳으로 떠나곤 했다. 이때부터 그는 식민지 개척이라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가 나이가 들고 나서 종종 언급한, 그가 [과거 한 때] 브라질 이민에 몰두하게 된 동기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곧 그곳에서 당시에 삶을 개척할 수가 있었으며 또한 유능한 사람은 외국에서 독일 사회에 특징적인 신분 차별로 억압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전제적으로 볼 때 그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마차와 말이 끄는 전차가 전부였던 비교적 조용한 도시에서 매우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냈다. 1894년 3월 4일 졸업장을 쥔 젊은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가 과거를 회고하며 확인한 것을 되풀이 하였다. “우리의 국가 교육의 평범한 열매가 되어 나는 학교를 떠난다.” 졸업장은 그가 전체적으로 볼 때 훌륭한 학생이었음을 가리킨다. 대부분 성적은 ‘우수’였고 튜링겐 음악 가문의 아들이자 손자인 그는 음악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 ‘태도와 성실’ 항목에 벨텐과 뮐러 교사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다.“ 그의 태도에는 늘 질서가 잡혀 있었고 흠결이 없었다. 그는 모든 수업 내용을 열심히 공부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왕립 교육청 교육감인 발드아이어의 확인을 거친 것이다.   

   

아데나워는 두 명의 형이 모두 대학생이었고 대부 톤거가 남긴 유산은 거의 다 써버렸으니 은행에서 실습생 교육을 받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채 몇 주 걸리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직접 설명한 대로, 그의 부친은 결국 몇 년 더 고생하더라도 아데나워가 법학을 공부하도록 허락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한 소망은 사실 김나지움 졸업반일 때부터 지닌 것이었다. 재정 지원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아비투어 시험 위원회는 이미 아데나워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나서 “법학 공부에 매진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프라이부르크, 뮌헨, 본 대학 시절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하필 먼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로 갔다가 다시 뮌헨으로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쾰른 사람들이 지닌 본능적인 집단의식 때문이다. 아데나워보다 1년 뒤에 아비투어 시험을 통과한 동년배 친구인 하인리히 레만은 아데나워의 행적을 따라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쾰른의 다른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 시험을 통과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는 1895년 4월 중순에 아름다운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로 갔다. 그 당시 라인란트 출신이 첫 학기를 그 학교에서 보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특히 젊은 법학도가 그곳에 떼 지어서 모였기에 첫 학기 강의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다음 학기 강의는 바덴 사람들만 들었다.”     


아데나워가 자기의 학업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레만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가 아데나워와 같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빌헬름 시대가 열린 첫해에 법관, 변호사, 학자, 관리의 직업을 가지고자 준비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계절학기가 있었다. “수강 신청한 학생의 숫자가 실제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 보다 훨씬 많았다. 강의에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환상적인 주변 경치, 가까이 있는 슈바르츠발트, 그리고 횔렌탈과 펠트베르크가 있는 아름다운 드라이삼슈타트의 유혹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대부분 학생에게 학문 연구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학생 단체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유능한 학생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레만은, 그보다 1년 먼저 아데나워가 한 대로 가톨릭학생회 브리스고비아에 가입하였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브리스고비아에 가입할 결심을 한 것을 보고서 나 자신 또한 그들을 따라했다. 비록 나는 유니폼을 입고 다니면서 과장된 학생 관례를 따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브리스고비아 회원들이 술집에 모여 하는 일은 견딜만한 수준이었고, 일부 개신교 학생들도 초청 회원으로 함께한 이 단체는 주로 강제성이 없는 친교 모임과 산책을 하였다. 이 단체에 약 30~40명의 신입회원이 가입하였기에 그 단체 안에서 서로 맘이 맞는 학생들끼리 작은 동아리를 이루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하고 저녁에는 기숙사, 술집, 또는 경치가 빼어난 슐로쓰베르크에 있는  다틀러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 쾰른 친구들은 친밀한 단체를 이루어 단합하였고 여기에 다른 단체 회원이나 연합회의 초청 회원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매우 정확한 이 이야기를 1850년대 중반 아데나워의 몇몇 친구들이 전기 작가인 파울 바이마르에게 전해준 것에 비추어 보면 그 첫 학기에 대한 매우 정확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가톨릭학생회 브리스고비아의 사회적 배경은 아데나워에게 어느 정도 맞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가정이나 소상인 출신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들 가운데 특히 친해지게 된 사람은 베스트팔렌의 농부 집안 출신인 라이문트 슐뤼터였다. 돈 많은 멋쟁이들도 이 무리에 있었는데 개신교 시민계층은 대부분 학생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도 그의 근본 원칙인 노력과 절약의 정신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두 정신을 결합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슈바르츠발트에서 산책을 길게 하고 저녁에는 펠트베르크의 술집을 찾았다. 주일에는 상트블라시엔과 티티제로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횔렌탈을 들렀다. 그러고 나서도 월요일 아침에는 정시에 수업에 들어갔다. 1904년 2월 신혼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운 추억에 젖어 이미 10년이 흘러버린 다음에 목가적인 여름 풍경이 있는 그 곳을 첫째 아내인 엠마 바이어와 함께 방문하였다. 분명히 그에게 좋은 기억이 남은 곳이었을 것이다. 대도시의 복잡한 일들을 잊고 [프라이부르크 시내의 유명한 개천인] ‘베흘레’가 흐르는 거리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대성당, 시청, 마르틴스교회, 십자로. 아데나워는 이러한 아늑한 것들로 둘러싸이고 조화로운 풍경 속에 놓인 시골스러운 보석에 그의 학생 시절 선후배 세대와 마찬가지로 매료되었다.  

   

바덴 지방의 슈바르츠발트는 아데나워에게 천국 같은 휴양지였다. 사람들은 그가 1920년대 초반에 호헨뫼르의 발치에 있는 슈바이그마트에서 그렇게 느끼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북부 슈바르츠발트도 찾았다. 쾰른의 행정 구역에서 쫓겨난 뒤의 힘든 날들을 보내며 그는 1935년 10월 처음으로 프로이덴슈타트에 있는 상트엘리사베트 온천장을 찾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1936년 6월에도 그곳을 찾았다. 두 차례 모두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가운데 그는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그는 친척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날씨가 계속 안 좋았어. 프로이덴슈타트가 어딘 있는지 알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거야.” 수상 재임기인 1950년대 중반에 그는 뷜러 회헤에 가끔 들러 머물렀다. 그리고 1954년 8월 30일 이곳에 머물던 때 그는 파리 국제회의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1894년 여름에는 여전히 독일 황제국이 건재했다. 그렇게 아데나워와 그의 많은 동년배는 그때를 참 좋은 시절로 여겼던 것을 기억한다. 그 당시 [나라가]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시민계층의 학생들 가운데 아주 민감한 이들만이 간혹 불안한 신호를 느꼈을 뿐이다. 레만은 릴스 교수의 ‘그 당시 불타는 유성처럼 등장한 니체에 관한’ 강의를 듣던 청중을 떠올린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세기말적인 정신적 동요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도 않고 인정되지도 않는다.   

  

이 젊은 아데나워는 겨우 18세였다. 그의 것으로 알려진 많은 사진이 담긴 증명서를 보면 그의 별명이 ‘토니’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 첫 학기 사진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아직 어설퍼 보였다. 그 사진에서 유약하고 갸름한 얼굴, 당돌한 콧수염, 약간 꿈을 꾸듯이 사방을 둘러보는 눈, 섬세한 손가락들을 엿볼 수 있다. 5년 후에 한 사법관 시보에게서 분명히 드러나고, 그 이후 줄곧 그의 외모를 지배했던 의지와 강인함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맘대로 해도 되는 젊은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얌전해 보였다. 그 당시의 아데나워를 잘 알고 있던 인물로 1950년대에 기자와 인터뷰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다른 사람과 떨어져 사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아직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대기만성형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부친과 쾰른의 재단에서 매달 주는 90마르크의 학비로 엄청난 절약 생활을 해야 했기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사용한 대학생 가방은 모친이 방수포로 손수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196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시절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조심스럽게 사무실 서랍장으로 가서 이 회색빛의 낡고 때가 타보이는 가방을 꺼내들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쾰른의 부모님 집이 대학생인 아데나워에게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한 학기를 보낸 후에 1894년 8월 말에 쾰른에서 거행된 제41차 가톨릭의 날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남은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뮌헨에서 두 학기를 보냈다. 이렇게 학교를 옮긴 것도 쾰른의 미래의 법률가들을 위하여 정해진 길을 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당시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나의 친구들을 따라서 2학기와 3학기를 뮌헨에서 보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도 필수 과목들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공부 이외의 다른 것들이 그를 더 매료시킨 것으로 보인다. 곧 오페라, 콘서트, 피나코테크 미술관, 그리고 뮌헨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여행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뮌헨에서 대학을 다니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본에 있는 파우크대학교에서 법학과 종신 교수직에 오르게 된 레만은 뮌헨에서 보낸 학기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뮌헨의 극장가가 그 당시에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궁정극장 총감독 폰 포사르트와 헤르만 레비는 회전 무대를 설치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쳄발로 앞에 앉아서 왼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오른손으로는 지휘봉을 휘둘렀다. <리골레토>,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가 늘 상연되었다.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언제든 벨칸토 창법의 오페라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바그너에 대한 열광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유럽을 휩쓸던 때였다. 그런데 입장권 가격은 엄청나게 저렴하였다. 대학생은 입석 자리에 겨우 80페니만 내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1년 늦게 입학한 쾰른 동향 친구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이 뮌헨에서 본 공연에 대하여 평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쾰른에 있을 때 로칭의 <러시아 황제와 목수>라는 제목의 오페라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이제 뮌헨에서 음악을 즐기는 소양을 키우게 된 것이다. 이 덕분에 그는 나중에 쾰른시장이 되어서도 음악회와 오페라 공연을 자주 다니게 되었다. 수상 임기 말년에 오페라와 음악회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가능치 않게 되자 그는 저녁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음반이나 테이프로 들었다. 서정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악 분야에서도 그의 취향은 보수적이었다. 그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사랑했다.     


아데나워는 뮌헨에서 음악만이 아니라 미술에 매료되었다. 후일 아데나워는 일주일에 최소한 3~4회는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을 찾아 그림을 찬찬히 감상하며 그의 평생 남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박물관을 자주 방문했다고 말한 것이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시 한번 레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정확히 기억한다. “강의가 없거나 빼먹는 날 오전에 우리는 예술품을 모아 놓은 곳, 특히 피나코테크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 학교 강의를 듣고 나서 더 공부하기보다는 삶을 즐겼다. 다만 높은 수준의 문화를 즐겼다. 우리의 청춘을 저급하게 술을 퍼마시거나 성적인 쾌락에 소모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인류의 지고한 경지를 거닐며 즐겼다.”     


그 당시 뮌헨의 생활비가 아직은 저렴하였기에 알뜰하게 살면 한 달 생활비 90마르크로도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우연히도 하인리히 레만은 그 당시 자신이 얼마를 써야 했는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조식 포함한 기숙사비는 월 27마르크였다. 학생 식당 <블뤼테>에서 정기권을 사서 먹는 85페니짜리 점심에는 수프, 2가지 코스 메뉴, 디저트가 나왔다. 여기에 원하는 경우 맥주 500cc에 11페니, 팁 4페니를 추가하면 총 1마르크가 되었다.     


아데나워가 이제 막 인생의 맛을 보기 시작할 때 장거리나 단거리 여행을 위하여 몇 마르크씩 저축을 할 수 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가 말하기를, 주말에 바이에른의 호수나 알프스의 산을 찾거나 방학이 되면 친한 친구인 라이문트 슐뤼터와 함께 보헤미아, 스위스, 이탈리아를 찾았다. 그 당시에는 4등석이 있었고 많이 걸으면서 필요한 경우 기차역의 대기실이나 어느 집의 헛간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프라이부르크에서 첫 학기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를 잘 아는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돈이 다 떨어지면 가끔 굶기도 하였다. 이 당시를 회상하며 아데나워가 한 이야기 가운데 아헨제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두 젊은이는 이탈리아 여행 후에 주머니에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신부에게 돈을 얻어낼 작정을 했다. 그런데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다가 그들은 갑자기 호수면 가까이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몇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물고기들은 밤에 헤엄치다가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호숫가를 기어 내려가 아직 싱싱한 그 생선들을 잡아 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 가서 구워달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매우 즐거워 보인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였다. 그리고 뮌헨에서 보낸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여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강의에는 열심히 참여하였다. 예를 들자면 루요 브렌타노의 국가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때 알게 된 지방에서 그는 나중에도 휴가를 보냈다. 이후로 슈바르츠발트 이외에 스위스가 그가 좋아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에 그는 아내와 함께 두 차례 보헤미아를 방문하였다. 나중에 그의 인생 끄트머리에 이르러 북부 이탈리아는 그에게 거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가 뮌헨에 있을 때 이탈리아로 2차례 여행을 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유품에는 베니스, 인스부르크, 아이사크탈에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다. 그 사진 뒷면에는 그가 쓴 글이 남아있다. ‘성령강림절 여행 - 베니스’, ‘1895년 뮌헨 여름학기’ 그 가운데 한장에는 산마르코 성당의 종탑도 보인다. 그 사진 뒷면에는 ‘아데나워 찍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중에 그는 6주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한 이야기도 하였다. 이때도 친구인 슐뤼터와 함께했다. 아데나워는 그를 ‘나의 유일한 진짜 친구’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들은 주로 예술사적인 매력이 있는 베니스, 라베나, 아시시, 플로렌스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는 후유증이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부친이 매우 화가 났던 것이다. 그는 아들이 공부에 쏟아야 하는 열정을 뮌헨의 dolce vita, 곧 즐기는 일에 낭비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풀이 죽은 채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그를 다시 감시할 수 있는 지역으로 학교를 빨리 옮겨야 했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 학기는 프로이센의 대학교에서 보내야만 하는 것도 있었다. 그는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하고 학업도 최대한 빨리 6학기 안에 마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일단 본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는 잠시 카세르넨슈트라쎄 40번지에 있는 빵 가게를 하는 친척 집에 얹혀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그의 가족사가 시작된 곳이었다. 그는 여기에서도 다시 ‘보너 아르미니아’라는 이름의 가톨릭 청년단체에 가입하였다. 아데나워 이전 쾰른시장이었던 막스 발라프는 아데나워보다 18년 앞서 이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신입회원과 기존 회원을 합쳐서 6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여러 학과에 소속된 학생들로 대부분이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출신이었다.  많은 가톨릭 정치가나 황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위 관리들은 이 ‘보너 아르미니아’의 원로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사가 제국 수상이었던 빌헬름 마르크스다. 그는 이 단체에서 아데나워보다 10년 앞서 활동하였다. ‘보너 아르미나아’ 출신만이 미래의 명사가 된 것은 아니다. 1950년대의 또 다른 명사였던 로베르 쉬망은 그보다 10년 앞서 ‘우니타스’에서 활동하였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보너 아르미니아’의 원로들은 쾰른에 있는 ‘연합회 회관’에서 계속 긴밀한 접촉을 하며 젊은 회원들이 쾰른 정부, 고등법원, 학교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길을 닦아 주었다.     


프라이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본은 낭만적인 학생회 생활의 아성이었다. 분명히 여기에서는 유명한 학생회가 주도했지만, 가톨릭학생회에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알아서 ‘귀여운 안나’*를 찾아 바트고데스베르크로 가거나 샤움부르거호프, 드라켄펠스, 롤랑스보겐으로 놀러갔다. 아데나워는 학창 시절에 잠을 쫓기 위하여 당시 유행대로 밤에 차가운 물통에서 족욕을 한 것에서 자기 일에 대한 강철 같은 열정이 연유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의 전세대나 후세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겨 이야기하였다. 6학기의 기본 학점을 이수한 다음에 사법관 시보 시험을 ‘우수’라는 성적으로 합격한 것으로 볼 때 그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노력하라, 노력하라, 노력하라’를 노래하지 않을 때는 메쓰도르프에서 보낸 휴가 때부터 알게 된 지역을 친구들과 함께 주일마다 돌아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그가 쾰른시장 시절에 한 말을 들어보면 그는 브라이베르크 산자락이나 뢴도르프 또는 호네프에 자기 별장을 짓고 싶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지역을 산책하면서 떠오른 생각일 것이다.   

  

* ‘귀여운 안나’[Ännchen, 역자주 – 1860년 생으로 알려진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바트 고데스부르크에 살던 과부. 학생들이 즐겨 부른 노래를 모은 <귀여운안나 노래집>(Ännchen-Liederbuchs)이라는 책도 출간 함]     


어찌 되었든 그당시 다른 모든 학생과 마찬가지로 멋지고 재미있게 시작되었던 아데나워의 학창 시절은 본으로 전학하면서 하루아침에 그저 돈벌이를 위한 공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당시 본의 법조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에른스트 치텔만이었다. 이른바 지상의 강자로 알려진 법률가로 형법과 소송법을 가르친 헤르만 소이퍼르트나 상법 전문의 콘라드 코사크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로마법 학자인 율리우스 바론에 관하여, 그가 비록 유대인이었음에도 베를린의 사법시험 과외교사로 헤르베르트 본 비스마르크의 사법시험 준비를 도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본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 대학의 법학과는 그의 교수직 임명에 반대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인기 있는 간추린 법령 교재를 저술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이 그 책으로 사법관 시보 시험 준비를 할 정도였다.     


우리는 아데나워의 취향이나 성향을 알지 못하며 그가 당시에 대부분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법시험 과외교사의 도움으로 시험을 볼 수준에 이른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특정한 학식 있는 교사나 학생의 영향은 찾아 볼 수 없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그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경제 정책 문제로] 대립했을 때 자기는 뮌헨 대학에서 루이오 본 브렌타노의 국가경제학 강의를 두 학기 들은 것으로 충분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두 학기의 공부는 [경제학의] 학문적 흐름과 그 학문의 내적인 논쟁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에는 너무 짧은 것이었다.     


쾰른의 법조계     


아데나워는 이제 21살로 아직 다 자란 어른이 아니었다. 사법관 시보로서 4년 반에 걸친 교육이 그때 막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급여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였다. 사법관 시보 업무 허가를 위한 구직 청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지원 서약서가 첨부되었다. “본인은 본인의 아들 콘라드 아데나워의 5년에 걸친 법률가 교육에서 그의 품위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것을 서약합니다. 쾰른, 1897년 5월 24일. 아데나워, 관청 공무원.”     

 

이 당시 부친의 급여 수준에 관한 상세한 문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그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공무원의 연봉은 3,600마르크였다. 여기에 297마르크의 주택보조금이 추가로 나왔다. 이 경우 월급은 약 325마르크 정도 된다. 이때 그의 아들은 분명히 타지에서 공부하던 시절처럼 매달 90마르크만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숫자는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를 잘 보여준다. 다행히도 형들의 교육 기간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둘째 형인 한스는 1897년 8월 1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심리적으로 부모와 관계가 분명히 쉬운 것은 아니었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아데나워는 상당히 주체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다시 부모에 의존하는 것에 적응하고 이에 감사해야 했다. 이 상황이 그에게 어떤 어려움을 초래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 경험이 이에 대하여 말해준다. 경제적으로 계속 의존해야 하는 상황만이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도 학생 시절이 여러 가지 면에서 쉬웠다. 아데나워는 프라이부르크나 뮌헨, 또는 본에서는 명망 있고 잘사는 집안 출신의 친구들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별 볼일없는 집안 출신의 궁핍한 하위 공무원의 돈 한 푼 없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다. 그는 많은 부유한 시민계층이나 교양 있는 시민계층 가정 출신의 동년배 사법관 시보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생애를 다 산 다음에 비로소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고 나서야 그는 그 시절에 대하여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며 일종의 사회적인 계층 하락에 대하여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관직 후보자로서 그는 예를 들어 그의 대학 동창들은 잘 다니던 모든 쾰른 집안에 단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 덧붙여 말하기를 그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자기 가정은 한 번도 사회적으로 높이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 이미 잘 알려진 부친과는 다른 인물이 되려는 ‘젊은 아데나워 선생님’에게 그러한 사실이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하위계층에 머물다가 고속 출세를 한 끝에 정상의 지위에 오른 이 사람이 그의 자만심을 주변에서 느끼도록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이 느낀 것으로 여겨지는 ‘고속 출세자의 교만’은 그가 사법관 시보와 관직 후보자로서 견뎌내야 했던 그 힘든 시절의 여파이다. 이러한 말이 그를 오래전부터 평가해 온 의장들, 고등검사장들, 법관들이 자주 그의 ‘대단한 성실성’, ‘직무에 대한 열성’, ‘사려 깊음’, ‘겸손’, ‘정확성’, ‘세련됨’을 칭찬한 것을 조롱하고자 하는 뜻은 없지만 조금은 깎아 내리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사실 그러한 덕성은 그의 직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아데나워와 같은 젊은이에게는 특히 필요한 것이었기도 하다.     


왕립쾰른지방법원에 근무할 때 거의 관청식 서체로 기록된 190면에 달하는 그의 인사기록에는 그가 지나온 단계들이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단계별로 상급자가 기록한 업무 평가, 휴가원, 병가원, 규정된 보고서, 증명서도 들어 있다.     


사법시험을 ‘우수’의 성적으로 통과한 이 법관 후보자는 1897년 5월 28일 제1시민법정 공개회의에서 선서하게 된다. 선서 양식은 다음과 같다. “저 콘라드 아데나워는 자비로우신 주군이신 프로이센의 전하께 겸손하게 복종하며 충성을 다하고 직무로 주어진 의무를 최선의 의지와 양심을 다하여 올바르게 수행하며 헌법을 양심적으로 지킬 것을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하오니 하느님께서는 저를 지켜주소서.” 쾰른에서의 첫 양성과정은 전통적으로 벤스베르크 지방법원에서 이루어진다. 아데나워는 그곳에서 9개월 동안 직무를 수행하면서 “법관과 법원 서기의 업무를 익혔다.” 그러면서 “훌륭한 지식, 빠른 이해력, 실무적인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 다음으로 쾰른 지방법원에서 12개월 동안 예비업무가 이어진다. 첫 6주 동안 이 사법관 시보는 취조국에서 조서 작성자로서 [범인을] 취조하였다. 그다음에는 제1형사소송법정에서 1개월, 제2민사소송법정에서 5개월, 제4민사소송법정에서 2개월, 제1상사소송법정에서 2개월 근무하였다. 법정이 열리지 않는 날에는 오후에 법원 서기로 일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검찰에서 4개월, 법률고문인 슈니빈트아래에서 반년 동안 변호사 업무 과정을 거쳤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모든 관계에서 매우 좋은 성적을 주었다. 왕립 법무관 법률고문인 쉐퍼 3세 또한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착오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전체 양성과정 동안에 서명할 때는 아데나워 2세로 표기하였다!) 1900년 1월 3일에 그는 쾰른 지방법원에서 9개월 동안 ‘추가 예비 직무’를 수행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1900년 10~11월에 다시 한번, 분명히 그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 슈니빈트 검사 곁에서 일하였다. 1900년 12월 1일부터 그는 “왕립쾰른고등법원 법원장 각하께” “충성을 다하며, 저의 2차 국가시험의 허가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다.   

  

베를린의 프로이센 법무부로 송부된 총 6개의 보고서가 첨부된 증명서는 흠결이 없어 보였다. 각각의 과정에 대한 평가는 1900년 9월 12일 자 ‘임시 성적증명서’에 간결하게 정리되어 나와 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에 지금까지의 예비업무의 결과는 ‘우수’의 성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사법관 시보의 업무적, 업무외적 태도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럽다.” 이제 그 증명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비슷한 방식의 숨겨진 암시가 들어 있었다. 이는 알 만한 사람이라면 의도된 정보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901년 5월 31일 자 고등법원장의 서한에 있는 손으로 쓴 비고란에 대해서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 편지로 아데나워는 2차 사법시험에 지원하게 되고 필요한 서류를 송부하게 된다. 비고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법관 시보는 국민군에 편입되었으나 복무하지 않았다.” 복무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당시 프로이센 행정부에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은 아데나워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인 아데나워가 이 점에서 열외가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아데나워는 분명히 가족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형 아우구스트는 예비역 장교였다.     


왜 그가 복무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후일 건강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서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898년 6월 27일 사법관 시보 콘라드 아데나워는 쾰른시 징집구역 제1국민군 화기부대 BIII의 제130번으로 편제되었다. 이보다 1년 전 6월 8일 아데나워는 7월 15일부터 9월 1일까지 그리고 이어서 추가로 8일 동안 ‘첨부된 의사 소견서를 근거로’ 휴가를 신청하였다. 이 신청은 받아들여지고 이 기간도 예비 직무 기간에 산입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켈러 박사는 그 소견서에서 “환자는 최근에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며 완치에는 최소한 6주간 매우 조용한 시골에서 휴양이 필요함.”이라고 썼다. 나중에 가족들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대학 공부를 마치고 난 직후 그의 폐에 결핵의 흔적으로 보이는 검은 점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소견서에는 심각해 보이지 않는 문장으로 표현되었다.   

   

그다음 해에 아데나워는 다른 의사의 소견서를 제출하였다. 그 소견서 또한 ‘만성 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최소한 한 달간의 요양 휴가를 처방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98년 6월 3일부터 7월 10일까지 그리고 이어서 8월 15일부터 9월 11일까지 병가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이 기간에 건강 문제는 결국 해결되었다. 그다음 해애 그는 단순히 정기적인 연차 휴양을 위한 휴가를 얻었을 뿐이다. 근무 증명서에 병가로 기록된, 2차 사법시험을 앞둔 검사직 훈련 단계 끝 무렵인 1899년 6월에 낸 1개월 휴가는 관청 공무원의 착오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학 시절과 그 이후에도 다시 평균 이상의 걷기 능력을 지닌 아데나워가 정기적으로 기관지에 문제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군복무 면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를린 법무부 시험위원회가 ‘복무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좋지 않게 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눈에 뜨이는 것은 지금까지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왔던 이 사법관 시보가 1901년 10월 베를린에서 그가 처음 치른 법관 후보자 시험에서는 겨우 ‘보통’의 점수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뛰어나지 않은 성적에 대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수는 거의 재난에 가깝다. 고등법원의 판사직에 들기 위해서는 더 나은 시험 성적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법관 후보자가 되어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다만 급여는 여전히 지급되지 않았다. 1901년 10월 19일 그는 임명장을 받았지만 법무장관은 쾰른 고등법원장에게 아데나워를 지방법원에서 무급으로 근무하도록 조치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명령에 따라 1902년 1월 중순 그는 투병 중인 검사 박마이스터 박사를 대신하여 임시로 근무하게 되었다. 정확히 2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처음으로 근소한 급여를 받게 되었다. 규정에 따른 일급이었다.      


여기에서도 그는 습관대로 다시 ‘매우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그의 상사는 “법관 후보자 아데나워 씨는 검찰업무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1902년 3월 24일자 평가서는 그의 업무 실적이 ‘매우 우수’하여 정식 검사에 속하는 권한을 이제 부여할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권한을 검사장의 5월 6일자 조치로 부여받았다, 물론 이 인사 조처에는 번복될 수 있다는 통상적인 단서 조항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단계를 거칠 때마다 매우 힘들게 나아가야 했다. 판사직 임기는 정기적으로 연장되었다. 1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검찰의 별정직 시보로 일하며 200마르크의 월급을 받았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검찰에서 일하던 시절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며 그는 그 일이 맘에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월급이 200마르크이고 직업적 전망이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가 검찰에서 일한 경험에 대한 기억은 60년이 지난 다음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된다. 그가 이른바 ‘슈피겔지 사건’ 때 격노하여 연방법무부 장관 슈탐베르거에게 지시하여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을 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그 책임을 물으라고 했지만 그 자신도 법관이 작성한 체포영장 없이는 그 조치가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는 있었다. “이는 예전 쾰른 검찰에서는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1903년 가을에 아데나워는 사법부의 통상적인 승진 과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병에 걸린 헤르만 카우센 법률고문관의 대리 근무를 위하여 같은 해 10월 11일부터 1년간 휴직 조처가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조처로 그는 고등법원의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법관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매우 놀라운 속도로 쾰른 행정부의 정상에 오르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그 당시에 전혀 알지 못하였다. 1년간의 휴직 이후 다시 1년 연장되어 총 2년 동안 법률고문으로 일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리 근무가 1905년 10월 10일 종료되자 그는 처음으로 4주간의 요양 휴가를 떠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당뇨병이 있어 4~6주의 요양 휴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아무런 효과적인 약물이 발견되지 않았던 이 질병을 그 주에 처음 발견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당뇨병은 거의 15년 동안 아데나워를 힘들게 하였다. 쾰른시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때도 그는 당뇨병 때문에 식생활을 철저히 절제해야 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이야기는 그의 비서였던 안네리제 포핑가가 이 연로한 인사에 관하여 전해준 것이다. 비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많은 공식 만찬에 참가해야 하여 섭생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식사하고 나서는 한 잔의 따뜻한 물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 넣으셨죠.”    

 

결국 병가를 냈다. 그러나 지방법원장의 판단으로는 아데나워가 곧 직무에 복귀할 것으로 보였다. 1905년 10월 6일에 아데나워는 그의 앞에 규정대로 나타나 전임자의 임기가 만료된 켐펜의 공증관 자리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1905년 12월 1일자로 아데나워는 쾰른 지방법원 판사인 요헨 박사의 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1906년 4월 1일 쾰른시의 유급 시의원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마지막 몇 개월간을 보조 판사로서 프로이센 법조계에서 보냈다. 이렇게 왕립쾰른지방법원에서 보낸 법관이 되기 위한 매우 힘든 프로이센의 사법관 시보 양성과정을 4년 반 만에 제대로 마무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다시 4년 반 동안 다양한 관직 후보자 직무를 수행하였다. 마침내 쾰른 행정부로 돌아오게 되면서 그는 시청의 무사안일주의로 기우는 모든 부하에게 무서운 존재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고 쫀쫀하게 구는 행정 법률가, 규정된 업무 절차와 책임 분담을 염두에 두고 자기 자신을 재촉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며 예절을 중시하고,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강직한 프로이센 고위 관리의 교과서적인 전형이 되었다.    

 

훗날 쾰른시장과 연방 수상이 된 아데나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원숙한 법률 전문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직업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모든 개별 사안이 먼저 사실관계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검토하고 상술하고 나서야 기존의 법규정과 방법에 비추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는 개념적 정확성, 세심한 논증 방식, 자기 해결 방식의 설득력 있는 제시 능력을 내면화하였고 사생활에서나 공생활에서나 논쟁과 논란이 불평을 일으키는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이제 사람을 더 잘 파악하고 평가할 줄도 알았다. 곧 개성이 있는 상사나 동료들, 소송 당사자들, 기결수나 체포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거짓과 진실에 대한 육감도 발달하였는데, 후일에 자주 표현한 대로 이를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줄도 알았다. 곧 세상에는 진실, 참된 진실, 명백한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과 논쟁은 소송 절차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도 경험하였다. 곧 소송 안건을 긴 시각에서 바르게 다루고 상상력을 동원하며 잘 생각하여, 한 사건을 2년이나 3년, 또는 4년에 걸쳐 소송 절차의 심급에 따라 키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숨겨진 냉철함, 주도면밀함, 교활함, 다양한 해결책을 다루기와 같은. 후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아데나워식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의 요소들 가운데 법률가적 사유의 특성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만한 요소는 거의 없다.     


재능은 조용히 길러진다.”     


아데나워가 9년에 걸쳐 전혀 눈에 뜨이지 않는 오히려 평범한, 쾰른에서의 사법행정의 인생 여정을 걷는 동안에 그의 개인 생활과 내적 삶은 어떠하였는가? 우리는 그것을 모두 다 살펴볼 수는 없다. 아데나워 서신의 대부분은 나치 비밀경찰이 1944년 8월에 압류하여 소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부는 1900년대 중반의 불길을 견뎌내어, 알려진 것과 다른 전혀 새로운 아데나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곧 먼저 쾰른, 그리고 독일, 끝으로 온 세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매우 탁월하고 권위의식이 넘치고 냉소적인 타고난 정치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매우 비정치적인 것으로 인성 발달에 분명히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아데나워 스스로 말한 대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밑줄을 쳐가며 읽은 칼 힐티의 책들이 있다. 또한 우연히 남겨지게 된 편지들과 편지 초안들도 있다. 이 편지들은 젊은 아데나워가 겔센키르헨의 시의원 자리를 얻기 위하여 어떻게 동창 친구와 접촉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준다.    

 

얼마 안 되는 이 자료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채 정리가 안 된 두꺼운 서류 묶음이다. 한 묶음의 문서들은 그의 물리-기술 문제를 다루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그의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다. 또 하나는 아데나워가 1899년 8월에서 1900년 6월까지 쓴 시를 묶어 놓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서정적 열매들을 엠마 바이어와 비공식적으로 약혼한 다음에 잘 정리하여 1902년 9월 10일 미래의 아내에게 헌정하였다. 이 시들은 아데나워가 다정다감하고, 동시에 깊은 신앙심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엠마 바이어도 3주에 걸쳐 스위스, 남프랑스, 이탈리아로 떠난 신혼여행 때 기록한 120장 정도의 일기를 남겼다. 엠마는 예술적 재능이 있던 사람으로 즉석에서 쓴 이야기들을 몇 개의 작은 시와 화려한 우편엽서로 장식하였다.   

   

프로이센의 사법행정이라는 엄격한 학교에서 제대로 연마된 아데나워는 분명히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과 정서적 세계를 약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 있는 일이다. 먼저 자기 고향인 쾰른시를 바꾸어 놓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유 독일 지역과 서유럽을 바꾸어 놓은 이 인물은 60여 년 동안 그와 교분이 있는 많은 이들이 보기에는 힘찬 펜과 같았다. 강한 의지와 그보다 더 강력한 스타일로 목표를 지향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펜이 얼마나 힘찬 것이었고 그 펜으로 어떻게 [사회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결과를 낳았는지를 목격한 이들은, 그들을 끌어 올리고 계속 이끈 힘도 인정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데나워가 1897년 쾰른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 집안의 정통적인 경건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에 다시 적응해야만 했는데 이번에는 이전보다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젊은 시절의 무비판적인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지만,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였다. 그의 전기 작가인 바이마르에게 아데나워는 처음으로, 사법관 시보 시험을 본 직후의 신앙적 위기에 대해 매우 드문 언급을 하였다. 안네리제 포핑가도 나중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당시에 인기 있던 칼 힐티의 책이 그에게 자기 관점을 확립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던 것이다.     


힐티는 스위스 정신사에서 매우 흥미 있는 인물이다. 1833년 상트갈렌 칸톤에 있는 그림 같은 마을인 베르덴베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법률가였으며 1874년부터는 베른 대학교에서 국법과 국제법 전공 교수였다. 또한 스위스 국법, 스위스 고유언어인 헬베티어, 중립 정책에 관한 연구로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공적 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890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스위스 육군의 총공증관을 역임하고, 생애 말기에는 신설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초대 스위스 대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어권 전체에서 그는 전혀 다른 능력으로 유명해 졌다. 곧 현실적인 생활철학에 관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해진 것이다. 가장 성공을 거둔 《행복》이라는 암시적인 제목의 수상록이 1891년부터 1899년까지 계속 출판되었다. 1905년까지 총 10만 부가 팔렸다.    

 

힐티의 《행복》과 《신앙이란 무엇인가》는 노년의 아데나워가 침실의 서가에 두고 읽었다. 연필로 밑줄을 그은 것을 보아 아데나워는 그 책들을 주의 깊게 읽은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어떤 글을 자세히 이해하고 싶을 때 늘 하던 습관이었다. 그 책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의 생애에서 더 정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이 시기에 관하여 단편적인 정보만 남아있기에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어느 정도 관심을 끌게 된다.     


힐티의 생가에 있는 기념판은 그를 ‘책임 의식이 있는 문화비평가, 도덕 저술가, 기독교 평신도 설교자’로 기리고 있다. 그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자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와 스토아학파의 이론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지니고, 런던과 파리에서도 수학하여 세상 물정을 잘 이해하는 시민으로서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신념을 건전한 인간 이성의 이해력을 결합시킨 인물이다.   

   

세 권으로 구성된 《행복》은 ‘노동의 기술’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동의 기술은 모든 기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삶을 결코 ‘즐기지’ 말고 효과 있게 가꾸어야 한다.” 이 말에 구체적인 원칙이 이어진다. 날마다 “정해진 대로 일정한 시간을 노동에 투여해야 한다.” “유익하지 않은 활동을 위해서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지나친 단체 활동이나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장은 문화 비평적인 숙고로 마무리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주장은 일종의 엘리트 순환 모델로 읽힌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탈리아의 국가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의 순환 모델에 나오는 기지와 강철같은 의지가 아니라 근면이 지도층의 성장과 몰락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로 사회적 혁명이 그 당시의 노동 계층을 지배 계층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19세기 초반의 혁명이 그 당시 활동적인 시민을 한가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능가하게 만들어 준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이 그 이후로 빈둥거리는 이들이 되면서 그들을 앞서간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연금에, 곧 다른 이들의 노동에 의존하며 살고자 하면서 그들 또한 사라지게 되기 마련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는 노동에 속하고 통치는 노동에 귀속된다.”     


‘에픽테투스’라는 제목의 다음 장에는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스토아학파의 삶의 원칙이 나온다. 이 장의 내용은 아데나워와 같은 종교를 지니고 사회적 신분도 같으면서 출세 지향적인 젊은이를 위한 지침과도 같다. “① 사생활이나 공생활에서 따라 살고 싶은 성격과 모범 가운데 한 가지를 눈앞에 떠올려라. ② 대체로 침묵을 지켜라, 아니면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하고 이때도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라. … ⑧ 음식, 물, 옷, 집, 하인과 같은 육체와 관련되는 것은 최소한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라. 그리고 사치에 해당되는 모든 것은 완전히 회피하라. ⑨ 사교 생활은 될 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유지하라. 그것이 힘들면 원칙에 맞추어라. … ⑬ 당신이 어떤 사람과, 특히 매우 유명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이때 소크라테스나 제논이 했을 법한 방식으로 하라. … 다시 말해서 너무 저자세도 아니며 또한 꼴사나운 교만도 아닌 방식으로 그들의 지위에 맞는 합당한 존중으로 대화하라. … 당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 일을 하되, 많은 이들, 곧 대중이 다르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힐티는 스토아학파적 삶의 태도와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엄밀히 구분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종교적 신앙보다는 스토아학파의 도덕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래서 스토아 사상은 “인간이 먼저 단순한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생존으로 빠져드는 일을 강력한 힘으로 막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 된다. “나쁜 이들과 지속해 싸움을 벌이면서도 음모를 꾸미지 않고 성공을 거두는 것이 가능하다.”는 힐티의 확신이 아데나워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아데나워는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어느 정도 고독을 즐기는 경향이 고요한 영적 성장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힐티 책의 그다음 부분들에는 아데나워가 자기 인생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할 때 종종 등장하는 핵심 개념과 사유 방식이 들어있다. “겁내지 말기. … 우리 인생에서 대적하게 되는 대부분의 것은 … 견딜 수 있는 것이다. … 용기는 분명히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것에 속한다. … 절대로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사태를 미워해야 한다. … 그러나 겉으로는 아니어도 실제로 간사한 인간들이 당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도록 그들에게 속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 … 가장 먼저는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특히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 … 끝으로는 잘난 이, 부자, 그리고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늘 자기들을 향한 사랑을 오해한다. … 의지와 결단력으로 확고한 인생 목표를 추구하고 모든 방해를 막아내는 것에서 모든 자기 도야가 시작된다.” 또한 힐티는 독자들에게 “인간의 삶에 불행은 필수적으로 포함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힢티는 경험이 풍부한 ‘기독교 평신도 설교자’의 스타일로 인생의 교훈을 넘어서서 좀 더 형이상학적인 숙고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이를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생소했을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황금별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요약하고 있다. 이 장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하느님은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고, 증명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은 일단 먼저 믿고 개인적으로 체험해보아야 한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직접 자기 의견을 적어 넣었다. “설명과 증명은 다른 것이다. 설명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는 다음 구절에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대한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기독교보다 더 확실하게 한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때로는 여전히 불확실하기까지 한 개별적인 결론에 만족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힐티는 낙관적인 역사철학에 기울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인류가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분명히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느님 존재의 최고의 증명이다.” 기독교 도덕률에 충실한 자유주의는 도덕적 발전, 그리고 역사적 진보에 최고의 수단으로 보인다. “세계는 그러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 어떤 형태의 강압이나 폭력이 아닌 자유를 통해서만 완성에 이르러야 한다. 위대한 세계 질서에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그러고 나서 점차로 민족들 전체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야 말로 세계사의 목적이자 목표이다. 그러나 철학, 곧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역사, 곧 삶을 통해서만 인류의 유일한 참된 진보가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책이 인생의 특정 성장 단계에서 일시적으로나 지속적으로나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여도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다만 아데나워가 그 책에서 찾은 많은 문장이나 개념을 먼 훗날에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자 하는 그의 성향은 증명할 수 있다. 아데나워 자신이때때로 특정한 원칙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원칙들은 힐티의 책에 나오는 것과 상당히 일치한다. 대부분 이론적인 천착을 포기한 현실적 형태의 설명은 그의 본성에 맞는 것이다. 철학과 신학은 그에게 낯선 것이었고 그렇게 남았다. 그의 직업이 그가 가진 모든 힘이 필요하였기에 관련 독서를 위하여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아데나워의 전기에서 힐티의 사상이 어느 정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자신이 이미 수십 년 동안 실천해온 것에 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이고, 국법을 전공한 교수의 권위에 근거를 둔 것을 찾았다. 삶의 처신에 대한 이 현명한 조언자가 도그마적인 완고함이 없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뢰를 지니도록 해 주었기에 아데나워가 종교적으로 흔들릴 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33년 초반에 그의 시민 생활을 위한 모든 기반이 무너졌을 때 그가 쓴 편지에는 힐티의 인생 지혜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가 구입한 책의 제목은 《잠 안 오는 밤들을 위하여》였다. 그가 계속 간직한 이 책에는 그가 직접 쓴 ‘아데나워. 마리아라흐, 1933’라는 서명이 들어 있다.     


물론 그는 자기 신앙을 견지하였다.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금식 계명을 준수하며, 청교도적인 원칙에 따른 처신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부를 신뢰하는 것은 형을 신부로 둔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사실 어느 정도 힘든 일이었다. 신부의 내면생활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신부를 교회의 대표자로 외경심을 가지고 똑바로 응시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러나 쾰른에서 법률가의 인생을 막 시작하던 무렵의 젊은 아데나워는 확실히 교회 환경 안에 있었고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었음이 틀림없다.     


세기가 바뀔 무렵 그가 쓴 시에 나타난 그의 신앙생활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1900년 2월 14일 자기 형인 아우구스트에게 보낸 자유로운 리듬에 맞추어 쓴 혼인에 대한 시를 보면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러 좋은 충고와 더불어 그는 형에게 그가 가는 길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형이 늘 형에게 맡겨진 신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조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형이 선을 수호하는 한 사람이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이 올바르고 현명하며 악에 맞서는 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적 어투이지만 그 형이 젊은 부부에게 얼마 전에 편안한 만년을 기원한 글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어느새 너희의 삶이 이울 때가 되면

너희 또한 편히 세상을 하직하리라,

늦은 가을날 지친 태양처럼;

너희는 잠들게 되지만, 다시 영원한 봄날,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리니.”     


여기에서 서정시의 수준을 논할 바는 아니다. 이 시는 이때와 그 이후에 쓴 많은 결혼 축시와 비슷하다. 이러한 표현이 종교에 바탕을 둔 것은 자명하다. 곧 이는 그가 20세기 첫해 둘째 달에 신혼부부가 탄 인생의 배가 안전하고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가호가 있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바라는 나이브한 낙관주의만큼이나 자명한 것이다.     


“너희 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열려 있으니,

이는 마치 햇살이 부서지는 먼 바다와 같고

너희가 탄 인생의 배는 출항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배의 돛은 순풍에 잔뜩 부풀어 있다,

그 사랑이 든든한 손이 되어 키를 잡는다. 잘 가라!

기쁜 항해가 되기를 바란다!”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지만 출판을 허용하지 않은 적은 양의 서정시 습작들에는 성가 양식도 들어 있다. 확실히 종교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시들은 대부분 어느 사순절에 양심성찰을 하는 가운데 쓰인 것이다. 이 시들에는 내적 갈등과 죄의식이 표현되어 있으며 모두 성가에 흔한 양식으로 쓰여 있다. 같은 시기에 쓰인 비종교적인 시는 매우 만족한 어조가 두드러진 아데나워를 보여주고 있다. 술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도 있고 무엇보다도 하이네, 아이헨도르프, 울란트, 고트프리드 켈러 스타일의 자연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행사용 시나 자연을 노래한 시를 짓기에 좋은 분위기에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모티브와 형식과 운율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높이 평가받던 낭만주의적이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시인들이 이를 습득해야 하였다. 이미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자주 정감 넘치는 시에 등을 돌리고 신낭만주의자들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 동안, 속물적이지 않으면서도 최신의 문학 사조와는 거리가 먼 시민들은 여전히 좋은 옛 낭만주의자들을 선호하였다. 때로는 자기 작은 시집을 자연을 노래하는 시나 교훈적인 시의 차분한 양식으로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시인은 아데나워에 앞서 쾰른시장이었던 막스 발라프이다. 그는 1926년에 이미 자기 인생을 요약하여 정리한 글에 이어 자기 시를 모은 시화집을 출간하였다.     


발라프의 후임자인 아데나워는 자기비판적인 사람이었다. 시집을 내는 일을 포기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아내인 엠마 바이어가 시작(詩作)에 훨씬 능숙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도 자기 시를 모은 시화집을 통하여 자신 안에도 무미건조한 법률가 이상의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후세에게는 엄격한 아데나워만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습작을 한 것을 떠올려 보면 그의 마음 안에도 참으로 부드러운 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본성 안의 어느 구석에는 섬세한 젊은이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 소박하고 마음에 와 닿는 시를 평생 간직했을 리가 없다.     


그가 비로소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사교 활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 20세기 초반 몇 년 동안에 찍은 여러 사진이 남아있다. 그 사진에 아데나워는 어깨에 테니스 채를 편하게 걸친 남녀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몸도 좋아졌다. 사법관 시보와 공직 후보자 시절의 아데나워의 사진은 새로운 아데나워를 보여준다. 힘차게 꼬아 올린 콧수염 뒤에 감추어진 여전히 두툼한 입술이 보이는 경직된 표정은 이 젊은 신사 앞에서 조심해야겠다는 신호를 줄 것만 같다. 그의 눈빛은 어린 육식동물처럼 강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분명히 매우 유익하게도 단체 사진에서 그를 둘러싼 친구들의 만족한 얼굴, 무딘 얼굴, 천진난만한 얼굴, 잘난척하는 얼굴과 분명히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제 그는 대부분 서서 찍은 사진의 한가운데에 있다. 예의 맨 뒷줄에 서 있지만 뭔가 지배하는 분위기이다. 그는 이러한 남자다운 자신감이 있는 척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가 지은 치기어린 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이미 자기 직업 세계에서 발휘하는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강인함을 가장 사적인 영역에서의 매우 풍부한 감성과 결합시킨 복잡한 성격을 지니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1892년 쾰른-클레텐베르크에 첫 클레이 테니스 코트가 개장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귀족 스포츠’를 매우 격식을 갖추어 즐겼다. 남자들은 넥타이와 재킷을 착용하고서는 경기할 때는 벗었다. 젊은 여자들은 긴 치마와 주름장식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었다. 이 당시만 해도 테니스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사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테니스 채는 흔히 ‘약혼을 위한 국자’로 불렸다. 이 테니스 클럽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를 ‘흠뻑 젖은’으로 불렸다. 이 클럽은 날씨에 상관없이 매주 세 번 만나 테니스를 즐겼다. 이 단체의 회원이 아닌 이들은 이 클럽을 ‘검은 쿠스토디스 클럽’으로 불렀다. 이 사적인 테니스 클럽에 아데나워도 가입했다. 그는 긴장을 풀어야 할 때도 당연히 자기가 익숙한 가톨릭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여기에 자주 나오던 젊은 여자 가운데 ‘엘라’ 발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여자는 벽돌 공장을 운영하는 훌륭한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는데 아데나워 가정과 1950년대까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였다. 1903년에 그 여자는 베네딕트 슈미트만 법학박사와 혼인하였다. 슈미트만은 나중에 쾰른 대학교에서 사회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이며 프로이센에 강력하게 맞서는 연방주의자로 나치에 반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는 그를 수용소에 감금하고는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아직은 1901년 초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겨우 한 살 반이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 ‘클럽’에는 엘라 슈미트만의 사촌인 엠마 바이어도 놀러왔다. 이때 엠마는 20살이었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엠마의 아버지는 1883년 당시 쾰른의 재보험 회사의 고위경영진 이사였다. 그는 파리의 보험회사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다음 24살의 나이에 이 회사의 이사보로 부임한 기록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 회사의 구조조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쾰른 보험업계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1884년 산책 중에 다리가 부러져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엠마 바이어의 할아버지인 요한 페터 바이어는 1890년대 초반에 쾰른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다. 쾰른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의 에콜드보자르에서 건축을 공부하였다. 21살 때 쾰른시 참사회는 그를 고향으로 불러들였고, 그는 쾰른에서 먼저 도시건축관의 부관으로 일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시참사원들은 그를 도시 건축관으로 선출하였다. 쾰른시정부는 그 임명을 5년 동안 지연시켰지만, 마침내 바이어는 1822년부터 1843년까지 쾰른의 공공 건축을 주도하였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도시가 그의 덕분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는 여러 교회를 재건하였는데 여기에는 상트아포스텔른, 상트게레온, 산타마리아 임 카피톨, 대상트마르틴, 그리고 아데나워가 세례받은 상트마우리티우스가 있다. 그는 평생 중세적이며 근세 초기적인 교회 예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지휘 아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설계에 따라 세워진 일반 건물들은 쾰른에 새로운 면모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아펠호프에 있는 법원 건물과 시민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짓고 증권거래소와 특히 아름답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낡아버린 집회 건물들을 개축하였다. 쾰른시 중심부에 파리를 모범삼아서 상가 거리를 만든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아데나워가 성장하던 시기와 1820년대에 이르기까지 ‘파사쉬’에 있는 작은 가게들은 쾰른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들이었다.     


1843년 바이어는 시정에서 물러난 다음 철도회사에 입사하여 부동산 업자로서 크게 성공하였다. 투기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이 금융업자는 여전히 과거의 거장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로트게르버플라츠와 페를렌그라벤에 지은 고전주의 양식의 화려한 저택 이외에도 쾰른에 최초이자 유일한 사설 미술관인 J.P. 바이어 화랑을 세웠다. 1852년 이 화랑은 364개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여기에는 비잔틴양식 제단과 이탈리아 양식 제단, 북부독일파의 그림들, 쾰른 미술학교의 작품들, 17~18세기의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화가들에 이르는 브라반트파 그림들이 있다. 1862년 경매 목록에는 586개의 그림들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크라나흐, 뒤러, 홀바인, 로흐너, 멤링, 로지어 반 데어 바이덴, 빈 다이크, 반 아이크, 루이스다엘, 렘브란트, 루벤스의 그림도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엘리사벳과 세레 요한과 함께 있는 성가정’과 같은 명작도 있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바이어의 사업과 화랑에도 불운이 찾아왔다. 그가 투자에 실패하여 재산을 많이 잃게 되어 그가 모은 그림을 경매에 붙여야 하게 된 것이다. (다 팔아봐야 65,076 탈러에 불과하였다.) 그 그림 가운데 몇 점만이 가족의 소유로 남았다. 엠마 바이어는 아데나워와 결혼하면서 그 가운데 특히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 몇 점을 가져왔다.      


1864년에 사망한 이 인물을 잘 기억해야 한다. 아데나워가 이 바이어 집안과 결혼한 다음에 그는 그 집안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자기 아내의 유명한 할아버지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따라하려고 노력하였다. 아데나워 또한 시장일 때 건축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도시를 근대화 하고 대규모 스타일로 설계하고 보존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또한 요한 페터 바이어처럼 과거의 명장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마음이 더욱 강력해져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그도 그림 수집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수상으로 재임하던 때 그는 매일 밤 자기 돈을 들여 방안 온도를 20도에 맞추고 가습기로 잘 보존한 아늑한 뢴도르프의 개인 화랑으로 가서는 모아 놓은 그림에 조명을 비추며 그 앞에서 생각에 몰두하였다.   

  

엠마 바이어의 외가 쪽도 훌륭한 가문이었다. 엠마의 외증조부는 1868년 쾰른에서 사망한 [프로이센의] 궁중법무관이었던 프란츠 자베르 요제프 하인리히 베르그하우스이다. 그는 프랑스 점령 시기에 이미 항소법원의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데나워 가문의 역사에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베르그하우스는 1840년 왕립 프로이센 행정장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1918년 11월 혁명 때의 아데나워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46년의 ‘쾰른 소동’ 때 그는 유혈 폭동을 막기 위하여, 매우 우유부단하게도 시 형무소에 있던 죄수들을 풀어주는 바람에 불명예 퇴직을 하고 63세에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매우 경건한 이 인물은 이제 자선 사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당시 쾰른에는 궁핍한 이들과 사회 낙오자들이 넘쳤다. 그래서 그는 거의 그의 임종 때까지 쾰른시 빈민 관리청의 의장직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상이 법률가이면서도 매우 신앙심 깊은 엠마 바이어 가문의 족보이다. 엠마의 모친은 남편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신앙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 모친은 일 년 내내 ‘세상을 등진 수도원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고 그의 남동생이 이야기하였다. 그는 후일에 아헨 지방법원장으로 근무하였다. 모친은 정신병을 오래 앓은 끝에 1911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부고장에는 그 집안에 흐르는 정신이 나타나 있다. “고인은 매우 의무에 충실하고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조용히 자선을 베풀며 살아왔기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고인의 소중한 영혼을 사제의 봉헌과 신자들의 경건한 기도에 맡겨 드리며 영원한 평화로 안식하기를 기원한다.”  

   

그 젊은 엠마가 이 슬픈 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엠마는 활기차고 기쁨에 넘치며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전형적인 고급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육 받은 상류층 딸이었다. 그런데 엠마와 아데나워 사이에 사랑의 불꽃이 곧 타오르게 되었다. 이 젊은 신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늘 어느 정도 무시하는 태도로 거리를 두며 자기 소심함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치밀한 계산을 하고 엠마와 혼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혼인으로 그가 쾰른의 상류층 진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 젊은이의 사회적 지위가 혼인을 통하여 비약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그 자신도 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드러난 증거를 볼 때 이 둘 사이에는 사랑의 연애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법률가들이 로랑스베르트 근처의 라인탈 고지에 있는 롤랑스보겐으로 초여름 야유회를 갔을 때 약혼식이 이루어졌다. 그 피크닉 파티에 함께한 엠마의 오빠인 막스 바이어는 그 여름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누이동생이 체리 장식이 달린 챙이 넓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달려와서 말했다. ‘막스 나 방금 콘라드 아데나워와 약혼했어.’ 아데나워는 약간 뒤에서 엠마를 따라왔다. 그가 매우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뜨였다. 그가 엠마와 대화를 할 때도 약간 냉소적인 투로 말했다. 나중에 내가 관찰하니 그는 여자들에게 말을 건넬 때 흔히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일요일에 ‘정자’에서 커다란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법관 시보인 콘라드 아데나워는 스탠드칼라가 달린 옷을 입고 꼿꼿하게 서서 엄숙하게 그를 방으로 맞이한 엠마의 모친에게 딸을 아내로 삼고 싶다고 하였다. 아내 될 사람을 어떻게 부양하겠냐는 질문에 아데나워는 그가 바라는 대로 공증인이 되어 곧 연봉 6천 마르크를 벌게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을에 치러진 관직 후보자 시험에서 아데나워는 낙방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상당히 막막했다. 검찰에서 받는 200마르크의 월급으로는 신분에 맞는 혼인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1902년 초에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그 약혼식에 참석한 이들은 이 젊은 신사가 곧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양가의 신앙심이 사회적 계층 차이를 극복하도록 해주었다. 엠마 바이어의 모친은 제산이 어느 정도 있어서 힘든 신혼 초를 견딜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좋은 자리를 찾아 나섰다. 1902년 4월 아데나워는 겔센키르헨까지 손을 뻗었다. 시청에 보좌관 자리가 났다. 이와 관련된 편지 초안이 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저명한 민사 사건 변호사이며 시의회 중앙당(Zentrum)의 당수였던 카우젠 법률고문관이 병이 들어서 그를 대신할 기회가 생겼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이 일에 재능이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복잡한 사안에 대하여 요점을 찾고 문제를 여러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탁월하게 비추어보는 능력에 탄복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의 동료였던 사람은 “그가 언변이 뛰어난 변호사는 아니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대신에 그는 냉정하게 이루어지는 객관적 논증으로 설득하는 매우 집요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언변은 법관에게 장마와 같은 작용을 하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기게 모든 반론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정치적 논쟁가로서의 수습 기간은 쾰른의 법조계에 입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법조계의 판단은 무게가 있었다!    

 

약혼자들은 이제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혼인식은 1904년 1월 26일 거행되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거의 28살이 되었다. 그 당시 시민계층이 하던 대로 그 신혼부부는 긴 신혼여행을 갔다. 첫 기착지는 본이었다. 본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밤에 호텔 기차를 타고 그 도시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알텐촐로 산책갔다. “라인강 위로 옅은 안개가 꼈다. 하늘에는 구름이 약간 있었다. 그래도 일곱 개의 산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갈매기들이 물결 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 그렇게 행복하고 아무 걱정 없이 미래를 내다 본 적은 한 동안 없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시장을 지나 돌아오면서 오래된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 기착지는 몽트레였다. 쉬롱성을 향하여 산책을 나갔다. 여기 날씨는 이미 초봄이었다. “밝은 푸른 하늘 아래로 넓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전개되었다. … 하얀 갈매기 떼가 파도 위를 오갔다.” 분명히 이 두 사람은 경치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아직 눈이 많이 쌓인 르사방 산(Les Avants) 정상에 올랐다. “썰매를 타고 눈 덮인 길을 달려 내려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흰 눈이 덮인 전나무 숲을 지나 달렸다. 그 숲은 너무 음침해 보여서 컴컴한 그 숲 속에는 동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이, 주변에는 산들이, 아래쪽으로는 제네바 호수의 넓은 표면이 보였다. 그 누가 이보다 더 멋진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썰매는 얼마나 신나게 미끄러지고, 우리 뺨은 얼마나 빨개졌는지! 정말 재미있어! 어린애들처럼 신나서 우리는 눈 내린 대지를 즐겁게 달렸다. 어린이처럼 행복해 하며 무한한 아름다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정심이 들지만, 약간은 오싹한 기분으로 그들은 저녁 만찬 이후에 응접실에서 약간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결핵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여기에서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죽음을 앞둔 모습이다. … 보통은 중년이 되어야 발병하고 젊은이들이 걸리는 경우는 드믄 법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겨울 요양지에서 흔히 보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세상은 참 독특하기만 하다.”    

 

여행은 계속 이어졌다. 제네바의 상가 쇼윈도를 구경하고, 안개 낀 호수 표면에 빛을 비추는 가스등도 노래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신혼부부는 로네탈을 거쳐 마르세유로 갔다. “기차는 프로방스 지역을 지나는 긴 노선을 달려갔다. 여전히 부슬비가 가늘게 내렸다. 그러나 들판에는 이미 따스한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 눈앞에 연애가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곳을 그들의 시를 낭송하는 특별한 자리로 만들고 다시 일어서서는 남부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 여기 지역 전체를 하얀 땅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이 밝은 빛줄기로 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대지를 거의 가릴 것 같은 묵직한 측백나무들로 가려졌다. 흰 지붕을 한 집들이 계곡 사이에 들어서 있는 이 지역은 평화로웠다. … 식물들은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남쪽에는 올리브 나무가 몇 그루 보였다. 그러나 아직은 겨울이었다.”  

   

마르세유의 전혀 다른 모습도 보인다. “어제는 회색빛의 황량한 겨울 풍경이더니 오늘은 부드러운 봄 공기가 느껴진다. … 봄 공기가 늦은 밤 마르세유의 중심가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뤼드카네비에르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고 이제 새로운 인상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길가에서는 엄청난 양의 무화과, 대추야자, 바나나, 귤, 오렌지를 팔고 있었다. … 비록 그들의 말을 잘 하지 못해도 활기찬 몸짓에서, ‘어서 오시라’는 손짓에서 상인이 말하는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숫기가 없어서 조용히 지나갔다. 카페를 찾는 이들은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 사이로 우편엽서를 파는 이들이 지나다녔는데 그들은 갈색 피부를 지닌 작은 소년 소녀들로 매우 세련되고 말주변이 있었다. ‘12장에 10실링입니다.’ 그리 비싸지는 않았으나 구미가 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보라색 가게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옷이 약간 때를 탔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하게 보였다. 마차들이 줄지어 지나갔고 마차 모는 이들의 단조로운 외침 소리가 들리고, 서툰 오르간 연주 소리,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 모든 것이 살아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독일 부부가 전쟁 발발 이전의 평화로운 시기에 남프랑스에서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신사가 아데나워가 아니었다면 언급할 가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 땅에 온 것은 순전히 관광을 위한 것이다. 정치적인 민감함과 숙고가 이 여행에는 관련되지 않았다. 그가 이 나라를 두 번째 방문할 때도 그리 길게 머물지는 않았다. 이때 그는 1919년 6월 6일 휴전 협정 독일 대표단 자격으로 마르세유를 찾았다. 이때 아데나워는 파리에도 잠깐 머무르게 되어있었다. 이 당시 그는 쾰른시장이었는데 믿었던 세상이 무너져버린 때였다. 세 번째 프랑스를 방문할 때는 파리에만 갔다. 이때는 프랑스에 처음 간 지 47년만인 1951년 4월로 그 당시 아데나워는 독일연방 수상이었다.      


또 다른 차원에서도 이러한 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글에서 아데나워는 프로방스 지방과 북부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남부 유럽의 경치와 생활방식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나이가 든 후에 결국 카데나비아 지역을 알게 된 다음에 그는 자기의 기억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남부에서의 행복에 대한 동경을 다시 추구하게 되었다.    

 

신혼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몬테카를로였다. 여기에서 물론 카지노를 찾았다. 사람들은 카지노에 있는 사람들의 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이 처음에 그러하듯이 조심스럽게 돈을 조금 걸게 되었다. 엠마 아데나워는 처음에 돈을 따고 나서 다시 잃었다. 그러고 다시 돈을 걸고 싶어 했다. 매우 침착하게 서서 아내가 마음대로 놀도록 하는 자기 남편을 보고 엠마는 경탄했다. 전형적인 프로이센 집안의 신중하게 행동하는 관리였다!     


그들은 몬테카를로를 지나서 이탈리아의 블루멘리비에라로 갔다. 여기에서 이 젊은 부부는 긴 산책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기억을 평생 소중히 여겼다. 보르디게라, 산타 마르게리타, 포르토피노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적인 의미를 얻게 된 지역을 찾았다. 유럽의 정부 요인들은 이 온화한 리비에라 지역의 도시들에서 산산조각이 난 ‘과거의 세계’를 다시 어렵게 재건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제노바, 산레모, 라팔로다. 제노바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있는 밀라노에서 다시 신혼여행은 스위스 루가노와 루체른을 거쳐서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그는 대학생 시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였다. 쾰른으로 돌아와서 그들은 클로스터슈트라쎄 71번지에 있는 멋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당시에 신축 주택지 주변에 있는 것으로 넓은 들판이 보였고 정원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집 몇 채가 서있었다.    

  

지금까지 본 것은 단순히 그의 이력서를 보면서 별 볼 일 없는 집안 출신의 이 쾰른 사람이 이른바 쉬지 않고 출세길을 걸었던 인물로만 여긴다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젊은 아데나워의 다른 모습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대로 그는 일에 중독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정의 평화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기억하는 대로, 그가 지방 공증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어딘가 숨어 있을 행복을 꿈꾸었다고 하여도, [신혼여행에서] 그가 일단 바이올린 선율이 넘치는 혼인이라는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여 그러한 꿈을 안심하고 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처남은 아데나워가 니더라인지역의 라인베르크의 공증관 자리에 지원했던 일을 기억한다. 쾰른시청에서 일을 시작하기 반년 전인 1905년 10월에 그는 또다시 라인강 왼편에 있는 켐펜의 자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이나 자리가 좋은 것일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급여가 매우 보잘것없어 시골에서 겨우 살아갈 만한 것이어서 그는 그 자리를 포기하였다.     


아데나워는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1904년 7월에 이미 이탈리아에 4주나 머문 뒤에도 그 젊은 부부는 프리츠호프에 있는 형 한스의 집에 14일이나 머물렀다. 1905년 1월에 그들은 르사방을 다시 찾아 4주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쉬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혼인했을 때 한 생명보험회사는 그의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 회사는 결국 좋은 고객을 한 명 놓치게 되었다. 1905년 가을에는 그의 당뇨병이 확인되었다.     


출세를 위하여 노력하는 이 젊은이가 그저 법률가가 되는 것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한가한 시간에 하던 일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여전히 정치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이른바 ‘사회 참여’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 집을 마련하자마자 그는 모든 특허의 가능성을 두고 씨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황립 특허청과 긴 편지를 나누었고, 곧 특허 변호사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허청과 논쟁하면서 그는 모든 절차적 가능성을 동원하고 오랜 대학 교육을 통하여 다져온 변호사로서의 노련함을 발휘하였다. 어디를 보아도, 그는 여기저기 탐색하고 불안해하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랬듯이 틀림없이 막다른 길에 이를 가능성도 있었다. 엠마 바이어와 맺어진 일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직업적으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었는데,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소시민적인 속물근성의 원칙에 맞는 만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만족은 법률가 생활뿐만 아니라 기술 발명에 관한 관심으로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콘라드 아데나워 인생의 대략적인 첫 단계는 이러하였다. 이 책이 위대한 인물의 전기가 아니었다면 이 29년 동안의 소소한 일들은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지루한 발전 과정으로 자칫했으면 매우 평범한 인생으로 마감될 수도 있었다. 곧 니더라인 지역의 소도시에서 공증관이 되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의 인생의 이 첫 3분의 1이 보여준 대로 고생을 많이 했다. 사람들은 그가 대기만성형의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소박한 출발, 어쩌면 스스로 만든 종교적 억압이 처음에는 그가 전혀 자존감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을 수도 있다. 아마도 카우젠의 대리로 일하던 첫 2년 동안 그의 안에 숨겨진 재능이 발휘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 재능을 시골에서 막 묻어버릴 참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아데나워는 매우 비정치적인 젊은이였다! 이 사실은 그를 나중에 그와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둔 다른 정치가들과 비교해 보면 보다 더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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