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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정이 '퀴어 축제'에 간 이유는?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보인다.

by Francis Lee



유호정 페이스북 퀴어축제.jpeg 퀴어 축제 참여한 류호정 ⓒ류호정 페이스북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정의당의 류호정이 윤석열 정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선전해 마지않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여러 개념을 적당히 엮어 내세우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그 자유민주주의 말이다. 먼저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배꼽티와 다이어트, 女 국회의원>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류호정을 화제로 만든 세 가지 포인트이다. 최고 화제 뉴스 Top 10에 보이는 제목에 입맛이 쓰지만, 이제는 익숙합니다.

그런데 “코르셋 아냐?!”라는 핀잔에는 응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탈코르셋’은 여성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기준에 나의 외모를 맞출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다. 나의 외모를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긴 머리’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숏컷’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긴 머리의 여성에게 코르셋이라 손가락질하는 건 탈코르셋이 아닙니다.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구속입니다.

2023년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 멋진 옷을 입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던 운동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습니다. (갑자기 살쪄서 무릎 관절이 안 좋았는데,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지난주 토요일, 저는 ‘당당히, 원하는 모습으로’ 을지로를 걸었습니다.

페미니즘과 여성주의를 만나기 시작한 학생들이 헷갈려 할까봐 몇 마디 적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자기검열에서 벗어나자는 게 탈코르셋의 취지에요. 세상이 시키는 대로 말고, 스스로 선택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퀴어축제를 지지하는 모든 분이 원하는 모습으로 당당히 사랑하길 바랄게요!

※ 기자님들, 제 등 뒤에는 다양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류진스’는 저와 진중권 교수가 만드는 유튜브 콘텐츠의 이름입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뿌셔서 불평등 해소합시다. 42299는 타투노동자의 직업분류코드입니다. 타투합법화와 출판업계 근로감독 필요합니다. 다이소 노동조합 파이팅이고요! 도서관에는 사서노동자가 있습니다. 모두의 노동권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ryuhojeong.official/?locale=ko_KR )


해석이 필요한 여러 개념이 이 짧은 문장에 들어 있다. 페미니즘, 여성주의 자기검열, 탈코르셋...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서양 것이라는 데 있다. 마치 포르셰, 람보르기니, 에르메스, 페라가모, 티파니가 국산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져다 별 경계 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역시 MZ세대인가? 그런데 정말 자유롭게 쓰는가? 이미 주어진 개념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합하는 것이 자유인가? 마치 람보르기니를 타고 에르메스를 들고 페라가모를 신으면서 ‘플렉스’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플렉스는 사실 자본가들이 시장에 내놓은 한정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더 나아가 ‘자유’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과연 자유가 무엇인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자유도 서양의 개념이다. 한국 더 나아가 유교문화권에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개항 이후 서양에서 도입된 사고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자유는 크게 freedom과 liberty로 나뉜다. 조금 전문적이지만 이 두 개념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freedom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행동, 선택 또는 생각에 대한 제약이나 제한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자율성과 자기 결정의 개념을 구현하여 개인이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한다. freedom은 개인의 고유한 권리와 존엄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다. freedom은 강압이나 억압이 없음을 강조하며, 개인이 자신의 개성, 창의성, 신념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에 liberty는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의 집단적 안녕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liberty는 정해진 법과 규정의 틀 안에서 freedom의 개념을 포괄하며, 절대적인 자유는 잠재적으로 혼란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인정한다. liberty는 더 큰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책임감 있게 freedom을 행사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공동선과 균형을 이루어 조화로운 공존과 사회 질서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러한 freedom과 liberty의 차이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각각의 관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freedom은 주로 개인의 권리와 개인적 자율성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외부의 제약이 없음을 강조하며, 개인이 자신의 선호와 이익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타인의 간섭이나 강압이 없는 것과 관련된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러나 liberty는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복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이는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를 고려하여 책임감 있게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강조한다. freedom은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고 의미 있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 기회, 자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포함한다. 이는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공정한 법과 제도의 확립을 촉진한다.


freedom과 liberty는 개인과 사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하는 서로 얽혀 있는 개념이다. freedom은 개인의 자율성과 제약의 부재를 강조하는 반면, liberty는 집단적 복지와 개인의 책임 있는 권리 행사를 고려하는 더 넓은 관점을 포함한다. freedom의 핵심은 개인의 liberty와 관련이 있지만, liberty는 확립된 법과 사회 질서의 틀 안에서 이러한 자유를 책임감 있게 행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개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이 공존하는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회를 조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결국 자유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맘에 내키는 대로 멋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사실 인간이 자유를 타고난 존엄한 존재라는 진리를 서양에서도 근세 이후에나 인지하게 될 정도로 매우 새로운 개념이다. 그런데 수천 년 동안 자유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해방 이후 밀려든 서양 물질과 사상의 홍수에 휩쓸려 들어온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고 있는 현상을 지금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방종은 단순히 류호정 무리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집단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LGBTQ+다. 흔히 퀴어(Queer)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이제 개인의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성소수자 전체를 지칭하는 사회적 개념이 되었다. 류호정이 참여한 것이 흔히 퀴어 축제로 불리는데 이 축제의 근본정신이 바로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는 freedom 이전에 liberation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깊은 사회적 자유의 개념이 경박해져서 아무나 가서 배꼽티 입고 사진 찍고 소셜 미디어에 사진 올려서 바이럴 되는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 모양이다. 귤이 하수를 건너 탱자가 되는 나라인 것이다.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고,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가 되고, 재화의 사회적 책임에는 개 사과나 주는 나라이니 인간의 존엄한 인권을 촉진하는 운동에서 시작한 퀴어 축제가 ‘애들’의 ‘배꼽티 사진 찍기 '놀이터’로 변질된 것이다. 이는 류호정이 속한 정의당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현재 명색이 국회의원인 자들이 6명이나 되지만 심상정 이외에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어린’ 류호정과 모텔 드나들 듯이 당적을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진중권 ‘석사’만 보인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정당이 ‘철 없는 애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내 삶을 내 맘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내 삶을 내 맘대로 사는 것만이 자유는 아니다. 나의 자유만큼이나 타인의 자유도 분명히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로 이해되는 집단의식이 팽배해 있다. 배꼽티를 입고 퀴어 축제에 참여해서 방실대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찍어서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려도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위에서 분석한 그 심오한 자유인가? 아니면 경박한 방종인가? 그 자유와 방종을 구분할 잣대는 무엇인가? 그 잣대의 정당성은 무엇으로 보장해야 하는가?


절대적 가치가 붕괴되고 모든 것이 상대화된 현대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자는 잣대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 내 멋대로 산들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류호정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조민의 모습이 겹친다. 조민도 배꼽티를 입고 돌아다녀서만은 아니다. 조민이 누리는 자유가 류호정의 자유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자유로 호도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조민에게 조공을 바치는 팬덤의 광기가 진보좌파로 호도되는 미친 현상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퀴어 축제는 사실 한국적 상황에서 자유와 연결해 보기에는 아직 매우 낯선 개념이다. 그리고 이 또한 기독교나 자유나 마찬가지로 메이드인 유에스에이다. 곧 외제란 말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미제는 X도 좋다.’는 말이 오랫동안 유행했었다. 그 당시 한국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난한 상황에서 미국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숭배의 나라였다. 그래서 미국이 문자 그대로 ‘천조국’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대주의적 식민 근성이 세계 10대 선진국 반열에 오른 21세기에도 한국 사회에 면면히 이어져 이제는 MZ세대도 미제라면 사족을 못 쓰고 있다. 물론 미제만이 아니라 사치품이라면 독일제, 이탈리아제, 프랑스제에 ‘미쳐 돌아 버린다’. 그것도 이른바 ‘젊은 애들’이 말이다. 게다가 이른바 ‘수구꼴통’으로 폄하되는 ‘개독교’ 신자와 ‘가스통 할배’도 툭하면 성조기를 들고 시청 앞으로 달려간다. 참으로 신기한 민족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친미’를 넘어 ‘찬미 문화’, 더 나아가 ‘서양 숭배’ 문화가 판치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첫 번째 퀴어 축제는 1970년 6월 28일 뉴욕 맨해튼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열린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해방의 날"(Christopher Street Liberation Day) 또는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게이 해방의 날"(Christopher Street Gay Liberation Day)로 알려져 있다. 이 행사가 있기 정확히 1년 전인 1968년 6월 28일 게이들이 즐겨 모이던 술집인 스톤월 인을 경찰이 단속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게이와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사실 스톤월 인은 주류 판매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영업장이었다. 그러나 이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폭동은 바 주변의 크리스토퍼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사실 이 폭동과 데모는 단순히 게이 문제가 아니라 1960년대 미국의 사회 혁명인 흑인 인권 운동, 여성 해방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인간 해방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척점에는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 목사와 그 무리,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빨갱이 사냥’의 전설인 매카시 상원의원이 시작한 매카시즘이 있었다. 퀴어 축제의 시발점은 문화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 깊은 역사를 지닌 이 운동은 나중에 ‘퀴어 축제’로 불리며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외에도 많은 도시와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로 매년 퀴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퀴어 축제로는 샌프란시스코의 "SF 프라이드"(SF Pride)와 토론토의 "토론토 프라이드 페스티벌"(Toronto Pride Festival)이 있다. 유럽에서는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의 퀴어 축제가 가장 유명하다. 아시아권에서는 시드니 정도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부산 이외에 대구 광주 정도에서 규모 있는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퀴어 축제는 한국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한국 내적인 사회적 역사적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수입품인 것으로 그 근본정신이 다르다. 그래서 ‘철없는 애’가 되어 배꼽티를 입은 류호정이 뜬금없이 김연아까지 소환하면서 스스로 고백한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놀러 갈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동성애자는 기독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투쟁의 주체였고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동성애는 문화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일탈이나 ‘비정상’으로 간주된 개인 윤리적 차원의 비난거리였다. 그리고 그런 비난이나 차별에 대한 투쟁이나 사회적 담론의 역사는 전무하다. 그래서 결국 역사적 무게가 있는 퀴어 축제도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놀이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사회의 무게 중심은 이른바 ‘어른’이 잡아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중심이 잡힌 어른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슨 기대가 가능할 것인가?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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