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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l 08. 2023

레즈비언이 아기를 낳는 이유는?

역차별까지 고려하는 것이 참다운 인권 존중이다.



한국 출신의 한 레즈비언 커플이 해외에까지 가서 정자를 ‘제공받아’ 임신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원래 체외수정은 난임이나 불임인 남자와 여자 부부가 출산과 양육을 결심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돈에 눈이 먼 의사와 아이 낳는 것을 애완동물 입양쯤으로 여기는 이기주의자가 배가 맞으면 끼나 고동이나 자유롭게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의 나라이니 전봇대로 이빨을 쑤셔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금과옥조의 ‘진리’가 되어 버린 사회이니, 그리고 ‘자유’가 돌에 새겨진 계명이 된 사회이니 여자끼리 부부가 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서양조차도 동성애자의 자녀 입양이나 출산 문제는 대단히 신중하게 접근해 왔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애완동물 입양하듯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애완동물 심지어 장난감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다. ‘엄마’가 맘대로 만들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과거에는 많은 이들이 모성 또는 어머니의 사랑은 여성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곧 여성의 DNA에 새겨진 것이라는 착각을 했었다. 그러나 현대 과학과 사회 현상이 말해주는 것처럼 모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이를 낳는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되는 것도 훈련과 무한에 가까운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기본적인 법칙인 음양의 조화에 근거하여 모성은 부성이 있을 때 더욱 잘 발휘되는 법이다. 그래서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커플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모성의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내가 여자라는 의식은 남자가 있을 때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자들끼리 있을 때 여자임을 의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시몬느 보부아르 부류의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강요된 성, 곧 만들어진 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이다. 그런 식이라면 ‘남성’도 사회가 강요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성은 사회 이전에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인 성은 구분될 수 없다. 그런 구분을 하는 것은 동물 가운데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 물론 보노보 원숭이에서 관찰되듯이 동물도 동성애를 한다. 그러나 그 동성애는 생물학적으로 기형이거나 집단의 화합을 위한 일종의 의식의 의미를 지닌 것일 뿐이다. 인간 사회처럼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는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이성생식을 하는 개체인 이상 아이를 ‘만드는’ 것이 단순한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듯이 출산과 양육은 짝짓기를 근본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짝짓기는 단순한 성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짝짓기는 기본적으로 4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짝을 찾는 것으로 짝짓기가 시작된다. 짝을 찾는 충동은 물론 성호르몬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이때 적절한 짝이라는 기준이 작동한다. 이는 남녀에 공동으로 적용되는 기준이다. 이 ‘적절한 짝’은 궁극적으로 남녀가 만나서 낳을 자식의 양육에 최적인 조건을 제공할 대상을 말한다. 여기에는 건강과 외모만이 아니라 경제력 사회적 지위를 포함하여 앞으로 나올 자녀의 성장에 최선의 환경을 보장할 조건이 포함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짝을 만나면 남자와 여자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말 그대로 눈이 멀어버리게 된다. 그래야만 출산과 양육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짝을 만나면 이제 둘째 단계가 시작된다. 바로 섹스를 포함한 연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성호르몬이 가장 폭발적으로 분비된다. 그래서 이른바 미친 듯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임신이다. 임신하는 순간부터 짝짓기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단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삼 단계에서 두 짝의 미래가 확정된다. 사실 연애를 할 때 출산을 전제로 섹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적 쾌락 자체를 즐길 뿐이다. 이것도 이미 DNA가 인간의 뇌를 조작해 놓은 기제이다. 만약 남자와 여자가 섹스할 때마다 아이 낳을 것을 예상한다면 ‘사랑’에 몰두할 수가 없다. 이른바 성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섹스는 미친 듯이 해야 그 효과가 높아진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는 섹스할 때 출산에 대한 ‘걱정’을 전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지막 사 단계는 바로 출산과 양육이다. 이는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으로 법적 부부 또는 사실혼 커플의 미래 인생을 완전히 결정해 버린다. 대부분의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는 이 단계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잠깐 쾌락의 대가를 평생 치르는 과정에 접어드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속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이런 과정을 20만 년 동안 거쳐왔다. 그런데 자연의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 짝짓기와 관련하여 ‘오류’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동성애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부 사람들이 이런 ‘정상적인’ 짝짓기 과정을 거부하고 현실적으로 출산과 양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동성애라고 하는 것은 종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단죄의 대상이었다.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식의 ‘생산’이 필수적이기에 생식 활동에서 출산과 양육을 제외한 성적 쾌락만을 ‘선택하여 즐기는 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사회에 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동성애가 단순히 성적 취향이 아니라 인간의 인권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재해석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른바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를 존중하는 현대적 인권 개념의 확대 해석 과정에서 이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진 국가에서는 동성애만을 따로 떼어 다루지 않고 소수자의 권리 존중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묶어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서 단순히 호모와 레즈비언만이 아니라 성전환자, 양성애자, 심지어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자까지 모두 인권 존중의 대상으로 포섭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은 낯선 LGBTQ+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적 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자 이제는 자식을 기르겠다는 요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자식은 이른바 ‘정상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인공 수정, 체외 수정을 통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지자 동성애자도 그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를 낳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두 동성애자의 사랑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인권과도 연관되는 심각한 차원의 것이 된다. 과연 그 아이가 다른 부모와 전혀 다른, 곧 ‘엄마+아빠’가 아니라 ‘아빠+아빠’, ‘엄마+엄마’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에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이 동성애자들의 체외 수정을 통한 임신과 출산은 인권의 개념으로만 처리하기에는 매우 심각하고 해결이 안 된 문제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위에서 말한 출산과 양육의 긴 ‘짝짓기’ 과정을 생략하고 단순히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라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기술적인 과정으로 축소해 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하면서 밀고 당기기 하고 서로의 성을 알아가면서 부모가 되는 훈련을 하는 과정을 일체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왜? 한마디로 귀찮고 그럴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할 능력이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동성애자들에게 출산과 양육은 어차피 mission impossible 한 과제다. 그런데 이제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자들의 출산과 양육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같은 것을 해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결심할 때 한결같이 내세우는 것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근본적으로 이성생식을 하는 ‘동물’이다. 그런 식으로 진화한 데는 자연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그 자연의 법칙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인공적인 생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거의 자연의 법칙이나 신의 의지 수준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신 놀음(Gottspiel)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늘 내세우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이다. 그러나 이는 극 이기주의적인 요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나머지 다수자의 인권은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는 흔히 말하는 역차별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레즈비언 커플을 비난하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혐오’를 방패 삼아 상대방을 파렴치범으로 매도해 버린다. 그런 프레임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이 덫에 가장 잘 걸리는 것이 여성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남성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여성 문제에서 늘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덫을 설치하고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일삼는 이들이 뜻밖에 페미니스트의 가면을 쓴 이들 가운데 많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레즈비언 커플의 이혼율이 호모 커플의 이혼율보다 3배나 높다. 그런 레즈비언이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이혼’한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어찌 된다는 말인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남자’의 정자를 사용하여 ‘생산한’ 아이의 미래를 얼마나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극도의 이기주의로 시작한 레즈비언 커플의 출산과 양육, 게다가 이혼한 레즈비언의 양육은 ‘정상적인’ 남녀 부부보다 더욱 힘들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레즈비언이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해야 한다. 그것도 물론 소수자의 인권 보호 차원에서 말이다.      


동성애는 분명히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대원칙에서 그 부자연스러움까지 포섭하는 현대의 시대정신의 틀 안에서 수용하는 법과 제도가 수립되어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 동성애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성적 자기 결정권의 개념으로 해석되고 종료된 문제이지만 동성애자 커플이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의를 도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한국의 레즈비언 커플은 마치 한국이 미개해서 자기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레즈비언에게 인공 수정을 허용하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제공하는 정자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자유롭게 임신하고 출산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존재이다. 소수자는 무조건 피해자라는 도식에 사로잡혀서 피해자는 자기 맘대로 해도 된다는 비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며 ‘멋대로’ 사는 자의 인권마저 존중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프레임을 가장 잘 이용한 사례라고 하겠다.     


어떤 여자가 자기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고 그 여자와 성생활을 하고 부부로 살고 싶다고 주장한다면 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파생시키는 사회적 부담은 결국 사회 구성원 전체가 분담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레즈비언 커플이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서는 레즈비언의 인권만이 아니라 비 레즈비언인 사람들의 인권도 함께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여성의 권리가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이기에 이런 문제가 그저 페미니즘의 프레임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레즈비언이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오늘 하늘만큼이나 한반도 사회의 하늘이 음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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