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버리가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겨우 어린 ‘애들’을 갑자기 여기저기 동원하여 광대 짓 시키는 것으로 무마하는 초라한 꼴을 전개했다. 모두 다 대한민국에서 목에 힘깨나 주는 꼰대의 머리에서 나온 촌극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꼰대끼리 서로 책임 전가에 열심이다. 그런 꼰대에게 ‘애들’은 무엇을 배울까?
대한민국에 ‘어른’은 사라지고 ‘꼰대’만 남은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쉬쉬해왔던 대한민국의 민낯이 이번 잼버리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잼버리 파행의 진행 과정을 보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지능이 훤히 보일 정도다. 일단 준비가 전혀 안 된 행사를 그저 하늘에 맡기면서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사달이 나자 옳다구나 하고 서로 삿대질만 하다가, 외국 언론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호떡집에 불난 모양으로 야단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문제 해결에 앞장서지 않는다. 결국 대통령이 나서서 추가 예산 지원하고 새만금에 모인 ‘애들’을 끌어내어 전국의 여관, 호텔, 모텔, 강당, 교회, 절에 닥치는 대로 보낸다. 그리고 운송 수단과 먹을 것 마실 것은 애국적인 대기업이 나서서 '솔선수범'하라고 닦달한다. 그래도 어수선해지자 내놓은 카드가 바로 새만금 촌구석이 아니라 으리으리한 서울에서, 그것도 잔디 조성에만 10억이 넘게 드는 상암 구장에서 K-pop 공연으로 대충 ‘때우기로’ 한다. 거기 나오는 ‘애들’의 바쁜 스케줄은 ‘애국’을 위해 다 무시되어 버린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권력투쟁에만 몰두한다. 단 한 사람의 꼰대도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한다. 겨우 한다는 것이 책임일 일이 있으면 책임진단다. 그럼 없으면 안 한다는 말이렷다.
이러니 대한민국의 ‘애들’ 가운데 누가 ‘꼰대’를 존경하고 따르겠나? 필요하면 겨우 ‘애들’이나 시켜 앵벌이 하는 어른답지 못한 ‘꼰대’이니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는 권위가 무너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권위주의가 채워버렸다. 그래서 제일 센 ‘꼰대’가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 권력의 말석에라도 버틸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회에는 체면과 도덕은 물론 원칙도 질서도 없다. 그저 각자도생 하면서 눈치 빠른 놈이 줄 잘 서서 성공하면 그만인 나라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아니면 원래 이런 나라였는데 그동안 민주 선진국이라고 착각해 온 것인가?
잼버리 주무 부서인 여가부의 장관씩이나 되는 김현숙은 오늘도 책임 의식 부족에 동의 못 한다고 생떼 부린다. 여권에서는 호남 무능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전라북도 도지사는 책임질 일만 책임진단다. 이런 '꼰대들의 행진'을 보고 우리 애들도 따라 하게 되겠지? 어떤 패악 무도한 짓을 저질러도 다 내가 아니라 남 탓을 하겠지? 그리고 내 잘못을 법적으로 따지지 못하면 희희낙락하면서 멋대로 살겠지? 어차피 보고 배운 것이 그것뿐이니 말이다.
과연 이런 사회에서 ‘애들’을 교육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미 권위가 무너진 사회에서 권위주의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을 과연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권위는 반드시 그 권위자의 권위 행사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약 이번 K-pop 공연 과정에서 드러난, 그런 자발성이 결여된 강제적 동의를 강요하는 사회적 기제만 작동한다면 한국 사회는 독재 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반드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권력은 권력자에게서 나오고 국민은 복종만 강요당하는 노예다. 이런 사회에서 무슨 자유, 자유, 자유 타령인가? 극소수의 권력자들의 전횡에 국민이 비자발적 앵벌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한번 맛 들이면 계속하게 되는 것이 바로 권력 중독이다. 그리고 그 권력 중독은 권력자만이 아니라 피해자도 길들게 된다. 다시 말해서 권력으로 타인을 가학적으로 대하는 행태는 전염성이 강한 것이다. 특히 권위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유명한 밀그램의 실험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되지만 이해를 위해 들어본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은 1961년 그 당시까지 막연히 인정되던 인간 행동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고 권위에 대한 복종의 복잡성을 밝히는 획기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흔히 밀그램 실험으로 알려진 이 연구는 권위자의 명령이 개인의 도덕적 신념과 상충할 때도 개인이 어느 정도까지 따르는지를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밀그램 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홀로코스트의 공포와 씨름하며 어떻게 평범해 보이는 개인이 권력의 영향을 받아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설계되었다. 밀그램은 특히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 것으로 유명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밀그램은 권위자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구하게 되었다.
밀그램의 연구는 권위자가 참가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통제된 실험 설계를 사용했다. 참가자들은 처벌이 학습과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연구에 참여한다고 들었다. 참가자들은 '교사'의 역할을 맡았고, '학습자'가 질문에 오답할 때마다 점점 더 심한 전기 충격을 가한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실제 전기 충격은 없었으며 학습자의 답변은 미리 녹음되어 있었다.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실험자’로 알려진 권위자의 역할이었다. 실험자는 참가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학습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충격을 가하도록 독려했다. 충격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졌고, 실험은 참가자가 실험자의 명령을 얼마나 끝까지 따르는지를 관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밀그램의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 참가자의 약 65%가 학습자의 명백한 고통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최고 수준인 450볼트의 충격을 가했다. 그리고 가장 적게 전압을 올린 경우도 300볼트나 되었다. 그 정도 전압이면 내적인 충격이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말이다. 이를 통해 개인의 가치와 도덕성에 반할 때도 권위자가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악의 평범함'을 강조하여 평범한 사람들도 적절한 상황에서는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사실 밀그램 실험은 참가자들에게 심리적 고통을 일으켰기 때문에 심각한 윤리적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참가자가 실험 도중 극심한 스트레스, 불편함, 내적 갈등의 징후를 보였고, 이에 따라 사전 동의와 잠재적인 심리적 피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비평가들은 참가자들이 실험의 성격과 정신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영향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부는 권위의 압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가자들에게 지속적인 정서적 영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밀그램 실험은 심리학 연구에서 과학적 탐구와 윤리적 고려 사이의 균형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이 연구의 논란으로 인해 피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대한 보다 엄격한 윤리적 지침이 마련되었으며, 사전 동의, 디브리핑, 피해 최소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밀그램의 실험은 인간이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운 내면, 곧 권위주의 사회에서 권력자가 강요하면 매우 평범한 ‘시민’도 얼마든지 매우 폭력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는 또 다른 가해자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나치 시절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파쇼 정권이 득세하던 이탈리아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달이 끝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분명히 희생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유대인 6백만 명을 포함하여 1,200만 명이 이러한 광기의 희생자가 되었다. 순전히 히틀러와 그를 추종한 나치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리고 그 나치에 동조한 이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교황 베네딕도 16세, 철학자 하이데거도 있었다. 게다가 나치를 추종한 독일 기독교의 목사와 신부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달이 끝나도 이들 가운데 누구도 반성한 자가 없었다. 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살을 했으니 되었단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도 다름없다. 이명박과 박근혜 밑을 열심히 닦아주던 자들이 주군이 잡혀가 옥고를 치르는 데도 나 몰라라 한다. 그리고 변명은 나치 협력자와 같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단다. 다들 머리에 해바라기 한 그루씩 심고 다니나? 그러다가 잊을만하면 이동관처럼 다시 기어 나온다. 그러다가 윤석열 정권도 무너지고 나면 또 똑같은 변명을 하겠지? '시키는 대로...'
나치의 경험으로 독일은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고 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의원내각제도 아래 총리가 권력을 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철저한 지방 분권 제도로 주지사의 권한을 함부로 침해하지 못한다. 독일 연방의회의 다수당 당수가 통상적으로 총리가 되지만 주지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미국의 상원의 역할을 하는 연방참사회(Bundesrat)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주의 이익에 관련되는 법을 시행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의 삼권분립 제도의 근본 원칙인 '견제와 균형'을 이런 식으로 실천해 해나가는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실시하는 프랑스나 미국도 별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번 잼버리 사태에서 잘 드러난 대로, 전라북도가 진행한 잼버리 행사가 파행을 격자 중앙 정부에서 마음대로 그 일을 처리해 버리는 것인 대한민국이다. 무늬만 지방자치이지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저한 중앙집권 국가임을 잘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 중앙집권 제도도 결국은 최고 권력자의 자의에 따라 멋대로 운영될 수 있다는 지극히 부끄러운 현실을 드러내 주었다.
과연 대한민국의 ‘꼰대’는 ‘애들’ 앵벌이로 근근이 버티는 이런 짓을 과연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권위주의와 권력으로 채찍질해 대는 자유, 자유, 자유만 만끽하는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영원무궁하지 않을까? 아니다 권위주의와 독재는 반드시 부패하고 부패한 정권은 반드시 무너진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의 누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