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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유럽 전체의 질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I

아데나워 전기 II

목적을 둘러싼 갈등과 권력 투쟁  

   

아데나워가 1957년 9월 15일 총선 승리로 확보한 힘을 외교 정책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아데나워가 총선 직후 중앙당 당 대표단에 이에 관하여 발언한 것을 보면 그는 여전히 일반론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절제를 발휘하자는 것이었다. 독일의 오만을 결코 보여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상당한’ 겸손을 발휘해야 했다. “독일이 패망한 지 겨우 12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그 얼마 전에 회의 석상에서 우리는 이제 “강대국이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을 보면 그러한 신중한 자세는 그의 생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독일의 위상을 재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기민당(CDU)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가 한 연설의 뒷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결코 하나의 계획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일 뿐이었다. 분단된 독일과 서유럽의 발전을 위한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의 책임은 막중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유럽 전체의 질서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나라를 이끄는 당이 되었습니다.”          

유럽과 독일의 새 질서는 여전히 아데나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에서만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탄생하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데나워의 최측근이었던 발터 할슈타인이 그 기구의 의장이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여기에 아데나워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상의 핵심이 놓여 있었다. 곧 독일과 프랑스의 양자 협력,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삼자동맹, 서유럽 6개국의 정치동맹, 통합공동체 안에 영국을 끌어들이는 것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 집권 3기에 들어서서 전 유럽과 전 독일의 새질서에 관한 모든 희망의 빛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끝 무렵인 1961년 8월 13일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그러나 ‘1947년 가을 아데나워가 어떤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라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상황과 아데나워가 외교 정책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빗겨나간 것이다. 독일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수상은 무엇보다도 외부에서 촉발되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과 위협에 대하여 책임져야 한다. 총선 승리의 기쁨이 잦아들기도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바람에 아데나워의 동방 정책은 그가 수상 임기를 마칠 때까지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추진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제4공화국의 마지막 내각 시기에 유럽 공동시장과 독일과 프랑스의 양국 협력이 막 시작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드골 장군이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보였다. 드골이 프랑스의 최고 권력을 차지할 것이라는 가능성만으로도 아데나워는 좌절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제4공화국이 그 종말에 이를 무렵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프랑스의 플림린 총리와 앙투안 피네에게 자기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통합을 위하여 드골의 권력 장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때만 해도 자신이 곧 드골과 더불어 독일과 프랑스의 긴밀한 협력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가 몰래 바라고 있었던 것인 미국의 헤게모니에 관한 대안을 찾을 전망을 마련하게 될 것을 몰랐다.     

1958년에 발생한 모든 위기를 사실 아데나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 곧 프랑스의 국가 위기,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에서 벌어진 새로운 중동 위기, 타이완의 진먼(金門)섬과 일본의 마쑤 열도를 중심으로 한 극동지역의 위기, 베를린 위기를 아데나워는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을 경험과 귀납적인 방법을 통하여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데나워가 국내 정치와 마찬가지로 외교에서도 다양한 노선을 병행 추진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957년과 1958년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독일군을 조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또한 핵무장 완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 시기에 독일연방 수상을 ‘대서양주의자’로 인식한 이는 그를 매우 올바로 판단한 것이다. 연합국들의 상황, 기술적 발전, 소련의 흐루쇼프의 외교 정책은 아데나워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독일군을 통합하고 미군의 독일 주둔을 통하여 독일의 안보를 확립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노선도 관련되어 있었다. 1957년 10월부터 1958년 5월까지 독일과 프랑스가 보여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 조직이라는 틀 안에서 이룩한 긴밀한 협력은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함께 핵무기와 그 운반체계를 생산하고자 한 것도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에서 1958년에 이미 아데나워가 대륙의 유럽통합 개념을 최종적으로 확립했다고 추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당시에도 여전히 독일과 영국의 협력을 위한 노력이 추구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에 아데나워와 영국 총리와 외무장관 사이의 관계는 다혈질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큼이나 매우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1954년 이후 독일과 영국의 관계가 아데나워의 런던 방문 이후인 1958년 4월만큼 좋았던 적은 없었다.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연 영국이 진정 유럽에 통합될 수 있을지 늘 의구심을 품었던 사람이었던 제가 이제는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연방 대통령인 호이쓰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 방문을 통하여 영국 정치에 관한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잠깐이나마 지난 1950년대에 가졌던 확신을 되살리게 되었다. 곧 영국과 힘을 합쳐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1955년 여름 이후 서유럽을 대상으로 한 정책을, 동유럽을 향한 건설적인 접근을 통하여 보완해보려는 아데나워의 노선을 명확히 찾아볼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정적들은 그에게 명확한 동방 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하였지만, 현실은 달라 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정적들과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언론인들에 관한 일종의 책임 회피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추구하는 정책의 시초로 여겨진 것도 있었다.     

아데나워가 소련의 대화 거부 태도 때문에 동방 정책에서 실질적인 것을 약속할 수 없었던 시기는 그가 진정한 발전이 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것보다 분명히 더 길고 많았었다. 아데나워는 공산주의 영역의 변화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자 한 기도의 성과는 사실 모스크바가 위성국가들에 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는 여부에 달려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1955년 9월 매우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동방 정책의 옹호자였던 쿠르트 게오르그 플라이더러를 벨그라드로 파견하였다. 이해 4월에 이미, 곧 6월 7일에 있었던 유명한 소련의 아데나워 초청이 있기 전에 아데나워는 기회가 오면 그를 소련 주재 제1대 독일대사로 임명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1956년 가을 ‘폴란드의 10월’*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그는 외무부가 폴란드와 어떤 형태의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조용히 연구해 보도록 하였다. 1957년 만이 아니라 1958년 상반기까지 매우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소련과의 대화 시도도 있었다. 여기에는 주독 소련대사인 스미르노프를 통한 대화 시도,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인 라르의 협상, 소련의 불가닌 수상과의 개인적 서신 교환, 1957년 12월 16일에 있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파리 회의에서 진행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데나워의 기조연설에서 제시된 화해 신호, 1958년 4월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독일 방문 등이 있었다.      

* 폴란드의 10월 [혁명] [폴란드어: Polski październik, 역자주 -  폴란드 해빙, 고무우카 해빙으로도 알려진 사건. 1956년 3월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사망한 후인 6월 포즈난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무자비하게 제압당함. 그러나 10월 들어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가 이끄는 개혁파 세력이 커져서 협상 끝에 소련이 고무우카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폴란드 정부의 자율성을 보장함. 그러나 고무우카 정권이 독재화 되어 폴란드의 해방은 무산됨.]     

이는 모든 국가의 군축을 선전하는 가운데 독일 문제 해결의 진전 가능성을 탐색해 보려는 노선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에 관하여 흐루쇼프가 긴장 완화에 나설 준비가 된 것에 관한 것만큼이나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고착화된 동서 갈등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데나워가 소련연방공화국의 건설적 정책에 대하여 상응하는 구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확인해 본 적은 분명히 없었다. 그러기에는 1955년 여름, 1957년 초반 또는 1958년 초반에 보여준 소련의 우호적인 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흐루쇼프가 1958년 가을에 시작하여 1962년 가을까지 되풀이 되었던 베를린에 대한 공격은 동방과의 모든 화해 정책의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그래도 아데나워 수상이 내부적으로 베를린 대책을 마련하여 상황에 따라 모스크바와의 대타협이 가능하다고 여기며 이에 대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노선들이 여러모로 서로 충돌하고, 하나의 정책이 다른 정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실 모든 외교 정책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아데나워와 같은 정치가에게는 특히 두드러지게 발생한다.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에서도 계속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무엇보다도 여러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 정책 스타일은 매우 세심한 조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워낙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최대한 그에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1958년 여름에 블랑켄호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할 정도로 아데나워가 외교에 매진하였다. “외교 정책의 무게 중심이 다시 연방 수상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었다. 중요한 국가의 대사들은 그를 먼저 찾았다. 그리고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서도 아데나워는 과거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가 외교 업무를 내려놓은 이후에 그를 보좌하는 커다란 조직이 사라졌다. 연방정부 수상실 내부 전문인력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1957년의 경우 누구보다도, 연방 공보실의 폰 에카르트가 있었다.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로 나가 있는 블랑켄호른도 한몫하였다. 나중에 글롭케도 가끔 아데나워를 거들었다. 그러나 외무장관인 폰 브렌타노가 외교 문제에 관한 제1 자문을 자처하였기에 이들 사이에는 늘 불협화음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어려운 때가 1956년 겨울부터 1958년 초반까지였다. 확실히 개념이나 개별 문제에서 발생하는 대립을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복잡한 정책 결정 과정을 분명히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 정책의 경우는 일 자체에 관한 문제와 입장의 대립이 서로 뒤섞였던 것이 거의 분명했다.          

모스크바와 외교 관계를 조속히 회복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폰 브렌타노와 할슈타인이 유고슬라비아가 동독을 인정한 1957년 가을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단절을 주도한 것이 분명하였다. 여기에서 동독을 인정하는 문제에서 다른 나라들도 이어서 인정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날 것에 관한 독일 외무장관의 우려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그는 폴란드에 대해서는 유연한 정책을 폈다. 이는 국경 문제를 논외로 한 외교 관계의 정상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외부무를 이끄는 인물들은 독일 통일 정책의 추진에서 195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4강 국가들의 협상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들은 야당만큼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서 블랑켄호른과 폰 에카르트는 지나치게 강경한 정책을 피하는 방법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연성에 관한 광범위한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독일연방공화국의 막강한 경제력에 관한 신뢰심을 지니고 있었다. 블랑켄호른은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둘러싼 내부적 갈등이 첨예화된 1957년 10월 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경제적 정치적 무게는 오늘날 이미 막강해졌다. 그래서 일부 국가에 동독의 대사들이 주재해도 대범하게 넘길 수 있다. ...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법적 제도의 강제 규정을 극복하면서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에 관한 흡인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느리지만 단계적으로 서유럽을 지향하고 나아가 자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블랑켄호른은 어느 정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에 관련된 임무에 실패하여 매우 상심하였던 플라이더러 대사의 노선에 동조하고 있었다. 플라이더러는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인 1957년 10월 초에 ‘동방 정책의 새로운 구상’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제안서에서 두 개의 독일 정책을 지지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는 동유럽 블록의 내적 붕괴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폰 에카르트나 블랑켄호른과 같이 여당 내부에서 이성적인 동방 정책을 지지하던 정치가들은 생각이 같았다. 곧 동유럽의 내부적 변화 과정의 촉진을 도모하는 것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4대 강국이 부여한 국제법적인 의무에 지나치게 엄격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독일의 정치에도 훨씬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데나워가 1957년 11월과 12월에 블랑켄호른을 외무부 차관 자리에 복귀시키려는 시도를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인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아데나워와 폰 브렌타노의 관계는 다시 최악을 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할슈타인은 좋은 이유를 들어 외무부에 2명의 차관을 임명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블랑켄호른은 이때 매우 복잡한 소송에 휘말렸다. 곧 경제부에서 근무하는 슈트라흐 부장이 그와 할슈타인에게 맞선 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그 소송은 조만간에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12월 중순에 갑자기 행운이 찾아왔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발터 할슈타인을 유럽경제공동체(EEC)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절호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유럽 공동시장보다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더 선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르망을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위원장으로 추대하기를 바랐다. 게다가 프랑스는 광업연합 의장 자리도 원하였다. 베네룩스삼국은 새 공동체의 건물이 브뤼셀에 들어서기를 바랄 뿐 의장 자리를 원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가 프랑스를 설득하여 할슈타인을 추대한 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의 수상 재임기 초중반에 최측근으로 일하던 할슈타인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그를 총애했다. 그가 자신과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곧 의지가 강하고 늘 준비가 된 협상가였으며 본질적으로 자만심이 넘치고 불분명한 것을 질색하였다. 그리고 지도력이 강한 보스 기질이 있었다. 할슈타인이 논리적이고 모순이 없는 입장을 고수하는 데에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아데나워도 잘 알고 있었다. 독단적인 일 처리 방식이 외교 관계 단절도 감수하려는 태도와 결부된 것을 한 가지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1958년부터 언론에서 이른바 ‘할슈타인 독트린’*을 언급하면서 이 할슈타인 차관을 편협하고 순전히 법률적인 관점만 지닌 대표적인 인물로 낙인찍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할슈타인 독트린 [Hallstein-Doktrin, 역자주 - 1955년부터 1969년까지 독일연방 공화국의 외교 정책. 제3국이 동독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서독에 대한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해야 한다는 정치적 지침. 이는 동독을 국제 외교에서 고립시키는 조치였고 경제 제재부터 해당 국가와의 외교 관계 단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제재가 가능했음.]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관련하여 회사법의 성격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할슈타인의 통합 개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할슈타인은 늘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아데나워가 유럽을 초국가적인 법적 공동체로 보는 생각을 지니도록 하고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의장으로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이바지를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아데나워는 이 초국가적인 위원회의 독자적인 활동과 유럽 통합을 향하여 나아가는 빠른 속도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 측근으로 있었던 인물을 가끔 비난할 뿐 그의 행보를 막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독일 출신 의장을 낙마시킬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1957년 12월에 결국 블랑켄호른이 외무부 차관 자리에 복직하는 일에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 글롭케, 크로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블랑켄호른과 폰 에카르트가 아데나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바람에 글롭케가 자기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폰 브렌타노도 비슷한 결단을 내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폰에카르트와 블랑켄호른의 정적들은 아데나워의 천성적인 사람에 관한 불신에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사람은 이 무렵 게르스텐마이어와 자주 대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게르스텐마이어는 여당 내부의 아데나워에 관한 반대세력의 맨 앞에 서서 아데나워에게 유연한 긴장 완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블랑켄호른이 게르스텐마이어 외무장관이라는 인물 한 사람 아래에서만 일하려고 꾀를 낸 것인가?     

1958년 1월 20일 아데나워와 게르스텐마이어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당 대표단 회의에서 처음으로 크게 충돌하였다. 기민당(CDU) 중앙당 대표회의에서도 게르스텐마이어는 자신이 아데나워의 외교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솔직히 드러냈다. 여기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게르스텐마이어와 너무 밀착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폰 에카르트도 마찬가지로 게르스텐마이어와 친하다는 이유로 강력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브렌타노가 승리를 거두어 그가 원했던 힐거 판 쉐르펜베르크 차관을 등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서신 교환, 고위회담, 대사들과 면담을 통하여 자기 외교 정책을 외무부에 전달하였다. 1958년 7월 언론에서 외무장관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서자 아데나워는 공개적으로는 외무장관을 두둔하였지만, 테오도르 폰 호이쓰 대통령과의 개인 대담에서는 더 이상 브렌타노를 외무부 수장으로 둘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아데나워의 후계자에 관한 논의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늘 언급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은 이러한 해결책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폰 브렌타노를 살린 것은 먼저 베를린 위기였다.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외무장관을 교체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별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가 1957년 총선 이후 이상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불분명하며 일관성이 매우 부족한 외교 정책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최측근들이 벌인 권력투쟁과 여당 내부의 동요를 고려해서 보면 된다. 그 당시 대부분의 견해차와 좌절의 주요 원인은 독일 정책이었다.    


수세 – 할슈타인 독트린과 라파츠키 플랜*에 맞선 투쟁   

  

* 라파츠키 플랜 [Rapacki-Plan, 역자주 - 폴란드 외무장관 라파츠키가 내세운 중부 유럽 비무장화 계획)     

아데나워의 많은 지지자는 그가 총선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독일 통일 문제 해결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955년 가을 제네바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된 이후 아데나워는 이 문제의 해결도 지지부진하게 될 것임을 잘 알게 되었다. 소련은 그때부터 동독의 국제법적 인정을 추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와 영국도 필요한 경우에는 군비축소와 군비통제 협상을 독일의 분단이라는 현재 상황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과 연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파리와 런던이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군비통제 협상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여있었다. 이는 간접적으로 독일군의 인원과 장비를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노릇이었다. 1956년 초 아데나워에게 이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은 현재 상황을 이유로 들면서 동서 대화의 시도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아데나워가 늘 빠져 있던 회의감이 더욱 깊어졌다. 곧 과연 유럽의 안보와 독일 문제의 해결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관한 고민이 깊어진 것이다. 독일연방정부는 두 문제에서 반드시 동시에 성과를 내고자 하였기에 긴장 완화 정책에서 방해꾼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합국 측은 독일이 협상에 유연한 태도를 보일 것을 되풀이하여 강요하였다. 그럴 때마다 독일은 유럽의 안보 문제나 독일 통일의 문제에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군축, 특히 핵무기 감축을 더욱 중요시하고 이를 독일 문제와 분리시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예상에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곧 독일의 통일은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는 시기에나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서 간의 전반적인 긴장 완화, 곧 상호 신뢰의 증진, 군축의 진전, 소련의 약화가 나타날 때 독일 통일을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위한 여건이 전혀 마련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1956년 동유럽 지역 국가들의 위기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 해결에서 원칙적인 해결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곧 4강 회담에서 모든 문제 해결 방안을 협상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독일의 언론, 특히 야당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그리고 외무부 또한 이러한 방식에 그 어느 때보다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격렬한 대립이 이루어져 온 독일 회담이라는 전선에의 독일 정치 차원의 공격이 점점 더 무기력해 보이기에 최소한 방어라도 잘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독일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분단의 고착과 지속이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동독을 제2의 독일로 만들어 외교 무대에 등장시키고자 하는 소련의 노력이 세계적으로 노골화되었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서독은 자신만이 정당한 독일 중심 국가로 여기고자 했던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단독으로 독일을 대표하고자 하는 요구는 아데나워 정부 수립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제국의 법통을 이어온 나라임을 강조하였고 민주적 입헌국으로서 독일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임을 내세워 왔었다. 또한 아데나워의 서방과의 유대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은 단순히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만이 아니라 통일된 전체 독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단독으로 독일을 대표하고자 하는 요구는 또 다른 외교적 함의를 지닌 것이었다. 과연 본과 외교 관계를 맺은 제3국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면 독일연방공화국은 어떤 대책을 취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주권 국가가 되고 얼마 후에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비로소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가 1955년 9월 22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표명한 입장은 매우 신중한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연성은 당시 외교부 정책 담당 부서장이었던 빌헬름 그레베가 제안한 것이었다. 곧 독일연방공화국은 ‘앞으로도’ 제3국이 동독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관계 수립은 독일의 분단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재의 정치적 목적은 당연히 동독의 국제적 고립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수상의 실용주의적 본성에 맞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사안에 따라 다양한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실용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이제 아데나워가 새로운 문제에 당면했기 때문이다. 곧 1949년 11월 이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동유럽 블록의 모든 국가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그런 국가들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경우를 거울삼아 대처할 수 있었다. 곧 독일 문제에 관하여 일단 결정을 보류하기로 합의하는 것과 동시에 ‘선천적 결함의 이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실적으로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에 다른 대안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외교부 안에서도 매우 의견이 분분했던 위성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라는 복잡한 문제는 1956년 10월 폴란드에 블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가 이끄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꼬이게 되었다. 이 정권은 처음에는 국내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서독의 언론에서는 폴란드의 내외적 자유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독일의 폴란드에 관한 정책에 시동을 걸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언론, 야당, 여당의 중진들은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빌헬름 그레베는 무역위원회를 수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브렌타노도 고무우카의 수정공산주의 정권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신중했다. 한편으로 1956년 가을에 그는 ‘소련의 속국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모든 것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기 위성국가들로 형성된 벨트를 완화하는 것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더구나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사건이 발생하자 아데나워는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폴란드에 관한 적극적인 정책을 시작할 적절한 시점을 여전히 찾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고무우카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로 여전히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1957년 2월 상황이 더욱 불투명해지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 회의에서 외무부가 “동유럽 블록 국가들, 특히 폴란드와의 관계라는 중요한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다룰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고무우카가 전술적으로 옳다고 여기지 않는 조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데나워는 그 회의 석상에서 발설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소련이 지배하는 영역을 불필요하게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아데나워는 소련의 위성국가들의 영역을 소련의 뜻과는 별도로 조심스럽게 탐색해 보는 조치를 할 생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 4월 폴란드의 변화에 관한 열광이 식어갈 무렵 바르샤바와의 관계라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때 소련의 수상 직무대리인 미코얀과 아데나워 사이에 매우 중요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미코얀은 독일연방공화국이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와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이 그런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 그런 나라들과 소련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렇게 관계를 맺으면 모스크바에서는 그런 나라들을 서방의 진영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미코얀이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하자 아데나워는 즉각 폴란드의 경우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그러자 미코얀은 폴란드가 독일과 외교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도 소련이 환영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그 대담 이후 몇 달 동안 계속 폴란드 정책을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소련의 통치 영역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지혜를 발휘하여 소극적인 조치에 관한 국내 정치적인 요인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실 총선 시기에 그러한 것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추방민당(BHE)의 득표율을 5% 미만으로 억눌러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 정당 지지자들의 표를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아데나워는 총선을 대비한 전술적 계산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결국 국경 문제는 평화 협상을 시작할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도 이에 대해서는 생각이 여전히 같았다. 사민당(SPD)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폴란드에 우호적이었던 카를로 슈미트도 1958년 3월에 브렌타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연설하고 정치적 대화를 나누면서 폴란드 하원의 외교위원회에서 그러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 있던 독일인들이 추방된 것이 매우 매우 심각한 부당한 조치라는 견해를 내부적으로나 공개적으로나 자주 나타내었다. 그는 해당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이에 관한 보상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추방된 독일인들이 바라는 대로 원래 살던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1957년에도 그 지역에 관한 공동통치 구상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57년 총선 이후 2주가 지난 무렵 아데나워는 텔레비전 대담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는 추방민들의 원래 살던 지역에서의 거주권을 보장하고 오더·나이쎄 국경 너머 지역을 전 유럽적 차원의 단위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무우카가 성대한 대접을 받으며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오더·나이쎄 국경을 인정한 것에 대한 아데나워의 응답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조치에는 폴란드와 더불어 누구보다도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폰 에카르트를 시켜서 총선 기간 말미에 들어온 이 소식으로 소동이 일지 않도록 적절히 조처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명백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티토는 10월 15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독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공표하였다. 이리하여 서독이 유일하게 독일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무렵 브렌타노는 국무회의에서 ‘연쇄반응’의 위험을 근거로 이에 관한 과감한 조치를 주장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22~25개 국가가 추가로 동독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티토의 행동은 그저 독일의 위협에 관한 저항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자유선거를 통한 독일의 통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었다. “만약 2개의 독일이 존립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귀하가 생각하는 자유선거라는 방법은 이제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브렌타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였다. 곧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동유럽 정책에서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누구도 폴란드가 서독과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동독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청하지는 않았다. 폴란드는 ‘세상에 잘 못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브렌타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가 독일의 강력한 태도를 지지한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그는 할슈타인이 개인적으로 전달한 독일의 입장을 통하여 베오그라드에 관한 강력한 조치를 외교적으로 잘 마무리하였다.     

10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게 되자 아데나워는 브렌타노와 할슈타인의 강경 조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단교 조치의 이유로 무엇보다도 독일 통일에 관한 정책이 아니라 불안한 세계정세를 내세웠다. 또한 지난 며칠 동안 그에게 전달된 정보도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곧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우주로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미사일 무기 기술이 월등히 발전되어 있다는 추론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메르카츠의 기록에 나온 아데나워가 밝힌 처음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이 미사일 기술에서 선두에 서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국방비의 지나친 절감과 관용 정책이 낳은 결과입니다. 세계정세가 불안합니다. 이것을 티토가 이용하여 동유럽 블록의 결속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연한 노선을 택할 것인가? 그러면 동유럽 블록 국가들이 우리를 만만하게 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정책은 일관되고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레머가 단교 조치를 지지하면서 그러한 조치를 통해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이미 말한 비관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하여 폴란드만큼이나 부정적이라고 하였다. “티토는 산도적 두목과 같습니다. 온 사방에서 돈만 받고 있습니다. ... 고무우카는 다시 모스크바로 기울고 있습니다.”     

국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유고슬라비아와의 단교를 결의하였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단서 조항을 달았다. 곧 이 사실을 공표하기에 앞서 브렌타노가 독일 연방의회의 여당과 논의하고 그 결과를 아데나워 수상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바지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단절이 잘못이라고 여기는 인물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10월 18일 아침에 아데나워를 면담하면서 ‘율법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같은 인물로 낙인찍히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단교를 감행하면 장기적으로 고립되고 비동맹국가에 관한 독일의 영향력도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얼마 후에 펠릭스 폰 에카르트도 아데나워에게 비슷한 우려를 전달하였다. 여기에서는 게르스텐마이어, 블랑켄호른, 폰 에카르트 무리의 집단 저항이 작용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누구보다도 블랑켄호른은 결국에 가서는 현실화하지 않았던 우려를 표명하였다. 곧 이집트, 시리아, 어쩌면 인도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할지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그런 국가들과도 국교를 단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독일의 체면을 크게 구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유연하게 대처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에 속하는 블랑켄호른은 10월 15일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우리가 장기적으로 소련의 위성국가들을 상대로 주도권을 충분히 행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폴란드와의 관계는 비록 경제정책에 제한된 것이라고 하여도 장기적으로 볼 때 원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단교에 집착하고 있었다. 단교를 비판하는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단교하지 않을 경우에 피해가 더 적으리라는 것을 자신 있게 주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제 다시 블랑켄호른을 본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브렌타노와 할슈타인은 결국 유고슬라비아에 관한 강경 노선을 관철했다. 이들의 계산이 옳았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아데나워가 살아 있는 동안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 이외에 그 어떤 나라도 독일연방공화국과의 유익한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동베를린 정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을 이러한 딜레마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비난하였다. 아데나워는 만약 브렌타노가 동독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일연방공화국이 자동적으로 국교를 단절하는 조치를 확정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당면한 딜레마를 피할 수도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일단 폴란드와의 관계가 다시 냉각기에 빠지게 된 것을 아데나워가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했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는 외무부가 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벨그라드에서의 사달이 벌어진 이후에 고무우카 정권이 독일과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관계에 위기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데나워는 폴란드가 유고슬라비아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그물 안에 있는 국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 외교 정책에서 그러하다고 보았다. 1957년 11월 중순에 열린 연방정부 국무회의에서 폴란드에 관한 재정 지원이 안건으로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말했다. “폴란드는 모스크바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독일에서 누구나 동유럽과 경제적 관계를 맺고자 나설 것입니다.”     

몇 달 후에는 그의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폴란드 문제에 관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는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역량이 증가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견해로는 소련의 위성국가 내부에서 (서유럽 국가에) 접근하려는 경향을 강화하는 데에 심리전 무기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모스크바입니다. 모스크바는 동유럽 국가들이 서구 국가들에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를 결국 피를 부르는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독일처럼 (동유럽의) 그러한 정책을 지지하는 나라에 대하여 매우 불친절하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국내 정치에서 모든 그의 정적들이 폴란드 외무장관인 라파츠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여긴 이후부터이다. 라파츠키는 독일과 폴란드를 비핵화 지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폴란드의 외교가는 이러한 제안이 폴란드의 단독적인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1956년 10월 2일 처음 제안하였고 1957년 12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 직전에 다시 한번 제안하였던 계획은 사실상 소련이 1956년 3월에 이미 제안했던 것이었다. 곧 그 계획을 원래 기획한 인물은 라파츠키가 아니라 그로미코였다.     

아데나워가 핵무장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려고 하는 가운데 라파츠키의 계획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라파츠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와 논의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의 반대는 변함이 없었고 이러한 태도는 나중에 가서 그러한 안보 개념을 다시 제기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것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비핵화의 경우 지정된 지역에 대한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조약을 통하여 확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위험한 경우에 관한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핵무기 공격의 위험은 전쟁이 발발 한 경우에나 비로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격렬한 분쟁이 어차피 발생해야 한다면 라파츠키 플랜에 관한 조약을 맺는 것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법입니다.” 핵무기 보유국들은 비핵화지역 ‘안에’든 그 나라를 ‘지나서든’ 어차피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 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조약을 맺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소련이 비핵화 지역 위로 프랑스를 목표로 핵무기를 발사하고 역으로 프랑스 땅에서 미국과 프랑스가 동일한 지역 위로 소련을 목표로 핵무기를 발사한다면 동풍이 불든 서풍이 불든 방사능 구름이 이 지역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소련조차도 바람을 자기 맘대로 불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연합국 측의 중요한 논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 주둔군의 핵무장을 추진하려는 결정을 분명히 내렸다. 그 군대가 계속 주둔하기를 바란다면 핵무장도 감수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데나워가 1958년 2월 초에 자신이 휴가를 보내던 남프랑스의 벵스에서 라파츠키 플랜에 찬성하는 데모 군중의 함성을 듣고는 근심 어린 전보를 글롭케에게 보냈다. “대도시들에서 폴란드가 제안한 비핵화 지역에 찬성하는 데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독일의 안보를 극도로 위협하는 이러한 제안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 다른 국가의 경우에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이러한 관계로 독일 주둔 연합군의 유지 비용에 관한 정부 대표와 연정 정당 대표들을 통한 독일 연방정부 차원의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독일을 둘러싼 비핵화 지역이 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와해시킬 것임을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에 상응하는 소련 측에 관한 조치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계획을 독일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라파츠키 플랜은 ‘소련이 놓은 덫’이었다. 그런데도 그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와해가 초래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또한 그 계획이 서방 선진국 사이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생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로 파견된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과 같은 명민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블랑켄호른만이 아데나워가 휴가지에서 보낸 편지들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커다란 근심에 빠진 아데나워는 자기 측근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무차별적으로 보냈다. 여기에서 블랑켄호른은 나중에 잘 알려진 대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라파츠키 계획은 여전히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도 곧 그러한 입장을 밝히면 좋겠습니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가 독일의 국격과도 관련된다고 여겼다. 비핵화 지역은 군사력이 미약한 지역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극도로 신중하게 접근하기 바랍니다. 군사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상황에서 군사력 배치가 미약한 지역인 독일은 결국 이류 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군사력이 미약한 지역과 관련하여 특별한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파리에서는 귀하가 같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자리에서 다름 아닌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독일 영토의 상당 부분이 군사력이 미약한 지역과 같은 특별한 지위에 놓이게 되면 독일에 발생할 수 있는 전체적인 정치적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이러한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1959년 초에 하필이면 프랑스가 제출한 회담 안건에서 중부 유럽 지역에 통제지역을 마련하는 계획이 다시 언급되자 아데나워는 브렌타노에게 짧지만 힘에 넘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한 제안이 담긴 서류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안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굴욕적입니다. ... 귀하가  그 서류를 프랑스 측에 정중하지만 분명한 거절의 뜻을 담아 되돌려 주도록 독일 대표단에게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대표단이 그러한 조치를 귀하의 명의로 할지 아니면 귀하와 나의 공동명의로 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귀하에게 일임합니다.”     

아데나워는 영국이 중부 유럽에 통제 지역을 지정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1957년 12월 조지 케넌은 BBC 방송에서 이른바 ‘레이스 강의’(Leith Lectures)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불간섭주의를 다시 거론하고 나섰다. 이 유명한 미국 외교관의 강의 시리즈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렀다. 아데나워의 의심병이 즉각 도졌다. “케넌의 BBC 방송 강의는 영국 정부가 촉발하고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도 갈등을 벌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1950년대에 독일의 국가에 관하여 그와 논쟁을 벌인 이래 그와 계속 불화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와 호이쓰가 외교 문제에서 대체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인 것은 놀라운 현상이었다. 아데나워가 자민당(FDP)의 두 정치가를 특별히 싫어했기에 이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른바 뒤셀도르프의 ‘나치 자민당(FDP)’의 토마스 델러(“말이 너무 많아!”)와 마리아 엘리사베트 리더스(“거짓말을 정신없이 막 해!”)를 극도로 혐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호이쓰가 신년 연설에서 케넌을 언급하면서 그가 ‘신중하고 현명한’ 인물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이쓰에게 책을 보내고 매우 친절한 답신도 받은 차였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가 호이쓰에게, 매우 감정을 억누르면서도 언짢은 수상 특유의 문체로 편지를 보냈다. 사실 이러한 문체는 내각의 여러 장관만이 아니라 의회의 여러 의원에게도 ‘상처’가 되었었다. “케넌 씨는 현재 비현실적인 관점을 들고 나와 매우 유감스러운 방식으로 독일을 무력화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곧 마주하게 될 외교 문제에 관한 중요한 논의에서 케넌 씨는 사민당(SPD) 측에 동조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호이쓰는 아데나워의 비난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이후에 나온 발언에서는 아데나워의 어조가 매우 부드러워졌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에 대하여 여러 경로로 유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변명하기를, 자신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서방 강대국의 지도적 정치가들, 특히 덜레스에 맞서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 요량으로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아이젠하워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지만 호이쓰에게 다시 큰 탄식의 노래를 전하였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여전히 미국이 서유럽 강대국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도 의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미국은 유럽 강대국에 등을 돌리고 이를 희생으로 삼아 소련과 야합할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의심과 프랑스와의 핵무기 비밀 공동 개발  


1957년 가을 아데나워는 모두를 의심했다. 곧 소련, 사민당(SPD), 여당, 외무부, 국방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을 의심하였다. 1956년 여름과 가을에도 아데나워는 미국을 지속적으로 의심하였다. ‘스푸트니크 쇼크’는 아데나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데나워는 10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곧 흐루쇼프는 다른 모든 강대국은 제쳐놓고서 미국과만 세계 문제에 관하여 2장짜리 문서로 된 협약을 맺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정책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스타센, 전임 국방장관 윌슨을 포함한) 미국의 많은 중요 인사들의 무책임한 태만으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된 군비 균형으로 흐루쇼프가 이러한 정책을 마련하는 데에 적당한 근거를 마련해 주게 된 것입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비교적 짧은 간격으로 10월 11일과 11월 11, 19, 26일에 독일 연방 국방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그 사이에 슈트라우쓰, 호이싱거, 루스트, 겔렌과의 연석 대담이 있었다. 또한 외무부 고위 관리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인 블랑켄호른과도 대담을 나누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아데나워는 미국이 독일의 국방부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미사일과 핵무기 장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두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미사일 장비 수준에 관한 신랄한 질문에 대하여 슈트라우쓰와 호이싱거가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소련의 핵무기를 위성국가에 보관하는지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런데 겔렌은 달랐다. 국방부의 수뇌부가 주최한 독일 연방 국방위원회의 회의 개최 이틀 후에 겔렌이 강의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겔렌은 가방에 하나 가득한 그림들을 들고 왔다. 그는 이 그림으로 소련의 붉은군대가 엄청난 규모의 핵무기와 미사일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겔렌은 광범위한 핵무기고 시설을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 걸쳐 배치하였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그는 아데나워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후 한동안 호이싱거는 아데나워의 신뢰를 잃었다. 그가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면 필연적으로 벌어질 사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화를 낸 것은 사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이해 5월에 이미 노스태드 장군이 아데나워의 질문에 대하여 소련의 핵무기가 위성국가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며 그 의미를 억지로 축소하려고 하였다. 국방장관 슈트라우쓰는 이때 동독에 재래식 무기와 핵폭탄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대포가 배치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가 그로부터 6개월 후에 국방부가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비난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1957년 11월에 와서 아데나워는 과거에 있었던 대담을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가 이런 식으로 하나의 핑곗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인가? 곧 미군의 핵무기를 독일에 배치하는 문제에 관한 조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한 불만을 나타낼 틈을 마련할 핑계 말이다.     

아데나워가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기울인 노력을 보면 연방정부 수상실에 있던 과거의 ‘겔렌 조직’의 정보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50년 말부터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 조직을 운영하는 겔렌 장군은 글롭케와 자주 접촉하였다. 아데나워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그와 불규칙적으로 만났다. 사실 아데나워는 자신만의 정보기관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겔렌의 조직은 1956년 연방정부 수상실 부속 기구로 통합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장군에서 연방정부 정보부의 수장이 되었다. 샤움부르크궁의 다락방에는 풀라흐에 있는 독일연방 정보부 본부의 공식 연락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여기에서 글롭케에게 매일 보고가 올라왔다.     

아데나워와 글롭케는 1950년대 전반에 걸쳐 겔렌을 매우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적절한 장소에 위치한 연락사무소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획득한 정보를 뮌헨에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내각의 결의 사항이나 매우 민감한 정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나중에 가서 슈피겔 사건과 펠페의 간첩 사건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아데나워는 겔렌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 가을에 독일연방 정보국의 국장은 아데나워에게 가끔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매우 훌륭한 소련 군사력에 관한 중요한 권위자 역할을 하였다. 이는 그가 제3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아돌프 히틀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 역할이었다. 겔렌이 아데나워에게 간단 명료하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소련의 미사일 기술 수준에 뒤처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미국의 전략공군사령부의 폭격기는 여전히 5~10톤의 핵폭탄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소련의 미사일은 겨우 1.5톤의 무기만 탑재할 수 있었다.     

노스태드는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미국은 현재, 그리고 앞으로 10년 동안 소련에 있는 모든 목표 지점을 파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해지면 미국이 정말로 핵무기를 사용하여 소련을 없애버릴 것인가? 전쟁 억지에 관한 의지에 관한 아데나워의 믿음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 대륙의 핵심 지역이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군대 투입의 명령을 내릴 강단이 아이젠하워에게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담에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던 이들에게 다시금 미국 대통령에 관한 비판적인 견해를 전달하였다. 그는 활력이 없고, 지나치게 유약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동생인 밀턴 아이젠하워에게서 정치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밀턴 아이젠하워를 미국 대통령 주변에 있는 나쁜 사람으로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1957년 가을에 있었던 논의로 아데나워는 단기적으로나 중기적으로 볼 때 미국의 미사일 체계를 유럽에 주둔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워싱턴의 시각에서는 공격 차단용 단거리 미사일이나 방공용 핵미사일만이 아니라 전략 중거리 미사일도 필요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거리 미사일은 1959년에야 배치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핵무장에 관해서는 미국의 뜻을 충실히 따르기로 하였다. 이 점에서는 미국과 독일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덜레스와의 정치적 관계는 1957년 가을부터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1959년 2월 중병에 걸린 덜레스 국무장관이 마지막으로 아데나워를 방문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를 진심으로 신뢰한 적이 없었다. 아데나워와 덜레스는 서로 격의 없는 서한을 주고받기는 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이어지는 우의가 오히려 미국과 독일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졌다는 인상을 주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곧 아데나워는 제삼자에게도 덜레스에 관한 매우 비판적인 말을 하게 되었다. 1958년 9월 프랑스 콜롱베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드골에게 최근에 본을 방문한 덜레스가 중동에 관하여 “내게 말해준 구상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라는 말을 하였다. 덜레스가 건강이 나빠서 그 자리에서 더 버틸 수 있을지에 관한 우려도 더해졌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확실히 믿을만한 미국인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매우 비관적인 생각을 털어놓았다. 맥클로이는 1957년 9월 15일 총선에서 승리한 아데나워가 ‘요즘처럼 최악인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라고 한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호이싱거도 마찬가지의 전망을 하였다. 곧 소련이 전격적인 공격으로 며칠 안에 서유럽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맥클로이는 아무런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로부터 2년 동안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미국과 독일 사이의 이해충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마땅한 대책이 아데나워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로 나가 있는 블랑켄호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하여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곧 대서양 연맹을 하나의 정치적 조직으로 발전시켜 이 기구에 긴장 완화 정책을 위한 분명한 과제를 부여하자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의미에서 작성된 블랑켄호른의 초안을 바탕으로 한 의견을 덜레스에게 보냈고 덜레스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이 이와 관련하여 덜레스와 논의한 다음 아데나워에게 보고한 내용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아이젠하워가 이 문제에서 손을 떼고 있기에 계획의 수립과 추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존 포스터 덜레스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조직적 차원에서도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몰아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이 부족하였다. 덜레스는 의회, 대통령, 국가안보위원회에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탄식하였다. 늘 관련 결정을 연이어 신속히 내려야만 하였기에 때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15개 회원국 전체를 배제한 채로 그것이 비밀에 부쳐지는 일도 벌어졌다. 그래서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에게 한 보고에 따르면 덜레스가 중점을 두는 것은 “현상 유지, 소련의 핵실험을 제재하되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는 자유세계에 불이익이 초래되는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도권을 잡기보다는 반응하고 기민한 전술보다는 자리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그저 허약한 거인일 뿐으로 유럽과 독일 지역에 핵무기를 가득 쌓아 놓는 것에만 골몰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호이싱거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복잡한 지휘 체계를 지적하여 아데나워의 불안을 더욱 커지게 되었다. 호이싱거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면 모든 것이 24시간 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데나워는 궁극적으로 영국, 이탈리아, 터키에 배치될 중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보관하는 계획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데나워와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그러한 중거리 미사일을 보관하는 기지 건설 후보 지역과 마을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래서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가 들어오기를 바랐다. 이러한 장비에 대한 소련의 선제공격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총선 승리도 아데나워에게 잠시나마 이로운 상황을 마련해 주었다. 사실 독일 국민은 핵무장에 대하여 여전히 불안해하였다. 야당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패배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특히 1957년 11월 10일 치러진 함부르크 시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컸다. 소련은 독일군의 방어를 위한 핵무장을 막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두 강대국의 세력 관계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소련이 독일 여론과 아데나워 자신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미르노프 주독 소련대사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데나워에게 핵무기에서 좋게 손을 떼라는 권고를 강력히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82회 생일잔치에 와서도 스미르노프가 뻔뻔하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었다.     

1957년 12월 파리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며칠 전에 소련의 불가닌 총리는 장문의 서한을 아데나워에게 보냈다. 그 서한에서 불가닌은 독일군이 핵무장을 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당장 아데나워에게는 미국의 미사일을 배치할 거점 지역을 선정해야 하는 것이 발등의 불이었다. “서독은 서방과 동유럽의 두 군사 세력과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양 지역에 있는 군사적 목표는 단거리용의 현대 무기로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들의 중요한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의 영토에 거점기지를 두게 되면 각각의 국가의 군 통수권자들은 마음이 덜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 거점 지역 선정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쾰른, 뮌헨의 운명에 대하여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수에즈 운하 위기 이후 단 한 번도 소련 측이 그 정도로 심각한 미사일 위협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가장 친독일적인 소련의 지도계층 인사로 믿었던 불가닌 수상의 입을 통하여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확실히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에 소련의 위협에 관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보였다. 소련의 압력과 소련의 협상안이 독일 국내 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10월 총선 승리가 있은 지 2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의 여론은 아데나워가 의회의 과반수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사민당(SPD)은 핵무기 문제에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조차 외교 문제에 사민당(SPD)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당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는 연방의회 전체회의에서 아데나워에게 앞으로 사민당(SPD)과 대화를 나눌 것을 권유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대표인 올렌하우어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지 거의 2년 반이나 흘렀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에 관한 지적을 받을 때마다 아데나워는 올렌하우어가 반드시 베너를 동반한 자리만을 고집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노스태드 장군은 1957년 5월 아데나워로부터 사민당(SPD) 안에는 강력한 친러시아 세력이 있으며 베너가 그 세력의 주동자라고 한 말을 들었다. 올렌하우어가 베너에게 항복을 했다는 것이었다!     

헤르베르트 베너는 1957년 10월과 11월에 다시 아데나워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사민당(SPD)이 그에게 다시 독일 연방의회의 ‘내독위원회’(Innerdeuscher Ausschuß) 위원장으로 천거한 것이다. 사민당(SPD)이 전통적으로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당의 강경파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베너가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내무장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비쉰스키와 비교하였기 때문이었다. 비쉰스키는 유명한 공개재판에서 스탈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슈뢰더만 격분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베너에 맞서는 이들의 앞장을 선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사민당(SPD)과 협력을 하는 데에 헛된 꿈을 꾸면 안 됩니다.” 차라리 “뒤에서 싸우기보다는 정면 승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민당(SPD)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이들은 더 이상 베너의 공산주의 전력을 더 이상 문제 삼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누구보다도 하인리히 크로네가 이러한 의견을 관철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여당 원내대표단과의 회의에서 확실한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여당 의원 가운데 117명이 베너를 내독위원회 위원장으로 받아들이는 데 찬성하였다. 95명은 반대했고 1명은 기권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 풀러, 훼헬, 마이오니카가 자기와 대척점에 섰음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이 사안에 대하여 게르하르트 슈뢰더, 리하르트 예거, 뷔르멜링, 블랑크가 자기편에 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매우 유감스럽게 여긴 것은 하인리히 크로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언론 대부분과 여당의 다수가 베너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일이었다. 총선에서 승리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이미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나 외교에서 자기 입지가 좁아지게 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관한 아데나워의 대응은 총선 전에 그가 취한 조치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독일의 언론 앞에서 그는 매우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서방의 모든 국가 정상이 모여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입장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검토해 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에 모스크바의 위성국가들과 경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건설적인 안을 ‘유럽의 분단을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제안이었기에 그에게 늘 비판적이었던 《노이어 취리허 차이퉁》의 본 주재 특파원인 프레드 루흐싱거조차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게 되었다. “당분간 아데나워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를 지지하지 않은 이들까지 자기 동료와 동조자들의 무리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중립주의자들이 파리 회담 첫날부터 그의 연설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하인리히 크로네도 매우 놀랐다. “아데나워의 연설은 마치 폭탄이 터진 것과 같았다. 수상이 이제 노선을 바꿀 것이란 말인가? 좌파와 독일이 환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즉각 파리로 날아가 아데나워를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아데나워는 “양심적으로 전쟁 발발 가능성에 관한 근심을 떨칠 수 없는 이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분명히 불가닌의 강경한 어조가 담긴 서한이 아데나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주독 소련대사인 스미르노프를 즉각 소환하여 그를 달랬던 것이다. 블랑켄호른과 폰 에카르트도 아데나워가 그런 발언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1958년 초에 지속적으로 소련을 상대로 한 지연작전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한 포괄적인 군축을 위한 정상회담 개최도 꾸준히 제기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핵무기의 독일 배치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파리회담에서 그러한 화해 제안을 하기 이틀 전에 아데나워는 브리스틀에서 덜레스를 만나 현안을 논의하였다.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독일 의원 가운데 대다수는 핵무기와 미사일 기지를 독일 영토에 배치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확실한 것은 1957년 12월에 아직 이는 단순한 예상일뿐이었다. 이 사안은 의회와 여론에서 일단 검증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핵무기의 독일 배치에 관한 공개 논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사실 이때 이미 아데나워는 미국 대통령이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전략 핵무기 사용 명령을 내리지 않아서 결국 서유럽 연합국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전략 핵무기를 유럽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독일이 치르도록 하려는 것인지에 관한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해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11월 중순에 프랑스가 하나의 제안을 해왔다. 그런데 이 제안은 비밀 계획이 판치던 시절에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계획으로 확대되다가 그만큼 빠르게 사라진 것이기도 하였다.     

프랑스 측이 갑자기 연락한 다음 모리스 포레 차관은 뮈르비에 대사를 동반하여 1957년 11월 16일 비밀 논의를 위하여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만남이 토요일 오후에 이루어졌기에 아데나워는 그들을 뢴도르프 저택 거실에서 맞이하였다. 먼저 폰 브렌타노와 할슈타인과의 사전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그 4명을 만나 논의된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포레가 보고한 것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분명히 프랑스 정부의 지도급 인사들은 독일연방공화국과 이탈리아와 힘을 합쳐 핵폭탄과 그에 필요한 미사일 체계를 개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 총사령관도 이에 대하여 통보받았고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포레의 말에 따르면 하루 전에 파리에서 수상 가이야르, 외무장관 피노, 국방장관 샤방-델마, 그리고 포레 자신도 참석한 비밀 회담이 있었다. 이들이 내각에 들어온 지는 겨우 10일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제안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이야르는 알제리 전쟁으로 취약해지고 우파로 기울던 프랑스 제4공화국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급진사회주의자의 대표로 겨우 38세에 불과한 정치계의 신성이었다. 1944년 25살의 나이에 이미 드골의 프랑스 임시정부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포레는 가이야르보다 3살 어린 나이로 급진사회주의자의 지도급 인사였다.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피노 또한 레지스탕스 출신이었다. 그는 몰레와 더불어 수에즈 운하 위기에 관한 논쟁에 깊이 빠졌었다. 사실 그 당시 그가 누구를 더 싫어했는지는 불분명했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공수특전대가 수에즈 운하에서 24km밖에 안 떨어진 엘칸타라 지역에 도달하였을 때 철수를 요구한 미국인지, 장거리 미사일로 파리를 공격할 것처럼 위협한 소련인지, 너무 진군이 느렸고 너무 빨리 군사 개입을 포기한 영국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적 드골주의자인 42세의 샤방-델마도 레지스탕스의 영웅이었다. 1954년에 그는 이미 국방장관이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레지스탕스 출신이었고, 당적과는 무관하게 민족주의 정치가였고 정치계에 입문할 때 누구도 독일에 호의적이지 않았었다. 피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부켄발트 수용소에 갇혀있었다. 그의 독일에 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데나워가 1956년 11월에 파리를 방문한 때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포레 대사를 통하여 아데나워와 그의 측근에게 스푸트니크 충격이 가져온 사태에 관한 결론을 전달하였다. 곧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힘을 합쳐 핵폭탄을 공동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핵전략적인 세계정세에 대하여 내놓은 분석은 아데나워의 생각과 대체적으로 일치하였다. 미국의 유럽 주둔 기지 건설에는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더 빨리 개발한다고 하여도 다른 한편으로 그 무기가 소련의 핵무기에 비해 취약해지게 되면 미국이 결국 조만간에 철군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때를 미리 대비해야 했다.     

프랑스 정부는 영국과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영국이 내세운 자유무역지역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대서양 주변에 미국에 이어 둘째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맥밀런 수상이 이끄는 영국 보수당의 의지가 너무나 강력했다. 영국이 수소폭탄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를 ‘완전히 돌게 했다.’ 이는 아데나워가 나중에 덜레스를 만나 프랑스가 그런 제안을 하게 된 동기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의 습관적인 비꼬는 투로 한 말이다.     

포레는 프랑스가 세운 계획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추진될 것이고 그 윤곽은 12월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소개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의도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 이외에 유럽 대륙에도 핵탄두와 그 운반체계를 개발할 핵무기 연합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연합이 궁극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조력 하에 프랑스의 핵무기 체계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 무렵에는 미국의 핵우산의 신뢰에 관한 의심이 강했던 아데나워는 그런 제안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온 방문객들은 포레의 상황 진단에 관한 응답으로 아데나워가 길게 늘어놓는 워싱턴에 관한 불평, 두려움, 좌절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강력한 반공주의자로 아데나워가 신뢰하는 덜레스와 백악관을 조심스럽게 구분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먼 미래에 관한 전망이었다. 곧 유럽이 미국에 종속되는 끔찍한 미래 말이다! 4년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차기 미국 정부의 노선에 관한 불확실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이 자체적으로 수소폭탄을 제작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보고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프랑스가 제시한 구체적인 안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포레가 요약한 정책이 옳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계획을 추진하면서 백악관과의 의견 차이를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영국도 노선을 수정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영국은 미국이나 대륙의 유럽이 각자의 길을 갈 때 자국이 번영할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멍청한 나라는 아니니 말이다.     

사전 면담에서 독일의 핵무기 개발 참여에 대하여 긍정하였던 폰 브렌타노는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적의 공격에 대비한 무장’인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일 외무장관의 의견과 거리를 두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그것들을 생산해 내야 합니다.’     

이러한 반응은 포레를 고무시켰다. 그래서 그는 제트기와 미사일의 대량생산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으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 터라 자원이 없었다. 이탈리아가 동의한 상태에서 독일이 핵무기를 생산하는데 협조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여기에 덧붙여서 폰 브렌타노는 조약의 공식적 개정을 제안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슈트라우쓰와 샤방-델마가 만나도록 하자는 프랑스의 제안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동의하였다. 다만 그 만남에서 논의할 것은 구체적인 문제, 곧 탱크와 미사일 생산, 과학적 협력만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결코 일반적인 정치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본질적으로 정치에 해당하는 문제에서 군부가 개입하는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구상이 점차 다시 부상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포레는 이 역사적인 회담에 참여한 독일 측 인사들에게 작별선물도 마련하였다. 곧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와 켈 사이의 유럽 지역에 유럽의 수도를 세우고 라인강 다리를 확충하자고 한 것이다.     

4일 후에 샤방-달마와 슈트라우스가 파리에서 만났다. 슈트라우쓰는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재 프랑스대사가 제시한 내용을 전달받았고 할슈타인을 통해서는 아데나워와 포레의 대담 내용을 전해 들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슈트라우쓰에게 직접 그 계획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말했다. 샤방-델마는 슈트라우쓰에게 프랑스가 내년 아니면 늦어도 2년 후에 사하라 지역에서 첫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때 이탈리아 외무장관인 타비아니와 먼저 대담을 한 것은 우연히 일정이 맞아 진행된 일이었다. 서둘러 해결해야 할 것은 1957년 초에 체결된 독일과 프랑스의 콜롱·베샤르조약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에 합의하는 이르렀다.     

샤방-델마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의 계획은 매우 복잡했다. 먼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가이야르 수상은 유럽 대륙의 국가들을 대표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안에서 핵과 관련하여 국가 간 차별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소련이 핵폭탄 제조 기술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이미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으니 파리도 미국의 핵무기 관련 비밀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다만 이는 프랑스가 자체적으로 핵무기 제조를 추진할 때 제대로 가능할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사정거리가 1,600km~2000km에 달하는 중거리 미사일의 개발도 함께 추진되어야 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여기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하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여기에서 독일의 재정 지원과 더불어 기술적 노하우도 필요하였다. 또한 아데나워의 정치적 지지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조약에 묶여 망설일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샤방-델마는 미국과 영국이 핵무기 독점을 포기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유럽 대륙에서 추진하는 핵무기 제작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샤방-델마가 회의 후에 가진 만찬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견하고 완성할 것입니다.’     

다른 회의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회의서도 프랑스가 독일에 제안한 것이 완전히 순수한 의도만 지난 것은 아님은 자명하였다. 파리나 본 모두 독일이 파리 조약으로 핵무기 생산과 중거리 미사일 제작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핵무기의 제조는 독일의 지원을 바탕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토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 핵탄두를 누가 보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샤방-델마는 과장된 몸짓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우리 국가들이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련된 정책에 언제든 연계시킬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져 더 이상 독일과 프랑스가 핵무기 발사기지로서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면 미래의 어느 시기이든 독일이나 프랑스에 관한 공격이 곧바로 유럽 연합국 전체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도 서유럽 연맹의 협약이 발효되면 프랑스의 기존의 주도적 역할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독일은 일단 프랑스의 핵폭탄을 실은 차량에 단순히 무임 승차하는 모양이 되고 말 것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이 그러한 계획에 관한 지원을 거의 안 할 거라는 생각에서 샤방-델마와 슈트라우쓰의 생각이 일치했다는 사실은 먼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독일이 이 계획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만 파리 조약의 조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조약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수정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는 비준이 필요한 협상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수정을 시도한다면 여론이 불안해하고 “소련의 궁극적 조치를 도발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시도는 “전혀 소리 없이 철저히 비밀을 지키면서도 완전히 합법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관계자들은 재무부와 독일 연방의회에는 이 계획을 위한 독일의 분담금이 ‘유럽 비행체 연구소’의 지원을 위한 것이라고 위장하기로 합의하였다. 샤방-델마는 변명거리를 찾는데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언론에는 [기독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의 날’(Buß- und Bettag)을 맞이하여 슈트라우쓰가 블랑켄호른 대사와 대사관 무관을 예방하였고 이 자리에는 샤방-델마가 인사차 함께 하였다는 성명으로 사실을 은폐하였다.     

드골주의자인 샤방-델마는 특별히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역겨운 시체 냄새’가 다시 나도록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절대로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프랑스 국방장관 샤방-델마는 이미 1954년 8월 30일에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소멸을 주장한 이들에 속한 인물이었다. 몇 주 후에 아데나워가 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가이야르 총리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곧 원칙적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은 샤방-델마가 그 문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다음 날 슈트라우쓰와 그의 차관 루스트는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보고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모든 내용에 대하여 보고를 듣고 매우 신중하게 작성된 그 문서에 서명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러한 비밀 계획이 국내외 정치에 어떤 충격을 줄지는 아데나워와 다른 관계자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본능적으로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아데나워는 덜레스에게 직접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대화를 나눈 사실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알려주었다. 국방장관에게 협상 전권을 주기는 했지만, 독일 정부는 아직 동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합의에 이르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유럽연합(WEU)에 그 내용을 통보할 것이며 모든 국가가 가입할 수 있다는 말도 하였다. 그리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모든 나라가 이런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이렇게 암시를 주고 난 이후 덜레스는 뭔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였다.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측에서 뭔가 진행하고 있다는 매우 막연한 암시만 받은 상황이었다. 덜레스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핵확산의 위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더불어 미국과 영국도 포함된 핵무기 통제위원회의 구상을 언급하였다. 그는 분명히 유럽 대륙에서 이루어지는 음모를 파악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그러한 계획에 관한 부정적인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덜레스가 프랑스를 매우 불신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프랑스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가장 심각한 취약점’, 병든 나라, 수시로 바뀌는 정권, 별 볼일 없음에도 요구 사항이 많은 나라로 본 것이다. ... 덜레스가 말을 중단했지만, 아데나워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다음날 프랑스 총리 가이야르에게도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가이야르도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였다. 프랑스의 수도에서 개최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대규모 회의가 있기 전날 밤이었다. 그리고 덜레스가 유럽 5개국으로 구성된 이른바 핵 관리체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가이야르는 무엇보다도 국가들에 관한 동등한 대접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데나워도 다른 나라들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은 좋다고 여겼지만,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곧 “영국이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된 이상 논리적으로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극들도 동일한 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이다.     

지리전략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핵무기 문제에 관한 것과 마찬가지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가이야르는 소련이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를 휘젓고 다니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데나워의 시각도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독일을 거쳐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와 지중해를 거쳐 서유럽을 포위할” 작정이라고 본 것이다.     

가이야르와 아데나워의 나이 차는 무척 큰 것이었다. 가이야르는 1919년에 태어났다. 그 해에 아데나워는 43세의 쾰른 시장으로서 외교 정책에 그의 불안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공통으로 식민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가이야르와 같은 젊고 역동적인 프랑스인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는 소련의 도움으로 독일을 포위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아데나워와 더불어 소련의 포위 공작에 맞설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이야르는 매우 친절한 작별 인사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곧 그 누구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궁국적으로 베네룩스삼국으로 이루어진 블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블록의 핵심은 프랑스와 독일입니다. 사실 이 블록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 움직여왔습니다.”     

핵무기 공동 연구와 생산에 관한 협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1958년 1월 21일 본에서 세부적인 합의안이 논의 되었다. 아데나워는 계속 모든 내용에 관한 보고를 받고 3국의 국방장관 샤방-델마, 타비아니, 슈트라우스의 예방을 받았다. 매우 기묘한 상황이었다! 15년 전 만 해도 주축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금 여기에서 프랑스의 국방장관과 매우 비밀스럽게 만나면서 영국이 세계 패권 주도하려는 의도에 맞서고 이 유럽 대륙의 삼국이 현대적인 강대국의 핵무기라는 문장을 다시 확보하기 위한 협상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먼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볼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샤방-델마가 영국에 대하여 안 좋게 이야기한다는 말을 들은 아데나워는 즐거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국은 강대국이었습니다. ... 그런데 영국처럼 서서히 망하는 것은 독일이 겪은 신속한 패망보다 훨씬 나쁜 일입니다.”     

1958년 부활절 월요일 로마에서 3장으로 된 합의서에 각국 국방장관이 서명하였다. 이 또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프랑스는 피에흐라트에 있는 동위원소분리기에 관한 자금을 공동으로 지원하기를 원했다. 그 비용은 45:45:10으로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금 문제는 여전히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비용은 일단 총 1억 4천만 달러로 예상되었다. 국방장관들은 피에흐라트의 시설을 방문해보기로 하였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의 제4공화국이 무너졌다.     

드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 합의를 무효화했다. 아데나워도 마찬가지로 재빨리 삼국 협상에 관한 책임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에게 미루었다. 자신이 슈트라우쓰에게 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하고 말하면서 말이다. 프랑스의 신임 국방장관인 기요마는 삼국 협상에서 매우 지저분한 방식으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공동 핵무기 제조라는 위험한 모험은 모두에게 답답한 모양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데나워도 이제는 국제 정치도 핵무기 시대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미국과 영국을 장기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핵무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사라진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미국과의 안보협력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프랑스 가이야르 정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사실은 전체적인 군축을 옹호하던 그이 많은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독일 정책은 사상누각     


아데나워는 가끔 전략적 기지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는 탁월한 재주를 발휘한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3년 총선 전에 독일 회담을 구상했었다. 사실 그 자신이 이 회담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닥치자 매우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와 비슷한 모습을 아데나워는 1957년 12월과 1958년 여름 사이에 보여주었다. 피할 수 없는 독일 영토 안의 핵무기 주둔을 선전·선동을 동원하여 관철하고자, 아데나워는 파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담에서 소련과의 군비통제와 군축에 관한 협상을 위하여 자기 권위를 최대한 발휘하였다. 흐루쇼프는 이러한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흐루쇼프도 효과적 선전·선동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1958년 초부터 정상회담 개최를 밀어붙인 것이다.      

서유럽의 여론은 소련의 긴장 완화 정책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그런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데나워 수상이 긴장 완화를 위한 대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창하지 않았던가? 덜레스와 같은 회의론자조차도 그리고 아데나워 자신도 원칙적으로 이제는 좋든 싫든 회담 준비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1958년 전반기의 외교 일정은 대부분 통상적으로 복잡하기 마련인 서방의 협상 자세의 정리, 상호적인 선전·선동, 이에 따른 국내 정치적인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번이 서방의 연합국들과 논쟁을 벌이고 국내적으로도 모든 소란이 벌어지는 데 이 동서 회담 준비만큼 더 좋은 계기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상회담의 제대로 추진되기 시작하면 기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이 일은 인류를 구하기 위한 목표로 포괄적인 군축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사실 여전히 무겁지만, 점점 더 조급하게 논의 되는 독일 통일 문제도 대두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해결이 거의 난망한 독일 관련 문제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곧 통일 이후 독일의 지위, 독일 통일을 향한 단계별 조치, 동독의 역할, 중부 유럽 지역 주둔군 철수와 감축, 독일군 창설, 핵무기 등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이다.     

독일의 여론은 여전히 4강의 협상을 통해서만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당파의 외교 정책에 관한 원칙주의자들은 ‘유럽의 안보’가 ‘독일 문제’의 진전과 결부되어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독일의 분단 극복을 향한 가시적 성과가 없이는 소련과 그 어떤 안보 조약도 맺으면 안 된다는 오래된 신념도 여전히 확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주의적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그 힘을 잃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동독이 궁극적으로는 해체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동독도 긴장 완화 과정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가 점차 힘을 받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많은 사람이 핵무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때문에 군축이 최우선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일에 관한 동서 회담에 대하여 많은 희망을 거는 모든 이들은 소련을 고무하여 협상에 임하도록 하는 유연한 태도를 주문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서독이 직접 협상해야 한다는 소련 측 주장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 전독 기술 위원회의 설치를 구상하여 왔다. 물론 이 위원회는 당연히 4강의 위임을 받아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헤르베르트 베너였다. 그의 사민당(SPD) 내부에서의 영향력은 괄목할 수준으로 증대하였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정치적 문제이고 어디까지가 기술적인 문제인가? 동독과의 대화는 어차피 국가 인정 문제로 귀결될 것이 아닌가?     

또 다른 이들은 타협의 가능성은 통일된 독일이 참여하게 될 안보 체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소련이 동독에 관한 지배권을 그러한 체계에 이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독일 통일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는 협상이 아직 유효하고 독일이 여전히 분리된 상황에서 ‘군사력이 희박한 지역’을 감시지역 또는 핵무기가 없는 지역으로 만들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이렇게 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이 동유럽과 서구의 통제를 받는 지위에 놓이게 될 것인가?’ 아니면 ‘통일을 이룩할 것인가?’였다.       

미국과 유럽의 유대를 중시하는 것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호이싱거 총사령관과 같은 냉정한 전략가도 탈핵과 재래식 군비축소가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 공군과는 달리 전술적 전투 무기를 동원한 전쟁 수행 개념에서는 육군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1958년 1월 라파츠키 플랜에 관한 호이싱거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호이싱거는 이 계획에서 중부 유럽에서 점진적으로 실현하게 될 세력균형 전략을 발전시켜낸 것이다. 호이싱거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지만 아데나워의 눈에는 그리 믿음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당시 독일에는 동독의 60개 ‘동부 사단’이 서독의 15개 ‘서부 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의 군사력을 증강하여 동독과 서독이 4대 3 정도의 사단 비율을 맞추게 되면 재래식 군사력에서 대체적인 균형을 이루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쌍방이 탈핵 지역에 핵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다. 이는 소련이 탈핵 지역을 지정한 대가로 소련 점령 지역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인 노스태드는 이러한 의견에 큰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는 결국 미국, 영국, 프랑스 군의 대규모 철수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위기가 발생하면 어떻게 미군을 적기에 파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스태드는 그러한 계획에서 독일 측이 군비통제 계획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기에 자신이 제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동독과 서독, 베네룩스삼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하나의 중부 유럽 통제지역을 구성하여 1,500명의 소련군이 서부 지역에 그리고 1,500명의 미군이 동부지역에 주둔하여 각가의 지역에서의 군대 이동을 통제하여 상대방에 대한 기습의 위험을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도 전에 포괄적인 계획안이 이미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ACEUR)와 덜레스에게 보고되었기 때문이었다. 덜레스도 군비통제 계획에 관한 표결을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불만은 1958년 4월과 마찬가지로 컸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성공적인 런던 방문에서 영국 외무부가 다시 한번 군대축소 지역의 수립에 관한 계획을 끈질기게 다시 수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동서 회담에 임하는 서방 연합국 외교가의 계획은 그 무렵 독일 언론이 아데나워에게 제기한 엄청난 양의 계획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일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외무부의 폰 브렌타노는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신랄한 어조의 편지를 보냈다. “독일의 모든 성인은 각자 하나의 ‘계획’을 제시한다는 것이 이제는 거의 강박관념처럼 되었습니다. 이 계획의 대다수에 대하여 솔직하게, 곧 비현실적인 소망, 또는 매우 위험한 실험으로 여긴다면 사람들은 독일 정부에 상상력과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전형적인 확신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사민당(SPD), 자민당(FDP),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기민당(CDU)마저 나름의 계획을 제시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점잖게 물러서 있지 않고 아데나워가 남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안에 《정치 사회 통신》에 이른바 ‘긴장 완화와 통일을 위한 5개 항목의 계획’을 그의 대변인인 슈뮈클레와 폰 라벤을 통하여 발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슈트라우쓰는 호이싱거가 세력균형에 관하여 전개한 생각의 일부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파견 대사로 근무하고 있던 블랑켄호른도 전체 계획에 관한 제안을 다시 조용히 제시하였다.     

이러한 소동으로 아데나워는 혼돈을 겪기보다는 망설임이 더 커지게 되었다. 성격대로 아데나워는 ‘긍정과 부정’의 전략을 사용하였다, 곧 정상회담에는 긍정적이지만 회담 참석 자격을 제한하고 사전에 세심한 외교적 준비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가 무엇에 대하여 더 근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곧 자민당(FDP) 계열에서 먼저 주장하고 나선 통일민족주의인지 아니면 좌파에서 들고나온 핵과 관련된 평화주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두 생각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으로 들어와 당내에서 정리가 되어야만 했다.     

독일 정책에 관한 좌절이 아데나워를 전혀 예상치 않게 매우 신속하게 위기로 몰아갔다는 사실은 1958년 1월23-24일에 개최된 기념비적인 독일 연방의회의 야간 회의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란스러운 증오로 넘쳤던 논쟁은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종료되었고 아데나워는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의회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온 사방에서 아데나워에게 집중포화를 날렸다. 그러한 공격은 정부 정책 전체를 향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데나워 개인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에리히 멘데는 아데나워가 의회를 무시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아데나워가 야당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가 언론과 이른바 ‘작은 독일 방송’을 통해 외교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었다는 비난을 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1933년 3월 23일 히틀러에게 정권 위임을 결의한 법에 찬성했던 라인홀트 마이어가 과거 1,200만 명에 달했던 나치당원들이 오늘날 어느 정당을 거들고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에게 몇몇 연방정부 장관의 과거를 거론하였다. 그는 바로 아데나워 뒤의 정부 관료석에 앉아있던 글롭케 차관을 지목하고 있었다.     

자민당(FDP)이 야당이 된 이후 정부와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를 비교적 온건한 인물이었던 에리히 멘데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통일된 독일은 연방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체계에는 미국과 소련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자민당(FDP)과 사민당(SPD)은 다시금 거의 같은 목소리로 양독의 자유선거는 통일된 전ㅈ체 독일의 정치적 군사적 지위에 관한 4대 강국의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유선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기민당(CDU) 내부에서도 의심의 기류가 나타났다. 이는 예를 들어 베를린 출신의 요한 밥티스트 그라들의 논쟁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논쟁이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선거가 먼저다!’라는 구호는 확실히 후퇴하게 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조차 그러하였다.     

‘자유선거’의 개념은 토마스 델러와도 연관이 있었다. 그는 밤늦게 발언 순서를 얻었다. 정부 측에서도 이미 논쟁이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정된 발언 시간이 이미 4분의 3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회의장 의석도 상당히 비어있었다. 그러나 델러가 격정적인 발언을 해나가자 대회의장은 다시 의원으로 가득 찼다. 아데나워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인신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델러가 이야기할 때면 늘 어느 정도 그의 성정을 감안하여 들어왔기에, 그가 연설하는 동안 “박수에 취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한 과장을 그저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정부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곧 ‘십자군’을 모집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을 누가 진지하게 받아들였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1951년부터 1955년 사이에 전개했던 독일 정책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자 사람들은 진지해졌다. 지금 발언하는 자는 오랫동안 내각에서 일을 했던 유명한 자민당(FDP) 정치가로서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1년간 정부에서 일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기 말로는 콘라드 아데나워를 오랫동안 신뢰해왔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아데나워의 전우가 이제와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부 정보, 곧 국무회의, 아데나워 수상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정신없이 분노하여 아데나워가 독일의 통일을 전혀 바란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소련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가장 먼저 자유선거’를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아데나워는 독일조약에서 서방과만 유대를 맺는 조항에 동의하고, 1952년 초 스탈린의 제안에 대하여 숙고할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1954년 베를린 회담에서 타협을 거부하고 1955년 영국 총리 이든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델러와 아데나워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은 이러한 독설이 단순히 계산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애증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해 볼 것이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한 개인적인 보복 공격은 사실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이제 많은 사람은 아데나워가 1050년부터 1955년까지의 과거를 이제 다시 소환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델러에 이어서 1950년대 초반을 함께 했던 인물 가운데 배반자가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구스타프 하이네만이었다. 그 또한 분노를 쏟아내었다. 1953년 총선 때 아데나워가 그를 개신교의 몽상가라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별로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그를 공산주의 진영의 인사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 이후 하이네만은 최측근과 더불어 사민당(SPD)에 입당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등장으로 이날 가장 커다란 탄핵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 연설로 아데나워의 통일 정책이 혼란에 빠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라디오를 듣고 있는 수백만의 청취자들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하이네만은 “때로는 거드름을 피우며 그러다가 강경하고 폭발적으로” 수상에 관한 복수를 완료하였다. 아데나워는 정부인사석에 굳은 표정으로 검은 색안경을 쓰고 묘하게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그는 계속 터지는 카메라 플레쉬에서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색안경을 썼다.     

하이네만은 델러보다 더 신랄하고 분석적이며 날카롭게 아데나워의 ‘실기(失期)’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델러가 비교적 소박한 민족자유주의를 내세운 데 비하여 하이네만은 냉정한 개신교 근본주의와 정치적 계산을 교묘하게 결합했다. 이는 유럽 의회에서 글래드스톤이 한 명연설 이후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기민당(CDU)을 특히 화나게 만든 것은 이 지도적인 개신교인이 탁월한 변증법적 논리로 개신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세계관의 간극을 메워버린 사실에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칼 마르크스에게 맞서다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은 것이었다.” 하이네만은 이 기회에 최소한 말로라도 아데나워를 제거하려는 마음이 확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증오에 가득 찬 아데나워에 관한 인신공격만이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의 다른 외교 관련 정치가들도 그러한 비판에 관한 제대로 된 반론을 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여당 당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가 발언대에 섰지만, 그의 발언은 그가 말주변이 부족하고 과거에 있었던 외교 정책에 관련된 상세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만 다시 한번 드러내 버렸다. 외무장관인 폰 브렌타노는 빌헬름 그레베에게 쪽지를 계속 전달받으며 논쟁을 벌였지만, 그 쪽지가 별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폰 브렌타노 자신도 그 당시에 일반조약 제7조 3항에 대하여 비판적인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자신이 과거 수행한 독일 정책에 관한 여론재판이 진행되던 그날 밤의 소동을 근엄하고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1955년 3월에 델러가 비교적 날카롭게 아데나워를 비판했을 때만 하여도, 그의 측근들은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며 그 당시의 자민당(FDP)과의 연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반론에 나서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무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나중에 가서도 일체 말이 없었다. 피로했었나? 배신한 장관에 관한 경멸이었나? 폰 브렌타노, 키싱거, 게르스텐마이어 같은 그의 측근이 나서주기를 바랐던 것인가? 아데나워가 1950년대의 투쟁에 대하여 자기 회고록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이때 패배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었다. 다만 ‘러시아의 제안서 공격’에 관한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천명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뒤늦은 합리화에서 우리는 아데나워의 세 가지 방어 노선을 읽어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의 제안서는 서방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방해 책동이었다고 여겼다. 만약 아데나워가 이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면 독일은 아마도 여러 세력에 둘러싸여 4대 강국이 시키는 대로 ‘강제적인 평화’를 받아들이는 위험에 놓였을 것이다. 둘째로, 제안서의 교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곧 “소련이 협상과 평화조약의 체결을 자유로운 정부가 대표하는 독일과는 원칙적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소련은 자유선거를 시작하고 그런 방식으로 정당성을 확보한 독일 정부를 협상 파트너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지막 셋째로, 통일된 독일이 비동맹의 자세를 취했다면 사실상 미군이 유럽에서 철수하고 유럽통합은 물 건너간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소련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결정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만약 아데나워가 1958년 1월 23일과 24일 사이의 밤에 벌어졌던 토론에서 이러한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면 그의 당시 외교 정책이 일단 수세에 몰리는 형국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을 것이었다. 이는 많은 이가 힘을 재정비한 독일이 매우 적극적인 통일 정책을 추구하기를 바랐던, 1958년의 크게 변화된 정세에서 우스운 자백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한 지난 8년 동안 적당히 안전한 통일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고 고백했어야 하는가? 그런데 아데나워가 생각한 적당히 안전한 통일이라는 것은 통일된 독일이 여전히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서방과 유대를 맺고 소련군이 동독과 그 위성국가에서 철수하는 것을 말하였다.     

여당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나중에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시(Staatsräson, 國是)’로 알려진 의도를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가 바로 헤르만 훼헬이었다. 그는 매우 분노에 차서 통일이 독일정치에서 가장 으뜸가는 과제여야 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이 논쟁의 핵심과 모든 의식 있는 독일인의 성찰의 출발점은 그 성향과는 무관하게 바로 우리 5천만 국민의 안전과 자유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안전과 자유가 없다면 통일도 없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 국가도 없습니다.”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이러한 논리를 바로 받아들였다. 1958년 2월 중반 리비에라에서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다음 외교 정책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아데나워는 파리에 있는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귀하가 입장을 발표할 때 독일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자유를 보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러한 자유는 아직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주요 과제는 5천 2백만 국민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것입니다. 철의 장막 건너편에 살고 있는 1천 7백만 명의 동독 국민의 해방은 오직 서독의 5천 2백만 명의 국민의 자유를 보장할 때야 비로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958년 1월 23일과 24일에 걸쳐 아데나워가 받은 모욕의 영향을 심대한 것이었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파울 세테, 한스 체러, 에리히 큐비를 대표로 하는 언론계의 아데나워 반대 세력은 모두 이제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이후로 언론을 동원하여 이 아데나워라는 수상이 결코 독일의 통일을 바란 적이 없었으며 이제 공개적인 의회 토론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마구 공격하였다. 정부 측에서 노련한 그레베 교수의 기자회견과 아데나워의 라디오 연설을 통하여 국면 전환을 시도했지만, 그 날 밤의 치명적인 인상을 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부터 야당이 내세운 구호는 ‘실기(失機)’, 또는 1952년 초의 ‘절호의 기회’의 상실이었다.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를 ‘새로운 내부 배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아데나워는 1월 31일 알프스의 마리티메스로 가서 2월 내내 휴가를 보냈다. 그가 묶은 샤토 상마르탱 호텔은 해발 500미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멀리 니스 지역의 알프스 주변과 해안이 내려다 보였다.” 과거에 아데나워는 그의 첫째 부인이었던 엠마 여사와 프로방스 지역을 종단한 적이 있었다. 거의 54년 전의 일이다. 이제 그는 늙고 쇠약해진 것을 느꼈다. “해가 나면 매우 따뜻하다. 그러나 나는 매우 피곤함을 느낀다.”     

아데나워는 이제 정치가들의 방문을 제한하였다. 조르주 비달과 그의 아내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 위하여 그를 방문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에 비달은 드골을 피해 바이에른으로 피신하여 숨어 살게 되었다. 가이야르 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봉직한 플림릉이 그를 방문하였다. 과거 쉬망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이 보수적인 엘사스 출신 인물과 독일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내부 사정을 그에게 듣고 나서 적잖이 안심하게 되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83세 된 윈스턴 처칠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 당시 처칠은 프랑스의 로케브륀 근처에서 그의 책을 출판한 리브스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정치색이 전혀 없이’ 좋았다. 아데나워는 작별선물로 처칠이 직접 그린 그림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아데나워가 정계에서 물러나 연방참사회 건물 119호에 자리를 잡게 되자 이 멋진 고대 신전을 그린 그림은 아데나워 책상 뒤에 걸리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처칠을 좋게 생각하였다. 처칠이 전후에 독일을 위해 해 준 것을 아데나워는 결코 잊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가 이 노정치가의 작은 약점을 무심히 넘긴 것은 아니었다. 로케브륀에 있는 빌라 라 파우사를 찾은 자리에서도 아데나워는 그런 관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려하자 그는 나를 밖으로 배웅하였다. 그러나 일어나 나가면서 그는 벽의 틈에 손을 내밀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병째로 말이다!”     

벵스에서 잘 알려진 과거의 탄식이 다시 울려 나왔다. “이 힘든 정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밖으로부터 정치가 나를 몰아대고 안에서도 억지로 그 일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시대의 저주입니다.” 규칙적으로 텔렉스를 보내고 글롭케의 방문을 받았다. 언제나 길게 쓴 브렌타노의 편지도 받았다. 블랑켄호른의 보고서를 받고는 장문의 답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초봄이 무르익은 벵스에서 산책하면서 아데나워는 자기성찰의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상실의 조직 개편이 필요해 보였다. 글롭케는 몇몇 가까운 이들과 만나 고위직 관료를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각의 수장 역할을 할 사람이어야 하였다.” 아데나워는 중년의 나이에 정치 감각이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글롭케 자신이 수상 옆에서 내각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한번 그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기 위하여 정신을 집중하여야 했습니다. 소소한 일에 계속 신경을 쓰다보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또한 육체적 힘도 지금까지에 비하여 조심해서 잘 써야합니다. 이 시기에 나는 내가 앞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의 생각은 좀 더 구체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입법 과정에서의 시의적절한 조정이 필수적이었다. “연방정부 장관들은 다른 장관과 갈등이 있을 경우나 입법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때 통상적으로 연방정부 수상실에 연락을 취합니다.” 이러한 관행이 결국 연방정부 수상실의 개별 부서의 인원 충원을 통해서 개선되어야 했다. 그런데 글롭케는 벵스에서부터 점점 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근무하는 차관들의 업무를 크게 덜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차관들이 연방정부 수상을 제대로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연방정부 수상실에 차관보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업무 처리 권한을 위임해야 합니다.”     

글롭케가 즉각 일처리에 나서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조직은 전체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연방정부 수상과 기민당(CDU) 대표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모든 일은 글롭케가 다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1월 23/24일 논쟁에서 패배한 것의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롭케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면 책임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인해 보세요.     

① 우리가 알고 있는 연방의회 논쟁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는 관리가 누구인가?

② 누구의 지시로 그가 회의에 그 자료를 가지고 왔는가?

③ 브렌타노도 이에 대하여 알고 있었는가?

④ 누가 그 사실을 회헐에게 알려주었는가?     

나는 훼헬이 본 쪽지에 그 내용이 표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 쪽지를 크로네나 아니면 차라리 내게 주지 않고 훼헬에게 준 이유가 무엇인가요? 브렌타노가 그 이야기를 했다면 가장 적절했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크로네와 글롭케를 통하여 여당에 최대한 신속하게 새로운 외교에 관한 논쟁을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말이다. 폰 에카르트는 1952년과 그 이후에 진행된 일에 관한 백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데나워는 당과 여당이 ‘비상사태에 직면하였다’는 말을 듣고 만족해하였다.     

결국 아데나워가 서방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데에서 독일 통일 문제를 중요한 안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몇 주 동안 강조한 이유가 그 논쟁에서 수모를 당한 것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1958년 2월 14일 보낸 편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파견 대사인 블랑켄호른에게 다짐하였다. 곧 군축 제안과 유럽의 안전에 관한 제안을 독일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과 연결시켜 하나의 ‘총체적 제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궁극적으로 독일의 통일이 미해결 문제로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다른 국가들의 대표들이 독일 통일의 문제가 분명히 독일의 문제이지만 분명히 유럽 전체의 문제이며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통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몇 주 전에 델러와 하이네만에게 받은 몽둥이세례를 아직도 얼마나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이 지시의 다음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절절한 시기에 통일 문제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점차 서방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서방과의 유대를 해소하는 것과 독일의 중립화를 진지한 문제로 여기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그렇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련된 지역 전체에서 독일 통일을 다른 모든 문제와 ‘반드시’ 결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런던에서 새로 들어서게 될 노동당 정부는 “독일의 통일을 순전히 독일의 문제인 것으로 설명하고 다루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무엇보다도 외교부가 오래전부터 다루어온 독일의 통일과 군축의 고전적인 결부 자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그렇게 엄격하게 통일과 군축을 결부시키다 보면 독일의 안보 문제에서 많은 양보를 해야만 하거나 소련이 아예 회담장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인식과 모순되지 않는가?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데나워는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독일 통일의 문제를 매우 강하게 물고 늘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58년 1월의 독일에서 독일 통일 문제는 커다란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데나워의 두 정적의 비난은 분명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아데나워 지지자들의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적으로 아데나워가 외교 문제 논쟁에서 패배한 일로 그의 권위는 크게 상처받았다. 아데나워는 여당 지도부, 연방의회 의장, 그리고 외교 업무 담당 제5조의 지도자인 키싱거에게 책임을 미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키싱거는 아데나워의 실패를 대신할 희생양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여단 내부에서 벌어진 사태 전체에 대한 비판에서 키싱거는 담당 장관과 연방정부 수상이 일단 앞장서서 발언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제5조가 실질적인 정보 없이 정부와 여당 지도부를 통해서 자기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이어서 그는 좀 더 강경한 발언을 하였다.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여당은 아데나워 수상 없이 싸움을 전개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라면 ‘지식인들’에 맞서 선거에서 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류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무뚝뚝한 비판을 하는 원내대표는 이 무렵 나름대로 수상에 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월 1일자 일기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거법의 다수대표제와 차기 수상 문제는 얼마 안 가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아데나워가 벵스에서 재충전을 하는 동안 그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당 원내대표단 앞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월 18일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밤에 브렌타노와 함께하였다. 그는 기꺼이 수상이 되고자 하였다.” 2월 22일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에르하르트는 그동안 마음에 담고만 있었던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도 수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2월 28일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온다. “슈뢰더는 사람들의 공개적인 판단에서 게르스텐마이어가 그보다 더 앞서 있다는 사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당 안에서의 판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명료하였다. 아데나워가 약간의 약점을 보이자마자 그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신속하게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나선 것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공개적으로 후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인물이 게르스텐마이어였다. 다만 그가 폰 브렌타노의 뒤를 잇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데나워의 후계자자 되고자 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였다. 델러와 하이네만의 돌격으로 촉발된 갈등은 올렌하우어나 에를러의 주변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주변을 흔들어 놓았다. 올렌하우어와 에를러는 포용 전략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기민당(CDU) 인사들 가운데 좀 더 유연한 이들은 야당의 지지자도 포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자리로는 독일 연방의회 외무위원회가 활용되었다.        

뷔르템베르크 기민당(CDU) 지방당 당대회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게르스텐마이어는 하이네만과 확실히 담판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좌초된 독일 정책을 다시 추진하기 위한 토론을 제안하였다. 이제 게르스텐마이어도 야당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곧 통일에 앞서 독일의 군사적 정치적 지위를 반드시 확립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통상적이지 않은 제안도 덧붙였다. 독일 통일 문제를 다시 정상회담의 안건으로 상정할지를 두고 소련과 다투기보다는 ‘독일과의 평화 조약’이라는 좀 더 넓은 주제를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휴양지 샹마르탱 샤토 두 두멘느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본에서 진행되는 모든 상황을 스라소니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에 관한 평화 회담을 여전히 한심한 생각으로 여기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데나워는 곧바로 폰 브렌타노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의 동료 게르스텐마이어가 소련과의 평화조약을 제안하고 나서며 다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은 동독 문제를 동시에 다루지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게르스텐마이어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갑자기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론이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되고 무엇보다도 소련의 매우 심각한 위협을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롭케는 한술 더 떴다. “나는 게르스텐마이어가 하는 외교 정책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독일의 평화조약 문제가 대두되면 소련의 두 개의 독일 정책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만이 대두되는 것이 아니다. 1956년 말부터 발터 울브리히트는 동독과 연방제를 하기 위한 국제 조약을 통하여 통합을 하자는 제안을 서독에 하였다. 그의 제안의 의도는 자명한 것이었다. 독일 동부 지역의 국가를 이런 식으로 국제법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 독재자가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서독에 비하여 3분의 1 밖에 안 되는 1천7백만의 인구를 지닌 작은 동독이 서독과 동등한 대접을 받고자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연방 동맹 체제에서는 다시 허용된 독일공산당(KPD)과 그 위장 조직을 통하여 서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합법적 가능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끝으로 독일 문제의 해결은 오직 동독과 서독 양국이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주장은 이미 소련이 오래전에 주장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당연히 거절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정상회담이나 그 후속 회담에서 독일 문제를 다루게 되면 연방의 개념을 소련도 내세울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소련이 실제로 독일과의 평화조약에 관한 요청을 받게 된다면 소련은 독일연방을 통하여 승인하면서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두 개의 국가 체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실제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될 것이 뻔하였다.     

1956년 말에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가 연방제를 제안하였지만, 동베를린의 공산주의자들이 프리츠 쉐퍼가 이것을 최초로 제안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는 1958년 11월에 갑자기 공개되어 언론이 깜짝 놀라게 했다. 쉐퍼는 1955년부터 동독의 빈첸츠 뮐러 장군과 이룩한 대화 창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데나워 정부의 재무장관으로서 1956년 10월 20일, 곧 동유럽의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베를린의 동부 지역의 빈첸츠 뮐러 장군의 집에서 3시간에 걸쳐 그와 논의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나중에 동베를린 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여기에서 쉐퍼는 연방제 구상을 ‘베네룩스삼국 협력의 차원에서’ 일종의 독일 통일 방법으로 논의 주제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연방제 아래에서 동독과 서독은 내정 간섭은 하지 않고 다만 경제와 다른 여러 영역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게 될 것이었다.”     

쉐퍼가 빈첸츠 뮐러만이 아니라 다른 군인들과 다양한 만난 자리에서 제안한 모든 것을 아데나워가 정확히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쉐퍼는 자신이 자유선거를 제시한 바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1년 동안은 양측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발언하면서 자유롭게 선거 준비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1955년 6월만이 아니라 1956년 10월 20일에도 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사전에 아데나워 수상과 논의된 일이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10월 19일 금요일에 아데나워와 쉐퍼는 거의 1시간 30분 동안 배석자 없이 대담을 나누었다. 다만 글롭케가 5분 정도 그 방에 불려 들어갔다 나온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10월 22일 월요일 쉐퍼는 다시 아데나워에게 불려갔다.     

1958년 11월 27일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쉐퍼가 빈첸츠 뮐러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 당시 빈첸츠 뮐러는 국방장관 직무대행의 소임을 맡고 있었다. 뮐러의 사무실에서 그들이 만난 사실은 아데나워도 모르고 있었다. 쉐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카페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기민당(CDU) 지도부에게 아데나워가 모든 일에 대하여 최대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때 아데나워는 이 모든 일을 별로 내켜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녹음테이프가 곧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하듯 말하였다. 그러나 녹음테이프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쉐퍼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비록 그가 오토 존 사건과 관련하여 동베를린 지역에 여러 차례 들어가서 소련과 그리고 독일과 비밀 회담을 했음에도 말이다.     

동베를린 측의 권력자가 보기에는 서독이 연방제 구상에 관하여 관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독의 고위 관리가 동베를린에서의 비밀 회담에  그런 식으로 나타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말 아데나워가 이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든지 간에 1958년 3월에 모든 관계자는 4강이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심각한 문제가 등장하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비판의 대상이 될 사람은 아데나워였다. 이제 아데나워가 무엇을 하든지 그는 통일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3월 5일 본으로 돌아오자 독일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자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그는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을 계속 수상이 직접 다룰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곧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나 연방의회 의장이 다룰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본의 기차역에서 아데나워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은 아데나워가 본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새로운 단호함을 보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원내대표인 크로네는 글롭케와 함께 루드빅스하펜까지 아데나워를 수행하면서 본의 기자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아데나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역에 내리자마자 원래 3월 13일로 예정되어 있던 게르스텐미이어와의 외교 문제에 관한 논쟁이 키싱거와의 논의가 있은 다음에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후에 아데나워 수상은 연방정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휴가에서 돌아온 다음 기민당(CDU)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우울한 눈빛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런 난리도 없습니다. 이런 난리가.”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이 본을 몇 주 동안 비우면 이는 예외가 아니라 흔한 일이었다. 그 당시 본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인 《노이어 취리히 차이퉁》의 루흐싱거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마치 곡예 공연을 하듯이 아데나워라는 나이 든 어르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사람들이 외교 정책에 관한 자기만의 생각을 더 강하게 내비치다가도 그분이 돌아오시면 바로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은 이제 관객들이 즐겨 보는 거의 고착화된 본의 정치적 관습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데나워는 몇 차례의 격정적인 회의를 통하여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 3월 20~21일에 외교 정책에 관한 논쟁을 벌일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여당의 전열을 다시 추스르기 위한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이 무렵 만난 모든 이들은 수상이 독일 문제에서 어떻게 하든지 진전을 보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아데나워는 3월 11일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일 문제가 고착 상태에 이르게 될 위험이 매우 급합니다. 그래서 독일 통일은 요원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국무회의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일 문제가 정상회담의 안건이 되지 못하게 될 때는 현상 유지가 필연적인 결과가 될 것입니다.” 3월 말 프랑스 외무장관 피노도 비슷한 논조의 말을 들었다. “독일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유럽 전체, 특히 프랑스에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또한 이 문제를 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바로 1958년 3월에는 모스크바가 서독에 대하여 별로 내켜 하지 않던 노선을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소련의 외교진은 여전히 독일 통일 문제를 정상회담의 안건으로 상정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 대신 소련은 2개의 독일 정책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3월 6일 소련 주재 특별대사 라르는 소련 정부가 8개월 동안 진행된 전쟁보상에 관한 협상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3월 8일에는 협상안, 특히 독일 소련 무역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이 마련되었다. 그다음 날 스피리도노브스키성에서 커다란 파티가 열린 자리에서 당시 흐루쇼프 다음으로 권력 서열 2위에 있었던 미코얀이 라르 대사에게 자신이 무역협정에 서명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하여 본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는 1955년 아데나워와 시작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데나워 수상은 3월 7일 독일 주재 소련대사인 스미르노프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는 스미르노프가 원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매우 자존심이 강한 스미르노프가 과연 모스크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크렘린에 올바른 보고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미코얀은 아데나워에게 자신이 힘이 있고 바르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아데나워가 스미르노프를 몇 년 동안 관찰을 해본 결과 그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교활한 스미르노프 대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미르노프와의 대화는 다시 한번 소련이 독일에 관한 2개 국가 원칙과 연방제 개념에서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 대화에서 아데나워 수상은 스미르노프에게 모든 이유를 들어가면서 독일 통일 구상이 그의 관심을 끌게 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아데나워는 이미 잘 알려진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을 요청하는 한편, 새로운 제안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점령 지역 국민의 자결권을 요청하면서 아데나워는 ‘민족적 고려’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독의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하였다. “소련 점령 지역 국민이 자기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이리 말한 것은 과거 자르조약 문제가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독의 독일 국민에게 부분적 자결권을 주고자 한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의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의 다음 단계는 폴란드에 관한 일종의 가벼운 질책이었다. 스미르노프와 대화를 나눈지 사흘 후에 아데나워는 쾰른을 방문하였다. 그날 쾰른에서는 상트 안드레아스에서 성대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아데나워는 오스트리아 연방정부 수상인 라브와 뮌헨·프라이싱 대교구 교구장인 벤델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함께 독일기사단의 단장인 투믈러 수사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독일과 서방의 유대를 대표하는 이 인물은 독일기사단의 검은 십자가가 빛나는 하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사실 이 기사단이 역사적으로 거둔 가장 중요한 업적은 독일 동부 지역의 식민지화였다. 바로 그래서 그 당시 폴란드의 민족주의 정서에 이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딱 좋은 상징에 속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처럼 역사를 잘 아는 독일인이 그러한 행사에 참석한 것이 폴란드에 어떤 신호를 보내게 될지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에 벌어진 일, 곧 벨그라드에서 일어난 고무우카의 쿠데타, 그리고 폴란드의 라파츠키 플랜만큼 그를 매우 화나게 만든 일은 없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좋지 않게 말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행동이 그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쾰른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일정이 정해졌을 때 아데나워는 카를로 슈미트가 독일의 대표적인 정치가 가운데 첫 번째로 3월 9일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 정책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위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었지만, 아데나워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독일과 소련의 대화도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계획에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의 동방 정책이 오로지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폴란드에 긍정적인 태도를 지닌 블랑켄호른은 2월 14일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을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모스크바입니다.” 폴란드는 일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이 명예기사 작위를 받은 다음 날 독일 연방정부 대통령과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그는 그것을 단순히 즐거운 일로 간주하였다. 대통령 호이쓰 자신도 그 행사에 대하여 별로 나쁘게 여기지 않으며 그를 전혀 비난하지 않고 독일기사단의 문장으로 장식된 아데나워의 사진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그날 밤 그는 슈톨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찐 랍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사진을 동봉합니다. 그가 오기 전에 나는 속기사가 쓰는 것처럼 서둘러 한 단락을 썼습니다. 그리고 시인 쉴러의 스타일로 에티오피아식의 훈장 장식을 달아 카를로에게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행사였음에도 그는 커다란 즐거움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아데나워가 거리로 나서야 했는데 마치 카니발에 참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쾰른은 그런 행사에 적합한 도시입니다. 아데나워는 본래 프로이센에 적대적인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프로이센에 병합된 하노버 근처에 있는 마리엔부르크성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중세 이후 동프로이센의 수도였던 쾨닉스베르크에서 거행된 ‘도시의 날’(Städtentag)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기사단, 특히 [독일 루터교파의 분파] 템플러(Templer)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데나워가 독일기사단에서 명예기사 작위를 받고 나서 6주 후에 독일기사단과 대척점에 있던 폴란드 하원의 폴란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인 츠나크파에 속한 슈토마 교수를 만났다. 그는 아데나워가 만난 첫 번째 폴란드 출신 정치가였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슈토마 교수는 그에게 폴란드의 불만을 전달하였다. 곧 독일군의 핵무장, 서독의 폴란드에 비판적인 서적의 출판, 아데나워가 독일기사단의 명예기사가 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슈토마 교수는 바로 아데나워 수상에게 독일과 폴란드의 외교 관계 수립, 아니면 무역위원회의 수립만으로도 폴란드의 긍정적 반응을 얻게 될 것이고 독일이 국경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폴란드에 관한 아데나워의 정책에서도 양면 전략을 사용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일단은 말다툼을 벌인 다음에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보이면 화해를 위한 외교적 대화에 나선 것이다.     

근본적으로 아데나워는 소련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략을 사용하였다. 스미르노프와의 대화와 불가닌 수상과의 서신 교환에서는 대화와 화해 전략을 활용한 반면에, 독일에 관련된 요구 사항에서는 강경하게 나간 것이다. 몇 년 동안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우리는 러시아와 언젠가는 만나야 합니다.” 사실 협상은 ‘독일이 최소한 소련만큼 강대국이 되었을 때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1957년과 1958년의 독일과 소련의 바람직하지 않은 세력관계에서 가벼운 말다툼으로 여긴 것이 스미르노프와 미코얀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독일의 국익을 끈질기게 지키려고 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 주재 특별대사 라르가 진행한 협상에서 엿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소련 측이 바라는 무역협정에 동의하는 데에 선결 조건으로 소련에 잡혀있는 민간인 포로의 석방을 내세운 것이다. 그 숫자는 약 2만 5천 명에 달하였다.     

이를 위해 라르는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협상을 벌였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소련이 추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모스크바에서 나오지 말기 바랍니다.” 아데나워가 스미르노프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기 이틀 전인 1958년 3월 5일에 스미르노프 대사가 전후 배상 문제에서 양보하자 아데나워 수상의 러시아 외교에서 매우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한 롤프 라르도 다음과 같이 확신하게 되었다. “소련 사람들은 날달걀 다루듯 해야 합니다. 그들의 노동자 투의 말투에서는 그런 조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런 대책을 아데나워도 소련을 대할 때 적극 활용하였다. “한 번씩 강하게 나가고, 원칙대로 하고, 세련미(Signorilità)를 보이다가도 세 번은 참아야 합니다.”     

사실 1958년 초에 아데나워는 소련 측에 접근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적인 독일과 소련의 대화가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현대적 독일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파리의 정상회담 이후 아데나워는 덜레스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다시 마음이 기울었다. “덜레스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소련이 강하게 나올수록 아데나워는 무슨 수를 쓰든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더욱 다짐하게 되었다. 1958년에 아데나워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이 원한다면 언제든 하루 만에 본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미국이 필요하였다. “미국이 없다면 우리는 끝장날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미군의 독일 주둔의 대가로 핵무장을 원한다면 그것을 수용해야만 했다.     

아데나워가 외교 전략에서 좌충우돌하는 가운데에서도 일관되게 보여준 모습의 하나가 바로 현대적 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의 창설에 관한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하였다. 예를 들자면 2월 7일 그가 폰 브렌타노에게 보낸 열정적인 지시가 있다. “나는 그것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군비 확충에 대하여 예상한 속도를 지연시키는 것에 맞선 모든 조치를 취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에 군비 확충의 지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동시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관한 우리의 영향력도 약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외교 정책에서의 우리의 영향력에도 심대한 타격을 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문제의 맥락에서 영국군 주둔 비용에 관한 협상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핵무기에 관한 것도 관련되었다. 3월 초에 그는 여기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이 동서 정상회담의 준비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3월 첫째 주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회담을 위하여 머물고 있던 워싱턴에서 소식이 날아왔다. 곧 슈트라우쓰가 마타도어 미사일의 도입을 확정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대지 미사일로 사정거리가 1,000km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미사일은 매우 고가의 것이지만 명중률은 극히 낮아서 핵탄두 장착에나 적합한 것이었다. 슈트라우쓰는 이것이 단지 연습용 미사일일 뿐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이에 관한 편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민당(SPD)은 즉각 이를 커다란 문제로 삼았고 독일노조총연맹(DGB)과 좌파 개신교 단체와 연합하여 전국적인 반핵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독일 측에 ‘MC70 계획서’에 관한 견해를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이 계획서에 따르면 독일은 전략 핵무기를 사단 수준으로 도입하고, 핵무기 투하를 위한 전투폭격기 편대를 편성하며,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로 무장한 대공방어 대대를 편성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독일 내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보낸 ‘질의서 ARQ1958’에 대하여 답변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되기를 바랐던 독일 연방의회의 논의에서 핵무기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중기적인 의무의 완수와 그에 상응하는 자금 조달 조치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3월 18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원내 회의 열렸다. 그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함께 사민당(SPD)과의 강력한 대결을 촉구하였다. 아데나워가 늘 하던 대로 평화의 손짓을 보이기는 하였다. 곧 있을 정상회담에서 포괄적인 군축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전용 위장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270명에 달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 의원들은 실제로 전투적이며 반소련적인 아데나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는 1949년 이후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에서 이미 전설이 된 모습이었다.     

먼저 아데나워 수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1년째 되던 해를 상기시켰다. 그 당시에 아데나워는 “다시는 전쟁이 없고 군비 확충과 무장도 하지 않을 것을” 바라는 이들에 속하였다. “나는 최소한 그 당시만 해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대하고 꿈꾸었던 것에 비하여 시대가 변했습니다. 나는 1948년 성탄절을 전후한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여기에서 의회위원회가 수립되었고, 올페와 그 너머에 살던 사람들은 매일 밤 소련의 전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결국 더 큰 심각한 전쟁이 우리 국민에게 벌어지고 우리가 그에 대비하여 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한 두 개의 세력은 늘 소련과 독일 사민당(SPD)이었다. 사민당(SPD)이 요구하는 대로 이제와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탈퇴를 요구한다면 미국의 철군을 감내해야 하였다. 그렇게 되면 “유럽 국가들은 소련이라는 거대 세력에 홀로 맞서야만 될 것입니다.” 이는 의회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사항이었다.     

아데나워는 핵무기에 반대하는 모든 종교적 논리를 비하하는 논조로 반박하였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도 함께해야 합니다. 나는 물론 사람들이 자기 종교에 헌신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련에 우리를 넘기게 되면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핵무기를 포기하자는 종교인들의 생각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성적으로 볼 때 확실히 틀린 것입니다.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그는 핵무기 없는 독일을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군은 모든 전투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에는 500만 내지 600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모스크바의 명령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요?” 아마도 미국일 것이다. 영국은 노동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소련은 여전히 세계 혁명을 꿈꾸면서 “대규모의 협공”을 시작하여 서유럽을 양면에서, 곧 지중해와 동유럽에서 포위해 들어올 것이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벌이게 되면 너무나 확실한 것은 서독과 동독은 서로에 호의를 베풀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경제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도 이를 남에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무시무시한 핵전쟁이 벌어지는 전장이 될 것이기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의 제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핵무기를 포기한다고 해서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대국도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 어떻게 빠지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 엄청난 딜레마에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매우 뻔뻔하지만, 이 순간 가장 진지한 어조로 아데나워는 포괄적인 군축 계획과 강자의 논리를 한마디로 정리하였다.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집단적이고 통제된 군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역사에서 국력의 수준이 다른 데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생사가 달린 문제에서 협상을 이룩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지역이 소련보다 강해지도록 하는 데에 우리도 일조해야 합니다. 소련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확실한 협상에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 서방에 속하는 국가들은 소련과 버금하는 국력을 키워 바람직한 협상이 가능하게 하는 것을 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안전과 우리 후손들의 안전을 위하여 이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후손들’이야 말로 그의 눈으로 보기에 강자의 논리 개념을 협상의 목적으로 삼는 데에 정당한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58년 3월의 시점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선동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냉소적으로 들렸다. 이제는 연방의회 전체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군축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대비한 핵무장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서 내려졌다. 당시 여당에는 외교 정치가들의 세련됨이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다시금 자기 지지자들을 ‘강자의 논리’를 중심으로 모으는 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계파의 기민당(CDU) 의원인 페터 넬렌은 279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진 거대 여당에서 사실상 고독한 전사였을 뿐이다. 그의 핵무기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발언은 여당에 적대적인 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소련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구호를 내세우면서 자기 사람들을 사민당(SPD)과의 전투에 나서도록 하자마자 1958년 3월 19일 스미르노프 대사가 면담을 요청하였다. 스미르노프는 정상회담에서 다룰 독일 문제에 관한 아데나워의 생각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각서의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 내용에 따르면 독일이 진정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다루고자 한다면 이는 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전술은 분명했다. 본의 연방의회에서 나흘 동안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모스크바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매우 난감한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곧 한편으로 아데나워가 정상회담에 독일 통일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국제적인 문제에서 아데나워가 너무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하는 델러와 같은 그의 정적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아니면 아데나워가 독일 통일 문제를 강경하게 밀고 나가 그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경우 아데나워는 군축 정상회담이라는 카드를 내밀면서 사민당(SPD)의 반핵운동이 더 이상 그 정당성을 내세울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문 날과 그다음 날 시작되는 독일 연방의회의 논쟁이 얼마나 긴밀하게 관련된 것인지는 외무장관 폰 브렌타노가 3월 20일 스미르노프와 만나서 하려는 회담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 회담에서 브렌타노는 그 하루 전날에 전달된 각서의 존재가 몇 시간 뒤에 바로 언론과 의원들에게 공개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나마 알려지기까지 한 것이다. 스미르노프도 자신이 아데나워를 방문한 사실에 대하여 그가 대사관저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펠리스 폰 에카르트가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중에 유명해진, 아데나워의 소련 정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상황이 조성되었다. 독일 양국이 국내적으로 동시에 변화를 이룩하는 데에서 과연 오스트리아를 모범으로 하는, 동독의 중립국 지위 확보가 가장 먼저 수용될만한 타협안이 될 수 있겠는가? 하필이면 갈등이 고조되는 당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매우 놀라운 제안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에서 아데나워 자신이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매우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1960년 여름 칼 야스퍼스가 이른바 ‘오스트리아 모델’을 공론화시키기 전에 이미 아데나워가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며, 더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에 이와 관련된 제안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제안을 한 것에 대하여 모스크바는 비밀을 지켰고 9년이 지난 다음에 아데나워 자신이 그러한 제안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이루어진 이에 관한 공개 토론에 그러한 사실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통일 없는 동독의 자유’의 이론적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1960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었다.     

그러한 제안을 하기 전에 아데나워는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도 밝혀진 것이 없다. 아마도 아데나워가 단순히 즉흥적인 생각에서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블랑켄호른과 펠릭스 폰 에카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12월 정상회담에서 동서 대화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환영하였고 자신이 구상한 서독과 동독 자체의 의사 타진을 제안하였다. 여기에 관한 회담 참석자들의 반대는 없었다. 1958년 4월 아데나워 생각에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동서 대화가 제도화되어 2~3년 정도 후에는 정기적인 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이며, 외무장관의 만남과 전문가 수준의 협상도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다. 포괄적 군축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어쩌면 긴장 완화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다. 통일 문제는 그 맥락 안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협상의 이 내용에서 처음부터 벙어리들의 대화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게 진행하는 것을 염두에 둔 아데나워의 계산을 엿볼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나중에 자기 회고록에서 밝힌 대로 그는 이제 자를란트 문제에서 겪은 경험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성이 있는 것 아닌가? 당시 독일의 여러 세력 가운데 하나가 꼭두각시 정부가 있는 국가 제도를 형성하였고 독일연방공화국은 이를 오랫동안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정권의 존재는 자르규약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악화시켰었다. 이 규정은 자를란트의 자유로운 관계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다만 자르 지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의 독일인의 자결권을 보장하는 원칙만을 받아들인 태세였다. 곧 자를란트 국민이 이를 받아들일 때 국가에서 이들을 분리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한 것이다. 1955년 여름에 아데나워는 자유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자르 지역 정부와 독일연방정부 사이에서 곧 합리적인 규정이 마련될 것을 기대하였다. 실제로는 상황이 좋아진 덕분에 더 나은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소련 정부가 스미르노프 대사를 통하여 이른바 오스트리아식 해결책이라고 막연하게 들고나온 것이 현실에서는 일종의 자를란트식 해결책과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그 당시에 자를란트의 ‘유럽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현재는 오스트리아를 모범으로 한 동독의 중립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경우 모두 내적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했다. 곧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매우 경솔하게도 자신이 동독에 대하여 자를란트를 모델로 삼을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스미르노프에게 분명하게 말할 뻔하였다. 아데나워는 3월 7일에 있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스미르노프에게 모스크바에서 협상을 진행 중이던 라르가 “어려운 자르 지역 관련 협상에서 보여준 탁월한 인내심과 기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1958년 중반에 아데나워 수상은 라르를 나중에 주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로 파견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아데나워가 과거에 자를란트에 관하여 취한 정책과 똑같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의 언론에 이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국민의 돌팔매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1952년 초에 이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프랑스 외무부에 자신이 어쩌면 자를란트의 유럽화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말하게 될 것에 대하여 미리 귀띔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동독과 관련된 문제의 그러한 해결책을 모든 헌법과 국제법적 조건으로 포장할 생각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대화 가운데 첫 번째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하면서 일단 의사 타진만을 하면서, 문제 해결과 관련된 방안에 관한 생각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유효하였던 독일 전체에서 실시하는 자유선거가 배제되어 있었다. “소련 점령 지역의 국민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아데나워가 전에 빈 주재 소련대사를 역임한 스미르노프에게 이 전체를 오스트리아 모델이라고 치켜세운 것은 당연히 ‘2개의 독일’ 원칙과 동독의 중립국화를 조약을 통하여 확정 짓고자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만큼 자를란트에서 벌어진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당시 자를란트에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정부를 선택하여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서독의 정부나 국민이 여전히 모스크바의 2개의 독일 정책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었던 1965년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사죄의 뜻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 통일의 기회는 나중에도 올 것이다” 아데나워의 그런 생각을 믿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와 마찬가지로 별생각 없이 자르규정을 모델로 삼아 동독 문제에 관해서도 자를란트의 경우와 유사한 분리 발전 방식을 받아들일 뻔하였다. 그는 이에 대하여 1950년대 말부터 그럴듯하게 들리던 근거를 제시하였다. 곧 “가장 중요한 일은 소련 점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었다.”     

1958년 동독지역에서 교회에 관한 탄압, 토지몰수, 그리고 서베를린으로의 탈주 행렬이 아데나워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7년 한해에만 동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사람의 숫자가 25만 명에 이르렀다.     

1958년 1분기의 외교적 상황은 아데나워가 검토를 요청한 이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단순히 협의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비밀 엄수를 당부하였다. 그런 와중에 소련 측의 긍정적인 신호가 나왔다. 곧 서방이 정상회담에서 동독지역에서만 자유선거를 치를 것을 요청하고 동시에 동독의 존립에 관한 잠정적 보장에 관한 협상도 진행하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련이 내세운 2개의 독일 정책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매우 어려운 조건에 붙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미코얀이 곧 본을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양자간 사전 논의를 위하여 소련의 권력 서열 2위에 있는 인물이 그를 만나러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화해의 제안이 그리 믿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르노프는 그다음 날 폰 브렌타노에게 아데나워가 파리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 한 연설이 소련 정부에 ‘많은 희망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한 걸음 전진한 다음에 두세 걸음 물러나는 일이 생겼다고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데나워가 스미르노프와 대화를 나눈 몇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독일 연방의회에서 한 발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틀 전 여당의 원내 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세계 지배 계획,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포기할 수 없음, 포괄적 군축, 강자의 논리를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나흘에 걸쳐 진행된 독일 연방의회의 논의는 아데나워 집권기에 벌어진 것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두달 전과는 달리 여당 연합은 이제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전과는 달리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야당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프리츠 에를러가 슈트라우쓰의 발언을 히틀러 시대의 선전상인 괴벨스의 악명 높은 ‘스포츠궁 연설’에 비유하자 여당 의원 전원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결국 결의안은 다수결로 통과가 되었다. 이 결의안에서는 통제된 군축이 실패하면 독일군을 완곡하게 표현된 ‘최신 무기’로 무장하기로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이제 무엇보다도 반핵운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아데나워는 다시금 사민당(SPD)이 “모든 사람의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과격화되고 있다.”고 보았다. “나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쾰른의 부시장으로 재임하던 때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유명 인사들과 접촉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민주의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과거에는 전혀 찾아볼 수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사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지역과 함부르크에서 핵무기 반대에 관한 여론조사를 시행할 계획과 총파업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지적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이는 헌법을 무력화하려는 단초가 되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이에 맞서 모든 법적 수단의 동원을 결의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사민주의자들이 과격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곧 사민당(SPD)이 총선에서 연거푸 세 차례 패배한 것, 사민당(SPD) 내부의 교조주의자들과 개혁 세력 간의 세력 다툼, 독일공산당의 서독지역에서의 활동이 금지된 이루 그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사민당(SPD)의 노력이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국민의 ‘군중심리’였다.  폰 에카르트는 아데나워에게 그 문제에 대하여 간단명료한 구호로 맞설 것을 조언하였다. 곧 “모든 나라의 핵전쟁에 맞섭시다! 통제된 군축으로 맞섭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자고 한 것이다. 이 구호가 적힌 간판을 거리에 세우고 수상 명의로 모든 가정에 대량인쇄물을 보내자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여당과 민주노동자연맹(ADK)의 주도로 군중대회도 개최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연방정부 공보실장은 사민당(SPD)의 정신없는 공격이 정점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반격에 나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괄적이며 통제된 군축’을 주제로 한 정상회담이 아데나워에게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반하여 독일 통일 문제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4월 11일 아데나워 수상과 논의를 한 다음 외무부는 각국 대사관에 매우 중요한 전문을 보냈다. 아데나워는 정상회담에 4강만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군축 문제에서 성과를 거두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포괄적 군축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따라 독일 통일 문제는 유럽 안보 체계의 구축과 관련하여 일단 뒤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재 논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체적인 독일 통일에 관한 제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독일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 문제의 해결은 일단 군축 문제에서 첫 합의가 도출되고 어느 정도 긴장 완화가 이룩되어야만 근본적으로 쉽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독일 문제로 정상회담의 개최를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다시금 유럽의 안보 체계 수립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곧 “현대 무기의 발달로 제네바회담 수준의 안전보장조약은 오늘날 사실 불확실해졌습니다. 특히 독일은 라파츠키 플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일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급으로 놓는 것에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라파츠키 플랜이나 그와 유사한 지리적으로 매우 제한된 계획은 사실 중립국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데나워는 “외무부에서 수립한 계획, 곧 소련의 위성국가들을 위한 유럽의 경제적 협력 계획”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아데나워는 대사들에게 보낸 전문에서 간단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계획은 “연방정부 수상의 동의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서는 서방의 전혀 많지 않은 자원을 지중해 동쪽에 있는 우리의 우방국들 또는 파키스탄과 같은 국가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계획에는 소련이 즉각 자기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인식할만한 제안들을 담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데나워는 그때부터 서방의 모든 대화 상대에 대하여 이러한 자기 뜻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는 실무자 협상 때문에 중단된 긴장 완화를 위한 일련의 정상회담을 다시 열자는 자기 구상에 영국의 맥밀런 수상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동유럽 지역 문제를 먼저 다루지는 말되 그렇다고 의제에서 제외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상기시켰다. 그래서 서방도 환상을 품지 않는 단호함과 더불어 커다란 인내심을 지니고 협상 대상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맥밀런에게 소련의 그로미코가 “협상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유명한 ‘꼴통’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5월 초에 아데나워는 데이비드 브루스 대사에게 좀 더 강경한 의사를 전달하였다. 곧 독일 문제를 회담의 ‘요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긴장 완화’라는 주제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상회담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못할 때 그 책임은 분명히 소련 측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직접 브루스 대사에게 이미 여러 차례 자기 국내 정치적 동기를 언급하고 나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선거가 있기 한 달 전인 6월 5일에 폰 브렌타노를 시켜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본심을 털어놓도록 하였다. 사실 그랬다. 정상회담에 관한 입장의 전략적 차이는 사실 국내 정치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곧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선거가 중요한 변수였던 것이다!     

6월 중순에 미국 대사는 결국 아데나워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듣게 되었다. 곧 과거에 연속적으로 긴장의 원인을 제거하여 실질적으로 군축을 이룩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군축을 먼저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 완화와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가장 깊은 속마음을 그의 측근인 블랑켄호른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곧 덜레스가 독일 통일 문제를 이용하여 정상회담의 구상을 차단하거나 중단시키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정상회담을 최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독일 여론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또한 독일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긴장 완화를 위하여 최선을, 정말로 최선을 다한 다는 것을 보여줄 때야만 핵무장이라는 어려운 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이러한 가시적인 노선 변경은 서방 연합국에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 자신이야말로 작년만 해도, 특히 모든 계략이 동원되던 총선 전 몇 달 동안에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에게 독일 통일과 군축을 반드시 연계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못 박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덜레스는 놀란 표정을 짓게 된 것이다. 그 사이 아데나워 수상이 부드러워져서 독일 통일 문제조차도 뒷전으로 몰아내려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아데나워는 평화의 보장을 포괄적인 군축과 완전히 동등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해두었다. 협상에서 [핵 미사일] 발사와 운송 시설을 다루게 되는 것에 대하여 데이비드 브루스 대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핵폭탄은 검증할 수 있게 제거하기는 힘들지만, 운반시설은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감시에 관한 측면을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75% 정도까지 통제된 군축이 가능하다면 군축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무렵 아데나워와 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은 군축을 위한 정상회담이 아데나워로 하여금 5개 주에서 열리는 독일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 선거는 1958년에 실시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승리하면 기민당(CDU)이 연방참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될 수 있었다.     

아데나워가 1958년 초에 독일 문제에 대하여 소련이 생각을 바꾸게 되기를 바랐었다고 하여도 그 희망은 이미 1958년 4월 말에 깨지고 말았다. 1958년 3월 27일 연방의회의 의원 다수가 핵무장을 지지하고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불가닌이 실각하였다. 1955년 이후 아데나워는 불가닌이야 말로 독일에 가장 우호적인 인물일 것으로 여겨왔다. 불가닌의 후계자로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소련공산당(러시아어: КПСС, 독일어: KPdSU)의 제1서기의 자리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수상의 자리도 장악하여 스탈린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흐루쇼프를 좋지 않게 여겼다. 독일이나 독일연방 수상과 불편한 인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독일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수상 직무대행의 본 방문은 그러한 부정적 예상을 더욱 강화하는 일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마치 러시아의 높은 귀족인 척하는 아르메니아인인 미코얀을 정중히 대할 줄 알았다. 폰 에카르트는 아데나워 수상이 러시아 고위 관리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지만, 예절을 갖추어 대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적당한 소문을 퍼뜨릴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폰 에카르트는 아데나워가 미코얀의 정찬 연설을 듣고는 매우 강력한 반박 연설을 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이는 폰 브렌타노와 커다란 대조를 보였다. 폰 브렌타노는 본을 비판하는 미얀코의 매우 불손한 연설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독소 정상회담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아데나워가 소련이 제시한 동독에 관한 오스트리아식 해결 방안에 대하여 얼마나 화를 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1958년 4월 26일 기록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련이 미코얀을 독일에 보낸 이유는 독일이 핵무장을 하지 않는 것이 독일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득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미코얀은 소련이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재래무기의 군비축소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결국 미코얀의 방문은 독일과 소련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만 증명하는 일이 되었다. 1958년 4월에 있었던 미코얀의 경고는 결국 흐루쇼프의 베를린 봉쇄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 조치에는 서독과 동독이 각각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요청이 더해졌다.     

국내 정치적으로 미코얀이 본을 방문한 것은 아데나워에게 부담을 줄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야당은 수상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비난을 하기가 곤란해 진 것이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권력 서열 2인자에게 비교적 예의바르게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7월 6일에 치르게 되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반핵운동도 눈이 뜨이게 약화되었다.     

아데나워는 1957년 총선보다 이 지방선거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선거 승리에 영향을 미친 것이 수상과 기민당(CDU)의 투쟁 정신이었는지 아니면 선거일 전에 사망한 칼 아르놀트에 관한 동정표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기사당(CSU)의 반핵운동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민당(CDU)은 50.4%의 득표율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의회의 다수당이 되는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또다시 선거에서 패배하게 된 데에 따른 영향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 내부의 급진적인 평화주의 파벌이 힘을 잃게 되었다. 사민당(SPD)의 개혁파인 프리츠 에를러, 빌리 브란트, 하인리히 다이스트, 헬무트 슈미트, 칼 쉴러는 이를 다행으로 여겼다. 선거 결과는 또한 좌파 노동자 단체인 ‘교회형제회’(Kirchliche Bruderschaft)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이는 구스타프 하이네만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자민당(FDP)에 미친 여파도 중요하였다. 뒤셀도르프의 신진 세력의 선두에 있었던 바이어, 되링, 쉐엘의 당내 입지도 좁아지게 되었다. 자민당(FDP) 원내대표였던 멘데는 3월에 있었던 의회의 대토론에서 아데나워의 사임을 촉구하고 ‘국가 비상 계획’의 수립을 제안한 바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시민 연합의 쇄신 노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아데나워는 만약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면 그것은 ‘기가 막힌, 파멸’이 될 뻔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제 기민당(CDU) 내부적으로는 핵무장이 어느 정도 당론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해 2월과 3월에 여전히 아데나워의 가장 커다란 고민거리였던 독일 통일 정책은 이제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 이번 선거의 승자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지난 9년 동안의 통일 정책을 마치 체념하듯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리 모두 통일 시점에 대하여 잘 못 생각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1948년과 1949년 의회위원회가 소집되고 소련이 다른 서방 3개국과 더불어 독일 점령군이던 시기에 우리는 모두 그 당시 우리가 제정한 헌법의 유효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헌법은 독일의 점령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국민회의에서 제정된 새로운 헌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흘렀습니다. 세계정세는 날로 대립으로 치달으며 냉혹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의 전선은 날로 확대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계의 긴장 완화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통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아데나워는 ‘인간적인 도움’이라는 찬가를 부르게 되었다. “독일 통일 정책은 앞으로 철의 장막으로 가로막힌 서독과 동독의 사람들의 인간적인 동질감이 보존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데나워는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긴장 완화라는 개념을 강자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제기해 왔다. 그러나 독일회담과 동서독 동시 자유선거를 내세우는 공식적인 정책의 차원에서 아데나워는 그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제 정상회담에 관한 국제적 관심이 시들해졌기에 아데나워는 이전에 추진했던 구상을 접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소련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오스트리아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데나워가 1958년 3월 19일 스미르노프와 가진 회담이 외교적으로 심각한 실수였다는 것을 몰래라도 스스로 깨달았을까? 독일연방 수상이라는 인물이 두 개의 독일이라는 구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지를 꺾었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하는 것만큼 잘 보여주는 일도 있을까? 그러한 태도가 상대방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상대방이 아무 생각이 없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쉐퍼는 동베를린에서 연방제 구상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 바가 있다. 이제 독일연방공화국 수상마저 비록 비공개적인 것이었지만 매우 공식적인 회담에서 두 개의 독일이 병존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는 말하기에 이르렀다. 아데나워가 이 정도 양보하는 상황에서 과연 소련이 동독의 울브리히트 정권을 희생시키거나 두 개의 독일 정책을 고수하지 않을 마음을 먹게 되겠는가? 흐루쇼프가, 두 개의 독일에 관한 최종적으로 제출된 평화조약 초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흔들리고 있던 독일의 입장을 강력한 압력을 가하여 완전히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이 독일 통일 정책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지적이 있자 그는 매우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1958년 11월 27일 매우 길게 이어진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은 물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유화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나섰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폰 브렌타노는 사민당(SPD)이 외교위원회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소련에 ‘통독 문제’가 아니라 ‘독일 문제’만 제기하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키싱거와 시민당 내의 그의 동료들도 이 문제에 대하여 처음에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여겨졌다.     

9개월 전만 해도 소련대사와 대담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을 한 당사자인 수상이 인제 와서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흥분하고 나선 것이다. “올해 7월 2일부터 연방의회 위원회에서 우리의 태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의원들은 ‘독일 문제의 해결’이라는 종래의 완곡하고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독일 통일’과 ‘독일 문제 해결’을 엄격히 구분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도 포함하는 이 ‘독일 문제’를 의도적으로 뒤로 미루어 왔습니다.” 늘 “우리는” 말해왔습니다. “자유로운 독일 통일! - 우리는 늘 되풀이 하여 말해왔습니다. 가장 먼저 자유롭고 국제기구의 감시를 받는 선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만 새로 구성되는 전독 정부가 4개 점령 국가와 평화조약을 놓고 협상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점차 논의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이렇게 비난과 탄식을 하는 동안 베를린에 관하여 이미 제출된 소련의 최후통첩 내용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아데나워는 그 요점을 그 자리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낭독하였다. 그 몇 분 전만 해도 아데나워는 독일 의회의 ‘유화적인 태도’가 연합국 측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말했던 참이었다.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드골이 매우 강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통보해 왔다. “소련이 동부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나서 그 자리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독일 국민 가운데 많은 이가 긍정적으로 여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블랑켄호른은 이를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 이러한 자세한 내용을 전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데나워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구상을 모든 이에게, 특히 소련 측에 전달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싶었다. 이와 관련하여 흐루쇼프가 보낸 베를린 각서를 참조해야 한다. “나는 – 비록 당연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 3개의 서방 점령국들과 마찬가지로 – 비록 일단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지만 – 소련 측에서도 우리의 유화적인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곧 독일 통일 문제에 관하여 독일 국민도 점차로 러시아에 기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민당(SPD), 자민당(FDP), 외무부, 게르스텐마이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독일의 공식적인 외교 정책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들 모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1956년부터 일종의 카드로 지은 집과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곧 어느 한 곳의 카드만 무너져도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58년 3월 19일 스미르노프와 나눈 대화가 그 카드로 지은 집의 가장 취약한 카드를 아무런 생각 없이 건드리게 되었으니 이는 기가 막힌 정치적 사건이 된 것이다.     

1958년을 돌아보면 아데나워 수상 자신이 독일 문제에서 그러한 취약하고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던 카드로 지은 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곧 제2의 독일의 불인정, 동독 주민의 열악한 상황, 베를린 문제, 군축 정책과 재무장 통제 정책,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 독일군의 창설, 연합국과 관련된 독일연방공화국의 지워, 독일의 국내 정치에서 모두 그러하였다. 아데나워가 늘 ‘주도적 인물’이었기에 그는 이러한 카드로 지은 집에 계속 카드를 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곧 카드를 밀거나 빼내어서 그 집에 변화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카드로 지은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1958년 11월 이전에 흐루쇼프가 야기한 베를린 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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