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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본 민주주의의 강화 II

아데나워 전기 II

국빈 방문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가 국제정치적인 위기가 연속된 시기였다. 위기관리라는 개념은 이 당시 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수상의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독일 여론은 상당히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의 외교가는 여러 국빈 방문으로 국제적인 도시의 분위기를 보여주게 되었다. 사실 독일연방 대통령이 주빈이었음에도 이 모든 것은 연방 수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그의 후계자와는 달리 해외 방문 활동을 그리 활발하게 수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에 관한 일은 아데나워가 주로 처리하여 처음 그런 기회가 왔을 때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먼 나라임에도 방문에 나선 것이다.     

아데나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활동에서 이러한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의 심리적, 현실적 측면이 나타나 있다. 먼저 심리적인 측면의 차원에서 볼 때 아데나워는 국가를 대표하는 것을 매우 즐기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에 관한 재능을 타고나기도 하였다. 이미 쾰른 시장 재임기에도 보여주었던 것을 이제 새롭게 커다란 스케일로 전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다른 나라들, 외국의 중요한 국가수반들, 새로운 정보에 관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도 한몫하였다. 국빈 방문과 그 밖에 만남을 수행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한 독일연방공화국이 세계 국가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흥미를 보였던 여론도 본에서 벌어지는 국빈 방문 행사나 본의 거물들의 해외 방문에 대하여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 중반까지의 기간에 이러한 일이 여전히 비교적 새롭고 흥미 있는 일이기는 하였다. 아데나워와 그의 중요한 공보비서인 폰 에카르트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상의 해외 순방, 커다란 외교 행사와 낯선 국빈의 등장은 외국만이 아니라 아데나워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독일의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56년과 1957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수상에게는 그러한 것이 매우 필요했다.     

연속적인 해외 방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권 선언에 있기 전인 1950년대 초반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일이기는 하였다. 서방 연합국의 외무장관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유럽 통합에 매우 긍정적이었던 이탈리아 정치가들이 냉각된 관계를 종식하고, 국빈 방문으로 양국을 오가는 길을 텄다. 이탈리아 정치가들의 독일에 관한 우호적인 태도는 놀라울 정도였고 아데나워의 초기 외교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데 가스파리 총리가 물꼬를 튼 이후에 1956년에는 그의 후임 이탈리아 총리인 세니스가 우호 관계의 차원에서 본을 방문하였고 아데나워도 답방 형식으로 로마를 방문하였다.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아데나워는 이탈리아와 기독교 민주주의 차원의 세계관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그가 꺼리는 좌파 세력이 약진하고 있었고 특히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깊은 우려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탈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독일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공통된 반공주의가 유럽 통합 정책에 관한 양국 정치가의 긍정적인 태도를 촉진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러한 정책은 이탈리아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50여 년 전 학생 시절 때부터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산책을 즐긴 이후 이탈리아와 정서적 유대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그러한 정서적 유대감이 이제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1957년 초에 아데나워가 코머 호숫가에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카데나비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생애 후반기에 아데나워는 이 도시를 최고의 휴가지로 삼았다. 그래서 본의 유명 인사들은 독일 정부 수립 초기에 베른의 오버란트를 자주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별장의 매우 아름다운 공원을 방문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물론 이는 아데나워 수상의 초대를 받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특기할 것은 오스트리아도 매우 일찍 독일을 공식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국민당(ÖVP) 소속 외무장관 칼 그루버는 오스트리아사회당(SPÖ) 소속의 차관인 브루노 크라이스키를 대동하고 1953년 5월 독일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비록 이탈리아에 비해서는 민감한 부분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계는 좋았다. 이 두 나라 사이에는 이른바 ‘독일 자산’에 관한 난제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가 보기에 우려스러운 문제도 있었다. 곧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소련군의 철수 대가로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의 지위를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이것이 독일에도 선례가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러나 ‘자체적인 주권에 따른 결정’에서 나온 중립국 지위에 관한 동의를 하겠다는 다짐 이상의 것은 오스트리아 측으로부터 얻어낼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전쟁 배상을 요구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그 소식을 듣고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인 그루버에게 다음과 같은 답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우리에게 전쟁 배상을 요청한다면 우리는 아돌프 히틀러의 유해가 담긴 유골함을 빈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오스트리아에 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은 견해차가 아니라 양국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좋은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독일의 모든 지도층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 수상도 논란거리였던 나치 시대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유지되어온 오스트리아의 병합을 지속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데나워 개인의 차원에서 오스트리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나라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이 정책에 그 어떤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오스트리아는 그저 작은 이웃 국가로 정중하게 대하고 독일에 관한 지지를 끌어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또는 덴마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주변의 약소국을 신중하게 대한 것은 독일의 외교 정책 초기의 신중한 자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눈에 뜨이는 사실은 이러한 중부 유럽과 서유럽의 작은 나라들의 정부와 대부분 언론이 독일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에 대하여 처음부터 호감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아데나워의 초기 방문 외교에서 보여준 신중한 태도는 나중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나서도 이어졌다. 베네룩스 삼국은 유럽 6자 공동체에도 연계되어 이 공동체가 개최하는 외무장관회의에도 정기적으로 참가하였다. 덴마크 총리 한센도 독일이 주권을 공식적으로 회복하기 전인 1955년 2월에 본을 방문하여 커다란 의전행사로 환대받았다. 1955년 5월 5일 이후 아데나워가 실행한 실시한 본격적인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에 대한 국빈 방문이 1956년 2월 로마, 1956년 9월 벨기에, 1957년 6월 빈에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빈이 아데나워의 관심을 끈 또 다른 이유는 1954년부터 소련이 오스트리아를 중간에 내세워 본에 외교적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도 같은 방식으로 의사를 소련에 전달하였다. 베를린 위기가 있던 시기에도 이러한 통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이러한 일에 오스트리아의 사민당(SPD) 출신 차관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외무장관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특이한 점은 아데나워가 브뤼셀이나 빈을 방문하기 훨씬 전에 그리스와 터키를 국빈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국가에서 아데나워는 이미 1954년 3월에 성대한 영접을 받은 것이다.     

하필이면 그리스가 아데나워를 초청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는 독일 나치군의 공격에 희생당하였고 나치에 맞서 저항군 운동도 벌였고 독일의 점령 시기에 엄청난 기근에 시달렸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가 그리스의 환대를 받은 것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그 당시 그리스에서 실세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스의 국왕 파울은 독일 뮈르비크에서 해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왕비 프리데리케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조카이자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의 실세였던 파파고스 사령관은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게다가 그는 아데나워만큼이나 매우 영리한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와 거의 동시에 소련과 관계 정상화를 이룩한 것이다.     

인문 교육을 단단히 받은 아데나워가 주권 국가 수반으로서 초대되어 이루어진 국빈 방문을 제대로 된 관광을 할 기회로 삼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6일간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시간을 내어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였다. 여기에는 아크로폴리스, 테세우스 신전, 독일 고고학연구소, 다프네 수도원, 델로스, 산토리니가 포함되었다. 산토리니에서 이 78세의 정치가는 나귀 등에 오르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나우필리아, 티린스 미케네와 당연히 올림피아도 방문하였다. 그는 모든 장소에서 남부 유럽 특유의 환대를 받았다. 사토리니에서는 밤에 사람들이 횃불을 들어 성벽에 걸린 ‘아데나워’라는 이름을 환하게 비추기도 하였다.     

그리스 방문은 8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는 탁테스가 아데나워에게 터키에서도 이 정도 기간 환대를 받아야 한다는 암시를 보낸 것이기도 하다. 사실 터키에서는 비록 나치 독일의 점령을 당하였지만, 독일에 관한 호감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아데나워를 영접한 사람은 국무총리인 멘데레스였다. 이후 아데나워는 6년에 걸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와 멘데레스의 독일 방문을 기회로 그를 자주 만났다. 그러나 나중에 멘데레스는 쿠데타로 실각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터키의 독일에 관한 호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앙카라, 이스탄불, 과거에 스미르나로 불린 이즈미르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터키 사관학교를 방문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을 향하여 학생들이 [히틀러 시절에 독일에서 하던] “만세!”(Sieg-Heil) 삼창하는 것을 들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중앙당 의장단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표정을 관리하면서 그 인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그 인사를 기꺼이 받았다.     

이때와 그 이후의 장거리 여정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세 딸인 로테 물트하웁트, 리아 라이너스 리베트 베어한 가운데 한 사람을 퍼스트레이디로 동반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여정에서 여행, 관광, 파티도 매우 즐겼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러한 방문을 통하여 중요한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데나워는 중동에 관한 독일의 근대와 현대에 이루어진 정책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가 13살일 때 빌헬름 2세 황제는 그의 누이인 소피가 약혼한 것을 계기로 대규모의 수행원을 이끌고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 이어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술탄의 궁정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커다란 요새로 이루어진 과거 독일 황제 시절의 대사관 건물과 독일 대사관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름 별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이 추진했던 강대국 정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 수상이 보니 보스포루스에 있는 궁전이 매우 낡아 신속한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터키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1954년에 이르러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으로서 야전군 총사령관 폰 데어 골츠의 무덤과 독일군 묘지에 헌화하는 자리에 오게 되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을 상대로 간략하게 한 발언에서 아데나워는 이렇게 독일이 주권을 회복하기도 전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에 가서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의 의미를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더구나 그 지역은 영국이 수십 년 동안 지배해 온 곳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나라들에서 ‘미래 독일 외교 정책을 펼칠 장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에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그곳을 방문한 일에 대하여 여러 유럽 국가가 말은 안 하지만 내심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미국을 자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이 나라들에 우리 외교 역량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분명히 독일의 빌헬름 제국 시대의 논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영국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임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독일이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펼치는 모든 활동에 대하여 영국 외무성이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군과 나치친위대의 행적과 1950년대 초반부터 이집트에서 활동해 온 독일 출신의 미사일 전문가들에 대하여 고위위원회의 영국 측 인사들이 매우 비판적인 발언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국의 발언도 아데나워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스스로 이 지역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선언하고 나선 이후 그가 런던의 근시안적 시각에 대하여 비판하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아데나워가 신뢰하는 외국 정치가에 속하던 이탈리아 국무총리인 안토니오 세니는 1956년 7월에 영국의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관한 정책을 세부적으로 비판한 아데나워의 견해를 받아보았다. 그에 따르면 런던은 이집트, 그리스, 사이프러스에서 “근시안적인 것으로, 유럽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당시 그 나라들에 관한 미국의 영향력이 영국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954년 초에 그리스와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독일의 가입은 먼 이야기였다. 미국은 중동과 근동지역에서의 독일의 경제활동과 독일의 경제 원조를 아직은 미국과 경쟁이 되는 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이 처음에는 약간 소극적으로 터키와 경제적 관계를 맺자 미국은 독일이 완전히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것을 독려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경제지원은 곧 군사 지원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유사한 흐름을 아데나워의 이란에 관한 매우 놀라울 정도의 관심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국내 정치적 계략을 국제정치적 술수와 연결시켰다. 이란의 젊은 샤(Schah, 국왕)가 베를린에서 태어난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를 왕비로 맞이한 이후 이 두 사람은 독일 언론의 긍정적 부정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라야의 아버지가 독일 주재 이란대사라는 사실도 호재였다. 연방정부 공보국의 시각에서 볼 때 이란의 샤가 소라야 왕비와 함께 독일을 방문한다면 이는 아데나워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1955년 2월 이란 국왕의 독일 국빈 방문은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독일연방공화국 자체가 독일의 경제적 기적을 즐기고 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초기 행사에 속하는 일이었다. 정부기록관, 사진기자, 신문비평가들은 한결같이 독일 외무부 소속 에리카 파프리츠의 지휘로 새로운 독일의 사교계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그런데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독일 연방정부 수상은 이 자리에 한편으로는 신흥 부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독일의 전통에 따라 세련된 사교 모임에 공을 들이는 이들을 초대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란 국왕이 아데나워의 테헤란 답방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답방 일정은 1957년 초, 다시 말해서 총선 사전 선거운동이 시작될 무렵으로 정해졌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대규모의 수행원을 동반한 해외순방으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에 사실 아데나워는 짜증이 난 참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때가 페르시아를 화려하게 방문하기에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페르시아는 여전히 동화의 나라였던 것이다. 영화관이나 텔레비전의 주간소식과 대중신문을 통해 전해진 아데나워의 모습, 곧 샤-인-샤 궁전, 쉬라스, 이스파한,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하는 모습은 그가 바라던 효과를 거두었다. 사실 이는 선거전에 활용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을 뿐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란 순방은 중동과 근동의 긴장 지역에서의 좀 더 중요한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끈질기게 추진하는 이스라엘 정책으로 아랍 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실에 대하여 커다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주재 독일대사들과 충분한 접촉을 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덜레스에게 아랍 국가들의 정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충고를 하였던 차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아스완 댐 건설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컨소시엄 형식으로 추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본이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과의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동안 독일·아랍 관계 개선은 난망한 일이었다. 외국 주재 독일대사들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란은 여전히 완고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이란의 민감한 정서를 건드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순방에서 돌아온 아데나워는 내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은 제가 테헤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영국은 현재 이란 국왕의 부친을 권좌에서 몰아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란의 모사덱 정권의 붕괴 이후 페르시아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아데나워는 이란을 방문한 지 2주가 지난 다음 덜레스와 대담을 나누면서 영국 언론이 자기 이란 방문에 대하여 비판적인 논평을 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중동과 근동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1954년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데나워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과 독일의 협력을 강조한 것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덜레스는 독일이 중동 지역에서 식민지를 둔 적이 없기에 그러한 협력이 적절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미국의 긍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테헤란에서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이란의 국왕이 이란의 경제 발전을 위한 독일과 이란의 협력을 제안하자 아데나워는 이를 위하여 다른 국가 특히 미국의 자본이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공동 사업 계획을 수립하되 독일의 사업가가 그 사업을 이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이란은 특히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이 파이프라인은 이란의 곰에서 시작하여 터키를 거쳐 지중해의 에스칸데룸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당연히 테헤란은 이 계획과 마찬가지로 다른 계획에 관한 재정 지원이 선행되는 것을 바랐다. 그리고 석유 판매 수입으로 적어도 3년 안에 채무 청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투자계획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미국대사인 리처드가 제안한 30-40만 톤의 제강 능력을 지닌 제철소 건설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았다.     

페르시아 지역에서 귀국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이란 국왕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석유 판매로 마련한 자금을 이란의 산업화를 위하여 투자하는 계획이 옳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자기의 독자적인 이란 정책이 존 포스터 덜레스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덜레스는 1954년 이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터키와 중동 조약을 맺는 것을 선호하여 왔다. 아데나워는 내각에서 이슬람권의 파키스탄, 이란, 터키 3국은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자유세계를 보호하는 ‘방어막’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아데나워 중동 정책의 개념은 분명하였다. 곧 독일은 이 지역에서 미국과 긴밀한 협력을 할 뿐이고, 이에 독일의 경제력과 더불어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유럽 이외 지역에 대한 외교 정책을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커다란 동서대결의 틀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에 관한 배려도 주요 요소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지리전략적인 고려 사항도 빠지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도 그의 해외 정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수출주도 산업 국가의 수상으로서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과거에 그리스나 터키에서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동과 근동에서 독일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로는 외국인들조차 그러한 아데나워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아데나워가 1958년 7월 21일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브루스와 나눈 매우 특이한 대화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와일드 빌 도노반’(Wild Bill Donovan)이라는 가명으로 런던과 파리에서 미국정보국의 서유럽 지부 활동을 총괄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제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의 아데나워와 7월 14일 이라크 혁명 이후에 나타난 상황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가? 독일에 이로운 혁명이 이라크에서 발발한 1941년 이후 독일은 이라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정보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혁명을 주도한 인물이 이제 이라크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다. 실제로 이라크의 새 실력자는 기꺼이 서방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영국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서방 국가들에 조언하고, 독일이 아무런 중재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독일은 중동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탈식민지화가 1958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검은 아프리카는 아데나워에게 매우 낮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1954년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956년 가을 투브만 대통령, 1959년 가을 세코우 투레의 독일 국빈 방문은 아데나워가 보기에 본의 사교 모임 달력에 색깔 펜으로 표기한 그저 그런 행사일 뿐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아데나워가 지닌 아프리카에 관한 구식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아프리카인들은 스스로 나라를 이끌어갈 능력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1960년 초에 이스라엘의 벤구리온이 아데나워의 그러한 견해를 단호하게 반박했음에도, 그는 자기 편견을 고쳐나갈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반면에 그는 아시아의 발전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하게 여겼다. 1956년 7월 아데나워가 매우 공을 들인 3개 국가의 국빈들이 모두 아시아에서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 인도의 수상 네루,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멘지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아데나워는 1955년 4월 개최된 제삼세계 국가들이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을 선언한 반둥회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자신이 매우 좋게 여긴 세계적인 차원의 반공주의 연대에 이 회의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잠시나마 독일의 중립 국가화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던 1955년 초반에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중요한 국가들과 그 당시 국제적인 영향력이 컸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사령관이 비동맹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아데나워는 반둥회의가 반식민주의를 강조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이 모스크바와 북경의 팽창 정책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였다.     

1955년 여름에 개최된 제네바회담 이후 아데나워는 사방에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겼다. 1955년 11월 흐루쇼프와 불가닌은 14일 동안의 인도, 버마, 아프카니스탄 국빈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서 소련의 이 두 지도자는 1956년 4월 런던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56년 6월 프랑스의 기 몰레와 피노와 모스크바에서 회담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의 후폭풍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애썼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6년 7월 중순 네루가 독일을 국빈 방문한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아데나워는 네루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루 방문 한 달 전에 아데나워가 사이러스 슐츠버거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던 것이다. ‘네루는 인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인도에서 해야 할 일이 넘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 네루를 전혀 몰랐다. “아데나워는 네루에 대하여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네루가 허영에 넘치고 늘 자기가 중심에 있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슐츠버거는 아데나워에게 네루와 깊은 대화를 나눌 것을 조언하였다. 네루의 국빈 방문 준비를 위해 아데나워를 찾은 독일 주재 인도대사와 대담을 나눈 다음 그는 내각에서 별로 친절하지 않은 말을 하였다. “나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네루는 특별한 생각을 하고 독일을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경제적 지원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인도의 국빈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기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이 만남을 높이 평가한 것은 이 인도의 국부가 지닌 다양한 풍모에 관한 과거의 평가에 비하여 볼 때 훨씬 올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정상은 서로를 매우 정중하게 대하였고 각자의 세계관을 매우 탁월하게 전개했으며 직접적인 충돌을 최대한 피했다.     

이 두 정상이 가장 커다란 견해차를 보인 것은 당연히 소련에 관한 평가였다. 아데나워는 소련이 여전히 ‘매우 팽창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소련이 무기를 공급한 일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군사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아데나워는 생각한 것이다. 독재자는 힘의 논리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하여 네루는 모든 강대국이 강대국처럼 굴고 있고 때로는 다른 나라의 내정에 기꺼이 간섭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들의 정치적 관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서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데나워의 최종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네루의 생각은 인도의 관점과 영국의 관점을 이상한 방식으로 섞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네루는 아시아의 근본적인 변화가 유럽의 상황에도 점점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네루에게 흐루쇼프가 중국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제 정치 무대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저 쌀 한 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못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1966년 아데나워는 베트남전쟁, 1962년에 발발한 인도·중국 전쟁, 중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언급하는 가운데 네루와 나눈 긴 대담을 회상하였다. 아마도 4억 명의 정치적 태도를 좌우하던 인물을 만난 일이 그에게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의 머리에는 아시아의 혁명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곧 빌헬름 제국 시대의 ‘황색 위험’에 관한 두려움의 잔재, 신맬서스주의, 지리전략적인 계산, 전환기의 위대한 인물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이 그에게 남게 된 것이다.     

그가 눈으로 직접 본 것에서 그의 사고가 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가 1960년대 초반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세계적 차원의 상호의존이라는 큰 틀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1960년대 중반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엄청난 땅덩어리, 태평양의 어마어마한 양의 물, 1억 명의 인구를 지닌 일본, 6억 명의 인구를 지닌 중국을 눈앞에 떠올려보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사실에 열린 시각을 지니고 세상에는 이렇게 넓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특히 아데나워는 앞으로 국제연합이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우려를 표명하였다. 1960년 1월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프랑스의 드골이 지난번 자신을 만난 자리에서 쪽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고 말하였다. 그 쪽지에는 내년에 예상되는 국제연합 회원국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아데나워가 그 쪽지를 내각 앞에서 읽었다. “검은 아프리카의 30개 국가, 20개의 모슬렘 국가, 모슬렘에 속하지 않는 18개의 아시아 국가, 12개의 소비에트 연맹 소속 국가 18개의 중미와 남미 국가 모두 합쳐 98개 국가입니다.” 이에 비하여 서방 국가는 15개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미래의 세계 정치의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세계가 급격히 변하고 서로 의존하는 상황을 볼 때 아데나워가 유럽의 통합에 공을 들이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유럽’, 곧 아데나워가 늘 말하던 서유럽은 미국 없이는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도 아데나워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차선책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의 귀환     


수에즈 운하 위기가 벌어진 직후인 1956년 11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거의 파탄이 난 것처럼 보였다.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인 그리네는 11월 16일 아데나워 수상을 예방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지난 4~5개월에 걸쳐 미국의 외교 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신랄하게 비난해온 차였다.     

아데나워는 어찌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아데나워가 격렬하게 비난했던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리네 상원의원은 그 당시 미 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정치가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존 포스터 덜레스, 알렌 덜레스, 또는 퀄레스에게 불만을 털어놓은 것은 아직 개인적 불만으로만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 수상은 주독 대사인 코낸트가 동석한 자리에서 미국의 실세 의원에게 자기 불만을 전달하면서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에 관한 자기 불만을 거의 공식화하였다. 미국 국무부가 보기에도 그러하였다.     

아데나워의 비난과 의심은 더욱 심해져서 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와해에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직접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알제리 문제와 관련하여 프랑스에 맞서 반식민주의를 내세운 것, 수에즈 분쟁에 관한 정책,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의 매우 불충분한 정보 정책, 소련에 관한 지나친 맹신, 세계적인 차원의 핵무기 감축 계획을 무산시킨 엄청난 영향을 미친 래드포드 플랜을 그 근거로 들고나왔다.     

물론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 이는 의심쩍은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이제와서 연합국의 군사력 강화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말하고 러시아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겨우 몇 주 전에 독일이 군대 의무 복무 기간을 18개월에서 12개월로 감축한 결정의 연장선상에 놓인 생각이 아닌가? 그리고 본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긴밀한 논의를 나누지 않은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아데나워가 이제 독일 국내 정치적으로 사민당(SPD)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 아닌가? 사민당(SPD)은 헤르베르트 베너를 내세워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워싱턴의 인사들이 아데나워 주변에서 어떤 생각이 마련되고 있는지를 알았다면 우려가 더 커졌을 것이다. 1953년 초와 1955년 6월과 마찬가지로 블랑켄호른과 폰 에카르트, 호이싱거가 군축과 독일 통일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커다란 단계별 계획을 아데나워에게 다시 제안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데나워도 전에 비하여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주미 독일대사로 잠시 근무한 이후로 마치 자신이 미국에 관한 전문가인 척하였다. 아마도 1956년 9월 그는 7장짜리 건의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미국의 외교 정책에 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어도 3~4년 안에 독일 주둔 미군, 그리고 어쩌면 유럽 주둔 미군 전체가 철수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 정치에 관한 모든 전문가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보다 국제연합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서 그러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소련과의 화해 정책이 추진될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 측에서도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유사한 경향이 존재했다. 과거 향태의 동유럽 블록은 흔들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서방으로의 팽창에 관한 희망을 더 이상 지닐 수 없었다.      

폰 에카르트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교 정책은 이러한 커다란 흐름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독일 문제의 해결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가 아직은 자기 구상을 확립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기에 독일 정부에서 강력한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선거를 대비한 전략적 고려도 포함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보다도 폰 에크하르트는 그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여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는 또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56년 10월 초에 다시 본의 정치계로 돌아온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도 1953년에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외교 정책 분야에서 ‘몇 가지 강력한 조처를 할 것’을 권유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블랑켄호른의 생각으로는 여러 제안이 제기될 수 있는 독일에 관한 4자회담 계획은 아데나워가 서방 긴장 완화 정책의 흐름에서 선두로 치고 나갈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폰 에카르트는 그가 처음으로 손수 작성한 제안서에서 1957년부터 1959년 사이에 동독과 소련의 위성국가 지역에서 소련 소속 군대가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도 독일에서 철수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다만 소련과 미국의 공군력은 그대로 주둔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촘촘하게 들어선 레이더 장비가 양측에 좀 더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었다. 이 시기에 독일군은 약 31만 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될 것으로 보았다. 독일군의 규모의 통제는 사실 국제연합위원회를 통하여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성국가의 군대 규모도 소련군의 철수에 따라 약 30만 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군대 규모도 국제연합이 통제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폰 에크하르트가 말한 계획에 따르면 1959년 이후 제2단계에 들어서서 동독과 서독의 독일 지역에서 소련과 미국의 공군도 철수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은 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고 동유럽 블록 국가들은 바르샤바조약 기구에 소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의 군인 숫자 상한선과 무기에 관한 것은 국제 지구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었다. 1959년 일반 군비축소회의가 개최될 것이고 이는 ‘포괄적인 군비 협약을 맺어 모든 외국군이 유럽 땅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폰 에카르트의 구상에 따르면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점진적으로 철수하는 것과 맞물리게 되어 있었다. 케셀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폰 에카르트는 첫 단계로 동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경제 사절단의 파견을 구상하였다. 이 사절단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이 지역에서 신뢰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사실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실시한 조처를 돌이켜 볼 때 처음부터 통일 독일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것에 찬성할 리가 없는 것이기에 다른 제도를 생각해 보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도 단계별 계획의 수립이 필요하였다. 폰 에커르트는 독일 통일의 첫 단계로 1959년 소련과 미국의 지상군 철수 이후 국민투표를 시행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독일 국민에게 통일을 원하는지, 그리고 독일 통일의 대가로 독일 동쪽 국경의 확정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기 위한 것이었다.’ 이 국민투표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면 (국민 100만 명당 1명의 비율로)소규모의 독일 ‘국가위원회’ 위원 선출을 위한 선거를 치르는 계획을 세웠다. 이 국가위원회의 임무는 1년 안에 통일 ‘규정’을 마련하여 이에 관한 제2차 국민투표를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위원회는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위원회와 베를린은 국제연합위원회 산하에 속하게 될 것이다. 국가위원회의 위원회는 ‘개별 국가의 국법 원칙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과 국경 문제를 논하게 될 것이다.     

1960년 독일 전역에 걸친 일반 자유선거가 치러지게 될 것으로 계획되었다. ‘이 선거를 통하여 첫 임시 통일독일 정부가 수립되어 제국 헌법을 제정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헌법에 관한 국민투표가 이어지고 다음으로 제국의회가 구성되고 4년 안에 첫 통일 정부 수립이 이루어질 것이다. ‘새 독일국가와 그 국경은 미국과 소련의 포괄적인 보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른바 ‘유럽 계획’으로 불리는 둘째 계획도 세웠다. 이는 ‘모든 유럽 통합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으로 특히 동유럽 국가들을 유럽 기관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매우 흥미 있는 것은 폰 에카르트의 계획에 나온 앞으로의 일정이었다. 그는 ‘국가 안보와 독일 통일 계획’은 1957년 1월 유럽통합계획과 더불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통일 독일 선거 이후에 의회 의원과 정부 대표로 이루어진 ‘독일위원회’(Deutscher Rat)가 수립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 위원회는 안보와 통일 계획 업무에 즉시 착수하게 될 것이었다.     

국제적 차원에서는 아데나워 수상이 1957년 3월 발표할 단계별 독일 통일 계획에 관한 내용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최대한 신속하게 전달해야 하였다. 1957년 3월로 예정된 아데나워의 미국 방문에 앞서서 이 계획의 세부 내용을 아이젠하워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크하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1957년 4월 이 계획의 수립이 완료되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와야 했다. 끝으로 “기본적인 모습을 갖춘 이 계획의 발표는 1957년 5월 기민당(CDU) 당대회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미 이 계획의 초안에서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한편으로는 아이젠하워의 2기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커다란 틀의 동서 전략에 최대한 신속하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선용 선전 도구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타자기로 작성된 이 계획의 수정본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삭제되었다. 블랑켄호른도 이제 이 계획 수립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관계에 관한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적절한 시기에 통보하는 대상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차기 사무국장인 스파크, 소련 외무장관이 추가 되었다. 군비통제 지역에는 새로이 라인강과 바익셀·나레프(Weichsel/Narew) 사이의 지역이 거론되었다. 독일의 ‘국가위원회’에 관련된 내용은 많이 수정되어 이 위원회가 ‘아무런 행정적, 입법적 기능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아데나워가 1953/1954년도에 독일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총선에 반대했었던 것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유럽 전체의 연맹’에 관해서는 초안에 있던 구상이 좀 더 확대되었다. 이제 ‘연맹 차원의 상위조직’이 거론된 것이다. 이 조직에는 “사회체제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유럽 국가가 가입해야한다.”라고 여겨졌다. 이 조직의 주요 목적은 평화로운 분쟁 조정. 국제법 규범 준수 감시, 유럽의 거대 경제 지역 기초 확립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실현에서 군비 부담이 줄어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의 유럽 지배 가능성에 관한 유럽 군소 국가들의 두려움을 경감시켜주기 위하여 독일 정부는 미리 국제기구를 통하여 유럽과 중동 지역의 저개발국가들의 재건을 위한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지원을 해야만 한다고 초안은 주장하고 있다.     

1957년 1월 3일 오후에 폰 에카르트와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를 찾아와서 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계획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그들의 생각을 ‘원칙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이 계획은 기존에 아데나워가 수행해온 외교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은 호이싱거 장군의 군사적 조언을 구한 다음 그들의 장대한 미래에 관한 전망을 6페이지짜리 서한으로 작성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른 적절한 준비작업도 진행할 요량이었다.     

아이젠하워에게 보낼 서한 초안에는 비록 헝가리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전개된 바가 있지만 동유럽 블록의 내적 발전에 관한 상황 분석은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소련이 ‘소비에트 지역과 위성국 영역에서 군사적 통치를 수단으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어진 여러 분석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소련은 상황에 따라 중부 유럽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것으로 그 외교 정책의 검토를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방은 소련의 정책을 적절한 외교 정책적 조치로 무력화 시키는 방법을 촉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소련의 군대가 특히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 세계평화에 현실적인 위험이 되고 있기에 매우 긴급한 일이었다. ... 우리는 새로운 위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면 소비에트 통제 지역으로 민중 봉기가 확산되어 서방에 위험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침내 폰 에카르트가 이전에 초안을 작성한 계획의 골격이 마련되었다. 1959년과 1960년의 2단계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지역 주둔 소련군과 ‘서유럽 주변국의 미국과 영국 군대’가 철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구상이 첨가되었다. ‘그런데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이 철군한 지역의 국가들이 핵무기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대신 국제연합이 제정한 헌장을 근거로 영국, 미국, 소련이 이 국가에 대한 핵공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보장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존속하겠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를 보일 것이라고 보았다. 곧 “앞에서 언급된 모든 계획이 실현되고 난 시점에서 상황을 고려하여 그 기구들의 존속의 필요성을 검토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아데나워에게 제출된 이 계획안에서 폰 에카르트와 블랑켄호른은 이른바 ‘유럽통합계획’을 좀 더 보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아데나워가 매우 좋게 여긴 생각, 곧 ‘다양한 형태의 독일 통일 구상의 요약’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유럽 통합정부 설립 전 단계로 유럽상임협의회의 수립을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협의회에는 먼저 서유럽 7개국이 가입하고 이어서 다른 유럽 국가가 가입하여 가능한 경우 각국의 (외무장관 제1직무대리와 같은) 장관급 인물이 상임으로 근무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럽 차원의 내각의 업무는 유럽통일 작업을 시작하고 유럽과 관련된 모든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관한 공동 정책 마련이 될 것이다.’     

폰 에카르트와 블랑켄호른은 호이싱거와 더불어 1월 7일 밤에 뢴도르프로 모여 글롭케와 아데나워 수상을 만났다. 아데나워는 이 ‘대담한 계획’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에서 어떤 부정적인 놀랄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 수상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유럽 대륙에서의 미군 철수에 관한 요청이 미국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 (곧 독일이 공동 유럽 방어를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나선다는 인상), 독일에 관한 영향 (그동안 미국의 보호에 익숙해진 독일 국민이 미군 철수로 러시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위험이 있다고 느낄 가능성), 동유럽 국가들에 관한 고려, 이 국가들은 근본적으로 미군이 지근 거리에 주둔한다는 사실에서 자유에 관한 갈망을 키워온 터였다. 나머지 서유럽 동맹국들의 경우는 독일에 관한 불신이 급격히 증대될 수 있으며 이 국가들은 미군의 유럽 주둔이 자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길 것임. 특히 벨기에, 네덜란드는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그런 나라에 속할 것으로 보임.” 사실 이러한 것은 아데나워가 늘 염려해 왔던 사안이다. 그런데 1월 3일의 대담에서는 그러한 근심이 표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권한이 제한된 독일 국가위원회의 수립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국가위원회 위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4대 강국의 감시 아래 치러지기를 바랐다.     

독일에서 강대인 미국과 소련의 군대를 철수하는 계획은 이제 ‘군비 균형’이라는 좀 더 중립적인 계획으로 전환되었다. 1959년에 완료될 제2단계 계획이 완료되면 소련군은 이미 철수하고 미군은 유럽의 주변으로 이동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와 더불어 동유럽 지역의 비무장화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과거 호이싱거가 세운 계획을 다시 받아들였다. 곧 독일 통일이 독일군의 전체 병력의 증대와 맞물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에게 보낼 이 2차 수정 계획안에 아데나워의 의견이 모두 반영되었음에도 아데나워는 여전히 이 계획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국가위원회 수립 계획도 이제 아데나워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소련이 동유럽 블록에서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려는 의도가 더욱 뚜렷해졌다. 그래서 블랑켄호른이 글롭케의 협력으로 국내 정치적으로 언제나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시 한번 전면에 내세웠어도 소용이 없었다. 아데나워가 외교 정치적인 공격에 나서지 않으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찬성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음에도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좁아진 점령 지역’과 핵무기 폐지의 필요성에 관하여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힌 것이 독일 여론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실망스럽다고 언급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조사에 따르면 더 많은 독일 국민이 안보가 더 절실한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폴란드의 불안한 정정 때문에 소련이 독일 문제에서 전혀 양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소련은 동유럽 블록을 일종의 독일을 제어하는 조임쇠로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간단한 해결책으로 다시 돌아갔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국들의 일치 회복이었다. 이는 사민당(SPD)과 맞서 선거전을 치르는 데에서 최대한 대립각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곧 뚜렷한 기민당(CDU)의 노선, 확실한 전선, 명료한 개념(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제 블랑켄호른도 급격히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위원회의 자문회에 관하여 보고하는 자리에서 소련에 관한 공포가 이제 모든 유럽 국가를 엄습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 철수를 포함하는 계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중기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하고자 했던 담대한 계획을 취소하고 1957년 5월 본에서 대대적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를 개최하는 계획이 마련된 것이다.     

동유럽에서 커다란 위기 상황이 벌어진 이후의 이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과 미국 측의 의심의 여파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곧 아데나워 수상은 결코 그 어떤 한 가지 생각에 철저히 매달리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할 때는 천하의 아데나워도 그가 이전에는 비난해 마지않았던 매우 비정통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호감을 보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민당(SPD)이나 자민당(FDP), 또는 좌파 지식인들이 제시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1956년 가을에 있었던 소련의 무력행사와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의 여파는 오래갔다. 이 이후로 아데나워는 다른 서방 강대국과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본 주제 소련대사가 냉대받던 시대가 지난 것이다. 아데나워에게 매우 호의적인 신임 주독 소련대사인 스미르노프가 소련의 불가닌 총리의 비교적 친절한 어조의 친서를 받자마자 아데나워는 매우 신속하게 답변하였다. 스미르노프의 서한을 받은 지 3주만에 아데나워 수상은 긍정적인 내용이 담긴 답신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반대가 있었다. 브렌타노와 할슈타인은 모스크바가 독일에 관하여 2개 국가 개념을 공공연히 견지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독일 외무부는 소련에 관한 배상 문제를 그 당시 소련에 감금되어 있던 독일 민간인 포로들 문제의 해결과 연계하기 위하여 공을 들이고 있던 차였다.     

소련 외무부는 기존의 소련 입장을 고수하였다. 아데나워는 막상 구체적인 문제를 대하게 되자 독일과 소련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57년 6월 중순에 롤프 라르 대사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롤프 라르 대사에게 마치 “힘든 모험을 하러 떠나는 아들을 둔 늙은 아버지처럼” 그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우려는 옳았다. 8월 초에 라르 대사는 협상에 관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다시 받았던 것이다. 소련 측이 협상에서 매우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여, 때로는 일정에 대해서조차 합의를 끌어낼 수조차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데나워나 소련 측 모두 이제 1957년의 독일 총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기꺼이 대화하고자 하는 수상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로미코, 그리고 누구보다도 흐루쇼프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에 더하여 소련의 독일 정책은 크렘린에서 벌어지는 권력 싸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와 화해 정책을 추구할 마음이 있었던 불가닌 총리가 1957년에 들어서면서 권력을 점차 잃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가진 이후 악평하였던 흐루쇼프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 권력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1957년 초반에 실제로 며칠 동안 독일 통일 문제에서 커다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리고 1957년 중반에 이르자 그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잘 알려진 독일과 소련 관계에서 발생한 논란이 되는 문제에 더하여 더 심각한 갈등 요소가 나타난 것이다. 곧 독일군의 핵무기 운반체 무장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의 핵무기를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에 주둔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핵무기 충격과 총선 승리     


아데나워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정치적 재가동을 진지하게 바랐다면, 미국과 영국을 고려하지 않고 그 일을 추진했을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미군을 유럽 대륙에 주둔시키고 핵무기도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맥밀런 정부에서는 재무장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래드포드 플랜’을 둘러싼 논의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전통적인 군사력의 유지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수에즈 운하 위기의 경험은 영국이 국방비의 상당 부분은 핵무기와 핵무기 운반체계에 지출하기로 결정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와 독일군이 조만간에 전략 핵무기를 보유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서방과 동방에서 동시에 핵무기 기술과 그 운반체계의 눈부신 발전으로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서방의 핵무기를 독일에 배치하는 것에 관한 비판적인 여론이 적어도 1957년 총선까지는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956년 가을에 서독 안보 정책에 관한 헌법 차원의 결정을 내릴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 결정은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곧 독일군이 핵무기 운반체계를 보유하기로 한 결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이제 자체적인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독일은 최소한 타의로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길에 접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에서 전략 핵무기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권한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보유하게 되는 것이지만 독일연방공화국은 핵무기 운반체계 운용에 관여하는 차원에서 그 권한의 일부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하필이면 아데나워가 가장 비관적인 생각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것으로 보았던 1956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핵무기연대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수에즈 운하 위기의 파국에서 확고한 정치적 연맹이 수립되지는 않았고 미국이 주도하는 핵무기 체계가 수립되었다. 여당 내부에서 이른바 ‘철저한 민간인’으로 묘사되던 아데나워는 그때부터 자기 수상직 임기를 마치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핵무기 정책에 관해서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특정한 의미를 지닌 말을 해야만 했다.     

1948년과 1949년의 베를린 봉쇄 이후 아데나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미군이 주둔하고 핵무기가 배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핵무기를 독일에 반입하고 저장하는 것에 관해서 그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비록 독일연방공화국이 주권을 회복하였지만 1960년 초반까지 독일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의 숫자와 배치 지역에 관한 정보를 아데나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953년 가을에 이미 일부 미군은 280mm 구경의 핵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아직 현장에 투입될 준비가 안 된 이 어마어마하게 큰 무기가 독일 총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힘을 쓸 수 있었다. 1955년 초반 독일이 주권을 회복하게 되자 일단 특정 핵무기 체계의 주둔에 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군대의 독일 주둔 협정으로 서방 연합국이 자국의 군대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독일에 배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볼 때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애석하게도 소련이 핵무기를 소형화하고 전략공군력을 확충하고 육군도 핵무기로 무장시키는 과정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사실 1956년 가을에 아데나워는 전쟁 무기가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미 독일에서 이 무기의 도입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을 매우 유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최소한 핵무기 운반체계만이라도 독일군이 보유하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56년 가을 초에 이 문제가 서유럽연합(WEU) 내부에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자 그 첫 단계부터 아데나워의 미국에 관한 불신이 싹트게 되었다. 독일 지위 문제에서 아데나워 수상은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세계에서 단 2개의 강대국이 대부분 핵무기를 봉하고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다.”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독일군을 고려해 볼 때도 이는 근본적인 동등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독일 육군과 공군의 부장 수준은 미군과 영국군에 비하여 형편없었다. “우리는 식민지 민족들은 그저 재래전에 참여해야 하는 보병들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지경에 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이 문제는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적이 독일을 공격하게 된다면 독일이 미군이나 영국군처럼 핵무기로 무장하지 않을 때 독일군이 사수하는 국경 지역을 향할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재래 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은 단순히 ‘도살장에 끌려온 소들’에 불과하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이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독일도 핵무기를 지녀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청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사실 모든 무기 발전이 결국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아데나워 수상의 사전 동의로 1956년 12월 1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요청을 제기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곧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 군대는 사단 단위에 이르기까지 핵무기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터키와 같은 여러 나라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계획을 논의하는 것과 실제로 군대에 무기를 배치하는 것 사이에는 그 당시 커다란 시간 차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른바 ‘이중 결정’과 같은 것을 내릴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소련이 외부에서 압력을 가할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미국이 동요하고 평화를 외치는 운동이 촉발될 것이 뻔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미군 주둔이 완료되기 전에 군축 협상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수차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체계나 시기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는 핵무기 배치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군축에 관한 요청으로 독일은 생각한 시간을 벌게 되고 동시에 소련 측에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무기체계의 도입에 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956년 12월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잠정적으로 감추어 놓았던 사안이 1957년 초에 전혀 대비가 안 된 언론에 홍수처럼 퍼져나가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2월 중순에 영국의 무기 재정비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격분하였다. 만약 영국이 4만 명 규모의 병사와 2개의 전략 공군부대가 독일에서 철수한다면 무엇보다도 서방 군사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제 독일군의 창설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러한 영국의 계획은 매우 성가신 일이 될 것으로 보였다. 야당에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은 자국 군대의 독일 주둔 비용을 독일에 요청하여 이미 동의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주둔군 일부의 철수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부 유럽 전선을 재래군으로 방어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수소폭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통하여 세계 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의도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분노하였다. 1957년 2월 기 몰레와 대담을 나누면서 친구가 핵무기를 지녔지만 정작 나는 그러한 무기를 지니지 못한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맘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기 몰레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5년 안에 핵무기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1957년 3월 아데나워는 여전히 카데나비아에서 스틸 대사와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영국의 군비 강화 계획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계획이 독일 총선일을 지나 1958년으로 연기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생각은 곧 소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월 4일 영국 국방장관 덩컨 샌디스는 영국의 새로운 방위백서를 발표하였다. 아데나워는 1946년 여름부터 샌디스를 잘 알고 있던 차였다. 그 당시 처칠의 사위인 샌디스는 서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그러면서 임기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기민당(CDU) 당대표를 영국 독일점령지역 안에서 만났다. 그는 샌디스에게 ‘유럽합중국’(Vereinigte Staaten von Europa)이야말로 모든 풀기 어려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찬미하였다. 사실 처칠은 그의 유명한 취리히 연설에서 이러한 언사와 이와 유사한 주장을 언급하면서 자신도 ‘일종의 유럽합중국’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처칠은 이 무렵 매우 건강이 악화하여 1956년 5월 아헨에서 거행된 칼스상 수여식에 겨우 참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수상식에 아데나워는 그를 매우 친절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1957년 초 영국 국방장관인 처칠의 사위는 매우 젊었고 매우 강력한 재무장 계획으로 독일 총선에서 아데나워를 거의 파국으로 몰고 갈 뻔하였다. 영국의 계획은 명확하였다. 육군과 해군의 군사력을 감축하는 대신 강력한 핵무기를 보유하는 길을 확실히 택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서 영국은 대륙의 유럽 국가들과의 유대에 손상이 있을 것도 각오한 터였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데나워를 곤경에 몰고 간 것은 영국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말을 경솔히 하는 바람에 스스로 비판 세력을 키운 것도 있다.     

영국의 국방백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4월 5일에 있었던 한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는 독일이 전략 핵무기 발전을 막을 재간은 없기에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대형’ 핵무기와 ‘소형’ 핵무기를 구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전략 핵무기는 종래의 대포를 개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독일 군대가 정상적인 무장을 추진하면서 최신 무기 발전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대형 무기를 확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수상이 핵무기 문제에서 기존의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사실 수상은 1956년 여름과 가을만 해도 독일군이 순전히 재래 무기로만 무장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핵탄두와 그 운반체에 대하여 한 말은 이 대량살상무기의 통제된 감축을 의미했던 것이 아닌가?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내심 단 한 번도 독일군도 필요한 경우 ‘최신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곧 1948년부터 서방 연합국의 차원에서 유럽 방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아데나워 같은 인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전략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면 이를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56년 아데나워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낸 격정적인 서한에 나온 대로 아데나워도 핵무기 개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도덕적 의미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른 길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야당인 사민당(SPD)이 노조와 개신교계의 군사적 무장 반대 세력과 연대하여 핵무기 문제를 강력하게 걸고넘어지자 다시 한번 아데나워의 안보 정책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가 아무 생각 없이 전략 핵무기를 단순히 기존 대포의 개량이라고 언급한 것은 심각한 실수였다. 물론 아데나워는 이와 같은 견해를 이미 1956년 여름부터 국무회의나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거의 동일한 표현을 싸가며 자주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무심한 비교를 내부적으로 하는 것과 대외적인 기자회견에서 밝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리하여 핵무기에 관한 매우 커다란 논쟁이 독일 역사상 처음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론이 보기에 이 문제가 아데나워 수상의 기자회견에서 촉발된 것이기에 이 논쟁은 최소한 그 시작에서는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논의로 이루어졌다. 아데나워의 도덕적 감각뿐만 아니라 그의 판단력에 관한 의구심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런데 그를 가장 강력하게 공격한 것은 사민당(SPD)이 아니라 세계적 명성이 높은 학자들이었다. 4월 12일, 곧 문제가 된 기자회견이 있은 지 정확히 1주일 후에 독일 핵무기의 중심지인 괴팅겐에서 이른바 ‘괴팅겐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 내용은 전보 형식으로 연방정부 수상실로 전달되었다. 이 성명에 서명한 이들은 독일의 최고 핵물리학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노벨상 받은 4인방, 곧 막스 폰 라우에(1914),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 오토 한(1944), 막스 보른(1954)이 있었다. 이 학자들 가운데에는 독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어온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오토 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리츨러였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1951년부터 아데나워에게 핵에너지의 평화로운 사용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조언을 해왔고 연합국의 제재를 조속히 해제시키도록 할 것을 요청해왔다. 아데나워 자신도 처음부터 핵에너지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였고 나름대로 이 미래 산업의 신속한 발전을 위하여 최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었다. 1956년 1월 26일 샤움부르크궁에서 원자력부 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독일원자력위원회의 설립이 의결되었다. 이 회의 이후 아데나워는 수상실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저명한 독일 물리학자들이 국제무대에 다시 나서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들의 핵무기 반대 운동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최대한 신속하게 커다란 어려움 없이 나치 이후 단절되었던 핵물리학에 관한 기초 연구를 다시 시작하고 외국의 핵에너지의 산업적 연구와도 연계를 맺고 싶어 한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길은 핵에너지의 군사적 이용을 완전히 포기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적 이용을 추구하면 모든 것이 힘들어질 것이 뻔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 이때 아데나워를 반대하고 나선 학자들이 모두 비정치적인 의도를 지녔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은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우라늄협회’에서 활동했었다. 이 협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관여했었다. 또한 이들은 핵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첫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난 이후 학자층을 뒤흔들었던 격렬한 윤리적 논쟁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성명에 서명한 이들 가운데에 자기의 국방 정책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인사들과 인맥을 맺은 인물도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괴팅겐 성명’을 작성한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 교수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나치 정권의 외무부에서 차관을 역임한 이의 아들이었는데 1954년 6월에 이미 개신교 교회 측 대표와 자연과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대화에 참여했었다. 여기 대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독일개신교협회의 대외업무담당관이었던 마르틴 니묄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 독일개신교협회의는 다시금 일부 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핵물리학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지 말 것을 제안하였다.     

독일 핵물리학자들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독일의 핵에너지 사업을 구축하는 가운데 군사적 활용도 고려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1956년 10월 독일 국무회의에서 유럽원자력공동체와 관련된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의도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생각을 시작한 인물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의심받게 되었다. 그리고 말이 안 되게도 아데나워는 이를 전혀 모르고 그저 노망부리는 것을 내버려 둔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 확보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나 그 이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핵무기는 장거리포의 연장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 그러한 오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아데나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괴팅겐 선언’은 아데나워가 핵무기의 파괴적 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하였다. 아데나워가 ‘큰’ 핵무기와 ‘작은’ 핵무기를 구분했다는 사실을 놓고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비난하였다. 사실 모든 전략 핵폭탄이나 대포는 히로시마를 초토화시켰던 최초의 원자폭탄과 비슷한 파괴력을 지녔다. 오늘날 전략 핵무기의 숫자가 엄청난 것이기에 전체적으로 합쳐본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작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더 발전된 ‘전략’ 핵폭탄, 무엇보다도 수소폭탄과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소리였다. 이를 고려해 본다면 ‘수소폭탄으로 독일연방공화국 국민 전체를 오늘 당장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정치적 결론이 내려졌다. “내 생각에 독일연방공화국과 같은 작은 나라는 명시적이고 자발적으로 모든 종류의 핵무기 보유를 포기하는 것이 현재 최선의 안보 방안입니다. 그래서 서명한 이들은 모두 핵무기의 제조나 실험 또는 모든 방식의 실전 배치에 관여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이 괴팅겐 성명이 자신에 관한 인신공격이고 매우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보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성명에 서명한 이들 가운데에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인사가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미리 이에 대하여 그에게 귀띔한 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성명의 아데나워의 첫 반응은 그가 구석에 몰릴 때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매우 무뚝뚝한 것이었다. 그는 서명한 사람들이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자신과 미리 협의를 할 수도 있었다고 보았다. 좀 더 큰 맥락을 이해하고 위기에서 시민을 보호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 그들에게 결여된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괴팅겐 성명에 대한 비난에 국방장관이 가담하였다. 그는 핵물리학자들의 성명에 관한 입장 표명에서 그들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 정부, 특히 국방부는 외국에서 확보한 자세한 정보를 통하여 핵무기의 영향을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과 언론의 반응을 통해 아데나워는 자신이 다시 한번 경솔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치가가 아니라 전문가를 더 신뢰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신속하게 반응하였다. 괴팅겐 성명이 발표된 지 며칠도 안 되어서 그 성명에 서명한 18명의 학자 가운데 5명을 수상 관저에서 만났다. 그들은 게르라흐 교수, 한 교수, 폰 라우에 교수, 리츨러 교수, 폰 바이체커였다. 아데나워는 그들을 위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을 내었다. 이 자리에는 슈트라우쓰, 할슈타인, 루스트, 글롭케가 배석하였다. 아데나워는 먼저 호이싱거 장군과 슈파이델 장군이 발언하도록 하고 이어서 그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 대담의 말미에 아데나워는 그가 가장 원한 일종의 성명이 마련되었다. 그 서명에는 자신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정부 대표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서명하였다. 이 성명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여전히 자체적인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을 것이며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독일 핵물리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참여할 것을 절대로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잘 알려진 과거의 노선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곧 독일연방공화국은 ‘모든 강대국과의 협약을 통하여 동유럽과 서유럽의 군대가 일괄적으로 핵무장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사실 자신도 어느 정도 야기한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실 독일의 핵무기 생산에 관한 논의는 시기상조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협상을 통한 해결책 마련이 목표라고 선언하여 시간을 어느 정도 벌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 그를 가장 강력히 반대하는 중요한 인물의 서명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론전은 계속되었고 특히 소련이 경고성 성명을 보내어 논란을 격화시켰다. 독일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알버트 슈바이쳐는 4월에 핵무기와 관련하여 평화주의를 호소하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말했다. “독일 국민 대부분은 이것이 마치 복음인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도 매우 심각하였다. 1957년 4월 응답자의 64%는 독일군의 핵무장을 반대하였다. 이에 비하여 17%만 찬성하고 19%는 중립적이었다.     

여러 조짐을 고려해 볼 때 아데나워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간이 흘러 언론의 관심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국제적인 행사 일정을 볼 때 쉽지 않은 일이었다. 5월 초 본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상반기 회의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는 독일 총선 직전에 열리는 만큼 아데나워가 자유민주주의 민족들의 위기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어떤 역할을 할지를 보여줄 기회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회의를 자기 임기에 독일에서 개최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회의에 참석하는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미국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였다. 1956년 6월 마지막으로 아데나워를 만난 이후 정치적으로는 엄청난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동안 때로는 매우 소원해지기까지 했던 친분관계를 다시 증진할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가 5월 말에 미국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일은 그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풍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러시아가 핵무기와 관련된 ‘그들의 폭탄을’ 독일 총선과 관련해서는 너무 일찍 투하했다는 것이었다. 덜레스는 아이젠하워가 스티븐슨과 맞선 미국의 대선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웃으며 말하였다. 러시아가 서방의 선거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좀 더 진지한 어조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핵에 관한 공포가 일어나게 된 원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는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다시 생생하게 떠올리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아데나워는 미국이 서방의 가장 강력한 보호국으로서 자국의 무기사용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민당(SPD)이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사민당(SPD)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자체적인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 되며 연합국의 핵무기를 독일 영토애 배치해서도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덜레스는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통제된 핵무기 감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일 핵물리학자들과 공동 성명을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바로 이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절대로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 미국은 아직 전략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시기에는 핵 감축 협상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략 핵무기가 일단 배치되기 시작한다면 독일연방공화국도 상황을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몽고메리 장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는 여전히 유럽연합군최고사령부(SACEUR)의 총사령관 노스태드 장군의 직무대행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관할 지역 전체의 방어를 요청하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 사단의 철군을 주장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노스태드는 몽고메리의 의견을 지나칠 정도로 존중하였다.     

이는 만약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하게 되면 모스크바에 관한 강력한 보복성 공격을 하는 것을 도덕적 이유로 반대할 명분을 덜레스에게 주었다. 보복 공격을 하면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게 될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에 반하여 얼마 안 가서 실전에 배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전략 핵무기의 개발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무기로 무장된 군대가 전선에 배치된다면 사실상 적군의 공격을 불가능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북독일 지역에서 영국이 철수할 경우 미군이 그 곳에 주둔해야 한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개진하였다.     

독일 측에서 폰 브렌타노, 슈트라우쓰, 호이싱거가 배석한 대담을 마친 다음에 아데나워는 워싱턴이 핵무기 운반 수단인 대포, 폭격기, 미사일을 독일군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 자명한 것으로 보았다. 핵무기 운반 수단의 사거리, 주둔, 발사 명령권에 관한 문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핵무기를 독일 영토에 도입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동의했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상반기 회의가 끝나자마자 영국의 맥밀런 수상이 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전략 핵무기로 무장해야만 중부 유럽에 대한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아직 공개적으로 그런 자기 의사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독일 연방의회에서 1957년 5월 9일 벌어진 핵무기에 관한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연방의사당 119N 회의실에서는 여당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덜레스에게 핵무기 배치에 대하여 사실상 동의하였던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독일 국민의 우려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주제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첫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군축 합의를 이룩하려는 의지, 둘째 핵무기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 불가능성, 셋째 충분한 방어 조치를 위한 노력.     

아데나워는 총선 전에 유권자들을 달래고자 무엇보다도 군비통제라는 해결책을 들고 나왔다. 그는 확실히 어느 한 해결책에 묶이는 것에 대하여 조심하였다. 사실 런던의 군축 협상이 아무런 실질적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핵전쟁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단 아데나워는 핵무기 관련 사안 추진에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30년 후 이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아데나워가 당시에 이 회의에서 핵무기 장비의 독일 주둔에 반대하자고 발언했고 자신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가 발의한 정부 성명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였고 문장의 표현 몇 개만 수정하도록 했을 뿐이다.     

5월 10일에 있었던 독일 연방의회에서의 커다란 논쟁은 무엇보다도 슈트라우쓰와 게르스텐마이어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새로운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논의에서 앞으로도 독일에서 근거로 삼을 만한 매우 강한 도덕적 논조로 발언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비교적 간단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런던 군축회담에서 성과를 이룰 것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 회담에서 합의를 이룰 전망이 매우 비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열흘 전에 덜레스와 논쟁을 벌인 바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회담이 결렬된다고 하여도 국제연합의 군축소위원회가 런던에서 벌이는 협상이 지연되어 독일 총선 날짜 이후에 열리기만 하면 된다고 덜레스에게 확언하였다.     

너무 일찍 시작된 핵무기에 관한 논란에서 아데나워가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연방의회 대토론이 있었던 다음날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드러났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커다란 근심에 싸여있었다. 곧 “독일 총선이 무엇보다도 외교 정책, 특히 핵무장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에 대하여 근심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유권자들이 ‘충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이 문제에는 합리적인 답, 숙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감정적인 답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생각을 대책이 없는 기민당(CDU) 거물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당의 지도자로서 심리학적 감각과 마키아벨리적인 선전 기술을 결합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공포에 맞선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공포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공포가 없다면 우리를 지지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그러한 공포는 더 큰 공포로 몰아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아데나워가 그 회의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총선이 치열해지면서 아데나워가 냉정하게 “사민당(SPD)이 승리하게 되면 독일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아 그가 말한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적인 선전·선동은 사실 사민당(SPD)의 이에 필적하는 선전·선동을 동원한 공포 선거전에 관한 맞대응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내세운 또 다른 전략은 원초적인 공포에 관련된 문제에서 국민에게 ‘다시 신뢰를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신뢰는 행위자의 뛰어난 도덕성에서 나온 믿음에 근거하는 법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헬무트 틸리케 교수를 ‘핵시대의 책임과 양심’을 주제로 함부르크에서 개최되는 강연회의 발표자로 초대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틸레케 교수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루터교회파 윤리교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기민당(CDU) 당원은 아니었지만, 기민당(CDU)에 호의를 보이던 매우 뛰어난 설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틸리케 교수는 남의 부탁을 매우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아데나워가 개인적인 대담을 나누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대담에서 그의 너무나 유명한 사람 다루는 기술을 발휘해 보고자 하였다. 틸리케는 25년 후에 쓴 회고록에서 이 대담이 매우 인상 깊은 것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샤움부르크궁은 매우 인상 깊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틸리케 교수가 아데나워 집무실 앞방을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아직 낯이 익지 않은 키 큰 인물이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교수님! 저같이 늙은 사람을 그렇게 애태우시다니요!” 강연에 관한 이야기는 단 5분 만에 정리가 되었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백지수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곧 기민당(CDU)에 대한 비판을 마음대로 해도 되고, 강의 시간도 얼마든지 알아서 하고, 원고에 관한 감수가 일절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인 윤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었다. 틸리케 교수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성윤리에 관한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에 관한 교육은 아내에게 일임한다는 아데나워의 이야기를 들은 틸리케 교수가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아데나워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게 될까봐 두려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 대담에서 핵문제에 관한 윤리적 가르침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커다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불안에 떠는 기민당(CDU) 대표들을 위한 신학적 가르침만큼 중요한 것이 방사능 오염의 결과에 관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자기 자신도 이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숨긴채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알버트 슈바이쳐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유명한 특유의 몸짓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슈바이쳐가 말하기를 “풀, 소, 우유, 비, 달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방사능이 있다고 했습니다.”아데나워는 슈바이쳐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분은 매우 영리하고 매력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이 옳지는 않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슈바이쳐가 입을 닥치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의 당 동료가 “사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을 해 줄 수 있는” 물리학 교수를 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자 아데나워는 “그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의견이 매우 좋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당대회에 틸레케 교수를 초대하여 두 시간에 걸쳐 루터교회의 정신에 입각한 깊이 있는 윤리적 성찰을 하도록 허용한 것은 그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 누구도 인제 와서 아데나워가 그러한 양심 문제를 가볍게 다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제일 먼저 나서서 일단 강사를 매우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틸리케가 나중에 회고한 대로 “아데나워는 내가 말한 내용의 비판적 요점을 매우 탁월하게 정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 뺨을 후려쳤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는 한 달 만에 걷잡을 수 없는 문제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지만 모든 전략적 기술을 동원하여 이를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기술에는 민주노동자연합회*가 수백 차례 주최한 대회도 포함되었다. 이 단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하여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핵무기는 1958년에도 다시 논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지만 기민당(CDU) 당대회에서는 핵무기에 관한 논란이 일단 수그러들었다. 아데나워는 5월 말 미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는 그곳에서 전략을 좀 더 다듬을 요량이었다. 얼마 전에 아데나워를 예방했던 노스태드 장군은 ‘매우 기분이 좋고 건강도 상당히 좋아 보이는’ 아데나워를 영접하였다. 81세의 아데나워 수상은 그에게 자신이 7, 8, 9월에 일요일만 빼고는 매일 커다란 선거유세에서 연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츠 쉐퍼는 아데나워에게 그 자신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충고한 바가 있었다. 이 바이에른 지방의 민심을 꿰뚫고 있던 쉐퍼는 지식인 계층은 변덕이 심하고 신뢰하기 어렵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여전히 아데나워를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 민주노동자연합회 [Arbeiterhemeinschaft Demokratischer Kreise, 역자주 - 1951년부터 아데나워 정권이 지원한 정부 선전 단체.]     

독일의 민중만이 아데나워를 확고하게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다시 한번 무조건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1956년 하반기에 있었던 독일과 미국 사이의 깊은 불협화음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57년 5월 초에 이미 덜레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미국은 한때 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덜레스의 말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이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과정이었다. 다만 그것이 잘 안 알려졌던 이유는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우방국들, 특히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덜레스가 추가해서 말하기를, 1914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의 지도층이 매우 우둔하여 적국의 모든 군대에 맞서 독일 국민을 총동원하였던 것도 그러한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던 영국 쇠락의 상황이 수에즈 운하 위기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영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정책을 따르고자 하였을 뿐이다. 런던이 영국 해군과 지상군의 대폭적인 감축 계획을 드러낸 국방백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독일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평가를 듣게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의 현명한 지도 덕분에 이제 독일이 제대로 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 국민은 이에 깊이 감사하고 자랑스러워하며 그에 맞는 책임을 기꺼이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고도 하였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 이를 노골적으로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어느 모로 그 자신이 이러한 독일의 모습을 가져온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데나워는 아데나워 덕분에 독일이 이룩한 국제적 지위를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데 적극적인 이바지를 하고자 할 따름이었다.     

미국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고도 아데나워에게는 꿀맛 같은 것이었다. 이제 미국과 영국의 특별 관계 대신에 독일과 미국의 우호 관계가 수립된 것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왜곡되었던 독일의 역사가 이제야 비로소 정상 궤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덜레스는 독일연방공화국(곧 서독)이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동독지역은 여전히 소련의 보호령에 머물고 있었기에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1957년 5월 말의 아데나워의 미국 방문은 몇 주 전 본에 있는 그의 측근들이 의전 절차를 마련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네루 이외에 그 어떤 국가수반도 게티스버그에 있는 아이젠하워의 농장에 초대받아 거기에서 키우는 종우(種牛)를 소개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데나워와 아이젠하워가 만난 모든 자리에서 좀 더 인간 친화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아이젠하워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소심한 태도를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그것이 비난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워싱턴 당국은 1955년 여름 이후 이미 진행됐던, 독일의 군축과 통일을 더 이상 연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양국 정상의 대담 성명을 통하여 명확히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곧 군축 조치가 있고 나서야 통일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철회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실질적이고도 상징적인 우호 관계가 증명되었음에도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미국식으로 다짐받고자 하였다. 곧 아데나워는 대담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미국이 독일 총선에서 자신에 관한 전적인 지지를 표명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미국의 군축 정책에 관한 아데나워의 근심도 이제 크게 덜게 되었다. 워싱턴을 향해 떠나기 전에 아데나워는 노스태드에게 다음과 같이 다짐하였다. “미국이 실수만 안 한다면 나는 독일 총선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독일 총선이 마무리되고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런던의 군축 회담을 무산시킬 것이라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의 다짐을 받고 워싱턴에서 독일로 돌아왔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독일사민당(SPD)이 핵무기를 선거 구호로 들고 나온 것에 대하여 무기 감축 협상에서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9월 15일 총선일이 더 가까워질수록 아데나워가 다시 총선에서 승리하게 될 것은 필연적인 일로 보이게 되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은 1953년도 총선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이 이루어졌다. 단 한 개의 주도 놓치지 않고 연설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이 연설한다는 길거리 방송을 하고 나면 1953년에 비하여 더 많은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번 총선도 다시 한번 아데나워 수상을 평가하는 투표가 되었다. 선거방송도 더욱 정교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절정인 것으로 ‘안보 – 결코 실험은 안 된다.’라는 선거구호는 1950년대 중반 국민들이 더욱 원하는 안보에 관한 바람을 나타내는 표어가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가 얇은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야당의 핵전쟁에 관한 선전·선동으로 유권자들은 적어도 몇 주 동안은 단호한 확신을 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기도 한 것이다. 이는 1950년대 후반의 전형적인 시대적 징표가 된 것이기도 하였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아데나워의 정책을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비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나타내며 이 총선 동안 아데나워가 ‘선전·선동의 가장’이라고 지칭하였다. 대다수 유권자는 아데나워에게 바로 그것을 바랐다. 곧 완전히 확신에 찬 가장으로 그들에게 기민당(CDU)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앞으로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아데나워 자신도 여론이 한 번은 ‘핵무기 공포’를 경험하고 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무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이제 국민이 그러한 공포는 극복한 것으로 보였다.     

이제 그 누구도 더 이상 이 운도 없는 사민당(SPD)의 올렌하우어가 1년 전만 해도 자신을 독일의 차기 수상으로 알리기 위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그 자신이 올렌하우어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인상까지 주게 되었다.     

총선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난 다음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고데스베르크에서 개최된  무도회에서 벌어졌던 유쾌하지 못한 에피소드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크라이스키는 올렌하우어와 함께 한 인사들 무리 안에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무심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렌하우어 씨, 내 생각이 어떤가요? 우리가 일단 귀하를 오스트리아로 임대시키고 그 대신 크라이스키 씨를 내세우는 것이 어떨까요?” 이에 대하여 올렌하우어는 멋쩍게 웃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악의에 찬 농담을 화룡점정으로 마무리하였다. “아니오. 나는 올렌하우어 씨가 필요하오.”     

총선에서 아데나워는 1953년에 비하여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 87%의 투표율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후보자 가운데 55%를 당선시켰고 50.2%의 득표율을 보였다. 사민당(SPD)은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31.8%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아데나워의 시대가 이제 정점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건강상으로도 아데나워는 이 총선을 전후하여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1955/56년 겨울의 추위를 얼마나 잘 이겨냈는지를 보고 놀라워했다. 아데나워를 그린 유명한 선거 벽보에서 그는 전성기의 햇볕에 잘 그을린 인물로 묘사되었다. 살이 붙은 얼굴에 단정히 뒤로 넘겨 빗은 머리와 찬란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지닌 그의 모습은 사실 선거 그래픽 전문가가 손질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데나워가 햇빛 아래 몇 시간 동안 서있으면 정말로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신중한 걸음걸이로 나아가고 늘 신속하게 반응하며 거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과 몇 안 남은 친구들은 그가 이미 90줄을 바라보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그 생일은 1966년에 맞이할 것이었다. 그래서 오랜 친구인 다니 하이네만은 미국 코네티컷의 그린위치에서 9월 15일 독일 총선 승리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축하 인사 편지를 보냈다. 때로는 간단한 시문이 하나가 장황한 정치 분석 기사보다 위대한 순간을 더 잘 표현하는 법이다.      

“그 위대한 결과는

사실 이미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아데나워와 그의 상대인 올렌하우어를 

비교해 보았다면 말입니다.

모든 자유 국가는 이제 잔치를 벌이고자 

커다란 황소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귀하는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올렌하우어는 다시 매복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고 싶었지만,

이미 90세가 되었네요.

그러나 국가경영술로 귀하는 견딜 것입니다.

베르디와 타이탄을 모범으로 삼으십시오.

우리의 친구인 요하네스의 말도 떠올리도록 합시다.

콘라드는 일단 맘만 먹으면, 세상에, 뭐든 할 수 있어!”     

아데나워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보아준 요하네스 함스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젊은 시절에는 어렵지 않게 시를 짓곤 했던 아데나워도 이제는 정치인답게 격조를 갖춘 산문으로 응답할 시간을 내게 되었다. “모든 정치가가 귀하께서 보여주신 지혜와 유머로 생각하고 쓸 줄 알게 된다면 세상이 훨씬 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쉬운 일은 없었다. 과반수를 확보한 다음에 정부를 구성하는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0월 8일에도 다시 한번 하이네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총선이 마무리되었지만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선거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후계자들의 약진     


아데나워의 14년 집권기 가운데 1957년의 정부 구성은 특별한 일 없이 이루어졌다. 언제나처럼 노련한 수상과 늘 그의 곁을 지키는 비서진이 정치적 야망, 현실 문제, 정당 구성, 협회의 세력, 언론기관의 세력 등을 가지고 놀았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과반수를 확보하기는 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정부 구성 과정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한 달이나 넘게 되자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여당 관계자에게 불쾌한 심사를 털어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손발을 다 묶어 놓으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내심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모든 장관 후보에 관한 내부 정보가 모두 언론에 흘러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골치 덩어리였다. ‘여러 계층의 바람’, 북독과 남독의 이해관계, 종교 문제, 기민당(CDU) 사회위원회의 요구, 여성계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각은 일단 국가 운영에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든 집단과 지역의 대표들로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9월 15일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총선을 연속해서 세 번 치르는 것이 내각을 한 번 구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불평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다당제도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반수를 차지한 정국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적으로 어떻게 권력의 배분이 이루어졌는지는 짚고 넘어가 볼 만한 주제이다. 그리고 아데나워 집권 후반기의 후계자 싸움도 조용히 그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 당시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이 매우 유동적인 동방 정책을 위한 모든 노력을 무산시켰다. 이미 화석이 된 할슈타인 원칙이 아데나워의 집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다. 이 사건은 6주에 걸친 정부 구성 기간에서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되었다.     

총선 결과가 발표되자 1957년부터 1961년에 이르는 의원 임기에서의 국내 정치적인 역학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먼저 사민당(SPD)은 연정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상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FDP)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기민당(CDU) 원대 대표 선출 문제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생각에 자민당(FDP)은 조용히 내부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를 우리가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지난 4년 동안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독일당(DP)은 여전히 연정에 환대받았다. 북부 독일 지역에서 독일당(DP)은 여전히 소용되었다. 우파 진영에서 떨어져 나가는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당(DP) 당수인 하인리히 헬베게는 니더작센 주지사로서 북부 독일 지역의 여전히 복잡한 정당 관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스 요아힘 폰 메르카츠와 한스-크리스토프 세봄은 내각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독일당(DP)이 앞으로도 영원히 존속할 거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아데나워는 1959년 초 니더작센 주의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면 독일당(DP)이 기민당(CDU)의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았다.     

양당정치로 흐르던 추세는 1957년 총선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의 해체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자민당(FDP)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당으로 축소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데나워는 윈스턴 처칠이 그에게 매우 흥미 있는 제안을 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유럽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유주의의 퇴보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아데나워의 질문에 대하여 처칠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합니다. 자유주의 정당이 강할 때 그들은 합당한 요구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요구를 모든 정당이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던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실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독일의 자유주의자들도 같은 운명을 겪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만 남게 되었다. 여전히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은 아데나워 앞에서 주체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표는 정부 구성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9월 19일을 기억해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을 연정에 다시 끌어들일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민당(FDP)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흑·적 연정, 곧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의 연정”은 완전히 배제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표는 아데나워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리를 뜬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당대표는 1958년 1월 17일에야 아데나워를 다시 만났다.     

이제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세력은 여당과 지방당 연합, 그리고 그 주변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가 이끄는 융에 유니온*과 기민당(CDU) 사회위원회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기민당(CDU) 사회위원회는 1957년 별 발언권이 없었다. 1년 전 어려운 시기에 아데나워가 부수상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던 칼 아르놀트는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이번 조각에서는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테올 블랑크는 이번 내각에서 노동사회부장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와 여당은 그에게 빚을 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누구보다도 기민당(CDU) 내부의 노조 계파 세력의 모든 정치가 가운데 최소한 좌파인 사회위원회의 루흐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영국 점령군 아래에서 기민당(CDU) 당대표로 있던 시절부터 아데나워는 그를 증오해왔었다.      

* 융에 유니온 [Junge Junion, 역자주 - 당내 청년당원세력. 한국에서는 2020년 당시 야당인 국민의힘이 이를 모방하여 ‘청년당’을 수립한 바 있다.]     

1957년의 정부 구성에서 기민당(CDU)의 노선이 1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중도우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당내 좌파의 손발을 완전히 묶어 놓게 되어 이제 그가 완전한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세력이 약해진 요인을 아데나워가 명시적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곧 기민당(CDU) 내부에는 경험이 많은 직장인 계층을 대표하는 이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괄목할 만큼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지방당 대표 연합 세력이었다.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주 지방당이 연방정부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상은 여전하였다. 오히려 더 나아가, 당 내부적으로 볼 때 아데나워 시대에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내각 출신 정치가들이 기민당(CDU)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1961년과 1962년에 들어서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기민당(CDU) 출신의 국방장관 카이 우베 폰 하셀, 그리고 가정청소년부 장관인 브루노 헥이 최소한 슈바벤을 대표하는 인물로 내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1957년 연방정부 내각은 다시 한번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출신 정치가들이 내각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각에 자리 잡은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출신 정치가로는 아데나워 연방 수상, 하인리히 륍케 농업부 장관, 게르하르트 슈뢰더 내무부 장관, 테오 블랑크 건설부 장관, 그리고 새로 재무부 장관이 된 프란츠 에첼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 당시 기민당(CDU) 내부에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이 핵심 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 정부의 당 조직이 강력했고 주 자체의 경제력이 강력했던 덕분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라인란트 주 정부의 수장인 아데나워가 연방 수상으로 재임한 덕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민당(CDU) 내의 주연합에서는 기민당(CDU)이 이런 식으로 계속 라인란트-베스트팔렌 주의 세력에 장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 조직 차원의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다시 라인란트 출신 인사가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곧 묑헨글라트바흐 출신의 프란츠 마이어스, 연방정부 내무장관을 역임하고 1958년 7월부터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가 된 아르놀트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또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시장이었던 에른스트 바흐가 연방정부의 재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데나워의 개인 재정은 당연히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담당하고 있었다.     

다만 연방정부의 외무장관은 헤센 주 인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헤센 주에서 기민이 구조적으로 소수당으로 전락하면서 헤센 주의 중앙 정부 차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그런데 비록 슈투트가르트의 게파르트 뮐러가 주지사로 재직하였음에도 1950년대 내내 슈바벤 출신의 정치가가 내각에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남부 독일의 정당 조직은 3개 주 연합으로 쪼개져 있었다. 울름에 지역구를 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연방의회 의원 후보자 명단의 선두에 들어 있었음에도 그랬다. 그런데 사실 그는 그 지방에서는 슈바벤 사람이 아니라 프랑켄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었다. 그래서 슈바벤 출신으로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던 유일한 인물이 바로 기민당(CDU) 원내대표 브루노 헥크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헥크의 능력에 관한 사람들의 평가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승진을 시키지는 않았다.     

1957년 조각에서 슈바벤 출신의 저명한 정치가들이 내각에서 매우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아데나워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에게 내무장관직을 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자기 관심 사안인 외교 정책과 관련된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자 기존의 연방의회 의장 자리에 머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의장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데나워에게는 못마땅하였다. 의회 의장은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정당을 초월한 관점을 지녔기에 기민당(CDU) 내부에서 유일한 야당의 역할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제3기 의회에서 아데나워와 그의 자존심을 구기는 게르스텐마이어 사이에 벌어진 논쟁들은 본의 여러 정당에서 이야깃감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를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정부 구성 초반에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탁월한 언변을 지닌 키싱거의 능력에 맞은 자리로 그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으로 보았다. 키싱거는 그 직무에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50년 키싱거를 원내대표로 앉히려고 시도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를 암암리에 내치고자 한다는 인상을 공공연히 내비쳤다. 아데나워는 키싱거에게 법무장관 자리를 제안할 때 그가 워싱턴 주재 대사 자리가 나면 이를 사양하리라고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최종적으로 임명장을 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프리츠 쉐퍼에게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기에 키싱거에게는 내각에 관하여 아무런 기미도 비치지 않고 다만 그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 자리를 제안하였다. 당연히 키싱거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오이겐 게르스턴마이어, 프리츠 에를러, 카를로 슈미드와 힘을 모아 외교 정책적인 대립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데나워에 맞서는 크고 작은 음모를 꾸미는 일에 더 이상 가담할 의무를 지지 않으려 했다. 아데나워는 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기다가 그가 1958년 슈투트가르트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정부 청사인] 라이첸슈타인 빌라(Villa Reitzenstein) 로 들어가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였다. 이때 겝하르트 뮬러는 연방헌법재판소 소장이 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시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게 되었다. 하필이면 당 동료이며 아데나워 정부에서는 내각에 들어가지 못한 이 인물이 아데나워의 생애 말기에 연방정부 수상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베를린의 기민당(CDU) 지방당의 역할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의 시대는 베를린 기민당(CDU) 출신의 여러 정치적 거물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야콥 카이저, 로베르트 틸만스, 오토 렌츠가 있었다. 1956년부터 베를린을 대표하는 인물은 에른스트 레머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수치로는 내각에서 베를린시를 대표하는 이가 적었지만 1955년부터 베를린을 자기 고향으로 선택한 하인리히 크로네가 이 정당을 대표하면서 그 균형은 충분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1958년부터 1955년까지 진행된 베를린 위기 동안에 명백하게 드러났다. 베를린이 아데나워 휘하에서 도움만 받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미 오래전에 베를린과 화해를 하였다. 그러나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주 지방당과 비교해 본다면 이전의 제국 수도 출신의 정치가들은 하인리히 하인리히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 볼 일 없는 인사들이었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와 더불어 아데나워 3기 내각에서 바이에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슈트라우쓰는 당연히 막강한 권한으로 국방부를 장악하였다. 프리츠 쉐퍼는 여전히 법무장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가장 중요한 두 장관 자리를 바이에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기사당(CSU)이 장기적인 시각에서 그 부서들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이 부서를 통하여 가장 최신의 기술과 관련된 산업을 바이에른으로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가 자기 고향인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이익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도 기술정책과 관련된 모든 부서를 별생각 없이 기사당(CSU) 인물들에게 맡긴 것이다. 원자력부는 시그프리드 발케에게 우편·통신부는 리하르트 슈튀켈른에게 넘겼고 근본적으로 국방부도 기사당(CSU)에 넘긴 것이다.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서부 독일 출신 연방 수상이 남부 독일의 근대화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어려운 정부 구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프리츠 쉐퍼의 정치적 미래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이는 매우 강력해진 기민당(CDU)의 입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재무장관을 교체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협상에 임하였다. 그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특히 테오도르 폰 호이쓰, 한스 글롭케,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에게 아데나워는 쉐퍼가 재무장관으로 남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모든 이유를 나열하였다.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쉐퍼는 독일군 창설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곧 그는 1956년에 이미 지출했어야 하는 35억 마르크에 대하여 여전히 늘 새로운 핑계를 대며 그 집행을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쉐퍼의 재정정책은 독일 경제의 자본 형성을 거의 방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 정부들과의 그 나름의 협상에서 쉐퍼는 매우 고지식하여 결국 주 정부에 손실을 줘왔다. 아주 작인 재정 집행에서도 그는 노인의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데나워는 결국 편히 다룰 수 있는 재무장관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각이든 여당이든 누구나 원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쉐퍼에 관한 반대에 가장 앞장선 인물은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였다. 쉐퍼는 이제 재정 지출을 바라는 내각의 인사과 수상에 맞선 모든 재무장관의 운명을 잇게 되었다. 기민당(CDU)의 유력 정치가들 또한 그가 내각에서 축출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머물기를 강력히 바라는 인사도 있었다. 특히 기사당(CSU) 당대표인 한스 사이델은 쉐퍼가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당대표가 되는 것을 한사코 막고자 하였다. 만약 그가 바이에른으로 돌아온다면 지방선거 이후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에 화려하게 복귀할 것이 예상된 것이다. 1945년 여름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던 그 자리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크로네는 자기 일기에서 쉐퍼가 ‘바이에른 전체를 동원’하였다고 적고 있다. 아데나워는 쉐퍼를 연방 재무장관에서 축출하기를 바라는 기민당(CDU) 정치가들과 쉐퍼가 바이에른으로 복귀할 것을 걱정하여 밤잠을 설치는 이들 사이에서 묘안을 찾아야만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데나워 수상은 결국 재정담당 부서와 연방정부 재무부 일부를 통합하여 새로운 부서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쉐퍼가 그 부서의 수장으로 앉는 것과 동시에 부수상의 자리도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쉐퍼는,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내각의 경제담담 회의에서 의장직도 겸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고집 센 쉐퍼가 경제정책을 관할한다는 것은 이제 아데나워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아데나워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연방정부 수상으로 재선되었지만, 조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쉐퍼에게 법무장관 자리를 제안하였고 그는 이를 지체없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조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만 그 자리를 노렸던 키싱거가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일부 언론은 이미 이러한 식으로 정부가 구성되는 이유를 아데나워의 후계 인물들을 정리하는 것에서 찾았다. 무엇보다도 에르하르트가 부수상 자리에 오른 것을 보고 에르하르트에 호의적인 신문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는 이런 식으로 후계자가 지정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수상이라는 자리는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는 장식적인 의미를 지닌 것일 뿐이었다. 조각을 시작하면서 아데나워는 당연히 에르하르트가 연방 수상의 직무 대리임을 분명히 하였다. 아데나워가 쉐퍼에게 부수상 자리를 제안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데나워 수상이 에르하르트에게 자기 어려움을 털어놓았더라면 그는 쉐퍼가 부수상이 되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연장자를 우대한다는 원칙에서도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그 당시에 무엇보다도 쉐퍼가 내각 경제회의의 의장이 되는 것을 막는 데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여기에서 에르하르트가 원래 연방 수상 후계자가 되려는 야망이 전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는 경제부 장관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강한 권력의지도 없었고 경제 기적의 화신으로 기억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가 959년 독일연방 대통령 후보로 한 번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실 에르하르트는 1957년 조각 때부터 쫓기는 인물이었다. 그를 밀착 취재하는 언론이 그를 쫓았고, 여당이 그를 몰아세웠고, 자기 측근들도 그를 재촉하였다.     

아데나워도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로 여기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이 바로 에르하르트였고 폰 브렌타노도 여기에 속했다. 아데나워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자주 폰 브렌타노에 관한 크고 작은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 예를 들자면 1958년 7월 8일 그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털어놓았다. “장기적으로는 브렌타노가 외무부를 효율적으로 이끌 수없을 것입니다. 그가 지나칠 정도로 담배와 커피를 애용하는 바람에, 일전에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우려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의 기력도 고갈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매우 지적이고 일을 매우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꾸준하고 목적을 명확히 추구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외무부 업무가 질서 있게 수행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이 외무장관에 대하여 품었던 생각들은 1963년 여름 이후 게르하르트 슈뢰더 때문에 모든 일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나서야 현실로 나타났다. 1964년 11월의 장례식에서 아데나워는 ‘정치 지도자였던 폰 브렌타노’에 관한 감동적인 헌사를 비로소 드리게 되었다. 장례식에 모였던 사람들은 아데나워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것이다. “우리는 참다운 의미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1957년과 그 이후 몇 년 동안에는 아데나워에게서 그런 생각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데나워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그의 후계자 역할을 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슈피겔》은 슈트라우쓰가 연방정부 수상이 되었을 경우를 가상한 추측 기사를 써가며 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지도부는 작은 자매정당인 기사당(CSU)에서 수상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며 기민당(CDU) 안에만 해도 수상이 되려는 야망이 있는 정치가가 넘치고 있었다.     

슈트라우쓰에게는 기민당(CDU) 안에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가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하인리히 브렌타노, 그리고 이 두 사람과 친한 한스 글롭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늘 수상과 대면할 수 있었고 국방장관의 모든 실책을 즉각 보고하여, 그렇지 않아도 불신이 가득한 아데나워의 의심을 계속 돋우었다. 여기에는 슈트라우쓰가 기자들과 함께하는 편한 술자리에서 떠벌리는 무례한 언행도 포함되었다.  또한 슈트라우쓰가 자신이 상관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고위장성들과 개인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만든 것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호이싱거 장군은 슈트라우쓰 아래에서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만이 아니었다. 루스트나 호프, 또는 굼벨과 같은 관료들도 힘들어했다. 그들은 사실 슈트라우쓰를 보좌하면서도 약간은 그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위하여 국방부에 들어간 인물들이었다.      

1958년부터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 사이에 정치적 견해차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우쓰는 1958년 2월의 유동적 상황에서 독일 자체적으로 핵무기 자유 지역에 관한 구상을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1958년 6월 그는 아데나워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데나워는 독일군 구성의 근본적인 변혁에 관한 간단한 서면 안내문을 전달받았다. 그 내용은 슈트라우쓰가 이미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이었다. 그러자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가 그러한 경우 통상적으로 자기 장관을 다루는 조치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먼저 ‘직무 태만’, ‘내 정책에 관한 명백하고도 심각한 방해’와 같은 표현이 담긴 냉정한 어투의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고 나서 통상적인 절차대로 글롭케가 정리한, 독일 헌법 제65조와 66조에 나와 있는 정부 조직의 권한 규정과 관련된 훈계를 전달하였다. 연방정부 수상은 이 규정에 따라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장관의 파면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대담하게도 수상의 편지를 무시하였다. 그 후에 아데나워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폰 브렌타노, 폰 에첼이 배석한 자리에서 슈트라우쓰를 흥분하여 비난하였지만 슈트라우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그 대화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하였다. 곧 독일연방 대통령에게 누구를 슈트라우쓰의 후계자로 추천해야 할지 자기는 이미 생각해 놓았다고 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는 늘 이런 식이었다. 후계자 문제에서도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기사당(CSU)과 슈트라우쓰는 자기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슈트라우쓰는 비록 글롭케와 크로네에게 계속 핀잔을 들어도 국방장관 자리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 정작 맞설만한 장관은 없었다. 폰 브렌타노처럼 인사담당자로서 직원을 느슨하게 관리하면 아데나워는 그가 행정적으로 태만하고 개념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슈트라우쓰의 경우처럼 장관이 엄격하고 사려 깊지 못한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아데나워는 그가 난폭하고 통합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였다. 장관이 에르하르트처럼 공정하고 타협할 마음 자세가 있는 경우에는 부서의 질서가 없고 너무 나약하며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기 마련이었다. 그해에 아데나워가 가장 맘에 들어 한 장관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뿐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호이쓰와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나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슈뢰더가 내무장관으로 어렵게 시작한 이후 크게 성장하였다. 그는 성실하고, 규율을 잘 지키고 언론에 자신을 잘 내세울 줄 알았으며 기민당(CDU) 내부의 ‘개신교 노동자회’나 경제계에서나 자기 정치적 세력을 키우는 데에도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국무회의에서도 자기 부서와 무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을 제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슈뢰더의 또 다른 장점도 높이 평가하였다. 슈뢰더는 야당을 매우 강하게 공격할 줄 알았다. 그는 내각의 다른 많은 장관과는 달리 타고난 정치가였다. 그때까지 수상에게는 절대 충성을 보이면서도 정치적 계산에서는 아데나워만큼이나 냉정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이 47세의 비교적 젊은 인물이 외교 정책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보여 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후계자 문제를 숙고하면서 아데나워는 그도 고려 대상으로 삼았다. 아데나워의 생각은 확고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가 자기 확실한 후계자라고 여기다가도, 다른 때는 슈뢰더의 수상이 되고자 하는 야망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1957년 이후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거론된 인물 가운데에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도 있었다. 그가 외무장관 후보로는 폰 브렌타노보다 뒤로 밀려 있었기에 1957년에도 그 보다 낮은 자리로 내각에 입각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있는 것이 여당의 다른 의원들보다는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그가 아데나워의 후계자가 될 것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조각 이후 게르스텐마이어가 자존심을 매우 내세우는 맞상대가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르스텐마이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데나워에 맞서 자신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아데나워는 군비통제 정책과 독일 정책에 관한 기조연설로 그와 충돌했다. 그 연설은 기민당(CDU)이 자신을 사민당(SPD)에 문을 열어 주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곧 게르스텐마이어는 [다른 나라와] 독일의 평화협정이 조인되도록 하는 대규모 국제회의를 제안하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독일에 ‘매우 불리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키싱거의 동의를 얻어낸 다음 외교 정책에 관한 논의를 지연시키면서 모스크바에 의회 사절단을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는 아직 시기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유감스럽게도 언론에서 그러한 제안을 여러 가지 이유로 좋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실 야콥 카이저와 함께 게르스텐마이어는 나치 정권에 대항한 진정한 전사였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에 그는 국가와 독일의 미래가 정당 차원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정당을 초월한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을 추구한 것은 쿠르트 게오르그 키싱거나 카를로 슈미트와 슈바벤 출신의 동지애를 발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게르스텐마이어는 보수주의와 사민주의가 협력하였던 독일의 나치에 관한 저항의 전통을 이어간 것이다. 그래서 게르스텐마이어는 너무 노골적으로 나서는 사민당(SPD) 의원인 프리츠 에를러를 보면서 그가 히틀러 시대에 교도소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던가를 떠올렸다. 1956년부터 독일 연방의회에는 동서 대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던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중진 외교 정치가들의 작은 모임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게르스턴마이어였다. 그는 수상의 측근인 블랑켄호른과 폰 에크아르트와 때로는 긴밀한 접촉을 했다.     

게르스턴마이어가 언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일상적인 정치적 논쟁으로 보이는 사안과 분리하여 근본적으로 다루는 능력 때문이었다. 언론과 식자층에서는 이러한 사려 깊은 방식을 높이 평가하였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능력이 아데나워의 전투적이고 독단적인 스타일과 다른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게르스텐마이어는 아데나워의 약을 바짝 올리곤 하였다. 연방의회 의장은 세심하고 초당적인 합의를 이루는 인물로 여겨진 것이다. 델러와 하이네만은 예외로 한다면,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아데나워의 여당과 야당 의원들 가운데 아무도 게르스텐마이어 만큼 그와 대립했던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게르스턴마이어는 연방정부 수상 후보로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실제로 수상 후보자로서의 기회를 얻게 된다면 대연정 정부에서나 가능할 것이었다. 이는 그 당시 본에서 떠돌던 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각 과정에서 새로운 후계자 후보가 등장했다. 그가 바로 프란츠 에첼이었다. 아데나워가 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기민당(CDU)의 경제 파벌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에첼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유럽통합 추진에서 든든한 선봉장을 얻은 셈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에첼이 1957년 아데나워 후계자의 반열에 오른 것인가?     

이제 55세가 된 에첼은 아데나워와 대부분의 내각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가정 출신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능력이 뛰어나고 상실하며 매우 단단한 법률가로서 사회법 전문가였다. 1930년부터 그는 뒤스부르크에서 산업변호사로 활동했다. 그사이 군 복무도 마쳤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정치적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독일민족청소년연맹(DNJB)*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영리한 그는 나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 독일민족청소년연맹 [Deutschnationale Jugendbund, DNJB, 역자주 -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시절에 설립된 DNJB는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며 주로 독일의 국가 정체성과 문화에 헌신하는 젊은이 회원으로 구성. 애국심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정부와 전통적 가치의 보존을 옹호. 1933년 나치가 집권한 후, 모든 정치 청년 조직은 히틀러 청년단에 통합됨.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DNJB는 부활하지 않았음.]             

그는 보수파에 속하는 인물에다가 개신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기민당(CDU) 라인란트 지방당 안에서도 발기인에 속하는 인물이었기에 이른바 ‘뒤셀도르프 원칙(Düsseldorfer Leitsätze)’의 작성과 관철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기민당(CDU)은 이로써 1949년에 당내에 여전히 남아있던 기독교 사회주의의 정신을 일소해버렸다. 제1차 연방의회 회의에서 그는 이미 여당의 강력한 경제전문가로 자리매김하였고 쉬망 플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룩셈부르크의 광산연합의 부의장으로서 장 모네의 편에 서서 독일의 이익을 무시하고 유럽 공동시장에 관한 아데나워의 동의를 끌어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개신교 신앙을 지녔다는 것은 1953년 이후 더 이상 반드시 약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강력하게 가톨릭의 영향을 받던 기민당(CDU)이 점차 개신교 유권자들에게 손을 내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폰 브렌타노와 하인리히 크로네도 그에게 맞서지 않았다. 하인리히 크로네는 1956년 중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녁에 브렌타노와 함께하였다. 우리는 총선 이후의 인사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브렌타노는 외무장관을 계속하고 싶어 하였다. 수상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프란츠 에첼이 나중에 수상이 되면 아마 큰 추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에첼은 폰 브렌타노나 크로네와 같은 정치가들을 좋아한 이유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다른 경쟁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수상 자신도 에첼과 같은 경제전문가를 에르하르트의 대체 인물로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1957년까지 이는 기자들 사이에 도는 소문에 불과했었다. 이런 소문이 돈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진지하게 수상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할 때도 아데나워는 아직 에첼을 재무장관으로 기용하는 가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은 그가 재무장관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 당시는 아직 기사당(CSU) 당대표였던 한스 사이델이 매우 강력한 재무장관 후보였다. 게다가 에첼이 광업연합 부의장 자리를 놓을 생각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그런 그가 내각이 입각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아데나워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자기가 유럽에 호의적인 내각을 구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내각 구성에서 프란츠 에첼과 관련하여 자주 제기된 소문이었다. 수상은 이것이 폰 브렌타노와 에르하르트와의 전면전을 예고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상이 인사 문제에서 하나의 해결책에만 매달릴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가 늘 여러 차선책을 마련해두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지도적인 인물의 인사 문제를 묵시적인 사회적 다윈주의적 원칙에 따라 처리하였다. 최고의 자리는 강하고, 영리하며,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이 차지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한 정치가가 내각과 여당에서 능력을 발휘할 때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1957년 당시 아데나워가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소 정당인 독일당(DP)을 제외해 본다면 하나의 여당이 장악한 정부에서 원내대표는 수상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 아데나워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1955년 6월부터 크로네가 키싱거를 물리치고 당선된 이후 아데나워는 그를 매우 소중히 다루었다. 그와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전화를 걸었고, 자주 뢴도르프나 휴가지로 불러 대담을 나누었다. 편지, 전보, 기안서가 전달되고, 글롭케를 통한 간접 접촉도 부지기수로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정책 결정 과정에 크로네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견해를 묻고 자기 의견에 동의하도록 이끌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쾰른 시장으로 재직할 때도 요하네스 밥티스트 링스를 이와 비슷한 식으로 키운 적이 있었다, 그는 쾰른 지방의회에서 아데나워에게 충성을 다하던 중앙당 대표였었다.     

폰 브렌타노가 원내대표로 있던 1945년부터 1955년까지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 대비가 뚜렷해진다. 폰 브렌타노가 아데나워로부터 매우 무뚝뚝한 편지를 자주 받았고 그 자신도 매우 강력한 답변서를 보낸 데 비하여 아데나워와 크로네는 비판적인 서한을 거의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이 또한 크로네가 늘 전화 통화나 직접 대면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일단 불편한 심기를 비출 때는 크로네도 서한을 통하여 마치 자기 ‘동지들’에게 가끔 하던 식으로 수상에게 훈계하였다. 그러한 서한에서 그는 ‘깊은 존경심을 담아 드립니다.’라는 마침 인사 뒤에 화난 필체로 서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크로네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격조 있는 추신을 첨부하였다. “존경하는 수상 각하, 제가 각하께 각하의 서한을 오늘 즉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하여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존경하는 수상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크로네 올림”     

나중에 조용히 써 내려간 일기에서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수상은 더욱 강경하고 냉정하며 편향적이고 부당해졌다. 나는 수상의 서한을 즉시 반송하였다. 나의 이런 행동을 수상이 잘못한 일로 여긴다면, 그가 틀린 것이다. 다음 면담 때 나는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수상은 어제 우리가 싸운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상은 내가 반송한 서한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였다. 결국 나는 양보하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이 작은 소동은 이 두 사람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관계에서 아데나워가 일을 더 재촉하며, 더욱 까다롭고, 사람들이 견디기가 더 힘든 인물이었다. 그에 비하여 크로네는 인내심을 타고났으며 가톨릭 신앙이 매우 깊고 청렴하며 과묵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관 자리, 나아가 수상 자리를 별로 탐내지 않았다. 만약 어떤 정치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지략, 탁월함, 그리고 쾌활함이라면 크로네는 별로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인물에 테오도르 폰 호이쓰가 있었다. 그는 토니 슈톨퍼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크로네를 시큰둥하게 묘사하였다. “너무 무뚝뚝하고 지루한 사람으로 ... 당내 경쟁자들과 비교해 볼 때야 비로소 언변과 능력이 있으며 원내대표가 될 만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크로네는 본이라는 지역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두드러지게 소박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베저강 유역의 고산지대에 살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도텐도르프에 있는 작은 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명 정치인으로 살았다. 자기 부모처럼 소박하며 국빈 방문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연미복을 입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그의 신념은 확실했다. 독일의 통일, 베를린의 자유화, 기독교 도덕 원칙의 공식적 인정, 조국 수호 지지, 무엇보다도 당의 단합을 그는 바랐다. 크로네는 수상도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삶의 양식과 거대 여당을 잘 꾸려가는 능력에서 그는 독특하게도 주변에 대하여 부정적이며 비판적이었던 헤르베르트 베너와 비교된다. 그는 크로네와는 전혀 달랐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너와 크로네가 서로를 알게 된 이후 크로네의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베너는 그의 집을 아침 일찍 방문하여 꽃다발을 전하며 그날의 주인공과 덕담을 나누었다.     

아데나워에 대하여 크로네는 업무와 관련될 때 자신을 아데나워라는 위대한 인물을 위해 일하는 충실한 종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종으로서 의젓하고 자기 뜻을 세우면서도, 자기만의 비전이나 권력의지가 없는 정치가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데나워는 1950년대 본의 정치적 관행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 원내대표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크로네는 수상을 보호하면서 원내총무인 빌 라스너와 더불어 의회 안에서의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에게 여당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에 대하여 자주 조언하였다. 그러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게 강력하게 맞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기 본당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하여 실수를 범하거나 조급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성실한 늙은 신부처럼 행동하였다. 1959년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가 엄청나게 대립했음에도 바로 크로네가 있었기에 내각이 삐걱거려도 그들이 4년 더 협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의적이고, 교활하고, 냉소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아데나워가 능력과 한계를 너무 잘 알고 있는 하인리히 크로네를 한 번이라도 자기 후계자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1957년부터 아데나워가 그에게 그러한 언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크로네도 자기 일기에 별 의견 없이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그러한 언질은 예의상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크로네를 자기 측근으로 잡아두고자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데나워도 생각만 있으면 예절을 갖출 줄 아는 인물이었다. 원내대표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기민당(CDU)의 거물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수상 후보자의 자질을 탐색한다면 이는 사실 크로네도 그러한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언질을 주기 위한 단순한 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크로네와 마찬가지로 크로네가 정치의 그러한 연극과 같은 측면을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이 성공적인 수상이 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사실 크로네는 많은 사람을 이끄는 데에 경험이 부족하였고 외교 정책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1961년부터 상황이 변하였다. 에르하르트의 추종자들이 그를 수상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질수록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와 크로네를 대결시켜 보려는 생각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크로네는 아데나워의 그러한 계략에 넘어갈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사실 당내에서 눈에 뜨이게 고립되어가던 아데나워는 크로네에게 크게 의지하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사실 크로네가 없었다면 아데나워가 1957년 총선 이후 6년 더 수상으로 재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격을 안 당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꺾지 못하였다. 1963년 초 크로네마저 아데나워가 더 이상 수상으로 버틸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고, 기민당(CDU)의 지지율이 최악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아데나워는 실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매우 커다란 탸격을 입은 폰 브렌타노가 원내대표에 오르고 브렌타노는 내각에 입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크로네는 여전히 당내에서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고 있었다.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 크로네는 독일연방공화국 안에서 서열 2위의 정치가였다.     

그와 비견될 정도의 영향력을 다방면에 행사하던 인물은 오로지 글롭케 차관 정도였다. 그는 선출직 공무원이 아니었기에 정책결정과정에서 그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아데나워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80대 중반을 바라로는 아데나워도 글롭케 없이는 자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인 글롭케는 단순한 직무적 기능 이상의 영향력을 눈에 띄게 발휘하고 있었다. 내각 측근들의 도움과 차관들의 ‘월요회의’(Montagsrunde)를 통하여 여러 연방정부 부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출세욕이 강한 의원들이 이끄는 거대한 관료제도에서 그가 통제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기민당(CDU) 내부의 색깔이 같은 이들의 지지만이 아니라 지방 정부의 지도층과 본의 기민당(CDU) 중앙당의 거물들의 지지도 확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크로네와 폰 브렌타노와 맺은 인맥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데나워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일 처지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라는 ‘노인네’가 자기 후계자들의 공격을 그토록 오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롭케의 눈과 귀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아데나워-크로네-글롭케가 권력의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데나워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이 없었다면 아데나워는 실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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