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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본  민주주의의 강화 I

아데나워 전기 II

아데나워의 자르 지역 정책에 관한 놀라운 논쟁    

 

1980년대에 테오도르 에쉔부르크는 ‘정서 민주주의’(Stimmungsdemokratie)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이 용어는 특정 정치 세력을 확고히 지지하는 유권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이들을 포함하여 대중의 정서는 바다의 표면과 같이 유동적인 것이다. 다양한 요소들이 그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경기의 흐름, 국제 위기, 스캔들, 지방선거, 본의 연합정권 내부의 지속적인 분열, 그리고 일시적인 연정의 와해가 포함된다.     

아데나워의 14년에 걸친 집권기를 연구하는 이들은 동일한 현상을 보게 된다. 정치적 성향은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안정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 신자와 지방 유권자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정서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상시적이었다.     

여기에서 특히 1956년에는 지지율이 오랫동안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아데나워가 의기양양하며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1955년 10월 23일의 자르란트에 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여론은 무엇보다도 자를란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오판한 아데나워는 자르규정에 무조건 동의하는 입장을 고수하여, 그에게 충성을 보였던 원내총무인 하인리히 크로네마저도 당 대표단 투표에서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10월 7일부터 23일까지 처음으로 긴 기간 동안 병에 걸렸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약한 기관지로 말미암아 폐렴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그의 후계자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어쩔 수 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과 많은 유권자는 독일연방공화국을 매우 연로한 인물이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었다. 나라 전체가 아데나워가 러시아에서 귀국하면서 독일 전쟁포로가 있던 프리드란트에 들린 일을 열광적으로 환영한 일은 아데나워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유동적이었다. 그러다가 1956년 1월 5일 아데나워의 80회 생일 축하 잔치가 요란하게 거행되자 그에 관한 여론이 다시 좋아졌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인기가 다시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인기가 하락하게 된 원인은 아데나워가 토마스 델러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자민당(FDP)을 분열시키고자 했던 데에 있다. 대부분 언론에서는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자민당(FDP)을 무력화하려는 기민당(CDU)의 배후에는 아데나워 수상의 무자비한 권력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뒤셀도르프의 아르놀트 정권이 사민당(SPD)과 기민당(CDU) 연합으로 무너지고 본의 연정이 무너지게 되자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내세운 커다란 계획들도 상황을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아데나워가 ‘방위군’(Wehrmacht)으로 부른 독일군 창설 문제는 지지부진하였다. 게다가 1956년 거의 한해 내내 지속된 연방 재무장관 쉐퍼를 둘러싼 공개적인 논쟁으로 정부의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 아데나워와 여당은 선거를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쉐퍼의 긴축정책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경기에 관한 정책을 둘러싼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와의 공개적인 갈등도 벌어졌다! 그리고 1956년 중반 여론조사를 시행한 결과 1957년 총선에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이론적으로 다수파가 될 것으로 예상되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도 사민당(SPD)과의 대연정, 일정한 양보를 통한 자민당(FDP)과의 연합의 쇄신, 심지어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도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여당 내부에서는 이제 아데나워의 영향력에 관한 논란도 감지되었다. 1955년 초여름부터 당 대표진에서 폰 브렌타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크로네는 1956년 5월 14일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으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직무 수행과 일에서 종종 피곤해하고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5월 중순 여론조사연구소인 알렌스바흐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아데나워의 지지율은 겨우 40%대에 머물고 있었다. 1956년 1월만 해도 56%였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 가운데 아데나워를 싫어하는 이들, 그리고 지지든 반대든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은 이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는 아데나워의 자도 스타일에 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는 분명한 표지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민당(CDU)에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아데나워는 이 해 초반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를 연방정부 공보부와 정보부의 수장으로 복귀시키고자 하였다.     

마침내 10월 중순 아데나워는 내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였다. 1956년 10~11월에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발생한 국제적 위기는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1956년 11월부터 그에 대한 지지도가 다시 상승곡선을 타게 되었다. 1957년 2월이 되자 여론조사 결과가 매우 좋아져서 아데나워는 코네티컷에 머물고있는 그의 오랜 벗인 다니 하이네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총선 예상이 매우 긍정적입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눈에 뜨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가 여론을 주도할 뿐 추종하고자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한 말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연방정부 수상실, 여당 중심부, 언론에서 나온 여론조사 자료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중하게 접수되고, 분석되고, 논의되는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아데나워는 그의 정적들과 구분이 되었다. 곧 아데나워는 자기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지만 그러는 과정에서도 [여론의] 부정적인 흐름을 수정하기 위한 전술적인 도움을 지속적으로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1955년 가을부터 1957년 초반까지의 힘든 시기에도 자기 임기를 훨씬 넘어서 진행될 예정인 계획들의 추진을 관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기본법의 방위 조항 보완, 국방법, 국방의무 규정, 자르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과 프랑스 관계의 최종적인 정리, 더 나아가 중요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연동 연금’(dynamische Rente), 카르텔 규제법이 있다. 그러나 이후 그가 퇴임하기까지는 거의 모든 입법 시도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다. 외교 정책에서도 두 가지 핵심 과제를 관철하였다. 곧 독일군의 핵미사일체계 도입과 독일·프랑스조약 체결이다. 이리하여 1956년은 아데나워의 외교와 국내 정치적 입지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대서방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르 지역 문제의 해결이었다. 이 문제는 1950년부터 1955년에 걸쳐 아데나워와 프랑스 측의 협상 상대는 파리와 본의 상호협력과 유럽의 다자간 통합을 신속히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여기에서 하필이면 아데나워에게 자를란트 주민이 자르 지역 문제 해결을 요구하였다는 것이 그의 연방 수상이라는 지위와 관련하여 모순적인 일이었다.     

1955년 여름과 가을에 자를란트의 향토연맹당(HBP)이 자르규정에 반대 입장을 표명할 권리를 내세우자 아데나워는 매우 분노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데나워는 자르규정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수개월 전부터 이것이 통과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이 확실하다. 이는 자유선거로 구성된 정부가 정치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때문이었다.     

1955년 8월 초부터 휴가지인 스위스 뮈렌에서 오토 렌츠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아데나워의 깊은 심중을 들여다볼 수 있다. 렌츠는 오래전부터 아데나워의 측근으로서 자르 지역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알트마이어 주지사와 자르 지역 기민당(CDU) 지방당과 격렬한 논쟁을 벌일 준비를 해왔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전달한 내용은 아데나워가 자르규정에 동의한 것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 기민당(CDU) 지방당의 자르규정에 대한 반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장 심각한 정치적 잘못’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리되면 자르 지역 기민당(CDU) 지방당은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에 반기를 들면서 사민당(SPD)의 흉계에 넘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 구성된 자를란트 의회에서는 기독교국민당(CVP)과의 협력도 불가능하게 될 노릇이었다. 기독교민족당의 당수는 요하네스 호프만이었다. 이러면 자를란트는 사민당(SPD)의 지배에 놓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연방정부나 연방의회의 여당도 ‘자르규정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받지 않게 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는 아데나워의 아주 약아빠진 주장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이후 몇 주 동안 되풀이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웠다. “자르규정을 거부하게 되면 당분간 프랑스와 그 나머지 관련 국가들과 새로운 협약을 맺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르 지역은 과거 호프만-헥토르 정권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10월 13일 이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아데나워의 이러한 예측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근거는 현실적으로 민감한 국제적 상황에 관한 것이다. “현재의 매우 위험하고 유동적인 외교적 상황에서 (피네이 정권의) 프랑스와 독일연방공화국의 관계에 그러한 혼란이 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그러한 혼란이 벌어지게 되면 미국의 여론과 정부에 매우 우려스러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알트마이어 주지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아데나워의 서한을 받았다. 다만 이 서한은 그 내용을 매우 조심스럽게 기술하였다.     

확인된 모든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자르 지역의 분위기가 친독일 정당의 설립이 허락되고 반대운동이 시작되자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55년 4월 알렌스바흐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를란트 지역 응답자의 59%가 자르규정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찬성할지 반대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21%는 이에 찬성하였고 20%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망데스-프랑스 총리는 프랑스의 시각에서 볼 때 훨씬 나은 수치를 제시하였다. 곧 60%가 찬성하고 15%가 기권하며 15%가 반대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대사인 그랑발은 찬성표가 50~52%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국민투표를 1955년 6월 1일 이전에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8월에 여론조사의 격차가 친독일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은 자르규정에 반대하고 자를란트를 독일연방공화국에 병합시키는 것을 바랐다. 여론조사기관인 엠니드(EMNID)의 조사에 따르면 79%가 자르규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를란트의 유권자 가운데 74%는 독일과 다시 통일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과 프랑스가 자르규정 제6조 3항에 따라 자를란트 지역의 여론 형성에 ‘그 어떤 외부 영향을’ 끼치지 않기로 한 것을 명시적으로 준수해야 했기에 아데나워는 적어도 이제부터라도 느긋하게 앉아서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르규정에 관한 반대 의견을 막아보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논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주지사인 호프만과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는 자르 지역 기민당(CDU) 위원장인 후베르트 네이를 동시에 파면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호프만의 친프랑스 노선을 은밀히 반대하고 있던 자를란트의 기독교국민당(CVP)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자기 구상에 따라 기독교국민당(CVP)과 자를란트 기민당(CDU)이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곧 자르규정에는 찬성하되 규정의 통과에 이어진 지방선거에서 노선 수정이 가능할 것으로 본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누구보다도 오토 렌츠를 통하여 정보를 수립하고 협상을 벌였다. 이렇게 오토 렌츠는 다시 아데나워의 측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러면서도 그가 즐겨 하던 뒷거래를 하고 싶은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9월 1일 아데나워는 야콥 킨트-키퍼를 초대하였다. 아데나워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초반기에 세운 공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르루이(Saarlouis) 출신인 킨트-키퍼는 스위스에서 서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 연합을 주도하였다. 여기에는 아데나워와 조르주 비달도 참가하였다. 매우 어려웠던 1050년 8월과 9월에 아데나워 수상은 킨트-키퍼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한 적도 있었다.      

안더나흐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이 킨트-키퍼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연방정부 수상실은 이 방문에 관하여 언론 보도문까지 발표하였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자르 지역 정당에 모종의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자 곧 언론에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호프만이 물러날 것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데나워의 정적들이 언론에 반대 정보도 흘렸다. 곧 킨트-키퍼는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관한 여론도 매우 안 좋아서 아데나워는 곧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9월 7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킨트-키퍼가 ‘호프만 씨를 물러나도록 하는데’ 활용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접촉했던 것이라는 고백을 해야만 했다. 이어서 그는 마치 사과하려는 듯이 말했다. 곧 자기는 사실 거의 3년 동안 킨트-키퍼를 본 적도 없었고 “프랑크푸르트의 어려운 시절에” 알게 된 것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미텔스만은 이미 ‘격노한’ 상황이었다. 글롭케는 9월 6일 자 서한으로 킨트-키퍼와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독일 친화적인 자르 지역 정당들, 특히 자르 기민당(CDU)도 킨트-키퍼에게 반감을 표시하였고 오직 궁지에 몰린 호프만이 뒤펜바일러에 있는 사냥궁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1955년 11월 킨트-키퍼가 등기우편으로 전달된 서한에서 아데나워가 자신을 모욕하였다고 불만을 토로하자 아데나워는 킨트-키퍼를 달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서한에서 킨트-키퍼가 오텔핑겐-취리히에 15년간 보관되어온 기록물들을 넌지시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답신에서 그를 적나라하게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귀하께서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하여 최선의 방책을 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귀하는 자기 능력을 매우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정치판에서 흔한 일이 귀하에게도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이 바닥에서는 성공하면 찬미를 받고 실패하면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킨트-키퍼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아데나워에게 또 서한을 보내어 9월 1일 아데나워와 만나 대담하는 자리에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 것이다. 곧 글롭케가 독일민주사회당(PDS)의 하인리히 슈나이더에게 100만 마르크의 돈을 “아무런 조건 없이 주었으며 –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다른 돈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공개적인 복권을 다시 한번 협박조로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글롭케가 응답하였다. 글롭케는 그러한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프랑스 대사에게도 이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더 이상 퍼뜨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뒤에 가려진 재정적인 이유와 아데나워의 자르 정책의 애매모호함에 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데나워의 그러한 술책을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이 일이 있은 지 35년이 지난 다음에 아데나워가 그 당시에 하인리히 슈나이더와 기민당(CDU)의 비밀 자금에서 1,000만 마르크 내지 1,100만 마르크의 자금을 마련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킨트-키퍼와 관련된 계획은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바로 자르 지역에 관한 국민투표를 둘러싼 논쟁과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요하네스 호프만의 사임으로 막아보고자 했던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아데나워가 정치적인 뒷거래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4월 24일 그는 기민당(CDU) 원내총무를 시켜서 독일연합통신사(DUD)에 원고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 원고에는 기민당(CDU)이 자르규정에 찬성한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에 머물지 않고 이제 국민투표를 둘러싼 싸움에 직접 뛰어들었다. 9월 2일 아데나워는 보쿰에서 베스트팔렌의 기민당(CDU) 지방당 창당 10주년 기념 연설에서 자를란트의 친독 정당들이 모두 ‘배신행위’를 하고 기독교국민당(CVP)이 그런 논조로 선전·선동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였다.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보쿰에서 자르란트 주민에게 반드시 자르규정에 찬성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연히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호프만 정부는 자르 지역에서 더 이상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아데나워가 먼저 킨트-키퍼와, 이어서 프랑소와-퐁세와 대담을 나눈 다음 날 나온 것이다. 타이밍이 매우 적절하였지만, 자를란트와 독일연방공화국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기 운신의 폭이 얼마나 적은지를 이제라도 깨달아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라인란트-팔츠 기민당(CDU)의 반발 분위기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정 내부에까지 확산되었다. 알트마이어 주지사와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 문제로 이미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민당(CDU) 당대표 대리와 전독(全獨) 장관으로 있던 야콥 카이저는 1950년부터 아데나워의 자를란트 정책을 막아보려고 노력해왔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정 내부에서는 누구보다도 그 당시 이미 연정에서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프리츠 헬비크가 강력하게 아데나워와 그의 측근들을 정중하면서도 강력하게 몰아세웠다. 그리고 여론에서도 자르 지역 문제에서 아데나워가 지금까지 우세를 점유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기민당(CDU)의 폭넓은 중도 세력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9월 말 기민당(CDU) 당 대표단이 크게 대립한 데에서 표출되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 명의로 ‘기민당(CDU)은 자르 문제와 독일·프랑스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자르규정에 나와 있는 방식이 최선이라고 여긴다.’라는 내용의 공개 성명을 발표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 대표단 가운데 15명은 그러한 성명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였다. 그러나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를 포함한 5명은 반대하고 6명은 중립 의견을 보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는 공개적인 반역이었다. 아데나워가 몇 분 후에 프랑소와-퐁세와 작별 만찬을 나누어야 해서 시간이 없던 상황으로 그는 더욱 분노하며 회의장을 나서게 되었다.     

이는 9월 30일에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벌어진 일이다. 10월 5일에는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 수상인 포레와 외무장관인 피네와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다. 사실 이제 아데나워는 망연자실한 상황에 놓였다. 국민투표를 3주 남긴 시점에서 오토 렌츠가 아데나워에게 새로운 구상을 제안하였다. 그 구상은 아데나워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렌츠는 아데나워가 포레와 피네에게 통 큰 제안을 하라고 권유했다. 곧 국민투표의 순연, 호프만 정부의 퇴진, 자를란트 주의회 해산, 프랑스-자를란트 경제협약 선언의 포기를 제안하라는 것이었다.       

호프만의 퇴진과 아데나워가 원래 바랐던 자유선거로 수립된 자를란트 주의회의 구성 이후에 자를란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협상 카드를 이제 프랑스 측에 직접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구상을 10월 5일 룩셈부르크에서 에드가 포레와 앙토안 포레를 만난 자리에서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원문의 각주 오류가 나서 처리한 부분]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하여 모스크바가 매우 부정적인 태도로 나오면서부터 아데나워에게는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하여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제 자르규정에서와 같은 동독과 서독 사이의 최종적인 평화 규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르 지역의 최종적인 국가적 소속은 “늦어도 3~4년 안에 결정되어야 하였다.” 자르 지역 문제와 동서독 문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더 이상 자르 지역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할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도 이 문제를 종결시키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5년 10월 23일 자를란트 주민들은 국민투표에서 67.7%의 반대로 자르규정을 부결시켰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아데나워 또한 굴욕을 당한 것이다. 협상의 진행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롤프 라르는 이에 관한 10월 24일 자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식적 차원의 업무적으로 보자면 우리도 분명히 아데나워 수상처럼 의기소침해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매달렸던 자르규정을 제외한 파리에서 마련한 조약들이 이미 몇 달 전부터 되돌이킬 수 없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우리가 손해를 보아야 했던 협약은 문자 그대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어서 그는 아데나워의 관점이라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 정치에서 이러한 식으로 모든 관계자가 마땅히 했어야만 한 것의 정 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은 매우 드믄 일이었다.”      

결국 프랑스가 이성적으로 반응하여 자를란트 주민들의 자결권을 존중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자기 겸손한 정책으로 파리가 이제 질서 있는 퇴각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에게는 여전히 서로 합의된 해결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자를란트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하루 전인 10월 22일 투표 결과가 충분히 예측되는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외무장관인 폰 브렌타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저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파리에서 자를란트 관련된 새로운 협상을 벌이면서 프랑스와 대립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을 통하여 본 주재 신임 프랑스 대사인 크리스티앙 드 마제리에게 ‘즉석’ 전문의 초안을 전달하였다. 이에 대하여 파리에서도 이와 유사한 ‘즉석’ 전문을 보내왔다. 그 전문에는 본과 파리의 좋은 관계를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유럽의 정신’에 입각하여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를란트의 국민투표 이후의 매우 중요한 시기에 아데나워는 프랑스 외무장관 피네가 매우 지적이고 관용적인 상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랑발 대사가 물러나고 호프만 내각이 해산되었다. 자를란트의 자유 지방선거가 예정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이 타협안은 1956년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과 자를란트는 ‘작은 규모의 통일’애 합의한 것이다. 이에 관한 보상으로 본은 모젤강의 수로 건설 비용을 지원하고 프랑스와 자를란트 지역의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였다.     

독일·프랑스 협상은 1956년 내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 측의 사회주의자 총리인 기 몰레를 상대하였다. 그러면서 이 프랑스 사회주의자가 프랑스 기독교 민주주의자나 보수주의 정치가에 비하여 자를란트의 자치권에 대하여 더 포용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종적인 합의는 수에즈 위기*가 발발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알제리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프랑스를 지지하였다. 그에 관한 보상으로 아데나워는 별 어려움 없이 자르 지역 문제를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수에즈 위기 [Suez Intervention, 역자주 - 제2차 중동전쟁, 카데시 작전, 시나이 전쟁으로도 불리며 프랑스와 영국이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를 침공한 사건.]     

자를란트가 독일연방공화국의 11번째 주로 편입되자 아데나워는 정치가로서 그곳에서 씨를 뿌리지 않고도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연방정부 수상은 아침으로 캐비어 한 접시와 고급 포도주를 비우고 나서 1957년 1월 1일 6시 20분 특별 열차 ‘코메트’ 편으로 쾨닉스빈터에서 자브뤼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마인츠에서 알트마이어 주지사가 기차에 올랐다. 그와 아데나워는 이미 서로 화해한 차였다. 이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메르치히, 딜링겐, 자르루에서 군중의 대대적인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10시 15분쯤에는 자브뤼켄에서 네이 주지사가 주최하는 열렬한 환영식이 열렸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에 대하여 지난 몇 년 동안 매우 나쁜 평가를 한 바가 있었다. 자르 지역 기민당(CDU)과 기독교국민당(CVP)의 통합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네이 주지사는 화해의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연미복과 실린더 모자를 착용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자브뤼켄 시립 극장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매우 솔직담백하게” 적절한 말을 하였다. “오늘은 제 인생에게 가장 기쁜 날입니다.” 

     

혼란     


그러나 1955년 10월 23일만 해도 아직 상황에 진전이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데나워는 폐렴으로 뢴도르프에서 2주 이상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처지를 오히려 기쁘게 여길 수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는 기자들이나 정적들의 비판적인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론은 자르규정에 관련된 일의 진행에 대하여 칭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데나워의 자를란트 정책은 아데나워의 다른 모든 일 처리에 비해 볼 때 그의 통치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곧 그는 자기가 엄정한 국시(國是, Staatsräson) 탁월하게 다룰 줄 알고, 정치적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다는 비난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정치를 매우 잘 다루며 논쟁을 궁극적으로 승리로 마무리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1955년 10월과 11월의 상황에서 이는 아데나워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모든 관계자는 아데나워가 얼마나 성급하게 공공연히 일을 추진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아데나워 자신도 프랑스와 힘을 합쳐서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여전히 매우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야콥 카이저가 일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나서 아데나워에게 축하 인사 전화를 하자 아데나워는 오히려 역정을 내면서 자신이 벌인 일이 어찌 돌아갈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였다.     

표결 논쟁을 벌이던 도중에 아데나워가 기절하거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이 80대에 접어든 노정객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관한 오래된 논의가 다시 부상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이야기를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떠돌면 자신이 건강이나 정치적으로 취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민감한 문제인 그의 후계자에 관한 논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곧 언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명망 있는 정치가들, 아데나워의 최측근이나 그와 밀담을 나누는 이들 사이에서 그러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논의가 1955년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가 수상이 된 이후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러한 논의가 더 격렬하게 이루어졌었다.      

아데나워가 그해 가을 병에서 회복하던 오랜 기간에 여론에서는 아직 추측성의 논의만이 있었다. 후계자로는 폰 브렌타노가 거론되었고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그리고 자기 입지를 다시 확고하게 다진 프리츠 쉐퍼의 이름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개별적인 후계 인물들의 생각이나 당 지도부의 의견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갑자기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후계자 문제를 아직 먼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과 흉금을 털어놓는 이들 가운데 먼저 페르드멩게스, 그리고 글롭케, 다음으로 크로네와 같은 이들은 아데나워가 가끔 다른 사람들과 이 매우 민감한 사안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데에 나름대로의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데나워가 자기의 사적인 문제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눈, 매우 정확하고 신중하지만 뜻밖에 말이 많은 페르드멩게스가 기민당(CDU)의 거물들에게 이러저러한 암시를 보낸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곧 그들에 관한 칭찬과 격려가 될 수도 있고 경고가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후계자 문제는 또한 독일연방 수상이라는 자리와 당대표라는 자리가 한 사람이 독차지해도 되는지에 관한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2년마다 열리는 기민당(CDU) 당대표 선출 때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1955년 4월 크로네와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미래의 당대표가 가톨릭 신자이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반드시 수상이거나 장관일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당대표는 종교나 선거구민의 차원에서 기민당(CDU)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을 배경으로 확보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수상직 후계자는 “미래를 확실히 내다보고 선하며 강인한 정치가 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크로네는 그 자리에서 광산협회 부회장인 프란츠 에첼을 거론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아미도 이는 에첼을 독일 연방의회나 내각에 불러들일 심산에서이었는지도 모른다.              

당대표로는 프란츠 마이어스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거론되었다. 크로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좋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가 더 강합니다.” 아데나워가 1955년 내내 폰 브렌타노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그는 사민당(SPD)을 잘 대적하기에는 너무 유약하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1957년의 총선에서 사민당(SPD)에 맞서 다시 한번 매우 강력한 선거전을 치를 요량이었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서방과 단절하고 중부 유럽에 중립 지대를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병상에 누워 있는 기간이 길어지게 되자 여론에서도 아데나워의 수상직에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사안이 부각되었다. 바로 글롭케 차관의 핵심 역할에 관한 문제였다. 아데나워는 질병으로 7주 동안이나 뢴도르프의 사저에 머물렀다. 이 긴 휴양 기간에 글롭케는 아데나워와 14차례나 면담을 했다. 대부분 독대했고 가끔 다른 이들과 동석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정치적으로 매우 입지가 약화된 부수상인 블뤼허는 겨우 세 차례만 아데나워를 면담하였다. 부수상 블뤼허는 아데나워가 휴가를 가거나 이번의 경우와 같이 국무회의를 주재할 때만 아데나워를 대신하였다. 실제로 글롭케가 수상 대리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아데나워는 외교 문제에 관해서도 종종 글롭케와 논의를 하였다. 폰 브렌타노, 그리고 누구보다도 할슈타인이 외무부 업무의 전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글롭케와 크로네, 그리고 크로네와 폰 브렌타노가 서로 잘 어울렸기에 그러한 상황이 이들 사이에 긴장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글롭케의 ‘막후 실세’로서의 역할이 하필 이 시기에 눈에 띄게 되자 《슈피겔》이 1956년 4월 글롭케에 관한 기고문으로 다시 한번 그를 강하게 비판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1955년 가을에는 제네바 외무장관 회담이 매우 부정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아데나워는 당 대표단 앞에서 간단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곧 러시아는 “제2차 제네바회담을 개에게 던져버렸습니다.” 아데나워 자신은 이에 대하여 사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로 모든 사람이 곧 아데나워의 서방과의 유대 정책이 독일의 통일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소련의 독일 통일 문제에 관한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사실보다 전체적인 세계의 상황이 더 우려스러워 보였다. 1956년이 흘러가면서 아데나워의 “세계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더욱 심각해졌다. 아데나워는 1954년 초반에 그리스와 터키를 처음으로 방문한 이후 지중해의 전략 지정학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 두 나라의 정상이 독일을 답방하고 이들 국가의 대사들과 정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아데나워는 지중해 동부에 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5년 가을부터 아데나워는 러시아가 ‘새로운 냉전의 전선을 형성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블랑켄호른이 11월 초에 뢴도르프에서 아데나워에게 설명해 준 바가 있다.       

지중해 동부는 동유럽에서 이집트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화약고가 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사건을 소련이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를 파악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영국도 책임이 없지 않아 보였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들은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영국이 이집트, 사이프러스, 인도에서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아데나워는 세계적으로 영국의 세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아데나워는 1956년 7월 이탈리아 국방장관 타비아니를 만난 자리에서 영연방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아데나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세니 총리가 들은 이야기도 마찬가지 내용이었다. 곧 영국이 러시아에 너무 다가가고 있으며 전혀 믿음직하지 못한 유럽 국가라는 것이었다. 처질이 영국 총리이고 이든이 외무장관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처칠이 없는 상황에서 이든은 ‘까다롭고’, ‘근시안적이며’, ‘버릇이 없는’ 성격을 보였다고도 하였다. 1954년 가을에 아데나워가 지녔던 좋은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에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아데나워가 자르 지역에서 국민투표가 시행되기 전에, 프랑스에 대하여 매우 부드럽게 나간 것에는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어려움에 부닥친 것을 고려한 면도 있다. 알제리 전쟁의 발발부터 비참한 종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그 어떤 보수주의자도 아데나워만큼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1955년 6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소련의 방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는 알제리 전쟁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그 이후에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알제리에 행정 부서들을 존속시키고자 하는 것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영국이 수에즈 침략에 실패한 지 며칠 후에 만난 미국의 그린 상원의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시킬 수 있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닙니다. 1830년부터 알제리는 150만 명의 백인 프랑스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한 주입니다. 프랑스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데나워는 중동의 “석유 기지”만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 지역 전체의 안전에 관한 문제도 근심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지중해 연안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면 유럽은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슬람 국가들이 “곧바로 러시아 편에 설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흔들리게 될 것이었다.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는 여전히 알제리에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무기 분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지중해 남부 지역과 중동을 위한 서방의 대규모 경제 계획도 구상하고 있었다.      

알제리 전쟁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동유럽 블록으로 기울게 된 상황을 보고 아데나워가 느낀 경계심은 단순히 전략 지리적인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아데나워는 평생 19세기 후반의 정신이 각인된 식민주의자였다. 이제 막 시작된 급속한 탈식민지화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유럽의 문명적 우월성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선입견은 되풀이하여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그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의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통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이 위대한 자선가는 1955년 11월 10일 병의 차도를 보이던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슈바이처는 자기 판단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슈바이처가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흑인들은 ‘근대적인 경제생활을 주도적으로 이끌만한 지위에 오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다른 대륙과 나란히 독립적인 지역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또한 유색인종의 단합이라는 과업은 중국이 시작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아프리카에 관한 지배력의 확대를 위하여 유색인종을 도울 뿐이라고도 여겨졌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말란 수상의 정책이 옳은 것이었다. 곧 그의 ‘인종분리’(Apartheid) 정책이 아니었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미 중국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었다. 이어서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정책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매우 강경하게 나갔어야 합니다.” 아데나워 수상은 슈바이처라는 이 유명한 아프리카 전문가를 자기 정보통으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 당시 떠도는 소문을 아데나워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속적인 위기에 당면해 있었기에 그 앞길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아데나워가 프랑스의 보수주의적인 외무장관 피네를 여전히 신뢰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곧 자르 지역 문제 해결에 그가 보여준 이성적인 태도와 제네바회담에서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 아데나워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피네가 11월 중순에 직접 제네바에서 본으로 날아와서는 아직 병에서 완쾌되지 않은 그의 ‘전우’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그를 포함한 12인을 위한 식사 대접을 하였다, 이는 매우 드믄 일이었다.     

그런데 1956년 1월 말이 되자 파리에서는 기 몰레 정권이 들어섰다. 아데나워 수상은 다시 한 달 동안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프랑스 총리 기 몰레는 사회주의자였고 외무장관인 크리스티앙 피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 몰레가 1956년 4월 3일 미국의 잡지인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 아데나워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몰레는 그 자리에서 유럽 안보와 군축 문제의 해결이 독일 문제의 해결보다 더 쉬울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래서 유럽 문제를 더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분노한 것은 유럽의 동과 서가 군축협상을 맺으면서 독일의 군사력을 완전히 재편해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피노는 몰레 총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련이 내세운 ‘공존’을 구체화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사실 이 사회주의 정치가의 인터뷰 내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파리만이 아니라 런던에서도 통제된 군축을 위한 계획을 수립 중이었다. 이에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이제 주권 국가가 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의 없이는 그 영토에 관한 간섭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간단명료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군축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독일은 이제 재무장하는 단계에 와있습니다.” 그나마 런던과 파리가 국내 정치적으로 미약한 기반과 국제정치적인 문제 해결에 힘이 부치는 상황에 당면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의 이해를 돌볼 여지가 없다는 것이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하는 일이었다. 1956년 초반 아데나워는 특히 영국에 대하여 매우 격노하였다. 영국이 독일에 군대 주둔 비용을 요구한 것만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독일 국군 전력 증강을 위한 재정 계획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런던은 영국-프랑스 군축 계획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는 군인의 숫자를 최대 65만 명으로 두고 나머지 유럽 국가의 군인은 각각 1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제한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그리되면 독일은 3류 군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연방 수상 휴양지에 자기 측근과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 말트찬을 소환하여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더 이상 미국도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물론 덜레스가 제네바회담에서 협상을 잠시 멈춘 때 독일 참관단에게 독일에 대한 자기의 진심을 전한 것이 아데나워의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다.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독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독일연방공화국 수상님을 무한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에 덧붙여 덜레스는 자르 지역의 국민투표와 관련된 지나친 민족주의적 정서를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56년 초반에 아데나워 수상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누구나 그가 매우 좌절하며 탄식하는 말만 들었을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외무장관인 피노가 가장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보였다. 그는 “동서 간의 중계자 역할”을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영국 외무장관 이든 또한 우유부단했다. 그가 진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바라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덜레스는 아데나워가 너무 세상 여기저기를 설치고 돌아다닌다고 비판하였다. 오래전부터 반공주의자로 알고 있던 미국 국무부의 차관인 머피조차도 이제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너무 유약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에게는 다시 한번 강대국들끼리 독일을 제물로 삼아 협상을 맺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피노와 몰레가 어느 정도 소련 측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동안 영국은 불가닌과 흐루쇼프를 환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걱정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독일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방 3대 강국은 이미 독일연방공화국에 군대 주둔 비용을 요청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는 독일에 재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 뻔했다.     

이 모든 것은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소련의 활동을 배경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흐루쇼프에 대하여 매우 커다란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다.  때로 아데나워에게는 흐루쇼프가 “제2의  스탈린”이 되는 데에 최선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에게는 독일연방공화국은 아직 국군을 지니지 못한 상태로 적과 미덥지 못한 친구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가 국무회의나 기민당(CDU) 당내 회의에서 외교적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하면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눈썹을 치켜뜨면서 “뭐 원래 늘 그랬던 거 아닌가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 외교 정책이 곤경에 봉착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느 정도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방의 3대 강국들은 단합이 매우 필요함에도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흔들리며 그저 소련의 공격에 대응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군비 통제 정책으로 군사적 부담을 더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미국은 존 포스터 덜레스가 제시한 방식대로 소련을 포위하는 정책과 군축 담당관이었던 해롤드 스타센이 추진하는 부분적인 화해 정책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물론 여론도 아데나워가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내부의 분위기에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민당(CDU)의 폰 브렌타노와 키싱거, 심지어 기사당(CSU)(CSU)조차도 노골적으로 사민당(SPD)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특히 화가 나게 된 것은 그의 외교 정책이 당면하게 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실 어느 정도는 국내적 요인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1955년 11월 초 뢴도르프에서 서서히 어느 정도의 기력을 회복하고 생각할 여유가 생기자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으로부터 매우 적나라한 상황 보고를 듣게 되었다. 곧 ‘현재 독일의 외교력이 매우 침체하여’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에서 외교 노선을 급격히 전환한 것이었다, 이는 실수였다. 어찌 되었든 외국이 독일을 불신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또한 자르 지역에서 국민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적 선전과 이에 관한 독일연방공화국의 호응이 있었다. 이것이 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불신을 가중한 또 하나의 원인은 독일 군대의 재무장이 매우 지연된 일이다.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지 이미 6개월이 지났음에도 독일 군대는 아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편재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총생산의 6% 이상을 방위비에 지출해야 한다는 점도 독일군 창설을 미루게 된 원인이기도 하였다. 끝으로는 아데나워가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수상 후계자에 관한 무익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상황도 문제가 되었다.     

1955년부터 1956년 사이에 아데나워 수상이 당면한 대부분의 어려움은 독일군 창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의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태도가 통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한 태도는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독일군 문제에 대하여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와 친분관계가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아데나워의 군부 고위 장교들에 관한 비판적인 언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군 지도부는 민주 국가에 대하여 불신의 태도를 보였다. 독일 군대의 총사령관들이 히틀러에게 굴복한 사실도 아데나워의 군대에 관한 불신을 극복하는 데에 불리한 것이었다. 야콥 카이저는 아데나워가 1936년 했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본에 널리 퍼뜨리기도 하였다. ‘똑똑한 모습을 보이는 장군을 한 명이라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데나워 수상은 프로이센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봉건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군 지도부가 민간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계층에 속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시민계급 출신인 에리히 멘데와 같은 은퇴한 직업 군인조차 아데나워가 지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정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아데나워의 생각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의 젊은 방위 전문 정치가들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이들은 전방의 전투부대 장교나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고위 장성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생각을 지니게 된 이들이었다. 국방부의 직무 관료제를 바탕으로 하여 독일 연방의회가 군부에 관한 철저한 감시망을 수립하는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 수상은 절대적인 지지를 하게 되었다.           

독일 장군들의 지나친 자만이 아데나워가 유럽 군대 창설의 구상을 확고히 지지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1951년 기민당(CDU) 연방 당 대표단 앞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군의 창설은 장군들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한 것이다. “2,000명이나 되는 독일 장군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인물을 찾아 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그 당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된 아데나워 수상이 1954년 10월 워싱턴에서 밤이 새도록 독일 구시대의 프로이센 군대 계급이 되살아나는 것에 관한 근심을 토로한 이야기를 들었다. 덜레스는 이 자리에서 리지웨이 장군이 한 말을 전달하였다. 그는 덜레스에게 미국이 그러한 군부의 민간 통제 문제를 해결한 방법에 대하여 강연을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군부를 완전히 불신하는 진부한 생각에 빠져들 정도로 분별력이 없지는 않았다. 아데나워 측근에서 일해 본 군부 장교들은 아데나워가 군부의 전문적인 업적을 이룩한 것에 대하여 점차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58년 아데나워는 여단급 군부대의 전투지휘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 군대의 총사령관과 사령관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난 다음 호이싱거에서 솔직담백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이싱거 장관님.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나요?” 아데나워가 1950년대 초반부터 눈여겨 보아온 후일 총사령관이 된 드미지에르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했다. “아데나워는 평생 군대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보고 나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른바 ‘블랑크 사무소’에서 군부 담당 부장으로 일했던 아돌프 호이싱거는 1952년부터 아데나워 곁에서 군대 문제에 관한 최고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밑에서 국방부 공보관을 역임했던 게르트 슈뮈클레가 묘사한 바로는 호이싱거가 ‘부드러움, 신중함, 강인함이 조화를 이루고’, 본성적으로 모나리자의 미소를 늘 띠고 있으면서 평생의 경험으로 정치적 야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호이싱거를 잘 관찰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군부 장교들은 그에 대하여 조용하고, 강인하고 진실하며 과시욕이 없고 신중하며 불평하지 않으며 늘 외적인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호이싱거는 히틀러에게 저항하는 단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호이싱거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런 단체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였다. 호이싱거는 그런 단체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았기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호이싱거가 히틀러 시절에 군 정보부에서 근무하였고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히틀러 암살 폭탄 거사 때 그 상황을 상부에 보고한 일도 아데나워에게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데나워는 실무적 자질이 있는 장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중요한 군사 정책적 결정을 내릴 때 호이싱거를 배제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호이싱거와 같은 전후 시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미국의 신뢰를 얻어낸 인물을 군사 문제 자문으로 두게 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아데나워가 그 판단력을 높이 산 한스 슈파이델은 정치적 색채가 있던 인물이었다. 곧 그는 외향적이고 외교적이며 남 앞에서 말하기를 즐기며 미국 지향적인 호이싱거와는 달리 프랑스와 여러 모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1957년 퐁텐블뤼궁에서 ‘유럽 중부’(Europa Mitte)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독일연방공화국이 프랑스와 동등한 국격을 지니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그는 본에서 이루어지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몇 년 후에 슈파이델은 아데나워가 독일 장군들을 명분이나 이념과 무관하게 매우 실용적으로 다루는 것의 좋은 예가 되었다. 드골이 보기에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난 지 13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B군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독일군부 인물이 프랑스 땅에서 커다란 부서를 통솔한다는 것이 과거의 프랑스에 아픈 상처를 노골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슈파이델이 롬멜 사령관의 침공을 전후한 중요한 시기에 장교들의 히틀러에 맞선 반란에 실제로 참여하였고 천운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드골이 슈파이델을 사령부에서 단호히 내쫓으려고 하자, 아데나워는 슈파이델이 매우 실망할 것이 확실함에도 과거 자기 자문이었던 이 인물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의 군부에 관한 태도는 매우 냉정하였다. 특히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독일군 창설 문제로 아데나워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서 더욱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군부와 군부를 담당하고 있는 블랑크 장관에게는 아데나워 수상이 1954년 겨울부터 독일 국군 창설을 노골적으로 밀어 붙이는 데 따르는 위험과 필수 조건을 언급한 것이 그리 큰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서방 연합국들에 솔직히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6년 가을 진실을 더 이상 감추기 힘들어지자 아데나워는 무력한 장관을 희생 제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도 호이싱거와 슈파이델은 논란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고도 아데나워는 군대에 대하여 복잡하게 얽힌 태도를 취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이념적 평화주의에도 반대했지만, 프로이센 정신에 물든 군부 장성들에 관한 시민적 불신도 그에 못지않게 가득했었다. 아데나워는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시대 이후로 많은 양심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들을 경험해보았기에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오로지 군사력이라는 틀에 갇혀 사고하는 장성들만큼이나 멍청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군부 장성이라고 하는 독일 황제 시절의 후예들은 국가가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지녀야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었다. 곧 그들에게 “군사력이 없는 국가는 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군부를 연맹 정책 차원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국가가 강할수록 연맹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그래야만 상대방의 존중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를 이러한 순전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더불어 아데나워는 전쟁이 발발할 때 군대가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매우 고전적인 확신도 지니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많은 발언과 개별 조치를 살펴보면 그가 국가 방위에 대해서 매우 고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데나워가 독일 국군을 위한 전략 핵무기 배치에 대하여 긍정적이었던 데에는 원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전략 핵무기는 동유럽 블록에게 위협을 가할 뿐 아니라 전쟁이 발발할 때 전선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단순히 권력을 위한 이성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독일 황제 시대의 사회화 여파가 남아 있고 1936년부터 1945년의 나치 시대의 경험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의미에서 쾨닉스그라츠의 전쟁 영웅의 후손으로서 군대막사와 훈련소가 있던 쾰른에서 성장한 아데나워에게는 군대가 학교, 병원, 감옥, 또는 법원만큼이나 삶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는 1949년 쾨니히 박물관 발치에서 샤움부르크궁까지 아데나워를 호위했던 전직 총사령관이며 대사였던 롤프 푸울스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직 벨기에 장군이 거주하던 함머슈미트빌라 앞에는 2인의 보초병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데나워 독일연방 수상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들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파울스도 들었다. “우리도 저것이 필요해.”     

다른 사람들이 나비나 우표를 수집하듯 아데나워의 어록과 ‘금언’을 수집한 발터 행켈스는 아데나워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나는 군인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쾰른 도이츠 지역에서 개최된 사격대회에 참가하여 총을 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과녁을 그 정도로 빗나가게 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다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평생 군인인 적이 없었음을 풍자적으로 말하던 수상이 1955년부터는 군악대가 있고 멋진 무기를 보유하며 필요할 때는 공격적으로 나올 수 있는 독일 ‘국군’을 제대로 창설해보고자 한 것이다. 독일군 사령부인 본의 ‘에르메카일 부대’(Ermekeil-Kaserne)에  있던 개혁가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군대가 국기에 관한 맹세를 해야 하고 단순히 형식적으로 국방 의무제 차원에만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55년 11월에 국방 의무제로 시작된 독일군은 아데나워가 보기에 전혀 위엄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테오 블랑크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귀하에게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독일군 창설식에서 모든 군인이 제복을 입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식을 마칠 때 독일 국가를 연주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안더나흐에 주둔한 독일의 첫 훈련 대대가 아직 사열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시기인 1956년 1월에 이 부대를 방문한 것이다. 게르트 슈뮈클레는 이 유명한 아데나워의 사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은 매우 추웠고 하늘을 음침했다. 라인강 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독일 국기는 돗대에 걸린 젖은 걸레처럼 보였다. 군인들의 먼지 뭍은 회색 군복은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더욱 우중충하게 만들었다. 하객들은 침울해 보였다. 마치 그들은 아이의 세례식이 아니라 장례식에 온 손님 같았다.” 그런데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대리석처럼 차갑게 자기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연설을 시작하면서 그는 매우 밝아 보이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5년 만에 그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분명히 이 행사를 포함한 여러 경우에 공개적으로 군사력을 인정한 것은 독일군의 존재를 여론에 각인시키기 위한 상징 조작 정치에 속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군대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시각이었다. 1955년과 1956년에 아데나워는 독일군 창설 문제를 뜻한 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연합정권을 형성한 여당을 계속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 여당은 자기 지원 입대 계획을 무력화시키고자 하였고, 국방법 제정에 진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국방법에 관한 논의도 지지부 하였고, 그의 생각에 사민당(SPD)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이 ‘기만’, ‘실망’,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창설 구상이 필요하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아무런 생각 없이 포기한다면 아데나워답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년에 걸쳐 정부, 모든 전문가, 심지어 기민당(CDU)까지 최소 18개월의 의무복무 연한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7년 4월 1일부터 청년들에게 18개월의 의무복무 연한을 부여하여 매우 부실한 군대 막사로 밀어 넣으면 유권자들이 어찌 생각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장기복무자의 숫자를 늘리고 18개월 의무복무 기간 구상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6년 9월 14일 외무부 수장들을 샤움베르크궁으로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회의를 시작하였다. “기민당(CDU)이 선거에 이기면 의무 복무 기간을 12개월로 할 것이고, 사민당(SPD)이 이기면 의무 복무제 자체가 없어질 것입니다.” 군사적, 조직적, 연방정책적 이유로도 아데나워의 결심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에 그는 노련한 권모술수를 발휘하여 기민당(CDU) 대표가 12개월 의무 복무제를 관철하는 것을 막았다. 그의 주장으로는 군부의 장성들이 이 일을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런 것이 싫습니다. 이는 평범한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이에 관련된 것이기에 당대표가 아니라 군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군부’는 아데나워가 무슨 속셈인지 잘 몰랐다. 결정이 내려지기 며칠 전에 그 당시 대령이었던 울리히 드미지에르는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업무일지에 적었다. “수상은 18개월 의무 복무제를 포기하라는 기민당(CDU)의 압력을 받을 것이다. 그는 원칙적으로 자기 뜻을 굽힐 것이다. 금요일에 수상은 주요 장성들에게 지시할 것이다. 그 책임이 장군들에게 전가될 것 같아 두렵다.”      

아데나워가 군대 정책을 다루는 방식이 처음부터 독일의 장군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서방 국가의 정부들은 이미 자국의 민간과 군부 수장들을 일찍 샤움베르크궁으로 보내어 독일 연방정부 수상이 그들의 뜻을 따르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국방부를 방문한 주요 인사들 가운데 아데나워 수상을 방문하여 식사를 같이하지 않은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한 이들의 방문에 앞서 국방전문가들의 조언을 미리 받는 것을 아데나워 수상은 매우 즐겼다. 그는 독일 국방부에서 돌아가는 사정이 어떤지를 분명히 알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군사 정책이 현대 외교에서 핵심 분야에 속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도 자신이 주도권을 잡겠다고 확실히 다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서방의 모든 주요 장성과 긴 대화를 나누며 친교를 나누게 된 것이다. 미군 참모총장 매튜 리지웨이, 친독일파로 분류되며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유럽 최고 연합사령관(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 SACEUR)으로 근무한 알프레드 그륀터, 그의 후계자이며 군사 전문 관료로서 아데나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정치적 판단력은 늘 그렇지만은 않았던 로리스 노스태드가 있었다. 또한 슈파이델의 전임자로 LANDCENT에서 근무한 장 에티엔 발뤼, 그리고 이미 본에서도 정치적으로 좌충우돌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몽고메리 야전사령관도 그와 친분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업무를 수행하면서 군사 정책과 관련하여 받은 조언의 폭은 놀라운 정도이다.     

그래서 독일 장성들의 의견에만 집중하는 것을 처음부터 아데나워는 피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낯설었던 이 분야에서도 그의 놀라운 관심을 발휘하여 다양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몽고메리, 노스태드, 또는 맥스월 타일러의 견해에 관한 아데나워의 냉정한 판단은 그의 장성들에 관한 비판이 서방 연합국 군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접촉으로 아데나워는 초기에 블랑크의 독일군 창설 계획으로 국방 정책에서 저질렀던 결정적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군부만이 자신을 처음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아데나워 수상도 처음부터 다자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선언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안보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955년과 1956년은 그가 군대 문제에 관련하여 배우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1957년부터 사람들은 이제 아데나워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자민당(FDP)과의 결별     


1956년에 그 정점에 이른 어려운 문제는 이미 1955년 상반기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다. 이미 1955년 초에 아데나워는 연정을 통해서만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타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 군사 정책과 유럽 정책은 여기에서 점점 더 서로 떼어 놓을 수가 없는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적으로 자민당(FDP)을 굴복시켜야만 다시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필요한 경우에는 연정 파트너와 결별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고 여겼다. 사단은 이미 1955년 2월 말에 시작되었다. 1955년 3월 9일 토마스 델러는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 따르면 델러는 2월 28일 연정 파트너들과의 협상에 이어서 폰 브렌타노, 크로네, 글롭케, 블랑켄호른을 포함한 그와 친한 협력자들과 자민당(FDP) 문제를 논의하였다. 여기에서도 자민당(FDP)은 배제되었다. 이 대화에서 델러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3월 1일 자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히 나와 있다. “아데나워 박사는 이제 자민당(FDP)을 각료진에서 배제할 뿐만 아니라 자민당(FDP)이 더 이상 정당으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목표를 추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자민당(FDP)이 더 이상 정당으로 존립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아데나워 수상의 뜻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를 위해 (소문에 따르면 130만 마르크 정도의) 매우 많은 액수의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미 이른바 ‘예방주사를 맞은’ 자민당(FDP) 지방 단체들이 연방 차원의 연합체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델러는 그 정보의 소스를 전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 15일 글롭케는 델러에게 3월 9일 국무회의에서 이미 정해진 의제 이외에 다음과 같은 내용도 다루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곧 ‘아데나워 수상이 측근들, 특히 블랑켄호른, 폰 에크하르트, 페르드멩게스, 압스 그리고 저(글롭케)와 나눈 대화를 담았다고 하는 일련의 위조된 문서들이 지금 시중에 떠돌고 있습니다. 이 위조 문서에는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조리 날조된 것입니다.’ 글롭케는 이 글에 발췌 언급된 델러에게 전달된 3월 1일자 문서도 ‘이러한 위조 문서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문서가 신뢰 할 수 없는 경로로 전달된 경우 누구에게 받은 것인지를 알려주어 ‘위조에 관한 조사를 쉽게 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델러는 더 이상 응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날짜에 아데나워에게 보낸 서한과 그 이후의 서간에서 그는 이 대화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이는 자민당(FDP)을 말살시키고자 하던 아데나워 수상의 의도에 관하여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제 자기 당 동료인 슈나이더와 오일러의 말에 따르자면 아데나워 수상이 그와 ‘더 이상의 진지한 연정 협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러한 불만을 3월 7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정 대표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이에 즉각 반응하며 단 하루 만에 여당 대표단에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제가 슈나이더 박사님과 오일러 씨에게 그 안에서 언급된 전문 보냈다는 사실을 솔직히 전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① 델러는 2월 27일 독일 연방의회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아데나워가 공동의 독일 외교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발언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② 자민당(FDP) 내부의 특정 집단이 아데나워가 자르 조약에 서명하여 연정 대표들이 파리에서 협상을 통하여 얻어낸 합의를 파기했고 아데나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한 것이다.      

델러는 그러한 비난을 반박하며 아데나워 수상의 발언이 ‘의도적인 비난’으로 여겨진다고 하면서 그와 더 이상 ‘아무런 진지한 대화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데나워가 지적한 두 가지 근거는 자기 태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기 당의 지지는 받고 있었다.이에 아데나워는 3월 17일자 답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정 내부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귀하께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저와 격의 없이 논의하셔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관한 해명을 하였다. “제가 귀하를 개인적으로 공격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1954년 10월 23일 오전 11시에 당대표진에게 협상의 진행 상황에 대하여 보고하고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곧 그날 오후 자르규정에 서명할 예정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저는 저의 근본적인 생각을 다시 한번 제시하였습니다. 저는 결코 귀하가 바라시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규정의 내용은 우리가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의 동료의원인 게르스텐마이어가 일종의 용어규정에 합의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조약 ‘종이 쪼가리’는 연정 정당들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며 귀하여 협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당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확고한 입장의 포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자기 입장을 완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특히 그로부터 며칠 후에 델러가 올덴부르크 당대회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입장을 피력한 다음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곧 그는 아데나워가 “독일 외교 정책을 독일 국민 전체의 공동 과제로 삼는 것에 실패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4월 7일 편지에서 이에 간결하고도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러한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난은 제가 지금껏 들은 것 가운데 가장 심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자르 지역문제는 아데나워와 델러 모두에게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이후 몇 달 동안에도 자민당(FDP) 원내대표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자민당(FDP)의 악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이제 다시 독일 정책에 관한 견해차가 급속하게 노골화되었다. 6일 연정 회담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토마스 델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정부와 여당의 공동 외교 정책 노선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야당의 주장에 기대어 독일 정책에 관한 독자적인 길을 걷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자 델러는 아데나워가 책임 있는 국가수반으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적하였다. 곧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의 조건, 전체 독일을 위한 규정, 앞으로 독일이 동유럽과 소련과 맺어야 할 관계, 독일이 서방와 더불어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기꺼이 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양보 조건에 관한 개념을 수립해야 합니다. ... 독일연방공화국이 아무런 구체적인 복안도 없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협상을 맺으러 간다는 생각은” 그에게 “거의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6개월 후에 델러는 동일한 어조로 ‘제네바회담에 참가한 독일 참관단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독일 통일에 관하여 그 회담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본과 모스크바가 직접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다른 측면에서도 이제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유화’라고 불렀다. 내각의 차관 아르놀트의 직무대리인 프리드리히 미델하우베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직접 혐상을 주장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도 주장하고 나섰다.     

아데나워 수상은 과거 자민당(FDP) 내부에서 아데나워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우구스트-마르틴 오일러가 이제 자기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안보 계획을 마련하는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독일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고 강력한 군비 확대를 통하여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무장 중립 지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제시하였다. 곧 독일 통일 이후 구 동부 지역,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관통하는 지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11월 23일이 되어서야 오일러는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외교 정책 분야에서 자민당(FDP)만의 별도의 조처를 하지 않을 것이며 외교와 관련된 조치는 ‘반드시 외교 노선에 관한 여당 내부의 공동 논의로 정해진 노선을 따르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또한 비록 외교 정책에 관하여 아데나워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약간은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오일러는 이 서한에서 독일 통일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대가로 집단 안보 체계의 수상을 다시 들고나왔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구상은 결국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게 되어 어쩌면 서방과의 유대라는 체계의 붕괴도 가져올지도 모를일 아니던가?      

이렇게 사람들이 아데나워에게 동방 정책에서 매우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자기 유럽 정책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1955년 6월 광산연합의 6개 회원국의  외무장관들은 메시나회담에서 경제공동체의 구성과 핵무기 풀 체계의 추진에 합의하였다. 여기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결국 각각 유럽경제공동체(EEC)(EWG)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자유 민주주의 통신》(Freie Demokratische Korrespondenz)은 이러한 상황에 반대하였다. 곧 제네바회담에서 참가국들이 독일의 통일은 반대한 것에 실망했다고 해서 ‘유럽 사업’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이다.     

이제와서 회고해 보자면 자민당(FDP)의 그러한 견해 표명은 중요한 사건의 단초를 알린 것이기는 하다. 곧 자민당(FDP)이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반대한 것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는 나중에 자민당(FDP)이 동독과 관련한 체제 ‘인정 정당’으로 발전하고, ‘모스크바와의 대화’라는 자민당(FDP)의 커다란 어젠다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 보다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된다. 10월 29일 글롭케는 아데나워에게 《슈피겔》의 출판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토마스 델러가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슈피겔 출판사가 아우크슈타인을 편집인으로 하여 자민당(FDP)의 새로운 주간지를 발행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차이트》의 리하르트 튕겔은 이 주간지의 편집장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파울 세테는 이 주간지의 청치평론가로 활동할 의사를 비쳤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의 자민당(FDP) 소속 정치가인 루빈과 아헨바흐, 그리고 어쩌면 나치 시절 대사를 역임하였고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의 코카콜라 회사의 대표로 있는 란이 이 사업을 위하여 200만 마르크의 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보였다.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에는 발터 쉐스도 있었다. 그는 당시에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자민당(FDP) 지방당의 재무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미델하우베, 루빈, 되링은 아우크슈타인과 《슈피겔》과 접촉하여 아데나워를 상대로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는 델러가 전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되링은 주간지인 《제국》에 버금가는 커다란 자유주의 주간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에 관한 보상으로 그사이 자민당(FDP) 당원으로 가입한 아우크슈타인은 차기 총선에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선거구의 당선 가능자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모든 것에 관한 보고서가 아데나워의 뢴도르프 사저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아직 건강이 안 좋아서 아데나워는 라인탈 너머로 11월의 안개가 낀 전망이 보이는 이 집에 머물면서 자기 외교 정책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릴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델러와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자민당(FDP) 지방당 연합에서 좌파 자유주의 언론을 등에 업고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외교 정책에 맞선 전선이 형성되어 왔다고 확신하였다.     

이리하여 토마스 델러에게 보낸 3장짜리 편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편지는 ‘아데나워와 델러 간의 위기’를 ‘아데나워와 자민당(FDP) 간의 위기’로 키워 사달을 일으켜서 연정의 균열을 가져온 것이라는 의심이 확실히 들게 한다. 이 서한은 자민당(FDP) 원내대표로서의 델러에게 보낸 것으로 자민당(FDP)에 최후 통첩을 한 것이다. 곧 12월 1일과 2일에 있을 독일 연방의회 전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사안의 결론을 내자고 하였다. ‘연방의회의 자민당(FDP)이 여전히 아무런 수정을 하지 않은 파리 조약을 지지하는가?’ ‘아무런 수정을 하지 않은 것’을 강조한 이유는 아데나워가 이제 연정의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독일을 위해서는 독일 연방의회의 토론에서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확고한 단합을 이룬 여당이 실제로 연정을 이루지 못한 연장을 꾸려가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민당(FDP)은 이에 동요되지 않았다. 자민당(FDP)은 ‘연정 합의 초안’을 작성한 것이다. 이 초안은 정부의 외교 정책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3차 연정 논의 때 협상 테이블에 올릴 예정이었다. 이 초안에서 자민당(FDP)은 연방정부 수상이 주재하는 제1기 연방의회에서 통상적으로 이루어진 연정 논의가 “즉각 다시 이루어져야 하고 3주일 동안 진행되는 연방의회 전체 회의 회기에 최소한 한 차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늘 진중하고 소란을 혐오하는 폰 브렌타노는 자민당(FDP) 지도부와 즉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동의하고 자민당(FDP)의 바람직한 약속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전혀 화해가 아니라 델러와 공개적으로 갈라서는 것을 선호하던 아데나워는 힘찬 필치로 써 내려간 서한에서 이 외무장관에게 그러한 자기 의사를 넌지시 전달하였다. 그런데 폰 브렌타노의 이러한 부적절한 처신으로 델러가 사임하지 않아도 되는 빌미가 제공되었다. 이 서한에는 아데나워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곧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내에서 델러를 무력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마침내 3개월 후인 12월 6, 7일에 다시 이루어지게 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자민당(FDP), 독일당(DP) 간의 연정 논의에서도 똑같은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 논의는 아데나워 수상의 도발적인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 발언에 대하여 델러는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델러는 나중에 이를 땅을 치고 후회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논의에서 속기사 두 명이 대화를 기록하고 추가로 녹음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또한 논의에 참석한 이들은 각자 발언록을 받아 가도록 하자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델러가 며칠 후에 발언록을 요청하자 글롭케는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고는 그 발언록을 복사하려면 먼저 아데나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델러는 결국 발언록과 녹음 기록의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1965년이 되어서야 아데나워와 델러는 서로 화해하며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당시 자민당(FDP) 측에서 기록관으로 참석했던 에리히 멘데는 이러한 아데나워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곧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의 소청에 대하여 ‘마치 검찰총장’처럼 대응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토마스 델러가 이미 합의한 외교 정책에 관한 내용에서 벗어난 모든 발언을 거론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그 당시 이른바 ‘수상 민주주의’(Kanzlerdemokratie)의 정점에 서서 연정 참여 정당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한 언급이 이 140면에 달하는 문서만큼 많이 담겨있지는 않다. 델러는 약 20명이 참가한 이 자리에서 마치 동유럽에서나 벌어지는 모의재판에 나온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델러는 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또한 회의 석상을 박차고 나가지도 않았다. 사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는 첫 대담에서 얼어있었고, 아데나워의 공격을 계속 받았다. 그다음 날 오전에 이어진 대담에서 그는 수세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당내에서 매우 커다란 치명타를 입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민당(FDP) 측에서도 델러를 지원하는 세력이 쭈뼛거렸다는 사실이다. 아데나워, 슈튀켈른, 크로네는 자민당(FDP)의 당대표가 더 이상 공동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는 언급이나 인터뷰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에리히 멘데는 한편으로는 토마스 델러를 옹호했지만, 그 어떤 이도 외부에서 한 정당에 대하여 ‘개인적 보장’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1월 10일 자민당(FDP)에서 원내대표와 직무대행을 선출하는 비밀 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그러나 ‘실질적 보장’에 관하여서는 서면으로 된 연정 합의를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겉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전설이 되어버린 이 대담에서 개인적인 보장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아데나워의 협상 스타일로 보자면 한 가지 결론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델러가 심판대에 올라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히기를 바란 것이다. 아데나워는 연정 붕괴를 들고나와 자민당(FDP)이 원내대표를 물러나게 하도록 강요하고자 한 것이다. 1월에 곧 이루어질 당 대표진에 관한 새 선거에서 연정의 노선에 충실할 것을 보장할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그런 인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경제 자유주의자인 한스 벨하우젠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델러가 공개적으로 먼저 자민당(FDP) 원내대표에서 물러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당대표도 그만둘 것으로도 보였다. 이것이 아데나워의 심중이었다.     

처음에는 계산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델러는 확실히 흔들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데나워가 그를 그렇게 심하게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CDU)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곧 기민당(CDU)은 자민당(FDP)에 압박을 가하여 12월 14일 독일 연방의회의 선거법 특별회의에서 새로운 총선법 개정안을 제출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이를 위하여 기민당(CDU)에 어떤 압력을 얼마나 가했는지는 알기 힘들다. 잘 알려진 대로 기민당(CDU)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크로네는 자민당(FDP) 사람들을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이 일을 밀고 나간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유명한 ‘무덤선거제도’*를 고안한 휴고 샤른베르크는 기민당(CDU) 대표단 앞에서 강조하여 말한 대로 크로네와 충분히 의견을 교화한 다음에 이 법안을 제출하였다.     

* ‘무덤선거제도’ [Grabenwahlsystem, 역자주 – 1인 2표제, 일종의 혼합선거제도로 단일 의회에 2회의 개별 선거를 치르는 방식. 대한민국에서는 17대 총선에 도입하여 지역구 의원과 지지 정당을 별개로 선택함.]     

그런데 아데나워는 선거법과 관련된 후유증이 드러나자마자 선거법 문제를 가지고 도박을 한 책임을 여당에 전가하였다. 그러나 크로네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아데나워의 승인 없이 추진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때까지 논쟁은 델러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되었고 특히 외교 정책 분야에만 한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논란이 되는 분야와 관련하여 그 당시 자유주의적인 여론은 막강한 기민당(CDU)의 세력에 눌려 있는 자민당(FDP)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선거법 문제에서의 견해 차이는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관계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다. 1955년 10월 10일 연정 협상 이후 자민당(FDP)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측이 이전에 이미 400개의 선거구에 상대적 소선거구제*가 거부되고 나서 새로운 선거법 법안을 마련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상대적 소선거구제 [relative Mehrheitswahlrecht, 역자주 - 선거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방법.]     

제1기 독일 연방의회에서 선거법이 논의될 때 이미 자민당(FDP)은 함부르크 은행장으로 근무하며 은행가다운 면모를 보여준 (함부르크 출신 기민당(CDU) 의원으로 선거법위원장을역임한) 휴고 샤른베르크를 경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그는 통상적으로는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가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치고나갔던 것이다. 샤른베르크는 이제 비례대표제와 상대적 다수대표제를 절충한 안을 만들고자 하였다. ‘1인 2표제’의 기본 구상은 간단했다. 곧 기존의 비례대표자 후보 명부는 유지하되 지역구에서 승리한 후보자라도 비례대표자 후보 명단에서 삭제하자는 말이었다. 샤른베르크가 1956년 1월 13일 기민당(CDU) 대표단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선거를 치르면 1953년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곧 사민당(SPD), 추방민당(BHE), 자민당(FDP)은 각각 27석, 13석, 10석의 의석을 잃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약 50석의 의석을 더 확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렇다고 자민당(FDP)이 패닉에 빠질 이유는 없어 보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결국 이미 자민당(FDP)이 수용할 수 없는 선거법을 제안했다가 철회해 온 터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이번에는 독일당(DP)의 도움으로 이 선거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 고문 도구가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1월 10일 자민당(FDP) 중앙당은 1인 2표제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델러는 다시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27표를 얻었고 한스 벨하우젠은 22표를 얻었다. 1월 중순의 대표단 회의에서 기민당(CDU)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어렴풋하게 깨닫기 시작하였다. 자민당(FDP)과 긴밀한 접촉을 해온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옳았다. “선거법을 상정하기 전까지는 자민당(FDP)에서 벨하우젠이 우세를 차지하였다. 29표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현재 델러를 지지하는 24명은 모두 다른 사람을 지지하겠다고 했던 이들이다. 선거법 개정안이 상정되자 이들이 모두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이전부터 델러는 자민당(FDP) 지방당의 지지 세력을 동원해왔다. 그는 중앙당보다 지방당에 지지 세력이 많았다. 아데나워는 ‘1인 2표제’를 밀고 나가면 자민당(FDP)이 주 차원에서 기민당(CDU)과의 연정을 파기할 것이라는 정도의 경고만을 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6개 주에서 자민당(FDP)이 연정을 떠날 것으로 보였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트-팔츠, 바덴-뷔르템베르크, 니더작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와 함부르크 시가 여기에 속했다. 그렇다고 모든 주에서 자민당(FDP)이 사민당(SPD)과 추방민당(BHE)의 좌파 세력과 연정을 구성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그러나 기존의 ‘시민 연정’이 완전히 와해될 위험이 대두되었다.     

아데나워는 1월 5일과 6일 자기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거행하면서 이미 그 자신이 매우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델러가 살아났고 자민당(FDP)은 이제 연방 차원에서 아데나워에게 맞서 세력을 동원하였다. 여기에 언론도 등에 업고 있었다. 1월 13일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이미 선거법 문제와 관련하여 최대한 신속하게 적절히 후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제 자민당(FDP)이 내부적으로 분열되기를 바랐다. 다만 선거법에 관련된 문제를 양보할 때 기민당(CDU)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았다.     

결국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민당(FDP)을 강력하게 공격하던 크로네는 2월 1일 힘든 협상 끝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거법에 관련된 새로운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다. 델러가 승리하였다. 새 선거법은 이제 없다.”      

그래서 테오도를 호이쓰가 이제야 연정을 구하기 위하여 아데나워와 블뤼허 편에 선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원칙적으로 호이쓰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델러의 변덕과 아부가 어찌 될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는 나치 시절의 자민당(FDP)이 사민당(SPD)과 중앙당(Zentrum)과 힘을 합쳐 기민당(CDU)의 아르놀트를 몰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르놀트 밑에는 뛰어난 (개신교) 문화부 장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일군의 이 인물들은 마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방에서도 아데나워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뒤셀도르프 자민당(FDP)의 ‘민족주의’ 파벌은 이제 1957년 총선에 대비하여 그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는 아데나워가 간파하여 공공연히 비난해 왔던 파벌이었다. 1956년 2월 21일 칼 아르놀트 주지사 정부가 무너지고 사민당(SPD), 자민당(FDP), 중앙당 연정이 수립되고 프리츠 슈타인호프가 주지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무엇보다 독일당(DP)의 하인리히 헬베게의 지원 덕분에 아데나워는 하노버의 연정 정부가 붕괴되는 것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자민당(FDP)의 분열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델러가 재선된 이후로 사실 자민당(FDP)이 분열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돌아갔다. 여당에 머물 자민당(FDP) 의원은 52명 가운데 16명에 불과하였다. 그 가운데 4명은 장관으로 있는 인물들이었다. 자민당(FDP) 의원들은 2월 23일 자민당(FDP) 원내회의에서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델러는 자민당(FDP) 당수직을 고수하면서 자민당(FDP)의 원내 의석도 고수하였다. 2월 24일 원내에 남아 있는 자민당(FDP) 당원들은 야당이 되기로 결의하였다. 자민당(FDP) 지방당들도 탈퇴 반대파가 득세하였다. 아데나워 내각에 있는 4명의 장관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들 가운데 주택건설부 장관 빅토르 에마누엘 프로이스커를 제외하고 모두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정치가로 여겼다. 언론에서도 그들은 정부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그들은 자리에 너무 연연한다고 계속 비판을 받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2월 21일 자기 말을 잘 듣는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뒤셀도르프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차기 총선에서 다수대표제 이외의 다른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크로네는 이에 한 마디 덧붙였다. “방법을 찾는 데에서 그는 결코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아데나워는 며칠 후에 그의 이러한 까다롭지 않게 구는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평소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였다. 곧 그는 갑자기 토마스 델러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태세를 보인 것이다.     

2월 28일 본의 언론인들과 자민당(FDP) 소속 전임 시장이었던 오토 슈마허-헬몰트는 델러가 ‘완전한 물갈이’를 바란다고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델러와 슈마허-헬몰트는 서로 친하였다. 슈마허-헬몰트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가 지적한 델러의 ‘변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슈마허-헬몰트는 델러에게 한번 해보라고 충고하였다. 아데나워도 슈마허-헬몰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연정의 협력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내세웠다. 곧 “자민당(FDP) 원내 구성원에서 떠난 이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자민당(FDP)의 분열된 두 파벌이 다시 합칠 것”, 델러의 인신공격을 철회할 것, 또한 뒤셀도르프의 정권을 교체 이전 상태로 복귀시킬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데나워가 느닷없이 분열보다는 다시 통합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슈마허-헬몰트는 내각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자민당(FDP)이 다시 합치더라도 현재 대립하고 있는 당내의 두 파벌에서 각각 2명씩 장관을 임명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델러도 ‘입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슈마허-헬몰트가 이리 말한 것은 델러가 부수상으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에 신중한 자세를 취했지만,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사실 델러를 법무장관에 다시 임명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기회에 슈마허-헬몰트가 장관 자리 가운데 하나는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교통부 장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슈마허-헬몰트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현직 교통부 장관인 세봄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지지 세력을 잃게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민당(FDP) 당대표는 이미 자기 사무실에서 2월 29일 정오 무렵의 사전 협의가 잘 마무리 되면 아데나워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태를 최종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슈마허-헬몰트와 전화 통화를 하는 데 막스 베커(Max Becker)가 옆에 있으면서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는 화를 벌컥 내면서 결국 전체적인 합의를 위한 대화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곧 이어서 델러는 다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선거전에 뛰어 들었다.     

중재를 위한 노력이 좌절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세력의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골칫거리가 뒤셀도르프였다. 델러 자신은 모든 것을 감내하고라도 연정에 머물고자 했지만, 신진세대인 바이어, 되링, 쉘을 설득하여 아르놀트를 다시 주지사 자리에 올려놓게 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정부를 재구성한 다음 그런 체면 구기는 일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자민당(FDP)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이런 소란 끝에 만약 델러가 부수상 겸 법무장관으로 입각하면 어떤 사달이 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민당(FDP)을 탈당한 이들이 모인 자유국민당(FVP) 또한 이미 건넌 루비콘강을  다시 건너는 것을 주저하게 될 일이었다. 일주일 후 부수상인 블뤼허가 슈마허-헬몰트에게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되자 당연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 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사실 아데나워도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당분간 충족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손실이었다. 처음부터 자민당(FDP)은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그와 주로 대립하는 유력 정치가들에 대하여 매우 노골적인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민당(FDP)은 아데나워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비록 경탄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자민당(FDP) 당대표가 된 에리히 멘데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난 ‘1인 2표제’ 제안이 실패로 끝나고 이어서 연정이 붕괴되자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에 관한 적대감 더 나아가 증오가 이제는 대세가 되었다. 비록 자민당(FDP)이 연방 대통령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지원을 받은 에리히 멘데가 이끄는 자민당(FDP)이 1960년부터 다시 기민당(CDU)과 연정을 맺게 되었지만 ‘권력자 아데나워’에 관한 깊은 불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델러는 1955년 12월 7일의 격정적인 연정 회담에서 아데나워가 ‘르네상스 시대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비난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아데나워에 관한 이러한 시각은 자민당(FDP) 내부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외교 정책에 관한 갈등이 일어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자민당(FDP)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충실하고, 친군부적이며 몇 년이 지나자 유럽 통합에 긍정적이었음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민당(FDP)은 동방 정책에서 정부 안팎으로 실험적, 비정통적, 도발적인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자민당(FDP)은 아데나워를 독일 통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확고한 반공주의의 대표자로 여기게 되었다.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의 프레드 루흐싱거가 말한 대로 연정 붕괴가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내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정치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계속 자기 방식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건으로 시민 세력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고 1960년대에 결국 정계에 나서게 될 확실한 힘을 얻게 되었다.  

   

연정에 관한 추측과 내각의 갈등     


1956년의 아데나워 정권은 1961년 10월 이후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연정을 맺을 기회를 얻게 된 것처럼 보였다. 아데나워는 1957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일단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먼저 외교 정책에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찬성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이 대연정을 이루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1956년 여름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자민당(FDP), 독일당(DP)이 다시 연정을 구성하는 시나리오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원내대표인 크로네가 1956년 초부터 대연정의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하였다. 2월 1일 실망한 아데나워는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델러가 이겼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붙였다.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 화해보다 더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사민당(SPD)과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의 접근 실험은 국복무 문제에 관한 기본법 개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법은 독일 연방의회의 3월 6일 표결에서 사민당(SPD)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월에만 해도 아데나워는 연방 대통령과의 정례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확언했었다. “사민당(SPD) 위원의 대다수는 중립적이고 평화주의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연방의회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에를러와 더불어 헌법 개정에 동의하는 의원은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실제로 1955년 초여름부터 연방의회 국방위원회에서는 사민당(SPD)의 프리츠 에를러와 기민당(CDU) 의원인 리하르트 예거가 군복무 문제에 관하여 대연정의 실마리를 마련해 왔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일을 멀리서 낯설게 여기며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아데나워는 국제적 상황이 불안한 것을 고려하여 서둘러 모병제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하고 전문가 양성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당이 생각하는 민간인의 확실한 군대 통제를 위한 모든 여건을 사전에 마련하자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아데나워는 다만 최대한 신속하게 독일 국군을 창설하기를 바랐다. 아데나워는 이미 1955년 9월 말 기민당(CDU) 대표단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1개 사단을 배치할 수 있다면 모스크바와 세계에서의 독일의 위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아데나워는 매우 초조해졌다. 독일군의 창설이 미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 측의 불신이 커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민당(SPD)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그에게는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데나워가 보기에 사민당(SPD)이 최소한 기존 해오던 대로 국방법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고 있던 통수권자 문제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의 타협안이 연정 정치의 지형에서 볼 때 그에게 매우 흡족한 수준이었다. 자민당(FDP)은 처음부터 군 통수권을 연방 대통령에게 부여하고자 하였다. 대통령 호이쓰 또한 이 의견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제 연정이 붕괴된 상황에서 자민당(FDP)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사민당(SPD)은 군담당관을 임명하고 국방위원회가 군대 문제 조사위원회를 운영할 권리를 지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사민당(SPD)은 국방장관이 의회에서 군 문제에 관한 책임을 직접 지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국가를 방위해야 하는 경우 연방 수상이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에 찬성하였다.     

1956년 초만 해도 아데나워는 대연정을 꿈도 꾸지 않았다. 아직 1961년과 같은 상황은 전개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CDU) 기사당(CSU) 내부의 다른 정치 거물들은 대연정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배신의 칼을 든 자민당(FDP)의 횡보에 치명타를 입은 칼 아르놀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에서 로베르트 틸만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당대표 직무대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민당(CDU)은 3명의 가톨릭 신자를 당의 실력자로 두게 되었다. 곧 아데나워와 당내 좌파의 대표자들을 직무대리로 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편하게 여긴 아데나워는 직무 대리의 자리를 4개로 늘렸다. 그래서 카이저와 아르놀트 이외에 당내의 보수 계파에 속하는 개신교 신자인 카이-우베 폰 하셀과 연방의회 의장인 게르스텐마이어를 직무대리로 임명한 것이다. 폰 브렌타노, 하인리히 크로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단순히 대표단 위원에 머물렀다. 그런데 당대회를 치르고 나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수상직을 물러날 경우 기민당(CDU)의 기조를 좌편향시킬 인물이 누구일지를 느끼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기민당(CDU) 내부에서 변화가 일던 시기에 하필이면 기사당(CSU) 내부에서 대연정에 관한 분위기가 촉발되고 있는 사실이 감지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바이에른 주 내부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극보수적인 사민당(SPD)의 빌헬름 회그너가 사민당(SPD), 자민당(FDP), 추방민당(BHE), 바이에른당과 함께 다양한 색깔의 연정을 이끌고 있었다. 사실 가장 큰 정당인 기사당(CSU)은 야당에 머물고 있었다. 기사당(CSU)이 델러를 둘러싼 연정 위기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델러에 맞서 아데나워를 지지한 이유는 뮌헨의 주의회에서 자민당(FDP)이 벌인 행태 때문이었다. 그러나 델러 파벌이 일단 승리를 거두게 되자 뮌헨에서 사민당(SPD)과 협력하는 것이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다.     

테시너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아데나워가 받은 글롭케의 편지에서 의심이 많은 아데나워는 자신보다 훨씬 더 의심이 많은 글롭케가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었다. “기사당(CSU)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사당(CSU)은 무슨 수를 쓰든지 바이에른 주에서 정권을 다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기사당(CSU)은 차기 총선 이후 사민당(SPD)에 연방정부 차원의 연정을 제안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거가 국방 문제와 관련하여 사민당(SPD)과 합의를 이루고자 노력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지난 회기의 기사당(CSU) 대표단 회의에서 쉐퍼가 주장한 것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가장 눈에 뜨이는 점은 슈트라우쓰가 쉐퍼의 주장에 맞서며 자민당(FDP)과 다시 연정을 할 가능성에 반대하고 나서며 선거전을 자민당(FDP)과 무관하게 치르자고 한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즉각 답신을 썼다. “본인은 기사당(CSU)에 관한 귀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한 번 의견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슈트라우스의 말이 저의 비위를 매우 거스르고 있습니다.”     

슈트라우쓰에 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두 달 후에 오펜하임 남작은 아데나워에게 재무장관인 쉐퍼에 관한 견해 차와 관련하여 현재 많은 사람이 슈트라우쓰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데나워라는 노인께서 쉐퍼를 내각에서 몰아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슈트라우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노인께서는 이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런데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들은 바에 따르면 뮌헨의 기사당(CSU) 당대회에서 흥에 들떠 외국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데나워라는 그 다 낡아 빠진 녀석은 이제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매우 현명한 인물이라서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늘 아데나워를 두둔하였다.     

아데나워는 정적들의 공격으로 휴가도 편히 보낼 수 없었다. 연정 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2월에 아데나워는 다니 하이네만의 생일 선물에 감사하는 편지에서 매우 지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매우 심각한 병에 걸리고 나서 매우 필요한 휴식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국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제가 여전히 나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일날 행사도 피곤하여 겨우 버텨냈습니다.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이 잘 되면 4월 초부터 한 3주 정도 리비에라로 휴가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리비에라 대신 테신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이  곳은 그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계층의 여러 독일인이 선호하는 휴양지였다. 아데나워 자신도 학생 시절부터 아열대 지역의 식물이 자라는 이 북이탈리아 지역의 호수들과 그림 같은 산간 지역 풍경에 관한 향수가 있었다.      

그러나 《슈피겔》은 휴가 중인 아데나워를 가만두지 않았다. 《슈피겔》에 따르면 스위스 지역 교통협회가 아데나워에게 제공한 포르차에 있는 별장이 테신 출신의 파시스트 지도자였던 레초니초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글롭케에 맞선 캠페인과 연관시켰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아스코나에 있는 몬테베리타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이 보수주의 정치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문명에 염증을 느낀 모든 이가 엘도라도라고 부른 이 지역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휴가지에서 쓴 아데나워의 서한의 논조는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일과나 날씨, 또는 둘 다에 관한 작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말 많은 이들이 나를 방문했습니다. (페르드멩게스, 테신 정부 관리, 기민당(CDU)의 헥 박사는 여러 차례 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속상한 일도 업무도 많았습니다. ... 이틀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해를 본 지는 나흘이나 되었고요, ...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매우 불안합니다. 고민이 떠나지 않습니다. 비가 오고 나면 사방이 푸르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하가 계신 곳에는 이미 식물들이 훨씬 빨리 푸르러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순리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밖에요.”     

본에 있을 때와는 달리 아데나워는 그곳에서 일정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잠시나마 그는 정치가의 가면을 벗어 내던지고 인간에 관한 본능적인 호기심도 접었다. 화가인 리하르트 세발트가 아데나워에게 테신에 관한 추억이 담긴 그림을 호텔로 보내자 그는 즉각 그에게 연락하여, 다음날 론코에 있는 키르흐플라츠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세발트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쾰른의 베르크분트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했었다. 그 당시 그는 좌파의 오브제 미술에 반대하는 것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가톨릭 신자로 개종한 이후 교회 창문 그림 전문가로 활동했었기 때문에도 비판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자기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화가들과 격의 없이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세발트는 아데나워와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매우 추운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망토를 걸치고 모자를 썼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망토와 모자 없이 교회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는 아스코나에서 여기까지 산책하며 걸어왔다. 딸과 비서와 함께 걷고 있었고, 두 명의 경찰관이 수행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독일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테신 소속이었다.” 그들은 세발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작은 집에 큰 평화’(parve domus magna quis)라는 구호가 걸린 것을 보고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집에서는 반대로 써야할 것 같습니다. 제 말씀은 본에 있는 수상 관저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곧 친해져서 신과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농담으로 영국 하원에서 자신을 파면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와서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자기 시골집에서 살고 있는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소박한 삶을 높이 평가하고, 지나가는 투로 뮌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들이 제게 마실 것으로 무엇을 주었을까요? - 바로 도르트문트 맥주입니다!” 그러자 세발트가 격앙된 어조로 답하였다.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그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냐는 질문으로 응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발트는 그의 낙관론에 관한 훌륭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곧 산토아노에 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경건한 기도를 인용하였다. 그러고 나서 약간 풍자하는 투로 덧붙였다. “적어도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말입니다. ‘그 뒤는 내 알 바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매우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는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손자가 15명이나 됩니다.” 세발트가 받은 전체적인 아데나워에 관한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날 아데나워의 방문으로 나의 직설적인 농담에 대하여 매우 현명하게 반응하고 모든 성급한 격앙이나 잰척하지 않는 명사로 아데나워를 기억하게 되었다.”      

* 뒤는 내 알 바 아닙니다. [apres moi le deluge, 역자주 – 직역하면 ‘내가 죽은 뒤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겠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여후작이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프랑스 일반 백성의 도탄에 무심한 귀족들의 부도덕을 역설적으로 비꼬는 말로 사용된다.]     

비가 많이 내린 아스코나에서의 휴가는 사실 아데나워의 휴가지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아데나워라는 노인이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후 바덴 지역의 슈바르츠발트에 더하여 두 휴양지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곧 그는 스위스의 알프스산맥과 북부 이탈리아의 그림 같은 호수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스위스의 아름다움을 1894년 성령강림절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제 60년이 넘은 시간이 흘렀다. 거의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그의 학우인 한하르트와 쾰른의 친구인 쿠스토디스와 함께 어울렸다. 갈색 바지, 푸른색 실내복, 여행자 셔츠, 부드러운 모자를 착용하였다. 그 모자는 단체 회원에게서 ‘억지로 빌린’ 것이었다. 그런 차림으로 스위스를 누볐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부모에게 보낸 16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운 편지에서 스위스 경치에 대하여 받은 깊은 인상을 세심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 당시 보덴제로 가려면 기차와 배를 타고 나서 걸어서 펠드베르크, 상트블라지엔, 알브루크, 싱엔을 지나가야 했다. 호헨빌에서 쉐펠 출신의 에케하르트를 기리고 나서 ‘몬덴샤인에서 호수를 건너’ 라이헤나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훈족이 라이헤나우 수도원의 수사 50명을 불태워 죽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른 유물과 더불어 성경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물독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 물독은 9세기 그리스 장군이 이 수도원에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콘스탄츠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토겐부르크의 들판을 지나 취리히 호수 근처의 라퍼스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더 걸어서 아인시델른과 라우에르처 호수를 거쳐 마침내 브룬넨에 이르게 된다. 헤르기스빌에서 출발하여 필라투스산을 등반하던 중 눈에 막히는 바람에 이 여행자들은 리기를 들러 “8월에 밖에서 운동하고 난 것처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루체른과 바젤을 거쳐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왔다.     

아데나워는 젊은이의 혈기가 넘치는 이 편지를 잘 보관해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했었다. 그 편지에는 그는 60여 년에 걸쳐 되풀이되었던 스위스의 모든 매력을 언급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장소들, 많은 사람이 미사에 참석하는 순례지 교회들, 높은 산지에 있는 등산로, 늘 감동을 주는 아름답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경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피어발드슈테터세 호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이다. 그 물은 푸르고 매우 투명해서 10미터 정도 깊이의 바닥도 볼 수 있다. 이 푸른 에메랄드색의 호수 좌우와 앞뒤로 커다란 만곡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호수 위로 하늘 높이 솥은 산이 비치고 있다. 산의 희고 아름다운 정상이 물줄기에 반사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장관이다. 내 생각에 우리 3명은 이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데나워가 그 후 수십 년 동안 계속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특히 그 후 50년 동안은 피어발드슈테터 호수 위의 고산 지대인 뷔르겐슈토크에 머물렀다. 그리고 1955년에는 뮈렌에서 출발하여 마지막으로 ‘가파르고 자갈이 깔린 등산로’가 있는 고산 지대 여행을 하였다. 이때는 외무장관과 외무부의 차관과 정치부 부장도 그를 수행했다.     

이후 아데나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곳을 찾지 못하였다. 1955년 가을 심한 병에 걸리고 나서 의사들은 높은 산을 피하고 온화하고 햇살이 많이 기후의 지역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라고 마지오레를 찾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뮌헨에서 시작하여 북부 이탈리아의 호수들을 찾아 멀리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린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스코나를 계속 좋아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휴가 중에도 매우 힘든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마침내 1957년 초에 카데나비아의 코머 호수를 찾게 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빌라 로사, 빌라 아르미니오를 포함한 여러 별장에 머무르면서 공기가 ‘매우 신선하고’ 넓은 공원이 ‘잘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이탈리아 식 공놀이] 보차(Boccia) 놀이를 하였다. 1958년 2월과 3월에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보내며 고생하였다. ‘이틀 동안 안개가 끼었고 어제 아침에는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렸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시 카데나비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마음에 매우 흡족한 콜리나 별장을 발견하여 그의 여생 동안 발리스의 산속에 있는 몬슈르 퐁의 그랑호텔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찾는 휴가지로 삼게 되었다.     

아데나워라는 이 노인의 내면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그가 최소한 공간적으로 본의 일에서 정기적으로 떨어져 있을 줄 알았다는 사실이다. 본에서 그가 하는 일은 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를 정말로 피곤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였다.   

  

슈트라우쓰가 국방장관이 되다    

 

아데나워에 관한 부정적인 국면을 전환시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56년 10월에 있었던 새로운 정부의 구성이었다. 사실 정부의 재편은 오래전에 실시해야했고 아데나워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에서도 과격 노선을 늘 본능적으로 거부하여 왔다. 아데나워의 측근으로 8년 동안 그를 세밀하게 관찰해 왔던 부수상인 블뤼허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 곧 어떤 일이 벌어지든 “5분 안에 다시 평정을 찾는” 아데나워 “수상의 성향”이 존재한다. 그 결과로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이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1956년 초부터 분명해졌다. 곧 프란츠 블뤼허를 포함한 자유국민당(FVP) 소속 장관들을 내각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력하고 무엇보다도 자민당(FDP)의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기사당(CSU)은 계속 이들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망설였다. 내각을 다시 구성하게 되면 다른 문제들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프리츠 쉐퍼, 테오 블랑크,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안톤 슈트로흐, 야콥 카이저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각의 절반이 문제였다. 그러나 장관 자리를 바꾸기 시작하면 지옥문이 열릴 판이었다.      

1956년 7월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자유국민당(FVP) 소속인 3명의 장관을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다만 블뤼허는 워낙 일을 잘해서 자리를 보전할만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국방장관이 되는 것은 여전히 피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방책을 마련해 두었다. 1955년 1월 기사당(CSU) 당대표 자리를 놓고 슈트라우쓰와 대결하다 패배한 한스 사이델이 프리츠 노이마이어 대신에 법무장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여기에 더해 기사당(CSU) 당대표에게 경제 분야 장관 자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사이델은 바이에른의 주지사가 되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는 1858년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해결책을 받아들인 결과 슈트라우쓰와 갈등을 벌이게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사이들러는 기사당(CSU) 지방당의 주요 인물들과 더불어 7월 10일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독일 국군에 관한 계획에 따른 결정적인 문제점을 아데나워에게 지적하고자 하였다. 군대 양성, 막사, 군복, 무기가 부족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1954년 이후 변함없이 병력을 50만 명으로 유지하려는 계획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중에 9만 명은 첫 해에 징집한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블랑크와 그의 차관인 루스트는 확신했다. 목표로 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재정적, 입법적 전제 조건을 세밀하게 제시한 것이다. 블랑크가 1954년 1월 13일 아데나워에게 보낸 최초의 11장짜리 경고 서한에 이어 1955년 5월 13일에도 그와 같은 서한을 보냈다. 아데나워도 위기를 느꼈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데에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곧 정부 측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군대에 관련된 입법의 어려움, 연방정부의 재무장관이 야기한 장애, 군 장교들에 관한 불신, 게르트 슈뮈클레의 말에 따르자면 이러한 불신으로 동시에 ‘두 개의 괴물이’ 한꺼번에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곧 ‘군대라는 조직과 군대에 관한 민간 통제기구’가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근거가 있음에도 여론에 불만이 형성되고 외교 정책적인 부담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모든 연방 수상은 자기 불만을 정치적 책임을 진 인물, 곧 담당 장관에게 전가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장관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수상 자신이 모든 일을 경솔하게 처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이 되어 기사당(CSU) 지방당이 테오 블랑크의 목을 자를 것을 요구했지만 아데나워는 아직 계획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글롭케와 루스트는 그러한 아데나워의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다. 이들은 군대 관련 헌법과 중요한 법률이 제정되고 나면 모든 것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에 ‘병력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추진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조직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장관의 교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아데나워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 7월 10일 아데나워와 면담을 한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의 채직을 휘두르는 듯한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어야 했다. 그러한 대답은 내각에 있는 사람이라면 듣기 싫고 두려운 것이었다. “슈트라우쓰 씨, 무슨 말씀인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말씀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제가 연방 수상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귀하는 결코 국방장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블랑크는 소환당할 국방장관일 뿐이었다. 8월 중순에 블랑크는 아데나워의 근심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블랑크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당분간, 곧 특별한 사안일 발생하기 전까지는 더 이상 자리를 주제로 논의하지 맙시다.” 그저 건강을 생각하여 몸을 돌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 국군 창성 문제는 블랑크의 역량을 벗어난 일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제 결국 당초 제시했던 18개월 의무 복무 안도 관철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의무 복무 기간을 12개월 이상으로 관철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이는 곧 장기 복무군인들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인원을 어디에서 충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56년 말까지 충원하기로 한 목표인 96,000명 가운데 9월 말 현재 겨우 62,000명을 모집한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핵무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9월 20일 개최된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블랑크가 사실상 파산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관인으로 초대받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핵전략 관련 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슈트라우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크로네와 글롭케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여당의 협조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불평하였다. “우리는 슈트라우쓰와 대결을 펼쳐야 합니다. 그 때문에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를 감수해야 합니다.”  크로네는 이와 관련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 아데나워 수상에 대한 비판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글롭케로부터 들었다. 글롭케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그에게 “그의 퇴직금을 계산해 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자포자기하기보다는 슈트라우쓰와 협상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56년 10월 30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례보고서 관련 회의 자리에서 연합국을 대상으로도 파산선언을 해야만 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 블랑크를 물러나게 만든 결정타가 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파견 대사인 블랑켄호른은 오랜 병에 시달리다가 10월 초에 다시 본으로 귀환하였다. 그러고 나서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와 대담을 나누고 장관 교체를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신속하게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여 우리의 국군 창설의 새로운 노선을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군사적 의무를  신속하게 다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최대한 빨리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더디게 진행된 시기에 장관으로 있던 사람보다는 새로운 국방장관이 우리의 진지한 노력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설득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이에 아데나워 수상 자신도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0월 10일 칼 아르놀트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계속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10월에 열리는 연례보고서 회의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약속해 온 것을 실행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현직 독일 국방장관이 그 자리에서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 지킬 것을 약속해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우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7월에 문전박대를 당하여 여전히 불만이 많은 슈트라우쓰가 10월 10일 수상 관저에 초대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제안한 국방장관 자리를 슈트라우쓰가 즉각 받아들이지 않자 아데나워는 그에게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슈트라우쓰 씨, 이 늙은이가 여전히 마음을 바꾸는 지경에 있다고 해서 불쾌하게 생각하실 것인가요?” 슈트라우쓰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라서 아데나워가 항복한 것을 기회로 즉각 독일국의 규모를 과감하게 축소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리고 1957년 총선을 염두에 두고 첫 군 지원자들의 모집을 매우 신중하게 추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길도 있는 법이다. 슈트라우쓰가 국방부의 고위 관리들에게 국군 창설 계획의 수정을 요청할 때는 아직 원자력부를 떠나 국방부로 자리를 옮기기 전이었다. 슈파이델은 슈트라우쓰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호이싱거는 유연성을 보이면서 국군 창설 계획안에 군대 규모를 3년 안에 50만 명을 확보하는 것에서 1960년도 후반까지 36만 명으로 축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고 나서는 군대 규모가 당초 약속된 12개 사단 약 50만 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슈트라우쓰와 더불어 아데나워는 이른바 소규모의 ‘정예부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몇 달 전 미국에서는 이른바 ‘래드포드 플랜’(Radford Plan)에 관한 논의에서 유럽 재래 군의 규모를 축소하고 그 대신 전략 핵무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슈트라우쓰나 아데나워는 이를 반겼다.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새 국방장관은 12월에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은 사단 규모의 부대에까지 핵무기가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독일 국군이 전략 핵무기로 무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슈트라우쓰만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도 이에 동감하고 있었다.     

1956년 9월 20일, 곧 슈트라우쓰가 새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는 결정이 최종적으로 내려지기 전에 기민당(CDU) 당 대표단은 아데나워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곧 미국에서는 ‘개인 화기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소식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한 번 화약 발명의 이래 무기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총을 쏘기 위해서는 12명의 장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요? 기술이 발전하니 군대도 이 신무기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일단 현재 그 무기는 아직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 수상보다 핵무기를 통한 위협 전략의 복잡한 변증법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제 독일 군대의 국방 계획에 핵무기를 도입할 것을 단단히 결심한 국방장관을 두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슈트라우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데에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었는지를 슈트라우쓰와의 최종 대화를 나누던 날에 연방 대통령에게도 털어놓았다. “그는 모든 반대를 관철하기 위한 무자비함과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서 분명히 기사당(CSU)은 대연정을 할 의사가 없다면서 사민당(SPD)과도 갈등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대연정을 할 의사’는 아데나워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기까지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이미 8월 초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기사당(CSU), 사민당(SPD) 대연정에 긍정적이라고 여기던 기사당(CSU) 당대표인 사이델에게 편지를 보내어 슈트라우쓰의 그런 생각이 바이에른의 시각에서도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에서 본다면 대연정은 파국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사민당(SPD)은 내가 수상으로 있는 한 결코 대연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연정에 반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총선 이후 연방정부 수상에 재선될 것입니다. 대연정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총선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내부에도 존재하는 사민당(SPD)과의 대연정을 찬성하는 이들, 곧 야콥 카이저, 칼 아르놀트, 그리고 최근 게르스텐마이어의 주장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총선 전에 이미 돌고 있는 연정에 관한 소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명확한 의사를 여당에 전달하였다. “대연정을 도모한다면 교수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히 수상만의 집착이 아니라는 사실은 연방부 장관이던 메르카츠가 독일당(DP)의 시각에서 문서로 표현한 건의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분석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기민당(CDU) 내부의 좌파는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기민당(CDU)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당과 기사당(CSU)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9월 중순에 아데나워와 델러가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의 집에서 만났다. 이러한 사실이 곧 언론에 알려지고 특히 자민당(FDP) 내부에서 델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 두 사람은 이 만남을 주선한 것은 다른 이들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곧 경제계가 대연정을 막기 위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갈등의 골을 메꾸어보고자 나선 것이었다. 이들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그 만남을 청탁하였다. 아데나워와 델러의 대담에 앞서 자민당(FDP) 의원인 슈타케의 주선으로 에르하르트와 델러의 면담이 먼저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이전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곧 자유국민당(FVP)으로 빠져나간 과거 자민당(FDP)의원들의 재입당과 뒤셀도르프의 슈타인호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끝내는 것이 전제되어야 자민당(FDP)이 정부에 복귀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뒤셀도르프에 관한 요구는 델러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일었다. 그가 원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바이어와 되링에 관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자민당(FDP)의 부정적인 테도를 완화하려는 노력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제 자민당(FDP)의 일부라도 대연정에 관한 소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민당(FDP)의 생존에 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여론조사에서 1956년 9월부터 사민당(SPD)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앞서가기 시작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미 1956년 하반기부터 이미 세 가지 연정 모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델은 1961년부터 수십 년 동안 당 전략가들의 머리에서 맴돌던 것들이다.     

1956년 아데나워는 소연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경제계 파벌에 속하는 에르하르트, 슈뢰더, 페르드멩게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직은 아데나워가 대연정에 관한 호감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연정 모델을 선호하는 이들은 대체로 1949년부터 늘 같은 부류에 속했다. 곧 사회위원회에 속하는 칼 이르놀트와 야콥 카이저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기사당(CSU)의 거물 정치가들 가운데 잠깐 이 모델을 지지하던 인물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이 게르스텐마이어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맞서 저항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무리에 있었다. 그리고 사민당(SPD) 인물들과도 여러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끝으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과 연방정부 차원에서 연정을 하는 모델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누구보다도 자민당(FDP) 소속으로 입각을 하고 있던 슈타인호프가 있었다. 그 당시 이미 《슈피겔》의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매우 친분이 깊었던 델러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그는 여전리 독일 통일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던 사민당(SPD)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는 그도 다른 자민당(FDP)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민당(SPD)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보다는 노조 계파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민당(SPD)과의 거리가 더 멀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이 복잡한 시기에 델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수다쟁이인데 사민당(SPD)과 기민당(CDU) 좌파가 서로 힘을 합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민당(FDP)이 여기에 힘을 쓸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장기적인 연정 전략을 인사 정책의 특수성과 연계시켜 보고 있었다. 그가 10월 9일 자기 생각을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알리면서 사회위원회와 잘 지내보고자 하였다. 노조 소속의 테오 블랑크는 국방장관 자리를 슈트라우쓰에게 양보하고 그대신 노동사회부의 장관직을 맡아 줄 것으로 보였다. 사회노동부에서 안톤 슈토르흐는 더 이상 전망이 없었다. 또한 몇몇 주요 부서에도 자리가 비어 있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데나워가 칼 아르놀트를 부수상으로 임명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내각에서 물러나게 될 블뤼허의 임무를 그에게 맡길 요량이었다.  


실제로 아데나워는 서신 왕래를 한 끝에 아르놀트와 10월 8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르놀트는 기독교 노동조합 소속의 블랑크와 슈토르흐가 내각에 머물게 되어도 자신이 입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아데나워가 고민했던 아르놀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면서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좌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블랑크와 슈토르흐를 유임시켰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상 거부당한 상황에서 아르놀트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블랑크가 국방부에서 곧바로 노동사회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거부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톤 슈토르흐는 1957년 새로운 내각 구성 때까지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부수상 블뤼허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10월 15일 모든 문제가 정리되었다. 아데나워는 협상을 전혀 벌이지 않고 원내 총회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연방정부 대통령의 충고 덕분이라고 하였다. 곧 호이쓰가 아데나워에게 말하기를 “그렇게 협상하는 관례를 만드는 것은 기본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것, 그리고 블랑크와 더불어 쉐퍼, 노이마이어, 크라프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발표하였다. 내각에 새로 입각한 인물 가운데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이가 베를린의 의원인 에른스트 레머였다. 그는 이제 잠시 연방우편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당 대표단 앞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레머 씨는 우편에 대하여 여기 모인 우리 모두만큼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고 내각에서 매우 소중한 인물입니다. 그가 정치적 경험과 정치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연방정부 내각에 매우 드믄 재주입니다.” 아데나워는 처음에는 쉐퍼를 물러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여당 대표단 앞에서 아데나워는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쉐퍼 장관께서는 정치 감각이 부족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경멸조로 쉐퍼를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큰 개에 비유하였다. “눈이 접시만 해서 금고 위에 앉아 돈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도 감히 그 곁에 오려고 하지 않지요.” 아데나워는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총선이 있는 시기에 건전한 재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강조하였다. “우리가 총선에서 패배하게 되면 재정 관리 전체가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총선이 있는 시기에는 재정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다룰줄 아는 분이 연방정부 재무장관의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아데나워는 양심적인 프리츠 쉐퍼와 선거가 있던 해에 이르기까지 계속 다투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57년 2월에도 쉐퍼를 물러나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와 대담을 자리에서 그가 재정을 ‘불투명하게’ 집행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쉐퍼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는 올바른 재정을 유지하는” 의무를 다할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이 말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답신 말미에 비꼬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귀하가 지금까지 사임을 청원할 때마다 제가 해온 대로 제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귀하가 사면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연방 차원의 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위험에 놓여있다.”라는 쉐퍼의 탄식이 1957년 여름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쉐퍼는 바보가 아니라서 그러한 비판을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며 하지는 않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적절한 다음 기회에 이 귀찮은 재정 파탄 경고자를 해임할 것을 조용히 결심하였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내각 개편은 얼마 되지 않아 아데나워에게 힘을 보태준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개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교육이 되었다. 계속 서로 다투던 장관들이 잠잠해졌다. 둘째로 아데나워가 정치적 이유로 조용히 해 줄 것을 부탁받은 이들이 더 이상 아무런 심각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쉐퍼와 에르하르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출이 과도한 연금 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사회정책과 선거 전략적 차원에서 커다란 공을 들인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노동자 계층이 “노년에 이르렀을 때 거지가 되어 돌아다니기보다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법적으로 최대한 가능하도록 해주고자 하였다. 내각 개편의 셋째 긍정적 결과는 국방장관의 교체였다.      

아데나워는 역동적이고 아직 때가 묻지 않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를 여전히 매우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마치 가장이나 되는 듯이 즐겨 그에 관한 비평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가 뒤죽박죽이던 국방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슈트라우쓰는 세력 간의 대립을 초래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현대적이고 국제적 경험이 풍부한 정치가로서 안보 문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정적들의 비판이 처음으로 많이 약화되었다. 슈트라우쓰가 정치 지도력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보여줌과 동시에 독일 국군 창설의 속도를 줄여서 군국주의 반대자들의 예봉을 어느 정도 꺾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얼마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임 국방장관의 결단 덕분에 1957년 총선 분위기가 훨씬 좋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총선 전 기간에 로트 암 인에서 거행된 슈트라우쓰의 결혼식에 여봐란듯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곧 아데나워는 비록 그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그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였지만, 그 국방장관을 앞으로 신임할 것임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슈트라우쓰의 정적이었던 하인리히 크로네는 1957년 6월 4일자 일기에서 약간 실망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결혼한다. 뮌헨 교구장 추기경이 혼인성사를 거행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초대 손님 가운데 아데나워 수상과 4명의 장관이 있었다. 더 이상의 높은 손님은 없을 것이다. 더 높은 손님이라면 교황 대사가 왔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로트 암 인으로 오지 말하고 충고하였다. 사실 그날 수상은 파사우에 있었다. 그러나 그 노인께서는 나보다 더 현명한 분이었다.” 

              

아데나워의 연금 개혁     


“지금껏 그 어떤 법률, 제도 심지어 헌법과 국가의 상징 가운데 연금 개혁만큼 긍정적인 반응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얻은 경우는 없었다.” 이는 정부 진영에서 격론을 벌인 입법이 완료되고 나서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연구소가 내린 평가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타당한 것으로 남아있었다. 분명히 아데나워 정권은 하나의 개혁을 이루어 내었다. “이 개혁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법률에 더하여 1,000번째, 또는 1,100번째의 법률을 새로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사회입법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1953년 총선 직후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외교 정책 분야와 더불어 사회 분야에 관한 ‘새로운 길’을 제2기 아데나워 정부의 ‘주요 과제’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4년에 걸친 결정 과정을 분석해보면 노후보장에 관한 이 근본적인 새로운 질서는 아데나워 수상의 확고한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수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연금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1957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근본적으로 이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법률에 관한 3차 토론은 독일 의회 역사상 가장 길었던 1957년 1월 21일의 독일 연방의회 전체 회의 끝에 마무리되었다. 아데나워에 관한 지지도가 1957년 1월 말과 2월말 사이에 45%에서 48%로 상승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서 아데나워가 비스마르크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아데나워는 단순히 위대한 외교 정치가만이 아니라 사회개혁가로도 역사에 남고 싶어했다.     

아데나워 생애 전채 그리고 수상재임기는 독일이 사회국가로 수립되는 과정이었다. 독일이 사회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아데나워가 재임하던 복구 시대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미 1950~1953년 사이에 공적 사회복지 지출이 50% 증가하였다. 이는 당시 복지국가 차원의 제도 실행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스웨덴과 영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이에 따라 1955~1960년 사이에는 연금 개혁 덕분에 은퇴 가구의 수입 증가율이 사회의 다른 모든 계층을 능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어떤 목적으로 독일을 사회국가로 만들고 개혁했느냐는 질문은 그의 전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에 속한다.     

아데나워가 국내정치, 특히 사회정책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내각이나 여당 지도부에서 그와 의견을 나눈 이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외교 정책 문제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시기에는 그도 경제나 사회 또는 법률 관련 정책의 고삐를 늦출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가 국내 정치에서도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사회정책을 질서에 관한 추상적인 생각에서 연역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규정이 있어야 하는 현실 문제에서 귀납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합리성에 관한 판단 기준은 다양하다. 개혁 입법은 사회 현실에 적합한 것이고 현재의 추세를 선도해야 한다. 정부 진영의 합의, 시민들의 수용, 그리고 단체들의 수용 또한 재정적 여유, 선거전략적 관점 또는 다른 정치 분야와의 연관성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아데나워 진영의 성공적인 정치가들은 현실에도 맞고 권력 차원에서도 적합한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찾았다.     

그러한 경험론적-귀납적 방법은 다른 사회정책 분야에서도 감지되었다. 아데나워는 임기 동안 그러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피해보상, 전쟁 피해자 구호, 공적인 가정정책, 주택 건설, 노동법 제정, 보건정책 분야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남들에게 자신이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그의 행위가 특정 이념 집단과 관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그처럼 다양하고 유연한 지성을 지닌 인물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상황에 맞게 일하고 그러면서 주요한 주장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개천에서 용이 된 인물인 아데나워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주 그가 자유주의적이며 시민적 성취 정신이 매우 강한 인물이라고 단정 지어 말한다. 세련되지 않은 개인주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인간의 본성에 따른 영리 추구 심리와 소유욕은 인간 본성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 아데나워라는 인물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해왔던 연대성의 원칙에서 자신이 취하는 입장의 근거를 찾았다. 또한 사회정책에 관한 아데나워의 조치나 결정에서 과거의 민족공동체 이념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이념은 연대성이나 ‘사회적 평화’라는 근대적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누구나 모든 최고 정치가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모순을 지적하게 된다. 1954년 12월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복지 국가의 개념에 대하여 반론을 펼쳤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국민을 국가 보험 보장의 울타리 안에 몰아넣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난 후에는 똑같은 장관들은 바로 그 연방 수상이 자기 입으로 1년 전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곧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이들이나 독립이 안 된 이들이나 보험이 똑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의 정적들이 어떤 요구를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예를 들어 사민당(SPD)은 1950년대 중반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책적으로 포용 전략을 들고나왔고 독일노조총연맹(DGB)도 국내 정치적으로는 아데나워의 적수이지만 대화의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래서 얼마든지 대타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사민당(SPD)과 노조의 그러한 반응은 이 아데나워라는 권력자는 외교 정책에서는 늘 한결같이 독자노선을 고집해 오면서 상대방을 도발했지만, 민감한 분야인 사회정책에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데나워는 선거전략에 관한 경계를 단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기민당(CDU) 당대표진에게 연금 개혁을 신속히 마무리하는 것이 “선거의 홍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아데나워는 여론조사를 통하여 연금 문제가 국방 문제보다 선거에서 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는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연금 개혁을 옹호하는 다른 관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곧 국내의 사회적 평화, 공산주의의 준동에 맞선 시민의 보호, 서독을 동독에 비하여 더 매력 있는 국가로 만들기였다.     

입법 과정을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어떻게 개혁을 말하자면 정부 차원에서 선거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여당 안에서 그는 연금 개혁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하여 매우 막연한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계획의 수립은 노동사회부 장관에게 일임하였다. 아데나워가 안톤 슈토르흐에게 다시 한번 임무를 맏겼다는 것은 기민당(CDU)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세력이 노동사회부를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슈토르흐는 제1대 연방의회에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노동사회부는 아데나워 수상이 바라는 수준의 포괄적인 사회개혁에 필요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954년부터 아데나워는 노동사회부 장관의 무능에 관한 질책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그가 연금 개혁이라는 매우 긴급한 사안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외무부 업무를 내려놓으면서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 자신은 이제부터 ‘새로운 군대’ 창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전념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내각에 자신이 주재하는 사회위원회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외교 문제에 다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부수상인 블뤼허가 사회위원회의 회의를 진행하면서 그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계획을 지연시키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연방정부의 재무부와 경제부 또한 혁신적인 사회정책적 개혁을 매우 반대하고 있었기에 사회위원회의 논의가 정체된 것이다.     

이 시기에 사회보장 제도의 전체적인 개혁이라는 대책 없는 계획은 연금보험의 부분 개혁이라는 예측가능한 계획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의 기폭제가 된 것은 빌프리드 슈라이버의 건의서였다. 당시에 그는 본대학교의 민간경제학과의 사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면서 가톨릭기업가연합의 총무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산업사회 안에서의 생존 보장>이었다.     

슈라이버는 이 문서에서 제시한 계획은 평등을 지향하는 사민당(SPD)이 내세우던 최소연금 계획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인연금은 노동자가 근로 활동을 하는 동안 법적으로 축적해 놓은 것을 자본으로 한 것에서 지급되어야 한다는 개념과도 다른 것이었다. 이른바 ‘국민연금’도 생명보험과 비슷한 ‘저축계약’도 아닌 ‘세대계약’이었다. 이에 따르면 사회에서 활동하는 세대는 달마다 개인 소득에서 일정액을 연금으로 납부하고 해마다 축적된 이 금액에서 현재 은퇴한 이들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리하면 연금 수요는 분담금 방식으로 충당되고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분과 연동된다.     

그 당시 뮌스터대학교에서, 후일 쾰른대교구 추기경이 된 훼프너 교수 아래에서 사회윤리를 주제로 신학을 공부하던 파울 아데나워는 이 논문을 아버지에게 소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글을 뮈렌에서 휴가를 보내던 때 읽었다. 아데나워는 이 명료한 구상에 매우 감동하여 슈라이버에게 내각의 사회위원회에서 강연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55/56년 연말연시 기간에 뢴도르프에 머물고 있던 아데나워에게 연방정부 수상실과 노동부가 마련한 제안서가 도착했다. 아데나워는 이 제안서에 자기 의견을 간단히 달았다. 연금과 급여 수준을 연동시키는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동의하였다. 또한 연금 수령 기간에 지급액을 조절하는 것도 좋게 여겼다. 그리고 임금을 받을 때의 생활 수준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좋은 생각으로 여겼다. 그러나 연금 지급에서 필요한 액수를 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반대하였다.     

이미 이 무렵부터 연금 관련법의 입법 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눈에 뜨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연금 체계의 근본적인 개혁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자 하는 아데나워 수상은 노동부의 쿠르트 얀츠가 이끄는 ‘사회개혁 사무국’의 기술 자문을 받으며 1년에 걸친 회의에서 모든 반대를 물리쳤다. 프리츠 쉐퍼는 연금 개혁으로 연방정부 재정에 새로운 커다란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며 이 계획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보았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가장 독특한 ‘질서정책적’ 의견을 내세웠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대다수 의원은 두 장관의 우려에 동의하였다. 기민당(CDU) 당대표도 연금개혁 계획에 관한 동의를 주저하였다.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은 끝까지 개혁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제 단체, 경제지 발행인, 신자유주의에 속하는 교수들은 ‘연동제 연금’에 대하여 대부분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 제도가 통화의 안정을 위협하고 개인의 자본 축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으로 재정적으로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56년 말에 이르러서야 아데나워는 마침내 내각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게 되었다. 프리츠 쉐퍼가 결국 아데나워의 계획에 마지막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쉐퍼는 연금제도의 개혁으로 연방 재정이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연금 개혁 법안에 반대 의견을 첨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모든 반대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곧 더 이상 논의를 지체하다가는 연금개혁법이 물 건너가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마침내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는 내각의 반대, 별로 확신이 없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거의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군소 연정 정당에 맞서서 매우 단호한 아데나워 수상이 유권자들의 기대에 따라야 한다며 단독으로 관철해 낸 것이다. 사방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아데나워는 원안을 대폭 수정할 의사가 있다는 뜻도 비쳤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노선은 관철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1957년 사회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정당으로서 총선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1956년 세계 위기 가운데 수립된 유럽경제공동체(ECC)    

 

1956년의 힘든 시기 동안에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수립은 아데나워의 주의를 끈 여러 계획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1957년 2월 19일과 20일 파리에서 열린 ‘매우 힘든’ 회담에서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자 아데나워는 몇몇 기자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면서 낙관적인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여러분 모든 것이 아직 유동적이라서 역사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협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계속 제기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해외 펀드와 관련된 커다란 양보를 한 일로 독일의 납세자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 얼마나 될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수립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19세기 독일제국의 통일에 견줄만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19세기 북독 관세동맹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방전쟁 이후 시기의 지도를 머리에 떠올리면 많은 작은 나라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모든 나라들이 자체적인 관세 지역을 유지하고 부분적으로는 자체적인 화폐까지 발행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이러한 다양한 경제와 나라, 그리고 다양한 관세지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엄청난 시도였습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마도 “우리의 손자 때나 가서 이제 결정된 것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사실 비전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아데나워는 한 세기의 업적이 될 만한 일에 함께하였다고 확신하였기에 1957년 3월 25일 맺은 로마조약의 서명식에 발터 할슈타인과 함께 참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조약의 비준이 7월 이전에 완료될 수 있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자기 직무에 완전히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1년 반 동안 아데나워는 늘 그렇게 한 대로 다양한 전략과 차선책을 동원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럽의 연합을 별 잡음 없이 이룩하고자 하는 그의 결심은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좌절된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1954년과 1956년에 아데나워는 일단 미국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고 유럽 통합 과정에 영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할지를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길고 짧은 검토를 거쳐 마련한 다른 모든 유럽 관련 계획들과 더불어 아데나워는 1955년 초에 ‘유럽의 부흥’(relance européenne)도 제안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비록 쉬망 플랜 초기 시절부터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싸고 아데나워와 논쟁을 벌였지만 아데나워를 매우 존경하던 장 모네는 아데나워의 부분 통합을 통한 새로운 기획안에 대하여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유럽 차원의 공동 핵시설의 설치를 원했다. 곧 미래 에너지 분야의 협력을 통하여 유럽 차원의 통합을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유럽 광산연맹의 기구 안에 통합하기를 바랐다.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이었던 바이엔은 그와는 전혀 다른 제안을 논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곧 이미 광업연합이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기능이 더욱 마비되어가고 있기에 더 이상 부분 통합은 하지 말고 큰 차원에서 일종의 유럽 관세동맹을 맺자고 한 것이다.     

당시 벨기에 외무장관이었던 폴-앙리 스파크는 여전히 유럽 통합 지지자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세련된 외교관이었다. 그는 베네루스삼국이 타협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베이엔이 제기한 방안에 따라 관세동맹을 맺고 모네의 제안대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비하여 망데스-프랑스가 이끄는 프랑스는 여전히 군비의 공동 관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시민-보수파인 프랑스 외무장관 피네는 초국가적인 기구의 설립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1955년에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피네는 정기적인 외무장관 회의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회의체는 사무국을 두고 6~8주마다 한 차례씩 회의를 개최하여 작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 정부 기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엇갈렸다. 외무부는 처음부터 부서 통합의 아이디어를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확실히 광업연합의 고위위원회에서 최소한 1개 정도의 초국가적 통합의 모델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연방 경제부에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그와 일하는 차관인 베스트릭과 뮬러-아르마크는 세계적인 자유무역 체제야말로 경제적으로 유일한 유의미한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광업연합 소속 6개국의 틀 안에서 관세동맹을 구성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한스 폰 데어 그뢰벤이 이 구상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었다. 그는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근무하였고 이어서 3년 동안 에르하르트 밑에서 국장으로 일하면서 요제프 루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경제부에 일종의 세포로 심어 놓았다. 그는 에르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시장경제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아데나워의 통합 정책에 보조를 맞추어 광산연합의 회원국인 6개국의 틀 안에서 커다란 유럽대륙 시장을 구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데나워는 1955년 6월 초에 ‘스파크위원회’(Spark-Komitee)의 설립을 위해 열린 메시나회담에 앞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가 4월 초에 장 모네의 계획을 알게 되고 나서 매우 냉정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이후 아데나워는 더 이상 탁월한 유럽 계획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그 계획도 수포가 된 것이다. 그는 당시에 일종의 정치적 통합 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다. 관세동맹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수립 계획을 스파크가 이끄는 전문가위원회가 검토해보도록 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유럽 공동 시장에 관한 기능적 접근이 정치적으로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제네바정상회담과 모스크바회담, 그리고 자르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1955년 가을 내내 병석에 오래 누워있었다.     

1955년 가을 내각에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계획에 관한 에르하르트의 저항이 매우 강경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장 모네가 주도하여 이끄는 모든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력부 장관인 슈트라우쓰도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그 계획에서 초창기에 있는 독일 원자력 사업을 억압하고 미국을 사주하려는 뻔한 의도를 읽어낸 것이다.     

이에 비하여 1955년 11월 14일 뢴도르프를 방문한 자리에서 스파크는 모스크바회담과 제네바회담 이후 전개된 국제적 상황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새로운 노력을 절실하게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강력히 제시하였다. 그리고 스파크는 아데나워가 여전히 “강력한 친유럽파”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유럽 통합이 “독일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확실하고도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연맹과 북대서양조약에 통합되면 독일은 그 부작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민족주의로 쉽사리 변질되는 개인주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서방과 관련된 이해관계는 무시한 채로 독일 혼자서 소련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유럽 통합으로 독일의 세력의 확장은 제한되지만, 독일을 보호하고 나치 시대에 있었던 일종의 유혹과 모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틀이 마련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데나워의 상황 판단이었다. 비록 스파크위원회의 보고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아데나워는 1956년 1월 19일 장관에게 보낸 확신에 찬 지시의 내용을 이미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독일 헌법 제65조에 규정된 독일연방 수상의 지시 권한을 근거로 ‘유럽 통합에 관한 독일의 분명하고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세부 사항을 구분하였다. 곧 메시나회담의 결정 사항을 단호한 실천, ‘먼저 광산연합 회원국 6개 국가’의 통합, ‘유럽 공동 시장의 마련’, ‘이 공동 시장의 기능을 보장하며 동시에 유럽 통합의 정치적인 발전을 촉진할 공동 기구’의 수립, 교통 분야의 통합과 유럽 원자력공동체의 수립 등을 제시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만이 아니라 인물, 곧 에르하르트와 슈트라우쓰에 대해서도 자세한 지시를 하였다. 정치적 목표 설정을 보장하는 데에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의 틀”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관련해서는 독일이 ‘순수한 국가 원자력 규정’을 제정하려는 시도에 관한 국제 여론의 불신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특히 아데나워 수상이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에 찬성하면서 분야 통합의 실험을 계속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수상이 지침을 자신에게 보낸 지 두 달 후에 그것이 ‘통합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불평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르하르트는 6개국 공동체 구상에도 반대하였다. 그는 영국이 유럽의 모든 새로운 계획에 함께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사이에 가장 논란이 된 두 문제, 곧 유럽경제공동체(EEC) 문제와 영국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이는 사실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설립 준비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에르하르트는 여기에서 아데나워를 견제하는 영국의 외교에 말려든 측면도 있다.     

1956년 초반 몇 달 동안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진심으로 유럽 공동 시장에 참가할 의사가 있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세니 총리는 이 무렵 아데나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곧 프랑스의 결정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미 유럽을 이끌고 나갈 동력을 이미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몰레가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 정권을 처음부터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정부의 소련에 관한 매우 강압적인 긴장 완화정책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스파크보고서가 마침내 완성되어 제출되자 아데나워는 다시 독일 연방의회와 내각에서 정부 입장을 발표하면서 자기 계획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동료에게 자기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탈리아 국방장관 타비아니는 1956년 7월 5일 아데나워가 자신에게 대영제국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유럽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랑스 또한 유동적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사회당 총리인 몰레를 신뢰하게 되었지만, 프랑스 외무장관인 피노의 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피노는 유럽 차원의 사고를 하고는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독일과 관련하여 나쁜 경험을 하였기에 독일에 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유럽 통합에 관하여 독일과 이탈리아가 힘을 합쳐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가능성에 대하여 이탈리아 외무장관 타비아니에게 언급하게 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형된 형태의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되살리는 방향도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패한 유럽방위공동체(EDC) 계획에서 추구했던 완벽주의를 버린 수정된 형태의 유럽의 방위공동체를 구성하되 영국의 참여를 확보한다면 어떨까? 타비아니는 일단 그러한 제안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 연방 수상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이탈리아가 추축국(樞軸國, Achsenmächte)이 되었던 것에 대하여 유럽 전체가 안 좋은 기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뻔뻔함을 보인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아데나워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최근의 과거사에 대하여 오만할 정도로 무감각한 모습은 새로운 유럽 기구의 창설에 관한 협상에 스페인도 끌어들이려고 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프랑코 총통이 다스린 스페인의 과거가 있음에도 말이다. 아데나워의 변명은 간단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고립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여전히 전망이 밝은 계획에 매달린 것이다. 이 계획은 스파크보고서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고 1956년 5월에 개최된 베니스회담 이후 공식적인 정부간 협상의 대상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와 더불어 약간의 수정을 더한 대안 마련도 모색하였다.     

1956년 9월에 장 모네는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 더 나아가 프랑스가 유럽 공동 시장에 찬성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선호하지만, 독일연방정부 내각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던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계획을 받아들여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모네에게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문제를 시간적으로 먼저 해결하겠다는 절반의 약속을 하였다. 폰 데어 그뢰벤과 할슈타인이 이끄는 독일 측의 협상단은 이러한 말을 듣고 놀라 아데나워가 한 약속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 가을의 상황을 볼 때 아데나워의 약속으로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은 프랑스 몰레 정권이 협상 자리에서 물러나고 유럽 공동 시장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 수상은 유럽과 독일에 관한 미국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55년 여름의 긴장 완화 상황은 이미 오래전에 종료되었다. 소련이 이집트에 많은 탱크를 공급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양의 모든 언론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질 중동전쟁이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하고 나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1956년 6월 폴란드에서 시작하여 1956년 10월과 11월에는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확대된 동유럽권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권의 위기에 대하여 세계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소련 정권이 어떤 조처를 내릴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와 미국 사이에 처음으로 커다란 위기 상황이 전개되었다. 1956년 4월에 에르하르트에게 보낸 놀라운 내용이 담긴 장문의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유럽 정책보다 미국과의 유대가 더 중요하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그의 유럽 통합에 관한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미국에 관한 무조건적인 편향된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유럽 통합은 우리가 다시 외교무대에 올라서기 위하여 매우 필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 통합은 유럽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독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럽 통합은 무엇보다도 미국이 이를 유럽 정책 전반의 출발점으로 여기기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귀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도움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데나워는 1956년 6월 12일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그에게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계획과 유럽 공동 시장 수립이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서유럽의 생존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 것 때문에 더욱 안심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월터 리드 병원에 입원 중인 아이젠하워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기에 어느 정도 좋은 기분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소련의 불가닌과 흐루쇼프가 미국 대선 이후 워싱턴 방문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1956년 6월 22일 덜레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러한 초대는 독일의 처지에서는 “미국의 기존의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단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이 근거 없는 소문일지 모른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덜레스는 아데나워의 서한에 관한 답신에서 소비에트 정권의 지도자를 워싱턴으로 초대하는 것은 이야기된 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심스러운 소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아데나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7월 13일 자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미군 합참의장인 아서 래드포드는 80만 명의 미군 병력을 감축하고 이 때문에 부족해지는 군사력을 압도적인 핵무기로 대신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였다. 이 소식을 접한 아데나워는 지난번에 덜레스를 만난 자리에서 덜레스가 그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곧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가 현재 군사기술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국방예산을 조절할 생각이 있다고 한 것이었다. 또한 영국이 수소폭탄을 만들 계획이라는 소식은 앵글로·색슨 강대국곧 미국과 영국에서 전략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이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방위법의 통과를 관철하기는 했지만 아데나워의 정적인 사민당(SPD)의 프리츠 에를러와 같은 인물이 벌써 아데나워 수상의 국방 정책이 국제정치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이다.     

독일의 시각에서 볼 때 아직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것이 미군 합참의장의 개인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미국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새로운 노선을 택한 것인지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1956년 7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래드포드는 유럽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유럽에 대하여 무관심한지도 모릅니다. ...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상당히 무례한 조치입니다.”     

아데나워는 7월 21일로 계획된 뷜러훼헤로 휴가 가는 계획을 미루고서 모든 주교 국가 주재 대사들을 몬으로 긴급 소집하였다. 그러고는 아직은 미국의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독일의 일치된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호이싱거 장군을 즉각 워싱턴으로 파견하였다. 호이싱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유럽연합(WEU)에 관한 독일의 심각한 우려를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에게 미국의 양대 정당의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설득해 볼 것을 지시하였다.     

7월 22일 일요일 아데나워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뢴도르프에서 매우 격정적이고 개인적인 서한을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냈다. 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우려가 숨김없이 담겨있었다.     

“① 비록 세부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관한 미국의 계획과 의도가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러한 의도의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기존 방향이라는 것은 바로 핵무기의 완성과 확산입니다. 이는 미국의 힘이 핵무기에 집중될 것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② 이렇게 되면 소련도 똑같은 노선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곧 핵무기와 관련된 소련의 능력을 제고할 것입니다. 소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대등한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③ 이러한 정책은 미국이 종래 유지해 오던 핵무기 감축 정책을 완전히 뒤집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④ 전통적인 무기가 뒷전에 밀리게 되면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사소한 이유로도 핵전쟁이 발발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대부분이 몰살하게 되는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⑤ 핵전쟁이 벌어지면 아마도 첫 1시간이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핵전쟁은 예방전(豫防戰, Präventivkrieg)이 될 것입니다.     

⑥ 미국보다는 소련이 기질적으로 예방전에 더 치중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핵전쟁에 힘을 모은다는 것은 미국의 초토화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는 인류의 대부분, 특히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대부분이 초토화될 것입니다.     

⑦ 기독교 윤리적 태도를 지닌 이라면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하느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독교적 양심으로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합리적인 축소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독일연방공화국도 이러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⑧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게 된 미국의 계획과 의도는 유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마도 소련이 냉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미국에 관한 신뢰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획은 미국이 군비경쟁에서 최소한 소련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 자기 힘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이 계획을 단호히 취소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파급력이 곧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무장관 귀하. 저는 이 전체 상황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상황을 매우 정밀하고 솔직하게 검토해본 결과 이 정책은 기독교와 인류의 근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귀하에게 이 진지하고도 강력한 서한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서한을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귀하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귀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그 계획을 부인한 것으로 아데나워는 만족할 수 없었다. 1956년 12월에 개최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미국이 유럽 주둔군 가운데 6개 사단을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여전히 퍼지고 있었다.     

덜레스는 이 서한을 읽고 나서 본 주재 미국대사를 교체할 때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코낸트 교수를 소환하여 인도 주재 대사 자리를 권유하였다. 코낸트는 이에 대하여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덜레스로부터 아데나워의 서한을 전달받은 미국 대통령은 아데나워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이 핵무기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핵무기 제거를 제안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덜레스의 답신은 아데나워를 안심시키고 아데나워의 경고 서한과 비슷한 매우 높은 수준의 윤리적 어조가 담긴 것이었다. 얼마 안 가서 미국 국무장관의 동생이며 중앙정보부(CIA) 국장인 알렌 덜레스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그도 아데나워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이 계획이 단순히 가능성을 탐색하는 수준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공군부 장관인 도널드 쿠얼스가 9월 10일 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여전히 불신에 가득한 아데나워 수상을 예방하였다. 아데나워는 쿠얼스에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상임위 그룹’(Standing Group)에서 전진 전략을 포기하고 소련이 공격하는 경우 ‘라인-이젤-전선’(Rhein-Ijssel-Linie)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못지않게 불안한 소식은 미국 상원의원 청문회에 관한 것이었다. 그 청문회에서 많은 이가 미국의 일방적인 군비감축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로 근심이 깊어진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긴말 필요 없습니다. 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끝난 것입니다.”     

대담 말미에 아데나워는 1956년 여름부터 그의 온 신경을 끌며 가장 문제가 되는 국제 갈등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바로 수에즈 운하 문제였다. 이집트의 독재자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너무 유약한 조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에서 그와 같은 경험을 이미 히틀러 시대에 해본 적이 있었다. 쿠얼스는 아데나워에게 그 일에 대하여 설명하며 달래려고 시도하였다. 아데나워가 깨달은 사실은 미국이 독일의 재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여전히 주변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동유럽의 게릴라 군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미국의 사절로 온 이들은 래드포드 플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덜레스도 그러한 참모진의 계획에 대하여 언론을 통하여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데나워는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력 분쟁이 발생하면 몇 날이 아니라 처음 몇 시간이 치명적이라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1956년 10월초 주독 프랑스 대사인 쿠브 드 뮈르비에와 만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의 러시아 정책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많은 결정이 덜레스를 거치지 않고 내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9월 말에 미국이 유럽에서 철군하거나 군대 규모를 축소할 의사가 없다는 아이젠하워의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독일과 북대서양조약 기구에 가입한 다른 국가들이 원한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과연 미국 정부가 이 약속을 얼마나 더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아데나워는 1956년 여름과 가을에 벌어진 국제 위기와 맞물린 이 위기에 빠진 독일과 미국 관계를 계기로 이제 프랑스와 유럽에 매우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렇게 전개된 상황은 매우 모순적인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독일이 재무장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 모든 국가가 분열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보다는 유럽에 집중하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탁월한 인물’인 몰레의 정부가 프랑스를 이끄는 것이 최선의 상황이었다. 만약 그의 정부가 무너지게 된다면 선택지는 “독재자 아니면 인민전선”만 남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여전히 유럽연맹을 구성하는 데에 영국의 참여도 촉구하고자 하였다. 1956년 9월 중순 영국 노동당 당수인 게이트스켈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영국 노동당 내부의 우파를 이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는 아데나워가 유럽 국가들의 연맹에 관한 자기 소신을 이야기한 첫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밝혔다. “유럽 국가 연합이 수립되면 어떤 한 국가에게 거부권이 보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소수 국가들이 반대 의견을 제시할 기회는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유럽이 통합된다면 영국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게이트스켈은 그런 아데나워의 구상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비평을 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일주일 후에 브뤼셀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영국이 유럽 연합에 참여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1956년 9월 25일 브뤼셀에서 열린] ‘대가톨릭회의’* 모임에서 한 이 중요한 연설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사망하기 두 달 전인 1967년 2월 16일 자기 유럽 정책에 관한 마지막 연설에서도 다시 언급한 기본적인 구상을 밝혔다.     

* 대가톨릭회의 [Grandes Conferences Catholiques(GCC), 역자주 - 1931년부터 각 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룩한 이들이 모여 브뤼셀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조직된 회의체]     

아데나워가 보기에 유럽 통합의 ‘제1단계’는 이미 완료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럽 민족들 사이의 전쟁은 앞으로 영원히 일으키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한” 단계였다. 그는 낙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말하자면 서유럽) 민족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는 이제 완전히 종료되었다.” 이제 또 다른 문제는 유럽의 통합이 단순히 “유럽의 정치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되어야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이리하여 한때 범유럽 통합운동을 옹호했던 아데나워는 30여 년 전 양차 대전 사이에 쿠덴호베-칼레르기스 백작이 강력히 주장한 그 운동을 1956년 세계의 정정이 불안한 시기에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가 기반을 공고화 하고” 제정 러시아 시대보다 더욱 강력한 “확장”을 추구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미국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어떤 비난도 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어찌 되었든 유럽을 보호하는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호”에 계속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는 이해 갈등이 나타났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갈등이 이를 잘 보여주었다. “세계 강대국 미국”이 주도하고 유럽의 “군소 국가들”이 그에 “종속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그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쇠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시 쿠덴호베-칼레르기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세계 정치의 무대에서 백인이 아닌 민족들의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문화가 주도적인 지위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유럽의 문화를 보존하지 않고 새로운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면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 문화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유럽 민족주의적 정서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여러모로 당시 독일 민족주의 운동이 소국가주의에 맞서 내세운 논리와 비슷하다. “우리가 세상의 새로운 변화에 맞서 민족주의적 정서와 전통에 입각한 많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협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도 협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유럽인들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발전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논조를 펼친 바가 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1950년대 초반에 유럽은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의 ‘발판’이 되었다. 또한 독일은 국제 정치의 대상이 되었고 미국의 주도권은 세계를 안정시켰다. 그런데 이제 독일은 유럽의 주도적인 강대국이 되었고 미국의 주도권은 흔들리고 과거에 비해 매우 커다란 위협에 당면해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유럽 통합 형태는 여전히 문제점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여전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완벽주의’를 ‘우리시대의 질병’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아데나워라는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은 그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 모네나 발터 할슈타인이 늘 내세우는 초국가적 구상도 아데나워가 보기에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유럽 통합은 융통성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최대한 유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초국가적인 기관을 세워 분야별 통합을 이루는 방법은 이제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여러 분야를 ‘하나로 묶어 버리는 탱크’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초국가적 기구의 수립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기구는 다른 나라가 가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공동 목적의 시련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초국가적 기구는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전과 마찬가지로 ‘연방’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단어를 정치적 국가 연합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이 국가 유대에서는 새로운 통합 분야 이외에 기존의 모든 것, 곧 유럽의회, 광산연합, 서유럽을 통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국가연합 구상의 연장선상에서 ‘공동 시장’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것으로 간단히 언급하였다.     

아데나워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 국가들만의 통합에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일단 초기 회원국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고 계획의 진행이 정체될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면 회원국 규모의 확대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브뤼셀의 [대가톨릭대회]에서 한 기조연설은 단순히 외유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때 아데나워는 다양한 차원에서 이 기회를 활용하였다. 1956년 12월 중순 아데나워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인 풀브라이트는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미국이 이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의 유럽의 협력, 영국이 깊숙이 관여하는 서유럽연합(WEU)의 구축, 유럽 공동시장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에 관한 협약을 통한 6개국 공동체의 형성, 끝으로 제도적인 완성에 그도 동의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예측하였다. 몇 해가 지나고 나면 “서유럽연합(WEU), 광산연합, 유럽 공동시장,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하나의 유럽 연방 체제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드골의 영향으로 아데나워가 초국가적인 제도를 통한 유럽 연맹의 수립을 옹호하던 입장을 벗어나 단순한 국가연합 차원의 협력에 찬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드골을 처음 만나기 정확히 2년 전인 1956년 9월 25일 브뤼셀에서 한 기조연설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상당히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기조 연설을 보면 아데나워가 1950년대 중반만 해도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 국가들의 통합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 계속 미적지근한 태도로 나오고 유럽 경제공동체에 대하여 영국이 애매한 자세를 취하고 이중적 태도를 보이자 아데나워도 소규모의 유럽 통합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계획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처음부터 프랑스는 유럽공동시장보다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더 맘에 들어 하였다. 프랑스 측의 협상단은 프랑스가 핵무기를 제조하는 옵션의 확보를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1956년 10월 5일 독일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슈트라우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협약은 독일연방정부에 장점보다는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협약은 핵무기의 통제보다는 독일이 핵무기 개발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미국의 핵우산 정책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그 국무회의가 열리기 2주 전에 아데나워는 내각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사실 독일은 더 이상 미국의 핵무기 보호국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독일의 주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통탄한 것이다. “그러나 덜레스가 당시에 내게 말한 바대로 이 모든 것은 사정변경의 원칙(rebus sic stantibus)에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그러자 슈트라우쓰가 다음과 같이 응대하였다. “그는(아데나워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수립을 통하여 최대한 빨리 핵무기를 자체 생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폰 메르카츠 장관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체결은 우리에게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늘 핵무기에 접근할 길을 열어줄 것이다.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분명히 유럽 차원의 핵무기가 아니라 독일의 핵무기 생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독일의 완전한 핵무기 포기나, 군사적 활용을 완전히 배제하는 원자력 산업에 관한 원칙적인 제한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 영국이나 현재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일이 미국의 핵 보호국의 지위에 머무는 것에 관한 예상과 동시에 소련이 핵무장하는 것에 관한 공포로 당연히 독일도 ‘최대한 신속하게’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서유럽 연맹 조인국의 동의가 필요할 것이었다.     

독일 외무부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무엇보다도 독일이 계약을 연계하는 방법으로 프랑스가 유럽 공동시장 조약에 서명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만 아데나워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그 자체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필요한 경우에는 유럽 공동시장 조약 체결에 앞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조약에 서명하여 이 두 조약을 연계하여 나중에 인준 절차로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비록 아데나워가 여전히 무엇보다도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염두에 두고 핵무기 문제에서는 독일이 핵무기를 자체 생산하는 방법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그는 일단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 공동시장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야 이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은 프랑스의 기 몰레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한 유럽의 발전’과 ‘공동시장 또한’ 바라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10월 19~20일 파리에서 있었던 협상을 마치면서 개최된 중요한 장관회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 뚜렷하게 드러났다. 폰 브렌타노, 에르하르트, 슈트라우쓰가 이끄는 독일 대표단은 여러 조항에서 타협할 수가 없었다. 특히 프랑스가 요구한 ‘사회적 조화’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는 물론 유럽  공동시장에 중요한 사안이 되지만 동시에 사민당(SPD)이 장악하고 있던 독일 정부 내각에서는 신성불가침한 것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피노는 기자회견에서 이 회의가 완전히 결렬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의기양양해서 본으로 귀국하고는 그가 싫어하는 유럽 공동시장 수립 계획이 폐기된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와 견해차가 있으니 유럽 공동시장의 원칙과 제도에 관한 기본조약만 맺도록 하고 상세한 조항 수립 작업은 앞으로 설치된 기관에 맞기고자 하는 그의 생각에 폰 브렌타노와 슈트라우쓰의 동의를 끌어냈다. 그런데 에르하르트가 보기에 원칙적으로 이것도 지나친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영국이 포함된 유럽 자유무역지대 구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한 구상을 담은 30페이지짜리 건의서를 10월 29일 아데나워에게 제출하였다.     

유럽 공동시장 구상에 찬성하는 이들은 할슈타인, 카르스텐스, 폰 데어 그뢰벤, 그리고 룩셈부르크의 프란츠 에첼은 매우 영리하게 작성된 협상안을 프랑스에 지시하고자 한 아데나워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논리로 에르하르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설사 에르하르트의 계획이 더 나은 것이 된다고 해도 헝가리와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독일은 ‘브뤼셀에서 발표한 개념의 원칙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는 10월 31일에 대담을 나누었다. 헝가리 혁명의 운명은 아직 풍전등화와 같았고, 이집트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참전은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문제였다. 엄청난 세계적 위기가 급격히 현실화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르하르트는 수상의 정치적 논리 앞에서 자기 의견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부수상 프란츠 에첼은 측근에게, 경제부장관인 에르하르트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의 대담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독일은 11월 3일에 있었던 분담금 협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파리에서의 협상에 양보를 할 자세로 나가서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자기 요청을 관철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이 와해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독일 외무부에서 유럽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칼 카르스텐스는 프랑스의 로베르 마르졸랭과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파리를 방문하기로 정해진 11월 6일까지 합의를 끌어내라는 아데나워의 지시를 받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자기의 구상과 관련하여 11월 6일 파리에서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과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압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다.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독일 사민당(SPD)은 아데나워의 파리 방문을 수에즈 침공 국가의 수도를 방문하는 꼴이라고 비난하였다. 폰 브렌타노도 그 방문에 대하여 경고의 목소리를 내었다. 훔볼트 대학교에서 행한 강의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동독에서도 언제든 군중 봉기가 발생하여 ‘유혈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수도를 사흘이나 비울 수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프랑스 정부가 이 시기에 유럽 공동시장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에 관한 진지한 협상을 과연 벌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아데나워는 파리 방문 일정을 고수하기로 하였다. 프랑스가 수에즈를 공격한 일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조무래기 독재자였다. 그에게 최대한 빨리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아데나워는 수에즈에 선진국이 관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완전히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태의 진행을 지리적,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맹이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면 유럽은 확실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지중해의 한쪽 해안에는 이슬람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 소련 편에 설 것이다. 그 맞은편에는 공산당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있다.”             

11월 7일 내각 특별 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은 아데나워가 서방 국가의 수에즈 사태 간섭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합니다. 나세르라는 어린 히틀러가 그들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고 있는 것을 그저 방관해야 하는지 그리고 프랑스가 100여 년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프랑스 군의 피를 계속 흘리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 위기의 책임은 영국에 있다. 영국은 1954년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그 당시 이집트 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했음에도 말입니다.” 사실 서방 국가 가운데 더 큰 책임은 미국이 져야 했다. “미국은 정보가 부족하여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아수르 댐 공사를 위한 융자를 갑자기 거부한 것이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정치적으로 중동에서 발생한 가장 심각한 정치적 실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에 맞서 소련에 협력한 일이었다. 이 일로 아데나워의 뿌리 깊은 의심, 곧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분할’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이 일이 바로 내가 1945년 당시 쾰른 주재 미국 사령관에게 한 말이다.’ 이는 아데나워가 수에즈 운하 위기를 회고하며 내각에 한 말이었다. ‘미국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미국은 분할을 택할 것이다.’ 핵무기 시대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았다. “핵무기가 발전하게 되면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곧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전쟁을 벌이든지 아니면 세계를 지배하는 권한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모든 나라의 사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래드포드 플랜(Radford-Plan)은 바로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가 수에즈 위기에서 걱정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와 불가닌의 서신 교환과 미국이 무기감축과 관련하여 태도를 ‘180도’ 바꾼 것도 그에게 충격이었다. 이는 래드포드 계획에 언급된 것으로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 계획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그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러시아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그 성격대로 이를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여 다방면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일단 특히 가능한 경우 연합의 정치적 기능의 강화와 이전에 미국과 맺은 신뢰 관계의 지속을 통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편이라는 방법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이 유럽 대륙에서 군사력을 많이 축소할 때를 대비하여 공동 방위에 초점을 둔 유럽의 정치적 연맹을 추진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독일군의 신속한 증강을 통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아데나워에게서 이러한 뜻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궁극적으로 서유럽 강대국들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수에즈 운하 위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영국과 프랑스가 우리를 러시아에 가장 먼저 팔아넘길 것입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생존하며 뭔가 변화를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군사력을 지닌다면 누구도 우리를 팔아넘길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에서도 프랑스와의 직접 대화를 통하여 유럽 공동시장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구상을 관철시키고자 한 아데나워의 결정은 결코 프랑스나 유럽만을 위한 일방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이것이 서구의 체계와 관련되는 일이기에 아데나워는 결코 양자 선택의 정책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늘 ‘뿐만 아니라’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물론 연맹을 맺는 방법에서 어느 하나를 더 선호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1956년 가을에 이르러 아데나워는 이제 무엇보다도 유럽과의 유대, 특히 프랑스와의 유대를 강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미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아데나워가 이제는 분명히 미국과 무관한 문제 해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하였다. 먼저 지속적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던 미국 대통령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가 병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 백악관에서 누가 미국 외교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지가 불확실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거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서구 여러 나라는 미국의 대통령 예선과 대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11월 2일과 3일 사이 밤에 덜레스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과중한 업무로 갑자기 쓰러져 수술받게 되었다. 그가 정책 결정에 과연 여전히 영향을 행사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행사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수술 과정에서 그에게서 암과 유사한 종양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11월 5일은 미국이 대선을 치르는 날이기도 하였다.     

전 세계가 1945년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와중에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국빈 방문을 결심했다. 다만 원래 3일로 예정된 일정을 하루로 축소하기는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이 탄 특별열차는 11월 5일 밤 본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이집트 지역의 공격 목표에 대한 폭격이 종일 이어진 다음에 영국과 프랑스의 공수특전단 대대가 운하 지역에 투입되었다. 아데나워가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 무렵에 이 특별열차에 마련된 정보부에서 소련이 발표한 성명을 요약한 보고가 전달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이집트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소련은 런던과 파리에 미사일 공격을 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러한 위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대피 선로에 머물던 특별열차는 다시 운행을 시작하여 기차에서 밤을 지새운 아데나워가 아침 8시 정각 파리중앙역에서 역시 밤을 지새운 초청자를 만났다. 프랑스 내각은 새벽 6시까지 회의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폰 에크하르트는 나중에 역사적 사건이 된 이 아데나워의 파리 방문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아데나워가 역사에서 프랑스 대표들과 만나는 자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아데나워를 격렬하게 환영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군 1개 중대를 사열하였다. 독일 국가와 프랑스 국가가 연주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이 행사를 정물화처럼 서서 지켜보았다. 나는 이를 바라보며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를 떠올렸다. 이날 아침의 의미와 그 상징적 중요성은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가장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 때 양국 정부가 긴밀하게 단결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유대가 약화하고 그 상처에서 프랑스가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 방문은 프랑스와 독일 내각의 수반이 함께 상황의 극복을 논의한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건이었다. 이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프랑스 수상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자리를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다. 이 논의는 양국 국민의 생사에 관한 것이었다. 나중에 본에서 회담에 관하여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우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소련의 첫 미사일이 파리에 떨어질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위협에 관한 아이젠하워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회피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전달된 프랑스의 에르베 알판드 대사의 전문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장 수에즈 운하에서 벌이는 조치를 철회하시오!” 실제로 프랑스가 택할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미 영국의 이든이 국제연합이 마련한 휴전결의안을 받아들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각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저지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칼 카르스텐스와 로베르 마르졸랭은 유럽 공동시장과 관련하여 여전히 논란이 되는 문제에 관한 독일과 프랑스 타협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타협안은 별문제 없이 합의되었다. 오후에 나머지 일정이 간단히 처리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회담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 장관들에게 유럽 통합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데나워는 미국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는 폰 브렌타노가 공개적으로 아데나워와 생각이 다르다고 발언해야 될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불가닌이 1954년 비밀 서신을 교환한 이후 지속된 미국 정책의 모호성, 다른 국가들을 희생시켜가면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서로 타협을 보려는 경향, 불길한 레드포드 플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이제 아데나워가 이야기하였고 이를 들은 프랑스 측의 인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위기 때 이루어진 이 방문으로 프랑스의 몰레 정부와 제4공화국 마지막 정부의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이 매우 강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몰레가 얼마 전에 본의 충분한 경제적 배상을 받고서 프랑스가 계속 어려움을 겪은 자를란트 문제를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가 미국에 관한 의구심을 지니고 영국에 대하여 일종의 실망감을 강하게 표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월 6일의 역사적인 회담 이후 프랑스 정부가 유럽 공동시장과 관련하여 새로운 경제적 요청을 제기하기는 하였다. 1957년 2월에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파리를 방문하여 6자 회담에 참석하여 유럽방위공동체(EDC)를 위한 분담금을 충분히 부담할 것을 확언하였다. 이 분담금으로 특히 식민제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가 혜택을 누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수립이 이제 확실해졌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아데나워의 사망 이후에도 지속된 그의 유럽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의 실행도 보장되었다. 이렇게 볼 때 유럽방위공동체(EDC)가 과연 수립될 수 있을지 불확실했던 1956년과 1957년 초에 이룩한 업적이 아데나워의 14년에 걸친 수상 재임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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