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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대서양 연합 II

아데나워 전기 II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싼 고뇌  

   

1953년 9월 6일 총선 승리 이후 1년 동안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과거의 계획과 논란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협상 자리에서 지속적인 공방이 이어졌다. 여기에서 논의된 것은 서방 계획, 동서 협상, 자르 지역 문제, 유럽 정치 공동체, 서방 연합국의 안보 보장, 유럽 대륙 방어에 관한 영국의 참여 문제였다.     

아데나워를 정확히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가장 힘든 기본법, 곧 헌법 문제에 관한 매우 세련된 전략적 협상에서 아데나워가 최대의 장점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제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 강인, 명민한 용의주도가 필요한 단계에서는 아데나워의 바로 이러한 능력이 특히 잘 발휘되었다.      

야당, 그리고 또한 여당에 적대적인 언론은 아데나워가 대안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숙고를 하지 않고 오로지 유럽방위공동체(EDC)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사실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은 파리에서 절대 비준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문제가 장기간에 걸쳐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 일종의 초국가적인 방위공동체라는 혁명적인 새로운 개념을 모든 풀 수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안이라고 계속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실 매우 옳았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이를 과연 확신했던 것인가? 그가 말한 것을 진정으로 믿었던 것인가? 사실 아데나워가 처음에 연합군의 개념으로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통합되는 것을 얼마나 단호하게 추진했던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러한 의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아데나워는 늘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수립되고 나면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확실히 그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 이외의 대안에 대하여 전혀 듣고 싶지 않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헌법 기관에서 이에 관한 비준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무엇보다 1953년 가을 미국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그 자신이 대안에 관하여 매우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이상의 말을 한 바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계속 지연작전으로 나온다면 처칠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해결책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프랑스를 제외하고라도 그렇게 할 요량이었다.     

제2기 내각의 선서일 하루 전에 아데나워는 《뉴욕타임즈》의 기자인 사이러스 슐츠버거와 그의 조카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는 블랑켄호른과 폰 에크하르트도 동석하였다. 슐츠버거는 아데나워와 커피와 코냑을 함께 마시면서 평소에는 아데나워가 매우 꺼리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키웠다. 독일 정부 수반은 이 기자에게 자신이 유럽방위공동체(EDC) 이외에 아무런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의 노선은 분명하였다. 프랑스가 결국에 가서 조약을 비준할 때까지, 프랑스를 철저히 고립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밖으로 내세우면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좌초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파리 또한 거부권 행사를 통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해결책을 방해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사실 프랑스는 여전히 점령국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면 서방이 대서양에 접한 프랑스의 항구들이 긴급하게 필요하지 않은가? 슐츠버거 기자는 그러한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아데나워는 일단 막연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슐츠버거는 ‘그는 미국, 독일, 영국, 터키를 대상으로 한 카드를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있었다.’ 하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데나워 수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와해시키고 다른 연맹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비록 그가 이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말이다.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와해될 때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시에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에 관한 심리적 여파가 엄청날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핵심 주장에 이르렀다. 북대서양조약 기구와 프랑스에 관한 고려 없이 독일과 미국의 연맹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국이 여기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항구를 통하여 보충대를 성공적으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부정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결국 프랑스에 ‘매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에 대하여 괘념치 않을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기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이 곧바로 덜레스나 아이젠하워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몇주 후에 그륀터 장군이 연방정부 수상실을 방문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인 그륀터 장군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프랑스가 비준하는 것에 대하여 의도적인 낙관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핵전쟁 시대에 들어섰음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외교관계를 올바로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아데나워는 먼저 그륀터의 낙관주의적인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유럽방위공동체(EDC)와 관련된 커다란 어려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더 나아가 유럽 정치 공동체와 관련해서 더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를 하는 가운데 그륀터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성사되지 못할 때 독일과 미국 양자 간 협약을 맺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나섰다. 이는 ‘매우 위험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프랑스 영토 깊은 곳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사용하고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125개 군용 공항 가운데 70개가 프랑스 영토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의 유럽 지원물자도 프랑스 공항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아데나워가 슐츠버거에게 무심히 한 말에 관한 매우 엄중한 공식적 답변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유럽방위공동체(EDC)가 무산되면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심리적 충격이 엄청날 것이므로 미국과 독일의 동맹이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보완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동맹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함께하고 이를 확고하게 지지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아데나워의 그런 모든 주장은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1953년 11월 20일 덜레스는 아데나워에게 친서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경고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러 자료를 통하여 ‘특정한 요소들’로 독일의 서방 방위 참여가 유럽방위공동체(EDC)라는 틀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독일 안에서 퍼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덜레스는 모든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완전히 공개적으로’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의 유럽 정책은 ‘프랑스와 독일의 일치라는 지역적 필요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미국이 유럽으로 보내는 자원들도 헛되게 사용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미국은 프랑스와 독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뜻은 전혀 없다고 하였다. 곧 유럽방위공동체(EDC)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르 지역에 관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와 백악관에 있는 자기에게 자르 지역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할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고 하였다.     

이는 잘 알려진 프랑스가 추가한 개념으로 덜레스의 편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파리의 프랑의 의회에서 벌어진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커다란 논쟁에서 자세히 다루어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미국이 그런 식으로 프랑스 편을 들고 있다고 반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아데나워에게 대안에 관한 논의를 금지하면서도 자르 지역 문제에 대하여 양보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가 양보하게 된다면 연정 내부에서나 독일의 여론에서 비판받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영국도 아이젠하워 정부 편을 들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구상하는 일단 중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비도를 불신했고 비도 또한 그를 불신했다. 사이러스 슐츠버거는 이 시기에 불화의 다람쥐 역할을 맡았다. 이 다람쥐는 독일 전설에 나오는 존재로 ‘이그드라실 상록수’*를 오르내리면서 나무 위에 사는 전설적인 존재와 나무 아래에 사는 전설적인 존재 사이에서 상대방에 관한 나쁜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동물이다. 프랑스 외무장관 비도는 10월 아데나워를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본에서는 비도가 프랑스 외무부 문서에 이미 들어 있던 자르 지역 통제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 것을 지워버렸다고 의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비도는 아데나워가 위대한 유럽인이기는 하지만 ‘닳고 닳은 정치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늘 쉬망에 관하여 나쁜 이야기를 했고 쉬망에게는 자신에 관하여 나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철저히 비밀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데나워의 가장 괴상한 성격이었다. 비도가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 ‘이그드라실 상록수’ [Weltesche Yggdrasil, 역자주 – 북구 유럽 전설에 나오는 9개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상록수]     

아데나워는 그 나름대로 비도가 전혀 훌륭한 유럽인이 아니라 프랑스 외무부의 모든 보수 세력의 약해빠진 대변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관한 증거로 아데나워는 자신이 제시한 자르 지역 문제 관련 ‘기본 협정’(accord de principe)에 대하여 자르 주민들이 자유롭게 투표하도록 하자는 구상을 바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아데나워와 바두의 관계는, 바두가 베를린회담에서 모든 독일 문제의 해결은 자유선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서방의 요청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비로소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이 베를린회담이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소련이 서방 강대국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베를린 외무장관 회담 개최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는 파리에서 결정이 내려져 라니엘-비도 정권이 다시 한번 위기에서 벗어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아데나워가 파악한 바로는 소련의 회담 제안은 무엇보다도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파병한 군대는 이미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베트남독립동맹회*는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공산화된 중국을 끌어들인 후일의 5자 회담을 프랑스에 강요하고 있었다.     

* 베트남독립동맹회 [Viet Minh, 역자주 – 호치민 주도로 베트남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들이 결성한 단체]     

아데나워는 이제 몰로토프*가 인도차이나에 관한 프랑스가 받아들일 만한 제안을 하여 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을 포기하도록 강요할지 모른다고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가 곧 열리게 될 전승국 4자회담에 대하여 늘 지니고 있던 우려가 다시 제기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덜레스 자신도 이 소련의 제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10월 중순이 되자 미국 국무성은 주요 미국 대사들에게 전문을 보냈다. 아데나워는 서방이 바로 그의 요청으로 회담에 관한 동서 간의 각서교환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미국이 매우 서둘러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할슈타인은 이제 버뮤다에서 개최되는 서방 3개 강대국의 정상회담에 앞서 다시 한번 존 포스터 덜레스를 찾아가 이제 미국이 그러한 구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만족할만한 정도로 분명히 전해 들었다. ‘그는 현재 러시아가 받아들인 4자회담이 결국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회담은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 프랑스, 독일의 여론의 기대를 고려해 볼 때 개최는 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기왕 개최해야 한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1954년 1월 1일에라도 개최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회담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그 이전에는 프랑스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하여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몰로토프 [Vyacheslav Mikhailovich Molotov, 역자주 – 1939~1949, 1953~1956년 두 차례 소련 외무장관을 역임한 인물]     

할슈타인이 보낸 전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 “덜레스답군요.”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이미 버뮤다를 향하여 출발한 처칠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곧 서방 국가들이 너무 서둘러 4자회담에 임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회담 결렬의 가능성에 관한 이유와 관련하여 합의를 일단 먼저 이루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만약 소련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면 서방의 여론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는 미국의 뜻에 굴복하였다. 할슈타인의 전문이 도착하자마자 코넌트 교수는 만족한 어조로 미국에 보고할 수 있었다. 곧 아데나워 수상이 이제는 4자회담의 조속한 개최에 동의한다고 전한 것이다. 다만 그 회담은 짧게 진행되고 충분한 성과를 거두어 프랑스가 마침내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비준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프랑스의 조약 비준 과정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이는 미국의 과시적인 낙관주의와는 상관이 없었다. 1953년 12월 중순 파리에서 덜레스와 만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덜레스가 말한 대로 일단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비준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자신이 파악한 상황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프랑스 의회에서는 301명의 의원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찬성하고 300명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것이 현재의 여론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 중요한 시기에 프랑스 농업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프랑스에서 포도주와 고기를 독일로 많이 사 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비도에 관하여 이제 아데나워와 덜레스는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생각에 프랑스 제4공화국은 여전히 부정적인 상황에 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유럽 전체는 하나의 강대국이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아데나워와 덜레스는 베를린회담이 조속히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덜레스는 버뮤다회담의 결과에 대하여 통보하였다. 베를린회담은 2~3주 동안 진행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차라리 4~5주 정도 진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는 독일의 여론을 철저히 의식한 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헤어질 무렵 아데나워는 덜레스에게 러시아와 조만간에 만나되 신속히 마무리하고 많은 인내를 발휘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나중에 아이젠하워는 자신과 덜레스의 바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회담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아데나워가 덜레스를 만난 중요한 성과 중에는 그가 베를린회담 준비 모임에서 3개 서방 강대국의 자문으로 그르위스 교수를 선택할 것을 약속한 일이다. 이리하여 독일 연방의회에서 사민당(SPD)도 참여하여 1953년 6월 10일 제정한 독일 통일의 세부적인 절차를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① 동독을 포함한 독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자유선거 실시. ② 전체 독일을 관할하는 자유 정부의 수립. ③ 이 정부와 자유롭게 체결하는 평화 조약. ④ 이 평화조약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동부 지역의 모든 영토 문제의 정리. ⑤ 기본법헌법과 국제연합의 틀 안에서의 전체 독일을 대상으로 하는 의회와 정부의 활동의 자유의 보장.” 아데나워는 사실 소련이 위에 언급된 ①항에 대해서 양보할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단순히 과거 소련이 제시했던 서독과 동독이 나란히 참여하는 독일 정부의 구성을 또다시 요청하고 국제적인 감시 아래 전체 독일이 자유선거를 치르는 것은 반대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갑자기 베를린에서의 독일회담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때 서방은 심사숙고하여 수립한 제안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본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독일의 제안을 그 회담 계획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매우 필요한 일이 된 것이다.     

이제 매우 중요한 과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버뮤다회담의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아데나워는 12월 8일 독일 연방정부 내무부 장관이 이끄는 내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베를린회담을 위한 자료를 최대한 신속하게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무회의록에는 연방정부 수상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른바 전체 독일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어떤 경우든지 일단 전체 독일 정부의 과제는 국민입법회의에 넘겨져 결의안 채택에 필요한 헌법 초안을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데나워 수상은 이와 관련하여 전체 독일 정부가 수립된다고 하여도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의 합법성을 문제 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각은 이러한 구상에 동의하였다.     

얼마 안 가서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다. 많은 사람은 자유선거로 구성할 정부가 즉각 전체 독일에 대하여 행사하는 권력을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요청의 목적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전체 독일의 정부가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을 즉각 해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1951년 전체 독일의 선거를 위하여 연방의 헌법기관들이 의결한 법률도 이와 비슷한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자유선거로 수립된 국민입법회의는 이에 따라 법치 국가의 질서 수립을 목적으로 한 행정 권한도 지녀야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와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12월 11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유선거로 수립될 국민입법회의가 유일한 헌법 제정 권한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분명히 그는 여기에서 독일기본법 제146조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이 기본법은 독일 국민이 자유롭게 결정한 헌법이 발효된 날에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독일 국민이 자유로운 투표로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한다면 동독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어떻게 해산해야 하는가? 자민당(FDP) 소속 특임장관인 쉐퍼는 이와 관련된 아데나워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국민은 국민입법회의를 선출할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소비에트 통치 지역에서 새로운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 우리 측에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이 진행된다고 해도 그러하다. 이것이 아데나워의 구상이다. 이렇게 하면 역사를 완전히 뒤집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해진다. 그런데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잠정적으로 행정도 대신하는 국민입법회의를 수립한다고 하여도 이 기관은 기반의 부족으로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인 행정만을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되고 새로운 선거와 더불어 소련 통치 지역의 정치 세력을 최대한 신속하게 규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잠정적인 행정부를 해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선거가 치러지게 되자마자 상호 협상의 조속한 시작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협상은 경제와 그 밖의 분야에 관하여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서 소련 통치 지역의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새로운 선거가 치러지는 것이 다시 한번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선거는 우리가 실시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유사해야 한다.”     

올렌하우어와 아데나워가 여전히 깊이 불신하던 베너와의 대담에서 사민당(SPD)도 이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세우게 되었다. “국민입법회의가 선출한 전체 독일 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곧 서독), 소련 점령 지역(곧 동독), 베를린에 관한 행정부 권한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점령 지역의 주민들의 상황을 쉽사리 개선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입법회의 선거와 동시에 소련 점령 지역의 주에서도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면서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사민당(SPD) 대표들이 그러한 구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른바 이 ‘삼각 구상’은 사실 서방 열강들의 베를린회담 준비계획에 반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자유선거를 통한 전체 독일 의회는 전체 독일 정부 수립에 필요한 예비적인 권한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독일연방정부(서독 정부)와 동독 정부는 기존의 권한을 변함없이 지니도록 하였다.     

회담 준비서류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은 동독 지역에서 서독 지역과 나란히 선거를 치른다는 구상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코넌트와의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서독과 동시에 치르는 동독 최고인민회의와 동독의 주 차원의 선거에 관한 구상에 대하여 그를 설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련은 이미 첫 번째 제안, 곧 자유선거 자체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추구한 통일 정책에 대하여 이러한 중간 과정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그러한 제안이 건전한 인간 이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그로부터 37년이 지나고 나서야 증명이 되었다. 아마도 실천가인 아데나워가 실제로 가장 실천적인 구상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일단 아데나워의 시각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발생하는 만약의 때를 대비한 계획이라는 사실이다. 그 일은 바로 소련이 베를린회담에서 자유선거 문제에 대하여 협상의 여지를 보이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진 계획에도 상당 부분 확정된 내용이 담겨있었다. 많은 내용이 새어 나갈 것이고 이와 동시에 먼 미래를 내다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의 기획 참모들의 관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열릴 회담에 대해서도 이전의 정책합의서를 참고하는 것이다. 1954년에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는 나중에 실현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구상이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말이다.     

아데나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임스 코넌트는 베를린회담이 개최된 지 1주일이 지난 1954년 1월 21일 폰 브렌타노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아데나워 수상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너무 지나친 조심성이다. 그래서 그러한 복잡한 성격으로 제기한 제안들은 여론이나 독일 연방의회의 주요 정치가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거의 모든 사람과 대척 관계에 있었다. 소련이 그러한 계획을 받아들일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동독의 인민경찰의 규모도 축소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게르스텐마이어, 틸만스, 크로네, 그리고 테디에크 차관의 의견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사민당(SPD)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자민당(FDP)의 상당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야당과 자민당(FDP)의 비판적인 인물들은 이 문제에 관한 아데나워의 입장을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곧 아데나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관철하고자 하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자유선거에 관련된 소련의 양보 자세에 관해서는 더욱 어려운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를 의심하는 영국의 관찰자들은 확실히 아데나워의 당리당략적 생각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민당(SPD)이 두려워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곧 전체 독일에서 실시되는 선거 이후에도 아데나워는 독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전체 독일을 통치하는 정부를 본의 연정을 모델로 수립하려는 결심을 굳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위위원회의 영국 측 위원인 호이어 밀라 경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도 있었다. 사민당(SPD)은 전체 독일 선거에서 30%에서 정체되고 있는 득표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에 전체 독일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가 행정적 권한도 계속 유지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호이어 밀러 경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서 전형적인 독일적 논쟁 주제를 다루게 된다. 이는 법률적으로 행정의 주체를 다루는 것으로 완전히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아데나워의 입장을 살펴보면, 가망은 거의 없지만 소련이 양보할 준비가 된 경우에도 독일 통일 과정에 관한 통제를 결코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할 지경까지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4주 이상 진행된 베를린회담이 끝날 무렵 모든 것이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자기 무죄를 내세웠다. 소련의 새 정부도 독일의 자유선거라는 도박을 무릅쓸 마음이 없었다고 한 것이다. 소련 정부는 1952년 초에 커다란 소란을 불러일으켰던, 전체 독일 정부가 결합될 자유에 관한 전망을 전혀 용인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각서를 분주히 교환하던 때 비하여 상황이 근본적으로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서독의 군인들은 전혀 무장되지 않았다.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운명은 여전히 불확실하였다. 소련을 포함한 모든 세계강대국은 명백히 핵무기 시대에 돌입하였다. 그래서 지상군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소련의 일방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은 이미 1952년 초반에 스탈린도 인지하고 있었다. 1953/54년 겨울의 핵무기라는 요소는 유명한 각서교환 시기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소련은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킬 생각도, 그렇다고 평화를 이룰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독일 문제는 소련의 시각에서는 여전히 전체 중부와 동부 유럽의 동유럽 블록과 관련된 문제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이데올로기적 동기와 안보 정책의 이유에서도 동유럽 블록을 확고하게 장악하고자 하였다.     

미국 국무장관이 실패로 끝난 베를린회담을 마치고 2월 18일 늦은 밤에 45분간 쾰른반(Köln-Wahn)을 잠시 들렀을 때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덜레스와 아데나워는 서로 뜻을 확인하였다. 덜레스는 솔직하게 아데나워 수상이 ‘이 회담을 개최하여 끝까지 진행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회담은 러시아와는 아무런 타협을 볼 수 없음을 세계에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곧 미국 측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3월 말이 지나기 전에 비준해 달라고 요구하며 새로운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었다. 미국과 프랑스가 이제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한 양보를 할 의지를 보여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26일 제네바에서는 인도차이나회담을 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담에서 프랑스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더욱 희망이 없어 보이는 식민지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였다. 이 회담이 시작되면 몰로토프는 파리가 받아들일 만한 인도차이나 해결책에 관한 응답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궁극적으로 와해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그 이전에 성사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일단 아데나워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다. 곧 그는 이제 자르 지역 문제에서 반 나테르스 플랜*을 바탕으로 한 유럽화 해결책을 놓고 협상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에는 아데나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19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항은 서방 3개 강대국과 더불어 독일연방공화국이 평화적 해결책의 마련에서 자르 지역의 유럽화를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에 관하여 독일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 뻔했다.     

* 반 나터스 플랜 [van Naters-Plan, 역자주 - 1954년 네덜란드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얀 반 나터스가 제안한 계획으로 자를란트를 유럽 자치구로 만들어 중립적인 위원장의 지도로 유럽평의회(CE), 유럽 석탄 및 철강 공동체(ECSC), 유럽 방위 공동체(EDC)의 본부로 삼아 자르 지역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덜레스는 자르 지역 문제에서 그가 익숙한 전략을 추구하면서 이 복잡하고 여러모로 매우 기술적인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사실 아데나워 수상이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문제였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정치가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했던 약속이 다시 언급되었다.     

이렇게 하여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한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데나워에게 이 협상은 과거의 협상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프랑스의 입장은 3월 초에 모리스 쉬망 외무차관이 작성한 자르 지역 문제 건의서에 잘 나타나 있었다. 블랑켄호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유럽의 색깔을 칠했지만, 완전히 프랑스 중심의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위기를 느낀 아데나워는 통상적이지 않은 조처를 했다. 할슈타인 차관은 외무부에서 자르문제 담당하는 전도 양양한 롤프 라르를 자를란트 주지사인 요하네스 호프만에게 아무도 모르게 보낸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자르 지역 문제가 커다란 어려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르 지역 정부의 독일계 정치가들의 협력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독일계 정치가들은 분리주의자들이었고 친독 야당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서 프랑스 권력에 더욱 의존하였다. 그래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가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 연방의회의 모든 정당은, 그리고 초반에는 아데나워 또한 이 친독 정당들의 수립 승인을 얻어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정당들이 지방선거에서 과반수의 득표를 하게 된다면 프랑스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그들과의 협력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자를란트가 경제적으로 프랑스에 종속되는 것이 자르 지역의 경제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났다. 독일의 민간 투자가 중지되었다. 라인란트와의 자연스러운 경제적 관계가 인위적으로 제한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생활 수준이 훨씬 높아졌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30년 정도가 흐르면 프랑스가 통제하는 기업들의 집중적인 채광으로 말미암아 석탄 매장량도 고갈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되면 자를란트 철광 업계의 미래도 전혀 보이지 않게 될 노릇이었다. 그래서 호프만이 이끄는 정부에도 경제적으로 프랑스의 일방적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등거리 노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아데나워가 정확히 파악한 대로 장기적으로 볼 때 서독의 자연스러운 경제적 우위가 이 작은 나라를 독일연방공화국의 궤도로 끌어들이는 데에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는 프랑스에 의존하는 자를란트의 기득권 세력과 접촉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과거의 경험으로 외부 세력의 점령 상황에서 최악을 피하려고 전략적 협력을 하다가 강경한 분리주의로 얼마나 쉽게 넘어가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라인란트 점령과 관련된 은밀한 의심을 여전히 받고 있었기에 결국 자를란트의 분리주의자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아데나워는 그들을 정서적으로 무심하게 대하고 있기도 하였다.     

실제로 아데나워는 자를란트의 친독 정당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그것도 매우 심각한 정도의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당 동료인 후베르트 네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멍청한데다가 민족주의자인 인물로 여겼다. 네이가 1952년 9월 기민당(CDU) 전당대회에서 아데나워가 있는 자리에서 인사말을 하고 난 다음에 아데나워의 그에 관한 판단은 굳어지게 되었다. 자르 지역 출신의 이 기민당(CDU) 정치가는 그 인사말에서 나치를 추종하던 노동자 시인 하인리히 레르쉬의 시를 인용하였다. “제국이여. 제국은 우리와 함께하고 자르 민족은 자유로워야 하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는 완전히 나치식의 발언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깃발을 들어라.’라는 구절로 인사말을 마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였습니다.”      

아데나워는 자르자유당(DPS) 당대표인 하인리히 슈나이더는 더욱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르 지역의 아데나워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슈나이더는 1931년 나치당에 가입하였으나 변호사로서 정치적 박해자를 변호했기 때문에 1937년에 출당 조치를 당했다. 기민당(CDU) 대표단에서 격론이 벌어졌던 1953년 초에 아데나워는 슈나이더의 나치 전력을 잊을 수 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야콥 카이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수상님,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잊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존경하는 카이저 선생, 저는 그리 쉽게 잊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늘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논쟁이 격화될수록 아데나워는 ‘나치 당원’ 슈나이더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내부적으로 더욱 심하게 하였다. 아데나워가 슈나이더를 싫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정치적 동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슈나이더는 당 동료인 리하르트 베커와 공모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의 자민당(FDP)과 연대하여 아데나워의 자르 정책에 맞서 공개적으로 소란을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뢰클링 가문 출신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불신하였다.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그 인물들이 헤르만 뢰클링을 마치 독일의 자를란트를 위하여 희생된 순교자로 떠받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그 인물들이 독일연방공화국을 겁박하여 뢰클링공장을 결국 커다란 이익을 남기고 프랑스의 중공업계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민당(CDU) 의원인 헬비크가 아데나워에게 거의 노골적으로 말한 대로 죽은 이에 대한 아무런 근거 없는 명예 훼손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1954년에 이미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연방공화국과 자를란트가 자기 자르 정책에 대하여 반대한 것 때문에 자르 지역 반대파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다란 압력을 받으면서 아데나워가 라르의 호프만 방문을 통하여 어쩌면 그와 비밀스러운 협력을 할 수 있을지를 떠보려고 한 것은 그 나름으로 논리가 있는 시도였다. 특사 라르는 자를란트 주지사와 포도주 3병을 나누어 마시고 나서 이 노련한 지방정치가가 “비더만과 같은 거만한 자세를 하고 동시에 두꺼운 뿔테안경 뒤의 작은 눈에서는 교만이 흘러나왔다.” 그런 자가 분리주의자로서 도덕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데나워와 기꺼이 접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호프만도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프만은 아데나워가 그와 공개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당시 아데나워 수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르 지역 문제로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분열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상에 강경 자세로 나오는 프랑스의 외교 정치가들과의 위험한 협상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의회가 승인한 반 나터스 플랜에 관한 문서가 제출되었고 관계자들은 이 문서를 가지고 세밀하게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고급호텔인 메종 루즈에서 아데나워와 프랑스 민중공화운동*의 피에르 앙리 티젠은 자를란트의 유럽화를 전제로 한 합의를 맺었다. 할슈타인과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이 타협이 이루어지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민중공화운동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 MRP, 역자주 – 1944년 창립 1967년 해산된 프랑스의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의 급진 정당]     

분명한 것은 자르 지역의 유럽화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발효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에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 빨리 보장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평화 조약의 유보에 관련된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러나 비도와 프랑스 외무부는 다시금 아데나워의 구상에 반대하여 메종 루즈에서 맺은 합의가 무산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제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추가 조약에 관한 협상도 시작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요구를 다시 제기한 것으로 이제와서 엄청나게 강조하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소용이 없게 되었다. 라니에-비도 정부가 6월 12일 인도차이나 문제로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는 그사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글 안에 있는 디엔비엔푸 요새가 장기적인 포위 작전 끝에 함락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이 미국과 중국의 참전으로 새로운 대규모의 극동 전쟁으로 확대될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도 이미 소요가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튀니지와 모로코에서 폭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유럽방위공동체(EDC)는 프랑스의 예측할 수 없는 식민지정책과 국내 정치에서 놀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특히 심각한 일은 프랑스에서 민중공화운동(MRP) 소속 각료들이 물러나게 된 일이었다. 피에르 망데스-프랑스가 이제 수상으로 선출되어 기민당(CDU)의 자매정당이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데나워의 유럽 정책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척을 보였던 것은 프랑스 외무부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민중공화운동(MRP)이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비도마저 영원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44년부터 1954년까지 두각을 나타낸 이 인물은 실각하고 8년이 지난 후에 묘한 상황에서 아데나워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알제리 전쟁이 한창일 때 비도는 더욱 우파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지하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육군결사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1963년 초에 그는 드골의 추적자를 피하여 바이에른에 숨어 있었다. 그는 이제 1948년부터 1954년까지 그와 함께 일하고 맞서기도 했던 인물을 기억하였다. 그 인물은 이제 거물이 되었는데, 비하여 비도 자신은 야생 동물처럼 쫓기는 몸이 되어 있었다. 1963년 3월 8일 자로 아데나워에게 보낸 매우 혼란스러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독일과 프랑스의 우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가장 연장자’로서 이제는 ‘쫓기는 들짐승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하소연하였다.      

* 프랑스 육군결사대 [organisation de l’armee secrete, O.A.S. 역자주 – 극우파 프랑스 군인으로 구성된 불법 단체]     

비도가 두려움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와 마찬가지로 육군 결사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아르고가 체포된 데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육군 결사대의 경쟁 집단이 뮌헨의 호텔에서 그를 강압적으로 체포하여 비밀히 국경을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비도가 육군 결사대를 배신하고 드골 암살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도는 이미 3일 전에 민족저항위원회 의장 자격으로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보낸 독자 기고문에서 ‘드골주의자 경찰 무리’가 그를 체포한 것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했었다. ‘이들은 대부분 범죄 전력이 있고 ‘비밀경찰들’(Barbouzes)로 불렸다.‘ 그러니 아데나워가 이 편지를 열지도 않은 채 반송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그 편지를 받는 것조차 거부했고 검찰총장에게 이 사안을 통보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편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여당 대표단에게 말하고 정치적으로 비도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아데나워는 ‘비도가 여러 외교 관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직접 연락을 취한 것이 대하여’ 매우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비도는 아데나워를 불편한 지경으로 몰아간 것이다. 중요한 사안은 망명 허가에 관한 법적인 측면이었다. 여기에서 비도가 기본법의 차원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고있는 인물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독일연방검찰은 비밀결사의 죄목으로 그를 조사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러한 결정은 바이에른 주 정부가 내려야 했다. 여기에서 독일연방정부는 단순히 자문의 역할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비도는 이제, 분명히 본의 입김이 작용하여, 바이에른 경찰의 엄중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아데나워에 관한 원망을 가슴에 품은 채로 그는 일단 독일을 떠나 포르투갈을 향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남미의 국가로 출국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변했고 이제 아데나워를 가장 배은망덕한 인물로 여기는 정치가가 한 명 더 늘게 되었다.     

1954년 초여름이 되자 아데나워가 때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민중공화운동 (MRP)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 정책이 역풍을 만나게 된다. 그때까지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젊은 근본주의 사회주의자 총리인 피레르 망데스-프랑스와 아무도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매우 중요한 지난 9개월 동안 프랑스 외교를 매우 독특한 방향으로 이끌며 그의 신선한 성격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이 새로운 인물을 증오하며 계속 지켜보던 아데나워는 민중공화운동(MRP) 측에 관한 나쁜 소식만을 들었다. 그는 아무런 신앙이 없는 정교분리주의자였다! 그는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인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제국을 해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관료로써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이 경제적 강대국이 되는 것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막고자 한 것이다! 1954년 7월 7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신임 총리인 망데스-프랑스가 독일의 서방 조약을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것인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망데스-프랑스는 ‘어느 모로 무늬만 볼셰비키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전선 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특히 의심스러운 것이 제네바에서 개최된 인도차이나회담이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미 완전히 희망이 없는 상황인데도 중공(Rotchina, 공산화된 중국)이 프랑스와 왜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지 당연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그 대가로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지연시키거나 와해시킬 것을 약속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매우 불길한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도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의 추측으로는 망데스-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를 일단 연기시키고 이른바 ‘힘을 집중하기 전략’(Hau-Ruck Verfahren)의 일환으로 먼저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고, 그러고 나서는 북아프리카에서 신속한 양보를 하여 상황의 안정을 가져오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1954년 6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선거에서 기민당(CDU)이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 데에 모든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르놀트 주지사에게 미델하우베가 이끄는 자민당(FDP)과 연정을 하여 중도우파 정권을 수립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아데나워는 연방 헌법수호청* 부장인 오토 존이 서독을 배신하고 동베를린으로 넘어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 연방 헌법수호청 [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역자주 - 독일 국내 안보 담당 부서]     

그러나 망데스-프랑스는 해외의 위기가 일단 정리되자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자 프랑스에 관한 아데나워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새로운 프랑스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이 추가 협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무엇보다도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초국가적 내용의 실행을 8년간 유예하고 모든 회원국의 사후 거부권을 보장하고 군사적 통합은 오로지 ‘보호군’(armees de couverture)에만 한정된다는 협약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에 군대가 주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놀라고 분노하였다. 프랑스의 요청대로라면 아마도 모든 관련 국가에서 새로운 비준 절차가 진행되어야 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는 이미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파기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프랑스가 독일을 희생양으로 삼아 모스크바와 합의를 이루고자 할 것이라는 그의 오래된 우려가 옳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사태의 진행 시점을 정확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길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1954년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브뤼셀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관련 긴급 회담이 개최되기 몇 분 전에 이탈리아의 가스페리의 사망이 알려진 것은 초국가적 조약에 나쁜 징조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회담은 극소수의 대표단만이 모인 채로 개최되었다. 이 또한 이 회담이 매우 어렵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사실 뷜러훼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서둘러 돌아온 아데나워는 이 회담에 더 이상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외교적으로 부러울 만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폴-앙리 스파크가 이 회담의 의장직을 맡았다. 그는 1954년부터 벨기에 외무장관 직무를 수행한 인물로 아데나워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몇 주 전에 슈트라스부르크의 메종 루즈에서 협상이 벌어졌을 때 처음으로 아데나워를 만났고 자르 지역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가 커다란 양보를 할 자세를 보인 것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 터였다. 그래서 스파크는 예비 논의에서 아데나워에게 좋은 충고를 하였다. 곧 아데나워가 78세의 나이를 핑계로 하여 망데스-프랑스와의 만남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망데스-프랑스는 회담 개시 전날 밤에 아데나워와의 만남을 희망했었다. 만약에 그를 만난다면 프랑스는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하여 새로이 아데나워의 양보를 요청할 것으로 여겨졌고, 그런 경우 독일이 ‘검은 페터’*를 떠안게 될 것이 뻔했다. 아데나워는 이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4일 동안 망데스-프랑스와의 면담을 미루었다. 이 회담이 결렬되고 나서야 아데나워는 서면으로 망데스-프랑스와의 만남을 요청하였다.     

* 검은 페터 [schwarzer Peter, 역자주 – 동명의 카드놀이에서 지는 것을 의미]     

망데스-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회담장 주변에서는 미국 대사가 망데스-프랑스를 반대하는 5개 국가 대표들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14장에 달하는 프랑스 측 제안서를 조목조목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에 참가한 이들은 망데스-프랑스가 회담이 결렬된 것을 가지고 프랑스 의회에서 조약 비준이 무산되어도 자기 정부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핑계로 삼을 요량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나중에 폴-앙리 스파크는 망데스-프랑스가 회의 중간 휴식 시간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잘 정리된 연설의 초안을 보여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그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합의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 이는 우리의 노력이 수포가 된 것이 확실해지면 저는 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떤 프랑스 총리도 협상에서 아데나워를 그렇게 편하게 해준 자는 없었다. 아데나워는 나중에 독일연방 대통령인 호이쓰에게 보고한 대로 회담에서 완전히 뒤로 물러나 프랑스의 요청에 관한 즉각적인 반대를 하는 다른 회담 참가자들의 의견을 듣기만 하였다.     

이제 망데스-프랑스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모든 회원국이 독일이 통일되면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탈퇴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까지 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독일조약 제7조 3항의 내용에 반대하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 조항은 통일되고 나서의 독일의 활동 자유를 다루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특히 분노한 것은 이제 전혀 설득력이 없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통일된 독일은 조약에서 벗어날 권한이 없다.”      

이는 분명히 옳지 않고, 베를린회담에서 서방의 전략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아데나워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결론적으로 상당히 뻣뻣한 자세로 독일연방공화국과 서베를린이 전체 독일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고 동부 지역의 독일인들도 서독의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망데스-프랑스가 반박하며 비도, 이든, 덜레스는 베를린회담 때 통일된 독일의 조약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협상일 밤에 관하여 폴-앙리 스파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아데나워는 정말로 탁월한 인물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인물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아데나워가 수상 자리에 있는 동안에 독일 문제를 반드시 매듭지어야 한다. 아데나워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필요한 때 양보할 줄 아는 인물이다.”      

회담 끝에 이루어진 아데나워와 망데스-프랑스의 만남은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망데스-프랑스는 아데나워에게 자기 모친이 알자스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배울 수 있었다고 한 것이다. 자기가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하였다. 대담 중에 망데스-프랑스는 유럽방위공동체(EDC) 협약이 기존의 형태대로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다면 비준이 무산될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말하였다. 프랑스 의회의 다수를 간단히 설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망데스-프랑스와의 대담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말해본다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망데스-프랑스 씨가 자기 가장 좋은 면을 보여 주고자 노력한 것이 결코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망데스-프랑스의 노력이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데나워가 대담 이후 2주가 지난 다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아데나워가 망데스-프랑스에게서 받은 인상을 말해보자면, 망데스-프랑스가 능력 있는 경제 정치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으로(인도차이나, 북아프리카, 경제적 권한 위임과 같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정치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그러나 파악하기 불가능하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정치를 하면서 매우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이를 눈치채자 프랑스 의회는 이미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 관하여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대책 마련이 이미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바로 드러났다. 곧 많은 의심을 받던 망데스-프랑스가 강경하든 온건하든 파리의 모든 유럽 통합주의자가 이룩하지 못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을 서방의 안보 체계에 지속적으로 결합시키는 조약들을 관철한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초에 이것이 제대로 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전에 망데스-프랑스도 1948년 비도가 맞이한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 당시 비도는 독일연방공화국 수립을 이끌어 낸 런던 의정서를 관철한 바가 있었다. 망데스-프랑스는 실각하였고 비도와는 달리 다시는 정치적 복귀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역사적 업적은 다음과 같았다. 곧 프랑스가 희망이 없는 식민지 전쟁의 부담을 줄였고, 처음부터 잘못 구상된 조약 초안과 관련하여 아데나워의 짐을 덜어주었다. 이 조약은 살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폐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파산 관리인이자 프랑스의 실패한 개혁가는 독일연방공화국을 서방에 연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아데나워에게 선행을 베푼 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그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고 유럽 통합의 기회를 놓친 것, 곧 1954년 8월 30일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를 비난하였다.

     

세계 강대국으로의 복귀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좌절되었다는 소식은 아데나워가 뷜러훼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전해졌다. 아데나워는 20세기 초반 양식으로 지어진 이 호화로운 건물을 좋아하였다. 이 건물은 슈바르츠발트 북쪽에 있는 산기슭 언덕 위에 높은 전나무에 둘러싸인 낭만적인 성처럼 보였다. 아데나워는 거기에서 라인탈 넘어 멀리 포게젠의 푸른 능선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곳의 직원들이 이 위대한 인물을 위하여 제공하는 편의와 사려 깊은 배려를 즐겼다.     

근본적으로 뷜러훼헤의 성 모양의 이 호텔은 샤움베르크궁과 유사한 모습의 건물이었다. 이 두 건물 모두 황제 시절에 지어진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에게는 이때가 여전히 ‘벨 에포크’*였다. 이 두 건물의 건축양식은 절충주의적인 졸부(nouveau-riche)를 위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멋진 것으로, 황제 시대 이후의 건물들에서 볼 수 있는 멋이 없고 기능적인 것과는 달랐다. 언론이나 그의 각료들이 반은 존경에서 그리고 반은 비꼬는 마음에서 아데나워가 여기에서 “발터 할슈타인,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등과 ‘유명 농장(Notabler Hof)’” 세웠다고 말했다. 이런 평이 그에게 어울렸다. 아데나워는 가끔은 공화정의 군주처럼 행동하거나 우아하게 휴가를 보내는 것이 여론을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 벨 에포크 [belle epoque, 역자주 – 원래는 불러전쟁이 끝난 189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4년까지 유럽에서 평화와 번영이 있던 시기]     

그는 여기에다 욕심이 없는 모습을 가미하였다. 폰 에크하르트는 “뷜러훼헤에 있는 수상의 집무실이 협소하고 매우 소박한 것”에 대하여 상당히 놀라워했다. 아데나워는 의사인 슈트로만 박사가 자기를 돌보는 것에 매우 만족했고, 그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쉽게 본에서 소환할 수 있었기에 1953년부터 1956년까지 그는 이 아름다운 장소를 자주 이용하였다. 주로 2일 정도 머물렀지만 가능한 경우에는 2주 이상을 이 속에서 머물 때도 있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바람에 1954년의 여름휴가는 망치고 말았다. 망데스-프랑스가 자기 결심을 통보한 8월 둘째 주에 여름 의회의 휴회를 전후하여 프랑스 의회에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비준안이 상정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불쾌한 심정으로 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브뤼셀회담에 억지로 참여하고 난 다음에 다시 ‘별장’* 뷜러훼헤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본에서는 한편으로는 위기관리 체제가 유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대한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 별장 [Palacio del Buen Retiro, 역자주 – 원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유명한 궁전을 지칭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별장을 의미]     

파리 주재 독일 총영사 빌헬름 하우젠슈타인과 칼 프리드리히 오필스, 그리고 본의 블랑켄호른은 유럽 방위 문제에 관한 초국가적인 해결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블랑켄호른은 자기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비관적인 분위기를 적었다. 초국가적인 유럽의 통합은 ‘수십 년 동안 실패해왔던 것’이었고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이 거부된다면 우리는 히틀러 바람이 일기 전인 1929년만큼이나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아이젠하워와 처칠을 정상회담에 초대하고자 한 그의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어쩌면 브뤼셀 협상의 결과를 바탕으로 마지막 순간에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서 생각해 본 것이었다. 아이젠하워와 처칠은 겨우 프랑스 정치가들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한여름 더위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전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는 아데나워 자신도 포기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8월 31일 아침 10시에 할슈타인, 글롭케, 블랑켄호른과 함꼐 뷜러훼헤를 찾아왔다.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가 그토록 비탄에 젖고 우울해하는 모습은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데나워 수상은 이 논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아데나워는) 이제 차후의 독일 정치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였다.      

①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 유럽 방위의 통합은 포기한다.

②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다.(독일이 두 지역으로 갈라져도 마찬가지이다.)

③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다.

④ 다른 국가의 군대가 독일연방공화국에 주둔하는 것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다.”     

이러한 발언은 아데나워의 내면적 생각을 들여다보는 데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아무런 구체적인 해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영향도 – 곧 측근, 내각, 여당, 워싱턴과 런던의 영향도 그다음 순서로 미치는 것일 뿐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다시 살리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일단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유럽 정치 자체에는 계속 매달리고자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럽의 경제적 통합의 길이 너무 서둘러 나와서 결국 난관에 봉착하게 된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비해 훨씬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9월이 지나면서 블랑켄호른이나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와 같은 정치가, 그리고 벨기에의 외무장관인 폴-앙리 스파크는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논의를 다시 한번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 동의해야 하는 프랑스가 독일연방공화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것과 브뤼셀 조약을 변경하는 것에 반대하기에 다시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데나워는 관계자들에게 나중에 유럽방위공동체(EDC)와 유사한 형태의 해결책을 다시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에게 이제 먼저 추구해야 할 목적이 두 가지가 있었다.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원칙적으로 독일이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가입하고 서방의 독일 점령 권한을 조속히 철회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자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 또한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약에 따라 독일의 가입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안보 제한에 관해서는 독일의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곧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서 정해 놓은 독일 군대의 규모를 초과해서는 안 되고 핵무기와 같은 특정한 무기 체계 제한에 관한 문제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를 상대로 심리전을 탁월하게 펼친 처칠은 아데나워에게 1954년 9월 3일 이러한 뜻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독일이 가입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독일의 자발적인 안보 제한과 결부시키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처칠이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9월 1일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도록 내부 지침을 변경한 것에는 전적으로 전략적 근거가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다음 몇 주 동안에 이어진 양자 회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관련 문제의 해결이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과,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에도 압력을 가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제는 독일의 온전한 주권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1954년 3월부터 아데나워는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권을 조기에 종식시켜야 한다고 더욱더 강력하게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의 위원인 코넌트와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코넌트는 미국 상원위원인 와일리와 더불어 뷜러훼헤를 찾았다. 미국과 영국 측은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이 좌초되기 전에 이미 이 조약과 관련한 대안은 없다는 것을 매우 노골적으로 천명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1954년 7월 상순에 영국과 미국의 실무진이 런던에서 극비리에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들은 위급한 경우에는 독일조약을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와 분리시키고, 프랑스 측에 압력을 가하여 가장 먼저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주권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하였다. 사실 1952년의 독일조약에는 독일의 온전한 주권 보장의 내용이 없었다. 또한 1954년 7월 12일 자 런던 비밀의정서에도 이 내용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언급되어 있었다.      

고위위원회의 영국과 미국 위원들이 이 문서의 내용을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자 아데나워는 그들에게 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절묘하게도 미국의 와일리 상원의원을 이 논쟁에 끌어들였다. 아데나워는 이 문서의 내용이 관료들이 꾸며낸 것으로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이제 그 당시 일반조약에서 얻어낸 것보다 더 나은 조건을 협상으로 얻어낼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각자의 국가의 본부에 신속하게 보고하면서, 독일 수상이 비판한 내용의 문서를 원래 예정했던 대로 망데스-프랑스에게 전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망데스-프랑스가 그 내용을 공개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더 쌓이게 될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 점에 관하여 현명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서방 연합국의 베를린과 독일 전체에 관한 권리, 그리고 독일에 군사를 주둔할 권리는 크게 변할 수가 없는 사안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아데나워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필요한 경우에는 당분간이라도 미국과 영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그러한 권리의 포기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주권 회복이라는 풀기 어려운 문제는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 문제와 분리시킬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모든 긴급 대담에서,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문제에 관한 해결책이 독일에 관한 특정한 안보 대책을 포함하여 프랑스가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은 찾지 못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9월 중순에 코넌트, 할슈타인, 블랑켄호른이 논의하는 가운데 할슈타인은 아데나워가 이에 관한 그 어떤 대안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위급한 경우가 발생하면 미국, 영국, 독일 간에 발칸협정을 모범으로 한 일종의 안보조약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프랑스와 베네룩스국가들은 이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간단히 거부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문제가 프랑스에 달려 있었다. 망데스-프랑스가 미국과 영국의 압력에 굴복할 것인가? 그는 도대체 어떤 전략을 들고나올 것인가? 그리고 그는 언제 그의 선임 총리들처럼 실각하게 될 것인가?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에 대하여 이제 매우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공개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가장 두려워하던 프랑스와 소련의 접근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의회의 표결이 있은 지 3일 후에 호이어 밀라 경은 아데나워 수상으로부터 독일이 이제 ‘포위된’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망데스-프랑스가 제시하는 방법에 대하여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파리에서 내린 결정은 제네바에서 개최된 인도차이나회담에서 나온 타협의 당연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몰로토프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어려움에서 구해냈다. 그 답례로 망데스-프랑스는 유럽방위공동체(EDC)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9월 중순에 연로한 독일 전문가인 로버트 머피가 국무성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내놓은 매우 음울한 프랑스의 동기 분석을 들었다.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가 프랑스를 유럽 대륙에서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망데스-프랑스는 ‘프랑스의 경쟁국인 독일연방공화국을 소련의 도움을 받아 제압’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소련과 협력할 가능성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머피에게 들었다.           

그러나 덜레스는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앤소니 이든 경이 9월 중순에 아데나워의 주요 대화 상대가 된 것이다. 이제 영국 외무장관은 곧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중계자 사명을 떠맡았다. 그는 서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순식간에 돌아다니고 나서 1954년 9월 12일 본을 찾아왔다.


이든이 이제 핵심 인물이 되어서 아데나워 수상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아데나워가 포괄적으로 펼친 장대한 전망에 대하여 경탄하였다. 아데나워는 대화 상대를 진지하게 여길 때면 언제나 그런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제 이든은 아데나워가 하는 말을 경청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거의 100년 전부터 독일인들은 ‘평정심을 잃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인의 특징적인 조건반사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의 결과였다. 19세기 중반의 산업화가 있고 나서 비로소 독일 민족은 ‘급격하게 부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수립은 ‘독일 민족이 정치권력을 너무 지나치게 빨리 장악하도록’ 이끌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프로이센에서 엘베강 동부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서방의 민주주의에 관한 몰이해가 야기된 것이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민주주의 도입은 정치적 무기력과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치가 등장하게 된 것이고 1914년과는 달리 독일이 촉발한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이야기가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그리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인물인 이든은 아데나워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적잖이 놀랐다. 곧 나치 독재는 ‘소수의 절대적인 추종자만 있었고 독일 국민 대부분은 반대했다.’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데나워 자신도 반대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확립된 독재에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아데나워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매우 먼 과거까지 연결되는 심리적 불확실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과 나치의 붕괴로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독일의 분단과 동부 지역에 관한 공산주의의 지배로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독일인들이 잃어버린 평정심은 독일에 바른 발전이 이루어지면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아데나워는 자기 생각을 털어 놓았다. 바로 이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현재의 주요 과제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특히 젊은 세대가 유럽적 이념으로 그들의 희망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독일 정부가 아니라 전승국에서, 곧 처칠과 쉬망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오히려 장점이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민주주의와 유럽이라는 이념으로 독일 민족의 평정심의 상실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치가 실질적으로 독일에 확실한 뿌리를 전혀 내리지 못했다는 좋은 표징이 바로 1945년 이후 독일이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려운 상황에 있었음에도 그 세력이 사라진 사실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럽이 통합되지 않고 독일이 서방과 유대를 맺지 못하게 되면 ... 독일 민족이 중립화를 통해서나 직접 동방과 유대를 맺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독일의 경제 상황도 실제보다 더 나아 보였다. 사실 독일에는 자본의 여력이 부족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벌어진 금속 노동자들의 파업이 언급되었다. 이 파업에 동부 지역에서 약 100명의 선동꾼이 파견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독일연방공화국은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불안정하기에 모든 혼란을 차단해야 하는 것이었다.”     

외교 협상에서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이 국내 여론이 매우 불안하기에 자기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수다스럽게 호소하는 것이 이제는 거의 표준적인 레퍼토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만 해도 엄청난 총선 승리를 거두고 자기 정부가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총리는 국내 정치에서 약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전략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여러 자리에서 독일 민족의 심리적 불확실성이 자기 가장 커다란 근심거리라고 이야기하였다.      

그가 ‘유럽’을 강조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아데나워는 이 중요한 대화에 이것이 적절한 주제라고 여겼다. 바로 이든이 대륙의 유럽 통합 구상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다른 사람들만큼 몰랐단 말인가? 이든이 직접 아데나워에게 자신이 ‘낡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구상을 되살리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직접 아데나워에게 분명히 말해주지 않겠는가? 그가 이전에 지칭한 ‘유럽 이데올로기’에 관한 지지를 이렇게 강력하게 고백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때 아데나워가 말한 것은 그가 유럽 정신을 구체적인 제도적 개념과 연결하는 데에 그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데나워는 ‘초국가성’이라는 개념 또한 상황에 따라 내세우기도 하고 철회하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처칠과 쉬망과 같이 서로 전혀 생각이 다른 인물을 유럽 정신의 화신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국의 국무장관인 제임스 번즈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명히 옳지만 매우 애매한, 유럽 통합에 동의하는 아데나워의 생각은 영국 외무장관에게 설명한 대로 자신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문제 해결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문제 해결을 서유럽연합(WEU)에 관한 브뤼셀합의의 발전과 연계시키자고 하는 이든의 구상을 얼마나 좋게 보고 있는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탈리아까지 포함하는 서유럽연합(WEU)이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라는 것을 아데나워가 즉각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유럽연합(WEU) 수립의 방법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테두리 안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인 독일에 관한 자동적인 안보 보장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는 1949년부터 아데나워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서유럽연합(WEU)은 이미 완성된 관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안보 관리 문제는 그 틀 안에서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연합(WEU)은 미록 초국가적인 성격은 전혀 지니지 않았지만, 서유럽의 유대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유럽 회원국의 증대를 통해서든 협력 강화를 통해서든 더 발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논쟁 이후에 그 사태 수습을 위하여 논의한 인물은 존 포스터 덜레스였다. 그는 이든과 대담한지 이틀 후에 아데나워를 찾았다. 그는 쾰른-반 공항에서 여러 마을을 지나 본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드는 많은 사람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덜레스는 오후 일찍부터 자정까지 아데나워와 논의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공항을 향하여 자동차로 이동하였다. 아데나워에게 덜레스의 방문은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 시기에 본의 독일 연방의회에서 벌어지던 존의 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덜레스는 아데나워에게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서 파리를 들러 망데스-프랑스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독일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프랑스의 고립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에게 다시 한번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망데스-프랑스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회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데나워와 덜레스의 회담에 관한 성명서는 차후의 협상에서는 독일과 미국의 공조를 예상해야 할 것임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이제 덜레스는 아데나워의 요청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대화에 임한 양자는 독일의 주권을 최대한 신속하게 회복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양자는 독일이 집단 안보 체제에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온전히 참여하도록 할 것에 합의하였다.”     

주권과 동등한 권리는 아데나워가 차후의 협상에서 프랑스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에 기본 원칙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이든이 강력하게 추구하는 9개국 회담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이 회담의 준비가 곧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망데스-프랑스는 여기에서도 브뤼셀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을 한 바가 있었다. 이제는 파리가 서유럽연합(WEU)의 독일연방공화국의 무장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그 빛이 바랜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초국가적 통제 아래에 놓이는 것은 피하면서 말이다. 또한 자르 지역 문제도 다시 안건으로 올려질 것으로 보였다. 회담에 참여하여 이 모든 것을 감내할 만한 일인가?     

결국 이 두 인물은 이든이 영국에서 개최하기를 바라는 회담에 반드시 함께 참석하거나 아니면 둘 다 불참하기로 약속하였다. 회담의 성과가 없을 것으로 사전에 판단될 때는 불참하기로 한 것이다.     

덜레스가 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날아온 소식은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유럽연합(WEU)을 대체할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이 대안은 미국 국무부에서도 검토할 예정이었다. 아데나워는 덜레스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달하였다. 곧 유럽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는 베네룩스삼국, 터키, 그리스, 스페인, 독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조심스러운 면 있지만 영국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제 런던회담 참석 국가들, 곧 유럽 대륙의 6개 국가, 영국, 미국, 캐나다에 9월 23일 자로 매우 상세한 제안서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을 느꼈다. 아데나워가 이 회담에서 기대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브뤼셀조약 수정안의 틀 안에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

-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 명시된 수준의 인력과 물자의 자율적인 제한. 다만

  “그 어떤 형태의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서양 연합국의 안보 보장의 강화.

독일 점령군의 철수와 독일조약의 비상조치에 관련된 조항 삭제.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가 독일에 관한 차별적인 안보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런던회담이 개최되기도 전에 상당한 불안 요소가 있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8월 30일부터 공개적으로 망데스-프랑스의 역학에 대하여 상당히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경을 표하면서 두 사이의 거리는 브뤼셀회담 때보다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워싱턴의 인사들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데나워가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아이젠하워는 기분이 저조하였다. 덜레스는 망데스-프랑스가 중립적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 곧 몰로토프와 나란히 마부석에 앉아있으면서 독일과 함께 ‘썰매타기’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런던에서 합의를 도출할 의지가 있었다. 다만 망데스-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되 그 절차를 간소화하고, 회담이 다시 정상궤도에 올려놓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무시하고 대안을 마련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본의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커크패트릭 차관은 아데나워 수상이 9월 27일 런던회담에 도착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다. “망데스-프랑스가 브뤼셀협약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독일이 가입하는 것을 동시에 지지하도록 다짐하도록 하겠다.”라는 약속을 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관한 프랑스의 반대를 극복할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은 ‘차선책’이 가능해 보였다. 첫째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브뤼셀협약에 가입시킨다. 둘째로 미국, 영국 독일연방공화국의 안보 협약을 체결한다. 프랑스에게도 언제든 조약 체결 참여의 여지는 남겨둔다.     

사실 처음에는 런던회담이 브뤼셀회담 협약의 개정을 위한 것으로 여길만한 징후가있었다. 사람들이 예상한 바와 같이 망데스-프랑스는 서유럽연합(WEU)의 해결책, 곧 유럽방위공동체(EDC)와 같으나 초국가적인 요소가 배제된 것을 최선의 것으로 여겼다. 그가 제안한 독일연방공화국에 관한 조사와 군비의 공동 운영은 매우 불평등한 요소가 담긴 것으로 처음에는 아데나워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처지는 브뤼셀회담 때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이제는 베네룩스삼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덜레스와 이든이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회담 자리에서도 아데나워는 덜레스와 나란히 앉았다. 이 두 사람은 통역을 가운데 두고 조용한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하였고, 이러한 모습으로 이들은 다른 참석자들에게 마치 독일-미국의 축이 구축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영국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였다. 처칠은 자신과 거의 동년배인 아데나워에게 노골적으로 동감을 표시하였다. 빌헬름 3세와 히틀러 다음으로 아데나워가 독일을 대표하는 인물, 그것도 그가 받아들일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의 좌초에 대하여 처칠은 아데나워 수상에게 많은 동감을 표시하였다. 9월 17일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전문에서 다시 한번 처칠은 그의 사자와 같은 발톱을 드러내 보였다. 그 전문에서 처칠은 간결한 문장으로 자신이 유럽방위공동체(EDC)와 아데나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귀하께서 알고 계신 것처럼 유럽방위공동체(EDC)는 제가 1950년 8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대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 저는 다시 정권을 잡게 되면서 이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프랑스가 독일의 제한된 군사력 유지 구상에 동의하도록 할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를 좌초시켰다고 해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프랑스가 이를 구상한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아데나워를 강하게 압박하는 바람에 그가 그의 삶과 정치력을 3년 동안이나 허비하게 된 것은 비극입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제 다시 한번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곧 대륙의 유럽인들이 제시한 의심스러운 초국가적 구상 곧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대체할만한 영국의 계획을 제시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자신과 영국이 여전히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은 일단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와 경제적 문제에서 유럽이 통합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덜레스가 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에 대하여 동의하였던 것이다. “망데스-프랑스가 말하기를, 영국을 받아들이면 초국가적 원칙을 포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런던에 온 이상 아데나워는 영국이 필요했다. 아데나워가 원래 지니고 있던 유럽 통합 구상의 범위는 사실 늘 북해와 도버 해협까지였다. 아데나워가 독일과 영국의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처음부터 프랑스에 치중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늘 빗나간 것이었다. 실제로 아데나워는 1960년대 초반까지도 영국을 유럽 공동체의 그물 안에 포섭하기 위하여 늘 새롭게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영국이 전통적인 중립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는 씁쓸한 사실을 점차 분명히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초국가적인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이 좌절된 직후에 프랑스의 부정적인 태도에 맞서 개최된 런던회담이 1950년대 독일과 영국 협력의 정점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노선을 주도한 사람이 처칠과 더불어 이든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이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블랑켄호른도 이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친영국 노선을 견지해 왔지만, 그에 못지않게 환상을 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영국의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보수당의 독일에 관한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런던회담에 참가한 유일한 국가수반인 아데나워를 위하여 회담 첫날밤에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커다란 만찬을 개최한 자리에는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여한 것은 단순한 외교적 예절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정부 관료들, 영국 상원의원들, 야당 대표인 애틀리, 그리고 몽고메리 사령관과 알렉산더 사령관도 참가하였다.     

아데나워는 또한 베네룩스삼국을 위하여 매우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처칠과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만찬 이후에 아데나워 수상은 자기 수행원들과 함께 런던의 클래리지 호텔의 로비에서 요제프 베흐와 위스키를 마셨다. 베흐는 룩셈부르크의 수상으로 외무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 대륙의 통합을 위하여 오랫동안 아데나워와 함께 싸워온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좌절된 것에 대하여 여전히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베흐와 그를 통하여 폴-앙리 스파크와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인 베이엔에게 자신이 좌절된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대하여 여전히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 다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슈피겔의 기자였던 로타 륄은 기둥 뒤에 숨어서 아데나워 수상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호소를 하는 것을 엿들었다. “제가 독일군을 창설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하는 소문은 거짓입니다. 베흐 수상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 저는 매우 확신합니다. 100% 확신합니다. 망데스-프랑스가 제게 강요하는 대로 독일군을 창설하는 것은 독일과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입니다. 제가 아직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니 만약 독일이 유럽의 통합을 적절한 시기에 이루지 못하면 독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데나워가 클레리지 호텔에서 가진 이 저녁 회합에서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수반들은, 그리고 그 이외의 인물들도 흔히 경험한 대로 기분이 흔들렸다. 자정에 위스키를 마셨으니 더욱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문제에 완전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수정 제안한 구상에 베네룩스삼국의 동의도 얻어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망은 매우 밝았다. 망데스-프랑스가 무기의 공동 활용 구상으로 베네룩스 삼국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베네룩스삼국은 망데스-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군수산업 전체를 프랑스가 통제하려고 한다고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령의 아데나워 수상과 적절한 때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해결책에 대하여 협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확실히 그 당시, 그리고 그 전후에도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서방의 동료 곧 망데스-프랑스가 나름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 계획을 관철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1961년 《슈피겔》이 6회에 걸쳐 아데나워에 관한 글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 글에 관심을 보였다. 이 글에서 클래리지 호텔에서 밤에 진행된 위스키 모임에서 아데나워가 한 말을 표제로 삼았다. 이 말은 그 이후 한동안 아데나워의 면모를 보여주는 말로 회자되었다. “세상에, 독일이 어찌될까요?”      

클래리지 호텔의 밤 모임에서 아데나워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에게 속마음을 더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이 공개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로타 륄은 《슈피겔》이 이를 보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아데나워는 이 기회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오늘 밤에 한 모든 말들은 이미 모스크바에 전달되었습니다.’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와 헤르베르트 베너가 소련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대화 상대방을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했다. 몇 년 후에 한 만찬에서 륄을 소개받은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친절한 말로 인사하였다. “륄 씨, 저는 귀하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런던에서 매우 흥미로운 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데나워와 베흐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고민을 하던 바로 그 밤 같은 시간에 영국의 내각이 소집되었다. 이제야 처칠은 이전에 자세하게 논의했던 제안을 제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곧 영국은 4개의 육군 사단과 2개의 전략 공군 여단 또는 이에 준하는 군대를 유럽 대륙에 무기한으로 주둔시킬 것이며 브뤼셀협약에 참여한 강대국 다수가 바라는 바와는 반대로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에 영국이 프랑스와 아데나워에게 되풀이하여 보장할 것을 약속한 내용이었다.     

다음날 드디어 덜레스와 이든이 잘 준비한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망데스-프랑스의 운신의 폭을 더욱 좁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데나워에게 실질적인 안보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먼저 덜레스는 ‘이 지역의 위협이 상존하는 동안’ 미군을 유럽 대륙, ‘그리고 독일’에 주둔시키게 될 것임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법률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든은 영국군을 계속 유럽 대륙에 주둔시키고자 하는 현실적인 제안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약속을 한 것을 치켜세우는 데에 소홀함을 보이지 않았다.     

회담에 참석한 당사자들 다수의 관심이 아데나워의 것과 일치하였기에 아데나워는 일단 소극적인 협상 전략을 추진하였다. 독일 점령 규정의 철폐에 관한 문제에서 덜레스와 이든과 아데나워는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한 가지 점에 대해서는 아데나워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곧 독일의 주권 문제였다. 기존의 독일조약 제1조 1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 ‘국내외적인 문제에 모든 권한을 발휘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아데나워는 이것을 불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아데나워는 주권이 명시된 다음과 같은 구절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이에 독일연방공화국은 국내외적인 문제에 대하여 주권 국가의 온전한 권한을 지닌다.”     

덜레스와 이든도 문제가 된 제7조 2항을 삭제하는 데에 아데나워에게 협조하였다. 브렌타노와 자민당(FDP)의 의견이 반영된 기존의 조항이 아데나워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조항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가시 없는 장미는 없는 법이다. 미국조차도 독일에 관한 외국의 일종의 긴급조치 권한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독일 군비에 관한 차별적인 통제를 요구하는 프랑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회담의 위기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최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망데스-프랑스의 계획이 베네룩스삼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브뤼셀에서 벌어진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망데스-프랑스는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이 회담은 몇 주 전에 개최되었던 브뤼셀 회담과 마찬가지로 진퇴양난에 봉착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소수의 협상 대표단만 모여 협상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이 대표들은 각각 1명의 자문을 받기로 하였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 대신에 그라프 폰 킬만세크의 자문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서는 정치적인 의미가 큰 것이기는 하지만 군사적인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발터 할슈타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할슈타인은 현명하다기보다는 고집 센 협상가였다. 종종 그는 양보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하거나 때맞춰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이 자의적으로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자 협상에 결정적 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은 전함, 장거리 폭격기, 무선 조정 무기와 같은 중무기(重武器) 생산에 관하여 브뤼셀협약의 통제를 받겠다고 하였다. 이 브뤼셀협약은 후일 서유럽연합(WEU) 조약으로 이어졌다.     

핵무기 생산의 포기에 관해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유사한 입장 표명으로 아데나워의 부담을 덜게 되었다. 폴-앙리 스파크는 그 전날에 이미 모든 유럽 대륙 국가가 핵무기 생산을 포기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망데스-프랑스는 그러한 입장 표명을 거부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영국의 선례를 따라 유럽의 핵강국이 되는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참가자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협상에서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든은 이 회의를 잘 이끌어 왔다. 블랑켄호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이든은) 자기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회의적이며 어느 정도는 냉소적이었지만 그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흥을 돋우고 때로는 우아하게, 그리고 가끔은 피상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역할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회담이 끝난 지 10년이 넘은 때 쓴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망데스-프랑스는 보완된 브뤼셀협약에 영국이 참여하는 것이 과연 실질적인 효력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든은 얼굴을 매우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는 영국 정부가 유럽 대륙과 함께하기로 내린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고 나서 이 영국 외무장관은 이성을 찾고 나서 독일이 유럽 민주국가의 대열에 다시 참여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유럽이 상호 신뢰의 정신으로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상호 불신으로 몰락하게 될 것인가 입니다. 우리가 독일 측에 유럽 방위에 참여하도록 군대를 창설해 줄 것을 요청한다면 우리는 독일 군대에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 수준으로 군비를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든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관한 논의에서 아데나워가 바라던 바에 동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이 회담이 좌초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틀린 판단이었다. 그다음 날 망데스-프랑스는 유럽 군비의 공동 관리에 관한 자기 구상을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위원회에서 그의 구상은 결국 ‘폐기’될 것이 뻔하였다.     

1954년 10월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무기 생산 포기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화학무기의 감시는 문제가 안 될 것으로 보였다. 화학업계의 산업스파이들에게 이는 누워서 떡을 먹기 보다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경우, 수소폭탄 1개의 제조 비용이 현재 가격으로 천만 달러에 달합니다. 내일 또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런 폭탄을 제조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서 이를 포기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도 핵무기 생산 포기를 자발적으로 결의한 바가 있기에 독일에 관한 차별을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망데스-프랑스가 제기한 통제 기구는 거의 힘을 잃었습니다.”     

결국 아데나워는 이렇게 독일연방공화국이 앞으로 무기한 핵무기 비보유국의 지위에 머물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몇 년 후에 아데나워는 많은 사람이 그리 생각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여러 차례 서방 강대국의 대표들과 독일 지위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 때 한 말을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언급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가 핵무기금지조약에 맞서 마지막 투쟁을 벌일 때인 1966년에 아데나워는 이 내용을 《회고록》에도 담았다. “내가 이러한 설명을 하자, 덜레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커다란 회담 책상의 다른 쪽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다가와 회담장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수상 각하. 귀하께서는 방금 독일연방공화국이 생화학무기와 핵무기의 자국 생산을 포기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국제법적 선언과 의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정변경의 원칙*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또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귀하께서는 저의 설명을 옳게 이해하셨습니다!’ 나머지 참석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사정변경의 원칙 [clausula rebus sic stantibus, 역자주 – 법률행위가 예측할 수 없는 일로 당사자에게 커다란 손해를 가져올 때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변경하거나 해지할 수 있다는 원칙]     

아데나워는 국제 협상에서 매우 개인적인 결정을 많이 내렸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이 문제의 장기적인 의미에 대하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기까지 한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뒤에서 말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표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상 임기 동안에 유일하게 ‘단독 결정’, 곧 내각이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또는 내가 속한 정당과 논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 일은 이 핵무기 생화학무기 생산 포기 선언을 한 것밖에는 없다. 이는 협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회담장에서 통역했던 그라프 킬만세그는 덜레스가 다른 시점에 그러한 사정변경의 원칙에 관하여 확인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이 유명한 장면은 아데나워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전개된 것이다. 그라프 킬만세그의 기억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생산 포기 성명을 발표하자 일단 회담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먼저 폴-앙리 스파크가 독일 대표들이 있는 자리로 다가와서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킬만세그에게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시 수상님이십니다. 수상님은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유럽인이십니다.’(Dites au Chancelier: il est un plus grannd europeen que moi.)” 아데나워는 이 말을 듣고 이마를 약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스파크는 지나갔다. 그러자 덜레스가 아데나워 수상이 있는 자리로 와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상 각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포기가 귀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이일이 앞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하여 구상을 해두신 것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킬만세그에 따르면 이때 사정변경의 원칙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덜레스도 아데나워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아데나워 수상은 킬만세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덜레스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게. ‘일단 제게 12개 사단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에 관하여 추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덜레스는 웃으며 회담장을 나갔다고 한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원칙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핵무기 포기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아데나워에게도 핵무기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은 발명품이었다. 처음에 그는 핵무기가 위협과 보복을 위해 개발된 것이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가스만큼이나 사용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미 1953년 말부터 아데나워가 국제 언론사와의 회견에서 되풀이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핵무기가 확산하여 이 무시무시한 파괴 수단을 충분히 보유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생명을 말살시키게 된다면 전쟁 자체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핵무기가 어쩌면 전쟁을 억지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자국을 공격하는 자를 핵무기로 위협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초지일관으로 생각한 것은 독일군도 다른 유럽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최신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독일군은 그저 ‘총알받이’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1953년과 1954년은 미사일과 탄두, 소유와 점유, 전술과 전략 체계의 명확한 구분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못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호이싱거나 슈파이델, 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장관들이 핵무기에 관하여 그에게 설명한 것을 바탕으로 핵무기가 이미 계획대로 서방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54년 가을 독일의 핵무기 생산 포기 선언은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최종적인 결정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탓도 있지만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제적 위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처칠은 그의 생애 말기에 독일이 다시 세계 강대국의 위치에 돌아왔다는 말을 무수히 되풀이하였다. 아데나워 자신도 그리 믿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54년 10월 11일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웅대한 전망을 제시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조만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조약은 결국 1955년 1월 중순에 체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은 모스크바로 관련 특사를 파견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강대국이 지녀야 할 지위를 회복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히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945년의 패전 이후 9년 동안을 돌아보면 세월이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이룬 시일 안에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핵무기 보유와 관련된 차별적 규정으로 이제 막 확보한 국가의 위상을 더 이상 실추당할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무기의 공동 생산 가능성을 포함한 모든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1954년 9월에는 아데나워가 아직 독일 안에서의 핵무기 생산 포기에 대하여 크게 근심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런던회담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여겼다. 아데나워가 오랫동안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장점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던 기민당(CDU) 대표부는 아데나워의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독일에 새로운 조직이 유럽방위공동체(EDC)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분명히 브뤼셀협약은 초국가적인 정신의 ‘제안’과 ‘싹’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마침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련된 완전한 해결책을 찾은 것에 대하여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미국과 영국에 주력하였다. 특히 영국은 런던회담을 통하여 유럽 대륙과의 지속적인 유대를 마련한 상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아데나워를 신뢰하였다. 유럽 주변 방어에 관한 장기적인 계획은 잠정적으로 철회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원래 유럽의 미국 지상군 규모를 축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부 유럽에서의 미군 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52년이나 1953년에 발발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소련의 유럽 침공에 대비한 임시 방어체계는 점차 장기화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이끄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서유럽에서 미국의 패권을 위한 확실한 기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런던회담에 참석한 이들은 3주 후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이 모임은 4개의 서로 얽힌 회담들 가운데 매우 기괴한 것이었다. 서방 3개 강국은 독일연방공화국과 연합국의 독일 점령 규정에 관한 마지막 세부 사항을 협의하였다. 브뤼셀협약에 서명한 5개국가, 곧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삼국은 서유럽연합(WEU)에 관하여 독일연방공화국과 이탈리아와 협상을 진행하였다. 여기에 미국과 캐나다가 협력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13개 국가의 대표와 본에서 파견된 참관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방식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양자 협상은 회담이 시작될 때부터 마무리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협상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데나워와 망데스-프랑스의 개인적인 관계는 조금 개선되었다. 이미 런던회담 때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하여 냉랭한 분위기를 완화시킨 바가 있었다. 블랑켄호른도 이 “냉정하고, 집요하며, 야망이 강한 사업가”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흔들어 깨우고 프랑스 제4공화국의 태만한 업무 추진 방식을 모두 답습하지는 않았다. 블랑켄호른과 망데스-프랑스 내각을 이끄는 젊고 똑똑한 장-마리 수투는 업무적으로 좋은 관계를 빠르게 맺었다. 이 관계는 망데스-프랑스 내각이 1955년 2월 붕괴될 때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정치가 잘 조정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망데스-프랑스는 독일 수상과의 관계를 확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마련할 것을 결심하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데나워는 아름다운 별장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파리회담 개최 시작 전날의 오후와 저녁에 라셀생클로성(Chateau La-Celle-Saint-Claud)에서 보내며 포괄적인 전망을 나누기로 약속하였다. 루이 14세의 애첩이었던 드 맹트농 후작부인(Madame de Maintenon)과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여후작(Madame Pompadour)이 이 작은 성에서 살았다. 그 이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아름다운 황후였던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도 여기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때는 독일첩보부가 여기에서 사무실을 차리기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도착하기 전에 이 건물의 모든 것이 신속하게 복원되었다. 거대한 정원은 황금색의 낙엽으로 뒤덮여있었다. 분명히 이 냉정하고 계산적인 망데스-프랑스는 멀리 떨어진 시골인 여기에서 모든 기자를 멀리하고 아데나워와 단독으로 만나 자기 새로운 정책에 관한 그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망데스-프랑스는 자신이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와 만난 것에 관한 아데나워의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새로 임명된 프랑스 총리가 협상 자리에서 동의한 내용을 내각과 의회에서도 관철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망데스-프랑스는 프랑스의 경제적 근대화에 자기 정치적 의지를 집중하였다. 그래서 망데스-프랑스의 오래된 구상인 유럽의 ‘유기적 결합’을 아데나워가 다시 문제 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에서 해마다 50만 톤의 밀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또한 설탕도 수입하고, 장기적인 무역 협상을 체결하고, 산업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모젤강에 운하를 건설하고 북아프리카에 독일의 자금을 투자하기로 하였다. 프랑스의 군수공장을 라인란트에 건설하고 독일의 군수공장을 남프랑스에 건설하기로 하였다. 군비 문제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약화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독일연방 경제부와 농업부의 반발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에르하르트가 경제 문제와 통상적인 정치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망데스-프랑스는 이 대담에서 아데나워 수상에게 유럽 통합을 그와 함께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라셀상클루성에서의 좋은 분위기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미래의 독일과 프랑스의 협력 계획이라는 고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자르 지역 문제라는 계곡을 지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망데스-프랑스는 판 나테스 플랜에서 출발하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아데나워와 타이트겐은 슈트라스부르크의 ‘메종 루즈’*에서 합의에 이른 바가 있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와 더불어 자르 지역 문제를 유럽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던 전체적인 틀도 와해되고 말았다는 반론에 대하여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는 유럽방위공동체(EDC) 기구를 브뤼셀협약이 대신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가 제시한 해결 방안의 중요한 새로운 점들은 다음과 같다. 자를란트에 관련된 국민투표를 2차에 걸쳐 실시한다. 첫 번째 국민투표는 자르규약이 체결된 지 3개월이 지난 다음 실시한다. 그리고 독일과의 평화협정이 실제로 발효된다면 자르 지역 국민은 자르 지역에 관련된 자르규약을 국민투표로 승인할 기회를 추가로 얻게 된다. 그런데 이 규약이 승인되면 이는 평화 조약의 규정이 마련될 때까지 그 효력을 유지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어느 당사자도, 곧 프랑스나 독일 또는 자르 지역 정부나 정당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단 보장된다면 자르 지역 국민의 인권과 시민권 보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 메종 루즈 [Maison Rouge, 역자주 – 슈트라스부르크의 유명 온천 휴양 호텔]     

이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이틀 전에 이루어진 블랑켄호른과 수투의 대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의 자유권에 관하여 망데스-프랑스가 그의 전임자에 비하여 대화할 용의가 더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 나아가 수투는 블랑켄호른에게 ‘단둘이서 비밀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자르 지역을 다시 독일에 반환할 것입니다. 이는 사태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국제법 분야에서 거부할 수 없는 해결책으로 아데나워를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환상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망데스-프랑스가 자르 지역의 상황 판단이 매우 현실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라셀생클루성의 대담에서 아데나워도 원칙적으로 평화조약이 맺어질 때까지는 자르 지역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에 찬성하였다. 약간은 비꼬듯이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많은 이들이 자르 지역이 자율을 확보하는 것에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 저는 자를란트 국민이 자율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를란트에서는 아무도 전쟁 부채상환이나 난민 문제에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는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오히려 자르 지역에서는 정당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르 지역의 자유선거로 구성된 의회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동의하면 프랑스, 독일, 자를란트 사이에 법적 구속력이 발휘됩니다. 이리하여 자를란트는 평화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자르조약을 준수해야 합니다. 평화조약이 맺어지면 자르 지역 국민에게 다시 문의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자르조약에 대하여 따질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아데나워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자르 지역에 안정이 오게 될 것이었다. “선거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다수가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찬성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확신합니다. 10년 후에는 아무도 이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유럽의 상황이 훨씬 더 발전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서유럽연합(WEU) 대신에 유럽평의회(CoE)가 자를란트의 외교 사안을 처리할 위원회 또는 삼자위원회를 구성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가 평화조약 체결에서 오로지 자를란트 국민의 결정만을 거론한 데에는 그가 암묵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모든 면에서 독일제국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공식적인 입장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선언을 강력하게 견지하는 한 자를란트 국민의 일부만이 자신이 독일 국가 전체에 속할지에 관하여 투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헌법적으로 세밀한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특별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일치된 국가 전체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를란트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자르 지역은 단 한 번도 독일연방공화국에 속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르 지역에 대하여 점유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자르 지역 국민이 독일연방공화국에 다시 속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다면 독일연방공화국은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망데스-프랑스에게 프랑스도 자르 지역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선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의 출발점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으로 여겼다. 대서방조약에 관한 대단한 해결책 마련이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과연 아데나워가 이러한 상황에서 ‘사소한’ 자를란트 문제로 모든 것을 무산시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그런데 국내 정치적으로는 어느 사이에 자르 지역 문제가 가장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의회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런던회담의 최대 성과의 빛이 바래졌다. 사민당(SPD), 자민당(FDP), 추방민당(BHE)은 물론 기민당(CDU)의 소수 우파까지 나서서 자르 지역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이는 아데나워 수상의 서방 정책에서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도 이 위험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갑자기 아데나워가 연방의회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제껏 그는 연정 여당이나 야당도 수상이 협상을 맺은 것에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입장을 늘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연정 여당의 당 대표단을 파리로 초대하여 10월 21일 일단 오전에 그들과 논의하였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 다시 한번 논의하였다. 그다음 날에는 올렌하우어, 베너, 카를로 슈미트, 자르 문제에 특히 적극적인 칼 모머와 대담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연정 참여 정당의 수뇌부와 확대 회담을 가졌다. 수상은 사민당(SPD) 의원들과 오찬을 나누기까지 하였다. 이는 매우 드믄 배려였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 자르규정에 서명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는 다시 한번 연정 여당 수뇌부를 달랬다.     

7개의 요점으로 정리하여 그는 프랑스 측의 요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기 노선을 설명하면서 특히 평화 조약 항목의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자르규정이 자유롭게 선출된 자르 지역 의회에서 승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의회의 선거는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고 1년이 지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의원들은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무엇보다도 평화조약의 조항에서는 어떤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 여당 안에서 아데나워의 자르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던 폰 브렌타노와 델러조차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으로 돌아왔다.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된 파리회담의 분위기를 직접 경험하고 나서 그들은 자르 지역 문제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서방조약 체결이 예정된 날 하루 전인 1954년 20월 22일 오전 망데스-프랑스는 회담 참석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사를 밝혔다. 곧 협상이 완전히 마무리된 자르규정에 서명할 수 있어야만 이 조약에도 서명할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외무장관 이든은 이 금요일 저녁에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만찬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디저트를 먹기도 전에 아데나워와 망데스-프랑스는 협상을 마무리하고자 대사관 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협상이 악화하면 중재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데나워 측에서는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이 협상 업무를 담당하였다. 망데스-프랑스 측에는 나중에 본 주재 프랑스 대사가 된 프랑스 외무부의 정책부장인 롤랑 드 마제리와 수투가 자리에 함께하였다.     

아데나워는 평화조약 체결을 미루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자르규정은 최소한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다룰 사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위원’(Europäische Kommissar)을 제도적으로 서유럽연합(WEU)과 결부시키자는 의견에 아데나워는 동의했다. 그리고 본으로 돌아와 기자들과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유럽 차원의 해결책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그것은 그저 말뿐이라고 한다면 좀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유럽 차원의 해결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망데스-프랑스가 아데나워 수상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다. 곧 자르 지역에 자유로운 상황이 형성되고 나서 석달 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을 우려한 아데나워의 생각은 기우였다. 평화조약의 자르규정에 관한 2차 투표는 아데나워가 이미 라셀생클루성에서 이루어진 회담에서 양보한 바가 있었다.     

아데나워가 결국 자르규정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에 동의하였기에, 그 투표가 자르규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면 그 규정에 대하여 더 이상 논란을 벌이지 않게 되어 망데스-프랑스는 자르규정이 발효되고 3개월 이내에 자르 지역 의회 선거를 다시 치르는 구상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 해 동안의 협상에서 추구해 대로 프랑스의 자르 지역에 관한 경제적 영향력을 확실하게 줄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파리 협상에서 부분적으로는 직접 관여해 온 롤프 라르는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치가들은 이러한 사안을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행히 이에 대하여 큰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 협상에 관한 그의 종합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인들은 마지막까지 탁월한 전략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독일연방 수상에게 압력을 가했다.”       

아데나워는 새벽 1시 무렵에 호텔로 돌아왔다. 라르가 본 대로 그는 “매우 지쳐 있었다.” 이 회담에 참석했던 이들은 아데나워가 대사관에 모인 이들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려고 몰래 방에서 빠져나온 것에 대하여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러는 가운데 이든과 영국대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사태 수습을 돕고자 하였지만 말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10월 23일 오전에 아이젠하워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모든 것은 자르 지역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아데나워와 망데스-프랑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젯밤 거의 새벽 3시까지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경제적 문제가 여전히 미결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파리 시간으로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회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의견 대립을 보이는 문제로 회담 전체가 좌절될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데나워가 정치적인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망데스-프랑스는 정말로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데나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지쳐보였다. 관찰력이 뛰어난 울리히 드 미지에르는 자기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데나워 수상이 늘 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경제적인 세부 문제도 토요일 오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오후에는 사진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서명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덜레스는 미국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자르 지역 관련 조약을 포함한 모든 조약이 서명 날인되고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아데나워 수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기 회의에 독일이 적어도 참관인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회의실에는 그를 위하여 동시통역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3년을 벼른 끝에 결국 처음으로 연합국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고상하고 비싸지만 어쩐지 불편한’ ‘드 브리스톨 파리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여기에서 그는 1954년 10월 23일이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이루어진 날’이라고 하였다.     

망데스-프랑스와 더불어 아데나워는 분명히 화해한 것처럼 보였다. 정부나 여당 내부적으로나 이후의 독일 연방의회 논의에서 아데나워가 망데스-프랑스를 비난하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망데스-프랑스는 자르 지역 문제를 로베르 쉬망과 비도에게서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1954년 12월 독일 연방의회에서 카를로 슈미트가 파리회담에서 망데스-프랑스가 독일의 대서방조약에 오로지 자르규정과 연계해서만 서명하겠다고 주장한 사실을 확인하며 아데나워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 그의 소극적인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공격을 확실히 되받아치면서 망데스-프랑스가 자신에게 냉혹하게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망데스-프랑스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것이다.     

카를로 슈미트는 사실 몇 주 전에 이 문제에 관하여 아데나워에게 문의한 바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아데나워에게 동정심을 느끼기에 더 이상 그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나타냈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아데나워다운 답을 했다. “그는(망데스-프랑스는) 제가 전혀 정치가 같지 않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가 내 입장에 서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러한 질문을 하여 나를 완전히 넘어뜨렸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양보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추측해 보자면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 규정을 받아들이면서 평화조약 체결의 유보와 자르 지역의 자유의 회복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법률적인 고려’를 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자체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 현실은 자르 지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련이 다시 여기에서 새로운 승자가 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말하자면 이는 냉정한 국시(國是, Staatsräson)에 해당되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자르 지역의 자유로운 지방선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 선거에서는 친독 정당들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1954년에 튀니지와 모로코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법적 청구권이 강력한 조치 운동에 맞서 얼마나 무기력해지는 지를 잘 보여 주었다. 대다수의 자를란트 국민이 자르규정이 어찌 되든 자유로운 지방선거 이후 자르 지역을 다시 독일에 합치는 것을 강력하게 바랐다면 자르규정을 자르 지역 국민들이 국민투표 없이도 받아들이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계산속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최측근에게도 누설할 수 없는 법이었다.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말한 다음과 같은 사후 합리화는 사실 신빙성이 떨어진다. “자르규정을 자르 국민이 거부하게 된다면 오히려 내게는 희망이 생긴다.” 국민투표에서 자르규정에 찬성해 줄 것을 권유한 아데나워 수상이 그런 식으로 사후에 진실을 멋대로 왜곡한 것은 아닌가? 1954년과 1955년에 자르 문제에 깊게 관여하였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먼 훗날에 자기의 《회고록》에서 아데나워의 그러한 마키아벨리식의 이중적인 자르 정책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다. 곧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르규정에 대하여 찬성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도 하인리히 슈나이더가 이끄는 자르민주당(DPS)에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라 안에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데나워가 만족해하며 본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서방 정책을 완전히 관철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온 사방에서 자르 문제에서 그가 양보한 것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아일랜드를 거쳐 제2차 미국 방문에 나서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워싱턴과 뉴욕애서 위대한 세계적 정치가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명예박사학위도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방문은 그에게는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1953년 초와는 달리 아데나워 수상의 미국 방문이 독일에서는 더 이상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없는 동안 본에서는 자르라는 질병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민당(SPD) 소속 연방의회 의원인 발터 멘첼은 보쿰에서 아데나워를 지금까지 독일에 있었던 ‘가장 무능한 외무장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형법 조문을 들먹였다. 그 조문은 독일 지역을 외국에 병합시키는 매국노를 다스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야당의 날카로운 비판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연정 참여 정당들의 분열 조짐이었다. 자민당(FDP)은 자르규정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내각과 연정 참여 정당들의 분위기는 또다시 매우 험악해졌다.     

이미 파리회담을 대비한 어려운 준비과정에 있던 10월 8일에 기사당(CSU) 소속 특임장관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서한의 공개 사건이 터졌었다. 그 서한에서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의 제2기 정권의 약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기사당(CSU) 또한 정정의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 당시 슈트라우쓰는 먼저 자민당(FDP)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더 이상 연정을 이루고 있지 않다.’라고 하면서 아데나워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아데나워의 실책은 지도력을 유연하게 발휘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당 대표인 폰 브렌타노나 부수상인 블뤼허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아데나워가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 귀하는 외교 정책에서 너무나 많은 책임을 홀로 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연정에도 균열이 갈 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심각한 손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 저는 높아만 가는 비판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는 제가 경험한 것과도 같습니다. 곧 귀하에게는 연정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데에 실제로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 외교 정책과 관련된 회담의 준비, 시행, 평가, 서방의 유력 정치인의 입국, 체류, 출국, 고위 외교 사절의 영접, 고위위원회의 3인의 고위위원들과 연합국 인사들의 방문과 관련하여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바람에 국내 정치에 대하여 조용히 논의하기에는 사실 시간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타협안을 제시하고자 말씀을 드리기 전에 저는 터키 수상이 이미 25분 전부터 귀하를 기다리고 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귀하께서 회의장을 떠나시니 방의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이러한 어조는 계속 이어졌다. “귀하를 둘러싼 일방적 관계는 이제 거의 한계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지도부에 속하는 동료들이 수백 번 제게 말은 하였지만, 귀하에게 직접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처음일 것입니다.” 슈트라우쓰는 연정 안에서 드러난 구체적인 견해차를 지적하고 있다. 곧 프리츠 쉐퍼가 제기한 조세개혁을 둘러싼 논란, 자민당(FDP)의 슈트라우쓰에 관한 조직적인 언론 공격, 자르 정책과 관련된 협조의 부재와 같은 것을 언급하였다. “우리의 경우 모든 분야에서 자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세우는 구호가 ‘고향을 제국의 품으로’부터 완전한 저자세에 대한 비난까지 다양합니다.”     

슈트라우스는 정치계의 떠오르는 별로서의 자신감으로 이 장문의 분노 서한에서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서슴지 않고 나열하였다. 그는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고 느끼며 연정 협상 자리에서 아데나워 수상이 화내도록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서한이 매우 파렴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기며 매우 냉정한 협박의 내용이 담긴 전문으로 응답하였다. 동료 장관인 슈트라우쓰의 ‘버르장머리 없는 짓’에 대하여 아데나워에게 불만을 쏟아낸 블뤼허 장관과 프로이스커 장관에게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늦어도 몇 주 안에 슈트라우스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소속의 분노에 찬 이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좋은 충고를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쉐퍼와 슈트라우쓰를 너무 부드럽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접입니다.” 결국 아데나워가 주재하는 협상 자리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1953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연방 재무장관은 걸림돌이 되었다. 부수상인 블뤼허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였다. “몇 주 후에 정부는 마비되고 말 것입니다. 쉐퍼는 토요일에 몇 주간의 휴가를 내면서 자기 비서와 부하 직원들에게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민당(FDP)이 싫어하는 또 다른 인물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내무장관도 있었다. 프란츠 블뤼허는 ‘존 사건’(John Affäre)*을 둘러싼 협상을 거론하면서 그가 ‘고집불통인 인물’이라고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슈뢰더를 내각의 훌륭한 장관으로 여기게 된 아데나워도 1954년에는 그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슈뢰더와 늘 경쟁 관계에 있던 하인리히 크로네는 아데나워가 슈뢰더의 ‘남들 앞에 나서는 모양’, ‘자기과시’를 지적하고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자세가 안 되어 있다고’ 꼬집은 것에 대하여 만족해하였다.      

* 존 사건 [John Affäre, 역자주 – 오토 존(Otto John)은 독일의 연방 헌법수호청의 초대 청장이었다. 그는 1954년 7월 20일부터 1955년 12월 12일까지 동독에 머물렀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 스캔들이었다. 당시 내무 장관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 ‘존 사건’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연방 헌법수호청 청장인 오토 존은 1954년 7월 이후 아예 동독으로 이주하여 아데나워 정부의 비리를 밝히는 증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달이 일어난 원인은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늘 나타나기 마련인, 그래서 1954년에도 등장한 어려운 전문적인 문제나 연정 정당 간의 갈등만은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심각한 개인적 경쟁이나 인성의 부족이었다.     

1954년에 특히 두드러진 인물은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이었다. 6년 전부터 그는 아데나워의 지도방식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장관들의 장단점만큼이나 수상의 장단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에서 커다란 성과가 있었던 1954년을 회고하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많은 유명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아데나워가 ‘정치적 후계자를 기르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한 아데나워는 연정 내부의 지도적 인물들을 규합하여 그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오늘날 모든 정당의 지도자들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누구도 이 위대한 인물의 성공적인 후계자로 단독으로 나설 힘도 없었다.”     

후계자 후보에 들었던 헤르만 엘러스는 편도선 수술을 받고는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아데나워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아데나워는 런던에 머물면서도 그의 5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미와 전문을 보낸 터였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아데나워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참된 표징이었다.     

독일 연방의회 의장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아데나워가 미국에 머물 때 전해졌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일정을 중단하고 군용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54년만 해도 비행기 여행은 체력이 매우 소모되는 일이었다. 버뮤다와 아조레스 제도에 중간 기착을 하였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 접근할 무렵 마드리드와 프라하 말고는 유럽 전역의 도시가 안개로 착륙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해협 위를 몇 시간 동안 오락가락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밤중에 그것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 착륙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군 막사 안의 ‘채색된 화분과 목수 장비들로 둘러싸인’ 야전침대에서 4시간 정도 잠을 청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브레멘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정확히 10시에 아데나워는 엘러스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올덴부르크의 교회에 들어섰다. 그는 “반듯하고 침착한 자세로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본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의 신경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아데나워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에게 엘러스의 뒤를 이어 독일 연방의회 의장이 되라고 재촉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게르스텐마이어를 매우 총애하고 있었다. 그래서 게르스텐마이어가 1953년 조각 때 내각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제는 이 측근을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수상의 뜻에 공개적으로 맞설 수 있었다. 에른스트 레머가 후보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자민당(FDP)과 사민당(SPD)이 동조하였다. 게르스텐마이어가 흔들렸다. 과연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야망은 외교 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데나워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게르스텐마이어는 3차 투표에 가서야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자 아데나워의 정에 넘치는 친필 서한을 받았다. 이후 그는 15년 동안이나 점차로 기쁠 일이 없어지는 연방의회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 그를 단 한 번도 내각에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절망하는 심정으로 아데나워에게 반항하는 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독일의 처지에서 볼 때는 전혀 좋을 필요가 없는 자르 규정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없던 연정을 흔들게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이제는 자신이 관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타협의 요소에 노력을 기울였다. 파리의 망데스-프랑스는 이와는 반대의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독일에 퍼진 자르라는 질병은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그러면서 본에서는 연정 정부를 흔들어 놓았다.     

프랑스 의회에서 조약이 연말까지 비준될 전망이 다시 매우 불확실해지자 아데나워에게도 독일 연방의회에서 조약에 관한 2차와 3차 논의를 1955년 2월까지 연기하기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 프랑스 의회가 이번에는 진척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자민당(FDP)의 분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자민당(FDP)은 하인리히 슈나이더가 이끄는 자를란트의 자르민주당(DPS)의 영향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철저한 민족주의 자유주의자였던 토마스 델러는 부수상인 블뤼허를 속으로 미워하고 있었고 점차 아데나워에 비판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정 안에서의 야당의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자민당(FDP)에 공을 들이며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을 대동하고 자민당(FDP)의 공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중요한 조약 비준에 앞서 자민당(FDP)을 2시간 동안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독일 연방의회 총회에서 연정 내부의 커다란 균열을 막지 못하였다.     

파리조약에 대해서는 연정 안에서 사실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302명의 의원에 맞선 150명의 사민당(SPD)은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사민당(SPD)이 주도한 반대 데모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이 데모는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관한 반대로 ‘나는 빼고’(ohne-mich)의 분위기가 독일 전역에 넘치고 나서 4년여가 흐른 다음에 독일 대다수의 국민을 설득하여 독일의 유럽 방위 분담에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도록 하는 데 아데나워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독일 연방의회의 의석수를 보아서는 자르규약의 비준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1955년 1월 바덴바덴에서 망데스-프랑스를 만난 자리에서 조인 찬성표가 과반수를 간신히 넘기게 될 것이라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비준에 대하여 아데나워보다는 조금 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민당(FDP)의 찬성표를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소와-퐁세와 내기를 했다. 곧 비준안 표결에서 자르규정에 관한 찬반의 격차가 40표 이상이 된다면 200명을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3차 논의의 표결 결과는 찬성 264표, 반대 204표, 기권 9표였다.      

내각의 일부 장관들도 기권하였다. 여기에는 카이저, 프로이스커, 쉐퍼가 있었다. 법무장관 노이마이어는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부수상 블뤼허는 찬성표를 던졌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자기 사임을 청원하는 공손한 서한을 아데나워에게 보냈다. 자기 정당 소속 의원 대다수가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투표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는 약속대로 저녁 식사 비용으로 2천 마르크를 지불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르규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곧 드러난 대로 10개월만 유지되었다. 그리고 자민당(FDP)과의 연정은 거의 좌초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아데나워에게 있었다. 사실 그 당시 상황에서 자민당(FDP) 의원 대부분이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그래서 이를 감내해야만 하였다. 자기 계획을 자르규정에 관한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찬성표로 관철한 경험이 있던 아데나워 수상은 이러한 결과를 느긋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대 의견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라면 말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변호사이며 공증관인 막스 베커가 자르규정에 관한 반대 의견의 발언으로 자민당(FDP)의 확실한 반대 기류가 형성된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베커의 발언에 담긴 고상한척하는 정신이었다.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돈과 재화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땅과 국민은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베커가 자르조약에 관한 모든 긍정적인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한 것이 훨씬 더 신경에 거슬렸다. 아데나워가 실제로 마음이 언짢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연정 내부의 자르규정에 관한 반대자들의 기를 죽이기 위하여 그런 척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연정의 내홍을 공개적인 위기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데나워의 다음과 같은 통렬한 비판이었다. “베커 의원님께서 하신 말씀은 준비가 철저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씀이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독일에 매우 커다란 손실을 입혔습니다.” 키 큰 아데나워 수상이 헤르스펠트 출신의 키 작은 의원에게 단단히 복수를 한 것이 자민당(FDP)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의 이러한 훈계를 듣고 토마스 델러가 훨씬 더 심한 반박을 한 것은 이 인물의 성격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자민당(FDP) 당대표는 비교적 부드럽게 진행되던 마지막 토론이 있던 날에 분노하여 쏟아낸 말은 단순한 안건에 관한 비판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책무에 따라 건전한 의견을 제시하는 국민을 대표하는 자신을 공격한 아데나워가 ‘인간적으로 실망스럽다’고 일갈하였다. 델러가 아데나워를 개인적으로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격렬하게 두 번째로 아데나워를 비판한 것은 거의 정확히 3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굳은 표정으로 델러의 발언을 들었다. 그러고는 즉각 분노에 찬 답변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측근이 그를 뜯어말렸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연정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보고 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제 그 두 사람이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원수가 된 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아니었다. 사실 몇 주 전에 아데나워는 페르드멩게스와 더불어 인사 문제를 논의하면서 자르조약 문제로 법무장관인 노이마이어가 물러나면 토마스 델러를 다시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르 지역 논쟁으로 촉발된 연정의 위기는 아데나워가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데나워는 조약 비준 과정 말미에 화해를 청하는 발언을 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긴장된 상황에서 말을 한 것이다.      

1955년 3월 초에 드디어 시작된 연정 논의에서 감정이 폭발하였다. 아데나워는 델러가 독일 연방의회에서 한 발언은 원래 자신에 관한 깊은 증오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를 비난하였다. 델러는 이를 반박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우리의 공통된 정치적 목적을 고려하여” 이러한 적대감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4월 초에 델러가 올덴부르크에서 열린 자민당(FDP)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분노에 찬 편지를 그에게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델러는 사순절 성금요일에 아데나워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다. 델러는 “저의 명예를 걸고 이것은 허언이 아닙니다.”라고 그 편지에 썼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더 이상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부활절 다음 목요일에 아직 뢴도르프에 머물고 있을 때 아데나워가 받은 델러의 고상하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에는 다시 한번 자민당(FDP) 당대회에서 델러가 했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발언이 다시 나왔다. 이 내용은 속기록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아데나워와 자민당(FDP)이 함께 외교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것이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슈마허나 사민당(SPD)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은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자기합리화적인 답을 하였다. “이 말을 비틀거나 곡해할 수 없습니다. 귀하는 여기에서 독일 외교를 공동으로 추진하지 못한 큰 잘못에 대하여 제게 책임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비난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여기며 이는 지금껏 제가 받은 것 가운데 가장 심한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목요일에 화해의 뜻을 담은 올리브나무 가지를 살짝 내밀었던 델러는 “지극히 존경하는”이라는 인사말로 시작된 이 서한으로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앞으로는 아데나워 수상과 자민당(FDP) 당대표 사이에는 휴전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짧았지만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은 서신 교환은 이 사단의 그 핵심이 정치적 대립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지난 몇 달 동안 연방의회에서 진행되었던 격렬한 논쟁 이후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의도적이든 아니면 멍청하게도 모스크바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베를린회담 이후 소련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서방과 유대를 맺는 것을 반대하는 구상을 제시하였다. 곧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집단 안보 체계를 들고나온 것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아데나워는 소련이 유럽에서 지배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집단 안보체계는 사민당(SPD)이 여러 형태로 변형하여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사민당(SPD)은 그러한 제안으로 소련이 유럽에서 주도권을 쥐게 해줄 것이라는 비난을 격렬하게 반박하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독일의 중립화, 블록 중립*, [서방과] 유대 없이 머물기 –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역겨운 발상들이었다. 논쟁이 격화되던 2월 초에 아데나워가 한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내려와 평평한 땅 위에 앉아 우리가 그들의 신발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격에 그런 일을 어울리지 않습니다.”     

* 블록 중립 [Blockfreiheit, 역자주 – 동방과 서방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것]     

그런데 이제는 사민당(SPD)이 이미 한참 나아간 길로 델러가 자기 당을 이끌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앞에서 언급한 서한에서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그의 유명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무례를 자행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안은 좀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델러 또한 자기 필생의 업적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기 정적을 늘 신속하게 처리해 왔다.     

그러나 프란츠 베커에 관한 아데나워의 강력한 반박은 국제적인 역풍을 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아데나워의 발언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응대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제는 요하네스 호프만과의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던 매우 내밀한 유대도 단절되고 말았다. 아데나워가 격노하여 선언한 대로 자민당(FDP) 내의 정적들의 정책으로 그가 쫓아내 버리고 싶은 그랑발스와 호프만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잔존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자브뤼켄, 곧 자를란트와의 대화 통로가 단절되고 말 것이었다. 정부에서 일하는 할슈타인은 아데나워가 자신이 제출한 문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내던져버린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이런 게 외교 정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상기된 얼굴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자르 지역 문제에 관한 논란이 서방 조약의 최종적인 비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5년 5월 5일 12시 정오에 독일연방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주권 국가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독일 연방의회 건물에서 축하식과 함께 비준식을 진행하려는 생각에서 연설문도 마련했다. 그러나 1952년 5월의 대서방조약 비준 때와 마찬가지로 야당은 아데나워의 계획을 망칠 심산이었다. 의사진행과 관련하여 매우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졌고 아데나워가 불쾌하게 여겼지만, 정당 대표들만이 연설을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은 샤움부르크성에서 12시에 국기 게양식이 거행 될 때 자기 선언문을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민족으로 일어섰습니다. 기존의 점령군은 이제 진정한 우방으로 유대를 맺게 되었습니다. ...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설 자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자유 민족들과 나란히 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나라의 통일과 동독이 자유롭지 못한 동포들이라는 목표도 동시에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이 성명서에서 그러한 주제를 강력한 도발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보다는 그의 시각에서 해방만이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해방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였다. 곧 동독의 해방된 동포가 독일의 핵심 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에 귀속되고 독일이 서방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자유롭고 통일된 유럽에서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1년 후에 아데나워가 자기 《회고록》에서 1955년 5월 5일의 선언을 되짚어보면서 이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라는 명칭 자체가 “헌법을 수립한 이들이 모든 독일 국민을 염두에 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곧 독일 기본법이 이미 “독일인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의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틀 후에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의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며 파리에서 개최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연초 회담에 참석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격식에 맞는 행사를 거행하는 가운데 독일연방공화국이 대서양 공동체에 가입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서도 많은 축사가 있었다. 그러나 승리했다는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상황이 변하여 서방과의 유대의 의미가 다시 한번 퇴색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대서양 양안의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안보 체계의 기초가 마련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 체계의 구체화를 위한 작업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아데나워 외교 정책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긴장 완화의 시작     


1955년은 냉전이 아무런 과도기 없이 갑자기 짧은 긴장 완화 시기로 진입한 해이다. 파리에서 마지막 지연작전 끝에 프랑스 상원에서 서방 조약이 체결되기 하루 전날인 3월 26일에 소련의 불가닌 총리는 정상회담에 응할 뜻을 밝혔다. 모스크바의 긴장 완화에 관한 의지의 시금석으로 흔히 5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대하게 체결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거론된다. 6월 7일 아데나워 정권은 소련이 독일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모스크바의 놀라운 제안을 마주하게 된다. 6월 13일 이미 프랑스, 영국, 미국의 정부 수반들이 7월 하반기에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모스크바 주재 대사들은 그곳에서 ‘분위기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같은 소식을 각국에 전했다. 서유럽의 여론은 이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덜레스는 지국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저는 지금 여기 유럽에서 들끓고 있는 4대 강국의 정상회담에 관한 광적인 기대에 대하여 약간 걱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 회담에서 무엇보다도 국가수반들의 만남으로 기적이라도 일어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회담에서 성과 있는 논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이제 아데나워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방과의 유대가 완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서방조약 체결 이후 예상되었던 ‘빙하기’가 지나고 긴장 완화의 봄과 여름이 온 것이다. 모스크바도 독일이라는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데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련 군대가 오스트리아로부터 철수하ᅟ겸 어쩌면 독일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매우 불안했다. 그는 자기의 외교 정책의 모순이 이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한편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을 약속하고 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본이 소련과 동유럽 블록과의 유대를 통상적으로 자율적으로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이 1952년부터 독일의 주권에는 소련과 관계를 맺는 권리도 포함된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인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가장 어려운 문제의 조짐을 인식한 것이다. 모스크바는 이미 동독과 대사 관계를 수립한 후였다. 동독과 관련하여 국제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폴란드와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제 독일의 가장 고유한 정책인 통일이라는 주제를 독일연방공화국 자체적으로 논의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모순이 되는 점은 또 하나 있었다. 곧 아데나워는 늘 되풀이하여 서방 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주장하게 된 것처럼 즉각적으로 독일 ‘군대’의 창설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제 제1차 긴장 완화 시기에 그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의 기도를 이러한 상황에서 또다시 최소한 독일 군대의 숫자와 최현대식 무장을 어느 정도 막아보려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련과의 관계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1948년부터 독일군은 소련이 모험을 감행할 생각을 못 하도록 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아데나워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한 이유는 군대가 독일의 주권에 핵심 요소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동서독의 통일은 동서 블록의 긴장 완화의 분위기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매우 강조해오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전세계의 차원과 유럽의 차원에서 군비축소와 군수 통제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순은 아데나워가 자기 수장직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아데나워가 1955년을 기분 좋은 확신보다는 매우 불확실하고 의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아데나워의 긴장 완화 정책의 내적 모순은 서방 열강들의 전형적인 상반된 자세 때문만으로 더 커진 것은 아니었다. 냉전은 프랑스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긴장 완화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 어떤 정부도 이를 쉽사리 뿌리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련이 긴장 완화의 의사를 나타내면서 무엇보다도 서방의 독일 통일 정책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서방 연합국들이 독일연방공화국을 희생하고라도 노골적으로 소련에 양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곧 안보 조약이나 독일 통일 문제에서 서방이 소련에 양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때부터 독일도 긴장 완화에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냐는 서방의 기대라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바로 독일의 분단 상황을 받아들이고 소련의 독일 군비 통제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서방 정부들이 독일의 신뢰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와의 대화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면 존 포스터 덜레스나 파리에서 새로운 ‘라팔로 조약’*에 관한 공포가 급속히 확산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에 맞서 서방과 유대를 이루어 독일의 동방 정책을 지혜롭게 집중시켜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러한 갈등의 탈출구를 택하면서 국내 정치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 대단한 성과를 포기해야만 했다. 1955년 9월 아데나워는 일단 독자적인 동방 정책을 추진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물론 이것도 서방과의 연대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맺는 것에 관한 서방 국가들의 내부적 반응을 보면 이미 이 단계에서 아데나워가 이미 서방 인내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라팔로 조약’ [Rapallo, 역자주 - 1922년 4월 16일 독일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이 맺은 국경조약. 이때 양국 관계 정상화도 합의함.]     

그러한 모순적인 기대는 이때부터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과 안보 정책을 따라다녔다. 이러한 기대는 아데나워에게 국내 정치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다. 사민당(SPD)은 여전히 소련의 긴장 완화 구상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주권을 회복하자마자 새로 확보하게 된 동방 정책의 여유를 통일에 도움 되도록 하라는 자민당(FDP)의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때때로 이와 맥을 같이하는 요구가 기민당(CDU) 내부에서도 돌출되었다. 그리고 정당 정책적 행보는 전반적으로 여론의 향배에 좌우되었다. 여론은 독일 정치 활동에 집중하기를 바랐고 냉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긴장 완화의 징표가 보이는 상황에서의 독일의 동방 정책과 관련된 이러한 기본적인 상황은 1955년 겨울과 초반에 처음으로 온전히 전개되었다. 아데나워나 그의 최측근 인사들은 이 시기에 소련과 최대한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협상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2월 중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변함없는 아데나워의 책사였던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은 아돌프 호이싱거와 외무부의 몇몇 인사들을 초청하여 ‘브레인스토밍’을 하였다. 논의의 주제는 독일과 소련의 긴장 완화와 독일 통일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안보정책적 양보가 가능한 사안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 “독일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독일연방공화국에 관한 새로운 군비제한일 것인가? ... 소련은 통일 이후 독일의 동부지역의 군비가 서독지역의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만족할 것인가? 그러한 양보를 하면서 동해에서 아드리아해를 거쳐 유럽까지 이르는 비무장지대를 제안해야 할 것인가? 이는 한편으로는 독일의 동부 지역을 포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폴란드와 체코 지역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비무장은 유럽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국제기구가 이 지역을 감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곧 이 지역을 미군과 소련군으로 구성된 감시군이 중립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블랑켄호른은 자신이 이미 1953년 초에 구상했던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여전히 별로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구상에 맞서 소련이 오더·나이쎄 국경을 인정해 줄 것을 역제안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모든 소련 위성국가와 ‘불가침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경우 독일연방공화국은 오더·나이쎄 동부 지역을 영원히 양도하고 소련의 위성국가들을 진지하게 인정하게 될 노릇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소련은 미군의 유럽 지역에서의 철수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울 것이 분명하였다. 미군이 중부 유럽에 보장하는 안보 체계가 모스크바의 처지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곧 소련의 입장에서는 ‘독일군과 미국의 군비와 잠재 인력이 조합을 이루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보장하는 서유럽 전체의 ‘유사 중립화’ 또한 위험한 구상으로 여겨졌다. 아데나워의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냉정한 전략가인 아돌프 호이싱거는 이 논의에서도 강력한 미군의 유럽 주둔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서유럽은 ‘미군 주둔 없이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충분하지 않다.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삼국의 군대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매우 부족할 것이고 불안할 것이다. 중부 유럽에 위기가 발생할 경우 미군과 영국군이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진군을 적시에 막기 위하여 유럽 대륙으로 파병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군사적 가능성을 냉정하게 검토한 결과 현재의 소련의 태도를 보아서는 모든 관계국이 안보에 관한 확신을 지니도록 하고 소련이 독일의 통일에 동의할 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 진행할 협상의 목표는 소련이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면 모스크바는 서방의 여론에 ‘현재의 상황을 포기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솔직한 고백을 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소련의 정책은 유럽에서 더 많은 지역을 흡수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 또한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보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계획은 서방 연합국과 조율하여 러시아에 제안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평화에 기여할 만한 구체적인 것이 나올 것이라는 환상은 품지 말아야 한다.”     

1955년 3월 9일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은 이러한 구상을 뢴도르프에 머물고 있던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해마다 걸리는 연초 독감으로 몸져누워있어야만 했다. 여기에서는 특히 소련이 핵폭탄과 수소폭탄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것이 동부 지역의 비무장화가 하찮은 일로 보이게 만들어버렸다는 사실도 언급되어 있었다.      

이데나워는 이 조언자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독일 전체의 중립화에 관한 대가가 그 당시 오스트리아와 소련이 협상을 벌이는 형태와 같은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미군이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납될 수 없었다. 독일의 중립화는 단순히 ‘미군이 유럽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첫 단계’가 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유럽 변방의 성공적인 방위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될 노릇이었다. “(수소폭탄까지 포함해서) 영공의 보호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독일의 12개 사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성공적인 4자회담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대난망의 일이었다. 아마도 전 세계적인 차원의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통일 문제도 결부될 수도 있었다. 독일 외교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미군 철수’와 ‘미군의 거점기지 포기’를 조장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숙고를 바탕으로 아데나워가 이제부터 제네바회담의 최종 수립단계에 이르기까지 아데나워가 제시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워싱턴에 보낸 여러 전문에서 제임스 코넌트는 아데나워 수상이 긴 설명 끝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지적했다고 보고하였다. 첫째, 소련의 군사력이 그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소련의 국내 경제의 어려움과 중국과의 껄끄러운 관계로 급격한 권력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둘째, 서방은 핵무기와 전략 무기에 관한 국제 협약을 맺도록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하였다.     

이와 연계하여 모든 유럽 국가, 미국, 캐나다가 참여하는 일종의 ‘유럽 안보 체계’를 제안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체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가침 조약, 상호 지원 의무, 침략국의 조약 관련 권리 상실, 군비 제한과 군비 통제, 영토 문제와 관련된 무력 사용 포기.” 이와 연계되는 사안은 1954년 제기된 ‘이든 플랜’(Eden-Plan)에 따른 독일 통일에 관한 새로운 제안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지되어야 한다. “새로운 제안은 파리회담에 따른 독일의 군대 창설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기본 지침은 1955년 가을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1955년 4월에 아데나워 수상은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고 본’ 독일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별개의 안건으로 논의하지 말고 세계와 유럽 차원의 긴장 완화 합의와 긴밀히 연결하여 논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에 관한 4자회담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동부 지역의 대표가 참여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1955년 5월 7일 존 포스터 덜레스가 표명한 의견대로 그런 식으로 동독을 동등하게 대접하면 ‘동부 지역의 국민에게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주어 실제로 이러한 조치가 독일민주공화국(DDR)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었다. 그래서 ‘심리적 저항’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협상 계획에서 내부적으로는 다시 한번 유럽 안보 체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논의될 필요가 있었다. 이미 4월 말에 아데나워 수상은 코넌트에게 자유선거로 수립된 독일 정부는 결국 처음부터 안보에 관련된 특정한 제약에 동의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곧 엘베강 동부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고 또한 엘베강 동쪽에서는 군인을 징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제안이었고 후자는 ‘전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오더·나이쎄 국경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았다. 아데나워가 이 문제를 논의하면 독일에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국경선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받든지 아니면 통일이라는 보상도 없이 이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 두 선택지 모두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 수상은 4월 말에 4자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런던회담 준비단에 매우 상세한 훈령을 전했다. 이 훈령에는 독일 통일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예상이 담겨 있었다.     

“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유럽연맹과 같은) 기존의 서방의 방어체계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② 조약의 체제로 정해진 군비축소 조치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전제가 되는 것은 동부가곧 동유럽과 소련이 이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재래무기의 균형 유지) 여기에서 독일연방공화국에 특별한 차별적 조치가 있어서는 안 된다.

③ 독일 통일로 서방의 군사력 증강이 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④ 동해에서 아드리아해에 이르는 비무장지대의 지정, 여기에는 기존의 소련 점령 지역까지 포함된다.”      

독일의 통일을 상정한 이러한 구상은 미국과 캐나다가 함께 참여하는 ‘유럽의 보장과 지원조약’ 계획과 연계된다. 영토 문제는 여전히 평화 조약의 안건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그리고 블랑켄호른에게 보낸 이 2장짜리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왔다. “전체 독일은 국제적인 지위를 고려하여 어떤 경우에도 차별적인 규정(중립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데나워에게 중요한 것은 유럽 문제를 세계적인 차원의 군비축소와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에서 벌어지는 미소 간 긴장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이 모든 구상은 자발적으로 중립을 선택한 오스트리아의 문제 해결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중립화에 관한 아데나워의 두려움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 대통령마저 1955년 5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가 깜짝 놀랄만한 발언을 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독일의 중립화를 지지하는 프랑스 신문 《르몽드》의 기자가 한 질문에 대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일련의 국가들을 중립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구상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립국이 스위스를 모범으로 삼은 것이라면 군사적 공백 상황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환상을 품는 국가가 늘게 되었다. 이미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가 중립국이 되었다. 모스크바에 들어선 새 지도자는 유고슬라비아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인 티토는 유럽을 관통하여 중립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립국인 독일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그런데 이제 아이젠하워도 통일 독일이 중립국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아데나워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우려하면서 5월 25일 워싱턴, 런던, 파리 주재 독일 대사들을 뷜러훼헤로 소환하였다. 크레켈러, 헤르바르트, 폰 말트찬 남작, 할슈타인, 블랑켄호른 앞에서 아데나워는 여러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곧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그러한 구상에 깊이 우려하며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결심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중립성은 지난 몇 달 동안 아데나워의 맘에 들지 않았다. “이 모든 오스트리아의 수작”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데나워는 미국무성 직원들과 비인의 정부관리들의 협잡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 모든 일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의 농간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를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처럼 선거와 외교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두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도 그렇게 냉정한 선거 계산을 할 것으로 여길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내년에 재선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가 러시아와 협상을 이루어 아시아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재선은 따 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비난을 이어갔다. “미국인은 이 유럽을 잘 모릅니다.” 미국인은 유럽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나 나아가 미국 여론에서도 여전히 독일에 관한 깊은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독일은 적대국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련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소련의 위성국과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어 미국이 소련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면 그 결과에서 미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데나워는 ‘비무장지대’라는 구름잡는 구상에서 무엇이 초래될지는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몇 달 전에 이미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에게 이러한 구상에 주의를 당부했었다.     

아데나워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 대해서도 그 몰래 중립 지대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크레클러 대사의 말을 듣고도 온전히 안심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중립 지대라는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유럽연합(WEU)에도 손실을 주게 된다는 것을 덜레스가 한심하게도 알지 못한다고 여겼다.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강대강(强對强)으로 치닫게 되면 모든 중립체계가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 강대국의 군비축소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뿐입니다.” 덜레스가 공개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립 지대 구상을 반대한다는 말을 하자 비로소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덜레스가 백악관의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무부를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대통령은 자신만의 외교를 추진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로 아데나워는 독일의 통일을 최대한 신중하게 추진하려는 의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아데나워 앞에 모인 외교관들은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시(國是, Staatsräson)에 관한 훈계를 들었다. “우리는 세계에 더욱 큰 목소리로 선언하였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최고의 문제는 우리가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먼저 서독의 오천만 명의 국민이 이를 누리고 그다음으로 동독의 1,800만 명이 이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다시 독일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크레켈러 대사를 통하여 독일 정부의 외교적 항의를 전달한 것과 더불어 슈파이델 장군을 통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총사령관인 그륀터 장군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 자신은 6월 중순 워싱턴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를 만나 누가 미국의 외교 정책을 이끄는 지에 대하여 상당히 노골적으로 물었다. 곧 국무성인지 백악관인지 물은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기는 인물들을 미국의 국무장관인 덜레스 앞에서 서슴없이 거명하였다. 여기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동생 밀턴 아이젠하워, 유감스럽게도 소련에 우호적인 전임 측근인 헤리 홉킨스, 셔먼 아담스, 조지 상원의원, 조기 케넌,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볼렌이 있었다. 이런 아데나워의 질문에 대하여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뢰를 받고 있다는 말 이외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데나워가 유럽 대륙에 중립국의 띠를 만들고자 하는 미국의 구상을 방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바로 테오 블랑크에게 즉각 자원군법* 초안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 자원군법 [Freiwilligengesetz, 역자주 – 1955년 7월 16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법으로 독일 구군 창설의 기초가 되는 6,000명 규모의 자원군 창설에 관한 법률]     

아데나워는 이제 ‘비무장 지역’의 구상을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알게 되자 장비 통제 계획을 마련하도록 즉각 조처를 취하였다. 이 계획은 중립 지대 구상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6월 초에 블랑켄호른과 호이싱거는 카우프만 박사와 볼프강 폰 벨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1953년 초에 세웠던 과거 구상과 1955년 4월에 마련한 의견을 변화된 상황에 맞추는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서 1955년 6월 11일의 이른바 ‘호이싱거 구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구상에서는 소련의 정책에 관한 기존의 부정적 평가에는 변함이 없었다. 6장에 이르는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소련과 소련의 정치적 궁국 목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나 5월 10일 소련이 제안한 군축 구상에 관한 신중한 검토는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앞으로 있을 협상에서 이 계획이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안건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리하여 4자 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4가지 범주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다. ① 핵무기 문제를 포함한 세계적인 군축 문제. ② 유럽의 군비제한. ③ 1954년의 이든 계획을 보완한 것에 따른 독일의 통일. ④ 유럽 안보 체계의 수립. 이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①, ②, ④번 문제는 ③번이 해결되지 않으면 처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획의 이 단계에서 원래 새로운 점은 ②번에 나온 내용이었다. 현재 유럽의 안보 체계는 여기에서 자세히 나온 대로 ‘세력 간의 극단적인 오해’라는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이 오해를 푸는 것이 ‘참다운 긴장 완화’를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군비의 균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약 200km에 걸친 비무장지대의 수립’이 전제되었다. ‘이 지대는 동해에서 아드리아해로 이어지며 (튜링엔 숲을 제외한) 소련의 점령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동부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비무장지대의 양쪽 지역에서는 ‘군사력의 균형의 확립’이 이루어져야 했다. 서유럽지역에서는 독일 군대가 참여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대가 주둔하게 될 것이었다. 이를 마주하고 있는 동부 지역에서는 동일한 숫자의 소련이나 위성국가의 군대가 주둔해야 할 것이었다. 기존의 동서 군사력의 불균형으로 당분간은 미군이나 영국군의 철수가 논의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방에서 명시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양보로는 기존의 12사단 규모의 독일군을 독일이 통일되는 경우에도 확대하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호이싱거는 추가적인 수정을 위한 이러한 아이디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그는 아데나워가 뉴욕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6월 12일 수상에게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발간한 지도 한 장을 전달하였다. 미국 지도에 비무장지대의 구획도를 그려 넣으면 그러한 구상을 원래 누가 했는지를 전혀 추적해 볼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 지도에는 이제 3개의 구역만 표시되어 있었다. 제1 비무장지대는 튤립꽃 모양으로 동독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튤립꽃 모양의 잔의 위쪽 경계는 트라베뮌데(Travemünde)에서 슈테틴(Stettin)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튤립꽃의 꽃받침 부분은 트리스트(Triest) 지역에 걸쳐있었다. 여기에는 비인과 프라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2 비무장지대는 서쪽으로 라인강에 닿았다. 그리고 중부에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알프스 지역과 포(Po)강에 이르는 롬바르디아 지역까지 펼쳐져 있었다. 또한 동부지역으로는 발트와 폴란드 지역 그리고 헝가리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군비를 동등하게 배치하되 미사일이나 무선조정 무기가 배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제3 비무장지대는 서방 쪽에는 프랑스 전역, 이탈리아는 포강 남부, 벨기에, 네덜란드 일부, 동방 쪽에는 소련의 일부 서부 지역, 그리고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 지역의 대부분에 걸쳐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는 특히 국경과 안보 지대가 일치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는 중립 지대 구상에 관한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최소한 튜링엔 숲은 안보 지대로 지정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가 배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이미 그 구상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지도를 들고 워싱턴으로 가서 6월 13일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극비 사항으로 다루어줄 것은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아데나워가 정치적으로 승인한 이 구상은 사실 소련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세운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호이싱거가 세운 계획의 세부 사항은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 사이 영국의 신임 외무장관이 된 헤럴드 맥밀런도 뉴욕에서 비슷한 정보를 접했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아데나워가 넘긴 지도를 프랑스에는 전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인 피네는 믿을만한 인물이었기에 맥밀런은 이 내용을 그에게 전할 것으로 보였다.     

사실 프랑스는 블랑켄호른과 장-마리 소토의 대화로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소토가 프랑스 외무부에 전한 보고서에는 ‘신뢰의 혼란’이라는 의견이 적혀있었다. 블랑켄호른은 소토를 신뢰하여 속을 털어놓았다. 곧 그 자신이 그러한 계획을 소련이 받아들일지 매우 회의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여론을 만족시키는 일이라고 보았다. 최소한 독일의 경우 이는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의 기밀은 지켜졌다. 소련이 자유선거 문제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기에 이 아데나워의 구상은 동서 협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와 비슷한 곡절을 겪은 것이 영국에서 수립한 비슷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호이싱거의 생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과 런던은 아데나워의 구상에 대하여 일종의 결론을 내렸다. 곧 그의 구상이 너무 복잡하고 별로 소련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독일이 통일된다면 영국에는 유럽 대륙 동부 지역의 비무장화 구상이 더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사실 영국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에 대하여 리빙스턴 머천트가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논평을 하였다. “비무장지대 구상은 소련이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소련은 동독을 잃게 되고 그럴 경우 동독은 내적 어려움으로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아데나워의 머리에서 나온 호이싱거의 구상을 영국이 변형한 제안도 이후 35년 동안 회담 안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 구상은 역사적으로 거의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나중에 가서 비무장 지역에 대하여 격렬한 반대하게 된 아데나워는 비무장지역이 동부에만 제한되어 지정된다면 그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일부라도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아데나워의 관심은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이 구상을 서둘러 내게 된 사실만 보아도 아데나워가 독일의 중립에 관한 논의가 그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협상 과정에서 그리고 여론에서 볼 때 최소한 서방의 고위정치가는 이러한 아데나워의 구상을 보고 아데나워 수상이 통일된 이후에도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머물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결국 통제지역의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보니 개별 국가들이 중립화 구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5월 말에 새로운 기장 완화 정책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수세에 몰렸다고 느꼈기에 모스크바가 독일-소련 직접 대담을 제안하자 서둘러 이에 대응하였다. 6월 7일 아데나워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 하인리히 폰 말트찬 남작을 통하여 전문을 받았다. 그 전문에는 소련이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아데나워의 방문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바로 그다음 날 독일연방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러시아의 제안을 환영하며 이 선행 조건들의 검토 결과 독일의 연방 수상이 소련의 국가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시의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내용의 성명이었다. 그러나 이 성명에는 서방 동맹국들과의 사전 협의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또한 선행 조건 가운데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언급도 없었다.      

그 대신 아데나워는 유나이티드 프레스(UP) 통신사와의 회견에서 소련과의 대화를 통하여 긴장 완화에 기여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사실 모든 민감한 문제에 관한 대책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아무런 독일대사관이 존재하지 않는 모스크바로 오라는 초대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아무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데나워가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야당은 동유럽의 선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를 냉전론자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이제 모스크바는 아데나워를 그들이 원하는 대화상대로 여기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일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불평이나 하며 그저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스스로 모스크바에 줄을 대고자 하였다.     

자민당(FDP)과의 연정도 이제는 훨씬 쉬운 일이 되었다. 6개월 전부터 토마스 델러가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요구하며 아데나워의 신경을 건드려 왔기 때문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면 그러한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델러를 사절단에 포함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라팔로조약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서방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6월 19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물리치고 수상이 된 이든을 만나 그의 심각한 우려에 대하여 대처해야 했다. 이든은 소련이 아데나워를 초청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가려고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데나워가 소련을 방문하지 않으면 독일 여론은 그가 평화, 긴장 완화, 독일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에 가서도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아데나워를 진짜 ‘반동분자’라고 일컫게 될 것이다. 곧 아무런 협상을 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모스크바는 여론에서 그를 ‘망가뜨리고자’ 초청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이런 내용의 하소연을 하였다.     

아데나워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하필 이러한 때, 곧 모든 사람이 과거 독일의 양다리 걸치기 정책을 떠올릴 때 덜레스와 이든에게 재무장관 쉐퍼의 동베를린 조사위원회에 관하여 보고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아데나워가 이를 전혀 곤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는가? 아데나워에게 이는 그저 노골적인 암시에 해당되는 것이었는가?     

일을 이렇게 진행하는 것은 전형적인 아데나워의 스타일이었다. 1955년 6월 30일자 비망록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워싱턴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 동독의 빈첸츠 뮐러 장군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통지를 쉐퍼를 통하여 전달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1888년생인 쉐퍼와 1894년생인 뮐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메트나우의 베네딕트회 학교를 함께 다녔다. 20세기 역사의 우여곡절 끝에 뷜러는 기사당(CSU) 소속 장관으로서 본에서 연방정부 내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뮐러의 인생은 더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그는 직업 군인, 군사령부 참모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제12군단 지휘부 장군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1944년 여름에 독일 군대가 민스크 중심에서 괴멸된 다음 항복하였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에 그는 독일연방장교단에 소속되어 파시즘반대 학교*의 교육을 이수한 다음에 독일 동부 지역의 독일국가민주당(NDPD, 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정치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52년 이미 인민경찰의 총경이 되었고, 1953년에는 병영생활 인민경찰의 총경과 내무장관 직무대행을 겸임하였다. 그래서 그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 파시즘반대 학교 [Antifa Schule, 역자주 - Antifaschistische Frontschule의 약자로 코민테른(Komintern, Komunistische Internationale)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포로로 잡힌 이들을 대상으로 파시즘 반대를 위한 교육을 실시한 기관]     

쉐퍼가 아데나워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뮐러가 한 독일 대기업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의사를 타진해 왔다는 것이다. ‘혹시 독일연방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협상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분명히 이는 소련이 아데나워를 모스크바로 초대하기 이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접촉 사실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보고한 쉐퍼의 서한에 보면 날짜가 6월 9일로 나와 있다. 이는 모스크바가 아데나워를 초청하는 내용이 담긴 전보가 파리에서 오기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서 민감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서방의 주요 국가 정부가 독일이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니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근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서독 연방 헌법수호청의 수장인 오토 존이 베를린의 동부 지역에 나타난 지 꼬박 1년이 지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아데나워는 덜레스에게 읽어 줄 편지를 작성하라고 쉐퍼에게 지시하였다. 쉐퍼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핵심 내용을 보고 하였다. “그 독일인, 곧 아데나워 수상이 제게 다음과 같이 확언하셨습니다. 곧 이 대화의 목적은 이날에 귀하께서 우리와 유대를 맺은 나라의 국가수반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활용하실 기밀 정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면 이 정보가 앞으로 개최될 4자회담의 성과를 가져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에 응한다는 것이 제게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모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제안이 ‘매우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서한은 늘 그렇듯이 의심이 많은 제3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쉐퍼가 베를린으로 가서 동독 관할 지역으로 가서 동독의 병영 인민경찰의 수장을 만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워싱턴에서 미국 정치가와 대담을 나누는 시점에 그리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더 잘 진행되었다. 아데나워는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그래서 덜레스에게 이미 6월 13일에 뮐러와의 2차에 걸친 접촉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쉐퍼의 서한을 그에게 읽어 주었다. 독일 시각으로 6월 15일 저녁 8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사무실에서 쉐퍼는 외무장관으로 지명된 폰 브렌타노에게 자신이 동베를린에서 가진 만남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동독에서 사업을 하는 인물로 뮐러와의 만남보다는 동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푸쉬킨과 동독지역 대담을 나누도록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폰 브렌타노가 들은 바로는 쉐퍼가 소련의 의사 타진을 해보려는 심산으로 러시아 리무진을 타고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에 있는 소련 대사관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쉬킨은 이 만남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쉐퍼는 2명의 대사관 고문을 만나 45분간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아데나워의 비망록에 나온 내용이다.     

6월 17일 아데나워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이날 그에게 쉐퍼는 “대사가 만남을 거부하였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 일에 관한 아데나워의 기록이 쉐퍼와 뮐러, 쉐퍼와 푸쉬킨 사이에 이때 또는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일을 다 담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빈첸츠 뮐러와의 만남은 쉐퍼와 아데나워가 이미 일고 있었던 뮐러와 푸쉬킨과의 만남을 위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쉐퍼와 같은 매우 냉정한 인물이 그렇게 망설임 없이 소련의 리무진에 오를 수 있었다는 말인가? 분명히 그는 최소한 오토 존을 둘러싼 사건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최소한 5월 초부터 독일연방정부 수상실에는 모스크바, 동베를린, 비인에서 여러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글롭케는 1946년과 1947년 칼스호르스트*와 친분이 두터웠던 ‘옥센세프’*라는 별명을 지닌 요제프 뮐러에게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곧 푸쉬킨이 그를 베를린이나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고 그에게 두 차례나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소식을 듣고 일단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파리조약이 먼저 발효되어야만 소비에트 연맹과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칼스호르스트 [Karlshorst, 역자주 – 소련 점령군 사령부가 있던 베를린 지역명, 소련군을 의미.]

* 옥센세프 [Ochsensepp, 역자주 – 황소와 같이 생긴 요제프라는 뜻의 비꼬는 말]     

동베를린 대사관 측은 오스트리아의 국가 조약이 서명되기 전인 5월 2일에 글롭케에게 또 다른 정보를 흘렸다. 곧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모든 계획이 세미요노프 대사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정보였다. 여기에서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것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의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분명히 소련의 지도부는 아데나워가 이를 거부할 것이고 독일 연방의회도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과 협상할 준비가 늘 되어 있었다지만 독일을 위한 파리조약에 관한 거부를 철회해야 할 일이었다.      

더 흥미로운 내용은 소련의 초청이 있은 지 하루가 지난 다음에 오스트리아 국민당(ÖVP) 당원이었던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홍보 담당관 사이페르트가 그 당시 기민당(CDU) 홍보 대변인이었던 베르너 폰 로이에프스키에게 보고한 것에 담겨 있었다. 사이페르트가 폰 로이에프스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 수상이 소련을 방문한다면, 소련은 독일에 추가적인 제안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빼앗긴 영토였던 슐레지엔 지역을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지역은 소련이 관할하고 있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 서방 열강은 관여하지 못하고 소련과 독일이 협상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소련이 바라는 보상은 집단 안보 체제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체제에 미국도 포함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는 소련 측에서 언급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소련이 아데나워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미끼를 던져보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으로 보였다. 마침내 1955년 7월 중순에 비인의 임페리얼 호텔에서 외무장관 피글의 중재로 요제프 뮐러와 소련 대사 일리췌프 간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 만남은 뮐러를 통해 아데나워의 의사를 타진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대화에서는 서로의 의중을 떠보자고 하였고 소련의 외교관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진심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할 뜻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키싱거가 말한 이른바 ‘비공식 채널’을 개설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뮐러가 보기에 소련은 무엇보다도 외교적 경제적 관계를 독일과 맺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뮐러는 피글이 요제프 뮐러나 아데나워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전달할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빈첸츠 뮐러의 제안은 그 당시 소련의 비공식 외교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와 같은 매우 민감한 시기에 쉐퍼가 동베를린을 방문하는 것을 아데나워가 승인하게 실질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에 뮐러 장군이 동베를린 카페에서 몰래 만나는 모습이나 쉐퍼 재무장관이 운터덴린덴(Uner den Linden)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어떤 기자나 서방의 정보요원이 보게 된다면 모든 서방 국가는 독일이 과거 러시아와 맺은 라팔로조약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면에서 아무리 쉐퍼의 편지로 보장된 것이라고 해도 아데나워가 이 일을 감행하는 것이 어떤지에 대하여 일단 문받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사실 그 요청은 소련 측의 초청에 관한 말타잔의 전보와 거의 동시에 아데나워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을 세심히 살펴보면 그 초청이 아데나워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안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원래 비공식적인 외교 접촉을 즐기는 아데나워의 성향이 물론 여기에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아데나워 수상이 미국의 외무장관에게 쉐퍼의 편지를 낭독해 준 일에서 또 한 가지 결론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미국 측에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것이 가능한지를 살짝 귀띔해주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무렴 자신이 서방에 충실한 정치가로서 결코 비밀스러운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 인물로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아도 자신을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폰메텐의 베네딕트 김나지움의 동창생끼리 동서독 접촉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동창생 가운데 한 사람은 이제 67세이고 다른 사람은 61세였는데 둘 다 이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민족적 가능성을 도모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모로 아데나워는 이 무렵에 소련이 커다란 도박을 감행할 수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몇 주 전부터 도쿄 주재 독일대사로 일을 시작한 한스 크롤은 7월 초에 그의 고향 동료인 한스 글롭케로부터 놀라운 서신 하나를 받았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관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곧 ① 동독의 자유선거, ② 자체적인 독일 국군, ③ 슐레지엔과 폼머 등의 지역 반환을 통한 오더 나이쎄 국경의 정상화입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서방과의 유대를 차단하라는 요구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미국이 앞으로의 유럽의 운명에 대하여 무관심할 것이고 우리는 최대 5년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안이 옳다는 것에 관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의 여론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여론은 쉽게 달랠 수 있고, 이성보다는 정서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이 쉽게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제네바에서의 진행되는 일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필이면 매우 민감한 시기에 외무장관 임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아데나워에게 단순히 귀찮은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아데나워는 그가 첫 내각을 수립할 때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여당에서 구스타프 하이네만을 내무장관으로 강력히 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당 당수인 폰 브렌타노에게 외무장관직을 결국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서방과의 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1955년 5월 5일 마침내 독일연방공화국이 주권을 회복하게 되자 그러한 핑계는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와 이 문제를 논의한 거의 모든 이들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에 대하여 비판적인 언급을 하였다. 여기에는 연방정부 대통령인 테오도르 폰 호이쓰도 있었다. 폰 브렌타노에 관한 의구심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곧 경험이 부족한데다가 강인함마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불확실한 외교적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할슈타인이나 블랑켄호른은 폰 브렌타노를 외무장관으로 모시고 일을 하는 것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이미 1954년 중반부터 할슈타인은 만약 폰 브렌타노가 외무부의 수장 노릇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현하였다. 그러면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을 차관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자신이 일종의 아데나워의 감시자로서 자기 파벌의 장관과 수상 사이에서 망가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54년 블랑켄호른이 이룩한 업적을 보고서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4년 성탄절 무렵에 그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블랑켄호른에게 제2차관이 되어 외무부에서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글롭케 또한 블랑켄호른의 해결책에 지지를 보냈다. 블랑켄호른은 자신이 밀던 게르스텐마이어가 외무장관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외무장관 임명을 둘러싼 문제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자 3월 초에 아데나워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아데나워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가 ‘지쳤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쓴 것이다. 그리고 건강도 안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로 임명하여 파리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주일 중 며칠은 본에서 일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이 없는 외무 정책 수행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 외무부에 2명의 차관을 임명하겠다는 과거의 제안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블랑켄호른이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외국에라도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의 생각에도 장점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아데나워 직속으로 블랑켄호른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로 임명하게 되면 최고의 외교관을 자신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폰 브렌타노와 블랑켄호른을 좋게 여기는 모든 사람은 아데나워에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를 자기 휘하에 두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블랑켄호른 자신도 폰 브렌타노를 지지하였다. 결국 할슈타인은 아데나워의 강권에 밀려 외무부 차관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빌헬름 그레베는 정치부 부장이 되었다. 할슈타인과 그레베는 몇 년 동안 아데나워의 참모로 일했었기에 자신이 모시는 장관에게 불충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데나워에게 불충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 이리하여 폰 브렌타노를 둘러싼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 블랑켄호른이 떠난 자리는 컸다. 정서적으로도 그러하였다, 그는 사실 점령군 지역위원회 시절부터 아데나워의 최측근으로 일해 왔다. 글롭케, 할슈타인, 폰 에카르트, 그레베는 모두 나중에 합류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글롭케를 제외하고는 인간적으로 아데나워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이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하여 몹시 서운해하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서서히 고립된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였다. 폰 에크하르트 또한 외국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는 뉴욕의 국제연합 대사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 주변에는 글롭케, 크로네, 폰 브렌타노 무리에 맞서는 대항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얼마 안 가서 폰 에크하르트를 독일로 소환하고 블랑켄호른에게도 자주 특별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점차로 글롭케와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크로네에게도 의존하게 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1955년 6월 15일 키싱거를 몰아내고 크로네를 당대표로 선출하였다.     

외교 정책에서 새로운 인사가 등장하면서 권력 구도도 변하게 되었다. 독일의 유럽 정책에서 다시 한번 할슈타인과 오휠스의 초국가적 개념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을 영국이 탐탁지 않게 여기기에 1954년에 약간 지체가 있은 다음에 아데나워의 유럽 정책은 대륙의 6개국 공동체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친영파이고 대서양 연안 국가에 공을 들이던 블랑켄호른은 그런데도 런던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파리의 인사들에게 기울인 만큼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아데나워 최측근 인물 가운데에는 눈에 뜨이는 친영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역할은 점차로 에르하르트가 떠안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효율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동방 정책에서도 처음에는 부정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브렌타노의 동료인 하인리히 크로네는 1955년 1월 21일 자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브렌타노는 독일 통일에 적극적인 외무장관이 될 것이다.’ 그 자신도 이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점차 흐루쇼프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1955년 여름 독일에 관하여 동독과 서독의 2개 국가 정책을 확고히 표명하였다. 곧 독일이 분단된 가운데 공존하도록 하는 정책을 선호한 것이다. 폰 브렌타노는 이러한 구상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이는 그가 강력한 독일 통일 정책을 추구하는 할슈타인이나 빌헬름 그레베의 구상을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 결국은 동독을 고립시키는 무의미한 전략 말고는 남는 방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동방 정책에서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전형적인 전략을 펼쳤다, 곧 모스크바와 강력하게 협상하고자 할 때면 블랑켄호른이나 에크하르트를 자주 동원하였고 1958년부터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인 크롤도 동원하였다.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와 떨어져 일하면서 아데나워에게 운신의 폭도 좁아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연방정부 수상실에는 외교를 챙길만한 커다란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1961년까지 외교에서 중요한 분야는 스스로 챙기기는 하였다. 그러나 수상 재임 초기부터 장기간에 걸쳐 보여준 기마병 같은 눈부신 속도로 전개하던 외교 정책이 이제는 점차 정례화된 형태로 넘어가게 되었다.     

1955년 초에 외무부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내각이 당면한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뿐만 아니라 테오 블랑크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실 그는 욕심을 버리고 아무런 장관 직위도 부여받지 못한 채로 4년 동안 아데나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도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의 충실한 직원이었고 나중에 총경으로 승진한 울리히 드미지에르는 1954년 말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블랑크의 자리를 놓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는 수동적이고 성마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그의 업무 수행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각에서 아데나워 수상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독일연방 대통령과 더불어 블랑크를 비판하였다. 블랑크가 직무에 매우 태만하고 “이미 군부 장교들에게 크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의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블랑크를 대체할 인물로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슈트라우쓰는 그 자신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특임장관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55년 2월 초에 하인리히 크로네는 기사당(CSU)의 원내총무이며 당대표 직무대리인 리하르트 슈튀클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슈트라우스가 조만간에 중요한 정치적 과제를 부여받아 내각에 입성하지 않는다면 정부에서 물러나 기사당(CSU)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슈튀클른은 이어서 그렇게 되면 슈트라우쓰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대표 자리를 요구하게 되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야만 연정의 분열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아데나워는 기사당(CSU) 지방당 대표들을 뷔페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에게 노동부 장관직을 권유하였다. 노동부 장관인 안톤 슈트로흐가 내각에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의 면전에 대고 노동부 장관과 사회부 장관에는 테오 블랑크가 적격이라고 말하였다. 그 자신은 기꺼이 국방부 장관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망설이자 슈트라우쓰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곧 그는 아데나워에게 국방위원회 창설을 위한 건의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는 국가 방위의 측면, 무엇보다도 민방위도 조정하는 임무를 맡기자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 위원장은 연방 수상이 맡고 국방장관과 더불어 ‘조국방위장관’도 임명하자는 건의가 이어졌다. 이 장관은 당연직으로 ‘국가안보위원회’나 ‘독일연방 국가 방위 내각’의 사무총장을 겸임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장관의 임무에는 연방정부 정보기관, 국가 방위를 위한 지역개발 계획, 심리전, 또한 민방위와 연관한 핵무기 연구와 개발도 포함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사무총장이 누가 될 것인지는 명약관화하였다. 바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자신이었다. 슈트라우쓰가 이러한 제안을 하기 몇 주 전부터 그 계획이 1955년 6월까지 성사되지 않는다면 내각에서 물러날 것을 명백히 밝히었다.      

1955년 초에 블랑크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아데나워가 프란츠 요베프 슈트라우쓰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스도 마침내 격에 맞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슈트라우쓰가 원자력산업부 장관이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블랑켄호른은 군 장교들을 민간인 통제 아래 두기 위하여 강성 기질의 차관을 임명해야만 했다, 그 차관은 새로운 독일 국군을 문제없이 조직할 수 있는 전문지식이 풍부한 동시에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충성심이 높은 인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점에서 연정에 속한 정당들의 생각은 달랐다. 자민당(FDP)은 자기 당의 국가방위 전문가인 에리히 멘데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이 확고한 민족주의자이며 군부에 호의적인 자민당(FDP) 인사에게 ‘군대’를 지휘하는 기능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한 직업군인으로 나치 정권이 수여하는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던 에리히 멘데와 같은 인물을 그는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아데나워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 독일 국군 창설에 사민당(SPD) 인사도 끌어들이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국방부에 사민당(SPD) 출신 인사를 차관으로 임명할 생각을 조금은 하였다. 그가 염두에 둔 인물은 함부르크 지방정부에서 잔뼈가 굵은 65세가 된 발터 두데크 위원이었다. 그가 전설적인 모스케 휘하에서 독일 제국군 창설을 위하여 일한 경험이 있기에 적합한 인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올렌하우어에게 서면으로 동의를 구하는 것을 마뜩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민당(SPD)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인물을 살펴본 끝에 아데나워는 요제프 루스트를 적임자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루스트는 이 때문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경제부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데나워의 간청에 따라 독일군사령부가 위치한 ‘에르메카일카세르네’(Ermekeilkaserne)에서 기율을 확립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가장 손쉬운 대상은 군 장교들이었지만 군수 문제는 어려움이 많았고 가장 힘든 것이 장관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블랑크 사무소’라고 불린 군사령부의 기강 확립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그의 수준에서는 꽤 다정한 어조로 쓴 루스트를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하는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는 귀하께서 그곳 군사령부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때로 저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합니다. 그러니 귀하는 모든 사람을 완전히 불신하는 태도로 업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차라리 실망하고 놀라면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 안 그런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결정적인 말이 나온다. “귀하를 제가 잘 알고 있기에 귀하의 업무를 저의 모든 권한을 발휘하여 지원할 것입니다.” 루스트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 4년 동안에 아데나워는 글롭케를 통해서나 아니면 루스트와 직접 연결하여 국방 업무에 적절히 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1956년 가을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자신이 바라던 목적을 이루고 난 다음에도 말이다.     

1955년 초 아데나워는 외무부와 국방부만 대상으로 인사 개편을 할 것인지 아니면 대폭적인 개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한 달 내내 고심하였다. 내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먼저 슈트로흐였다. 그는 “사회개혁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콥 카이저는 자기 아내인 엘프리데 네프겐에게 너무 휘둘렸다. 노이마이어는 상이한 점이 많았음에도 자꾸 토마스 델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하여 직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특임장관도 있었다.     

그런데 개별 인물들과는 필연적으로 연정 전체의 운명이 결부되어 있었다. 추방민당(BHE)은 분열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민당(SPD)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조약 비준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 없는 것으로 보이자 아데나워는 선거법 개정 문제에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자민당(FDP)과의 연정 위기였다. 1955년 5월 6일 자민당(FDP)과 가진 연정 회의에서 마침내 결정이 내려졌다.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에 남든 떠나든 결정하라고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그러자 자민당(FDP)은 다시 한번 연정에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작은 해결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곧 인사 정책 차원에서 폰 브렌타노를 견제하고, 추가로 아데나워가 핵심 사안에 대하여 직접 관여하는 것에 동의하도록 한 것이다. 직접 전달한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어려운 국제 정세를 들어 앞으로 자신과 폰 브렌타노가 협력하는데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귀하께서는 저를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곧 제가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유럽 문제와 미국과 소비에트 연맹 관련 문제를 주도하고 회담 관련 사항도 내부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귀하께서는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이면 미리 제게 귀띔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시기에 관련 사항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중요한 이유는 사실 다른 국가들의 외교를 이끄는 정부 수반들에게도 다반사로 제기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매우 엄격한 제도적인 예방조치를 염두에 둔 것임을 분명히 하는 뜻에서 이 내용을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에게도 통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통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독일기본법(곧 헌법) 제65조에 규정되어 있는 저의 권한을 강조하는 일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는 전적으로 사태의 추이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국제적 상황 변화의 특성상 아데나워는 1961년 가을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러한 요청을 거두어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외무부에서 잔뼈가 굵어 온 고위 관료들은 신임 장관의 모든 행적을 예의주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블랑켄호른은 브렌타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회의에 처음 참석했을 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브렌타노는 그리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발표하였다.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부족하였다. 이 첫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회의에서 현직 외무장관인 브렌타노와 전임 외무장관인 아데나워에 관한 여론의 관심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 아데나워 주변에는 최소한 40명의 기자가 몰려들었는데 브렌타노 주변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브렌타노는 매우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줄담배를 피웠다. 내가 잘 살펴보니 그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하였다.”     

사정이 이 모양이니 신임 외무장관 임명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보도가 아데나워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폰 브렌타노에게 외교 업무를 넘겨주는 것을 얼마나 꺼렸는지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최초의 심각한 문제는 6월 중순에 발생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아데나워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신임 외무장관은 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브렌타노는 소비에트 점령 지역의 정부 곧 동독과 독일 통일에 관한 비공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의 가능성에 대하여 무심히 언급한 것으로 보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브렌타노 모르게 쉐퍼가 동독의 의사 타진을 하러 동베를린으로 가도록 허용한 참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덜레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사실 브렌타노의 부주의로 일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데나워의 반응은 매우 과격한 것이었다. 그는 브렌타노에게 장문의 전보를 보내 제발 입 좀 닥치고 있으라고 분명히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너무 화가 나서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잠을 설치는 가운데 브렌타노와 관련된 문제를 위험 수준에 이르기까지 과장해 생각하게 되었다. 6월 15일 아침이 되자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당장’ 브렌타노의 해임을 추진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당장 브렌타노 해임의 근거가 담긴 서한의 초안을 작성하여 블랑켄호른에게 수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아데나워의 분노는 폰 브렌타노가 보낸 장문의 전문이 도착하고 나서야 점차 풀렸다. 그 전문에서 브렌타노는 속기록을 첨부하여 자신이 그러한 위험한 발언을 전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1955년이 흘러갔다. 비난하는 서한, 전보, 분노에 찬 발언 – 아데나워는 외무장관을 제대로 길들이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래서 결국 외무장관도 할슈타인이나 브르랑켄호른, 또는 글롭케나 폰 에카르트처럼 복종하고 신뢰할만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외무장관을 용인 할 수 없었고 그럴 뜻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의 내부자들과 정보가 뛰어난 기자만이 아니라 신문의 만평가조차도 곧 아데나워 수상이 외교 정책을 여전히 자기 ‘고유영역’(domaine réservé)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제네바 정상회담이 시작되던 바로 그날인 7월 18일 아데나워는 스위스에 있는 휴양지인 스위스 베른의 오버란트에 있는 뮈렌으로 갔다. 아데나워가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8월 20일까지 머물렀다. 그 장소에는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3가지 장점이 있었다.     

첫째로 뮈렌은 7월 18일부터 23일까지 대단한 4자회담이 개최되는 제네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제네바회담 참관인단에 속한 폰 에커르트를 단장으로 하는 그레베와 블랑켄호른에게 아데나워는 필요한 경우 구두로도 지시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덜레스와는 이미 긴급한 경우에 도청이 되지 않는 전화로 베른에서 통화를 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회담에서 언론에 비치는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여봐란듯이 스위스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마치 위대한 수상 자신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아도 어느 모로 그가 저 높은 곳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둘째로 커다란 장점은 이 휴양지를 자동차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오로지 산악열차를 타야만 이곳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산악열차는 높은 구름다리 철교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갔다. 이때 딸 리마와 함께 이곳에 온 아데나워는 셩돌랑에서 보낸 휴가를 떠올렸다.      

그의 측근들인 브렌타노, 할슈타인, 블랑켄호른, 그레베가 그를 만나려면 매우 힘들 길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에 아데나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기자는 여기서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셋째이자 가장 커다란 장점은 뛰어난 위치였다. 아데나워는 이 산책의 천국을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흥에 넘치는 우편엽서를 보냈었다. “안개가 꼈지만, 우리 비행기는 잘 도착했다. 오늘 날씨는 좋다. 숙소는 아름답고 만족스럽다. 경치와 공기가 정말 좋다.” 그러고 나서 44년이 흘렀다. 정말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도 이 지역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알프스 지역의 경치와 산책에 관한 열정도 전혀 식지 않았다. 다니 하이네만에게 쓴 1955년 8월 1일 자 편지에서 그는 “뮈렌은 매우 아름답습니다.”라고 썼다. 라우터브룬 계곡 위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1,600m에 위치해있었다. 아이거, 묑히, 융프라우와 같은 높은 산들을 바라보며 아데나워는 계속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이 79세 된 노인은 제네바회담의 진행, 시간의 흐름, 비에 관하여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여기에서 궂은 날씨와 근심과 업무에 시달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건강이 더 나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아데나워를 찾아 이 계곡을 방문한 사람들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피부가 그을리고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유머가 넘치고 평상시와 같이 느긋해 보였다.”     

그러나 편지의 그런 내용은 겉모습이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아데나워가 제네바회담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을 볼 때 전혀 유머나 느긋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는 그가 최악의 사태를 예상한 것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네바회담은 시작부터 매우 커다란 화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국무총리인 에드가 포르의 개막 연설이 그 발단이 되었다. 그는 사실 서방 고위 정치가 가운데 유일하게 러시아어에 유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보다 다른 이유로 더 화가 났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포르는 독일을 희생 삼아 소련에 접근하려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뉴욕에서 외무장관들이 합의한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포르는 독일이 통일되면 통일된 독일은 결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4개 강국이 합의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는 서유럽연합(WEU)의 결의 내용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실 동서 협상이 상당히 진전되고 나서 필요한 경우 제시할 매우 커다란 양보 조건이 될 만한 사항이었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지시하여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포르는 이에 관한 답신에서 자신은 뉴욕의 합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에드가 포르와 프랑스 외무장과 피네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사실이었어도 정상회담에 관한 아데나워의 선입견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포르는 자신이 모든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데나워 수상과 일일이 사전 협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게다가 프랑스는 서유럽연합(WEU)의 회원국으로서 적절한 제안을 할 권한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찌 되었든 독일 통일 문제는 협상 안건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포르가 생각하기에 자기에게 적합해 보이는 대접을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아데나워 수상은 영국의 이든에게서도 섭섭한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은 그의 기조연설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그 뜻을 파악하였다. 곧 이든은 유럽의 안보체계를 독일의 분단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수립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이를 즉각 반박하였다.      

서방 국가들과 독일 참관인단 사이의 협의도 처음에는 매우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좀 나아지기는 하였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아데나워가 제네바회담에 참석한 인사들이 여러 자리에서 나눈 서방의 의견을 정말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련이 독일 통일 문제라는 안건을 확실히 ‘뒤로 미루고자’ 했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군비 통제 체계와 안보 체계 안건은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야 비로소 일이 어떻게 진척될 것인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곧 동서 관계의 정상화를 분단 독일이라는 현재 상황을 고착화하는 것을 근거로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에게 7월 20일 보낸 전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리하여 독일 통일이라는 안건은 국제적인 긴장관계에 관한 문제에서 그 중요성을 상당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스크바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우려하는 것은 소련이 “이 문제를 느긋하게 다루고자 한다.”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후에 비교적 만족스러워하게 되었다. 서방 3개국이 독일의 통일 요구를 새로운 안보 협상 문제와 확실히 연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아데나워를 안심시키는 전문을 보냈고 에드가 포르에 대한 아데나워의 의구심에 동조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서방 열강은 제네바회담 성명서에서 독일 문제와 유럽 안보 문제를 연계시키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각국의 외무장관들이 제네바에서 10월에 열리는 회담에서 일부 모호한 지침을 다시 다루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최종 회의가 마무리되고 나서 아데나워는 회담 진행에 관한 요약문을 받아볼 수 있있다. 그 요약문에는 이 회담에서 독일 문제에 관한 대중의 기대가 너무 섣부른 것이었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독일 문제에 관한 소련의 강경한 자세는 서방 전문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 당시 내부적 판단에 따르면 그 어떤 환상도 품으면 안 되었다. 곧 “러시아가 10월에 있을 외무장관 회담에서 독일 문제에 관하여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흐루쇼프가 제네바회담이 종료된 이후 동베를린에 나타난 사실이 바로 그러한 분석을 확증해주었다. 소련은 이제 두 개의 독일이라는 개념을 거의 분명하게 확립한 것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아데나워는 동서 관계의 정상화와 긴장 완화를 독일의 분리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압력에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서방 열강이 이러한 구상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제네바회담에서도 이미 드러났다.     

그러나 이리하여 아데나워의 모스크바 방문의 가치에도 변화가 왔다. 독일 통일 문제에서 진전이 있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그 대신에 모스크바에서 외교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한 것이 실질적으로 두 개의 독일을 도구화하려는 수작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제네바회담의 독일 정책에 관한 결과 못지않게 아데나워를 실망시킨 것은 이 회담에서 보여준 서방 열강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사실 독일연방공화국은 이 나라들과 얼마 전에 성대하게 유대 관계를 맺은 차였다.     

아데나워를 또다시 방문한 오토 렌츠는 수상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을 보았다. 제네바회담의 결과가 아데나워를 매우 심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에 관한 신뢰감이 더욱 희박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인맥에 달린 문제가 되어버렸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다른 나라가 특히 미국이 독일을 희생해가면서 러시아와 합의를 끌어낼 위험’이 상존한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일단 덜레스, 이든, 커크패트릭,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최근에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 피네가 믿을만한 인물들이었다. 본격적인 문제는 몇 년 안에 발생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데나워가 독일 정치에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렌츠는 잘 알려진 아데나워의 하소연을 들었다. “정치한 것은 구역질 나는 일인 것이다. 그는 정치를 혐오했다. 도대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아데나워 수상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매우 비관적인 서한을 보냈다. “저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고독을 즐기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도 나름대로 고독한 상황에 계시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산속에서 완전히 혼자 있다 보니 본에서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 끝에 제가 매우 기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적어 보냅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솔직한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제네바회담에서 ‘러시아 측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러시아는 ‘싸구려 조치로’ ‘소비에트 통치 지역, 위성국가, 자국의 상황과 같은 부담스러운 문제들’을 관계자들이 모두 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제5열이 국제적으로 획책하는 중상모략, ‘모든 자유국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비확장을 하도록 강요하기’, ‘세계 정복 계획’도 잊도록 만든 것이다. 아데나워의 가장 큰 근심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곧 ‘소비에트 러시아에 맞서는 저항 정신’이 점차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독일에서도 그런 징조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러시아의 복권’을 해준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그 결과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독일을 포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아데나워가 제네바회담에 관하여 만족하는 듯한 언급을 하는 것을 보고 미국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데나워가 보낸 서한의 번역문을 덜레스로부터 건네받은 아이젠하워는 아데나워가 생경하다고 말했다. 덜레스는 아데나워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제 나이가 80줄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다른 길을 걸어오다가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덜레스의 생각에 결국 모든 것이 유동적이지만 현재 독일의 통일은 그 어느 때보다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평화로운 변화가 이제 가장 안전한 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덜레스는 아데나워가 모스크바 방문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아데나워에게는 모스크바에는 독일 대사관도 없고 도청당하지 않으면서 자기 견해를 밝힐만한 장소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덜레스는 장문의 답신을 작성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아데나워의 기운을 북돋우는 말도 하였다. “저는 독일의 통일의 ‘분위기가 잡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이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데나워는 1966년 자기 《회고록》 제2권에 덜레스의 이 낙관적인 편지를 아무런 해석 없이 인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덜레스와 아이젠하워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제네바 정상회담이 서방 정치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예상이 옳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독일 분단에 관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그 나름대로 현재 상황을 현실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뮈렌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9월 초에 계획된 모스크바 방문 준비에 활용한 것이다.  

   

모스크바 –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아데나워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지 20년이 지난 1975년 12월 알렌스바흐 여론 연구소의 엘리사베트 노엘레-노이만은 아데나워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였다. 독일 제1대 연방 수상의 으뜸가는 업적을 묻는 항목에서 응답자들은 다음과 같은 답을 하였다. “러시아에 잡혀 있던 전쟁 포로를 귀환시킨 일.”이다. 둘째로 지적한 것은 “프랑스와의 화해와 선린 관계의 회복”과 “독일이 세계무대에서 그 위상을 되찾도록 한 일”이었다.     

그러한 대답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에 관하여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인상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이 세계무대에서 그 위상을 되찾도록 한 일.’ 여기에서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있었던 행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행사는 아데나워가 1953년 9월 6일 선거에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프랑스와의 화해에 관해서 응답자들은 아마도 1962년 7월의 국빈 방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때 아데나워와 드골은 랭스의 대성당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기갑부대가 함께 무르멜롱에서 행렬을 이루어 사열을 받은 일도 떠올렸을 것이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1955년 모스크바 방문이었다.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모스크바회담은 그 회담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언론의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취재 허가를 받은 기자가 70~80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 당시 모스크바는 말하자면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terra incognita)였다.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었고 “어느 모로 역사에 한 번 있던 일이었다.” 이 회담에 참석한 이들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새 비행기 두 대와 추가로 수속한 두 대의 여객기, 그리고 한 대의 특별 열차로 협상을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런데 뒤에 남게 된 이들 가운데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당대표였던 크로네는 다음과 같은 어두운 예상을 하였다. “모든 이들은 무엇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 모스크바로 가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도박을 해야 했다.“ 독일 국민의 예상도 어둡기만 했다.     

만약에 이 세상에 무엇인가 비정상적이고 시대사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일과 소련과의 관계이다. 아데나워는 수백만 명의 독일 동포가 러시아전쟁과 1944~1945년 소련의 독일 침공으로 깊은 상처가 기억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 동부 지역과 동유럽 블록에서는 공산주의의 압제가 스탈린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무회의에서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소련의 심중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냉정히 판단해 볼 때 공산주의에 관한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제 소련과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이는 아데나워 수상이 현실적 심리적 갈등을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언론의 사설과 후일 관계자들의 회고에서도 모든 기대가 아데나워에게 쏠려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데나워가 독일 연방의회와 독일연방참사회의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식이 더욱 뚜렷해졌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헌법적인 삼권분립에 더하여, 인류가 부족 생활 시대부터 지녀온 매우 오래된 고정관념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곧 커다란 부족 무리를 이끄는 족장이 바로 아데나워인 것이었다.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무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데나워가 적대적인 부족의 족장들과 힘을 겨루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여당 대표단, 내각, 그리고 그의 《회고록》에서 현란한 어조로 보고한 내용에는 모두 그가 의식하지는 못하였어도 이 일에 관한 바로 이러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두드러져 보였던 커다란 사건이 바로 아데나워와 흐루쇼프라는 두 족장의 말싸움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이 초대된 자리이기에, 말다툼과 팽팽한 협상 결과 결국은 양국 간의 관계 정상화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여정에 관심이 크기 마련인 여론은 상징적인 사진에 커다란 인상을 받게 된다. 브누코보 공항에 착륙하는 모습.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0년 만에, 그리고 냉전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소련 내각의 수뇌부가 활주로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을 영접하였다. 소련의 국가가 연주된 다음 독일 국가가 연주되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위풍당당한 소련의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프로이센 군대의 경험이 있는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전문적인 평가를 하였다. “러시아 의장대는 독일의 그 어떤 군대보다 훌륭하였다.” 영접받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무뚝뚝한 어조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독일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 민족의 대표가 소련과” 협상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장면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곧 회담 탁자에서 아데나워와 흐루쇼프가 유례없이 충돌한 장면이다. 전쟁포로와 관련하여 전쟁의 참상에 관한 언급을 할 때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독일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많은 불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물론 반격에 따른 것은 분명하지만 독일을 공격하고 독일 땅에서 전쟁을 벌이며 많은 끔찍한 일을 벌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식으로 최근의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차감한다.’라고 표현한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은 ‘슬픔의 극복’ 차원이 아니라 조용히 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 생각에는 우리가 진지하게 바라는 대로 새로운 선린 관계를 맺는 단계로 나아가자면 과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려운 일들이 쌓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려면 심리적인 차원의 정화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흐루쇼프가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격노하며 주먹을 휘두르자 아데나워도 바로 일어서서 주먹을 흔들었다. 아데나워와 흐루쇼프 정도의 거물이 충돌하는 정치 드라마라면 이 정도의 장면은 나와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한 일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곧 미래를 새로운 희망을 지니고 평화롭게 가꾸고자 한다면 고통, 증오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것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평화로운 관계를 바람직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적었고 그것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세계는 냉전이 한창이었다. 잠시 긴장 완화가 찾아왔음에도 말이다.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이때만큼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아데나워가 소련의 지도자를 마주하면서 죄인처럼 굽실대지 않고 당당한 자세를 취한 것을 매우 흡족해 하게 생각하였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긴급 설문 조사 결과를 언급하는 일을 언급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 설문의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비에트 측은 아데나워 박사가 모스크바에 와서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에서 저지른 만행에 관하여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귀하는 아데나워 박사가 그런 발언을 한 것이 필요했다고 보는가 아니면 하지 않은 편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응답자의 68%는 “필요했다.”라고 답하였고 15%는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이 응답자의 68%는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와 협상하는 방식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데나워 자신은 협상 테이블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에 대하여 매우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예상한 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전쟁으로 양국 국민에게 발생하고 서로에게 불러일으킨 원한, 분노, 슬픔에 대하여 양국 대표들이 언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각자의 생각을 강력하게 말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논쟁은 격렬했습니다. 러시아 대표들은 솔직히 말해서 강력하게 공세를 취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강력하게 수세에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회담을 회고하는 자리에서도 아데나워는 편향된 언급을 삼갔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러시아 측은 우리 측에게 크게 화를 냈습니다. 제 생각에도 독일은 소련에서 소련이 독일에서 자행한 것 못지않게 커다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러시아 전쟁포로들 가운데 우리가 의도적으로 굶긴 이들의 숫자는 실제로 수백만 명에 이릅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조약은 ‘비열한 목적과 불순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조약은 조약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1939년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과 숫자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련의 대표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 당시에 벌어진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된다면 말이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회담 때만큼이나 나치의 과거에 대하여 매우 자존심을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평가를 명확하게 표현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국빈 방문 기간 중 어느 저녁에 아데나워는 소련의 지도부와 함께 볼쇼이 극장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감상하였다. 극장에는 온통 소련과 독일 국기가 장식되어있었다. 그리고 양국의 국가가 다시 연주되었다. 공연 중에 적대적인 가문이었던 캐풀렛과 몬테규 집안사람들이 서로 껴안는 장면이 나오자 아데나워와 불가닌과 흐루쇼프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늘 그렇듯이 그러한 장면을 목격한 수행원과 관찰자들이 말하는 것으로는 누가 먼저 손을 흔들었는지를 알아내기가 힘들다. 아데나워는 자기 《회고록》에서 자신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고 단언하였다. 이렇게 두 적대 국가의 수반들이 화해하는 모습은 전 세계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귀국길에 있었던 장면에 관한 기억도 매우 분명하였다. 곧 아데나워 수상의 손에 입을 맞추고자 했던 어떤 노모(老母)를 기억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소련과 협상한 결과로 독일로 귀국하게 된 이들과 프리드란트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기억했다.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직하던 14년 가운데 모스크바회담 때만큼 아데나워에 관한 지지율이 급격하게 오르게 되었을 때는 없었다. 1955년 7월 지지율은 50%에 머물렀으나 8월에는 52%, 9월에는 59%로 상승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소련의 초대에 매우 복잡한 심경으로 응하였다. 모스크바롤 향한 비행기에서 아데나워는 오랜 친구인 블랑켄호른과 나란히 앉았다. 비행기는 때로는 고도 5,200m로 그리고 또 2,000m를 유지하면서 베를린, 토른, 동프로이센의 습지, 빌나, 비테브스크 상공을 지나갔다. 여행할 때마다 늘 호기심에 넘쳤던 아데나워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광대한 소련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광대한 숲이 보였다. 그리고 가끔 작은 오두막과 커다란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거리에는 차량이 없었다. 하늘에 구름이 없어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소떼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 모스크바릐 고층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데나워와 블랑켄호른은 이 여행에 오르기까지 긴 여정을 거쳤다. 이는 함부르크의 점령군위원회와 의회위원회,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런던, 워싱턴에서 벌인 협상 끝에 이루어진 매우 특별한 여행이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회담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해보았다. 아데나워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였다.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단지 이 새로운 형태의 긴장 완화 방식이 서방의 상황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환상을 심어줄 수가 있을 가능성을 경계하였다. 이는 정신적 오염에 맞설 방어 자세와 저항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아데나워는 모스크바의 초청에 관하여 생각할 때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혹시 초청을 바로 승낙한 것이 실수는 아니었을까? 6월 초에 예상치 못한 초청을 받았기에 아데나워는 그 초청에 응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면 독일 정치계에서는 그를 ‘냉전주의자’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민당(SPD)의 주장에 관한 확실한 반론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었겠는가? 그리고 차선책으로 제기된 소련에 억류된 독일 전쟁포로의 석방 이후에야 소련을 방문해야 한다는 제안도 잘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곧 “우리가 소련에 서한을 보내 모든 전쟁포로가 석방되기 전에는 독일 대표단을 파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면 러시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독일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이 미친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소련을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6월과 7월에도 독일 통일 문제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지속되던 차였다. 그러나 제네바회담 이후 아데나워는 원래 그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게 되었다. 비록 덜레스가 격려 서한을 보냈지만 말이다. 또한 독일 문제는 10월 독일을 제외한 서방 국가 외무장관 회의에서 논의 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입장들이 대립하며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하였던 것이다.     

또한 흐루쇼프가 동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소련이 독일과 외교 관계를 맺고 싶다는 제안이 애매한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는 모스크바가 독일에 관하여 2개 국가 정책을 공고화하겠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폰 브렌타노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블랑켄호른과 할슈타인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들은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모스크바에 가서 아무런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모든 조건을 해결할 4자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런데도 독일 외무부는 조속한 외교 관계 수립에 실무 차원에서 대비하는 차원에서 관련 서류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일단 인위적인 잠정해결책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런 식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구상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다. 곧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1주일 동안이나 소비에트 지도부와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협상을 벌이고 나서 고작 몇몇 실무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상을 이어가도록 한다면 사람들이 독일연방 수상의 판단력에 대하여 어떻게 여길지가 뻔한 일 아니겠는가? 어찌 되었든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소비에트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를 예상하지 못햇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모스크바 사절단에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닌 많은 인사들을 포함시켜 노선 변경에 대비하였다.     

독일 통일 문제에서 이미 잘 알려진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외교 관계 수립 문제에서 독일 측이 아무런 진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협상은 급격히 위험한 상황으로 기울게 될 것이 뻔하였다. 사실 소비에트 연맹의 입장에서는 독일 전쟁포로의 석방과 외교 관계 수립을 연계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 아데나워가 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노선을 택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가능성을 지녔지만 아직 구체적인 안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스위스 뮈렌에 머물면서 여전히 ‘소련 방문 계획 전체를 어떤 핑계를 대고’ 취소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소련 방문 준비를 진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서방 열강들이 그의 모스크바 방문 구상을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히 눈치채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모스크바회담 전략에 관해 묻는 이들 모두에게 한결같이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 수립은 독일 통일 문제와 독일군 전쟁포로의 석방 문제에 진전이 있을 때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며 다녔다. 그러나 과련 소련이 포로 문제에 관하여 양보할지는 매우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이미 제네바회담 때 소련에는 독일 전쟁포로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판결받은 전범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 문제에 관한 진전이 있을지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엄에도 존 포스터 덜레스의 최측근이었던 리빙스턴 머천트는 8월 31일 휴가를 마치고 본으로 돌아온 “발고, 침착하며 확신에 찬 기분”의 수상이 “소련과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동독정권을 존속시키는 동안에는 흔히 온전한 외교 관계를 나타내는 실질적인 관계정상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머천트는 이 대화에서 파리 주재 소련대사인 비노그라도프의 발언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련은 외교 관계 수립, 무역협정과 문화조약 체결을 본에 이미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말을 듣고 나서 파안대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이 그럼 무슨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독일은 두 가지를 원할 뿐오. 곧 전쟁포로와 민간인 포로의 귀환과 독일의 통일이오. 독일은 외교 관계 수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며 동방 무역도 필요 없고 소비에트 연맹의 문화적 혜택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는 말이외다!’ 사실 아데나워는 소련과의 회담에서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협상을 중단하고 본으로 귀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머천트 씨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블랑켄호른이 추가로 설명하였다, 독일 측이 최종 결정을 내리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보다는 4개의 공동위원회를 수립하려는 생각도 있다고 말하였다. 이 위원회는 경제와 문화 문제, 전쟁포로 문제,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할슈타인도 말을 덧붙였다. 곧 그러한 제안과 더불어 외교관 지위를 부여한 실무자를 파견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측에만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내각에서도 똑같은 내용의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아데나워는) 독일 전쟁포로 문제에 진전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방과 맺은 조약에 충실하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그 어떤 인상도 주지 않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래서 소련과의 온전한 외교 관계 회복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또한 아데나워가 매우 신중하게 준비한 협상 개막 연설도 이러한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곧 모스크바에 가서 그 어떤 대사 관계 수립에 관한 합의는 없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독일 대표단은 소련과의 협상 첫날만 해도 기대가 컸다. 그러나 곧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미국대사인 볼렌은 9월 10일에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곧 그에게 블랑켄호른이 다짐하기를 아데나워 수상이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 문제를 독일의 통일에 관한 합의나 긍정적인 반응과 반드시 연계시킬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로 추론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곧 아데나워는 소련과의 회담 전략에서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모스크바 공항의 영접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소련은 아데나워의 방문을 의전 차원에서 국빈 방문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코 실무차원의 방문이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만 보아도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이제야 아데나워는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곧 그는 대사 관계 수립을 합의하지 않고 모스크바를 떠나게 된다면 상황이 매우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단순히 4개 위원회 수립만을 요청하는 것은 강대국인 소비에트 연맹을 ‘모독하는’ 일이 될 노릇이었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환대를 받고 나서 독일 측에서 회담을 결렬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모스크바가 독일 전쟁포로 문제 처리에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제 모스크바에서 독일 대표들은 모스크바가 독일에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민당(SPD)의 카를로 슈미트를 포함한 독일 연방의회의 대표와 독일 참사회의 대표들을 동반하기로 한 아데나워의 결정은 바람직하지 않은 양보나 아무런 성과 없는 귀국을 막기 위한 방책만은 아니었다. 이는 소련 측에 독일이 얼마나 간절하게 소련에 억류된 9,626명의 독일 포로의 석방을 바라고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 포로들의 이름은 독일 국민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은 누구나 독일 포로 석방이 아데나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그가 오판한 협상 전략을 제대로 수정하는 방법도 곧바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를 조속히 수립해달라는 소련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오로지 독일 전쟁포로 문제 해결만을 내세운 것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협상을 언제든 중단해도 국내에서 혹평받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전략은 사실 매우 민감한 전쟁포로 처리 문제를 이보다는 덜 돋보이는 외교 관계 수립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가려져 여론의 관심사의 뒷전에 물러나도록 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 정상화에 독일 통일 문제에 중요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아데나워는 동독의 대표단이 참여한 가운데에서 모스크바와 독일 전쟁포로에 관한 문제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는 이러한 양보로써 소비에트 정부가 이와 관련된 제안을 강력하게 제시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결국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동독 초대 수상인 오토 그로테볼도 대부분 25년 강제노역의 판결을 받은 독일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유명한 소련 지도부의 ‘명예를 건 약속’의 근거에 관한 혼란이 발생하자 주독 미국대사인 볼렌이 화를 머리끝까지 낸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그는 블랑켄호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지난 일요일에 독일연방 수상 각하께서는 우리가 소련 측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해 주라고 부탁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저는 수상께서 말씀하신 소련에 관한 강경한 태도가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볼렌은 개인적인 실망감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아데나워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아데나워가 그 어떤 결정을 옳다고 여기든 그를 지지할 것임을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볼렌은 9월 14일 분노에 찬 전문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협상을 통하여 독일의 입장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 아마도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아데나워가 그런 협상을 이끌어낸 이유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만 독일과 소련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협약이 맺어진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폰 브렌타노, 할슈타인 그리고 처음에는 블랑켄호른까지 소련과의 대사 관계 수립을 한결같이 반대했었다. 이들은 볼렌과 마찬가지로 대사 관계의 수립이 소련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겼다. 더 나아가 흐루쇼프와 불가린의 ‘명예를 건 약속’을 그다지 신뢰하지도 않았다. 누구보다도 폰 브렌타노는 모스크바협상 결과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협상 스타일에 대해서만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도 과거에 폰 브렌타노에 대하여 외교 협상에서 지나치게 유약하고 여러 가지로 기술적인 실수를 저지른다는 비난을 한 바가 있다.      

사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에 가서 독일과 소련과의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는 않을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다짐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덜 복잡하게 진행되었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오래전부터 그러한 관계의 수립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아데나워 구상의 기미는 1955년 9월 30일 기민당(CDU) 당 대표에게 밝힌 바가 있었다.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 독일에도 이익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의 우리에 관한 존경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제 자라고 있는 청년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연합국 3개국의 의사에 따라 그들과 함께하거나 뒤에 남겨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그들과 나란히 서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비꼬듯이 말했다. “우리는 그저 앉아 있고 다른 이, 곧 소련이 우리에게 와서 외교 관계를 맺어달라고 말한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구 5천만 명인 민족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인구가 2억 명입니다.”     

소련과의 협상 이후 얼마 지나고 나서, 아데나워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련에 있던 독일 전쟁 포로의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독일 전체에서 감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국내 정치적으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 측도 이러한 조치가 무엇보다도 인도주의적 성과로 보이게 되었다. 또한 아데나워의 공개적인 지시로 전쟁포로를 실은 루프트한자의 비행기 두 대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단호하고 노회한 협상가라는 명성은 더욱 드높아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거의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뛰어난 협상가로 다시 한번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탁월한 기지를 발휘하여 독일과 소련의 즉각적인 외교 관계 수립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서면으로 작성된 독일의 국경에 관한 법적 보장과 더불어 <독일 통일을 위한 서한>(Brief zur deutschen Einheit)을 작성하자는데 소련과 합의를 이루어 냈다. 그런데 최종 순간에 할슈타인이 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그가 회담 전체 회의에서 독일 국경 보장에 관하여 당초 몰로토프와 합의했던 온건한 내용이 아니라 강력한 내용이 담긴 초안을 제출한 것이다. 당시 독일 외무부 동방 담당관으로 이 문제의 모든 상세한 진행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요아힘 페커르트는 아데나워가 이 상황을 위기에서 구해냈다고 확신했다. 아데나워는 사실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독일 연방의회에서 조약 비준 절차를 거치도록 조치하여 협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다음에 눈치가 빠른 소련 대사인 세미요노프의 주의를 끌지 않으면서 서한 형식으로 작성된 국경에 관한 보장 문서를 제출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의 국제 사회에서의 독자적 대표권과 독일 국경 보장이라는 가장 민감한 문제에 관한 소련이 수용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귀국하는 날 밤에 아데나워는 의전비서관인 폰 취르쉬키를 시켜서 불가닌의 개인 비서에게 전달하고 수령증을 받은 이 서한은 나중에 아데나워의 독일 정치에서 가장 소중한 문서로 남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상 각하, 독일연방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외교 관계를 맺게 된 데에 따라 저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입니다.

① 독일연방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정부가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현재의 영토 점유 상황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일 국경에 관한 최종 결정은 평화조약으로 내릴 것이다.

② 독일연방공화국이 소련 정부와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독일연방정부가 국제적 문제에서 독일 민족을 대표하는 권한에 조금의 변화가 있게 되지 않는다. 또한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의 실질적 주권이 미치지 않는 독일 지역 곧 동독지역에 관한 정치적 상황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에서 협상을 벌이며 얻게 된 인상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6일 동안 소련 지도부를 탐색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지도부가 자신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겼다. 크렘린 내부의 권력관계는 불분명해 보였다. 아데나워가 내각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회담 첫 2일 동안 ‘흐루쇼프가 서기장’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피상적인 것을 수도 있었다. ‘불가닌이 지배적인 인물로 보였다.’ 불가닌은 아데나워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불가닌은 ‘과거의 베를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AEG를 매우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그는 독일에 매우 위험한 적수였다. 내각에 협상 과정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종종 불가닌이 온후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그것은 외면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는 매우 차가운 잔혹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흐루쇼프는 ‘매우 활기차고 잔혹한 면이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흐루쇼프가 ‘다혈질이고 활기가 넘치면서도 갑자기 잔혹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여겼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소련은 독재적으로 지배되는 국가로 내부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좀 더 냉정하고 사리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인물이 지배한다고 해도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매우 커다란 위험에 당면해 있습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불가닌은 편하게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싸움군’, ‘선동가’, ‘당파심이 있는 당원’이었다.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적 능력에 관한 아데나워의 부정적인 평가는 모스크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귀국 이후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소련에 대하여 무시하고 측은해하는 어투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모든 자리에서 똑같은 인상을 전달하였다. 곧 서방의 기준으로 볼 때 소련은 매우 후진 나라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시민들은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으며” 옷도 매우 남루하여 “마치 우리 독일에서 1947년 시절의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 제가 늘 생각한 대로 모스크바는 식민도시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것에서 유색인종들은 매우 힘들게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일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명령하는 작은 무리의 사람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에 비하여 지배층은 사치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릅니다.     

아데나워는 슬픈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종교는 이제 소련에서는 박멸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현장에 직접 본 것으로 다음과 같은 확신을 더 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단순히 우리 독일이 빼앗긴 땅을 회복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유물론과 기독교 신념 사이의 매우 중요한 싸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교리는 완전히 변하기는 하였다. 소련의 지도부가 공산주의를 얼마나 확신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의 마음 속을 드려다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가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냉전은 지속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특히 우려스러운 일은 독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2~3년 전만 해도 아데나워는 소련이 무엇보다도 안보 문제로 동독의 존립에 매달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받은 인상으로 그는 소련이 동독에 집착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군사적인 이유는 러시아에 하등의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동독 지역에 가치 있는 공장이 몇 개 남아 있는지도 러시아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동독의 국민이 1,700~1,800만 명이 된다는 것도 전ㄹ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 전혀 다른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소련과 나눈 대화에서도 이 점이 분명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곧 동독 지역을 포기하게 되면 흐루쇼프가 말한 대로 소련은 공산주의의 축복을 체험한 지역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모든 참상을 그러안은 채로 자본주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과 ‘독일의 지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이제 최소한 흐루쇼프의 의도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분명해 보였다. 아데나워가 이 자리에서 설명한 모스크바에 관한 안보 정책적 양보가 적절하지 않은 만큼이나 야당의 모든 구상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것으로 보였다. 야당의 구상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새로운 유럽 안보체계의 수립을 통하여 독일의 통일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데나워의 발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데나워는 이제 독일 통일 문제르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독일에 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여겼다. 불가닌은 AEG와 인연을 맺을 때부터 독일의 근면성에 대하여 경탄해왔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확신으로는 흐루쇼프도 아데나워의 강력한 협상을 통하여 “독일에 관한 커다란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본으로 돌아와서 그가 발견한 것에 대하여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방의 대화 상대들과는 이에 관하여 자주 이야기하였다. 흐루쇼프와의 단독 면담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공산화된 중국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흐루쇼프는 “중공 문제 해결에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아데나워에게 간청했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안도감을 느끼며 귀국하게 되었다. 소련은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미국, 미국과 연맹을 맺은 서유럽은 물론 중공의 위협도 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아데나워가 독일 문제에서 모스크바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미래를 구상할 때마다 그는 중국과 소련 간의 공개적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그 반대되는 상황도 고려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유럽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노력할 것으로 보인 것이다. 이는 소련이 중공과 갈등을 벌이게 되면 지원받을 심산에서 나온 것이다.      

1950년대 초반에는 로버트 융크의 저서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 책의 제목은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이다. 이 책은 미국의 미래 과학을 주제로 삼았다. 그런데 이 제목은 이번에 아데나워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을 외교 정책적으로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이후 아데나워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동방 정책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소련도 중요한 외교 상대로 여겨야 하게 된 것이다. 소련에 관한 단순한 부차적인 정책은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소련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은 서독이 동독을 인정하라는 소련의 요구에 계속 시달려야 한다는 것도 의미하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공산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문제도 등장하고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아데나워 덕분에 1955년 각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각성했다고 해서 외교가 쉬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의 치유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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