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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대서양 연합 I

아데나워전기 II

 휴전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하는 법이다. 아데나워는 평생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1952년에 특히 그렇게 행동하였다. 서방과 맺은 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52년 5월 30일에 아데나워는 내각에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전달하였다. “독일 연방의회 휴회 이전에 조약 비준을 완료해야 합니다.”     

그는 이 비준을 확신하였다. 곧 밝혀진 대로 지나치게 확신했다. 《타임스》의 발행인 윌리엄 프랜시스 케이시는 조약 비준을 1952년 6월 초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말을 들었다. 그는 독일 연방의회는 휴회를 14일 정도 미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내각은 6월 6일 개회하는 독일 연방의회에 모든 조약을 즉시 제출할 권한을 아데나워에게 위임하였다.     

지분을 서둘려야 하는 국내외 정치적 이유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준이 빨리 이루어질수록 사민당(SPD)과 노조 일부 세력이 강력한 반대 운동을 전개할 시간이 줄어들 것이었다. 그 무렵 《뉴스위크》의 로버트 헤저 기자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는 잠시 소란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분위기가 더욱 우호적으로 변할 것입니다.”라고 첨언하였다.     

속도를 더욱더 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외교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1952년 7월 초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곧 있을 독일 회의를 위한 동독과 서독 사이의 각서교환은 아직 미루어지고 있었다. 소련만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프랑스마저 재촉하던 4자회담은 당연히 모든 결정을 뒤로 미루도록 만들었다.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아데나워 수상과 6월 중순에 논의한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에게서 불길한 예상을 하는 말을 들었다. 서방 열강이 각서 교환에서 4자회담을 조속히 열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비준에 관련된 모든 작업이 의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독일 연방의회와 독일 여론은 조약들의 비준 완료에 앞서 그러한 회담의 결과를 기다리도록 연방정부에 권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회담이 무산되면 비준을 완료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하게 됩니다. 독일이 그러한 조처를 한다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를 당연히 위협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7월 초에도 모든 계획이 유동적인 상황이 되자 아데나워는 내각에 “러시아에 맞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라고 촉구하였다. 어찌 되었든 프랑스에도 맞서야 했다. 만약 독일이 4자회담에 참석해야 한다면 그가 직접 파리에 가지는 않고 할슈타인이 “비준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조약 작업에 관한 전망이 처음에는 프랑스에서도 비교적 유리하였다. 신임 프랑스 총리로 임명된 피네는 아데나워의 마음에 꼭 드는 강경한 시민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 첫 만남에서 피네는 아데나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조약 인분에 찬성하였기에 아데나워는 좋은 결과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희망차게 시작된 1952년 6월에 이미 조약 비준이 지연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결국 1954년 8월 30일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좌절로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본의 연합 정부에 참여한 파벌에서 조약 비준에 관한 반대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월 10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상임위의 논의 시한을 약 4주로 못을 박았다. 그래서 8월 10일까지 모든 일이 마무리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경솔한 발언이 이어졌다. “사실 상임위에서 논의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원내대표인 폰 브렌타노가 격노했다. “귀하는 독일 연방의회가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연방홍보실장인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는 국내 정치 문제에 ‘정통하다’라는 명성을 누리고 프랑스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그가 6월 23일 서방 3국에 관한 매우 현실적인 상황 판단을 아데나워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서 그는 ‘무조건 밀고 나가는 전략’(Hau-Ruck-Strategie)이 점차 역효과를 보인다고 하였다. 에크하르트가 내세우는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의회는 아데나워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연정 내부에서도 1952년 4월과 5월에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때 아데나워는 조약 서명의 일정을 핑계로 의회에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전혀 흥미가 없든 연방의회의 연정 우군에게 쌀쌀맞은 태도로 무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반대파들은 이제 마침내 결딴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민당(FDP) 인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품어 왔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도 이런 불만이 나타나게 되었다. 최소한 형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원들도 또한 사람이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휴가도 즐겨야 한다는 생각도 이러한 반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6월 23일자 문서에 나온 분석에 따르면 비준 지연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4자회담의 복잡성이었다. 비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나면 그러한 회담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더 나아가 매우 바람직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여론을 아무리 이성적인 논거를 제시해도 바꿀 수 없다.” 그 이유는 “독일 통일문제에 관하여 기회를 놓쳐버린 것에 관한 책임을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각, 연정, 본의 기자들과의 대담 – 어디를 가든지 사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아데나워가 마주하게 되는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지난 몇 달과 마찬가지로 결국 자민당(FDP)이 불만의 진원지였다. 1952년 6월6일, 곧 독일연방참사회에서 조약 초안이 첫 논의를 위하여 제출된 날 칼 게오르크 플라이더러는 지기 지역구인 바이브링겐에서 기조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은 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플라이더러는 무명 인사가 아니었다. 그 당시 53세였던 슈바벤 사람인 그는 20년 동안 밀라노, 북경,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카토비체, 파리, 스톡홀름에서 외교 직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제2차 대전 이후에 그는 보이텔스바흐에 있는 부모님의 포도 과수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바이브링겐 시의회에서 근무하였고 이제 외교 정책에 관한 지식이 가장 풍부한 자민당(FDP) 의원이 된 것이다.     

그는 1952년 여름 만 해도 자민당(FDP) 내에서 소수파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라인홀트 마이어라는 막강한 후견인을 두고 있었다. 마이어는 4월 25일 독일 서남부국가 수립 이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탁월한 솜씨로 독일인민당(DVP)-사민당(SPD-추방민당(BHE)) 연정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당이었던 기민당(CDU)을 야당 자리로 몰아낸 것이다. 이리하여 독일연방참사회에서 조약 비준에 필요한 표 확보에 위협이 되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이제 1년여에 걸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정확히 파악한 대로 플라이더러와 마이이어가 그 배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슈투트가르디아*’의 회원이기도 하였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의 주지사가 자기 내각 동료인 볼프강 하우쓰만과 더불어 프라이더러가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을 맨 앞자리에서 바라보며 힘찬 박수를 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이 기조연설에 관하여 미리 근본적으로 합의를 본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1952년 9월에 ‘조약서와 동방 정책’이라는 제목의 제안서에 들어 있던 플라이더러의 입장이 아데나워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얼마 후에 시민주의자 진영에서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에 관한 대안으로 제시한 구상은 어떤 것이었나?     

* ‘슈투트가르디아’ [역자주 - Stuttgardia, Akademische Gesellschaft Stuttgardia의 약어로 1879년 설립된 독일 ‘튀빙겐대학교학생회’를 가리킴]     

한편으로 플라이더러는 독일 통일의 기회가 4자회담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사민당(SPD)이나 《슈피겔의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을 포함한 여러 언론인과 뜻을 같이하였다. 그와 같은 회담에서 독일의 통일을 다시 이루는 일이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위에서, 곧 중립국으로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아데나워의 우려가 그에게는 두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비에트 연맹의 안보에 관한 관심에만 무게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1937년의 국경을 기준으로 한 독일 통일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 경우에 소련군이 오더강 동쪽 지역의 독일 땅에 계속 주둔하고 라인란트에는 서방 연합국이 주둔할 것을 상정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구상은 분명히 유럽방위공동체(EDC)나 일반조약에도 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이더러는 독일 통일과 대서방조약,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어낼 수는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이 참여하는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수립되면 서방 세력이 매우 강력해져서 조만간에 소련이 독일 ‘동부 지역’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라고 한 아데나워의 판단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이러한 대안 구상을 바탕으로 하여, 독일에 관한 동서협상을 곧 시작해야 한다는 플라이더러의 요청은 아데나워의 시각으로 볼 때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라인홀트 마이어가 강력한 국내 정치 차원의 헌법적 근거를 내세워 조약 비준을 지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전혀 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들의 주장의 배후에는 아직은 불안한 외교 정책 사업을 망치고자 하는 약아빠진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이 이 시기에 대규모 군중 연설에서, 그리고 또한 정부 안에서도 자기 구상을 설명하고 추진해 나가고자 계속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내각, 기민당(CDU)의 연방 [중앙당] 수뇌부, 기자들과의 면담, 그리고 적절한 기회에 그는 그러한 기본적인 구상을 사람들의 머리에 심어주고자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외교 정책적 세계관에 관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원칙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그 첫째 원칙은 독일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4대 강국의 합의 도출에 관한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그 시절 아데나워가 지속적으로 지녔던 두려움을 나중에 사람들은 이른바 ‘포츠담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이는 승전 국가들이 서부 지역의 독일이라는 독수리에 아직 남아 있던 깃털마저도 뽑아버릴지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이었다.     

분명히 아데나워 수상은 역사의 시계를 더 이상 1947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4강이 합의한 평화조약은 독일에 매우 불리하리라는 것이 뻔하였다. 그 조약의 주요 내용은 독일 동부지역과 자를란트의 분리, 전쟁 비용 배상, 독일의 미래 산업의 제한과 통일된 독일에 관한 지속적인 감시였다. 여기에서 예상되는 결과는 새로운 독일의 고립 콤플렉스, 독일 독자 노선으로의 회귀,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7월 3일 고위위원회의 대표가 전해준 서방의 답변 각서의 일부 내용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역사적 비교를 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이 그저 동의 아니면 거부밖에 할 수 없었던 베르사유 조약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었다.”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위원인 앙드레 프랑소와-퐁세가 자신 있게 “수상께서는 허깨비를 상대로 싸우는 중입니다.”라고 말했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 허깨비가 결국 비극적인 역할을 하게 된 독일과 유럽의 근세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데나워에게는 민족·진보적이며 그래서 ‘몽상적’인 플라이더러의 생각에서 나온 동서 진영에 속하지 않는 중립이라는 개념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환상세계로 되돌아가는 모험으로 보인 것이다.     

4강이 독일을 통제한다는 구상이 특히 프랑스에서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에서 화해 정책을 추구하는 정치가인 로베르 쉬망이 날이 갈수록 입지가 약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1952년 6월 중순 아데나워는 점차 독일의 중립화 구상으로 기울고 있던 영국에 관한 부정적인 전망을 내각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였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그가 우려하는 강력한 ‘신고립주의’가 등장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점차로 둘째 원칙을 언급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원칙을 이 결정적인 시기에 그가 참석한 모든 회의 석상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이 원칙은 서유럽이 단합하지 않는다면 서유럽의 민주주의가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아데나워는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중무장한 러시아 군대는, 이에 맞서는 연합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어느 모로 자연스럽게 유럽의 주도적 세력이 될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서방과 소련이 강경하게 대립하게 된다면 모스크바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공산주의 세력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제5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데나워는 1848년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유럽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민족들의 단합, 유럽을 지키는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 통일된 동방 정책, 강력한 군사적 위력의 구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방위공동체(EDC), 그리고 가능하다면 ‘유럽 정치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의 핵심 요소는 독일연방공화국이어야 했다.     

아데나워는 내각, 기민당(CDU) 수뇌부, 자신을 지지하는 모든 언론인에게 이러한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독일 여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세뇌하였다. “저는 ‘유럽’이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기존의 유럽 형태와 문화가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독일이 중립국이 되거나 서방 세력권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것은 유럽 통합의 실패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유럽이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 모를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제 통합되고 강력한 서방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셋째 원칙과 연결된다. 이 원칙은 이미 1951년부터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 여름에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이것이 온전한 모습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이 원칙은 아데나워의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의 핵심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소련이 순전히 이기주의적인 생각에서 유럽 군대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위협이나 유혹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데나워는 1951년 4월 무렵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동유럽 블록과의 관계 개선은, 독일과 같은 커다란 민족이 자기 문제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려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무시하거나 폭력으로 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정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외교 노선을 ‘힘의 정책’이라는 용어로 자주 표현하였다. 그의 정적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단순화한 강대국 논리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러한 반론에 맞서 자기 세대의 경험에서 나온 보화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곧 반쯤 미친 독재자를 결국에는 [연합군의] 공중 폭격과 전차사단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나 동유럽의 침략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1950년과 1951년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이제 외교적 수단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협상이 결국은 진부한 유화정책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전체주의 국가,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는 오직 하나의 결정적 요인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힘입니다.”     

그렇다면 아데나워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던 대로, 소련의 정치적 항복을 염두에 둔 것이었던가? 아니면 “일단 서방의 무력을 키우고 나서 성공적인 협상에 임한다.”는 논리로 자신이 독일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닌가? 사실 그는 스탈린이 1952년 3월 10일 각서를 사방 측에 보내기 이전에 이미 군사적인 힘과 협상의 관계를 규명한 바가 있다. “서방이 소비에트 러시아보다 군사적으로 강해지면 소비에트 러시아와 협상을 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에 관련된 여러 가지 구상이 좌절되고 나서야 비로소 1952년 내내 그는 평화로운 해결책의 구상을 때로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내밀하게 발전시키게 되었다. 기민당(CDU) 전국당대회 개최 전인 1952년 1월 12일, 곧 소련의 각서가 당도하기 전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련은 무엇보다도 자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처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소련 국민의 평균 수명은 38세입니다. 서방의 경우는 60세입니다. 댐 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 계획은 소련이 살아남는 데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언젠가 러시아는 무기에 엄청난 돈을 쓰기보다는 자국민에게 확실한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한 다른 프로젝트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침략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주장입니다.”     

그 당시에, 무엇보다도 서유럽 의원들과의 접촉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때만 해도 완전한 아데나워 측근이었던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도 아데나워로부터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블랑켄호른의 일지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1952년 10월 24일 게르스텐마이어를 불러 자민당(FDP) 의원인 플라이더러와 논쟁하기 위한 ‘지침’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플라이더러는 별로 새로운 것도 없는 구상을 다시 끌어내던 참이었다. 곧 “유럽을 제삼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만들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한 축과 소련과 그 위성국이라는 또 다른 축 사이에 머물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였다. 곧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러시아가 아무런 저항 없이 동부 점령지역을 포기하겠는가? 비판을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하여 아데나워 수상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다음의 방법밖에는 없다. 곧 서부 독일 지역의 독일연방공화국을 서유럽과 대서양 연합과 결합하고, 이를 통하여 유럽 대륙을 경제적(이는 사회적 문제이다!),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강화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모든 전체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힘만 존중할 뿐이다. 이제 소비에트 러시아가 체제를 전복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서방에 적용하기에는 설익은 것이어서 서방을 정복하기 힘들고,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가 어렵다는 확신이 서게 되면 서방과 협상에 나서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의 협상 의지는 소련의 내부적인 이유에서도 나왔다. 곧 소련 국민이 엄청난 군비 확장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낮은 생활 수준을 마냥 감내할 수만은 없는 일인 노릇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러시아가 일단 서방으로 세력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어느 정도 타협을 위한 협상이 유익해 보일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심리적 상황이 성립될 때만 독일 통일에 관한 협상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언론에서 종종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아데나워 수상은 그러한 힘을 궁극적인 협상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의 계산은 비교적 명료하였다. 그것이 확실한 것이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아데나워는 소련이 냉전에 들어가는 경제적, 사회적 비용에 관한 합리적인 평가를 하여 입장을 변경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가 기꺼이 인정한 대로 여기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의 위기감을 고려해야 했다. 아데나워와 함께 일한 한 장관은 사람들이 ‘냉전론자’로 비난했던 아데나워가 1952년 5월 10일 한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하여 놀라워했다. “러시아를 상대할 때 어느 정도 두려움이 작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52년 5월 3일 아데나워는 모스크바로 가던 중이던 조지 케넌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케넌은 모스크바에서 짧고 운이 없던 대사직을 수행하러 가려던 길이었다. 케넌은 분명히 아데나워에게, 소련도 안보에 관한 정당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내각에서 서방과의 조약 체결을 옹호하는 이야기를 할 때 이 주제를 다룬 것이다. 케넌 또한 “러시아 정책의 일정 부분은 공포로 통제하고 적절한 시기에는 러시아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한 가지 예측을 하였다. 이는 멀리 내다본 것이기는 하지만 올바른 핵심을 담은 것이었다. “현재 세계의 엄청난 긴장은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긴장이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우리가 러시아의 간단한 공격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가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우리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 현재의 긴장 상황이 일단 지나가면, 곧 소비에트 러시아와 그 위성국가들은 서방 국가들과 10년이나 20년 또는 30년 지속되는 협상을 맺는다면 사태가 안정을 찾을 것입니다.”     

이러한 발언이 보여주는 것은 아데나워가 확실한 시간 개념을 전혀 지니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과정이라는 범주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고 어찌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곧 소련이 실질적으로 협상에 임할 자세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아데나워가 1952년 초 미래의 [동서] 긴장 완화에 관한 그러한 자기 환상을 이야기해주었던 두 명의 영국 출판인들은 매우 회의적인 태도로 그 시점이 언제 도래하게 될 것인지, 25년이 될지 아니면 100년이 될지를 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에 답하면서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5년 내지 10년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는 소련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동부를 동유럽과 연계된 전체적인 상황에서 놓고 보아야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분명해졌다.     

1952년 6월 9일 《뉴욕타임스》 파리 특파원 사이러스 슐츠버거가 아데나워를 찾았다. 그는 나중에 이 신문사 발행인이 되었다. 슐츠버거는 아데나워에 대하여 분명히 매우 좋은 인간적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매우 친절하였고, 상당히 신중하고 영리한 사람치고는 매우 열린 인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매우 건강하여 70을 훨씬 넘긴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독특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가끔 절제된 미소가 얼굴을 스쳐갔다.” 슐츠버거는 동유럽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데나워에게 매우 회의적인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는 아마도 아데나워가 단지 잃어버린 독일 동부지역을 되찾기 위하여 대서방조약을 맺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슐츠버거가 아데나워에게 만약 모스크바가 오더·나이쎄 국경을 조정하자는 놀라운 제안으로 극적인 조처를 하면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 질문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어 웃으며 대답하였다. 곧 많은 독일 사람이 간과한 것을 슐츠버거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통역자가 작성한 무미건조한 문서를 통하여 읽어낼 수 있는 그의 논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 통일의 문제와 슐츠버거도 언급한 바대로 소비에트 점령지역의 반환은 소련에 결코 별개의 조치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이를 자기 동방 정책과 세계정치의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볼 것입니다.” 소련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반환하게 된다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이제 이 모든 국가는 불안해질 것이다. 이 나라들은 자유를 다시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스크바가 오더·나이쎄 국경 동부지역을 독일에 돌려주고자 한다면 어찌되겠는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요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조치는 내려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슐츠버거가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를 들고나오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1951년 10월 6일 베를린에서 한 유명한 연설을 언급하였다. 그 연설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더-나에쎄 국경 건너편 땅은 우리 독일에 속한 것입니다.” 사민당(SPD)과 미국은 아데나워의 이러한 주장을 불편하게 여겼다. 사실 아데나워의 속마음은 “독일 통일 이후에” 폴란드와 확실한 선린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슐츠버거의 질문은 영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다시 자기 오래된 생각인 ‘공동 통치’(Kondominium)를 다시 들고나왔다. 아데나워는 이에 관하여 자신만의 의견도 제시하였다. “반환 지역을 독일과 폴란드가 공동 통치하든지 아니면 국제연합이 신탁통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 영역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완전한 평등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말을 마치면서 오늘날 이러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아데나워가 폴란드를 점령하려는 생각을 숨기고 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 무렵 다른 대담에서도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의 해결은 동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것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전쟁 없이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확실히 소련이 이에 동의하는 것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이는 세계와 유럽의 긴장 완화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긴장 완화’라는 용어는 그 당시에 이러한 맥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이 개념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 하였다.     

그러한 아데나워의 기본적인 생각을 잘 알아야만, 조약 비준을 준비하던 오랜 시기의 아데나워의 외교 전략과 전술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결국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싼 고통으로 이어졌다. 확실히 아데나워는 1952년이 당면 문제에 장기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여겼다. 조약 체결로 서구의 단합을 이루기에 앞서 먼저 서유럽·미국 그리고 동유럽·소련이 동서 협상을 벌이는 것이 그가 보기에 분명히 전략적으로 유용한 방법이었다. 사민당(SPD), 플라이더러, 심지어 야콥 카이저마저 주장했던 4자회담을 통한 근본적인 새 질서의 신속한 수립은 아데나워가 보기에 여전히 환상이거나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4개국 외무장관이 모이기 전에 조약의 비준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에 관한 4자회담에 관한 요청을 그가 직접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볼 때 국내 정치 차원에서 자살 행위나 다음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요구도 거부하기 어려웠다. 파리에 있는 조약 반대파는 4자회담을 최대한 지연시켜서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 논의를 일단 보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파리의 관점에서 1952년에는 독일 문제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전개 과정이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통일된 독일을 국군을 보유한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소비에트의 제안도 유럽방위공동체(EDC) 반대파의 화만 돋우게 될 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약을 찬성하는 이들은 소비에트의 무례함으로 무산된 독일회의가 필요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확실한 다수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즉각 4자회담을 개최하자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박했지만 사실 웃는 낯으로 불길한 도전에 나서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6월 13일 고위위원회 영국 위원이 이보느 커크패트릭에게 간략하게 설명한 그의 노선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이 남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아데나워는 4자회담이 개최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때까지 미결로 남아 있던 모든 문제를 명료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야만 그 회담이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 막연한 기대만으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앞으로 6~8주 동안만이라도 좀 더 고민해보는 단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조약 비준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였다.”     

서방 열강에 전한 아데나워의 바람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은 내부 소식통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① 동독과 서독의 전체 독일 정부가 자유롭게 합의한 평화조약을 체결에 참여한다.

② 평화조약 전후에 전체 독일 정부가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포츠담 선언과 같은 지침이나 4대 강국의 통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③ 전체 [곧 동독과 서독] 독일 정부가 재량에 따라 세력 집단에 속할 자유가 있다. (중립국은 될 수 없다.)

④ 유럽 통합 작업의 과업은 맡지 않는다.

⑤ 국군을 보유하지 않는다.

⑥ 오더·나이쎄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⑦ 완전한 자유선거, 선거 이전, 도중, 이후에 자유를 보장한다.”     

당연히 반박이 심했다. 아데나워가 서방 열강의 답변 각서에서 몇몇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상황은 4자회담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회담은 1952년에도 1953년에도 궁극적으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1952년 9월 23자 서방 국가가 보낸 마지막 각서에 대해서는 모스크바가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2년 초여름에는 아직 그것을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대서방조약에 관한 본의 독일 연방의회의 논의도 지연되고 있었다. 독일회담이 신속하게 성사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연정 소속 정당들이나 연방참사회는 서두를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헌법 기관들은 본의 민주주의가 결코 거의 독재적으로 통치되는 ‘수상 공화국’이 아니라 삼권분립이 이루어지는 법치국가라는 사실을 아데나워에게 주지시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독일연방참사회에서 경고가 날아왔다. 연방정부가 전체 조약 초안 가운데 비교적 정리가 된 2개 안에 대해서 참사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 데 대하여 연방참사회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요 조약들 또한 참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지방 정부들이 일치단결하여 주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방참사회는 최종적인 법적 평가를 요구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일에서 다시 한번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들이 무엇보다도 지압 정부의 수장이기 결코 연방정부 수상의 보호막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것은 라인홀트 마이어의 태도였다. 이미 1952년 6월 중순에 슈투트가르트 주 정부 내각은 주요 계약들도 참사회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1952년 7월 10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개최된 첫 조약 설명회를 무사히 넘겼다. 아데나워는 연설에 많은 공을 들였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벌려고 하는 이들의 협력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정당한 근거 없이 계약을 지연시키려는 시도는 위장된 조약 인준의 거부일 뿐입니다. 우리의 협상국들도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세계의 정황을 볼 때 독일연방공화국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데나워를 극히 존경하고 있었음에도, 자기 상전이자 주인이 연방의회에 등장한 모습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블랑켄호른은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논쟁은 수상의 대단한 성과로 마무리되었다. 사민당(SPD)은 아무런 개념이 없었고, 방어가 부족했으며 공격을 잘 못하였다. 연정 측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게르스텐마이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수상 자신이 성공적인 논지를 펼쳤다. 수상은 수요일에 잘 준비된 연설로 논쟁을 선도하였고 목요일에는 매우 강력한 즉석연설로 마무리하였다. 조약의 비준은 확실히 통과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정된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데나워는 조약 비준 시한이 더 멀리 연기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의 여당 중진의 동의, 제2차와 제3차 설명회를 9월 무렵에 가지기로 한 것 이외에는 6월 24일의 국무회의에서 합의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분명히 여당은 여름휴가를 마치고 다시 의회에 복귀해서는 9월에 차분하게 상임위 검토를 하자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상임위에서는 일단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는 결의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9월 중순에 일련의 부탁 서한을 보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브렌타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체적인 상황이 매우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민당(SPD) 측의 지연 전술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당대표는 몇 개월 전부터 아데나워가 자신이 외무장관이 되는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며 수상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당 대표단에 보내는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당 대표단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놓았다. 2차, 3차 설명회를 10월 중순 이전에 개최하는 것이 “외교적인 이유로 꼭 필요함”에도 이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이제 수상이 끈질기게 서둘고자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아니던가? 외교적 상황이 이제는 ‘매우 심각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데나워는 자신이 쾰른 시의회를 다루는 식으로 독일 연방의회를 멋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제나 배우게 될 것인가? 쾰른 시의회 시절에 대해서는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사민당(SPD) 의원이 된 로베르트 괴르링거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쾰른에서 공부한 야콥 카이저나 제국수상실 실장으로서 아데나워의 지방 정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헤르만 퓐더와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연방의회 상임위원회들은 아데나워의 평생에서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의회주의에 속한 제도들에 순응했지만 늘 그의 생각에 의회주의 체제의 최대의 장점은 의회가 책임지는 법 집행이었다.     

그러나 조약 비준을 지연시키는 것은 독일 연방의회만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갑작스럽게 비준 절차가 느려지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이제는 9개월에 걸쳐 국내 문제로 정신이 없게 된 데에 원인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상황이 변한 것에 대하여 숙고하는 가운데 그는 8월 중순에 뷔르겐슈토크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오랜 친구인 빔 슈미츠에게 편지를 썼다. “정치적 관계에서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네, 그것도 강한 인내심 말일세. 나는 현재의 문제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네.”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고위위원회의 존 맥클로이가 고위위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데나워가 그와 썩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블랑켄호른이 보기에 맥클로이의 “억세고, 때로는 어느 모로 가벼운 태도”가 아데나워의 맘에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차관으로 근무했던 이 사람은 독일인 전체를 불신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 아래에서 독일에 맞서 미국 군사력을 동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맥클로이는 아데나워의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지원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의 말이 워싱턴의 외무부에서 힘을 발휘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민당(SPD)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이 고위위원이 독일연방 수상의 수호성인의 역할을 해왔고 독일연방 대통령 헤르만 엘러가 주최한 작별연회도 고사한 사실을 그에게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맥클로이가 고위위원으로 더 머물기를 바랐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이 인물은 아데나워에게 불리한 시기에 떠나지만,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자신이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데나워에게 몰래 언질을 하였다. 맥클로이의 후임으로 온 도넬리는 힘이 없는 인물로 얼마 안 가서 임무를 그만두었다. 그리러고 나서 마침내 1953년 1월 유명한 제임스 코낸트 교수가 새로운 주독 미국 대표로 부임하게 되었으나 아데나워는 그와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였다. 그는 너무 좌파적이고, 전혀 정치적이지 못하고, 독일연방공화국의 사정에 관한 정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워싱턴에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은 1956년 자기 마음에 드는 독일 주재 미국 대사 데이비드 브루스가 임명될 때까지 3년 동안 탄식하며 보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후반기에 있었던 커다란 난관은 사실 주독 미국 부영사였던 존 맥클로이가 남긴 공백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아왔던 프랑스와 영국의 고위위원들이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프랑소와-퐁세는 독일 문제를 4강이 힘을 합쳐 해결하는 방안을 여전히 고려해 보는 것이 자기 과업에 속한다고 여겼다. 그는 프랑스 외무부의 독일 혐오 세력과 뜻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로베르 쉬망의 화해 정책이 너무 미약한 것으로 여기고 독일의 성장이 재기가 너무 성급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르 지역 문제도 다시 조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급한 문제였다. 1952년 9월 15일 독일의 자르 지역 비망록이 광업연합 각의(閣議)에서 논의되었다. 가을에는 자르 지역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 여론에서는 프랑스가 자르 지역에 친독 정당의 정치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프랑스 측의 적절한 보장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독일 연방의회에서의 조약 비준 절차에 심각한 장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프랑스에는 사정이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파리 정부나 국회는 독일에 더 큰 자유를 보장하는 어떤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때마다 이를 프랑스의 입맛에 맞는 자르 지역 문제 해결과 결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르 지역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르 주민들의 태도도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장관들의 모임에서 광업연합의 최종 조직이나 조만간에 개최될 토의에서나 나머지 유럽 기구에 관해서도 자브뤼켄에 관한 오래된 구상을 다시 들고 나와야 한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미 1952년 2월에 프랑스 외무부는 당시 프랑소와-퐁세의 참사관으로 일하던 셰송을 통하여 이와 관련된 의사 타진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해결책의 장점을 이미 오래전부터 간파하고 있던 아데나워는 이때 몇 가지 조건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그 당시 자르 지역에 속한 영토 일부의 독일 반환, 프랑스 점령 지역의 유럽 공동 영역 편입, 자르 지역 주민의 동의가 포함되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유럽연맹이 수립될 때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이었다.     

아데나워는 1952년 2월 4일 열린 내각 임시회의에서 이에 관한 정보를 망설임 없이 전달하였다. 그러나 연정 참여 정당들은 그러한 해결책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 수상은 로베르 쉬망에게 이러한 점에 관련된 규정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의견을 간략하게 구두로 통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2년 3월 아데나워는, 긴급한 경우에 자를란트의 ‘유럽화’라는 탈출구를 모색할 것이라는 인사정책적 신호를 보냈다. 곧 독일연방정부 외무부의 자를란트 담당부서장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룀의 직무를 정지시킨 것이다. 슈트룀은 이미 1935년에 자르 지역의 독일 편재를 위해 투쟁했던 인물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사민당(SPD) 당원이었고 아데나워의 자르 지역 정책에 반대하던 인물들에게 노골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누설해 왔었다.     

이제 1952년 7월 말이 되자 ‘유럽화’ 계획이 아데나워가 예상치 못하게도 프랑스 외무장관 쉬망이 완전히 공식 안건으로 제기하였다. 곧 자르 지역에 유럽에 속하는 지위를 부여하자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광업연합 기구의 본부를 자브뤼켄에 설치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쉬망에게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며, 잘 알려진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여기에 더하여 자르 지역의 정당들의 수립을 허용하고 선거를 6개월 뒤로 연기할 것도 요청하였다. 또한 자를란트를 프랑스에 연결시키는 프랑스-자를란트 경제협약이 파기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데나워는 7월 24~25일 파리에서 개최되어 이러저러한 사안을 논의하게 될 6개국 외무장관 회의를 지금까지 그가 직접 참석한 것 가운데 가장 유감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날은 더웠고 하루 종일 이어지는 회의, 게다가 피네이 총리가 주최하는 조찬이 있었다. 당연히 모두 지쳐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자르 지방 계획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유럽 기구가 들어설 자리를 모두 노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국가의 대표들이 자기 나라에 이 기구가 들어서기를 바랐다. 협상은 밤을 새우는 것도 모자라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후일 유럽경제공동체(EEC 위원회 독일측 대표가 된 한스 폰 데어 그뢰벤은 아데나워가 나중에 오후가 되자 회의장을 떠나 휴식을 취하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데나워는 단 한마디만을 하였다. “한심한 유럽이군!”     

어찌 되었든 프랑스 정부가 자를란트 선거 일자를 연기하고 자유선거를 보장할지도 모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차기 협상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아데나워는 자르 지역 친독 정당들의 압력으로 이제 새로운 잠정적 해결책, 곧 자를란트가 유럽 소속국 지위를 5년만 가지도록 하자는 요청을 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보기에 이 협상의 매력은, 독일리 궁극적 해결책에 동의할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1952년 11월 말까지 프랑스는 자르 지역 문제에 몇 달 동안 매달려왔다. 자를란트 지역의 지방선거는 호프만 정부가 주도하였다. 친독 집단은 저항의 표시로 주민들이 무효표를 제출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르 지역 정당들에 관한 유효표는 70.3%에 이르렀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신을 자르 반대파로 몰아간 모든 이, 곧 야콥 카이저, 자민당(FDP), 무엇보다도 당연히 사민당(SPD)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였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1953년 연방정부 총선이 있기까지는 자르 지역 문제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52년 여름이 되자 아데나워와 내각의 관계가 삐걱이기 시작하였다.     

오토 렌츠가 이러한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힘들었던 몇 달을 뒤로하고 뷔르겐슈톡에서 여름휴가를 시작하자마자 12장에 달하는 렌츠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서 렌츠는 조속히 내각 개편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독일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은 아데나워가 여전히 포괄적인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한 징후는 아데나워가 뢴도르프에서 가볍게 표명한 입장이나 스위스 산간 지역에서 숙고하기 위하여 보낸 장기 휴가 기간에 내비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아데나워에게 그와 여러 사람이 제시한 모든 구상을 요약하였다.     

오토 렌츠는 내각이 아직 단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데나워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에 취약점이 있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출신 장관들은 야콥 카이저를 제외하고는 아데나워 정책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수상이 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만 그러하였다, 아데나워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부수상인 블뤼허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로 혼란스럽고, 통일되지 못한 정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장관들에게는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일부는 아예 정치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모든 것을 주도하는 아데나워는 어느 모로 장관들을 의존적으로 만든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 인사 정책에 관한 제안이 이어졌다. 물론 그러한 제안들 모두 다양한 반대 의견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였다. 난민부 장관 루카쉐크와 차관 슈라이버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추방민들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대한 지지를 끌어낼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현재 최선의 방법은 발데마르 크라프트의 지휘를 받는 추방민당(BHE))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크라프트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던 렌츠의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총선이 있은 다음의 대연정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 미리 내려지게 될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식량부 장관인 니클라스 교수와 우편부 장관인 쉬베르트도 교체 대상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매우 병약해 보였다. 아데나워는, 소문에는 냉정한 권력자였지만 실제로 인물을 교체하는 일에는 힘들어했다. 그러나 당사자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인 질병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을 좀 더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렌츠는 이를 예상하고 이러한 세련된 타개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후에 아데나워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어떤 인물이 유감스럽게도 매우 아프다는 식으로 심각하게 말하면 그 장관이나 직원의 자리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부독일 장관에 관해서 렌츠는 무미건조하게 말하였다. “지도부 교체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저는 더 이상 자세한 이유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베를린의 개신교 파인 로베르트 틸만스를 야콥 카이저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말인가?     

내무부 장관의 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블랑크의 자리도 고민거리였다. 블랑크의 인사 정책은 젊은 장교단의 의견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일종의 사조직을 이루어 민간 공무원들에 부작용을 미칠 수도 있었다. 이 두 자리, 곧 내무부와 블랑크의 자리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하마평에 올랐다. 그러나 가장 민감한 문제는 외무부의 수장을 뽑는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렌츠의 제안은 아데나워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귀하께서 외무장관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시라면, 그러한 조치가 귀하의 격무를 줄이고 총선에 대비하는 데에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기민당(CDU) 소속의 폰 브렌타노 박사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렌츠는 신중하게 덧붙여, 자기가 외무부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아데나워가 생각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도 외무부가 모든 면에서, “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매우 부족합니다!’ 게다가 ”외무부에서 국가와 국가정책 차원에서 믿을만한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입니다.“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이 된다면 하인리히 크로네가 당대표를 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훌륭한 원내대표, ‘간결하고 힘찬 선거 구호’, 선거 선물, 선거용 선전을 위한 추가적인 비용, ‘매우 현대적인 선전 방법을 동원한’ 정서에 호소하는 수상 선거가 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선거 결과에 관한 모든 근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선전 방법에 관하여 렌츠는 이미 이 중요한 제안서에서 1953년 실제로 엄청난 선거 승리를 가져오는 데에 도움이 된 수단들을 언급하고 있다. “영화와 음성 장치가 설치된 비행기를 동원한 광고”, 아데나워에 관한 선전 영화, 그리고 많은 영화, 뛰어난 선거 벽보 프로그램, 심금을 울리는 벽보, 그리고 어쩌면 《나의 아버지 – 로테 아데나워 지음》과 같은 소책자도 필요할 것이었다.     

렌츠는 그런 편지를 아데나워에게 보내는 것이 폭탄을 다루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근본적으로 아데나워가 이미 여기저기에서 들었을 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긴장된 시기에 외무업무를 내려놓는 것은 수상이 생각하기에 권력을 내놓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영리하고도 혜안을 지닌 렌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제안서를 마무리한 것이다. “귀하께서 제 서한을 읽으시고 나서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 자리도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그에 대하여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렌츠는 자신이 손해를 입을 것을 염두에 두어가면서까지 나랏일을 위하여 이러한 사적인 제안을 한 것은 아니다. 이 서한을 발송한 다음 날 그는 과거 베를린에서 일하던 시절의 친한 친구인 하인리히 크로네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그는 렌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원내대표로서 크로네는 정당 업무에 몰두하였고, 늘 여행을 즐기는 폰 브렌타노는 자기 직무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크로네는 그 날 기사당(CSU) 지방당의장 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 말고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렌츠는 이제 그가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폰 브렌타노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크로네는 폰 브렌타노에게 외무부에 관련된 새로운 제안을 하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비록 렌츠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1952년 8월 18일 뷔르겐슈토크에서는 인사정책과 관련하여 심각한 영향이 있었던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다. 폰 브렌타노, 크로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뷔르겐슈토크로 모였다. 아데나워와 모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르 지역 문제, 연정 정책, 오토 존이 이끌고 있는 연방 헌법수호청*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그는 자기 부서에 지나치게 많은 사민당(SPD) 인물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트라우쓰의 생각에는 오토 존이 영국 정보부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다.     

* 연방 헌법수호정 [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BfV), 역자주 - 독일 국내 정보기관으로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대한 도전과 외국 스파이 활동 방지에 관한 정보 수집 및 분석을 주요 업무로 함.]       

대담이 처음에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멋진 암석 사이에 난 길을 산책하였다. 저녁 식사에는 부인들도 초대되었다. 그래서 페르드멩게스, 렌츠, 루스트의 부인이 참석하였다. 저녁 10시가 되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데나워는 렌츠가 조목조목 따져가며 외무부에 대하여 비판한 내용을 며칠 전에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과 깊이 논의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비판은 아데나워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결국 그가 외무장관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외무부가 있는 코블렌처 슈트라쎄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마침 브뤼겐슈토크에서 며칠간 휴가를 보내던 중이던 패르드멩게스와도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페르드멩게스는 연방정부 수상실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블랑켄호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격식을 차리지 않는 오토 렌츠에 대해서는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휴가 기간 내내 루스트 국장도 같이 있었다. 그의 빈틈없는 업무방식을 아데나워는 각별히 총애했다. 루스트와 서둘러 아데나워에게 달려온 아데나워가 총애하는 글롭케 사이에는 매우 돈독한 신뢰 관계가 맺어졌다. 이 관계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루스트와 렌츠 사이에도 형성되어 있었다.     

매우 섬세하게 얽혀있는 개인적인 공감과 반감, 충성과 경쟁, 정치적 목적과 현실적인 이해가 온 사방에 퍼져 있었다! 아데나워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긴장 관계를 계속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기 구상이 수립되면 가차 없이 치고 나갔다.     

이미 그해 4월에 외무장관이 되고 싶은 의사를 구두로나 서면으로 표명하였던 폰 브렌타노는 이 자리에서 매우 신중히 처신하고 있었다. 먼저 슈트라우쓰가 이스라엘과의 화해 협약에 대한 비판으로 포문을 열었다. 쉐퍼와 기사당(CSU)의 대다수 인사들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재정적 부담이 지나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사당(CSU)은 자기 당 소속의 농업부 장관인 빌헬름 니클라스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논쟁이 이 정도에 진행된 상황에서 이미, 렌츠가 제안한 대규모 내각 개편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대신에 아데나워는 내년에 실행하게 될 방책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곧 내년에 연정 정당들의 결속력을 촉진할 과업을 담당한 특임 장관을 임명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하인리히 크로네가 본격적으로 비판을 제기하였다. 외무부와 블랑크 사무소의 인사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가 분기탱천하며 블랑켄호른의 비판을 반박하고 외무부에 그 어떤 인사이동을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인 렌츠가 소란스러운 논쟁에 뛰어들었다. 아데나워에게 이는 반대파가 형성한 연합전선에 맞서 싸우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기사당(CSU) 지방당 의장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겨우 38살로 너무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2월 7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수상의 약점을 순간적으로 물고늘어지며 한 뛰어난 연설로 여론의 극찬을 받았던 그가 이제 아데나워의 머리끝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 전선에는 크로네도 있었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로 나이도 많고 매우 원숙한 인물로 아직 60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당시에 중앙당 사무총장 대리를 역임하고 이미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지나친 공명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폰 브렌타노의 후계자로 원내대표가 되고자 한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끝으로 새련된 폰 브렌타노도 이 전선에 섰다. 그는 외무장관이 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멀리 수상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폰 브렌타노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 선두에 선 자가 바로 오토 렌츠였다, 그런데 그는 연방의회 의원도 아니고 아데나워의 지휘 아래 있는 국무차관이 아니었던가!     

아데나워와 렌츠의 관계가 소원하게 된 원인은 피어발드슈테터세 호수에서 벌어진 그날 밤의 충돌에 있다. 이에 관하여 렌츠는 그의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날 밤은 모두가 불편한 마음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다음 날 아데나워는 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것이 음모라고 한 것이다! 폰 브렌타노는 그를 수상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다!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에게 훈육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확실히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 노선이 확립될 때까지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이 되고자 하는 기도를 최대한 차단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또한 크로네도 3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11년이 흘러서야 브렌타노와 크로네가 결국 긴밀한 협력으로 수상을 바꾸는 것이 성공하게 되었다. 그것도 브렌타노가 아니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밀게 된 것이다.     

자리가 위태로웠던 모든 장관은 이러한 사달이 난 덕분에 1953년 내각 개편이 있을 때까지 직무를 계속하게 되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어떤 작은 변화로도 자기 권좌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상임위 논의에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조약 비준 논의에 대하여 더욱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연정 내부에 널리 퍼진 반발 기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각과 연정 참여 정당 안의 불만이 있는 거물들이 은밀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이 시기에 자행된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의 귀찮은 방해 공작 또한 불안을 야기하였다. 독일 연방의회가 조약 비준 논의를 막 시작하자 동독의 인민회의 대표단이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헤르만 엘러스에게 동베를린의 통일 제안서를 전달하였다. 그 대표단의 단장은 어용 기구로 전락한 동독 기민당(CDU) 당대표 오토 누쉬케였다. 동독 대표단이 서독 지역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이틀로 제한되었지만, 그 방문객들은 조약 비준을 방해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탈리아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의 국빈 방문 준비를 하고 있던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대통령 앨러스에게 긴급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대통령이 동독 방문단의 영접에 나서지 말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미 사민당(SPD)이 그 영접에 참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기에 외교 정책과 정당정책적 이익의 손실이 발생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엘러스는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영접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명시적인 결의와 더불어 다른 정당들의 동의로 확정된 사안이라고 냉정하게 반박한 것이다.     

동독의 대표단은 폴란드 국적기를 타고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본의 마크트플라츠에 있는 ‘슈테른 호텔’에 머물렀다. 아데나워는 경찰의 보호 차원에서 이 호텔이 가장 좋은 장소하고 여겼다. 독일연방 대통령은 동독 대표단을 18분 동안 영접하였다. 엘러스는 당당한 자세를 보이며 방문단에게 동독 지역의 정치적 악행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러나 언론에는 수십년 동안 기민당(CDU) 개신교 파벌에 속하는 이 원리원칙주의자 정치가가 가톨릭 신자인 수상과는 달리 최소한 동독과 대화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아데나워는 엘러스에 대하여 화가 났다. 그가 그 당시 여전히 “전선이 어느 정도 고착되는 것을 궁극적으로 막는” 노선을 택한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개적인 논쟁이 나서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였다. 아데나워 시각에서는 1952년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헤르만 엘러스가 정치적으로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나 로베르트 틸만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민당(CDU) 내부의 개신교 파벌은 여전히 동독에 대하여 완전히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동독 지역에 있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두 독일 간의 정치적 대화의 기회를 마련하라는 동독 정부의 압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베를린의 수석 사제인 그뤼버나 튜링겐의 미첸하임 주교와 독일연방공화국의 개신교 좌파도 마찬가지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킬의 보수적인 수석 사제만큼이나 모든 관계자가 상황을 날카롭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 회장 니뭴러, 모칼스키 사제, 수석 사제 그뤼버, 그 외의 인물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엘러스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공산주의가 서독으로 침투하는 문은 독일개신교협회(EKD)입니다. 그런 식으로 길을 트는 단체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952년도에 아데나워는 개신교에 충실한 유권자 대다수가 아직 자기의 정책에 관한 확신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형편없는 당 동료인 헤르만 엘러스와 정치적으로 연대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내각과 여당의 다른 모든 거물에게 편지와 대화를 통하여 서슴 없이 훈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사나워 보이는 사민당(SPD) 내부의 개신교 파벌의 지도자에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최측근의 당대표진에 포함시키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1952년 10월의 투표에서 엘러스는 307명 가운데 302명의 찬성을 얻어 베를린의 기민당(CDU) 연방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직무대행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당대표인 아데나워의 득표율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야콥 카이저는 28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오토 렌츠는 엘러스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하여 마치 기민당(CDU)이 선거에서 승리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측근 가운데 비망록을 작성한 또 다른 인물인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엘러스가 “나중에 가서 당대표나 연방정부 수상으로 다시 보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3년의 총선 결과가 사실로 드러나자 칭찬에 인색한 아데나워 수상은 선거 후에 가진 첫 당대표진 회의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친애하는 엘러스 선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분은 독일연방공화국의 개신교 유권자들에게 강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1949년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개신교 유권자를 우리 측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이네만과 니묄러와 같은 자들이 우리에 맞서서 중상모략을 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1952년 늦가을에는 아직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는 서방과의 조약이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좌초될 것처럼 보였다.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사민당(SPD)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연방헌법재판소법의 제정과 그 판사들의 선출에 관하여 확실히 커다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게 되자 그는 기민당(CDU) 중앙당 수뇌부 앞에서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자기비판을 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자신도 포함한 독일 기본법, 곧 헌법을 수립한 국부들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헌법재판관을 ‘정치적인 의회’에서 선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연방헌법재판소에 관한 법률은 ‘지나친 이상주의’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재판관의 선출을 연방의회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당과의 타협을 이끈 중진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잊지는 않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이러한 확실한 다수결로 법관을 선발하는, 국가정책 차원에서 멀리 내다보는 합의를 통한 해결이 장래에 연방헌법재판소의 높은 권위를 확보하는 데에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1952년과 1953년 조약 비준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아데나워는 국가정치적으로 현명한 절차를 전혀 밟지 못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독일 연방의회와 독일 연방참사회의 재판관 선출위원회는 연방헌법재판소를 정치가나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편향된 중앙공무원과 직업 판사들로 채웠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얼마 안 된 과거사가 있었다. 재판관으로 거론되었던 전문 재판관 가운데 대부분은 나치당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후보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위원회 노력의 결과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분명히 끔찍한 것이었다. 1952년 12월 15일 기민당(CDU) 중앙당 대표단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연방헌법재판소에 현재 23명의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9명이 사민당(SPD) 소속이고 2~3명은 기민당(CDU), 1명이 자민당(FDP) 소속입니다.”      

《라이니쉐 메르쿠어》와 《슈피겔》을 필두로 언론이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람들은 제1재판부에 대해서는 ‘적색(赤色)’(진보 세력을 의미), 제2재판부에 대해서는 ‘흑색(黑色)’(보수 세력을 의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모순적이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민당(FDP) 연방의원이었던 횝커 아쇼프가 ‘적색(赤色)’ 제1재판부 의장이 되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사민당(SPD) 소속 법무장관이었던 루돌프 카츠는 ‘흑색(黑色)’ 제2재판부의 의장이 되었다. 결국은 판결에 따라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재판관들이 복잡한 조약 관련 심리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고 판결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였다. 여기에는 조약 비준이 좌절되거나 오래 지연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민당(SPD)은 처음부터 조약 반대 투쟁에서 모든 법절차의 수단을 동원하도록 결심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미 1952년 1월 31일에 사민당(SPD)은 조약 문제를 담당한 제1재판부에, 다시 말해서 연방정부가 근심스러운 뜻에서 ‘적색’이라고 부르는 재판부에 대하여 예방적 차원의 법률심사 청원을 제기하였다. 이럴 경우에 연방헌법재판소에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이 독일 기본법에 합치하는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모든 소송 관련 당사자가 그들과 친밀한 재판관으로부터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자 연방정부 내각에서는 바로 우려가 제기되었다. 연방정부 교통부 장관인 세봄은 조약 초안에 서명하기 이전인 1952년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독일 민족의 운명에 관한 결정이 9~12명의 파당적이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1952년 6월에 이미 상황이 위급해 보였다. 여러 정황으로 살펴볼 때 제1재판부가 사민당(SPD)의 청원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 청원은 너무 성급한 것으로 기각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연방정부 대통령을 설득하여 연방헌법재판소의 법적 감정(法的 鑑定, Rechtsgutachten)을 청원하도록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이쓰와 친분이 있던 회프커 아쇼프가 고립되었다고 느끼고 있으면서 불길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던 차에 여기에 관여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중한 연방정부 대통령은 법률적 결단이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며 개인적으로도 혐오하던 것임에도 그 당시 비밀에 부쳐진 1952년 6월 6일 내각 결의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요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서 정치적인 핵심 구상은 제1재판부와 제2재판부에 관한 법적 감정을 얻어내는 것에 있었다. 이를 통하여 제1재판부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일단 차단하고자 하였다. 사실 사안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총괄 감정(總括 鑑定, Plenargutachten)에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해 내용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고, 이는 다시 전체적인 조약 비준 절차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이 감정이 대통령에게는 1952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사이에 이 조약을 연방의회와 연방참사회에 상정할 기회를 얻게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연방의회에서만이라도 비준이 이루어진다면 연방헌법재판소가 조약 초안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즉각적인, 곧 7, 10, 11월에 조약의 비준이 이루어지기를 재촉한 것도 그러한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미 독일연방정부는 그러한 법적 감정이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사민당(SPD)은 제1재판부가 자기에게 유리판 결정이 내려질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였다. 7월 30일 사민당(SPD)의 예방적 차원의 법률심사 청원을 “현재의 시점에서 승인할 수 없는 사안”으로 기각하였다. 정부 진영에서는 처음으로 느긋한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평화를 믿지 않았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아데나워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 22명의 재판관 가운데 8명 만 그 조약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11월에 들어서서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에서 점점 더 어두운 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초초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연방의회가 연방대통령을 위한 감정에 관련된 협상이 있기 이전에 조약 비준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회프커 아쇼프가 공식적으로 연방헌법재판소가 먼저 판결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그러하였다.        

1952년 12월 18일 아데나워 수상은 처음으로 연방의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연방의회 의장의 충고와 게르스텐마이어의 충고도 무시하면서 아데나워는 11월 26~28일 사이에 조약 비준을 밀어붙이고자 하였다. 아데나워의 정확한 진단으로는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연정 정부와 야당의 힘겨루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정은 결국 아데나워의 의견을 따랐지만, 이는 연방의회 전체 회의에서 표결할 때 그에게 노골적인 치명타를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 의원 가운데 17명의 결원이 있었고 자민당(FDP) 일부 의원도 아데나워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을 이룬 여당은 166표로 179표의 반대 세력보다 열세에 놓였다. 야당은 환호하였고 여당 진영에서는 무기력감이 팽배했다.     

이어진 연정 내부 회의에서는 차기 조약 비분 관련 논의를 2월 3~4일에 개최할 것이 제안되었다. 얼마 후에 상황이 변했다. 며칠 전부터 아데나워는 이른바 새로운 논거를 들고나온 것이다. 아데나워는 새로 선출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월에 포스터 덜레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덜레스는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경도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다면 전망이 매우 절망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정 정당들에 2차, 3차 초안 논의를 12월 초에 개최하고 이를 전체 회의로 넘기자고 하였다.     

본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의사진행 논의와 병행하여 칼스루에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도 혼전 중이었다. 연방헌법재판소 소장인 지치고 병들든 회프커 아쇼프는 비판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국무차관 렌츠의 잠시 받아들여 연방정부 대통령의 법적 감정에 관한 공개 논의를 연방의회의 논쟁이 종결될 때까지 미루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자마자 사민당(SPD) 소속의 부소장인 카츠가 재판소의 재판장 다수에게 안건을 12월 8일에 논의하도록 재촉하였다.     

그 사이에 내각에도 연방헌법재판소가 일치된 법적 감정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러한 정보의 원천인 회프커 아쇼프는 다수의견이 될지가 단 한 표에 달리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이 감정이 법적 구속력을 지닌 것은 아니어도 그 결과에 따라 사민당(SPD)이, 연방참사회의 조약 비준 직후에 재차 법률심사 청원을 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것도  ‘적색 재판부’(roter Senat)에 다시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아데나워가 《슈피겔》을 인용하여 12월 4일 연정 여당의 당무회의에서 거침없이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1953년 5월이나 6월에 총선이 있기 직전에 최종적인 결정이, 그것도 부정적인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제 아데나워의 법률 자문들이 탁월한 생각을 제시하였다. 연방헌법재판소에 여당이 기관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어떨까? 여기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다. 이 소송을 담당하는 것은 ‘적색’ 재판부가 아니라 ‘흑색’ 재판부가 될 것이다. 판결이 어찌 나오는 날짜는 1953년 2월이나 3월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총선 예정일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거리를 두게 된다. 소송이 일단 제기되면, 결과가 불확실한 연방정부 대통령의 법적 감정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더 좋은 것은 대통령 호이쓰가 알아서 법적 감정 청원을 철회하는 것이다.     

* 기관소송 [Organklage, 역자주 – 연방 차원의 기관들이 연방헌법재판소에 헌법 관련하여 제기하는 소송]     

기관 소송은, 사민당(SPD) 측의 비준 반대 세력이 연방의회 다수당을 상대로 의회에 상정된 조약비준법을 규정에 정한 대로 단순 과반수의 찬성으로 통과시키는 법에 반대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런데 그러한 소송은 2차 초안 검토에서 다수당의 단결을 보여준 다음 3차 초안 검토가 시작되기 전에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 3차 초안 검토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몇 달 후에 세상이 어찌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예상치 않게 3차 초안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정부에 호의적인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외국의 상황은 어떨 것인가? 프랑스가 이를 핑계로 조약 비준을 더 지연시키지 않을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삶에서 언은 교훈을 따랐다. “조약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결국 프랑스 때문에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흑인 페터’가 독일 측에서 나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 아닌가?     

* ‘흑인 페터’ [der schwarze Peter, 역자주 – 손해를 보는 자를 의미하는 독일의 유명한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이 게임의 기원은 지는 사람이 술값을 지불하는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11월 말에 바르게 진행된 회의들에서의 모든 장단점과 연관되었다. 12월 초에 아데나워는 방향을 완전히 틀기로 결심하였다. 12월 4일 목요일, 3차 초안 검토를 연기할 것이라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 떠돌고 있는 가운데, 아데나워 수상은 니더작센에서와 같은 단도직입적인 방식으로 2차 초안 검토 이후 곧바로 3차 초안 검토에 들어가지는 말도록 여당, 특히 독일당(DP)의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수상의 모든 조력자는 가자들과 외교 사절들에게 이러한 예상치 못한 지연작전에 관한 다양한 이유를 설명하느라고 진땀을 뺏다. 정치 현실을 냉정하게 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함정을 빠져나가려고 동원한 책략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여당 안의 평범한 사람들과 대중 대다수는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며 수상이 모든 술수에 능하다는 그들의 생각을 재확인하였다.     

비록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 전반이 심각한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75세의 아데나워가 여전히 풍랑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독일 연방의회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가운데 이루진 2차 초안 검토는 라디오를 통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 방송되었다. 이 검토는 12월 3일 수요일에 시작되어 토요일 오전의 표결까지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수요일 거창하게 등장하여 야당의 첫 연사인 빌리 브란트의 뒤를 이어 등단하여 잘 준비된 열정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 발언은 모든 이의 관심을 끌었고 모두가 명연설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독일이 조약과 관련하여 주인과 노예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민당(SPD)은 크렘린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도 하였다. 이에 맞서 사민당(SPD) 측은 아데나워가 ‘독일 통일을 갉아먹는 존재’라고 비난하였다.     

금요일에는 아데나워가 칼스루에에 대하여 꾸미는 수작에 대하여 의원들이 분노하는 가운데 논쟁에 다시 참여하여 매우 신선하고 힘찬 목소리, 그리고 악의적인 논쟁과 유머가 담긴 비난으로 의원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몇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하였다. 금요일 늦은 오후에 격렬한 논쟁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오토렌츠는 자기 사무실에 있는 아데나워를 찾아왔다. 렌츠는 법무장관 델러가 사민당(SPD) 의원인 멘첼을 악당이라고 부르며 자극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데나워는 그것이 별문제가 안 된다고 보고 렌츠와 약간 논쟁을 벌였다. 렌츠는 사민당(SPD)과 연정을 이루게 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오토 렌츠는 이 무렵 이미 속으로 아데나워와 거리를 둘 생각이었는데 이 기회에 수상이 스토아학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보았다. 제2재판부의 소송 절차를 염두에 두면서 아데나워는 느긋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결국 결과가 안 좋을 것이라고 해서 미리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전체 회의가 진행되었다. 또다시 상호비방이 이어졌고 시간은 어느 사이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베를린의 의원인 로베르트 틸만스와 프란츠 노이만 사이에는 멱살잡이가 일어날 뻔하였다. 틸만이 의석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사민당(SPD)의 사람들처럼 공산당과 일치를 이루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렌츠의 보고에 따르면 “아데나워 수상은 이 장면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흔히 그렇듯이 아데나워가 기분이 좋아지고 동시에 피곤해지면 냉소주의만 남게 되었다. 의원이 아닌 렌츠가 집에 가려고 새벽 1시 반에 인사를 하자 아데나워는 의회에서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적당한 독재를 도입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유감이오, 그러면 시간을 훨씬 절약할 것인데 말이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최종 표결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독일조약과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은 반대표에 비하여 각각 54표와 57표가 많은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이날 밤에 칼스루에에서의 소송도 시작되었다.     

이 소란스러운 12월에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전환이 독일 연방의회의 대규모 토론이 끝난 다음인 월요일에 이루어졌다.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그들이 내리는 판결의 객관성에 대하여 모두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연정 정부에서 기관 소송을 제기한 것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도발이라고 여겼다. 재판부의 판결은 심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있었다. 연방정부 대통령이 제기한 감정 청원을 심리한 연방헌법재판소의 두 재판부는 20대 2라는 절대 다수의 의견으로 두 재판부에서 모두 판결 절차를 진행한 다음 전체 회의에서 이를 감정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리하여 이른바 ‘적색’ 재판부와 ‘흑색’ 재판부의 인적 구성에 관한 추측이 난무하게 되었다. 소송 당사자인 야당 사민당(SPD)과 다수당인 여당의 속셈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연방헌법재판소의 전체 회의에서의 누가 다수파일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보기에 아직 운명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제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제기되었던 연방정부 대통령의 감정 청원은 이제 원래 청원자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것이 되어버렸다.     

12월 9일 열린 연방정부 국무회의의 반응은 당연히 격렬한 것이었다. 11시에 열린 오전 회의에서 할슈타인은 전화로 칼스루에의 결정 사항을 통보해왔다. 국무회의에서 격렬한 분노가 일었다. 아데나워는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법률 위반입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법률과 헌법을 거슬러”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1932년 7월 프로이센 침공 이후 라이프치히의 국가재판소*에서 벌어진 유명한 제국/프로이센 소송을 언급하였다. 또한 그 당시 제국재판소 소장 에르빈 붐케의 역할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발터 시몬스와 이에 관하여 논의했던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위헌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제 본의 국무회의에 바이마르의 유령이 다시 출현하게 되었다.     

* 국가재판소 [Staatsgerichtshof, 역자주 – 제국 시대의 연방헌법재판소]     

다음으로 책임을 질 사람은 연방정부 대통령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연방정부 대통령은 감정 청원을 철회해야만 했었다. 아데나워는 12월 9일 첫 국무회의를 마치자마자 독일연방정부의 소송위임을 담당한 발터 할슈타인 치관과 발터 슈트라우쓰 차관이 칼스루에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곧바로 호이쓰에게 달려 갔다. 아데나워에 앞서 대통령에게 달려가 ‘마음을 굳게 먹고 계십시오.’라고 충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연방정부 대통령실의 차관인 만프레드 클라이버에게 아데나워는 자신과 함께 차에 탈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아데나워가 방에 들어설 때도 연방정부 대통령은 자신이 제일 먼저 관련되는 칼스루에의 판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듣지 못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에게 결과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내각의 의사도 전달하였다. 그러면서 할슈타인과 슈트라우쓰의 보고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호이쓰 대통령이 이 첫 대담에서 자기 청원을 철회할 것인지를 전달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이날 밤에 있던 내각 논의에 관한 세봄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유일한 서면으로 남아 있는 문서에는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방정부 대통령은 할슈타인과 슈트라우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각의 관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각은 결국 만장일치로,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법적인 근거가 확실히 미약”하고 연방정부 대통령이 원하던 “감정 관련 의사 표명의 성격과 범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호이쓰 대통령에게 감정 청원을 철회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는지는 국무회의록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각은 대통령의 감정 청원을 철회하여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의하였다.” 호이쓰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사실 알 수 없었다. 할슈타인과 슈트라우쓰 차관을 대동한 아데나워, 블뤼허, 레어, 델러, 슈토르히는 호이쓰 대통령에게 연방정부의 입장을 조속히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장관들은 차례로 내각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아데나워가 마지막으로 의견을 전달하였다. 그러고 나자 호이쓰 대통령이 감정 청원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데나워는 매우 만족해하며 대담을 마치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호이쓰 대통령]은 오늘 정말 아주 편하게 주무실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이제 연방헌법재판소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조약 비준 절차를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사려 깊은 인내와 현명한 절제를 다시 발휘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내각의 도움으로 연방정부 대통령의 결단에 영향을 얼마나 강하게 미친 것인가는 매우 소란스러운 그 시기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말하자면 강력한 수상과 매우 존경받는 연방정부 대통령 사이의 좋기는 하지만, 당연한 미묘한 관계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 대통령은 그의 후임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전체 독일의 대표가 되고자 하다 보니 때로 자기 뜻을 분명히 표명하고 싶은 마음을 힘들여 감추게 된 것일 뿐이었다. 이는 그가 잠시 당대표를 맡았던 자민당(FDP) 내부의 계파 투쟁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서방과의 유대, 유럽 방어 분담, 독일 통일 정책에 관한 논쟁과도 관련되었다. 여기에서 연방정부는 그에게 공적 정책 노선을 따르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압력을 가할 필요가 전혀 필요 없었다. 호이쓰 대통령 자신이 이러한 것들의 기본적인 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보호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고 여기에는 연방정부 내각이 최대한 앞에 나서게 하려는 전략이 들어 있었다. 바로 감정 청원을 둘러싸고 진행된 일이 이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체면을 차리고 수상과 연방정부 대통령 사이의 완전히 자의적인 협력이 세상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호이쓰는 이번에 아데나워가 전체적으로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어느 모로 자기를 강요하는 모양새를 피하게 된 것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다만 호이쓰는 다혈질인 토마스 델러가 12월 9일 밤에 가진 대화에서 호이쓰의 취임 선서를 언급한 것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의 미디어가 벌인 소동은 엄청난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자기 주변의 몇몇 언론인들에게 ‘국가 위기’와 같은 무시무시한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칼스루에에 있는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입법자가 의회인지 아니면 연방헌법재판소인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결에 관한 찬반 투표수는 판결에 관한 제 생각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이가 그 결정에 동의한다고 하여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판결은 기본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20명이나 22명, 또는 12명이 찬성한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고심에 잠기게 되었다. 애초에 연방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려는 생각은 재판관의 인적 구성을 새롭게 하려던 생각과 마찬가지로 포기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그 무렵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반발이 상당한 상황이, 특히 연방 법무부 장관인 델러가 연방헌법재판소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이 내심 싫지 않았다. 델러는 남부 독일의 법률계에서 나온 비판적인 목소리에 대하여 전보로 보낸 답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방헌법재판소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법의 길을 벗어나 심각한 위기를 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짧은 시간 안에 독일연방공화국의 모든 헌법기관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인사들 가운데 아데나워가 확실히 가장 생각이 없는 인물로 여겨졌다. 비록 그가 모든 잘못을 사민당(SPD)과 연방헌법재판소에 떠넘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사실 그는 걱정이 없었다. 위기가 절정에 이를 무렵에 그는 글롭케에 관한 확신을 느꼈다. “글롭케는 조약의 비준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그러지 않으면 독일에 재앙이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데나워에게 법치국가의 제도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가? 그가 자신만을 외교 정책의 수장이라고 여겼는가? 아니다. 그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이러한 인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연방헌법재판소가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비판 자체도, 매우 세심한 법에 관한 그 생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12월 10일 기자들을 초대하여 나눈 차담에서 확인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당시 정부 여당이 한목소리로 연방헌법재판소를 비판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자민당(FDP)소속 법무부 장관인 토마스 델러가 그 가운데 가장 앞장을 선 인물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법률가도 매우 정제된 평가를 내렸다. 그는 1952년 11월 중순에 친밀한 당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연방헌법재판소라는 것은 의회가 만들어준 ‘단순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데나워의 거리낌 없는 단호함은 눈에 뜨이는 것이었다.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당시에 사람들은 이 위대한 인물에게서 거의 순진할 정도의 자신감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인물로 여겼고 국가의 안녕이 그가 올바르다고 인식한 것과 같다고 여겼다. 지식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자유주의 좌파 언론들은 우려를 표명하였고 야당은 거의 권위주의적인 수상 독재가 수립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여당 안의 많은 동료도 아데나워의 고집에 대하여 어느 모로 우려하였다.     

놀랍게도 상당수의 유권자는 이러한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부에 관한 지지도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아데나워 개인의 인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11월부터 이러한 추세는 다시 반전되었다. 정부에 관한 지지율이 1952년에는 34%였으나 1953년 1월에는 37%, 2월에는 39%에 이르게 되었다. 1953년 9월에는 57%까지 올랐다. 이와 더불어 1952년 말부터 유보적인 의견을 지녔거나 부동층에 속하는 이들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52년 11월 37%에서 1953년 1월 36%를 거쳐 3월에는 34%로 줄어들었다. 1953년 9월에는 그 비율이 28%로 낮아졌다.     

아데나워가 오토 렌츠의 소개로 <엘리사베트 노엘레-노이만과 파울 노이만 여론조사 연구소>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부터 여론조사에 늘 중독에 가까운 관심을 가졌다. 그 어려운 시기에 있었던 자기 정책에 관한 여론의 반응을 보면서 그의 생각에 늘 한 가지 결론에만 이를 수 있을 뿐이었다. 곧 엄청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단호한 지도력만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결정적인 해’인 1953년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시작    

 

 1953년 3월 9일 미국의 신임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가 국제연합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모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젠하워 시대가 열리고 스탈린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 스탈린이 죽은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우리의 위대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그는 유럽을 해방시키고 비할 바 없는 탁월한 기품을 지닌 분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1953년은 실제로 두 시대의 분수령으로 보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어도 동유럽 블록에 관한 억압은 지속되었다. 동독에서 많은 사람의 삶은 그 이후에도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소비에트 체제는 내부적으로 처음으로 틈이 생겼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동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전례가 없었던 소련의 세계적인 세력 확장 정책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스탈린 시대라는 질곡의 시기와는 달리 이제 다시 희망이, 최소한 변화가 있었다. 국제 관계의 역사에서도 195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소련에서 무시무시한 스탈린 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미국에서 아이젠하워의 시대가 열렸다. 곧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풍요의 시대, 미국 주도권의 시기, 동서 긴장이 지속되었지만 마침내 커다란 전쟁이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신문발행인이었던 헨리 루스가 병적일 만큼 들떠서 선포했던 ‘미국의 세기’가 현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는 서유럽에서도 현실화하였다. 서유럽의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 안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에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경제 성장을 체험하면서 1914년부터 1950년까지 이어졌던 파국적인 역사의 주기가 마침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새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식민지 전쟁이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졌고, 북아프리카의 소요,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의회 제도로 프랑스는 어려움에 놓였던 것이다! 1952년 12월 23일 앙투안 피네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는, 잔인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시민계급의 마지막 실험’이었던 인물이다. 그와 더불어 로베르 쉬망도 외무부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정책에서 간판이 되는 인물이 일단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취약한 내각이 계속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잠깐이지만 매우 자신감이 넘치고 성공적이었던 피에르 멘데스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1951년에 프랑스가 점차 ‘유럽의 병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인생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비효율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지나치게 확장된 오스만 제국을 ‘보스포러스의 병자’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프랑스 제4공화국에 대하여 이러한 전혀 재미없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기민당(CDU) 사람들끼리만 있을 때는 아데나워가 ‘어느 모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프랑스인들’이라는 말을 경멸조로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연방공화국에는 1953년이 시대의 과도기였다. 사람들은 이미 이 당시에도 이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간 지속되었던 궁핍한 시기가 지나갔다. 대부분의 독일인에게 그러하였다. 통계자료를 보면 첫 재건 시기의 어려움과 불안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정이 넉넉한 시민들은 벌써 해외여행에 나섰다. 약 50만 명의 독일인이 1953년 상반기에만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찾았다. 이는 앞으로 늘어날 독일 여행객들의 전조였다.     

상황이 변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법률의 제정이었다. 1952년에는 재건법이 거의 마무리 되었다. 부채상환법이 1952년 5월에 통과되었다. 이는 대서방조약의 조인이 이루어질 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1953년 독일에서 국내 정치적으로 한 가지 안건이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바로 커피세의 감세를 다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선심 공약을 둘러싼 논쟁은 독일이 벌써 복지사회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피와 땀과 눈물’이 주제가 되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가 1953년부터 공개적인 발언이나 내부적인 발언에서 늘 되풀이하여 자주 경고 메시지를 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제 다시 확보하게 된 안정에 취하여 세계적 상황이 전반적으로 불안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통계를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여러 분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이미 다시 유럽의 강력한 수출 강국이 되어 있었다. 외신 기자들보다 더 잘 이러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이들은 없었다. 이들은 1953년 독일 총서 취재를 위하여 독일로 날아와서 새로운 독일에 관한 소식을 세계에 전하였다. 그래서 1953년 8월 31일 《타임》지에는 독일 총선에 관한 표지 기사가 실렸다. 내부 기사에는 흑적황 색깔의 바탕에 검은 제국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을 배경으로 찍은 아데나워의 당당한 천연색 사진이 실렸다. 이 잡지 기사의 주요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의 서부 지역은 1945년의 ‘신들의 황혼’이 있은 지 8년이 지난 현재 유럽 대륙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을 보장하는 이가 바로 아데나워였다.     

이는 확실히 총선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를 위하여 오토 렌츠, 펠릭스 폰 에카르트와 그 동료들이 힘을 합쳐 지략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현실과 정서의 조화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이 여전히 취약했던 1950년과 1951년 또는 1952년 초반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개선된 경제 지표와 낙관적인 정서, 이에 대하여 한마디로 이제 급속하게 퍼진 ‘경제 기적’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제 이런 분위기에 관한 확신한 감을 가지고 1953년 전반기에 그의 생각이 유럽의 국가체계와 세계적으로 작용하는 전체적인 흐름과 일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불확실하였다.     

스탈린 사망 이후에 소련의 지도층이 ‘내부적인 분열’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3년 3월 11일 기민당(CDU) 대표단에 이제 ‘불안’과 더불어 ‘어느 정도 안정과 안도’의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의 모든 희망과 구원은 미국 정치가 지속으로 일정한 노선을 유지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사고를 저지르면 미국의 힘에 밀리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스탈린 이후의 소련 외교 정책을 경험하고 나서 동서 갈등이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증대될 것이고 전략무기 분야에서도 강화될 것임을 예상하게 되었다. 소련은 세계적인 확장 정책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주로 유럽 이외 지역의 분쟁에서 연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랑스나 영국은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유럽, 아프리카, 중동과 같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영향을 미치는 지역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모든 정성을 미국에 기울였다. 함부르크의 기민당(CDU) 소속 정치가인 에릭 블루멘펠트는 아데나워에게 서한을 보내 1953년 총선에서 미국과의 선린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충고에 대하여 답신을 보내며 물론 그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진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저는 다른 한편으로 귀하께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곧 미국이 현재에는 우리의 유일한 친구이고, 영국과 프랑스의 눈치를 보느라고 이 우리의 친구, 국제 정치의 결정권을 지닌 이 나라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아데나워가 1953년에만 이러한 노선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1950년대 말까지 이러한 생각을 어느 모로 지속하고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로베르 쉬망이 프랑스 외무장관이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위하여 노력하고 외교 정책에서 영국과 이탈리아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1956년 중반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다시금 노력을 강화하는 경향을 분명히 보였다. 그는 중기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유럽에 관한 안전 보장이 약화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수에즈 운하 위기 때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정책이 아데나워에게 정치 노선을 수정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데나워의 일방적인 유럽 외교 정책이 불가능해졌다. 프랑스 제4공화국의 내각, 그리고 대통령이 된 지 얼마 안 된 드골도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매우 취약하고 그 노선이 확실치 않았다. 영국은 여전히 세계 강국의 역할을 맡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제 영국은 그럴만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약한 이탈리아 정치는 강력한 공산당, 개발이 안 된 남부 이탈리아, 매우 복잡한 다당제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였다.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유럽의 단합도 이루어낼 수 없었다. 이를 유럽방위공동체(EDC)와 이에 관한 대안에 관한 문제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1953년 한 해가 흘러갈수록 아데나워는 독일을 점령했던 승전국들이 1949~1951년과 같이 독일을 통제하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대서방조약이 비준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독일연방공화국에 군사적 공백이 존속된다면 독일의 안보가 확실히 보장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5년 독일이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의 자기 최우선 과제가 독일의 부흥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조약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1951년과 1952년에 협상한 계약이 이미 제출되었기에 1954년 8월 좌절된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좌절되는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그가 할 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비준을 위하여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를 포함한 모든 관계자는 먼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 집중하였다. 이 조약이 그 당시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독일의 참여가 프랑스가 동의할 만한 수준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조약 초안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부족한 것이었다. 1953년 초부터 1954년 여름까지 1년 반의 기간에 아데나워는 오로지 정치적으로 잘못 구상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초안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파트너로서 협력하는 틀을 마련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놀랍게도 1952년 말에도 여전히 거의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던 독일연방공화국 내부에서의 비준 문제가 비교적 잘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파리의 반대는 점차로 극복할 수 없어 보일 정도가 되었다. 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체결 의사를 이제 노골적으로 자르 지역 문제와 연계시키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1953년 초에 가장 긴급해 보이는 문제는 1월 20일 공식 취임한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새 정부와의 신뢰 관계를 신속하게 회복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와 1951년 2월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이젠하워는 유럽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총사령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데나워와의 만남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보고서를 보면 자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독일이 유럽 방위에 참여하면 독일연방공화국의 지위도 바뀌어야 한다는 아데나워의 언급이 분명히 그를 짜증 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유럽 십자군’의 전임 총사령관은 아데나워가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여 년 후에 회고록을 작성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다. 쾰른의 올곧은 시장은 ‘나치 앞에서 등을 굽히는 것’을 거부하였고 과거의 민족주의 대신에 바람직한 유럽 정신을 심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아데나워에 관한 생각은 아이젠하워의 근본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아이젠하워의 이러한 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전후 몇 년 동안의 독일에 관한 적개심에서 시작하여 서방 민족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새로운 구성원인 독일에 관한 신중한 공감대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한 국가의 정부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대국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뛸 듯이 기뻐하였다. 1952년 전반기만 해도 아데나워는 미래에 관한 매우 커다란 두려움이 있었다. 여전히 일부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미국의 공화당이 20년 만에 대통령을 당선시킬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신고립주의자인 태프트를 물리치자 아데나워는 크게 안도하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서유럽이 1944~1945년에 유럽을 해방하고 그때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보다 더 바람직한 미국 대통령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미국의 대선이 끝난 다음에도 아이젠하워가 미국 상원에 있는 신고립주의자들을 물리치려면 적어도 6개월은 걸릴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아데나워가 소련의 붉은 군대와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은 제5열에 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우려한 것이 바로 미국에서 고립주의가 현실화하는 일이었다.     

맥클로이가 미국의 국무장관이 될 뻔하였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인물이었다. 아이젠하워도 그를 기꺼이 임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후에서 자문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루시우스 클레이는 맥클로이를 임명할 경우 신고립주의자인 태프트 상원의원이 공격하고 나설 것이라고 아이젠하워를 설득하였다. 그래서 결국 국무장관 자리는 덜레스에게 넘어갔다. 덜레스는 맥클로이가 차관으로 임명되도록 나름대로 힘을 썼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아데나워에게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처음에 아데나워는 그에 대하여 완전히 오판하였다. 1952~1953년에 여러 차례 아데나워는 덜레스가 “아시아에 경도된 인물” 같다고 말했다. 아데나워가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덜레스가 1951년 일본과의 평화조약을 협상한 사실에 기인한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아시아에 더 강력하게 간섭하게 될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우려는 나중에도 되풀이하여 제기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때 그러한 우려가 마지막으로 표명되었다. 아데나워는 미국이 소련과 밀약을 통하여 한국, 인도차이나, 대만, 그리고 끝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주 근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밀약이 독일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아데나워는 덜레스의 ‘퓨리터니즘’에 대해서도 우려하였다. 프랑스의 신임 외무장관 비도가 전한 바에 따르면 덜레스는 매우 전투적인 개신교 신자로 서유럽의 일부 국가의 가톨릭적 성향에 대하여 편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얼마 안 가서 깨닫게 된 바대로 그러한 생각은 전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덜레스가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고 193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세계 개신교 단체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많은 저서, 논문, 기조연설을 보면 그가 국무장관이 되기 이전에 이미 미국의 외교 정책의 매우 본질적인 깊은 흐름을 체현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퓨리터니즘에 기초한 도덕주의가 있었고 게다가 전 세계를 최대한 미국적 가치관의 기본원칙에 따라 정리하려는 마음이 확고하였다.     

이는 사실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적 세계관과도 일치하는 확신이었다. 1950년대 초반에 아데나워와 덜레스 가운데 많은 기조연설과 기자회견을 통하여 자기 세계관의 강조점을 더 많이 제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덜레스의 전투적 개신교 정신이, 아데나워가 독일 정신사에서 잘 알고 있던 불길한 반가톨릭적 요소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결국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들어났다. 독일연방정부 대통령 호이쓰는 덜레스와의 첫 만남 이후 “그는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역설적으로 말하였다. “그가 좀 더 강경한 퓨리터니즘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기분 좋은 실망을 느꼈습니다.”      

또한 덜레스가 아시아에만 관심을 주고 있는 사람이라는 우려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곧바로 드러났다. 사실 미국식 세계 경제를 전체 세계 차원에서 엮어내는 데에 이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출신 인물만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덜레스는 1914년 이전과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카리브 지역, 중미, 남미 전문가로 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주로 유럽에 집중하였다. 물론 그가 청년 시절부터 태평양 지역에 관한 지리전략적 이익에 정통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속한 명문 가문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덜레스의 조부 존 워트슨 포스터는 공화당 해리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1893년 하와이의 병합을 추진하여 미국이 마침내 태평양의 강대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1951년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끌어내는 데에 주도적인 활약을 한 인물이다. 아데나워는 이 조약을 독일연방정부에서 성공적으로 모방하고자 노력했었다. 그러나 덜레스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그의 주된 사업적, 그리고 정치적 관심의 대상은 유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륙의 유럽이었다. 1904년 막 약혼한 아데나워가 처음으로 남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 당시 14살이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거의 1년 동안 유럽에 머물렀다.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산책하고, 이탈리아와 영국에 머물렀고,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자전거 여행도 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 후에 1908년부터 1909년의 2년 동안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금요일 오후 5시가 되면 프랑스대학 강의실에서 당시 유명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도 들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도 장기간 머물렀다. 그래서 덜레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뉴욕의 유명한 사교클럽인 <설리번&크롬웰>에 가입하여 그의 탁월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나라들의 법체계와 정서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존 포스터 덜레스는 워싱턴의 관계에서 일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파리평화회담의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독일의 전쟁 보상 문제 협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 젊은 경제변호사가 커다란 외교 협상장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미국 국무장관인 로버트 랜싱의 조카였던 것이다.     

독일과 관련하여 덜레스는 1919년 파리에서 미국 대표단 전체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 자신도 독일 민족이 될 수 있는 한 빨리 다시 세계 경제의 안정된 생산과 소비 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료한 지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당시 31살이던 덜레스가 1919년 그 당시 외교 정책이라는 미로에서 그 당시 그와 마찬가지로 젊은 쾰른 시장이었던 아데나워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더 잘해 나가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아데나워는 패전국 국민의 처지에 있었기에 대단한 외교의 첫발을 내디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부터 덜레스는 20여 년 동안 주로 중부 유럽과 중동부 유럽에서 활동하게 된다. 곧 그는 <설리번&크롬웰>에 속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월스트리트의 주류에 합류하게 된다. 월스트리트는 그 당시 1929년까지 수십억 달러가 유럽에 투자했고 1930년대에는 이 투자액을 회수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그는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폴란드를 여러 차례 방문하게 되었다. 폴란드에서 그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장 모네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사실 그는 이미 1919년 모네와 인사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덜레스가 독일에 대하여 선입견 없는 좋은 인식을 지니고 자기 업무를 시작한 것은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 대하여 선입견만 없었을 뿐이었다. 그가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가운데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독일보다는 프랑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시기에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이 인물은 어느 사이에 전투적 개신교주의 세계 단체와 외교 정치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뉴욕의 공화당에서 국제주의파벌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 파벌은 토마스 듀이를 내세워 1944년과 1948년 두 차례 대통령직을 노렸지만 실패한 바가 있었다.     

덜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최된 주요 회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국제연합 설립 회의와 독일의 4강 통치가 궁극적으로 종말을 맞이한 모스크바회담에 참여하였다. 1947년 그 당시에 듀이가 나중에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외무를 담당하게 될 예정이었던 덜레스는 여러 기조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했다. 곧 서유럽의 경제를 상호의존적 체계로 여겨야 하며 루르 지역 문제 해결 없이는 경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덜레스는 독일 경제력을 강제적으로 억압 하는 것은 결코 누구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경험을 통하여 그는 독일에 아무런 통제를 가하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독일 경제의 부흥에는 동의하지만 루르 지역은 국제화되고 서유럽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얼마 후에 장 모네가 쉬망 플랜에 담게 된 몇 가지 기본적인 구상을 여기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덜레스는 미국인들 가운데 유럽의 경제 재건과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오로지 모든 분야와 관련된 것이 통합될 때만 가능하다고 여기는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광업, 무역, 통화정책, 유럽 군사적 방위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통합체계에 서독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더욱 분명해 보였다.       

그가 유럽에서의 미국이 어떠한 장기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외부적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생각으로는 덜레스가 속으로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수립 이후 독일의 역할 강화를 통하여 미군의 유럽 대륙 주둔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경제 정책적 확신은, 미국 경제 체제의 붕괴를 예상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같은 구공화당 인사들만큼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국가 재정지출과 국가 채무를 과감하게 삭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방비 지출은 크게 줄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덜레스는 비용 문제로 기꺼이 미국 이외 지역의 자체 방어를 위한 안보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세력이 미국 정계에 얼마나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체계에서는 유럽의 자국 방위력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독일군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덜레스는 서독의 변화를 매우 회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독일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오로지 독일이 서유럽에 완전히 통합된 다음에야 용납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그는 아데나워의 판단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독일의 이익에 관한 자기만의 분석을 한 것이지만 크게 보아 덜레스가 옳게 여긴 것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원래 프랑스를 좋아하는 인사였던 덜레스는 그 당시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늘 취약하고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 해결을 지연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덜레스가 영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별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미국 정계의 주도 세력에 속하는 주요 인물들과 차이가 났다. 이 주도 세력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미국과 긴밀하게 연결된 영국의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만해도 미국이라는 경험이 부족한 세계강대국이 영국의 세심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영국의 맥밀런 수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미국인들은 오늘날 세계의 로마제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국은 고대 그리스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제국을 통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덜레스는 자기 경험을 통하여 유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정신적 도움에 사의를 표하며 사양했던 것이다.     

덜레스가 영국에 대하여 차가운 태도를 보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생각에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정부 수반의 자리에 있기에는 이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늙었다. 나중에 1955년 수상이 된 영국의 외무장관 이든에게 그는 일본 평화협정에 관한 협상을 한 이후로 깊은 거부감을 보였고 게다가 이든의 비청교도적인 생활방식에 대하여 좋지 않게 여긴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덜레스가 자기 유럽정치에 관한 구상을 관철하고자 할 때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연방공화국의 지지가 필요하였다. 늦어도 1953년까지는 이 독일연방공화국이 앞으로 얼마 동안은 그 나라의 수상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 수상은 자기 나라의 복잡한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유럽 차원에서는 덜레스가 미국의 시각에서 매우 긴급한 것으로 여기는 바로 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덜레스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유럽 정책을 아데나워에게 집중하여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주도권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자기 바람을 이야기하면 그의 뜻을 따를 준비가 미국 측은 상당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미국의 일부 계획을 반대하면 이는 사실 거부권이나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화합은 분명히 아데나워와 덜레스라는 두 인물에게는 서로 닮은 모습이 있는 상황의 탓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능력 있고 가능성의 틀에서 보아도 신뢰할 만한 독일인상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소질은 덜레스가 거의 20년 동안 은행가, 동료 변호사, 제국 관료들을 상대하면서 형성한 것이기도 하였다. 제3제국에서도 덜레스는 베를린에 오게 되는 경우에는 천박한 나치들은 잘 상대하지 않고 샤흐트와 그의 동료와 같은 차원의 철저한 경제전문가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그는 예를 들어 이든에게서 느낀 것과 같은 분노와 부정적인 기억이 없었다. 프랑소와-퐁세나 조르쥬 비도와 같은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은 그저 인정할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아데나워는 새로운 독일과 더불어 나치 이전의 구독일을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두 독일을 모두 존중할 줄 알았다.     

아데나워 또한 존 포스터 덜레스를 괜찮은 인물로 여겼다. 비록 그가 아데나워 자신과 같은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경제계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들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쾰른 시절부터 일종의 경탄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탁월한 법률가들을 그와 마찬가지로 존경하였다. 그에 속하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던 할슈타인은 자신이 자세히 연구한 인물인 덜레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덜레스)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인물 가운데 법률문서 작성에서 가장 탁월합니다.”      

아데나워 수상은 덜레스와의 첫 만남에서 약간 부담을 느꼈다. 아데나워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덜레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다정하지만 원가 주저하며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곧 신뢰하게 되었고 자기 《회고록》에서 그를 보기 드물게 칭찬하였다. “매우 예절 바른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서로 서신 왕래를 시작하였고, 어느 사이에 ‘친애하는 친구에게’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때 덜레스보다는 아데나워가 좀 더 친밀함을 나타내었다.     

분명히 종교적인 근본적 믿음에서 일치를 이룬 것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것 또한 분명히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15차례의 만남을 통하여 형성된 이러한 신뢰 관계의 심리적 의미를 결코 과대평가할 것은 없다. 아데나워는 서독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20세기 후반의 서방 사회에서는 ‘신참’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 모네, 존 포스터 덜레스, 맥클로이, 이들은 모두 서방의 지도층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관해 아데나워는 처음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아데나워가 국제 금융계와 국제적인 콘체른 분야와 그나마 맺고 있던 약간의 접촉은 하이네만을 통한 것이었다. 하이네만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아데나워에게 자기가 속한 세계에 관한 배경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느 모로는 이러한 국제 금융계와 거리를 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아메리카 바메르크와 아메리카 글란츠슈토프의 주식에 투자해 본 단 한 번의 국제적인 돈놀이, 투기가 엄청난 재난으로 끝났던 것이다. 이러한 분야는 그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었다.     

덜레스, 모네, 맥클로이와 만나면서 아데나워는, 이전에는 접근 불가능했던 미국과 프랑스의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가장 내밀한 집단의 정상에 있는 인물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데나워를 신뢰하고 자신들과 동급의 인물로 여겼다. 그리고 아데나워를 그리고 그의 조국을 서방 클럽의 당당한 회원으로 만들었다.     

아데나워는 사실 아주 약간 나타나는 불안감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아데나워에게 열등감이라는 것은 사실 원래 낯선 것이었거나 이를 최대한 잘 감출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제 드디어 자기가 출세했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와의 ‘우정’에는 분명히 독일 국내 정치적 대가가 따랐다. 덜레스는 1950년대에 온건 좌파와 급진 좌파의 표적이 되었다. 그가 미국의 두 가지 중요한 외교 정책의 흐름을 체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덜레스는 자만에 가까운 기독교-보수주의적 도덕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이 좌파를 특히 괴롭힌 이유는 그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도덕을 설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덜레스는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의 거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를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 자본주의에는 세계화된 경제적 이익, 지리 전략, 그리고 기독교-도덕주의적인 외교 정책이 혼재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는 기독교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의 이러한 흥미로운 결합이 이 미국 국무장관의 성격에 고유한 도발적인 요소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그렇다고 해서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런데 독일의 국내정치적 반대자들이 아데나워를 상대로 보인 거부감은 존 포스터 덜레스에 관한 적대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1950년대 말이 되어 미국 안에서의 덜레스의 권력이 시들해지자 잠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아데나워는 이러한 덜레스와의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아데나워가 존 포스터 덜레스와 간접적으로 접촉을 시작할 때는 주저하는 바가 있었다. 1952년 당시 국내 정치적으로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던 아데나워 수상은 조약 비준 절차가 모두 정체되는 위험을 새로운 독일·프랑스 협상을 통하여 극복해보기 위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해보았다. 조약 비준에 목소리를 내줄 필요가 있는 파리의 온건한 드골주의자들은 그 당시 반공주의와 프랑스 국군에 관한 애정을 놓고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드골주의자였던 비로테 장군은 나중에 대사로 발령받은 존넨홀과 그 당시 독일 외무담당 부서(외무부의 전신) 대변인이었던 귄터 딜을 통하여 1952년 성탄절 이전에 상리스 근처의 한 성에서 아데나워 연방정부 수상과 프랑스 피네이 총리의 비밀 만남이 주선되었다. 피네이 수상이 비로테 장군과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를 통하여 요구한, 조약 비준에 대한 대가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초국가적인 요소의 발효를 5년간 유예하는 부가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는 필요한 경우에 프랑스군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할 권한도 확보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완전한 실용주의적 구상이 구체화 되자 그는 이 해결책을 모색해보기로 곧바로 결심하게 되었다. 초대에 관련된 세부 사항에 관한 의견 조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미국 위원인 레버에게 대리인을 보내어 당시에 아직은 현직에 있던 애치슨 국무장관이 독일을 조만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에 가입시킬 것임을 내부적으로라도 통보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수립 계획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해결책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런데 바트 고데스베르크에 대기시킨 특별열차는 할슈타인과 블랑텐호른의 요청으로 취소되었다. 피네이가 이 협상을 외무장관인 로베르 쉬망의 뒤에서 추진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가 블랑켄호른에게 말한 대로 로베르 쉬망을 ‘여전히 미워하는’ 프랑소와-퐁세는 피네이 내각이 붕괴되기 전에 아데나워 수상에게 그리고 쉬망에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우리 프랑스에서는 정권이 너무 짧게 유지되고 귀하의 독일에서는 너무 오래 유지 됩니다.” 아데나워는 특히 여기에 이어진 충고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곧 프랑소와-퐁세는 아데나워가 사민당(SPD)과 대연정을 이루면 모든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프랑스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약 비준을 끌어낼 것을 얼마나 강력하게 결심했는지는 1953년 1월 초에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철저히 유럽 친화적인 프랑스의 새 총리인 르네 마이어는 이제 드골주의 반대파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추가 협정안에 관한 공식적인 협상을 요청하고 나섰다. 여기에서 그는 조약 비준과 자를란트의 유럽화를 연계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그다음 날 바이에른 방송에서 자신이 조약 초안의 ‘유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서 ‘추가 협정안’의 형태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포괄적인 양보를 언급하면서 프랑스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칠 영국 총리도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위위원회의 미국 측 위원인 사무엘 레버는 뉴욕의 은행가인 베른하르트 바룩의 집에서 열린 처칠, 아이젠하워, 덜레스가 참가한 회담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아데나워에게 전했다. 여기에서 처칠이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대안으로 영국, 미국, 독일, 그리고 프랑코가 통치하는 스페인의 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관한 레버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곧 “이 위대한 노인께서 다시 위스키를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먼 조상인 말보로 시대로 시간이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워싱턴의 새로운 권력자들은 아데나워와 다른 유럽인들에게 유럽방위공동체(EDC)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는 사실을 매우 노골적으로 밝혔다. 그러한 대안은 또 다른 예측할 수 없는 지연만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새 행정부가 아직 들어서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적인 통로가 필요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그의 최근의 발언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실망을 확실하게 전해줄 것을 존 맥클로이에게 당부하였다. 그는 지시받은 대로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맥클로이를 통하여 자신이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충실하겠다는 뜻을 아이젠하워에게 전달하였다. 독일 연방의회 다수당과 그 자신이 직접 그 조약을 ‘확실히’ 지킬 것임을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럽연맹도 지속적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맥클로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과 나를 확실히 믿어도 좋다는 뜻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에게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덜레스가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데나워는 새로 지은 본의 프레스센터에서 재빨리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며칠 전에 그가 바이에른방송에서 했던 말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곧 그는 자기 메시지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대안에 관한 그 어떤 논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대안 계획이 존재한다는 그 어떤 암시도 유럽 국가들의 정부에 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이 교훈은 유럽방위공동체(EDC) 계획이 1954년 8월 좌절되기까지 대체로 지켜졌다. 곧 추가 조약에 관한 그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언급을 삼갈 것, 그리고 내부적인 대안 계획도, 특히 외부에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본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사민당(SPD)의 주요 인사들을 무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 그들은 덜레스에게 유럽 안보 체계에 관한 그들의 막연한 구상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들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45분 정도였다. 그것도 그 절반은 통역에 사용되었다. 사민당(SPD) 인사들은 미국에는 현재의 조약 이외에 그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경청해야 했다. 그리고 사민당(SPD) 인사들이 마치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방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기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을 미국 측 인사들은 잊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미국의 노선이었다. 곧 아이젠하워가 이전 정부에서 물려받은 조약에 관한 그 어떤 대안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야당은 아데나워가 1954년 8월까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그 어떤 대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미국의 새 행정부와 관련된 이전의 경험에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당시 그가 따른 노선은 순진한 통합-이상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지도력을 무조건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덜레스가 파리에 대해 행사하는 엄청난 압력을 관철하지 못한다면 대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먼저 자기의 책임이 될 노릇이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 문제, 라인홀트 마이어와의 갈등, 연정 내부의 일부 파벌과의 갈등으로 매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데나워에게 미국이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에 관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는 뉴스는 그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조약에 관한 모든 반대가 외교적 참사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와 덜레스의 첫 대담은 이러한 논조에 맞추어져 있었다. 덜레스는 이 대담을 위하여 반나절의 시간을 할애할 정도였다. 주변 상황에 대하여 약간 실망했지만, 아데나워는 과시적인 낙관주의를 들고 나왔다. 곧 조약이 별 지연 없이 조속히 독일 연방의회의 허들을 넘게 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조만간에 제2차 조약 초안 검토가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다. 바이에른당도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덜레스에게 자신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대안이나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또는 독일군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다짐하였다.     

덜레스와 나눈 이 대화만이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이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취미에는 낚시와 골프만이 아니라 그림그리기도 있었다. 그래서 이 아마추어 화가는 독일연방정부 수상에게 자신이 잠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관한 기억을 아름다운 푸른 풍경화에 담아 보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선물을 받고서도 아데나워는 적절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첫 경고 신호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 셰퍼드 스톤이 오토 렌츠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12월 5일 선거가 끝난 밤에 기분 좋게 맥클로이와 함께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내 그림에 대하여 왜 아무런 답신도 안 하는 거지? 내 그림이 예술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자기가 실수한 것이 대하여 약간 당황한 아데나워는 아데나워의 선거 승리에 관한 축하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아첨에 가까운 찬사를 하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제 방의 벽에 걸어 놓은 귀하의 아름다운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독일 언론에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저를 방문한 많은 사람이 그 그림을 보고는 아이젠하워 장군께서 전쟁과 국가 경영 기술만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고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아데나워의 칭찬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 이야기를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했던지, 아니면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 아데나워가 덜레스가 독일로 떠나기 전에, 아데나워의 방을 찾은 이들이 “놀라고 경탄해 마지않은” 이 소중한 그림을 아데나워에게 보여 달라고 한 것일 수 있다.      

덜레스의 첫 방문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사를 먼저 전하자마자 곧바로 그 그림에 관하여 물었다. 그는 한 번도 자기 대통령이 그린 그림을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그림은 아데나워 사무실에 전혀 걸려있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무장관 각하, 그 그림을 조금 후에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통역관 베버는 아데나워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는 급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던 장면을 목격하였다. “즉시 그 그림을 액자에 끼워 휴게실에 걸어 놓을 것.”     

할슈타인이 방을 나서서 곧바로 조치를 취했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림이 걸렸습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덜레스를 향하여 말했고, 이 재미있는 일화를 나중에 전해준, 통역관인 베버가 수상이 한 말을 덜레스에게 전달했다. “휴게실에 새로 액자에 담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데나워가 말을 이어 나갔다. “국무장관님. 제가 이 그림을 어디에 걸어 놓아야 할지를 깊이 고민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이 그림을 여기 휴게실에 걸어 놓았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저는 이 방에 잠시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휴게 의자에 누우면 그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서방의 최강국의 최정상에 있는 분이 너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국무장관님은 아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그림이 제게 영감, 힘, 신뢰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덜레스는 감동한 눈치였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아데나워는 각하의 친서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그에게 선물하신 풍경화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친서는 아데나워가 오랫동안 바라던 것으로 1952년에 한 차례 무산되었던 워싱턴 방문 초대장이었다. 그러나 일단 여기에도 제대로 된 순서가 있었다. 제일 먼저 영국 외무장관 이든이 미국의 신임 대통령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프랑스 총리 마이어가 방문하고, 이어서 이탈리아의 총리 데 가스페리가 미국을 찾고 끝으로 아데나워가 워싱턴시를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시점을 잘 맞추어 1953년 4월에 미국에서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함부르크의 기민당(CDU) 전당대회에 바로 참석할 수 있었다.     

나중에도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어려운 협상이 마무리되고 나면 아데나워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덜레스가 독일을 떠나자마자 아데나워 고열의 겨울 독감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다. 몇 주 동안 그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페니실린을 맞으며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워싱턴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모든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외교 정책적으로 그는 프랑스의 고립주의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데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의 신임 외무장관인 조르주 비도는 처음에 아데나워에게 썩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덜레스의 독일 방문 이후 몇 주 지나 로마의 6자회담에서 처음으로 그와 만났다. 로베르 쉬망을 신뢰했던 아데나워, 할슈타인, 블랑켄호른에게 비도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건방지고, 허영심이 있고, 능력이 매우 부족해 보였다. 그의 유럽 정책은 불분명하고 조약에 관한 태도는 올바르지 않았다. 게다가 기민당(CDU) 지도부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특이하게도 밤에 일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을 밤 12시, 1시, 2시 또는 3시에도 호출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렇게 밤에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실하고 철저한 일꾼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였다. 미국도 비도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약 문제에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르 지역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의 조약 비준 절차는 오히려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제2재판부는 3월 초에 연방의회 다수당의 기관 소송을 기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이 수상에게는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못하였다. 연정 정부의 소송은 연방정부 대통령의 감정 청원이 칼스루에의 재판관들의 탁자위에 제출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가 이루어졌고 이제는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는 서방 조약과 관련된 아무런 소송도 제기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제 4월 초에 예정된 미국 방문에 앞서 독일 연방의회에서 조약 초안의 3차 검토를 적절한 시기에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야당이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 가처분신청을 제기하여 다시 법률적인 공격을 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연방정부가 조약 비준에 성공하고 나서도 조약 서명과 공탁 절차를 진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만이라도 아데나워에게는 일단 만족할 일이었다. 그는 이제 제3차 조약 초안 검토를 이루어낸 수상으로 자신을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사민당(SPD)은 독일 여론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고집불통의 방해꾼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953년 3월 마침내 이스라엘과의 배상 합의 조약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비준되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사민당(SPD) 의원의 찬성이 필요했다. 의원 가운데 35명이 반대하고 86명이 기권하였다. 찬성하지 않은 위원 가운데에는 아데나워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 재무장관 프리츠 쉐퍼와 파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있었다. 기사당(CSU) 인사들 가운데 비판적인 인물들은 배상법으로 들어갈 엄청난 비용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또한 아랍 국가들의 외교적인 항의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아랍 정부들의 비난보다는 미국 내부에 있는 유대 단체들과 신문들의 지지였다.     

아데나워가 아니었다면 이스라엘과의 배상 합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물론 아데나워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합의의 도덕적 측면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합의 비준에 관한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람직한 외교 정책은 내부적으로 인정된 도덕적인 동등권을 전제로 합니다. 바로 그래서 이스라엘과 맺은 조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조약에 관한 표결의 시기가 보여준 것은 외교 정책의 목표 설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앞으로 예정된 미국 방문에서 ‘나치 시절에 저질러진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나이와 정치 이력이 그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독일은 배상 합의의 비준을 무기로 미국의 언론 앞에서 좀 더 당당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방문 계획을 세우는 일은 아데나워를 매우 즐겁게 해주었다. 나중에 그가 잘 모르는 먼 나라들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방문을 정치적 스케줄만으로 꽉 채울 것이 아니라 모든 낯설고 새로운 것에 관한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일정도 마련해야 했다. 특히 미술관 방문을 포함한 문화와 관련된 여정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최고 수준의 기자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통속적인 주간지의 평범한 기자들과 주간뉴스의 카메라 기자들도 포함되었다. 오토 렌츠는 아데나워가 주인공이 되는 미국 방문에 관한 필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는 허풍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첫 미국 방문에는 무엇보다도 정치, 지평 확장, 정치 관광, 선거 광고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선거의 압승을 기획하는 방법     


아데나워는 매우 중요한 1953년 총선을 앞둔 몇 달 동안처럼 자기 카드를 탁월하게 활용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미국 방문의 대성공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25년 전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으로 재직할 때 젊은 영국대사의 자격으로 그를 방문하였던 해롤드 니콜슨은 1953년 5월 중순 ‘영독협회’(AGA) 주최로 런던의 도체스터 호텔에서 개최된 만찬에서 독일연방 수상을 기리는 테이블 스피치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 경탄을 표현하였다. “그는 아마도 아데나워 수상께서 오늘 그 당시보다 20년이나 젊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결코 아첨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더욱 꼿꼿한 자세로 힘차게 걸었고 주의를 한 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힘들었던 쾰른 시절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노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미국 방문 전에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이번이 자기 인생에서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그 이후에도 1963년까지 워싱턴을 10회 방문하였다. 게다가 그보다 10살이 어린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이미 사망한 후에도 말이다. 그는 이 무렵 자기 삶의 끝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중반부터 아데나워 수상이 당 대표단과 내각이나 수상실의 측근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보면 그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그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 목표는 바로 조약의 비준과 1953년 여름 총선에서의 압승이었다. 총선 시일이 다가올수록 그는 더욱 그 목표에 집중하였다.     

조약을 반대하는 이들이나 최소한 이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이제 처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20년 후에 전혀 다른 상황에 있었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도 한 것이다.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이 조약 초안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밀고 나가고 그 과정에서 워싱턴, 런던, 파리의 지지를 확보할 때는 야당,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여론도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들은 경험한 것이다.     

이를 먼저 감지한 사람은 라인홀트 마이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였다. 근본적으로 그는 아데나워보다 훨씬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는 연방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연방 차원의 당 안에서 그는 상당히 고립된 인물이었다. 그의 유일한 버팀목은 지방당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법무장관인 빅토 레너를 중심으로 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사민당(SPD) 인사들이 있었다. 레더는 조약을 독일연방참사회에서 좌절시키고자 하였던 인물이다.     

라인홀트 마이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CDU)이 총선에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하였다. 또한 그는 조약을 독일연방참사회에서 비준하지 않으면 독일연방공화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칼스루에에서 모든 판결을 조인 이후로, 곧 사실상 총선 이후로 미루자, 헌법과 관련된 핑계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마이어가 언제부터 아데나워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아데나워의 미국 방문 이전에 수상과 독일연방 대통령 사이에서 일종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그리고 그 당시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상원의장 빌헬름 카이젠이 이끄는 브레멘에 그 당시 호이쓰와 아데나워가 합의한 바와 같이 ‘황금 다리’를 지어주기로 하였다. 호이쓰가 아데나워에게 말하기를 마이어가 헌법과 관련된 이견이 많지만, 조약의 통과에 협조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독일 연방 대통령이 조약 관련법을 제정하고 선포하는 일을 사민당(SPD)이 예고한 법률심사 청원에 관한 판결이 칼스루에에서 내려질 때까지 미루는 것을 조건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호이쓰의 의견으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조약 비준은 늦가을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호이쓰는 아데나워와 만난 자리에서 그의 비서실장 만프레드 클라이버가 그러한 뜻을 마이어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마이어가 조약 비준에 찬성할 것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도 원칙적으로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하였다. 다만 연방정부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비준 각서는 헌법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것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약속을 표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었다.      

이때가 1953년 5월 초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라인홀트 마이어가 주 정부의 사민당(SPD) 소속 장관들에게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그 해에 마이어는 연방참사회 의장을 맡고 있었기에 더욱 신중하게 처신해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의장에게 주어진 세밀한 통제력을 잘 발휘할 수 있었다.     

4월 24일로 예정된 독일연방참사회의 최종 결정이 있기 하루 전에 마이어는 주 정부 각료 전체와 함께 본을 찾아왔다. 연방정부 대통령실의 비서실장 만프레드 클라이버는 아데나워와 최종 협상을 앞두고 주지사들을 찾았다. 클라이버도 슈바벤 출신 인물로 라인홀트 마이어와는 학생회 시절 친구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부탁으로 마이어에게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전하였다. 곧 그가 슈투트가르트의 주 정부 내각에 자리 잡고 있는 사민당(SPD)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계속 주지사로 머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클라이버는 연방정부 대통령도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마이어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하게 되었다. “추측컨대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예정된 협상에서 대통령이 아니라 일개 시민의 역할로 밀려난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는 이 계획이 좌절되면 아데나워 수상의 분노를 클라이버에게만 돌릴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그 정도로 예고한 ‘협상’은 겝하르트 뮐러의 희생을 가져왔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야당인 기민당(CDU)을 이끌며 가장 강력한 당의 수장으로서 빌라 라이첸슈타인 관사에 거주하는 주지사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뮐러를 아데나워가 어떻게 설득하여 마이어가 주지사로 머물 수 있도록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이어는 그러한 ‘추측’을 반박하면서, 다음날에도 자기 태도를 변함없이 유지하였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감정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약에 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사민당(SPD)이 지배하는 주들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주장하는 것과 일치하였다, 이는 아데나워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그 조약이 이러저러한 점에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릴 경우에는 독일연방참사회에서도 이 안건을 다시 다루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민당(SPD)은 너무 늦게야 마이어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참사회가 주요 법안에 관한 입장 표명을 거부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독일연방정부의 시각에서 이 법안들은 사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독일연방참사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 법안들 가운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두 개의 법안만이 연방참사회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독일연방참사회의 동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기민당(CDU)이 지배하는 주들은 이제 이러한 법 해석에 동의하고 나섰다. 곧 이 두 법안에 대해서만 마이어를 포함한 독일연방참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나게 되었다. 당내 동료들의 마이어에 관한 출당 위협을 포함한 강력한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마이어는 부가 법안의 통과에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조약 초안 전체가 처음으로 의회의 장벽을 넘어서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소식은 영국을 방문하던 아데나워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에 대하여 좋은 소식이라고 간단히 논평하였다. 사람들이 커다란 승리의 소식을 전하면 늘 이런 식으로 그는 반응했다.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안심하는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저 멀리에서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위협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8일 후에 기민당(CDU) 대표단 앞에서 연방헌법재판소가 ‘독일의 독재자’라는 불평을 쏟아 놓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이를 크게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에 대하여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      

그러는 사이에 그의 근심거리는 독일연방참사회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는 처칠 수상이 소련의 새 지도부와 정상회담을 열기 위하여 몸이 달아 있었다. 처칠은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그러한 구상을 하게 되었다. 처칠의 주치의였던 모란 경은 1953년 3월 7일자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수상은 스탈린의 죽음이 긴장 완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이는 다시 오지 않을 절묘한 기회였다.”     

그러나 절묘한 것은 영국 내각의 구성이었다. 수상은 고령의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외무장관인 이든의 두 차례에 걸친 힘든 수술로 영국 외무부도 중요한 시기에 사실 아무런 지도자가 없게 되었다. 이든을 포함한 영국 외무부의 외교관들은 협상을 이끌 처칠이 다시 한번 냉전 시대의 정상외교를 추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5월 초부터 이미 처칠은 자신이 몰로토프에게 전문을 보내 모스크바 방문을 제안하고자 한다는 뜻을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아이젠하워는 불같이 화를 내며 즉각 이를 말렸다.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미국 측의 논리는 1953년과 1954년에도 변함이 없었다. 당시 모스크바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삼두정치의 지도자들과 협상한다면 결국 피투성이의 스탈린 공범들에게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말렌코프는 사실 그 스탈린이라는 독재자의 오랜 비서였다. 스탈린의 파렴치한 행위 가운데 그가 실행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가학적인 비밀경찰 수장인 베리야는 나중에 사람들이 지칭한 대로 ‘수용소 군도’의 통치자였다. 몰로토프 또한 사악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내세운 또 다른 이유는 국내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얄타회담 이후 공화당원들은 루스벨트의 정상회담 외교를 완전히 실패한 방법으로 못 박았다. 덜레스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권력자들이 약간 친절한 몸짓을 보인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바로 잊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정상회담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조약의 비준 절차가 1952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동서 회담의 전망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정체될 위험이 이제 새로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비도가 동서 회담을 다시 한번 유럽방위공동체(EDC) 비준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것을 보고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이 제안은 무산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의 상황에 관한 미국의 우려도 있었다. 영국 외무장관이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신문 기사를 더 이상 제대로 읽지 못하고 가끔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많은 것들이 뒤엉켜있었다. 곧 아주 먼 옛날의 말보로 시절의 유럽 국가체계제국에 관한 향수,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정상회담, 핵전쟁에 따른 세계적인 파국이라는 끔찍한 전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것이 워싱턴 측의 시각에서 바라본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새 정부의 시급한 단기 목표도 있었다. 그 목표는 한반도의 휴전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반도에서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속히 개최될 동서 회담이 아데나워의 총선 결과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를 고려해 보는 것은 단지 여러 측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아데나워의 입장도 무게가 실린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처칠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5월 11일 처칠 수상은 영국 하원에서 충격적인 제안을 하여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다시 한번 처칠이 전쟁의 위험과 평화의 희망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고, 유럽 정치 체계에 관한 포괄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소련의 정당한 안보 이해에 관하여 언급하고, 세계의 강국 간의 조속한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1925년의 로카르노협약에 대하여 막연한 암시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협상을 막 마무리하고 영국을 향하여 떠나던 차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정부가 놀라 격분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처칠은 발언 내용에 관하여 프랑스와 미리 논의한 적도 없고, 정상회담에 프랑스가 참여할 자리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이 함께, 처칠의 이러한 사전 조율이 되지 않은 제안을 거부하는 데 동의하였기에 아데나워도 동서 회담에 대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처칠은 과거 자신이 아데나워에게 한 약속을 기억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기에 그를 안심시키는 문장 하나를 추가할 정도는 되었다. “서독이 그 어떤 희생을 치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굳이 조심스럽게 표현하자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고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그들과 맺은 협약의 틀 안에서 말입니다.”     

처칠이 평화 담화를 발표한 직후 아데나워가 5월 14~15일에 걸쳐 런던을 방문한 일은 잘 진행되었다. 아데나워는 현명하게도 자기 우려를 직접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영국 외무부에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아데나워 수상의 최측근인 블랑켄호른은 조약 비준에 관련된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연히 처질의 구상은 사민당(SPD)에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처칠과의 대담은 다시 한번 이 영국 총리이 제대로 정보는 접했음에도 할슈타인이 말한 대로 거의 정신이 나간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당황했다. 불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노인은 자기 의자에 힘겹게 앉아있었다. 왼쪽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고 그가 뭔가 논리적인 말을 하려고 하면, 예를 들어 영국의 평화 의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면 노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 인물이 이러한 몸을 하고 영국이라는 제국을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을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때로 대화가 완전히 불가능한 이 대화 상대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고 자기 우려를 담은 한 장의 비망록을 내게 보냈다.”     

이 두 국가 수반의 공식적인 대담은 길어졌음에도 매우 어색하게 마무리되었다. 아데나워는 처칠에게 권련 상자 두 개를 선물하였다. 이는 그가 독일 공항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독일 담배생산조합 대표에게서 전달받은 것이었다. 처칠은 기뻐하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자신에게 담배를 선물했던 마지막 독일인은 빌헬름 2세 황제라고 말하였다. 처칠이 자기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찬 시간에 아데나워에게 다시금 영국이 독일 뒤에서 아무런 협상을 맺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면서 처칠은 아데나워에게 기괴한 다짐도 덧붙였다. 러시아가 실제로 유럽을 정복할 만큼 강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이제 신무기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말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3개월 안에 소련의 군수산업, 통신체계, 모든 현대전 수행 능력을 파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처칠은 영국이 자체적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도 하였다.     

처칠의 아내인 클레멘틴 여사도 함께한 이 오찬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사 중에 모두 포도주를 한잔씩 받았습니다. 처칠은 거기에 진이나 스카치를 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처칠은 그 잔에 큰 검은 권련을 깊이 담가 거의 3-4cm만 안 젖은 상태로 둔 다음 거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마침내 처칠 수상이 독일을 국빈 방문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놀랄 언급을 처칠이 하였다. 쾰른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처칠도 이 도시가 파괴된 것에 관련이 있기는 하였다. 아데나워는 처칠이 독일에서 환영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상징적인 쾰른 방문이라는 민감한 제안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 수상은 작별 인사를 나누며 처칠 수상에게 영국의 정치가 매우 안정되어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피어슨 딕슨 경이 5월 19일 영국 외무부의 동료에게 보낸 비망록을 보았다면 런던 방문 이후 그의 기분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데나워가 런던을 떠난 지 하루 만에 딕슨은 처칠 수상과 대담을 나누고 그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사무적으로 정리하였다. 처칠이 ‘통일 후 중립화된 독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딕슨 경의 말에 따르면 처칠 수상은 이러한 조치가 소련과의 과거에 대한 포괄적 청산의 일부로 여겼다.      

윌리엄 스트랭 경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독일의 중립화가 독일인들이 원하는 경우에만 논의가 될 수 있다는 중요한 추가 문장이 포함된 것을 들었다. 그 당시 영국의 독일 정책을 주관하고 있던 프랭크 로버트스 경은 같은 날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비망록을 받아 들고는 매우 긴장하게 되었다. 곧 영국이 그러한 소련의 구상을 받아들인다면 기존의 유럽 안보 체계의 전체 구조가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동유럽 블록의 경계는 라인강까지 밀려 들어오게 될 노릇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있었던 4개국 점령 세력 통치가 독일에 다시 들어서게 되면 아데나워는 가을 총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사민당(SPD)의 취약하고 중립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서거나 민심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기울게 될 것이다.     

본의 정부에서는 자세한 소식을 듣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런던과 파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아이젠하워는 이제 서방 국가 수반들의 버뮤다 회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다시 한번 그를 제외한 전승 3국의 배타적인 회담이기 때문이었다! 독일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말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프랭크 로버트스 경은 독일연방 수상실의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이 정상외교라는 장기판에서 단지 강대국에 놀아나는 말에 불과하다면 모든 독일인이 매우 불안해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1953년 6월 17일 이틀 전에 블랑켄호른은 영국 외무부의 콘 더글러스 월터 오닐과 상당히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데나워는 처칠의 정책에 대하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블랑켄호른이 전했다. ‘불신’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가 처칠의 동기나 우의를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칠은 자신이 러시아와 협상을 이루어낼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하였다. 처칠이 주변의 충고에 귀를 안 기울이는 것이 너무 놀랍다는 말도 있었다. 처칠은 정신적으로 1945년에 고착되어 있고 그 이후에 독일과 유럽 정치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전혀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5월 15일에 런던을 방문하였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실무적인 논의를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처칠이 ‘자기 꿈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서’ 실무 대화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고 아데나워가 블랑켄호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는 것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모든 서류를 치워버리고 충고를 듣는 것이었다. 워싱턴에서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말도 했다.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아데나워의 우려를 매우 적나라하게 전달받은 영국 외무부의 관리들은 그들도 처칠이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그 처칠이라는 노인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영국 외무장관 이든은 와병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의 근심을 단번에 제거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 가지 일이 벌어졌다. 6월 16일과 17일에 독일에서 저항운동이 발발했다. 6월 23일 처칠은 심장마비를 겪었다. 그래서 처칠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직무에서 잠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7월 10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베리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분명히 이는 모스크바의 권력을 누가 잡을지 불안하다는 징후였다. 그래서 정상회담은 아직 이른 일이 되어버렸다.     

독일 총선이 있기 전의, 이 긴급한 변화가 있던 시기에 국제 정세는 매우 놀랍고 위급한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1945년 여름 정계에 들어선 이후 사실 이와 크게 다른 것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유럽의 민주주의가 위험이 가득한 전후 시기의 말기에 와 있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내 정치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1953년 독일 총선이 외교 정책과 독일 정책 분야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외교 정책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외교 정책과 국내 정책을 균형 있게 추진해야만 정치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국무회의 때마다 아데나워가 국내 정치를 장악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새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쾰른에서 16년 동안 시장을 역임한 이 인물은 외교 정책이라는 새로운 과업을 핑계로 그가 잘 알고 있는 재무, 경제사회정책, 행정, 치안 분야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각료들 가운데 프리츠 쉐퍼와 로베르트 레어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아데나워만 한 식견을 지닌 인물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총선 직전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선거전에는 결코 새로운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 각료들에게 재차 경고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요하지 않은 안건이 새로운 논란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커피세의 인하와 같은 선거용 선심 공세는 좋았다. 그러나 이 일조차도 내각에서는 선의에서 시작한 일이 결국 표를 의식한 싸움거리로 번지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데나워 수상과 연방 재부장관의 관계가 이제 매우 심각한 긴장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쉐퍼는 서로의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쉐퍼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매우 심각한 재정적자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1933년까지 쾰른 시장 시절에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장기적인 재정적 안정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경험에 따라 대선 전에 강화되는 법이었다. 쉐퍼가 보기에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적 의도가 있는 지출이 그의 재정 안정 정책을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런던의 부채협정, 점령군 유지비용, 유럽 방위비 지원, 유대인 배상 협정을 위한 지출이 그것이었다. 쉐퍼는 특히 배상 협정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하여 아데나워와 재무장관의 관계가 이제 매우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연방정부 수상만이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총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모든 정당은 연방정부의 재정을 동원하여 은퇴자, 전쟁희생자, 가정주부 또는 추방민들을 위한 선거용 선심 공작을 벌이고자 했다. 야당은 재정 지원 요구에서 여당을 능가하였다. 그리고 독일당(DP)과 자민당(FDP)을 합치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능가하였다. 독일 연방의회가 마침내 휴회에 들어가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원내총무였던 하인리히 크로네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일지를 기록하였다. “연정을 이룬 정당들은 이러한 특별 조치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재무장관도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수상은? 이제 그는 총선의 승리를 바란다. 그리고 여기에는 돈이 든다. 정당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전략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말이 통한다. 선거 후 4년 동안에 정부는 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아데나워는 이미 거물 정치인으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 그는 이 총선에서 1949년도에 있었던 선거와 그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근엄한 수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이성적인 정당 대표로 변했다. 이 선거에서 지속적인 변화 속에 있는 정당들의 상황을 그만큼 정확하고 냉정하게 꿰뚫어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서독에는 정당 제도를 그만큼 날카롭게 분석하는 인물이 없었다. 또한 그만큼 폭넓은 분석을 하고 관찰 결과나 결론을 그토록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각이나 기민당(CDU) 지도부, 또는 작은 모임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1952년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이 계속 다당제를 유지하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1953년에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이 필요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오토 렌츠의 조언대로 아마도 추방민당(BHE)의 도움도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비록 ‘추방민과 권리박탈민 연합’(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이 그 영향력을 상당히 잃었음에도 말이다. 1953년 5월 추방민당(BHE) 당수인 발데마르 크라프트는 아데나워 수상의 마지막 희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만약 라인홀트 마이어와 아데나워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니더작센의 추방민당(BHE)이 힌리히 코프의 사민당(SPD) 정권을 버리고 시민 정부 수립을 시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1953년 초에 아데나워는 9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연방의회선거법에 관한 논의에서 추방민당(BHE)을 위하여 커다란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당(DP)은 나중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신뢰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헬베게와 폰메르카츠의 기독교 보수주의 노선이 버텨주기를 기대하고 일단 교통부장관 세봄의 일요연설을 금욕주의자다운 평정심으로 일단 견디어 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독일당(DP)이나 자민당(FDP)이 전국 정당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늘 떨고 있었다. 1949년만 해도 별 영향이 없었던 민족주의적 구호가 유권자들의 표심에 먹혀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 나치 추종자들이었던 취약한 군중이, 연정을 구성한 모든 정당의 선거전략에서 주요 대상이었다. 심지어 사민당(SPD)도 이에 편승하였다. 아데나워는 1953년 7월 15일 기민당(CDU) 지도부 앞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1949년에는 과거 나치에 속했던 이들은 선거권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제한이 사라졌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제 생각에 자민당(FDP)과 독일당(DP)에 그러한 민족주의적 요소의 일부가 흡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규모가 다른 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민족주의적 요소가 1949년에 수립된 정당들 안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의회를 장악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은 민족주의라는 흐르는 모래를 잡아 가두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수없이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기민당(CDU)은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유권자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이타적이고 유럽적이면서도 대단히 민족적이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정 내부적으로 자민당(FDP), 독일당(DP), 그리고 어쩌면 조만간 추방민당(BHE)도 기민당(CDU)의 서방 정책에 동의하도록 이끌어야 했던 것이다.     

가장 골칫거리가 되는 것은 자민당(FDP)이었다. 자민당(FDP)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데나워가 자주 공개적으로 말한 대로 자민당(FDP)이 어디로 튈지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자민당(FDP)은 여전히 우파적인 성향을 강력히 보이는 정당이었다. 특히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유독 그러한 성향이 심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파벌에서 오랫동안 출판업자인 프리드리히 미델하우베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파벌을 정부 진영에 통합하여 길을 들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아데나워는 미델하우베와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부 시절부터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온 사이었다. 주지사인 아르놀트는 원칙적으로 자민당(FDP) 우파보다는 차라리 사민당(SPD) 우파와 연정을 이룩하는 것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로부터 가끔 비난조의 말을 들어야 했다. “국가정치적 차원에서 사안을 고려해 본다면 저는 민주주의적 색채가 없는 커다란 흑-백-적의 정당보다는 자민당(FDP)과 함께하는 흑·백·적*의 색채를 선호할 것입니다.”     

* ‘흑·백·적’ [schwarz-weiß-rot, 역자주 - ‘흑-백-적’은 1867년부터 북독연맹(Norddeutsches Bund)의 깃발이었고 1871~1919년, 1933~1945년 독일제국의 국기였다. 이 색깔은 독일 우파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상징함.]     

자민당(FDP)에서 발전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흑-백-적 정당’은 1952년부터 아데나워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나치 잔당들이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자민당(FDP)에 스며드는 것을 1953년 초반에 영국 점령군이 차단한 것이 아데나워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을 고위위원회 영국 측 위원인 이본 커크패트릭 경이 직접 주도하였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지도부 앞에서 ‘나우만과 그의 일당들의 체포’에 대하여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애쓰면서 자민당(FDP)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였다. 자민당(FDP)의 협력 없이는 사민당(SPD)의 대연정으로 내몰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데나워에게 악몽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와 자민당(FDP)의 관계는 불화를 겪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자민당(FDP) 인사들을 결국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범주로 나누어보지 않는다면 정치가가 아닐 것이다. 자기 《회고록》에서 아데나워는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민당(FDP) 안에는 정치적 태도가 올바른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말해보자면 프란츠 블뤼허 박사, 빅토르 에마누엘 프로이스커 박사, 헤르만 쉐퍼 박사, 한스 벨하우젠 박사가 있다.” 아데나워가 자민당(FDP) 소속으로 ‘올바른’ 인물이라고 한 것은 자기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독일연방정부 대통령 호이쓰도 포함되었다. 그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와 나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인 크레켈러 또한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 범주에 드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본 주재 기자인 슈마허-헬몰드도 마찬가지였다. 슈마허-헬몰드는 개방적이고 정이 넘치는 가톨릭 신자로 라인란트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는 아데나워와 자민당(FDP)이 뒷전에서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그가 늘 믿을만한 다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1953년에는 토마스 델러도 포함된 ‘올바른’ 자민당(FDP) 인사들도 자주 아데나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1952년과 1953년에 그러한 민족주의 성향으로 특히 자르 지역 문제에서 갈등이 쌓여가게 된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이 독일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아데나워의 실적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53년 자민당(FDP) 인사들 가운데 ‘올바른’ 이가 아닌 인물에는 당연히 라인홀트 마이어가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가 그의 탁월한 전략적 능력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하고 있음에도 그러하였다.  아데나워는 마이어가 가톨릭의 교계주의에 대하여 독설을 날린 것을 매우 기분 나쁘게 여기었다. 1949년의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가톨릭주의에 관한 개신교의 분노는 1953년의 총선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분노는 평소에는 자민당(FDP) 내부의 적대적이던 파당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자민당(FDP)이 내부적으로 분열된 것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뷜러훼헤에서 휴가를 보내는 가운데 1953년 7월 21일 뉴욕에 있는 친구인 다니 하이네만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에게는 자민당(FDP) 내부의 분열이 유일한 근심거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강하고 결속력을 보이는 자민당(FDP)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는 정당 정치적 차원의 근심, 경고, 책략은 오로지 하나의 전략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었다. 곧 가능한 모든 연정 구성 방법에서 사민당(SPD)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총선 뒤에 독일연방헌법재판소애서 서방과의 조약에 관한 판결이 내려질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이끌어 모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했다. 여기에는 문자 그대로 사민당(SPD)이 아닌 표만이 필요했다. 그 정당이 작다든지 아니면 정치적 정향이 의심스럽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가 사망했을 때도 아데나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1952년 8월 2일 일요일 하노버에서 수많은 이들이 참여한 슈마허의 운구 행렬이 진행될 때도 그는 뷔르겐슈토크에서 보내던 휴가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부수상인 블뤼허를 조문 사절로 보내고 그다음 날에는 악센슈트라쎄, 수스텐파쓰, 로센라우이탈, 기쓰바흐, 브뤼닉파쓰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아데나워의 슈마허에 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슈마허의 지배 아래 사민당(SPD)은 “그저 독재 정당이 되어 버렸다. ... 사민당(SPD)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였다.” 아데나워는 1953년 5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슈마허)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전체를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항로로 이끌어 들였다.”        

반면에 슈마허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 거의 동정심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슈마허를 한 인간으로서 ‘좋게 기억하고 있다.’ 기민당(CDU) 지도부 인사들은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들었다. “그는 확고한 의지를 지닌 성실한 인물이었습니다. ... 그는 그의 생애 말기에 매우 깊은 병에 걸렸습니다. 사실 그는 이전에도 아팠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외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실망, 고독, 고통을 달고 살았기에 매우 의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가 “슈마허의 탁월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슈마허가 죽은 지 겨우 두 달이 채 안 되어 아데나워 수상은 여당의 동료들과 더불어 아쉬워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슈마허가 죽기 몇 달 전에 그와 협상하는 것이 지금의 사민당(SPD)원들과 협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올렌하우어는 이를 대적하기에 너무 약한 인물로 보였다. “나는 모든 희망을 접었습니다.”     

사민당(SPD)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정당”으로서 모든 비정치적인 성과를 목적으로 삼을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아데나워는 최소한 내면적으로는 사람들을 구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올렌하우어가 선의를 지닌 인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베너는 극도로 불신하였다. 아데나워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한 대로 그 당시에 실제로 사민당(SPD)을 그토록 불신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아데나워의 상황 판단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총선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를 목적으로 그에게 최대 의석을 확보해 줄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사실 1953년 초 아데나워에게 조약의 운명과 더불어 선거법보다 더 중요한 사안은 따로 없었다.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내각, 여당, 연정 회의, 그리고 수많은 회의에서 아데나워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새 선거법은 다수당 수립에 도움이 되는 것과 동시에 기민당(CDU)에 유리하고 소수 정당들이 받아들일 만하고, 사민당(SPD)의 선거 기회를 최대한 불리하게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아데나워 자신은 선거구에서의 선거 방식에서 2차 투표에서 결선투표가 바로 이루어지는 로마제국식의 선거제도를 선호하였다. 이 제도는 독일제국 시절 선거전에서 그가 매우 익숙했던 것으로 그 당시에 사민당(SPD)을 고립시키는 데에 매우 큰 효과를 발휘했었다.      

사실 선거법은 그가 관철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사실 소수 연합 정당에 연합공천 제시와 선거공약에서 제일 멀리하고 싶어 하면서도 말이다. 하필이면 6월 17~18일에 동독에서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 공산당)의 독재에 맞서 항쟁이 발생하자 여당은 선거법을 둘러싼 작은 정권 위기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자민당(FDP)은 실질적으로 1949년부터 존재해 온 비례대표제 선거법을 건드리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다수와 기민당(CDU)의 일부도 이 규정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이 법이 그럭저럭 존재해 온 것이다. 격노한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측 협상 대표에게 자민당(FDP)이 선거법 문제로 연정을 붕괴시키고자 획책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선거법으로는 기존의 연정 정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민당(FDP) 측 인사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비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6월 17일에 자기 신임 문제를 들고나올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에서 그는 이를 감행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서방 열강들의 독일에 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민당(FDP)이 먼저 아데나워에게 접근하여 왔다. 자민당(FDP)이 5% 봉쇄조항*에 동의한 것이다. 연정이 유지되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6월 17일 총선에서 두 가지 역사적 결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정 가운데 후자의 존속 기간이 더 길었다. 첫째는 동독이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 것이고 독일연방공화국에 새로운 선거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 선거법은 그 이후 모든 개정 시도를 물리쳤다. 아데나워가 다수당 구성을 위한 선거법 마련에 계속 실패한 것은 오랫동안 그에게 상처로 남은 가슴 아픈 패배였다.     

* 5% 봉쇄조항 [Fünf-Prozent-Sperrklausel, 역자주 -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이 5% 이상인 정당에만 비례대표 선출권을 주는 제도]     

이제부터는 독일 문제가 총선 전의 모든 나머지 정치 활동을 좌지우지하였다. 동독에서의 민중봉기가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독일 여론 전체를 놀라게 하였다. 5월 말부터 개별적인 협상 절차가 모두 중지되었다. 서방 점령 세력들 사이에서는 버뮤다회담에 관하여 긴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회담에서 아데나워는 8개 항의 매우 심각한 요구 사항 목록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참여하는 외무장관 대리 회담 개최를 관철하지 못하였다.      

이제 급격히 대두된 독일 문제에 누가 가장 현명하게 접근하는 것인가에 관한 경쟁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아데나워와 야당 사이에 벌어지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야당보다 한발 앞서 나가며 6월 10일에 독일 연방의회에서 외교 정책에 관한 토론을 기습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분명했다. 그는 사민당(SPD)의 책략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사민당(SPD)은 독일에 관한 4강 협상과 고위위원회의 4개국 위원들의 회합을 찬성하는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인사들에게 올렌하우어의 불확실한 발언에 관한 책임을 묻고자 하였다. 올렌하우어가 포츠담협정을 근거로 4강 협상을 추진하고자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데나워도 4자회담은 배제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늘 주장한 대로 매우 신중한 준비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만 하였다.     

동부지역에서는 6월 9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된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제2차 전당대회 이후로 상황이 급속히 나빠졌다. 발터 울브리히트는 그 전당대회에서 이제 ‘사회주의 기초의 확립’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소련을 모델로 한 계획경제와 억압과 테러 재판을 동원한 계급투쟁의 강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는 계획된 혼돈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이미 경제적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던 중산 근로 계층이었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위기가 증폭되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소련의 새 지도부는 정책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소비자 산업을 중시하고 국민의 생활 수준을 최대한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독에 필수적인 소련의 특별 물자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 결과 파국적인 혼란이 야기되었다. 5월 28일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도부는 곤경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노동할당량을 10% 늘였다. 이는 곧 임금 삭감 조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당내 권력 투쟁의 결과 6월 9일 ‘새로운 노선’을 선포하였다.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계급투쟁의 여러 조치를 이제 해제해야만 하였다. 정치적 압력의 완화도 예견되었다. 아데나워는 6월 14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는 로제나우 경기장에 모인 2만 명의 군중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는 독일 공산주의 정권의 파산선고입니다.” 이제는 “동독이 독일 전체에 평화와 자유를 가져오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동부지역 곧 동독의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억압으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날마다 1,000~2,000명의 난민이 서베를린의 난민 수용소에 모여들었다. 그런데도 노동 할당량의 증가 조치는 취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의 분노는 대기업과 대규모 공사 현장의 노동자 계층에서 폭발하였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소련의 탱크들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6월 16일 항쟁이 좌절되고 6월 17일 동독의 봉기가 진압되어도 아데나워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작 독일 연방의회에서 항의문 발표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든 정당의 대표들이 6월 17일 베를린에 모였다. 늘 홍보 효과를 노리고 있던 오토 렌츠는 최소한 동독의 민중봉기에서 희생된 이들의 장례식에라도 참석할 것을 아데나워에게 권유하였다. 블랑켄호른도 같은 의견이었다. 8년 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아데나워는 먼저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참석 여부를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하여 쉐넨베르크 시청사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그 하루 전에 아데나워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행기 안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연설문 작성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순간에 선조들의 정신이 명령처럼 다가왔다. 수십만 명의 베를린 시민이 운집하였다. 그는 확고한 목소리로 ‘전체 독일 민족을 위한 맹세’를 하였다. “슬픔에 더하여, 연민에 더하여 이 자유의 영웅들에 관한 자부심이, 8년 동안 지속되어 온 노예살이를 거부한 이 모든 이들에 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철의 장막 뒤에 있는 독일 민족 전체는 그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엄한 시간에 그들에게 맹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독일 민족 앞에서 이렇게 맹세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고 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독일 전체가 통일될 때까지 말입니다.”      

아데나워의 연설은 그 주간에 독일인의 심정을 건드렸다. “이제 독일 통일이라는 단어가 핵심 주제가 되었다.” 이는 고위위원회의 미국 측 위원인 제임스 코낸트가 1953년 6월 29일 미국 사령부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독일인들의 일반적인 희망에 대하여 한 말이다. 독일 전체를 휩쓸던 민족 정서는 모든 것을 그러안고 있었다. 곧 이제 다시 동독 지역을 휩쓸던 경찰의 테러에 대한 분노, 무기력한 좌절감, 소련의 폭력성에 관한 어느 정도의 공포, 그런데도 많은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이 서방에 든든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특히 미국이 필요하다는 아데나워 수상의 주장은 이제 타당한 것으로 보였다. 붉은 군대가 그토록 잔악하게 동독 국민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나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독일의 신속한 유럽 방어 참여를 주장한 것을 ‘맹목적인 반공주의’로 낙인찍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하이네만과 그의 전독독일인민당(GVP)은 그 당시에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낙인을 찍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여론은 정부가 조처해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부적인 상황 판단에서 코넌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독에서 이제 곧 독일 통일에 관한 많은 비현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그의 생각에 사실 선거철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그리고 처칠과 영국 외무부도 마찬가지의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독일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아데나워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한편으로 독일이 서방과 지속적인 유대를 맺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이 없는 통일을 이루는 일을 완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6월 21일 아데나워의 긴급전문이 아이젠하워에게 도착했다. 그 전문에서 아데나워는 독일 민족의 고통을 백악관 집무실 책상 앞에 펼쳐놓았다. 미국 대통령은 4일 후에 덜레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덜레스가 답변서 초안을 아직 대통령에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답변서에는 인권의 회복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양국 정부가 힘을 모아 진지하게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아데나워를 위한 선전을 하고자 하였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단순히 말로만 아데나워를 돕는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7월 초에 본에서는 곤궁에 처한 동독 시민들을 위하여 식량과 의복의 배분으로 도움을 주려는 대대적인 신속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교회가 그 역할을 발휘해야 했다. 아데나워는 7월 4일 아이젠하워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이젠하워는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소련이, 예상대로 동부지역에 도착한 구호물자의 분배를 거부하자 서베를린에서 분배 작업을 즉흥적으로 시작하였고 이는 언론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람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막후에서 아데나워는 그의 모든 영향력을 사용하여 서방의 회의 계획을 막고자 했다. 그는 적어도 총선 전까지 만이라도 그 회의를 막기로 결심했다. 소련이 어떤 선전·선동으로 독일 총선 선거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데나워는 코넌트에 관한 확신이 없어서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을 파리 주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브루스에게 파견했다. 아데나워의 깊은 우려를 워싱턴의 중앙 정계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브루스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아데나워는 러시아가 9월 6일 독일 총선에서 그를 패배시키기 위해 조만간 새로운 계획에 착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서방 정부가 놀랄 정도로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입장을 급히 바꾸었다. 블랑켄호른은 할슈타인의 지원을 받아 7월 7일 서방이 지금 당장 독일 문제에 관한 4자 회담 개최를 요구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다만 독일 총선이 끝난 다음에 개최하자고 하였다. 블랑켄호른에 따르면 독일의 목표는 독일 연방의회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은 6월 10일 확정한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이라는 것이었다. ① 독일 전역에서 국제적 감시 아래 자유선거를 개최한다. ② 독일 전체를 위한 자유 정부를 구성한다. ③ 이 독일 정부와 서방이 자유로이 합의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④ 이 조약에서 아직 미해결 중인 영토 문제에 관한 첫 번째 결정을 내린다. ⑤ 국제연합의 헌장의 틀 안에서 모든 전체 독일 의회와 정부의 황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블랑켄호른은 또 한 가지 중요한 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서방의 계획에 잠시 영향을 미쳤다가 수십 년 동안 세간에서 잊힌 것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과 1990년에 다시 한번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의 구상은 일단 소련에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이미 기본적인 개념이 담겨 있는’ 안보 체계를 제안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독일을 사실상 통제하는 성격의 서방 안보 공동체 안에 통합하는 제안이었다. 통일된 독일의 ‘군대 규모, 무장, 무기생산력’을 방위공동체의 결정으로 제한하게 된다면 이는 ‘서방만이 아니라 소련을 포함한 동방에도 안전보장’을 제시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소련 측이 내세운 소련의 4자회담 참여에 관한 보상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인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블랑켄호른은 한 걸음 더 나갔다. 곧 그는 독일의 안보 체계를 제구성하기 위한 단계별 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그 첫 단계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미군과 영국군이 라인강 뒤로 철수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소속 군대만이 주둔하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창설될 독일군도 여기에 주둔하게 된다. 이에 관한 대응 조치로 러시아는 오더·나이쎄 국경에 이르는 동부지역에서 물러나고 국제연합이 이 비무장 지역을 감시하도록 하는 조치에 동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된다면 중부 유럽에 일종의 중립 지역의 단초가 마련될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은 2단계로 영국군과 미국군이 북아프리카, 스페인, 영국과 같은 다른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방위공동체(EDC)는 엘베강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엘베강과 오더·나이쎄 국경 사이의 중립 지역은 1937년 기준의 오더·나이쎄와 독일 동부 국경 사이의 지역보다 더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단순하게 독일로 넘어오게 되지는 않고 그곳에 거주하는 400만 명의 폴란드 국민을 고려하여 국제적인 통치 기구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통치 기구는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이 지역에서 발생한 난민들의 합리적인 복귀를 도울 것이다.” 할슈타인은 이 구상에 동의하고 블랑켄호른과 더불어 7월 7일 밤에 뷜러훼헤로 달려가 아데나워를 만났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3주 동안 휴가를 보내며 선거에 대비한 체력 보강을 하고있는 중이었다.     

아데나워도 그 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아데나워는 그러한 조치가 가져다줄 외교와 내치 차원의 정치적 이익을 전광석화와 같이 간파하였다. 그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워싱턴의 외무장관 회의 사회자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낼 서한의 초안을 구술하였다.”     

새로운 안보 체계에 관한 민감한 구절은 일단 막연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는 소련 국민을 포함한 모든 유럽 민족들의 안보 요구를 고려한 안보체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체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4월 16일에 한 연설에서 제안한 국제연합의 틀 안에서 추진되는 보편적인 군비축소와 안보 체계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영토 문제를 연결시켜 안보 체계 논의를 좀 더 정밀하게 만드는 것은 거부하였다. 이는 ‘시기상조’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이 제안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2년 후에 아데나워도 미국과 영국에 맞서는 ‘호이싱거 플랜’(Heusinger-Plan)에서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을 비무장화하는 구상을 확립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이 존 포스터 덜레스에 관한 그의 탁월한 생각을 서방 3개 강대국 외무장관 회의에 직접 들고 가 설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외무장관 회의는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블랑켄호른은 다른 이들이 원하지 않는 등장이 어떤 불평을 일으킬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서방 3개 승전국의 외무장관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 처칠의 요청과 비도의 프랑스 의회에서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야 잘 해결할지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영국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독일 총선 이외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위싱턴을 향하는 길에서 블랑켄호른은 데이비드 브루스에게서 좋은 충고를 듣게 되었다. 곧 아데나워 수상의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기한을 못 박으라고 한 것이었다. 이 충고를 받아들이며 아데나워는 ‘늘어도 가을까지’ 4자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곧 당연히 독일 총선이 마무리된 이후애 개최하되 최대한 신속하게 회담을 개최하여 조약 비준 절차가 더 이상 지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블랑켄호른이 수상의 편지를 가방에 넣고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국무성과 외무부에 있는 그의 업무상 관계자에게 냉소적인 솔직함으로 다가갔다. 프랭크 로버트스 경은 7월 11일 오전에 전화로 선거전략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이 사민당(SPD) 인사들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고위위원회의 소련 측 위원인 세미요노프와 협력하여 7월 말에 소련의 대규모 계획을 획책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서방이 조속히 그러한 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아데나워 수상의 제안에 따라 개최할 것을 천명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소련 측의 새로운 제안에 관한 소식은 부수상인 블뤼허가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소련 주둔군의 대규모 병력이 철수할 것이라는 사실을 7월 15일 밝히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는 그 나머지 병력도 곧 철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 전 지역에서 자유선거가 9월 6일 치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토 렌츠는 이 소식을 아데나워에게 7월 7일 전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식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연히 이는 소련 측의 분명한 선전·선동일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블뤼허 장관과 클라이버 차관과 약속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곧 그는 신중히 처리하기 위하여 독일 언론에 그 소식을 전하고 “언론이 그러한 소련의 조치가 순전히 선전·선동 수작일 뿐이라고 묘사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독일 회담을 서방이 제안하는 것이 선전·선동을 하느라 야단법석을 피우는 것보다 확실히 더 믿음이 가는 일일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이 동부지역에 식량 지원을 더하게 된다면 말이다. 블랑켄호른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4자회담에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이라도 파리에서 조약이 비준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일이었다.        

아데나워의 제안에 관한 첫 반응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위위원회의 영국과 프랑스 측의 위원들은 아데나워의 의견을 무시하며 다음과 같이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이에 커크패트릭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영국에 보냈다. “아데나워가 보낸 것은 매우 형편없는 내용의 서한으로 독일 측이 무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코넌트는 이러한 아데나워의 ‘아무 생각이 없고 무례한 조치’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당연히 아데나워 수상이 이제 총선을 치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데나워가 본에 머물고 있었다면 누군가가 그를 말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3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기에 완전히 ‘통제 불능’이었던 것이다. 비도와 영국 외무장관 살리스버리 경도 그와 마찬가지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 측에서는 아데나워의 제안에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아데나워의 제안을 따르게 된다면 영국 외무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미국이 훨씬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외무장관 회의의 틀 안에서 처칠이 추진하는 소련과의 정상회담을 무력화 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을 따르면 아데나워가 독일 총선에서 확실히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은 사민당(SPD)의 아데나워에 대한 비난이 어느 정도 표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전체적인 입장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가 독일의 통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반대의 입장에 있다는 여론이 강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덜레스는 독일 문제에 관한 외무장관 회의를 1953년 가을에 개최할 것을 소련 측에 촉구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덜레스의 소비에트 연맹을 상대로 한 이러한 제안은 명백히 “독일 연방정부와 사전 협의를 거쳐” 마련된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승리감에 취하게 되었다. 이중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하나의 선례를 영원히 남기에 되었다. 이제 앞으로는 누구도 그를 독일 문제에 관한 예비회담에서 이번 경우처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아데나워의 관계는 이제 눈에 뜨일 정도로 가깝게 되었다. 덜레스가 확고한 친서방의 독일연방 수상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이제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이제 안심하고 선거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10여년 후 아데나워가 자기 《회고록》에서 이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기 기쁨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사민당(SPD)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결정이었다. 사민당(SPD)은 우리가 4자회담을 방해하고 있다고 계속 비난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것은 블랑켄호른이 수상에게 설명한 기본 구상에 다시 한번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통일된 독일이 방어적인 서방의 유럽방위공동체(EDC)에 통합되어야만 아데나워가 소련을 즐겨 지칭하던 “소비에트 러시아가 두려워하던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이 없을 것임을 보장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1953년 초반만 하여도 유럽의 통일은 그저 희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국내외적으로 통합의 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계속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불확실한 운명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탈리아 수상인 데 가스페리가 먼저 제안하고 나왔던 유럽 정치 공동체(EPC) 계획에 대하여 지나친 희망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데나워에게는 일단 그 자신이 깊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거시적인 조약 초안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단 이 유럽정치공동체 구상도 하나의 선택지로 놔두고자 노력하였다.     

벨기에 광업 연합 의장인 폴-앙리 스파크는 1953년 3월 중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의 결정에 따라 광업연합 장관회의에 유럽 헌장 초안을 제출하였을 때 아데나워 수상은 중요한 유럽 헌법 논의를 정부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관료 기구에 맡기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초안을 6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더 논의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광산연합 임시총회에서 앞으로도 유럽 헌법에 관한 의견을 계속 표명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하여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아마도 유럽 헌법에 관한 논의가 유럽방위공동체(EDC) 계획에도 힘을 불어 넣게 된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 몇 주 동안에 아데나워는 상황을 매우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비도가 이끄는 프랑스 외무부는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도 미적거렸다. 프랑스의 정글 같은 국내 정치에 관한 정보를 아데나워에게 가끔 전해주던 장 모네는 유럽 통합 문제와 관련하여 비도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비쳤다. 게다가 영국의 정서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독일 측에서도 유럽 헌법 제정 계획을 느긋하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5월 8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유럽 헌법 초안에 나온 대로 유럽 의회의 의원들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것에 일치단결하여 동의하는 장관들과 연정 참여 정당의 대표들에 맞서게 된 것이 매우 언짢았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들이 다른 모든 방법에 비해서 유럽의회 의원의 직접 선거가 독일 국민에게 유럽 통합을 더욱 잘 의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아데나워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비준에 위험을 초래할 극단적인 해결책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유럽의회가 관할 영역 결정 권한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했다. 그가 미적거리자 5월 중순에 워싱턴과 장 모네는 데이비드 브루스를 통하여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이는 “유럽 헌법 초안 작업 속도가 너무 늦추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6월 17일 직후 광산연합 장관회의에서 유럽 헌법 초안에 관한 논의를 제기하고자 파리로 날아가서도 이 문제가 여전히 정체 상태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블랑켄호른이 작성한 1953년 6월 22일 자 비망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피곤하고 실망한 장관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유럽통합 정신이 거의 없었다. 아데나워 수상과 이탈리아의 데 가스페리를 제외하고는 그 자리에 모인 인사들은 그들이 역사적인 순간에 어떤 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인사는 자기 과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잠들고 다른 이들은 정신이 다른데 가 있었다.”     

이후에 독일연방 수상과 프랑스 외무장관 비도 사이의 냉랭한 관계가 개선되었다. 비도는 더 나아가 독일 총선에서 아데나워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1953년 8월 초에 광업연합의 장관들과 더불어 먼저 바덴바덴을 방문하고 이어서 본을 찾았다. 또한 비도는 유럽의 통합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전제된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본에 정권이 들어선 초기 무렵에 이는 상징적 정치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담을 마친 후에 이 두 사람은 정원을 거쳐 라인강가를 산책하였다. 그곳에는 라인강을 운행하는 증기선 ‘평화호’가 정박해 있었다. 그 배에는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 수백 명이 승선해 있었다. 그들은 아데나워와 비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인간적 차원에서 관계가 호전되었지만 유럽 헌법 초안에 담긴 지나치게 초국가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프랑스 대표가 여전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데나워의 총선에 힘을 보태는 것이 희망들만은 아니었다. 그 희망에는 조속한 독일 통일과 유럽 연방국가,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1949년부터 걸어온 길을 보면서 아데나워를 믿을 준비가 된 유권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데나워에 관한 지지율은 계속 상승했다. 그래서 외교 전선에서 분주하게 이루어지는 활동은 먼저 이러한 바람직한 발전이 처칠의 정상회담에 관한 향수병이나 소련이 추가적인 독일 각서로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아직 선거일 확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1952년 10월에 선거전략은 이미 실행에 들어갔다. 선거일은 1953년 6월 30일에야 비로서 9월 6일로 확정되었다. 그 오랜  기간에는 선거법에 다른 불확실성으로 다른 모든 전술적 구상이 뒤로 미루어져 있었다. 나중에 선거전에 돌입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여러 당직자 가운데 책임이 있는 인사들을 샤움베르크궁에서 자신 주재로 진행되는 국무회의에 모이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주 단위로 매주 수요일에 열린 전략 회의에는 원칙적으로 연방정부 수상실의 렌츠와 글롭케, 연방공보실의 에크하르트가 참석하고 블랑켄호른도 자주 함께하였다. 선거계획을 주도적으로 책임진 기민당(CDU)의 정부연락사무소는 브루노 헤크가 이끌었다. 이 무렵 그는 아데나워의 불신을 극복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처음에 그를 키싱거의 측근으로 여겼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키싱거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기민당(CDU) 재무담당관인 에른스트 바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거가 가까워지자 아데나워는 여당의 당지도부 중진들도 선거에 끌어들였다. 그러는 가운데 광고 전문가들의 강의도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의 지도 스타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의 모든 이가 귀찮게 여기는 성향, 곧 모든 세부적인 일까지 직접 챙기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성향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의 비관주의도 한몫하였다. 그는 오토 렌츠가 보고한 여론조사 결과가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도 여론조사에 어느 정도 신회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여론조사 결과를 처음 보고 받을 때만 해도 그는 무뚝뚝한 반응을 보였다. “이것은 여론조사를 가지고 그저 장난하고 있는 것이오! 도대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정당 정치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투표할지를 무슨 수로 알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점쟁이나 예언가를 언제나 믿지 않소.” 아데나워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국제 정세는 달마다 변하고 있었다. 기민당(CDU)의 선거 전략가들은 선거 결과에 대하여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대표와 연방 수상에 대하여 두려움을 지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늘 비난만하고 칭찬은 아주 드물게 한다는 것을 알 정도로 아데나워를 잘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특히 그의 주요 인물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그나마 덜 심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모든 중요한 참석자들, 곧 오토 렌츠, 한스 글롭케,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 브루노 헤크는 아데나워가 그들의 업무에 대하여 비판하는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선거전에 책임을 진 모든 이들이 일을 안 하고 힘이 없으면 선거에 임하는 제대로 된 투쟁심이 없었다. 여기에는 기민당(CDU)의 정부연락사무소, 연방공보실, 재무 담당인 오토 렌츠와 그 휘하 조직 모두가 해당되었다. 에크하르트는 아데나워의 이러한 피곤한 지도 스타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단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다음에서 아데나워는 선거에 임하는 투쟁심을 서서히 다시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전략 회의에서 스스로도 몇 가지를 배울 정도의 유연성은 지니고 있었다. 필릭스 폰 에크하르트와 베르너 크로이거는 아데나워가 계속 언론과 접촉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아데나워의 기본적인 태도는 세월이 흘러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여전히 성가신 존재였다. 심지어 기자들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동시에 필수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제 독일 언론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게 되었다. 곧 신중하게 선별한 기자들과 편집장들을 불러 막후 기자회견을 벌이고 연방정부 공보실의 브리핑을 통하여 간접적인 접촉도 유지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선거전 시기에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특별 선거열차였다. 아데나워는 수상과 그 참모들이 논의하거나 늦은 밤 잡담으로 긴장을 푸는 장소로 기차의 응접실 칸을 이용하였다. 기차의 이러한 연방 수상이 이용하는 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자들을 위한 식당 칸이었다. 기자들을 위하여 침실 칸도 마련되었다. 아데나워는 이에 초대될 기자 명단을 이미 수주 전에 작성하여 아무나 초대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 기자들이 결국 아데나워를 선거전의 전사로 묘사해 줄 사람들이었다. 아데나워가 바라고 실천한 대로 연방 수상은 이 여행에서 대중의 호의를 얻게 되었기에 기자들에게도 그러한 좋은 분위기를 전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연방정부 공보실의 관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부여되었다. 그들은 날마다 4개나 8개 또는 10개의 소식을 특히 지역 신문에 사전에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것이다. 또한 이들은 아데나워 수상의 기차에 동승한 주요 기자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매일 밤에 일정이 다 마무리 되고 나면 기자들이 탄 기차 칸에 나타나 기자들과 포도주나 샴페인 한잔을 나누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국내 기자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외국 기자들에게도, 특히 미국 기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데나워의 스케줄은 꽉 차 있었다. 선거 전 몇 달 동안에는 외무부의 미국담당 부서의 엘크하르트와 게오르크 폰 릴리엔펠트나 외무부의 자존심이 강한 공보실장인 귄터 딜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모두 아데나워에게 데리고 왔다.


8월이 되자 미국의 정상에 있는 언론들과의 접촉이 마련되었다. 아데나워는 외국의 저명한 신문에 기사화 되는 것만큼 연방 수상의 명망을 올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타임》과 《라이프》의 소유주인 헨리 루스가 시어도르 화이트와 함께 아데나워를 만났다. 화이트는 독일 의회위원회 시절부터 아데나워와 안면이 있었다. 《뉴욕타임즈》의 사이러스 슐츠버거는 다시 한번 파리에서 본으로 건너와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솔직히 말해서 아데나워는 대단한 노인이었다.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고 힘차 보였다. 그리고 선거전을 치르면서도 침착하고 느긋해 보였다.” 또한 슐츠버거는 아데나워가 이제 아데나워가 국가수반답게 다른 국가수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업무실 책상 뒤에는 처칠, 데 가스페리, 아이젠하워,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남자, 아마도 로베르 쉬망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사인이 담긴 사진이 걸려있었다.”     

국가수반으로서의 아데나워가 선거 광고에서 보란 듯이 나오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선거 간판 가운데 하나에는 자신에 넘치고 반듯한 아데나워가 중절모를 벗어 인사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간판을 가로지르며 다음과 같은 구호가 쓰여 있었다. ‘그는 우리를 자유 세계와 이어주고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사실 선거 간판을 도배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찬성하면 성장이 지속됩니다.’ ‘독일은 아데나워를 뽑습니다.’ ‘모두가 아데나워를 뽑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소련에 관한 공포와 통일에 관한 바람을 한데 엮은 선거 구호도 등장하였다. ‘모스크바는 명령합니다. 아데나워를 무너뜨려라. 이제 기민당(CDU)을 뽑을 때입니다.’ 아데나워의 ‘독일 국민 전체에 관한 맹세’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경고도 선거 간판에 나왔다. ‘정신 차리자! 기민당(CDU).’ 또한 빨갛게 표시된 동부지역 앞에 지치고 남루한 부부가 서 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경고성의 호소의 글이 보였다. ‘우리를 생각해 주십시오. 기민당(CDU)을 뽑읍시다.’     

7월이 되자 아데나워는 3주간 휴가를 보내면서 선거전에 대비한 힘을 비축하였다. 선거 기간을 앞두고 스위스에 머무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시 슈바르츠발트에서 유가를 보내기로 하고 뷜러훼헤에서 영주처럼 머물렀다. 그리고 여기에서 국내외 인사 가운데 선택하여 손님맞이를 하여 외부인들이 차단된 산책로에서 산책을 하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슈트로만 교수의 도움으로 건강을 유지하였다.     

본의 업무에서 가끔 멀어지는 것은 이제 독일 전체에서 눈에 뜨이게 이루어지는 아첨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책을 저술하는 계획도 휴가를 가는 데에 한몫하였다. 몇 달 전부터 아데나워는 제대로 된 첫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래 오토 렌츠가 선거전에 사용하기 위하여 통속적으로 작성된 짧은 자서전을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콘스탄츠에서 발행되는 《쉬드쿠리어》의 편집장인 알프레드 게리크의 도움으로 거의 인쇄 작업에 들어가게 된 이 책의 출판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렌츠는 1953년 6월 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당장 인쇄 작업을 중단하라고 쓴 아데나워의 편지를 받았다. “《수상》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절반 정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틀린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일화로 넘쳐납니다.” 이 일에 관하여 미리 잘 설명하지 않은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제 진중한 자서전을 쓸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이는 로스비타 슐뤼터가 그에게 권유한 일이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매우 신뢰하는 이웃인 슐뤼터-헤름케스의 딸이었다. 이 사람은 그사이 의사가 되었고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파울 바이마르라는 출판인을 소개해 주었다. 이 책은 킨들러 출판사에서 출판할 예정이었다. 이 출판사는 화보지인 《레뷰》도 발간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 오토 렌츠가 선거사무소에서 제작한 축소판 아데나워 자서전을 비판하고 나서 며칠 뒤에 아데나워는 로스비타 슐뤼터가 함께한 자리에서 킨들러 출판사와 합의하여 바이마르가 연방 수상 자서전을 쓰도록 하였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자기 측근을 시켜 바이마르를 위한 추천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아데나워를 존경하는 젊고 활동적인 바이마르와 서신 왕래를 하였다.     

아데나워는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 알게 된 뷜러훼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기 생애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는 가운데 과거의 쓰라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아데나워는 이미 2년 전에 로스비타 슐뤼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인생은, 정확히 말해서 1933년 이후의 시기와 1949년 이후의 시기에 나의 인생은 인간에 관한 불신으로, 엄청난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곧 인간에 관한 경멸로, 그에 따른 견디기 힘든 내면적 고독으로 나를 몰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아데나워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은 것으로 보였다. 총선에서의 커다란 승리가 목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회의적인 태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53년 6월 16일 로스비타 슐뤼터에게 보낸 또 다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누구도 “현재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연방 수상이 아니라면 내게 더러운 말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기억과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전을 최상의 기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7월 28일 도르트문트에 있는 베스트팔렌 실내경기장에서 개최된 첫 대규모 군중 행사에 2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아데나워는 2시간 반 동안 연설을 하고 열광적인 박수 세례를 받았다. 여기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행사에서 그는 나라의 상황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50년과 1951년에 있었던 주의회 선거 때의 소동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53년의 총선이 아데나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선거에 모든 힘을 쏟아붓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9월 6일 총선이 있는 날까지 아데나워는 선거를 위하여 짧은 여행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자들이 비꼬듯 지적한 헤르만 괴링이 사용하던 낡은 특별열차를 이용하였다. 아데나워는 하루 종일 주로 수상 관저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 늦게, 또는 저녁이 되어서야 선거 유세에 나섰다. 그는 이제 외국 기자, 특히 미국 기자들과 함께하였다.      

그가 등장하는 유세는 대부분 대도시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라인홀트 마이어의 슈바벤 지역의 대도시와 뮌헨과 뉘른베르크는 지나쳤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유권자의 4분의 1 정도는 아직 농촌이나 소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민당(CDU)의 아성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나 베흐타와 라벤스부르크도 방문하였다. 그리고 베르크슈트라쎄도 빼놓지 않았다. 지방당에 있는 이들이 그에게 낭만적인 분위기의 지역에서 유세할 것을 권하면 이 유혹을 물리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비르나우에 있는 유리창을 통하여 햇살이 찬란히 부서져 들어오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석하거나 오덴발트에 있는 에어바흐 성이나 슈파이어에 있는 황제대성당에 모인 그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였다.     

또한 과거 나치 시절의 군부에 속했던 이들도 생각해주어야 했다. 이미 1952년 12월에 아데나워는 케셀링 원수를 접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영국이 최근까지도 전범으로 간주하여 구금시켰던 인물이었다. 1953년 7월 초에는 폰 만슈타인을 아데나워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접견하였다. 아데나워는 선거 참모들과 함께 그와 군인협회와의 관계를 논의하였다. 여기에서 폰 만슈타인은 아데나워 수상이 전범 판결을 받은 이들의 운명에 대하여 얼마나 각별한 마음을 쓰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6월 28일 유명한 베를 형무소를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영국이 전범으로 판결한 나치 소속 독일군이 아직도 갇혀 있었다. 그 이전에 아데나워는 베를에 있는 성모상을 찾아 순례하는 5만 명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 추방민들과 함께한 적도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수상에 취임한 이후 이러한 군사 법정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지속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 자신이 브라우바일러에 감금된 경험이 있었기에 재판을 받은 이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베를에서 그는 두 장군과 대담을 나누었다. 이들의 운명에 대하여 보수 언론과 군인단체는 몇 년 전부터 불만을 제기하여 왔었다. 그들은 바로 폰 폰팔켄호르스트 원수와 나치 친위대 소속 쿠르트 마이어 장군이었다.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이 두 사람이 정상적인 구금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번 총선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기민당(CDU), 자민당(FDP), 독일당(DP) 사이에서 흔들리는 부동층’이 기민당(CDU)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프리드리히스루에를 방문하여 비스마르크의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조치로 민족주의와 개신교 진영에 속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프랑스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을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은 프랑스 대통령 뱅상 오리오에게 이는 아데나워가 프랑스 측에 불길한 길을 나서고 있다는 또 하나의 반증이 될 뿐이었다. 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는 9월 30일 독일 총선에서 아데나워가 압승을 거두고 나자 미국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아데나워가 위대한 유럽인이 될 것을 여전히 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틀러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독일인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독일인들은 그들의 과거 영토를 수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동부지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독일 총선 전에 비스마르크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데나워 수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를 다르게 보았다. 블랑켄호른은 8월 말 3일 간에 걸쳐 북부 독일 지역의 선거 유세에 함께하였다. 많은 이들이 아데나워를 보고 환호하였다. 이때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가 프로이센의 귀공자인 오토 비스마르크의 환생이라기보다는 매우 드물게 운이 좋은 카리스마 넘치는 시민 정치가라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지난 60내지 70년 동안 정치적으로 그토록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른 시민계층이, 지도자의 자질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힌 인물을 내세우게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늘 우려했었다. 우리가 일찍이 체험했던 대중 국가는 현명한 입법 조치와 이성적으로 깊은 성찰만으로는 이끌어 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전체주의 정권이 더 잘할 줄 아는 그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곧 사람들의 환상과 그들의 내적인 보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역동적이고 정력이 넘치는 인물이 필요하다. 아데나워 수상은 바로 이러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 인물이 분명하였다. 홀슈타인 지역의 추방민으로 넘쳐나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데나워에게 손짓을 하고 친절한 말을 건네는 것은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1949년 내가 아데나워 수상과 동행했던 여정에서는 그렇지 않았었다. 여기에는 그의 업적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가 국가 간의 협상에서 신속하게 보여주었던 능력이 직용한 것이다. 곧 조용한 기다림,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명확한 구분, 자신이 상대하는 인간의 심리를 파고드는 감정이입의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여기에 더해 늘 잰체하지 않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편한 태도를 보였다.” 블랑켄호른은 자기 관찰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나는 9월 6일 총선의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정작 정치적 카리스마를 전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였다. 이 조직은 1953년 선거 때는 거의 완벽하였다. 결국 독일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등장이 대중에게 효과를 발휘하도록 기획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스피커 차량이 마을과 도시에서 연방 수상의 행렬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렸다. 전단을 뿌리는 이들은 인쇄된 선전물을 통하여 시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대규모 유세 행사에서는 행진 고적대가 군중의 흥을 돋우었다. 깃발이 나부끼고, 오늘의 주인공의 도착이 인위적인 방법이나 군중의 쇄도로 지연되어 모두가 위대한 인물의 메시지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결코 로마 시대의 호민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적에 관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군중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그의 주요 공격 목표는 사민당(SPD)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독일노조총연맹(DGB)이 있었다. 독일노조총연맹(DGB)은 유권자들이 더 나은 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구호로 아데나워의 심기를 매우 건드리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원래 노조에 평화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취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독일노조총연맹(DGB) 위원장 자리를 뵈클러가 차지하고 있던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만 유지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이, 노조가 제기한 대기업과 광업계에서의 노동자의 동등한 공동결정권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한 이후로 노조와의 전쟁이 선포되었고 아데나워 집권 시기 내내 사민당(SPD)으로 기운 독일노조총연맹(DGB), 특히 금속노조연맹(IG Metal)과의 평화협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53년 아데나워는 총선 결과가 신통치 못한 경우에는 정치적 파업이, 나아가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여 내무부에 그럴 경우를 상정하여 대책을 마련해 볼 것을 지시하였다. 총선 승리 후에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대표단에게 말하기를 독일노조총연맹(DGB)과 사민당(SPD)이 기민당(CDU)의 사민당(SPD)과의 대연정을 강요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선거전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르고자 했던 의도는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분명하게 드러났다. 8월 19일 아데나워는 솔링겐의 사민당(SPD) 지방당 대표로 사민당(SPD) 당수 직무대리인 멜리에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시 솔링겐 출신인 하인리히 슈로트와 휴고 샤르레이가 동독 측으로부터 각각 1,000마르크의 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이른바 사민당(SPD)의 ‘백서’를 받아친 것이다. 사민당(SPD)은 그 백서에서 경제계가 중산층 정당인 기민당(CDU)의 선거전을 위하여 수백만 마르크를 지원했다고 하는 공공연한 비밀을 적시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슈로트는 아데나워를 상대로 즉시 직무 정치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 확증은 없었다. 슈로트가 아데나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사건이 총선 종료 6개월 후에 본 지방법원 제2 민사법정에서 다루어질 때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해명서를 제출하였다. “법률 절차에 따라 저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곧 슈로트 씨에 관하여 저에게 전달된 정보는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그 정보를 신뢰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감을 표명하면서 슈로트 씨가 동부지역으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을 철회하는 바입니다.” 이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도 아데나워의 정적들은 그가 얼마나 선거에서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가리키고 싶을 때마다 이 사건을 거론하였다.     

폰 에크하르트나 오토 렌츠는 아데나워에게 인신공격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자주 충고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권자들, 또한 훌륭한 언론인들은 정당 간의 싸움을 멀리하는 정치가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러한 충고를 자기 합리화로 배척하였다. 곧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더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선거전에서 아데나워가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인신공격 스타일은 그가 선거 연설에서 준비한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덜덜 거리는 ‘호르흐’*로 첫 선거전에 뛰어들던 1946년부터 아데나워는 자신이 말할 내용의 요점을 연설 직전에 메모지에 간단히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한 기록에 더하여 그는 언론에 보도된 정적의 발언을 인용하고 이를 통렬하게 반박하고, 여기에 더해 참모들이 모은 통계자료나 다른 내용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가 연설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그가 사민당(SPD)을 강하게 비판할 때 군중이 가장 커다란 호응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 분위기에 도취하여 작은 집단에서 흔히 하듯이 노골적으로 강력한 비판을 쏟아내었다. 대부분 계산된 발언이었지만 때로는 그도 커다란 군중의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한 것이다.     

* 호르흐[Horch, 역자주 - AUDI 자동차 회사의 전신으로 August Horch가 설립한 회사가 만든 자동차 이름. 속된 표현으로는 늙고 힘  없는 사람을 빗댄 말]     

그러나 과연 그가 사민당(SPD)과 독일노조총연맹(DGB)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 도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을까? 선거 직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왔다. 알렌스바흐의 예측에 따르면 1953년 9월 4일 기준으로 기민당(CDU)이 38%, 사민당(SPD)이 28~33%, 자민당(FDP)이 8-12%, 추방민당(BHE)이 6~10%, 독일당(DP)이 4~5%를 득표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개인적인 지지율은 갑자기 53%에서 47%로 추락하였다.     

8월 말에 나온 이러한 자료들이 당시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면 실제적으로는 선거 당일에 이르러 소수 정당에 관한 지지가 급격하게 기민당(CDU)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미국의 선거연구가들이 그러한 현상을 설명할 때 말하는 이른바 ‘밴드왜건 효과’를 이야기 해 볼 수 있다. 부동층이나 마음을 확실히 정하지 않은 유권자는 흔히 그들에게 달콤한 이야기를 해주는 승자의 마차에 편승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미국 정부가 절대적으로 아데나워 편을 들어준 것도 있다.     

9월 3일 목요일, 선거 3일 전에 존 포스터 덜레스는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아데나워 수상의 연정이 패배한다면 “독일의 통일과 온전한 주권 회복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하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물러나게 된다면 “커다란 혼란이 야기되어 통일과 자유를 위한 독일의 노력이 계속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도 하였다.     

그러자 미국 언론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었고, 독일의 야당들도 흥분하였다. 사민당(SPD)은 미국 비판적인 선거 유인물을 즉각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선거일까지 덜레스가 아데나워 편을 든 것이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어 누구나 미국이 누구 편인지 알게 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 주변에서는, 아데나워에 호의적인 미국 신문들까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혹시 덜레스가 무심코 자기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아데나워의 선거 전망을 망친 것은 아닌가?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입장 표명은 사전에 아데나워와 협의한 것은 아니었다. 덜레스 자신이 매우 자책하며 선거 당일에도 아데나워가 패배할 경우 그 책임은 자신에게 전가될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사실 현실은 덜레스가 우려한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온 소리가 독일에서도 효과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53년 독일 총선에서 일종의 여론 선도자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다른 독일 전문가와 함께 덜레스의 발언에 대하여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했던 제임스 코넌트는 1964년에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덜레스가 아데나워의 총선 승리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데나워의 미국 정책이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독일 국민의 독일 정부에 관한 호감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여론이었음에도 말이다.     

선거일 전 토요일에 아데나워는 여전히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 녹음기를 통하여 고전음악을 들었다. 아데나워의 좋은 친구가 된 AEG 회사의 프리드리히 슈펜라트는 아데나워로부터 매우 격정에 넘친 편지를 받았다. “어제 저녁 저는 에센에서 있었던 선거 유세에서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에야 녹음기가 어제 집으로 배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한 곡을 들으면서 어둡고 밝은 음조와 그 세밀한 소리를 듣고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귀하께서도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 제게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저는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로 선거전을 마쳤으니  저는 이제 녹음기 음악을 즐기면서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헤르만 요제프 압스를 치하하기 위한 성찬 자리에 참석하였다. 압스는 런던에서 진행된 독일 전쟁 부채 청산 합의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덕분에 독일연방공화국공로장을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데나워는 다시 녹음기를 틀었다. 그는 그 이후에도 여러해 동안 그 음악을 즐겼다. 일요일 오전에 그는 늘 습관대로 교회에 가고 나서 투표를 하였다. 연정 정부가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선거일 전 목요일에 이미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 할슈타인, 폰 에크하르트와 더불어 정부 구성에 관한 첫 회의를 진행하였다.      

개표 결과는 자정이 한참 지난 다음에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여전히 개표와 관련하여 구시대였다. 선거 당일 저녁에 컴퓨터를 동원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는 일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아데나워는 선거 날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는 아침 6시 반에 깨워달라고 부탁하였다.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침 6시에 뢴도르프에 전화를 걸어 선거 결과를 알려주자 아데나워는 그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뿐이었다. “고마워요. 폰 에크하르트 씨!” 선거에서 승리한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수상실에 들어서면서도 마찬가지로 간단히 말하였다. “이일을 아주 잘 치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선거 다음 날인 햇빛이 찬란한 9월 6일 일요일에 모든 사람은 압도적인 선거 결과에 대하여 깜짝 놀랐다. 아데나워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총선 때 31%의 득표율을 보였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유권자의 45%의 표를 확보하였다. 이는 선거일 하루 전에 조심스럽게 예측한 것보다 7%p나 높은 수치였다. 의석수로 계산해 보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 되었다. 선거법에 따라 최저 득표율 5%에 이르지 못한 정당의 표를 나누어 가지면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연방의회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서방과의 조약 비준도 통과될 일이었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이 없게 되었다. 비록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에서 부정적인 판결이 내려진다고 하여도 긴급한 경우에는 아데나워가 헌법 개정을 위한 의원 3분의 2 이상의 의석도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과연 연방헌법재판소가 이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신임을 거슬러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제 아데나워가 얼마나 자신감에 넘치게 되었는지는 본의 마크트플라츠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청년 사민당(SPD)원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있는 군중들 사이에서 횃불 행진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앞으로는 독일의 통일이 아니라 ‘동부의 해방’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아데나워가 변한 것인가? 아데나워 수상이 이제 평화주의자이며 선한 유럽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것인가? 특히 파리에서 사람들이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동부 지역 문제도 이제 다시 갑작스럽게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한 미국 기자와 이야기하며 자기 오래된 구상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곧 폴란드가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게 된다면 독일과 폴란드의 동부 지역에 관한 공동 지배 하는 방안이나 동부 지역을 국제연합의 지배 아래 놓는 방안도 논의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추방민 집단 측의 격렬한 반응을 보고 아데나워는 그러한 구상이 동프로이센나 폼메른 또는 슐레지엔 사람들의 기대에 얼마나 못 미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은 아데나워가 이제 얼마나 자신감이 넘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총선에서 이러한 대승을 거두게 된 국내외 정치적 영향은 블랑켄호른이 9월 7일 작성한 일기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이는 9월 7일 아침에 아데나워의 최측근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 기민당(CDU)이 아니라 연방수상 개인의 공로라는 의견에 공감하였다. 이 선거는 ‘아데나워 선거’로 부를만한 것이었다. 노동자 계층에 이르기까지 국민 대중은 아데나워라는 인물에게 표를 던진 것이었다.” 그래서 국내 정치적 결론은 사람들이 곧 지칭하게 된 대로 ‘수상 민주주의’(Kanzlerdemokratie)의 도래였다.     

그렇다면 외교 정치적 의미는 어떠했는가? “독일연방공화국은 내적으로 공고한 측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고함으로 독일은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일은 이제 유럽 대륙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 이유는 유럽 통합의 구상이 이 선거로 힘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블랑켄호른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데나워의 생각을 반영하여 바로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일이 유럽 연합 구상의 길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어찌 되었든 ‘유럽 대륙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분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8년 만에 이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몇 달 전에 《라이프》지는 이미 ‘거인이 다시 판을 흔들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관한 표지기사를 실었다.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아데나워는 자신이 이끄는 독일이 주도권을 쥐되 결코 거인으로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야기하도록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아데나워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독일 고전 시를 좋아하고 교만과 현명 사이의 싸움에 관한 쉴러의 격언에 담긴 교훈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데나워 수상이 앞으로 여러 국가의 공동체 안에서의 독일의 지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지침으로 삼을 만한 교훈을 길게 설명하는 특징을 지닌 것이다. 아데나워는 1796년 쉴러가 쓴 시 <삶의 유희>(Das Spiel des Lebens)에 나오는 시를 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달리기에 너무 좁았다.

마차는 달리고, 차축은 불이 날 정도였다.

영웅은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겁쟁이는 뒤에 머물렀다.

교만한 자는 하찮은 함정에 빠졌다.

결국 현명한 자가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사자라기보다는 여우였다총선에서 승리한 아데나워.    

 

독일 역사에서 히틀러 시대를 제외하고 올바르게 치러진 선거에서 의회 의석수의 과반수가 넘는 성과를 거둔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부차적인 차원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이는 아데나워의 승리이다.”라는 논평으로 일반적인 여론을 반영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독일은 강력한 인물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게 된 것인가? 여기에서 의회주의, 법치국가주의, 정치적 다원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된 것인가? 총선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모든 야당이 그러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외국 여기저기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걸쳐 탁월한 판단력을 보여 주었던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조작된 우려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하였다. “기민당(CDU)은 국가당이 되어버렸다. ... 그러한 승리로 독일의 민주주의가 패배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진부한 표현에서 아데나워가 통치하는 ‘기민당(CDU)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은연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아데나워 - 민주주의적 독재자’라는 표현은 이미 1963년에 런던에서 발간된 《아데나워에 관한 비판적 전기》에서 사용된 한심한 제목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1953년에 아데나워의 정적들은 보수적인 아데나워,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의 지지자들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빗대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 두 인물과 그 국가 형태를 비교하는 것은 턱없는 노릇이기는 하였다.     

1953년 정부 구성에서 수상 민주주의가 아데나워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교훈을 아데나워가 얻게 되었다. 처칠이 이미 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에 빗대어 이야기했던 아데나워 수상의 과반수 지지가 확보되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부터 절제와 균형의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측의 절대다수 의석은 그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기사당(CSU)의 총선 승리는 더욱 그러하였다. 아데나워는 딸인 레아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그리고 다른 정당들은 너무 작아졌다. 그래서 한 편은 숫자로 밀어붙이고자 하고 다른 편은 그저 쫓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연정 참여 정당들을 다루는 데에 이미 잘 알려진 전략과 더불어 심리학이 필요해졌다. 총선에 패배한 측은 사민당(SPD)만이 아니라 연정에 참여한 정당도 있었던 것이다. 자민당(FDP)/독일민중당(DVP)은 52석에서 48석으로 줄었다. 독일당(DP)은 17석에서 2석이 줄어든 15석을 차지하였다. 중앙당(Zentrum)은 정당명부제에서 기민당(CDU)과 연계되었음에도 10석에서 3석으로 줄어들었다. 연방의회 의원 수가 402명에서 487명으로 증가했음에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139석에서 243석으로 의석이 늘었다. 연합 내부적으로 볼 때는 기사당(CSU)이 최대의 수혜자였다. 제1차 총선에서 바이에른당(BP) 소속이었던 17명의 의원 가운데 단 한 명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기사당(CSU) 소속 의원이 24명에서 52명으로 늘었다. 이리하여 기사당(CSU)이 자민당(FDP)을 제치고 연정 정부에서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기사당(CSU) 당대표인 한스 에하르트가 아데나워에게 다른 이들과 더불어 연방 재무장관인 쉐퍼를 연방 부수상으로 임명해 주라고 요청한 일은 놀랍지 않다.     

아데나워 시대에 처음이었지만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에서는 여러 번 있었던 일이 일어났다. 곧 아데나워 수상과 기민당(CDU) 당 대표단은 이제 자민당(FDP)을 누르고 기고만장하는 기사당(CSU)의 기세를 제압하고 세력이 약해져서 오히려 고집을 피우는 자민당(FDP)을 잘 달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자민당(FDP)의 사이는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이 당시 상황은 1955년에 시작되어 1956년에 마무리 되었던 아데나워와 자민당(FDP) 사이의 심각한 상호 불신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헤센 출신 자민당(FDP) 의원인 오일러는 정부 구성이 마무리 될 무렵에 당대표진에 연정 협상 관련 보고를 하면서 아데나워에 대하여 제대로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아데나워에 관한 찬가를 불러야 할까요? 우리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데나워가 우리를 연정에 강력하게 참여하게 해준 것은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민당(FDP)의 시각에서 볼 때 선거 결과는 여전히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미델하우베는 실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민당(FDP)은 이제 아데나워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델러는 이러한 갈등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우리 없이는 정국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해왔고 우리가 지지해 온 정치에 반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독일당(DP)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맘만 먹으면 독일당(DP) 없이 자민당(FDP)과, 또는 자민당(FDP) 없이 독일당(DP)과 연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현명하게도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두 정당에 연정 안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였고 추방민당(BHE)도 연정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소정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깐깐한 협상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들은 내부적으로 파벌 경쟁과 자리다툼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누가 감히 아데나워와 같은 정치적 야망을 지닌 자와 담대하게 맞서 싸우고자 하겠는가?     

아데나워가 보기에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연정 소속 정당들이었다. 여기에 서로 자기가 잘났다는 이들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있었다. 총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그는 외무부 자리를 간절하게 노렸다. 그런데 이러한 점에서도 총선 승리가 모든 것을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거일 전 목요일에 이미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자신이 “더 이상 외무장관을 겸임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이 되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는 경우 수상이 ‘어느 정도 외무 관련 권한’을 보존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해결책은 직무 변경이 완료된 1955년 7월에야 비로소 마련되었다.     

이제 9월 6일의 아데나워 총선이 마무리된 다음에 상황이 다 바뀌었다.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데나워 수상과 긴 시간 대담을 나눈 후에 수상이 자신에게 외무부를 넘겨준다고 이해하고는 몇몇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서둘러 알려버리고 만 것이다.     

브렌타노만큼이나 아데나워와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영리한 정치가였던 라인홀트 마이어는 ‘확답’을 피하는 아데나워 수상의 협상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누는 이는 아데나워의 표현 방식의 상대성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아마도 폰 브렌타노는 이를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데나워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였다. 총선이 끝난 다음 수요일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관련 기사가 나자마자 아데나워는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에게 연방 공보실과 정보부를 통하여 강력한 반박 보도를 해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 보도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9월 6일 독일 국민이 선택한 것은 독일연방 수상이 기존의 외교 정책을 계속 시행하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또한 독일연방 수상인 아데나워 박사가 외무부를 이끄는 일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이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아데나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는데도 ‘무기력하게’ 타인의 압력을 받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수상을 둘러싼 측근과 연정 지도부의 선두 다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처음은 아니다. 브렌타노는 원내총무인 하인리히 크로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크로네는 “브렌타노가 아데나워 수상을 가끔 잠깐 볼 수 있을 뿐인데 더 이상 주어진 업무에만 충실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 두 사람과 글롭케는 한편이 되어 일했다. 글롭케는 여전히 모든 인사 결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이 되는 것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블랑켄호른과 할슈타인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블랑켄호른은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를 움직였다. 그는 제3제국 말기부터 블랑켄호른과 좋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1944년 7월 20일 벤들러보크에서 체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게르스텐마이어가 해외여행을 하는데 편의를 제공했던 블랑켄호른은 그에게 사면증을 얻는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게르스텐마이어가 본에 도착하자 블랑켄호른은 외교 정책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를 말렸다.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을 오래 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그러한 욕망을 제대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두 사람은 미국 대표인 코넌트 교수와 브루스 대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거의 모든 인사 결정에 조언을 구하는 또 다른 막강한 실세인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의 지지도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다시 1년 6개월간 외교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아데나워의 지휘로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이 외교 정책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적어도 이제는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와 평생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브렌타노가 마침내 자기 소원을 이루게 된다면 그는 본을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폰 브렌타노는 그에 관한 반대에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반응을 보였다. 먼저 그는 반대한 이들을 비난하고 모든 것을 내 던지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당에 장관 자리 하나를 내줄 것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부수상 자리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부수상 자리는 다른 사람도 노리고 있었다. 바로 프란츠 블뤼허였다. 그는 아 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프리츠 쉐퍼와 1953년 미래에 선거를 이끌 인물로 떠오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도 이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부수상 자리에 관한 꿈도 시들게 되자 폰 브렌타노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연정 협상 시작 때부터 자기 뜻대로 당 내부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이 대연정은 그에게 힘든 과제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자주 대화를 나눈 자민당(FDP)의 한스 벨하우젠은 자민당(FDP) 지도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고 놀랐다.” 그러한 많은 정치가는 한 명의 연정 지도자가 길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일단 자리를 단호하게 지정하여 그들의 변함없는 출세욕과 한시적인 충성심을 보여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길들이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은 내각에 자리를 하나 얻고 싶어 하는 정치 후계자들을 모아 그들의 도움으로 연정 파트너들을 정부에 묶어 두는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서 ‘특임장관’의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난 4년 동안 아데나워는 자기 내각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사실 그 장관들은 과거 자신이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장관들은 비정치적인 전문 관료들이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병약하거나 비활동적이었다. 이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43살이라는 한창나이에 접어든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빌헬름 황제 시절에 나올법한 독일 민족주의자인 로베르트 레어를 대체하였다. 아데나워는 슈뢰더가 명민하고 쓸모가 많은 인물로 여겼다. 또한 그는 내각에 개신교적 요소를 강화할 인물이었다. 그의 경쟁자인 로베르트 틸만스는 개신교의 정치 세력의 주요 인물로 베를린 파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에게는 특임장관의 소임이 부여되었다.     

내각에 진입한 또 다른 풋내기로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있었다. 내각의 무리에 최대한 빨리 영입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기사당(CSU) 당대표 직무대리이며 독일 연방의회의 기사당(CSU) 지방당 파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이 적격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그가 52명에 달하는 기사당(CSU) 파벌을 연정으로 이끌어 들였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총선 직후 슈트라우쓰에게 새 내각의 가정부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그가 얼마나 버릇없는 인물인지를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었다. 사실 이는 인사 정책적인 실책이 될 만한 일이었다.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의 면전에 대고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수상 각하. 제가 그렇게 가정부 장관이 되면 나라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38살이고 미혼으로 가정이 없습니다. - 제가 가정부 장관이 된다면 모든 정치만평가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아데나워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대로, 사실 이 자리에는 신앙심이 깊고 자녀가 많으며 기민당(CDU)의 반자유주의적인 가톨릭 파벌에 속하는 프란츠-요제프 뷔르멜링이 적격이었다. 뷔르멜링도 아데나워에게 절대복종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 가장 알맞은 인물이었다.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가 어떤 자리를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하여 오랫동안 불편한 심정을 지니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슈트라우쓰는 자신이 특임장관 자리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슈트라우쓰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방부 장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0월 3일 바이에른 주지사이며 기사당(CSU) 당대표인 한스 에하르트로부터 4장짜리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 요청 사항을 밝혔다. “기민당(CDU) 당내 차원에서 균형 잡힌 권력 분산을 위해서는 나중에 바이에른이 추천한 적합한 인물이 국방부를 담당하고 그의 제안으로 국방부 정책을 이끄는 것이 중요합니다.” 테오도르 블랑크가 이 자리를 노리고 다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정부 구성에서 어려움을 야기한 일은 기사당(CSU)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아데나워가 총선 이후에, 그가 귀찮게 여기던 재무장관 쉐퍼를 물러나게 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쉐퍼는 훨씬 더 자리에 집착했다. 그리고 부수상으로서 힘을 쓴 끝에 자리를 보전하고 정부 구성 말미에 가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서 아데나워 반대파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4개의 특임장관 자리를 신설하려는 아데나워의 계획을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는 자기 의지를 관철하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출신 장관의 경우 젊은 정치가들을 등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후에 아데나워 시대에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결정적인’ 인물로 활동하였고 그 이후에도 그러하였다. 새로 구성된 내각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구상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하였다. 이 말을 모두가 기뻐할 리는 없었다. “이 내각 구성은 말 사육장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젊은 말과 늙은 말들이 같은 우리에 섞여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들은 서로에게 길이 들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젊은 말들이 늙은 말들에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젊은 장관들에게 가르침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의 이 늙은 ‘수말’에 속하는 이는 쉐퍼 이외에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야콥 카이저, 안톤 슈토르흐가 있었다. 카이저와 슈토르흐는 사회상임위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보였다. 또한 카이저는 난민 기민당*도 대표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카이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틸만을 앉힐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저가 또다시 무례하게 반항하는 경우에는 특임장관으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일단 정리하였다.     

* 난민 기민당[Exil-CDU,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점령 지역과 동독 지역에서 피난 나온 난민들 연합체를 대표하는 기민당(CDU) 지방당 단체]     

야콥 카이저의 운이 이제는 기울고 있었다. 본에서는 이미 ‘전독 야콥’이라는 조롱하는 식의 말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안톤 슈토르흐와 더불어 제2기 연방의회 회기 안에 ‘포괄적인 사회 프로그램’을 완성하겠다는 야심에 찬 목표는 아직도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기민당(CDU) 내부의 노조 파벌과 ‘잘 어울리되’ 힘은 없는 장관을 임명하고자 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파벌에는 뛰어난 지도자급 인물도 없었다. 성실한 테오 블랑크는 몇 년 전부터 독일군 설립 계획에 여념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노령으로 은퇴하게 되는 빌헬름 니클라스 대신에 새로운 장관은 내각에 영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장관은 당내 좌파 출신이 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하인리히 륍케를 후보로 선택하였다. 그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의 농업부장관으로 재직하기 전부터 이미 ‘붉은 륍케’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던 인물이었다. 그의 정적들은 자우어란트의 엄청난 농지개혁을 두고 그를 ‘재산약탈자’라고 부르게도 하였다. 이제 59세가 된 그는 20대 무렵부터 농업협동조합에서 활동해 왔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는 프로이센 의회에서 중앙당(Zentrum) 파벌에 속하기도 하였다. 그는 거의 언제나 토지를 많이 소유한 이들과 맞서 싸워왔다.     

이 유머 감각이 없고 매우 고집이 센 이 당 동료는 개인적으로 아데나워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1947년과 1948년에 그와 아데나워 사이에 벌어졌던 오래된 갈등도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뒤셀도르프 지방당의 보수 파벌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농업은 개혁의 동력이 필요했다. 농업의 구조가 미비한 상황은 개혁되어야 했다. 또한 농가 소득도 비농업 분야의 소득과 형평성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농업 보조금도 축소될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 정권의 제2기 내각에서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개혁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하인리히 륍케였다. 곧 독일 연방정부는 해마다 발표하는 ‘녹색 계획’*을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농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독일 농부연맹(DBV)은 륍케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무능력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한 아데나워는 륍케를 두둔하였다. 그래서 이 초임자가 내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게 되었다. 또한 나중에 아데나워가 알게 된 바와 같이 1960년대에 기민당(CDU)의 미래를 좌우할 인물을 등용하게 되었다.     

* ‘녹색 계획’[Grüner Plan, 역자주 – 독일 정부가 농업 생산 증대를 위하여 1950년대 실시한 농업 개혁 계획]     

그 다음으로 이 기간에 륍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인사정책적 결정이 내려졌다. 연방법무장관인 토마스 델러가 물러났다. 그 대가로 델러는 자민당(FDP) 원내총무가 되었다가 결국 1953년 10월 프란츠 블뤼허를 몰아내고 당대표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 10월에 그 누구도 델러가 법무장관을 그만둔 일이 아데나워와 자민당(FDP) 사이에 매우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보기에는 델러를 둘러싼 문제가 기민당(CDU)과 바이에른의 자민당(FDP) 사이의 선거전의 여파로 보였다. 바이에른에서는 델러와 뷔르츠부르크의 대주교인 율리우스 되프너 사이에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다. 토마스 델러는 바이에른의 자민당(FDP) 당수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연방 법무장관이었다. 그런 델러가 되프너를 지방법원에 형사고발한 것이다. 그 이유는 되프너가 12월 31일 미사에서 자민당(FDP)을 공격하는 내용의 강론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되프너가 이를 부인하였고 이는 기사당(CSU)에 선거전에서 좋은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모양이 되었다. 사실 이는 프랑크 지방에서 벌어진 진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사당(CSU)이 바이에른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이 사건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 것이다.     

아데나워는 1953년이 되자 바이에른과 그 나머지 주에서 종교에 관련된 정책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기사당(CSU)은 바이에른당을 지지하던 성실한 가톨릭 유권자들의 표를 얻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일 전체를 놓고 볼 때 아데나워가 압승을 거두게 된 것은 오로지 개신교 유권자들의 절대적 지지 덕분이었다. 그래서 기사당(CSU) 소속 의원으로 나중에 연방 법무장관이 된 리하르트 예거는 1875년의 문화투쟁 시기에 도입되었던 의무적인 군복무 제도를 철회하자는 요청을 제기하였다. 반면에 기민당(CDU) 내부의 개신교 파벌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새 내각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배당된 10개의 자리 가운데 기민당(CDU) 개신교 파벌은 겨우 3개만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종교 문제는 무엇보다도 주 정부 차원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 사이에 갈등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종교 문제는 선거전에서 늘 되풀이하여 새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 델러는 기민당(CDU) 내부의 성직주의*에 희생되어 실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민당(FDP)의 최고위 당료들이 그가 법무장관으로 남는 것을 막겠다고 다짐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소장인 회프케 아쇼프와 독일연방 대통령 호이쓰가 델러를 반대하는 전선의 선봉에 서 있었다. 회프케 아쇼프는 호이쓰를 찾아가서 연방헌법재판소법의 명백한 결함은 개정을 통하여 제거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델러가 법무장관으로 있는 한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이라고 본 것이다. 아쇼프와 그의 몇몇 동료 재판관들은 델러가 다시 법무장관으로 임명된다면 물러나야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테오도로 호이쓰는 아쇼프와 마찬가지로 델러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해 있었기에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는 프란츠 블뤼허와 에리히 멘데, 그리고 당연히 아데나워에게 선언하기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토마스 델러에 관한 법무장관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매우 심각한 헌법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노릇이었다. 그러한 경우에 장관 임명에서 대통령의 실질적인 검토 권한에 관한 포괄적인 문제가 논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이쓰는 회프케 아쇼프에게 뷜러훼헤에 머물고 있는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이 사정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 성직주의 [Klerikalismus, 역자주 – 교회 특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가 종교적 지배권을 내세우는 경향을 말함.]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총선이 끝난 직후에 델러가 주최한 칵테일파티에 나타나 의도적으로 그에게 “안녕하십니까. 법무장관님!” 하고 인사하였음에도 며칠 후에 델러가 더 이상 장관직을 수행하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실히 천명하게 된 것이다.      

분명히 델러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민당(FDP) 지도부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10월 19일 새 내각의 선서가 있던 전날 밤에 자민당(FDP) 대표들이 호이쓰를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음날이 되자 장관 선거가 있기 30분 전에 지금까지 주택부에서 장관으로 일해 온 자민당(FDP)의 프리츠 노이마이어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법무장관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게 된 것이다. 노이마이어는 검은 정장을 입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토마스 델러는 연방 수상에게 매우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그를 위하여 연방 대통령을 설득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고 여긴 것이다. 델러의 생각에 이는 참으로 신의 없는 일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아데나워를 위하여 모든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데나워도 나름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길게 늘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델러의 생각에는 아데나워 수상이 원하기만 했다면 다른 어려운 상황에서도 델러를 유임시키고자 하는 뜻을 관철했을 것이었다. 델러의 실망은 이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고 소외감은 삐딱한 마음을 낳고, 삐딱한 마음에서는 증오가 싹트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도 마찬가지로 증오로 응답하였다. 그 결과는 당연히 정치적 파편 더미였다. 이후 12년 동안 두 사람은 대면한 적이 없었다. 1965년 1월이 되어서야, 곧 아데나워가 많은 실망을 경험한 다음에야 오토 슈마허-헬몬트의 중계로 이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민당(FDP) 또한 델러가 법무장관에 유임되는 것을 간절히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자민당(FDP)의 선거 결과에 관한 탄식은 깊었다. 자민당(FDP) 지도부의 야망이 있는 정치가들의 다른 정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무리는 다른 정당의 인사들에 비하여 전망이 밝지 않았다. 장관 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민당(FDP) 내부에서는 파벌끼리 서로 비난하였다. 선거를 망친 것이 상대방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데나워는 1955~1956년 이후에 보여 준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의 커다란 희생양이 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진짜 희생양은 라인홀트 마이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연방정부에 맞서 사민당(SPD)과 연정을 구성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1949년 선거에서 17.6%를 득표했던 자유주의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12.7%만 득표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던가? 마이어는 즉각 결과에 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게파르트 뮐러가 주도하는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대연정의 길을 열어주었다. 대연정을 통하여 뮐러는 실질적으로 연방참사회의 의사 결정권을 확보하여 결국 아데나워가 연방참사회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훌륭한’ 자민당(FDP) 인사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게 되었다. 블뤼허, 프로이스커, 노이마이어, 쉐퍼는 내각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1956년 2월 23일에 안 좋은 모습으로 연정을 끝낼 때까지는 아데나워 지지 세력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이 보기에는 제2기 내각 정부의 수립에 관한 연정 내부적인 결정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자민당(FDP)을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러했다. 표결에 참여한 연정 관계자 44명 가운데 내각에 대하여 24명만이 찬성을 하고 12명은 반대하고 8명은 기권한 것이다. 이러한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은 아데나워의 인격이 아니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절대다수가 자민당(FDP)이 ‘아데나워의 품’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은 보인데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독일당(DP)은 비교적 쉬운 상대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한스-크리스토프 세봄과 결별하고 싶었다. 그가 교통부 장관의 업무를 잘 수행했음에도 그러하였다. 세봄의 일요 연설은 늘 아데나워에게 골칫거리였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자신이 하인리히 헬베게와 그의 생각에 믿음직한 한스-요아힘 폰 메르카츠를 내각에 영입하고 세봄을 내치게 되면 독일당(DP)이 그와 결별하려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민당(FDP) 출신으로 협상을 벌였던 한 인물이 아데나워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게 되면 헬베게는 공중 분해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매우 기괴하고 독일 내각의 역사에서 단 한 번 있었던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장관 임명 하루 전인 1953년 10월 19일 세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아데나워의 친서를 받았다. “귀하께서 연방정부 장관으로 재임명되는 경우에는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얼마 후에 있을 니더작센의 지방선거는 예외로 하고 말입니다.” 세봄은 자기 장관 임명이 확정된 지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서면으로 아데나워의 부탁에 동의하였다. 다만 자기 선거구와 선거전에서의 연설은 그러한 제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다시 세봄에게 정치적 발언은 차기 니더작센의 지방선거의 경우에만 한정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구두로 그렇게 합의를 한 것 아니냐고 한 것이다. 세봄은 이번에는 좀 더 양보하여 정치적 발언은 자기 선거구와 니더작센에서만 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을 여전히 내세우며 아데나워가 지난 편지에서 원래 요구했던 ‘차기 지방선거’라는 표현은 삭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관용을 발휘하여 여기에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내각의 규모가 점점 더 확대되는 가운데 추방민당(BHE) 측에서도 2명의 장관을 임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발데마르 크라프트와 테오도르 오버랜더였다. 아데나워는 연정 안에 추방민당(BHE)을 끌어들이면서 이 당의 세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그렇게 되면 이 당의 관료들과 지지자들이 누구를 택하게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민당(SPD)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당대표인 크라프트와 추방민당(BHE)의 바이에른 지방당 실세인 오버랜더는 아데나워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민당(CDU)에 기우는 무리를 미리 정부에 끌어들인다면 추방민당(BHE) 진영의 기민당(CDU) 지지자들을 확대하는 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특이하게도 아데나워는 나치에 협력한 전적이 있는 두 사람을 처음으로 각료로 임명하였다. 발데마르 크라프트는 탁월한 조직가로 1898년에 태어난 인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민족 분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가 지배하던 포젠에서 ‘독일 농민총연맹’(HDBV)과 폴란드 제국의회의 독일 소수민족 의원 대표를 역임한 바가 있다. 1943년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여 나치 친위대 명예돌격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부터 그는 ‘라체부르크의 외치는 이’(Rufer von Razeburg)가 되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니더작센, 바이에른 숲에 있는 난민 집단을 규합하여 추방민당(BHE)이 놀라운 지지를 얻도록 하면서, 거의 맹목적으로 추방민들의 이익을 위하여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지방 정부에 진출하도록 그들을 이끌었다.     

크라프트보다 더 문제가 되는 정치적 과거가 있던 인물은 테오도르 오베랜더였다. 그는 학자이며 동유럽 전문가로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단치히에서 농업정책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 해방운동’(Russische Befreiungsbewegung)의 블라소프 장군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의 러시아 침공으로 1950년대 말 그에게는 이른바 ‘오버랜더 사건’*의 소문이 따라다녔다. 1951년부터 그는 48살의 나이로 바이에른 주의 난민문제 담당 장관을 지냈다.     

* 오버랜더 사건 [Fall Oberländer, 역자주 –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오버랜더가 폴란드 양민을 학살했다는 언론 보도에 따른 사건]     

1953년 고위 공직자 임명 때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과거 나치에 속하는 인물을 내각에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직접 말한 대로 오버랜더는 ‘갈색, 그것도 깊은 갈색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오버랜더는 18살 때인 1923년 11월 9일 펠드헤른할레의 군중대회에 참가하고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나치 돌격대장과 나치당 대관구 지도관를 겸임하였다. 그는 나름대로 변명하였다. 곧 자신이 동유럽 민족들에 관한 나치의 비인간적인 정책을 종종 비판하였으며 그런 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은 동유럽가 독일의 지배 아래 놓이고 그러는 가운데 독일이 슬라브 민족들을 현명하고 상당히 인간적으로 대접하며 그들의 문화적 자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존중을 하며 대하는 것이었다.      

* ‘갈색, 그것도 깊은 갈색의 인물’ [braun, sogar tiefbraun, 역자주 – 지독한 나치주의자. 나치의 군복 색깔을 비유한 말]     

크라프트, 더구나 오버랜더는 분명히 정치적으로 문젯거리가 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둘 다 새로운 의회민주주의 제도라는 틀 안에서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 자신들이 개과천선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다. 1953년에는 아직 그가 ‘기회주의자’라는 사실은 아직 엿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이들이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보여줄 때 아데나워는 그러한 정치가들을 활용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아데나워를 공격하는 것도 사실 힘든 일이었다. 1949년 이후 모든 정당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과거 나치 추종자나 협력자들을 위하여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버랜더와 같은 인물도 바이에른 정부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바이에른 정부도 사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그 당시에는 새로 구성된 내각에 관한 여론의 비판도 비교적 온건하였다. 1959~1960년에 들어서자 오버랜더를 궁지에 몰아갔던 《슈피겔》 조차도 1954년에는 노골적인 논설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사실 그 당시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는 추방민부 장관으로 과거 나치 전력이 있는 인물을 등용한 것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었다.      

그런데 이는 그 당시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곧 1953년에 크라프트와 오버랜더와 같은 장관들은 연정을 확고히 하려는 이유로 입각하게 되었지만, ‘7월 20일 사건’*에 참여했던 오토 렌츠와 같은 인물은 아데나워가 변방으로 몰아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렌츠의 실각은 그 자기 인생 역정은 아니지만 히틀러의 제3제국에 관한 기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아르바일러 선거구에서 기민당(CDU)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여전히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차관으로서 아데나워의 ‘오른팔, 그리고 왼팔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장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정보부 장관이었다.      

* 7월 20일 사건 [Das Attentat vom 20. Juli 1944, 역자주 -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 베르크 주도로 추진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 사건으로 히틀러는 더욱 포악해져서 전쟁 말기 독일인의 희생도 커지게 되었음.]          

그렇게 현명한 인물이 나치 시대 선전·선동의 책임자였던 괴벨스의 사악한 부서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시절에 그러한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가 다른 어떤 부서에서 그가 길러낸 조직을 장관으로서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또한 현대적인 정치 홍보(PR)에 관한 그의 열정을 더 잘 발휘할 부서가 또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정보부가 1953년 초부터 아데나워 자신이 구상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부서에서는 연방정부 공보실 기능도 겸할 예정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렌츠의 계획에 관하여 매우 분명히 일단 기다려보자는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공보실이 이 구상에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슈피겔》은 총선 이전부터 이미 이에 관련된 강력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아직 젊고 좌파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기자인 로타 륄이 그 글을 편집하였다. 그 글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제목은 ‘초월적 부서’(Über-Ministerium)였다.  《슈피겔》의 주장에 따르면 렌츠와 글롭케는 선전부를 수립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안에 겔렌의 조직을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렌츠가 그러한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슈피겔》의 기사가 보도되고 나서 그가 아데나워에게 9월 2일 제출한 제1차 공식 부서 설립 계획에는 부서에 2개의 국이 있었다. 연방정부 공보실장이 이끄는 연방 공보실과 ‘간사’가 이끄는 ‘대외 업무실’(Öffentliche Angelegenheiten)이 있었다. 이 두 실의 기능을 설명하는 문장에는 ‘Tag X’, ‘Nachr.’, ‘Publ.’, ‘Rel.’, ‘Dem.’과 같은 약어가 사용되었다. ‘Tag X’는 통일 관련 조치를 위한 계획에 해당되는 표시였다. 그 당시 이는 부수상 블뤼허가 자기 부서의 업무로 삼으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Nahr.’은 첩보부의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Publ.’은 한편으로는 ‘조국봉사 연방 중앙사무소’와 연관되었다. 이 사무소는 나중에 가서 ‘정치교육 연방 중앙사무소’로 변경되었다. 여기서는 국내외적으로 문서를 발간하여 기타 홍보 업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Rel.’은 교회 분야에서의 홍보업무를 의미하였다. ‘Dem.’은 인구 통계 관련 업무를 의미하였다.     

9월 한 달 동안에는 이러한 계획에 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부분 언론에서는 비록 일부에서는 작위적인 것도 있었지만 커다란 반발이 있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정 수뇌부에서도 브렌타노와 크로네를 중심으로 한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렌츠의 모든 정적은 이에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계획을 몰아 붙이면 자기가 사실상 독재 정권을 수립하고자 한다는 야당의 비난에 빌미를 제공해 주게 될 노릇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렌츠에게 사적인 홍보(PR) 업무의 조정은 그가 의원 자격으로 수행할 때 더 나을 수 있겠다는 충고를 하였다. 그러나 렌츠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반박하였다. 아데나워가 ‘늘’ 자신을 떨구어 낸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말은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9월 중순부터 14일간 뷜러훼헤에서 또다시 휴가를 보냈다. 그래서 그와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불편한 일을 상당히 길지만 매우 형식적인 내용이 담긴 그의 ‘소중한 업적’에 관한 감사의 편지로 마무리하였다. 나중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이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나섰다. 아데나워는 빗나간 계획과 서로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다는 변명의 말을 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한스 글롭케를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으로 당당하게 임명할 기회를 결국 얻게 되었다. 총선에 승리한 차이니 비록 그가 ‘뉘른베르크 법’*에 관한 주석서의 공동 저자를 가장 중요한 측근으로 임명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과거 베를린 시절과 그 이후에도 글롭케와 잘 알고 있던 오토 렌츠가 글롭케, 그리고 아데나워의 간계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리자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결국 글롭케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10년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될 때가 온 것이다.      

* ‘뉘른베르크 법’ [Nürnberger Gesetzen, 역자주 - 나치 시대에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혼인을 금지하도록 정한 법]     

이 정부 구성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 정권 후반기에 인사 정책의 차원에서 많은 약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탁월한 전략가인 아데나워 수상은 자신이 울부짖는 사자라기보다는 여우처럼 보이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단 아데나워는 본에서 인사 정책에 관련된 욕망이 분출하도록 놔두었다. 그리고 그는 폰 브렌타노에게 누가 주인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나서 뷜러훼헤에 머물며 본에서 벌어지는 소동에서 한 걸음 비켜나 있었다. 휴가에서 돌아오자 아데나워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나 연정에 참여한 군소정당도 총선의 승리자에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내각 구성을 마무리하기 전에 수상의 선택권을 요구했음에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도 사람들은 체신부장관 자리와 델러, 그리고 다른 여러 일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실망한 이들의 탄식이나 연정 내부의 불만이 아데나워가 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더 이상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국내적인 권력 기반을 권위주의보다는 신중함으로 강화한 다음 독일연방공화국의 수상은 이제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서방 정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저면 독일 통일로 그 정책을 화려하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정권 수립 마무리에 이르러서 이제 새 내각에서 특임장관에 임명된 자민당(FDP)의 헤르만 쉐퍼도 그렇게 보았다. “통일 문제에 관한 예측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아데나워가 이를 달성하게 된다면 그는 엄청난 존재가 되어 독일의 입법 회의에 자민당(FDP)의 역사가 함께할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역겹지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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