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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유럽 전체의 질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II

아데나워 전기 II

드골  

   

프랑스 벵스에서 휴가를 보낼 때부터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최대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재무장관 플림랭이 그 해 초반에 아데나워에게 프랑스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이 알제리 전쟁으로 몰락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온 손님이 아데나워에게 설명해 준 시나리오는 정말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전이나 인민전선 또는 군부독재나 마찬가지였다. 플림랭에게 남은 방법이 오직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바로 드골에게 독재자 수준의 전권을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이라는 이름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1945년 여름과 초가을에 걸쳐 아데나워는 독일의 라인강 좌안 지역을 프랑스가 점령할 것을 예상하여 드골의 측근과 비밀 접촉을 했다. 그러면서 그 당시 총리였던 드골이 프랑스 점령 지역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그 지역을 대신 장악하자 아데나워는 그동안 프랑스와 접촉했던 흔적을 조심스럽게 지우고자 하였다. 드골은 라인강 좌안 지역을 독일제국과 분리해 루르 지역을 국제적인 공동 관리 지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쉬드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에서 헤센에 이르기까지 마치 띠와 같은 느슨한 독일 위성국가를 세워 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상이 이제 영국 통제지역의 기민당(CDU)에는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일이 되었다. 그 기민당(CDU) 당수인 아데나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전 시기에 취한 프랑스의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정책에 대하여 이제 아데나워는 드골과 그 추종자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아데나워는 드골을 좋게 여길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드골과 그 추종자들이 결국 1954년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드골이 장군이었을 때인 1944년 12월에 스탈린과 러시아·프랑스 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을 아데나워는 외교적 차원에서 가장 경계하였다. 결국 그리되면 독일을 억압하고자 프랑스와 러시아가 직접 협력하고 나서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게다가 1950년대부터 아데나워가 프랑스와 독일 화해 정책으로 만나온 프랑스 인사들은 모두 프랑스 제4공화국 정치가들이었다. 여기에는 로베르 쉬망, 피에르 앙리 타이트겐, 조르쥬 비달, 앙투안 피네, 기 몰레가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새로이 펠릭스 가이야르와 피에르 플림랭이 있었다. 드골의 절대 추종자였던 미셀 드브레는 이들을 경멸하며 ‘우리를 통치하는 왕자들’(Ces princes qui nous gouvernent)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드골은 이들과 다른 공화국을 꿈꾸고 있었다. 곧 독재적이고 보나파르트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프랑스를 꿈꾼 것이다. 이러니 드골과 그의 추종자들과 관계를 단절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였다.     

1958년 5월 13일 알제리에서 벌어진 소동과 여기에서 촉발된 제4공화국의 위기는 아데나워에게 커다란 근심거리였다. 5월 19일 월요일 정오가 지난 시간에 폰 브렌타노와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였다. 이때는 드골이 프랑스 외무부 건물에서 3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기 3시간 전이었다. 이 기자회견은 그의 정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은 이미 이틀 전에 오랜 친구인 라로이로부터 프랑스 대통령인 코티의 주변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불과 석 달 전에 플림링이 드골이 문제 해결의 적임자라고 여긴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플림링이 1958년 5월 14일 기 몰레와 더불어 ‘비상내각’을 수립하였다.     

샤움베르크궁에서 아데나워 수상과 대화를 나눈 다음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상은 드골과 관련된 일의 전개에 대하여 매우 근심하였다. 수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① 프랑스와 소련이 특별 안보조약을 맺기 위한 파리-모스크바의 직접적 소통. ② 프랑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③ 프랑스 통합의 종말.” 결국 누구도 그 당시 드골 장군의 외교적 구상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몰레와 플림링에게 그들의 민주·사회주의 연정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 통합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드골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이미 이러한 아데나워의 첫 반응이 앞으로 드골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신경써야 할 문제를 보여주었다. 곧 프랑스가 소련에 기울 경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에 미치는 위험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드골이 정권을 잡은 다음 프랑스 신임 외무장관에 전임 주 본 프랑스 대사였던 쿠브 드 뮈르비에가 임명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무르빌은 주독 대사로 있으면서 독일 정치가들의 신뢰를 얻었다. 아데나워의 신뢰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세력이 없는 자를 고위공직자로 임명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주는 일이었다. 곧 드골이 직접 외교를 챙길 속셈인 것이었다.     

독일에 반드골주의자가 있었다면 그것은 드골이 정권을 잡은 이후 얼마 안 된 시기의 아데나워였을 것이다. 1958년 7월 초에 연방 대통령을 만나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드골이 내심 독일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드골의 유일한 목표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주도권을 쥐는 일이라고도 하였다. 그의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관한 태도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제4의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데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독일 정책의 주요 목표는 오히려 ‘영국과 지속적인 협력 속에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1956년 가을부터 1958년 5월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매우 좋았지만 이미 깊은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싫어하게 된 것은 드골의 일반적인 인상만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매우 구체적인 것에서도 그처럼 반응하였다. 온 사방에서 그에 관한 부정적인 소식이 도래한 것이다.     

신임 프랑스 국방장관인 피에르 드 기유마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문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곧 드골이 3장으로 작성된 비밀 협약을 단칼에 무력화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당돌한 조롱이었다. 그러한 협상을 맺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 프랑스 정부였다. 한 국가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제 협약을 무효화하고 싶다면 상대방과 올바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매우 건방진 인물이었던 기유마는 슈트라우쓰의 면전에 대고 그 논의가 되는 협상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는 말까지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드골 정부가 들어서기도 전에 본에서 스스로 그에 관하여 슈트라우쓰와 대립각을 세울 심산이었다.      

슈트라우쓰가 이에 관하여 보고한 지 며칠 뒤에 슈파이델 장군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하였다. 당시 그는 우럽 중부 지상군 총사령관으로서 퐁텐블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프랑스 장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슈파이델은 이제 파리에 있는 독일 비밀정보원이 보낸 매우 확실한 정보를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곧 소련 정부가 드골에게 연맹을 제안하면서 프랑스의 핵무기 제조를 돕겠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으로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여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프랑스의 피네의 측근에게서도 비슷한 소식을 접하였다. 아데나워가 미국 대사 브루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드골은 실제로 소련의 유혹에 넘어갈 심산이었다. 나중에 프랑스 정부의 인사들은 이러한 조치의 숨은 뜻을 공개하였다.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 같지만 마키아벨리적인 뜻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곧 드골 장군은 소련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제5공화국 정권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초기에 공산당을 무력화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골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누가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둘러싼 위기에서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가 반년 안에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여겼다. 이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프랑스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소련이 프랑스에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드골이 보낸 특사가 아데나워에게 전한 이야기는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곧 프랑스 군대가 독일 사령관 휘하에서 지휘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 사령관은 바로 슈파이델 장군을 의미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별로 좋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한 피카 장관에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3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런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장군 드골의 기분을 맞춰주고자 파리를 방문할 의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덜레스는 서한을 통하여 드골을 방문할 의사를 비치어 온 바가 있다. 피카 특사가 드골의 의사를 반영하여 아데나워에게 전한 의사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더욱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사실 아데나워가 패전국의 대표로 파리의 드골을 방문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 아니던가? 의전을 따지자면 아데나워가 1956년 11월에 기 몰레 총리를 공식적으로 예방하였으니 이제는 프랑스가 독일을 방문할 차례가 아닌가? 그런데도 피카 장관은 이제부터 진행될 일정에 대하여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곧 드골은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으니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국 총리와 미국 국무장관도 드골의 기분을 맞추어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오랜 숙고를 거쳐서 아데나워는 쉐르펜버르그 차관을 파리로 파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에서 회담 일정을 조율하도록 한 것이다. 후일 드골이 회고록  《희망의 기억》(Memoirs d’espoir)에서 분명히 지적한 대로 아데나워의 요청으로 그 회담이 이루어졌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도 의전을 매우 따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카데나비아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드골이 자신을 [드골의 고향 마을인] 콜롱베레되제글리즈 (Colombey-les-Deux-Églises)로 초대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드골이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를 사적으로 초대한다면 이는 의전상의 특전으로 이해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카데나비아에서 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결정한 콜롱베레되제글리즈 방문 이틀 전에 그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여기에서 9월 13일 바덴바덴을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 바덴바덴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에 9월 14일에 콜롱베레되제글리즈로 출발할 것입니다. 별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필요한 방문입니다.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하루 머문 다음 월요일 아침 다시 바덴바덴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딸 리아와 로테의 시중을 받으며 빌라 아르미니오 안에 있는 큰 공원 지역 한 가운데에서 머물 때인 8월 16일 비밀리에 카데나비아를 찾은 앙투안 피네조차도 그를 제대로 안심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로베르 쉬망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된 후 아데나워와 솔직한 대화를 나눈 두 명의 프랑스인은 바로 장 모네와 피네였다. 이 무렵 피네는 드골 정부의 재무장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1960년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뜻을 같이하던 피네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구하며 유럽경제공동체(EEC) 건설에서 프랑스 측의 헌신적인 협조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자인 기 몰레가 1959년 1월 내각을 떠난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드골과는 다른 정책을 추구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드골은 드골주의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인물들인 미셸 드브레, 앙드레 말로, 조르주 퐁피두나 정부 고위직의 쿠브 드 뮈르비에와 자크 뤼프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국방 분야에서도 드골주의자 장성들을 점점 더 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만 해도 프랑스는 제4공화국에서 제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드골 장군이 알제리 내전을 과연 해결할지, 그리고 만약 해결한다면 어찌 해결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외교에서도 드골은 일을 확실히 처리하지 못하였다. 비록 그가 자기 회고록에서는 다르게 말하였지만 말이다.      

드골은 이 회고록 제11권 시작부터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프랑스가 ‘일등’ 국가가 되어야만 그 정체성을 확보하게 될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 책의 서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사용된 단어들이 ‘grandeur’, ‘partie’, ‘dignite’, ‘fierte’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로 드골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지난 10년 동안 추진해온 유럽 통합 정책만이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드골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였다.     

피네는 그러한 아데나워의 생각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드골이 합리적인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곧 드골이 자기 정치적 동지들과만 일을 하였다면 반유럽적인 대통령 중심제의 정권이 수립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몇 주 전에 피네가 그의 동료인 비올레를 통해 아데나워에게 전달한 바에 따르면 드골 장군의 퐁피두, 기오메, 말로와 같은 측근들 사이에는 실제로 프랑스와 소련이 맺었던 과거의 유대를 그리워하는 반유럽 집단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위험은 일단 봉합된 것처럼 보였다. 아직은 피네, 플림릉, 몰레와 같은 프랑스의 친유럽파 정치가들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려있었다.     

또한 피노는 친유럽 정치가로 쿠브 드 뮈르비에도 언급하였다. 피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회의론자인 것은 분명하였지만 본 주재 프랑스 대사로 근무하는 동안 ‘유럽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드골이 단순히 정부의 협력을 선호하고 유럽경제공동체(EEC)의 관료제도에는 분명한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피네의 말에 따르면 일련의 문제들에 관하여 드골이 유럽 통합 노선을 택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드골 자신이 유럽경제공동체(EEC) 조약을 파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유럽 공동시장과 독일과 프랑스의 협력에 관한 드골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피네는 미국이 지배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드골이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미국은 드골의 생각에도 미국인들은 “과거 역사가 없는 새로운 민족으로 유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배제하려는 드골의 의지는 분명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도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의 드골 방문은 잘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다만 피네는 드골 장군이 어떻게 방문객 덜레스를 안달 나게 했는지를 재미있어하며 이야기해주었다. 곧 드골은 덜레스가 한 시간 내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 두면서 ‘무관심하고 교만한 시건으로 그를 처다보았다.’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드골이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상당이 의기소침했던 덜레스의 표정이 풀어졌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사실 이런 자세한 이야기에 관한 관심이 늘 있었다. 8월 초만 해도 아데나워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드골과 대담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슈파이델 장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였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일하는 프랑스 출신의 장군들은 드골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매우 푸대접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자면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부 유럽 담당 사령관인 발뤼 장군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국가지도자 드골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장군이 인사할 때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악수하기 위하여 손도 내밀지 않는 ‘앉으세요, 장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는 ‘말해보세요, 장군!’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발뤼 장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적 통합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자 드골은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듣고 나서는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당장 나가세요, 장군, 당신은 더 이상 프랑스 장군이 아니오.’”     

드골이 이런 식으로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에는 프랑스 군대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군에서 최소한 일부라도 빼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파견된 프랑스 장교들이 다시 프랑스의 지시만을 받고 만약 반대가 있으면 아예 해체해버리고 독일 지휘자가 많은 프랑스 군을 통솔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슈파이델 같은 독일 장성이 유럽중부군 지상군의 지휘자로 당당하게 퐁텐블뤼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을 드골은 부당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피네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드골이 전반적으로 ‘인간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여전히 드골에 대하여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교만하고 건방지며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드골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피네는 좋은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와의 만남에서 나눈 첫 대화에서부터 드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 것이다. ‘독일연방수상께서는 위대한 인물이시다. 그분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이 기쁘다.     

그 당시 드골은 여전히 아데나워가 파리를 방문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들은 바로는 피네가 그런 경우에 발생할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일단 아데나워는 5천만 명의 국민이 사는 대국의 정부 수반으로서 9년간 일해 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가 그의 도덕성을 칭찬하고 있었고 게다가 이미 여든을 넘긴 인물이었다. 그러니 아데나워를 평범한 청원인처럼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골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를 콜롱베(Colombey-les-Deux-Églises)로 초대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피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드골과 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데나워는 드골이 자신을 동등한 파트너로 여길지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 장교들에 관한 파리의 냉정한 태도가 어떤 암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피네는 아데나워에게 너무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조언하였다. 곧 ’패전국의 국민에 속한다는 편견으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결국 프랑스도 히틀러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드골은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노릇이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드골은 아데나워를 잘 영접할 것이라고 하였다.     

요점은 드골이 현재 독일에 대하여 지닌 생각에서 이 민감한 만남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드골은 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독일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영국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모로 아데나워가 프랑스를 아는 수준보다 드골이 독일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드골이 독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데나워가 프랑스를 안 것만큼 먼 과거의 일이었다. 드골이 학생이던 시절에 몇 년 동안 여름휴가를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가 1908년이었다. 그 당시 드골은 바덴 지역의 한 마을에서 1870년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쟁 기념비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그 마을에서 전쟁에 참여한 100여 명 가운데 41명이 희생되었다. 드골은 신문을 읽으면서 독일이 프랑스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17세였던 드골이 쓴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3년 전부터 유럽은 변해왔다. 그런 가운데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널리 퍼진 불쾌한 감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시르에서 교육을 마친 드골은 1914년 8월 1일 초급 직업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전선에서 싸우고 2번 부상을 입고 결국 두오몽(Donaumont)에서 지옥을 맛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독일군에게 허벅지를 칼에 찔려 고통 속에 기절하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프로이센의 근위보병 돌격대들 한가운데 있었다. 그로부터 32개월 동안 그는 독일의 장교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처음에 오스나브뤼크를 시작으로 폴란드의 츠쿠체친, 독일의 잉골슈타트와 로젠베르크, 그리고 프랑켄 지역의 뷜첸부르크의 수용소로 옮겨 다녔다. 다섯 차례나 탈옥을 감행하였으나 그때마다 다시 잡혔다. 그래서 드골을 독일의 군경찰과 민간 경찰을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서간을 보면 드골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올바른 대접을 받았고 집에서 오는 우편물과 소포를 전달받았으며 독일어로 된 서적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시대 유럽의 봉건적 정신이 최소한 그 당시 포로로 잡힌 적국의 장교에게는 여전히 적용되었다. 이때 읽은 것 가운데에는 폰 베른하르디스(Friedrich von Bernhardis, 1849~1930)의 《독일과 차기 전쟁》(Deutschland und der nächste Krieg)이라는 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드골이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주의에 관한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드골은 영국 장교와 러시아 장교들도 만났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소련의 총사령관이 된 추카세브스키도 있었다. 드골은 독일어 실력을 잘 다듬어나갔다. 자신을 감시하는 보초와 계속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러나 드골이 지닌 독일에 관한 인상은 당연히 복잡했다. 사실 부정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가 집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내 주변의 독일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 가운데에는 지식인도 있는데, 가끔 독일 민족과 프랑스 민족은 일단 평화가 오면 서로 연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아마 여러분을 웃을 것입니다.” 이렇게 드골은 아데나워가 독일 황제국 시절의 쾰른시의 마지막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기를 그와 같이 독일에서 세월을 보냈었다. 드골에 1958년과 1967년 아데나워와 나눈 수많은 대담에서 그는 자기 포로 시절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18년 11월 드골은 석방되어 프랑스 장교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드골에게는 자신이 잃어버린 세대에 속한다는 의식이 낯설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맥밀런이 영국군 장교로서 벨기에 플라망(Flandern) 지역에서 겪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1920년 드골은 베이강(Maxime Weygand, 1867~1965) 장군의 교육참모로 일하게 되었다. 베이강 장군은 러시아의 필수드스키 사령관이 공산주의자들의 붉은 군대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곁에서 일하던 폴란드 출신의 부관은 그가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네, 메드베츠키. 우리는 파국의 세대라네.”     

드골은 1024년 독일 마인츠에서 독일에 관한 경험을 다시 쌓게 된다. 또한 후일에 드골은 프랑스의 라인란트 점령기 말엽, 곧 1927년부터 1929년까지 2년에 걸쳐 트리어에서 위수 근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주로 참모와 장교 양성 업무를 수행했던 드골은 이 시기에 보병대대의 지휘를 맡아 수행하였다. 후일 독일 외무장관이 된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그 당시 트리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때 드골을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드골은 키가 크고 자존심이 강하고 코가 매우 긴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는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독일 학생들 앞을 당당하게 지나가곤 하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학생들은 그가 돈키호테 같다고 비웃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드골이 이미 매우 훌륭한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적들의 불화》(La discorde chez l’enemi)였다. 이 책에서 드골은 자신이 정치 심리학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드골은 이 책에서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 1846~1934) 장군이 1916년과 1917년에 각각 마른강 전투*와 룬덴도르프(Ludendorff)에서 저지른 실수를 날카롭게 분석해 내었다.      

* 마른강 전투 [Marneschlacht, 역자주 – 제1차 세계대전 때 파리 근처 마른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 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폰 클루크의 오판으로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바람에 독일의 승리가 좌절되고♗ 지리한 참호전이 5년이나 지속됨. 나중에 이 일로 폰 클루크는 해임됨. 프랑스는 이를 ‘마른강의 기적’으로 부르게 됨.]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드골은 그 당시 독일에 대하여 매력을 느꼈다. 그는 단순히 독일 ‘제국’에 관한 경탄과 두려움을 번갈아 가며 느낀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경탄과 두려움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기는 하다. 트리어에서 근무하던 때부터 드골은 독일의 복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드골은 프랑스인으로서 독일의 신민족주의 자들의 저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드골은 판 덴 브루크*의 《제3제국》을 알고 있었다. 드골은 탱크 만들기를 주장하여 1930년대 파리에서 군사 개혁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는 반드시 상대하게 될 독일의 최신 무기에 맞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여기에서 이 보수주의 장교인 드골은 외교적 터부에 대하여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1935년 자기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조만간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독일의 모든 적들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여기에는 소련도 포함되었다. “이는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 외의 것은 다 그저 아름다운 소설일 뿐입니다.”     

* 판 덴 브루크 [Moeller van den Bruck, 1876~1925, 역자주 – 독일 민족주의를 일깨운 《제3제국》(Das Dritte Reich)의 저자로 나치당의 출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침.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함.]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드골은 독일에 맞선 전투에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자기 입지를 확립하였다. 드골이 그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독일 문제의 해결을 고전적인 직설법으로 구상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독일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 베스트팔렌, 그리고 헤센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리해야 합니다. 독일을 조각내야 합니다.” 드골은 1944년 이미 자브뤼켄 지역으로 진군하는 자리에서 냉소적으로 바레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언젠가 모든 독일인들이 로렌의 십자가*를 차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드골은 1945년 가을에 프랑스 점령 지역의 주요 도시의 시장과 시의회 의장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프랑스와 연계된 커다란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드골은 과거 [콩고 고와국 수도] 브라자빌이나 알제리에서 아프리카와 아랍의 실력자들 앞에서 이와 똑같이 말 한 적이 있었다.     

* 로렌의 십자가 [Lothringer Kreuz, 역자주 - 프랑스 로렌 지방의 상징으로1871년에서 1918년 사이 로렌 알자스 지역이 독일에 합병되었던 동안 로렌 십자가는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의 국기에 사용됨]     

그러나 전쟁 중에도 드골은 독일군들의 용맹과 독일 군대 조직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라로이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12월 소련 측 주최자들의 초대를 받은 저녁 자리에서 드골은, 볼가강까지 진격하고 여전히 아이젠하워의 군대에 대적하고 있는 ‘위대한 민족’ 곧 독일 민족에 대하여 경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드골은 패전한 독일보다 스탈린과 그가 주도한 제5열 스파이에 대하여 더 경계하게 되었다. 이제 드골은 과거 민족 대이동의 역사와 비교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곧 과거 로마, 갈리아, 게르마니아 민족이 ‘프랑스 중부 평원’(katalaunishe Feldern)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유럽의 모든 문명국이 훈족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드골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재무장하는 것을 바랐으나 결코 유럽방위공동체(EDC)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드골은 1954년 8월 31일 프랑수아 페루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은 어떤 방식으로든 통일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통일인가요? 그리고 어떤 방법인가요? 그리고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가요? 이러한 문제를 정치가들이 해결해야 합니다.”     

드골은 서부 독일 지역에서 국가가 수립되는 것에 동의하였다. 또한 드골은 독일의 정치적 재건이 아데나워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 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드골은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존경의 마음으로 역사의 위인들에 관한 자기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가 있다. 드골은 아데나워에 대하여 1932년 그의 에세이집 《칼날》(Le fil de l’epee)에서 처음 언급하였다. 이 책에서 드골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나열하였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애국자들, 대중에게 높고 광대한 지평을 열어주고 또한 민족에게 힘과 확신을 심어준 위대한 지도자들을 언급한 것이다. 1924년에 이미 드골은 전쟁이 벌어지면 ‘기회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고 서술하였다. 독일의 경우 바로 아데나워가 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1958년 8월 초 신임 프랑스 총리였던 드골은 《아데나워의 독일》(l’Allemagne d’Adenauer)을 자기에게 헌정한 로베르 다르쿠르에게 시간을 내어 몇 자 적어 보내었다. 다르쿠르는 아데나워 수상을 매우 존경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드골도 아데나워를 신뢰할 채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직은 드골이 독일 국민에 관한 일말의 의심을 버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프랑스 총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데나워의 독일에 대하여 그 누가 귀하보다 더 잘 알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희망에 넘쳐 이 다면적이고 열정에 넘치며, 잘 알기 힘든 독일 민족을 사랑하고 경탄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바라겠습니까!”     

아데나워가 독일 연방의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을 드골이 매우 경탄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시기의 프랑스 의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드골은 독일연방공화국 제1대 수상에게서 정치가 무리를 자기의 강력한 의지대로 이끌었던 국가 지도자의 면모를 보게 된 것이다. 몇 년 후에 곧 1962년과 1963년 아데나워가 독일 연방의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자 드골은 독일연방공화국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독일은 점차 와해될 것이다. 아데나워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이를 막았었다. 그는 이 나라를 혼란에서 구해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이제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1958년에 아데나워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드골은 많은 굴국이 있었음에도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에 동의하였다. 드골의 서한에 아데나워의 이름은 1945년 10월 29일에 처음 등장했다. 그 당시 총리였던 드골은 프랑스 점령 지역의 총독이었던 쾨니히 장군에게 독일의 국가적 틀에 관한 생각을 요약하여 전달하였다. 일단 독일에 중앙집권제도가 들어서면 안 되었다. 그러면 ‘새로운 제국’이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독일에는 철저한 지방분권구조가 수립되어야 했다. 곧 팔츠, 헤센-나사우, 라인 지방, 바덴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은 독립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를란트는 프랑스의 경제권에 통합되어야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무엇보다도 라인강 좌측의 지역에 있는 주민은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연합국들의 혼란스러운 점령 체계에서 유일한 피난처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이를 이해할 것이라는 표징이 많이 보입니다. 아데나워 정도의 중요한 인물의 태도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1950년 3월의 기자회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통합에 관한 자기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 매우 막연 생각에 찬성한 사람은 드골밖에 없었다. 그 당시 드골은 철저한 반공주의 단체인 ‘프랑스국민연대’(Rassemblement du Peuple Francais, RPF)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 수상은 화해에 앞장서는 분입니다. 아마도 우리 두 민족의 통합을 위해 앞장설 분입니다. 제가 30년 동안 콘라드 아데나워의 언행을 지켜보며 관심을 가지고 공감해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였다. 아데나워가 과거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추구했던 라인란트 정책과 더불어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던 1945년 여름과 초가을에 드골주의자 장군들과 맺은 가벼운 친분의 여파가 그동안 잠재해 오다가 이제야 작용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아데나워의 명성이 마인츠에 주둔한 프랑스 점령군 사령부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은 것으로 보였다. 그 당시 드골은 여기에서 1924년 9월부터 1925년 7월까지 라인군 참모부 제4국에서 시보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의 구체적인 동기와 계획, 그리고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드골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드골은 아데나워가 화해를 추구하는 정치가로서 프랑스에 매우 친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회고록 《희망의 기억》(Memoires d’espoir)에서 드골은 아데나워가 “독일인들 가운데 가장 능력이 뛰어나며 동시에 자기 조국을 프랑스를 향하고 프랑스와 함께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아데나워 사후에 쓴 것이다. 이 책은 드골이 사망하던 1970년에 출판되었다.     

매우 특이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드골은 사실 그의 평생 독일에 대하여 현실적인 환상을 품었었다. 아데나워가 프랑스에 대해 지닌 환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과 경탄으로 생겨난 환상은 1918년 말 긴밀한 만남 이후에는 눈에 뜨일 정도로 독일인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이 줄어들었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 드골은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하였다. 심지에 트리어 주둔군 시절은 물론 1930년대 파리 시절, 그리고 1949년 이후에도 그러하였다. 드골이 지닌 독일에 관한 인상은 먼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또한 독일에 관해 읽은 많은 책, 언론 보도, 그리고 프랑스 외교관 관리 기술자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드골이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마음을 터놓은 최초의 독일인이 바로 아데나워였다.     

드골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1949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정신세계나 경제 또는 정치에 대하여 깊은 정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9년 이후부터는 직간접적으로 프랑스의 정치계와 거의 매일 접촉하게 되었고 최소한 정계의 일부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프랑스의 관계는 사실 1919년과 1945년에 저지른 일련의 정치적 실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어느 사이 아데나워는 프랑스적 사고방식의 특성과 프랑스 국내 정치와 외교의 고유성에 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개성이 뚜렷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인사 가운데 아데나워를 가장 잘 알고 있던 프랑소와-퐁세는 프랑스 신문 《피가로》지와의 회견에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하여 매우 정확하게 예측한 바가 있었다. “자기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이 두 대화 상대는 남을 불신하는 성격에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들로 처음 보는 사람은 매우 무뚝뚝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둘 다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둘의 만남은 조속히 이루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바덴바덴을 출발하여 콜롱베레되제글리즈(Colombey-les-Deux-Églises)를 향한 차 안에서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9월 아침의 찬란한 햇빛, 오트마른주(Department Haute Marne)를 향한 길에서 친절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그의 기분을 좋게 하였다. 아데나워는 매우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드골 장군의 소박한 생활 방식에 놀랐다. 드골과 만난 지 이틀이 지나서 아데나워는 독일연방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드골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황량한 동네의 소박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단층집으로 몇 개의 방은 잘 꾸며져 있었지만, 나머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매우 적막해 보였습니다. 숲에 둘러싸여 있고 마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데나워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정원을 산책하면서 드골이 그를 어떤 장소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정원의 울타리 넘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팔을 길게 내밀어 눈에 보이는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외떨어진 곳에는 아무도 와서 살지 않습니다. 가난한 동네죠.’” 아데나워는 이 수수께끼의 인물을 더 잘알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았다. “사실 그랬다. 그의 관심을 끈 것도 바로 그런 정경이었다.”     

공원 입구에서 그 두 사람은 주일의 격조 있는 회합에 나온 평범한 시골의 신사들처럼 만났다. 아데나워는 다른 이들이 접근을 완전히 차단한 것을 매우 좋게 여겼다. 신문과 사진 기자들은 거의 사적인 방문을 전혀 방해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호이쓰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독일 언론과 미국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가 가지게 된 모든 선입견이 다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드골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드골은 귀가 나쁘지도 않고 눈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책을 읽을 때만 돋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드골은 독일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젊을 때 그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하여 해마다 슈바르츠발트에 왔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두 시간 반 동안 대담을 나눌 때 혼자 통역을 맡았던 장 마이어는 사실 통역할 것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1966년 아데나워의 비망록 제3권이 출간되자 드골 장군의 서재에서 이루어진 이 두 사람의 중요한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 세상에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망록에는 13페이지에 이르는 장 마이어의 통역문서 5페이지에 이르는 날짜는 없는 포괄적인 기록이 담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은 드골이 그 전체 내용을 작성한 성명서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과거의 대립이 완전히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국민은 바람직한 협력을 하며 살고 함께 일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드골의 시각에서 이제야 비로소 드골이 말하는 ‘역사적 기적’, 곧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문서로 만들어지고 체결된 것이었다. 곧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가 동의한 다음에 말이다. 그런데 며칠 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는 콜롱베레되제글리즈의 회담이 성사되지 못하였다면 9년에 걸친 정치적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아데나워는 로베르 쉬망 이래 추진되어 온 양국의 화해 정책이 지속된 것을 애써 언급하였다. 물론 기몰레와 펠릭스 가이야르 총리 때도 이루어진 진전에 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성명서에서 이미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을 유럽의 건설적 부흥의 기초가 된다고 명시하고 이러한 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것은 이 회담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언론에서 회자된 ‘화친’(entente cordiale)라는 단어가 이 회담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이 장대한 여정의 중요한 성과로 확신한 것은 그가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드골은 독일에 관한 두려움이 신뢰로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주도권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유럽 통합에 관한 의사를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드골은 매우 솔직하게 프랑스가 지금 병에 걸려있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도 하였다는 것이다. 독일 통일은 독일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는 언급도 하였다. 다만 그에 따른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매우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와는 매우 긴밀한 협의를 할 자세를 보였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콜롱베레되제글리즈의 회담에서 드골이 새로운 헌법과 온건한 지도력으로 프랑스를 안정시킬 것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아데나워가 호이쓰에게 보고한 내용이나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흥미를 끈다. 확실히 아데나워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하여 드골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비판을 가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나 아데나워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미국이 몇 년 동안 아데나워를 홀대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이프러스와 아일랜드의 분쟁을 보란 말이다. “미국의 외교 기구는 형편이 없었다.  ... 덜레스가 본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중동에 대하여 논의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드골이 이에 맞장구를 치자 아데나워는 그를 적당히 달래기 시작하였다. “저 또한 우리가 미국의 도구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덜레스의 러시아 정책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위협이 상존하고 군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미국이 유럽과 결별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의 정책에 관한 우리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관하여 저는 귀하와 생각이 같습니다.” 드골은 정치적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직이 와해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드골과의 첫 만남에서 이러한 강경한 발언을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데나워의 고칠 수 없는 ‘비난하는 버릇’이 도진 것인가? 존 포스터 덜레스라는 ‘친구’와의 우정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자기 외교 정책에 관한 탁월한 능력에 관한 확신에서 나온 것인가? 중동에 관한 정책에서도 말이다. 아니면 드골의 신뢰를 얻고자 이런 말을 한 것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국, 영국에 대하여 매우 사적인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사실 그러한 비판은 드골 장군 자신이 자주 하던 것이었다.     

그러한 동기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당시나 그 이후에도 아데나워가 드골과 나눈 대화에서 그런 동기는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그 기회에 자신이 몇 달 동안 품어왔던 생각을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품어왔던 미국에 관한 비판적인 생각은 1958년 초부터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심해졌다. “현재 미국은 제 맘에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는 아데나워가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1958년 7월에 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아데나워가 덜레스를 만나기 전에 한 말이다. 또한 1958년 7월에 벌어진 새로운 중동의 위기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기도 전의 일이기도 하다.     

이라크에서 친영 정권이 몰락하자 영국의 공수부대가 요르단에 파견되고 미국의 해병대가 레바논에 상륙하였다. 이 모든 것은 드골이 프랑스 총리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던 몇 달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아데나워는 몇 년 전부터 덜레스가 중동에서 계속 실패만 해왔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리고 1958년 7월 말에 그런 생각을 그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내각에서 아데나워가 한 발언으로 그의 중동 위기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독일 언론에서 오르내린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아랍의 민족주의적 자각’을 서방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동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곤궁과 빈부 격차가 상존하고 있었다. 돈은 사회의 최상층에게만 흘러 들어갔다. 사회적 문제와 민족적 문제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점에서 아데나워의 생각은 여론과 달랐다. 일단 연합국의 편에 서야만 했다. 커다란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되었다. 이 문제에 관한 큰 책임은 미국과 영국에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 두 나라를 비난하였다.     

1958년 9월에 아데나워가 워싱턴과 런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만난 드골에게 그런 생각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 놓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한 가지 점에서는 영국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바로 자유무역지대에 관한 것이었다. 드골은 이 첫 회담에서 분명한 입장을 드러냈다. “자유무역지대가 유럽공동시장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드골은 필요하다면 유럽경제공동체(EEC) 조약에 대한 지지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만해도 영국 측에 자유무역지대에 대하여 동의하는 의사표시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각의 압력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드골에게 즉답을 피한 것이다.     

그런데 먼 장래를 내다보는 차원에서는 동방 정책에 관한 드골의 설명이 맞았다. “우리는 동유럽으로 평화를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 나라를 아시아의 손아귀에 머물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유럽 지역에 있는 러시아 연방 국가들은 왜 아니겠습니까? 이는 온전한 유럽을 건설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데나워에게 그러한 전망은 낮선 것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자신도 통제된 군비축소를 바탕으로 한 긴장 완화에 찬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소련에 관한 경제 원조를  대가로 독일 통일과 동유럽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바이크셀의 기적’* 이후 폴란드에 관하여 관심을 보였던 드골은 늘 품었던 생각을 되풀이 말하였다. 곧 통일 이후 최선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폴란드에 관한 ‘프로이센식 정책’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러시아를 자극할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 바이크셀의 기적 [Wunder an der Weichsel, 역자주 - 1920년 폴란드가 소련군을 기적적으로 물리친 사건]     

이 회담에서 많은 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아데나워는 드골이 비밀스러운 동방 정책 계획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3주 후에 맥밀런이 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러한 생각을 명확히 밝혔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드골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였다. “그는 소련 위성국, 더 나아가 소련을 유럽 안으로 끌어들이는 유럽 통합의 확대 가능성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드골과의 회담을 마치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귀국하여 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드골이라는 사람이 “11년 동안 심상치 않은 지역에서 머물면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면서”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내각에서 보고한 내용을 기록한 메르카츠에 따르면 “그는 전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말투가 매우 단정하였다. 그리고 시대와 세계정세에 대해서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밀월관계는 딱 27일만 지속되었다. 10월 8일 블랑켄호른이 서둘러 본에 와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드골이 이제 ‘삼국위원회’(Dreierdirektorium)에서 완전히 탈퇴하였다. 원래 연합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로 구성된 위원회인 이 기구를 기초로 하여 서방 자유 국가의 세계질서를 확립할 생각이었다. 드골의 생각으로는 3개 강대국이 세계를 책임지는 차원에서 이 삼국위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3개 강대국은 세계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의견 교환을 하고 핵무기 문제에 대하여 상응하는 실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프랑스가 자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비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폴 앙리 스파크는 블랑켄호른에게 비망록 사본을 보여주었다. 그 문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으로서 드골로부터 전달받은 것이었다. 그 문서의 원본은 1958년 9월 17일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에게 이미 전달되었다. 곧 아데나워와 드골이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우의에 넘친 대화를 나눈 지 정확히 3일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데나워는 매우 놀라지는 않았다. 8월 31일 곧 콜롱베레되제글리즈로 떠나기 2주 전에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총리 판파니를 만났다. 이 만남의 핵심 주제는 드골이었다. 판파니는 8월에 예정된 파리 예방을 마쳤다. 그는 드골에게서 10년 전에 비해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드골 장군은 무엇보다도 군비 분야에 관한 매우 긴밀한 독일·프랑스·이탈리아 협력 구상을 밝혔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3국의 핵무기 공동 생산에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1958년 부활절의 삼국 합의는 여전히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판파니는 드골이 여전히 드골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서유럽 대륙에서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 되고자 한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런 식으로 드골은 이 유럽 대륙의 연합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유일한 창구의 역할을 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와 판파니는 당연히 프랑스가 주도권을 쥐는 것에 대하여 한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삼국 사이에 완전한 동등권이 보장되어야 했다.      

스파크도 경고하였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파견 대사로 있던 블랑켄호른은 9월 9일 아데나워에게 간곡히 조언하였다. 곧 그가 콜롱베레되제글리즈를 방문할 때 “드골에게 단호한 어조로 삼국위원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독일연방공화국은 프랑스가 유럽 국가들의 대변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전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좋은 분위기에 취하여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이제 아데나워는 더욱 화가 났다. 그는 곧바로 블랑켄호른을 소환하였다. 블랑켄호른은 10월 8일에 열리는 독일과 영국의 회담에 참석하기에 앞서 영국 맥밀런의 사절단을 위한 만찬에 앞서 그가 스파크에게 비밀 엄수 조건으로 전해 들은 것을 모두 보고해야 하였다. 블랑켄호른에게 이는 아데나워의 뜻에 따라 맥밀런의 사절단에 포함된 엔소니 럼볼트에게 그 비망록의 사본을 전달해라는 지시만큼이나 처리하기가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다.     

맥밀런은 아데나워 수상의 제안에 매우 흡족해하였다. 만찬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유명한 만찬 연설을 하였다. 그는 ‘페터스베르크 협약’*을 회고하고, 로버트슨 장군을 칭송하고, 스틸 대사에 관한 칭찬도 하였다. 맥밀런은 그 나름 대로 점차 상호의존적으로 진행되는 세상에서의 독일과 영국 협력의 필요성을 다짐하였다. ‘상호의존’은 1950년대 중반의 커다란 화두였다. 그런데 그다음에 아데나워는 드골에 관한 불쾌감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혐오와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매우 성실하게 일기를 썼던 맥밀런이 일기에 한 말이다. “그는 드골을 믿었다. 겨우 몇 주 전에 그 두 사람(곧 아데나워와 드골)은 긴밀한 대화를 하기 위하여 만났다. 그런데 이제 그가(드골이) 아데나워 수상의 독일과 프랑스의 친선을 위한 노력에 한방 먹인 것이다.”     

* 페터스베르크 조약 [Petersberger Abkommen, 역자주 - 1949년 11월 22일 본 근처 페터스베르크에서 체결된 서독과 연합국 고위위원회가 맺은 국제 조약. 이 조약은 그 몇 주 전에 체결된 점령법을 넘어서 서독 정부의 권리를 확장하여 서독이 독립적인 외교 정책 주체가 되는 기초가 됨.]     

맥밀런은 1942년과 1943년에 드골을 철저히 분석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아데나워에게 이 위대한 장군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를 조언하고 있었다. “그는 드골은 자기 친구를 이상하고 서툴게 막 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신비주의적인 사명 의식과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이때 아데나워에게 맥밀런은 드골이 많은 그리고 때로는 문제가 심각한 생각들을 여러 종이 위에 기록하는 버릇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드골의 측근은 그 쪽지들을 최대한 눈에 안 뜨이게 치우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 어떤 사달이 일어나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영국 총리은 드골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치·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에게 설득시킨 것에 만족해하였다. 그러면서 영국 총리는 영국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의사가 없으며 영국·미국·프랑스가 힘을 합쳐 세계를 지배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아데나워를 달래듯 말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속임수에 불과하였다. 사실 영국 총리와 미국 대통령 사이에는 삼자회담을 통하여 드골의 비망록에 대하여 논의하자는 모종의 밀약이 있었다. 맥밀런은 드골과 아데나워의 방문 때 아데나워가 ‘삼국위원회’를 거론할 때 대처 방법에 대해서도 합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 총리는 아데나워가 드골의 제안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과 대담을 마친 날 저녁에 영국대사인 해롤드 카치아는 덜레스와 통화하였다. 아데나워는 대담 이후 여전히 ‘상처받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데나워가 궁지에 몰린 김에 서둘러 끝장을 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10월 13일에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드골의 제안서에 관한 삼자회담을 차관 차원에서 시작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10월 16일 덜레스는 전화 통화에서 맥밀런이 대화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분명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사무총장인 스파크는 드골이 제안하고 맥밀런, 그리고 아이젠하워까지 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 드골의 계획을 일단 막으려고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삼국위원회 구상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끼칠 폐해에 대하여 간파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가 타격을 받을 것이었다.     

10월 13일 아데나워는 이탈리아 대사 콰로니의 예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삼국위원회 구상에 관한 반대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드골과 덜레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아데나워 수상은 그의 반대 의사를 매우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그 불쾌한 계획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편에 관한 전체적인 논의로 논지를 끌어나갔다.     

상황이 여러 이유에서 아데나워를 불안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볼 때 아데나워는 이 점에서 서방 연합국을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제2차 세계대전 적국들의 무리가 이제 다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우리 독일이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개인적 인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와 맥밀런 사이에는 확고한 우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1943년 1월 북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났다.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고 맥밀런은 영국 내각장관으로 처칠의 위임을 받아, 알제리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1956년 11월의 수에즈 문제에 관한 논란 이후 맥밀런은 이제 영국 총리로서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새롭게 찾았다.     

삼국연합에서 셋째 인물은 드골이었다. 그 또한 1943년 알제리에서 독일에 대한 대규모 공격 준비에 협력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에게는 여러 소식이 당도하였다. 곧 관계자들의 기록에 보면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드골과 앵글로·색슨인 미국과 영국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맥밀런과 드골은 개인적으로 친한 것으로 보였다. 그 옛날에 아이젠하워와 드골의 친분이 얼마나 긴밀한 것이었는지는 아데나워가 알 도리가 없었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나중에 본 주재 대사로 일한 월터스는 드골이 아이젠하워를 존경할 뿐만 아니라 따뜻하게 대했다고 말했다. 월터스는 드골과 아이젠하워가 만나는 자리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누구보다도 드골이야말로 아이젠하워를 좋아했다. 드골이 미국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때부터였다. 그리고 존슨이 대통령이었을 때는 드골이 미국과 이미 멀어져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제 의심에 의심을 더 하게 되었다. 곧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도 반독 연합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여러모로 아데나워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서방 4개국 정상회담과 별도로 아이젠하워, 맥밀런, 드골 사이에 삼자회담이 열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워싱턴의 이른바 ‘상임그룹’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속한 나라들만의 배타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에 아데나워는 분노하였다. 1959년 여름 코머 호숫가의 매나지오에 있는 멋진 빌라 스티커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핵심 인사의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노골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루어진 ‘제2의 회의체’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아데나워는 유럽 대륙의 관심도 그 회의체에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노스태드 장군과 네덜란드 출신의 유럽경제공동체(EEC) 대사인 스티커는 아데나워에게 잘 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득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만 노스태드 장군은 드골의 계획이 제기된 이후 프랑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비공식적’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 수상은 미국은 영국과 나눈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과도 여러 차례 논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아데나워는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코머 호수에서 대담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다음 아이젠하워가 본을 예방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그 불편한 주제를 꺼내들었다. 비록 노스태드가 아데나워에게 영국과 미국의 ‘연합사령부’가 1946년 이후 해체되었다고 확언했지만 아데나워는 노스태드가 그 기구가 ‘점진적으로’ 해체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아이젠하워는 다시 한번 그 기구가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명백히 밝혔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그것은 ‘완전히’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이젠하워도 공동 관심의 대상이 되는 위험지역에 관한 즉석의 협력이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였다.     

스파크는 자기 《회고록》에서 아데나워의 성격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데나워의 극단적인 관점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반응에서 나오는 경박함을 보인다. 그가 영국 미국 프랑스를 돌아가면서 반대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였다. 대부분 그의 감정적인 판단은 특정 상황에 관한 그릇된 판단에서 나온다. 내가 자주 목격했던 사실이다.”     

1958년 10월 중순, 이 모든 일이 벌어지자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빨리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 드골이 아데나워를 가장 실망시킨 점은 드골이 맥밀런에게 보낸 서한에서 마치 자신이 아데나워와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만난 자리에서 삼국위원회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을 설명했다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었다. 드골은 이제 아데나워를 달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였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서한을 통하여 해명하고, 프랑스 외무부 사무총장인 루이 조세를 통하여 추가적인 해명을 마르쉬에 있는 샤움부르크궁에 보냈다. 그리고 3일 후에는 다시 한 번 세두 대사를 본으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일 템포》와 뒤셀도르프에세 발간하는 《미탁》 등을 통하여 이 일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세두에게 1956년 가을 미사일 공격의 위협 속에서 파리를 방문한 것과 기 몰레와 대화는 나눈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소련이 공격하면 미국이 핵무기로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워싱턴에 문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기 몰레도 미국 측이 대답하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였다. 미국 측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셋이 함께 해도 안 될 일이었다. 제도적 방법은 위기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비록 미국 정부가 드골의 제안에 찬성한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유럽 대륙에서 드골이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생각을 매우 부당하게 여긴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조세가 들은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핵무기 보유라면 미국은 이미 그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에 맞서 핵무기 한 개를 보유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가 세계적 차원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주장을 아데나워는 인정한 적이 없다. 그 당시의 중동 위기에서 이스라엘의 벤구리온은 자기 차관을 본으로 몰래 보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유럽의 경제권에 연결하지 못하면 중동이 러시아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지중해도 소련에 넘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독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만이 아니라 미국도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데나워는 10월 말이 되자 드골에게 다시 한번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세두에게 자신이 더 이상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솔직담백하게 전달하였다. “정치적, 개인적 이유에서 아데나워는 드골이 실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세두가 이 말을 드골에게 전할지는 세두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다시 불편해진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적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 것이 프랑스의 ‘미라지’ 전투기 문제였다. 이 시기에 미국이 ‘스타파이터’ 전투기로 공군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프랑스 정부는 ‘미라지 3호기’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라지 3호기는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스타파이터를 능가하는 전투기였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프랑스 측 파트너인 프랑스 국군성 장관 기요마에게 드골 장군이 스타파이터에 맞서려는 의도를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제 파리의 인사들은 독일의 국방장관인 슈트라우쓰에 대하여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에 슈트라우쓰가 반대한 것에 대하여 감정이 풀리지 않았던 장 모네는 온 사방에 대고 슈트라우쓰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피네의 말에 따르면 기요마와 슈트라우쓰는 오래전부터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그리고 아데나워에게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그 전설적인 마르셀 다쏘가 드골 측근으로 있었다. 1951년부터 다쏘가 발간하는 잡지 《주르 드 프랑스》는 드골을 지지하고 있었다.     

벌써 1년 동안 슈트라우쓰와 불편하게 지내온 아데나워가 이제는 국방장관 슈트라우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사실 아데나워도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자면 무조건 ‘미라지’ 전투기를 지지하였을 터였다. 그러나 슈트라우쓰와 그의 기술자들의 면면을 보자면 ... 일단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최선으로 보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1958년 초가을에 ‘스타파이터’ 전투기를 택하기로 내린 결정이 최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드골과의 긴밀한 접촉을 얼마나 서둘렀는지는 자기 최측근인 블랑켄호른을 대사로 프랑스에 파견한 결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블랑켄호른이 이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재 대사로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드골은 이 두 직무 수행이 서로 방해가 될 정도로 시간적으로 중첩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겼다. 그 당시 드골은 아데나워의 협력을 구하는 데에 그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1958년 11월에 이르자 아데나워와 드골과의 관계가 매우 불편할 지경에 이르러 다시 한번 회담을 개최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번에는 의전에 따라 독일 땅에서 제대로 준비된 일정에 따라 만날 예정이었다. 드골은 독일 점령국 프랑스 사령부가 바덴바덴에 있었기에 뷜러훼헤에서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결국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 만나기로 최종합의를 보았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역사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심산이었다. 만남의 장소로 예정된 크로이츠나흐에 있는 요양소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잠시 사령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드골과 함께 폰 브렌타노, 뮈르비에, 피네와 마주 앉아 오찬을 한 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 빌헬름 2세와 당시 독일 주재 교황대사였던 파첼리가 식사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당시 파첼리는 교황의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수십 년 뒤에 프랑스 총리와 독일 수상이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집의 같은 방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임을 비로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전까지는 어제 크로이츠나흐에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었던 정도의 솔직함과 우의가 넘치는 분위기가 넘치는 국제 협상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언론을 의식한 오찬 연설에서 드골은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Entente)를 강조하며 초대한 측(곧 아데나워)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참석자는 ‘우리 양국의 역사를 이끌 흐름에 쓸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데나워 수상은 이 자리를 주도하며 “매우 친절하고 단호한 어조로 그 위대한 인물, 위대한 유럽통합주의자, 위대한 독일 사람”을 칭송하였다. 이리하여 삼국위원회와 관련된 비방은 일단 수그러들게 되었다.     

이 좋은 날 있었던 단 하나의 옥에 티라고 한다면 아데나워가 보기에 ‘알제리에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벌인 이른바 ‘매파’들이었다. 이 데모를 주동한 인물은 사민당(SPD)의 연방의원인 한스-위르겐 비슈네브스키였다. 아데나워는 “이 데모는 사민당(SPD)이 독일에 끼칠 수 있는 최악의 행위였다.”고 말했다.     

아데나워가 프랑스의 알제리 정책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다만 드골이 ‘알제리 독립운동’(FLN)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아이젠하워는 1959년 8월 26일 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 수상이 “알제리 문제에 거의 편집증을 지닌”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아이젠하워는 아데나워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을 다 들어야만 했다. 아데나워는 만약 프랑스가 알제리 저항군과의 싸움에서 패한다면 결국 지중해와 중동을 소련에 내주고 말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데나워와 드골이 모종의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는 아데나워의 입장보다 근원적으로 더 파급력이 있는  또 다른 협력이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드골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수립 절차를 시작하고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보호 조항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독일과 프랑스가 모두 놀랐다. 회의를 마친 후에 클라피에르와 보름서는 블랑켄호른을 만난 자리에서 드골이 그 정도 치고나갈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바트 크로이츠나흐의 회담이 이루어지기 전에 프랑스 정부는 11월 14일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곧 파리는 영국의 자유무역 구상에 반대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 구상에 따르면 공동시장과 나머지 유럽경제공동체(EEC) 국가들 간에 자유무역지대를 수립하여 공동 무역 관세를 수립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각 진영 내부의 조화를 위한 추가 조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데나워와 드골은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위한 공동 정책을 지지하면서, 간접적으로 맥밀런의 구상에 반대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런던에서는 사실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무역지대’라는 단어는 아데나워와 드골의 성명에 나오지 않았다.       

영국 대사 스틸은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 드골이 아데나워를 설득하여 유럽 자유무역지역에 관한 모들링 플랜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확신하였다. 사실 바트 크로이츠나흐 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는 커다란 견해차를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유럽경제공동체(EEC) 국가들에 관한 ‘프랑스의 보호무역주의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한 타협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자 하였다. 에르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 독일의 정책이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독일 여론에 대고 우리가 세계의 제3위 무역 국가로서 좁은 틀에 우리를 가두게 될 것을 알리게 되면 말입니다. 프랑스가 지난 몇 달 동안 강조해 온 것을 볼 때 프랑스는 공동 시장이라는 것을 비호무역주의적 차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대한 아데나워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곧 그는 파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유럽경제공동체(EEC) 장관 회담 참석을 정중하게 거부한 것이다. 에르하르트가 발송하지 않았던 11월 21일 자 편지를 보면 그가 아데나워의 프랑스 정책에 대하여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프랑스의 산업계는 보호무역주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과는 달리 ‘세계 경제에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준에서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무역정책의 노선을 그러한 보호무역주의의 전통에 묶어 두려는 노력을 지속해 온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거의 10명의 프랑스 장관과 논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원칙적으로 보호무역주의적 경제정책과 재정정책의 개혁에는 동감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총대를 메고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골이 이끄는 독재 정권”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유럽이 프랑스의 독단을 얼마나 더 견딜지, 그리고 유럽의 경제정책에 관한 문제에서 프랑스와 연대를 얼마나 더 잘 이룰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영국에 맞서는 대책을 내놓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후일 그러한 생각에 관하여 비공개된 회고록을 위한 구술 내용에서 밝혔다. 칼 카스텐이 주요 외교사절에게 보낸 회람 전문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드골은 11월 24일 곧 바트 크로이츠나흐 회담 이틀 전에 블랑켄호른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자유무역지역의 관계가 자기 생각에는 바트 크로이츠나흐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에르하르트가 추가적으로 새로운 요구나 바람을 제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프랑스가 공동시장에 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다른 회원국들과 추가적으로 협상을 벌이자는 데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세 시간에 걸친 드골과의 단독 면담에서 자신이 결국 어느 편에 설지를 확언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만약에 이제 아데나워가 드골과의 화해에 모든 힘을 모으고, 이에 따라 간접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인 측면에서 영국에 맞서기로 한 상황이라면 이는 단순히 미국과 영국의 정책에 관한 장기적인 회의적 평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독일과 프랑스의 연대의 매우 구체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드골이 조속히 만나자고 제안하여 11월 12일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이틀 전에는 흐루쇼프가 모스크바의 스포츠궁에서 베를린 위기를 초래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전쟁이 나면 독일연방공화국이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베를린에 관한 4강의 합의를 끌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아데나워는 이제 며칠 안에 곤경에 처할 것이고 서방 3개 연합국의 선의만 바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 3개 국가는 일처리 방식에서 믿음직 하지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58년 늦가을에 들어서서도 드골 장군의 행위는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가장 문제가 되는 전례를 남겼다. 곧 아데나워는 베를린 문제에서 자신이 맥밀런이나 아이젠하워보다 더 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나 일단은 우려가 훨씬 더 컸다.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위협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진 1958년 12월 중순에 판파니를 만난 자리에서도 아데나워는 자기 프랑스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통역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무미건조한 내용이 나온다. “프랑스가 소련에 대하여 유럽 전체에 위협이 되는 추세로 나가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만 합니다.” 아데나워의 드골에 관한 정책에서 신뢰와 불신은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늘 병존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라인강 건너편에 있는 예측하기 힘든 상대방을 확실히 붙잡아 놓고자 하였다. 그래야만 그가 더 예측이 힘든 동방의 적의 편으로 기울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베를린 최후통첩  


의회위원회가 수립된 시기부터 아데나워는 베를린 문제를 마치 정치적 시한폭탄이나 되는 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의 생각에 이 도시의 상황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어서 현재의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립 초기에 베를린을 독일연방에 완전히 통합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아데나워가 정당 정치적 차원에서 이기적인 의도로 그런 정책을 취했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를린은 연방의회와 연방참사회에서 사민당(SPD)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아데나워가 모를 리는 없었다. 사민당(SPD) 측 인사들도 이를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정치적 통합은 아니어도 베를린을 독일연방에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949년 가을에 제기된 안에 대하여 수상이 원칙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베를린의 사민당(SPD)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1958년 12월 27일 6개월의 유예 기간을 두고 베를린 최후통첩을 발표하자 그 당시 베를린 시장으로 재임에 성공한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온전한 의결권을 지니도록 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브란트는 기민당(CDU) 소속 시장이었던 발터 아므렌의 지지를 받았다.     

베를린을 ‘자유시’로 전환하고 서방 점령군 철수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흐루쇼프의 제안서는 연방의회의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브란트의 역할을 비판하고 나섰다. “베를린에 관련된 협상을 소련이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요청하려면 베를린과 독일연방공화국 그리고 서방 국가 전체도 합의된 내용을 철저치 준수해야 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브란트가 영국 대사 스틸을 재촉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난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45세 불과했던 브란트가 매우 야망이 큰 신진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란트가 그런 요청을 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고 여긴 것이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을 반대하는 만큼이나 베를린에서 소련에 맞서 공세로 나서고자 하는 여당 내의 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베를린에 관한 최후통첩이 내려질 무렵에 기민당(CDU) 의원인 게르트 부체리우스의 제안은 사실 이미 폐기된 참이었다. 함부르크에서 출판업자로 있던 그는 1956년 가을 동유럽 위기 때 ‘독일연방공화국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고자 하는’ 매우 커다란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부체리우스는 당시 아데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동유럽과 소련이 약하면 모든 반대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약한 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유럽과 소련에 맞서는 데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약한 상황에서 우리는 힘의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부체리우스는 자기 ‘힘의 정책’을 주장하면서 아데나워 개인에 관한 호소도 덧붙였다. “다시 한번 온 국민이 귀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기회가 왔습니다. 콘라드 아데나워를 베를린으로! 이것이야말로 행동이며 구호가 될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아데나워는 이 문제에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그러나 글롭케와 크로네는 부체리우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하였다. 사실 헌법적인 문제만 걸린 것이 아니었다. 법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 수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서도 아데나워 수상이 보기에는 민감한 베를린의 지위를 고려해볼 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여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베를린 주둔 소련군을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타협책이 나왔다. 곧 제국의회 건물을 다시 짓기로 한 것이다. 다만 과거 발로트*가 설계한 매우 인상적인 제국의회 건물 내부 형태에 관한 정치가들과 건축가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의 제2차 임기를 베를린에서 시작해야 하고 독일 연방의회가 여기에서 정기적으로 그 면모를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 발로트 [Paul Wallot, 역자주 – 1894년 독일제국의회 건물을 지은 건축가로 특히 현재 독일 연방의회 건물에 있는 둥근 지붕으로 유명함.]     

아데나워가 수도 문제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당 내부에서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는 아데나워가 베를린에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이어진 당내의 분쟁에서 아데나워는 그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 괴벨스가 대관구 지도관으로 있던 시기에 베를린 시민들이 나치를 광적으로 환영하던 일에 관한 기억이 아데나워의 머리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여당의 일부 세력이 야콥 카이저에게 굴복한 것도 아데나워의 베를린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이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대하여 선의와 무관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비교적 자주 베를린을 찾았다. 이 도시를 공식 방문하고, 총선 때도 왔으며, ‘녹색 주일’*에도 찾았다. 또한 연방의회나 기민당(CDU) 회의가 열릴 때도 베를린을 찾았다. 아데나워는 본과 쾰른 다음으로 베를린을 가장 자주 방문하였다.     

* 녹색 주일 [Grüne Woche, 역자주 - 베를린에서 1926년 시작한 열리는 국제 농업 무역 박람회. 세계 농업 산업의 생산자와 마케팅 담당자가 농산물을 선보이며 무역 방문객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된 행사]     

아데나워가 1950년대 초반 베를린을 방문할 때 자주 그를 수행하던 오토 렌츠, 펠릭스 폰 에카르트, 하인리히 크로네 등은 모두 베를린에서 아데나워를 만났다. 아데나워는 과거 제국 수도의 재건에 큰 관심을 보였고 베를린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도 받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아데나워는 베를린을 자주 찾았다. 타타니아궁의 방문을 시작으로 1951년 4월 18일 독일국가를 처음으로 3절까지 부른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이미 서쪽에서 온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베를린 시민의 마음은 그의 이른바 ‘베를린에 대한 적대감’을 불식시켰다. 다만 아데나워에 대하여 비판적인 언론에서만 그러한 것을 퍼뜨리고 있었다.     

베를린 시의회와 베를린 시민들이 열렬히 환영에도 아데나워가 강한 자존심을 굽히지는 않았지만, 과거 제국의 수도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려고 본에서 베를린을 위하여 로비를 벌이는 이들의 생각에 접근한 것으로 보였다. 베를린이 매우 격정적으로 환대한 것은 독일연방정부 대통령인 테오도르 폰 호이쓰였다. 하인리히 륍케의 인기는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가 의원들의 면면을 둘러보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베를린에서 전성기를 보냈거나 최소한 가끔이라도 대도시에서 직업으로든 군 복무 때문이든 시간을 보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여러모로 라인란트 사람이었지만 1930년대에 베를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하인리히 륍케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베를린에서 일했다. 한스-요아힘 폰 메르카츠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와 이베로 미국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었다. 에른스트 렘머는 베를린을 광적으로 사랑하던 인물이다. 그는 양독부 장관을 역임한 바가 있다. 심지어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이체방크에 근무하던 자기 매제인 구트를 방문하며 베를린에 머물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의 차관들과 다른 측근들은 베를린의 도이체방크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했었다. 여기에는 오토 렌츠, 한스 글롭케, 펠릭스 폰 에카르트,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 빌헬름 그레베 등이 있었다. 또한 여당 내에서도 여러 정치적 거물이 베를린 출신이었다. 여기에는 하인리히 크로네,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등이 있었다. 또한 베를린에는 베를린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사랑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사민당(SPD)의 경우도 대동소이하였다. 예를 들어 에리히 올렌하우어나 헤르베르트 베너와 같은 인물은 이미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베를린에서 정치적 뿌리를 내린 바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가들의 대부분은 독일의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베를린이라는 대도시의 탁월한 매력에 끌려 오게 되었다. 어느 모로 아데나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삶이 부침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베를린이 중심이 되었고 결코 베를린에 대하여 부정적이지는 못했다. 아데나워가 1950년대 사회를 풍미하던 베를린에 동조하는 정서에 휩쓸린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정서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새로운 희망에 넘치거나 전쟁의 역경을 체험한 시대에 관한 향수와 함께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베를린과의 다양한 개인사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면 아데나워를 포함한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득권층이 자생력이 없는 베를린을 위한 대규모 원조와 흐루쇼프가 베를린을 장악하려는 기도를 단호히 물리친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흐루쇼프가 버르장머리 없는 연설로 위협하고 최후통첩을 내렸을 때 아데나워의 첫 반응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12월 초에 여봐란듯이 이틀에 걸쳐 베를린을 방문하였다. 12월 8일에는 베를린 지방선거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선거 하루 전에 베를린을 방문하여 독일홀에서 개최된 대규모 군중대회에서 베를린 위기가 시작된 이 시기에 자기 전략을 드러내었다. “먼저 외교문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의 노선은 분명했다. 최후통첩이라는 강압을 받는 상황에서 협상은 없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의 평화 협정안은 1월이 되어서야 독일 측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미 11월과 12월에 사람들은 최후통첩이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동독의 체제 인정도 소련이 추구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고립 의도, 독일의 핵무장 저지를 위한 연속적인 위협 행위, 동독인의 대향 탈주 방지.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최후통첩과 동독 체제 인정 문제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독이 프리츠 쉐퍼의 동베를린에 관한 과감한 제안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곧 몇 달 동안 동독의 울브리히트가 동독과 서독의 연방제를 더욱 재촉하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흐루쇼프의 외교문서가 도착하자 11월 27일 원칙적으로 독일 정책과 관련된 논의가 기민당(CDU) 연방 의장단에서 개최되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매우 경솔하게 근본적 입장에 혼선을 빚을 것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나중에 소련의 평화 협정안이 도착하자 아데나워는 여당이 독일에 관한 중차대한 문제에서 ‘유연성’을 보이고자 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시도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흐루쇼프는 11월 24일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말하기를 독일연방공화국의 실력 있는 정치가가 자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러한 제안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나중과 마찬가지로 늘 헤르베르트 베너를 거론하였다. 그는 ‘동독의 입장을 직접 들어볼 필요성’을 제기한 바가 있었다. 사민당(SPD)이 ‘독일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한 부서를 수립하자고 제안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민당(FDP)의 실력자들은 더욱 노골적인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민당(CDU) 정치가의 의견이 흐루쇼프로 하여금 ‘기민당(CDU)의 일부에서 소련 점령지역의 입장에 대한 판단에서 변화가 있다고 여기도록 하는 단서를 제공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키싱거(“그는 너무 물러터졌다.”)와 게르스텐마이어(“그는 자기 과시욕에서 그리 한 것이다.”)를 지칭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아데나워는 언제나처럼 회의적이었다. 곧 소련의 위협을 받아서 1959년 5월 27일 이후에는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길의 통제권을 결국 동독에 넘겨야 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해결이 안 되었거나 해결 불가능한 독일 정책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동독과의 관계, 독일과 폴란드 국경 문제, 불간섭주의 문제, 핵무기 문제, 자유선거의 원칙, 할슈타인 독트린이 포함되었다.     

아데나워는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에게 야당의 독일 정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힘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비겁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양대 강국이 그 모양입니다.” 이 유명한 칼럼니스트와의 대담은 3월 중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하필이면 소련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독일에 관한 협상을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자신이 국내외적으로 형성된 대세에 맞서게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야당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독일 정책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던 이들은 소련의 최후통첩에 대하여 사실 기뻐하였다. 그들이 과거에 들고나왔던 논리를 다시 꺼내 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방 국가들의 인사들 가운데 독일의 통일 정책을 귀찮게 여기고 독일군의 핵무장을 문제로 여기는 이들에게도 소련의 최후통첩은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를 무기로 아데나워를 몰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처음에 대세에 맞서고자 하였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같은 내용의 서한을 각각 덜레스, 맥밀런, 드골에게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이들에게 위기가 시작되면 어떤 전술을 전개할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먼저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어도’ 베를린의 경찰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힘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베를린의 대량 난민의 발생으로 패닉에 빠지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소동과 패닉은 독일연방공화국 전체와 유럽은 물론 서방 자유 국가들에도 여파를 미칠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베를린에서 질 때 ‘도미노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자유에 대한 소련의 공격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독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논의하자고 소련 정부에 제안하는 것”에 대하여 명백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 두 문제를 하나로 엮어 논의하는 것은 결국 베를린의 자유를 위태롭게 하든지 아니면 독일 전체의 문제를 외통수로 몰고 가 결국 소련의 요구에 대하여 남이 모르게 굴복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이러한 아데나워의 생각이 옳다고 보았다. 파리에서 개최될 예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상임위윈회 회의를 앞두고 이 두 사람은 일단 독일 문제에 관한 협상을 새로 시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오래가지 못했다. 연합국들의 정부에서는 소련의 최후통첩에 대하여 협상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협상을 통하여 독일 문제와 군축에 관한 논의의 활로를 뚫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스파크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폰 브렌타노도 파리에 오면서 ‘독일 전체 문제에 관한 협상’을 촉구할 요량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12월 중반에 소련의 최후통첩을 단호히 반박하였다. 그러나 그 강력한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상임위는 베를린 문제가 소련과 독일 전체에 관한 협상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상임위는 서방 강국들이 이 문제와 유럽의 안보 문제 그리고 군축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되풀이하여 표명한 바가 있다. 서방 국가들은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당연히 모스크바는 두 개의 독일이 평화 협정에 관한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요청으로 맞받아쳤다. 1월 중순이 되자 이미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독일에 관한 새로운 회담이 열리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일로 보였다.     

워싱턴과 런던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계속 나왔다. 이는 이미 11월 중반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처음부터 양보하면 소련이 계속 새로운 요구를 하게 될 것을 경고하였지만 덜레스는 간계를 발휘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였다. 그는 소련이 권한을 동독에 넘겨주면 동독 정부가 단순히 위임국가 곧 소련의 꼭두각시로만 존재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동독 정부가 연합국과 합의한 틀을 지킬 때 말이다. 덜레스는 11월 26일 이러한 생각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이를 즉각 부인하였다. 아데나워는 꼭두각시 이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베를린과 관련하여 흐루쇼프와 울브리히트에게 제시할 다양한 추가적인 제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허가증을 검사하겠다고 한 것은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유선거가 가장 먼저 시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 제안도 독일 회담이 개최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1월 상반기에 미국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곧 덜레스가 기자회견을 통하여 동독과 서독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반드시 ‘독일 통일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장기적으로 놓고 볼 때 그는 어느 모로 예지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포스터의 주장을 듣고 나서 그 역시 연방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음날 데이비드 브루스는 샤움부르크궁에서 외무장관이 임석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근심하며 격노하였다. 아데나워는 브루스에게 덜레스가 한 말은 1953년 이래 독일과 미국이 취해온 공동 외교 정책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것이라며 화를 낸 것이다. 그러한 발언은 1954년 파리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런 발언으로 베너가 이끄는 독일사민당(SPD)만이 아니라 자민당(FDP) 일부 세력이 소련과의 협상을 주장하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극적인 표현을 하였다. “독일 정부가 이제 구렁텅이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아데나워가 특히 화가 난 이유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소련의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과의 대화에 나선 것 때문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우려가 다시 전면에 대두되었다. 곧 양대 강국이 독일 문제를 정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이즈음 아데나워 수상은 자기 독일 정책이 물 건너가게 된 것만을 본 것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이 1959년 초여름 건국 10주년이 되는 해에 핵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서방의 수도들에는 전쟁에 관한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영국이 특히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보였다.     

서방의 정부 수반들 가운데 특히 헤롤드 맥밀런이 유럽의 정부들이 1914년에 자국의 국민들을 전쟁터로 몰고 간 맹목적인 광기를 가장 강하게 떠 올렸다. 그가 이런 근심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맥밀런은 20살이던 1915년에 플랑드르의 지옥으로 끌려간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여름 내내 전투에 참여하고 세 번이나 부상을 당하여 야전 병원에 오래 누워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아서 살아남게 되었다. 그의 전우 수십 명은 전사당하였다.     

이 전쟁으로 맥밀런은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궁전에서 전선에 있는 군대를 지휘하던 무능한 장군들만을 혐오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경한 정책으로 전쟁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정치가나 외교관에 관한 불신도 매우 컸다. 전선의 참호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한 일들을 조금도 경험하지 않는 주제에 말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도 그런 인물이었다. 흐루쇼프도 마찬가지 인물일 것으로 여겨졌다. 그가 보기에 이른바 ‘철저한 시민주의자’인 아데나워는 미국과 영국이 동독의 인민경찰대와 힘을 겨루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맥밀런은 독일에 대하여 매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단지 아데나워가 제2의 독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필이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이유가 뭐란 말인가?     

런던의 분위기에 대하여 데이비드 스틸이 처음으로 분명한 경고를 하고 나섰다. 그는 그 당시 아데나워가 총애하는 대사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클리브 경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클리브 경이 쾰른에서 근무할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 스틸은 서방 국가 대사 가운데 처음으로 1958년 12월 22일 아데나워에게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생사가 달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인물이다. 그는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여 독일에서는 이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정보에 민감한 아데나워는 그러한 의견에 대하여 상황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전쟁이 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대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곧 맥밀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련과 협상을 벌이고 싶어 한 것이다. 그는 전쟁을 두려워하였고 그렇게 보였다. 그는 아데나워가 조속히 런던으로 날아가 맥밀런과 회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맥밀런은 아데나워가 자유무역지역 문제에 관하여 드골의 편을 들고 날씨를 핑계로 맥밀런을 멀리하는 것을 점점 더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1월 중순이 되자 스틸 대사는 상황 보고를 위하여 런던으로 돌아갔다. 맥밀런은 스틸과 대화를 나누면서 다음과 같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매우 건강이 안 좋고 급격히 노화되었다. 나머지 인물들 (브렌타노 등)은 이 상황에서 새로운 제안을 내세울 능력이나 의사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어떤 때는 매우 프랑스 측의 편을 들고 드골에 호의적이었지만 다시 매우 비판적으로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데나워는 아직도 나를 신뢰하는 것으로 보였다. 베를린 문제에서 아데나워는 –공식적으로- 매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러시아에 맞서 강한 반발을 하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러시아와 서방이 마치 서로를 향해 달리는 기차와 같다는 것이었다.”     

1959년 1월 13일 아데나워를 방문한 데이비드 브루스도 아데나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데나워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더불어 ‘MC/70 추진 협약’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이는 핵미사일 배치를 포함한 독일군의 재무장에 관한 협약이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연이라는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매우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필요하다면 서방 3개 점령국 군대가 동독의 인민경찰에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이 실패할 것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당시 베를린 시민에게 비행기를 이용하여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 정부와 독일군이 베를린을 위한 계획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그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 독일군을 이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의사가 없다면 말이다.     

이리하여 그는 베를린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언급한 것이 되었다. 베를린 위기 대처 계획에 1961년 7월 21일부터 명분상 독일 정부 대표가 온전히 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Live oak’라는 멋진 암호명을 지닌 또 다른 비밀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미국 대사에게 아데나워는 심각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때부터 그런 말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미코얀이 미국을 방문한 것도 문제 삼았다. 특히 미국 경제계가 그를 ‘대대적으로’ 환대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브루스도 아데나워에게 서방이 소련에 협상 자리에 나오라고 압력을 행사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사실 독일에 관한 대규모 회담이 이미 준비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정의 순간이 임박한 1959년 1월에 아데나워에게서 초조해하는 인상을 받은 것은 대사들만이 아니었다. 그 무렵 아데나워가 본 주재 기자들 가운데 몇 명을 모아 공개 토론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오르그 슈뢰더, 로베르트 슈트로벨, 박스 슐츠-포어베르크와 같은 노련한 언론인들이 아데나워를 만났다. 아데나워는 자기 정책을 ‘선전’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이 대담을 통하여 일종의 좋은 ‘제안’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에 문을 열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블랑켄호른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1월 23일 아데나워를 만났다. “아데나워는 엄청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그 위험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 노인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문제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이 문제에 대하여 격의 없이 논의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느 모로 이는 그의 탓이기도 하였다. 그는 외무부와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았다. 외무부는 아무런 지시도 안 받고 매우 열심히 분석과 계획 수립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분석과 계획에 관련되는 내용이 차관이나 장관에게 보고된 적이 없었다. 사실 아데나워에게는 내각이나 여당에서 신임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철저하고 현실적인 전문 지식으로 무장되어 사태를 같이 논의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와 외무장관의 관계는 별무소득이었다. 사실 외무장관은 자기 입장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생존이 달린 이 중차대한 문제가 지난 12년간 독일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힘을 소진한 사람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다. 지나친 격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제 지쳐서 그는 정신을 차려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자기 입장을 세울 여력이 더 이상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데나워와 함께 탈출구를 모색할만한 측근들의 숫자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틈이 날 때마다 외무장관에게 묘안을 제시해 보라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데나워는 뭔가 창의적인 의견을 요청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비난을 하도 많이 들어서 외무부에서 새로운 기안을 시도해보았지만, 번번이 아데나워의 비판적인 눈길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늘 줏대가 없다는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크로네는 여당에 대하여 신물이 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는 외교관도 아니었다. 다만 국내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판단을 내릴 수는 있었다. 1959년 초에 들어서자 종래의 신뢰관계에 위기가 왔다. 대통령에 관련된 문제에서 자신만의 견해를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레베는 이미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아데나워가 상시로 접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9년 1월 초에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나중에 말 한대로 이는 말하자면 “아데나워 수상의 공수부대 작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 이와 더불어 아데나워 수상은 디트만 외교부 국장도 처음부터 성사할 수 없는 임무를 맡겨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곧 미국 대통령이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만나지 말도록 설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팰릭스 폰 에크하르트의 비망록에 보면 1958/1959년 겨울 아데나워는 매우 기분이 우울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독일 정책과 관련하여 수상은 에크하르트와 그의 동료 블랑켄호른을 비난하고 나섰다. 곧 그들의 무모한 협상 방책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이 대부분 불확실한 회의 전략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노인네’는 새로운 구상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긴 사실이다. 아데나워는 언론의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연방 공보실과 정보국의 수장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결국 남은 것은 글롭케였다.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그는 아데나워를 위하여 잠정적인 해결책과 포괄적인 해결책을 동시에 수립하였다. 크로네는 이러한 내막을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 계획을 자기 1959년 2월 5일 자 비망록에서 ‘글롭케 플랜’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그 문서를 1974년에 와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당시 기민당(CDU)은 ‘새 동방 정책’과 관련하여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제기한 비난, 곧 1950년대 이후 할슈타인 선언과 같은 진부한 구상만 내세울 뿐이라는 비난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5장으로 구성된 이 계획은 5개 분야의 26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I. 통일, II. 과도기 단계, III. 베를린, IV. 국제연합의 협력, V. 경제적 규정. 제목들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는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잠정적인 해결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결합되어 있었다.     

기존의 것: 모든 근본적인 원칙의 민주적 정당성을 견지한다. 5년간의 과도기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곧 통일에 관한 국민투표를 서독과 동독 지역에서 각각 실시하고 이와 더불어 ‘독일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도 실시한다. 자유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독일 국민 전체’의 민의를 대변하는 이들이 정부를 수립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든 바르샤바 협약이든 하나를 선택한다. 중립국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협약 체제는 논의에서 배제되고 협약에서 탈퇴한 지역은 ‘모든 군사동맹, 시설, 설비에서 손을 뗀다.’ 국경 문제에 관해서 통일 독일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만을 명시하였다. 이는 통상적인 내용이었다. 이 부분에서 과거의 계획에 들어 있던 요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곧 여기에는 호이싱거 계획과 1955년대의 독일 문제 해결에 관한 특정한 입장이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새로운 내용도 있다. 곧 글롭케는 동독의 체제를 분명히 인정하자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 문서에서 동독은 독일연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주권 국가로 묘사되고 있다. 1958년 3월의 오스트리아식 해결 방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구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 다만 과거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어조로 묘사되었다.     

동독의 체제 인정이라는 결정적인 양보에는 다만 여러 단서가 달려 있었다. 동독은 서독과 마찬가지로 그 존립을 국민투표에 맡겨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동독과 서독 국민 대다수가 통일을 원하면 즉각 자유선거를 치르고 국가를 해산할 수 있어야 했다. 동독은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나 자세히 논하지는 않아서 추가적인 협상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여기에 더한 조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양국 독일 간의 모든 교통 제한을 해제하고 조약이 발효된 지 1년 안에 동독과 서독에서 각각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동독에서는 과거 자를란트에서와 마찬가지의 절차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동독에 비하여 훨씬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흡인력으로 동독이 바르샤바조약에 속하는 것이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이 구상에는 베를린에 관한 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린 지역(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이 조약의 발효로 독립된 자유시가 된다.’ 교통수단 왕래의 자유가 보장된다. 이에 관한 감시와 보장은 국제연합위원회가 보장한다. 이 위원회를 대표하여 아일랜드,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가 그 업무를 수행한다.     

끝으로 국제연합에 제2차 세계대전 배상기금 조로 통일된 독일은 100억 마르크를 지불한다. 이로써 모든 구상권이 소멸된다.     

그러한 구상은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이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안 간의 관계도 밝혀준다. 그리고 특정한 규정의 논리적 결과에 관한 주의도 환기한다.     

이 구상은 분명히 협상 과정에서 제시할지 말지를 떠나서 서독 측의 요구 사항을 다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무엇보다도 내부 논의용으로 작성된 것이다. 강제적인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고 아직 아데나워가 확정적으로 제시할만한 최종안은 아니었다. 협상 과정 이전이나 도중에 제시할 확정적인 내용은 이 전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데나워가 글롭케의 구상에서 좋게 본 부분은 바로 여기에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를 국제 정치나 국내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59년 1월 초부터 아데나워는 글롭케와 크로네와 더불어 어떤 대응책을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였다. 글롭케 플랜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이 세 사람이 어느 날 뢴도르프에서 긴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싹트게 되었다. 이날은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83회 생일 다음 날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날 ‘무심히 써 내려간 생각’의 초안을 그에게 보내고 다음과 같은 반어법적인 여운이 남는 글을 덧붙였다. “한 해를 시작하는 마당에 귀하를 다시금 ‘불안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저는 연말 대담에서 게오르크 케난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1958년 초에 생각했던 구상의 연장선상에서 1월 6일 글롭케와 크로네와 나눈 대담에서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하였다. “독일 통일은 당분간 예측이 힘들기에 현재 상황에서 추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독 지역은 판코프의 권한 아래 놓일 것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서방과 연대할 것이다. 현재 상황을 고려하여 동독 지역 상황의 인간화를 고려한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아데나워 수상이 말한 ‘인간화’의 의미는 그가 서방측의 대화 상대와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 잠정적인 해결책을 조심스럽게 제기할 때 매우 세심하게 에둘러 표현하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동독의 울브리히트 정권의 교회 탄압의 종식과 동독과 서독 간의 교통 통제 완화를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     

폰 에카르트는 사실 내부적으로 글롭케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글롭케는 그 당시에 이야기되던 스미르노프에 관한 ‘오스트리아 질의’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고 아마도 그러한 것을 제안한 것으로 보였다. 폰 에카르트는 이때 ‘동독 지역이 오스트리아의 예를 따른 독립 국가의 지위’를 보장 받도록 하고 독일연방공화국은 현재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연대’하는 지위에 머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용기 있는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글롭케나 아데나워는 그 정도의 생각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었다.     

아데나워가 당시 상황을 얼마나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는지는 그가 1월 22일 기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1953년부터 1973년까지 본에서 《벨트》를 이끌어 왔던 게오르그 슈뢰더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받은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아데나워가 미국과 영국의 압력으로 자신이 그동안 견지해온 노선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기 측근의 범주를 넘어선 이들의 의견과 충고를 원하고 있었다. 전략으로나 내용으로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하여 확실한 생각을 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기존의 입장을 현실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의 예상보다 빨리 포기할 수도 있어보였다. 야기에는 할슈타인 독트린, 동독과의 관계, 소련 위성국과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실 아데나워가 그런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라이니셰 포스트》의 막스 니체도 이 대담에 참석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나중에 가서 기록하기도 하였다. “조만간 우리는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 늦은 오후의 대담에서 동독의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면서 이를 군축 협상을 연계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도 독일연방공화국이 해결할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발적인 무력 포기 선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수세적이고 자포자기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이 소련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도록 견지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 통합, 포괄적 군축 요구가 포함되었다. 소련에서 뭔가 움직임이 보이기 전까지는 정중동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 보였다. 그러나 모든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여전히 언젠가는 소련이 내부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자유를 보존해야 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소련과의 관계에 변화가 올 때까지 말입니다. 이 강력하고 공격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현재의 모습대로 남아있게 된다면 기가 막힐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작별 인사를 하며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함께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압니까? 내일 상황이 완전히 변할지?”

이 무렵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데나워가 협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배제하고자 한 것은 독일의 핵무장이었다. 이 점에서 이미 1월에 아데나워는 외무부와 같등을 벌이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대화 상대들에게 늘 되풀이하여 자신은 라파츠키 플랜으로 나가는 것을 반대한다고 강조해 말했지만 폰 브렌타노는 자기 동료 크로네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군축 계획과 ‘포괄적인 탈퇴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글롭케가 1월 초에 완성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덜레스가 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크로네와 아데나워에게 자기 생각을 설명하였다. 곧 과거에 했던 독일 통일 요청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노선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정통적인 독일 정책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기에 크로네나 글롭케나 아데나워와의 대담이 있기 하루 전 토론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하였다. “근본적으로 판코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곧 독일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먼저 동서독 간의 내적, 인적 관계 개선에 힘을 더 써야 한다.”     

이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외무부가 이 계획을 아직 밀고 나가지 말기를 바랐다. 더 나아가 그는 원내대표단의 에를러와 멘데가 이 일에 관여하는 것을 차마 놔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아데나워는 이 창의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문제의 요소가 많은 계획이 너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닌가? 아데나워는 상황이 더 악화될 때를 대비해서 이 계획을 차선책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크로네는 아데나워가 이미 그때부터 글롭케의 계획을 추진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데나워는 매우 확실히 이 계획을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대신 서방 국가들은 그 ‘대가’로 독일에 관한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또 다른 고민은 독일의 지위가 국제법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글롭케는 2월 26일 손으로 직접 수정한 17개 항목의 목록이 담긴 4장짜리 서신을 받았다. 그 글씨에서 아데나워의 불안한 생각을 읽어 볼 수 있었다. 전승국들 가운데 한 나라가 서독의 동의 없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 나라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영국 말고는 그럴 나라가 없었다. 또 다른 질문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정체의 근거에 관한 것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일연방공화국은 종전의 서방국의 점령 지역을 포괄하여 3개 서방 점령국이 독일조약을 통하여 상세한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었기에 주권 국가의 영토가 된 것이 아닌가?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제법적으로 동독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결론에 가서 아데나워는 국제법의 역사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보았다. “구 독일제국에서 알자스·로렌 지역이 어떤 상황에서 분리되었나요? 터키 제국의 와해를 국제법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사실 터키 제국은 이집트와 그리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에 관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다가 점차 권리를 양도하거나 보장하여 마침내 이들이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이 된 것 말입니다. 오스트리아 일부를 여러 후발 국가에 양도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그리고 국제법적인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이러한 질문을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이제야 비로소 국법적인 국가의 해체과정에 역사적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도기적 해결책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곧, 과연 해제 과정이 국제법적으로 완결되지 못할 경우 어느 정도까지 그 과정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작성한 질의서를 연방정부 수상실의 메르커 부장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이틀 안에 국제법적인 견해들을 간추렸다. 그러면서 독일의 법적 상황을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고 근세사의 국가들에 관하여 일어났던 다양한 변화는 매우 제한적인 차원에서 현재 독일의 상황에 관한 예화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연히 독일 문제는 언론인들에게도 불확실하고 다면적이며 여러 모순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외교 조치나 현실적인 조치를 내놓아야 하는 수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이었다.     

조만간 밝혀진 대로 아데나워는 ‘글롭케 플랜’에서 대체로 두 가지 요소를 채택하여 협상 준비에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곧 독일 통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 그리고 인도주의적 지원에 관한 5~10년 기한의 과도기적 해결책에 관한 제안이었다. 통일 절차와의 연관성 문제는 계획안 수정문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추후의 논의에서 일단 배제하기로 하였다. 사실 상황이 매우 심각한 수준은 아니기에 일단 견해를 피력하는 수준 이상의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데나워가 구체적인 협상안에 무엇을 담으려 하는지에 관한 대답은 없었다. 다만 글롭케 플랜이 일단은 독일의 분단 현실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에서 ‘현상 유지 합의’라는 순전히 방어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독일 문제에서 자신이 타협할 뜻이 있음을 밝힌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영국의 맥밀런 수상이었다. 3월 13일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현상 유지 합의’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다만 그 기간이 5년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맥밀런은 그런 경우 과연 독일 국민이 소비에트 점령 지역과 베를린의 지위가 현재대로 유지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할 것인지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이에 긍정적으로 답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 “당연히 현재 상황에서 이는 지속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맥밀런의 방문 직후에 아데나워는 미국 대사 데이비드 브루스에게도 자기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는 흐루쇼프로부터 확답을 얻어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곧 ‘현재 상황을 5년간 유지하여 침착하고 이성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의 지위에 관한 법적인 인정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주장에 따르면 흐루쇼프가 이 ‘현상 유지 합의’에 동의하겠지만 아마도 정상회담 준비 차원의 것으로 여길 것이었다. 3일 후에 아데나워는 여당 대표단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베를린과 동독 지역의 현재 상황을 유지한다면 현재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이룩한 것입니다. 독일 통일 – 언제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6주 후에 아데나워는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외무장관 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 대사 브루스를 조용한 카데나비아로 불러 긴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생각을 좀 더 털어놓았다. 아데나워는 제네바회담에서 독일 문제에 관한 진전은 전혀 없을 노릇이었다. 아데나워는 브루스의 면전에 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일 통일과 평화 협정의 전망은 사실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데나워는 독일 대표단에게 독일 통일 문제는 부차적인 안건으로 다룰 것을 지시하였다. 중요한 것은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을 놓치게 되면 독일 통일은 무한히 미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949년의 파리협약에 따라 소련 점령 지역과 독일연방공화국 사이의 교통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고 또한 기독교 교회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조처를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동독이 장기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계획이 성사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였습니다.”     

여전히 아데나워는 장기적으로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는 포괄적 군축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문제가 논의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상 유지 합의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글롭께가 이미 이 문제에 관하여 연구했습니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흐루쇼프가 자신이 제안한 정상회담에서 ‘현상 유지 합의’를 논의하게 되기를 바라는 자기 희망을 피력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글롭케 플랜’을 직접 언급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아데나워는 필요한 경우 ‘글롭케 플랜’의 다른 부분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몇 주 후에 아데나워가 기자 몇 명과 현 상황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길의 통제와 국제연합군의 베를린 배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독의 법적 지위 인정은 논외로 쳤다. 이는 국제법적으로 독일의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접근 통로에 대해서는 동독 당국과 협상을 벌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 당 내부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토론이 이어졌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매우 참신한 발언도 있었다. 이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이와 관련하여 동독 측에서 임명된 장관이 파견된다면 막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죽는 것도 아닙니다. 나도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흐루쇼프가 마침내 베를린 최후통첩을 취소할 준비가 되어 있자. 일단 아데나워에게는 과도기적 합의나 글롭케의 계획을 논의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베를린 문제가 심각해질 때마다 아데나워는 이를 다시 거론하였다. 예를 들자면 1960년 9월 8일 알렉스 슈프링거가 카데나비아로 아데나워를 방문한 자리에서 말이다. 아데나워와 슈프링거가 그때부터 친해지게 된 것은 어느 모로 이 글롭케 플랜이 동기가 되었다.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카데나비아에서 보낸 서한을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저는 귀하의 계획을 좀 더 크게 발전시켜보았습니다. 귀하가 작년에 구상한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은 명백한 확신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그 계획이 정책의 차원에서 볼 때 베를린이나 민족 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만 1,700만 명의 동독 주민과 베를린 시민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고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1960년 9월 슈프링거와 대담에서 거론된 긴급한 상황은 1960년 가을 국제연합 총회에서 독일과 베를린 문제를 다루기로 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글롭케는 자기 계획을 수정할 마음을 먹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글롭케의 계획에 기반 한 ‘현상 유지 합의’라는 구상에서 1962년과 1963년에 들어서 10년 기한의 ‘휴전’ 계획이 나오게 된다. 먼저 아데나워는 1962년 6월 6일 소련대사 스미르노프에게 비밀 엄수를 부탁하며 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미국과 영국이 독일과 베를린 문제에서 소련에 양보할 가능성을 우려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여기에 ‘동독 주민들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연계시켜보았다. 그래서 동독과 서독이 안정된 상황에서 상호 존중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여전히 논란이 되고 해결되지 못한 문제에 관한 이해를 도모하기가 더 쉬운 일로 보였다. 이렇게 안정된 시기가 오면 중요한 문제 곧 포괄적 군축 문제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스미르노프에게 글롭케 차관 이외에는 그 누구와도 이 구상에 대하여 논의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 제안의 내용은 전적으로 흐루쇼프의 입맛에 맞춘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이에 관심을 둔다면 각론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흐루쇼프가 몇몇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아데나워는 즉각 그의 수상 임기 말기에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 집중할 요량이었다. 아데나워는 1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기로 하자는 계획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중세에 흔했던 평화 협정을 지칭하는] ‘도성평화 계획’(Burgfriedenspla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대담에서 독일 통일은 필수적인 일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데나워는 몇 달 뒤 드골 대통령에게도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확실한 사실은 베를린 위기가 발생한 초기 몇 달 동안에 ‘글롭케 플랜’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아데나워의 독일 정책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데나워는 동서독 분단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며 현상 유지 합의에 머무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글롭케 플랜에서 ‘임시 해결책’과 동독 주민의 어려움에 관한 인본주의적 지원만 선택하고 독일 통일을 위한 단계적 계획에 관한 나머지 모든 것은 제쳐두게 되었다. 당시 상황과 자기 주군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글롭케도 독일 통일에 관한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그저 현상 유지 구상을 위한 장식품 정도로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아마도 이는 자기 계획서가 독일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 오르거나 불순한 의도를 지닌 이의 손에 넘어갈 것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사실은 아데나워가 통일을 궁극 목표로 삼는 독일 문제에 대하여 일단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현상 유지 합의에 대하여 솔직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올 때마다 그러한 의도를 내비쳤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둘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소련의 군사력이 현저히 증대된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나 내부 논의가 있을 때 그의 측근이 동독의 울브리히트가 체제 인정에 앞서 한 동의를 첫날부터 위반할지 모른다고 하자 아데나워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 나중에 걸고넘어질 수 있는 문서라도 확보해야 합니다.”     

가끔 글롭케 플랜을 언급하는 것에서 우리는 아데나워가 최소한 ‘과도기적 해결책’을 위하여 어느 정도라도 구상된 기초를 철제금고 깊은데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1959년에 이르러 아데나워의 독일 정책은 그 종말 단계에 와 있었다. 그 단계에서 그는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좀 더 정밀히 보자면 1959년 첫 두 주에 걸친 상황이 그랬다.      

2월 3일 영국 대사 데이비드 스틸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영국 총리가 하루 전에 작성한 서한을 전달하였다. 그 서한에는 따르면 영국 총리인 맥밀런이 소련의 국빈 방문 요청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방문은 협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몇 주 후에 아데나워 수상은 발터 리프만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영국 대사에게 한 말을 전해주었다. “네, 파리에서는 박람회를 열 만하죠. 물론 선거에서 승리하려는 맘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선거 여행을 위해 7~10일을 소비하다니. 그건 좀 과하네요.” 이 대담 이후 아데나워가 간략하게 전한 바에 따르면 스틸 대사는 얼굴이 빨개져서 선거전략 차원의 계산은 전혀 없었다고 항변하였다고 한다.     

당연히 맥밀런은 자기 일방적인 대화 추진이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책임감에서 나온 시도라고 여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선거에서 영국의 보수당이 승리할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은 것이다. 아데나워가 테오도르 폰 호이쓰를 나중에 만난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맥밀런이 모든 것을 오로지 선거만 의식해서 추진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런데 호이쓰는 맥밀런이 아데나워에 대해서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대담에서 아데나워의 말에 대해 최소한 ‘기꺼이 웃어주는’ 예절은 갖추었다.     

그런데 스틸 대사와의 대화는 더욱 심각하게 흘러갔다. 스틸 대사는 동독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동독의 체제 인정을 위하여 전쟁을 불사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맥밀런이 소련을 방문한 자리에서 소련이 동독의 체제 인정을 어느 정도 시도할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이제는 ‘글롭케 플랜’에서 거론한 ‘현상 유지 합의’라는 구상에 좀 더 다가가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스틸 대사와 대담을 나눈 지 이틀이 지나자 크로네는 아데나워가 ‘글롭케 플랜’을 추진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아데나워 수상은 격노하였다. 그가 며칠 후에 원내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크로네는 아데나워가 ‘영국이 판코프의 계획을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도 불만을 털어놓았다. 곧 맥밀런이 서방 연합국과 사전 논의 없이 1주일이나 소련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비열한 알비온*’으로서의 영국에 관한 인상이 다시 급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독일인은 그러한 영국에 관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의 경제에 관한 질시가 영국의 독일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상투적인 말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 알비온 [Albion, 역자주 - 과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친 지역을 지칭하는 비속어]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 맥밀런에 대한 신뢰심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도 아데나워는 여전히 맥밀런이 미리 상의 없이 소련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 방문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이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많은 것이 양보되고, 논의되고, 망가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데나워와 영국 총리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몇 년 후에 영국 총리가 자기 러시아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나서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다. 맥밀런이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은퇴한 후인 1965년 아데나워는 영국의 여러 수상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맥밀런을 ‘멍청이’라고 불렀다.     

맥밀런도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속마음을 잘 감추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1959년 초여름에 적은 일기에 보면 이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8월 28일 “아데나워는 다른 많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허황되고 의심이 많고 욕심도 많다. ...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나는 체임벌린 수상의 환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6월 18일 일기에 나온 말이다. “아데나워는 이제 거의 미친 사람이 되었다.” 6월 27일 “드골과 아데나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아데나워는 믿을 수 없고 싸우자고 덤비기 좋아하는 노인이기 때문이다.” 7월 23일 일기에는 이런 말까지 나온다. “거의 미쳐가는 아데나워”     

놀랍게도 맥밀런에 대한 신뢰할 수 없다는 비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것이었다. 맥밀런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한 아데나워는 사실 자유무역지역에 관한 협상에서 맥밀런을 지지할 것을 약속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사실을 드골과의 첫 만남에서 고자질해버린 것이다. 맥밀런이 3월 중순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후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하면서 아데나워는 영국의 심각한 반독 정서를 언급하면서 맥밀런의 응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꾸하였다. “자유무역지역에 동의하시면 사정이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독일 수상과 영국 총리 사이에 인간적,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사실 이 당시는 흐루쇼프에 맞서 단합할 필요가 매우 절실한 때였다.     

이 당시 미국의 대독 정책도 아데나워의 시름을 가중시켰다. 그런데 원인은 달랐다. 미 의회를 지배하던 민주당은 포괄적 협상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이 주장하는 것과 대동소이하였다. 덜레스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신도 의회를 통한 국내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 덜레스는 맥밀런보다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아데나워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달래듯이 말했다.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아데나워는 그 자리에서 덜레스가 더 이상 중계인 논리를 펼치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도 하였다.     

1959년 2월 첫 주에 덜레스는 서유럽 주요 도시들을 순방할 예정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도 세력의 단합이 순방 목적이었다. 논의 내용의 조정을 위하여 아데나워는 1월 30일에 10페이지에 달라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덜레스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 친서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강경한 노선을 피력하였다. 흐루쇼프가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흐루쇼프의 목적은 서유럽의 경제적 잠재력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소련이 미국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당시 아데나워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그가 좋아하던 기자 간담회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우려가 옳았다고 털어놓았다. 할슈타인이 아데나워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잠재력은 17이라고 볼 때 미국의 잠재력은 20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평화 계획이 연맹 체제 구상과 더불어 현실화한다면 먼저 독일연방공화국이 소련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고 결국 서유럽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노릇이었다. 말하자면 도미노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덜레스가 소련의 연맹 구상에 관련된 모든 술수에 관한 그 어떤 동조도 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또한 이 일이 오직 독일연방공화국에만 해당된다는 주장도 하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만약 베를린이나 독일연방공화국이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고 아데나워가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하고는 있었다. 베를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어떤가?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오더·나이쎄 국경에 관한 바람직한 성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러나 물론 독일 측의 입장을 아데나워는 잘 알고 있었다. 곧 폭력의 포기와 조국을 수호할 권리의 보장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폴란드와의 경제적 협력도 고려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덜레스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이고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측근인 머천트에게 전화를 걸어 아데나워 친서의 내용을 전달했다. “그 서신에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가(아데나워가) 말하는 요점은 현 세계의 긴장 국면의 원인이 독일의 분단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이 긴장 국면에는 더 깊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모두 군축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덜레스와 머천트는 그런 생각이 말 앞에 마차를 묶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미 아데나워 수상이 무슨 생각에 꽂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는 독일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무력 사용 포기라는 허접한 제안을 하는 것 말고는 더 내세울 것이 없었다고 보았다.     

아데나워가 강경한 의견서를 보낸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미 워싱턴에서는 이미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다. 아이젠하워는 ‘중재자론’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는 미군 총사령관의 조언을 무시하고 연합국이 베를린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을 소련이 막은 그날에 1개 사단을 베를린에 즉각 투입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덜레스의 조언대로 군대 파견이 이루어지게 되면 국제연합의 안보이사회와 총회를 개회하여 대대적인 선전전에도 나설 예정이었다. 무력행사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는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었다. 흐루쇼프가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베를린 봉쇄 조치를 철회할 기회를 주자면 4월 중순에 독일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기 위한 4자 외교회담을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회담은 소련이 현재의 베를린에 관한 ‘최후통첩’을 전면 취소하거나 수정할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덜레스와의 면담을 하루 앞둔 저녁에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긴급하게 측근들과의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였다. 분위기는 매우 침통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 수상이 이제야 자기의 강경 노선을 수정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폰 브렌타노, 글롭케, 크로네는 아데나워가 원칙적으로 이미 현상 유지 합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회담 개최가 필수적이었다. 호이싱거 장군은 아데나워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였다. 곧 베를린 사태의 해결에는 핵무기 동원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소련은 동독 지역에 강력한 재래무기로 무장된 20개의 최정예 사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클레이 장군도 호이싱거 장군과 생각이 같다고 보고하였다. 소련이 새로운 지역 차단을 시도하는 것을 막으려면 분명히 제3차 세계대전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면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처음부터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사전 회의에서 대책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상의 자리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아데나워는 핵무기 사용에 따른 파멸을 앞두고 자기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아데나워는 흐루쇼프가 결국에 가서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며 측근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1944년 여름을 돌이켜본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결정적인 오판을 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2월 7일 오전에 아데나워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로운 나쁜 사실이 확인되었다. 덜레스는 매우 빈약해 보였다. 그는 몸무게게 20파운드나 빠져있었다.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으로 보였다. 덜레스는 아데나워에게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첫 대담이 끝난 저녁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더 이상 그와(덜레스와) 논의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 미국 측에 서서 독일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협을 봐야 하는가? 그러한 생각은 서방 진영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오더·나이쎄 국경, 베를린, 독일 통일. 이는 우리에게는 매우 심각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합니다.”     

덜레스는 아데나워가 더 이상 강경 노선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리고 이 첫 대담에서 그는 만약 유럽 연합국들이 미국에 양보를 강요하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불간섭주의’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챘다.     

다음 날 아침 아데나워와 덜레스는 의견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 매우 신중한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를 다루는 협상에서 반드시 베를린 문제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래서 최후통첩을 철회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은 분명했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를린에 관한 잠정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위기 상황 대책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논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베를린 연결 통로가 무너지면 대책이 무엇이냐는 덜레스의 질문을 언급하였다. 아데나워는 먼저 잠정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곧 위기 상황이 도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태가 어쩔 수 없이 벌어진다면 ‘3개의 부정적 일반 원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로 서방 국가들의 단결을 해치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3개 서방 강대국, 특히 미국이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에 놓여서는 안 된다. 셋째로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서방 강대국 가운데 가장 신중한 영국이 무력행사의 시기와 강도를 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제한된 병력의 충돌, 곧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의 동원은 하지 말아야 하였다.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최고로 무장된 20개 사단의 소련군은 그 정도의 병력은 쉽게 차단하거나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독일과 연합국은 가장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입고 굴욕적으로 철수하게 되거나 핵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데나워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앞에 앉은 국무장관은 불만이 많았다. 그는 속으로 이미 자기 삶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의 관심은 여러 번 맹세한 ‘벼랑 끝 전술’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베를린을 위한 보급로가 차단된다면 무력을 행사랄 수 없는 법이라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무력행사가 실패하면 결국 핵전쟁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 자체도 적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하였다. 덜레스는 분명히 말했다. 유럽에 절대로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큼 황당한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소련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데나워가 한발 물러섰다. 그는 다만 동독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을 고수했다. 덜레스는 이제 미국의 비상 대책 계획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워싱턴에서 1월 말에 완성한 계획으로 전쟁을 불사할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전쟁을 불사하면 소련이 물러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세운 계획이었다.     

아데나워는 한발 물러서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영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서방 3국의 단합이 핵무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제 덜레스가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서방 3국이 아니라 4국, 곧 독일연방공화국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에는 이 4개 국가가 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에서도 이 계획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더 나아가 덜레스는 은근히 협박조로 말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강경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미국에 미리 그 의사를 파악하게 된다면 미국은 독일의 위신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 발 더 물러섰다. 그는 이제 강경책에 찬성하지만, 베를린 통로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미국이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이외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덜레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은 최소한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가 유지되도록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앞으로 2단계로 진행될 계획을 설명하였다. 첫째로 무력을 동원해야 할지를 탐색을 한 다음에 군대 동원 준비 단계로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선전·선동 조치가 동반된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이런 계획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제 답을 했다. 곧 단계별로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 자기 생각에도 옳고 독일연방공화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이다. 덜레스는 아데나워가 최종 단계로 나가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크로네가 아데나워의 보고를 바탕으로 구성해 본 대화 내용이다. “덜레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의 추측으로는 “덜레스는 아데나워 수상이 예상한 것보다 더 나간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의 수상 재임기에서 그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이때처럼 시험을 받은 적이 없었다. 1960년 초반에 이 문제가 다시 한번 등장하고 1961년 말에는 케네디가 비슷한 질문을 다시 아데나워가 하게 된다. 이때 아데나워는 죽음이 임박한 덜레스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언급하며 비슷한 답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전 생애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해왔다. 그러다가 한계 상황에 이르게 되면 탈출구를 찾고는 했다. 1950년대의 상황에서 매우 냉정히 생각하는 인물이었지만 결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에첼부르크(Etzelburg)의 불타는 발홀(발하아)에서 죽으려고 몸부림치는 니벨룽들은 아니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와 맺은 약속이 얼마나 부실한 것이었는지는 그가 귀국하자마자 곧 드러났다. 덜레스는 대통령에게 경과보고를 하면서 아데나워의 핵전쟁에 관한 우려를 전달하였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병원에 달려가 진찰받았다. 결과는 상당히 진행된 암이었다. 그의 동생이자 미국 CIA의 국장이었던 알렌 덜레스가 아데나워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의 형이 아데나워가 실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본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일단 독일 문제에 관한 협상 자리가 새로 마련될 것으로 보임에 따라 영국이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덜레스의 충고를 받아들인 아데나워는 맥밀런이 러시아를 방문하기 전인 2월 11일에 매우 중요한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친애하는 친구여”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아데나워는 먼저 2월 3일 스틸이 전한 불쾌한 내용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서방 연합국이 이른바 동독의 체제 인정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면 외교적 상황 전체가 유럽과 우리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변하게 될 것입니다. ... 흐루쇼프가 귀하에게 그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대답을 매우 신중하게 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것에 대하여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서한이 전혀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맥밀런은 아데나워가 동독의 체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1971년에 발간한 1권짜리 회고록에서 맥밀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는 당연히 평생에 걸쳐 가장 엄격하고 확고한 관점을 견지해 왔던 것이다.”     

영국이 타협할 만한 주제로 생각한 것은 유럽의 군사 장비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 주 무대는 독일이었다. 3월 3일 발표된 맥밀런과 흐루쇼프의 대담 결과 성명서에는 불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국가의 수반들은 “군사력과 무기의 제한을 통하여 유럽의 안정을 강화할 가능성을 합의된 유럽 한 지역에서 적절한 감독 체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맥밀런은 이제 독일에 체제 불인정과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등장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평생에 걸쳐 가장 엄격하고 확고한 관점을 견지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군비통제를 독일연방공화국의 동의하에 진행하는 문제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내적인 성찰을 한 다음 이 문제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곧 군축을 강력하게 내세운 것이다.     

맥밀런이 소련을 방문하는 동안에 이미 아데나워는 미국 대사에게 맥밀런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맥밀런은 체임벌린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맥밀런이 러시아 군대에게 ‘동무’라고 인사한다면 이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아데나워는 내각에서 맥밀런의 태도 때문에 소련이 촉발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번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 가운데 북부 유럽에 속하는 국가들은 이미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영국이지만, 내일이 되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해당될 것입니다.”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이 전반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쳤던 이 무렵 영국에 관한 근심이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영국 총리만이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독일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중순에 아데나워는 당시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월터 리프먼에게 자기 심정을 매우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았다. “미국은 소련과 완전히 대립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도 드골을 중심으로 마찬가지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선거를 앞두고 있고 거기에 더해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독일에 관한 강한 증오, 진짜 증오가 횡횡하고 있습니다. 그 증오는 부분적으로 소련의 조직적인 사주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맥밀런이 매우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덜레스는 거의 무기력해졌으니 아데나워는 프랑스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드골은 그사이에 절대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아데나워는 드골은 이제 이 어려운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의지처가 되었다고 여겼다. 프랑스 대통과의 면담을 앞둔 시기에 아데나워는 하인리히 크로네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곧 “그가 프랑스에 정상회담에서 독일을 대변해 주라고 요청하여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한 것이다. 원내대표는 그런 식으로 매우 의미심장하면서도 생각해 볼 만한 제안을 한 것이다. “수상은 프랑스와 매우 밀접한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날 맥밀런이 11일에 걸친 소련 방문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자, 아데나워는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드골과의 면담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말리르로이 성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신문기자가 동석하지 않았고 방송 촬영도 없었다. 드골은 이제 자신이 대통일 뿐 아니라 드러내놓고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비밀 회담 후에는 반드시 논의된 것보다 더 부풀려진 뉴스가 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두 정상은 언론에 ‘파리·본 축’(Achse Paris-Bonn)이라는 기사가 나고, 대륙 유럽의 강경한 자세와 타협적인 영국에 관한 기사가 난 것을 보고 매우 좋아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기가 난 아데나워는 3월 중순 영국 총리 맥밀런을 만났다. 그의 생각에 이 회담은 매우 불편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 두 사람은 견해차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회담에 참석한 인사들은 아데나워와 맥밀런이 얼마나 서로에게 냉랭한 자세를 취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주요 논쟁거리는 군비통제에 관한 영국의 계획이었다. 아데나워는 맥밀런의 예방이 있기 직전에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모든 군사적 불간섭 정책에서 과거 승전국들의 정치적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맥밀런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한 강압에 의한 강화 조약에 독일 측이 서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제 강화 조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맥밀런과 외무 장관 셀린 로이드에게 성명서에 나온 유감스러운 표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하였다. 며칠 후에 아데나워는 브루스 대사에게 맥밀런이 실제로 철의 장막으로 갈라진 양측의 군비 동결에 동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는 별로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군대는 그 무기를 계속 보유해도 된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미국 측에서 전달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에게 그런 계획을 전달한 것은 맥밀런 자신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흐루쇼프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당연히 아데나워는 브루스에게 그런 계획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찌 되었든 맥밀런이 본을 방문한 때 아데나워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일련의 동서 회담 구상을 제시하고, 추후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조건으로 베를린과 관련된 논의를 5년간 중단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흐루쇼프가 정상회담을 바란다는 것을 아데나워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맥밀런도 정상회담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맥밀런은 아데나워가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에 동의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본에서는 초기에 흐루쇼프에 맞서 강력하게 형성되었던 전선이 완전히 와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밀런이 아데나워와 협상을 하는 동안 프리츠 에를러와 카를로 슈미트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협상을 벌였지만, 별무소득으로 돌아왔다. 그 며칠 전에는 이미 올렌하우어가 베를린에서 흐루쇼프를 접견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비웃으며 발터 리프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렌하우어가 흐루쇼프를 만나러 통역관도 없이 단독으로 동베를린으로 가서는 이미 성명서를 다 작성한 러시아인들을 마주하였습니다. 그 커다란 소련 공산당 지도자가 그 정도로 멍청할 것으로 생각하다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다시 며칠이 지나서 사민당(SPD)은 이른바 ‘독일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일을 담당한 위원회는 헤르베르트 베너가 의장으로서 이끌고 있었다. 그는 그 계획의 초안을 동유럽 측의 입맛에 맞도록 수정하였다. 그 계획의 핵심은 독일의 비핵화와 궁극적으로 집단 안보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너는 여기에 한술 더 뜨고 나섰다. 아데나워 정부에 강력하게 맞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아데나워는 ‘히틀러 총통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수상의 생각에 사민당(SPD)은 ‘베너의 지휘 아래서 지나치게 좌경화 되어 있었다.’ 과거에 어느 정도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들과 ‘참된 사민주의자’들 사이에 정신적인 분열이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적인 갈등이 다시 일어난 것을 내심 반겼다. 니더작센과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민당(SPD)이, 통합된 독일 조직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등한 대표자격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선거에서 기민당(CDU)에서 뜻밖에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3월과 4월에 본과 서방의 수도에서는 아직 독일 회담에 관한 의견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데나워의 책상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회담 관련 서류의 내용은 아직 부족하고 심지어 위험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는 자기 나름대로의 구상을 멈추지는 않았다. 1958년 겨울부터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계획에 관한 소문이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에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동독의 수도를 라이프치히로 옮긴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에 자유도시를 수립하여 국제연합의 통제 아래 놓는다. 3월 20일 아데나워와 그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탐문은 다 무위로 돌아갔다. ‘크라이스키 플랜’을 놓고 벌인 밀고 당기기에서는 결국 아데나워가 얼마나 열심히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었는지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데나워의 의구심은 커져만 가서 결국 외무부가 서방 국가의 외무부와 접촉하여 그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독일 계획을 수립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후계자를 찾는 일이 절정에 이르러 아데나워의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어 벌어진 일이다.     

일이 점점 꼬여만 갔다. 3월 말 부활주일 토요일이 되자 판 셰르펜베르크 차관이 뢴도프로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4강의 베를린 문제 실무진이 작성한 엄청난 양의 서류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 《노이어 취리히 차이퉁》은 감독지역에 관한 계획이 라파츠키 플랜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그사이 쾌속선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서는 워싱턴의 입맛에 맞게 회담 준비서류의 내용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런던이 제시한 의정서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아데나워가 혼란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 폰 브렌타노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는 아데나워를 무시하고는 뉴욕에서 개최된 서방 외무장관 회의에서 군비통제 계획을 승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다음 크라이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3월 말 그가 본을 방문하였을 때 폰 브렌타노에게 비슷한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 계획은 폰 두크비츠 부장이 입안한 것이었다. 그 당시 크라이스키는 한 저녁 식사 때 이에 관하여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크로네가 아데나워의 최측근이면서도 이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사실을 알았다. 판 셰르펜베르크가 상황을 설명하고 나자 아데나워는 이 이렝 적극 개입하였다. 폰 크로네가 경고를 한 것인지, 언론 보도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데나워는 판 샤르펜베르크를 통하여 폰 브렌타노에게 지침을 전달하였다. 곧 부활절 월요일 워싱턴에 갈 때 중요한 사안에 관련된 것이라면 실무회담에서 그 어떤 것도 동의하지 말 것을 명령한 것이다. 외무장관과의 회담은 브렌타노의 심기를 매우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4강 실무회담이 파리에서 다시 한번 개최되어야 했다.     

2주 후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데나워는 본에서 커다란 논란이 된 대통령 후보가 되는 문제에서 잠시 발을 떼고는 카데나비아에서 4주간에 걸친 봄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날마다 회담 준비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지켜보았다. 사실 이제 존 포스터 덜레스는 미국 정계에서 사라졌다. 이때 아데나워가 어찌 생각했는지는 다네 하이네만에게 보낸 친서에 잘 나와았다. “여기 날씨는 매우 좋습니다. 그렇다고 일과 근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덜레스의 병과 퇴임은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가 하필이면 매우 중요한 회담을 앞두고 그만두게 된다니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감입니다.” 본으로 돌아와 기자들에게 한 아데나워의 말은 더 극적인 것이었다. 이 회담의 준비로 카데나비아의 휴가를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었다. 그가 멀리서 모든 일을 어찌 막으려 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데나워의 측근들은 그가 이렇게 장기 휴가를 가자 더 긴장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휴가를 떠나서 본에 있을 때보다 두툼한 서류를 더 꼼꼼히 보고서 외교 전문을 통하여 장문의 비판적이고 우려스러운 서한을 쓸 시간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한 계획도 세웠던 것이다. 프랑스의 독일 문제 실무단의 단장인 장 라로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라로이는 아데나워에게 특정 지역에 한정해서 군축을 추진하려는 영국의 계획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아데나워의 신경을 건드릴만한 심한 언사도 여기에서 구사되었다. 라로이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지역은 프랑스의 시각에서 볼 때는 독일의 ‘중립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아니면 독일연방공화국 자체가 ‘국제적 통치 지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카데나비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판 쉐르펜베르크의 날이 잔뜩 선 전보가 당도해있었다. 그는 실무진의 활동 지침 초안을 무조건 반대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국내 안전지대’를 설정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의 생각에 이는 ‘라파츠키 계획의 짝퉁’에 불과한 것이었다. 판 쉐르펜베르크에게 소식을 들은 폰 브렌타노는 매우 놀라 내각에 서면 질의를 제출할 정도였다.     

글롭케와 판 쉐르펜베르크 차관은 외무 장관의 서한을 들고 즉각 카데나비아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아데나워의 심기가 가라앉지는 못했다. 그들이 카데나비아를 떠나자마자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에게 10페이지에 걸친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와 외무부에 관한 그의 모든 생각을 정리하였다.     

먼저 아데나워는 외무장관 사퇴 의견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현재 그것은 적절치 않은 조치였다. 게다가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판 쉐르펜베르크 또한 신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외무부 전체를 신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외무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곧 외무부가 ‘내부적으로 질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외무부에 일부 세력이 사민당(SPD)과 협잡을 벌이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내가 보기에 외무부에서 일하는 하위 관리 가운데 내 지시없이 더 나아가 나를 거슬러 중요한 결정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브렌타노는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장관의 통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귀하가 건강이 안 좋고 회담 준비 기간의 절반 동안에 본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자주 본을 비우고는 발드미헬바흐로 향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합리적으로 건강을 돌보며 며칠 지내기보다는 귀하의 선거구와 헤센주로 가서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사실 현재 이는 전혀 무의미한 일입니다.”     

원래 아데나워가 승인했던 회담 계획 전체가 이제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터뜨렸다. “베를린 문제와 다른 문제를 연계하여 함께 다루는 것은 베를린에 매우 불리한 일입니다.” 사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벌어진 일들은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아데나워 자신이 이 계획을 마지못해 승인한 것이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이제 아데나워는 베를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제연합의 관여를 끌어내는 것을 별로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다. “우리가 그에 반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아데나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국내 안전지대’의 설립 문제였다. 사실 폰 브렌타노도 자신이 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한 것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독일에 회복 불가능한 손해를 입히게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몇 달 후에 맥클로이는 군비통제에 관하여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특히 격분한 이유는 문제가 되는 외무부의 구상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4월 13일 자 기사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트》와 《컴배트》에도 동일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외무부 자체에서 흘러나온 것일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가 즉각 이 부서 내부 기밀이 새어나간 것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아데나워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다음 날 글롭케에게 보낸 급히 써 내려간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긴 추신을 덧붙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외무부 직원 가운데 상당 수가 현재의 외교 정책을 반대하는 것으로 우려됩니다. 폰 브렌타노는 심신이 쇠약해졌습니다. 판 쉐르펜베르크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정말 걱정이 큽니다.”     

위기를 감지한 아데나워는 이제 그레베 대사가 독일 사절단을 이끌고 제네바회담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그레베야 말로 독일 문제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회담에 필요한 뚝심도 있었다. 이제 회담 준비가 어느 정도 안정되게 이루어졌다.     

독일 문제에 관한 회담의 결과를 놓고 볼 때 아데나워는 매우 현실적으로 접근한 것을 알 수 있다. 베를린 문제가 잘 해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회한 유럽 통합 지지자인 룩셈부르크의 요제프 베흐는 4월 28일 자 소인이 찍힌 서한을 받았다. 이 서한이 거의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현재 시작될 회담의 전망은 제가 볼 때 아주 안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베를린의 자유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데나워가 예상한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서방 국가들이 참여한 제네바회담에서는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최후통첩이 길고 성과 없는 논란으로 이어지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힘은 들었지만, 그 성과를 거두었다. 5월 11일부터 8월 4일까지 협상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베를린에 관해서는 장정적인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필이면 5월 27일 존 포스터 덜레스가 햇빛이 쨍쨍한 미국 알링톤 국립묘지에 안장된 일에 묘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데나워만이 아니었다. 이날은 소련의 최후통첩에서 지정한 날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하여 입을 먼저 열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다양한 인사가 참석하였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 폴-앙리 스파크, 그로미코가 참석해 있었다.     

덜레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위를 달래는 오트밀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데나워는 감동하였다. 그것은 아데나워가 덜레스에게 먹어보라고 한 것으로 직접 우편으로 보낸 것이었다.     

모든 견해차는 이제 다 잊혔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아데나워는 다니 하이네만에게 언제나처럼 짧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친구인 존 포스터 덜레스와의 작별이 매우 유감입니다. 그는 독일의 가장 믿을만한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볼셰비즘이 자유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4월 초에 느닷없이 내렸던 잘못된 결정을 수정한다는 말로 건너뛰었다. 곧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했던 결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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