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Aug 23. 2023

유럽 전체의 질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III

아데나워 전기 II

    

대통령과 관련된 희극     


1959년 초와 초여름 독일의 여론은 베를린 최후통첩만큼이나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후계자 문제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워낙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언론은 베를린 위기와 더불어 ‘대통령 위기’를 거론하였다. 베를린 위기는 현실적인 문제였지만 대통령 문제는 사실 쓸데없는 과장에 불과하였다. 독일 문제에만 너무 집중하지 않고 보면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 정치 계층에게 가장 군침이 도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코티 대통령을 1953년 12월에 선출하기까지 투표가 13차례가 진행되었다. 세니가 이탈리아 1962년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에는 9차례의 투표 과정이 필요하였다.     

결국 륍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한 절차에 관한 조바심으로 이미 언론에서는 전형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곧 정국 안정과 대통령 직위가 흔들림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매우 독일적인 견해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대가 정치가들의 잘 알려진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논란에 관한 대중의 혐오를 부채질하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는 세 인물, 곧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그리고 호이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잘 발전해오는 데 도움이 된 이들로 여겨졌다. 아돌프 히틀러 이후 독일이 안정적인 시민사회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이 정도 수준의 세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봐도 매우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국민들은 아데나워보다 호이쓰와 에르하르트에 더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국민들은 아데나워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아데나워를 다른 이들을 달달 볶고 요구 사항이 많으며 신경질적인 어르신네로 존경하지만, 다른 두 사람을 선한 시민과 같은 풍모의 보헤미안으로 여기며 더 사랑하였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가 그들과 협상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고위직에 있는 인물들 사이의 조용한 구도 전체에 혼란스러운 변화가 올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실 아데나워의 사고방식에서는 시민사회적 공화국 친구들이 유명 인사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절실히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1950년대 후반기의 시민들은 천사들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를 오랫동안 관찰해온 이들은 그런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많은 독일 국민은 최소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이는 사회를 모두 그러안을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독일 국민은 이제 테오도르 폰 호이쓰가 매우 잘 수행해온 국가의 최고위직을 개인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이의 손에 넘겨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 상징적인 의미만이 있는 대통령 직무에 관하여 이런 큰 소동이 난 것이 매우 이상할 지경이었다. 수상과 기민당(CDU) 당대표가 대통령 후보 자리를 그 정도로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심각한 판단력 부족에서 나온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아데나워의 나이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 정도로 나이 든 인물이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면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 이유로는 아데나워가 지금까지 전혀 노인의 티를 내지 않은 것도 있었다. 1957년 10월 블랑켄호른이 다시 한번 카데나비아에 머물고 있던 아데나워 수상을 찾은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그에게 무릎에 혈종이 생긴 것에 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넘어져서 생긴 후유증에서 회복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자리에 앉아서 오른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매우 유쾌한 목소리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 ‘전혀 노인의 뼈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약간의 섬유화 현상이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의 뼈는 중년 남성의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는 매우 심각한 허점을 보이게 되었다. 그가 최고의 직위에 오르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직위는 그가 83살에서 88세에 이를 때까지 그의 많은 나이에 걸맞은 가벼운 임무를 맡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명예를 위하여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가 품격을 높여 놓은 이 직위의 명성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아데나워가 자기 직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소란이 일고 있던 때 아데나워 휘하의 차관이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보낸 편지에 아데나워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여러 조사를 한 결과로 여전히 확신합니다. 에르하르트가 수상이 된다면, 독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르하르트가 수상이 된다면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어 보였다. 아데나워와 글롭케는 일단 제네바회담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이 아데나워라는 노인이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서 눈치채고 있었다. 곧 늙은 농부가 세습농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의 동기를 아데나워가 마음에 품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는 무엇보다도 커다란 비극이라기보다는 커다란 희극이었다.     

국가의 최고 직위가 우스갯거리로 전락한 것은 당연히 이 논쟁의 결과와 깊은 연관이 있다. 훌륭했던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 격이 맞는 후계자를 구해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큰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거물들인 카를로 슈미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콘라드 아데나워가 경기장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인리히 륍케가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치가가 연방정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이 두 사람은 전후 연합군의 독일 점령 시기부터 이미 서로를 싫어했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 같은 식견이 밝은 인물에게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륍케와 아데나워가 서로를 못견뎌한다는 사실, 그것도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에 기민당(CDU) 지방당을 설립할 때부터 나는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소동으로 자신의 위신만을 깎아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려서 결론적으로 그에게 맞서는 한 사람을 함머슈미트 빌라*에 가둬버린 것이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를 동료로 삼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비록 그는 전혀 비판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거부감은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를 존경하였다. 호이쓰가 은퇴하고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가자 본에서 국가 재건 시기에 함께했던 정국에 안정을 기하던 또 한 사람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외로움이 커졌다.     

* 함머슈미트 빌라 [Villa Hammerschmidt,  1950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된 건물. 1994년 대통령이 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이후 베를린의 벨뷰궁을 공식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하고 있음. 1994년부터 함머슈미트 빌라는 독일 대통령의 공식 보조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됨]     

그래서 전체를 바라본다면 이는 불운의 연속이라고 할 만하다. 겉에서 보면 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 전체 일이 진행된 모든 단계에는 그의 철저한 계산과 논리가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저지른 모든 실수에도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소동에서 우리는, 일상적 결정을 내리다 보면 전체적인 조망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의 전형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한 달에 걸친 소동에서 가장 커다란 부담을 떠안은 것은 하인리히 륍케만이 아니다. 그는 비록 카리스마는 없지만 연방정부 대통령직을 감당할 수는 있었다.     

1959년 초에 벌어진 우스꽝스러운 일들과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연방 대통령 선출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면 아데나워 정권의 반대파는 아니어도 그의 지지자들은 이 소동을 금방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7년에 걸친 ‘아데나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매우 공로가 뛰어난 경제부장관과 맞섰고 이어서 그의 후계자와 맞서게 되었다. 1966년 12월에 에르하르트가 실각한 것은 아데나워가 기획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1964년과 1966년 사이에 아데나워는 그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반대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데나워는 늘 업무를 중심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데나워와 대화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그렇게 확신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여론은 그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권력의지가 있고 다음으로 1963년 가을 강제로 은퇴한 다음에는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아데나워가 1959년 초부터 언론이 아데나워를 곱게 보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에르하르트를 증오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1958년 여름 아데나워, 글롭케, 크로네가 처음으로 연방 대통령 폰 호이쓰의 후계자를 논의할 때만 해도 이 시시해 보이던 문제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를 아무도 몰랐었다. 그들이 일치를 본 것은 그 당시 회자되던 교수나 주교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검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새 대통령은 정치인 가운데서 나와야 했다. 결국 1961년에 총선이 치러질 예정이니 연방정부 대통령의 추천권에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때 마구 인심을 쓰고 있었다. 1958년 중반에 연방 대통령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한스 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문에 나오고 있는 크로네가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어떤가요?” 이 대담 자리는 호이쓰 자신이 호기심에 넘치는 자기 충복을 시켜 마련한 것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크로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기사당(CSU)이 그러하였다. 기사당(CSU)은 게르스텐마이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기민당(CDU) 내부의 북독 개신교 연합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호이쓰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크로네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가톨릭 신자 수상에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는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크로네는 말을 아꼈다. 그때는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 수상은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를 직접 거론하였다. 이때만 해도 이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느긋하게 논의할 수 있었다. 아직 논의의 초기 단계에 이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의도는 명백했다. 나중에 토니 스톨퍼에게 보낸 서한에서 호이쓰는 아데나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나를(아데나워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안 됩니다.” 크로네 자신이 자신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 생각에 이는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러자 호이쓰가 몇 명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호이쓰가 슈바벤 출신의 동료 게르스텐마이어를 잠정적인 후보로 언급하자 아데나워는 언성을 높였다. “버릇없고, 여당 내에서 호감을 얻지 못하고, 영리하지 못한 ...” 호이쓰가 그다음으로 거론한 에첼에 대하여 아데나워 수상은 그에게는 아직 ‘위엄’이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호이쓰가 다시 후보가 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리고 호이쓰도 직접 들은 바대로 아데나워는 그의 ‘지성’, ‘경험’, ‘위엄’을 찬미하였다. 그러나 결론에 가서는 너무 딱딱해보이지 않도록 위하여 약간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곧 임기 연장이 임시방편이 아니라 독일 국민에게는 ‘아주 적합한 해결책’이라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호이쓰를 각별하게 여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그가 매우 교양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는 찾기 힘든 온전한 지성과 노련한 의원의 품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호이쓰는 젊잖게 아무 말 없었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는 연정을 이룬 여당과 야당이 모두 찬성한다면 3회 연임도 생각해 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1958/59년 회기 말에 뢰라흐에서 휴가를 보내던 때 아데나워와 당 대표단에게 보낸 긴 비망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호이쓰는 그곳에 있는 아들 에른스토 루드비히 호이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휴가를 보냈다. 그 아들은 비베르트 회사의 책임자였다. 이 회사는 기침과 목잠김에 관한 약인 ‘비베르트 환약’(Wybert-Pastillen)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비망록》 16항에서 중요한 속내를 비쳤다. “나와는 무관하지만 어쩌면 가능한 헌법 개정에 관하여 나의 아들이 매우 심사숙고한 의견을 주었습니다. 헌법 제 54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연방대통령의 임기는 5년(또는 7년)이다. 연임은 한 번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자신이 모든 이의 지지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이보다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호이쓰 자신은 그런 생각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말이다.     

정책 결정 과정이 독일연방 대통령의 성대한 제75회 생일잔치 때문에 지연되었다. 이 잔치는 1959년 1월 31일 매우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때 호이쓰의 2차 연임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호이쓰는 아데나워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곧 그는 자신에게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몰고 가서는 애국정신을 발휘하라는 압력”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러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호이쓰의 ‘교양’을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기민당(CDU) 내부의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상황이 매우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 어려운 시기에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베를린과 독일 문제로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말이다.     

그는 이제 다시 한번 대통령에게 그 누구도 호이쓰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호이쓰는 다음날 슈톨퍼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후보를 그가(아데나워가) 박살을 내버리거나 여성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는 말이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미 그를 후보로 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셈은 뻔했다. 슈뢰더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말처럼 말이다. “에르하르트가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강력한 차기 수상 자리의 선두 주자가 사라지게 됩니다.”     

1959년 2월 초에 여러 차례 있었던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대통령 후보로 미는 것을 완곡하게 거부하였다.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가 잘하는 과장된 표현으로 말하기를 에르하르트의 정치적 식견은 ‘이 담배 상자와 같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석탄산업 위기 때 그가 보여준 미국과 룩셈부르크의 고위 관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노조도 그를 반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로써 분명해 졌다. 아데나워는 이때까지도 에르하르트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여전히 호이쓰가 다시 한번 연임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사민당(SPD)은 이제 2월 12일에 카를로 슈미트를 내세우는 것을 기정 사실화 했다. 이른바 ‘호이쓰 법’(Lex Heuss), 곧 호이쓰가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이제 논의가 될 수 없게 되었다. 호이쓰를 대통령 후보로 밀기 위하여 거의 3개월 동안 궁리를 하던 아데나워는 이제 매우 당황하게 되었다.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이 다수가 아닌 연방 회의*에서 카를로 슈미트는 강력한 후보가 되었다. 3차 투표까지 간다면 최고 득표자가 되면 그만이었다. 그는 호이쓰와 마찬가지로 학계에서 탁월한 교수였다. 능변인 데다가 중재 능력이 있고 전국적으로 시민에 다가가는 시민 정당 후보의 전형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이제라도 크로네로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후보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반대하였다. 아데나워와 그의 종교가 같아서 종교적 수상과 대통령의 종교적 균형을 맞출 수 없게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한 핑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는 대통령 후보에 관한 논쟁이 끝날 때 드러났다. 결국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인 하인리히 륍케의 종교에 대해서 아무런 논란 없이 그를 후보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크로네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추측하기로는 아데나워가 크로네를 반드시 원내 대표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크로네는 그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안 되겠다는 사실을 2월 23일 여당에 통지하였다. 사실 여당은 그를 강력하게 밀고자 하였다.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 크로네가 후보를 포기하면서 몇 주 전에 아데나워가 글롭케가 있는 자리에서 그가 자기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무렵 크로네는 때가 되면 에르하르트가 차기 수상이 될 것이라는 언질을 이미 받은 터였다.     

* 연방 회의 [Bundesversammlung, 역자주 - 독일 연방공화국의 비상설 헌법기관으로,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인 기관. 독일 연방의회의 모든 의원과 독일 주의 국민 회의에서 선출된 동수의 선거인으로 구성됨. 법적 근거는 독일 기본법 제54조와 연방 회의에 의한 연방 대통령 선거에 관한 법률임.]     

아데나워는 이제 크로네의 권유로 카이-우베 폰 하셀을 후보로 고려하게 되었다. 그는 1954년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주지사로 일하고 있었다. 46세의 폰 하셀은 기민당(CDU) 내부의 개신교 파벌의 ‘촉망받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북독 출신의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니더작센 주의 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 집안에서는 장교와 신학자가 나왔다. 지방 출신의 분위기가 있는 정치가들 가운데 그는 연방정부 차원의 정치 무대에서 매우 뛰어난 처세술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아프리카 주둔 독일 수비대의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그곳에서 폰 하셀이 태어났다. 1935년 그는 다시 동아프리카로 돌아가 아버지의 커피 농장 관리를 도왔다. 그러다가 그가 직접 커피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0년 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나와서 다시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 전후에는 1946년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기민당(CDU)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라는 주명은 과거 프로이센 시대의 지방명과 같은 것이었다. 1945년에 이 지역으로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의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이후로 이 주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대형 빈민구호소나 다름없었다. 전임 주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륍케의 지원을 착실히 받은 하셀은 서독의 최연소 주지사로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보수적인 의미에서 근대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내정의 차원에서 폰 하셀은 매우 아름다운 탁한 목소리를 지닌, 처음에는 매우 전투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인물로 사민당(SPD)에 맞서는 데 아주 적합한 정치가였다. 개신교 출신의 능력 있는 정치가를 계속 찾고 있던 아데나워는 그를 매우 적합한 인물로 보았다. 다만 폰 하셀이 당내의 친영, 친미 파벌의 대표자로서 ‘어르신’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던 동안에는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아데나워는 폰 하셀을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거의 기정사실로 하였다. 비록 그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민당(CDU)에서는 그가 흠이 없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폰 하셀 자신은 자리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지사로 선출될 때 주민들에게 그 자리에서 임기를 마칠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2월 23일 밤에 아데나워와 긴 대화를 나눈 끝에 에르하르트를 후보로 낼 것에 합의하였다. 그가 아데나워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에르하르트도 다른 사람들이 다 동의한다면 자신도 흔쾌히 후보가 되겠다고 하였다.     

에르하르트가 후보가 되면 기민당(CDU) 후보에 관한 자민당(FDP)의 지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데나워와 그 사이에는 이미 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두 사람은 자신이 나라를 상징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는 맞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공감대가 확실히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아데나워에게는 복안이 생겼다. 곧 에르하르트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그의 후계자 후보에서 그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슈뢰더는 에르하르트에게 충고하였다. 만약 아데나워의 후계 문제가 나오게 되면 연방정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수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도 처음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확실한 후보보다는 어느 정도 불확실한 후보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다음날 기민당(CDU) 소속 대표 정치가 16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후보 선출을 확정짓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조금 늦게 참석한 크로네에게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에르하르트를 밀고자 하네.’ 에르하르트 자신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경제부 장관이던 그는 당시 3주간의 휴가를 글로터탈에서 보내며 본에서 돌아가는 일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살 빼기 운동을 하고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아데나워가 이제 회의를 마치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자 에르하르트는 일단 주저하다가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결정이 틀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이 만장일치로 자신에게 요구한다면 거부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전화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중에 에르하르트가 후보직을 철회한 다음에 나온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당연히 서로 엇갈렸다. 그래도 당시에 아데나워는 서둘러 여당의 지도부가 에르하르트를 후보로 내세울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게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기 입장을 내세웠다. 곧 에르하르트가 원칙적으로 후보가 되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당의 다수가 그를 지명한다면 말이다. 다만 그는 정중하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 사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이 후보 선출 문제가 매우 삐걱거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가 독감에 다시 걸려 매우 힘들 때라 외교 문제와 더불어 대통령 후보 문제도 일단 뒷전에 밀려 있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에르하르트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달이 일어났다. 호이쓰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제부 장관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에 대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먼저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밀고자 한 그의 측근들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경제지 언론과 의원 자리에 연연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라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선거에서 어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자들이다. 개신교 신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하여 가장 강하게 반대한 자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였다. 그 이유는 둘 중의 하나였다. 그 자신이 1961년 수상 후보가 되고자 한 것이든지 아니면 최소한 에르하르트 밑에서 외무장관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8일이 지나자 마침내 에르하르트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에게 8장에 걸친 격조 있는 서한을 보내어 자기 후보 철회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언론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독일 민족은 매우 고무되었다.’ 사람들은 경제 기적의 초석인 에르하르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데나워에게 더 이상 여당에서 그를 대통령 후보로 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사를 정중하게 표현했다.      

에르하르트는 이 정중한 서한에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였다. “저는 귀하께서도 저와 생각이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민주주의에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존경하는 수상 각하 뒤에 많은 인기를 누리고 신뢰받는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근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수상 각하 밑에서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해 온 저 말고 이를 더 솔직히 말씀드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귀하에게 머물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저는 저의 직무에 충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이는 넌지시 아데나워가 고령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에르하르트가 그의 후계자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국민들도 그의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일 후에 DPA 통신사에 에르하르트가 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성명이 도착하였다. 글롭케는 에르하르트의 공보관인 칼 호만이 이렇게 하여 후보 철회를 기정사실로 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했다.     

3월 6일 호이쓰와의 면담 자리에서 매우 상심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의 우유부단함을 탓하면서, 에르하르트가 이미 6주 전에는 확실히 후보가 되겠다는 약조를 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제 아데나워의 분노는 모든 이에게 특히 여당을 향했다. 아데나워는 누구보다도 게르스텐마이어를 가장 비난하였다. 그가 헌법 개정을 철저히 봉쇄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카를로 슈미트가 대통령 관저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제는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일으킨 책임을 여러 사람에게 돌리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 호이쓰에게도 이제는 자기 후임자 후보를 찾는 과정이 골치 아픈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토니 슈톨퍼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순전히 당리당략적인 행위는 점점 국가에 손실을 주고 있네.” 호이쓰는 아데나워와 다시 한번 대담하고 교수 가운데 대통령 후보를 내는 데에 합의하였다. 갑자기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호이쓰가 선호하는 후보인 기민당(CDU) 의원이기도 한 프란츠 뵘 교수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여전히 썩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이쓰는, 이 대화를 나누고 나서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데나워의 놀라운 점은 그가 승리에 도취해서 너무 안이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런 사달에 책임이 있다는 아니 적어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사태를 방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를 석달 남기 시점에서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후계자를 고르는 일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의 후계자 문제는 어찌될 것인가? 이 또한 정치적인 결정 과정에서 한바탕 코미디가 벌어질 것인가? 그러한 과정이 한 번도 순탄하게 지나간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노회한 수상이 대통령직을 거쳐 은퇴하든지 아니면 좀 더 확실한 가능성으로 볼 때 5년 임기 동안에 사망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가족들은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가족들은 그런 생각을 가장에게 전달하였다. 1948년부터 아데나워를 수행한 블랑켄호른은 그것이 가장 현명한 조치라고 여겼다. 이미 1956년 10월에 아데나워가 정치적으로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 그는 1957년 초가 되면 아데나워에게 충고할 요량이었다. 곧 총선이 마무리되면 은퇴하고 1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그런데 블랑켄호른은 ‘나는 수상께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영특한 그는 아데나워에게 그런 생각을 전혀 제안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아데나워는 그런 제안 뒤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라리 페르드멩게스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사실 아데나워의 자녀 말고는 이런 민감한 문제에 관하여 그에게 말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의심받지 않는 그의 측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 측근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였다. 그는 1957년 총선 이전에 이미 아데나워에게, 1959년이 되면 자리를 옮기는 계획에 대하여 충고를 한 바가 있었다. 1959년 3월 25일 아데나워가 그의 친구의 금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쾰른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에게 사저를 구하고 대통령이 되어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런데 정작 언론에서는 이 매우 합당해 보이는 방안에 대하여 거의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는 대다수 언론은 아데나워의 직무 능력에 대하여 여전히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1958년 11월 28일 대통령직에 관한 논의에서 호이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농담 삼아 자기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자신이 나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임기가 끝나면 정당 정치에 복귀하고자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만 해도 농담이었던 것이 며칠도 안 되어 사실이 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에 아데나워는 사망을 몇 달 앞두고 이 일에 대하여 자신이 정확히 기억한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는 반박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는 요점은 이러하였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에르하르트와 껄끄러웠던 일을 정리하기 위하여 기민당(CDU) 대표단은 당과 여당 인사 가운데 6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들은 대통령 후보에 관한 제안을 하기 위하여서 모였다. 대통령실의 차관인 블리크는 이 위원회를 비꼬아 ‘요양회’(Kurverein)라고 불렀다.     

아데나워는 이 ‘요양회’를 4월 7일 처음으로 소집하였다. 그보다 5일 전인 4월 2일 글롭케는 샤움부르크궁에서의 정례적인 오후 산책에서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곧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원로들이 그를 지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스트 차관도 그러한 해결책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아데나워는 사람들이 다시 그의 의사를 탐지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으나 완곡한 거부의 뜻을 밝혔다.     

그다음 날 글롭케는 다시 한번 사람들이 4월 7일 아데나워 자신이 후보가 될 생각이 없는지 물을 것이라고 보고 하였다. 그런데 글롭케를 당황시키는 말이 아데나워에게서 나왔다. 그러한 제안을 받고 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그래도 글롭케는 연방정부 대통령의 자격 요건을 일단 정리할 심산이었다. 바로 그다음 날 서류가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4장에 걸쳐 연방정부 대통령의 일반적인 권한에 더하여 국방법을 근거로 한 새로운 권한에 관한 완전히 공식적인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이 자격 요건을 보고 나서 아데나워가 지금까지 온전히 정리되지 못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일깨웠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이미 4월 3일의 대담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을 보였다. 글롭케가 4월 4일 토요일 베를린에 있는 크로네 원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크로네는 자기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누구라고?’ 하고 말했다, 그러자 글롭케는 ‘그’라고 말하고, 다시 한번 ‘그’라고 하였다. 나는 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일 줄은 몰랐다.” 필연적인 일이 일어났다. 크로네는 곧 베를린 전권대사인 포켈과 그라들 의원, 그리고 그 외 몇 몇 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그 커다란 비밀을 이미 몇 사람들은 알게 된 것이다.      

다음날 글롭케는 크로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아데나워가 크로네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크로네는 건강의 문제로 갑자기 수상이 사임을 하게 된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글롭케는 그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아데나워의 주치의인 베버-부흐가 일을 좀 줄이라고 다그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크로네와 글롭케는 아데나워의 주치의가 늘 그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연방정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자기 생각이 기울고 있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르하르트가 결국 수상이 되리라는 것을 매우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정치와 행정에 썩 재능이 없기에 크로네가 부수상이 되어야 했다. 이리하여 이른바 ‘테두리의 개념’(Einrahmungskonzept)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개념은 1963년 가을까지 늘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4월 6일 아데나워가 여당의 지도급 의원들과 50분에 걸쳐 대담을 나누었다. 폰 하셀과 마이어스 주지사, 원내대표 하인리히 크로네, 기사당(CSU) 지방당위원회 의장 헤르만 훼헐, 글롭게 차관이 배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이어가 너무 늦게 합류하였다. 그래서 크로네는 먼저 폰 하셀의 새로운 구상을 들을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먼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작성한 수상의 직무 목록을 바탕으로 한 연방정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의 우려를 설명하였다. 카를로 슈미트가 대통령이 된다면 대통령실의 차관이 내각의 모든 회의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차관에는 프리츠 오일러나 아돌프 아른트가 유력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3차 투표까지 갈 때 사민당(SPD)이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를 후보로 내세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면 그가 선출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한 크로네와 훼헬은 그러한 결론이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오랫동안 외교 문제에서 게르스텐마이어와 충돌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게르스텐마이어가 대통령이 되면 대연정을 도모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제 아데나워의 생각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마이어도 크로네와 폰 하셀과 마찬가지의 견해를 제기하였다. 곧 아데나워가 대통령이 되어 기민당(CDU)을 어려움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훼헬은 이에 반대하였다. 아데나워가 수상 자리에 머무는 것은 당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현재 결정을 내리지 못할 처지에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크로네는 프란츠 에첼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훼헬은 에르하르트를 지지하는 세력이 여당 안에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헤첼이 과연 강단이 있을지 의구심을 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회의에서 후보의 이름을 절대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날 흡족한 기분의 아데나워가 익숙한 기자회견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외교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면서 덜레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피력하였다. 대통령 선출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호이쓰 대통령을 만났다. 호이쓰도 아데나워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을 눈치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틀 후면 그가 카데나비아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게다가 그는 니더작센과 라인란트-팔츠 주의 지방선거에서 유세를 벌였다. 선거는 4월 19일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호이쓰는 처음에는 예상 후보자에 대하여 한마디도 못 들었다. 그 대신 어려운 외교적 상황에 관한 이야기만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데나워는 대통령이 매우 관심을 보이는 자기 후계자 문제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에르하르트의 태도에 대하여 비판했다. 그러고 나서는 호이쓰가 고민을 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연방정부 대통령의 안팎의 상황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제 그가 매우 이상하게도 한 마디 더했다. 곧 사람들은 대통령직을 단순히 의전적이고 과시적인 제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루 종일 기민당(CDU) 당내 회의에서 대통령직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긴급 강의를 하고자 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호이쓰는 자기 측근이 토니 슈톨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그 강의를 기꺼이 듣고 싶다네.” 호이쓰와 이러한 흥겨운 대화를 나눈 다음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의 집으로 가서 혼자 앉아 대통령 후보 인선을 결정하였다.     

다음 날 오전에 하기로 한 ‘요양회’에서의 강연은 사실 ‘후보자 출마 연설’과 같았다. 그는 여기에서 연방정부 대통령의 권한에 관한 포괄적인 해설을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자리를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논의를 더 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크로네와 폰 하셀에게 “며칠 동안 전전긍긍하며 생각하다가 어젯밤에 수락하기로 결심하였다.”는 뜻을 전하였다. 호이쓰는 그에게 좋은 충고를 하였다. 곧 ‘요양회’에서 연설하면서 무엇보다도 연방정부 대통령의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이러한 경솔한 결정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데나워의 건강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내에서 그에게 대통령직을 강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4월 6일의 대담에서 크로네, 폰 하셀, 마이어, 글롭케에게 한 말은 그가 글롭케에게 직접 전달한 뜻의 연장선에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서 외교의 책임지고 싶어 했다고 해석해 보아도 그러한 결정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독일 정책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에 관한 도전에 늘 자신감과 인내심으로 맞서 온 인물이다. 그는 이 시기 이전과 이후에도 그러한 자기 성격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곧 그는 어려움에 부닥쳐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합리적인 사고의 차원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그가 헤어 나와야만 할 곤경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일까?     

아데나워를 11년 동안 전문적인 전기 작가의 눈으로 지켜본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4월 3일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상한 사람일세. 어떨 때는 고집불통이다가 어떨 때는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이러한 종잡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경향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사실 가끔 보였다. 그러면서 잘 정리되고 이성적으로 계산된 조치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벰베르크 주식 투자로 재산을 탕진했다. 그래서 그는 ‘쉬망 플랜’의 너무나 뻔한 위험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 6월 초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독일군 창설을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고 연합국 고위위원회를 닦달한 것이었다. 그런 아데나워가 이제는 몇 시간도 안 되어 대통령직 후보가 되고자 한 것이다. 당연히 기민당(CDU)의 ‘요양회’의 회원들, 그 가운데 누구보다도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가 ‘긴 우렁찬 박수로’ 아데나워의 결정을 환영하였다. 곧 아데나워가 마침내 함머슈미트 빌라의 구 가옥에 들어서기로 한 생각 말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아직 자기 연설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연방정부 공보실의 보도문이 도착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후계자로 아데나워를 바라고 있다.’ 이 소식은 DPA 통신사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마이어스 차관이 그 전문을 전달하며 말하였다. “우리가 더 빨라서 다행입니다.” 기사당(CSU)만이 주저하였다. 헤르만 훼헬과 베르너 돌링거는 그런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이미 박수가 나오기도 전에 회의장을 떠났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이미 이날 자기 권력이 얼마나 빨리 붕괴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바로 정오 회의 중간 휴식 시간에 그에게 게르스텐마이어가 그를 후보로 세우고자 하는 ‘요양회’의 바람을 전달할 때였다. 연방의회 의장은 그 자리에서 연방정부 대통령으로서 기민당(CDU) 대표 자리를 유지하고 가끔 국무회의에도 참석하고자 하는 아데나워의 바람을 단칼에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미는 것에 동의하였다.     

‘요양회’에서 한 짧은 수락 연설에서 아데나워는 보기 드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대통령 선거가 특이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저는 최소한 ... 저는 제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최선을 다한다면 바른 길에 들어서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이때 아데나워는 대통령으로서 더 이상 선거 연설을 할 수 없게 되어 유감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저는 쓸모없는 노인네로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대통령이 권력을 발휘할 기회가 “포괄적인 해석의 대상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크로네는 며칠 전에 글롭케로부터 아데나워의 생각에 대하여 처음 이야기를 듣고서 확실한 예감을 일기에 적었다. “내 일감으로는 아데나워가 드골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4월 6일 저녁 호이쓰와 대담을 나눌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그리고 4월 8일 아데나워가 자정 무렵에 본의 기차역에서 주말 뉴스와 텔레비전 기자들이 몰려든 가운데 코모호수를 향한 기차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마찬가지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카데나비아의 비교적 평안한 분위기 속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휴양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연방 총리실이 단 한 번도 외교부를 제대로 통제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연방 대통령이 되어 권력이 축소된다면 어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테오도르 폰 호이쓰는 그의 분통을 터뜨리는 4월 9일의 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곧 다름 아닌 아데나워 자신이 연방정부 대통령이 때때로 국무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헌법과 대통령 직무 규정을 근거로 거부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와서 그런 관례를 어찌 바꾼단 말인가? 그리고 호이쓰는 아데나워가 연방정부 대통령의 직무가 국내외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라고 한 말에 대하여 매우 불쾌한 심정을 밝혔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가장 근심하게 된 것은 이제 ‘에르하르트 사단’이 본에서 다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거의 한 달 동안 카데나비아로 그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새삼 경제장관에 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경제장관은 그가 늘 해오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오슬로와 로마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적은 회원국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작은 유럽 방안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영국을 공정하게 대우할 것을 주장하고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에르하르트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이 아데나워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분명히 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카데나비아를 들락거리던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에게 그러한 자기 생각을 아데나워에게 전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가 잠시나마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연정의 구도가 어찌 변하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보여준 대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에첼이 후보로 나서는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사실 아데나워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데나워는 6월 1일 처음으로 에첼에게 진지한 충고를 하였다. 곧 이미 그가 어차피 안 될 일이니, 자신이 후보에서 물러날 결정을 내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그에게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여당 내부와 언론에서 에르하르트를 지지하는 세력은 대통령 선출이 마무리되면 아데나워가 아무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떠들어댔다. 법사위 위원장을 에르하르트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던 기민당(CDU)의 호겐 의원 같은 사람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곧 연방정부의 외교 정책에서 연방정부 대통령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이다. 정치 스타일에서 순수주의를 지향하는 《슈피겔》의 편집부, 그리고 테오도르 에셴부르크와 같은 권위자는 7월 1일 연방정부 대통령이 선출되면 아데나워는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직이 9월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말이다.     

이미 4월 중순부터 그 무렵 아데나워와 카데나비아에서 대화를 나는 이들은 누구나 그가 대통령 후보에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당에서 그의 후계자로 에르하르트는 밀 때 말이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도 수상실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월 15일 덜레스가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자 두려워하던 일이 생겼다. 아데나워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다수가 에러하르트를 밀고 있는 여당의 상황에서 좋은 기회가 마련된 것이었다.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데나워가 자신이 생각하듯이 에첼이 연방정부 수상이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랐는지는 알 수 없다.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모든 장관은 아데나워가 모든 것을,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척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 놀음에 아데나워를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프란츠 에첼이 연방정부 수상이 되면 연방정부 대통령인 콘라드 아데나워와 어느 정도 무리 없는 협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데나워가 헌법의 ‘매우 포괄적인 해석’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에첼 자신은 현실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2일 《벨트》와의 회견에서 그는 아데나워의 후계자가 누가 되든지 간에 ‘목에 줄을 매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휴가에서 돌아오고 나서 5월 내내 아데나워는 대담, 서신 교환, 그리고 완전한 부인이나 적당한 부인 등을 통하여 에르하르트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아데나워가 보기에 에르하르트나 여당이 제정신이 아니기에 후보 철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특히 아데나워는 이제 여당 원내대표인 크로네나 당 대표단의 그로스마저 에르하르트를 수상 후보로 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잠시 정신이 나가서 받아들인 대통령 후보 자리를 포기할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개인적으로 굴욕이 될 것임을 아데나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이를 오래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사실 외교 정책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에 자신이 수상에 머무는 것이 합당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사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데나워가 마음을 변하게 된 근본 원인이 에르하르트가 수상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속마음을 감추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나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그러한 속내를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5월 20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쓴 ‘매우 비밀스러운’ 개인적인 서한에서 적절한 설명을 하며 그가 경제장관으로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탁월한 외무장관이지만 형편없는 경제장관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경제장관이 돼야 한다고들 해도 저는 사양하며 경제 분야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고 경제생활의 성격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인사”로 끝난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거부하는 결정적 이유로 외교 정책을 들먹였다. 곧 에르하르트가 유럽 통합을 확고하게 반대하는 것을 이유로 든 것이다.      

에르하르트를 꼭 집어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훨씬 더 부정적으로 써내려갔다. “에르하르트 씨를 수상으로 선출하는 것은 우리의 외교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갈 커다란 실수가 될 것입니다.”  이틀 후에 아데나워의 충실한 대변인 노릇을 하는 글롭케는 크로네에게 보낸 서한에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외교 정책에 관한 안이한 생각과 ‘내막을 파악할 능력이 부족한 것’을 질타하였다. 그래서 에르하르트는 ‘독일의 생존이 달린 정상회담에서’ 독일을 대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대통령 후보직에 관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우유부단함을 매우 비난했던 차였다. 5월 14일 에르하르트와의 대담 후에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국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기가 대통령 후보직에서 물러날 확률이 90%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5월 23일 일기에서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환호하였다. “수상은 포기하지 않는다. 에르하르트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속내를 제헌절 10주년 기념 만찬 자리에서 게르스텐마이어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 날 이러한 결정이 다시 흔들리게 되었다.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제네바회담에서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결국 후보직을 포기할 의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5월 26일에 열린 여당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여당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데나워가 참석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이 수상의 후계를 결정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자리를 떴다. “친애하는 당원 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더 듣게 된다면 제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모양이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의 사망 소식이 당도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아데나워가 연방정부 수상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마지막 구실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에서 장례식이 열리기 전에 아데나워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벌어질 국내 정치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자기가 물러날 가장 좋은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고들 있었다.     

그 시기가 마침내 찾아왔다. 아데나워 수상이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에르하르트가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위하여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르하르트가 출발하기 전에 아데나워는 자신이 결단을 내리리라는 것에 대하여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래서 직접 배웅을 한 에르하르트나 기민당(CDU) 당대표를 노리는 하인리히 크로네 그리고 테오도르 폰 호이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에르하르트를 밀기로 한 여당에 대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내 양심을 걸고 그에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가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상은 원내대표 직무대리인 칠리엔에게 자신이 대통령 후보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밝혔다. 칠리엔은 1960년대 초에 사망할 때까지 아데나워와 동고동락한 사람이다. 그는 즉각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단호했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이네”     

그러자마자 아데나워, 크로네, 훼헐 사이에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크로네는 자신이 사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그를 사임시킬 요량이었다. 아데나워는 14일 이내에 모든 것이 정리되리라 예측하였다. 아데나워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6월 초 만해도 47%에 이르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관한 지지율이 6월 중순에 41%로 하락하였다. 그러나 7월 초가 되자 다시 46%가 되었고 9월 말에는 50%에 육박하였다. 국민은 언론이나 정치가들보다 아데나워를 더 빨리 용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다음 날 연방의회에서는 예산안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야당을 은근히 싸잡아 비난하는 것을 참지 못하였다. 사실 사민당(SPD)은 4월 초에 아데나워가 갑자기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소식을 마지못해 환영했던 바였다. 헤르베르트 베너가 “너무 좋은 소식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프리츠 오일러가 한 발언에서도 이러한 기쁨을 어느 정도 느껴볼 수 있었다. 그는 은근히 아데나워를 비꼬았다. 아마도 이번 예산이 아데나워 집권기의 마지막 회기일거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 예산으로 한 시대가 지나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늘 하던 과장된 말을 하면서 수상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국가 권력의 삼권분립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정부 인사석에서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아데나워를 바라보면서 크로네는 그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매우 분명한 어조로 반박을 했기 때문이다. 곧 사민당(SPD)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겨우 엄청난 비밀이나 털어놓는 것처럼 한마디 했을 뿐이다. “만약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야...”      

아데나워는 여당의 모든 압력을 단호하게 버텨냈다. 크로네와 훼헬은 6월 4일자 서한을 받았다. 그 서한에는 대통령 후보에서 물러나는 공식적인 이유가 담겨 있었다. 곧 외교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에르하르트도 서한을 받았다. 그 내용은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존경하는 에르하르트 귀하! 오늘 저는 크로네 박사와 훼헬에게 서한을 보내습니다. 그 서한에는 복사본도 동봉했습니다. 저는 귀하께서 저를 믿고 따르시겠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다음 총선에서 함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서한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데나워 배상.”     

아데나워는 이 모든 논란의 책임은 당의 동료들에 있다고 했다. 곧 하셀, 마이어스, 회헬, 크로네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4월 6일 아데나워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한 압력이 있었기에 아데나워가 4월 7일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원내대표인 크로네가 에첼에게 제안을 했고 그가 아데나워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뭔가 일을 망치고 나면 언제나 그 책임은 그가 회고록에서 ‘나의 동료들’로 표현한 인물들의 어리석음, 계략, 교만, 이기심에 있었다.     

그다음 주부터는 아데나워는 문제의 여파를 최소화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사실 기민당(CDU)의 여당 지도부가 이처럼 수상에게 굴욕을 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는 분기탱천하여 미국에서 즉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아데나워가 제시한 근거인 국제 정세의 악화를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데나워가 대통령 후보에서 물러난 주요인은 자기 외교 능력을 의심해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6월 10일 크로네와 훼헬이 있는 자리에서 그를 제압해버렸다. 그 후 아데나워는 내각에서 불만이 잠잠해지지 않을 것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데나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상실의 직원들의 업무 능력을 질타한 것이다. 에르하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분노하였다. 특히 크로네가 가장 심각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달의 후유증을 처리해야만 했다. ‘사고가 나면 크로네 아빠가 다 처리해 줄거야.’ 이런 말이 본의 정계에 돌았는데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크로네는 커다란 인내심과 단호함을 발휘하여 아데나워에게 맞서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기가 질 싸움이었다. 아데나워가 어느 정도 무사히 이 주간을 보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크로네 덕분이었다. 결국 크로네가 여당의 공개적인 비난을 막아낸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사 인사도’ 받지 못하였다.     

가장 분노한 사람 가운데에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도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수모를 당했다고 여겼다. 그는 4월 7일 아데나워가 대통령 후보가 되도록 설득한 우아한 방법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친구 게르스텐마이어”라는 말까지 했었다. 이제 게르스텐마이어는 여당에서 결의안 채택을 추진하였다. 곧 아데나워가 자기 행동에 관한 불신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상 각하. 귀하의 논거는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차갑게 답을 했다. “존경하는 귀하. 귀하는 건설적인 불신임안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당의 분노를 그가 떠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에 대한 불신임안이라니. 당치도 않을 소리였다!     

여당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은 언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론은 수상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민주주의적 행동, 국가 제도를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놀기, 냉소적인 권력의지, 냉혹, 불공정. 처음부터 그를 따라다닌 모든 비난이 다시 고개를 드는 형국이었다. 많은 논설위원은 이제 그가 노인의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정작 아데나워를 다시 보게 된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한 의견에는 반대한다. 내가 아데나워 수상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직접 보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벽을 뚫고라도 갈 사람이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도 상당히 당황하였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진심을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만당하고’ ‘속았다’고 하였다. 수상이 자초한 논란을 거치면서도 현직 대통령에게 재임을 권유한 것은 아데나워가 정말로 뻔뻔한 사람임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호이쓰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 “다른 사람이 그런 인사 문제로 음모를 벌였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가뜩이나 제네바의 상황이 안 좋은데 말이다. 내가 맘대로 말 할 수 있는 언론인이 아닌 것이 아데나워에게는 천만다행이다.” 이어서 그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내가 보기에는 그와 나에게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오랜 행정 경력이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공직에 있어본 적이 없는 나는 제도의 차원에서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이 매우 ‘소름끼치며’ 자신이 독일에 ‘합리적인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이 ‘도덕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데나워가 ‘오만불손의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처칠이 그를 비스마르크 이후 독일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라고 말한 다음부터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이 그 업적을 ‘평가 절하’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호이쓰는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뒤끝이 없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나름대로 손해를 보지 않고 사과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8월 7일 어느 정도 소동이 가라앉은 다음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로 정례 하반기 휴가를 떠나기 직전에 대통령과의 통상적인 늦은 오후 만남을 ‘매우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가졌다. 그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최근의 일에 대하여 약간 까다로운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초와 여름에 걸쳐 벌어진 많은 일들에 대하여 매우 상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호이쓰도 자신도 매우 상심했다고 말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왜 아데나워는 7월 1일 자기 후보직 철회 의사를 밝히지 않았느냐는 핵심 문제에 다가가게 된다. 아데나워는 상대방이 허탈해할 매우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그는 5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될 마음을 90% 정도 굳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블리크 차관이 이에 관한 보고를 안 했는가? 그 자리에 있던 블리크는 그것이 차관이 불참한 장관회의였다는 변명을 하였다. 이렇게 가장 그럴듯한 변명이 있었다. 이어서 호이쓰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데나워에게 들었다. “그 일로 제가 놀라게 되어 그가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불평을 이어가면서 새삼 “정중한 인사와 좋은 휴가를 보낼 것을 바라는 인사”를 서로 나누었다.     

이 무렵 아데나워가 경솔하게 다루었던 대통령 후보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목격한 모든 이들은 그의 교만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칼 부르카르트가 그랬다. 그는 소동이 절정에 이르던 6월 8일 본으로 와서 먼저 테오도르 폰 호이쓰를 예방하여 새벽까지 술을 함께하고는 나서 점심 때 다시 식사를 같이했다. 이 오찬은 아데나워의 푸르 레 메르티 훈장 수여식을 위해 거행된 것이다. 그가 칼 추커마이어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성대한 대통령 정찬이 벌어지는 가운데 아데나워에 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의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데나워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잠시 아데나워만 그 자리를 독점하는 것 같았다.”     

부르카르트는 말을 이어가면서 아데나워의 면모에 관하여 단 몇 줄로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식탁에서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장미를 가꾸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향이 강한 역사가 오래된 장미인 ‘메르철 닐’(Marechal Niel)과 ‘글로와 드 디종’(Gloire de Dijon)에 관하여 황홀해하며 낮고 편안한 일정한 목소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한 번은 돌아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카탈로니아의 들판에서 아이펠까지 건너온 아시아적인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르카르트 씨. 당신은 어떤 사람이 좋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과 자기 잘못을 감추려는 사람 가운데 누가 좋은 거요?’ 나는 그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약간 놀란 표정을 하였다. 그러더니 이 ‘매우 중요한’ 날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였다. ‘구체적이 상황이라. ... 나는 그런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을 잘 알고 있소. 큰 소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거요. 두 주 안에 모든 것이 다 지나갈 것이오.’ 사람들은 그가 사람을 매우 무시한다고 말한다. 그리나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사람을 잘 알고 자신이 그들을 돕는 사명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노쇠하고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식한 소리다. 그는 활시위처럼 매우 유연하다.”     

나치 과거의 망령     

아데나워는 공을 들여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이 저지른 과오의 부정적 여파를 수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는 그가 외국인이나 내국인에게 한사코 새로운 현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가운데 성취한 것이다. 그는 독일이 독자노선을 걷는 나라가 아니라 커다란 전체, 곧 유럽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단언하였다. 곧 서방 민주주의의 자유 세계, 대서양을 둘러싼 국가 연합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매 순간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서방 공동체와의 유대를 선포하여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서독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서방의 공동 과제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 독일연방공화국을 보호하고 자유 베를린을 수호하며, 구동독의 실지 회복 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유럽의 문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독일이 서방과 굳은 결속을 맺는 것이 외교적 고립을 막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과거 청산에 관하여 자주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재사회화된 범죄자가 먼 과거에 저지른 악행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그 과거는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시기였다. 아데나워가 서구 우방의 정치가들과 독일의 과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길 때는 마치 자신이 맹수를 다루는 조련사인 척 으스대었다. ’너희들이 말이지 내가 있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해. 나만이 불만이 있는 독일 사람들을 서방 공동체로 이끌 수 있단 말이야!‘ 무엇보다도 확실한 화해 의지로 추진한 대이스라엘 정책이 그에 관한 신뢰감을 높였다.     

국내 정치적으로 아데나워는 나치 과거에 관한 거의 신경쇠약에 걸린 듯한 논쟁을 외면하였다. 선거 유세에서 전쟁 채무 문제가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던 1946년과 1947년은 아주 먼 옛날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그저 가끔 그에 관하여 언급할 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와 화해 협정을 맺을 때 말이다. 측근들과는 독일의 과거에 대하여 좀 더 자주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국제적인 협상에 관해서 ‘마지못해서 할’ 경우만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주권 문제, 자르 지역 문제, 배상 문제가 걸린 경우에만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나치 과거에 대하여 계속 악담하는 일을 회피하였다. 그는 독일 국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측근 가운데에는 과거 나치 시절의 진짜 저항 세력이나 최소한 나치에 의해 탄압받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 국민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저항 세력에 속하는 이는 오토 렌츠, 야콥 카이저, 로베르트 레어,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하인리히 크로네, 프란츠-요제프 뷔르멜링이나 토마스 델러 정도였다. 오히려 내각이나 당내 지도자급 인물들의 대다수는 인생에 뚜렷한 오점이 있거나, 나치 시절 세력가와 불순한 거래를 하거나 양다리를 걸치거나, 비극적인 일에 연루되거나, 철부지 협력자들이었다.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 에른스트 레머는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찬동했던 인물이다. 한스 글롭케는 다 알려진 바와 같이 ‘뉘른베르크 법’*의 주석을 공동 저술했던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바로 이 ‘뉘른베르크 법’의 희생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운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었다. 여러 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던 키싱거는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에서 근무하면서 나치 추종자들과 호흡을 같이했던 인물이다. 100%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다 훑다 보면 테오도르 오버랜더에 이르게 된다. 그는 나치 당원으로서 동부전선의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문명인의 태도와 이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뉘른베르크 법’ [Nürnberger Gesetze, 역자주 - 나치 정권 하의 1935년 9월 15일 제국의회에서 제정된 유대인 차별법. 이 법에 따라 독일인은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음.]     

아데나워의 최측근도 과거를 문제 삼지 않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대표적으로 나치로부터 박해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자신도 1932년에 히틀러도 정권에 참여하도록 하자는 이른바 ‘길들이기 구상’(Zähmungskonzept)에 동의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33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하여 아데나워는 당시 쓴 편지에서 자신이 쾰른의 시장으로서 나치주의자들을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가 존경하는 장인인 친서 교수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도 전에 나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친서 교수의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나치 협력자라는 이유로 영국 점령지역의 수용소에 2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이미 영국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표였던 아데나워가 죄 없는 이 처남을 위하여 사면증을 써야만 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은 자신이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기회주의자’인 민족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실 모든 사람은, 특히 누구보다도 아데나워가 나치 통치의 12년의 기간이 저절로 잊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주장이 논란이 없다거나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런 의지를 관철하였다. 1945년 이후 나치 과거 청산 문제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1950년대였다. 그러나 1960년에 국내외적으로 이른바 [나치 제복이 갈색인 것을 비유한] ‘갈색 오물들’이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였기에 아데나워는 수상직 말기에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치 과거 청산 문제에 다시 공을 들이기 시작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계가 된 것은 1959년 성탄절 쾰른에 새로 지어진 유대인 회당에 하켄크로이츠, 곧 나치 십자가를 그린 사건이었다. 이후 모방 범죄가 줄을 잇게 되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분노를 야기했고 독일 국내적으로는 젊은이들의 정치 교육 강화를 촉발하였다. 이 사건에 관한 아데나워의 조치는 어느 모로 전통적인 독일식이었다. 그는 그런 낙서를 하다가 잡힌 모든 ‘나쁜 놈들’을 당장 ‘호되게 때려’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독일에 관한 세계의 여론을 그것으로 간단히 무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1956년에 울름에서 열린 특공대 행진에서 시작하여 아우슈비츠 행진에서 정점에 이른 사건이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이 모든 사단은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 재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아이히만이 체포된 1960년부터 1962년 6월 사형당할 때까지 아이히만과 유대인의 학살은 언론을 도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쾰른에서 있었던 나치 십자가 그림 사건부터 독일 정보부는 아데나워에게 그 배후에는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시가 개입되어있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서독의 유명 정치 인사들에 관한 흠집을 내기 전략은 동독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 근거에는 동베를린이나 바르샤바 또는 모스크바에서 나온 진짜 자료와 가짜 자료가 섞여 있었다. 야당 언론과 사민당(SPD) 그리고 여러 좌파 단체는 이런 자료를 당연히 덥석 물고는 과장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흠집 내기에 독일 신문, 단체, 개인이 정치적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동조하는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정치적 공격은 순전히 그와 그가 이끄는 정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다만 유대인 언론인과 단체에 대해서만은 그 순수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기에 대한 공격에 강력하게 맞섰다. 아데나워는 자기 임기 말까지 1959년부터 늘 새로운 공격을 해댄 글롭케에 대하여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맞섰다. 글롭케는 1959년 동베를린에서 아데나워에 대한 보여주기 식의 재판까지 열었었다. 그리고 추방민부 장관이었던 테오도르 오버랜더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아데나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마녀사냥은 195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버랜더는 이미 그해 9월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정부에 누를 끼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장점은 자기 장관이나 부하가 억울하게 공격당하고 동베를린에서 벌어진 보여주기 식의 재판에서 궐석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을 잘라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 당시 나치 과거사 문제는 학생들이 주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2월 15일 아데나워는 쾰른대학교에서 3,0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격론을 벌였다. 몇 명의 학생들이 ‘오버랜더는 나가라!’고 소리치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버랜더 씨는 나치의 갈색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말한 대로 아주 진한 갈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명예를 실추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사직을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이 원하는 것을 할 의향이 없습니다. 장관을 사임시킬 것을 대통령에게 권할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것이 그의 확신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과연 어디까지를 나치 협력을 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하여 오버랜더가 있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오버랜더 씨는 젊은 시절에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나치당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치당 안에서 바른말을 하여서 어려운 처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 5월이 되자 오버랜더는 정치적으로 큰 짐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더 이상 사직을 말릴 수가 없었기에 명예로운 퇴임 길을 마련해주었다.     

1960년대 초반의 이러한 비난 가운데 이미 새로운 시대가 예고되었다. 1967년 여름 학생운동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자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파시즘을 반대하는 가운데 반공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과거사 청산’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1967년 4월 19일 사망하고 1967년 6월 2일 이란의 국왕 반대 데모가 벌어지는 가운데 베노 오네소르그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극좌파나 진보적인 학생들에게 아데나워는 이제 종말을 고한 기만적인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반동인 아데나워, 국제 독점 자본주의의 정치적인 ‘상징적 인물’, 모든 나치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보호자였다는 것이다. 곧 나치 경력이 있어도 쓸모 있고 강력한 반공주의자면 용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독일을 대표하지 못하고 독일 역사의 가장 최악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를 이런 식으로 보는 시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49년에도 있었다, 구동독의 언론에서 오랫동안 선전한 대로 그는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 공공의 적이었다. 다만 그런 비난이 구서독에서는 1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1959년이 되자 비로소 이른바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비난과 더불어 이러한 전형적인 비난이 구서독의 좌파 언론과 좌파 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68세대의 시위에서 드러난 아데나워의 모습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이 68세대의 시위는 아데나워 시대에 관한 뒤늦은 저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9년과 1960년에는 그러한 생각이 아직은 초기 단계에 있었다. 이 당시 여론은 아데나워를 전혀 다르게 그리고 있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서양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유럽을 기독교와 인본주의 가치로 다시 통일시킨 인물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서양의 우월 의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질긴 민족주의를 버리고 독일을 새로운 유럽 연합의 틀 안으로 이끈 명민한 개혁가였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 더불어 아데나워가 서방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인물로 여겼다. 그리하여 독일의 헌정사에서 서방에 맞선 ‘별도의 길’(Sonderweg)을 가면서 독일 외교가 민주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뒤처지는 것에서 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파울스교회에서 파견한 특사가 들고 온 황제관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조롱하듯이 거부한 이후 독일은 자기만의 별도의 길을 1849년부터 걸어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1933년 초 포츠담에서 보수적인 프로이센 위정자들과 혁명적인 나치가 협약을 맺은 날도 그 ‘별도의 길’의 한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데나워가 서방 정신을 주목한 것을 이제는 잊힌 독일의 좋은 과거를 소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왜곡된 별도의 길과의 단절, 특히 1933년부터 1945년의 시기와의 단절, 그러면서 독일 민족의 역사에서 입헌국가적인 서양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1960년대 초반에는 아데나워에 관한 인상이 제각각으로 형성되었다. 대통령 후보에 관련된 소동은 아데나워 수상이 여전히 활기가 넘치고 동시에 전혀 큰 정치인답지 못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많은 이에게 아데나워는 이미 살아 있는 동안에도 신비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한 인물은 대부분 지식인과 선동가들에 의해 자주 다양한 희망이나 거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위대한 인물의 운명에서 아데나워는 오래전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매우 이성적이고 섬세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여러 정치 세력은 여기에서 정치적 예술가가 매우 어려운 줄타기를 하며 급격한 움직임으로 떨어질 위험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편한 대로 아데나워의 한쪽 측면만을 더욱 바라본 것이다. 곧 왜곡되거나 찬란히 빛나는 모습, 엄청난 재앙이나 큰 희망을 그에게서 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의 모습이 그 당시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묻는 것은 아데나워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늘 행동과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이 자신에 관한 지지율의 등락이나 특정 사안을 검토해 보면 이는 대부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일이고 목표가 확실한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성격이 찬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는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 언제 다 계산에 넣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아데나워는 일과 사실에 집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59년 초반부터 서방 강국의 언론에서도 나치 과거의 유령이 큰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에도 영향을 받았다. 부분적으로 이는 상황에 따라 나치의 범죄와 그 범죄자들을 문제 삼는 이들이 촉발한 것이기는 하다. 여기에서 동유럽의 선전술이 전혀 무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데나워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먼저 갑자기 다시 풍요하고 매우 강력해진 독일에 반대하는, 과거 전쟁반대자들의 일종의 분노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동기를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힘들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자기 분노를 세련되게 감추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영국이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1950년 후반기에 아데나워는 영국의 언론이 독일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영국 좌파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 확실했다. 아데나워는 맥밀런과 그 주변 인물들도 한통속일 것이라고 보았다.     

아데나워의 추측은 옳았다 1970년에 세상에 알려진 맥밀런의 비망록을 보면 그 당시 영국 총리의 당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 마음에는 독일이나 아데나워에 관한 특별한 애정이 없었다. 그래서 1961년 1월 재무에 관한 끈질긴 협상 끝에 맥밀런은 다음과 같이 쓴 것이다. “우리는 이틀에 걸쳐 아데나워 박사와 그의 측근들과 협상을 하였으나 거의 성과가 없었다. 4시간의 대담, 저녁 그다음 날 아침까지 논의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세계 경제적인 차원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들은 부유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들이었다.” 1959년 11월 아데나워는 셀르윈 로이드에게 메모를 전달하였다. 이는 독일 국군이 핵무기로 무장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는 독일이 매우 양면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현재는 과거 나치에 있던 인물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일군, 행정부, 사법부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크룹이라는 대기업이 다시 살아난 것을 이 나라에서는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맥밀런의 불만에는 자유무역지대와 1962년 3월부터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해야 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맥밀런과 영국 외무부는 무엇보다 프랑스가 앞장서서 반대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도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전쟁 때 적국에 읍소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독일 사람 가운데 드골의 영국에 관한 반감을 누그러뜨릴 사람은 아데나워 밖에는 없었다. 맥밀런은 1960년 8월 “아데나워는 프랑스에 자기 영혼을 팔았습니다.”라고 탄식한 바가 있다.      

프랑스 여론은 그나마 나았다. 제4 공화국의 중도 정당과 중도 우파 정당 그리고 비슷한 노선의 언론은 독일의 화해 정책에 점차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이제 과거 ‘자유 프랑스’의 수반도 자기 지지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러한 긍정적인 프랑스의 태도가 전적으로 자신에 관한 호감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외국이 누구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지에 대하여 최소한 최측근에게는 숨기지 않았다. “나를 믿고 있는 것일세.”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이 정권을 내려놓은 다음 독일이 어디로 갈지를 놓고 둘이 기탄없는 대화를 나눌 때도, 드골이 맥밀런과 아이젠하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충분히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드골이 맥밀런에게 대한 속내를 털어놓을 때는 그가 근본적으로 ‘본 정부’에 관한 신뢰를 안 하고 있다는 마음도 드러냈다. 아마도 이는 드골이 잘 알려진 대로 의회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맥밀런에게 거짓 친근감을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인 진실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어떤가? 미국도 1960년부터 모든 언론이 유대인 회당에 나치 십자가를 그린 소식을 보도하였다. 여기에 아이히만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련 재판에 관한 보도도 이어졌다. 독일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잔뜩 보도하면서 정작 독일의 경이로운 경제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미국 여론의 풍향이 변한 것은 특히 케네디 정부가 들어선 첫해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여파를 미친 것을 덜레스 국무장관의 사망이었다. 아데나워와 그의 관계는 잘 알려진 대로 때로는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데나워가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덜레스는 독일 수상을 미국의 유럽 정책에서 중요한 인물로 존경하고 늘 지지했었다. 아데나워가 덜레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데에는 간접적으로 프랑스의 제4공화국이 무기력한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국 총리상들과도 개인적으로 관계가 나빴기 때문이었다. 이든이나 맥밀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이 이제 급격히 변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미국의 신임 국무장관인 크리스티안 허르터는 덜레스가 보여준 명료함과 에너지가 없었다. 게다가 허르터는 관절염으로 휠체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덜레스의 오랜 측근이었던 리빙스턴 머천트는 독일 문제에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관으로 있는 로버트 머피도 뮌헨에서 공사로 있던 1920년 초반부터 독일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레베는 그가 워싱턴 정가에서 독일의 이익을 대변해 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덜레스 사망 후 1년 반이 흐른 시점에서 핵심 인물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신사였다. 그는 여전히 매우 위풍당당한 노회한 아데나워 수상을 존중하고 베를린 문제에 관하여 그를 배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독일에 대하여 독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후임인 케네디의 보좌관들처럼 말이다. 노스태드 장군은 독일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안보 문제에서 아데나워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앤드류 구드페스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군부에서는 여전히 독일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관해 경탄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맥밀런과 드골의 사각에서 볼 때 덜레스라는 별종의 인물이 사라진 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종의 전우 의식이 더욱 공고해진 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심한 의전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1959년 여름 맥밀런이 실망한 가운데 아이젠하워가 흐루쇼프를 정상회담을 위하여 워싱턴으로 초대한 것에 대하여 서구의 동맹국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그는 드골에게 의사를 타진하였다. 드골은 프랑스를 해방한 인물이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아이젠하워의 회고에 따르자면 드골은 이미 장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곧 아이젠하워의 “이번 방문을 다른 모든 것에 비하여 격식을 더 갖추고 성대한 것이 되도록 할 것이었다.” 파리에서의 이틀에 이어서 영국에서는 3일간 머물렀다. 그 일정에는 영국 왕실이 스코틀랜드의 발모랄로 그를 개인적으로 초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가 독일도 방문할 것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그 노신사를 위해서는 긴 시간을 예정해 두었다. 다만 매우 인간적인 독일 대통령을 위해서는 빠듯한 하루만을 배정하였다.     

아이젠하워의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의 탁월한 기지 덕분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 아직 시골길이었던 쾰른-반 공항에서 본으로 이어지는 길을 아이젠하워가 도착하기 30분 전부터 차단할 것을 경찰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퇴근 시간 직전부터 엄청난 교통혼잡이 벌어졌다. 수만 명이 마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트 고데스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아이젠하워가 지나가는 길에 손을 흔들었다.     

아이젠하워와 함께 오픈카에 오른 아데나워는 ‘승리가’를 행진하였다. 이 두 시간 반에 걸친 행진이 있은 다음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대표단 앞에서 매우 만족한 얼굴로 수백만 명이 도로에 나와 있었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는 길에서 네다섯 명의 ‘노동자 계층의’ 사람이 ‘손이 너무 얼어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정말로 열광하며 아이젠하워를 환대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저도 환대했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우리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추진해온 정책 말입니다. 그들의 지지가 이보다 더 친절하고 잘 표현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제 아이젠하워에 관해서도 모든 면에서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과거에 비하여 매우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이 만남에서 보여준 열정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전에 밝은 아데나워 같은 사람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실 한때 전쟁 때 연합국인 미국과 프랑스의 두 대통령이 서로 할 말이 많고 관심이 각별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데나워는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덜레스의 사망 이후 연합국 3국의 통치의 이념이 더욱 공고화되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드골이 환영했고 맥밀런도 만족해한 것은 아이젠하워가 랑부이에의 사냥성에서 진행된 긴 시간에 걸친 성공적인 회담 이후에 비공식적인 사적 3국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그 회담은 동서 정상회담과 서방 4국 정상회담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관할지역 이외의 지역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단 3국 정상이 만난다면 자연스럽게 그 이외에 많은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드골과 맥밀런은 생각했다. 곧 동서 관계, 핵전략 문제 또는 독일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군사령부에 관한 즉석 회담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맥밀런의 의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2~3개월마다 3국 정상이 정례 회담을 하기를 바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의 3국 정상회담이 1959년 12월 서방 4국 정상회담과 1960년 5월 흐루쇼프와의 동서 정상회담 사이에 개최되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먼저 노스태드 장군에게 유감의 뜻을 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인 폴-앙리 스파크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벨기에 대사인 드 슈테르케가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저 기분 나쁘지만 좋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 5월 파리회담 이후 비공식적인 3국 정상회담이 정례화되자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유감의 뜻을 전했다. 이번에는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를 통해 유감의 뜻이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3국 정상회담의 정례화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서방 강국의 양자 정상회담도 이루어졌다. 1960년 5월 서방 3국의 정상들이 1960년 5월 파리에서 흐루쇼프를 만나기 전에 아데나워를 포함한 서방 4강의 정부 수반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현악 4중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드골이 매우 진지하게 이루어진 이 회담을 기뻐하였다. 먼저 맥밀런이 3월 중순에 랑부이에에서 드골을 만났다. 그리고 4월 초에 드골이 런던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였다.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있었다. 군중들이 열렬히 그를 환영했고 궁정에서 대규모 만찬이 개최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전쟁 때 연합국의 장군 드골만큼 영국의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물론 그런 환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나빴다. 4월 말 드골 장군이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아데나워는 드골처럼 뉴욕에서 색종이가 날리는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도대체 그런 왜 환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비록 드골이 매우 까다로운 손님이기는 하였지만, 워싱턴에서 그는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 얼마 전에도 맥밀런 역시 비슷한 환대를 받았다. 물론 그는 어머니가 미국 사람이기는 하였다. 그러니 그런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특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데나워는 영국과 미국이 서로를 스스럼없이 이해하는 데 비하여, 자신은 서방 정상들 사이에서 아무리 독일이 강국이고 신뢰가 다져졌어도 여전히 신입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나마 아데나워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은 아이젠하워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이 노령의 수상의 심리적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에게 최대한 예절을 갖추어 대접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에 아데나워를 게티즈버그나 캠프 데이비드에 초대하여 개인적인 의견 교환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가장 못마땅했던 것은 결국 파리에서 이루어진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의 준비와 평가였다. 여기에서도 서방 4국 정상회담과 별도로 이루어진 아이젠하워와 맥밀런과 드골의 정상회담이 아데나워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맥밀런의 수작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알지 못한 것은 드골 역시 3국 정상회담에 아데나워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아이젠하워의 제안을 막은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3국 정상회담의 구상은 1960년 중반부터 없던 일이 되었다. 이제 드골도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에게 물을 먹은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은 분명히 그가 세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도구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공식적인, 거의 비밀에 가까운 회담을 원하는 드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골은 관리국을 설치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힘을 무력화하고 미국의 주도권을 막아보려고 했었다. 그래서 프랑스도 적어도 미국과 영국과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 이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맥밀런은 드골이 제창한 관리국 수립 계획을 막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어서 핵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 영국의 긴밀한 특별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드골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케네디가 매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골과 아이젠하워는 서로를 불신하기는 했지만, 인격적으로 존경을 하는 사이였다. 아이젠하워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정부는 비록 처음에는 약간 흔들렸지만, 핵확산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한 노선을 견지했다.     

아데나워가 싫어하던 3국 연합 지휘부 수립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곧 아이젠하워가 힘을 쓰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드골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는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매우 입장이 곤란해졌다. 드골과 연합국 사이에서 양자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59년과 1960년은 세계 언론에서 반독 정서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를 드골과 맥밀런이 자국 이기주의에 이용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맞서보려고 하였다. 우선 그는 서방의 단결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나왔다. 최소한 공식 성명에서라도 서방의 강국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 강국들이 1954년과 1955년에 독일과 조약을 맺은 다음에는 독일 정책에 관해서 독일 정부의 의지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맥밀런과 드골의 강력한 회담 활동에 맞서 아데나워도 나름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9년과 1960년 그는 워싱턴을 방문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자신이 1959년 8월에 본의 그를 찾은 적이 있었다. 미국의 국무장관도 마찬가지였다. 드골과 맥밀런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더욱 긴밀하게 이루어졌다. 1959년과 1960년에 드골과 세 차례 만났다. 그리고 1960년 가을에는 드브레를 방문하였다. 이같은 시기에 맥밀런과는 4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이어서 서방 4국 정상회담이 1959년 12월과 1960년 5월에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는 양국 회담도 함께 이루어졌다.     

직접적인 만남에 더하여 아이젠하워, 맥밀런, 드골과 많은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사관을 통한 의사소통도 이어졌다.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이때 이탈리아도 끌어들였다. 3개 강국의 외교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협력을 위해서도 공을 들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인 폴-앙리 스파크는 믿음직한 파트너였다.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제4의 핵무기 보유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 유럽연합최고사령부(SHAPE)의 노스태드 장군의 야심도 이용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순방 외교를 펼치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그 자신도 1960년 3월과 4월에 세계 순방을 계획하였다. 물론 이 계획이 독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도록 하였다. 유권자들은 주말 뉴스, 잡지, 그리고 점점 무게가 실리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1959년 초반의 부진을 뒤로 하고 느긋해진 수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맥밀런, 드골은 84살의 이 노인이 여전히 힘이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미국의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미국의 여론에서는 히틀러의 제3제국을 떠올리며 독일을 거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폰 에카르트를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아데나워에게 조언하기를 그가 직접 움직여야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미국 방문을 당초 계획보다 더 요란하게 진행하게 된 것이다.     

세계 순방은 3주 동안 진행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 아직 제트기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아데나워는 미국 록히드사의 ‘수퍼-콘스텔레이션’을 이용하였다. 쾰른-반 공항에서 뉴욕의 아이들와일드 공항까지 16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샌프란치스코에서 도쿄까지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서 이틀을 쉬어 나흘이 걸렸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에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와 아일랜드의 케프라비크를 거치면서 다시 이틀이 소요되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조종석에 들어가서 루돌프 마이어 기장 옆에 앉았다. 이 여정에서 비행기는 수상실도 되었다가 기자회견실도 되었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해외 순방을 할 때와 비교해서 이때 수행원은 비교적 소박한 수준이었다. 핵심 수행원은 35명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 도착해서는 주재 대사관 직원 일부가 합류했다. 외무장관과 연방정부 공보실장도 이 여정에 함께 하였다. 비행기의 꼬리 부분에는 아데나워를 위한 작은 집무실과 거실을 마련했다. 그 방에는 비행 여정이 그려진 지도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서류 더미도 쌓여있었다. 한네로어 시겔과 안네리제 포핑가 비서는 아데나워 수상의 쉴 틈 없는 호출을 받았다.     

비행기 가운데에는 외교관들과 아데나워의 정적들이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여객 칸에는 기자들, 사진사들, 경호원들이 있었다. 아데나워의 아들 콘라드 아데나워와 딸 로테 물트하우프트도 같이 탔다. 이들은 아버지가 과로하지 않도록 보살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접견, 정치적 대담, 방문, 기자회견이 분 단위로 진행되었고, 고급 호텔에서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아데나워는 눈에 뜨이게 활기를 찾았다.     

미국 방문에서 어느 정도 실추된 독일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뉴욕의 월도프 아스테리아 호텔에서 3월 14일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이는 워싱턴에서의 회담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다. 이 만남은 요란한 선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뢴도르프의 가부장이 스데보카의 가부장을 만나는 모습이 미국의 모든 텔레비전에 나왔고 신문의 1면에 보도되었다. 아데나워는 미국 유대인을 염두에 둔 이 선전 행사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준수했다.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말고 통 크게 나가자.’     

월도프 호텔의 연회장에서 이 역사적인 만남이 있은 날 오후에 ‘미국 독일 위원회’(American Council of Germany) 주최한 모임에서 아데나워가 연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최대한 엄숙하게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오늘날의 독일 정신은 반유대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모든 유대인 시민에게 어떤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미국의 수석 랍비인 요아힘 프린츠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이전에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는 아데나워가 ‘평화와 인간 존엄의 상징’이라고 격찬했다. 그가 히브리어로 드린 기도에는 하느님이 아데나워 수상과 새로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을 축복해 주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다.     

아데나워와 벤구리온은 1시간 30분 동안 대담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이 두 사람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1950년대 초반부터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와 벤구리온의 만남은 전례 없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자는 인식을 더 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1964년 초에 자기 첫 회고록 초안을 구술한 내용을 보면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다. “1952년 이스라엘과 맺은 협정. 이스라엘에 관한 속죄. 최대한 내적 의무를 다했다. 이스라엘 협정은 세계에서의 독일의 위상에 결정적이다.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미국 방문이 그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수립, 1958년부터 1963년까지의 유럽 정책, 1963년의 독일·프랑스 조약이 맺어진 시절에 관한 내용도 또한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민족은 두 가지 과제의 해결을 위하여 노력해야 했다.:     

① 프랑스와의 화해

② 유대인에 관한 속죄.     

이 과제에는 심리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해결은 우리의 세계에서의 위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서는 벤구리온과의 만남을 묘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도 아데나워가 다신의 대화를 이야기한 회고록의 다른 장들과 마찬가지로 통역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무기 공급이나 제삼국에 관한 이야기는 삭제했다. 아데나워는 이 회고록 원고에서 그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후에 바로 벤구리온에게 연락했다는 것이다.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관한 이 대화는 족장들끼리 나누는 협상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흔히 그러하듯이, 일반적인 감동적인 평가에 더하여 매우 구체적인 주제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벤구리온은 카메라 앞에 아데나워와 함께 서면서 독일 수상이 나중에 이스라엘 수상과 만남이라는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써먹을 방법을 미리 연습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데나워도 그에 대하여 중요한 보답을 하였다. 곧 이스라엘에 관한 배상을 지속하고, 극비 군사 기술을 지원한 것이다. 물론 이 대담에서 독일과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이스라엘은 오래전부터 이를 요구해 오던 차였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배상이 이스라엘의 경제 건설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경제원조가 곧 종료되는 배상 협상 효력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지속되어야만 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을 독일의 경제발전 원조국의 명단에 포함시키거나 매년 4~5천만 달러의 차관을 10~20년 기한으로 빌려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원조에 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하였다. “이에는 저의 내적인 의무감에서만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지혜를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서방에 속하는 나라이기에 그 발전은 자유세계의 전체적인 이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어서 벤구리온은 무기 지원에 관한 언급도 하였다. 이미 1957년부터 이스라엘은 독일로부터 군사 장비와 무기를 비밀히 공급받아온 터였다. 독일에서 이를 담당한 인물은 국방장관 슈트라우쓰였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이스라엘 국방부 사무총장인 시몬 페레즈가 파트너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허락하였다. 하인리히 촌 브렌타노, 하인리히 크로네, 프리츠 에를러, 그리고 자민당(FDP) 원내대표도 이에 관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이리하여 독일 정부의 재무 규정을 어겨가면서 독일군의 상당량의 장비가 이스라엘로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독일군은 이를 경찰에 절도로 신고하여 위장 처리하였다. 그 당시 강력한 이스라엘 편이었던 프랑스도 이 음모에 동참하였다. 독일의 헬기와 비행기가 국적 표시 없이 프랑스로 날아가 마르세유 항구에서 배에 실려 이스라엘로 운송된 것이다. 대신 독일군은 현금이 부족한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이스라엘제 우지기관총을 사들여 주었다.      

벤구리온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의 회담에서 슈트라우쓰가 매우 고마운 사람이라는 뜻을 전했다. 국방장관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아데나워에게 제시한 구매 목록에는 매우 민감한 무기 체계도 들어있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홍해에서 사용할 천해용 소형 잠수함을 요구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동해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 잠수함을 건조한 바가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 생산하고 있는 탱크와 저공 비행기를 대상으로 하는 무선 조종 미사일에 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아데나워는 무선 조종 미사일의 수출을 승인하겠다는 약조를 하였다. 이미 슈트라우쓰가 긍정적인 신호를 이스라엘에 보낸 다음에 말이다.     

이렇게 월도프 아스테리아 호텔에서는 상징적인 정치의 감동적인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일이 벌어졌다. 이 만남에는 정치적 거래가 있었다는 증거가 분명하였다. 그 대신 이스라엘은 아데나워를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된 곤경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계적인 시선을 끈 이 벤구리온과 아데나워의 만남은 이렇게 독일을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 인사들에게 은밀히 청탁하였다. 반대급부로 아데나워는 완전히 불법적이고 은밀한 무기 수출이라는 시한폭탄을 계속 들고 다닌 것이다. 그런데 이 시한폭탄은 운이 좋게도 에르하르트 정부에서 터졌다. 그래서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는 그 폭로로 본의 중동 정책이 철저히 실패하는 장면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대나워는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위한 논의 이후에 이스라엘을 위한 개발 원조에 관해 더 이상의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관한 신중한 조치 또한 소리 없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귀국하자마자 국무회의에서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나 경제원조를 승인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신속하게 확언하였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다른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5천만 달러의 차관을 이스라엘이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비쳤다. 폰 메르카츠 장관은 아데나워 수상의 이러한 언급에 확실한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세계의 여론을 설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     

그런데 뉴욕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이 8일에 걸친 대대적인 선전 효과를 위한 미국 방문에 이어 왜 하필이면 일본을 방문했을까? 사실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일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1940년 독일, 일본, 이탈리아 삼국협상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억에 매우 민감한 만큼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그 과정에서의 독일의 역할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을 그는 늘 경계해왔다. 그러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20주년을 맞이하여 행한 라디오 연설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유감을 표명해야만 할 때도 그는 단숨에 ‘히틀러 독일과 소련 군대의 침략’을 언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것을 ‘청산’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사실 근세사에 관련된 불편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데에는 세계 챔피언 감인 나라였다.     

그렇다고 해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동맹국이었던 사실을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본에서도 야당인 좌파 정당이 일본 정부가 뉘우치는 빛이 조금도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혐오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가 일본의 상·하원에서 연설할 때 양국 국가의 연주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집권 자민당은 연설에 이으 공식 환영식에서는 독일 국가가 연주되도록 하였다. 사실 언론에서는 독일과 일본 양국이 최근에 저지른 일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일본의 기시 수상이 1959년 7월 2일간 본을 국빈 방문에 관한 답례로 아데나워를 초청하였다. 기시는 과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속과 쇄신에서도 전형적인 일본 방식을 구현하였다. 전쟁 중에 그는 1944년까지 일본 제국의 통상장관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일본 평화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내각에서도 사퇴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미군에 의해 전범으로 판결을 받고 3년간 구금되었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다 용서받고 잊힌 다음이었다. 이제 그는 반공주의를 기치로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협력을 주창하는 무리에 속했다. 사실 이런 정치 경력은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의 공통된 과거가 아데나워의 일본 국빈 방문의 동기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일본을 특별히 챙겨야 할 외교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무역정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기시가 본을 방문할 때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일본 방문에서도 유럽경제공동체(EEC)의 관세 정책 계획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일본의 관심사에 대하여 깊은 고려를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은 아직 세계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고 동아시아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동아시아에서 아데나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래서 도쿄에서 아데나워가 기시와 대담을 나눌 때, 중국에 관한 일본의 평가에 관하여 많은 시간이 할애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시가 중국이 일본에 얼마나 중요한 국가인지를 언급하자 아데나워는 이 두 나라의 관계가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에도 두 나라는 중요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에서 말이다. 아데나워는 그러나 인구 대국인 중국이 조만간 국제정치에 관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실험이 성공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지 않은 것이다. 아데나워와 기시는 노련한 정치가들로서 기탄없는 의사 교환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 이상을 의도한 만남은 아니었다. 세계 정치 관계에 관하여 긴밀한 대화를 나눈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세계경제 정상회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데나워는 도쿄에서 중요한 정책을 추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본의 아데나워에 관한 반응은 예의를 갖춘 것이었지만 열광적이지는 않았다. 이는 1년 전에 기시가 본을 방문했을 때나 1954년 10월 요시다 수상이 짧은 일정으로 독일을 방문했을 때와 유사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서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메르카츠는 귀국 후 내각에서의 보고 자리에서 한 아데나워의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일본: 상황이 어려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공과의 접촉을 지지함.’ 일본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종교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말도 했다. 사실 일본 의원의 3분의 1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중국과 관계를 맺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쿄는 한때 900만 명이 살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225만 명만이 살고 있었다. 이 세계적인 대도시에는 결핵환자가 넘치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일본이 미국 방어에 중요한 거점이 된다고 하였다. “일본이 공산화된다면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결정적인 타격이 될 것입니다.” 지정학적인 차원에서 아데나워는 일본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고 그 나라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아데나워가 내각에서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에르하르트는 일본의 값싼 섬유 수출에 관헤 언급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일본 방문 때 독일과 일본의 경제 협상 문제를 언급하라는 대사들의 충고를 ‘단호히’ 거부하였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극동에 있는 나라의 전략적 역할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 방문을 한 이유가 외교 정책적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전혀 낯선 문화 탐방에 관한 호기심이 있었다. 사실 일본은 빌헬름 황제 시대부터 독일 지식인 계층에서 중요하고 매우 놀라우면서도 상당히 낯선 나라였다.     

아마도 안네리제 포핑가가 이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 아데나워의 호기심을 더욱 북돋운 것으로 보인다. 포핑가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크롤 주일 독일대사의 비서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 문화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1958년 아데나워 곁에서 수석비서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카데나비아에서 수상에게 전혀 다른 문화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포핑가는 낯선 일본에 관한 자기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이 그리 다른가요?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아마도 정치 관광이 그가 일본행을 결정하게 된 주요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도의 네루, 호주의 멘지스, 아르헨티나의 프론디지, 브라질의 쿠비셰크와 같이 많은 국가에서 그에게 국빈 방문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 세계 순방에 나선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미 누리던 세계적 명성과 결부된 그의 위엄이 일본에서 제대로 빛을 발휘한 것이다.     

세계 순방에서 가장 인상을 깊게 받은 것은 미국의 세계적으로 발휘하는 힘이었다. 아데나워는 내각에 순방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를 강조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대사인 세두에게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가 파리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미국의 엄청난 크기’에 경탄하였고 자국 방어에 커다란 힘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서도 놀랐다는 것이다. 미국의 장군들이 아데나워에게 이를 직접 보여준 것이다.     

하와이에서 이틀 동안 머문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2년 후에 다음과 같이 구술하였다. “내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태평양 주둔 미군의 위세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4정 장군 4명과 1명의 제독이 나를 영접하였다. 그렇게 많은 미국의 4성 장군을 한꺼번에 봤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웨이크섬에도 잠시 기착해야 했다. “매우 작은 섬으로 거대한 태평양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매우 덥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기온이 같았다. 이 섬 주민은 1,250명인데 군인은 몇백 명 정도였다.” 그곳 사람들이 아데나워에게 보여준 역사적 유물이라고는 작은 건물 하나였다. 그곳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태평양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만났다고 한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트루먼은 그 사령관을 해임하였다.     

웨이크섬에서도 미국의 세계에 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섬은 비행기 급유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곳에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사된 미사일을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는 관측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시 시설은 은폐되어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끝으로 앵커리지도 방문하였다. “알래스카의 미국인들은 매우 친절하였고 다정했다. 나는 매우 따뜻한 심성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공항에서 장교 숙소로 이동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 비행기 종류와 그 지휘체계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공군 대장은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비행기 두 대의 출격 명령을 내려 볼 것을 권하였다. 명령을 내린 지 5분이 되지 않아서 음속 2배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공중에 떠 있었다. 우리는 비행기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갔다. 비행기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장군이 출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조종사들이 주변 막사에서 달려 나와 비행기에 신속히 올라탔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출격 명령 이후 비행기가 공중에 뜨기까지 4분이 걸렸다. 장군은 내게 이곳 군인들이 매우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일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 매우 위협적인 비행기의 조종사들은 열흘간 이곳에서 일을 한 다음에는 다시 알래스카를 떠난다고 하였다. 이곳 군인들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담수함에서 미국을 직접 겨냥한 로케트 공격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들은 5년이 지나야 가능한 일이라고 답변했다. 미소 정상회담에 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과가 거의 없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정상회담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세계 순방을 하는 가운데 나치의 과거 그림자에 관한 것보다는 다가오는 정상회담에 관한 우려가 더 컸다. 1951년부터 아데나워를 세밀하게 관찰해온 그레베 대사는 아데나워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이미 그가 불만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하와이에서도 아데나워가 매우 신경질적인 것을 눈치챘다. 사실 아데나워는 첫 일본 방문을 망칠 뻔했다. 그가 기자회견장에서 눈부신 텔레비전 카메라 조명을 꺼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회견문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기자들에게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 신문의 수석 기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장광설을 늘어놓지 말고 정확한 질문을 하세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데나워는 기자회견을 잘 이끌어 갔다. 그리고 차로 2시간 달려가 전 일본 수상인 요시다를 만났다. 그는 ‘일본의 아데나워’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곳에서 오랜 문명의 흔적이 있는 정원을 방문하고 거의 흑적색인 ‘콘라드 아데나워’ 장미를 보았다. 그 당시 82살로 이미 은퇴한 전 일본 수상에게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자랑하였다. “저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야지요.”      

이런 기분으로 그는 귀국하였다. 하인리히 크로네는 그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보고자 했다. 그는 1961년에 해낼 것임을 알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5월 중순에 열리는 파리 정상회담을 잘 견뎌내야 했다.


베를린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로     


아데나워는 1959년과 1960년에 독일연방공화국의 위상 하락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 싸우면서 국격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적 서열과 외교 의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조차 위협을 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영국이 보여준 유대가 재현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1960년 5월 파리 정상회담 2주 후에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에서 글롭케 차관에게 긴 전문을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1960년 5월 25일 《기독교인과 세계》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아이젠하워가 맥밀런으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추론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기간에 서로를 알게 되었기에 그런 추측이 옳을 것입니다. 포스터 덜레스의 장례식 날 내게 말한 대로 아이젠하워는 맥밀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하필 소련의 베를린에 관한 압력이 강화되어 불안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매우 불길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상황의 결과에 대하여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서방 강대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잔학 행위의 결과로 독일의 분열과 베를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 정책에 관한 모든 입장과 여러 해에 걸쳐 이룩한 안보 정책적 차원에서 독일의 위상이 위협받게 될 처지였다. 베를린 위기로 야기된 전쟁 가능성의 압력으로 어쩌면 서베를린에는 더 나쁜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기에 다른 분야에서 소련에 큰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흐루쇼프가 바라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제적 지위의 악화에 대하여 대부분은 서방 동맹국은 무관심하거나 이를 은밀히 바라고 있었다.     

이는 독일 동부의 국경 문제로 시작되었다. 서방 3국은 모두 독일과의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독일 조약에서 합의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총리직이 끝날 때까지 서방 3국이 합의를 깨지 않도록 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서방 3국 정부는 폴란드 서부 국경과 관련된 당시의 추세를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국경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심산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무력 사용 포기 약속은 최소한의 양보가 되고, 동유럽에 있는 과거 독일 영토의 공식적인 포기가 최대 양보가 될 것이었다. 적어도 독일 조약의 정신이 이에 방해가 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포기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평화 조약의 조건과 연계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는 독일 조약과 양립할 수 없는 그러한 추론은,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오래 지속된 베를린 위기 동안에 계약 당사자인 서방 3국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다름 아닌 드골이 이에 관한 공식 견해를 가장 먼저 제기하였다. 1959년 3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독일의 통일이 “독일 민족의 목적이며 당연한 운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다만 “독일의 현재 동서남북의 국경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아데나워는 일단 파리에 파견된 특사인 얀센에게 즉각 상황을 파악해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에 프랑스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확언을 전달하였다. 곧 “오더·나이쎄 선을 잠정적인 독일의 동부 국경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드골은 이 민감한 문제를 더 이상 공론화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하는 기간에는 말이다.     

드골이 비록 일회성이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이 사실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되었다. 1960년 3월 흐루쇼프와의 파리회담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아이젠하워는 게티즈버그에 있는 미국 대통령 별장에서 만난 맥밀런에게 다음과 같은 의사를 전했다. 곧 서방 강대국들이 오더·나이쎄 선이 국경으로 확정된다면 베를린 규정을 확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1960년 양보 조항에 이미 포함된 내용이었다. 미국 민주당의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문제에 대하여 소련에 양보하려는 의사가 더욱 커졌다. 미국 민주당은 경험상 폴란드 출신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소련이 되풀이하여 요구한 양보는 서방 강대국이 독일군의 핵무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이었다. 영국도 이를 되풀이 주장하였다. 독일의 비핵화에 관한 영국의 관심은 소련의 것과 일치하였다. 본의 인사들은 맥밀런이 ‘발견의 항해’(voyage of discovery)에서 흐루쇼프에게 그러한 제안을 했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아데나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군이 핵무장을 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이젠하워 정권기에 이러한 뜻을 관철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제한된 핵확산에 대하여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케네디 정부에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핵확산 저지가 더 중요한 정책이 된 것이다. 최소한 정부의 일각에서는 영국의 제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곧 독일연방공화국의 비핵화를 베를린 양보 조항에 포함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서방의 독일군 비핵화 계획만이 아니었다. 1960년 초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부의 로리스 노스태드의 참모들은 군사적 검열과 통제 지역을 세우려는 계획을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그러한 계획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 많은 내용이 과거의 것을 답습하거나 새로 정리하거나 보완되고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되곤 하였다. 또한 그러한 구상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도 보통은 알아내기 힘들었다. 과연 그러한 구상이 파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의 주변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워싱턴에서? 아마도 대통령 측근이?     

이 계획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동서독과 베네룩스국가들,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동유럽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제 지역에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여기에 서방과 소련 측에서 각각 3천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돌발적인 공격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원칙적으로 그런 식의 지역을 구성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논리를 제기하였다. 공중에 관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별무소용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으로는 소련의 미사일이나 비행기 공격에 무방비일 뿐 아니라 낙하산 부대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독일에서 1,500명의 소련 ‘정보원’이 활약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구상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렇게 되면 미국의 ‘모든 효율적인 현대 무기들’이 통제를 피하려고 철수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턱없이 부족한 독일군이 방어하는 무주공산이 되고 언제든 소련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었다.’ 또한 동독이 조약 당사자가 된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결국 동독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늘 그러했듯이 아데나워는 독일이 지옥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먼저 군사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다가 서방의 방위기구에서 단계적으로 떨어져 나와 점차 중립화되다가 결국 ‘서독의 몰락’에 이르러 서구 전체가 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제안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외무장관 헤르터가 이미 2년 전에 했으나 그 당시 거부된 제안을 아데나워가 워싱턴을 방문한 때인 3월에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아마도 아이젠하워도 식사 때 아데나워에게 이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그러나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헤르터의 계획은 이미 거부한 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제 노스태드마저 독일 국방장관인 슈트라우쓰에게 이 계획을 설득하고자 나섰다. 노스태드의 요청으로 파리 정상회담 10일 전인 5월 5일 샤움부르크궁에서 아데나워가 그를 맞이하게 되었다. 독일 측에서는 이 면담에 폰 브렌타노, 슈트라우쓰, 호이싱거가 참석하였다. 데이비드 브루스와는 달리, 아데나워는 이 빨간 머리의 직업 외교관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었다. 그래서 미국은 1960년 12월부터 1963년 4월까지, 곧 독일과 미국의 관계가 매우 껄끄러운 시기에 비교적 친독일적인 미국 외교관을 상대했지만, 아데나워는 그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무렵 흔히 그랬듯이 아데나워는 언짢아지면 그 사람의 이름을 ‘멍청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5월 5일 면담에서 노스태드는 1시간 반 동안 자기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아데나워를 설득하였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소련 측과 정상회담에서 이 계획에 대하여 협상을 벌이리라는 것도 설명하였다. 아데나워는 단호하게 이를 반대하면서 그날 밤에 드골에게 보낼 편지를 구술하였다. 그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이 계획을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은 10년 동안 그가 추구했던 계획을 떠올리게 하였다. 곧 군사적으로 볼 때 이 제안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은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아데나워와 드골이 정상회담 직전에 논의하였다. 드골은 노스태드가 공군 장군이라서 핵무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의 정치적 영향에 관한 생각에 동의하였다.     

아데나워의 미국 측에 관한 판단은 다시 한번 매우 부정적으로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1960년 1월, 곧 이 계획을 알기도 전에 안토니오 세니에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곧 아이젠하워가 “점잖은 사람이지만 결코 정치가는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세니에게 아데나워의 모친이 평화주의 무리에 속하여 아들이 정치에 입문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소문도 다시 이야기하였다. 대통령의 형인 밀튼 아이젠하워는 완전한 평화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아이젠하워는 임기가 얼마 안 남은 시기였음에도 여전히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한심한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노스태드가 문제였다. 6월 말 아데나워와 이야기를 나눈 덜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이보다 더 멍청한 계획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사정을 그렇게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자리에 있어서 너무 걱정된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나 노스태드가 전령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덜레스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2주 후에 거의 같은 내용을 존 멕코이에게 전달한 것은 사실 헤르터와 아이젠하워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한 것이었다. 군비통제 계획은 아데나워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예외적인 지위에 놓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의 현재 지위를 소련이 받아들일 것을 전제로 할 때 서방의 생각으로 동독을 사실상 인정하게 될 것이 뻔했다. 베를린 문제가 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은 독일의 분단이 굳어지면서 여기될 정치 불안에 관한 근심보다 더 큰 것이었다. 이 점에서 드골의 생각은 확고하였다. 그가 비록 경제 대국인 서독에 비하여 작고 무기력한 동독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고 보았지만 말이다. 영국도 이 점에서 역시 소련과의 타협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동독을 인정하는 다양한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4대 강국의 위임을 받아 전독기술위원회를 설립하는 것부터 일정 기간 조건부 인정 또는 연방제의 차원에서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통일까지도 고려하면서 말이다.     

물론 조약의 조건이 영국과 미국에 무제한의 선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더·나이쎄 국경의 문제와 같이 서독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고, 밀어붙일 수 있으며, 설득과 압력으로 추진할 수 있고, 끝으로 독일 조약에 부합하는 ‘자발적’ 해결책을 강요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베를린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런던 외교가 그러한 구상을 계속 밀어붙일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에 비하여 훨씬 더 신중했다. 이는 또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령관인 아이젠하워가 동독의 인민경찰이 미국의 베를린 물자 수송을 통제한다는 생각을 혐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면에서 우월한 서독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닌 생각을 바탕으로 아데나워가 동서독의 긴밀한 접촉을 촉구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1959년 8월 본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아데나워에게 이런 뜻을 전했지만, 그가 거부하자 실망했다. 동독을 인정하는 문제에서는 미국도 종잡을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은 베를린 문제에서 양보의 의지를 분명히 보였다. 이는 이미 1959년 7월 말의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당시 상당히 위험한 소련과의 잠정해결책이 논의되고 있었다. 베를린 주둔 서방군의 수를 줄이고, 방송사의 자유에 영향을 미칠 선전 활동의 통제, 잠정 조치 이후의 불명확한 법적 상황이 논의된 것이다. 다행히도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의 신중한 전술 덕분에 흐루쇼프는 캠프데이비드에서 최후통첩을 철회하게 되었다. 제네바에서 소련 측이 밀어붙였던 12 내지 18개월의 잠정 합의에 관한 이야기도 일단 더 없었다.     

그러나 늘 의심이 많은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가 캠프데이비드에서 특정 기한 동안의 합의를 은밀히 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 세상이 매우 작아진 덕분에, 6월 초 일본을 방문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카데나비아를 찾은 시게류 요시다와 차를 나누며 이렇게 말했다. 곧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가 지금 시작된 대통령 선거가 그의 국내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고 있어서 그러한 약속을 지킬 수 없으리라 추측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흐루쇼프가 격노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미국이 잠정적 해결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1959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서방측의 예비 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가 예기치 않게 베를린의 기존 법적 상황을 더 이상 고수하지 말자고 제안하자 아데나워는 그와 충돌하였다. 미국은 잠정안에 관한 논의에서 제네바회담을 1959년 7월 말로 연기하자는 제안을 담은 서방측의 제안서를 다시 들고나온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드골과 맥밀런에게 베를린의 법적 지위 변경에 관한 반대 의사를 전달하자 아이젠하워는 자기 의사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국무부와 백악관은 숙고를 계속하였다. 곧 베를린으로 가는 민간 교통을 위해 새로운 협정이 마련될 수 있는지, 또는 그래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해본 것이다.     

좋든 싫든,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외교적 계산과는 거리가 먼 군부의 참모가 수행하는 비상 계획에 대해 계속해서 논의해야 했다. 아데나워와 아이젠하워는 1960년 12월 중순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이 문제를 다루었다. 아데나워는 연합국이 법 집행을 하는 데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하는 경우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하겠다는 덜레스의 1년 전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워싱턴을 방문하기 며칠 전, 다우링이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이다.     

다우링의 방문 후, 아데나워는 이러한 미국의 구체적인 문의에 관한 자기 생각을 원내대표인 크로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 3월 8일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미국 대사는 베를린을 둘러싼 싸움에서 독일 정부가 어느 시점에서 군사적으로 치고 나갈 수가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었다. 필요한 경우 미국도 궁극적 조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한 서독 정부도 그런가? - 핵무기 사용까지도? 수상은 그 질문이 함정이라고 여겼다. 그는 베를린을 위한 타협책이 가능하다면 궁극적 조치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그러한 조치에 동의한다면 언젠가 언론은 그를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이야기할 노릇이었다. 그러한 결정은 언젠가는 새나가기 마련이었다.”     

절차에 관하여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은 정상회담을 즉시 개최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드골은 주저하면서도 파리를 회의 장소로 정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동서 정상회담을 정기적으로 갖자는 구상도 관철되었다. 그러나 정부 수반 간의 논점, 논의 순서, 확정된 최상의 방안 및 대안에 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흐루쇼프와의 논의에서 처음부터 베를린을 꺼내지는 말자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어쨌든 아무도 흐루쇼프의 본심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공격적인 길을 택하라는 모스크바 정치국의 타협을 모르는 그룹의 압력을 받는 것은 아닌가? 모든 이들이 예상하듯이 그가 무엇보다도 동독의 실질적 인정을 바라는가? 크롤 대사가 글롭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흐루쇼프가 소통할 의향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데나워는 여전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 3월 중순에 아데나워가 다우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흐루쇼프가 “마치 세계의 지배자나 되는 듯 구네요.” 아데나워는 조롱하고 있었다. 분명히 흐루쇼프는 전쟁을 바라지는 않지만, 과대망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은 5월 중순 파리에서 열린 유명한 기자회견에서 흐루쇼프가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준 후에 나온 것이었다.      

흐루쇼프를 만나기 하루 전인 5월 15일 4개의 서방 국가 정부 수반이 내부 전략을 자기 위하여 먼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드골의 생각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였다. 이 예비회담에 관한 그의 생각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는 1960년 7월 중순 존 맥클로이에게 “서방의 정상회담 준비는 그가 경험 한 최악이었다.”고 하였다. 그리면서 특히 미국과 영국이 힘에 부쳐 하는 것을 한탄했다.     

이것이 바로 1959년 중반부터 1960년 여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상황은 1963년 봄까지 변화가 없었다. 1960년에 이미 알려진 해결방안의 모든 요소는 베를린에 궁극적 평화를 가져오고자 한다며 소란을 떠는 참모들과 서방 정상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흔들렸다. 아데나워가 1960년 1월 초 쿠브 드 뮈르비에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미국인에 대해 말한 내용은 영국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변함없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문제, 문제 및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태가 종식되는 것을 긴장 완화로 여겼습니다!”     

이제 어떻게 모든 것에 맞설 것인가? 폴란드의 국경 확정 요청과 관련한 그의 입장은 1951년 이후 단호한 것으로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곧 무력 포기에는 찬성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유보하며 동유럽 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이 다시 고향을 찾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는 견지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서독이 군사적으로 특수한 지위에 놓이게 할 모든 것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드골은 그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그는 “라인강에서 러시아 전차를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이 발언에서 프랑스 지역은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1960년 정상회담에 대비한 예비회담에서 그는 다시 동독의 체제 인정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동맹국에 대해 몹시 불평했다. 다우링 대사는 그의 소련 동료인 소련의 스미르노프가 본에서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곧 독일 정당들은 동독의 실질적 인정 문제에 대해 소련과 서방 동맹국 사이에 이미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적어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독일 정책과 관련된 용어를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파리 정상회담 직전에 내각에서 “미래에는 통일보다는 ‘자결권’(Selbstbestimmungsrecht)에 대해 말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점에서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 5월 6일 국무회의에서 글롭케 장관은 방금 받은 정상회담에 관한 사민당(SPD)의 건의서를 아데나워에게 건네주었다. 아데나워는 그것을 훑어보며 몇 가지 핵심 단어를 낭독하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의 생각으로는 놀랍도록 온건한 어조였다. 군축, 핵무기 통제, 통제된 재래전 장비의 축소, 통일 독일의 유럽 안보 체계 회원국 가입. 게다가 점령군의 기존 권리 보존, 그리고 국제연합의 보증과 같은 추가 협정의 필요성 등이었다. “이 모든 것은 대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럽 안보체제에 대해서도 통독이 세계에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구조 조정이 이 사안과 연관하여 고려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합니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오스트리아식 해결책을 제시하여 흔들리는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소련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서방 세력이나 중립국 모두 ‘통상적인 통일 슬로건이나 자결의 개념’만으로는 확실한 공동 입장을 취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을 둘러싼 4대 강국들에 얼마 안 되어 야기될 첫 번째의 동맹들 사이의 위기에서 ‘소련 점령 지역과 베를린의 진정한 중립화’를 제안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이 새로운 협약에 따르면 동독 지역은 스위스 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지위를 차지할 것이며, 이 지역 내에서는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외국 점령군의 완전한 철군이 보장될 것을 요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중립화된 지역은 국제연합의 통제에 놓이게 될 것이며 ‘베를린은 이 중립화된 국가의 수도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20년 동안 제한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른바 사회적 성취에 관해서는, 최근 몇 년간의 집단화를 통한 자유농민 계급의 파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하면 소련은 체면을 구기지 않고서도 동독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중립국 또는 반중립국이 되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보장 된 중립 완충국이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소련의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그러한 계획에 대하여 협상하면서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으며 그동안 세계의 여론을 호의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폰 에카르트가 아데나워가 제시한 계획을 자기 친구인 블랑켄호른에게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거의 85세가 된 아데나워 수상이 이번에는 사민당(SPD)과 함께 이처럼 크고 중요한 정치적 계획을 제기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데나워가 실제로 이것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을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흐루쇼프는 실제로 회의 중단이라는 믿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서방은 독일과 베를린 문제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5월 15일 저녁, 아이젠하워가 U-2 정찰기 비행에 관한 흐루쇼프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회의가 파기되자 아데나워는 큰 시름을 덜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 대사 공관에서 일단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오스트리아식 해결책 방안을 권유했던 폰 에카르트를 조용한 구석으로 이끌고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오, 폰 에카르트 씨. 내가 지금 쾰른 사투리로 말하리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운이 좋았구려!’(Wir haben fies Jlück jehabt!)” 그러나 이와 관련된 계획은 계속 이어졌다. 폰 에카르트는 모든 것을 서류로 기록하였다. 그의 제안에 관한 아데나워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에카르트 씨. 귀하가 전적으로 옳지만, 나는 그 서한을 금고에 단단히 보관해 두었습니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었던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에 대하여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준비 회의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사실 정상 외교 자체는 아데나워의 자존심에 걸맞은 것이기는 하였다. 정상회담에서 외무장관은 단순한 하수인이고 외무부의 고삐를 잔뜩 틀어쥘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대로 말이다. 흐루쇼프, 아이젠하워, 맥밀런,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골이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 외교를 추구한다면 원칙적으로 반대할 것은 없었다. 다만 아데나워는 중요한 4자회담에서 자신이 제외되었기에 아이젠하워나 맥밀런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어려운 가운데 드골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협상을 거부하는 고집을 부리는 국가 원수가 4자회담에 과정에 한 명이라도 있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정상회담과 관련해 무력한 것이 아데나워만은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도 회담 주제를 소련에게 지시받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때로 그는 포괄적 군축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평온한 1958년에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이 1960년에 들어서는 모든 일에 간섭하기로 결심한 흐루쇼프의 관심을 더 이상 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1960년의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정상회담을 바라보면서 체념한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정상회담의 유일한 의미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결국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정상회담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외무장관들이 일련의 문제들을 먼저 논의하고 나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 어떤 확실한 결정도 내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시간을 벌려고 애쓰는 가운데, 한 협상에 이어, 또 다른 협상이 이어지면서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데이비드 브루스는 1959년 봄에 그에게 준 현명한 조언에 따른 것이다. 이때만 해도 존 포스터 덜레스가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브루스의 계획에 주의해야 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을 때 놀랐다. 덜레스는 이 계획에 관하여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전술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흐루쇼프가 별일 아닌 U-2 정찰기 사건을 이유로 1960년 5월 파리 정상회담을 파기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상회담을 간절히 바랐던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은 이제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흐루쇼프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은 제게는 매우 운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서방의 세 강대국과 서독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몇 달 동안은 조용할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더 이상 아이젠하워와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도발적인 무례함으로 분명히 밝혔다. 미국에서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든 간에 신임 대통령은 직무에 적응해야 하기에 적어도 1961년 봄까지의 상황은 안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위로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독일의 총선이 있기 몇 달 전 베를린을 둘러싼 동맹의 위기나 동서 갈등은 아데나워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런 상황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다.     

파리 정상회담의 결렬 때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 만료 때까지의 몇 달은 냉전 중에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흐루쇼프가 1959년 9월과 1960년 4월에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에는 일종의 긴장 완화가 이루어졌다. 맥밀런과 아이젠하워는 언제나처럼 낙관적이었다. U-2 정찰기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격추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동서 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파리, 모스크바, 워싱턴과 런던의 정기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핵실험 중지 협약과 추가적인 합의가 도출될 수도 있었다. 베를린에 이르는 통로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소련이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자 하는 가운데 일련의 위기가 도래하였다. 콩고분쟁,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좌파 정권의 등장, 라우스의 분쟁, 그리고 서방의 군사 블록, 사회주의 국가, 중립국의 대표로 구성된 이른바 ‘트로이카’로 국제연합 사무국을 대신하자는 제안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를 기꺼워서 할 수 있었다. 이제 서독과 베를린에 관한 압력이 소련의 세계적인 팽창 단계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미국과 영국의 타협 의지도 줄어들었다. 반면에 정면충돌의 위험은 훨씬 더 커진 것이다.     

그래서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개혁 문제와 서유럽을 조직의 세속적인 과제가 다시 한번 외교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등장한 데에는 내적 논리가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에서의 수 싸움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서독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제 아데나워, 아이젠하워, 맥밀런은 서방 체제의 구조 조정을 마침내 실질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드골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굴뚝의 백일몽     


1960년 서유럽의 핵심 3대 국가를 통치하는 수반들의 분위기는 날씨처럼 변했다. 특히 아데나워는 이제 점점 더 강하게 고립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두드러진 것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금방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사람들에 관한 평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변덕스럽게 변했다.     

1960년 5월의 정상회담에서는 평소 냉소적이고 냉정하며 고집불통인 드골 장군이 아데나워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파리에서 극적인 일이 벌어진 이후 몇 주 동안 아데나워 수상과 대화해 본 사람은 이 신뢰할 수 있는 동지에 관한 칭찬만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존 멕클로이는 샤움부르크궁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당시 그는 민주당 대통령 아래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을 예상하였는데, 그 이유만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서독 건국 시기에 관한 아데나워의 기억도 다소 변하였다. 맥클로이, 로버트슨, 커크패트릭 또는 프랑소아퐁세를 만날 때마다 그들과는 매우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훌륭한 식사와 좋은 와인 한 병을 나누는 것이 당연했다.     

단둘이 있게 되자 이번에는 아데나워가 맥클로이에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미국 대통령 후보에 관한 기밀 정보를 빼내고자 했다. 아데나워가 현재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었고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러나 맥클로이는 아데나워가 이제 드골도 깊이 불신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가?     

첫째로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이 드골과 함께 일종의 삼자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흐루쇼프와의 동서 정상회담은 재앙으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날 아데나워의 귀국 후 서방 3국의 정상은 여러 차례 만나 비공식적이지만 정기적인 3자회담을 가질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확고한 합의를 이루었다. 스파크가 사무총장으로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처음으로 워싱턴에서 3대 강국의 전문가 회의가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렸을 때 다른 모든 회원국들은 분기탱천했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3국 이사회를 ‘이해할 수 없는 구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맥밀런뿐만 아니라 드골도 그 오랜 생각을 여전히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관한 드골 장군의 정책은 그에게 짜증을 가져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드골과 흐루쇼프는 1960년 4월 초 프랑스를 국빈 방문 때 비밀 협정을 맺었을까? 드골은 맥밀런처럼 동서양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를 바란 것일까?     

아데나워 수상은 특히 드골이 독일과 프랑스가 더 긴밀한 정치 및 군사 협력을 하자는 오래된 제안을 아직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다. 독일 군을 방문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데나워의 강한 바람을 드골이 냉정하게 외면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이었나? 아데나워가 드골의 독일군 방문을 간절히 바랐던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서서히 나이를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정치학자들이 ‘상징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외교 정책의 현실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것이 되었기에 말이다.     

이러한 초조한 불신의 분위기에서 앙투안 피네의 방문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피네는 1960년 1월까지 드골 정부의 재무장관이었지만, 사실 드골은 그를 무시했다. 정책의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네는 아데나워 수상과의 대화를 드골 장군을 비난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드골은 ‘매우 교활하다’라는 것이었다. 드골과 말할 때는 “그가 기교를 잘 부리니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국가수반이 대화하면서 ‘술수를 부린다’라는 사실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렇다면 드골이 거짓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피네의 대답은 이랬다. 드골은 거짓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것이다. 국가위원회 회의에서 드골은 거짓말과 척하는 것은 정치가의 기술이라는 말을 했다고도 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심각하게 말을 이어갔다. 곧 이제부터는 드골의 편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피네는 드골이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 의도에 맞을 때만 그런다고 말하며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피네는 아데나워 수상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더욱 뿌려댔다.     

그 정도로 불안을 느낀 아데나워가 기존의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다시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CIA의 앨런 덜레스 국장은 아데나워에게 그럴 것을 권유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에게 피네의 보고서에 깜짝 놀랐고 말하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와해한다는 것이었다.     

데브르 총리가 ‘핵무기가 없는 국가는 위성국가’라고 말한 것 때문에는 아데나워는 드골주의자들에 관한 불만이 더욱 커졌다. 이 말은 프랑스가 첫 핵실험에 성공한 후인 1960년 봄부터 공식적으로 구축된 프랑스의 핵무장 군대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데나워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독일의 국제적인 국가 위상에 관한 문제에 아데나워 수상이 얼마나 민감한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7월 14일에 또 다른 도발적인 일이 발생했다. 샹젤리제 페레이드에서 미국 대사, 영국 대사, 소련 대사만이 대통령의 개인적인 인사를 받았다. 외무부 정치국장 인 칼 카스텐스는 즉각 이 문제에 대하여 세두 프랑스 대사에게 항의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블랑켄호른은 3국위원회와 비핵 위성국이라는 모욕적인 발언에 관한 항의 차원에서 5공화국 초대 총리 미셀 드브레를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얼마 후에는 아데나워가 직접 세두 대사에게 엄중히 항의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처음에는 드골의 대화 초대를 받아들이지 말 생각까지 하였다.     

세두와의 대화에서 그는 핵무기가 없는 국가는 위성국가라는 드브레의 발언에 대하여 다시 한번 기분이 매우 상했음을 상기시켰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대사만이 아니라, 며칠 후에는 드골에게 직접 당시 독일의 핵무기 생산 포기는 ‘사정 변경의 원칙’*에 입각하여 선언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덜레스 자신이 말한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는 즉각 런던에 자기의 뜻을 전달하기로 했다. 1959년 3월부터 서로 서신교환이 없었던 맥밀런이 이제 다시 친절한 뜻을 담은 서신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폰 헤르바르트 대사를 통하여 맥밀런을 조기에 본으로 초대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결국 8월 중순에 만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드골과 아데나워의 양자 정상회담이 형평성을 맞추게 된 것이다.
 
 * ‘사정 변경의 원칙’ [clausula rebus sic stantibus, 역자주 – 법률 관계 당사자가 예측하지 못한 중대한 상황이 발생하여 부당한 결과가 나오게 되면 합의나 계약을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원칙]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인 블랑켄호른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드골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대화만이 프랑스와 독일의 불협화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드골이 아데나워를 초대한 랑부이에성은 원래 고위정치가들과의 비밀 회담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맥밀런, 아이젠하워, 흐루쇼프가 모두 손님이었다. 드골 자신이 여기에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점점 더 공화정 군주의 역할에 빠져드는 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은 그가 랑부이에성이 자기 격에 맞는다고 여겨 이곳으로 국빈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란츠 1세 왕 시대부터 300년 이상, 파리와 샤르트르 사이에 놓인 랑부이에 숲에서는 커다란 사냥 전치가 벌어지곤 하였다. 프란츠 1세는 여기에서 서거하였다. 나폴레옹의 발자취를 랑부이에에서도 볼 수 있다. 황제를 위한 욕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욕실에는 군대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고 숲과 도시를 바라볼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작은 아연 욕조는 왕위를 찬탈했던 자, 곧 나폴레옹 1세의 그 당시 청결에 관한 욕구를 잘 말해주고 있다.     

넓은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조용한 위치는 이 시골 저택의 참다운 매력을 여전히 보여준다. 아데나워가 영국 총리를 방문 때 알게 된 체커스 컨트리하우스와는 달리 랑부이에성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공원을 향한 멋진 전망이 있는 커다란 테라스와 우아하게 장식된 살롱이 여러 개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랑부이에성은 20세기 중반의 고급 정치를 위한 것으로는 규모가 작은 장소였다.     

그러나 랑부이에성의 테라스와 천장이 높은 방들에서 프랑스를 해방한 자로써 드골 자신이 주인공인 된 영웅적 전설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1944년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결정적인 사흘 동안 그는 이 성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제2 기갑 사단장인 르클레르 장군이 파리 해방을 위한 역사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8월 25일 그는 여기에서 수도를 향한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통상적인 기마병들의 사열을 받으며 성의 계단에서 드골의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가 세 차례나 대통령에게 전달한 그의 불편한 심기에 대하여 되풀이 말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드골은 이제 다른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독일이 영원히 핵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드골도 독일이 핵무기를 영원히 포기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군축이 없다면 이 점에서 독일이나 프랑스나 마찬가지였다.     

드골은 나중에도 다양한 기회에 이를 아데나워에게 재차 다짐하였다. 다만 드골은 매우 신중하게도 이에 관하여 단 한 번만 공개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의 강력한 반대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그런 다음에 두 정상은 나중에 다 알려진 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탄식하였다. 드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권에 끌려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군비 협력을 촉구하면서 언젠가는 핵무기와 관련하여 양국에 더 이상 차별이 없어야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였다. 아데나워는 유럽 자체적으로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드골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미국이 동의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공군을 군사적 통합에서 분리하는 것과 같은 조치가 도움이 되지 않기에 우려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드골은 자기 의견을 고수했다. 서방의 동맹은 필요하지만, 군사 통합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프랑스·독일 참모총장 회담이라는 오래된 구상을 다시 제시하였다. 그러나 드골은 모든 것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규제되는 한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슈트라우쓰와 호이싱거가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라고 충고하였다. 많은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이 파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기관을 방문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드골이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는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새 미국 대통령에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혁 방안을 제시할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루어진 것은 전혀 없었다.     

대화는 국방 문제에서 유럽 협력 조직으로 나아갔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드골이 현재 가장 염려하는 문제임을 재빠르게 간파하였다. 여기에서 드골 대통령은 국방 협력에서 자신이 어떤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드골은 정치적 영향을 행사하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위원회에 대한 그의 비판에도 아데나워가 동조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브뤼셀의 관료제도가 확장되고 체제를 갖추는 데 골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데나워가 최근 할슈타인에게 격노한 데에도 그런 것이 크게 작용했다. 1959년 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서독 총리가 될 것처럼 보였을 때 할슈타인은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에르하르트가 총리 후보가 되는 것을 환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 전만 해도 그는 아데나워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유럽 통합을 위해서라도 에르하르트가 총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했던 차였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에게 이를 잊지 말 것을 거듭 당부했었다.     

드골과 아데나워는 이제 유럽경제공동체(EEC) 안의 장관협의회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두 사람 모두 유럽이 정기적으로 3개월에 걸쳐 국가와 정부 수반이 모여 논의하는 회의를 마련할 것을 서로 다짐하였다. 이것은 1959년 이래 6개국이 논의해온 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는 외무장관들의 협의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드골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협력의 요점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이것은 특히 아데나워가 다시 제기한 점이기도 하였다.     

드골이 랑부이에성 안에서나 산책하는 동안에 나눈 대화에서 답한 내용을 나중에 모두 재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데나워의 개인 수행원인 프란츠 요제프 바흐는 이 대담 이후 20년이 지난 다음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드골 대통령은 국적을 공유하는 일종의 프랑스·독일 연방의 구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 국방, 재무의 세 분야를 양국이 공동 관리하자는 것이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치고 나가면 6개국 공동체 가운데 누구도 이 새로운 정치적 요청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아데나워는 이에 반대했다. 최근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과거를 생각해볼 때, 서독이 유럽 민족들에게 협력 말고는 대안이 없는 곤경을 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바흐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비망록 초안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 가운데 이 내용을 삭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제안은 잘 알려진 드골의 기본적인 신념과 반대되는 것이기에 아데나워가 원가 오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단순히 그의 희망 사항이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당시 아데나워 수상이 양국 연합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드골이 아데나워에게 이 늦은 오후와 다음날에 제안한 것들이 완전히 즉흥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8월 30일 아침, 드골 대통령은 종이에 9개 항목의 요점을 직접 손으로 종이에 작성하였다. 그런데 블랑켄호른 대사는 그의 생각의 기본적인 윤곽을 1960년 7월 8일 엄격한 비밀 대화에서 프랑스의 쿠브 드 뮈르비에 외무장관에게 전달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친서를 즉각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9개 항목의 요약문서는 1961년 2월에 시작된 유럽정치연합 설립에 관한 6개국 협상으로 이어지는 데에 핵심으로 작용한 문서이다. 각 항목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때로는 의도적인 오해와 논란을 초래할만한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드골은 여기에서 그가 자주 언급했던 협력이라는 외교 정책 목표를 설명하고 있다. 유럽은 전 세계적으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 조직의 네 영역을 구상하고 있다. 곧 정치, 경제, 문화, 국방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합의로 시작되는 국가 간의 협력체만이 구상되고 있으며, ‘일단’ 6개 국가 공동체의 회원국들이 이 협력체에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드골은 ‘초국가적’ 조직의 ‘개혁’을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초국가적’ 조직이 이미 생겨났지만, 누구도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고 보았다. 브뤼셀위원회에 관한 그의 대단한 증오심은 이러한 그의 구상에 따라 ‘개혁되고, 각 국가 정부에 종속되며, 각료위원회의 정상적인 업무와 기술 업무에 활용’될 것이라는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제안은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염두에 두고 있다. 미국의 ‘통합’은 종료되어야 했다. 대서양 동맹은 유럽에서 제안한 새로운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구축되어야했다.     

실질적으로 드골의 유럽 구상은 4개국 위원회에서 결정을 내리는 국가 정부들과 정부수반들의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합의된 정책들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각 국가의 의회로 구성된 자문회의는 정기적으로 안건을 토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체의 위원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럽 전체 국민의 보편적이고 엄숙한 국민투표로 이 조직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점에서 프랑스 국내 정치에서 흔한 국민투표를 선호하는 드골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수상은 ‘필요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유럽,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양국, 그리고 두 정상의 의무이다.’라고 강조하며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이는 빨리 추진해야 했다. 드골은 빠르면 10월에 6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의 정상회담을 소집하기를 바랐다. 이 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다. 그 전에 외무장관 회의가 미리 열릴 수도 있다고 보았다.     

7월 30일 낮에 이루어진 두 사람만의 대화는 본질적으로 드골이 말한 요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당분간 외부에 공개하지 않도록 하였다. 드골 장군의 긴 발언에서 아데나워는 드골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가 의심의 여지 없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드골이 말하는 것은 다소 전투적으로 들린다. 이 연합국에는 4개의 강국이 속한다, 말하자면 이 국가들은 4개의 기둥을 이루고 뚜렷한 민족적 특성과 세계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지리적, 정치적, 도덕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드골은 이탈리아가 다섯 번째 기둥으로 지정되어야 하는지는 미정으로 하였다.     

독일은 동방에 맞서는 최전선을 형성하기에 그에 맞은 조직이 필요하다. 프랑스는 내륙 지역에 있기는 하지만 독일과 함께 전진 방어를 위한 공동체를 이룬다. 방어 측면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단일체가 되어 ‘동일 전투’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여전히 아프리카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비해 영국은 본질적으로 대륙을 방어하는 군사력이 아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바다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의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예비군’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드골은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만든 표현인 ‘민주주의의 무기고’(arsenal of democracy)를 지적하며, 미국을 예비군이자 ‘무기고’로 간주했다! 사실 미국은 남미와 태평양에서도 활약하고 있었다. 앵글로·색슨 (미국과 영국의) 군대는 분명히 대륙에 주둔해야 하지만, 미래에는 군사적 통합을 없애야 한다. ‘통합’은 실제로는 미국이 총사령부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전시에 과연 미국이 실제로 어느 정도 유럽에 참전할지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평화 시기에 유럽 민족들의 자기주장의 의지가 약해졌다. ‘가장 고귀한 임무’가 국방인 정부조차도 어느 정도 ‘제한되어’ 그 권위를 잃은 것이다.     

드골은 여러 사람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폰 브렌타노 독일 외무장관이 일부 의구심을 피력하자 매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미국 대선 이후 프랑스는 더 이상 현재 형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남아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와의 대화에서 그는 더욱 분명히 말했다. “프랑스는 앞으로 석 달 이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탈퇴할 것입니다.”     

연합국에 큰 불안을 가져다줄 이 변화에 아데나워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유럽은 미국이 필요하며 미국의 고립주의 경향을 강화할 수 있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케네디 대통령 후보의 첫 연설이 상당히 고립주의적인 것으로 들렸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미국식’ 통합에 관한 자기 구상을 제기하였다. “유럽의 발전은 미국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되 유럽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드골의 계획에 관한 독일의 일관된 입장이며, 그 후로도 반복되었고 결국 프랑스·독일 조약의 전문에 명기되었다. 이 마지막 논쟁이 1963년 봄에 지속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아데나워에게 조약 전문의 수용을 강요해야만 했다. 사실 이제는 그리고 그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독일의 특별한 이익을 대변할 사람은 아데나워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드골은 “이 표현이 원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발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전략가답게 버티면서도 당분간 대립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는 심지어 드골이 “근본적으로 옳았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통합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수립될 무렵인 1950년에는 전쟁의 위협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될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했다. 미국이 얼마나 더 오래 유럽의 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는 불확실한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랑부이에성에서의 대담에서 분명해졌다. 동맹 개혁을 주제로 한 6자 회담에 아데나워가 동의한 것은 이 회의가 진행되면 그가 망설이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생각은 특이했다. 1960년 7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체계적인 유럽 협력에 영국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사람은 드골이었다. 물론 단순히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참여하도록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에 참여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아데나워는 자기가 프랑스와 독일의 유기적 협력을 선호하지만, 영국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영국에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의 화합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드골은 이에 동의했다. “영국은 단지 영국일 뿐이며 우리 대륙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여전히 영연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궁극적으로 석탄철강조합만이 제대로 된 초국가적 단체라는 어느 모로 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 말고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개혁 계획에 대하여 별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랑부이에성 회담 내용이 내각과 여당에 분노의 물결을 일으키자 그는 재빨리 그러한 뜻을 철회할 줄 알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우리가 랑부이에성에서 만난 후 몇 주 동안 우리가 일부 사항에서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고 분명히 오해가 있었다.”     

독일 대표단의 불만의 징후는 많은 이가 참여한 최종 회의에서 이미 드러났다. 두 노회한 정치가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외무장관들은 대부분 침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고위 관리들이 자주 제기하는 조심스러운 불만에 따르면 드골은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나 심도 있는 내부 토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쿠브 드 뮈르비에와 같은 장관조차도 드골이 내린 생경한 단독 결정을 계속 접하면서 이를 최대한 적절하게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데나워의 측근으로 이 회의에 참여한 독일 측 인사들조차도 ‘프랑스 굴뚝에서의 대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외무장관과 파리 주재 독일대사가 샤르트르 대성당으로 관광 여행을 떠난 가운데 아데나워 수상이 단독으로 드골과 고위급 정치를 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드골 대통령은 회담 개최자의 이점도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조직’에 관한 논의의 결과를 요약하고 자기 생각대로 논점을 정하는 것이 그의 마음대로 된 것이다.     

시작부터 그리고 특히 9개 항목의 제안서가, 드골에 대해 점점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된 블랑켄호른과 같은 정보에 탁월한 관찰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이 문서의 근본적인 의미는 미래의 유럽 단합의 형태가 연방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점은 책임 있는 정부 수반에게 모이게 되어 있다. 조약의 법에 따라 유럽 정부들이 추진해온 초국가적 해결책이 포기되었다. 드골이 반복해서 요구했던 프랑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이것이 통합에 관련된 참다운 발전에 프랑스 정부가 관심을 갖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물론 이는 매우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가 최종 대담에서 드골의 극단적인 입장을 미묘하지만, 근본적으로 수정했으며, 이는 각서에 반영되었다는 언급도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위원회가 그 권한을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해야 하며, 이를 계약과 활동을 바탕으로 확인되어야만 미래에 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고 또 도출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드골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에게는 핵심 사항에 관한 합의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드골이 분명히 로마조약의 개정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데나워는 자기 패를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그에 반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랑부이에성 회담이 있기 전 몇 주 동안에 존재한 견해차가 잘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신에 곧 다가올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불만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론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평에 구름이 사라진 것을 크게 환영했지만, 아데나워 주변의 측근들은 더 이상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기를 유럽 통합의 수호자로 자처해온 폰 브렌타노 외무장관은 실망하며 동시에 좌절했다. 쾰른 공항에 도착한 직후 그는 친구인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격노해서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는 이제 아데나워가 완전히 드골의 노선을 추종하는 것으로 여겨 절망하게 되었다. 1961년 크로네는 그로부터 더 이상 외무장관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8월 2일, 크로네는 그의 수준에서 볼 때 매우 강력한 서한을 아데나워에게 보냈다. 이는 분명히 폰 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글롭케도 그 서한의 내용에 동의하였다. 크로네는 드골의 구상이 ‘조국들의 유럽’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유럽 차원의 제도를 통해 유럽을 건설하려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기존의 제도가 흔들린다면 “원래 우리가 추진해온 유럽 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드골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 계획에 대해서는 더 큰 불만을 표명했다.     

아데나워는 즉시 답장하며 수습에 나섰다. 크로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체 안건을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합니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유럽에 대해 말한 것이 더 큰 불안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이에 관해 크로네와 더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나 저는 단일 유럽 정부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여러 나라의 유럽인들은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럽 국가를 전체로 통합하는 문제는 좀 더 천천히 다루어야 하며, 무엇보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북부 독일의 관세협약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수상으로서의 권한에 영향을 미치려는 용납할 수 없는 시도에 관한 전형적인 아데나워식의 반론이 이어졌다. “걱정하지 말고 휴가나 즐기십시오.” 이 서한을 보면 그가 다시 한번 모든 측면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물론 맥밀런과 대화할 때는 매우 조심할 것입니다.”     

크로네와 폰 브렌타노만 비판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및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여러 여당 정치인은 이제 더 이상 아데나워의 프랑스 정책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블랑켄호른은 이제 파리에서도 경고를 보냈다. 장 라로이와의 대화를 통하여 드골이 로마조약을 수정하고 평화 시기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통합 최고사령부의 폐지를 들고나온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해체하고 이에 따라 유럽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고약한 것은 드골이 아데나워와의 회담에서 그의 동의를 구했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아데나워는 이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드골에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회담 이후에야 비로소 해명하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데나워 수상의 개인적인 지시에 따라 판 쉐르펜베르크 차관이 파리로 파견되어 쿠브 드 뮈르비에 프랑스 외무장관을 비롯한 다른 프랑스 관리들과 몇 시간 동안 나눈 대화에서 드골과 아데나워 두 정치가가 일주일 전 랑부이에성에서 별로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던 세부적인 내용을 명확히 했다. 이들은 유럽정치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관한 합의를 다시 한번 이룬 것이다. 이 프랑스와 독일이 마련한 구상은 2년간의 집중적인 협상 끝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랑부이에성 회담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 남아있다.     

이 이외의 안건에 대해서는 아데나워가 외교관들에게 지시하여 반대하도록 하였다. 드골과 아데나워가 공식화한 새로운 목표에 따라 로마조약을 어느 정도의 조정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조약의 핵심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에 관한 재협상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 자체가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했다. 독일 측은 계약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세 조직을 합병하여 문제를 우아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유럽의회 의원을 직접선거로 선출하자는 구상은 거부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랑부이에성에서 1961년 독일 총선 이전에 유럽의회 직접선거가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만약 그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국민투표의 제안에 대해서도 기본법이 제한을 받는 헌법 차원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그러나 덜 바람직한 둘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 드골이 아데나워에 대하여 상당히 불쾌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8월 1일 드골 대통령은 쿠브 드 뮈르비에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아데나워 수상의 방문 후에 유럽 조직이라는 쇳덩이가 뜨거울 때이니 서둘러 두드려야 합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이 즉각 신중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정치위원회의 씨앗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를 당장 가동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조직적인 정부 간 협력 계획, 기존의 유럽 공동체의 ‘근본적인 개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6개 국가의 정부 수반이 10월 회담을 가져야 했다. 이탈리아나 베네룩스 국가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10월에 일단 프랑스·독일 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 4개 국가에도 이 협정 체결의 기회를 주면 된다고 하였다. 확실한 아데나워의 대변자인 힐거 판 쉐르펜베르크 차관은 본에서는 로마 조약의 대대적인 개정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밝혔다. 마찬가지로 독일 정부는 평시에도 통합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사령부 조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전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해체되면 연합국들이 서독의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더 나아가 랑부이에성 회담의 회의록 내용에 관한 명확한 설명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토론 후 판 쉐르펜베르크와 블랑켄호른은 드골의 고위 관리들이 독일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을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 드골은 6개월 동안이나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아데나워가 랑부이에성 회담 이후 본에서 맥밀런을 만난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프랑스 외교관들은 독일과 영국의 화해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드골, 맥밀런, 아이젠하워의 3자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아마도 버뮤다에서 개최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오랜 외교 정책 가운데 이 시기만큼이나 모든 것에서 교만, 질투, 복잡한 계산 및 우선 과제 선정의 실패가 이어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공개적으로 서로에 대항하고, 단기적인 연대에 들어가고, 무례하게 일을 추진하고,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인위적으로 일정을 강요하는 것으로 점점 더 동맹의 분위기가 망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동서 긴장이 급속히 악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의심스러운 모든 외교 수단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맥밀런은 아데나워에게 예정된 3국 정상회담에 대해 드골이 그에게 말했는지 물어보며 은근히 뻐겼다. 물론 드골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 또한 모든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데나워도 영국과 유럽의 관계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이야기 했지 않았던가?     

그런데 적어도 ‘뜻밖에 따뜻하게’ 맥밀런을 환대하며 아데나워는 일단 독일·영국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갑자기 아데나워는 유럽의 경제적 분열을 극복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반면에 그는 유럽 연방의 구상이 영국을 훨씬 더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에 정말 유용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기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동서 정상회담 외교를 자주 반대해오다가 마침내 서방 국가 간의 정상회담 외교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드골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할 좋은 핑계를 찾았다. 그래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적인 대화를 최대한 피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드골의 다음 유혹 때까지만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골은 정치 지도자들이란 찬란한 공생을 모색하면서 토론하되 결정은 결국 혼자 내려야한다는 고정된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다. 그는 드골이 촉구 한 9월 말의 3국 정상회담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였다. 이것은 3국 이사회의 구상이 비록 잠정적이기는 해도 미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드골은 또한 독일과 영국에 대해 점점 더 짜증을 내게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앞으로 치고나갔다. 그가 아데나워에게 랑부이에성에서 가장 비밀스럽게 전한 말의 내용을 궁금하다면 1960년 9월 5일 파리에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한 기자회견을 참조해서 보면 된다. 이 기자회견은 실질적인 3국 이사회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잠정적으로 중단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미국은 제4의 핵무기 세력으로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구상을 통해 핵을 공동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유럽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추진한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최고사령관인 로리스 노스태드였다.     

1959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카데나비아에서의 여름휴가를 계기로 코모호수에 있는 스티거 빌라에서 또 다른 대담이 개최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시골 영지를 사랑했다. 스티거 빌라는 코모호수 끝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여기에서 호수의 환상적인 전망과 산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노스태드와 스파크가 대표하였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 만 대동했다. 노스태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점심 식사와 그 이후의 활발한 토론에서 아데나워는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대담 직전에 드골은 군사적 통합의 원칙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충격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던 참이었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여기서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첫째,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여전히 최우선의 관심사임을 미국 측에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잘 전달되었다. 노스태드는 아데나워 수상이 현명한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워싱턴에 보고한 것이다.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10년간 이어진 프랑스·독일 화해의 귀중한 결과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미국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블랑켄호른은 이 중요한 대담 이후에 그 사실을 알아챘다. “아데나워 수상의 은근한 확신, 그리고 조약에 관한 특히 대서양 동맹에 관한 확고한 태도는 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들은 이 4시간의 대화를 마치고 우리 서방 세계의 방어를 위해 새롭고도 든든한 토대를 확보했다는 느낌으로 우리와 작별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드골과도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드골과 직접 또는 공개적으로 맞서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드골이 예민하고 거만한 인물이기에 부정적으로만 반응할 뿐이라면서 말이다. 외교채널을 통해 드골의 지나친 생각에 대한 완곡한 거부 의사를 전하며 동시에 그가 수용할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궁극적으로 모든 견해차가 핵무기와 미사일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는 드골의 불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스파크는 이에 관한 반론을 제기하며 드골을 달래고자 자꾸 새로운 제안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하여 점차 불편해하였다. 핵무기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유럽에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스태드는 이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미국 국민은 그 어떤 국가가 핵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당장은 핵무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미국의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유럽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속으로는 불간섭주의 계획에 대해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주장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노스태드는 제4의 핵 세력으로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1959년 12월 미국 패서디나에서 행한 기조연설에서 이 구상의 몇 가지 기본적인 내용을 전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이 핵탄두의 저장과 배치의 통제에 관한 개혁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듣게 되었다. 핵탄두는 여러 나라에 배치하고 계속해서 미국의 감시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독일 및 이탈리아를 고려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걱정하는 일방적인 핵무기 철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위탁하는 것으로써 배제될 것이었다. 그러면 5개국이 공동으로 핵무기 사용을 결정하는 회의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노스태드가 그렇게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상에서는 여전히 관련 국가의 정부가 거부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핵탄두에 관한 물리적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것이 특히 중요할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파크가 끼어들었다. 그가 보기에 핵무기 사용 통제의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구상이 드골이 자체적 핵 무력을 보유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를 강하게 의심했다.     

그러나 노스태드는 전쟁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일이 가장 잘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실용주의적인 생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지금까지 발전을 이루어왔다는 것이었다. 이 노선에 머물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는 예상할 수 있는 핵전략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일단 핵잠수함 6~8척을 유럽 해역으로 배치하게 된다. 이 잠수함은 폴라리스 미사일 발사에 최적화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보다 더 작은 이동식 육상 기반 폴라리스 미사일 개발도 계획 중이라고 하였다. 1964년부터는 더 많은 미사일을 동맹국들에 배치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핵 문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아이젠하워와 개인적 접촉을 하는 노스태드는 이번 회의 직후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며칠 안에 긍정적인 소식이 올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핵무기 사용 절차에 대해 길게 논의하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노스태드의 제안에 적극적인 동감을 표명하고 10월 랑부이에성에서 가지게 될 드골과의 또 다른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드골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만이 이 조치를 따라야 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드골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 계속 기지를 발휘하여 결단의 순간을 최대한 연기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회의 직후 글롭케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내가 프랑스의 입장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우려를 어느 정도 해소하고 또한 이것을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득하는 일을 잘 해내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으로 핵탄두 사용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노스태드는 내일 워싱턴으로 날아갑니다. 월요일에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우리가 핵탄두 사용에 관한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그에 관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는 제안을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에 매우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한이 보여주는 것처럼 드골만이 미국의 핵 독점을 종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노스태드 계획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3국 이사회의 계획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노스태드가 미국에 귀국하고 며칠 후, 그는 아이젠하워가 코모호숫가에서 진행된 대화의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르면 그가 혐오했던 3국 이사회 수립 계획이 완전히 포기될 수 있었다. 물론 최소한 아이젠하워의 임기 동안에는 말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그 이후 몇 주 동안 중요한 결정을 뒤로 미루고 있음을 알아챘다. 1961년에도 여전히 아데나워는 애버렐 헤르만 이나 딘 애치슨을 만난 자리에서 아이젠하워가 설득력 있는 미국의 제안을 수립하는 데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 케네디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첫 몇 달 동안 아데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무장을 추진한다는 것에 희망을 계속 걸고 있었다. 그는 케네디와의 첫 대면에서도 이를 분명히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그는 워싱턴의 구상이 현재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곧 미국은 한편으로는 핵무기 사용 결정을 단일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과 군축과 장비 통제 협상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정부가 연합국 내에서의 핵확산에 더 강경하게 반대한 마지막 미국 행정부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 늦여름에 드러낸 노스태드의 구상이 매우 중요해졌다. 이 모든 것의 추진력은 어떻게 해서든 드골을 연합국이 추구하는 방향에 함께하도록 이끌려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드골은 그가 보기에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노스태드의 계획에 참여할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또한 드골은 알제리 정책으로 국내에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기에 점점 더 심화하는 국제적 고립에 강력하게 맞선 것이다. 이것은 특히 독일을 자극하는 정책에서 잘 드러났다.     

최근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나쁜 소식을 자주 전달해 온 슈파이델 장군은 9월 23일 아데나워에게 설명할 예정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직 내에서 그는 ‘중부 유럽연합지상군’(LANDCENT)의 최고사령관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덴마크와 스위스 국경 사이의 모든 지상군이 그의 지휘 아래 놓이고, 무엇보다도 독일군이 그의 지휘를 받게 된다. 프랑스 장군은 전통적으로 중부 유럽의 전력을 모은 ‘중부 유럽연합공군’(AFCENT)을 지휘해 왔다. 오랫동안 이 자리는 장 에티엔 발루이가 차지해 왔다. 그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전략의 대략적인 윤곽을 아데나워에게 설명하고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데나워는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발루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프랑스 방어를 위한 최고의 현대적 조직으로 인정하는 프랑스 장성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래서 드골은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중부 유럽연합공군(AFCENT)의 새로운 사령관인 공군 출신 샬레 장군은 이제 전혀 생소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곧 그는 그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앞으로는 그의 직속 부하로서만 일해야 한다고 알린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1961년에도 발생할 뻔한 전쟁의 경우 군대가 독일 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슈파이델을 불러 노스태드에게 이 정황을 즉시 알리고 그런 계획에 단호히 반대하도록 요청했다.     

알제리의 튀니지 국경을 따라 그 유명한 전기 울타리를 건설하도록 했던 모리스 샬레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럽의 국경을 막으려는 놀라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약 30km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나란한 전기 울타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사이에 소련의 붉은 군대의 진군을 막기 위해 핵 지뢰를 설치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독일의 뤼벡이나 브라운슈바이크와 같은 도시가 그 울타리 사이에 위치할 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생각하지 않았거나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슈파이델은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다소 황당한 계획에 관해서도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전진 방어 전략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점점 더 분명해진 것이다. 1961년 3월부터, 곧 하필이면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한 그 달에 2~3만 명의 프랑스군이 마인츠 서쪽으로 철수하여 주로 프랑스 영토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그리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다. 프랑스 군의 무장이 형편없었고 특별히 전투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드골의 전반적인 전략 개념 자체가 문제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아데나워에게 약속한 것과는 달리 그는 프랑스가 실제로 ‘독일에서의 전투’(bataille en Allemagne)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패배하면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 것이기에 말이다. 곧 프랑스를 둘러싼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맥밀런은 1960년 3월 드골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다. “독일은 선봉대가 되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주요 전선입니다. 영국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해로를 지켜야 합니다. 미국은 거대한 예비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프랑스 공군의 대부분을 통합 방공 방어에서 떼어내는 그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 기본적인 구상을 이해한다면 드골이 군사 통합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독일이 독일 주변에서의 전쟁이 매우 중요하다고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것을 우려하였다. 전쟁이 발생하면 독일 방어에 모든 전략을 동원하게 되어 프랑스의 군사력도 여기에 활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군사 조직을 떠나야만 이를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포괄적인 행동 방침은 메스머 국방장관이 1960년 7월 18일 프랑스 의회에 제출한 ‘로이 플랜’을 바탕으로 할 것이었다. 이 기본 방침은 국방 예산의 상당 부분을 ‘핵무기로 무장된 기동타격대’(force de frappe)를 구축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드골의 비판자들은 이것이 새로운 마지노선 구축의 구상으로 보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서유럽 민주주의의 집단 방어 구상과 양립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슈파이델 장군이 떠나자 이날 오전에 세두 프랑스대사가 드골 장군의 손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 서한에는 아데나워가 기꺼이 듣고 싶은 ‘우리 유럽의 연합’(Union de notre Europe)을 강조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이에 관한 근거인 ‘독일과 프랑스의 합의’(un accord de l' Allemagne et de la France)라는 개념도 담겨 있었다. 위대한 사람들이 아첨을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드골은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를 추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아데나워가 “우리 양국이 서로를 특별히 이해하는 데에 앞장서고, 그리고 공동 계획을 수행해야 한다는 이러한 구상을 앞서 주장하는 인물”이라도 다시 한번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는 매우 공허하게 들렸다. 이 서한은 사실 아데나워가 1960년 8월 15일 자 서한에서 요청한 내용에 관한 답신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서한에서 드골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 계획을 포기하고 영국을 배제한 유럽 연방제 구상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 손 편지의 내용은 매우 모호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날 회의의 회의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드골의 손 편지에는 본질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드골이 9월 5일에 한 결정적인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가 8월 15일 자로 보낸 서한에서 요청한 것에 관한 실질적인 답변이 이루어진 것이다.     

슈파이델과 세두가 함께 있던 날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과 상황을 논의했다. 블랑켄호른도 나쁜 소식만 전했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파리의 두 주요 독일 관측자인 블랑켄호른과 슈파이델로부터 드골의 외교 정책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고만 받았다. 물론 서로에 관한 평가가 상호 강화하는 경향이 있고, 아데나워의 방문 이후 두 정상이 가끔 서로 정보를 나누고 있었지만 블랑켄호른과 슈파이델이 전하는 이야기는 분명하였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는 드브레 총리가 블랑켄호른에게 전한 말이다. 이에 따르면 드골이 선호하는 유럽 연방제도 아래에서도 서유럽 방어 문제를 다루는 조직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미군 철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커다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안의 또 다른 작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였다. 그리고 실제로 기존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해체하기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이에 대하여 깊은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블랑켄호른에게 “나는 드골 장군에 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네.”라고 말했다. 신뢰를 조만간 회복할 수는 없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당분간 유럽 차원의 정치 조직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제 프랑스와 독일 대화의 핵심 주제는 오로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였다. 드골의 우정이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냐의 선택 기로에서 아데나워는 망설임 없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택하였다. 이는 어렵지 않았다. 노스태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이제 아이젠하워가 직접 자기 측근과 더불어 어떤 방식으로 연합국 회원들이 핵무기를 사용하도록 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내준다던 아이젠하워의 서한은 도착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다울링 대사에게 서한을 재촉하였다. 드브레 총리가 10월 초에 본을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문제가 그와의 회담의 핵심 주제가 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다울링 대사를 통하여 아데나워는 미국 대통령에게 자기 방식과 드골의 방식이 이제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렸다. 아데나워는 드골이 인간적 차원에서도 실망스럽다는 말을 대사에게 전했다. 2년 전에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여전히 드골의 맘을 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드골이 혼자 자기 길을 가도록 할 요량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의 의견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간절히 필요한 것이 있었다. 곧 발송할 것이라고 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제4의 핵 세력으로 지정한다는 서한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안전망 없이는 체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제 프랑스와의 연줄을 끊어야 한다면 그는 적어도 미국의 서면 약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1960년 늦여름과 가을에 다시 서구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어떤 이유로든 드골에서 멀어지게 되자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에 다가갔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는 영국에 대해 몇 달 동안 다시 좋은 태도를 보였다. 또한 아데나워 총리가 매우 신뢰하는 블랑켄호른은 당연히 6개국 연방제를 성급하게 수립하려는 시도가 유럽의 6개 국가나 7개 국가 사이의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였다.     

드브레 총리와의 협상 직전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미국 대통령의 서한이 마침내 도착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내용이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무장에 관한 긍정적 신호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다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련하여 이 서한에는 명확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곧 군사 통합 없이는 유럽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통합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구현한 인물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제1대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그의 필생의 업적이 드골 때문에 무너지는 원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서한의 이 구절은 드브레와의 대화에서 아주 잘 써먹을 수 있는 주장이었다.     

삼국이사회의 구상이 이제 보류되었다는 확언도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체제 내에서 6개 국가로 구성된 군사 조직도 거부하였다. 9월 5일의 결정적인 기자회견 이후 드골에 관한 전쟁의 북소리가 포토맥에서 울려 퍼졌다. 파리에서 나온 개혁안은 이제 처음부터 의심을 사고 있었다. 대신 아이젠하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평의회에서의 협의를 강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다음 날 도착한 미국 대통령의 서한은 덜 고무적이었다. 그는 앤더슨 재무장관이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곧 독일이 개발 원조에 더 많이 기여하고 미국의 국제 수지 적자 문제에 가시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그 이후 40년 동안 지속된 달러 약세와 국제 수지 적자, 그리고 이와 관련된 부유한 동맹국에 재정적 지원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미국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핵 문제에 관해서는 노스태드의 제안에 관한 추가 검토가 예고되어 있었다.     

드브레가 도착할 때 아데나워는 결국 드골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챘다. 전체 대화는 오로지 드골에게 가능한 한 명확하게 그러한 사실을 전달하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블랑켄호른 대사는 이 방문 전에 프랑스 총리와 프랑스 외무장관 모두에게 아데나워 수상의 불평 사항을 정확히 전달하라는 지시를 아데나워로부터 두 번이나 받았다.     

이제 아데나워만이 드골에 맞선 진영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와 드골의 랑부이에 회담과 9월 5일 드골의 기자회견 이후 본에 있는 행정부 전체 부서는 분기탱천했었다. 폰 브렌타노와 크로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슈트라우쓰, 심지어는 아데나워의 노선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게르스텐마이어까지 모두 아데나워에게 드골의 독자 노선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필이면 소련의 위협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통합이 강화된 서유럽이라는 독일 서방 정책의 두 기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독일 사민당(SPD)도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에게 입장을 확고히 할 것을 주문하였다. 1960년 6월 30일 서독 연방의회에서 베너가 사민당(SPD)에도 이제는 서방 통합이 최우선 과제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 이후, 사민당(SPD)도 더욱 분명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 통합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해온 터였다. 어쨌든 그들은 권위주의자인 드골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아데나워는 드골이 더욱 파괴적인 방식으로만 나오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여론의 분위기를 고려해야 했다.      

드브레는 딱 알맞은 시기에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총리를 매개로 하여 드골 대통령의 면전에서 대고 어려운 진실을 말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본에서는 드브레가 모든 드골주의자 가운데 가장 골수파로 알려져 있었다. 반면 쿠브 드 뮈르비에 프랑스 외무장관은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고 항상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전문 외교관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매우 놀라워할 정도로 드브레는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누면서 냉청할 현실 감각과 깍듯한 예의범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스태드 계획에 드브레가 관심을 가지게 하고 군사 통합의 원칙을 설득해보려던 아데나워 수상의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귀가 꽉 막힌 사람과 예의가 바르게 대화를 나누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여러 정황상 아데나워가 드골을 포기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드브레와 대화는 나누는 중에 드골이 방금 그레노블에서 한 연설의 내용이 담긴 전문이 전달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었다. 그 전문에는 아데나워가 10년 넘게 공을 들여온 것을 단번에 내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우리 국가와 이를 대변하는 정부 외에 다른 유럽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는 프랑스가 “특히 그 국방 문제에서 민족적 특성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프랑스 핵무기를 연합국에 통합하려는 모든 시도가 거부되었다. 1960년 2월 13일 첫 번째 핵실험을 통해 프랑스라는 국가가 핵클럽에 가입한 후 드골은 영구적으로 그 클럽에 머물고 싶어 한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핵 세력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내친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는 이제 드브레가 그의 주군에게 전할 만한 엄청난 말을 할 기회를 기다렸다. ‘서독은 프랑스의 정책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드브레가 드골의 발언을 크게 문제 삼지 말라고 하자 아데나워는 이 상황에서 더 이상 토론해봐야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논란이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드브레의 침착한 태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에도 이 대화에 참석한 이들은 아데나워가 이 기회에 어떻게 프랑스를 대했는지에 대하여 뒷이야기를 할 것이었다.     

샤움부르크궁에서 열릴 만찬이 1시간 연기되었다. 그러나 드브레는 전적으로 위대한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찬사를 기반으로 한 저녁 연설로 만찬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칭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여전히 팽팽했다. 만찬 이후 독일과 프랑스 인사들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은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느껴 그다음 날 드브레에게 친절한 작별 인사와 더불어 방문 기념으로 개인적인 헌사가 담긴 사진을 선물하였다.     

적어도 유럽 문제에 대해 약간의 진전은 이루어졌다. 아데나워가 향후 독일 유럽 정책의 초점은 로마 조약에 있을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조직 차원의 협력에 관한 근본적인 논의를 위해 12월에 6개국 총리들을 파리로 초청하겠다는 프랑스의 계획에는 동의했다. 이 회의는 결국 1961년 2월에 가서야 비로서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로 드골은 그가 원하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었다.     

드브레와의 협상은 본과 파리 사이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데나워는 드브레에게 자기 관점을 재차 강조한 서한을 드골에게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현재 세계는 다시 ‘강화된 냉전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구조적 변화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의 6대 국가 조직이라는 구상은 중복적인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독일은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미국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서서히 영국을 유럽에 끌어들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드골은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가 미국과 영국을 택했다는 사실을 탄식하였다. 그래서 오래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악감정이 지속된 것이다. 이 감정은 1961년 2월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수상이 회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자기 강경 노선을 대체로 견지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드골은 더 이상 ‘연방제’라는 용어를 고집하지 않고 ‘조직적 협력’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였다. 유럽경제공동체(EEC) 건설이 계속 추진될 것이 예상되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보호주의적 농업정책을 위해 이에 관한 반대가 더 노골화되었다. 국민투표에 관한 구상이 포기되지 않았지만, 드골이 드러내놓고 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6개국의 긴밀한 군사 협력에 관한 이야기도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드골 장군은 아데나워가 선호하는 실용주의가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는 심지어 각 국가 정부 간의 협력을 그와 나란하게 비록 구속력은 없으나 각 국가의 국회에서의 병행 논의를 통해 뒷받침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 가을에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독일, 미국, 영국이 보기에 드골은 1960년 가을에 전쟁을 벌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블랑켄호른을 불러내어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로 보내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데나워 수상이 이제 전적으로 미국으로 돌아섰다는 분명한 신호가 될 수 있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게다가 두 대선 후보, 곧 닉슨과 케네디 가운데 누가 이길지를 어찌 알겠는가? 어쩌면 아데나워는 다시 곧 드골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가 1960년 가을 서독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회의적이었는가는 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짧은 비망록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기록을 통하여 그는 조용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기본적인 사실로 요약해보고자 하였다. 1960년 5월 브란트와 암렌, 그리고 아이젠하워와 맥밀런은 베를린을 자유 도시로 만드는 구상을 옹호했으나 드골만이 반대하였다. 미국 대선 이후에도 케네디나 닉슨 모두 자유 도시에 찬성할 것이며 드골만이 끝까지 반대할 수도 있다. 그는 여전히 서베를린에 자체 민병대가 없는 가운데 동베를린에는 공장 전투단*이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베를린을 둘러싼 핵전쟁은 불가능하며 재래전도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미군과 독일군만을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 공장 전투단 [Betriebskampfgruppen, 역자주 – 일종의 노동자 계급 투쟁단체인 동독의 준군사조직. 이는 동독이 프롤레타리아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것을 군사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음]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베를린을 군축 계획과 연결. 또는 ㉡ 베를린과 중립 지역 + 베를린 연결 (투표 10년 후) 또는 ㉢ ㉠안과 ㉡안의 연계.”     

그러나 당분간 아데나워는 확실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노선을 택하고 있었다. 공화당 후보의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아데나워는 핵 문제에 관해 어떤 결과가 신속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짧은 간격으로 두 번 더 개인적인 서한을 보냈다. 첫 번째 서한에서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존재하는 동안 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할 것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핵무기가 없는 독일군은 소련군에 맞서 그저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아이젠하워 정부가 마지막 순간에 포괄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랐다.     

또한 이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베를린으로 촉발될 전쟁에 관한 그의 우려를 나타냈다.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흐루쇼프가 크롤 대사에게 내년에 독일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는 1월이나 2월에 정상회담을 할 생각하고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3월이나 4월까지만 기다릴 것으로 보였다.     

특히 그는 1960년 8월 자의 <보위 보고서>에 대해 우려하였다. 이 보고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다자간 해상 핵전력 구축을 권장하였다. 미국 대선 며칠 전,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 버지스에게 이 보고서에 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여기에는 최전선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제안이 포함되어 있다고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의 대선 상황에 대하여 잘 모르는 가운데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가 12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 직접 참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960년 11월 8일 케네디의 선거 승리는 이러한 모든 숙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딜런 미국 국무장관이 선거 후 본을 방문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전력과 전술 핵무기 문제를 다시 한번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아데나워는 해상 기반의 다국적 핵억지력 구상이 이미 명확하게 구체화 되기 시작했지만 이에 대해서 한 번도 긍정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참여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이로 인한 정규군의 축소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임기가 마무리되던 미국 행정부는 또한 기존의 핵무기고를 축소하지 않는데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동맹국들에 이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무기 사용 명령에 관한 최종 규정은 아직 불분명했다.     

기존의 미국 행정부는 구속력이 없는 의사 표현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실 이 문제가 아데나워에게 매우 중요하기에 아데나워는 딜론과의 대화 이후에 아이젠하워에게 두 개의 서한을 보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전력에 관한 계획을 1960년 12월 안에 밝힐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미국 대통령이 파리회담에 참석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아데나워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핵전력에 관한 제안으로 프랑스가 자체적인 핵무기에 관한 욕구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은 순진한 소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데나워 자신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양다리 걸치는 인물은 아데나워 자신이었다. 그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유인해 내려는 드골의 설득력에 아데나워는 단호히 맞섰다. 그러나 미국 대선이 공화당 행정부를 밀어냈다. 사실 미국의 공화당 정부와 더불어 어쩌면 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핵무기 참여 구상을 제시할 개념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 정부가 정책을 다시 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모든 것이 다시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드골과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누는 것 말고 아데나워에게 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만남은 1961년 2월이 되서야 이루어졌다. 11월과 12월에 해마다 아데나워를 괴롭힌 가을 독감에 다시 걸린 것이다. 본 정가의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자면 이 84세의 이 인물은 자기 건강을 노리는 과로에 아직은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라도 사소한 이유에서 그는 번쩍이는 목성 모양의 램프가 타오르던 포펜스도르퍼 알레의 본 시민 연합 강당에서 열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민당(CDU) 행사에서 작열하는 조명 아래 거의 2시간 동안 서 있었다. 이 행사로 그의 약한 기관지가 공격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거의 3주에 걸쳐 진행된 이 병은 당분간 드골과 6개국 공동체의 정부 수반들과의 만남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초읽기가 시작되었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1961년은 나쁜 해가 될 조짐이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은 이제 새로운 미국 행정부가 보낼 신호에 달려 있었다.  

   

지금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으면 주변의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린다!”


1962년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 미국의 허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의 농담을 은근히 즐기는 마음으로 전달했다. 미국 상원의원의 6년 임기와 관련하여 험프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처음 2년 동안 우리는 국가 지도자가 됩니다. 그 다음 2년 동안 우리는 정치인이 되고 나머지 2년 동안은 선전·선동가가 됩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우리 독일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독일 의외에서는 4년의 마다 선거를 치릅니다.” 험프리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였다. “앞에서 말한 처음 2년은 잊으세요.”     

위대한 유럽의 정치 지도자로서 아데나워가 국내 정치에서 살아남은 방식을 이 말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확실히 아데나워 수상은 국내 정치의 장기적인 추세에 관한 감각을 절대로 잃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개별적인 사안에 관한 결정의 장기적인 영향에 관한 그의 성찰의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물론 이와 동시에 그는 대부분의 정치 마당에서 매우 보수적인 근본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쩌면 해로울 수도 있는 것이 일상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기회와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 그는 국가 지도자가 아닌 정치가로서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러나 지방선거나 총선이 1년 반 또는 심지어 1년 안에 있다면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선전·선동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이 연방의회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4년 동안에도 잘 관찰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국내 정치에서도 확고한 의지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측근들이 그가 대부분 시간을 외교 정책에 바치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서 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매주 내각, 기민당(CDU) 당 대표단, 여러 연정 협상 또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결국 그가 단호한 결단력으로 국내 정치의 끈을 풀었다 엮었다 하며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통제 수단은 내각과 여당, 그리고 기민당(CDU) 당대표라는 직위였다. 그는 글롭케 국무장관의 도움으로 전통적 방식으로 내각을 통제했다. 그러나 여당을 통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데나워는 사심 없는 하인리히 크로네의 도움으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국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휴가나 독감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일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였다. 그러한 때 그는 글롭케 국무장관에게 급한 메모를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 조직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되풀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실제로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귀하에게 그 신뢰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문들을 받아 봅니다. 외무부로부터 우리 대사관의 소식을 전달받습니다. 때로는 흥미롭지만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보고입니다. 나는 국내외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화와 맥락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부서가 필요합니다. 특히 신문과 대사관을 통한 것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말입니다.

국내 정치 분야와 관련하여 나는 우리 경제의 발전에 관한 연방통계청과 경제부에서 발표한 통계 수치가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경제적 관점에서 나온 정보가 필요합니다.     

- 규모의 경제로의 이동. 꼭 필요한가요?

- 중산층은 어떻게 되나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중산층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 경제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여기에는 사민당(SPD)에 관한 노조의 영향도 포함됩니다.

-농업의 발전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사회정책 분야에서도 노동부가 추구하는 사회정책 방향에서의 이전 사회정책의 결과에 관련된 일련의 근본적인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극방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국방부 장관이 갑작스럽게 제출한 국방에 관련된 문제에 관한 제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아마도 ‘자문기관’(Gehirn-trust)이라는 단어가 내게 필요한 것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는 심층적인 흐름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보아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외교 정책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더 할지도 모릅니다.”     

글롭케는 아데나워의 그러한 근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더라도 사실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대내외 정치 상황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건국 초기에는 견딜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통제 기제도 때로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정당이 대부분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연방 차원의 연정 문제와 같은 근본적인 결정에 관해서는 누구도 1961년까지는 아데나워 수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방 정부의 연정 결정 문제는 전혀 달랐다. 아데나워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방과 지방 정부 관계에 대하여 정말로 논란이 되는 문제 (예를 들어 TV 분쟁, 소득세의 주 정부 몫 분배)에 관해서는 기민당(CDU) 소속 지방 정부 수장들이 점점 더 오만불손한 권위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은 규율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극명한 견해차가 드러나면 일부 주지사는 아예 회의에 참석하지 않거나 당대표에게 한 약속을 별문제 없다는 듯이 깨곤 하였다. 이는 아데나워 시대가 저물 때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키싱거, 알트마이어, 마이어스와 같은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들이 더욱 당당하게 중앙당의 노선과 결별하고 나섰다.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늘 당 대표단의 ‘당내 무질서’에 관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데나워는 1959년 가을 기민당(CDU) 중앙당 당대표에게 “우리에게 중앙당이 있기나 한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이 수사학적인 질문에 관한 당대표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제 생각에는 중앙당은 없습니다.” 중앙당 당 대표단은 주 정부 차원의 연합이나 주의회의 지방당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방 선거법은 여당이나 심지어 중앙당 대표단이 지방당의 인사 간섭을 금지하고 있었다.     

사민당(SPD)을 제외하면서 연정을 구성하겠다는 아데나워의 결심은 1961년 총선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 당시 사람들이나 그 이후의 관찰자들도 아데나워가 의도적으로 사민당(SPD)을 선전·선동의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내외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주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사실 그는 그중심에 서서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외교 정책 측면에서 그는 사민당(SPD) 다수가 독일의 중립화 노선을 걷고 있다고 보았다. 사민당(SPD)이 독일군을 포함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합국 핵무장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기에, 아데나워는 그들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반대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사민당(SPD)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의 사고를 포기했다는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민당(SPD) 당원들은 그들의 주요 상품을 진열장에서 꺼내 가게 안에 다시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제 다른 해가 없는 것들을 진열장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에 진열장에 전시했던 것은 여전히 상점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1963년 여름 헤르베르트 베너와의 연정이 너무나 잘 이루어진 지 겨우 몇 달 만에 그는 ‘앞줄에 앉아 있는 사회민주주의 인사들’의 정치와 사민당(SPD) 내부의 사악한 흐름과 독일금속노조 의장인 오토 브레너를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적 노조 파벌의 고약한 성향을 정확히 구분했다.     

사실 고데스베르크 강령 발표 이후 차별화가 요구되기는 했다. 오토 슈마허-헬몬트 기자는 올렌하우어가 이제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를로 슈미트도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민당(SPD)의 경제 전문가인 하인리히 다이스트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수입이 250,000마르크의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죽은 사민당(SPD) 당원이 가장 착한 사람들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사민당(SPD) 당원과 오늘날의 사민당(SPD) 당원을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때 그들은 품위 있고 정직한 사람들로 대부분이 노조 조합원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 아데나워는 자기의 맞수로 등장한 베를린 시장인 빌리 브란트를 노골적으로 혐오하였다. 여기에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것이 더 많았다. 브란트는 당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 가운데 가장 우파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데나워의 관점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다. 아데나워 수상의 인생 교훈에 따르자면 위험한 상대는 최대한 폄하하고 멸시해야 했다. 반대로 올렌하우어와 같이 무탈한 인물은 무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도전자로 확실시된 브란트에 대하여 계속 헐뜯고 다녔다. 이른바 죽은 사민주의자인 에른스트 로이터와는 달리 브란트는 베를린에서 아직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브란트는 자기가 사민당(SPD)을 대변하고 연설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을 보여주었다고도 하였다.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에서 브란트가 수상 후보가 되는 것에 관해 첫 번째로 작성한 내부적 입장문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특유의 독화살을 날렸다. “브란트, 이른바 ‘프람’(Frahm)이라는 브란트”에게 말이다. 그러나 그 독화살이 대선 기간에는 오히려 아데나워 자신을 다치게 했다. 《다스 도이체 보르트》에 실린 글을 근거로 아데나워는 브란트가 전쟁 중 노르웨이에서의 활동과 민주적 사상을 옹호한 공로로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상트 올라프 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확실히 랑게 주지사는 서방을 지향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실수였다. “노르웨이에는 나치가 아닌 독일군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브란트는 나치에 맞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 브란트는 실제로 프람이라고 불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 따르면 그는 노르웨이 군인이 된 후 독일 포로로 잡혔으나 독일은 그를 관대하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최소 3년 동안 노르웨이 군 장교로 복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군대는 베를린이 끔찍한 곤경에 처했을 때 베를린에 진주한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브란트는 자신이 베를린 시민이며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관한 사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데나워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브란트가 사민당(SPD)의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이고, 사민당(SPD)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다음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 사민당(SPD)에 가입한 베너가 있고, 브란트도 어쨌든 노르웨이 군대에서 일했음에도 사람들이 개의치 않고 있다면, 독일 민족의 민족의식과 자부심이 부족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당내에서만 돌았던 이 성명은, 아데나워의 민족의식과 좌파 이민자와의 관계, 곧 브란트가 노르웨이에서 보낸 시절을 비난하는 정치 선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에 관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아데나워가 “이제 브란트에 관한 해명을 어찌해야 할지에 대하여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브란트의 방탕한 사생활에 관한 정보도 확보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아데나워는 청교도적인 편견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데나워라는 노인이 자신보다 몇 세대나 어린 위대한 미래를 앞둔 찬란히 빛나는 남자들에게 질투를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일과 베를린 정책과 관련된 현직 베를린 시장을 향한 아데나워의 비판은 이해하기 쉽다. 브란트가 서베를린을 서독 연방에 완전히 통합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것을 두고 아데나워는 실수로 여겼다. 나중에 총선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또한 독일제국 시절에 52명의 전쟁반대자가 ‘최고회담’을 개최하여 독일 전체에 관한 평화 조약을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한 인물이 브란트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런 소식을 읽게 되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잘난 브란트 선생’이 “무기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 완전히 구식이 되어버린 ‘라파츠키 플랜’을 다시 들고 나왔습니다다.”라는 비난도 이어갔다. “외교 정책의 무능함에 관하여 정리해 보면, 서방 강대국과 소련과의 협상의 첫 단계에서 흐루쇼프와 그의 국민에게 즐거운 음악을 선사한 브란트라는 분이 떠오를 것입니다.”     

또한 아데나워 베를린의 민병대 구성 문제로도 브란트와 베를린 인사들의 무대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60년 초반 이후 갑자기 수만 명의 무장 직장예비군이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쏟아져 들어와 사태를 종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증대되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도, 브란트는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1960년 5월 사건에 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확신이 담겨있었다. “민병대를 구성하라는 조언을 베를린 의회가 따르지 않고, 연방정부 앞에서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베를린에서 자발적으로 [민병대가 되겠다고] 신고한 건수만 73건이다(!)”     

그러나 1961년까지 과거의 어두운 바다에서 노를 젓고 있던 사민당(SPD)을 보면서 아데나워는 그 원인이 무엇보다도 헤르베르트 베너가 사민당(SPD)에서 결정적인 정치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1960년 6월 30일의 유명한 연설에서, 베너는 많은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사민당(SPD)이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을 따르라고 한 것으로 보였다. 이에 대해 아데나워는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비꼬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치한 장난입니다. 전체적인 표현 방식, 그가 사용한 언들, 그의 침묵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공산주의적 변증법 그 자체일 뿐입니다.”     

물론 아데나워는 정치인으로서의 베너를 존경했다. 그가 자주 게으르다고 비판하던 기민당(CDU) 지도부 앞에서 그는 베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민당(SPD)의 가장 강력한 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열심히 일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또한 가장 많은 지식과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급진적인 인물입니다.”     

1958년과 그다음 해에도 그는 베너가 여전히 노조의 급진파와 연계된 것을 보았다. 보클러와 프라이탁과 같은 온건한 노조 지도자들의 시대는 먼 과거가 되었다. 이제 노조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적 지원군 또는 돌격대’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반핵 운동의 흐름이 이어질 때도 이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특히 금속산업노조를 의심하였다. 아데나워는 1962년 초, 베를린을 둘러싼 긴장이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 금속산업노조가 비상조치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것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금속산업노조의 기관지에 나온 ‘전쟁광이 얼마나 더 입법을 통제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이는 명백한 국가반역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거의 50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조직이 “우리 외교가 문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시기에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독”이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는 적어도 독일 정치가들 가운데 아데나워만큼이나 급진적 노조를 두려워하고 주저 없이 그들의 영향력을 제압하고자 했던 이는 없었다. 이 시기에 내각에서 노동자 단체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노동법, 주택 건설 또는 사회 정책 규정을 제안하면 아데나워는 늘 이를 저지하는 편에 서고자 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노조의 민주화 요구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전직 시장으로서 그는 많은 경우에 노조 소속 간부들의 집단 투표가 노조 총회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개별 근로자들이 노조 가입의 압력을 얼마나 받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강경하게 말했다. “노조의 비민주적 특성이 소수를 무시한다고 규정한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모두가 여기에 동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데나워를 바르첼, 게르스텐마이어, 카처도 설득할 수가 없었다.     

당 대표단의 대책 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지게 되면 아데나워가 노조 반대 파벌의 대변자가 되었다. “우리 중 누가 노조는 모든 노동자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인 생각을 한다고 여겨진 테오 블랑크는 과도한 대립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신중하게 자기 견해를 밝혔다. “아마 저도 이제는 수상과 의견을 같이할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본능적으로 노조가 적대적인 조직이라고 여겼다. 그의 당정책 차원에서의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전술적 차원에서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여전히 커다란 단체의 힘, 특히 노조의 힘을 비판하는 소리를 되풀이하여 들었다. 아데나워는 “사회적 협력자들은 나라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경고의 말을 1962년 1월 내각회의에서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1957년 이후 자민당(FDP)의 변화를 다소 덜 비판적으로 지켜보았다. 1960년 여름 이후로 사태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그해 8월 오토 슈마허-헬몬트가 아데나워를 만나러 와서 자기 친구 에리히 멘데가 6개월 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목소리를 낸 이후 이제는 연정 구성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했다. “그의 당(자민당(FDP))은 1961년 총선 이후 기민당(CDU)과의 연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는 또한 브란트가 총리 후보가 되는 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민당(FDP)에 관한 그의 의중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멘데 주변의 인물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데나워에게 하였다. 곧 양당 체제를 지지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강력하고 건전한 자민당(FDP)’을 ‘국가 정치적 이유로’ 지지한다고 한 것이었다. 1956년의 일은? 자기 오판이었다는 것이다!     

기민당(CDU)의 좌파 파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복지국가’에 맞서 싸우는 데 찬성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슈마허-헬몰드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그 말을 듣고 ‘다소 선하고 깊은 생각을 하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요?”라고 말이다.     

뒤셀도르프에 있던 청년튀르크당*에 관한 불신조차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작되어 끝까지 궁극적인 연정 공약, 특히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에서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의 확실한 노선 수정이 요청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서로 잘 지내고 있던 프란츠 마이어스와 빌리 바이어는 ‘과거 이야기’로 이제 선을 그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볼프강 되링도 ‘변했다.’     

* 청년튀르크당 [Jungtürken, 역자주 - 19세기 말부터 터기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정치 운동 단체. 자유주의 개혁과 입헌 국가 수립을 위하여 체계적인 정치, 군사, 경제 현대화로 오스만 제국의 강화를 추구. 이들은 초기부터 독일 사민당(SPD)과 긴밀한 접촉을 한 역사가 있음]     

그러나 1961년 8월 총선 직전 아데나워는 하노버에서 열린 자민당(FDP)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다시 깜짝 놀랐다. 먼저 되링이 독일의 현상 유지를 위한 내외부의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반대하며 보다 적극적인 독일 정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사실 아데나워 수상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되링이 포괄적인 통제 군축을 위한 차기 정부의 노력과 관련하여서 한 발언이다. “포괄적 통제 군축은 오로지 성공적인 지역적인 부분 군축이 선행되어야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최소한의 상호 신뢰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유럽 지역은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소총의 사격 범위 안에서 동서의 양 진영의 군대가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 여름에 다시 자민련 세력 가운데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새로운 연정을 이루려는 의지가 확고함을 아데나워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트로싱겐 출신의 한스 렌츠 자민당(FDP) 부대표였다. 유감스럽게도 ‘확신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에발트 부허를 들어 볼 수 있다. 빌리 라데마허 의원이나 지민당·독일인민당(FDP/DVP)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당 의장인 폴브강 하우쓰만도 있었다. 하우쓰만은 1년 후인 1961년 4월 3일에 에리히 멘데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정 문제에서 유권자들에게 사민당(SPD)만으로는 연정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무조건 기민당(CDU)에 가입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석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당의 관심사입니다. 유권자들이 무조건 기민당(CDU)에 목을 매도록 하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또한 하우쓰만은 9월 2일, 곧 총선 직전에 뒤셀도르프의 젊은터키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히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으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공격하며 6월 30일에 게르스텐마이어가 발표한 성명만이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위한 가능한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자민당(FDP) 중앙당 원내대표인 칼-헤르만 플라흐는 일련의 확신이 없는 무리에 합류했다. 슈마허-헬몰트가 아데나워 편에 선지 한 달이 지난 다음, 그는 당 대표단에 ‘기회주의적으로 함께 싸우거나 두 주요 정당을 강력히 공격하면서 선거를 치르는 것’을 제안하였다. 현재의 선거 상황과 관련하여 그는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년에 아데나워의 육체적 건강이 어찌 될지 아직은 모르기에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그런데도고 아데나워는 토마스 델러와도 잘해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민당(FDP)이 델러를 연방의회 부의장으로 추천했을 때 아데나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에리히 멘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아데나워는 그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첩한 사람이라고 신중하게 말하였다. 그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너무 많은 인터뷰나 하고 있어, 과연 상황이 어려울 때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오랫동안 이러한 평가를 고수했으며, 특히 멘데는 좋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강인함과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은 신중을 기했다. 몇 주일 후에 그는 당 대표단에 이런저런 접촉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래서 자민당(FDP)은 믿을 수 없는 매우 불확실한 상대입니다.”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고 해도 안전망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든든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양당의 화해에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적어도 경제계의 재정 후원자들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었을 때 아데나워는 ‘탈이데올로기’의 구호가 확립된 시대적 추세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 자신도 세계관의 ‘유연화’를 반대하던 하인리히 크로네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정당 간의 차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정당의 의미도 줄어들고 있다.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은 더 이상 정치적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다. 서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현실 문제에서 말이다. 그리고 좀 더 관대해지고 있다.” 크로네의 관점에서 이는 주로 사민당(SPD)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관찰은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세계관의 대립이 약화하는 과정 어디쯤 서 있는가? 그를 잘 아는 사람은 그를 확고한 실용주의자로 여기고 있었고, 1961년과 1962년의 연정 협상이 증명하듯이 그는 시대의 징표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가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사민당(SPD)과의 대립을 더욱 드러냈다. 그의 가슴 안에는 두 영혼이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는 세계관의 파벌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기회주의적인 권력 유지가 다른 하나인 것이다.     

아데나워가 정확히 파악한 대로 세계관의 기반의 침식은 기민당(CDU)만이 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1962년 5월, 곧 아데나워 총리의 시대가 저물 무렵 기민당(CDU) 당 대표단은 라이너 브라체가 작성한 포괄적인 제안서를 논의했다! 그 제안서의 제목은 ‘기민당(CDU)의 현재와 미래의 과제에 관한 지적, 사회적 구상에 관한 연구’였다. 브라첼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민주주의 정치의 세계관적 토대를 다루었다. 아데나워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은 점점 더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기독교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붕괴 이후의 곤경은 광범위한 물질적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형성된 의식은 “정말 끔찍한 것입니다. 이에 우리도 짓밟힐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교회 분야에서 전개된 사태였다. 아데나워는 종종 당 대표단 앞에서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했다. 아데나워의 분석에 따르면 개신교 교회는 분명히 기민당(CDU)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충격적인 서한에서 아스무센 개신교 총회장은 개신교 교회의 지도자들이 ‘증오까지는 아니어도 기민당(CDU)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자신이 기민당(CDU) 당원임을 공개적으로 밝혀 개신교 유권자들에게 신호를 보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독일개신교연합회(EKD)의 경고에 반박했다. 당 대표단에서 그는 개신교 교회가 기민당(CDU)을 계속 지지하도록 하는 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가톨릭 분야에서도 비슷한 충격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57년 기민당(CDU)이 총선에서 승리하자마자 사민당(SPD)은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가톨릭 아카데미의 새 이사로 임명된 가톨릭 고위성직자인 포스터를 전체 토론에 초대하였다. 막 총선에서 패배한 사민당(SPD) 지도부는 마침내 그 당의 역사에서 교회에 반대하는 전통과 거리를 둘 좋은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 제제2차 바티칸 공의회 [Vatican II, 역자주 -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바티칸 시국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8~12주에 걸쳐 4차 회기 동안 진행됨. 이 공의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진보적인 교회 개혁 대책이 마련됨. 라틴어로만 진행되던 전통적인 미사 예식과 결별하고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볼 수 있게 됨. 또한 유대교, 이슬람교와의 적대관계도 종식됨.]     

아데나워는 이 토론을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주시하였다. 개혁주의자인 뮌헨의 되프 너 대주교를 제외한 모든 독일 주교는 이 대담에 대해 내부적으로 반대를 표명했지만, 어찌 되었든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순전히 ‘정당 정치적 함정’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게르스텐마이어와 다시 한번 논쟁을 벌였다. 게르스텐마이어는 단지 ‘교회가 정치보다는 선교에 더 유념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민당(CDU)이 이를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가톨릭 주교들에게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우리 당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기독교 기초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 맥락에서 사유재산 문제를 거론했다. 기독교의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사적 자유였다. 그런데 이제 뮌헨에서는 사회화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사민당(SPD)은 임금 정책을 통해 이에 다가갈 요량이었다. 지나친 임금 정책으로 광산과 제철소의 수익성이 떨어지면 그다음 단계가 국유화가 될 것이었다. 먼저 석탄과 철강 산업, 그다음은 화학 산업, 원자력 산업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가 전권을 장악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노조와 국가 관료들만 보게 될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영역에서 그들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무모함으로, 우리가 금세기에 기독교 덕목의 주요 업적, 곧 국가의 전능함에 맞서는 개인의 사적 자유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자유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분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설득력이 있었다. 이는 1958년의 아데나워 수상이 이미 오래전인 1946년과 1949년에 기민당(CDU)이 보여준 영웅적 시기와 마찬가지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해에 모두 그는 기독교의 메시지에서 사적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직접 도출해 낸 바가 있다.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노동조합, 사민당(SPD), 좌파 가톨릭이 그의 주적이었다. 세계관의 커다란 변화에 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닌 아데나워는 이제 가톨릭 교회 내의 사회주의적 집단의 등장을 인식하고, 10년 전과 같이 근본주의적 강경함으로 맞선 것이다.     

1958년 10월 비오 12세 교황을 이은 요한 23세 교황이 매우 걱정스러운 인물이었다. 교회의 최고 수장이 좌경화한다면 독일 기민당(CDU)과 이탈리아 기민당(CDU)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속으로 근심했다. 이는 경제 정책과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티칸이 지금까지 교착 상태에 있던 동유럽 가톨릭 교구들의 경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어떻게 해서든지 비오 12세 교황을 개인 알현하려고 애쓴 것처럼 1960년 1월에도 요한 23세 교황의 개인 알현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데나워 개인적으로 이는 매우 우울한 경험이었다. 아데나워는 새로운 의전 절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교황의 개인 집무실은 개축되어 더 커졌다. 비오 12세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해졌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은 내 의자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금박 대리석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23세 교황은 매우 친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대화가 어떻게 풀려나갔는지에 대해 다음과 우울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매우 말이 많았는데 내게는 노인의 수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좌절했습니다.” 아데나워 수상이 공산주의에 관하여 논하려고 하자 요한 23세는 재빨리 타르디니 추기경에게 말을 돌렸다. 그런 다음 다른 참석자들이 배석하게 되었다. 교황은 다시 한번 매우 상냥한 목소리로 1페이지 반 길이의 성명을 읽어나갔다. 아데나워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가 그 성명에서 독일 분단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한 것에 대하여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나는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몇 마디를 하였다. 곧 독일은 동유럽의 압력에 저항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이 발언을 신중하게 준비한 것이고 비오 12세의 성명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짜증은 계속되었다. 만찬에서 교황은 자기 수행원을 아데나워에게 보내 그의 발언이 언론에 공개돼도 좋은지 물었다. 아데나워의 답변은 간단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의 발언은 바티칸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 삭제되었다. 이에 관한 아데나워 수상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이전의 비오 12세 교황 방문을 생각해 보니 이번의 일로 더욱 우울해졌다. 그러나 나는 교황이 우리, 특히 나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3년 후 아데나워는 맥나마라에게 이 교황 알현 이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아데나워 수상의 마지막 수년간 외교 정책 고문이었던 호르스트 오스터헬트는 아데나워가 1963년 드마제리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들었다. “나는 비오 12세를 알고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요한 23세는 재앙이었습니다.”     

교황 알현에는 후유증이 있었다. 1960년 여름, 뮌헨에서 가톨릭 ‘세계성체대회’가 열린 것이다. 벤델 추기경을 대신하여 예수회의 고위성직자인 폰 타텐바흐가 이 성체대회 사무총장으로 본에 왔다. 사람들이 교황의 독일 방문을 꺼린다는 소문이 바티칸에서 돌았다. 하인리히 크로네에게서 이미 이 이야기를 들은 폰 타텐바흐는 아데나워 수상에게도 직접 같은 말을 들었다. 아데나워는 교황 알현 때 교황이 독일 분단을 언급하지 않은 일을 언급하며 교황이 독일을 방문하면 “우리는 그가 세계성체대회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처한 특별한 어려움, 공산주의 치하의 1,700만 명 동독 주민에 대한 억압과 자유의 박탈에 대하여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교황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독일 국민은 실망하고 그의 명성에 누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곧 교황이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다면 세계성체대회에 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폴란드도 암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방문에서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아데나워가 중요하게 여기는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에 관한 문제에 관한 바티칸의 노선 변경의 암시는 마침 미국과 영국과도 관계가 소원해진 아데나워에게 타격이 되었다. 그의 고립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한 가톨릭 교회의 국내 정치에 관한 견해차와도 관련된 사안이었다. 독일주교회의 의장인 풀다교구장 프랑스 추기경은 연방 텔레비전 방송국 수립에 관한 아데나워의 계획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분명히 교회는 상업 텔레비전의 사회도덕에 관한 부정적 영향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교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것이다. 심지어 신앙심이 투철한 하인리히 크로네조차 불평이 많았다. 곧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 수립 계획에 반대하는 지방 정부의 ‘기민당(CDU)·사민당(SPD) 연정’은 이제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보호막의 도움조차 얻게 되었다는 것이었다.53     

여기에 더해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 당시 주교, 가톨릭 협회, 그리고 당연히 노조는 철강 산업 분야 근로자들의 주일 휴식 문제에 대해 산업계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여기에서도 뭔가 결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주교들은 점점 더 기민당(CDU)의 자유주의 경향을 비판하고 나섰다. 가톨릭교회는 특히 연방의회의 함부르크 기민당(CDU) 출신이자 출판인인 게르트 부체리우스가 텔레비전의 상업화를 강화하는 계획의 주동자라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부체리우스는 《슈테른》 주간지의 편집인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잡지는 정기적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을 조롱해왔다. 게다가 부체리우스는 개신교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강력하게 밀고 있는 기민당(CDU)의 자유주의파에 속했다. 가톨릭의 불만은 또한 자유주의자인 에르하르트가 기민당(CDU)의 문화 정책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우려에서도 나오는 것이었다.     

개별 문제를 넘어서, 급속히 퍼지는 유물론과 복지사회의 쾌락주의에 대한 가톨릭계의 비판은, 보수주의자들과 가톨릭 지역의 좌파 진영 모두에 의해 명료하게 제기되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전반적인 부활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데나워는 자기가 갈등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 당에서 정신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가 하필 국내 정치 및 외교 정책에 관한 전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생각에 대하여 보수적인 가톨릭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지원을 바라는 때 교회가 일련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기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기민당(CDU)의 초교파주의도 문제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개신교 파벌이 교회와 밀착된 가톨릭 신자들과 대립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가 생각하듯이 가톨릭의 성직주의는 교회 내의 진보 진영이나 보수 진영이나 차이가 없었다. 이미 극복된 것처럼 여겨진 문제가 이제 다시 대두되었다. 본의 관료 가운데 가톨릭 신자 비율이 여전히 낮은 이유는 무일까? 1961년에 나온 어떤 문서에 보면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외무부에서는 69:23, 국방부에서는 70:14로 가톨릭 신자 수가 적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의 관료들의 종교별 형평성을 요구하는 것이 합법적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부분적으로만 드러난 이런 불만에 관한 아데나워의 반응은 그다운 방식인 원칙과 전술의 조합이었다. 그는 동독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선거를 염두에 두고 공영 방송국인 ZDF의 설립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기에 교회 압력에 굴복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교회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1961년 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야당의 강력한 비판에 굴하지 않고 연방 사회복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교회 기관과 무료 복지단체에 지방 정부보다 더 많은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제국 청년복지법의 개정에는 교회의 요구 사항도 반영하였다. 둘째 자녀를 위한 자녀수당 지급이 시작되었다. 이혼도 무고한 배우자의 반대가 있으면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다 아데나워의 전술이었다. 원칙적으로 아데나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그는 이 공의회에 참석한 인사 가운데 독일 측에서 누가 중요한 발언권을 가지게 될지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그는 쾰른 시장 시절부터 프링스 추기경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으며 텔레비전에 관한 논쟁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그리고 사민당(SPD) 측에 손을 내민 학술원장 포스터를 보호하는 것이 되프너 추기경이 아니던가?!     

세계의 가치 체계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던 아데나워에게 적어도 교회만이라도 안정적으로 머물렀다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보편교회 자체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게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카데나비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수집하던 아데나워의 비서 안네리제 포핑가는 아데나워가 1966년 여름에 아데나워가 코코슈카와 나눈 대화를 그녀의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아데나워가 자기 초상화를 그리던 때 베스트팔렌의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농부는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으로 앞으로는 미사에서 라틴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전례도 바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 농부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맘대로 하라지. 나는 여전히 가톨릭으로 남을 테니!” 그런 식의 회의적인 태도를 고려해 보면 아데나워가 많이 논의 된 <바젤 건의서>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바젤은 한 수 더 뜬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바젤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제안서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결론은 이랬다. “제가 보기에 이 문서는 교회의 입장을 지나치게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적 사고방식이 ‘빠르게’ 사라지기에 “우리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자유주의자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의 투표 없이는 독일에서 과반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매우 거슬리는 문장 하나를 지적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를 하느님의 계명 아래에 둔다.” 그런 표현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었다.“여기서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정치를 하느님의 계명 아래 두지는 않습니다.” 게르스텐마이어가 다음과 같은 말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수상님! ”그러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그리하십시오.” 그리고 라허를 자기 편에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그는 재무담당관으로서 기민당(CDU)의 자금을 관리하는 부르그바허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또한 귀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그바허 선생!”     

따라서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종종 1870년대의 문화투쟁*에 관한 탄식을 자주 늘어놓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가인 클라우스 엡슈타인이 회고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비스마르크가 문화투쟁과 사회주의법을 통하여 “대부분의 사민당(SPD)과 중앙당(Zentrum) 당원들이 참여하는 커다란 자유주의 정당이 서방에 형성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정당이 설립되었다면 동유럽의 지나치게 강력한 보수주의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제국시대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현재 순전히 가톨릭적 정당 수립이라는 구상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문화투쟁 [Kulturkampf, 역자주 – 1872년부터 1878년까지 비스마르크와 가톨릭 간에 벌어진 권력 싸움이 교육과 외교 전반으로 확대된 사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속화는 광범위한 변화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아데나워는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노동 중심 사회에서 여가 중심 사회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하였다. 노동은 그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명약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그는 널리 퍼진 안락을 추구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하였다. 공공 분야에서의 노동 시간 단축에 관한 요구를 비용 문제 이상의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하루 8시간 노동 원칙에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행정부에서 토요일에 근무를 안 한다는 것은 그에게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휴무는 점차 확산되었다. 공무원 가족이 본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는 아데나워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노동’과 ‘노동 의식’을 주제로 논의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가 엄청난 약세에 몰릴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의 불만 대부분은 수 세기에 걸쳐 노인들이 때로는 더 큰 소리로 때로는 작은 목소리로 내던 너무나 잘 알려진 불만이었다. 곧 “아이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커다란 근심거리이기에 자주 듣는 말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데나워나 그의 동년배들이 독일의 국제 경쟁력에 관하여 직접 목격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을 위한 교육적 과제’를 독일 국민 전체 생존 문제로 이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0년 5월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에서 중요한 논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그 당시 문화 정책과 관련된 기민당(CDU)의 주요 인물들의 생각이 아데나워가 상상하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교육기관의 증설 요구에 관한 기민당(CDU)의 동의를 문서화하기 위해 문화정치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중앙당 원내대표인 브루노 헤크와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문화부 장관 오스터로와 게르하르트 슈톨렌베르크, 당시 기민당(CDU) 청년연합의 중앙회장으로 자기의 경제관을 피력한 프리츠 헬비크,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지사 폰 하셀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고집을 피우는 아데나워 수상과 몇 시간에 걸쳐 서로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결국 계획은 원안대로 유지했다.     

어떤 계획이었나? 독일 교육위원회의 기본 계획과 관련된 입장 설명, 제2차 교육과정에 관한 질문, 대학 역량 확대, 대학 개혁 등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그 모든 것을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그가 주제를 제시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젊은 세대의 지식과 일에 관한 의지를 강화하고 향상할 수 있습니까?”65 그러나 그의 목표 집단은 학생이나 학자만이 아니라 도제들도 포함되었다. 이미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루는 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시민들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수공업 분야에는 더 이상 도제들이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적게 배웁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걱정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직업교육기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제발 덕분에 대학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본에서 마이스터 시험 응시자의 50%가 탈락했다!     

이어서 그는 이른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석탄은 항상 우리의 부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가 사라졌습니다. 둘째 부는 교수가 아니라 국민의 노동 의지와 지식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데나워 수상의 긴 성명으로 그가 독일 국민 가운데 대학 졸업자 수를 늘리는 것에 대한 그의 반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가 분명해졌다. 그는 고학력자 양산과 고학력자 실업을 중요한 문제로 본 것이다. 비록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광범위한 계층에게 좋은 교육을 시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많은 인구가 생존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매우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하였다. “정말로 이는 내가 아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입니다. 이는 수개월 동안 저를 사로잡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출산율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들은 게르스텐마이어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다. 아데나워 수상이 갑자기 교육전문가와 주 정부의 문화부에서 제대로 다루어야 할 분야에 간섭하려는 것을 사람들은 노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 문명의 현상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자주 갑작스러운 불만을 드러내곤 하였다. 예를 들어, 1959년 여름 국무회의에서 바덴 문제와 법무부 장관과 관련된 질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갑자기 교통 소음에 대해 말했다. 아데나워는 세봄 장관에게 오토바이의 소음이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토론 주제가 교통위반으로 바뀌면서 강력한 권위주의자인 아데나워를 다시 연구할 수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경찰이 속도 제한에 대하여 현장에서 50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안 된단 말인가?     

그러더니 아데나워는 다시 교통 소음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디젤 엔진 또한 그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라인 계곡은 점차 지옥이 되고 있습니다, 예인선 때문에 산악지역이 아닌 곳에 있는 집도 떨립니다. 산에서는 그 소음이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합니다.” 그러나 교통부 장관 세봄은 아데나워에게 그것은 라인운송협회의 책임임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원자력 시대가 가져온 모든 문제에서 “인생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소음이 아니라 순수한 공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문명에 관한 그의 최소한 숨겨진 비판의 기본 어조는 그러한 발언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샤움부르크궁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아데나워 수상의의 끊임없는 집무에도 불구하고 이 성이 고요한 오아시스라는 사실을 경탄하며 이야기한다. 포효하는 1950년대의 역동성에 크게 관여한 아데나워는 적어도 샤움부르크궁의 생태계만은 원래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 대하여 귀를 열고 세밀히 관찰하였다. 그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더불어 시작한 일의 결과를 그는 분명히 보였고 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태학이나 교육 분야에서 장기적으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그의 사유는 결론 없는 것이었다.     

세속화와 직업윤리의 쇠락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은 국가관의 쇠퇴를 보여주는 여러 징후였다. 그의 세대만 해도 여전히 국가와 확고한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헌법의 틀 안에서 국가는 질서를 보장하고, 장기적으로 국내외의 안전을 보장하고, 권리와 법의 효력을 보장하고, 사회 제도를 보호하고, 교육 제도를 책임지고, 여러 분야에서 변화를 계획하였다. 그는 이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는 이를 평생 활동으로 확인하였다. 심층적인 국가철학적 성찰은 아데나워와 같이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국가와 사회 사이의 헤겔식 변증법이 있다고 보았다. 그 세대의 법률가들에게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고방식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에게 국가는 단순한 사회의 대리자가 아니라 자체적인 권리와 존엄성을 지닌 실체였다. 국가는 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는 또한 체제의 상징과도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의식이 모든 영역에서 침식되고 있다는 탄식이 늘게 되었다. 국가 권위의 쇠락, 독일 국민과 국가 간의 불균형적인 관계가 나타났다. 이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독일 민족의 미래를 좌절케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1959년 10월 연방정부의 내각은 모든 동서독 공동 스포츠 행사에서 공산주의 상징이 있는 이른바 ‘분열 깃발’ 곧 동독의 국기를 게양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는 아데나워에게 비판적인 추가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다른 모든 것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국민에게 국가를 존중하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우리, 업적, 제도!” 최근 독일연방산업연합회(BDI)에서 연방 대통령이 얼마나 무례한 대우를 받았는지. 그는 더욱 우울한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10년 안에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당시 개신교 일부, 노조, 사민당(SPD)에서 확인된 독일군에 관한 거부를 특히 우려했다. 그는 영국 대사 스틸의 말에 동의하며 인용하였다. “여러분이 군인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군인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국가에 관한 철저한 보수적 이해는 이른바 ‘《슈피겔》 사건’*에서 매우 극적으로 나타났다. 아우크슈타인이나 알러스에 관한 국가 권력의 행사가 지나쳤다는 생각을 그는 전혀 하지 못했다. 국가 안보 문제에서 과도한 것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반역은 살인만큼이나 나쁜 것입니다.” 그 당시 그는 블루멘펠트나 마르틴과 같은 의원들의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반박한 것이다.     

* 《슈피겔》 사건 [Spiegel-Affäre, 역자주 - 1962년에 벌어진 서독의 정치적 추문. 서독의 주간 잡지 《슈피겔》에 실린 독일군에 관한 기사를 둘러싼 언론 탄압 사건. 이때 《슈피겔》 기자가 국가 반역죄로 체포되었으나 결국 재판 없이 풀려남. 이 사건은 아데나워 정권이 저지른 부당한 언론자유 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남음]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관과 민족의식은 어느 모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는 이를 매우 체계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히 독일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못했던 매우 심각했던 1960년에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계속 생각했다. 예를 들어 1960년 2월 기자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면서 아데나워는 특정 독일 기업가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가서 그곳에서 사업을 논의하지만, ‘그들이 들은 바를 외무부에 알리는’ 노력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민족의식의 결여에 대해 사람들은 내게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온당한 것입니다. 곧 우리가 민족의식을 되찾지 않으면 독일 민족이 어찌될 것인가요?”     

동일한 언론인들과의 다음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민족의식을 다시 거론하였다. 그는 이제 독일 국민이 베를린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인지에 관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살아있는 독일인들은 자기 국가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젖을 짜는 젖소로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하고 바람직한 민족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건전한 민족의식 없이는 어떤 국가도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족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곧 필요하다면, 이 나라와 그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더 이상 민족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민족의식의 쇠퇴가 과도한 민족주의의 재등장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나치의 경험으로, 앞으로 사람들이 절대로 다시 추구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유럽의 연합과 건전한 애국심 사이에 대립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독일수공업중앙협회(ZDH)에서 “민족의식이 없이는 작은 유럽 민족들이 모이는 오늘의 세계에 한 민족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국가가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상상의 산물로 보여 국가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제 서독의 잠정적인 성격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아데나워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국가가 잠정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민족의식을 키울 수 있겠는가? “물론 서독이 잠정적이라고 하여 현재 우리의 국가를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나는 말해야 합니다. 서독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사람들이 독일은 2개의 국가로 되어 있다는 모순적 상황을 기정사실로 여기고자 하면 아데나워는 신중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그것은 민족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이다. 민족이야말로 건전한 민족의식의 확고한 역사적 근거가 된다고 하였다. “나에게 민족의식은 민족에 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통치자 가문에 관한 사랑도 아니고 특정한 국경에 관한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미국 언론인 조지 베일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독일의 민족의식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서독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독일 전체를 위한 것인가요? 1937년의 동유럽 국경을 기준으로 한 독일은 어떤가요?” 이는 아데나워에게는 부적절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오, 그렇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대화에서 아데나워가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폰 에카르트는 베일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독일 민족입니다!” 아데나워가 덧붙인다. “독일 민족을 위해서입니다.” 베일리가 추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서독 국경 안에 있는 민족만인가요?” 그러자 아데나워는 현명한 답을 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곧 서독은 독일을, 곧 독일 민족을 대표합니다.”     

매우 놀라운 점은 이 대담에서 아데나워가 나치 시대라는 12년의 역사 때문에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낮추고 싶어 하지 않으려는 결단력이었다. 조지 베일리가 앞서 언급한 배경에 관한 대화에서 나치 시대를 언급하고자 하자, 아데나워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독일에도 풍요롭고 위대하고 명예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베일 리가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자 아데나워는 “물론 커다란 범죄가 자행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한 번 영국 역사에서 크롬웰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가 무슨 짓을 했나요? 솔직히 그는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영국이 아일랜드를 어떻게 대했나요! 그런데도 영국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프랑스도 좀 보세요.”     

집단 죄의식! 이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 대통령이 퍼뜨린 ‘집단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이와 관련하여 비유를 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글쎄요, 집단 죄의식은 없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집단적 수치심. 이는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나는 그 시대가 부끄럽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국 역사에서도 영국과의 분리전쟁 때와 남북전쟁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아데나워는 매우 보수적이며 매우 자존심을 내세우며 죄의식이 없는 자유로운 민족의식과 이에 상응하는 국가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이제 부상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매우 낯설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독일이라는 국가와 자기 자신이 이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치유보다는 진단이 훨씬 쉬운 법이다. 그는 1960년 1월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이제 독일의 재건은 완수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몇 년 전부터 많은 신문에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제2차 현대화의 물결이 흐르는 중이었다. 많은 분야에서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재건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많은 영역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부 영역에서는 빠르게, 또 다른 영역에서는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생활양식과 삶에 관한 태도를 바꾸고, 유동성을 강화했지만, 전통적인 영역 곧 국가와 소도시는 여전히 산업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변화를 보고, 통계 자료를 수시로 검토하며, 중립적인 전문가를 포함하여 단체 대표들과 많은 토의를 하였다. 물론 현대화의 문제는 내각에서도 논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상으로서나 기민당(CDU) 당대표로서나 아데나워는 변화의 유도를 위한 정치적 개념과 같은 것을 설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총리실에 제대로 된 ‘자문단’이 없었기 때문일까?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쾰른의 독특한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이 국가 차원에서 되풀이되지 못했다. 대체로 그는 장관들에게 부분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것에 머물렀다. 대체로 농업정책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가 비록 능력이 모자라지만 하인리히 륍케를 테오도르 폰 호이쓰 대통령의 후계자로 존중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륍케가 이전의 농업개혁에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그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받아들이고, 전반적인 시장경제적 주택정책에서 먼저 빅토르-에마누엘 프로이스커를, 그리고 이어서 파울 뤼케를 신뢰한 것이다. 그리고 테오 블랑크에게 먼저 포괄적인 의료보험 개혁을 맡기고 이어서 이 창의적인 장관에게 우편 및 통신을 그리고 운송 및 원자력 에너지 분야를 맡긴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는 특정한 입법 계획, 재정 조치 및 문제 해결 구상이 안정을 위협할 때만 개입하였다. 그가 정부의 안정과 국가의 안정을 동일시한다는 사실은 1949년 가을 이후 그를 지켜본 모든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이제 주로 보수적인 태도로 도전에 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변화의 속도를 늦추려고 하거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뒤로 미루곤 하였다. 그는 더 이상 근본적인 혁신을 원하지 않은 것이다.     

비교적 성공적인 억제 정책의 좋은 예가 바로 석탄 위기를 해결한 것이다. 에너지 공급 측면에서 아데나워 임기는 격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석탄 시대가 석유 시대로 대체된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석탄 시대에 자랐다. 그도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들인 루르 지역 위기(1923/24)와 쉬망 플랜(1950/51)은 모두 석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독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1957년까지 석탄은 산업과 개인 가정 모두에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그 당시 서독의 1차 에너지 소비에서 경탄과 갈탄의 비율은 여전히 84%였다. 그런데 이것이 1년 만에 뒤집어졌다. 유가 하락으로 유류 비중이 11%에서 15%로 올라갔다. 1963년 아데나워 수상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32% 였고, 그가 사망한 해인 1967년에는 48%였다. 1957년에는 1천만 톤의 난방유가 사용되었고, 1963년에는 4,700만 톤이 사용되었다. 석탄 부족으로 시작된 아데나워의 시대가 석유 과잉으로 끝난 것이다.     

유럽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콘라드 아데나워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이 문제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진영에 속했다. 에르하르트는 세계 자유 무역의 전망에 관한 관점에서 변화를 평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에너지 문제의 어려움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전제하였다. 반대로 아데나워는 보수적 에너지 정책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의 기본 정책 회의에서 이들은 늘 충돌했다.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당 대표단에 제기한 것은 어느 정도 석탄 로비를 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공급의 확보였다. 또한 가격도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경탄은 우리에게 있는 에너지원입니다. 난방유는 국내에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떤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면, 난방유 수입은 매우 줄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난방유 가격이 매우 낮지만, 일단 난방유가 시장을 지배하면 소수의 대기업이 난방유 공급을 줄이거나 이에 상응하여 가격 인상을 맘대로 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방정부의 내각은 독일 경제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요인들에 너무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특히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국내 정치와 관련된 일련의 제2차의 정치적 논쟁과 관련된다. 아데나워는 자기 긴 인생 경험을 내세웠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루르 지역의 공산주의 봉기다! 루르 지역의 가난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치당이 큰 성공을 거둔 일도 있다! 약 50만 명의 광부가 사는 이 대도시 지역은 ‘공산주의 분자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서독의 알레르기 발생지”였다 기민당(CDU)이 루르 지역의 지방선거에서 50.5%의 득표율을 보인 이후, 최선을 다하여 기민당(CDU)이 서민들의 당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야 했다.     

셋째 논거는 과도한 자유화를 통해 강력한 경제 분야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참된 보수다운 성향을 문서화한 것이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석유 로비는 ‘자유화를 매우 존중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화를 위하여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분야가 파괴되도록 합니다. 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유주의 원칙을 농업에 적용해 본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농업 분야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저 캐나다와 미국에서 곡물을 수입하면 됩니다. 야채와 과일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수입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국내 농업을 그만두면 됩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석탄 산업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보수적인 아데나워 수상은 매우 보수적인 하인리히 구터무트 위원장이 이끄는 독일전국광산노조(IG-Bergbau)를 좋은 협력자로 삼았다. 적어도 아데나워 수상 시절에는 광업의 구조 조정 과정을 늦추고 사회 정치적으로 완충 조처를 할 수 있었다. 기민당(CDU) 정부가 프란츠 마이어스 주지사 아래 뒤셀도르프에서 같은 노선을 취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더 이상 잠재적인 새로운 에너지원인 원자력에 대해 예전만큼 긍정적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석유가 넘쳐나다 보니 미래에는 값싼 에너지가 풍부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원자력이 왜 필요한가? 그는 원자력 발전소의 높은 투자 비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익을 얻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원자력 이야기’로 사람의 머리를 흐리게 하고 있다고 불평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말을 남겼다. “이 한심한 원자력의 역사 ... 정말 문자 그대로 한심한 것입니다.” 일견 그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안보 정책과 관련된 핵무기 논쟁에서 그는 상처를 입었다. 1958년 봄부터 아데나워는 핵무기 문제를 날달걀처럼 다루어 왔다. 그러나 석유가 넘쳐나다 보니 값싼 원자력에 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 모든 사업적 계산도 다시 해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사민당(SPD)은 고데스베르크 정강과 관련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 문제를 강력히 들고나왔다. 사민당(SPD)이 핵발전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것이다. 이래서 아데나워가 이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또한 수년간 ‘원자력 시대’를 구호로 하여 대학과 대학 외 연구기관의 강제적인 증설에 관한 의구심도 커졌다.     

그러나 핵무기 실험이 증가함에 따른 대기 오염 소식이 아데나워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그는 독일 수상으로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예를 들어 맥클로이는 비록 뒤늦은 감이 있지만 끔찍한 핵 관련 사고에 대해 매우 기밀에 해당되는 보고를 그에게 하였다. 사고 현장에 도착하는 데 몇 주가 걸렸고 사고를 당한 희생자의 오염 된 시체를 20미터 깊이의 특수한 관에 묻어야 했다. 이 관의 가격은 개당 2만 달러나 되었다. 과학자들은 시체에서 8개월 동안 방사능이 나올 것으로 예측하였다. 과학자들은 1950년대 중반 휘황찬란하게 자랑하던 이 현대 기술 분야에서도 발전에 따른 위험이 존재했다.     

아데나워 수상이 조심스럽게 여기저기에서 제동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특히 개혁 조치의 단기적인 정치적 피해가 앞으로 예상되는 이익보다 훨씬 클 때 그에게 이러한 조치는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면 그는 문제가 된 계획을 냉정하게 막았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헌신적이고 매우 정력적인 블랑크 장관의 건강 보험 개혁이었다. 아데나워는 의료비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므로 이 개혁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인간의 민감한 야만적인 본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분야에서 개혁보다 정치적으로 더 위험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생각에 다행히도 이 문제의 폭발성을 적기에 인식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과 언론은 그를 위협하는 의사들이 결국 그의 뜻을 굴복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병원에서 반정부 선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론조사도 정부안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의회에서 논의된 것을 보면 정부안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블랑크 장관이 여당의 원내 회의에서 정부안을 소개했다. 하인리히 크로네는 화가 난 테오도르 블랭크의 사임 의사를 간신히 막았다.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데나워 수상이 장관을 다루는 방식은 탁월합니다. 나는 블랑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날의 일기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 “아데나워 어른께서 선거에서 지고 싶다면 계속해서 모든 사람과 충돌하면 될 것이다. 나는 그가 벌인 일을 뒤에 수습하는 것에 이제 지쳤다. 한 번은 에르하르트, 다음으로 게르스텐마이어, 그리고 이제는 블랑크였다. 수상이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92     

그러나 이번에도 크로네가 뒷수습을 잘 해냈다. 아데나워는 여당의 원내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블랑크에게 “마치 아버지처럼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말했다. 그는 우쭐하여 자리를 떴고 사임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의료보험법에 관한 정부안은 철회되었다.     

그때부터 아데나워는 의료보험 개혁 문제를 운에 맡기지 않았다. 그는 글롭케에게 “우리의 선거 결과는 전적으로 이 문제가 어찌 귀결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소위 타협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었다. 의사와 근로자는 만족했다. 미래는 또한 당분간 상당히 빈약한 규제로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건강 보험 개혁에 관한 논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아데나워의 또 다른 구상이 마찬가지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곧 제2의 텔레비전 방송국의 설립 문제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임기에 그가 처음부터 끈질기게 집착했던 국내 정치 계획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 동기는 당 지도자로서 품을 수 있는 것으로 매우 불순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중앙당 대표단 앞에서 아데나워는 ‘임대료 인상과 주택 건설’을 주제로 한 두 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알렌스바흐의 조사에 따르면 이 방송을 7~8백만 명이 보았다. 여기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문제와 관련된 700만 내지 800만 명의 성인이 그 방송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는 가장 중요한 정치 도구이기에 다음 총선 결과가 대중 연설이나 업적이 아닌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좌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정말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텔레비전 방송사 설립을 하려는 주된 동기였다. 공개 토론에서 제기된 다른 모든 주장은 부차적이었다. 해마다 그가 방문하는 미국에서는 텔레비전이 훨씬 더 발전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텔레비전이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어왔다. 또한 미국에서 광고비로 먹고사는 상업 TV 방송이 정당에 어떤 기회를 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서독의 ‘NDR’, ‘WDR’, ‘Bayerischer Rundfunk’, ‘Hessischer Rundfunk’와 같은 주요 방송사들이 주로 사민당(SPD)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정적들이 텔레비전 매체를 장악한다면 기민당(CDU)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독의 삼권분립과 다원주의 체제 안에서는 단호한 총리조차 이것만큼, 곧 방송만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야는 없었다. 기존 공영 방송사들은 당연히 민간의 경쟁자를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은 방송의 자유를 위해 아름다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자기 맘에 드는 현재 방송 시스템이 지속되는 것을 바랐다. 교회, 특히 쾰른의 프링스 대주교는 강력한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대중의 저속한 입맛에 맞춘 텔레비전이 국민의 도덕성을 타락시킬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정권을 잡은 주들조차 아데나워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1개 주 가운데 6개의 주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연방참사회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정권을 잡은 주들은 자체적인 방송국을 가지고자 하는 생각이 연방정부 차원의 강력한 선전 도구를 마련하려는 아데나워의 단호한 의지보다 더 강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의 이해를 조절하기가 불가능해지자 아데나워는 마침내 1960년 여름에 신속한 추진력으로 ‘독일 텔레비전 주식회사’(Deutschland-Fernsehen-GmbH)를 설립했다. 몇 달 동안 그는 흥에 겨워했다. 주지사들이 자기 권한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자 연방정부는 상업 텔레비전 회사를 통제하게 되었다. 선거 전인 1961년 4월 1일부터 약 500명의 직원이 준비한 프로그램이 방송될 예정이었다. 아데나워의 순진한 주장은 이랬다. 독일 국민에게 오래전부터 제2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약속해왔다는 것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정부의 텔레비전은 그를 짜증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의 생각에 제대로 된 국가라면 국가가 방송사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없어야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1960년 7월 초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근엄하게 선언했다. “연방정부에서 텔레비전 주식회사의 지분을 보유해야 합니다. 나는 연방정부의 권위를 주지사들의 노리갯감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일단 그는 거의 모든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들과 등을 지게 되었다. 카이-우베 폰 하셀 만이 확실한 예외였다. 아데나워가 기민당(CDU) 중앙당 대표단에서 여당 동료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지만 기민당(CDU) 당대표가 반항적인 주지사들에 대해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1960년 여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수상이 될 것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연방헌법재판소도 그의 권위주의적 뜻에 굴복하지 않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1961년 2월 28일의 텔레비전 관련 판결로 마침내 연방정부가 자체적인 방송사를 운영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데나워는 자기 위신에 관한 엄청난 타격을 놀라울 정도로 꿋꿋하게 버텨냈다. 물론 며칠 후 그와 함께 자리한 기자들은 독일 연방주의에 관한 수상의 긴 불평을 들어야 했다. 당시 독일 점령국인 미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중앙 정부를 그토록 허약한 것으로 만든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 우리는 몇 년 안에 통일이 되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건국 기본법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헌법이 ‘여전히 유지되며 굳어졌다.’     

그리고 이는 어떠한 주들인가! “바이에른이 유일하게 참다운 의미의 주입니다. 나머지 다른 모든 주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는 ‘함께 합쳐진 것이다’,  라인란트-팔츠 주는 라인 지역의 일부를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라인란트-팔츠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 니더작센 주의 경우는 각 지역이 올덴부르크, 브라운스비크, 하노버, 벨프 등 제각각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네, 이는 참으로 큰 불행입니다.” 나중에 그는 텔레비전과 관련된 분쟁의 결과를 가장 심각한 패배의 하나로 여겼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1963년 초에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 회의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탄했다. “우리는 그에 맞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명하게도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강력한 공개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그의 실패를 정확히 지적했다. 51%였던 수상에 관한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갑자기 47%로 떨어져 그를 반대하는 이들을 고무시켰다. 2월 중순과 4월 중순 사이에 그 수치는 약 10%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일반 대중보다 정치 계층이 훨씬 더 오래 물고 늘어지는 법이다. 그 효과가 곧 사라진 것이다. 놀랍게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관한 지지율도 급격히 상승하여 이제 때로는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지지율을 능가할 때도 있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이제 여당 전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텔레비전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기민당(CDU) 수뇌부의 분위기를 오실로프스코프처럼 일기에 기록한 하인리히 크로네는 칼스루에의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은 지 3주도 되지 않은 1961년 3월 21일에 이미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썼다. “불길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총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보수화되던 아데나워 수상은 좌파 자유주의, 온건한 반권위주의, 매우 모호한 의미에서 진보주의적 사상이 이미 여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여러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사상의 경계선으로 얼마나 분명하게 움직이는 지는, 해외 개발원조라는 새로운 주제에 관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외교 정책의 전형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륍케 대통령, 모든 정당, 교회, 경제계 및 노조가 이 과제를 매우 신속하게 주요 의제로 제시한 결과 국내 정치에서도 논의가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 새로운 주제에 대해 마지못해 다가가는 것이 이목을 끌었다. 1957년부터 그는 독일도 원조해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경고를 받았기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왔다. 그러나 개발원조를 주도하는 이로서 그는 고상한 도덕적 활기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간단히 ‘제삼세계’라고 부르는 국가들은 가끔 그에게 막연한 미래에 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회의적이며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한 어조가 그의 발언에서 묻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다른 존경받는 사람들의 비판적 발언을 조심스럽게 인용하면서 자기 거부감을 감추어왔다. 곧 아데나워는 드골이 국제연합에서 앞으로의 투표권의 배분에 대해 언급한 것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소규모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아데나워가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에 그는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이러한 관점에서 전체를 조망해 본다면, 이 세계에는 6억 5천만 인구의 중공, 모두 또는 대부분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는 유색 인종, 그리고 터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유를 수호해야하는 소수의 백인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면 세계의 자유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악몽은 “전 세계의 공산주의 바다에 떠 있는 ‘자유로운 민족들’의 아주 작은 섬”이었다.     

콩고의 혼란은 탈식민지 국가가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강화시켰다. 그는 식민주의에 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이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유색 인종에 대하여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색깔을 입힌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게 이야기해준 바에 따르면 지금  흑인은 무시무시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백인들을 경멸조로 쳐다봅니다.” 그는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의 탈식민화와 콩고의 혼란을 ‘백인종’의 재앙으로 여겼다.     

그래서 아데나워 수상은 개발원조에서 인도주의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 개발 원조는 도덕적 과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적 과제, 그것도 고도의 정치적 과제입니다.” 고도의 정치적 과제, 곧 그는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를 막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발 원조가 공산주의의 근원을 진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인 전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이 생각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지역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곧 자유 국가들이 업무를 분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해야 합니다, 곧 때로는 인도를 돕고, 때로는 터키를 돕다 보면, 그들은 모두 다시 손을 내밀어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 당시 전 국민이 위대한 도덕적 과제로 이해한 것을 아데나워는 대체로 지리 전략적인 과제로 보고 있었다. 물론 인도주의적 개발 원조라는 주제로 정치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한 륍케 대통령에 관한 은밀한 혐오감이 여기에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늘 감상적인 것이 아닌 보수주의의 기본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이러한 면에서도 더욱 이상주의적인 시대정신은 아데나워의 세계관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국내 정책은 대체로 보수적일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에서도 그러하였다. 오로지 유럽 정치 분야에서만 그는 여전히 혁신가로 자체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몇 년 전처럼 시대의 흐름의 지지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텔레비전과 관련된 논란과 관련하여 그가 말한 것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된다. “지금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으면 주변의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린다!”

작가의 이전글 유럽 전체의 질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