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Aug 23. 2023

권력투쟁 I

아데나워 전기 II

케네디 

    

비둘기 발에 묶어 전한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현재 서양이 진입하는 새로운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 시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진입한 것으로 그 정확한 시간을 잴 수가 있었다.     

* 비둘기 발에 묶어 전해진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역자주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오는 문장을 준용한 것으로 ‘조용하게 전해진 말이 세상을 움직인다.’라는 뜻. 원래 문장: “Die stillsten Worte sind es, welche den Sturm bringen. Gedanken, die mit Taubenfüßen kommen, lenken die Welt.”]     

1961년 1월 20일 케네디는 놀라운 취임사를 통해 ‘뉴 프런티어’로 나갈 것을 촉구했다. 현재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로 그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블랑켄호른은 분위기의 변화를 다음처럼 지진계를 비유해 묘사하고 있다. “새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내게는 완전한 해방의 작용을 했다. 그 연설의 전체 맥락은 미국 자체는 물론 전체 자유세계에 관한 큰 책임감과 결합한 젊은 활기가 넘치는 주도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속되지 않은 젊음, 활기찬 정치적 수사, 비전통적 사고, 모든 분야에 관한 강력한 자극. - 이것이 미국 언론을 통해 서독으로 전해진 분위기였다. 언론, 텔레비전, 정치 잡지들과 본의 정치계는 즉각 이러한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전체적인 인상은 아이젠하워와 함께 무기력해지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인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안정, 온건, 번영, 평화의 반석으로서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이제 서독에서도 아이젠하워는 낡고 속물적이며 정책을 제대로 구상할 줄 모르면서 미국을 이끌어온 인물로 간주되었다. 이른바 ‘한물간 인물’(Vieux jeux)이었다.     

아데나워도 이 새로운 분위기에 서로 잡혔다. 1959년 봄 미국 대선에 관한 논란이 가져왔던 불확실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때 총리의 고령이 처음으로 정치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거의 잊혔다. 본의 장관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아데나워는 여전히 올렌하우어나 베너 또는 에를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의 신체적, 정신적 활동은 여전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지그프리드*라는 인물을 나타내는데 비하여, 아데나워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매우 늙고 새로운 시대에 낯설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그가 대부분 노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로 더욱 강화되었다. 하인리히 크로네나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유능한 일꾼이지만 확실히 젊고 빛나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 지그프리드 [Siegfried, 역자주 –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구성하는 네 개의 음악 드라마 중 세 번째 작품의 제목이며 젊은 영웅인 주인공.]     

물론 젊은 정치에 관한 바람과 더불어 노인이 다스리는 것에 관한 거부감은 물론 처음에는 아데나워 수상과 기민당(CDU)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많은 언론기관에서만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학교, 교육받은 중산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여러 직원과 고위 관리 사이에서도 퍼지게 되었다. 많은 대중은 이들보다는 더 느리게 반응하였다. 결국 드골이나 맥밀런 또는 흐루쇼프와 같은 다른 노령의 정치가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하인리히 륍케 또한 서독에서 구세대에 속하였다. 그런데 이제 40~50대의 세대가 모든 정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케네디에 비교되는 것은 사민당(SPD)이 빌리 브란트를 케네디와 비슷한 이미지의 수상 후보로 밀고자 하기에,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물론 이 두 사람에게는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둘 다 젊고, 잘 생기고, 유머가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언론인의 인기를 누리며, 지식인을 흡수하는 매력이 있었다. 정치적 유사성도 놀라울 정도였다. 국내적으로 케네디와 브란트는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좌파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냉전 시대의 외교 정책 결정 문제에서 두 사람 모두 위험한 강경함과 그 못지않게 위험한 긴장 완화에 관한 열린 자세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두 가지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1960년 여름 이번에 어쩌면 미국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데나워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은 대통령 선거에 두 번 나와 떨어졌으나 1950년대에 미국 동부의 자유주의 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아들라이 스티븐슨이었다. 아데나워는 어느날 저녁 식사에서 밤새 그와 이야기를 나눴고 적어도 그 만남 이후로 그를 ‘위험한 이론가’이자 매우 비실용적인 지식인으로 경멸했다.     

이렇게 볼 때 케네디의 부상은 안도감을 주는 일이었지만,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중앙당 당 대표단 회의에서 케네디 스티븐슨이 미국의 국무장관이 된다면 이는 ‘여러  모로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더 심각한 말도 했다. 곧 스티븐슨이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된다면 러시아인들이 ‘이제 우리가 해냈군.’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미국 AFL-CIO 노조 위원장인 조지 미니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미니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이기에 아데나워는 그의 판단을 믿고 약간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미국의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케네디에 관한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케네디 가문의 가장은 사업가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이미 존 F. 케네디의 상당히 지나친 여자관계도 교회의 관점에서는 불미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케네디는 여전히 예절과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았다. 1960년 7월 기민당(CDU) 중앙당 당대표 회의에서 케네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데나워는 비꼬는 투였지만 신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토 슈마허-헬몰트는 1960년 8월 말에 자기 당 동료들에게 아데나워 수상이 케네디의 선거 전망을 ‘끔찍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보고했다. 상원의원일 때 케네디가 아데나워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 것이 당연히 아데나워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데나워가 때때로 별생각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게다가 본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주변에서 ‘철저한 비밀’이라는 관련 분석이 나도는 가운데 미국 언론에서은 이미 공화당 후보에 관한 호의적인 추측이 시작되었다. 독일인들, 특히 아데나워가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을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인물로 여긴 것인가? 그레베 대사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미국 대선 몇 주 전에 아데나워가 케네디의 승리 가능성을 점친 것에 동의하였다.     

당연히 얼마 동안은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 민주당에서 두 개의 외교 정책 파벌이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아들라이 스티븐슨, 체스터 보울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 또는 케니스 갤브레이스와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에서도 수년 동안 논의되어온 동서 긴장 완화 정책, 특히 군비통제를 옹호하였다. 이들은 개발 정책에 주요 초점을 맞추고 확실한 탈식민지화 정책을 강조하며 국제연합을 중시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된 애치슨을 대표로 하는 강력한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치슨은 처음에는 베를린 문제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흐루쇼프의 팽창주의에 관한 단호한 반대 세력이 일단은 미국의 새 정부의 정책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였다.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한 케네디는 먼저 유럽의 노회한 정치가들 사이에서 자기 입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초기 외교 정책은 확실히 성급한 단정을 피하고 드골, 맥밀런, 아데나워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의심이 많은 아데나워 수상이 오랜 세월에 단련된 잘 알려진 성격을 고수한다는 것이 워싱턴 정가에서 잘 알려졌기에 케네디 대통령은 신중하게 민주당의 오랜 경험이 있는 외교관들이 아데나워를 상대하게 하였다. 에버렐 해리만 특사는 1961년 3월 초 본에 도착하고, 4월 중순에 예정된 아데나워 수상의 워싱턴 방문은, 1961년 4월 9일 아데나워의 뢴도르프 저택에서 딘 애치슨과 긴 일요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논의되었다.     

잘 알려진 인물로는 당시 대통령의 군비통제 및 군축 정책을 담당하는 존 맥클로이가 있었다. 케네디는 또한 그를 통하여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에서 소련에 양보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물론 아데나워는 반대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케네디 행정부 초기에 영향력을 미쳤던 국방전문가인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이미 아데나워와의 인맥을 가꾸어 온 인물로 워싱턴에서는 그를 기꺼이 본으로 파견했다. 그는 이제 막 그 틀을 갖추기 시작한 새로운 전략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아데나워 수상에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케네디가 아데나워의 불식되지 않는 불신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환상을 품지 않았다. 케네디 주변의 새로운 인물들은 자기들이 낡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관한 젊은 대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본에 있는 아데나워라는 ‘노인’도 이제는 자기가 사람들이 기꺼이 치워버리고자 하는 ‘지난 세상’에 속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워싱턴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런던 주재 미국대사로 근무하면서 영국의 방어 의지에 크게 동조하지 않고 독일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은 이러한 과거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영국 친화적인 조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 주변에는 독일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자문들도 넘쳐났다. 히틀러의 제3제국,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독일 점령 초기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드라이 스티븐슨, 체서터 보울스, 케니스 갈브레에스, 붤트 로스토우, 아서 슐레진저, 그리고 대변인인 피에르 샐린저와 에브릴 해리만이 여기에 속한다.     

어쨌든 애치슨의 예방 이후 아데나워가 미국의 새 행정부를 신뢰하기로 결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애치슨과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베를린 문제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무장, 중부 유럽 전선의 핵무장, 재래식 군대의 재강조 및 연합국 정책이 여기에 포함된다. 애치슨이 아데나워에게 케네디 행정부가 베를린을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유럽을 미국의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정치의 초점으로 삼을 것이라고 다짐하자, 아데나워는 “안심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사의를 표했다. 애치슨은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서독을 선제 방어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물러났다가 수복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첫 케네디 방문은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아데나워와 케네디는 각자 속으로는 불편했다. 케네디는 이미 자유주의 언론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미국 외교 정책의 확실한 지도자로서의 명성은 아직 얻지 못하였다. 모든 분야에 관한 근본적인 검토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아직 이들은 친절과 선의를 특징으로 하는 탐색 단계에 있었다. 아데나워는 앞으로의 몇 달과 몇 년 동안 외교 정책 측면에서 그에게 일어날 일을 예측하기에 미국의 새 행정부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처음에 대화가 약간 딱딱하게 진행되었지만, 아데나워 수상은 지혜로운 가부장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재치 있는 만찬 연설에서 그는 독일인에게는 유머 감각이 없다는 편견을 바꾸었다. 아이젠하워나 덜레스와는 달리 케네디와 그의 팀은 톡톡 튀는 기질과 재기 넘치는 자학을 높이 평가하였기에 유머 감각은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데나워와 케네디는 서로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났고 언어 장벽이 있어서 케네디와 맥밀런 사이에서 싹튼 친밀한 교류가 여기에서도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에서 드러난 대로, 아데나워는 전반적으로 케네디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매력적인 케네디 대통령의 적절한 찬사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1961년 5월 20일 아데나워가 드골에게 조용한 뢴도르프의 저택에서 워싱턴 방문 결과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하면서, 그의 수준에서는 놀랄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는 아무 편견 없는 상태에서 미국을 방문하였고 케네디와 몇 번의 긴 대화를 나눈 다음,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케네디는 “현명하고”, 이해력이 빠르며, “정력적이고”, 경청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고 그때에 분명히 말했다.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빈에서 예정된 흐루쇼프와의 만남이 케네디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여겼다.     

그는 케네디 주변의 하버드 출신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 후에는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 키신저가 본을 방문한 후 아데나워는 심지어 백악관에 들어간 교수들에 대해 감사의 말을 몇 마디 전할 정도가 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의 사망 이후 흔들리고 우유부단해진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비교해보면 새 행정부가 월등했다. 아데나워는 또한 드골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 말도 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와는 달리 케네디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자기 정치의 핵심 기초”로 간주한다고 말한 것이다. 워싱턴 방문을 자세히 관찰한 그레베 대사의 생각은 그런 말이나 또 다른 말에서도 확인된다.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향후 4년 동안 자기 외교 정책에서 핵심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 싶어 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의 논의에 관해서는 워싱턴 방문에서 많은 것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 회담 후에 발표된 상당히 많은 내용을 빼 먹은 성명이 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맥스웰 타일러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케네디 행정부가 재래식 군대를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케네디는 핵무기가 철수되지 않을 것이라며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다만 그는 앞으로 효과적인 명령권과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단 차원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모든 핵무기 사용 결정을 중앙 집중적으로 내리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전력 계획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워싱턴은 연합국 내의 핵확산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지에 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을 확인하고 기뻐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핵 문제를 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당분간은 연기되더라도 노스태드의 제안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전력 계획에 관한 관심을 계속 가질 것임을 강조했다.     

양측 모두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협상 카드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제 미국 대선이 끝났으니 문제의 핵심에 관한 협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아데나워는 동서 협상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이는 실제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분명히 흐루쇼프가 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문제에 관한 지속적인 해결책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미국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레베 대사에게 이러한 뜻을 전했다. 그러나 미국 측에는 당분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케네디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정치적 양보는 그가 개인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것을 존 맥클로이에게 맡겼다. 그는 독일이 제안할 것을 요구하고 오더·나이쎄 국경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그가 폴란드의 서부 국경을 확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아데나워 자신도 그것을 예상은 하고 있지만 멕클로이의 발언을 반박하면서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폴란드 측의 양보가 없다면 그 자신도 어떤 양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멕클로이의 제안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베를린 문제에 관한 예방적 제안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독일 측이 적절한 때 ‘기꺼이 희생할 의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와의 회담에서 군사적 비상 계획과 관련된 문제는 비교적 타협의 여지가 많았다. 케네디는 베를린을 서독과 연결하는 통로를 유지에 문제가 생길 때 독일군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이에 대하여 매우 주저하였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동유럽 지역에 독일군이 시험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독일을 둘러싼 4개 강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것이다. 베를린 통로 확보를 위한 전투에서 대규모의 핵무기를 즉각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 측은 이를 매우 노골적인 거부로 인식하면서 그레베 대사에게 이에 대응하는 조처를 하고 서독 정부가 군사적 비상 계획에 참여하도록 할 것을 촉구하였다.     

미국과 독일 양국은 당분간 독일과 미국의 관계에 존재하는 많은 모호함을 해소하지 않고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는데 견해가 일치하였다.     

어느 정도 안심한 아데나워는 이제 정치 관광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45년 여름, 그의 맘에 매우 드는 텍사스 주민을 대표하는 존 패터슨 대령을 만난 이후 그는 텍사스 주를 한번 방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존슨 부통령의 초대를 받아 텍사스에 있는 그의 목장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존슨 부통령은 많은 독일 출신 텍사스 주민들을 매우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유명한 아데나워 수상이 자기의 고향이 있는 주를 방문한 것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서독을 ‘강대국’으로 여기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아데나워의 환심을 샀다. 물론 이는 케네디의 부탁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두 나라와 세계 여러 나라 곧 라오스, 콩고, 남미, 쿠바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논의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통 큰 제안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사실 존슨은 자기 주를 방문한 손님에게 미국의 비행기가 쿠바의 피그만에 착륙하려다가 심각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 불편한 임무를 받았다. 케네디가 워싱턴에서 아데나워를 극진히 대접하는 동안 미국 CIA가 지원하는 쿠바 해방군의 비행기가 플로리다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고 나서도 아데나워는 미국의 새 대통령이 그의 첫 번째 큰 사고를 일으키던 때,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에서 그는 내각, 폰 브렌타노 외무장관, 크로네에게 서독이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사실을 충분히 알렸다. 그는 크로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케네디가 존슨을 통해 “독일을 세계 정치의 중요한 문제에 관여해야 하는 위대한 강국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최초의 우주 비행사에 관한 소식도 전해졌다. 그는 러시아인 유리 가가린이었다. 이 사건은 소련 미사일 체계의 효율성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텍사스의 야단법석 잔치를 함께 즐겼다. 마치 라인 지방의 카니발에 참여한 것 같았다. 대규모의 바비큐 파티와 42갤런 모자를 쓰고 카메라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민속 의상 잔치는 미국 정치 사업의 일부이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선거 광고의 미국화를 전혀 꺼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1957년 총선 전 시기에 그는 인디언 장식을 착용했고 1961년에는 텍사스 모자를 썼다. 아데나워는 존슨 부통령에 대하여 호감을 품게 되었다. 비록 나중에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지만 말이다. 텍사스를 여행한지 몇 주 후에 아데나워는 드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슨 부통령은 ‘거의 유럽인’이었다고 한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가 여전히 드골과 맥밀런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것이 없었기에 1961년 봄의 독일과 미국 관계도 비교적 양호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빈에서 흐루쇼프를 만나기 위해 유럽을 처음 방문했을 때 3일 일정으로 파리도 처음 방문했고 그 후 빈과 런던에서 회담을 마쳤다. 드골과 맥밀런과의 만남에서는 삼국 지도부의 구상을 놓고 잠시나마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삼국 지도부 구상은 이미 처음부터 아데나워가 극렬히 반대한 것이기에 폰 브렌타노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에 강력히 경고하게 시켰다. 적어도 드골과 케네디가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기에 아데나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빈에서 진행된 베를린 문제에 관한 논의의 내용을 아데나워에게 개인적으로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종의 경고 신호였다. 그런데도 어쨌든 케네디 행정부와 맺은 관계의 시작은 전반적으로 좋은 출발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약간은 여유로운 이 상황에서 유럽 정치 결합에 관한 6개국 간의 협상이 마침내 2월 중순 파리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이 협상 이전에 아데나워가 드골을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1960년 여름 이후로 심화된 견해차를 정리하였다. 주로 드골이 양보하였다. 그는 신중하게 국민투표 구상을 철회하고, 계획된 유럽 연합을 묘사하는데 ‘연방’이라는 대단한 용어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조직적 협력’도 꽤 좋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미국을 고려하여 당분간 국방장관을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오히려 정부의 수장, 외무부 장관, 농업부 장관, 문화정보부 장관은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정부가 실질적인 협력을 연습하도록 하였다. 사무국 설치 계획도 연기되었다. 이는 아데나워의 실용적인 구상을 향한 커다란 도약이었다. 그리고 드골이 본을 차기 회의 장소로 제안하여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이것은 이 회의가 마침 독일 총선 직전에 개최되는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또한 이 달에 영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맥밀런이 ‘위대한 구상’(The Grand Design)이라는 평범한 명칭으로 부르던 구상으로 케네디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아직 들은 바는 없었다. 1960년 2월 영국 총리의 제안서는 미국, 영국, 유럽과 같은 자유세계의 강대국들의 힘을 모으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경제, 정치, 군사의 모든 차원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3국 지도부는 선진 산업국들의 정부 수반들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는 기능을 할 수도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외에도 맥밀런은 독일과 일본, 그리고 어쩌면 브라질과 호주도 포함할 것이 이야기되었다. 여기에는 유럽 대륙의 6개 국가 공동체의 계획에 관한 영국과 미국의 역제안이 담겨있었다.     

이 ‘위대한 구상’의 틀 안에서 맥밀런은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와 영국 농업에 관한 많은 전제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조건을 협상하기로 했다. 영연방 국가들과의 내부적인 논의 및 협의는 1961년 상반기 전체 동안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7월 31일 영국 정부는 6개 국가와의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여기에서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4개 서양 강대국 간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관계가 이어지던 단계가 종말을 고했다. 베를린의 심각한 위기는 이 단결을 빠르게 붕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가입 문제도 이를 악화시켰다. 다시 한번, 1959년과 1960년과 마찬가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혁과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압력에 맞서는 방법에 관한 견해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확대와도 필연적으로 얽히게 되어 앵글로·색슨, 곧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와 대립각을 이룬 것은 훨씬 더 큰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다.     

서방 진영의 새로운 긴장 상황은 아데나워만 폭발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아데나워와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는 유럽경제공동체(EEC) 문제에서 처음부터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왔기에 지금까지 끊임없는 짜증을 유발했다. 그러나 이제 서방 공동체의 지속적인 발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수상 후계자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이 모든 것은 베를린 문제에 관한 서방의 견해차라는 위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 임기의 마지막 2년 동안의 커다란 극적인 장면은 1961년 여름에 아주 잘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제 베를린에 관한 흐루쇼프의 압력이 커지면서 맥밀런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네디 대통령 행정부와의 관계에 관한 부담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분류    

 

1908년 마이어가 쓴 《대화 대사전》의 ‘폭포’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바위 표면 위로 흐르는 물의 낙하 ... 이 낙하는 흔히 여러 차례 이어지는 추락으로 발생한다. 큰 강에서 연속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는 낮은 폭포 또는 급류는 분류*라고도 한다. 폭포의 아름다움은 물의 양과 주변 환경의 웅장함에 따라 달라진다.”     

* 분류 [Katarakt, 奔流, 역자주 - 세차게 빨리 흐르는 물줄기]     

아데나워의 총리직은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의 건설로 첫 번째의 커다란 분류에 봉착하였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 지속되는 폭포’가 이어졌다. 곧 1961년 9월 17일 의회 과반수 확보 실패, 1961년 9월 말부터 1962년 봄까지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를 둘러싼 독일과 미국, 독일과 영국의 극심한 긴장 관계, 1962년 10월, 11월, 12월의 《슈피겔》과 관련된 위기, 1963년 1월과 2월의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둘러싼 위기, 1963년 4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의결을 통환 아데나워의 실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61년이 재난의 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이미 연초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아데나워가 85세 생일을 맞이하기 이틀 전인 1월 3일 WDR(서부독일방송)의 루드비히 폰 단비츠와 그의 생애에 대해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인터뷰 막바지에 ‘방금 시작된 1961년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을 요청하였다. 아데나워의 대답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1961년에는 12개의 달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를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1961년이 시작된 지 며칠도 안 되어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긴장이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기술의 발전으로 거리가 줄어들어 한 장소에서 시작된 화재가 넓은 지역으로 매우 쉽게 퍼질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누구도 12개월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1960년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1961년에도 일하고, 부지런하고, 양심적이며, 충실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1961년도 우리에게는 재앙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잠재적인 운명의 해가 시작되면 아데나워 수상의 85번째 생일잔치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열렸다. 세심하게 계획된 축하 잔치가 이번에 이틀 동안이나 이어졌다. 1월 5일 목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아데나워 후반기의 인사들이 국무회의실에 5분 간격으로 들어섰다. 예외도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대가족도 포함되었다. 4명의 아들, 3명의 딸, 수많은 손녀와 손자가 개별적으로 축하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 2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으로 아데나워의 집무실에서 ‘수상의 측근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오랜 전통 의식에 따라 7명의 고아가 글롭케 차관과 함께 수상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예외적으로 샤움부르크궁에서 이 생일 축하 인사를 한 이들은 륍케 대통령, 개신교 주교들인 디벨리우스와 쿤스트, 그리고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와 카를로 슈미트가 이끄는 연방의회와 연방참사회의 의장단이었다. 이들도 모두 각각 5분 동안만 인사를 하였다. 그에 비해 내각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인사들에게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내각과 연방의회 회장단은 생일 선물로 돌로 만든 네 개의 바로크 양식의 [그리스 신화의 큐피드 모습의] 동자상을 가지고 왔다. 이는 나중에 뢴도르프 저택의 정원을 장식하게 되었다. 장관들이 이 공동 선물에서 천상의 봄 동자상과 바흐식의 가을 장식으로 치장한 것을 가리키며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두 동자상이 각각 ‘고딕 양식의 총리와 그의 바로크 양식의 대리자’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것이 모양만을 설명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 기쁜 날에 에르하르트에게 칭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에르하르트는 사실 전혀 바로크의 장식을 생각하지 않는 현실주의자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아데나워가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칭찬이었다.     

특이하게도 재치 있고 신앙심 깊으며 충실한 노조 파인 요하네스 알버스가 이끄는 기민당(CDU) 사회위원회 위원들도 이 자리에 함께하였다. 아데나워에 비하면 알버스는 아직 애송이였다. 이 두 인물은 1912년부터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알버스는 22세였는데 그도 이제 벌써 70세가 되었다. 그는 정확히 73세 생일인 1963년 3월 8일에 사망하였다. 87세였던 아데나워는 그뤼체니히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한 추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뛰어난 점은 자기 이상과 원칙에 보여준 충실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제가 알기로 저도 포함된 그의 친구들에게도 충실했습니다.”     

독일노동자총연맹(DGB)의 빌리 리히터 위원장이 기민당(CDU) 사회위원회 위원들 다음으로 축하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고용주단체 연방연합회의 회장인 파울센보다 훨씬 앞선 순서였다. 그와 동료들은 오후 늦게 여당 대표들과 독일공무원협회를 오래 대표한 알프레드 크라우제 회장 사이에서 그것도 긴 행렬의 맨 뒤에 행사가 끝날 무렵인 오후 6시 55분 프리츠 베르크가 이끄는 독일연방산업연합회(BDI) 대표단 다음 차례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바로 이어서 샤움부르크궁의 광장에서는 독일군의 횃불 행렬이 진행되었다.     

주지사들은 베네치아 양식의 샹들리에가 빛나는 연회장에 오전부터 들어설 수 있었다. 그들은 사실 이미 승자들이나 다름없었다. 연방헌법재판소가 이미 정부의 텔레비전 방송국 설치에 관한 가처분 판결을 통해 아데나워, 글롭케, 폰 에카르트에게 재갈을 물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베를린 시장에게 반드시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 눈에 뜨인다. 브란트는 예절 바르게 순서를 기다리는 것으로 다가오는 선거 캠페인이 공정하게 진행될 것을 기대한다는 자기 뜻을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선거 캠페인이 서서히 시작되던 몇 달 뒤 브란트는 아데나워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 자신이 이야기 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에게 그의 ‘졸작들’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가 서로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정말 불가피한 일입니까?” 몇 년이 지난 다음에도 브란트는 아데나워가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한 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브란트 씨, 내가 귀하에 대하여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일잔치에서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법이었다.     

이는 사민당(SPD) 전체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지금 확인되는 의전과 관련된 변화만큼이나 사민당(SPD)의 우경화를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1960년 1월 5일 헤르베르트 베너가 이끄는 사민당(SPD)의 당대변인실은 아데나워의 생일에 그의 통치중독, 인간 경멸, 냉소주의, 최고위직 인사들에 관한 경솔한 대접을 비난했었다. 그리고 사민당(SPD)의 중간 관리에게 붉은색 카네이션 꽃다발을 전달하는 일을 시켰었다. 그런데 이제는 카를로 슈미트는 사민당(SPD)을 대표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는 의미로 85송이의 차장미를 선물한 것이었다.     

라인 지역과 베스트팔렌 지역의 기민당(CDU) 당 대표단 인사들과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헤센 주 기민당(CDU) 대표인 빌헬름 파이가 그렇게 일찍 니타난 것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노로드라인-베스트팔렌 주 기민당(CDU)은 여전히 연방 차원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중추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보쿰의 변호사와 공증인 출신인 요제프 헤르만 두푸에스를 원내대표로 임명할 것을, 여전히 당을 대표하는 아데나워에게 강요한 날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내무장관으로서 텔레비전 토론에서 아데나워 수상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에게, 다가오는 선거 캠페인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한스 에드가 얀을 회장으로 하는 민주 진영 실무단의 등장이다. 민주 진영 실무단의 인사들은 본 대학 총장의 뒤에 있었지만, 지방의회 의장단보다는 앞이었다. 오전 행사는 외교단의 축하로 마무리되었다.     

점심 휴식은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이때는 ‘가족들과의 아침 식사’와 ‘가까운 가족들과의 커피’가 주요 행사였다. 여기에 페르드멩게스도 아내와 함께하였다. 뉴욕에 있는 다니 하이네만의 축하 인사도 전달되었다. 그는 생일 선물로 뢴도르프 저택의 정원에 세울 차 마시는 정자를 보냈다.     

하이네만의 긴 생일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제가 90살이 되면 본으로 귀하를 방문하여 귀하의 기념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불행히도 오래된 세관에는 이미 다른 기념물이 서 있습니다. 거기가 참 좋은 장소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귀하의 기념비는 대학 근처에 세워야 합니다. 비문으로 적어도 오늘은 솔론의 말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배운다. 그것이 늙지 않는 방법이다.’(Je m'instruis toujours en vielllisant, c'est une facon de ne pas vielllir.)” 그 오랜 친구는 추신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서유럽이 무너지면 나머지 세계가 공산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이네만은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오랫동안 라인란트를 사랑했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 아데나워의 85번째 생일에 전문을 보내며 유명한 하이네만식의 사강음운 시를 담았다. “오늘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의 온 마음을 다해/라인에 나의 소원을 보냅니다./더 좋았을 곳으로.”     

대학에 아데나워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데나워 기념비의 위치에 대해 하이네만이 말한 것이 아데나워의 마음에 들었다. 1965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는 오토 슈마허-헬몰트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데나워는 그 기념비가 ‘아무 데나’ 세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과거 황제 기념비가 있었던 카이저플라츠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장소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 아니기에 지명을 바꿀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보통 많은 사람이 깊이 감동하면서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큰 생일 파티를 축하하지만, 재미있고, 신선하며, 재치 있는 아데나워 수상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과거와 미래가 14시간에 걸친 연속적인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서 깊이 성찰할 시간이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반대파들은 이 기회에 과거의 유쾌한 사건들만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 축제 분위기가 가시기도 전에 아데나워는 1월 13일 크로네와 글롭케와 매우 불편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던 것이다.9 1920년 대 후반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실패한 주식 투기에 관한 기사가 《슈피겔》에 뜬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의 폭발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경험에 따르면 정치인의 큰돈과 관련된 소문만큼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데나워 수상은 엠마 와이어와 결혼한 이후의 자기 재정 상태에 대하여 이 두 인물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진술을 속기사가 기록하도록 하였다. 자기 양심의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4장에 달하는 이 속기록은 크로네와 글롭케와 논의 후에 그들에게 보냈다.     

그 두 사람은 이때 아데나워가 첫 결혼을 통해 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엠마 와이어는 7~8만 제국 마르크라는 엄청난 재산을 지참금으로 가져왔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정도 액수의 유산을 다시 상속받았다. 1917년에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아데나워는 그의 형인 변호사 아우구스트 아데나워를 통하여 합의금으로 14~15만 독일 마르크의 보험금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약 30만 독일 마르크를 안전한 증권에 투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1917년에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결과로 독일 화폐의 가치가 상당히 하락할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1917/18년에 영국의 1파운드가 중립국에서는 48독일마르크로 교환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달러, 파운드, 스위스 프랑을 사기 위해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쾰른시의 모든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쾰른시 재정위원회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파는 것을 반대하였다. ‘반대 이외에는 모두 비애국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재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냉정하게 대응하며 마르크화가 폭락해도 재산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재화에 투자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크로네와 글롭케가 들은 바로는 1920년대에 유럽에서 새로운 전쟁일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우려가 컸었다. 그래서 미국에 자산을 투자할 것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27년과 1928년과 같은 평온한 시기에 이러한 동기가 거의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아데나워도 그 당시 만연했던 투기 광풍에 휩쓸렸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어지는 간략한 보고서에는 ‘미국 벰베르크’ 회사 주식의 투기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중 한 명이 다니 하이네만이었다. 아데나워는 1931년 이후, 특히 1933년의 무척 긴 여러 달 동안 수많은 편지와 메모를 통해 이 철저히 망한 투기에 관한 그의 조언을 활용했다.     

아데나워의 친한 친구로 나중에 7~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도이체방크 쾰른 지점장인 브뤼닝의 역할에 대해서는 간단히 묘사하고 있다. 그에 비하여 아데나워에게 그의 재산에 관한 긴급한 조언을 준 Vereinigte Glanzstoffwerke 회사의 총지배인이었던 블뤼트겐과의 만남에 관한 내용은 매우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데나워에게 미국에 있는 Vereinigte Glanzstoffwerke의 두 자회사의 낮은 가격의 상장 주식에 투자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테이블에서 메뉴 카드를 가져와서 증권과 그것의 수익률을 계산했습니다.” 아데나워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런 식탁의 대화로 내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은 너무 불확실한 일이었기에 그다음 어느 날 그에게 편지를 써서 이 증권에 대해서 문서로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그에 관한 상세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도이체방크 쾰른 지점의 브뤼닝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브뤼닝 씨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 투자를 권유하였기에 내 채권을 팔고 그 금액만큼 Vereinigte Glanzstoffwerke의 자회사 주식을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가가 처음에 상승했지만 곧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격 하락의 원인은 미국의 전반적인 경기 침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년 후에 찾아왔습니다. 걱정되어 팔고 싶었지만 블루트겐은 팔지 말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그는  팔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나중에 분명해진 대로 그는 확실히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곧 내가 그때 팔아버리면 도이체방크와 그 고객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상황은 주요 부분만 서술되어 있다. 물론 아데나워가 말한 것에 따라 다소 선택적으로 서술되었다. 곧 브뤼닝이 ‘아메리칸 밤베르크’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주식을 매각한 일, 당시 아데나워 쾰른 시장에게 칼스바트의 휴가를 과장되게 묘사하며 전한 하이네만의 불길한 소식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브뤼닝, 1933년 체포된 브뤼닝, 처음에는 도이체방크 쾰른 지점을 그러고 베를린 본부에 이 문제를 조사하고 그 피해를 보상할 것을 아데나워가 요구한 일들을 서술한 것이다.     

제3제국이 멸망했어도 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데나워의 보고에 따르면 이 거래 과정에서 자기 주식으로 아데나워의 주식 포트폴리오를 더 늘렸던 블루트겐이  이제 그 주식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끝으로 아데나워는 압스의 조언에 따라 Vereinigte Glanzstoffwerke가 블루트겐과 합의하여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압스는 아데나워가 블루트겐의 편지에 절대 응답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고도 하였다.     

물론 크로네와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여기서 올바로 처신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가 비난받을 일도 분명히 아니었다. 아마도 아데나워가 모든 일을 조용히 수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폰 에카르트가 공보실과 함께 이 불쾌한 이야기를 공론화하지 않은 것은 매우 뻔뻔한 짓이었다. 이 사건에 관한 《슈피겔》의 폭로 이후 진행된 공보실 회견에서 나온 연관 질문에 침착하게 대응하고 질문을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에 관한 수상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61년 분류의 첫 번째 위험한 급류는 무탈하게 지나가게 되었다.     

1961년 초와 초여름에 아데나워는 다시 정상에 선 기분을 느꼈다. 유권자들은 텔레비전 방송국에 관한 논란을 대부분 잊었다. 가톨릭 교회와 가정단체들은 만족해하였다. 농부들도 안정되었다. 4월 말 원내총무인 크라스케는 여론조사기관인 EMNID의 긍정적인 통계 수치를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보고하였다. 조사 대상자의 37%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26%는 사민당(SPD)을, 5%는 자민당(FDP)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지지 정당이 없는 이들도 28%나 될 정도로 많았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날씨 전망이 좋아도 원래 날씨란 자주 변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일기예보가 좋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수확한 것을 실제로 창고에 넣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7월에는 상황이 더욱 좋아 보였다. EMNID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39%, 사민당(SPD)아 28%, 기민당(CDU)이 7%의 지지율을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지 정당이 없는 21%는 여전히 불안한 요소였다. 무응답의 수치를 뺀다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지지율은 49.%가 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너무 승리를 확신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교 정치 상황은 “당분간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선거에 매우 불안한 요소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민당(SPD)을 외교 정치에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정당으로 낙인찍는 선거전략을 고수했다. 그들의 포옹 전술을 고려하여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 정책을 여전히 사민당(SPD)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에 관한 긴 성명을 여당 당 대표단 앞에서 했다. 그렇다면 독일군은 핵무장을 한 적으로부터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비극일 뿐. 3막도 아닌 단막극으로 끝나는 비극”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961년 6월 30일 제3대 연방의회 회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독일 연방의회에서 게르스텐마이어 연방의회 의장이 사민당(SPD)의 열렬한 박수를 받은 연설을 통해 외교 정책에서 협력을 강조한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했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평화 조약의 추진을 요청하였다. 이는 ‘하나의 독일과 하나의 조약’으로 체결되어야 하며 먼저 ‘절차’를 명확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1년 여름의 위기 상황에서 ‘평화 조약’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연방의회 의장은 특히 사민당(SPD)이 내세우는 두 가지 요점을 제시하였다. 곧 전체 독일의 군사적, 정치적 지위에 관한 합의의 필요성과 독일제국 시대의 국경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연방의회 의장의 자격으로 이 연설을 하며 회기를 마감했기에 정부는 이에 대해 논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논평을 내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었다. 당 내부의 대립을 궂이 밖으로 공개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측근이 이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하인리히 크로네 원내대표가 7월 3일 다음과 같이 한 말에 드러난다. “아데나워 수상이 전화했다. 그는 내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언론이 이미 그 내용을 보도한 것이 다행이었다. 사실 연방의회 의장인 게르스텐마이어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연설에서 연방의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 이상의 말을 했다. 사민당(SPD)과 미국 민주당은 게르스텐마이어를 위대한 공동정신의 정치인으로 환대하며 기뻐하였다. 게르스텐마이어가 평화 조약을 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장과 대결하는가? 나는 모든 대립을 피하며 설명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을 설득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우려하고 있었다.”     

폰 브렌타노가 있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게르스텐마이어가 ‘헌법 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면서 흥분하며 그를 비난하고 서면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기민당(CDU)의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와 폰 브렌타노는 연방의회 의장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몇 시간 동안 진행된 당 내부적인 도편추방제식의 재판에 대하여 크로네가 그의 일기에서 간결하면서도 매우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격노하며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려고 하였다.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 수상과 외무장관이 그를 공격하는 것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무었이겠는가? 결국 우리는 그를 다시 달랬다. 그는 당대 표단 성명 작성에 함께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이제 그들은 다시 화해했다. “폰 브렌타노와 게르스텐마이어, 그리고 나는 술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앞으로는 더 자주 함께 모이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사민당(SPD)의 안보 정책에 맞서는 기민당(CDU)의 선거운동의 방향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1960/61년 겨울에 흐루쇼프가 케네디에게 기껏해야 1961년 4월까지 시간을 줄 것으로 보였다. 봄이 지나면서 베를린의 상황은 다소 진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서베를린으로의 이동하는 난민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1961년 안에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루쇼프의 결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빈의 케네디와의 만남에서 흐루쇼프가 예고한 것에 관한 모든 진실이 새어 나오면서 아데나워의 근심이 다시 한번 고조되었다. 포이 콜러 미국 국무부 차관은 정상회담 직후 본을 방문하여 연말이 되면 점증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빈 회의에 관하여 들은 내용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루어진 아이젠하워와 흐루쇼프의 만남에 관한 보고서를 비교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이제 실질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아이젠하워는 대화가 첫날에 이미 마무리되었기에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총싸움이 난무하는 서부영화를 함께 보았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케네디라는 강한 대통령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크롤 대사에게 “아데나워는 녹색 클로버에 관한 케네디의 행동에 관한 칭찬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1961년 6월 11일, 소련은 흐루쇼프가 빈에서 연말 기한의 서면 최후통첩을 발표했다고 선언했다. 곧 동독과 서독, 두 독일 국가와 평화 조약을 맺든지 아니면 모스크바와 동베를린 간의 평화 조약을 맺겠다고 한 것이다! 이 경우 베를린으로 접근하는 것의 권한은 동독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었다. 베를린 접근로를 위하여 서양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이는 소련과의 전쟁으로 이해한다는 점도 밝혔다. 흐루쇼프는 6월 15일과 21일의 연설을 통해 신경전을 고조시켰다.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은 10월을 베를린 해결책의 최후 시기로 못 박았다. 흐루쇼프가 7월 2일 영국 대사 프랭크 로버츠와 발레 공연을 함께 관람한 뒤 나눈 긴 대화는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브레즈네프, 미코얀, 코시긴, 그로미코와 푸르트세바를 포함한 소련 지도부 전체가 여기에 함께했다. 따라서 흐루쇼프의 발언은 매우 공식적인 것이었다.     

대화 시작부터 소련은 언제든지 30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서방이 독일에서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도 했다. 베를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는 핵전쟁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10개의 원자폭탄만으로도 프랑스나 영국을 파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서방이 강제로 베를린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소련은 결코 전쟁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흐루쇼프는 물었다. “2억 명의 사람들이 2백만 명의 베를린 시민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     

흐루쇼프는 1959년 7월 제네바에서 결렬된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맥밀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부터 16년이 지난 다음에 잠정적인 전후 조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는 평화를 원했고 소련과 서구 열강 사이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은 독일 문제뿐이라고도 하였다. 영국도 프랑스도 케네디도 독일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모든 관계자, 심지어 아데나워도 오더·나이쎄 국경의 변경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두 개의 독일과 각각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어떤가?     

이 시점에서 흐루쇼프는 아데나워를 직접 공격했다. “유일한 장애물은 서독 수상이 서방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동서 간의 악화시킨다는 사실이다.” 프랭크 경이 서독 수상에 대한 비난을 관례적으로 반박하자, 흐루쇼프는 흥미로운 말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베를린 시장인 브란트보다 귀하에게 더 편한 사람입니다. 평화 조약의 체결이 확정된다면 그에 필요한 협상에 관한 권한이 서독 수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서방과 소련을 갈라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진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위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서방은 서독 총리가 정책을 좌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소련이 보기에는 평화적 해결책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독일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고집이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서방 강대국들의 체면에 관한 요구를 영리하게 계산에 넣은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소련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제시한 것이 자유 도시로서의 베를린이라는 구상이다. 베를린이 자체적인 경제적 사회적 체제를 갖추고 서방과 유대를 맺되 4개의 강대국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동독과의 평화 조약은 1961년에 반드시 체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서방 열강이 동독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베를린에 접근하는 것은 동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도 하였다. 만약 서방이 동독의 허가 없이 베를린에 군대나 비행기를 보내려고 하면 소련은 이것을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동독을 지원할 것이었다.     

적어도 서독의 총선은 지나야 한다는 프랭크 경의 제안에 대하여 흐루쇼프는 짜증을 냈다. “서방에서 치르는 이러저러한 선거를 계속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위원회는 1961년 7월 8일 비밀회의에서 프랭크 경이 소련 측과 나눈 대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보고 받았다. 크롤 대사는 7월 12일 모스크바에서 같은 내용의 소식을 전했다. 그로미코는 이를 동독과 서독 국경의 적절한 지점에 소련군이 배치될 것이라는 위협도 전했다. 소련 외무장관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독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소련의 목표는 분명했다. 독일 분단이라는 현상 유지가 국제법으로 인정되어야 했다. 베를린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또한 필요한 경우 독일군의 핵무장 문제를 들고나올 심산이었다. 전반적으로 1961년 말까지 예정된 최후통첩은 1959년 겨울과 봄처럼 다시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민주주의는 1938년 여름 수데텐 위기 때나 1939년 여름 히틀러의 폴란드에 관한 요구 사항을 고려해야 할 때와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다시 한번, 잔혹한 독재자가 제한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위협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확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7월 하순의 10일 동안 첫 반응이 나왔지만, 케네디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무렵에 아데나워는 여전히 무력 대결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그는 여전히 흐루쇼프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롤 대사는 여러 근거를 들어 그를 계속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1961년 중순에서 말까지 개최되는 소련공산당 제22차 전당대회 이전에는 흐루쇼프가 평화 조약 문제에 관하여 결정적인 조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이때 아데나워는 워싱턴에서 들려오는 소식만큼이나 모스크바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말은 유연하지만, 행동은 단호한 맥밀런을 갑자기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칭찬한 영국 총리는 1961년 6월 25일 자기 일기에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베를린 때문에 파국이 올 수 있다. 엄청난 외교적 패배나 (순전한 무능으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맥밀런은 독일 문제에 관한 폭넓은 협상을 신속히 시작할 것을 촉구하고 군사적 비상 계획을 터무니없는 쇼라고 여겼다.     

그러나 워싱턴의 결정 과정은 일단 불분명해 보였다. 다만 미국 행정부가 현재 상황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노선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으로 7월 25일 케네디는 놀라운 라디오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유럽에서 지속 가능하고 신속한 재래식 군사력의 구축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패한 쿠바 피그만 침공으로 야기된 약점에 대한 여론의 비판에도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제 독일 문제에 관하여 최대한 빨리 협상할 것을 4대 강국에 촉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이젠하워 당시인 1959년과 1960년에도 고려했던 포괄적인 양보가 거의 자연스럽게 다시 나타났다.     

베를린과 관련하여 서방의 이익이라는 것이 새롭게 정의되었다. 이는 아데나워를 포함한 독일 측에는 8월 13일까지 대부분 비밀로 숨겨져 있었다. 베를린 전체에 대한 4개 강국의 책임을 여전히 강력하게 강조한 아이젠하워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서베를린’이라는 의심스러운 용어가 1961년 6월 초반 이후 성명에서 자주 등장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제는 ‘서방 열강의 베를린 주둔’, 서베를린의 ‘자유로운 접근’과 ‘자유와 안보’가 핵심이 되었다.     

미국 행정부는 도심에서 이동의 자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의장인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1961년 7월 30일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동독이 국경을 폐쇄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국경을 차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어떤 경우에도 베를린을 둘러싼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강력한 흐름이 미국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월 초에 아데나워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과시적인 전쟁 준비를 즉각 시작하라는 케네디의 요구였다. 서방의 모든 관계자와 마찬가지로 늦어도 가을이 끝날 때까지는 베를린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것이 예상되었기에, 즉각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는 요구는 사실 타당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어떤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는 신호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요구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선거전략 측면에서 고려해 본다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슈트라우쓰 독일 국방장관과 카스텐스 미국 국무장관은 8월 3일 늦은 오후 카데나비아에 도착하였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의 전략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독과 관련된 서방 3대 강국과 서독의 장관급 회의가 1961년 8월 5일부터 7일까지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본의 정부는 구체적인 전쟁 준비에 관한 미국의 요구에 답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슈트라우쓰는 미국에 3주간 머문 다음 이제 막 돌아온 차였다. 그는 미국이 대체로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고하였다. 다만 서독이 이에 참전해야 한다는 조건에서였다. 워싱턴이 바라는 바로는 서독이 즉각 사단들을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1962년 1월 1일까지 추가로 세 개의 사단을 추가로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특히 9월 28일 제대 예정인 3만 명의 징집병들이 계속 군대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슈트라우쓰는 총선 다음날인 9월 18일에야 이를 발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가장 시급한 것이 즉각적인 탄약 주문, 보급품 강화, 8,000대 이상의 트럭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슈트라우쓰는 거의 30년이 지난 후 아데나워가 "매우 염려하고, 매우 조심스럽고,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라고 기억했다. 아데나워 수상은 자기 반론을 요약한 메모를 작성하였다. “나는 이에 강력히 반박했다. 나는 자민당(FDP) 내부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여 1961년 9월 17일 총선에서 과반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우리가 실제로 확실하고 일관된 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쓰 장관이 가시적인 전쟁 준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틀린 것이다. 모든 전쟁 준비는 가시적이다. 독일 국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파괴의 결과로 여전히 내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서 적어도 정당 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계층은 사민당(SPD)의 노련한 전략에 말려들어 사민당(SPD)에 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사민당(SPD)과 미국 민주당의 특정 세력과의 연계가 전쟁 준비로 매우 불편해질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리고 미국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절대다수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쟁 준비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조치에 단호히 반대한다. 나는 슈트라우쓰 장관에게 파리 협상에서 미국 측에 이러한 나의 입장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미국이 요구한 대로 1961년 12월 31일까지 사단을 구성하고 전쟁 물자를 확보할 수 없다. 이는 1962년 4월 1일에야 가능할 것이다.” 카스텐스 미국 국무장관은 독일 외무부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탄약 확보와 연합군 수용을 위한 국방예산의 즉각적인 증액을 아데나워에게 요청하였다.     

가시적인 즉각적 조치를 거부하면서 아데나워는 또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집권하던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이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뒤처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베를린 위기는 미국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할 좋은 기회가 될 터였다. 이제 그는 ‘빈에서의 성급한 회의’가 틀렸다고 생각하며 또한 7월 25일에 예정된 케네디의 연설 시기도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험프리, 멘스필드, 풀브라이트의 제안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흐루쇼프가 그 제안을 보고 미국이 내부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여긴 것이다. 아데나워는 영국에 대해서는 이제 더욱 회의적으로 되었다. 소련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런던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 흐루쇼프는 ‘여러 성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그에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므로 ‘서독이 이제 갑자기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 될 노릇이었다. 흐루쇼프는 소련 국민 앞에서 체면을 살려야 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2년 반 전에 다음과 같이 예측한 바가 있었다. “독일의 총선과 10월 17일에 열릴 소련 공산당대회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일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협상에 나서야 합니다.”     

아데나워를 매우 놀라게 한 베를린 장벽의 건설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베를린 문제와 독일 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정치적 그림이 종합적으로 볼 때 매우 안 좋습니다. 절대 착각하면 안 됩니다.”     

아데나워 혼자만 이렇게 비관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화해 정책을 추진했던 블랑켄호른 대사는 1961년 8월 첫 주 파리에서 개최된 전략회의 이후 상황이 매우 어둡다고 보았다. “서방 세계는 요즈음 1945년 이후로 공격적으로 나온 소련과의 가장 심각한 갈등에 직면해 있습니다. 만약 이 엄청난 세력 다툼이 오판이나 어떤 작은 사건으로 너무 쉽게 재앙으로 이어진다면 최후의 가장 강력한 노력이 요구되는 파국, 곧 결국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와 맞서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와 같은 무력시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위기를 극복할 기회를 제공하지만, 군사 분야 (미사일)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 소련의 힘이 급격히 증가하게 될 것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미국 전문가들의 견해가 매우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에게 더욱 큰 손실을 주고 훨씬 더 절망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의 과시는 필요합니다. 서방이 이러한 무력시위를 더욱 노골적으로 할수록 소련 정부가 한 걸음 물러날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이 내용을 보면 1914년 7월 베트만 홀베크 제국 수상이 무력시위를 감행하도록 이끈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아데나워는 역사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모든 관계자의 체면을 살리면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는 다가오는 위기에 최대한 비영웅적으로 접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총선이 끝난 다음 최대한 신속하게 협상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의 전술은 모스크바와의 협상 개시를 포함한 모든 문제에 관한 결정을 총선까지 연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즉각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면 서독 정부는 일련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급한 결정을 내려 경솔함으로 국내 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실향민 문제를 다루면서 단순히 국경 문제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현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지지하고 있기에 총선에서의 과반수 득표는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없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의 생각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독일 정책에 관한 필수적인 양보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드골이 전쟁의 위협을 받아 가며 협상에 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좀 더 강력하게 제기하였기에 폰 브렌타노와 카스텐스는 파리에서 흐루쇼프에게 그 어떤 공식적인 협상안을 제기하지 않는 전략을 고수하였다. 협상할 준비가 된 영국과 미국이 유럽 대륙의 동맹국과 크게 대립했다는 사실은 최종 공동 성명조차 나오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맥밀런이 몰래 8월 11일 자기 일기에 요약한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와의 협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될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 측은 너무 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너무 불편하다.”     

맥밀런이 이러한 결론을 내렸을 때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카데나비아에서 아데나워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61년 4월 이후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맥밀런은 거의 감출 수 없는 허세를 부리면서 러스크를 ‘학문 세계의 지식 이외에는 경험이 별로 없는 교수’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보기에도 러스크는 아직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덜레스와는 달리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러스크를 만난 아데나워 수상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이전에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한 것처럼 솔직한 대화를 나누겠다고 말했다. 러스크는 이를 큰 칭찬으로 여겼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 수상은 미국 국무장관 앞에서 독일이 최근 수 세기 동안 독재자를 겪어내고 또한 러시아와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해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긴 강의를 했다. 이와 연계하여 아데나워는 미국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케네디의 ‘훌륭한’ 연설과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결정적인 조처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처가 주는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풀브라이트나 맨스필드 또는 험프리와 같은 상원의원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안보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흐루쇼프에 관한 분석이 이어졌다. 이때 아데나워는 흐루쇼프가 조국인 소련의 경제발전을 간절히 바라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보았다. 그래서 요점을 말하자면 만약 소련의 공격이 있다면 서방의 소련에 관한 경제적 제재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독에도 동방무역을 위한 통로가 있지만 이것이 중단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에 대해서 아데나워는 매우 미온적이었다.     

러스크는 아데나워가 협상을 주도하기를 바라는 케네디의 뜻을 전하자 아데나워는 그 문제는 매우 신중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협상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아데나워는 러스크의 제안에 답을 하였다. 러스크는 10월 초와 11월 사이에 [소련과] 협상하겠다는 제안을 9월 첫 주에 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1945년에 서방 강국이 베를린에 서방 수비대를 설립하면서 튀링겐, 작센, 메클렌부르크에서 철수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워싱턴이 회의 계획을 수립하면서 독일 총선 문제에 관한 이해를 보여준 것에 감사하였다. 최근에 독일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은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더 이상 기민당(CDU)에 협조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빌리 브란트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트는 사실 지난 금요일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행한 연설에서 베를린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비난을 뒤집어쓰는 것이 라인강의 서안에서 독일 민족이 다시 한번 분열되는 것을 감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정작 논의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동부 점령 구역의 폐쇄 가능성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7월 26일 흑해 소치에서 8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흐루쇼프와 존 맥클로이가 논의한 내용을 알아내려고 하지도 않고 서베를린에 관한 미국 안전 보장의 한계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또한 대응책에 관해서도 그저 경제적 보복을 포함하자는 아데나워의 차선책 정도만 논의했다.     

이렇게 심각한 위기가 발발하기 전의 마지막 카데나비아 휴가가 끝났다. 러스크는 벨라지오 근처의 빌라 세르볼리니로 향했다. 매우 말을 아끼는 아데나워가 빌라 콜리나에서 식사한 다음 보트를 타고 코모호수와 말펜사 근처의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이탈리아의 판파니 총리는 1961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 휴양객과 매우 심각한 세계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코모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호수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을 보면서 아데나워가 이탈리아어로 두세 번 말하는 것을 들었다. “행복은 늘 강 건너에 있지”(La felicita sta semper ad altera riva).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곧바로 그의 정적, 곧 브란트의 고향인 킬과 뤼벡에서 처음으로 선거전에 몰입하였다. 뢴도르프에는 8월 12일 토요일 오후 5시경에 돌아왔다.     

8월 13일 일요일 아침 7시 직전에 글롭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베를린의 통금 조치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글롭케는 이미 6시 직전에 베를린 시장 암렌으로부터 보고받았다. 그 직후 독일 전체 문제를 담당하는 에른스트 레머 장관은 글롭케에게 전화를 걸어 암렌 시장의 보고에 더하여 소련군, 특히 기갑부대가 구역 경계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전달하였다. 레머는 또한 연합국이나 베를린 시민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커다란 소동이 벌어질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글롭케가 기억한 바에 따르면 레머는 그렇게 말하면서 1953년 6월 17일에 일어난 일을 언급하였다고 하였다.     

한 시간 후 레머는 아데나워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데나워의 말에 따르면 레머는 동부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레머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서 아데나워에게 즉시 베를린으로 가볼 것을 조언했다고 썼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 문제를 최대한 무시하기로 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아데나워가 베를린에 즉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8월 15일 자 그의 일기에서 수상실의 의견이 갈렸었고 말했다. “많은 이가 침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미온적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고위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역 안에서 침착하게 머물러라. 서베를린 안에서 침착하게 머물러라. 조용함은 시민의 첫째가는 의무이다.’ 이것이 그 구호였다.”     

‘미온적 대처’는 이미 8월 13일 아침부터 분명했다. 하필 이날 미국 코네티컷 주의 상원의원 토마스 도드가 독일 국무장관인 글롭케와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도드 상원의원은 확실한 반공주의자이자 친독파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측근은 풀브라이트, 험프리, 맨스필드와 같은 상원의원들과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글롭케와 함께 그를 영접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제시하였다. 동부에 신중한 자세로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으로 날아가는 도드에게 이러한 뜻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 측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일요일 오후 아데나워는 글롭케와 크로네와 더불어 뢴도르프에서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나중에 글롭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기에 강경한 조처를 하는 것은 우려스러워 보였다. 글롭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데나워가 베를린으로 직접 날아가는 극적인 방안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롭케의 회상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그렇게 했다면 총선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감정을 악화시킬 위험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한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정당의 이익은 국가 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회의의 보고서는 또한 서방 연합국의 외교적 대응의 불확실성을 지적하고 있다. 지역간 무역 협정의 파기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베를린의 접근 경로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서방 동맹국들에는 통행금지에 대한 [베를린 시민의] 반발에 그 어떤 폭력적인 조치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크로네와 전화로 내용을 조율한 아데나워의 성명은 온전히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단호하지만 침착하게 동방의 도전에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상황의 개선이 아니라 악화만을 조장하는 조치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8월 13일 아데나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발발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자기와 같은 많은 노인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8월 13일과 그 이후의 자기 행동에 관한 비판적인 질문에 직면했을 때 사과하면서도 그 당시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동서 베를린의 경계 지역에 나타나면 그것이 봉기하라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데나워와 글롭케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여러 다른 궁리도 하고 있었다. [동독의] 울브리히트가 연결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도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항공로가 차단되어 아데나워가 베를린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아데나워가 쉔베르커 시청사 앞에서 수십만 명의 베를린 시민들 앞에서 브란트와 나란히 서서 연설한다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선거운동에서 브란트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     

이 단계에서 총선 전략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선거전이 본격적인 단계로 막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극단 논리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다. 아데나워는 이 성공적인 방식으로 지금까지 총선을 훌륭하게 치러왔다. 여기에 더하여 일단은 평소에 하던 대로 한다는 방침에 따라 선거를 치르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그래서 8월 14일 저녁 레겐스부르크, 8월 16일 본, 8월 18일 에센에서 주요 행사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폰 브렌타노 외무장관이 8월 14일 아침 만났을 때 당연히 방침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점심때 함께 TV 카메라 앞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당황해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서방 열강이 아직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은 것도 이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가정만이 텔레비전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부정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레겐스부르크의 유세에서 브란트에 관한 독설이 섞인 인신공격이 나왔다. 이는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는 아데나워가 이미 오래전에 똑같이 발언했었다. 그것을 이틀 후에 본의 버스 중앙역에서 열린 집회에서 ‘프람이라고도 불리는 브란트’라는 단어를 도발적으로 반복하여 사용한 것이다. 물론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두 경우 모두 브란트가 먼저 근거 없는 인신 공격을 했기에 되갚은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외무장관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나선 것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 그가 저지른 회복 불가능한 둘째 실수였다. 대중의 반응을 보면 아데나워가 한 번에 세 가지 실수를 동시에 범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감정 대립을 고조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 연대를 촉진하기보다는, 그저 선거운동을 계속하였고 브란트는 모든 선거 유세 일정을 당분간 취소하였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브란트와 베를린 사람들을 아버지처럼 달래지 않았다. 사실 논쟁은 나중에라도 다시 할 수 있는 법 아닌가? 그 대신 아데나워는 오히려 선거 유세를 진영논리로 몰아갔다. 그러면서 그는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공격할 뿐만 아니라 매우 거친 방식으로 인신공격까지 하였다. ‘프람이라고도 불리는 브란트’라는 말은 빌리 브란트가 조국을 떠난 사실과 그가 혼외자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데나워는 과거에도 종종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품위 없는 발언을 했다가 결국 자살골을 넣은 꼴이 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은 금방 하찮게 넘겨버리고 잊었다. 결국, 사람들은 그의 선거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이 극도로 고조된 때였다. 그의 모든 발언은 정확하게 평가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이런 발언으로 그의 정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아직 결심하지 않는 많은 사람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대는 국가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아데나워는 선동가의 모습만 보여준 것이다!     

아데나워가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언급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런 와중에 완전히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가 언급한 서방 무기의 완전한 금수조치 말이다.     

8월 15일과 16일의 국무회의는 주로 정보 교환과 정부 선언문 초안을 작성위한 것이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또한 8월 1일 베를린 쉔베르거 시청사 앞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관급 회의에서는 아데나워의 매우 신중한 노선이 다른 각료들도 지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하인리히 크로네가 극도로 싫어했음에도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베를린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수년 전부터 확신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 원자력부 장관 발케는 그러한 말도 공개적으로 발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적어도 아데나워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스미르노프 주독 소련대사가 면담을 요청했다. 8월 16일 화요일 12시에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 글롭게, 오스터헬드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스미르노프의 장황한 메시지는 선전과 위협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흐루쇼프가 크롤 대사에게 해왔듯이 이제는 본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모든 문제 해결에 평화로운 협력을 다시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스미르노프는 1955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유익했던 회담을 언급하면서 흐루쇼프를 대신하여 현재 논란이 되는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며 베를린 장벽 건설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범죄 정책을 언급하면서 스미르노프는 또한 아데나워가 갈등의 고조와 호전적 행위를 피하지 못하면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아데나워는 동부지역에 있는 독일 국민을 감금한 것에 대하여 소련대사에게 즉각 강한 유감을 표하는 대신에 먼저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흐루쇼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스크바회담을 기꺼이 좋게 기억하며 최대한 신속하게 방금 논의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독일 총선 이후에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자신은 현재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하려는 목적에 모든 정신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스미르노프는 눈을 깜빡이면서 총선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지만 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니라면 총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아데나워는 베를린에 대해 최대한 신중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의 생각에 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성가시고 불쾌한 문제였다. 그는 소련 정부가 완화 조치를 해줄 수 있다면 감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베를린과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을 솔직히 두려워하였다. 상황은 실제로 끔찍하다고 할 수 있으며, 소련 정부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준다면 매우 감사한 일이라고 하였다.”     

스미르노프는 냉소적인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대표들도 베를린에 관련된 조치를 결정하면서 베를린 시민들에게 ‘어느 모로 불편을’ 초래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베를린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된다면 이러한 조치가 “검토되고 변경될 수 있으며 잠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브란트와 레머와 파리 외무장관회의 결의안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위협 조로 말을 이어갔다. “브란트나 다른 정치인들이 위험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면 그에 대비하여 추가적인 조치도 검토될 것입니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동독에서 유혈 사태는 물론 그 어떤 불안도 허용하지 않기로 굳게 결의했다고 하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라는 아데나워의 요청은 즉시 소련 정부에 전달되었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이 최근 이탈리아 판파니 총리로부터 흐루쇼프가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묘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비판하고 나서자, 스미르노프는 흐루쇼프가 그런 생각을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흐루쇼프가 최근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의에서 현재 긴장이 고조된 세계적 상황에서 전쟁을 막는 방법을 아데나워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모든 것을 서로에게 말하고 나자 스미르노프는 준비해온 또 다른 성명을 꺼내 들었다. 그 내용은 이 음울한 대화의 어조에 매우 잘 맞는 것이었다.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이 성명을 발표하지 말것을 제안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만 아데나워의 요청에 따라 베를린 장벽의 설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매우 빛바랜 문장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베를린 상황에 관한 의견을 스미르노프 대사에게 말할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소련대사는 폭력적인 충돌을 억제하고 적어도 이제부터는 선거 활동을 방해받지 않는다는 두 가지만을 목표로 삼은 매우 부드러운 총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대담에서 나름대로 동부지역의 봉쇄가 베를린에 이어지는 통로의 차단 조처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조심스러운 소극적 태도는 사실 케네디와 맥밀런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8월 16일 《빌트》는 이것을 매우 독설적인 제목으로 표현하였다. “서방은 아무것도하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침묵했다. 맥밀런은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브란트를 비난한고 있다.”     

케네디나 맥밀런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요란한 대응책은 적절치 않다고 여겼다. 8월 17일 여러 언론인이 그를 방문했다. 그날의 뉴스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8월 16일 25만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빌리 브란트와 함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브란트는 서독 정부가 처음에 전혀 알지 못한 서한을 케네디에게 전달했다. 소련 측의 도발이 있은 지 60시간이 지난 후 서베를린의 3국 사령부가 재기한 무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마침내 아데나워와 스미르노프의 대담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레겐스부르크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보였다. 곧 소련에 관한 금수조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베를린 동부지역의 역사 때문에”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비밀 대화를 통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아데나워가 그런 식으로 깊은 생각 없이 말을 한 것에서 그즈음 벌어지는 많은 정신 사나운 일들에 관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베를린을 너무 늦게 방문하여 베르나우어가를 지나 다시 한번 마리엔펠데 임시 수용센터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가 왔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직후에는 전쟁에 관한 두려움, 냉정한 국시(國是)에 관한 고려, 선거전의 계산만이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그가 볼 때 이제 상황은 위기의 시작에 놓여있었다. 아데나워는 8월 16일 악셀 스프링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은 결국 직접적인 전쟁 위협에 이르는 일련의 조치들의 첫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빌트》가 선정한 다음과 같은 제목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만일 상황이 정말 심각해지면 독일 국민과 언론의 불안은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     

아데나워는 일단 브란트가 케네디에게 보낸 강한 어조의 서한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불편한 심정으로 밝혔다. 그는 자신이 신중히 반응한 것은 케네디 대통령과 맥밀런의 뜻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맥밀런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맥밀런은 베를린 장벽의 건설로 글레네아글레스에서 치고 있던 골프가 방해받은 것에 대하여 기자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무도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데나워는 빌리 브란트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자신이 소심하게 행동한 것이 그의 선거운동을 망치고 있음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베를린 시장이 사건 현장에서 멋진 모습을 남기는 동안 아데나워 수상은 무력하고 무감각하며 부당한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그가 베를린에는 무관심하고 독일이 아니라 단기적인 총선의 승리만을 생각한다는 널리 퍼진 편견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듯했다. 또한 8월 16일부터 브란트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사민당(SPD)의 선거운동에서 계속 등장한 주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몇 년, 몇 달, 몇 주에 벌인 실책들”이라는 주제를 비판적인 언론과 야당이 널리 선전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또한 실패하고, 활력 없고 매우 기만적인 [아데나워의] 통일 정책에 관한 증거이기도 했다!     

8월 17일 오후 샤움부르크궁에서는 선거 대책 회의가 열렸다. 아데나워는 이제 첫 번째 긴급 여론조사의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매우 좋았던 분위기가 7월 들어 확실하게 악화되었다. 6월 말 49%였던 그의 지지율이 7월 말에는 45%로 떨어졌다.     

베를린 장벽의 건설 자체는 아데나워의 지지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지지하지 않는 비율이 7월 말 18%에서 8월 말 26%로 급증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관한 지지율의 가파른 하락이었다. 7월 말의 49%에서 8월 중순에는 35%로 하락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집권기 전체에서 이렇게 빠르고 깊은 추락은 일찍이 없었다.     

대체로 이는 세 가지 잘못된 결정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곧 베를린에서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매우 좋지 않은 때 브란트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한 일, 아데나워에게도 책임이 있는 서방 국가들의 방관이 그것이었다.     

언론인인 찰스 하그로브가 총선 직후 아데나워에게 서독 정부도 예측력이 부족했고 무대응으로 일관한 결과 연대 책임이 있지 않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라틴어로 ‘장벽 안팎으로 잘못이 있다’(Peccatur intra muros et extra!)라고 대답했다. 브란트는 그의 연설이나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로 약간 매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워싱턴도 잠깐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브란트는 뭔가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갑자기 아데나워에게 나쁜 인상을 바로 잡을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케네디는 서베를린과 독일 전체의 분위기가 안 좋게 변하고 있음을 깨닫고 상징적 정치를 통해 이에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8월 19일과 20일, 그는 전설적인 루시우스 클레이 장군과 함께 존슨 부통령을 독일로 파견했다. 존슨은 베를린에 있는 1,500명의 전투 병력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아우토반을 통해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혼란스러워하는 독일 여론이 바랐던 바로 그러한 커다란 쇼에 불과한 것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서독의 수비대 전체와 더불어 독일이 쉽게 제압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전쟁 영웅으로 미화된 케네디가 소심하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원한 것이었다.     

베를린으로 날아가기 전에 존슨은 잠시 본을 들렀다. 쾰른-반 공항에서 서독 수도로 가는 도중에 이미 아데나워는 존슨 부통령에게 베를린까지 동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어진 회담에서 아데나워를 동행하는 것에 관한 답을 달라는 요청을 받자 존슨은 다우링 대사와 함께 샤움부르크궁의 화장실로 가서 논의한 다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답을 하였다. 독일 총선의 선거운동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이라는 사람은 존슨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분명한 요구 사항을 제기하며 맞서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하거나 운명론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브란트도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더욱 짜증나는 일이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미 준비된 비행기를 타고 먼저 베를린으로 날아가서 템플호프 공항에서 에서 존슨을 맞이하자는 탁월한 구상은 폰 브렌타노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폰 브렌타노는 자신이 나서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 대신에 자신이 비행기를 타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우유부단하여 감정의 대립이 극단을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베를린 주둔 미군들에게 인사를 할 기회를 놓쳤다. 그들은 베를린 시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리하여 빌리 브란트는 6시간 동안이나 존슨 곁에서 함께 돋보일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일련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8월 22일과 23일에 마침내 단독으로 베를린시로 날아갔다. 이는 통상 그가 거의 10일 동안 심리적 명령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총선 이후 아데나워 다음으로 수상이 되고 싶어하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후일 말한 바에 따르면 이때 아데나워의 지도력에 관한 그의 신뢰가 ‘마침내 흔들렸다’라고 한다. 오랫동안 아데나워를 우러러보아 왔던 게르하르트 슈뢰더도 겉으로는 이러한 평가와 거리를 둔 것처럼 보여도 그 속내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과거 본능적이고 번개처럼 빠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베를린으로 갔어야만 했다!” 여당의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반면에 아데나워의 최측근들은 그가 특히 이번 위기에서 어떻게 더 성장하였는지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연속되는 회의와 전화 통화, 그리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전문이나 언론 보도에 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동안에도 여러 지역에서 간단한 연설을 하며 하루 종일 선거 여행을 하였고 때로는 저녁에만 선택적으로 선거 유세를 하였다. 전에 있었던 헤르만 괴링의 오래된 세단 자동차를 이용하던 약간은 여유로운 여정은 이제 대부분 바쁘게 비행기로 날아가서는 자동차로 돌아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운전기사는 평소와 같이 과속으로 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도 기자회견과 텔레비전 출연도 이어졌다. 호르스트 오스터헬트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종종 1~2시에 잠자리에 들어 5~6시에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물론 아데나워는 마지막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연정할 것이라고 선언한 자민당(FDP)을 신뢰하지 않았다. 한스 자이델의 사망 이후 기사당(CSU) 당대표로 선출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회의에 참석 한 8월 25일의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민당(FDP) 의원의 3분의 1은 사민당(SPD)과의 연대를 절대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또 3분의 1은 그에 절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기민당(CDU)이 과반수를 차지해야만 독일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예감하고 있었다. 이미 7월 10일 장벽이 건설되기 전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기사당(CSU) 사무총장 인 프리드리히 침머만은 빌리 와이어와 벌써 정치적으로 꽤 성장한 뒤셀도르프의 ‘젊은 터키당원’인 ’볼프강 되링을 [독일 백화점 체인 기업인] Kaufhof의  ‘왕’인 헬무트 호르텐의 집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총선 이후 아데나워의 후계자 문제는 기민당(CDU)과 논의해서 해결할 것에 동의하였다. 기사당(CSU)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연방 수상으로 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슈트라우쓰가 자민당(FDP)에 호의를 보인 것은 새로운 발전이었다. 지금까지 자민당(FDP)은 그를 주요 정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본의 정치적으로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들은 이미 슈트라우쓰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그저 곧 용도 폐기 될 과도기 수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슈트라우쓰에게 길이 열릴 것이었다.     

또 다른 음모를 꾸미는 자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였다. 그는 현재 륍케 대통령이 은밀히 동의하고 있는 대연정을 위해 사방으로 모든 정당과의 접촉을 준비하고 있었다.     

총선 이전에 이미 이렇게 당내에서 연정 방안을 꾸미는, 아데나워의 핵심 인사들은 여전히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역 출신의 기민당(CDU) 거물 정치인들과 하인리히 크로네였다. 1961년 상반기에 아데나워는 가끔 크로네에게 자기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며 환심을 샀다. 폰 브렌타노는 지금까지의 외교 정책 전체가 현재 어떻게 혼란에 빠졌는지에 관한 인식이 더 명확해질수록 아데나워가 총리로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하게 되었다.     

9월 17일 총선을 앞둔 몇 주 동안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전쟁에 관한 두려움이었다. 8월 마지막 주에 서방 사령부 휘하의 군대는 구역 경계에 배치될 것이었다. 미군의 전차가 동독의 인민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소련이 공격을 위해 베를린 전역에 군대를 소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아데나워에게 당도하였다. 소련군 3개 사단과 동부지역군 3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이는 글롭케의 주장이었는데 독일정보부의 자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련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으면 서베를린은 3~-6시간 만에 점령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런 불안한 소식은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그러나 케네디는 베를린으로 가는 육로나 항공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는 공격 행위로 간주 될 것임을 미국이 흐루쇼프에게 분명히 밝혔다고 아데나워에게 알려왔다. 이에 관한 미국의 결의는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오판을 할 때 전쟁의 위험이 고조될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었다.     

총선 10일 전에 아데나워와 만난 노스태드 장군도 비관적이었다. 그는 매파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현재 상황이 1935년부터 1937년까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고 아데나워에게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상황은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와 노스태드는 베를린 접근 통로를 놓고 싸울 때 재래식 무기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아데나워는 동부지역에서 봉기가 발생하면 서독군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노스태드는 아데나워의 소극적 태도에 동의하면서 서독의 독일군과 동독의 인민경찰 간의 전투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동독지역의 민중봉기의 위험이 더 이상 심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봉기가 전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독일군이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그의 바람을 강조하였다.     

38,000명의 예비군이 실제로 9월 30일까지 소집 해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다시 한번 자세히 논의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결정대로 당분간은 과감한 조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데나워는 결정적인 선거일을 앞둔 마지막 주일 동안 ‘평화의 총리’로 전국을 순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한 독일이 미국 및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미국에 관한 실망에서 나온 비판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여전히 케네디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매우 신중한 국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민당과 그 수상 후보에 관한 편 가르기식 공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자문을 구하는 일부 기민당(CDU) 지지 언론매체의 편집인들은 아데나워가 정적을 ‘나무망치로 두드리는 일’을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79. 그 요구가 잠시 효력을 보이는 듯싶었으나 아데나워는 곧 평소대로 언행을 이어나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민당(CDU)이 전력투구를 한 결과 다시 지지율이 오르게 되었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8월 중순 35%에서 9월 중순 46%로 상승하였다. 선거 전부터 자민당(FDP)의 최종입장이 분명해졌다. 자민당(FDP)은 이제 영리한 이중 전략으로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멘데 당대표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의 연정에 찬성한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이제는 수상이 바뀔 때가 되었다는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현재 85세인 수상에게 은퇴할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민당(FDP) 유권자들은 기민당(CDU)이 결정한 정책이 연속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아데나워에는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성실성과 선의에 관한 신뢰도를 높여 왔기에 자민당(FDP)도 에르하르트가 대안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멘데와 그의 동료들은 에르하르트가 총리가 되면 발생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아데나워가 퇴위하고 에르하르트가 즉위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지켜볼 일이었다.     

9월 17일 총선 결과는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45.3%만을 득표하여, 5% 조항에 따라 7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확보하였어도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였다. 자민당(FDP)은 12.8%의 득표율로 67석을 확보하여 당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SPD)의 득표율도 이전의 31.8%에서 36.2%로 올랐다.     

이미 선거 날 저녁에 아데나워를 제거하고자 하는 여당 의원들이 에리히 멘데를 중심으로 계획을 제시하였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연정은 아데나워 이외의 총리 아래서도 ‘당연히’ 가능한 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맨데는 수상과 관련된 문제의 논의 결과가 자민당(FDP)의 연정 참여 의지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슈트라우쓰는 예언하듯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수상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물은 많이 있습니다. 기사당(CSU)의 결정은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에르하르트 박사를 지지합니다.” 다만 그가 에르하르트를 차기 수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과도기적 해결책으로 여기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르신께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선거일 밤에 아데나워는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특히 슈트라우쓰의 발언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여 정확한 결과는 이른 아침에 그에게 전달되었다. 체닉스벡의 뢴도르프 집을 떠나면서 그가 풍자적인 의미가 담긴 ‘선단의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과거 독일제국 해군이 배가 침몰할 때 부르던 노래로 다음과 같은 담대한 가사가 들어 있었다. “흑·백·적 삼색기가 자랑스럽게 휘날리네.”


그는 두 가지의 업적을 완수했다. 6주가 넘는 어려운 시기에 지도력을 발휘하여 정부를 쇄신했다. 동시에 그는 케네디가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하여 소련 측에 포괄적인 양보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어르신’의 정치적 재능은 심지어 그의 반대자들에게조차 어느 정도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자민당(FDP) 측의 정부 구성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빌리 바이어는 9월 29일 당의 중요 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어르신의 침착함이야말로 참 대단한 것입니다. 9 월 17일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어르신께서 무덤에서 빠져나와 훌륭한 협상 기술과 훌륭한 협상 전술로 다시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아데나워는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선거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시 확신에 차서 분명한 의지로 수상의 자리를 일단 거머쥐면, 권좌를 노리는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일단은 감히 그의 길을 막아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여기에서 일단이라는 말은 수상 선거에서의 일차 투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시저를 찌른 브루투스처럼] 먼저 나서서 아데나워를 단검으로 찌르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에르하르트만이 아니라 게르스텐마이어도 주저하게 만든 강력한 동기였다. 그런데 게르스텐마이는 에리히 멘데와 협상하면서 이러한 동기에 대하여 슈바벤 사람다운 투박한 말투로 이야기하였다 “저는 아데나워 총리의 살해자로 역사에 남을 야망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아데나워가 수상 후보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협상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다. 먼저 자민당(FDP)은, 기민당(CDU)의 실세들이 반감을 품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어도 수상 선출 과정에서 아데나워에 직접 맞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둘째도 첫 번째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곧 아데나워가 필요한 경우 사민당(SPD)과 연정을 수립할 것이라는 사실이 자민당(FDP) 측에 분명히 전달되었다. 수상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데나워는 친구든 적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민당(SPD)은 한목소리로 12년 동안의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을 요구던 차라서 어떤 타협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를 고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가 에르하르트를 샤움부르크궁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멘데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은 기민당(CDU) 지도부 안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좋든 나쁘든 공개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실패한 음모가로 머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9월 18일 월요일 낮 12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여당 강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침착하게 나서서 사민당(SPD)이 요구하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흑·적 연정, 곧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의 연정에 관한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하였다. 그러면 자민당(FDP)은 어찌 되는가? 어찌 되었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연합은 연방의회 의석의 48%를 차지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기존의 외교 정책의 지속이라고 천명하였다. 기자회견이 끝난 다음 아데나워가 자기 주도로 다시 정부를 구성하려는 의도에 추호의 의심이 없게 되었다.     

기자회견장을 떠난 아데나워는 30분 후 치과 의사를 찾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크로네와 글롭케와 회의를 하였다. 수상이 두 사람에게 말하고자 한 내용을 크로네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분은 정치 현장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에르하르트와 예정된 면담이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이제 업무를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에르하르트에게 약 2년 후에 수상직을 그만둘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꺼냈다. “에르하르트 귀하, 나는 [수상 후보로] 당신 말고 다른 인물은 모릅니다.” 이것은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에게 한 공개적인 다짐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에르하르트가 적어도 1차 투표에서는 그에게 맞서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어진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와의 대화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에 공개적으로 맞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와 슈뢰더와 각각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아데나워는 이어진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어떤 전술을 써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회의에서 누군가 불합리한 요구를 하기 전에 아데나워는 직접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지금 수상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당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직무를 4년 더 수행할 의도는 없습니다. 내 건강이 허락한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수상으로 선출된다면 나의 막연한 생각으로는 정말로 막연한 생각으로는 나는 그 4년 임기의 중간쯤에 물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에 올라 1965년 총선에 대비하도록 할 것입니다. 1965년 총선에 대비하여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회의 말미에서 그는 그러한 자기 뜻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원내대표인 크로네에게 제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크로네 씨가 그 문서를 여당 기록 보관소에 보관할 것입니다. 그 서한의 형식에 대해서는 생각해보겠습니다. 명료한 형식이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처음부터 그와 같은 통 큰 양보로 나오니까 수상의 즉각적인 교체에 관한 모든 요구가 철회되었다. 그는 심지어 한마디 더 하면서 하루 전에 그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에게 확언한 내용도 당 대표단에 전했다.      

그런데 에르하르트는 여기에서도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공개 성명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격렬한 논쟁에서 에르하르트가 밀리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여당의 거물 가운데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만이 수상 선출 규정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설명하면서 아데나워 에게 2차나 3차 투표의 위험을 피하고자 품격 있는 아량을 베풀 것을 권유하였다. 물론 이는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위협이었다. 당 대표단과 여당의 분위기는 한참 후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설명한 대로였다. “아데나워가 없는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말들이 있었지만, 기민당(CDU) 내부에서는 아데나워에 관한 충성 서약이 여전히 우위에 있었다. 아데나워와 관련하여 그에 맞서려는 그럴듯한 영웅적 결단이나 영웅인 척하는 용기를 내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막상 실제 상황이 되자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내부의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기사당(CSU) 당대표로 참석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에게 기사당(CSU)이 확실한 소수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어쨌든 기민당(CDU) 당 대표단은 아데나워에게 수상 재선출을 목적으로 하는 협상을 이끄는 일을 위임하였다.     

다음으로 자민당(FDP)을 겁박하는 일이 남았다. 에리히 멘데는 어리석게도 9월 19일 당과 더불어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천거할 것을 확정했다. 아데나워의 반격이 즉각 이루어졌다. 같은 날 그는 하인리히 크로네를 자민당(FDP)에 보냈다. 아데나워는 필요하다면 사민당(SPD)과도 힘을 합칠 의사가 있음을 전했다. 크로네는 자민당(FDP)이 아데나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면 사민당(SPD)과의 대화를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9월 25일 아데나워는 보란 듯이 에리히 올렌하우어와 프리츠 에를러, 그리고 심지어 헤르베르트 베너까지 불러서 전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2시간 동안에 걸쳐 일장 연설을 했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연정에 관한 문제는 여기서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데나워가 자민당(FDP) 지도부를 만나기 전에 이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후, 베를린 시의회 의원인 클라인이 글롭케 국무장관에게 사민당(SPD) 인사들이 대화 내용에 매우 만족해했다고 알려왔다. 빌리 브란트도 언제든 만날 용의가 있다는 말도 전했다. 그러면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의 제안은 단지 제안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흑·적 곧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연정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빌리 브란트는 클라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신호를 보냈다. “사민당(SPD)에 인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과거사는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고려하여 거론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헤르베르트 베너는 뉘른베르크에서 한 연설에서 자기 생각을 좀 더 노골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이는 자민당(FDP) 대표단 사이에서 커다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아데나워가 하루에 3시간 정도만 ‘업무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너무나 모순되는 주장이기에 아무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아데나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이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이 비밀리에 그를 몰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민당(SPD)은 오랫동안 수상을 꿈꾸어 오면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이나 흑·적 연정을 할 의사가 있는 게르스텐마이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대통령은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르스텐마이어는 기민당(CDU)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고 기사당(CSU)이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9월 25일 오후 아데나워는 여당의 하인리히 크로네와 테오 블랑크 그리고 독일연방산업연합회(BDI) 회장인 베르크 및 국가경찰협회의 슈타인 변호사와 회합했다. 이는 자본가들을 무기로 자민당(FDP)에 압력을 가하고자 한 의도로 모인 것이었다. 크로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민당과 연정, 이것이 불발되면 사민당(SPD)과 연정할 것이다.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이상하고 낯설게 들리겠지만 자민당(FDP)과의 연정이 무산되면 사민당(SPD)과 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아데나워는 크로네가 그러한 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국기당* 시대부터 그는 올렌하우어와 막역한 사이였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베너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민당(FDP)을 신뢰할 수 없는 무리라고 여기면서 원칙을 존중하는 사민당(SPD) 인사들을 존경해왔다. 아데나워가 1961년 가을에 사민당(SPD)과의 연정 가능성을 확신했는지는 측근들 가운데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는 자민당(FDP)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이라 해도 그 가능성을 논의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 제국국기당 [Reichsbanner, 역자주 - 1924년 수립된 정치 단체. 나치의 등장으로 1933년 해체됨]     

많은 참석자가 모인 자리에서 토론할 때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을 소외시키려는 생각이 전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륍케와 폰 구텐베르크가 헤르베르트 베너와 협상하고 나서 족히 1년이 지난 다음 본의 정치적 상황을 지속적으로 바꾸게 된 생각을 이미 품고 있었다. 10월 8일, 크로네는 그 당시만 해도 일단 사민당(SPD)보다는 자민당(FDP)과 협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사민당(SPD)과 함께해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 소선거구제, 의원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기, 그 임기 중간에 모든 주 의회 선거 시행. 헌법에 관한 주 정부 책임 강화. 이런 프로그램이라면 수상도 사민당(SPD)과 연정을 구성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민당(SPD)에 처음 접근한 것은 단순히 흑·적 연정에 관한 두려움으로 자민당(FDP)이 기민당(CDU)의 품에 다시 들어오게 하려던 의도 이상의 근본적인 뜻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필요한 경우 신속하게 노선을 바꾼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사민당(SPD)과 연정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자민당(FDP)을 초토화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도 되었다.     

멘데와 슈트라우쓰가 9월 26일의 상황에 대하여 논의할 때 슈트라우쓰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흑·적 연정이 이루어진다면 말입니다. 멘데 선생. 슈트라우쓰는 더 이상 국방장관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 둘이 야당이 된다면 66 더하기 50으로 116석이 됩니다만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어려운 정부 구성에서 아데나워의 전술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자민당(FDP)에 생존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중 한 가지였다. 나중에 1962년 11월과 12월 정부의 위기와 관련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한 소선거구제의 위협은 이미 주요 관계자들에게 분명히 전달되었다. 이와 더불어 아데나워는 여당 안에서 제삼자와의 은밀한 협력으로 자기를 대신한 인물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슈트라우쓰가 이끄는 기사당(CSU)이 멘데와 연대하여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총리로 밀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사당(CSU) 안에서 슈트라우쓰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헤르만 훼헬은 글롭케를 통해 자신이 슈트라우쓰에 맞서 아데나워를 총리로 밀고 있음을 알렸다. 영향력이 강한 리하르트 예거 의원도 마찬가지로 수상의 교체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급부상하고 있는 실세인 프라이헤르 추 구텐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공주의를 기치로 두 거대 정당이 협력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흐루쇼프가 베를린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에게는 사민당(SPD) 내부의 민족주의 세력을 기민당(CDU) 측으로 끌어당길 적절한 기회로 보였다. 개신교-프랑켄 지역 파벌의 베르너 돌링거도 여전히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아데나워는 어려운 때 기사당(CSU) 안에서 누가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하였다. 헤르만 훼헐은 1961년 내무장관이 되었고, 베르너 돌링거는 그 1년 후에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민당(CDU) 안에서 슈트라우쓰에 맞서 아데나워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 크로네, 폰 브렌타노, 게르하르트 슈뢰더, 테오 블랑크, 파울 뤼케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슈트라우쓰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거물들이었다. 이들은 에르하르트가 어차피 슈트라우쓰로 넘어가기 전의 과도기 수상이될 것이므로 수상 교체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기민당(CDU) 사람들은 에르하르트의 약점을 매우 잘 알고 있어 그가 얼마안가서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를 위하여 킹메이커인 슈트라우쓰는 이미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러한 인사 정책에 관한 생각은 극도로 불안정한 베를린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 독일 정책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정치적 양보를 통해 패전에 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힘든 일을 처리하게 한 다음에 광야로 추방하는 것만큼 더 좋은 복안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독일 정책에 관한 불가피한 논쟁에서 사람 좋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보다는 아데나워가 훨씬 더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에르하르트를 매우 현실적으로 평가한 것에 대하여 에리히 멘데 주변의 자민당(FDP) 지도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는 아데나워 시대가 1~2년 더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에 맞서 믿을만한 대안은 아직 없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제 처음으로 모험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도 자민당(FDP)과의 접촉에 나섰다. 에르하르트와 슈트라우쓰에 관한 거부감이 분명해졌을 때, 여당 원내총무인 라스너는 글롭케에게 연락하여 여당 대표단 일부가 이제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크로네도 어떻게 해서든지 슈트라우쓰를 권좌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바로 슈뢰더를 차기 수상으로 밀고자 한 것이다. 크로네의 견해로는 그가 차악이 될 것이었다. 글롭케와 페르드멩게스는 라스너에게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결국 이 소식이 두 채널을 통해 아데나워에 확실하게 전달될 것이었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에르하르트 지지 세력이 이를 받아들일 것이 만무하였다. 그러나 일단 또 다른 후계자 후보를 거론했다는 의미는 있었다.     

반면에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는 이러한 논의에서 국외자의 역할만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기사당(CSU)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민당(CDU)의 아데나워 파벌은 그가 사민당(SPD)에 계속 추파를 던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보다도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이미 서로를 매우 견제하고 나섰고 아데나워는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그래서 9월 27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여당 회의에서 사전 결정이 내려졌다. 에르하르트의 지지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를 즉각 수상으로 임명해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회의 몇 시간 전에 기사당(CSU)의 지방당 연합회는 아데나워를 다시 밀기로 했다.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가 자기 임기 동안에 수상을 다시 뽑는 것에 동의했기에 대세를 따랐다. 그래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아데나워가 계속 수상직을 수행하는 것에 찬성하였다.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는 자민당(FDP)과의 연정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이렇게 하여 여당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지방당의 풀뿌리 민심의 조류를 따랐다. 9월 17일 이후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지역 협회와 단체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은 여전히 아데나워의 팬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제 에리히 멘데는 더 이상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아데나워 반대파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신속히 반응하였다. 9월 19일 기민당(CDU) 당 대표단과 여당의 연석회의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에 도취하여 투표했을 때 멘데는 회의 끝자락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결정을 내린 여당과 대표단이 존속되고 몇 주 지나서 와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대로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훈스뤽의 시머른에서 열린 공개회의에서 그는 이제 자민당(FDP)은 아데나워가 “과도기에 믿음을 줄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사고’였다. 이 사고는 1960년대 내내 멘데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9월 19일 회의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것은 특정한 결정 사항을 발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있는 한 연정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민당(FDP)이 이룩한 선거 결과와 총선 전체의 결과는 아데나워를 거부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9월 19일의 상황 이후에 기민당(CDU)이 아데나워에 등을 돌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정적인 논거는 독일 정치를 모든 연정 상대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86세인 사람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자민당(FDP) 내의 대립에 관한 아데나워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에리히 멘데는 일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정부가 성공적으로 구성되고 나서야 멘데는 1961년 8월 이후 막전 막후에서 진행된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하였다. “수상 각하, 각하의 사람들이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상이자 당대표인 분을 물러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연정 상대로서 자민당(FDP)에 속한 귀하가 연정 조건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일단 귀하가 문을 열어주면 200명의 의원이 따를 것입니다. 의원 전부는 아니지만, 수상의 교체를 바라는 이들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을 열고 공개적으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력을 다했으나 결국 귀하에 맞설 수상 후보를 한 명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둘 다 알고 있습니다. 수상 각하! 귀하는 다시 연방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저는 저의 당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아데나워는 간단히 답했다.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잘 정리된 이 설명에서, 실제로 자민당(FDP) 내부에서 아데나워를 수상으로 하는 연정에 관한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지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지방당 연합과 중앙당에서 아데나워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자르브뤼켄의 하인리히 슈나이더, 토마스 델러, 오스발트 코후트, 볼프강 도링, 빌리 막스 라데마허와 함부르크 지방당대표인 에드거 엥겔하르트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슈피겔》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주간지의 출판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이 자기 당 동료들에게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역설하였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브란트나 슈트라우쓰를 수상으로 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묻는다면 브란트를 택할 것입니다.”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곧 자민당(FDP)이 새로운 연정을 이루면 “내부적인 이유로 연정 조건을 제기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그러한 상황이 지금 전개되고 있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과반수 확보에 정확히 7명의 의원이 부족하였다. 자민당(FDP)이 사민당(SPD)과 연정을 추진하면 당이 분열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 정부는 과반수 확보에 실패할 것이었다. 수치적으로는 아니지만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제4기 연방의회에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전략적 다수’를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뜻에 반하는 정부 구성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분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도 또한 아데나워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연정 협상은 1961년 10월 2일에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이 세부적인 문제를 먼저 논하였다. 사소한 견해차가 있었지만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입장은 합의에 이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자민당(FDP)은 보다 유연한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을 원했다. 아데나워도 이제 독일 정치에 관하여 못마땅한 일이 벌어지겠다고 생각했다. 자민당(FDP)에서 선수를 치며 특정 사안에 관한 양보를 저울질하고 나왔지만, 아데나워는 협상에서 그 어떤 양보를 하겠다는 신호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라파츠키 플랜을 모범으로 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 통제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양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와 기사당(CSU) 당대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자민당(FDP)의 에리히 멘데와 빌리 바이어만 참석한 최소한의 규모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나중에 국내 정치에 관한 협상에서만 뷔르템베르크 주 자민당(FDP) 지방당 대표인 볼프강 하우쓰만이 추가로 참여하였다. 자민당(FDP)이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당이 이끄는 대로 나갈 것은 여전히 현실이었다. 과거 뒤셀도르프 젊은터키당 소속이었던 바이어가 지방당 대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기민당(CDU)과 다시 연정을 수립할 것을 주장해 왔고 이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첫 번째 협상 단계에서 멘데와 바이어만을 상대하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외교와 안보 정책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먼저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논의는 슈트라우쓰와 폰 브렌타노가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협상단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입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기뻐하였다. 이 문제들에 관한 최종적인 설명이 있은 다음에 폰 브렌타노는 “자민당(FDP)이 실제로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발언하였다.”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연합의 협의와 통합이 강화되어야 하고 국방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며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늘리자고 하였다. 연정 합의서 최종안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와 무기의 기술적 통합을 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모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의 군대에 최신 휴대용 무기를 포함한 모든 최신 무기를 장착하는 것도 포함된다. 핵탄두 배치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 회원국의 공동 결정권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앞으로 제정할 규정에 포함되도록 하는 원칙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특수 장비를 갖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특수 부대의 배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독일군의 핵무장뿐만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제4의 핵보유 조직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스태드의 구상도 자민당(FDP)이 받아들였다.     

자민당(FDP)은 또한 아데나워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유럽 지역의 군사적 차원인 특별 지위에 관한 계획은 독일 통일과 관련될 때만 논의될 수 있다. 기습 공격에 대비한 광범위한 통제 구역 지정에 관한 논의는 군사적 특별 지위가 부여된 유럽 지역의 지정과 연관된 독일 통일을 위한 신뢰 기반 구축에 필요하다. 독일의 중립화를 전제로 해서는 평화와 자유가 보장된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아데나워는 마지막 제안은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앞의 두 제안은 못마땅해했다. 특히 그는 폰 브렌타노가 기민당(CDU) 협상단 대표로서 제출한 초안에서 관련 구절을 삭제했다. 그러나 기사당(CSU) 당대표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그와 비슷한 제안을 하였고 아데나워는 ‘매우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를 바꿀 재간이 없었다. 자민당(FDP)이 이를 받아들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이 제안은 베를린 계획과 독일 계획에서 독일 측의 타협안으로 채택된 것이다.     

유럽 정책에 관한 자민당(FDP)의 태도는 이제 매우 긍정적으로 변했다. 합의 내용이 애매모호하지만, 기존 아데나워의 기본 노선은 유지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에서도 미국과 영국의 양보를 얻어야 한다는 아데나워의 강경 노선에 관한 자민당(FDP)의 동의도 신속하게 얻어냈다.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강조 되었다.     

“헌법과 이에 기초한 조약, 특히 독일 조약에 따라 새 정부는 독일 통일을 그 정책의 제1 목표로 간주한다. 새 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 통일의 회복을 공동 정책의 목표로 규정한 독일조약 제7조를 독일 통일에 관한 희망을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로 간주한다. 헌법과 독일 조약의 제7조는 다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 베를린과 서독의 관계의 단절이나 완화로 독일 통일의 근거 축소;

㉡ 소련 점령 지역에 독일 국가의 일부의 수립을 인정하여 독일 통일의 근거 감소;

㉢ 1961년 8월 13일의 불법 조치를 직간접적으로 제재하거나, 소련이나 동독 당국의 베를린 왕복 민간 항공에 관한 통제를 인정하여 이 조치를 대체하여 독일 통일의 근거 감소;

㉣ 전독 평화 조약 체결 이전의 국경 문제 해결.”     

물론 자민당(FDP)이 독일 정책에서 좀 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오래된 요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 해석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논쟁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새 정부는 독일과 서방을 위하여 독일 정책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해야 한다. 전독 평화 협상을 통해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958년 10월 1일 독일 연방의회의 결의와 1961년 6월 30일 모든 정당의 동의를 받아 연방의회 의장의 성명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베를린 문제와 독일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에 관한 폭넓은 합의가 필요했다. 합의에 필요한 것은 아데나워의 협상 기술만이 아니었다. 슈트라우쓰, 멘데, 바이어 사이에는 선두 세대 간의 일종의 심리적 동지애가 있었다. 소련의 압력으로 비상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이전에 논란이 되었던 국방 정책 문제가 함께 해결될 수 있었다. 한 달 후 자민당(FDP)과의 협상 결과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논란이 되자 아데나워는 다시 10월 2일과 5일 두 차례의 최종 협상 자리를 마련하였다. “우리에게 – 곧 협상단에게 -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 정책과 국방 정책입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에 대해 거의 승리를 거둔 듯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의 외교 정책과 국방 정책을 수용했습니다. 과거에 이는 그들에게도 넘기 힘든 산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방위법과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반대했으나 이제는 그것을 모두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데나워만이 현재 이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1961년 7월 이후 케네디 정부가 베를린과 독일에서 최대한 빨리 협상을 벌이고자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결국 연말이 가까우면서 흐루쇼프와 동독과의 평화 조약이 위협을 받아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쟁이 발발 될 수도 있었다. 오랜 삶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의 많은 기본 입장이 아이젠하워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흔들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아데나워는 7월 이후 백악관과 국무부 안에서 돌던 내부 계획 문서를 알지 못했지만,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문서에는 흐루쇼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곧 오더·나이쎄 국경의 인정, 실질적인 동독 체제의 인정, 서독과 동독 간의 양자 회담, 비핵화 지역과 같은 것들이었다.     

사실 워싱턴은 9월 17일 선거일까지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인 9월 마지막 주에 러스크와 그로미코 소련 외상은 유엔 총회에서 3차례의 긴 회담을 했다. 이는 정식 협상은 아니지만 광범위한 요구 사항, 여러 문제, 그리고 가능한 타협안이 논의되었다.     

이때 흐루쇼프가 베를린 문제만이 아니라 서독의 지위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이 다시 분명해졌다. 그의 요구 사항에는 중립국과 소련의 군대의 보호에 놓인 서베를린 자유 도시 외에도 동독의 국제법적인 체제 인정, 오더·나이쎄 국경의 승인, 유럽 안의 핵무기 없는 비무장 지대 구축, 서독 군대 재건 계획의 대폭 축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핵무기 배치 금지와 상호 불가침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미국 측은 여러 가지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논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독일 분단이라는 현상 유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오랫동안 우려해 왔던 생활 방식이 다시 등장했다. 이는 서베를린의 지위가 상당히 악화되고 서독의 군사적 지위가 그 못지않게 악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이 기꺼이 소련에 양보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드러나자 아데나워는 자포자기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미국이 러스크·그로미코 회담에서 잘못했다는 사실은 여러 조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0월 3일 – 곧 국방 정책에 관한 연정 협상 직전에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국 대사인 토마스 핀레터는 그의 독일 동료인 게파르트 폰 발터에게 본이 ‘서독에 통제나 비무장화 또는 기타의 지역’을 지정하는 것을 염두에 워싱턴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물었다. 두 사람은 그러한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 방어 정책을 10년 이상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핀레터의 냉소적인 의견이 이어졌다. “최근 워싱턴에 가본 경우에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마치 달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데나워는 케케묵은 라파츠키 플랜을 일부 변형시킨 수정안이 현재 워싱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늘 지옥으로 가는 직항로로 여겨 거부했던 것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지체없이 응답하였다. 이미 10월 4일에 3페이지 분량의 서한이 케네디에게 보내졌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유럽에서 어떤 종류의 특별한 군사적 지위가 있는 지역을 지정한다는 것은 불길하고 더 나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서유럽 국가, 특히 서독의 특별한 군사적 지위는 소련에 지속적으로 서유럽으로 진출하라고 초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케네디가 그로미코와 만나기 직전에 아데나워는 다울링 대사에게 더 큰 우려를 표명했다. 다울링은 동독 체제를 어느 정도나 인정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비타협적 행위가 전쟁으로 치닫게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지적했다. 아데나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독일 통일이 당분간은 이루어지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통제된 군축과 긴장 완화의 중요성을 늘 지적해 왔다.     

그런 다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그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모든 희망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소련의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수용하게 된다면, 그와 동시에 소련 점령 지역에 인간적 조건이 보장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사는 독일 조약과 파리조약을 알고 있습니다. 서방의 3강이 그들의 말이나 조약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한 말의 신뢰성에 관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수년 동안 그는 통일이 가까운 장래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양방향으로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을 달성하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다울링이 이 지역과의 접촉을 확대할 수 있는지 묻자 아데나워는 그런 경우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다울링이 이를 강력히 주장하자 아데나워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연합국이 이미 한 말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이 대화가 아데나워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경우에 자주 한 대로 짧은 기록을 남겼다. 다울링의 “통일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당분간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정치인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요청 사항은 확고합니다. 미국이 소련과 협상을 하면서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소련 점령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희망을 빼앗을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미국에 관한 독일 국민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더·나이쎄 국경선과 관련하여 그는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 문제는 이미 1959년과 1960년 협상 계획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이미 어느 정도 은밀한 압력을 가해왔기에, 많은 것들이 고려되고 논의되었고 심지어 서로 탐색하다가 결국 더 이상 강요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59년 7월 제네바회담의 중요한 마지막 단계에서 서독 내각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는 것을 논의했었다. 폰 브렌타노는 이를 강력히 밀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장관들은 주저했다. 구 동유럽 지역에서 이주해온 독일 실향민에 대한 배려가 당연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던 오버랜더 장관은 하노버의 주 정부 내각 구성 때 추방민당(BHE)에 대하여 특정한 추가 약속을 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아데나워는 사실 추방민당(BHE)이 낼 수 있는 것이 몇십만 표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협상 전술적 관점이었을 것이다. “소련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최악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얼마 후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독일은 반드시 타협안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서방 동맹국과의 논의에서 항상 수면 아래 있거나 겉으로 드러나곤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무역 대표사무소를 설립하는 구상이 자주 제기되었다. 아데나워의 뜻에 따르면 그 전제 조건은 폴란드 측이 국경 문제에 관한 논의를 안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폴란드의 치란키에비치 총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KRUPP 그룹의 이사인 베르톨드 바이츠로부터 폴란드가 협상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로 구성될 케네디 정부의 친폴란드적 경향을 알고 있는 아데나워는 1961년 1월 바이츠에게 이와 관련된 사항을 탐색해 보도록 하였다. 바르샤바로부터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면 파리 주재 대사를 통하여 공식 협상을 시작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고무우카의 연설이 이러한 탐색 과정에서 터져나왔다. 여기에는 “아마도 두 독일 국가의 화해는 아데나워 수상과 그의 정부가 오더·나이쎄 선을 궁극적인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으로 공식 인정할 때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측만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라는 내용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이 닫힌 것은 아직 아니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국경 문제를 통 크게 논외로 하는 것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보였다. 총선이 더 가까워지고 있었고 추방민들은 수상이 소극적 태도를 보일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하인리히 크로네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총선 이전에 위험한 협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폴란드와의 관계와 오더·나이쎄 국경의 인정이라는 문제는 1961년 10월 초부터 미국과 영국이 되풀이 하여 강조해온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었다. 폴란드의 희망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국인은 민주당 상원의원인 후버트 험프리였다. 10월 6일 케네디와 그로미코의 만남을 앞두고 그는 평소처럼 미국대사와 함께 아데나워를 찾아와 직접 면담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존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도 무언가 보상이 있어야만”그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데나워는 1961년 10월 초에 들어서면서 독일 정책에 관한 종래의 모든 주요 기둥이 워싱턴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러스크와 그로미코의 회담과 케네디와 그로미코의 만남에 관한 독일 측의 보고서를 미국의 언론인 줄리어스 엡스타인에게 전달한 것은 거의 찌푸리기라도 잡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엡스타인은 아데나워가 바라는 대로 그 문서를 대대적인 언론 선전에 쓰지 않고 직접 미국 대사관에 전달하고 만다.     

이러한 외교적 항의, 어쩌면 결례는 아데나워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케네디에게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10월 14일 그는 장문의 서한을 통해 베를린의 생존 방식의 근거가 아직 명백하지 않다는 사실을 케네디에게 설명하였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의사를 타진하는 것과 동시에 군사적 대비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에서 손을 떼거나 특별한 군사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흔들리는 전선이 억지로 안정되기도 전에 자민당(FDP)과의 정부 구성이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국내 정책에 관한 협상은 상당히 잘 진행되었다. 자민당(FDP)은 일단 1961년 초여름에 마련된 교회친화적인 법을 건드리지 않고 그 법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를 지켜볼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에리히 멘데는 여전히 당내에서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두 파벌을 달래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민당(CDU)과의 연정을 전혀 원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아데나워가 없어야만 연정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협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갑작스러운 멘데의 기자회견 내용을 들었다. 멘데는 실제로 아데나워의 86세라는 나이에 관한 우려를 제기하고 1963년에 사임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는 이제 과거 독일제국의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던 때와 같은 나이입니다.”     

아데나워는 이미 다른 때도 있었던, 그러한 멘데의 발언에 대하여 화를 낸 적이 있었다. 9월 19일 자민당(FDP) 당 대표단과 여당이 가진 회의에서 멘데가 아데나워의 노령을 이유로 수상직의 연임에 대하여 경고한 바가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총선 일주일 전에 자민당(FDP) 당 대표단과 당에 보낸 서한에서 멘데는 자민당(FDP)의 총선 유세에 나선 이들에게 아데나워가 제4기 연방정부의 수상 후보가 되는 것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답하라고 한 것은 또 어떠했던가? “9월 17일 이후, 기민당(CDU)은 비록 아데나워가 연장자임을 기리고 그 인격을 존중하지만 87세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현직 정치가로서 수상의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는지에 관한 결정적인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연방 총리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지 아니면 처칠 시대에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젊은 정치가에게 그 책무를 넘기는 것이 나은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기민당(CDU)은 수상 후계 문제를 우연에 맡기지 말고 아데나워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민당(FDP)은 에르하르트나 게르스텐마이어 또는 크로네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데나워는 이제 여당 당대표 회의에서 7~8시간 동안이나 마주 앉아 이야기한 다음에 이러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다. 자민당(FDP)은 결국 그를 연정에서 빼내고 싶어 하는 것인가? 아데나워는 크로네에게 자민당(FDP)에 이제 신물이 났다고 말했다. 크로네는 아데나워의 요청대로 멘데에게 불만을 전달하였으나, 그는 이를 부인했다.     

멘데는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아데나워의 정강이를 걷어찬 다음 아데나워의 임기를 제한하는 것에 관한 동의를 포함한 연정 협정안을 자민당(FDP) 전체 회의에 상정할만큼 자신감을 느꼈다. 11시간 동안의 토론 끝에 자민당(FDP)은 아데나워와의 연정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크로네와 라스너가 합의한 연정 문서가 채택되었지만, 아직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는 제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민당(CDU)의 노조 파벌은 여당을 미쳐버리게 했다. 한스 캇처와 그의 동료들은 다소 모호한 연정 합의가 그들이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입법으로 여기는 것을 방해할 것을 우려하였다. 멘데의 기자회견에 대하여 화내고 아직 최종 합의 문서를 보지 못한 아데나워도 마찬가지로 합의안의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정확히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그는 그 합의문을 ‘자민당(FDP) 문서’라고 불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다시 협상하자고 나선 것에 대해 자민당(FDP) 지도부는 격렬히 저항했다. 자민당(FDP)은 연정 합의와 아데나워의 총리직에 관한 의견을, 강력한 당내 저항에도 불구하고 관철했기에 여러 당원을 모아 놓고 2차 토론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이다. 투표권이 있는 참석자 가운데 67명이 이러한 결론에 동의했고, 18명이 반대했으며 5명은 기권했다. 이는 비교적 명확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자민당(FDP)의 분위기는 빠르게 바뀔 수 있었다.     

아데나워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자민당(FDP)에서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제 외무장관을 걸고넘어졌다. 멘데는 외교관인 지그문트 폰 브라운을 외무부 제3차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외교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민당(FDP) 대다수가 폰 브렌타노를 외무장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민당(CDU)은 다른 외교 책임자를 지명해야 했다. 키싱거, 슈뢰더, 게르스텐마이어, 크로네는 자민당(FDP)이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다만 폰 브렌타노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민당(FDP)은 자기 당 출신의 외무부 차관을 요청하였다.     

아데나워는 매우 격하게 반응하며 여당이 자민당(FDP)의 그러한 제의를 수용하면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찬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몰아세워 부당한 처지에 놓으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6년 동안 여당 원내대표였고 6년 동안 외무장관을 지냈던 폰 브렌타노를 어떻게 놓아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단지 자신이 수상으로 남기 위해서 그 짓을 하란 말인가! 멘데는 아데나워에게 그러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인간적 고려를 하는 것이 떄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자민당(FDP) 안에는 차라리 사민당(SPD)과 연정을 수립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고 아데나워를 ‘죽도록 미워하는’ 또 다른 세력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연정 협상이 5주째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여당의 사회정책적 요구 사항을 뜨거운 감자처럼 물리치고 싶어 하였다. 사실 문자 그대로 국가의 존립에 관한 문제와 노동자의 개별 기업 정책 결정 과정 참여와 전체 기업 정책 결정 과정 참여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3자녀 이상의 가정에 자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하고 싶은 외무부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그는 폰 브렌타노의 약점과 능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0월에 그는 폰 브렌타노가 ‘라파츠키 플랜 연구’ 위원회를 수립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분노했다. 미국의 가스텐스 차관이 세상 물정을 잘 안다는 듯이 미국인들이 제안한 모든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아데나워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독일 외무장관은 자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69 그러나 아데나워는 수년 동안 그런 외무장관에게 익숙해졌다. 결국 폰 브렌타노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유럽 통합주의자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지지자이며, 독일 정책의 핵심 문제에 대해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기에 아데나워가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결국에 가서는 늘 그래온 것처럼 외교 정책을 그에게 맘을 놓고 지시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폰 브렌타노에 대한 자민당(FDP)의 공격을 자신에 관한 또 다른 인격적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자민당(FDP)의 공격에 아데나워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렌타노는 전전긍긍했다. 자민당(FDP)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민당(CDU) 내부의 경쟁자들이 자민당(FDP)의 공격을 부추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먼저 키싱거가 거명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 일종의 남부 철도가 놓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외무장관으로 본에 입성하기를 바라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주지사가 슈트라우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키싱거는 자민당(FDP)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키싱거의 주정부에서 자민당(FDP)이 연정을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하필 1958년 카를로 슈미트와 프리츠 오일러와 함께 외교위원회에서 유연한 동방 정책과 독일 정책을 추진하여 분노를 야기한 키싱거를 내각에 데려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에게 보낸 10월 19일 자의 ‘매우 사적인’ 서한에서 자기 인내의 한계가 ‘넘어섰다’는 말을 하여 이러한 암투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더 이상 새 내각에 참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 사적인 서한에 답신하지 않았다. 그 서한은 특이하게도 아무런 제목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데나워’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폰 브렌타노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은 것이 눈에 뜨였다. 이틀 후 폰 브렌타노는 발터 쉴이 이끄는 유럽부 수립 계획에 반대하는 7페이지 분량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쉴은 1957년 봄 로마조약에 찬성표를 던진 몇 안 되는 자민당(FDP) 당원 중 한 명이었지만, 폰 브렌타노는 유럽 정책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의 ‘핵심’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강력히 했다. “이 분야를 쉴에게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나는 아주 솔직히 말해서 유럽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또한 유럽부 설립에 대해 커다란 우려를 표명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폰 브렌타노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편지에서 말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였다. 키싱거도 자기 의도가 관철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발 물러났다. 그러나 자민당(FDP)은 폰 브렌타노를 교체해 달라는 요구를 계속하였다.     

샤움부르크궁의 국무회의실에서 개최된 당 대표단과 연정협상위원회의 연석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이 인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고 음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의 말을 듣고는 그가 교체 대상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에 관한 자민당(FDP)의 공격에 대해 짜증을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나귀를 치지 않고 자루만 두드립니다.” 외무부 차관으로 ‘자민당(FDP) 정보원’, ‘염탐꾼’, ‘감시원’을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화를 내며 그는 회의장을 떠났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민당(FDP)의 외무부 관련 인사 요청이 심각한 문제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자민당(FDP)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그가 정말로 폰 브렌타노를 내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결국 자민당(FDP)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게르스텐마이어, 크로네, 키싱거, 슈뢰더 또는 압스를 외무장관으로 추천한다면 이에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게르스텐마이어와 키싱거에게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회의 직후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산업연합회(BDI)의 베르크 회장과 슈타인 변호사 그리고 글롭케와 은행가인 압스와 함께 저녁 회의를 가진 것에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여전히 폰 브렌타노를 연임시킬 생각이 있음을 계속해서 밝혔다. 그다음 주일 저녁에 아데나워는 크로네와 글롭케와 더불어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곧 해결할 것이오.”     

그러나 10월 27일 회의에서 폰 브렌타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아데나워에게 매우 고상한 편지를 썼다. “어제 대화를 잘 음미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야기된 것만이 아니라 않은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아데나워에게 인간적으로 실망했다고 많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는 아마도 정부 구성을 위해 당의 정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자민당(FDP)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또한 문제가 복잡해지기 전에 박수칠 때 떠나라는 인생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 편지로 그는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그는 더 이상 외무부나 다른 모든 내각 직책을 맡지 않을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전화도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에 새로운 연정 논의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외무부 대변인을 통해 자기 결정을 발표했다. 아데나워는 통상적인 유감 표명을 하면서도 거의 즉시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이때를 돌이켜 보면서 자신이 폰 브렌타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었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물론 그는 이 사건이 냉정한 배은망덕의 예로서 세간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회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참 못된 수상이 아닌가! 곧 많은 신문에서는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충성스럽고 품격 있는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무도 폰 브렌타노가 자제력을 상실했다는 아데나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에 관련된 위기는 단 일주일 만에 여론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극렬한 동서 대결 양상이 베를린에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본에서 외무부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동안 베를린에서는 케네디의 베를린 특사인 클레이 장군이 찰리 검문소에 미국 탱크를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독의 인민경찰이 라이트너 미국 사절이 동부 구역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코니예프 소련 원수는 소련 전차를 동베를린 지역에 진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외무부를 둘러싼 도박은 계속되었다. 본의 정계에 있는 이들은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때가 왔다는 사실을 며칠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외무부에 관한 관심을 처음 표명한 지도 벌써 8년이 되었다. 과거에 아데나워는 여러 차례 그를 이 부서의 인물로 고려해왔다. 이제 슈뢰더는 자민당(FDP)과 화해했다. 그는 빌리 바이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에리히 멘데와 발터 쉴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아데나워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새로운 외무장관에게 업무를 익힐 틈이 없을 것임도 알고 있었다. 슈뢰더는 부서를 잘 이끌 수 있는 인물이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직 해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아데나워는 발터 할슈타인을 폰 브렌타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놀라운 계획을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폰 브렌타노의 사직 이후 바로 언급되었다. 만성절 때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할슈타인과 긴 대회를 나누었다.     

확실히 둘 사이의 사적 관계는 최근 다소 껄끄러워졌다. 또한 독일이 유럽경제공동체(EEC) 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네 놓아야 한다면 이 또한 커다란 손실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외무장관이 된다면 장점은 명약관화하였다. 할슈타인 정도의 경험이 풍부한 법조인이라면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을 고통스럽지만 재정립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명한 해결책을 찾는 데 이상적인 인물이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매우 끈질긴 협상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또한 할슈타인은 서방의 모든 국가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외교 정책의 연속성에 관한 가시적인 보장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무장관을 또다시 가지게 될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사각에서 할슈타인을 중용해야 하는 모든 이유가 자민당(FDP)이 보기에는 그를 반대할 명분이 되었다. 할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이른바 할슈타인 독트린을 강력하게 실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자민당(FDP)은 오래전부터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참이었다. 설사 에리히 멘데가 할슈타인을 원한다고 해도 당내 동료의 의견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끝까지 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11월 2일 그는 폰 브렌타노의 후계자로 당 대표단 회의에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은 즉각 반론을 제기하였다. 베를린의 시의원들은 그가 내무장관일 때 베를린을 연방정부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했던 사실을 들어 비난했다. 말하자면 그가 1959년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베를린 시의원들의 투표권에 관하여 부정적이었던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인과 언론인과의 대화에서 베를린을 더 이상 붙잡을 수는 없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필요한 것으로 여긴 ‘전열 정비’를 말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질서 있는 후퇴’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본에서는 이른바 슈뢰더의 명언이라는 것이 회자하고 있었다. 곧 최악의 경우 서베를린 시민들을 뤼네베르크의 숲으로 이주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쨌든 베를린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피해가 적을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통로를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미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슈뢰더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여러 면에서 그와 견해가 다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마저도 같은 생각이었다.     

특히 베를린을 아끼는 륍케 대통령은 암렌 베를린 시장으로부터 이 문제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일단 슈뢰더의 임명장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륍케는 슈뢰더 대신 압스 또는 키싱거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키싱거를 임명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1957년부터 도이체방크 이사회 의장이었던 압스는 11월 11일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제의를 거절한 바가 있었다.     

슈뢰더를 둘러싼 인사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연방정부가 이 무렵 베를린 문제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상황에서 일련의 사안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독일 정책에 관한 핵심적인 입장과 서독의 중요한 안보 이익을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0월 21일 케네디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서독의 안보를 위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합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하면 독일군은 평화 시에는 미국이 관리하는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소련의 기습 공격에 맞선 대응 조치에 관한 동의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는 “현재 매우 넓은 지역의 형태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베를린을 연방에 연계하는 것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를린의 지위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점점 더 회의적이었다. 11월 중순 그는 크로네에게 제2차 대전 이후 연합군의 독일 점령 시기의 법만을 가지고 작전을 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크로네는 이를 단호히 반대하며 이 점에서 수상이 매우 강력한 입장을 고수할 것을 바랐다.     

동독과의 관계에서도 신중한 양보의 첫 징후를 볼 수 있었다. 1961년 9월 중순 이후 서독 측은 다자위원회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독일에 관한 폭넓은 협상이 불가피하다면, 필요한 경우 4개 강국의 분명한 위임을 받아 경제, 이동의 자유, 전독 선거법에 관한 3개의 기술위원회를 수립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 위원회는 서독과 소련 점령 지역, 곧 동독의 관리들로 구성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점령 지역, 곧 동독에 관한 사실상의 또는 법적인 승인은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거부되었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양보를 향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면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소련뿐만 아니라 서방 강대국에도 아데나워가 점차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신호로 여겨질 수 있음이 분명했다. 슈뢰더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 할 시간이 없었다. 케네디는 11월 초 아데나워에게 11월 중순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쩌면 연방 수상을 새로 선출하기 전일 수도 있다고도 하였다. 물론 그는 아데나워가 새 수상이 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 수상 선거는 미국 방문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서독의 여론조차도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 구성을 완료할 것을 요구해 왔다. 사방에서는 아데나워가 수상직에 집착하여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당내에서나 여론조사에서 또다시 자기의 지지율이 바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인리히 크로네는 11월 4일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누군가 아데나워에게 재선을 요청하자 당내에서는 누구도 손뼉을 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원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다시 선출하였다.” 이어서 그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의원들은 차라리 에르하르트를 선출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그를 원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을 바랐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는 이제 아데나워를 상대 할 때는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이 질질 끌게 된 정부 구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단호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곧 발터 쉴이 이끄는 개발원조부를 신설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부서에 손해가 가해져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자신은 아데나워의 제4기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이제 에르하르트를 쉽게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보고 현재 광업협회의 부사장인 프리츠 헬비크에게 그의 자리를 맡기는 것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고려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데나워가 11월 7일 수상 선거의 1차 투표에서 과반수보다 겨우 8표를 더 얻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305명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의원 가운데 258명만이 그를 지지했고 47명은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수상 선출을 위한 4차 투표는 그날 저녁 샤움부르크궁에서 만찬과 함께 거행되었다. 아데나워의 자녀들과 그 배우자들은 물론 페르드멩게스 부부, 한스 글롭케와 하인리히 크로네도 초대되었다. 크로네는 새로 선출된 수상이 과반수를 겨우 넘겨 당선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늘 그래왔듯이 이를 기꺼이 과장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11월 8일은 정부 구성의 전체 과정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다. 연정 협상 초기부터 예정된 대로 아데나워는 이제 여당 원내대표인 크로네에게 예정된 내용의 서한을 구술했다. “나는 1965년의 총선에서 여당을 이끌 생각이 없습니다. 나의 후임자가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적절한 시기에 수상직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에리히 멘 데가 이 서한의 사본을 받았다. 거의 두 달 전에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약속했던 것만큼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임기 중 사임의 시기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 그 당시에도 임기 중반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볼프강 되링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로부터 아데나워의 임기가 3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 신임 연방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말이다. 그 서한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본과 나라 전체에서는 아데나워가 단지 임기 중 소환될 수 있는 수상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돌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낙관적인 라인란트 출신 사람인 아데나워에게 우울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었다. 매우 힘든 정부 구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지 이틀 후, 뢴도르프에서는 아데나워라는 명예시민에게 횃불 행렬을 선사했다. 11월 11일이 아데나워는 문 앞에 서서 마치 카니발이 이미 시작된 것처럼 행렬단에 인사했다. 이 행렬에는 ‘상트 휘베르투스 수호대’* ‘청년수호대’*, 카니발 단체인 ‘치프케스 예케’, 고적대인 ‘자유의 길’, 체조 클럽인 ‘아이헤 호네프’, 가톨릭 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하였다. 이들 모두 함께 행진하였고, 주임 교사인 묄러는 그가 시벤게비르게에서 사냥한 멧돼지 드 마리와 사슴 한 마리를 선물하였다.106     

* ‘상트 휘베르투스 수호대’ [St.-Huebertus-Schutzen, 역자주 - 쾰른시와 그 주인인 추기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1417년 브릴론에서 수립된 일종의 민병대 조직. 나중에는 가톨릭 단체로 성격이 바뀌었다.]     

* ‘청년수호대’ [Jungschutzen, 역자주 - 성인 수호대의 하위 조직]     

11월 14일 마침내 내각 구성이 마무리되었다. 에르하르트는 다시 부수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불만이 있지만 아데나워 총리직의 마지막 기간을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버텨낼 준비를 했다. 정치적으로 매우 강력해진 기사당(CSU) 당대표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국방부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가 아데나워를 내쫓으려고 시도한 이후로 그에 관한 불신은 거의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진 나머지 아데나워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대통령에게 슈트라우쓰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할 지경에 이르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외무장관도 사실 아데나워가 바라던 인물은 아니었다. 슈뢰더는 나름대로 아데나워를 존경하는 인물이기는 했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여당과 내각에서 수상의 정치적 기술을 자세히 연구할 기회를 얻었기에, 이제 수상의 장점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근면, 정확성, 말이 별로 없는 유연성, 조심성, 냉정한 엄격함이었다. 아데나워는 곧 자신이 가장 영리한 후배들이 바로 자기 장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크로네는 아데나워의 “그는 충성스럽지 않다.”는 불평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슈뢰더가 이제 자기 방식대로 정치를 펼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는 아데나워 시대가 끝난 다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슈트라우쓰와 슈뢰더에 맞서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데나워는 이제 하인리히 크로네를 특임장관으로 임명하여 내각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임무는 베를린 정책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곧 수상은 새 외무장관의 곁에 그가 가장 싫어하는 적을 감시자로 심은 것이다.     

내각에 새로 들어온 인물에는 기사당(CSU) 출신의 헤르만 회켈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1959년 봄부터 그를 눈여겨 보아왔다. 당시 그는 기사당(CSU) 지방당연합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싼 어리석은 소동이 일어났을 때 정확한 판단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던 인물이었다. 1961년에도 그는 아데나워의 해임에 반대하던 기사당(CSU) 사람이었다. 아데나워의 속셈으로는 훼켈이 기사당(CSU) 내부에서 슈트라우쓰에 맞서 균형추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자민당(FDP) 출신으로 새로 장관으로 임명된 이들은 대부분 의회주의자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의 연정을 지지하던 의원들이었다. 여기에는 누구보다도 뷔르템베르크 줄신의 신임 재무장관인 한스 렌츠가 해당되었다.     

또한 와병 중인 프란츠 에첼의 뒤를 이어, 신임 재무장관이 된 하인츠 스타르케도 여기에 해당된다. 아데나워는 재무부를 자민당(FDP)의 몫으로 넘기는 데 성공한 것을 특별한 성과로 간주했다. 연방정부의 재정은 국방 문제와 복지국가 유지를 위한 부담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슈타르케는 누구나 꺼리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자민당(FDP)의 지지자들에게 여러 재정적으로 부담스러운 약속을 했기에 그는 또한 자신이 속한 당과도 갈등을 벌여야 했다.     

드레스덴 출신의 볼프강 미슈닉을 추방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추방민들의 영향력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부서를 자민당(FDP)에 넘겨줌으로써 기민당(CDU)은 정책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추방민 연합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미슈닉이 그들의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약간 꺼리는 분위기였다.     

발터 쉘도 이제 내각에 입성하였다. 사실상 그를 위해 수립한 개발원조부는 아직 역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시작은 되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아데나워는 그를 통하여 1956년에는 그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강력한 자민당(FDP)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당을 성공적으로 통합시키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기민당(CDU)은 좌파 자유주의자인 법무장관 볼프강 슈탐베르거를 내각에서 이념적으로 결이 다른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민당(FDP) 내부의 좌파를 임시라도 결속시킬 수 있었다.     

자민당(FDP) 당대표인 에리히 멘데는 처음부터 자신이 아데나워의 내각에 속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에르하르트가 집권하면 그가 내무장관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모든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협상 과정에서 그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된 아데나워는 멘데가 이제 내각 밖에서 연정을 위해 더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를 내보내기 위한 협상에서 멘데에게 자민당(FDP) 당대표로서 외무부 장관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멘데는 이것을 완곡하게 거부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적어도 한 명의 여성 장관이 내각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개신교 장로회 의장인 엘리사베트 슈바르츠하우프트를 내무부에서 차출하여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원래는 슈바르츠하우푸트를 가정부 장관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부서는 여전히 가톨릭 몫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프란츠-요제프 뷔르멜링이 임명되었다. 그는 사실 아데나워와 대립하고 내각에 분란을 가져온 그의 가족 정책에 맞서는 인물이었다. 그는 재임에 성공한 각료들에 속했다.     

새로운 방향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에는 외교와 독일 문제, 금융과 개발, 그리고 법무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내각이 나라를 새로운 방향으로 강력하게 이끌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저 과거의 독일 정책을 적절하게 정리하고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에서 나라를 잘 이끄는 것이 주요 임무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과제가 얼마나 긴급한 것인지는 모스크바 주재 크롤 대사를 둘러싼 소동이 잘 보여주었다. 이는 내각 구성의 막바지 단계에서 불안을 고조시키고 아데나워와 케네디의 회담 준비를 방해했다. 1958년 5월 모스크바 대사관에 부임한 이후, 크롤은 독일과 소련 관계의 정상화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20대 초반에 젊은 무관으로서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몇 주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당시 소련 주재 독일대사는 전설적인 인물이면서 근접하기 어려운 브뤼켄도르프-란차우 백작이었다. 그러고 나서 크롤은 오데사에 있는 독일 영사관에 부임했다. 그는 거의 모든 대륙에서 오랜 외교 경력을 쌓았다. 가장 최근에는 베오그라드와 도쿄의 대사로 근무했었다. 그런데 이제 모스크바에서 근무하는 것은 통상적인 업무가 아니라 비스마르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련 주재 독일대사들의 위대한 전통을 이을 기회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데나워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1947년 직업이 없던 이 외교관은 뒤셀도르프에 있는 수상청에서 일했으며 영국 점령 시기에는 기민당(CDU)의 외교 정책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의 권력 핵심과의 중요한 연줄을 이어준 것은 그의 학교 친구였던 한스 글롭케였다. 크롤은 이 인맥을 잘 관리하였다. 아데나워가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제안을 받기도 전에 크롤은 글롭케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자기 과거 모스크바에서의 활동과 러시아어 능력을 내세워 러시아 주재 대사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1955년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 주재 대사가 되고 싶다는 뜻을 담은 편지를 글롭케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냈다.     

이미 이 단계에서 크롤은 신중한 양다리 전략을 수행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1955년 8월 말, 소련과의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이 논의 될 때 그는 아직 느긋하게 기다리는 전술을 ‘우리에게 중요한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협상에 소련의 관심을 끄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이 우리의 요구 사항에 대하여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양측에 충실하면서도 어느 한쪽과의 접촉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양측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베를린 위기 동안에도 이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아데나워는 런던과 워싱턴이 신뢰를 어긴 것에 대해 크게 화를 냈을 때도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크롤을 모스크바에 보내는 것에 반대한 주요 논거는 이미 너무 잘 알려진 대로 그가 너무 나댄다는 것이었다. 1958년 1월 문제가 ‘잘 마무리되자’, 글롭케는 축하 편지에 경고도 담았다. “그러나 귀하의 기질과 귀하의 주요 상대자의 기질이 유사하다는 사실이 귀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에 사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귀하에게 다른 임무를 맡길 수도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사실, 1958년 여름에 크롤이 지나친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과도한 낙관주의로 자기 업무에 임한 결과 거의 교체될 뻔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크롤을 최대한 신속하게 소환하여 물러나게 해야 하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가 모든 것을 완전히 망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보고서는 허위였습니다. 결코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의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 것은 그가 미코얀의 찬사를 조작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크롤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과도한 언론플레이도 아데나워를 짜증 나게 했다. 그는 자신을 독일과 소련의 화해를 이끄는 선구자로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에 몰두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동서 해빙을 강조하는 언론의 지지를 얻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부의 지원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이 베를린에 관한 소련의 최후통첩으로 정국이 얼어붙었을 때 그를 구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흐루쇼프가 그와 대화할 용의가 있을 때 그 의사를 전달할 독일대사가 모스크바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대는 것조차 이제 용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외향적인 흐루쇼프의 의도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런던과 워싱턴에서 소련과 타협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을 때 지속적으로 독일과 소련의 직접 대화를 요청하는 독일대사가 모스크바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적절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인터뷰만이 아니라 목표에 관한 낙관주의와 사람들이 말하는 친소적인 태도가 정부의 수장을 수년 동안 절망에 빠뜨릴 뻔한 크롤을 제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정기적으로 그의 개인 보고를 받았다. 글롭케는 정상적인 통로를 우회한 추가 보고서를 받았고 우편으로 그를 원격 조정하고자 노력했다. 하인리히 크로네도 글롭케를 통하여 크롤과 접촉하면서 많은 서한을 받았다. 크롤은 매우 끈질기게 자기 업무 철학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곧 아데나워와 흐루쇼프가 독일과 소련의 관계의 ‘포괄적 정상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흐루쇼프가 본을 직접 방문하여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소련에 관한 경제 원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에 관한 비망록에서 아데나워는 실제로 직접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 했다. 이것이 그가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가 사고를 쳐도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주요 이유이다. 실제로 크롤은 흐루쇼프와 비교적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크림반도에도 초대되는 것을 통해 확실히 아데나워를 대회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활용되었다. 아데나워는 당연히 소련과의 접촉이 불러일으킬 위험을 알고 있고, 서방 열강의 불신을 경계하고, 이 제멋대로인 외교관의 매우 다혈질적인 자아가 일으키는 추가적인 문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0일 소련이 마음을 바꿨다는 소식이 모스크바의 소련 당국에서 흘러나왔다. 소련은 이제 서베를린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서구 열강과 맺고 그러고 나서야 독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독과 소련은 이 새로운 베를린 협정을 별도의 협정을 통하여 존중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서방의 열강과 서독은 또한 소련과 동독이 맺은 합의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될 노릇이었다. 바로 이것이 소련이 제시한 이른바 4단계 계획이었다. 그런데 처음 두 단계는 크롤 자신이 흐루쇼프에게 직접 제안했다는 말도 있었다.     

여러 복잡한 회의에서 베를린을 위한 협상 노선을 신중하게 마련 중인 서방 국가의 대사들은 당연히 크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격분하였다. 서독 정부는 모스크바 대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행동했다는 사실을 서방 열강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크롤은 최대한 신속하게 보고할 것을 명령받았다. 크롤은 서방에서 ‘라팔로 노선’의 기수로 간주되기에 사실 지지 기반이 줄어들 위험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연방정부 공보실장인 폰 에카르트가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크롤 대사가 본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공항에서 수상실로 소환되었다.     

아데나워는 글롭케와 카르스텐스가 배석한 자리에서 상세한 보고를 받았고 예방 조치로 모든 보고 내용을 녹음했지만 놀랍도록 매우 가벼운 견책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귀하가 아무 책임이 없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한번 크롤은 수상에게 독일과 소련의 관계의 포괄적인 정상화를 달성하기 위해 흐루쇼프와 직접 대화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데나워는 더 이상 이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크롤이 간신히 호텔에 당도하자마자 그의 전 비서였던 안네리제 포핑가가 총리를 대신하여 전화를 걸어 그가 당연히 모스크바의 임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외무장관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크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아데나워는 여전히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사와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데나워도 독일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여기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분명히 아데나워는 이제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조만간 흐루쇼프를 만나는 것을 더 이상 배제할 수 없나고 여기게 되었다. 독일의 이익을 제쳐두고자 하는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의도를 고려하여 그는 본도 모스크바와 합의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크롤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은근한 신호로 활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특히 맥밀런이 케네디에게 독일 총선 후에 아데나워 수상에게 압력을 가할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에라도 말이다. 분명히 아데나워가 막연히 추측만 했던 것인 맥밀런의 구상은 매우 폭이 넓은 것으로 1954년에 맺은 독일 조약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4일, 케네디가 아데나워를 다시 만나기 직전, 맥밀런은 케네디에게 아데나워에게 최대한의 압력을 가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첫째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오더·나이쎄 국경, 둘째로 동독 체제의 실질적 인정을 목표로 하는 규정, 셋째로 제 생각에 아데나워가 서베를린을 서독 연방과의 정치적 유대 관계를 포기하는 것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재정적 유대는 강화되고 확장 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넷째ㄹ 독일 정부가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도록 해야 합니다.” 맥밀런의 생각에 아데나워가 이 모든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 대가로 베를린과의 연결로와 그 밖의 모든 문제에 관한 합리적인 해결이 합의되어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소련의 요구에 관한 서방 국가들 사이의 일련의 어려운 협상 과정에서 종종 드러난 대로 이제 아데나워는 협상이 베를린 문제에만 집중된다면 양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시 이르게 되었다. 크롤과 흐루쇼프와의 대화로 소련 최후통첩이 다시 암묵적으로 취소되었고, 모스크바가 이제 타협의 의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최대한 미국과 소련의 탐색을 좁혀보기 위하여 아데나워는 11월 18일 슈뢰더와 슈트라우쓰를 대동하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케네디와 그의 부하들과 3일간 진행된 토론에서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케네디 또한 당분간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베를린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문제 전체를 일단 제쳐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데나워의 고집과 더불어, 독일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단독 조치를 할지 모른다는 미국 측의 우려가 여기에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는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미국 언론은 아데나워의 협상이 개인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았다. 폭넓은 여론을 특히 잘 파악하기로 정평이 난 《뉴욕 타임스》의 워싱턴 주재 기자인 제임스 레스턴은 회담 후 아데나워가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을 달성했다고 썼다. 여기에는 철군 금지, 동독 체제 인정의 금지, 서베를린의 연합군 주둔을 포함한 서독과 서베를린과 서방 간의 관계 강화, 베를린 접근의 자유 및 자생력 유지가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이 현실이 되었기에 케네디는 아데나워의 요구를 수용하여 그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미국 정치의 목표로 삼기가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은 또한 1954년 독일 조약에서 약속한 것을 재확인했다. 곧 평화적 수단과 자결권에 기초한 독일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경 문제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소련에 관한 무력 사용 포기 선언에 동의하지만,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하여 평화 조약 체결의 유보를 주장했다. 반면에 케네디는 오더·나이쎄 국경과 관련하여 진전이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데나워도 이제는 베를린 문제에 대해 좁은 의미에서 협상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심지어 강제로 진행되는 모든 협상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드골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 이후에 밝혀진 대로 그는 또한 드골과의 직접 대화에서 그리고 서한을 통해서도 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을 위하여 미국과 소련의 탐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맥밀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현재의 약하고 무능한 독일 정부가 압력에 굴복하더라도 앞으로도 프랑스의 입장은 변함이 없을 것임을 독일이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위협이 너무 커서 라인강이 엘베강과 너무 가까워졌다! 12월 중순에 딘 러스크는 엘리제궁에서 나눈 대화에서 “문제가 무엇인가요?”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도 답을 했다. “독일의 중립화는 유럽의 중립화 이어질 것입니다.” 이 핵심 문제에서 드골과 아데나워의 상황 판단이 일치했다. 그래서 그는 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느 모로 독일의 지위가 온전히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드골의 지원 덕분에 워싱턴에서 일을 잘 마무리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풀브라이트, 맨스필드, 험프리 상원의원의 발언에 대하여 케네디에게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이것이 바로 상원의원의 온전히 누리는 특권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지난 몇 주와 몇 달 동안 진행되어 온 일이 처리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이 사과했다. 그는 이에 대하여 “미리 정확히 알지 못했으며 언제 어떤 형태로 세워질지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외무부로부터 워싱턴의 대사 회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크롤에게 사과하였다. 곧 그가 흐루쇼프와의 만남에서 이미 합의된 서방의 노선과 일치하지 않는 몇 가지를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베를린 장벽의 건설이 흐루쇼프의 단독 결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독의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케네디가 흐루쇼프는 난민의 흐름을 끊고자 한 것 아니냐고 하자 아데나워는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현재 상황에 관한 형세 판단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요점은 소련이 1958/59년 겨울 베를린에 관한 첫 최후통첩 이후 압도적인 재래식 무기를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베를린을 둘러싼 전쟁에서 핵무기가 즉시 사용되지 않는다면 함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가 점령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소련은 분명히 다시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흐루쇼프는 결국 잘 알려진 그의 목표로 돌아와, 서유럽을 장악하려는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싸구려 탐정소설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기에 디터 프리데의 《러시아의 영구기관》이라는 책을 선물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잘 안 알려진 작가의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곧 러시아는 18세기부터 일관된 확장 정책을 추구했으며 수많은 조약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다음날 흐루쇼프가 그의 화려한 경력 덕분에 미쳐버렸다고 덧붙였다. 아데나워는 그가 열등감과 오만이 혼재한 성격이라고 진단했다.     

아데나워는 소련에 관하여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주제를 언급했다. 소련은 중공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공이 국내 경제 개발 비용 문제로 언젠가 소련의 외교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북유럽에서 이탈리아와 터키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전체가 현재 얼마나 불안한 상황인지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자유세계는 매우 분열되어 있기에 미국이 유럽의 기독교권 수호를 위해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케네디는 서방이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다는 아데나워의 생각을 말리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케네디에게 적어도 독일에서는 18개월의 의무 복무제가 도입될 것임을 알렸다. 위기 상황 대처 계획과 관련해서도 본은 미국과의 만남 이전에 이미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이미 4월에 아데나워 수상은 북대서양조약 제5조와 제6조 2항에 의거하여 육로나 항공으로 베를린으로 접근 경로에 있는 서방 삼국의 군대에 관한 소련 또는 동맹군의 공격이 있으면 서독의 서방 동맹군 참여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케네디 대통령에게 다짐한 터였다. 1961년 10월 24일 그레베 대사가 케네디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러한 의사를 좀 더 확실히 전달하였다. 여기까지     

서방 동맹군이 참여한다면 서독은 이제 베를린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독일 국민과 동맹국에 생존의 기회를 보장하는 군사 계획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베를린 접근로 확보를 위한 대규모의 지상 및 항공 작전 계획에 동의하지만, 여전히 해상 대응 조치를 선호했다.     

아데나워는 독일만이 아니라 포괄적인 해상 봉쇄를 통해 베를린 접근 경로를 차단하려는 동방의 조치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미국과 영국은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경을 건드려왔다. 특히 영국은 큰 골치였다. 미국의 외교진도 마지못해 반응하며 독일군이 막상 긴급한 상황이 되면 물러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인 톰슨은 10월 말 그의 동료인 크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케네디도 군사적 보복에서 해상 봉쇄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아데나워 수상의 제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만 고려할 수 있는 계획으로 서독은 함대의 부족으로 참여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제안은 그다지 이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쨌든 1961년 가을의 상황은 너무나도 심각해서 아데나워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비상 계획에 대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핵무기를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했다. 필요한 경우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아데나워는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재래식 전쟁에서 전선이 흔들리게 되면 핵무기 사용이 실제로 사용될 것이라는 말을 케네디로부터 직접 들었다. 독일 영토를 빼앗기게 되면 전략 핵무기와 전술 핵무기를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재래식 군대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또한 독일의 핵무기 문제도 언급하였다. 아데나워는 1954년 런던에서 벌어진 소동과 덜레스가 말한 사정변경의 원칙(clausula rebus sic stantibus)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케네디는 독일이 핵무기 포기 원칙을 유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상황에서 안보가 크게 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의 위험이 증가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독일 핵무기 생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이 문제는 국내 정치적 압력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솔직한 대화를 나눈 다음 통역에게 그들의 대화 기록을 찢어버려 달라고 요청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다시 받게 되었다. 분명히 최근에 있었던 베를린 경계 구역에서의 대결로 상황이 눈에 띄게 경색되었던 것이다. 그는 비행기에서 드골에게 이러한 생각을 전달했다. 개인적으로, 지난 총선 기간에 손상되었던 신뢰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귀국하자마자 케네디는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과 흐루쇼프의 사위인 알렉세이 아슈베이와 긴 인터뷰를 해야 했다. 물론 케네디는 이 인터뷰에서 아데나워와 방금 합의한 여러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형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사망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독일군에 대해 일종의 통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는 생각도 분명히 밝혔다. 통일을 바라는 서독의 소망은 지지하지만, 케네디가 독일 분단의 현상 유지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도 있었다. “우리가 서베를린 문제에 관한 합의에 이르게 되면 우리 세기에 중부 유럽에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이상의 생존 방식은 불가능해 보이며 독일과 미국의 견해차는 피할 수 없을 노릇이었다.     

아데나워는 매우 강력한 약을 사용해서야 간신히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폴스로드가의 대사관저에서 이 어른을 돌보던 그레베는 지난 몇 달의 어려움이 아데나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8월 13일 이틀 전에 카데나비아에서 돌아온 다음 아데나워는 정말 말처럼 일을 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선거운동을 전개하고, 비상 회의와 비상 계획이 이어지고, 미국과 영국과 씨름하고, 정부를 구성하고, 이제는 워싱턴에서 협상까지 벌인 것이다. 회의론자에서 아데나워의 찬미자로 빠르게 변신한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수상이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자주 회의를 개최하고, 편지 초안의 작성과 수정을 하고, 서류를 집으로 가져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다시 아침 5시나 6시에 기상했다. 이것이 무리를 가져왔다.     

본을 출발할 때부터 이미 몸에 열이 있었다. 그의 상태는 워싱턴에서의 협상 중에 이미 악화되었다. 결국 아데나워의 개인 고문인 하인리히 바르트가 아데나워 몰래 베버-부흐 박사를 독일에서 불렀다. 그는 워터게이트호텔에서 가짜 이름으로 머물면서 신분을 공개하지 않은 채로 공식 회담이 끝날 때까지 환자 치료 방법, 약물 및 복용량에 대하여 대사관 의사에게 지시하였다. 폐렴 증상이 악화되어 체온이 심각히 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가 중병에 걸린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에 대하여 그의 측근들이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웠다. 우선 언론이 아무것도 알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85세의 나이와 막 수립된 정부의 구성이 다시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려운 대화를 진행하는 데에 아데나워에게 그러한 불안한 전망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치의는 모든 공식 행사가 마무리되었을 때만 나타났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에는 전국 기자클럽에서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로 귀국한 날 아침 쾰른 공항에서 기자들은 밤을 새워 초췌해진 수상을 만났다. 그는 단지 ‘훌륭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즉각 뢴도르프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건강 상태는 그의 시대를 통하여 잘 지켜진 비밀 중 하나이기에 그의 질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사실 누구나 수상이 11월이나 12월이 되면 기관지염에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롭케도 병이 있었다. 순환계 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뢴도르프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부총리는 11월 29일 그를 대신하여 정부 구성 선언을 해야 했다. 이보다 더 나쁜 징조는 없었다.  


사면초가     


수상 재임기 전체, 그리고 그 이후의 1963년부터 1967년까지의 기간을 살펴보면 1962년은 분명히 아데나워의 후기 단계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것은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내적으로는 ‘시민’ 동맹의 이 위대한 대표자는 흑·적 연정을 위한 확실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외교 정책 측면에서 아데나워는 이제 프랑스와 독일 양자 동맹이라는 상당히 나이브한 선택을 위해 서방 강대국 사이의 오랜 줄타기 노선을 끝내고 있었다.     

분명히 정치적으로 일단 쉬어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아데나워의 정치적 활력에는 아직 휴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의 신체적 기능도 여전히 놀라웠다. 그는 1961년 가을 정부가 수립 이후 걸렸던 심각한 병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되었다. 1962년 1월 5일에 그의 86번째 생일은 그를 다시 ‘빛나는 육체와 최고의 기분, 그리고 변함없는 기지’를 보여주었다. 퍼레이드는 길게 이어지고 질서정연했으며 여전히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가부장의 가족에는 이제 손자가 22명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랑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내각 책임자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그에게 바로크 양식의 돌로 만든 의자를 선물하면서 그것이 은퇴를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웃으며 말하자 그는 나중에 유명해진 답을 했다. “정치에서 성공은 오래 앉아 있을 때 이룩하는 법이지요.” 그 이후에도 그는 힘이 약해지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는 둥글고 꽉 찼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했다. 주름이 깊어지고 윤곽이 수척해졌다. 뺨과 턱에 불필요한 지방이 없어서 머리가 더 작아 보이고 아주 나이 든 인디언 추장의 머리와 더 닮아갔다.     

그러나 1962년 초 아데나워는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가장 심각한 건강의 위기를 겪었다. 중증 순환기 질환을 앓으면서 업무를 거의 소화할 수가 없었던 글롭케는 1월 중순에 매우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1962년 1월 21일 그는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지난 며칠 동안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모습의 수상을 보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모든 것에서 최대한 물러나고자 합니다.”원문각주6 그날 아데나워는 다시 병에 걸렸다. 이른바 열성 독감이었다.     

실제로 그에게 첫 번째 심장마비가 일어났다. 강철 같은 힘으로 그는 집에서 2주 동안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치료하였다. 이번에도 최측근 곧 베버-부흐 박사와 안네리제 포핑가가 아데나워의 뜻에 따라 그를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고 외부에 그의 중병을 알리지도 않았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가 그렇게 빨리 회복된 것은 의학적으로 의학적 기적이었다. 아데나워가 뢴도르프 집에서 1961/62년 겨울 두 번째로 심각한 질병을 극복하고 나서 1962년 2월 초에 크로네는 “콘라드 아데나워가 여든여섯 살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점점 더 확실히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원문각주3 그러고는 깊은 상념에 젖었다. “아마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습니다”원문각주4     

그러나 아데나워는 또다시 이 겨울의 계곡에서 다시 벗어났다. 수상을 돌본 의사 중 한 명인 칼-레오 논 박사는 1962년 7월에 매우 고된 프랑스 국빈 방문을 마치고 아데나워가 지난 5년 동안 전혀 늙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스위스 휴가의 즐거움은 독일과 스위스의 일부 신문의 통렬한 발언으로 오래전부터 망가졌었다. 그는 또한 힘든 고지대 하이킹도 포기해야 했다. 그가 이제 봄과 여름, 그리고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정기적으로 휴가를 가는 카데나비아에서는 여전히 긴 산책을 하지만 주로 보치아 놀이를 했다. 그는 이 오래된 놀이에 매우 열광하여 뢴도르프 집의 정원에도 보치아 경기장을 만들었다. 1950년대에는 한가한 시간에 주로 장미 애호가이자 등산객의 모습을 보였다면 이제는 펩피타 모자를 쓰고 보치아 놀이를 하는 아데나워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러나 늘 그의 가까이에 있는 측근들은 그의 정신적 탄력이 조금 약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카스텐스 차관은 그가 많이 관대해지고 단호함, 가혹함, 완고함이 줄어들었다고 보았다. 카스텐스는 그해에 수상과 외무장관 사이의 갈등을 매우 세심한 노력으로 해소해 보려고 노력했었다.원문각주5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몇 달 후 글롭케는 오스터헬드에게 수상이 늘 매우 정중하면서도 매우 정확한 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그는 때때로 정확한 지시를 내리지 못하면서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를 꾸짖거나 책망했다. 그래서 그는 “장관들 사이에 더 이상 친구가 많지 않았다.”원문각주7 그러나 사실 그가 언제 장관들 가운데 많은 친구를 가진 적이 있었던가?     

아데나워를 계속해서 접할 수 있었던 하인리히 크로네는 비록 더 이상 충성스러운 원내대표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수상은 더 날카롭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또한 더 변덕스럽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글롭케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한 달 후 같은 불만이 제기되었다. “수상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1962년의 기복 이후 크로네는 섣달그믐날의 일기에서 총평하였다. “수상은 늙어 가고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블랑켄호른은 이 무렵 그와 눈에 띄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가 이제 드골에게 너무 다가가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샤움부르크궁을 정기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이 무렵 글롭케가 아데나워에게 걱정스러운 정신적 변화가 있다는 진단을 내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수상은 ... 매우 생기 넘치고 활발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70세 정도 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 1961년의 큰 소동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신중함과 침착함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프랑스 정책과 영국의 가입에 대해 아데나워와 충돌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이 이제 정말 나이가 드셔서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로 그 누구와도 제대로 상의하지 못하기에 잘못된 판단을 내릴위험이 매우 크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62년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주변에서 그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정치적 문제에서 그와 함께 추구하는 것에서의 조화와 부조화에 달려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강력하고, 권위적이고, 교활하게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자포자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가 끊임없이 일에 몰두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 정통한 언론인을 포함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고위정치가들은 이제 1961년 가을에 수립된 아데나워 내각이 이미 과도정부라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다. 특히 조만간 수상에 오르고 싶어다는 생각을 강력히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이를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가 포함되었다. 아데나워가 차기 과도기 수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던 하인리히 크로네도 아데나워 수상의 영광이 곧 끝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당 안의 많은 에르하르트 지지자들과 함께 이른바 ‘에르하르트 사단’은 경제부 장관에게 자신이 ‘허수아비’임을 증명하는 것을 중단하고 수상직을 노릴 것을 촉구하였다.     

1962년 상반기에 기사당(CSU) 당대표 슈트라우쓰와 아데나워의 관계는 매우 불편해졌다. 슈트라우쓰 또한 더 이상 놀림감이 될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무리 안에서는 ‘어르신’에 관한 불만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슈트라우쓰의 눈에는 아데나워가 이제는 기념비일 뿐이며 게르하르트 슈뢰더조차도 이미 아데나워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더 독립적인 노선을 가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게 되었다. 연방 대통령은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의 주도로 모든 정당이 연정을 수립하고, 아데나워가 즉각 물러나기를 바랐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폰 브렌타노가 외무장관에서 물러난 뒤에 동정심, 반항, 죄책감으로 그를 다시 원내대표로 선출하여 아데나워와 선을 그었다. 폰 브렌타노는 이전에 하인리히 크로네의 경우처럼 원내총무인 빌 라스너에게 실무를 맡기고, 원내대표 자리에서 곧 물러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모든 중요 사안, 특히 수상 후계자 문제에서 그의 말에는 당연히 무게가 실렸다. 그는 1961년 정부 구성에서 아데나워가 사용한 전술을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각하게 된 것은 아데나워의 노골적인 변심의 결과로 여기며 수상에게도 그런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크로네처럼 그는 자민당(FDP)과의 연정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과는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도 흑·적 연정을 은근히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자민당(FDP)은 기민당(CDU) 내에서 중요 인물들과 파벌들은 연정 상대를 바꾸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현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연정을 맺은 데 핵심 인물인 에리히 멘데는 그의 ‘타락’ 이후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자민당(FDP)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슈피겔》과 《슈테른》은 멘데에 대한 무자비한 언론 공격을 이끌고 있었다. 멘데는 물론 중앙당과 지방당연합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민당(FDP)이 계속 거부하는 아데나워를 버리고 당이 지지하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지 세력이 사라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멘데는 1962년 내내 당원들이 아데나워를 반대하도록 놔두고 그 스스로도 신속한 수상 교체를 위해 노력해야 했다.     

1962년 7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선거 결과가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이어, 되링, 쉘, 멘데가 이끄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자민당(FDP)은 1961년 기민당(CDU)과의 새로운 연정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총선 결과가 너무나 훌륭했지만 막상 지방선거에서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내에서 기민당(CDU)과의 연정에 대해 아직은 반발이 없었다. 다만 아데나워의 ‘몰락’을 바랐다. 에르하르트의 약점을 현명한 자민당(FDP) 정치인들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면 어떠랴! 일단 먼저 에르하르트로 아데나워를 축출하고 볼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후일을 기약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기민당(CDU) 중앙당 간부들도 이제는 아데나워 이후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키워드는 ‘정당 개혁’이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텔레비전 방송국 설치에 관한 논란은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 정부와 주 정부 차원의 기민당(CDU)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중앙당에서 강력한 통제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내무장관을 하고있는 요제프 헤르만 두프후에스를 실무를 담당하는 당대표로 선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엄격한 베스트팔렌 출신 인물은 오랫동안 마이어 주지사와 라인란트 기민당(CDU)의 지도자인 빌헬름 요넨에게는 골칫거리였기에 그를 중앙당 요직으로 보내는 것을 추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무담당 당대표로 두프후에스를 미는 많은 이는 이미 수상 후계자 문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예상대로 1962년 봄에 수상이 된다면 기민당(CDU)은 가톨릭 신자인 당대표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아데나워가 수상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동시에 내놓기를 바랐다. 그럴 때 강한 인물이 필요했다. 아데나워가 하인리히 크로네가 자기 1962년 3월 일기에 두프후에스의 의도라고 지적한 것을 알았다면 이 인사 문제의 해결 방안에 관한 그의 불신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크로네가 들은 바로는 두프후에스가 “수상의 분신으로서 당의 운영을 맡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의 분신. - 이래서 뭐가 될 것인가! 크로네도 이를 감지했다. “수상이 두프후에스가 원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찌 되는가?”     

이렇게 해서 1962년의 비교적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거론되는 정치인들 대부분은 여러 이유로 아데나워를 빨리 내보내고 싶어 하였다. 기민당(CDU)에서 그의 지지자들의 숫자는 이미 1962년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인리히 크로네 외에도 아데나워가 여전히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내각 인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파울 뤼케와 테오도르 블랑크와 더불어 여전히 아데나워의 정치 기반인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출신의 거물급 정치가들이나 몇몇 중간 관리자들은 아데나워가 떠나고 에르하르트가 들어 오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지방당연합회애도 비슷한 비판적 시각이 지배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여전히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기민당(CDU) 대표인 프란츠 마이어스를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62년 7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은 터였다. 라인란트팔츠에도 강력한 지지 세력이 남아 있었다. 아데나워가 주위를 둘러보면,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출신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와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내부적으로 커다란 분열이 이미 본격화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수상 임기 내내 언제나 크고 작은 부침이 있지 않았던가? 그 질곡을 늘 당당히 헤쳐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늘 놀라웠던 불굴의 의지가 이제는 확실히 그의 남은 추종자들에게조차 점점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이 1962년 2월 기민당(CDU) 실무당당 당대표 사무실에서 요제프 해르만 두푸후에스가 회의를 주재하는 가운데 계획을 논의했을 때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당대표로서 자기 후계 문제에 어떤 편견도 가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약간 비꼬듯이 말했다. 이 문제는 “두프후에스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내가 언제 당대표를 그만둘지는 솔직히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1962년 6월에 도르트문트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대표 후보에 출마하여 앞으로 2년 동안 당의 수장으로 남을 예정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를 분명히 한 다음 그는 내년 1963년에 수상직을 사임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속내를 보였다. 계산은 꽤 분명해 보였다. 1964년까지 계속 통치한 다음 에르하르트를 함머슈미트빌라에서 내쫓을 요령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수상 후임자 문제는 그에게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 국빈 방문 준비가 이미 본격화되던 1962년 6월 말,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사임할 생각이 없습니다. 1963년에도 말입니다.” 그가 크로네와 두프후에스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게르하르트 슈뢰더의 고집을 이미 못마땅하게 여기고 폰 브렌타노도 적합하지 않다고 하며 이제 크로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일을 맡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로네는 당내에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 맞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민당(CDU) 의원들은 결국 1965년 총선의 승리를 바라며, 이를 위해 에르하르트라는 선거 기관차가 필요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그가 수상 재목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총선 승리가 불확실하다면 아직 4년의 여유가 있으니 필요하다면 다른 수상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1962년 6월이 대화 이후 크로네가 문서로 정리한 생각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콘라드 아데나워가 오래 수상에 머물 것 같지는 않다. 훼헬이 내게 전화했다. 민주당원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훼헬은 그들에게 독단적으로 대응하였다. 임박한 광부들의 파업과 관련된 협상을 이유로 그에 강력하게 맞섰다. 그리고 이는 연정 정부의 승인을 얻은 것이다.”     

일이 이런 식으로 1962년 가을까지 진행되었다. 에르하르트를 지지하는 자민당(FDP)만이 아니라 기민당(CDU)에 있는 사람들도 수상의 자리를 흔들 기회를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1962년 9월 초, 드골이 서독에서 승리자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자민당(FDP) 당원들은 다시 후계 문제를 제기했다. 정보를 캐는 데 여전히 탁월한 글롭케는 자민당(FDP)이 이 사안에 관하여 마련한 구상에 대하여 알아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에르하르트, 슈트라우쓰, 게르스텐마이어와 대화를 추진해야 했다. 자민당(FDP)은 또한 폰 브렌타노의 수상 승계에 관한 대화에 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FDP) 의원들이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소모임에서 적절한 합의를 제안하자 때 폰 브렌타노는 소신을 지키며 멘데의 흉계를 수상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9월 중순에 카데나비아로 3주간의 휴가를 가버린 것이다.     

이제 자민당(FDP)이 이 시기에 치고 나오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자민당(FDP) 출신 재무장관에게 슈타르케에게 자신이 1964년까지 수상직에 머물고 싶다고 당당히 선언했었다. 그러고 나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연방 대통령이 되고 하인리히 크로네가 연방 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얼마나 간절히 크로네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며칠 후 드골이 귀국한 다음 국내 정치를 위한 시간이 생겼을 때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그에게 촉구하며 ‘자신이 바라는’ 결단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였다.     

이 기간에 진행된 막후 조정은 두프후에스와 처음 정면충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곧 두프후에스는 크로네를 통하여 아데나워의 최근 생각에 관한 소식을 듣고 《쾰르니셰 룬드샤우》와 인터뷰하면서 그러한 당내 권력투쟁에서 흔히 하는 대로 위선을 잔뜩 떨었다. 그러면서 기민당(CDU)이 아데나워 후계자 문제를 정치가에 관한 존경심에서 그와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두프후에스는 이 인터뷰로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말하자면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는 고전적인 궁전 혁명의 신호였다. 수상은 카데나비아에서 이를 알고 격노하였다. 아데나워의 측근들은 그가 자제력을 잃고 이 정도로 분노를 폭발시킨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크로네가 말하기를 두프후에스는 ‘저주’가 담긴 격정적인 전문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그 내용을 기민당(CDU)의 모든 의장단 위원에게 공개하였다. “나는 9월 16일 《쾰르니셰 룬드샤우》에 실린 귀하의 성명을 막 읽었습니다. 앞으로는 내 개인적인 결정에 관한 논평을 자제해 주기를 간곡히 촉구합니다. 나는 귀하의 성명이 나의 개인적인 권리에 관한 용인할 수 없는 간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당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합니다. 폰 브렌타노 박사와 폰 하셀 씨의 경우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내가 휴가지로 출발한 직후에 내게 연락도 없이 이러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매우 유별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귀하가 월권을 자행한 것이며 기민당(CDU)의 단합과 협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데나워와 두프후에스 사이에 전투가 발발하였다. 아데나워 이후를 대비한 당 대표단 문제 해결에 관한 장기적인 정리를 위한 모든 훌륭한 계획들이 소용없게 되었다. 이제부터 아데나워는 두 가지 일에 온 힘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에르하르트가 차기 수상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빨리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 두프후에스가 당대표가 되는 길을 반드시 막기로 결심했다. 역으로 아데나워를 최대한 빨리 수상직에서 밀어내려는 이들 모두는 이 베스트팔렌 출신의 거친 두프후에스를 일종의 지렛대로 여겼다.     

아데나워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규정에 따라 두프후에스가 기민당(CDU) 의장단 회의에 참석하여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경제부 장관인 에르하르트의 강의를 들은 다음 연방과 주 차원의 경제 정책과 재정정책의 상황을 설명하도록 정해졌다는 사실이다. 이 날짜는 아데나워와 상의 없이 정해졌고 그도 이 회의 때문에 카데나비아의 휴가를 중단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회의에 초대된 모든 사람은 아데나워의 전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누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1962년 9월 27일에 예정된 회의는 취소되었습니다. 논의될 안건을 연방정부에서 더 정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민당(CDU) 당대표 아데나워.”     

아데나워의 첫 번째 전문에 대하여 냉정하고 자신감 있는 답장을 했던 두프후에스는 아데나워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기민당(CDU)의 명예 대표가 아니라 당대표입니다. 그래서 당대표의 모든 권리와 의무는 저의 권한에 속합니다. 귀하는 실무담당 대표입니다. 중요한 결정과 절차에 앞서 실무담당 대표는 당대표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합의가 되지 않을 때 의장단 회의나 당 대표단 회의에 문제를 회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매우 공손하게” 새 의장단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토론 주제와 일정에 대해 그와 논의할 것을 요청하고 나서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갔다. “나는 귀하가 이 모든 상황에 대하여 천천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 서한의 사본은 의장단 위원들과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들에게도 전달되었다.     

크로네는 이 소동과 관련하여 두프후에스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했다. “수상이 자신이 가장이라고 또는 여전히 가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수상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이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족쇄를 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소동이 얼어난 당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지도부는 아데나워가 1963년에 사임하도록 강요하며 이 날짜를 곧 공표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결정했다. 크로네, 폰 브렌타노, 게르스텐마이어, 폰 하셀, 두프후에스, 슈트라우쓰, 그리고 물론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9월 말 크로네는 글롭케와 함께 카데나비아에서 아데나워에게 에르하르트를 이른 시일 내에 수상 후계자로 선언하도록 하고 내각 개편에 관한 논의도 할 요량이었다. 에르하르트와 슈트라우쓰를 싫어하는 아데나워의 우려를 고려하여 부수상을 임명하여 내각 업무를 시작하고 조정하도록 하고, 특히 국방위원회를 이끌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에르하르트, 슈트라우쓰, 폰 브렌타노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아데나워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수상은 물러 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슈피겔》이 새로운 위기 상황을 야기하며 사달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자신이 당 지도부와 여당의 압력에만 둘러싸여 있다고 보지 않았다. 내각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물들이 점차 독자노선을 걷거나 그럴 의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는 다만 그의 후계자를 둘러싼 암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지만 말이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의 영원한 불화는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아데나워가 경기 정책 문제에서 반복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엄격한 입장 표명을 요청하고, 최근의 잘못된 결정을 비판하거나, 직무 유기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욱하는 성질의 에르하르트를 의도적으로 자극하려고 했다고 추측할 것까지는 없다. 물론 아데나워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객관적으로 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늘 그러한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를 다루어 왔다. 곧 경기 순환, 국제 경쟁력, 에너지 정책, 그리고 잘못되면 유권자의 표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분야 말이다.


사실 에르하르트는 1949년 이래로 수상의 정당한 우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늘 서한이나 대담 또는 국무회의에서 자세하고 전문적이며 대부분 낙관적인 답변을 해왔다. 경제 정책 문제에서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불가능했지만, 에르하르트 또한 수상의 경제적 무지에 대해 우습게 대하는 습관을 자제했다.     

1962년 봄과 여름은 임박한 물가 상승으로 다시 한번 ‘자제를 호소’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늘 활동적인 수상은 에르하르트가 통화가 평가 절하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판을 가했다. 아데나워가 1960년대 초반에 국내 경기를 생각하며 동화에 나오는 소년처럼 ‘늑대, 늑대’를 외쳤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다. 그러나 아직 재앙이 닥치지 않았다. 사실 경기 침체는 에르하르트가 수상에 오르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어쨌든 아데나워가 뒷이야기를 위해 만난 언론인을 포함하여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에르하르트의 경제 정책에 관한 거의 끊임없이 탄식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실제로 에르하르트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에르하르트를 내각에서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자살이 될 일이었다. 1962년의 에르하르트는 거의 난공불락의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더욱 못마땅한 것은 경제부 장관의 영국에 관한 정책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유럽경제공동체(EEC) 문제에서 어느 정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브뤼셀의 월권적 태도에 아무런 화를 내지 않고 공동 시장의 개방을 끊임없이 역설하였다. 1962년에는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조건을 협상하고 나섰기에 아직은 회원국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제 수년 동안 에르하르트가 유럽경제공동체(EEC) 확대 문제에서서독에서 내로라하는 거의 모든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정이었다. 폰 브렌타노가 이끄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자민당(FDP)과 마찬가지로 협상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요청하고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칼 카르스텐스가 있는 외무부도 [영국의] 회원국 가입을 지지하였다. 산업계와 무역계도 같은 견해였고 사민당(SPD)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사회 집단 가운데 농업계만이 유일하게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데나워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피할 수 없는 긴장 관계에서 대체로 타협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늘 워싱턴과 파리에 조금 더 친밀하여지고자 애썼다. 이는 여당 진영의 다수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였다.     

1962년은 아데나워가 외교의 초점을 확실히 그리고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일방으로 프랑스 친화적으로 바꾼 해이다. 그러나 이것이 갑작스럽게 바뀐 것은 아니다. 1963년 1월 22일 맺은 엘리제조약으로 마무리된 일련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드골에게 집착할수록 독일 내각과 정부 여당의 외교 정책적 지침과 맞서는 형국이 초래되었다. 대다수 국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특히 대립을 보인 것은 에르하르트였다. 에르하르트는 영국 정책의 문제에서 몇 년 전부터 런던에 대하여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이래서 아데나워가 그의 권좌를 노리는 에르하르트를 더욱 싫어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가 영국 친화적인 자세를 매우 노골적으로 취하는 데 비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영국 친화적인 인물이었던 외무장관 슈뢰더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운신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아데나워가 1962년에 더욱 의존하게 된 모두와 균형을 이루는 입장을 취했다. 프랑스와의 친선? 좋다! 그러나 보다 광범위한 서유럽 협력의 틀 안에서만 말이다!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발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중기적으로 영국도 여기에 함께 해야 한다! 서유럽 공동체의 확장? 마찬가지로 좋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희생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외무장관은 이러한 노선에서 아데나워가 1950년대에 추구한 통합정책과 더불어 미국과의 거의 무조건적인 유대 정책에 동조했던 정부 진영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슈뢰더의 경쟁자인 폰 브렌타노와 크로네조차도 이러한 신중한 균형 외교에 대하여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아데나워의 오랜 추종자였던 파리의 블랑켄호른이나 브뤼셀의 할슈타인조차 이제는 슈뢰더가 독일 외교 정책의 복잡한 게임을 늙은 아데나워 수상보다 더 탁월하게 다루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슈뢰더의 미국에 대해 다소 양보하는 태도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공개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롭케나 크로네와 같은 측근들은 이미 1962년 여름 수상이 내각을 개편하려는 막연한 계획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글롭케는 1962년 7월 말에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을 들었다. “슈뢰더의 행동이 그를 잠 못 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병들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 분노의 이유가 무엇인가? 슈뢰더는 서유럽 정치 연합의 구상을 완전히 버리는 조건으로 영국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슈뢰더는 정치에 관한 전문을 연방정부 공보실장인 칼-귄터 폰 하제에게 전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정보의 흐름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자신을 거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슈뢰더는 또한 베를린 특사인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베를린에 관련된 정보를 알리지 않기 때문에 베를린 의회에서 정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는 영국 정책과 프랑스 정책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차기 실세로부터 냉정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아데나워의 정확한 느낌과 관련된 문제였다. 아데나워는 슈뢰더가 자기의 거의 모든 술수를 제대로 배운 최고의 학생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슈뢰더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그는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슈뢰더의 후계자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첫 번째 선택은 아마도 튀센기업의 루르 지역 관리자를 역임한 쿠르트 비렌바흐일 것으로 보였다. 그는 1957년부터 연방의회의 의원이었으며 아데나워의 후기 단계에서 기민당(CDU)의 가장 유능한 외교정치가에 속했다. 비렌바흐는 당시 56세였다. 1939년에서 1950년 사이에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미국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에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월스트리트와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도 포함되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장 모네와 영국 인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비렌바흐가 슈뢰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책 방향을 추구할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었다. 비렌바흐도 영국 친화적이고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지지하고 드골에 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얼마 후에 유행을 탄 명칭인 이른바 ‘대서양주의자’였다. 스스로 생각할 때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도시적이며 동시에 베스트팔리아 출신인 슈뢰더 못지않은 강경파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와 아데나워는 프랑스·독일 조약 문제를 놓고 충돌을 벌였다.     

이 무렵 슈뢰더의 후계자로 지명될만한 또 다른 떠오르는 스타는 구켄베르크 백작이었다. 그는 기사당(CSU)의 보수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바이에른의 오래된 훌륭한 가톨릭 귀족 가문 출신으로 나치를 강력하게 거부한 가문이기도 하다. 그는 나치 독일군에서 5년 동안 복무하다가 1944년 10월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칼라 군인방송’*에서 활동한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1947년부터 1963년까지 바이에른 사민당(SPD)의 지방당 위원장으로 일한 발데마르 폰 크뇌링겐을 만났다. 그리고 프리츠 하이네, 필립 로젠탈, 오토얀도 만났다.     

* ‘칼라 군인방송’ [Calais Soldatensender, 역자주 –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정치전쟁지휘부에서 운영한 흑색 방송.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주 임무였다. 영국이 운영하면서 독일 내부의 지하방송인 것으로 위장했다.]     

아데나워가 1962년 여름 구텐베르크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동안, 슈뢰더는 이미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위해 비밀리에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1962년 8월 말 크로네는 그가 헤르베르트 베너와 여러 차례 만나 연정 조건으로 무엇을 제시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곧 6년 동안의 연정, ‘지금 당장’ 중요한 인사 문제의 확정, 소선거구제 도입, 기존의 안보정책과 외교 정책의 지속, 인플레의 추세를 막는 대책이 그것이었다. 놀랍게도 베너가 이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따라서 아데나워가 이제 구텐베르크를 후계자로 고려할 때 연정·정치적 계산이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비렌바흐 또한 비당파적 외교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프리츠 에를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해에 그와 더불어 독일 외교 정책협회를 비밀스러운 초당적인 토론을 위한 발판으로 만들었다.     

구텐베르크는 나치에 저항했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다른 정치가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지유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사민당(SPD) 사람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1957년 연방의회에 입성했을 때 그는 36세에 불과하여 젊은 의원에 속했다. 그는 1959년 가을 의회 연설을 통하여 사민당(SPD)의 독일 계획을 무자비하게 비판하여 그의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또한 아데나워의 관심도 끌게 되었다. 이미 대부분이 신중한 동방 정책을 지지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동독과 동유럽을 소련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서구 민주주의의 당연한 과제로 여겼다. 그리고 기사당(CSU) 내에서 그는 확고한 보수주의자로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강력한 반대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슈트라우쓰의 모든 면을 못마땅해했다.     

이상하게도 아데나워뿐만 아니라 헤르베르트 베너도 이 도발적인 젊은 신인 정치가를 존중하였다. 그는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의 다른 많은 점잖은 대표자들에 비해 훨씬 든 것이 많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1961년 초부터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심각한 곤경에 처했기에 여러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여름에 개각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1961년의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의 관계는 정부 설립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다. 수상은 그를 내각에 들여야 했지만, 그의 모든 행보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이 불신의 기괴한 면모들 가운데 하나는 슈트라우쓰가 위기 상황이 발발하면 군사독재를 실시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슈트라우쓰는 하인리히 크로네를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크로네는 슈트라우쓰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런 크로네가 1960년 7월 아데나워와 나눈 놀라운 대화를 언급했다. “수상은 슈트라우쓰가 장기적으로 국방부 장관으로 남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슈트라우쓰는 외무장관이 되고 싶어 하는데, 그래야 1965년에 수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수상은 내 말을 막았다. 나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질문했다. 그는 자기 질문의 근거를 댔다. 곧 언젠가 슈트라우쓰가 무슨 짓을 할지 알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일군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상은 터키에서 있었던 군부 쿠데타를 언급했다.”     

아데나워는 《슈피겔》의 독자가 아니었다. 가끔 언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그 잡지를 ‘쓰레기 슈피겔’(Dreck-Spiegel), 그리고 더 나아가 ‘잡동사니’ 잡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잡지의 편집자들을 ‘갱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슈트라우쓰에 관한 불신은 그 잡지의 편집장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보다 한술 더 뜨는 수준이었다. 아우크슈타인은 몇 년 전부터 국방장관을 공격해 왔다. 그러면서 《슈피겔》의 독자들에게 그와 같은 생각을 주입하였다.     

1962년 3월 수상은 다시 한번 음울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슈트라우쓰가 비상시의 독일군의 역할에 대해 프란츠 마이어스 주지사와 논의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나라에서 군대는 위기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이 아니던가? 마이어는 아데나워에게 이에 대하여 경고하고 아데나워는 자기 우려를 대통령인 륍케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글롭케와 크로네에도 “이 영리하지만 통제력이 없는 인물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렸다.     

그의 측근들이 파악한 대로 1962년 초에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와의 결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근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슈트라우쓰는 《슈피겔》이 몇 달에 걸쳐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차였다. 그리고 《슈테른》, 《프랑크푸르터 룬드샤우》, 《쉬드도이체 차이퉁》과 같은 정부 비판적인 모든 언론이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고발에 고발이 이어졌다. 소련에 대한 핵 선제 공격 주장, 주독 미7군의 군대 막사 건설에 관련된 불법 자금 거래, 측근 특혜, 무절제한 행동에 관한 사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들이 난무한 것이다. 슈트라우쓰는 이 문제를 일부는 법으로 해결하고자 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늘 그렇듯이 뭔가 찜찜한 것은 계속 남았다.     

적어도 1962년 봄과 초여름에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를 정치적인 부담으로 여겨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는 글롭케에게 그가 FIBAG 사건과 연계하여 내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글롭케 또한 슈트라우쓰에 대해 큰 의구심이 들고 있지만, 연방 수상실에서 만든 FIBAG 사건 조사 보고서만으로는 그를 몰아낼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아데나워에게는 슈트라우쓰가 사건이 종결된 후 자발적으로 사임하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 또한 만만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글롭케와 크로네는 함께 아데나워를 말렸다. 이 사건으로  야당이 이득을 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스트라우쓰에 대한 비판이 너무 과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2년 5월 초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하는 가운데 잘 알려진 질문에 관한 답을 구할 때가 왔다. 곧 내각에 들어온 기사당(CSU) 당대표가 궁극적으로는 복수를 다짐하는 실각한 장관보다는 통제하기가 더 나은 것 아닌가 말이다.     

1962년 상반기 내내 나라를 뒤집에 놓은 슈트라우쓰를 둘러싼 위기는 바이에른 내부 차원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사당(CSU) 안에서는 슈트라우쓰가 이끄는 자유주의 파벌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당(CSU)의 보수 가톨릭 파벌에는 스트라우쓰를 둘러싼 스캔들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진보적인 되프너 추기경도 슈트라우스를 싫어했지만, 본에서 추락한 그가 뮌헨으로 와서 바이에른 주지사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1962년 7월 논란이 되었던 슈트라우쓰의 뮌헨으로의 귀향을 막은 것은  교회 파벌의 반대 덕분이었다.     

1961년 총선 전후의 짧은 밀월 기간이 지나자 자민당(FDP)의 대다수는 다시 스트라우쓰 반대 노선으로 이미 회귀하였다. 국방장관은 이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부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확히 1962년 여름 자민당(FDP)의 과도한 반대는 아데나워가 오히려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쓰를 붙잡은 이유가 되었다. 선거에서 자민당(FDP) 측이 사민당(SPD)과 연대하여 FIBAG 사건을 이용할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먼저 7월 8일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 지방선거가 있을 때까지, 그리고 가능하면 1962년 11월 25일 바이에른 주 지방선거가 있을 때까지 그럴 요량이었다. 슈트라우쓰가 본에서 버텨내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입지가 강화된 것처럼 보이자, 정부 개편이라는 해방작전을 통해 내각에서 자기 운신의 폭을 넓히려던 아데나워의 모든 계획은 1962년 7월 수포로 돌아 갔다. 정부가 《슈피겔》의 위기로 결국 개편이 된다면 이것은 해방작전이 아니라 거의 끝장이 날 일이었다.      

당을 키우고 시민 세력과 더불어 13년 동안 통치해온 수상은 1962년에 이중의 좌절을 맛보았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그는 더 이상 구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의 고립은 명약관화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1947년부터 그의 국내 정책의 전체적 노선이 되어온 자민당(FDP)과의 연정이 이제와서 자기 은퇴를 대가로 해야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해는 기민당(CDU)에 운명적인 노선 변경이 이루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아데나워의 업적이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였다. 포괄적이고 초교파적인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을 이끌던 기존의 지도자는 이제 주로 라인지역과 베스트팔렌 지역, 그리고 남부 지역 가톨릭이 주축이 된 파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은 두 가지를 혐오하였다. 첫째로 자민당(FDP) 내의 자유주의 파벌을 혐오하고, 둘째로 기민당(CDU) 내에서 에르하르트, 슈뢰더, 슈무커, 폰 하셀을 중심으로 한 북독, 개신교, 경제적 자유주의 파벌을 혐오한 것이다. 그러나 교파는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으로 아데나워 주변의 기민당(CDU) 의원 중 누구도 과거 [가톨릭이 세운] 중앙당(Zentrum)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파울 뤼케, 바론 추 구텐베르크는 물론 라이너 바르첼, 브루노 헥, 하인리히 크로네도 이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대한 신뢰가 흐려지고 있었고 이미 1962년부터 시작된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에 관한 아데나워의 ‘복수극’이 여기에서 확실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때 기민당(CDU)의 위대한 통합의 인물이었던 아데나워는 이제 당내 소수파 리더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그가 반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운 기민당(CDU)을 사민당(SPD)과의 연정으로 몰아가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자민당(FDP)이 그를 정치적으로 매장하고자 하기에 이러한 방향 전환에는 분명한 내적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 15년 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맞서 싸워온 아데나워 추종자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했다. 노선 변경의 내적 모순은 연정 정책의 변화를 다름 아닌 철저히 보수적인 아데나워가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 당시 이탈리아 기민당(CDU)에서 볼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차원의 ‘좌경화’(apertura a sinistra)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새로운 노선을 추종하는 이들은 이념적으로 오히려 보수인 가톨릭 계파의 고위정치가들이었다. 다만 그 당시 별로 힘이 없었던 한스 카처를 중심으로한 기민당(CDU) 사회위원만이 예외였다. 이렇게 보자면 자민당(FDP)으로부터 멀어지고 동시에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추구하던 경향은 처음부터 인위적인 것으로, 나중에 형성된 사민당(SPD)과의 대연정 동안에, 그리고 이 대연정이 와해되고 난 다음에 명확히 드러났다.     

기민당(CDU)의 불행이기도 했던 아데나워 정권 후기의 불행은 이미 수상이 사방에서 포위망이 좁혀오던 1962년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수상직의 실질적 단절을 의미하며, 이후의 5년 동안에도 지속된 현상이다. 이 시기는 불확실한 변동이 이어졌고 그의 사후에도 기민당(CDU)을 오랫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사방에서 늙은 최고의 우두머리 늑대인 자신을 둘러싼 젊은 파벌 지도자에 맞선 생존 투쟁과 연정 정책 사고의 전환이 시작된 것과 더불어, 1962년부터는 미국으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지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유대에 관한 전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유럽 전체의 질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I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