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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권력투쟁 II

아데나워 전기 II

프랑스로의 방향 전환  


아데나워가 수상이 된 이후 프랑스와의 화해를 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로 선언했다는 것은 1962년에 그를 둘러싼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불분명해진다.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싼 오랜 싸움에서 단명한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를 위한 노력은 종종 헛된 구애와 비유된다. 아데나워는 낙담하지 않고 프랑스와의 최대한 긴밀한 협력의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르 지역 문제가 해결되고 1956년 가을 수에즈 운하 위기를 겪으면서 프랑스 정치 계층의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 모두에 무한히 실망하게 된 이후에야 진전을 보게 되었다.     

1957년 봄 이후 구체화 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는 드골의 현명함 덕분에 계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62년 여름에 양국이 서로 국빈 방문을 하고 1963년 1월 22일 엘리제조약을 맺음으로써 마침내 화해가 완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 이후 길고 중단 없이 지속된 외교 정책 노선의 정점으로 이해되었다.     

사실 아데나워의 프랑스 정책은 복잡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는 종종 분열 양상을 보이는 서방 강대국들 사이의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상의 일부로 이해할 때만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아데나워는 강대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간의 화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민감한 감정도 또한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베네룩스 국가들도 신중하게 대하였다. 또한 그는 6개국 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필수적인 다자간 관계당사자로 이해하여 이 안에서 모든 관계자 사이에 합리적으로 균형을 이룬 이해관계가 가장 유익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아데나워는 대립이 해결될 수 없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단호하게 미국 노선을 따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적어도 딘 애치슨 임기부터 케네디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안보 문제에 해당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맞서 유럽 대륙의 동맹국들을 활성화하여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프랑스와는 달리 그는 요란을 떨지 않고 동맹국 내에서 이러한 균형 정책을 추구했기에 오히려 매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드골이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준비할 때조차도 그는 드골 장군이 지나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 계획을 이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60년 여름과 가을에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체제 내에서 미국의 보호와 독일과 프랑스, 또는 유럽 대륙 차원 특수 관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때도 변함 없이 미국을 선택했다. 이는 서방 강대국 간의 상호균형을 이루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1962년과 1963년 말기에는 물론 분명한 노선의 변화가 있었다. 그가 프랑스 쪽으로 무게추를 옮기고 있었고, 영국의 가입 문제에서 영국과 미국에 맞선 격렬한 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것이 동맹국 내의 균형 노선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1963년 1월 중순에 그는 프랑스·독일 조약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의 조지 볼 국무장관 대리를 만난 자리에서 원칙적으로 해양 방어에 기반을 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다국군을 주축으로 한 전쟁 억지 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1963년 6월 케네디는 아데나워의 초청으로 독일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국빈으로서 독일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미국 동맹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보기에 케네디에 관한 찬사가 과도한 것이었지만 미국과의 동맹은 그에게 신성불가침한 것이었다. 프랑스와만 일방적인 연대를 맺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여전히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프랑스·독일 조약 이후 프랑스에만 의존했다는 인상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방점을 달리 찍었다고 해서 프랑스·독일 양자 연합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의 프랑스 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것은 미국과 영국에 편향된 점을 겨냥했지만 그렇다고 이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의 탈퇴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수상에서 물러난 후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강화한 것도, 만약 그가 수상으로 남아서 날마다 복잡한 관계망에서 결정을 내려야되는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맘대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1962년 이후로는 무조건 미국을 지지하자는 말은 더 이상 그에게서 나오지 읺았다. 그의 수상 임기 말기에도 미국과 프랑스는 가장 중요한 두 외교 상대였다. 비록 무게추가 프랑스로 기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데나워는 여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케네디 정부는 1961년 가을 러스크와 그로미코의 회담 이후 계속해서 그를 실망시키거나 짜증이 나게 했다. 반면에 드골과의 관계는 1962년 봄 이후 상대적으로 잘 나가도 있었다. 그래서 미국이 노골적으로 패권주의를 내세우는 것에 대하여 맞서게 하려고 굳이 드골의 기분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 관한 그의 인상이 나빠질수록 미국의 패권주의에 관한 장기적인 대안을 드골과의 화해를 통하여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더 강하게 하게 되었다.     

4년 동안 드골은 아데나워를 이 노선에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1962년과 1963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아데나워는 점차로 그에게 기울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순수한 외교 정책적 동기가 수상 후계자 문제와 얽히게 되었다.     

1961년 11월 케네디와 회담한 이후 그 우유부단한 대통령이 다시 계략에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 아슈베이와 진행한 케네디의 인터뷰에서 수상은 추가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곧 1962년 동안 케네디는 폭넓은 양보냐 아니면 실제 전쟁 위험을 감수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케네디가 서독을 희생시키면서 소련에 양보하기로 한 것처럼 보이기에 아데나워로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분간 시간을 더 벌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려야만 했던 것이다.     

1961년 11월 말과 12월 초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수상은 뢴도르프의 조용한 의무실에서 미국과 영국의 [소련에 대한] 폭넓은 양보에 대응하여 두 가지 방책으로 맞서기로 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함께 화해 노선을 택하였기에 협상 준비에 프랑스를 모든 형식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하면 미국과 영국의 시도를 어느 정도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데나워는 케네디에게 드골에게 적절히 영향을 끼쳐보겠다고 약속했다. 4대 강국 회의와 다가오는 독일에 관한 동서 회담에서 드골의 반대 의지를 활성화하는 것이 첫 번째 전략이었다.     

둘째 대응책은 독일과 소련 사이의 대화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59년 이후 아데나워는 다양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곧 한편으로는 앵글로·색슨 진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흐루쇼프가 있었다. 앵글로·색슨 진영은 독일과 소련이 직접 대화를 나누게 되면 본의 정치에 관한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서독에 관한 모스크바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을 우려하였다. 아데나워의 계산에 따르면, 그 경우 독일을 희생해가면서 협상할 준비가 된 그들의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아데나워와 흐루쇼프 사이의 대화가 일단 시작되어도 서방 연합국의 피드백 없이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었다.     

대화의 또 다른 상대는 물론 흐루쇼프 자신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어떤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좀 더 집중으로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만약 전체적인 양보를 해야 한다면 최상의 조건을 제시하는 방법은 직접 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화를 할 준비가 된 상대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독일의 여론이었다. 수년 동안 크롤 대사는 오직 [아데나워] 자신만이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사실 부정적인 공존 방식, 곧 지속적인 분단이라는 방식을 독일 국민에게 설득할 권위가 있다고 믿는 수상을 지켜봐 왔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결국 여러 방법 가운데 하필이면 잠정적인 분단에 동의한 수상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피한 새로운 규제에 관하여 권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안에서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필요로 동서 협상이 성사 될 때까지는 자신이 수상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을 합당하게 도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61년 12월 초 수상이 병상을 떠나 샤움부르크궁으로 돌아온 날 바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주독 소련대사인 스미르노프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스미르노프에게 자신이 크롤 대사를 중요하게 여겼기에 지금까지 자기 수하에 둔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 그리고 스미르노프가 즉각 낌새를 채고 아데나워에게 크롤이 흐루쇼프와 나눈 대화에서 나온 구상에 동의하는지를 묻자 수상은 스미르노프가 만족하도록 모호한 답을 했다. “절반 절반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1955년 흐루쇼프와 나눈 잊을 수 없는 대담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련의 중국에 관한 우려를 언급하였다. 1955년 9월 다차에서 나눈 대화에서 흐루쇼프가 중국의 위험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한 이후 아데나워는 언젠가는 중국 카드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중국을 우려한 소련이 서방 전선과 관련하여 이성적인 조치를 바람직하다고 여기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아데나워는 이제 그의 가장 정중한 자세를 보이며, 소련 지도자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고, 흐루쇼프 제국의 많은 것에 관한 이해를 표명하고, 심지어 ‘나치 도당들’이 소련을 침략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는 이에 관한 언사를 그동안 극도로 아껴왔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진 적대관계를 우정의 관계로 극복한 것을 언급하며 이것이 독일과 소련의 관계에서도 가능하지 않은지를 물었다.     

이러한 발언에 분명히 전술적인 속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틀 후 아데나워가 크로네에게 스미르노프와의 대화록을 넘겨줄 때 크로네가 기록한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아데나워는 자기의 남은 정치적 삶에서 독일과 소련의 관계를 지속 가능한 질서의 차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여전히 이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미르노프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제 아데나워 수상이 협상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모스크바에 전할 수 있었다.     

이때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눈 여러 사람은 아데나워가 베를린의 운명과 관련하여 매우 체념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베를린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한 명민한 크로네는 미국과 영국이 베를린에 서독 정부와 정치적으로 무관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아데나워가 아무런 강력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궁금해했다. 그리고 드골이 1961년 12월 중순에 아데나워와 헤어지면서 독일의 운명을 베를린에 너무 크게 걸지 말라고 심각하게 충고하여도 아데나워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서베를린 포기를 막은 것은 드골의 고집만이 아니었다. 맥밀런은 이 뜻을 짜증이 나게도 드골로부터 직접 들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통령은 또한 1961년 12월 중순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랑스가 워싱턴의 미국주재대사위원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라는 아데나워의 권유도 거부하였다. 이때 아데나워는 양보 말고는 더 나은 방안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드골 장군은 고집을 부리며 서로 관계가 좋았을 때 자기가 직접 미국과 영국 측에 제기했던 모든 주장에 반대했다. 아데나워 수상이 늘 그랬듯이 자기 동료가 지나친 양보를 하는 것에도 짜증을 냈지만, 드골이 자기 제시한 새로운 화해의 노선에 함께하지 않으려 하기에 이제 드골의 마음이 변한 것에 대해서도 단단히 화가 났다.     

12월 9일 회의에서 견해 차이가 거의 극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드골이 제시한 것은 정중한 거부였다. 곧 만약 서로 탐색하는 과정에서 “협상에서 어떤 명예로운 것이 가능할 때만 프랑스가 협상에 참여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명예로운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서방이 베를린 문제에 대해서만 양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 가지 사항에서 러시아의 협박에 굴복하면 곧 또 다른 요구를 받게 될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곧 독일, 말하자면 서독을 법적 또는 실질적 중립국으로 만들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프랑스가 중립국이 되어야 할 차례가 올 것이었다.     

회담하는 동안 드골은 케네디와 맥밀런의 압력을 받은 아데나워가 베를린 문제에 관해서는 최대한 신속한 협상을 촉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케네디는 모스크바에 있는 톰슨 대사에게 크리스마스 기간에 소련의 의사를 타진해보라는 지시를 내려 또다시 약점을 노출하고 만다. 그러나 그로미코는 계속해서 비타협적인 요구 사항만을 제시하고 있기에 당시로서는 서방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양보인 베를린에 관한 소극적 규정을 실행할 수 없었다. 1962년 1월 아데나워 수상은 그의 외교 정책 전체가 중단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워싱턴과 런던은 여전히 독일 문제에 관하여 양보 노선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분간은 단호하게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이때 프랑스와 다시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미 1961년 12월 중순 파리에서 드골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농업 정책에 대해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공동 시장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지지를 얻고 싶었기에 상당한 양보가 불가피했다. 1962년 1월 14일 유럽경제공동체(EEC)가 2단계로 진입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 측에서는 이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 농무부 장관 피사니가 진정한 승자라고 널리 믿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가 농업 정책에서 양보를 얻어내자마자 드골은 유럽 정치 연합 계획에서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을 시도하였다. 1962년 1월 18일 유럽의 공동 농산물시장 문제에서 커다란 돌파구가 마련된 지 나흘 만에 푸체 대사는 드골의 직접 지시에 따라 새로운 연합 조약의 초안을 제시하였다. 유럽의 정치 연합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연동시키는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유럽경제공동체(EEC) 기관의 독립성도 보장되지 않았다. 특히 아데나워가 힘겨운 협상을 통하여 달성한 타협안은 대부분 철회되었다. 분명히 드골은 1960년 7월 랑부이에성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또한 알제리 정책으로 마침내 자신이 큰 고비를 넘게 되었다고 믿으며 이에 상응하는 자신감을 보이는 프랑스 대통령에 대하여 또다시 짜증이 났다.  드골이 케네디를 재촉하여 파리, 런던, 워싱턴의 관리들이 삼자 지도부 계획을 다시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지금까지 변화무쌍했던 아데나워와 드골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대중은 대부분 이런 관계의 부침을 잘 모르고 있었다. 대중은 1958 년 9월 14일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이루어진 두 거물의 역사적인 만남이 보여주는 멋진 그림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역사적 카드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갑자기 2월 9일 아데나워와 ‘의전과 형식 없이’ 만날 것을 요청했다. 드골은 알제리 반군과 협상의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다. 알제리 내전에 관여한 육군비밀조직(OAS)의 테러도 그 주에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 지하조직은 이미 대통령에 대한 암살 계획에 실패했다. 그리고 또 다른 테러 공격이 우려되었다. 2월 15일 바덴바덴의 디펜던스 폰 브레너스 파크호텔에서 두 정상이 회담을 가지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회담에 관한 모든 것이 철저히 보안이 유지되는 가운데 준비되었다.     

언론은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이 회의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데나워는 특별열차로 여기에 도착했고 드골은 하르의 프랑스 군 공항에 착륙하고 나서 독일 경찰의 강력한 오토바이 호위를 받아가며 전속력으로 회담장에 도착하였다. 파크호텔 주변은 경찰이 삼중으로 차단막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육군 비밀조직은 경찰의 라디오의 주파수를 알아내어 경호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공격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위협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정치가는 회담 중에 이 위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브리핑을 담당하는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이 요청을 허세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샤를 드골과 콘라드 아데나워가 극적인 긴장 속에서 이 역사적 만남을 즐겼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 회담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 측이 이른바 ‘제2차 포셰 플랜’으로 제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회의 다음날 아데나워는 헨리 키신저에게 좋지 않게 헤어지게 될 것을 확신하고 드골을 만나러 갔었다고 말했다. 오전에는 단독회담으로 오후에는 외무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 회담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 전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아데나워는 흐루쇼프를 상대로 ‘부드러운 노선’을 택한 미국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또한 그는 자민당(FDP)이 모스크바와 ‘단독으로 협상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는 말도 했다. 모스크바와 직접 거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서독 정부는 ‘매우 조심’하고 그러한 흐름에 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드골도 자기 나름대로 프랑스 국내 정책의 반발로 자기 기본적인 외교 정책이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를 털어놓았다. 일부 무리는 소련과 뜻을 같이하고 다른 무리는 나라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나라의 정치와 국방을 기존의 조직에 내맡기지 않아야만 국가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자유세계에서 자기 역할을 설득력 있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독일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혁에 대해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서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요 문제에 관하여 함께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필요한지에 대하여 이상적인 확인만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정치적 연합에 대해서는 극적인 합의를 보았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능숙하게 협상했다 그는 포셰의 2차 초안에 나온 극단적인 주장을 포기하도록 드골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바덴바덴의 회의 다음 날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외무장관 쿠브 드 뮈르비에에게 지시한 것을 보면 그가 아데나워에게 양보한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① “본인은 이 본문이 현재의 (유럽)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정치적 연합이 이러한 조직들의 존재 또는 발전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조건에서만 그러하다. 사실 공동체들은 정치적 결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 공동체들은 정치 덕분에 존재하며, 유럽의 정치가 그 공동체들의 설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논의 중에 드골은 자기 생각을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정리했었다. 곧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태초에 신이 있었고 그다음에 정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② “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이 문서 어디에서든 언급하는 것을 인정한다.

③ 우리는 독립적인 사무국장을 두지 말아야 하며 보편적 참정권에 기초한 의회의 선출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독일과 합의했다.

④ 아데나워 수상은 유럽 차원의 국민투표 구상에 동의하였다. 다만 이에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드돌 대통령의 관점에서 아데나워의 입장은 확정적이었다. 다만 그 역시 가까운 장래에 유럽의 발전은 투트랙으로 전개될 것이었다. 곧 한편으로는 유럽경제공동체(EEC),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연합으로 전개될 것이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자신이 태어난 1876년을 언급하였다. 물론 드골을 안심시키는 말은 아니었다. 독일제국 건국 5년 후인 1876년에는 독일 관세동맹이 맺어졌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차원에서 표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북독 연맹으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독일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지속가능한 구조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아데나워와 드골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럽 동맹을 오늘 당장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관계자들이 일단 어느 정도 일을 진행해보고, 유럽경제공동체(EEC)가 매우 어려운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적 차원과 동시에 경제적 차원을 포괄하는 역할을 하는 유럽 연합을 고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푸셰위원회의 협상에서 바로 드러난 사실은 드골이 연합을 목표로 하여 경제는 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복잡하고 모순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바덴바덴의 회의는 전체적으로 큰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수상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아데나워와 드골은 이전에 있었던 불협화음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비교적 조화로운 방식으로 협력을 이루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 자체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6개 국가로 구성된 공동체의 세 조약 체계를 기둥으로 정치적 지붕을 쌓기로 합의하였다.     

아데나워는 ‘조국들의 유럽’과 ‘통합 유럽’을 대비시키며 대대적인 선전을 하는 것이 매우 별로라고 여겼다. 그는 1962년 4월 초 이탈리아 수상 판파니에게 이것이 그저 말싸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양자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정치적 연합에 대한 견해차가 그 양식에 관련된 복잡한 타협을 거친 후에 마침내 마무리되자, 네덜란드와 더불어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어느 사이에 벨기에의 외무장관이 된 폴-앙리 스파크가 협상에 나섰다. 6개국 공동체의 소국들은 이제 확실히 드러난 대로 이 공동체 안의 양대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의 헤게모니를 경계하였다. 이탈리아도 문젯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작은 나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이 정치 연합과 더불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참가하는 것이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헤게모니를 견제하는 필수적인 균형추가 될 것이었다.     

독일 측의 협상을 슈뢰더 외무장관이 주도하는 바람에 게임은 더욱 복잡해졌다. 슈뢰더 외무장관은 아데나워와 달리 영국이 최대한 빨리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관계당사자들은 서로에게 악역을 떠넘기느라 분주했다. 기본적으로 드골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압력으로 포셰의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제 룬스와 스파크 외무장관이 영국의 가입 문제를 들고나왔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문제와 관련하여 드골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규정을 내세웠다. 그래서 결국 이 계획은 1962년 4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6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처음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드골, 그리고 판파니 수상은 1962년 7월에 다시 협상을 재개하고자 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     

당연히 상호 비난이 곧 시작되었다. 아데나워는 실패의 책임이 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드골과 일치했다. 그는 네덜란드 외무장관 요제프 룬스가 주범이라고 확신했다. 몇 년 후, 그는 그 ‘키가 큰 녀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1962년 봄과 여름에 “네덜란드 사람처럼 완고하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릴 수도 있었다”.     

1962년 7월 말 협상이 거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교착 상태에 빠지기 전에 이미 아데나워는 늘 이 계획에 대해 커다란 의구심을 지녔다. 5월 30일 이탈리아 외무부 사무총장인 아틸리오 카타니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당시 프랑스 대사 푸셰를 이어 유럽 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 그는 어느 정도 불안을 느끼고 이에 따라서 유럽 연합에 대해 점점 피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통이 이정도로 심하면 애를 제대로 낳을 수 있기 힘들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데나워 수상은 이미 유럽에서의 협력은 당분간 프랑스와의 양자간 협력의 증진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파리에서의 6개국회의가 실패한 직후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6월 말 또는 7월 초에 프랑스를 공식 국빈 방문을 해 주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드골과의 화해는 미국이 베를린 문제에 관한 탐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데나워가 미국과 영국에 대한 거의 모든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케네디가, 그저 교수로만 일을 했을 뿐 정치 경험이 부족한 고문들에 둘러싸인 약한 대통령으로 드러났다. 이는 1962년 1월 초에 존 맥클로이가 은밀한 대화에서 비꼬듯이 말했던 것과 같았다. 곧 그들은 ‘이전에 누가 명예 교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정교수가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만 했던 것이다.’ 맥클로이의 말로는 이 신사들은 평생 단 한 번도 딜레마에 처해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고문들에 둘러싸인 대통령이 어쩌면 1962년에 핵전쟁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호이싱거 장군으로부터, 핵전쟁이 발생하면 첫 한 시간이 결정적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케네디는 1961년 11월 이에 관련되는 질문에 대해 수상에게 안심할 수 있는 답변을 했다. 곧 런던과 파리가 2분 이내에 아데나워에게 언제 어디서나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케네디가 정말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까? 이제 아데나워가 가지게 된 케네디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는 그가 경제 정책이나 농업 정책 또는 사회 정책에서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수상은 이 몇 달 동안 핵전쟁이라는 두려운 전망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미국 측으로부터 비상계획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마다 그가 한 전형적인 대답은 소련의 베를린에 관한 봉쇄 조치에 대해 엠바고로 그리고 최악의 경우 해상 봉쇄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재래군사력 상태에 관하여 그가 1962년 2월 말 다울링 대사에게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의 분쟁은 “즉각 핵전쟁으로 이어지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끔찍한 패배로 시작될 것이었다.” 그는 영국과 캐나다가 해상 봉쇄라는 구상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짜증을 냈다.


그에게 희망의 빛을 준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본을 방문한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분신인 동시에 케네디 가문에서 가장 강인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36세의 이 미국 법무부 장관을 즉시 맘에들어했다. 아데나워는 전쟁이 발발하면 해상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인 톰슨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 건설로 난민의 흐름을 멈추게 했기에 환영받았다고 주장하여 비난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한편 크롤 대사도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경솔하게 해왔기에 아데나워는 모스크바 주재 서방 대사들 사이에 종종 그들이야말로 각자의 나라들 사이에 커다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실제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어려움이 없지만 소련과 독일 또는 대만(Formosa)과의 사이에 존재다는 말을 실제로 어떤 연설에서 한 것이다. 혹시 미국 국무부 안에 일부 중재자가 심겨 있다는 말인가?     

아데나워는 흐루쇼프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흐루쇼프의 사위인 아슈베이와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아데나워가 소련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아데나워는 비꼬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는 러시아인들이 그의 목을 자르고 싶을 것입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웃으면서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코드가 맞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아데나워에게 수상과의 두 번의 만남이 그의 형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하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미국을 믿어도 좋다고 강력하게 강조하니 아데나워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굳게 믿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아데나워에게 미국 언론을 상대로 미국의 확고한 입장에 대해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언론인들 앞에서 습관적으로 말이 많은 아데나워는 종종 이 약한 대통령이 얼마나 민감한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언론인에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비판을 의도적으로 전한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아데나워의 비판이 자연스럽게 확산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다른 정치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인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둘 다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아데나워는 로버트 케네디를 믿고 안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그는 이제 몇 주 동안은 미국 언론인에 관한 발언을 자제하거나 좋은 말만 했다. 그 말이 보도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사이러스 슐츠버거는 4월 초에 카데나비아로 아데나워를 방문하여 아데나워 면전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대단한 특혜를 받아 가며 대화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늘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미국을 다스린다고 해도 케네디와 똑같은 정책을 추구했을 것이라고 변명 삼아 말했다. 러시아는 이제야 막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처럼 실용적으로 접근하며 공존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덧붙여 말하기를 러시아가 이 방식을 온전히 존중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렇다고 하였다.     

그는 베를린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소련은 여기에서 협박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탁월한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이 더 흐를 것이다! 소련이 연합군 항공로의 비행을 방해하려는 분명한 조처를 했을 때 아데나워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핵전쟁에 관한 우려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카데나비아에서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이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국방부로부터 '전쟁 상황'에 관한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휴가 중인 이 86세의 노인은 핵전략의 몇 가지 기본 가설들을 검토하느라고 바빴다. 결과는 예측할 수 있었다. 그가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을 가질 때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슈트라우쓰 국방장관에 관한 새로운 의심뿐만이 아니라 민방위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갑작스런 핵으로 공격을 받은 민족의 삶의 근거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핵을 통한 파멸을 생각하면서도 핵무기에 반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핵억지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그는 소련이 서구와 미국을 동시에 초토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오랫동안 숙고하였다.     

이 문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는 몇 페이지의 종이에 이 문제를 직접 논리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했다. 추상적인 분석을 통하여 그는 그가 오랫동안 바라온 전략핵무기의 유럽 배치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만족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매우 가치가 있다고 여겨 4월 13일에 폴 니츠에게 그 구상을 전해줄 요량이었다. 그는 미국 국방장관을 대신하여 샤움부르크궁에서 연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데나워의 구상에는 노스태드 장군이 수년간 주장해 온 중거리 미사일의 유럽 배치에 관한 찬성 의견이 담겨 있었다. 아데나워가 알고 있듯이 미국은 이미 영국, 터키, 이탈리아에 토르 미사일과 주피터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적의 선제공격에 취약한 시스템이기에 유럽연합최고사령부(SACEUR)는 오래전부터 해상 발사와 지상 발사가 가능한 이동식 중거리 미사일의 배치를 요청해 왔다. 아데나워도 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핵전쟁의 위협 대신 1961년 9월과 10월에 미국 측에서는 새로운 회유 전략이 제기되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오래전부터 경계해 왔던 것이었다. 니츠를 만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격노했다. 이틀 전인 4월 11일 오전에 미국의 요청이 접수되었다. 새로운 협상안에 대한 입장을 48시간 이내에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협상안에는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같은 소규모 중립국의 안정을 담보로 한 인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제적 베를린 통로 관리 기관 수립의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니츠와 다울링 대사에게 그러한 규정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딘 러스크가 도브리닌 대사와 즉각 재협상하기를 바라는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곧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합의, 동방과 서방의 상호 불가침 협정 ( 베를린 봉쇄가 시행되면 베를린 접근로를 요청하는 데 미묘한 문제가 될 것이었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양독위원회 설립과 베를린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 외무장관 대리의 상설 회의체 수립과 같은 제안이 들어 있었다.     

아데나워의 의견에 따르면 이는 독일과 베를린 문제에 관한 미국과 영국의 양보라는 지옥의 강의 물줄기가 다시 한번 활짝 열리게 된 꼴이었다. 아데나워는 폴 니츠에게 그렇게 된다면 사실상 동독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핵무기 비확산까지 제안하다니!     

신문이 도착하자 샤움부르크궁에서는 난리가 났다. 슈뢰더 외무장관과 카스텐스 차관과의 논의에서 아데나워는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외무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3월 22일자 문서의 새로운 버전임을 알게 된 것이다.43 게르하르트 슈뢰더도 3월 13일 로잔에서 그의 맞상대인 딘 러스크와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아데나워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미국의 유화정책에 독일의 외무장관이 공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아데나워의 의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 이후 어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슈뢰더의 저항에 맞서 아데나워는 에리히 멘데와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포함한 원내대표단에 4월 12일 늦은 오후에 의회 건물에 있는 폰 브렌타노의 사무실에서 만날 것을 요청했다. 거기서 그는 슈뢰더와 카스텐스가 최종 확정된 미국의 베를린 계획에 대해 보고하라고 요청했다.     

폰 브렌타노와 크로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과 합의를 한다면 베를린의 가구 마차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를린은 죽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올렌하우어는 머뭇거렸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민당(SPD)이 독일 문제에 관한 계획을 제시한 이후 현재의 이러한 구상은 사민당(SPD)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기 떄문이다. 멘데도 이를 제기하였지만, 아주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4월 초 자민당(FDP) 지도부는 에리히 멘데를 대신하여 볼프강 숄베르가 작성한 제안서에 관하여 비밀리에 논의했다. 이 제안서에는 두 개의 독일 국가와 중부 유럽의 핵무기 없는 비무장 지대의 지정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에 관한 동방 측의 반대급부로는 울부리히트 집단의 퇴임, 동독의 탈스탈린화, 소련의 베를린 자유 보장과 서독으로의 여행 자유 회복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멘데가 이 제안서에 대해 너무나 비판적이어서 아데나워는 그 제안서를 자민당(FDP) 당대표도 반대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슈뢰더는 이 제안서에 새로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몇몇 점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물론 아데나워는 연방의회 건물 한가운데 있는 방에서 여당 당 대표단이 모여 하는 극적인 회의보다 언론에 더 잘 알리는 확실한 수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이치란트풍크》가 4월 13일 저녁에 이를 보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4월 14일 신문에 모든 내용이 보도 되었고 미국 협상 제안에 대하여 분개하는 논평이 실렸다. 많은 이들은 폰 브렌타노가 이를 언론에 알렸다고 이야기하였다.     

아데나워는 니츠에게 여당 당 대표단의 ‘명백한’ 거부 의사를 알리기 전에 뜸을 들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최대한 빨리 카데나비아로 돌아가 중단된 봄 휴가를 계속했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그는 니츠에게 독일 정부가 소련에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제안을 찾을 수 있는지 충분히 숙고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분명히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수정된 글롭케의 현상 유지 협상 계획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다. 서독이 제안하면 프랑스가 동의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그의 발언은 이제 더 이상 신중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는 협상 과정에서 일단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을 바란 것이다.     

미국의 견해에 따르면 아직 협상은 없고 탐색만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케네디가 이미 오래전에 협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회하고 탐색 기간에 베를린 관련 잠정 협정에만 집중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4월 14일 자 서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케네디 대통령에게 1961년 11월 개인적으로 한 약속을 강조했다.     

이른바 ‘앵글로·색슨’ 곧 영국과 미국의 회유 노선에 대한 드골의 반응은 아데나워의 것만큼이나 날카로운 것이었다. 4월 14일 쿠브 드 뮈르비에의 비망록에서 그는 ‘서로에게 협상을 촉구하는 광기’를 조롱하고 이러한 사전 토의와 그 내용에 관한 확실한 거부를 표명하라고 지시하였다. 곧 이어서 이루어진 아데나워에 관한 프랑스 국빈 방문 초대는 유럽 정치 차원의 포석일 뿐만 아니라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연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미국 입장을 나타낸 문서의 요점을 미리 발표한 결과 이 문서가 도브리닌에게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이제 독일 외무장관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독일 측이 추문에 가까운 무분별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으로 한풀이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른바 그 서류의 ‘누출’ 혐의에 대해 미국 국무부가 요란을 떠는 것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자기 신뢰 부족에서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도록 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 모든 것에 더해 아데나워는 그레베 대사에 대해서도 의심이 들었지만, 증거에 따르면 문제의 녹음 내용이 본에서 새어나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기자들이 모자이크식으로 그 문서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워싱턴이나 런던에서 탐사 취재를 하여 내용을 보완하고 강화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미국과 소련의 탐색에 관한 지시가 본 주재 다울링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도록 하여 그레베 대사를 노골적으로 배제했다. 분명히 워싱턴은 그레베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하여 양보하려는 성향의 미국 정부의 세부적 속내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슈뢰더도 비판하고 나섰다. 그가 독일대사에 대한 미국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러스크에게 강력히 항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레베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글롭케에게 보내는 4월 20일자 메모에서 그레베 대사가 즉시 휴직하고 이에 따라 워싱턴으로 복귀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의 정치 무대 뒤에서 베를린 정책에 관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케네디가 특별 대표로 베를린에 파견했던 클레이 장군의 임무가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는 발표에서 드러났다. 이는 4월 11일 공표될 예정이었다. 곧 최종 베를린 문서를 발표하는 날과 겹쳤다.     

아데나워는 이제 온 사방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하게 되었다. 3월 27일 그는 폰 브렌타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특히 러스크 국무장관은 제네바에서 베를린 문제를 아주 잘 다루고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통보해 주었기에 내 생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딘 러스크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상대로 의도적인 거짓 정보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때는 정보를 주고 또 다른 때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협상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우려스러운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모든 것(방법, 구체적 내용)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의 노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 이상한 것은 미국의 새 문서에서는 ‘서독’과 ‘서독인’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의 유일한 대표라고 들었습니다.” 아데나워는 미국이 그렇게 명칭을 변경한 것이 미국의 노선 변화를 보여주는 ‘강력한 표징’이 된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아데나워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내부 협의 중에도 미국에 관한 100% 신뢰를 표명하고 나선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대해 더 큰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슈뢰더가 러스크와의 대화에서 처음부터 늘 미국의 추종자 역할을 너무 과하게 해 온 것이 우려됩니다.” 적어도 아직은 아데나워가 슈뢰더의 선의를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정작 슈뢰더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베를린 문제에서 가장 큰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독일 측에서 이러한 미국과의 관계에 지나친 압박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강경 노선을 조용히 수정한 것이다.


1962년 봄의 국내 권력투쟁도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폰 브렌타노와 크로네는 매우 강경한 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슈뢰더의 정치적 입지가 상승하는 것을 최대한 견제하려고 애쓰며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슈뢰더는 이제 아데나워를 무조건 따르는 보수적인 ‘종자’라는 오래된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 정책에서 케네디의 노선을 추종하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에리히 멘데의 지원을 받고 심지어 프리츠 에를러와 빌리 브란트를 중심으로 한 사민당(SPD)의 실용주의 파벌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어쨌든 아데나워와 케네디 정부 사이만이 아니라 아데나워와 슈뢰더 사이도 그때부터 빠르게 틈이 벌어졌다. 독일 정책과 베를린 정책과 관련된 차이는 유럽의 정치적 연합 문제와 얽혀 있었다. 4월 20일 아데나워가 평소처럼 카데나비아에서 봄 휴가를 보내면서 글롭케에 보내는 비망록을 통해 자기 구상을 명확히 하는 가운데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더불어 우리와 미국의 관계도 악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사주로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유럽의 정치 연합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유럽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조치의 목표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프랑스와 독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와 룩셈부르크도 참여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또한 독일과 미국이 긴장 관계에 놓이면서 영국은 반유럽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스와 독일만 남게 된다.’ 이는 더욱 분명해지는 새로운 노선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제 워싱턴과 공개적인 충돌을 감수해야 한다고 단정했다. 그는 외무부가 추구하는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곧 미국이 협상을 이끄는 것에 관한 신뢰를 보이는 것 말이다. 그는 4월 30일 카데나비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몇 년 동안 미국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유럽이라는 경주마에 돈을 더 많이 걸어야 합니다.“     

그는 프랑스가 이번 콘서트에서 제1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인식했다. 아데나워는 독일이 프랑스에 종속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5월 초 베를린에서 열린 회의에서 클레이 장군에게 확언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제2차 세계대전의 과거 때문에 독일이 유럽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 주도권을 프랑스가 매우 온건 한 형태로 행사하는 것이었다.”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하여 그는 이제 현실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공존 방식의 규정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오스터헬드는 이와 관련된 아데나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리는 소련 점령 지역, 곧 동독 사람들이 더 자유롭고 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면 소련 점령 지역을 인정하고 나아가 헌법적 실체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구상에서 구체적인 운영 방식을 끌어내는 단계에 들어서면 아데나워는 여전히 완고한 모순의 정신을 드러냈다. 아데나워 수상은 케네디 정부와의 공개적인 충돌의 무대로 베를린을 선택했다. 1962년 5월 7일과 8일 두 차례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베를린 문제에서의 미국의 탐색하는 태도에 대해 정중하지만, 매우 가차 없는 평가를 하였다. 지금까지 미국은 끝없이 지루한 전문의 홍수 외에는 그 어떤 결과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고수했다.     

아데나워는 국제적인 이른바 ‘베를린 통로위원회’를 수립하려는 계획에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예상되는 13명의 구성원 중 5명은 동부에서 5명은 서부에서 임명되고 중립국의 3명은 저울의 지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많은 매우 민감한 문제에 관한 결정은 세 중립국가 위원이 내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말하기를, 아무도 그 중립국 위원들에게 그러한 부담을 지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와 같은 작은 나라들이 이러한 고도의 정치적 기구에 참여하여 ‘국제적인 성격의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랄 것인가?     

만약 베를린에 관한 상호 탐색에서 아무런 양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일단 휴식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는 현상 유지가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노선을 추진하는 것보다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케네디 정부뿐만 아니라 독일 외무장관도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의도였다. 얼마 전에 그는 카데나비아에서 벌어진 열띤 토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베를린에서 당신에게 모욕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도 독일 외무장관이 5월 초 아테네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베를린 통로위원회 계획에 찬성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워싱턴에서 그레베 대사를 소환할 의사를 발표하며 결국 케네디 정부에 양보했다. 클레이 장군은 그에게 이를 간곡히 촉구한 바가 있었다. 아데나워가 분명히 말했듯이 그는 여전히 그레베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론에 대고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부작용이 발생하면 늘 무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죠!”     

그레베는 자신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했지만, 통보 방식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슈뢰더 외무장관에게 독일·미국 관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자신이 소환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서한을 이미 보낸 바가 있었다. 이제 그에 대한 찬사를 곁들인 대답이 기자회견을 통해 주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데나워에 대한 대중의 인상이 바뀔 리가 만무했다. 이럴 때 수상은 냉정한 국시의 관점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케네디는 독일 수상의 이러한 정면 공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공개 발언을 통해 반발하였다. 《노이에 츄리허 차이퉁》의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과 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서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1961년 10월과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케네디가 고개를 숙이고, 다울링 대사는 5월 14일 레크의 비난과 아데나워의 서한에 대하여 미처 답하지 못한 것에 관한 절반의 사과를 전하러 샤움부르크궁을 찾았다.     

그래서 양측은 이 논란을 극단으로 이끌지 않기로 했고, 소련 측에 양보하려던 미국의 뜻을 당분간 접었다. 그 당시만 해도 베를린을 둘러싼 오랜 긴장의 가장 중요한 단계가 이미 끝났다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고함과 양보의 의사만을 표하는 것을 적절히 섞어가면서 실제로 아데나워 수상은 4년간 이어진 소련의 강력한 압력을 견디며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무사히 구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후일 아무도 그를 자유 베를린의 구세주로 축하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대신 아데나워를 비판하는 언론은 ‘반베를린주의자’이며 가톨릭 신자인 라인란트 출신 인물에 대한, 그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적개심을 계속 불태웠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62년 봄의 이 몇 주 동안 평화가 오리라고 믿지 않았다. 대신에 스미르노프에게 예비 차원에서 마련해 두었던 10년간의 ‘정전’을 제안하기로 했다. 아데나워는 1962년 6월 6일 미국이나 독일 외무장관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소련대사에게 흐루쇼프에게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곧 소련이 경제 건설을 위한 평화를 필요로 한다는 관점에서 “이 두 나라, 곧 소련과 서독이 비유적인 의미에서 10년간 일종의 정전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는 이 기간에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독 주민들도 지금보다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10년 동안 평온한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 그러면 논란이 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이해를 도모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이전에 케네디와 그랬듯이 아데나워는 이제 흐루쇼프와의 탐색을 위한 대화로 긴 휴지 기간을 가질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국무장관이 본을 방문하기 전인 6월 중에 이 제안에 관한 응답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스크가 6월 21일 본에 도착했을 때도 흐루쇼프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프랑스를 방문하기 몇 시간 전인 7월 2일 아침이 되어서야 스미르노프는 소비에트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의 10년 ‘정전’ 제안을 완전히 거부하고 이전의 기본 입장을 주장한 6페이지 분량의 각서를 전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러스크의 방문은 4월과 5월의 심각한 차이가 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워싱턴에서도 소련에 대한 지나친 양보 의지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커졌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미국의 변덕스러움의 뒷맛을 잊지 않았다. 그는 또한 케네디의 회유정책이 맥밀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클레이 장군으로부터, 결코 친영국적이지 않은 이 ‘보스턴에서 온 아일랜드인’이 드골이 프랑스와 미국의 견해차를 해결하자는 개인적인 호소를 거부했기에 매우 씁쓸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클레이는 언짢은 어조로 “이제 이렇게 형성된 공간을 영국이 채울 것으로 보입니다.”고 말했다.


1962년 4월과 5월에 국제정치와 국내 정치의 모든 중요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아데나워와 드골의 화해가 가속화되었다. 6월 초 수상은 호르스트 오스터헬트에게 드골에게 친서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이 친서는 그가 프랑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독일 문제에서 드골의 오른팔이었던 피에르 말라조차도 수상의 글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드골은 프랑스가 ‘통합된 유럽에서 합당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뜻을 편지에서 읽을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실제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어 했다. 이 기간에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대륙 연합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특정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이 편지에 독일이 유럽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구절을 포함시킬 생각을 했다. 그러면 수취인이 프랑스의 지도력에 대해 수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관한 결론을 스스로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하인리히 크로네는 이를 말렸다. 그에게 아데나워의 프랑스 정책이 점차 거북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계획한 프랑스 국빈 방문의 커다란 규모, 특히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했던 랭스에 있는 대성당에 거행할 장엄미사 때문만이 아니었다. 폰 브렌타노도 비슷한 우려를 하였다. 그는 원래의 통합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었다. 글롭케는 회의론자의 편에 속했다.     

이 주간에 아데나워와 이야기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제 그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인상을 받았다. 곧 그는 프랑스로 확실히 방향을 틀기, 미국과 거리 두기,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전혀 아니나 영국이 유럽 정치 연합에 참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독일과 소련의 공존 방식을 확립하기 위해 더 커다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필 이때 풀브라이트 미국 상원 의원의 압력으로 케네디가 아데나워에게 서한을 보내 이른바 ‘닭 전쟁’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농업 정책에 압력을 가하려고 하자 그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62년 6월 9일 토요일 오순절에 폴 레노가 광범위한 탐색을 위해 아데나워를 찾았다. 그도 이미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데나워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드골을 26년 동안 알고 지냈다. 1936년 당시 그는 드골의 현대식 전차 무기에 관한 계획을 지지했다. 프랑스 전쟁이 진행되던 운명적인 몇 주 동안, 이 민족적 보수주의자는 히틀러와 협상하자는 모든 사람의 의견에 맞선 프랑스 수상 및 국방장관으로서 일했었다. 그의 사임 직후 프랑스는 항복했다. 그 자신은 전쟁의 마지막 해를 작센하우젠과 부켄발트 포로수용소에서 보냈다.     

제4공화국에서 레노는 이미 기괴한 인물이 되었고, 1958년에 그는 제5공화국 헌법 제정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지만, 그 후 드골의 측근에서 벗어나 점점 더 그를 반대하는 인물로 변했다. 그러나 1962년에는 적어도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는 여전히 매우 좋았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레노가 3일 후에 있을 드골과의 만찬 때 그에게 전해주기를 바라며 그의 프랑스 정책과 유럽 정책의 기본 구상을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는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가 프랑스 대통령을 위해 외교 정책을 간청하고 프랑스의 폴 레노가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이상한 대화였다.     

이 기회에 아데나워는 앙트완 피네 또는 장 모네와 마찬가지로 레노가 결정적인 점에서 드골의 노선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레노는 지식이 풍부한 국방 전문가이지만 프랑스의 핵무장을 환상으로 여기고, 드골 장군이 미국을 새로운 고립주의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는 또한 드골의 유럽 계획을 불신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하원과 상원에 있는 거의 모든 정치인이 드골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말을 그에게서 들었다. 드골 장군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매우 의심스러운 유럽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여 국민들의 뜻을 직접 묻고자 하는 뜻이 확실하다고도 하였다.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화 과정에서 레노는 아데나워에게 유럽 정부를 휩쓸고 있는 이른바 ‘비겁의 폭풍’에 굳건히 맞설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영국이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미묘하지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에 아데나워는 ‘예! 그렇지만 ...’이라고 대답했다. 미국 없이는 소련에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또한 유럽이 당분간 미국과 소련에 상응하는 힘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브뤼셀에 있는 유럽경제공동체(EEC) 위원회의 압력과 영국의 가입을 경솔한 조치로 여기는 에르하르트, 외무부, 독일연방산업연합회(BDI), 독일 농업계의 압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분명히 밝혔다. 유럽경제공동체(EEC)는 회원국 확대에 대처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하면 독일, 특히 석탄 부문에 경제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초유럽인’, ‘유럽인’, ‘반유럽인’이 존재하며 자기 자신은 유럽인에 속한다고도 하였다.      

이어서 레노는 아데나워가 많은 예화를 들어가며 드골을 칭찬하는, 그러나 약간 뼈가 있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뜻은 한 마디로 드골이 프랑스를 다시 크고 강하게 만든다면 프랑스는 드골을 막아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아데나워가 흐루쇼프에 관한 드골 장군의 비타협적 태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가 분명해졌다. 그는 1960년 5월 정상회담이 실패했을 때 드골이 한 말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곧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러시아인들이 어느 사이 라인강가에 와 있는 꼴을 나는 볼 수 없다.’라는 말이다!     

또한 레노는 아데나워가 1925년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우호 관계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말도 들었다. 아데나워는 늘 이 연도를 매우 정확하게 언급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프랑스와 소련의 합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과 유럽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레노는 아데나워와 헤어지면서 그가 영국의 유럽 연합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매우 단호하고 그 협상 기준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드골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럽경제공동체(EEC) 자체와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스파크와 룬스가 주장하는 영국의 가입과 정치적 연합을 연계하는 것도 분명히 거부하였다. 그는 스파크가 실제로 영국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활동했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기다리는 것에 점차 지쳐간 것이다.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왔다.     

레노만이 경고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후 블랑켄호른 대사가 아데나워를 찾았다. 정치적으로 둘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이 두 사람은 드골이 아데나워를 위해 마련한 멋진 방문 계획에 대하여 기뻐하며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블랑켄호른이 이번 방문의 절정이 될 행사를 그려보았다. 마들렌에서 케도르세까지 기마병들의 행진, 엘리제궁에서의 리셉션에 초대될 2천 명의 손님, 호텔 드빌에 모일 2천 명의 손님들, 많은 관객이 모인 가운데 상연될 갈라 오페라!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데나워가 “블랑켄호른 씨,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카펫과 관련된 일을 기억하십니까?” 블랑켄호른이 정말로 그 일을 기억하며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럼요.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스위스의 2급 호텔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데 얼마 후에 중산층 프랑스인이 우리를 영접하여 기뻐한 것도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매우 불쾌한 것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블랑켄호른은 드골이 국빈 방문으로 ‘3자, 더 나아가 2자 동맹’에 아데나워 수상이 함께해 주기를 바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유럽은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는 영어권, 다른 하나는 프랑스어권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드골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제3세력으로 대륙 동맹을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 노련한 외교관은 아데나워에게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관한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끈질기게 지적하며 그러한 노선을 국내 정치 차원에서 오래 견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블랑켄호른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은 1914년과 1939년에 약한 동맹을 형성하는 불운을 두 차례나 겪었다. ‘이 약해빠진 나라!’ - 우리가 이 나라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완고하게 대답했다. 독일 국민을 확실히 묶어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갑자기 러시아와 함께하거나, 양 블록 사이에서 춤을 추기 시작할 것이었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정치적 몽상가입니다! 또한 너무 안일해졌어요!” ‘그는 독일 민족의 안정을 도모하고 증진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인기가 없을밖에.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사실, 과거에 아데나워의 포괄적인 방향의 기준이었던 ‘자유세계’는 1962년에 상당히 분열되었다. 아데나워는 동반자들에게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였다. 미국에 관한 분노,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이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 폴-앙리 스파크에 관한 불신이 있었다.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유럽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누구보다 아데나워를 잘 아는 블랑켄호른이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분명했다. “결과가 어떨지도 모른 채 프랑스에 더 다가가 현재의 어려움을 피할 생각을 속으로 확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잘못된 결정’의 위험은 상당할 것이기에 카스텐스도 이러한 우려에 공감하지만, 무엇보다도 펠릭스 폰 에카르트, 쿠르트-귄터 폰 하제, 에르하르트, 슈뢰더 및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도 같은 생각이었다. 블랑켄호른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수상직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현실 역사적 이미지를 파괴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축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내각의 실력자들도 비록 개인적으로 동정을 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보았다. 수상과는 달리 그들은 본의 외교 정책에서 모든 관계자와 균형을 맞추는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프랑스와 최고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럽 정치 연합에 관한 추가 협상, 영국의 가입에 관한 긍정적인 추가 협상, 미국 내에서 위험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조심해서 피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더 이상 의견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날 선 질문을 했다. “우리가 항상 그렇게 착하게 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드골은 고집을 부리고 거절하면서도 잘 해왔습니다.”     

일단 1962년 초여름의 전체 외교 정책은 이제 프랑스 국빈 방문의 광채 아래 가려졌다. 의전 측면에서 항상 어려운 행사에서 모든 세부 사항을 얼마나 세심하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프랑스군과 독일군 행진 관련 의전에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행진은 아데나워의 국빈 방문 행사의 연장선상에서 드골이 샹파뉴 지방의 무멜롱 군훈련소에서 거행하도록 마련한 것이다. 독일군은 어떤 깃발을 들고 행진해야 하는가? 독일 외무부와 블랑켄호른은 서독 깃발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깃발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깃발은 사용할 수도 있고 둘째 깃발은 무조건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국빈 방문의 정점에서 이보다 더 고약하게 드골 장군을 도발할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감지하고 마침내 단 하나의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독일군은 독일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로 한 것이다.     

드골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근무하는 독일 장군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는 통상적으로 큰 문제가 없던 아데나워의 국빈 방문의 시작부터 분명해질 것이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국가 원수는 아니지만 드골은 오를리 공항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독일 대표단을 소개 할 때 드골 대통령은 슈파이 델 장군의 뻗은 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그의 부인과만 인사를 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장교들이 그런 식으로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 무멜롱의 행진에는 연합군 사령관 가운데 단 한 명도, 연합군 소속 장군도,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의 프랑스 장군도 초대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깃발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식의 극단적인 분노를 대하고 나서도 슈파이델 장군이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아데나워는 과거에 독일 최고의 군 지휘자로 임명한 이 인물이 그에게 더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얼마 전에 드골은 슈파이델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러한 요청을 슈트라우쓰 국방장관은 “잊었다.” 드골 대통령이 다시 한번 불쾌감을 표현하자 아데나워는 과거 장관이나 그와 관련된 인사와 헤어지기를 원할 때 흔히 사용한 방법으로 반응하였다. 그의 건강 상태를 물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슈파이델은 매우 불쾌한 기색으로 자신이 지금 매우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그는 아데나워가 1962년 7월 국빈 방문 중 그가 곧 교체될 것이라고 드골에게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1963년 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드 마르그리 대사는 글롭케 차관에게 항의 메시지를 전했다. 드 마르그리는 유감을 표하며 슈파이델이 몇 주 안에 해임되지 않으면 기피인물로 선언될 것이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아데나워는 자존심을 세울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에 슈파이델 장군을 불러 프랑스와 독일의 친선을 위해 때때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슈파이델은 불분명하고 매우 부당한 비난에 대해 계속해서 맞섰다. 직선적인 륍케 대통령은 드골을 강하게 비난하며, 1948년 12월에 처음으로 대담을 나눈 아데나워의 이 초기 군사 고문을 1963년 9월 30일 아데나워 수상과 거의 동시에 사임하게 하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데나워가 그를 강력하게 밀지 않고 냉정한 국시의 논리를 따랐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물론 인제 와서 그러한 사달로 아데나워가 프랑스와의 긴밀한 협력이라는 위대한 목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양국의 유대를 결심하도록 만든 것은 파리와 프랑스 지방에서 거행된 국빈 방문을 성대하게 치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징후는 7월 2일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시사한다.     

냉정하게 보면 드골이 그를 맞이하며 보여준 찬란한 행사들이 이미 다른 인물을 위해서도 거행되었던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1959년에 비슷한 방식으로 환대받았다. 흐루쇼프, 맥밀런, 케네디 모두 파리에서 비슷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방문은 여러 면에서 통상적인 외교적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드골은 이 모든 것을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크게 과시하기 위해 거행하였다. 명징한 역사의식을 지닌 아데나워는 이를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1919년 6월 6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에 독일 대표단으로 잠깐 파리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당시 계절은 지금처럼 초여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빙하기였다.     

그는 또한 20세기 초반 유럽의 권력 구조를 바꾼 주요 국빈 방문을 기억했다. 1903년 5월 에드워드 7세 국왕이 유명한 파리 국빈 방문을 한 뒤 1904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 협상이 이루어졌다. 1914년 7월 푸앵카레 대통령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것은 훨씬 더 운명적이었다. 이제 국빈 방문으로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번의 목표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확정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독일과 프랑스를 합쳐 1억 1천만 명의 유럽 대륙 동맹의 핵심을 이루는 연합을 결성하게 되리라고 아데나워가 꿈꾸게 되었다.     

이번 방문의 하이라이트는 통상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드골과 아데나워 모두 드골주의적인 정보 정책으로 오래된 이웃 국가 시대를 초월한 중요한 대표자로 요란을 떨고 나서서 랭스의 대관식 대성당에서 장엄미사를 거행한 다음 프랑스와 독일의 위력적인 군사력 과시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어느 기자가 쓴 것처럼 ‘피로 물든 샹파뉴 전쟁터 위에서’ 말이다.     

초청자와 언론, 그리고 아데나워의 측근은 모두 이번 국빈 방문 동안 수상이 보여준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새삼 계속 놀랐다. 사실 이번 프랑스 방문의 정치적 결과에 대하여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블랑켄호른 대사도 수상의 놀라운 건강 상태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않았다. “곧 87세가 될 분이 매우 힘든 꽉찬 스케줄을 매우 가볍게 처리하였다. 그분은 이미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여러 대담과 모임을 더하는 데에도 지치지 않았다.”     

드골은 크고 매우 웅장한 스타일로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의 역사를 만들기로 작정한 것에 대해 남은 마지막 의문까지도, 엘리제궁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한 그의 연설로 다 없애주었다. 그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이 연설문을 신중하게 준비했고, 다른 누구보다도 세두 대사에 그 효과를 검증받았다. 이제 독일 수상 앞에서 수 세기에 걸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긴 불화의 역사를 펼쳐보았을 뿐 아니라 함께 하는 미래에 관한 전망도 제시하였다. “수 세기에 걸쳐 고조되어 세상을 흔들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경쟁심, 양국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정치적, 전략적 다툼은 수많은 무력 충돌과 민족 감정을 일으켜 일련의 승리와 패배를 가져왔고 많은 사상자를 낳았으나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 실제로 독일과 프랑스는 주변 국가를 지배하기 위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고 각자가 2,000년 동안 우리 대륙의 영혼을 괴롭혀 온 오랜 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어서 과거 영웅들의 이름도 소환되었다. “그러나 칼 5세, 루이 14세,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 클레망소의 야심 찬 목표 그리고 심지어, 네 심지어, 지난 세계대전 동안의 범죄 정권이 시저, 기독교, 칼 대제의 위대한 과거로 독일 민족을 취하게 만들고자 했던 광폭한 열정이 남긴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전히 제국의 폐허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기원은 아직도 강력하고 지속적인 현실입니다. 유럽의 통일은 어쨌든 독일과 프랑스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결국 이 불길한 구원사는 두 민족의 연합으로 이어지며,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왕과 황제, 그리고 불한당들이 지난 자리에 존경스러운 아데나워가 서 있다는 말도 했다. “정치의 가치가 상황에 달려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치가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수상 각하, 귀하가 이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14년 동안 정치지도자로서 귀하가 탁월하게 수행해 온 업적을 보여주는, 추구한 목표에 관한 이러한 폭넓은 시각, 소용돌이 속에서도 보여준 확고함, 위대한 민족을 이끄는 노련함을 프랑스 국민도 잘 알고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귀하를 새로운 독일의 영적 지도자, 통치자, 대표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그러한 새로운 독일을 진심으로 바라며 프랑스의 번영, 안보, 평화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랑스 국민은 귀하를 위대한 독일인, 위대한 유럽인, 프랑스의 친구인 위인으로 여깁니다. 또한 그 위인이 자기 나라를 섬기고 있다고 믿고 선포하며 이 두 가지 이유로 프랑스 국민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아데나워는 이때 이전과 이후에도 다시는 이렇게 엄청난 찬사를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이후 드골은 단 한 번도 아데나워의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모습을 그토록 세밀하게 강조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드골에게는 1962년 7월 3일이 또 다른 이유로 중요한 전환점이 된 날이기도 하다. 그가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와 아데나워에 대해 위대한 연설을 한 이날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다. 드골 대통령은 마침내 손을 털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이 우연의 일치는 정말 멋진 순간을 의미했다. 1945년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는 더 이상 국력을 소모하게 하는 해외 전쟁과 식민지 제국의 부담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프랑스가 처음으로 탈식민지화라는 부채 없이 유럽의 재건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유럽 대륙 재편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과 함께 말이다. 국빈 방문에서 발표된 성명에서 독일 통일이라는 목표가 제삼 강조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드골의 마음을 안다. 그가 말하는 통일은 소련이 점령한 작센, 튀링겐, 마크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 주를 독일의 핵심 주로 재편입하는 것이었다. 오더·나이쎄 국경선의 동쪽 지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국빈 방문하는 동안에 드골과 아데나워 사이에 이루어진 집중적인 회담은 필연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양국 동맹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유럽 6개국 정치 연합의 틀 안에서 양국 동맹 수립을 먼저 시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리에 모여든 인사들도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도 서독에서 이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본에 있는 거의 모든 부서는 이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하인리히 크로네, 에리히 멘데를 시작으로 이를 반대하는 프리츠 에를러와 빌리 브란트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1962년 7월 프랑스와만 지나치게 일방적인 협력을 이루는 것에 관한 모든 반대자도 좀 더 큰 규모의 유럽 정치 연합이라는 커다란 환상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와 독일 양국 동맹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국내외 정치에서 상당히 고립되어 있던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그에게 남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드골이 7월 3일 만찬 연설을 시작하면서 의미 있게 말했던 ‘진실의 순간’은 이미 7월 8일 대표단의 최종 회의에 찾아왔다. 드골과 아데나워는 각 국가의 장관들에게 정치 동맹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더 이상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신뢰하지 않는 아데나워는 이탈리아가 제안한 로마의 외무장관회의가 아니라 정부 수반들의 회의에서 그 마지막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히 그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이제 자기 손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유럽 연합에 영국이 가입하는 문제에서 두 정부 수반은 영국의 바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특히 영국의 가입은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아일랜드를 포함하는 확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철저한 조사가 시급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전면에 내세웠다. 훨씬 저렴한 영국 석탄은 독일 광업에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스털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발표 과정에 함께 한 장관들은 두 정부 수반이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의 구상을 거부하고 영국이 유럽 정치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으며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하는 것도 매우 꺼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정상만의 대화에서 그들은 이러한 점에 대해 훨씬 더 솔직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만세 삼창으로 영국의 합류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특히 케네디와 맥밀런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우려했다. 한편으로 그는 맥밀런이 1962년 6월 초 챔스성에서 드골 장군과 마지막 나눈 회담에서 꼭집어 한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그의 말에 따르면 드골은 칼 대제의 제국을 원했고, 그 자신은 로마제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맥밀런의 관점에서 1962년의 상황은 분명히 매우 역설적인 것이었다. 드골은 분명히 영국도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형태의 국가들끼리 조직된 유럽을 원했다.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영국이 참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에는 영국 없이도 영국이 있습니다”(L’Europe à l’anglais sans les anglais).     

이 모든 것은 수석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제 드골은 본심을 드러냈다. 그는 영국의 가입에 의존하는 정치 연맹의 설립을 엄격히 반대하면서, 놀랍게도 아데나워에게 협상이 언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을 했다. 6개국 정치 연맹 협상이 실패하면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만이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를 노골적으로 물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처음에는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세 나라가 정치 연맹을 구성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다른 국가들에 가입 기회를 열어 둘 수 있다며 그 직접적인 질문을 약간 비켜갔다. 다만 협상을 통해 다른 국가들도 따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판파니 이탈리아 수상이 계획한 외무장관 회의가 실패하면 그는 ‘둘이 일을 시작할 생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둘이 짝을 이루어 함께 일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이제 아데나워는 무조건 “예”라고 답하였다. 그도 이제 이 길을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드골은 아데나워 수상이 한 이 약속의 가치와 중요성을 완전히 마음에 새겼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아데나워가 본으로 돌아오기도 훨씬 전에 이미 상황이 진전되었다.     

예상대로 유럽 정치 연합에 관한 마지막 시도는 점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7월 말에 아데나워를 찾아와 다시 모든 설득력을 동원한 폴-앙리 스파크에 대하여 수상은 단호히 너무 큰 규모의 정치 연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통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유럽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에 결국 모든 것이 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앞으로도 본에서 누가 큰 목소리를 낼 것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는 벨기에 외무장관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 에르하르트 경제부 장관을 초대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내렸다.     

아데나워는 이제 모든 영향력 있는 내각의 인사들이 자기 프랑스 정책과 다소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가 여전히 믿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인리히 크로네였다. 그래서 그는 이제 크로네를 그의 후계자로 삼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로네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싶어 하였다. 예를 들자면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 같은 경우 말이다. 이 대회가 끝난 후 크로네는 “우리의 때가 끝났다.”라는 확실한 인상을 받았다고 체념하듯이 말했다. 자신은 물론 아데나워의 시대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9월 드골의 국빈 방문 때 그는 드골에게 자기 후계자로 크로네를 생각하고 있다고 다짐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신뢰할 수 있고 온전히 자기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드골이 몇 달 후 양국 동맹의 문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독일 국내 정치 차원의 권력 구도를 오판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크로네 자신도 프랑스를 일방적으로 중시하는 것을 비판하는 진영에 진작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서 이 말을 듣었지만, 그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며 아마도 그 자신이 교묘하게 사주한 크로네와 슈뢰더 사이의 적대감을 너무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관한 정책은 정체상태였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아데나워는 영국의 유럽 정치 연합 가입 문제를 마침내 더 넓은 맥락에서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슈뢰더와 에르하르트가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이와 관련한 내각위원회의 구성을 자제해야 했다.     

그래서 아데나워와 대척점에 선 인사들은 9월 초에 있는 드골의 답방에 대하여 매우 복잡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블랑켄호른에게 보낸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편지에서 드골의 독일 방문이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독일의 동맹에 관한 자기 생각을 실행하기 위한 심리적 준비”가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슈뢰더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곧 드골은 또한 “독일과 프랑스의 이 밀접한 동맹으로 시간이 흐르면 영국과 미국과 별개로 소련과의 균형을 맞출 힘을 기르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슈뢰더 자신은 이 상황에 매우 불만이었다. 그는 8월 말 블랑켄호른에게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그는 수상에게 충언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와 계속 교감을 하고자 합니다만 불행히도 이에 관한 반응은 부정적입니다.”     

아데나워는 당장 슈뢰더, 에르하르트, 슈트라우쓰를 동시에 제거하고 싶었다. 특히 슈뢰더가 제1차 대상이었다. 슈뢰더를 교체하고 싶은 아데나워는 그가 이미 외무장관 파벌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블랑켄호른에게 그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인물이 없었다. 그가 전권을 행사하던 시대가 이미 저문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제는 서로 경쟁 중인 후계자들이 자민당(FDP)과 한통속이 되어 수상을 쫓아내는 일은 상황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본의 신임 프랑스 대사인 롤랑 드 마게리는 그때가 언제일지를 더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 드골이 독일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는 드골에게 양국 동맹의 해결책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반대 전선이 독일 내에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측에서는 요란한 성명이나 동맹 협약에 관한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 대신에 구체적인 진전을 위해 노력하고 드골 대통령이 내부적으로 적절한 제안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드골의 서독 국빈 방문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의 개선 행진이 될 예정이었다. 드골 장군은 철저히 준비했다. 드골 장군은 공개석상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 71세의 인물은 독일어 연설 부분을 외워야 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단상에 오르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루드빅스부르크에서 행한 큰 연설에서 그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이미 본 시내의 중심 광장에서 한 “위대한 독일 민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독일 민족입니다,”라는 열정적인 외침으로 그는 독일 국민을 휘어잡았다. 빌헬름 2세와 아돌프 히틀러 이후 그 누구도 그들을 향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함부르크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 전국에서 드골 열풍이 불었다. 아데나워조차도 드골의 열정이 약간 과장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드골이 다소 ‘총통스럽지’ 않냐고 약간 비꼬듯 물을 정도였다.     

브륄성에서 진행된 만찬에서의 큰 연설에서 드골은 이미 독일과 프랑스가 추구하는 ‘연합’을 촉구하였다. 동쪽으로는 ‘힘과 번영을 보호하는 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구식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의 중독에 따른 추구가 종식된 이후에는’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유럽의 ‘긴장 완화’, 균형, 평화, 발전이 보장될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브륄성에서 대규모 횟불 행진이 있은 다음에, 샤움부르크궁에서 바로 단독면담이 이루어졌다. 드골은 분기탱천했다. 블랑켄호른의 조언을 받아들인 륍케 대통령이 처음부터 영국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시킬 필요성에 대해 국빈에게 신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국민 대다수가 이것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국가가 소외되거나 주눅이 들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우정을 너무 강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였다. 이에 드골은 독일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드골 대통령은 아데나워에게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거부의 견해를 확실히 밝혔다. 그는 외연 확장을 일단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본에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에 아데나워는 헌법에 따라 정치적 지침은 대통령이 아닌 수상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비꼬는 투로 덧붙였다. “물론 저는 예의상 대통령과 몇 가지 사안에 대하여 논의하지만, 대통령께서는 그 문제를 깊이 다룰 시간이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를 모두 검토해 보고 나서 마침내 그 문제에 관한 결론이 아직 내려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부정적인 결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과의 협상이 무척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치 연합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브륄성에서 드골이 한 연설의 뜻에도 동의하였다. 곧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두 민족을 장기적으로 결속시키며 특히 동유럽에 대하여 일관되고 합의된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정밀하고 확실한 협약을 맺는 것” 말이다. 그러나 유럽의 정치 연합과 영국의 가입에 관한 문제가 여전히 미정이기에 그는 신중하게 신사협정 이상의 것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드골에게 이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꽃놀이를 하는 가운데’ 확고한 조약을 맺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외교와 국방 정책 문제에 실질적으로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그러한 키워드가 나오기만을 기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뭔가 명명백백하게’ 정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어쩌면 서한의 교환이나 서면 기록?” 그래서 이들은 기밀 서신 왕래나 기밀문서의 형태로 합의하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즉각 양국 동맹 체결을 가장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아직은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그 이유는 서독의 국내 정치적으로 그러한 계획을 반대하는 이들을 고려해야 했고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유럽 6개국과 영국과의 협상 때문에도 그랬다.     

국빈 방문이 끝날 무렵 아데나워는 드골과 함께 독일 문제에 관한 10년 ‘휴전’을 목표로 하는 흐루쇼프에 대한 철저한 기밀 계획을 논의하였다. 드골은 독일 국민이 소비에트 점령 지역에 있는 1,700만 명의 독일 주민들에 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첫째 문제로 삼고 민족 문제를 그다음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언급했다.     

드골이 독일을 떠나면서 그는 자신이 제시한 양국의 긴밀한 동맹에 대하여 독일 국민이 찬사를 보냈다고 믿었다. 돌아온 다음 날 그는 여동생 마리 아녜스에게 편지를 썼다. “독일 방문 동안 밀려드는 사람들과 군중의 열광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을 한동안 흠잡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자기 가정사에 독일이 얼마나 관련되는지를 언급했다. “슈투트가르트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는 1716년 바덴 지역의 크로칭겐에서 태어나신 증조부 루이-필립 콜브의 성함을 떠올릴 기회가 있었다!”     

아데나워 또한 국빈 방문의 결과를 드골과 마찬가지로 평가했다. 그는 9월 11일 국무회의에서 프랑스·독일 정책을 ‘국민이 인정했다.’라고 밝혔다. 물론 그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측근들조차 그의 흥분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9월 6일에 글롭케는 그 무렵의 분위기를 규정하면서 ‘비현실주의’라고 했다. 크로네도 이에 동의했다.     

이미 9월 18일 드골은 제안된 합의에 관한 자기 생각을 담은 6페이지 분량의 각서를 전달했다. 그는 외교 정책, 국방, 문화와 청년의 세 가지 분야에서의 유기적 협력을 전망하는 제안의 형식으로 회의록을 작성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외교 정책 분야에서 사전 협의 없이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푸셰 플랜의 기초가 되는 사항들을 이러한 제안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프랑스 측은 문구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간단한 서신 교환으로 이러한 합의가 발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각서가 도착할 때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에서 가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드골에게 9월 28일 자로 일종의 수신 확인서를 보내면서 잠정 결정 사항을 상당히 포괄적인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실제로 이 협력은 우리 두 나라의 운명과 유럽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정책의 제1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날, 그는 크로네 연방장관과 글롭케 차관에게 같은 내용의 서한 두 통의 작성을 지시하였다. 이 서한에서 그는 수상으로서 13년 동안 축적된 신뢰의 자산을 바탕으로 하여 계속 해결을 모색하고 싶은 여섯 가지 중요한 문제의 목록을 나열했다. 여기에는

“① 프랑스와 우리의 관계 확립.

 ②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편.

 ③ 미국과 우리의 관계 확립.

 ④ 동유럽 문제.

 ⑤ 군사 분야에서 이룩한 것의 보존과 세심한 관리.

 ⑥ 경제 분야에서 성취한 것의 유지와 관리”가 있었다.     

그는 ①~④번에 나열된 ‘생존의 문제들’을 개인적으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는 나머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주시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프랑스와의 관계가 처음에 언급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점에서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각서에 명시된 문제들의 해결을 포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영국 및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포함한 정치 연합의 문제”, 프랑스 정책, 영국 정책,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향후 발전 및 정치 연합 계획이 그의 생각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합적이었다. 지난 6개월의 경험으로 볼 때 그가 여기서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할지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데나워에게 쿠바 위기와 《슈피겔》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이 이러했다.     

*《슈피겔》 사건 [Spiegel Affäre, 역자주 – 1962년 10월 10일 슈피겔이 독일군의 부실한 방어 능력을 고발하여 슈트라우쓰의 실각을 요구한 사건. 슈피겔은 이전에 이미 슈트라우쓰가 건설회사인 FIBAG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을 보도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 사건으로 그에 결정타를 먹이게 되었음. 또한 이 사건은 독일의 언론자유의 수호,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촉매가 되었음.] 

    

반역의 나락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에서 가을 휴가를 보내면서 1962년의 부침에서 회복되기를 바랐다. 계획된 4주 가운데 3주가 채 못되었을 때 그는 휴가를 중단하고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의 장례식을 위해 급히 쾰른으로 날아갔다. 이스라엘을 여행 중이던 아데나워의 아들 폴은 아데나워가 일이 너무 많다고 투덜대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그 일 없이는 아데나워가 살 수 없었다. “내게는 휴가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단다. 사실 나는 이처럼 어려운 문제와 일에 치이어본 기억이 없다. 오늘 시작된 이번 주, 나의 마지막 카데나비아 휴가는 특히 힘들었다. 내일 월요일, 영국에서 히스 장관이 오고, 화요일에는 미국 번디가 온다. 그리고 화요일 저녁에는 뢴도르프로 날아간다. 나의 좋은 친구 페르드멩게스가 금요일 저녁에 사망하였다. 그는 최근 폐렴에 걸렸었다. 그의 아들이 말했듯이 그의 임종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의 죽음으로 마음이 매우 슬프다. 나는 그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수요일 아침에 쾰른에서 장례미사가 있다. 오후에는 장례식이 묑헨-글라드바흐에서 열리는데, 당연히 내가 참석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다. 몇몇 장관들이 금요일에 나에게 와서 연방의회가 열리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에 관한 최종 마무리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진정한 휴식이라고 거의 말 할 수 없지만 가을 날씨가 계속 좋구나.”     

10월 8일 본에서의 업무가 다시 시작되며, 일련의 위기로 바쁜 주일이 이어지다가 크리스마스 무렵에야 거의 마무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데나워만이 아니라 독일 국민 전체가 쿠바 위기로 놀랐다. 10월 2일 케네디의 안보 보좌관인 맥조지 번디가 카데나비아를 방문하여 페르드멩게스의 사망으로 계획되었던 말펜사에서 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수상과 동행했다. 긴 대화 가운데에서도 쿠바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신에 아데나워는 번디가 자신을 매우 짜증나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이달에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아데나워는 번디에게도 만약 영국이 유럽 대륙의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주도권을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정치적 경쟁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다소 생각 없이 말을 했다. 번디는 강경하게 답하였다. 곧 서유럽의 3대 강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15년 동안 유럽을 이끌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10월 22일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날 저녁 미국 대사와 CIA 장교가 샤움부르크궁을 찾아와 케네디가 그날 저녁 미국 방송을 통하여 발표할 연설과 함께 쿠바를 봉쇄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아데나워 수상에게 전달했다. 연설 자체와 편지의 내용 모두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이 비밀스럽고 위험한 조치가 독일과 베를린의 상황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 매우 우려합니다.”     

미국 측 인사들이 나중에 전 세계에 발표된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찍은 항공사진을 꺼내 들자 아데나워는 슈뢰더 외무장관, 글롭케, 오스터발트를 문밖으로 내보냈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는 모든 격식을 갖춘 메시지를 케네디에게 보내어 그의 조치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정보 부족에 대하여 슈뢰더 외무장관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최근 미국 방문에서 딘 러스크에게 받은 암시를 소홀히 여겼거나 고의로 그에게 알리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것이다.     

쿠바 위기와 《슈피겔》 사건은 내각의 실력자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했다. 아데나워는 슈뢰더가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이 ‘저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가 미국에서 구체적인 정보를 받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수상은 당분간 슈트라우쓰와 공조를 했지만, 이 새로운 휴전이 10년 동안 이어져 온 의구심을 해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관들 또한 서로 깊은 갈등을 겪었다. 슈뢰더는 슈트라우스와 크로네를 상대로 계속 다투고, 크로네는 슈트라우스와 슈뢰더를 불신하였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나 글롭케를 통해서도 아데나워에게 이 두 경쟁자에 관한 불신을 부채질했다. 슈트라우쓰와 훼헬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 사실 내각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타고난 정치가들 사이에 견해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962년 10월과 11월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무조건 케네디를 지지하기로 했다. 10월 23일 늦게 서유럽 주요 도시를 순방하는 길에 아데나워를 방문한 딘 애치슨은 완전히 호전적인 수상을 대하게 되었다. 대화 중에 아데나워는 미국이 쿠바 내에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맞서 소요를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예를 들어, 벨기에 상원에서 표명한 것과 같이 쿠바 봉쇄에 관한 국제법적 우려를 아데나워는 완전히 무시했다. 애치슨이 군사적 수단의 즉각적인 사용이나 봉쇄, 또는 두 가지의 조합이라는 세 가지의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했을 때, 아데나워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즉시 제거할 것을 지지하였다. 그는 소련의 은밀한 기습 작전으로 전체적인 핵전략 측면에서 힘의 균형이 갑자기 모스크바에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경악하였다. 그는 애치슨에게 미국이 너무 오래 잠에 빠져 있었다는 말까지 하였다. 소련이 미사일을 계속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애치슨은 현재 일단 자제하는 이유가 즉각적인 무력 사용이 핵무기 사용이나 베를린에 관한 조치와 같은 흐루쇼프의 감정적 반발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요즘 피델 카스트로에게 개인적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다. 그는 그러한 조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농담조로 그러나 약간은 진지하게 그를 찾아온 방문객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는 너무나 많은 갱 단원이 있으니 그들을 한 번 쿠바로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그는 이것이 바로 CIA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더구나 그는 케네디 대통령과 갱 단원 두목이 같은 여자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몰랐다. 케네디 정부뿐만 아니라 아데나워도 이제 베를린 봉쇄, 더 나아가 핵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아데나워의 주재로 열린 국방위원회는 적절한 위기 조치를 가동했다. 아데나워가 미국과 소련의 가장 심각한 대결 국면에서 워싱턴을 무조건 지지한 사실은 케네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위기가 절정에 이른 10월 28일 일요일 정오 직전에 아데나워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놀라운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확실히 상황은 더욱 긴장될 것이며, 48시간 이내에 상대방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한다면 상황은 점차 강도 높은 군사적 단계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다우링은 처음으로 뢴도르프로 아데나워를 찾아왔다. 이것은 수상이 그동안 이 대사를 얼마나 냉대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그는 미사가 끝난 후에야 그를 만나 어느 모로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여러 전문을 보면서 위기 상황을 논했다. 두 시간에 걸친 이 격렬한 대화에는 오스터헬드만 통역으로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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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링은 군사 작전 방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폭격하거나 섬을 공격하고 지상군을 투입하여 미사일을 파괴 방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군사적 해결책을 지향하고 있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포함된다면 유럽도 참여를 요청받을 수 있는 노릇이다. 어쩌면 여전히 무력 사용을 중단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대해 아데나워는 멈추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폭격과 섬의 공격이라는 두 가지 조치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에 찬성했다. 미사일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워싱턴에 피델 카스트로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물으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면 흐루쇼프도 미사일 배치를 포기해도 체면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섬의 주인인 피델 카스트로도 책임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는 창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마치 내가 다우링 씨에게 내 땅을 제공하여 대포를 설치도록 하고 라인강 건너편에 있는 스미르노프 씨의 집을 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카스트로에게 24시간의 최후통첩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우링은 향후 24시간 이내에 군사 개입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아데나워가 다른 많은 동맹국 수반보다 좀 더 명확한 태도를 보인 것을 치하하였다.     

한 시간 후 “흐루쇼프가 사실상 항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일주일 후에 아데나워는 쿠바 위기가 미국에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드골에게 보냈다 . 이는 베를린 문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몇 주 후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났을 때 그는 쿠바에 강경한 조처를 하라고 촉구했다. 호르스트 오스터헬드는 이와 관련된 수상의 만찬 연설을 기억했다. “나는 그가 전쟁 선포를 하지 않도록 그의 옷소매를 어느 정도 당겨야만 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협상을 조만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는 11월 중순 케네디와의 만남에서 분단을 전제로 한 10년 동안의 휴전을 제안할 요량이었다. 그러고 나서 통일에 관한 결정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케네디가 여전히 긴장된 쿠바 상황 때문에 당분간 베를린 사태와 관련된 탐색을 보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류 계획을 엄격하게 기밀로 유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 나아가 탐색을 다시 시작할 때는 먼저 소련이 제안하도록 하여 베를린에 서방의 군대 주둔을 용인할 때만 협상에 임하자는 합의도 보게 되었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비상 계획과 관련해서는 한 걸음 더 치고나갔다. 여기에는 미국이 좀 더 강력한 위기관리를 할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 한몫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비상사태 시 독일 군대가 최전선에 있을 것”을 약속한 것이다. 다만 이들은 전술핵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했다. 이 문제에서 케네디가 확실히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전술핵을 사용하기 전에 일단 휴지 기간을 가지는 구상을 연구하고 일단 핵을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끝장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유럽 미국 소련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독일과 미국의 분명한 견해 차이가 드러난다. 케네디는 재래 군사력의 신속한 강화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무력 위협을 핵 위협으로 여겨 독일군에도 최대한 많은 핵무기 운반체계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 모든 것 곧 협상 계획과 위기 대처 계획은 물론, 이미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케네디는 1962년 11월에는 이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 11월 16일에 본으로 돌아왔을 때 아데나워는 언제든 독일을 강타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심각한 위기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그의 결단력으로 위기 속에서도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다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하는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분명해졌다. 아데나워는 어느 모로 근심이 들러 드골에게 장문의 따뜻한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영국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확실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워싱턴이 여전히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히 지적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배경에서 국내 정치적으로 아데나워가 크게 당할 뻔한 《슈피겔》 사건이 터졌다.     

10월 10일 ‘제한된 방어 준비’라는 제목의 《슈피겔》 기사가 모든 사달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사는 슈트라우쓰에 관한 《슈피겔》지의 공격의 일환이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계획에 관련된 매우 민감한 문제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진행하는 FALLEX62 훈련에 관한 많은 세부 정보도 담고 있었다.     

이미 많이 이야기되어 온 워싱턴과 슈트라우쓰 사이의 군사 전략에 관한 갈등을 이 기사가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수년간 슈트라우쓰는 사거리가 2,000~3,000km인 폴라리스 중거리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발사 체계를 도입하여 핵무기를 부분적으로나마 공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타파이터’와 ‘퍼싱’, ‘서전트’와 ‘어네스트 존’ 미사일이 거론되었다. 슈트라우쓰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전선이 붕괴하기 전에 재래식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여 협상 시간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노력에 반대했다. 본은 적대 행위가 발생할 때 신속하게 전술핵을 사용하기를 원하지만, 워싱턴은 전술핵의 중앙 통제로 독일과의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라는 이름 대신에 아데나워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도 사실 생각은 대동소이하였다. 일반적인 핵전략에 관한 많은 핵심 문제에서 여기 슈트라우쓰에게 해당되는 입장은 아데나워 자신도 매우 크게 강조하여 주창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 또한 핵전략 차원의 기습적인 보복 공격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정부가 궁극적으로 그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슈트라우쓰가 프리드리히 푀르취와 슈네츠 장군에게 미국의 선제공격에서 독일군이 해야 할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지시하자 아데나워는 불현듯 의심이 들기는 하였다. 오랫동안 그래왔듯이 1962년에도 아데나워 수상은 핵무기 사용에 대해 갈팡질팡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위협 공격이 있으면 조처해야 한다는 생각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가 케네디에게 핵 공격 명령을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것인지를 물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1962년 4월 말 하인리히 크로네와 페르취 장군과 슈네츠 장군의 ‘전쟁 상황 연구’를 논의했다, 사실 그는 카데나비아에서 이에 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던 차였다. 아데나워의 최측근인 크로네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여러 의미가 있는 글을 적었다. “강대강으로 나가게 되면 결국 공격 아니면 항복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 아데나워는 당연히 핵전쟁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와 관련하여 슈트라우쓰가 자제력이 부족한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가 1962년 여름에 바이에른 주지사가 되어 뮌헨으로 이주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에 그는 대통령에게 쓔트라우쓰가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기에 국방부 장관을 해임해야 한다고 다짐해서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기사당(CSU) 수뇌부를 동원하여 아데나워와 단호하게 대화를 나누며 그러한 사악한 험담에 대해 강력하게 맞섰다.     

슈트라우쓰가 그러한 강력한 대립이 있은 지 25년이 지난 후에 쓴 글이니 매우 신뢰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크로네 또한 글롭케와 전화로 나눈 대화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통화에서 글롭케는 매우 기가 죽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상과 나눈 긴 대화에서 전쟁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글롭케는 만약 누군가가 전쟁의 모습을 슈트라우쓰처럼 해석한다면, 그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상은 포기했다. 그는 슈트라우쓰와 논쟁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슈트라우쓰와의 논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슈트라우쓰는 그 어르신을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마구 공격하였다.” 그곳에 있었던 원내대표인 빌리 라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슈트라우쓰는 수상을 상대로 해서도 이겼다.”     

분명히 아데나워 자신은 이 무렵에 가장 두려워해야 할지를 모른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무력으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흐루쇼프의 베를린에 대한 공격, 한심한 미국의 양보, 독일의 전술핵을 동원한 사려 깊지 못한 전쟁인가 아니면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그의 전쟁 기계들인가? 어쨌든 사실 국방장관이 생각하는 핵 정책은 아데나워 수상의 생각과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말이다.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에 관한 《슈피겔》의 공격을 속으로는 자기 정치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12월 3일 슈트라우쓰가 사실상 내각에서 배척당했을 때 그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슈피겔》이 오랫동안 내세운 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독일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슈피겔》은 유럽과 독일의 핵무장을 반대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슈피겔》은 일련의 기사를 통하여 우리의 외교 정책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슈피겔》의 슈트라우쓰에 대한 공격은 슈트라우쓰가 유럽 핵전력 문제를 열십히 다루자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노스태드 장군과 합의 하에 진행한 것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말입니다.”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이 분명히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민당(FDP)의 실세인 되링 씨는 반역죄로 체포된 아우구스틴 오랜된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코리레 델라 세라》에 대고 뭐라고 설명했던가? “‘지난 2년 동안 서독은 점점 더 고립되었다. 그래서 서독은 프랑스와 맺은 것과 같은 관계를 영국과 맺어 이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독은 더욱더 부드러운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해야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제는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케네디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서독은 더 이상 유럽 대륙의 무시무시한 세력이라는 꿈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여러분 이것이 전체 인터뷰의 핵심이 되는 문장입니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서독은 더 이상 유럽 대륙의 무시무시한 세력이라는 꿈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되링은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아데나워가 구상한 프랑스와 독일의 긴밀한 협력의 위험을 인식했다.’”      

아데나워는 《슈피겔》과 되링이 주장한 것이 “매우 깊은 생각에서 나온 개념”으로 모두 자기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1962년 7월 19일 선제공격을 둘러싼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의 큰 갈등은 오히려 두 사람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했다. 가끔은 아데나워를 공격하는 것이 유용할 때가 있다. “우리는 지금 긴밀히 협력하여 사민당(SPD)에 공세를 취해야 한다.” 것이 구호가 된 것이다. 9월 18일 수상은 남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여전히 매우 의심스러운 국방부 장관에게 짧지만 흥미 있는 편지를 카데나비아에서 썼다. “슈트라우쓰 귀하, 귀하가 본에 머물기로 결정하게 되어 기쁩니다. 나는 그 결정이 모든 면에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의 수신자에게 아데나워의 은총의 태양이 환히 비추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을 때 늘 그러했듯이 슈트라우쓰의 아내에게도 정중한 인사를 전했다. “귀하의 부인께도 진심 어린 인사를 드립니다. 아데나워 드림.”     

두 사람이 각자 휴가를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자 우호적인 휴전이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특히 그 주에 두프후에스, 폰 브렌타노, 에르하르트, 멘데, 심지어 충성스러운 크로네가 노골적으로 그를 몰아내고자 하고 있기에 기사당(CSU)과의 전선에서 휴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한된 방어 준비’의 제목의 《슈피겔》 기사를 둘러싼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이 기사가 난지 이틀 후에 슈트라우쓰는 수상에게 이와 관련된 편지를 썼다. “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겠다고 선언했기에 별로 놀랄 일도 아닙니다만 바른 세부 정보와 허위 주장을 교묘하게 혼합한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방법에 관한 엄정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적극적인 조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언론 테러는 폭력만큼이나 범죄 사안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가 뮌헨으로 갔으면 이런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데나워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언론의 명예 살인에 관한 법적 조치를 먼저 생각하였다. 이는 4일 후에 슈트라우쓰에 쓴 서한에 다음과 같이 나온 대로이다. “귀하의 올해 10월 12일 자 서한을 근거로 나는 언론이 자행하는 명예훼손에 관한 법안을 마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초안이 마련되면 이 문제를 바로 다룰 예정입니다.”     

10월 18일 저녁 시간에 방금 휴가를 마치고 본으로 돌아온 슈트라우쓰는 수상을 만나 단독면담을 가졌다. 이때만 해도 쿠바 위기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같은 날 국방부는 연방검찰청으로부터 《슈피겔》 기사에 관한 의견을 요청받았다. 슈트라우쓰는 이제 정부 수반과 그 상황을 논의하고 있었다. 슈트라우쓰가 11월 19일, 곧 《슈피겔》 위기가 이미 절정에 달했을 때 아데나워에게 보낸 8페이지 분량의 편지가 이 대화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곧 있을 조사 보고서 작성이 제게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해 보이기에 10월 18일 목요일 오후 6시에 귀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다른 부서의 장관이 귀하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법무부에서 이미 검찰 조사와 보고서 작성에 대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군사 비밀의 누설 혐의가 있는 경우 국방부 장관이 헌법에 따라 수상께 알려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는 담당 장관보다 정부 수반이 더 많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저의 정보를 접수하고 군사 비밀의 누설 사건을 밝히기 위해 여기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귀하께서는 또한 귀하에게도 계속 진행 상황을 보고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조 사 대상자의 범위가 직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들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가 누설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의에서 슈트라우쓰는 또한 《슈피겔》에 관한 조치가 연정 위기로 확산하면 논란의 중심이 빠르게 변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 논의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제게 보고된 법무부 인사들에 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내 정보에 따르면 분명히 슈탐베르거 장관을 상대로 사용되었을 구체적인 내용을 《슈피겔》이 알고 있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슈피겔》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제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입니다. 귀하께서는 저의 의견에 대하여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매우 비밀스러운’ 서한에라도 저 자세한 것을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에리히 멘데는 1986년에 출판된 회고록에서 이에 대해 상당히 솔직히 이야기하였다. 볼프강 슈탐베르거는 자민당(FDP)의 소수 지도부의 심문에 관한 응답으로 자신이 “중위로 군 복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처벌로 이어질 뻔한 군 형사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음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슈탐베르거가 말한 대로 그는 이 사실에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끌려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1월 26일 자민당(FDP) 당대표인 에리히 멘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위 보고서, 문서 위조, 급양 병사 액수 허위 보고, 군사 재물 횡령이 입증되었습니다. 이에 관련된 문서를 《슈피겔》이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슈탐베르거는 그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슈피겔》의 끊임없는 압력을 받고 있어서 더 이상 운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아데나워는 그가 슈트라우쓰에게 10월 18일에 주의를 준 것을 멘데에게도 전하였다. “《슈피겔》이 법무부의 사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슈탐베르거도 《슈피겔》의 편집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해왔다는 것이다.     

《슈피겔》 사건을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지도 이 대담에서 논의되었다.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쓰로부터 상황을 매우 자세히 보고받았다. 슈트라우쓰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것이 군사 기밀 누설의 심각한 사례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슈트라우쓰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하게 사전을 조사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아데나워는 연방 검찰이 국방부를 상대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보고도 받았다. 그리고 이미 이 사건으로 ‘하자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 슈탐베르거 법무장관을 대신하여 차관인 발터 슈트라우쓰가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여 슈탐베르거와 그의 동료인 폴크마 호프를 국방부 업무에서 배제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국가 안위 문제에 있어서 늘 주저함이 없던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조치는 꼭 필요한 것이었고 슈탐베르거 법무장관의 경우도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10월 22일 아데나워 수상은 다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공격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그날 하노버에서 열린 독일노조총연맹(DGB) 대회에 참석하고 오후 5시에야 돌아왔다. 먼저 르마스 아일랜드 수상과 면담한 다음에야 가장 긴급한 업무들을 처리할 시간이 있었다. 다우링 대사는 오후 7시 15분에 도착하여 쿠바 위기의 시작에 관한 경보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제 아데나워는 《슈피겔》에 관한 조사가 쿠바 사태에 따른 전쟁의 위협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전의 사태 진전을 보면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가 함께 《슈피겔》에 대해 최대한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하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은 쿠바 사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슈트라우쓰가 4주 후 아데나워 수상에게 이 전화 대화의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서 보낸 것의 내용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10월 22일 월요일 제가 특별 회선 전화로 보고드린 내용대로, 그때나 지금까지 제가 직접 읽어보지 않은 조사 보고서가 검찰총장에게 전달되었고 호프 차관이 근본적인 문제를 포함한 세부 사항을 칼스루에의 연방헌법재판소와 상의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이 문제가 우리 국가의 근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계속 보고드렸습니다. 이 문제가 그렇습니다.” 슈트라우쓰는 11월 19일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인상과 경험이 그런 사실을 더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귀하께서 연방 수상이며 국가수반으로서 그 권한을 최대한 발휘하여 죄인을 형사소추하고 사실의 전모를 밝히는 데 필요한 조처를 하실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실 것을 제가 믿어도 되며 필요한 경우 저를 소환하실 수 있는지를 문의 드렸습니다. 귀하께서는 저의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시고 언제라도 귀하의 서면 확인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부 수반의 확언으로 충분하기에 서면 확인을 포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슈트라우쓰는 이러한 사실 기술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에 저는 확신을 하고 호프 차관이 자기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추가하여 우리 국가의 안보를 위한 우리의 의무를 의식하여 최선의 지식과 양심으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국방장관은 그가 오래 다짐해온 대로 호프 차관에게 연방 검찰청의 조사에 공식 참여하는 일을 위임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조사의 모든 단계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그의 입장에서 정부 수반도 정확히 알도록 나름대로 조치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정치적으로 폭발력이 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다음 날에도 진행 상황에 대하여 보고받았다. 슈트라우쓰는 확언했다. “10월 23일 화요일에 아일랜드 수상을 위한 만찬이 있은 다음 단독으로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귀하께서는 철저한 기밀 엄수의 필요성을 지적하셨습니다. 귀하께서는 이는 마땅한 일이라고 설명하시며 글롭케 씨에게 조차도 상황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아데나워는 이 상황에 관하여 편지 가장자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체포 날짜와 절차의 집행에 대해.’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상으로 아데나워가 글롭케에게 그 조사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비밀이 이미 연방정부 안에서 유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로네는 10월 22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훼헬에게 들었다. 10월 10일 《슈피겔》의 독일군에 관한 기사 때문에 연방 검찰총장이 아우크슈타인에 관한 반역 소송을 시작할 예정이거나 이미 시작했다.” 훼헬은 분명히 슈트라우쓰에게 주의를 준 것으로 보인다. 곧 그러한 조사가 진행되면 그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쓰가 “《슈피겔》에 게재된 범죄와 연관된” 발언을 했다면 말이다. 어쨌든 연방헌법재판소의 수사 담당 판사는 10월 23일에, 곧 아데나워가 슈트라우쓰로부터 경과 보고를 들은 날, 국방부의 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론라드 알러스에 관한 체포 및 수색 영장을 발부하였다. 채포 사유는 형법 100조 1항이었다.     

이 모든 사건 경과를 바탕으로 볼 때 슈트라우쓰에게는 아데나워가 비밀로 진행된 수사 과정을 나름대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 단계에서 누구에게 그 내용을 전하고 누구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추론할만한 모든 근거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1962년 11월 19일에 쓴 편지에서 지적한 대로  슈뢰더, 카스텐스, 크로네, 글롭케와 함께 진행한 10월 24일 연방 국방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아데나워가 현재 진행 중인 수사 절차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연방 수상실에게 개최된 연방 국방위원회의는 오전 내내 진행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들은 수상의 대단히 격노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특히 핵무기 사용 후 물이 오염되면 취해야 할 예방 조치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슈트라우쓰는 즉각 1961년 가을까지 내무부 장관이었던 슈뢰더와 충돌하며 이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나섰다. 슈뢰더는 이에 반작하고 나서서 아데나워가 두 장관을 어느 정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수상은 국민이 이 단계에서 공식적인 경고로 더 불안해하면 안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슈피겔》에 관한 조사는 임박한 전쟁 위험의 분위기에서도 계속되었다.     

물론 세계 위기도 연방의회가 10월 25일 FIBAG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논의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슈트라우쓰는 자민당(FDP)의 도움으로 감시 의무 위반 혐의도 면제받았다. 이리하여 6월 28일 의회가 휴회에 들어가기 전에 매우 흔들렸던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유대가 다시 강화된 것처럼 보였다.     

10월 26일에도 아데나워의 관심은 여전히 온통 쿠바 위기에 집중되었다. 그의 방송과 라디오 연설은 오후에 녹음되어 저녁에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는 “쿠바의 위기는 1945년 이래 세계 평화에 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조치는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의 자유가 이 사건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징후는 아직 없습니다.” 이때 그는 침착하고 신중하며 자신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위기 상황에 부닥친 국민이 연방 수상에게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이날 그는 사민당(SPD)의 프리츠 에를러를 포함한 모든 정당 지도자에게 위기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리는 것이 옳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슈피겔》 사건과 관련된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가 이미 10월 17일, 곧 그가 아데나워에게 보고하기 바로 하루 전에 그가 직접 이 작전을 완전히 망쳐버렸다는 사실을 예감하거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그는 그것이 적절하다고 여겼기에 11월 19일 아데나워에게는 서류를 보여주고 겔렌 대통령에게는 단독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렸다. “연방 검찰청이 《슈피겔》에 대하여 반역죄로 수사 절차를 수행하였으며 국방부 업무에 관한 조사 보고서 작성자가 연방 검찰청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리하여 연방정보부의 비히트 대령에게 누가 정보를 제공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밝혀졌다. 어쨌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슈트라우쓰는 1962년 11월 19일 《슈피겔》이 이미 10월 18일 비히트로부터 연락받고 범죄와 관련된 자료를 제거 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결국 슈트라우쓰는 아데나워가 상황 파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처를 했다. 사건의 과정에서 그는 말라가에서 콘라드 알러스를 체포하도록 지시한 마드리드의 독일군 무관 오스터 대령과 전화 대화를 한 사실을 연방의회에 알리지 않은 사실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매우 곤경에 빠지게 된 슈트라우쓰는 11월 19일 수상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10월 26일 밤부터 27일까지 호프 차관이 연방 검찰청의 조치 과정을 제게 알려준 후, 저는 뢴도르프 전화를 걸어서 이에 관하여 알려 드렸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귀하께서는 지속적인 정보를 요청하고 위에서 언급한 대담에서 강조된 귀하의 입장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1965년 여름, 아데나워가 기사당(CSU) 당대표인 슈트라우쓰와 연대하여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상대로 맞서 싸울 때, 그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이 심야 전화 통화 사실을 인정했다. “슈트라우쓰 씨는 그 당시 《슈피겔》의 편집자 알러스가 스페인의 탄지에르로 휴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슈트라우쓰에게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슈트라우쓰에게 그가 가능하고 필요하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할 것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슈트라우쓰와 그의 아내 마리안느 그리고 로트 암 인에 살던 은행가 압스는 《슈피겔》 위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슈트라우쓰는 다시 한번 그 일의 과정에 관한 자기 관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미 전설이 된 마드리드로 걸었던 전화 통화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렀다. 압스가 물었다. “그 어르신은 당신이 마드리드로 전화 통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그러자 슈트라우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알았어요, 그가 저에게 부탁 했어요!”     

여론이 《슈피겔》의 행동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할 때 연방정부에 관련된 모든 인사들은 당연히 연방 검찰청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조사를 위한 협력과 국방부의 독려가 없었다면 이러한 중대한 조처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었다. 슈트라우쓰가 《슈피겔》에 관한 연방 검찰청의 수사의 결정적인 단계에서 관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수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한 또 다른 원동력이 있다. 바로 아데나워 연방 수상이다. 수상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법무부의 발터 슈트라우쓰 차관이 자기 부서에 즉각 경종을 울릴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또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슈피겔》의 철천지원수들에 대한 공격에 연루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는 사실 심각한 국내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충분히 예상될 수 있었다. 슈트라우쓰가 당시 아데나워가 관여한 사실을 완전히 공개했다면 아데나워의 시대는 1962년 말에 거의 확실히 끝났을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그렇게 한 동기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는 《슈피겔》 기사를 자기 외교 정책과 안보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본 것이다. 또한 그는 반역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성실한 공무원인 국방부의 폴크마르 호프가 주도한 조사 결과는 엄청난 체포와 수색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우크슈타인과 《슈피겔》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분명히 쿠바 위기가 연방 검찰청을 제지하지 않도록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쿠바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 슈트라우쓰에게 수사 진행을 허용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식으로든 강력한 조처를 하고자 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수사 과정과 세계 위기가 우연히 겹친 것이 강력한 조치를 바라는 그의 뜻을 강화했다고 보는 것을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국방부, 법무부, 연방 검찰청, 연방헌법재판소의 냉정한 법조인들에게 검토를 맡긴 바람에 아데나워는 이 사건에서 슈트라우쓰의 정치적 판단력에 관한 그의 의구심을 버리게 되었다. 《슈피겔》을 공격한 직후에도 아데나워는 아직 슈트라우쓰와 거리를 두지 않았다. 이 조치가 시작된 지 이틀 후인 10월 27일 토요일 오후 쿠바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슈트라우쓰로부터 다시 개인적인 보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조치를 반역죄에 대한 비난에 한정하도록 할 일로 보였다. 검사는 아우크슈타인의 금고와 그 밖의 압수한 문서들에서 많은 정보를 확보했다. 공식적으로 ‘기밀’로 표시된 군사 시설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연방 검찰청은 11월 6일 기자회견에서 국방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 비밀을 담고 있는 여러 장으로 된 요약문 그리고 매우 당황스러운 내부 서신 교환의 증거들이 있음을 밝혔다.     

10월 31일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지도부를 수상실로 초대하여 발견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슈피겔》에 관한 조치가 매우 정당한 것이었고 발견된 문서들이 증명하는 대로 이는 성공이었다고 확신했다.     

제3차 세계대전에 관한 두려움이 나라를 짓누르는 한 정부는 고삐를 쥐게 마련이다. 그러나 며칠도 안 되어 상황이 바뀌었다. 신문기자와 사진기자, 출판사와 언론인 협회는 《슈피겔》에 관한 조사 방법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언론자유에 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이 사건 전반에 걸쳐 언론계의 자연스러운 동지애가 결정적인 요소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데나워는 ‘47그룹’을 중심으로 발표된 강력한 선언문이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의 연대를 표한 것에 대해 아데나워가 별로 큰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교수들의 우려를 담은 성명이나 수많은 대학에서 벌어진 열띤 토론도 아데나워에게는 1950년대 초부터 충분히 익숙해진 일이라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들은 《슈피겔》 조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들의 지능과 도덕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적어도 이 조치 이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여론은 반역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절차적 문제에 대하여 더 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에는 신경을 써야 했다.     

훨씬 더 성가시지만, 충분히 예상된 것은 자민당(FDP) 내부에서 새로 불거진 동요였다. 아데나워를 중심으로 한 연정에 끝까지 저항해온 자민당(FDP) 당원 중 소수가 《슈피겔》 대한 조사를 둘러싼 의심스러운 상황을 정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아데나워가 알고 있듯이 토마스 델러와 볼프강 되링은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슈탐베르거 법무장관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분명히 이 조치 과정에서 약점이 된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자민당(FDP) 의원의 대표가 이를 이유로 그를 못 박으려고 하자 그는 자민당(FDP)을 무시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호프 차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슈탐베르거에 관한 혐의를 자민당(FDP) 지도부에 오랫동안 알리지 않았다. 그는 11월 말 멘데와의 대화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알렸다. 그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이유는 물론 분명하다. 아데나워가 이미 11월 초에 이 사실에 관해 언급했다면 《슈피겔》 조사와 슈트라우쓰의 조사에 대하여 자신이 미리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슈탐베르거의 사임 요구와 결부될 것이었다.     

그리고 수상은 연정 위기를 처음부터 최대한 피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발터 슈트라우쓰 차관이 슈탐베르거 법무장관을 최대한 배제 시킨 것이 자민당(FDP) 지도부에게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자민당(FDP)이 여기에서 정당 정치적 음모를 의심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 대표단과 원내 인사들이 모여 8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를 통해 자민당(FDP)은 에리히 멘데에게 두 차관의 교체를 요청하는 서한을 아데나워에게 보내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멘데는 호프와 슈트라우쓰 차관의 교체를 11월 5일 월요일 정오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전달된 해고 요서를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내부에서 논란이 벌어졌음을 알고 11월 2일 밤 11시까지 에리히 멘데의 편지를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크로네와 글롭케는 이미 서한의 초안을 마련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수상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두 차관의 교체를 단호히 거부하고 슈탐베르거가 《슈피겔》의 기사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난하였다. 아직도 아데나워에게 충실한 이 두 사람은 놀라며 아데나워에게 이것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연정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결국 아데나워는 “귀하의 방식을 시도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자민당(FDP)의 지시에 따른다는 의미였다. 슈트라우쓰 차관이 교체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 사법재판소의 판사가 될 것으로 보였다. 호프 차관은 휴직 처리되었다.     

자민당(FDP) 당원들의 불만이 하필이면 흠잡을 데 없는 두 명의 공무원의 희생으로 잠재우게 되었다는 것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의 많은 인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11월 6일 이에 대하여 논의했다. 아데나워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우구스트 드레바흐는 단호하게 말했다. 차관들의 면직에 관한 첫 소식을 접하고 그는 아데나워 수상이 신뢰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더 깊은 숙고 끝에 그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신뢰라는 개념이 고급 정치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국시라는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정부의 열악한 정보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이 또한 거의 노골적인 수상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쿠바 위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기에 당원들은 격노했지만 아직은 어느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폰 브렌타노 원내대표는 다음날 아데나워에게 3페이지 분량의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면서 당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도 적절한 시기에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는 또한 정부의 수동적 정보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 비교적 온건한 서한에서 가장 감정을 드러낸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인사말이었다. “간곡한 당부를 전합니다.” 이는 폰 브렌타노가 이제 아데나워와 매우 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데나워를 당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크로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1년 전부터 수상을 의심, 비판, 깊은 혐오감으로 대하였다.”     

아마도 여당 내에서의 비판 때문에 아데나워가 11월 7일 독일 연방의회의 대정부 질문 시간에 여러 차례 중간 발언을 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의 개입은 사실 튀는 행동이었다. 야당의 주요 관심은 원래 슈트라우쓰 국방장관과 훼헬 내무장관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이 이렇게 의견을 개진한 이유는 그가 언급한 요점들에서 매우 분명해진다. 그는 절차상의 결함에 관한 여론의 엄청난 비판으로 수세에 몰린 정부의 국면을 전환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론의 관심은 결국 중요한 문제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몇 년 동안 설파하고 다닌 구호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바로 “반역의 심연”말이다. 그는 아우크슈타인의 금고에서 발견된 증거물들을 지적하며 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아우크슈타인이 수사관 앞에서 반복적으로 자기변명을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그의 생각에 이는 《슈피겔》과 그 지지자들이 문제 삼은 국가 안보와 국가 권위에 관련된 문제였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아우크슈타인이 반역을 저지르면서 가장 저질스러운 탐욕을 부렸다는 것에 대한 그의 비판의 강도였다. “한 편으로 그는 반역을 저지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정말 저질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여러분, 그는 연정 정당을 전반적으로 선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를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아데나워의 이 사건의 주범들에 관한 경멸은 격렬한 것이었다. “세상에! 아우크슈타인을 어찌 봐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자기 방식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정부 기관의 운영에 대해 궁극적으로 누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아데나워는 그가 엄폐물 밖으로 너무 멀리 나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입의 마지막 기간에는 샤움부르크궁으로 이어지는 흔적을 은폐하려고 했다.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직무에 관한 의무와 조화를 이루는 한도 안에서 이 모든 일에서 의도적으로 최대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다루거나 아예 관심을 거의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념해야 한다면 – 사실 그럴 시간은 없지만 - 밤낮으로 전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할 다른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슈트라우쓰에게는 한마디도 안 했다.     

슈트라우쓰는 적어도 아데나워의 등장으로 그가 그 조치에 관한 것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 대정부 질문 시간에 정부 관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데나워의 모습만 기억할 것이다. 사실 슈트라우쓰의 목숨은 이 대정부 질문 시간에 달려있었다. 야당과 자민당(FDP)의 일부 세력의 모든 에너지는 이제 국방장관을 제거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조치에서 아데나워가 관여한 정도에 관한 질문은 명시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슈트라우는 입을 철저히 다물었다. 이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만약 아데나워가 거의 슈트라우쓰만큼이나 그 조사에 대해 일찍 알고 무자비한 조치를 촉구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수상의 실각은 불가피할 노릇이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는 함부르크에서 압수된 자료가 결국 연방정보부의 비흐트 대령의 체포로 이어진 것에서 가장 음흉한 배후가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슈피겔》이 이미 10월 18일 비흐트를 통하여 검찰 조사 이전에 주의하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데나워가 슈트라우쓰로부터 그에 관한 보고를 처음 들은 날이었다. 슈트라우쓰는 곧바로 10월 17일 자신이 연방정보부의 부장인 겔렌에게 연방 검찰청의 수사에 대해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알렸다. 그런데 슈트라우쓰가 국방부 공보관인 슈뮈클레 대령과 아데나워에게 알린 것처럼 겔렌이 바로 《슈피겔》에 관한 조사를 강력히 요청한 사람이었다. 이 잡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최고 기밀문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슈탐베르거를 조사 과정에서 배제하자는 조언도 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1961년 11월 6일에 연방정보부의 직원인 하인츠 펠페가 적의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다음 겔렌에 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겔렌 자신이 펠페가 이 조직 안에서 출세하는 것을 적극 밀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가 펠페에게 ‘홀딱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서야 《슈피겔》과 풀라흐 사이의 연결 고리가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졌기에 여러 설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동유럽의 첩보기관이 《슈피겔》 사건과 관련하여 연방정보원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겔렌이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장교 집단의 대표자라는 의혹을 조사해야 하는가? 이러한 설을 퍼뜨리면서 게르트 슈뮈클레는 미국의 언론인들이 강력한 독일 재래식 군비 확충애 관해 호의적으로 보도하도록 이끌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장을 한 민족’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 병력을 ‘몇 년 동안’ 서방의 와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통합되는 것을 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겔렌이 이끄는 조직은 거의 10년 동안 미국의 도구였다. 그러니 워싱턴의 특정한 무리가 이제 슈트라우쓰, 그리고 심지어 아데나워까지 《슈피겔》 사건으로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겔렌은 한편으로는 슈트라우쓰를,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아데나워가 《슈피겔》 수색하도록 부추기고서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기관의 대령 한 명을 통하여 《슈피겔》의 ‘제한된 방어 준비’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준 의혹이 짙었다. 바로 그 자신이 비흐트 대령을 통해 경고한 배후 인물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늘 음모와 계략을 의심하는 아데나워는 주말 동안 문서를 샅샅이 뒤지고 나서 11월 12일 오전에 겔렌을 상대로 일종의 심문을 진행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글롭케는 순환기 질환으로 본에서 벌어지는 정치 범죄를 멀리 바르카슈타인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와 겔렌은 처음에는 단둘이서만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쉬었다가 다시 30분 동안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상은 이 대화에 관한 비망록을 구술하여 작성하도록 한 다음 겔렌도 이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이 비망록은 또한 특이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정부가 아데나워에서 에르하르트로 바뀌었을 때 겔렌은 이 문서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겔렌과의 둘째 인터뷰 직후, 아데나워는 충성스러운 크로네에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그의 통치의 기둥이 되어준 조직에 관한 의심으로 ‘흥분하고 화가 났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슈탐베르거 법무부 장관과 쿤 연방 검찰총장은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에서 열린 회의에서 샤움부르크궁으로 급히 소환되었다. 저녁 8시쯤이었다. 그리고 수상은 대통령에게 상황 보고를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슈탐베르거는 몇 년 후 《슈피겔》에 그날 저녁 대화에 관한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즉각 부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슈탐베르거 씨, 겔렌을 즉각 체포해야 합니다. 그는 옆방에 있고 지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슈탐베르거는 수상에게 즉각 영장이 없으면 체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무심하게 말했다. “나도 한때 검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겔렌은 슈탐베르거와 쿤의 심문을 받았지만 《슈피겔》에게 결코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아데나워는 이제 그의 휘하에 있는 비밀정보기관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힝거는 풀라흐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힘이 더 이상 없었다.     

그런 다음 아데나워는 3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미국 방문이 되었다. 한편 본의 상황은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자민당(FDP)은 이제 슈트라우쓰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슈피겔》에 관한 조치에의 자기 역할에 대하여 처음부터 여론과 의회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11월 19일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소속 장관의 사임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분명히 자민당(FDP) 의원들은 연방정부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기를 바랐다. 자민당(FDP)이 추구하는 중기 목표는 볼프강 되링이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밝혀졌다. 이에 아데나워는 매우 화가났다. “우리는 혼란을 더하지 않기 위해 아데나워 문제 해결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걸음 씩 나아갑니다.”      

슈트라우쓰는 11월 2일 아데나워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자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되링 씨의 사주로 자민당(FDP)이 이제 (슈트라우쓰가 물러나야 한다는) 새로운 위기에 더해, 조만간 수상의 교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여전히 그가 아데나워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다. 분명히 그의 8페이지짜리 편지는 필요한 경우 수상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여론에 공개할 수 있는 거의 감출 수 없는 유일한 위협이 되었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저는 제가 한 일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관한 책임이 있지만, 연방 수상 각하께도 이 어려운 문제에서 전체 사태를 고려하여 판단하고 그에 따라 조처하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제 귀하가 결단을 내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부 전체와 우리의 전체 정치가 도전을 받고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1월 22일 바이에른 주 지방선거에서 기사당(CSU)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만 슈트라우쓰가 내각에 남아있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데나워가 자기의 몰락을 바라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신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민당(CDU) 지도부는 기사당(CSU)이 필요한 경우 연정과 기민당(CDU)과의 공조를 파기하려는 기사당(CSU)의 의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기민당(CDU)은 완전히 사기가 완전히 꺾기고 분열되었다. 처음에는 이 시기에 슈트라우쓰와 폰 브렌타노가 동맹을 맺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자민당(FDP)의 희생자라는 인식을 같이하고 협박에 굴복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자기 때가 다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건설적인 불신임 표결로 아데나워에 맞설 준비가 여전히 안 되어 있었다. 출판인인 부체리우스와 같은 인사들이 이를 강력히 촉구했음에도 말이다. 이 무렵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외무부를 스페인에서 알러스를 체포하는 것과 관련된 논란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슈트라우쓰에게 강력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오르고 있어서 에르하르트가 수상직에 오르는 것은 아직 때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여전히 모든 정당이 연합할 때만 수상이 될 생각이 있기에 그를 아데나워의 대항마로 내세우려는 자민당(FDP)의 제안을 다시 거부하였다. 끝으로 크로네는 슈트라우쓰를 내각에서 몰아내고, 슈뢰더를 막고, 아데나워가 곧 적당한 퇴임을 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수상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바로 그것을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수상의 지지도가 다시 급락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여전히 50%대였지만 11월 중순에는 38%로 떨어졌다.     

이러한 야망과 두려움의 혼란 속에서도 그는 11월 19일 자민당(FDP) 소속 장관의 사임과 그다음 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장관의 퇴임에 관한 답을 마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의 제4기 정부가 저절로 해산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제는 몰아내고 싶어 하는 수상은 베를린에서 열린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비난하는 말만 하였다. 정치적인 파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데나워는 당 대표단 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다시피 5명의 자민당(FDP) 소속 장관들이 각자의 직책을 내려놓은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기민당(CDU) 장관들이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순전히 이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연방 수상은 현재 거의 혼자입니다. 수상은 이제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헌법에 따르면 현재 인도를 방문 중인 연방 대통령이 돌아와서 그의 사임 요청을 승인 또는 반려하거나 새로 지명할 때까지는 현직 장관들이 계속 직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수상은 법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61년 12월 5일까지는 여전히 느긋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면 륍케 대통령이 귀국할 것이었다. 어쨌든 바이에른 주 지방선거가 끝나면 분위기가 다소 안정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각의 다양한 변화가 예상되었다. 이제부터 12월 5일은 내각 위기에 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일종의 마법 같은 날짜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론이 들끓고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조롱과 비난만 할 뿐이었다. 튀빙겐대학교의 교수 53명과 본대학교의 교수 63명이 함께 서명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들의 우려를 조롱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과거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은 괴팅겐대학교 교수들처럼 - 그들 또한 분명히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계파 의원인 마르틴이 아데나워가 이렇게 교수들을 비웃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며 “기민당(CDU)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하자 아데나워는 그저 비꼬기만 하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귀하는 그들이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데나워는 끝까지 그의 요점을 이어 나갔다. 곧 반역 말이다. “이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비열한 것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그들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확신하였다. “우리를 반대하는 특정 계층이 있습니다. ... 사람들은 반역을 저지르면 머리를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 “제 눈에 반역은 살인만큼이나 나쁩니다.”


그의 과도한 자신감에 대하여 여기에는 그래들, 두플메스, 마르틴, 에르하르트, 폰 브렌타노가 비관적인 우려를 표명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스페인에서 알러스를 체포하는 것과 같은, 그가 분명히 말하는 사소한 일로 흔들리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끝으로 그는 무심한 듯이 왼손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적 가능성들을 내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 대표단에 내밀었다.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연정, 또는 모든 정당과 연정을 통한 정부 구성을 한다. 다만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며 기존의 정부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요점에 이른다. “이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정부는 야당이 없는 정부를 의미합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같습니다. 이는 의회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에 이는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입법부 회기의 나머지 기간 에 우리가 항상 맞서 싸웠던 사민당(SPD)과 갑자기 힘을 합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10월 22일의 세상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나서 바이에른의 기사당(CSU)이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어 지방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금엽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기민당(CDU)은 이제 그가 바이에른 주의 주지사가 되기 위하여 본의 정치 무대에서 명예롭게 내려가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트라우쓰는 자신이 쫓겨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상과 국방장관 사이의 단기 동맹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었다.     

바이에른의 선거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의 성급한 연정 이야기를 꺼내 들기 시작하였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일요일 다음 날인 월요일 오후에 그는 충성스러운 주택부 장관 뤼케를 만나 그가 더 이상 슈트라우쓰와 함께 내각에 있고 싶지 않다는 단언을 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제도 논의하였다. 그것이 바로 뤼케가 현재 대통령과 함께 인도를 방문 중인 슈뢰더 외무장관의 후임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것에 관한 논의였다. 이는 전문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뤼케가 11월 26일 오후 4시에 아데나워와의 대화를 문서로 만든 전문의 가장 중요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수상의 명성은 아직 건재하다. 상황에 따라 소연정이 구성될 것 같다. 인적 부족의 문제가 매우 크다. 바이에른 주의 성공적인 지방선거 이후, 연방 대통령의 귀국하기 전까지 정부 구성이 완료되어야 한다. 나는 수상에게 대연정을 고려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아데나워가 연방 수상이 되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며, 비상 법률을 제정하고 재정 개혁을 한다. 얼마 전 야당의 책임 있는 인사들은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최대한 빨리 명확한 입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슈뢰더는 또한 연방 대통령에게 새로운 상황 변화에 대하여 알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소연정 가능’이라는 문구는 아마도 아데나워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지만 동시에 슈뢰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뤼케와 베너의 일차 탐색이 처음부터 아데나워와의 사전 교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뤼케와 아데나워는 뤼케가 ‘위임 없이’ 행동했다는 인상을주었다. 사실 이는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아데나워는 뤼케가 탐색견으로 파견했는데 이는 뤼케 스스로가 원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베너와의 의사를 타진하려는 의도를 알고 있었고 분명히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만남 이전에 구텐베르크 남작과 베너가 이미 한 달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적어도 크로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베너와 뤼케 사이에는 두 주요 정당의 협력에 관한 대화가 한 번도 없었다. 아데나워와의 점심 대화 후 저녁에 뤼케와 헤르베르트 베너의 첫 만남은 주택부 사무실에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뤼케는 아데나워와의 대담 이후 베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베너가 즉각 그에게 온 것이다. 아데나워가 연방 수상이 되는 것에 사민당(SPD)이 동의하는지에 관한 뤼케의 질문에 대해 베너가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하는 말을 뤼케가 들었다. 베너가 언급한 조건에는 ‘《슈피겔》과 관련된 이야기’에 관한 솔직한 해명과 ‘연방 수상이 자민당(FDP)의 지지를 싼 값에 얻기 위해 사민당(SPD)과의 연정 협상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 조건은 아데나워의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아데나워릐 잘 알려진 전술이 동원된 것이다. 곧 그는 최종 결정을 미리 내리지 않고 적어도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궁극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정확히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아데나워에 관한 전격적인 정치 음모가 10일 만에 아무 결과 없이 무산되었지만, 연방정부 수상실의 현명한 테반스도 그의 주인이자 스승인 아데나워가 실제로 대연정을 원했는지 아니면 단지 냉소적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아데나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글롭케는 호르스트 오스터헬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데나워는 대연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개인 고문인 하인리히 바르트는 정반대의 생각을 했다. 사실 바르트는 모든 연정 회담의 회의록을 정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수상의 기분을 느끼는 것은 물론 모든 단어, 심지어 스라소니처럼 그의 모든 몸짓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슈뢰더에게 뤼케가 보낸 전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민당(SPD)에 관한 탐색은 전술적 변칙에 가까운 것일 뿐 아데나워는 자민당(FDP)과의 연정을 재확립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11월 27일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제의 주제. 수상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 양측 모두 이를 놓고 자유롭게 협상해야 한다.” 이는 큰 열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아데나워는 크로네가 대연정 실험에 찬성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또한 그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가볍게 피운 바람이 이제 다소 더 뜨거운 외도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아직 이전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베너와 올렌하우어가 자민당(FDP) 당내에서 뜻을 관철하지 못했기에 마침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아데나워가 자신이 선호하는 해결책에 주로 관심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해결책의 대표자들을 대하는 것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2월 3일 이른바 ‘에르하르트 사단’이 흑·적, 곧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연정에 대항하여 대공세에 나서자, 크로네는 수상에게 “각하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천만에”라고 대답 했다. 한편 그는 4일 후 에리히 멘데를 만나 매우 솔직담백하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나는 우리의 협력을 지속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멘데 씨. 제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민당(SPD)이 우리 정부에 합류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민당(SPD)이 과거에 지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멘데 씨. 당신과 당신의 당보다 사민당(SPD)이 이제 다루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아마도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뤼케가 아데나워와의 본심을 얼마나 정확하게 탐색했는지는 그가 베너를 만난 직후 뢴도르프에 전화를 걸어 아데나워의 아들인 파울 아데나워 신부를 통해 수상에게 정확한 조건을 알렸다는 사실을 통해 명확해졌다. 덧붙여서 베너가 있는 동안 우연히 뤼케에게 전화를 건 슈트라우쓰도 베너와의 대화 내용과 대연정의 가능성에 대해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11월 27일 아침 뤼케가 베너와 나눈 긴 대화의 내용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수상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베너의 협상 의지 덕분에 자기 전술적 상황이 얼마나 크게 개선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했다. 하필이면 《슈피겔》을 둘러싼 위기의 소용돌이가 그를 끌어내리고 있는 지금, 베너가 그에게 생명줄을 던진 것이다. 사민당(SPD)이 모든 사민당(SPD)이 반대되는 이야기만 하지만 실제로는 《슈피겔》에 관련된 사건을 묻어 버리고자 하고 있으며 기민당(CDU)과 진지하게 연정 협상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탐색이 무산되더라도 사민당(SPD)과의 협상 내용이 충분히 공개되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 관한 도덕적 분노의 폭풍이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더해서 베너가 아데나워가 무제한으로 수상직에 머무는 것에 동의한다고 거침없이 치고 나오자 아데나워의 귀가 매우 솔깃해졌다. 물론 베너의 관대함은  아데나워가 과거에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그리고  원내대표인 크로네에게 보내면서 자민당(FDP) 당대표인 멘데에게도 사본을 보낸 서한에서 사임하기로 한 기간과 자민당(FDP) 의회 그룹 대표자인 멘데에게 사본과 함께 의회 그룹 대표자 크로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기 퇴임 의지를 얼마나 강력하게 밝혔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곧바로 크로네와 폰 브렌타노는 11월 27일 뤼케와의 면담에 초대되었다. 아데나워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기민당(CDU) 안에서 자민당(FDP)을 가장 혐오하는 인물들이었다. 뤼케는 11월 26일 밤 11시에 전화로 크로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그의 내각 동료가 전화로 설명한 것의 요점은 한 마디로 베너가 뤼케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민주주의에 관한 우려를 하고 있기에 이 엄청난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둘 다 다음과 같은 관점에 동의했을 것으로 보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 간의 연정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선거구제를 합의안에 포함시켜야만 연정이 가능하다. 콘라드 아데나워는 자신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원한다면 연방 수상으로 남을 것이다. 베너의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이 합의안을 기민당(CDU) 안에서 관철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 정당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뤼케가 지적했듯이 크로네는 11월 26일 밤의 이 전화 대화에서 이러한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였.     

크로네는 대연정을 바랐다. 아데나워와 달리 그는 이 협상을 단순한 전술적 술수 이상인 것으로 여겼다. 그는 그 생각을 글로 남겼다. “독일 민주주의를 위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모범이 되는 계획이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     

폰 브렌타노는 덜 흥분했다. 그러나 자민당(FDP)에 관한 그의 원한은 그가 멀리하고 싶은 수상에 대한 불만만큼이나 깊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그를 위한 훌륭한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베너와의 대화 내용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민당(FDP)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여당이 양측과 모두 협상하자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였다. 여당의 회의록을 보면 그가 관여한 부분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연정이 죽었다고 여겨야 한다. 궁극적으로 말이다. 연정의 종료가 이미 선언되었다. 그리고 연정 협상에 관한 문서에 나온 모든 이야기는 다 지나간 일이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는 수상에게 자민당(FDP)뿐만 아니라 사민당(SPD)과도 새 정부 구성에 관한 논의를 할 것을 요청하고다 하였다.” 이제 ‘협박’은 그만하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의 모든 장관은 여당 대표단 회의에서 사퇴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의 연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선거법 문제를 이제 새롭게 다루어야 한다는 뜻도 밝혔다. 이는 자민당(FDP)에 대적하는 연정을 고려할 때만 의미가 있는 발언이었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의 발언 직후 두 연정 대상자와 협상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기존의 연정이 해체된 것으로 간주했다. “아시다시피 사실 모든 연정 파트너는 협박자입니다!”라는 말로 그는 자민당(FDP)에 대해 분노한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이제 자민당(FDP)과 관련된 모든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는 길로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흥분도 가라앉혔다.     

이제부터 드라마는 아데나워 감독만이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되었다. 당 대표단 회의에서 기민당(CDU)의 당 동료들의 지원을 받은 수상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에게 국방부로 복귀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못 박았다. 며칠 전인 11월19 일 글롭케는 바드가슈타인에서 손으로 쓴 편지에서 슈트라우쓰가 연방의회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바이에른 수상으로서 뮌헨으로 이주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바이에른 주지사인 폰 하셀이나 헤르만 훼헬을 국방장관으로 등용시키자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기사당(CSU) 몫을 차지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은밀히 하셀의 임명을 선호하였다.     

슈트라우쓰는 이제 자기 외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간파하고 최측근들과의 회의에서 이에 대하여 큰 불만을 토로하였다. 적어도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최고위직에 있는 인사들은 이 기회에 아데나워 자신이 《슈피겔》 사건에 처음부터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그에게서 직접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내각을 떠나면 기사당(CSU) 출신도 장관도 더 이상 내각에 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기사당(CSU)에 많은 난관이 있게 되었다! 동시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는 11월 27일 원내대표 회의에서 승계 문제를 다시 한번 결정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상황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게 되어 원내대표 회의 후에 충성스러운 크로네에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마침내 슈트라우쓰에게 불가피한 것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1월 30일에야 그는 기사당(CSU)의 지방당대회에서 자기 사임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베너와의 비밀 협상으로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 다는 것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슈트라우쓰가 필요하다면 아데나워와 함께 몰락해 버리겠다고 냉정하게 결심한 것으로 보이기에, 그의 관점에서는 사민당(SPD)과의 연정 탐색을 신속히 진행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뤼케와 폰 구테네르크는 힘을 모아 이제 베너와의 탐색을 구체화하기 위해 아데나워 수상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먼저 그들은 본에서 협상하고, 폰 구텐베르크가 단독으로 베를린의 ‘힐튼호텔’에서 열린 ‘불가분의 독일 후원회’(Kuratorium Unteilbares Deutschland)가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협상을 지속하였다.     

뤼케는 상세한 서면 정보를 아데나워가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때 여러 문서를 작성하여 아데나워에게 최대한 신속하게 보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뤼케가 보낸 서한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귀하는 매우 올곧은 사람이지만 글씨는 정말 엉망이군요!”     

대담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주의하지도 않은 헤르베르트 베너는 이제 아데나워에게 뤼케와 구텐베르크 남작이 아데나워의 인지와 위임을 받아 협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서한을 보내 주라고 요구하였다. 11월 29일 오전 10시 15분, 구텐베르크는 크로네와 글롭케가 있는 곳에서 베너가 요구한 아데나워로의 확인서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베를린의 베너를 향해 날아갔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 서한에서 그에게 대연정의 세부 사항에 관해 이야기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의 연정 구성에 대해 뤼케 장관과 연방 의원인 베너 씨가 오늘 논의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연정의 전제 조건은 소선구제의 도움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을 바탕으로 베너 씨와 함께 각론을 확정해 주시기바랍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관계자가 최대한 예절을 갖추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11월 29일 저녁에 수상실에서 열릴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지도자들과 자민당(FDP)과의 첫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뤼케와 구텐베르크만을 통해 접촉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당은 기사당(CSU)과 자민당(FDP) 양측과의 협상을 위하여 소위원회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브렌타노, 슈무커, 슈투르베, 바젤과 더불어 기사당(CSU) 측에서는 슈트라우쓰와 돌링거가 참석하였다. 에르하르트 지지자들은 이 위원회에서 수상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기를 바랐다. 아데나워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협상위원회에 알리지 않고 사민당(SPD)과 함께 뤼케와 폰 구텐베르크를 통해 먼저 탐색해보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민당(SPD) 수뇌부 전체, 곧 배너뿐만 아니라 사민당(SPD) 지도부 전체가 아데나워의 무제한적 수상직 안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해지면, 그의 당 내부 반대 세력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탐색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베너와 가장 친분이 깊은 인사가 바로 기사당(CSU) 의원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당(CSU)의 당대표인 슈트라우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반응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11월 29일에 수상은 베너로부터 매우 귀중한 발언을 들었다. 뤼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베너가 분명히 밝힌 바로는 국방 정책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요란을 떨지 않으면서도 유럽의 핵 군사력을 확보하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었다.” 더 나아가 소선구제와 아데나워의 수상직 유지 조건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11월 29일 저녁, 베너와 구텐베르크는 베를린 힐튼호텔에 함께 앉아 폰 구텐베르크가 들고 온 문서의 기본 내용들이 이미 매우 상세한 합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에는 연정 참여 정당의 공동 선언 초안을 포함하여 소선거구제 법안도 포함되었다. 다만 베너는 소선구제로 인해 사민당(SPD) 내부에서 발생할 문제를 조심스럽게 지적하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책의 지속, 독일 및 베를린의 모든 형태의 분단을 거부하는 것도 베너가 받아들였다.


내각의 자리 배분은 전날 본에서 이미 논의되었다. - 의석수에 따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나 사민당(SPD)이 11대 9로 장관 자리를 나누기로 하였다. 여기에 연방 수상의 자리는 기민당(CDU)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다만 베너는 오스트리아를 모범으로 하여 모든 부서에서 장관과 차관의 색깔을 곧 소속 정당을 달리하자고 제안 하였다. “두 정당이 서로 이익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베너는 전날 글롭케와 논의한 부서 인사 목록의 초안을 구텐베르크로부터 전달받았다. 이에 따르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은 경제부, 국방부, 교통부, 농업부, 가족부, 우편부, 원자력부, 재무부, 법무부, 전독부 및 특임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너는 외무부 자리는 사민당(SPD) 당대표인 올렌하우어에게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점에서 구텐베르크는 기민당(CDU)이 에를러를 받아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베너는 또한 유럽부 장관도 사민당(SPD)이 가져가기를 원했다.     

사민당(SPD) 지도부의 입장은 신속하게 나왔다. 힐튼호텔에서 회의를 마친 후 그날 밤에 베너는 올렌하우어와 에를러가 협상안에 동의했다고 전화로 협상 파트너인 구텐베르크에게 알려왔다. 구텐베르크가, 그리고 곧이어 아데나워가 사민당(SPD)의 지도부가 월요일에 상임위를 개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12월 4일 화요일이 결정적인 날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륍케 대통령은 12월 5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때면 새 정부의 기본 윤곽이 이미 확립될 것이었다.     

베너, 올렌하우어, 에를러는 기습 전술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기민당(CDU)의 흑·적 연정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크로네가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리기를 바랐다. 그러면 탐색 단계에서 협상 단계로 나가게 될 일이었다. 그들은 대표단 회의를 2~3차례 가지고 나서 아데나워가 공식적으로 사민당(SPD)과의 협상에 나서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에 관하여 11월 29일 밤에 부분적으로 논의되었기에, 아데나워는 11월 30일 금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목요일 저녁에 베너와의 대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기에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을 향해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자민당(FDP)은 그동안 너무 거드름을 피워왔다. 바이에른 주 지방선거 직후, 자민당(FDP)은 아데나워와 연정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그러나 거의 일주일 내내 《슈피겔》 사건에서의 슈트라우쓰의 역할과 그가 내각에 남아있는 문제에 대하여 게속 논쟁을 벌였다.이는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11월 29일 목요일 저녁 수상실에서의 만찬으로 새로운 협력 길의 시작점을 확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자민당(FDP) 대표들은 슈트라우쓰와 함께 만찬 자리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대표는 흰색으로 덮인 식탁의 구석 자리에서 아데나워와 함께 식사했다. 그리고 자민당(FDP) 대표들은 옆방에 있는 식탁보가 없는 식탁에서 식사했다. 그러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인사들이 앉은 식탁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협상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모든 것이 베를린의 힐튼호텔에서 베너와 구텐베르크 남작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결국 아데나워는 이 희극적인 장면을 마무리하기 위해 방금 다시 모욕당했음에도 즉각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양측이 간단한 모두 발언을 하고 나자마자 아데나워는 즉각 자민당(FDP) 대표단을 공격했다. 그는 자민당(FDP)이 하필이면 국제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는 때 내각에서 5명의 장관을 사퇴시킨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는 또한 자민당(FDP) 소속 재무장관인 슈타르케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발터 쉘을 그의 후계자로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정부 위기 동안에 자민당(FDP)의 수장 자리에 오른 볼프강 되링은 그 주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전혀 모른 채 이제 반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진정으로 사민당(SPD)과 연정 협상을 하기를 원하는지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연정이 재수립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을 잔뜩 쌓아 올렸다. 여기에는 사회보장, 비상조치법, 《슈피겔》 문제의 처리, 새로운 연정 협정 체결, 그리고 연방 수상의 후계자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마찬가지로 강경한 어조로 맞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후 그는 되링의 등장이 자신을 얼마나 화내게 했는지를 강조했다. “그들은 연정을 깨고 장관을 퇴임시킨 다음에 마치 통제권은 지닌 척합니다. 나는 되링에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는 정말 매우 조심해서 봐야 할 형제입니다. 자민당(FDP)과의 첫 협상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나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제 여당의 다른 대표들에게도 되링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재를 원하는 멘데와 초글만에게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다음 주 월요일에 그들은 협상위원회가 다시 만나자는 동의만을 겨우 얻어냈을 뿐이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그의 전술적 목표를 달성했다. 앞으로 누구든지 자민당(FDP)과의 신속한 협상 합의를 옹호할 때마다 그는 자민당(FDP)의 오만함의 모범 사례로 그들을 반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사민당(SPD)과의 탐색을 진행하며 자민당(FDP)과의 연정의 대안 구상에 관한 찬성 의견을 모으기 위한 3일의 시간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민당(FDP)과의 합의에 도달할 의도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보기에 이는 자민당(FDP)에 맞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었다.     

베를린으로부터의 좋은 소식은, 이 소동이 난 회의가 끝나고 난 밤과 다음 날 아침에 도착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올렌하우어와 에를러가 이제 전면에 나선 것이 결정적인 신호였다. 헤르베르트 베너가 마치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완전히 회심했다는 것은, 그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12월 3일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연정 협상 진행 과정에 관한 토론에서 그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베너 씨가 갑자기 이렇게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원내대표단 앞에서 그는 좀 더 설득력 있게 말했다. “뤼케는 베너와의 대화에 대해 내가 단순히 그를 믿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뤼케가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해 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민당(SPD)에 관한 나의 깊은 불신으로 베너가 말한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11월 30일 사민당(SPD)과의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이자 그는 자신이 매우 놀란 척해야 했다. 당 대표단, 기사당(CSU) 지도부, 이미 수립된 협상대표단 뒤에서 비밀 협상을 벌인 것은 그의 많은 당 동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11월 26일 뤼케와의 대화를 추후 작성된 보고서에 언급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말이다.     

에르하르트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두프후에스는 모두 정부 구성과 함께 에르하르트를 수상 후계자로 확정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는 스스로를 경쟁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민당(SPD)조차도 아데나워가 영원히 수상으로 재임할 것에 동의한 상황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아데나워를 강제로 밀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보다도 게르스텐마이어가 실망했다. 사민당(SPD)으로 이어지는 가교를 건설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온 그는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을 건너뛰고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 크로네, 뤼케는 커다란 도박을 하고 사민당(SPD)은 당과 륍케가 가장 좋아하던 모든 정당의 연정 구상을 무시하듯 제쳐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 예를 들어 노동부 장관 테오 블랑크도 실망했다. 그에게 기민당(CDU) 당대표이자 연방 수상이 13년 동안 사민당(SPD)에 관한 불신을 심어 주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더욱 화를 냈다. 그는 아데나워가 이제 안전한 땅에 있고 자신은 거의 절망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새로운 사태의 전개가 기사당(CSU)의 위대한 당대표인 그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관은 그의 정적인 기사당(CSU)의 사절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에 비추어 볼 때 11월 27일의 원내 회의에서 내린 결정인 모든 대상과 협상을 하겠다는 것은 갑자기 매우 폭넓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아데나워는 계속해서 그것을 강조하며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진행된 탐색도 마치 이를 통하여 협상 담당 기관의 공식 협상을 신중하게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듯이 운영해 온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바로 사태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각 명단의 골격이 넘겨 질 때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이제 깜짝 놀란 모든 사람은 권위주의적인 아데나워의 권력 정치의 또 다른 사례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이 흑·적 연정의 많은 위험을 지적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에는 의결권 문제만이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당원 회의에서 논의된 것을 보면 연정 상대를 바꾸는 것을찬성하는 이들이 아직 과반수에 이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수상에게는 이제 모든 것은 사민당(SPD) 지도부가 샤움부르크궁에 와서 공식적인 협상을 벌이는 것에 달려 있었다. 사민당(SPD) 지도부와의 비밀 접촉의 상황을 보면 이제 더 이상 아데나워가 요청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여론은 《슈피겔》과 관련된 사건을 이유로 아데나워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정당에 도덕적 비난을 퍼붓고 나섰던 사민당(SPD)이 너무 서둘러 흑·적 연정의 침대로 돌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열띤 토론 후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지도부를 공식 연정 협상에 초대하는 것을 관철해 내었다. 그러면서도 이와 동시에 자민당(FDP)과의 협상도 계속하였다.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는 자민당(FDP)의 ‘협박’에 관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 의원들의 분노였다.     

12월 4일 서독 역사상 처음으로 사민당(SPD)의 지도부가 샤움부르크궁에서 정규 연정 협상에 참여했다. 대단히 놀란 독일 여론은 이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진영과 사민당(SPD)은 모든 형식에서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상대로 서로를 인정했다. 같은 날 진행된 사민당(SPD)과 자민당(FDP) 간의 정보 회의는 당 체제의 중대한 변화를 강조했다. 이리하여 연방정부의 모든 정당이 서로 연정을 구성할 수 있었던 1960년대가 시작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1946년 이래로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마다치 않던 기민당(CDU) 지도자, 곧 아데나워의 작품이었다. 그가 사민당(SPD)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것 여부와 관계없이 이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것은 그 장기적인 정치적 효과였다.     

사실 12월 4일에 전격 작전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모든 것이 무너졌다. 올렌하우어, 베너, 에를러를 포함한 사민당(SPD) 지도부는 이미 아데나워만큼 의지가 분명했다. 올렌하우어는 실제 연정 협상 전에 이루어진 영수 회담에서 사민당(SPD)이 연정의 조건으로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수상에게 말한 것이다. 이제 사민당(SPD) 측은 폴 뤼케의 괴벽이 대연정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어야하는지를용남하고 싶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열된 자민당(FDP)과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음’에 관한 분노로 사민당(SPD)과 연정을 결성할 준비가되어 있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선거법을 통하여 자민당(FDP)을 파괴해 버리려는 생각은 사실 매력적이지 않은 흑·적 연정에 관한 진정한 재미를 느끼게 만든 것이었다.     

이에 아데나워 자신도 조심스럽게 그러한 뜻을 밝혔고, 사민당(SPD)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츠 에를러가 가장 주저하였다. 오늘 대화를 나눈 것 차제만으로도 성과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양측이 첫 번째 비공식적인 접촉을 넘어 실제적 대화에 도달하는 것을 양측이 얼마나 바라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은 구속력이 없는 예비적인 확인이었다.” 이러한 원내대표의 말은 그가 더 이상 이 계획에 대하여 더 이상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결국 아데나워는 이 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수상 임기에 관한 올렌하우어의 정중한 어조의 질문에 관한 답을 1961년 11월 8일 당시 의원인 크로네에게 쓴 편지에서 언급했다. 이제 그는 흑·적 연정의 수장으로서의 수상직의 영광도 늦어도 1964년에 끝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사민당(SPD) 내부의 분위기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소선거구제만이 아니라 하필이면 아데나워 밑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연정을 이루는 것에 관한 반대가 있었던 것이다. 자기 주도로 계획을 추진하고 싶지 않다면 그는 이 점에서 유연성을 보여야 했다.     

서로 진지한 시도를 추구하는 양측의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 당의 저항을 얼마나 과소평가했는지가 분명해졌다. 그에 따라 공동성명도 소극적으로 작성되었다. 협상위원회 사이에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오늘 회의에서나 이전에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베너, 뤼케, 폰 구텐베르크 사이에 논의되었던 모든 내용을 무효화했다.     

따라서 12월 5일 저녁에 나온 소식, 곧 사민당(SPD)이 소선거구제나 아데나워의 수상직에 관한 문제에서 아무런 결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당분간은 전권이 없는 대표 위원회에서 협상을 진행하자고 하였다. 12월 5일 저녁, 아데나워는 크로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올렌하우어는 베너, 뤼케, 구텐베르크 간의 합의에 근거하여 협상하거나 - 정중하게 열린 상태로 두자는 – 곧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자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예비 합의는 소선거구제의 도움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안정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나의 수상직을 기반으로 한다.”     

연정 계획에서 기민당(CDU) 측의 동력인 하인리히 크로네는 처음으로 좌절했다. 그는 이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적 시간을 따르는 이들이 없다. 늙은 수상은 용감한 자들과 함께한다.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제 소연정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는 나중에 에르하르트가 이끌 것이다. 영화는 계속 상영될 것이다. 그리고 곧 끝이 난다.”     

과연 크로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데나워가 실제로 끝까지 계획을 추구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2월 2일 일요일 정오에 뢴도르프로 그를 찾은 게르스텐마이어는 “우울하고 흔들리는 연방 수상”을 접했다. 그는 아데나워의 자민당(FDP)에 대한 불만으로 그가 잠시나마 사민당(SPD)과 가까이하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크로네, 뤼케 또는 폰 구텐베르크가 내세웠던 원대한 생각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데나워가 얼마나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인지는 12월 6일 아침 일찍 글롭케와 크로네에게 연방의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을 때 드러났다. 두 사람은 이 미친 생각을 하지 말 것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자 그는 다소 경황없는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그가 내년에 사임 선언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1963년 9월 1일에 은퇴하고 연방 수상실에서 일하는 데 지친 글롭케는 연방의회의 여름휴가가 시작될 때를 사직 시기로 권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데나워가 당연히 가을에 사임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얼마 후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협상위원회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수상은 실제로 1963년 가을 연방의회 회기가 시작되는 날을 사임 날로 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마감일이 다시 목에 걸렸음을 의미했다. 이번에는 1961년 정부 구성 때보다 훨씬 촉박했다.     

적어도 그는 자민당(FDP) 사람들이 이제는 다소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자기 승리를 다시 만끽할 수는 있었다. 이미 사민당(SPD)과의 연정 협상이라는 폭탄이 터진 12월 4일에 있었던 자민당(FDP)과의 협상은 그가 자민당(FDP)의 기세를 꺾어버렸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볼프강 되링조차도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자기 견해를 수정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그는 회의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더 이상 자민당(FDP) 원내대표가 되고 싶지 않다는 뜻도 밝혔다.     

자민당(FDP)에서는 이제 다시 에리히 멘데의 발언권이 커졌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사임이 자기 재량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재무장관의 문제에서도 자민당(FDP)이 양보하여 아데나워도 동의한 함부르크 자민당(FDP)의 재무 전문가인 롤프 달그륀을 추천하였다. 또한 그는 발터 쉴, 한스 렌츠, 볼프강 미쉬니크를 기꺼이 다시 내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민당(FDP)은 여전히 그에게 불편했다. 《슈피겔》을 둘러싼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긴 대화를 나누었던 라인홀드 마이어는 이러한 그의 불안감을 강화했다. 자민당(FDP)이 그에게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대화 보고를 들은 기민당(CDU) 당 대표단 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가 이전의 자민당(FDP)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상당히 경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블뤼허, 프로이스카, 라이홀드 마이어, 횝케-아쇼프, 빌더무트, 호이쓰, 함부르크 출신의 쉐퍼, 나중에 법무장관이 된 노이마이어 ...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가깝고 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되링과 그 부류의 사람들과 연정을 수립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 아픈 일을 참아야 했다. 법무장관인 토마스 델러를 연임시킬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슈바벤 출신 변호사인 에발트 부허를 다시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좌파 자유주의를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1962년에는 무트라겐에 사는 부허가 1983년에 기민당(CDU)에 합류할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방식에서 용인할 수 없는 법치국가의 원칙을 위반한 이유로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데나워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추천한 장관을 선출하는 재량권이 있는 경우 두 가지의 기본적인 생각을 따랐다. 한편으로 내각은 좀 더 젊어져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후계자를 염두에 두며 자기 노선을 추구하는 정치가를 끌어들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인 브루노 헥을 가정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기민당(CDU)의 원내대표로서 오랫동안 그를 섬겨왔다. 기사당(CSU)의 알로이스 니더알트가 연방참사회 장관이 되고, 연정 협상에서 아데나워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준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프랑크 베르너 돌링거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라인 지역 기민당(CDU)의 위대한 젊은 희망인 라이너 바첼은 베를린 기민당(CDU)의 큰 불만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 레머의 뒤를 이어 양독일부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 대신에 바르첼을 원내대표로 임명하고 폰 브렌타노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하여 내각으로 불러들이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외무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2년 12월에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슈뢰더는 이제 많은 명성을 누리게 되어 이제는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논의될 정도였다. 12월 14일 이 과도 내각이 취임 선서를 할 때 기민당(CDU) 장관 중 누가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할지는 이미 분명했다. 에르하르트와 슈뢰더가 여기에 속했다. 두 사람은 각각 수상 후보로 여겨졌다. 둘 다 국방장관이 될 폰 하셀을 포함하여 개신교 신자였다. 기민당(CDU)의 개신교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었다. 아직은 이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이 마지막 아데나워 내각에는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의 거물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너 바르첼, 발터 쉴, 볼프강 미쉬니크, 헤르만 훼헬, 리하르트 슈튀켈른과 함께 이 아데나워 시대의 마지막 내각의 구성원은 아데나워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데나워가 1949년 알렉산더 쾨니히 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했던 장관들 가운데 현재는 기민당(CDU) 소속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세봄 교통부 장관만이 남아 있었다. 내각에서도 아데나워의 시대는 눈에 띄게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방부의 인사였다. 폰 하셀은 그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1963년 1월 중순까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지사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마지못해 놓아준 메르카츠를 국방부 관리를 잠정적으로 맡기고 싶어 하여 이미 연방정부의 공보에 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쓰가 큰 사달을 내고 있었다.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는 돌링거가 있는 자리에서 45분 동안 서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슈트라우쓰는 다시 수상이 비겁하게 《슈피겔》 사건에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아데나워는 마침내 헌법 제69조에 따라 일종의 배상으로 슈트라우쓰가 1월까지 국방장관 업무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슈트라우쓰는 명예를 절반 정도 회복한 것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이미 그의 후계자를 위한 마지막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슈트라우쓰와 폰 브렌타노 사이에 이른바 정치 동맹이 형성되었으며 아데나워는 이제 에르하르트가 기사당(CSU) 당대표의 도움으로 수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자민당(FDP)과 《슈피겔》을 괴롭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데나워는 지금 폰 브렌타노를 수상으로 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슈트라우쓰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실각한 국방장관이 12월 19일 열리는 독일군의 횃불 행진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약 100명의 독일군 장군과 제독, 그리고 국방부의 고위 관리들이 반 공군 기지에 있는 공군 장교의 집에 모였다. 언제나처럼 꼿꼿한 아데나워는 모피 안감이 있는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썼다. 그러면서 퇴임하는 국방장관의 공적을 치하하며 “앞으로 그는 여전히 독일 국민의 정치 생활에서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그는 그에게 삶의 지혜도 전해 주었다. “힘든 시기가 남자를 만드는 법입니다.” 이렇게 하여 《슈피겔》 사태를 둘러싼 게임의 치열했던 단계와 아데나워의 마지막 정부의 구성이 마무리 되었다.     

짧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마치고 아데나워가 다시 최고의 컨디션을 찾았다. 평소처럼 그는 88번째 생일을 축하하였고, 연말에 자기 일기장에 일종의 추도사를 썼던 크로네는 이 기회에 놀라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르신은 여든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활기차고 민첩하고 유머가 있으며 쇄약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그가 가고 싶지 않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독일 조약     


수상 시대의 모래시계가 이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빨리 줄어들었지만, 아데나워의 업무 스타일의 속도와 강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은 이제 여당이나 여론의 강한 저항에 맞서 중요한 계획을 추진할 정치적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이미 아데나워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국내 정치적으로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후계자를 둘러싸고 한바탕 벌어질 총격전이었다. 1963년 1월 초에 지원자 가운데 누가 경선 가도에 남을지 확신을 두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교 정책에서도 수상의 날개가 꺾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제치고 그 자신이 수상이 되지 않는 한 아데나워 시대 이후에도 외무부를 계속 이끌 것이 거의 확실했다. 아데나워는 평소와 같이 외무장관의 고삐를 바짝 조이고자 했다. 예를 들어 그는 1962년 새해 전야에 연방정부의 절차 규칙 제13항을 언급하는 힘찬 편지를 썼다. 슈뢰더가 아데나워 수상과 사전 협의 없이 영국의 장관들과 체커스에서 회담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드골과의 중요한 협상이 1월 21일과 22일에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는 프랑스 측에 독일이 이중플레이를 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상은 이미 합의된 여정을 더 이상 금지할 수 없었다. 다만 그 회담에서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문제만을 다룰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슈뢰더는 아데나워의 요구 사항을 무심히 넘겨버릴 수 있었다.     

글롭케와 오스터헬트가 1월 초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데나워의 최측근인 이 두 사람은 이제 아데나워가 처음부터 국민이나 여당 또는 내각이 찬성하는 외교 정책만 시행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1962년 9월 드골의 성대한 영접을 받은 이후, 1963년 초반인 지금에 와서 그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 심화를 위해 계획된 정부 합의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 1962년 12월 6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협상대표단과 함께한 중요한 회의에서 1963년 가을에 사임하기로 한 아데나워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나는 여전히 프랑스와 함께 일하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편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제에서 전술적으로 노련한 방법을 사용하는 데 내각에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쌓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핵무장 계획은 이제 핵미사일을 탑재한 수상 함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각 내부에 존재하는 확실한 친미 파벌의 에르하르트와 슈뢰더, 그리고 막 취임한 이후의 하셀도 이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워싱턴의 의도를 정말로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실행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본이 핵무기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만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할 요량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는 서방 동맹의 모든 핵무기를 중앙집중적으로 통제하려는 케네디 정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이 서유럽 국가의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다국적군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다국적군 창설 계획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어쩌면 서독에도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자율적인 해결책이나 서유럽 핵 협력에서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당분간 협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는 이 계획에 대하여 잘 알려진 자기의 요구 사항을 고수했다.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무기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의 관할에 속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독에도 공정하고 원칙적으로 동등한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 독일군 전투 장비 확충과 전술 핵무기 유지 및 기술 개선, 독일군에 전장 무기를 추가로 보급하고, 서유럽에서 이동식 중거리 미사일 도입 계획을 고수하여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조지 볼 미국 국무부 차관이 1월 중순에 많은 환대 속에서 서유럽을 방문하고 다국적군 설립 계획에 관한 협상을 위해 본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는 이에 전적으로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8일 후에 드골에게는 해상 기반 억제 체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전술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그러한 체계는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는 주로 지상 기반 중거리 미사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공격에 걸리지 않으려면 기동성이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문제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비 통제 협상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이 잠수함에만 배치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면 서독에 훨씬 편했을 것이었다.     

20년 후에 일어날 커다란 미사일 논쟁에 이미 이것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1963년에 말했듯이, 아데나워는 퍼싱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의 배치를 열렬한 지지하였지만, 협상을 통한 모든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아데나워는 이미 서유럽 핵무기 부대의 이론적 대안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이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최소한 다국적군과 나란히 구축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은 다국적군을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이 독점적인 서유럽 핵전략의 어떤 개념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었으며, 드골을 설득하여 자율적인 프랑스 핵무기부대 창설 계획을 포기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적이게도 아데나워는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드골에게 핵무기를 ‘조용히’ 개발할 것을 남몰래 촉구하였다. 물론 그는 드골에게 독일이 어쩔 수 없이 다국적군 계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드골은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직하는 한 독일의 참여에 관한 협상을 수락하고자 하였다.     

때때로 아데나워는 유럽의 핵전력을 꿈꾸었지만, 조금 정신 차려 보면 이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아데나워의 미국과의 동맹을 통한 핵 정책과 프랑스 정책 사이에 타협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수상직의 마지막 해에 그는 에르하르트, 슈뢰더, 폰 하셀이 오랫동안 희망을 품고 있는 다국적군의 유령 함대* 진수식에 참여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상직 후반기에 그는 자율적 원자력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기가 없는 서독을 능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슈뢰더, 폰 하셀, 카스텐스, 글롭케, 오스터헬트, 그레베 및 푀르취 장군과 쿤첸 장군과 함께 1963년 1월 14일 아침 조지 볼과의 협상을 준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핵무기와 다른 현대 방위 무기에 대해 발언권이 없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3등 세력이 될 것입니다.” 서독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비한 핵전력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2등’ 또는 ‘3등’ 국가가 될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주 언급하는 정형화된 생각이었다.     

* 유령함대 [Geisterflotte, 역자주 – 더 이상 필요 없거나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배. 그러나 유사시 정비하여 전투에 활용할 수 있음.]     

이는 빌헬름 황제 시대에 관한 향수가 틀림없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독일이 전개한 권력과 영광에 관한 그의 생각이 더욱더 강하게 들게 되었다. “독일이 한때 어떤 나라였는지 안다면, 19세기 말 세계에서 어떤 위세를 떨쳤는지 안다면 – 그리고 이제 거기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면 슬프고 씁쓸하지만 ... 어쩔 수 없지요.” 그런 말에서 드골이나 맥밀런의 힘의 정치의 환상과 멀지 않은 생각을 하는 아데나워를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독일이 나치의 과거로 한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씁쓸하게 지적했다. 그래서 독일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간접적으로 자기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세의 과거에 관한 기억으로 서독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핵 억지 정책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힘의 정치의 현실은 또한 프랑스·독일 동맹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금지했다. 1963년 1월에도 아데나워는 이미 엘리제궁에서 맺은 조약에 서명할 때 계획된 이중 동맹과 일련의 미국을 강조하는 조치 사이의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2년 12월 18일 미국의 요청에 따라 그는 내각에서 시베리아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163,000톤의 대형 파이프 수출을 금지시켰다. 드골을 만나러 가기 일주일 전인 1963년 1월 14일, 그는 조지 볼에게 원칙적으로 독일이 다국적군에 참가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4일 후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여름에 계획된 유럽 방문 때 독일도 방문해주도록 초대했다. 3일 후 케네디의 승낙 답신이 도착하였다.     

미국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신중하게 발전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영국을 노골적으로 제쳐 두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에르하르트가 영국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에 그와 멀지 않았다.     

이달의 우선 과제는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였다. 아데나워는 다양한 주장을 통해 그의 현재 그가 노골적으로 친프랑스적인 것을 합리화하였다. 그리고 주된 동기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계속해서 미국에 관한 그의 의심이 대두되었다. 예를 들어 12월 28일 그는 뢴도르프에서 글롭케, 호이싱거, 오스터헬트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와 큰 성탄 구유 앞에서 바하마 협정의 결과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에서 맥밀런은 영국의 핵무기와 미국을 밀접하게 연계했다. 호이싱거가 자리를 떠나고 나자 글롭케와 오스터헬트는 미국에 관한 큰 불만을 다시 한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누구도 실망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변덕이 얼마나 심한지! 오늘 그들이 내일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케네디 정부가 쿠바 위기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베를린과 독일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데나워가 집착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63년 내내 그는 이러한 고착된 생각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63년 2월 베를린에 관한 탐색의 대화가 재개되는 것과 같은 모든 경우는 그에게 미국에 관한 가장 깊은 불신을 일깨우고 미국에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끌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1963년 8월 핵실험 중단 합의서에 동독이 서명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최악에 이르렀다.     

아데나워가 정권 말기에 그 세밀함과 조언에 더욱 의존하게 된 오스터헬드는 아데나워의 비관주의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의 이익 추구를 미국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관철할 수 있다면, 많은 사태를 예방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다는 말로 수상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소련에 접근하기로 하고 우리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진지하게 총을 쏘듯 말했다. “그들은 이미 얼마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그러한 우려를 배경으로 아데나워는 드골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미국이 불성실한 경향이 있고, 영국도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믿기 어려운 상대이기에 프랑스만이 남아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서독이 쇠약하고 버림받았다고 여기며 프랑스·독일 연합의 힘의 환상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독일 조약의 서문에 관한 논란이 최종적으로 해결되어야 하자, 카데나비아에 기민당(CDU), 기사당(CSU), 자민당(FDP)의 외무 전문의원들이 모여 큰 전망을 제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시작하였다. “프랑스·독일 조약으로 유럽에 새로운 힘의 중심이 생기는 것이기에 바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때 아데나워로부터 친프랑스 정책에 관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더 많은 고정 관념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91년 프랑스 함대의 크론슈타트 방문, 1914년 7월 포앙카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빈 방문, 제1차 세계대전, 1944년 프랑스·소련 조약에 관한 기억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두 전선의 위협이 - 곧 독일을 둘러싼 프랑스와러시아의 협공이 -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프랑스·독일 조약을 맺도록 설득하던 때 그에게 이를 상기시켰다. 그는 내각에도 이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존 포스터 덜레스의 오랜 친구였던 리빙스턴 머천트도 들었다.     

또 다른 근거로 그는 자기의 서방 정책 전체의 틀을 가리켰다. 외교 정책에 게으른 앵글로·색슨이 그와 마찬가지로 느긋한 독일에 필요한 심리적 의지처가 될 수 없기에 프랑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서방의 모든 자유 공화국에 독일의 운명을 묶은 심산이었다. 동맹은 “동방 공산주의의 진전을 막는 정치적 댐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독일을 ‘내부적으로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대화 상대자들은 주로 드골 자신에게서 이러한 말을 종종 들었다.     

또 다른 근거는 프랑스와 독일을 핵으로 하는 유럽의 새로운 힘의 중심에 관한 지적이었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소련에 맞서는 주체성, 특히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할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범유럽 사상의 아버지인 쿠덴호프-칼레르기가 이미 1923년에 선포한 것처럼 그는 유럽이 미국에 대항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는 공산화된 중국, 독립한 유색 인종, 문제가 심각한 라틴아메리카의 공산화와 같이 모든 대륙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힘의 정치 차원의 도전을 목격하고 있었다. 유럽 통일에 관한 그의 원래 생각이 이제는 프랑스와 독일 연합의 필요성으로 축소되었다. 최대한 빨리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이 핵심에 합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데나워와 드골은 1962년 9월 정부 간 합의를 통해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긴밀한 협력을 시작하기로 합의했기에, 이에 관한 국내 정치적 기반도 확보된 것으로 보였다. 1962년 9월 드골의 방문에 비추어 볼 때,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영국의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들조차도 이를 반대할 수가 없었다. 야당인 사민당(SPD)에서도 반드골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브란트와 베너는 적극적인 프랑스 정책 지지자로 간주되었다.     

연방정부 안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이러한 실용적인 노선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쿠브 드 뮈르비에 프랑스 외무장관과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은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사이에 슈뢰더는 영국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시키려면 먼저 프랑스·독일 관계를 신중하게 촉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덧붙여서 슈뢰더는 영국과도 비슷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국내 정치적으로 외무장관은 이제 아데나워와 크게 싸울 필요가 과거에 비해, 거의 없어졌다. 그가 차기 수상 후보가 될 가능성에서 1963년에 뭔가 전망이 보이게 될 것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10월과 11월의 격동으로 인해 약간의 지연이 있기는 했지만, 정부 간 합의문 초안은 1962년 12월에 거의 완성되었다. 12월 중순에 슈뢰더와 쿠브 드 뮈르비에는 파리에서 합의문 초안을 개인적으로 논의했다. 이는 1월 11일과 12일에 본에서 프랑스 외무부의 정치부 부장인 장 루세와 외무부 직원인 요제프 얀센이 중심이 되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정부 합의안일 뿐이었다.     

비준이 필요한 조약은 아데나워가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조약식을 거행하여 이 구상에 화려함을 더하고 무엇보다 영구적인 의미를 담고자 한 의도는 원래 아무런 역할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정책에 대한 많은 반대가 정부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처음에는 의회 비준 절차라는 어려운 일을 고려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제 독일·프랑스 협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위임받은 호르스트 오스터헬트가 그에게 헌법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유하였다. 외무부의 법무담당 부장은 정부의 합의가 헌법에 부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터헬트는 부서 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에서 정부 합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헌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스터헬트는 아데나워에게 1962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그리고 1월 초에 다시 한번 우려를 표명했다. 아데나워는 최대한 빨리 계약을 이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마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오스터헬트 조차도 더 이상의 정치적 고려를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 정책 측면에서 해가 될 수 있는 법적 문제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하여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는 조약이 큰 문제 없이 비준될 수 있다면 조약이라는 형식이 지니는 정치적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성대한 만남이 임박했기 때문에 헌법적인 문제를 우려하여 이를 철회한다면 당연히 드골의 의심을 사게 될 노릇이었다. 인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1월 초에는 생일잔치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정이 많으므로 아데나워는 이 문제를 미루고 있었다.     

이제 1963년 1월 14일 드골의 기자회견에서 큰 사달이 나게 되었다. 드골 대통령은 1962년 11월 말 총선에서 프랑스 여당인 신공화국연맹당(L'Union pour la nouvelle République, UNR)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두 가지를 분명하게 매듭지었다. 한편으로는 그는 프랑스를 위한 다국적군에 관한 미국의 계획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핵 능력을 여기에 포함하면 마지막 남은 국방의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기 생각으로는 아직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할 때가 안 되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핵 문제와 영국 가입 문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게 되었다. 케네디와 맥밀런의 바하마 협정은 방아쇠 역할을 했거나 적어도 좋은 변명 거리를 제공한 것으로 보였다.     

이 기자회견은 런던과 워싱턴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드골에게 직접 압박을 가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본에 집중했다. 다국적군에 관한 원칙적인 승인은 드골의 기자회견이 있던 바로 그날 본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서독 정부는 브뤼셀에서의 영국 가입 협상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도 이렇게 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미 1월 15일에 외무장관은 드골의 발언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본은 계속해서 영국의 가입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영국과의 단순한 연합 협약을 맺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고 자기 본심을 드러내야 했다. 물론 그는 드골이 이제 프랑스와 영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본을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결정을 회피하려는 이전의 모든 시도가 이제 끝나고 말았다. 수상의 관점에서 볼 때 장애물은 더욱 커졌다. 그는 현재 파리 방문을 보란 듯이 연기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파리와의 합의를 단순한 협의 조치로 축소하고 싶지 않다면 의회에서 힘든 비준 관련 토론에 참여해야 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드골은 분명히 아데나워가 국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는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서독 정부가 프랑스에 대하여 공개적인 선택을 하도록 세심하게 계산해서 수행한 그의 책략은 완전히 역효과를 낳고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에 대하여 이전에 널리 확산하여 있었던 공감대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그가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는 중요한 계획을 추진해야 했다. 그런데 내각, 여당, 의회 전체 또는 여론에서 그에 관한 지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극단론은 불가피했다. 더구나 양 진영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프랑스·독일 협력의 지속을 보류하기를 원하는 데 비해,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소수파에 속하는 또 다른 일부는 파리와의 무조건적인 핵 협력을 요구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1월 15일 저녁 크로네와 현 상황을 논의하면서 “드골에게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라고 그에게 물었다. 주택부 장관 뤼케가 그러한 제안을 했다. 크로네는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안이 현재 상황에서 슈뢰더나 에르하르트 또는 멘데 사이에 반란을 촉발할 것임이 분명했다. 이제부터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는 대서양 지지(곧 친미 친영) 진영과 프랑스 지지 진영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아데나워는 이미 포진하고 있는 다수파에 맞서 자가 주장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1월 16일 국무회의에서 그는 프랑스·독일 관계에 관한 전체 역사의 파노라마를 전개하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 프랑스·독일 합의가 공식적인 비준을 통해 합법화될 수 있다는 그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이 시점에서 슈뢰더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적어도 대서양 지지 진영은 아데나워가 다국적군 계획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드골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음에도 말이다. 내각은 어찌 되었든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예감에 따른 확신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에 반해 야당은 새로 깨달은 대서양주의를 내세웠다. 1월 17일 사민당(SPD)은 아데나워 수상이 파리 방문을 미루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는 슈뢰더, 크로네, 카스텐스, 글롭케와 여당의 당 대표단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아데나워는 슈뢰더와 폰 브렌타노의 지지에 힘입어 파리 방문을 고집했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문서에 서명하겠다는 결심도 밝혔다. 그러면서 드골에게 영국의 가입에 관한 협상을 계속할 것을 권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가 암시하는 ‘예기치 못한 것’은 드골이 정부 간 합의 대신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파리와 본 사이에서 이 정도로 포괄적인 계획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1월 18일 저녁이 되어서야 본 대사관에서 보낸 전보가 프랑스 외무부에 도착했기에 이제 독일 측이 조약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리로 떠나기 전부터 런던에서 반격이 있을 것이 분명해졌다. 파리에서도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장 모네가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에 그는 이른바 ‘유럽연합행동위원회’(Comite d' action pour les Etats Unis d' Europe)의 지도자로서 영국의 가입을 위한 활기찬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월 19일 매우 비판적인 전보를 보낸 존 맥클로이와 딘 애치슨은 모네를 지지하였다. 분명히 서독 수립 초기의 가장 중요한 연합국 대표들이 인제 와서는 아데나워가 -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 원래의 통합 개념을 떠나 대서양 동맹에 불성실해지지 않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장 모네는 7월 20일 저녁 파리에 도착한 아데나워가 딸 리아 라이너스를 동반하고 블랑켄호른 부부와 함께 식사하고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개인적으로 서둘러 찾아왔다. 발터 할슈타인은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도착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조기 통합 정책에서 가장 가까웠던 세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드골의 위험한 길을 따라가지 말 것을 권유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장 모네는 아데나워에게 프랑스·독일 협정의 서명과 브뤼셀에서의 영국 가입 협상을 지속하는 것을 연계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미국에 관한 악영향에 대해 경고하고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영국 가입 협상을 중단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모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는 드골에게 조금의 압력을 가하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일단 유럽경제공동체(EEC) 위원회에 현재의 협상에 관한 입장을 밝히도록 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안하도록 하여 시간을 벌자는 구상이 논의되었다. 할슈타인은은 이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러한 제안을 다른 회원국들이 승인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위원회가 입장을 발표하도록 협상을 연기하자는 타협안은 아데나워와 드골의 논의에서도 합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순한 통상적인 프랑스·독일 정상회담 이상의 것이 1월 21일과 22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오래전에 합의된 바와 같이 아데나워는 독일 대표단으로 외무장관에 더하여 폰 하셀 국방장관과 청소년·가정부 장관인 헤크를 포함시켰다.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합의된 협력 분야인 외교 정책, 국방, 청소년 및 문화 분야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를리 공항에서의 영접부터 훌륭한 의전에 따라 진행되었다. 아데나워가 공개적으로 ‘조약’이라는 용어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월 21일 아침 아데나워와 드골이 세계 정치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두 외무장관과 대표단은 다시 합의 내용에 관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블랑켄호른의 말대로 “점점 더 비준이 필요한 엄숙한 조약의 성격을 취하게 되었다.” 정오에 드골과 아데나워가 비준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엘리제궁의 외무장관들에게 전해졌고, 그 본문은 서명 전까지 조약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다.     

대표단 회의에서 드골은 조약의 형식을 명시적으로 환영했다. 그는 조약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프랑스도 헌법상 비의무적인 의회 논의를 진행하고 이 조약이 국민투표에 부쳐져야 한지 아닌지까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 측은 헌법상의 이유로 서독에서는 국민투표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 회의까지 비준 절차를 완료해야 한다는 드골의 신중한 조언에 아데나워는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외무부의 실무진들은 조약 체결 결정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1월 22일에는 파란색 틀이 있는 계약서 문서와 독일 연방 독수리가 새겨진 가죽 포트폴리오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독일 대표단의 피셔를 통하여 포부흐그 셍토노헤가에 있는 에르메스 상점에서 적당한 파란색 가죽 폴더를 하나 찾아냈다. 그러나 조약서 종이로는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프랑스 측의 것을 사용해야만 했다.     

드골과 아데나워의 친근한 포옹과 함께 엄숙한 서명식을 진행할 때 조약의 형식이 문자 그대로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랑부이에성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면서 이 완전히 즉석에서 만들어진 조약이 그의 14년 동안의 수상직의 주요 작업이라고 칭송하였다.     

장기적으로이 합의 활동은 실제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장은 아데나워가 하루아침에 그것도 즉석에서 마련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드골이 정권을 잡은 이후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추진해온 모든 프랑스 정책을 훼손해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자기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혔던 프랑스와의 긴밀한 유대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이 이제는 큰 소리로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영국에 관한 아데나워의 정책은 그저 파편 쪼가리가 되었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말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베를린 문제 때문에 양보하려는 최악의 때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나빠졌다.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조차도 이제 치를 떨며 그를 외면하였다. 1월 28일 브뤼셀에서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붕괴하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불만인 세력이 있다. 매우 화가 난 벨기에, 공격적으로 부정적인 네덜란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과 좋았던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상실하는 길을 잘도 가고 있으며, 우리가 다자간 핵 군사력을 확실히 인정하고 나아가 동참하려는 의지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점점 더 우리를 불신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는 브뤼셀에서의 협상 중단이 현실화되면 필연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한때 아데나워를 숭배했던 인물의 이러한 강력한 비난은 그의 정적도 차마 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나중에 역사가 독일 외교 정책의 이 부분을 평가할 것이다. 1961년 이후로 그가 명확히 그리고 더욱 명확히 보여준 그대로이다. 그가 고령이기에 서독의 복잡하고 미묘한 외교 정책 문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여 정확한 결론을 내릴 처지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나쁜 외교 정책이다. 그리고 나중에 – 어쩌면 앞으로 몇 달 안에 – 그러한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역사적 서술은 그러한 과정을 더 넓은 관점에서 평가하기에 더 나은 판단에 이르게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1963년과 이어진 동안에는 블랑켄호른의 분석이 전적으로 정확했다. 아데나워가 본에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다우링 대사는 상황 보고를 위해 워싱턴으로 소환되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데나워는 그에게 화를 돋우는 소식을 전했다. 곧 존 포스터 덜레스가 살아있었다면 프랑스·독일 조약에 대해 듣고 너무 기뻐서 날뛰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비명을 질러대는 영국에 대해서 드골과 마찬가지로 화가 났다. 영국이 독일과 프랑스에 화를 내는 것만큼 말이다. 다우링은 영국이 1950년과 1955/56년 두 차례나 유럽 통일에 참여하는 기회를 거부했다는 말도 들었다. 할슈타인은 자신이 아는 한 협상에서 영국만큼 오만만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그렇게 빨리 달랠 수는 없었다. 케네디가 보낸 편지는 매우 분노에 차있었다. 장 모네의 친구이자 유럽 연합의 확고한 지지자인 조지 볼 미국 국무부 차관은 이른바 엘리제 조약을 프랑스와 독일 음모의 일환으로 여겼다. 그 자신과 국무부의 다른 분석가들은 이상한 소문에 놀라고 있었다. 당연히 이 소문은 영국이 퍼뜨린 것이다. 곧 드골은 본의 지원을 받아 모스크바에서 전혀 새로운 유럽 안보 체계에 관한 협상을 벌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동독에서 소련의 철수, 독일 양국의 연방제 수립, 중립국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소멸 – 이러한 소문과 다른 추측들로 미국인들은 한마디로 미치고 팔짝 뛰고 있었다.     

딘 애치슨은 크납슈타인 독일대사에게 가장 끔찍한 말을 했다. 독일은 프랑스 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독일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독·프 조약에 서명한 것은 그에게 전후 기간 가운데 가장 암울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독일 연방의회가 그 조약을 거부하기를 희망했다.     

다우링 대사는 2월 4일 특별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케네디의 거의 감출 수 없는 경고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미국 여론의 분위기로는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할 수도 있었다. 이는 모스크바와 서유럽이 별도의 협상을 하려는 것에 관한 경고와 더불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하도록 하고 유럽 공동체가 자유주의 무역 정책을 취하라는 권유를 담고 있었다.     

특히 맥밀런은 싸늘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쿠브 드 뮈르비에가 최종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기 전날 저녁인 1월 28일 그의 일기에는 마치 그가 새로운 됭케르크 철수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독일군에 몰린 영국군이 됭케르크에 모여 실시한 굴욕적인 대철수 작전 사태를 본 듯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유럽 대륙에 관한 프랑스 패권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모든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이 망가졌다. 우리의 방어 계획은 공중 전력을 통한 억제에서 해상 억제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유럽연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의 프랑스 패권은 새롭고 놀라운 현실이다. 우리 정부의 인기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용기와 결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었다.”     

이후 맥밀런은 둘 다 현직에 있는 동안에 아데나워와 단 한 줄의 서신도 교환하지 않았다. 아데나워 수상의 사임 일주일 전인 1963년 10월 9일에 맥밀런은 질병에 시달렸고 거의 좌초된 상황에서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그제야 아데나워는 맥밀런 총리에게 그의 위대한 업적을 치하하는 적절히 예절을 갖춘 서한을 보내는 것이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데나워가 1967년 봄 사망했을 때 맥밀런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에 가야 한다는 어떤 내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1963년 2월 초의 아데나워는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영국의 음모를 경계하였다. 2월 4일 드 마제리 프랑스 대사가 그를 찾아와 특이한 경고를 했다. 브뤼셀의 영국 수석 협상 대표인 에드워드 히스가 며칠 전 EFTA의 여러 대표에게 프랑스·독일 조약을 비준하는 법이 나오면 영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 정부가 본에서 14일 이내에 정부 위기를 촉발 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아데나워는 드 마제리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5월까지 비준은 다소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는 사임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절대적 진리‘라고 하였다. 드 마제리는 아데나워 수상이 자기 정치적 운명을 프랑스·독일 조약과 연결하게 했음을 드골에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전한 경고는 아데나워를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그는 사실 2월 9일 연방의회 전체 회의에서 자신에 관한 불신임안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었다고 말했다. 그즈음 사방에서 아데나워에 대한 비판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사 쥐도티는 그의 정부가 어느 모로 소외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룬스와 스파크가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놀랄 일이 아니었. 엘리제 조약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모스크바에서도 나왔다.     

고립에 대한 공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데나워의 명성은 서독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 데에 큰 기반을 두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잘못된 길로 나라를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20세기 전반기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약하고 불안정한 국가들과의 동맹 - 1914년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3제국 시가의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동맹! 그러나 그 대가로 최강의 세력들과 많은 작은 국가들의 혐오감만 부추겼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또는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민당(CDU)과 자민당(FDP), 그리고 사민당(SPD)의 외교 전문가들은 프랑스·독일 조약을 거부하는 것은 여러 이유로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조약이 비준될 때 이에 관한 해석이 담긴 결의안이나 서독의 외교 정책 전체의 맥락에서 조약의 의미를 문자로 표현하는 전문을 붙이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토론에 제기하는 사람은 이것이 조약 상대방을 속이는 다소 비열한 방법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문을 추가하여 조약을 일방적으로 수정하는 방법은 국제법적으로 드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전문의 내용이 조약 상대방의 잘 알려진 의도와 정반대되는 것이라면 실제로 상당히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국과의 동반자 관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에 관한 약속, 자유 무역 정책 – 전문에 담길 미국, 모네, 브뤼셀 또는 본에서 나온 그러한 부분들은 드골에 관한 직접적인 도발이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만이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슈뢰더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비준될 법에 연계된 전문의 제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해석적 결의안을 채택하는 대안은 프랑스에 미치는 영향에서 비슷하게 불합리한 것으로 조약의 비판자들에게는 여전히 너무 약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전문을 원했다. 그러나 2월에 드러난 바와 같이 이러한 비판을 하는 이들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문제에 대해서도 여당 안의 다수가 아데나워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가 바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그리고 원내대표인 폰 브렌타노는 독일과 프랑스의 융합이라는 양자 간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과거의 연방제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었다. 곧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국가, 가능하다면 영국과 그밖의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과 함께하는 연방제 말이다! 기본적으로 슈뢰더는 또한 엘리제 조약이 잘못된 길로 이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이에 동의해야 했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4주간의 겨울 휴가를 떠나며 모든 모순적 상황에서 도피했다.     

사실 에르하르트가 반드골주의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는 피할 수는 없지만 많은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 엘리제 조약에 관한 논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데나워의 후계자 문제와 결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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