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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권력투쟁 III

아데니워 전기 II

몰락  

   

처음에 아데나워는 슈뢰더 외무장관이 함께했기에 내각과 의회 그룹의 폭풍에서 어느 정도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쿠브 드 뮈르비에와 같이 조약에 서명했지만, 장기적으로 적대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영국과 미국의 반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2월 초 에르하르트는 《쉬드도이체 차이퉁》의 한스 울리히 켐프스키와 깜짝 놀랄만 한 인터뷰를 했다. 이때부터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의 프랑스, 영국, 미국 정책을 심하게 비난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켐프스키와의 인터뷰는 에르하르트가 공개적으로 했던 많은 비판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이제 에르하르트는 또한 독일 연방의회에서 공개적으로 수상과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에르하르트는 2월 5일 여당 원내회의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사렸다. 아데나워에 대한 공격은 주로 쿠르트 비렌바흐가 주도했다.     

그러다가 수상의 생각으로 그런 공격이 좀 지나치다 싶으면 아데나워는 장관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서한을 보내 에르하르트를 훈계하였다. 이번에 그는 경제부 장관이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에 관한 의견을 외무부와 협의하지 않은 채로 발표했다는 그럴듯한 비난과 더불어 그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슈뢰더와 에르하르트가 서로 비난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조약을 위한 싸움에서 아데나워는 이제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점점 더 의존하면서, 필요한 경우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보다는 그를 수상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관계자가 아데나워를 그저 명목상의 수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에르하르트의 회신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데나워의 공격을 냉정하고 상냥하게 거부하고 동시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음 날 개최되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본능을 가진 아데나워는 확실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에르하르트가 이런 식으로 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장관들의 심리에 관해 오래 쌓아온 지식을 동원하여 에르하르트가 스스로 항복하고 내각을 떠날 때까지 괴롭힐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것이 그가 《프랑크푸르트터 알게마니에 차이퉁》과의 서신 교환을 물고 늘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그러나 이리하여 손상되는 것은 에르하르트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데나워의 이미지였다. 아데나워는 뮈러-아르마크 차관의 사임을 강요하는 것조차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유럽경제공동체(EEC) 문제로 에르하르트에게 사의를 표명했었다. 경제부 장관은 단순히 이 사표를 수상에게 전달하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뮐러-아르마크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데나워 정부의 차관으로 남아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제 그의 권력은 약해졌다!     

이러한 견해차는 여당과 여당 원내대표가 계속 조정하였다. 원내대표는 이 시기에 치열한 당내 분쟁이 있는 가운데 내각에 이어 점점 더 의사 결정 과정의 둘째 중심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 거의 불가피했다. 여당이 정치 과정과 수상의 문제로 심하게 붕괴하면 정부는 마비되고 권력은 당의 운영회의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심각한 불일치가 이제부터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만연해지기에 본의 정계와 언론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점점 더 여당, 특히 원내대표가 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가 수상 승계 문제에 관한 빠른 해결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민당(CDU)은 베를린 지방선거에서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기민당(CDU)은 크게 당하고,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SPD)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라인란트-팔츠와 니더작센 주에서는 3월 말과 5월 중순에 지방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당의 저변은 불안해하고 있었고, 이러한 불안은 본의 여당에도 전달되었다. 엘리사베트 노엘레-노이만과 같은 여론조사 연구원은 이전에 자신이 투표한 정당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보다 유권자를 더 실망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 점점 더 많은 의원은 이러한 갈등의 주범이 에르하르트가 아니라 아데나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1953년 총선 승리 이후 여당의 통합에 영향을 미쳤지만, 이제는 바로 그것이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수상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물러나지 않는 한 에르하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 이제 이 사실은 모든 평의원에게도 분명해졌다. 어쩔 수 없이 프랑스·독일 조약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에 관한 격렬한 논쟁에서 이번에는 아데나워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수상 후계 문제에 관한 논쟁이 새롭게 발생했다.     

이는 3월 4일 여당 당 대표단 회의에서 매우 분명해졌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가 다툰 자세한 내용이 담긴 서한이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먼저 게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아데나워 수상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문제를 다시 토론 주제로 삼고자 하였다. 간단한 회의록의 단문들에서 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브뤼셀에서 에르하르트가 한 조치는 틀렸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지녀야 합니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무시하고 드골을 잘 대하여야 합니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하다 보면 일을 진척시킬 수 없습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 내각을 멀리하는 에르하르트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직접 연결시켰다. 또한 에르하르트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공격도 연결시켰다. 아데나워는 적어도 10월이나 11월에 사임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배석한 당 대표단 의원들은 두 사람이 절망적으로 갈라지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게르스텐마이어와 슈톨텐베르크는 모두 양심에 호소하고, 폰 브렌타노 자신은 이제 매우 날카로워졌고 이른바 ‘에르하르트 사단’의 슈무커는 근심 어린 말투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앞으로 7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불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데나워가 이러한 불쾌한 회의가 끝날 무렵 에르하르트와 편하게 악수하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데나워 사람인 하인리히 크로네는 나름대로 이 비극이 곧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일기에 이 회의를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이 회의는 점점 더 콘클라베*를 위한 준비위원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과 에르하르트 사이의 또 다시 충돌이 있었다. 어르신은 에르하르트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회의를 결렬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이 명쾌하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원내대표는 이 갈등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폰 브렌타노도 수상에게 강경하게 맞섰다. 결국은 서로 좋게 마무리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을 알아차렸다고 생각된다. 당이 그에게 그것을 느끼게 했다. 에르하르트는 가치, 곧 ‘수상의 가치’를 되찾았다.”     

* 콘클라베 [Conclave, 역자주 – 원래 가톨릭 교회의 교황선출 비밀 회의를 의미]     

이튿날 여당 원내 회의에서 대부분 공개적인 갈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설득력 있는 말솜씨 덕분에 에르하르트는 통제할 수 없는 어르신에 의해 삶이 고달파진 차분하고 착실히 일하는 장관이 자기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라는 그의 호소는 무시될 수 없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다소 둔해 보이며 바로 요점을 다루고자 하지 않으면서 회의실 안에 팽배한 불만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서 폰 브렌타노는 현재 원대대표단 회의에서 이미 준비한 결정적인 제안을 하였다. 그는 아무런 반대가 없는 가운데 지명 제안을 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여당, 당대표, 기사당(CSU) 당대표와의 대화를 통하여 ‘많은 책임자’가 지지하는 여당에 제출할 제안을 위한 전제 조건이 수립되어야 했다. 의견 통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강한 의지를 13년 동안 아무 소리 않고 따랐던 충성스러운 폰 브렌타노가 이제는 실제로 사형 집행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후계 자리를 노리는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폰 브렌타노는 킹메이커였다.     

이제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가 3월 14일에 개최되었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가 발언권이 있는 ‘소위원회 선거’ 제안을 더 이상 관철할 수가 없었다. 폰 브렌타노는 당장 아데나워의 제안에 반대하고 실무담당 당대표인 두프후에스를 대화 상대로 삼을 것을 권했다. 그는 분명히 당 대표단의 주요 인사들의 사전 동의를 얻은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의 제안은 무효가 되었다. 이리하여 더 큰 회의체를 통해 진행 과정을 흔들고 멈추고자 했던 그의 희망이 사라졌다. 당 대표자로 두프후에스만 지명한 것도 잠정적인 결정이었다. 두프후에스도 에르하르트를 피할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아직 회의에서 이를 표명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물론 아데나워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1962년 12월 정부가 수립 된 이래 어떻게 해서든지 에르하르트를 막으려고 여러 후계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게 한 그의 노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는 갑자기 브렌타노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 1월과 2월에 슈뢰더가 점점 더 여론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자 아데나워는 이제 그를 에르하르트의 대항마로 지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가 화가 난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로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이틀 만에 휴가를 중단해야만 했다. 사민당(SPD)과 철강 산업계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파이프 금수 조치를 관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에 엘리제 조약에 대해 분노한 미국 측을 진정시켰다고 여겼다. 모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하여 그가 본에 잠깐 머무는 동안 크로네 특임장관을 국방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슈뢰더와 폰 하셀과의 균형추 구실을 해야 했다.     

카데나비아로 다시 돌아온 수상은 언론인과 다른 방문객과의 뒷이야기를 통하여 에르하르트를 깎아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3월 29일 여론조사원과 기민당(CDU) 의원 에리히 페터 노이만이 그를 방문하여 최근 설문 조사 결과를 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에르하르트에게 매우 호의적인 내용이었다. 얼마 안 되어 본에서는 아데나워가 이 결과를 보고 차갑게 한 말이 회자되었다. “내가 끝장을 내고 말겠네!”     

그러나 인기 높은 에르하르트에 대한 이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아데나워 수상이 평화로운 중재안에 협력할 기미가 전혀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은 이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수상이 없는 동안 에르하르트뿐만 아니라 두프후에스와 폰 브렌타노의 지지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아데나워는 나중에 스스로 탄식하며 말했다. “나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면 매우 외롭고 경험을 별로 못하게 된다. 에르하르트 사단이 나를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데나워는 후계 다툼을 하는 이들이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도록 강 대 강의 전략을 쓰고자 하는 환상을 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크로네를 자기 후계자가 되라고 선동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크로네는 여당의 분위기를 바르게 판단하여 자신이 수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폰 브렌타노가 후임자를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가 수상의 후계자가 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폰 브렌타노와 같은 신사가 그런 일을 맡으면서 갑자기 자신을 후보로 내세울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1963년 12월 폰 브렌타노가 첫 번째 암 수술을 받자 사람들은 그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후보 자리에 뛰어들지 않은 것으로 추측했다.     

그래서 1963년 3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만이 주요 후보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슈뢰더 또한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젊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아데나워가 선호하는 맞상대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면 그는 수상이 되어도 모든 에르하르트 지지자의 ‘피의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었다. 또한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차기 에르하르트 내각의 핵심 직책을 차지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였다. 게다가 오래 사귄 내각 동료인 에르하르트와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이 에르하르트에게 이롭게 전개되었다.     

요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여론조사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알렌스바흐의 자료에 따르면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지지율은 2월 말 46%에서 4월 중순 42%로 줄어들었다. 아데나워의 정책에 관한 그 유명한 지지율은 1월 말 47%에서 4월 초 35%로 떨어졌다. 1952년 12월에 마무리되었던 초기의 위기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아데나워에 관한 평가가 이 정도로 부정적인 경우는 없었다.     

3월 31일 라인란트-팔츠 주 지방선거 결과는 기민당(CDU)이 실제로 유권자들 사이에서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선거 후 자민당(FDP)의 지원으로 정부를 간신히 유지할 수는 있지만 5월 19일 니더작센에서 치러질 선거가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민당(SPD)은 1959년부터 그곳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일당(DP)과 전독블록(GB)/추방민당(BHE)의 와해로 바닥에서 기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궁극적으로 니더작센의 농촌 출신 기민당(CDU) 의원들 사이에서도 슈뢰더를 떠나 에르하르트를 지지하는 추세의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누구나 에르하르트를 선거에서의 간판 스타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것은 기사당(CSU)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만이 이렇게 계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에르하르트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과도기 수상으로 있은 다음에 또 다른 조합의 길이 열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 내부적으로 슈트라우쓰는 ‘《슈피겔》 사건’ 이후 그 무렵에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랑켄 지방 출신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기사당(CSU) 안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중산층 개신교 소속 기민당(CDU) 선거구에도 마찬가지였다. 북부 독일에서 많은 인기가 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대하여 남부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라인 지역의 기민당(CDU)에서조차도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와의 싸움에서 더 이상 무조건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노동부 장관 테오 블랭크는 여전히 수상을 위해 워털루 전쟁에서 구식 군대 척탄병이 나폴레옹을 위해 한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전장에 나서고는 있었다. 그러나 여당과 당에서 새로운 무게 중심이 되기 시작한 라이너 바르첼도 이제 에르하르트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마찬가지 생각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었다. 게르스텐마이어 또한 에르하르트가 수상이 되는 것에 찬성했다.     

코머호수에 비가 내리는 봄에 아데나워는 집에 있는 당 동료들이 그물을 점점 더 조여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낙담과 전투의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4월 1일 아들 폴에게 “내가 사랑하는 당이 어쩔 수 없는 화를 돋우고 있다.”라고 썼다. “어제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손실을 보았다. 어느 정도 합리적인 사람은 지난 14년 동안 이룩한 성취를 가리키며 내게 감사를 표하지만, 많은 지도자는 나를 깎아내리는 것 말고 더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참 씁쓸하다. 부활절이 끝난 다음 당대표 회의에서 반격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알다시피 여기에 왔을 때 매우 짜증이 나 있었는데 아직도 그렇다. 이번 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특사가 서한을 전달하러 내일 올 것이다. 목요일에는 독일·프랑스 조약 때문에 연정 대표단을 보게 된다. 그 조약에 대해 독일 국민은 무릎을 꿇고 감사해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4월 4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주요 외교 전문 위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아데나워를 찾아온 것은 프랑스·독일 조약의 운명을 담판 짓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마침내 짐을 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는 여당의 외교 연구회 의장인 에른스트 마요니카를 곁으로 불러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조약 비준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마요니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상께서 전문 삽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매우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가볍게 대답했다. “왜 아닙니까? 조약이 없는 것보다는 전문이 있는 조약이 더 나은 법이지요.” 몇 시간 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 있던 모든 참석자는 아데나워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놀랐다. 비록 드골이 얼마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아데나워와 여당의 방문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쨌든 훌륭했다. 관련 장관들과 의원들은 마치 회사 야유회를 나온 기분이었다. 아데나워는 점심으로 훌륭한 와인을 제공하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서로에게 호의를 느끼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 있게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수상 후계자 문제에 대한 공격을 능숙하게 피해갔다. 그 또한 과시적인 낙관주의를 자신에게 심고 있었다. 회의 며칠 후 그는 아들 파울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네 아버지의 경험 덕분에 이곳에서의 연정 논의가 완벽한 조화 속에 진행되었다. 멘데는 처음으로 진정한 연정 정신을 느꼈다고 말했다. 독일·프랑스 조약에 관한 논의는 4월 25일 연방의회에서 열리는 첫 독회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채택될 예정인 전문은 아쉽지는 않지만, 우리 언론이 이미 모든 것을 다 밝힌 다음이니 찬성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조약의 체결이 내 오랜 재임기에서 이룩한 가장 큰 성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1962년 초 심장마비가 있은 다음 그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변했는지는 이 편지에 나온 간단한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 “어제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나는 B 선생의 허락을 받아 아주 부드러운 길을 걸었다. 몸이 좋아진 것 같다.”     

그러나 다음날 아데나워의 좋았던 기분은 수상 후계자 문제에 관해 크로네와 라스너와 추가 논의를 하면서 다시 완전히 망가졌다. 그의 딸 리아에게 보내는 부활절 인사는 더 이상 우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매일 비가 내린다. 일주일 동안 여기에 있었던 리베트는 오늘 나에게 여기에 머무는 동안 딱 반나절만 해를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10월과 11월 사이에 이 일을 등지게 되겠다고 생각하거라. 더 나은 표현을 찾을 수 없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크로네와 라스너는 휴가를 보내고 있던 아데나워에게 수상 후계 문제로 여당이 완전히 난장판이 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크로네는 여당과 당에서 다수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원내 총무인 라스너는 이제 슈뢰더를 지지해 줄 것을 간청했다. 에르하르트를 원하지 않는다면 슈뢰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슈뢰더를 분명히 지지한다면 그가 여당 안에서도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한 것다.     

사실 폰 브렌타노는 분명히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력히 고수하고 크로네도 후보가 되지 않으려 하기에 아데나워는 슈뢰더를 밀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글롭케는 지난 며칠 동안의 회담 이후 수상이 슈뢰더를 밀면서 에르하르트가 수상 후보 자격을 잃을 때까지 승계 문제에 관한 결정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고 4월 12일에 보고했다. 로마에 머물던 폰 브렌타노는 같은 날 그곳에서 크로네와 자기의 전술을 논의하고서 두프후에스처럼 여전히 에르하르트로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부활절에 그는 카데나비아에 있는 아데나워를 찾아가서 에르하르트만이 여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도 에르하르트가 부적합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 가면 에르하르트는 70%를 얻고, 슈뢰더는 30%만 득표할 것이 뻔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이 몇 주 전부터 공개 시장에서 자기 후계자를 논의해 오는 과정에서 있을 수 없고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스타일에 대해 다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에르하르트를 거부했다. 기민당(CDU)은 결코 경제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에르하르트는 프랑스의 많은 사람에게 투우사가 흔드는 붉은 천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여전히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농업 파벌이 자유무역 옹호론자인 에르하르트를 반대하는 입장은 견지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브렌타노는 이제 아데나워의 입에서 슈뢰더에 관한 좋은 말이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확실히 슈뢰더는 아직 53세에 불과한 아직 아주 어린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자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1962년 가을에 마지막으로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이후 그는 많이 컸다. 그리고 국내외적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앞으로 몇 달 동안에도 그 명성은 높아질 것으로 보였다. 프란츠 마이어스와 쿤스트 주교도 슈뢰더를 지지했다.     

아무래도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와 가진 부활절 회담에서 심각한 전술적 실수를 범한 것으로 보였다. 폰 브렌타노는 이제 아데나워가 모든 것을 지연시키고 싶어 하며 더 나아가 슈뢰더를 통하여 에르하르트를 내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4월 19일 아데나워 수상은 활기차게 본으로 돌아왔다. 그다음 날인 토요일에 샤움부르크궁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다우링 대사가 작별을 고했다. 그는 이제 아데나워 주변에 대고 아데나워가 직접적인 조치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슈뢰더와 크로네를 포함한 고위정치가 집단은 아데나워에게 새로운 수상이 10월이나 11월 이전에는 선출될 수 없다고 알렸다. 그전에 여당이 수상을 지명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도 했다. 아데나워는 글롭케와 크로네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은 슈뢰더가 후보가 되는 것을 밀겠다는 의사를 강조했다. 슈뢰더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기독교 정치인이었다.     

두프후에스와 폰 브렌타노와의 대화는 4월 23일 월요일 오전에 진행되었다.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에게 오후에 원내대표단 회의를 주재하고 4월 24일에 여당 전체회의를 개최하되 최종적인 결정은 내리지 말 것을 명시적으로 요청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의 말 몇 가지를 기록했지만 분명한 약속이 담긴 명확한 답변은 피했다. 4시간에 걸친 원내대표단 회의가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족히 4시간이 걸린 이 회의는 아데나워가 일종의 수상 몰아내기로 여기게 되는 결과로 끝났다. 회의의 의제가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는 개회사에서 오늘 아데나워의 후임자에 관한 원내대표단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원하며 여기에서 나온 제안은 내일 여당전체회의에서 논의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여론의 혼란이 너무도 커져서, 또다시 결정이 연기된다면 피해가 너무 커지기에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두프후에스가 그의 주장에 동의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그의 반대자들이 행동하기로 결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중요한 결정을 이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내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폰 브렌타노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연막작전을 펴면서 폰 브렌타노, 크로네, 슈뢰더, 에르하르트 이상 4명이 추천을 받아야 할지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에르하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무대에서 물러났다. 폰 브렌타노는 자신이 후임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안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당에 대고 선언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런 그가 자기 자신을 후보로 내세울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나처럼 의젓한 하인리히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후보로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후보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해 아데나워가 단 한 번도 의심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와 폰 브렌타노를 반대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이를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다. 네 명의 잠재 후보자 중 벌써 아데나워 측의 두 명이 그 어떤 식으로든 합의하지 않았던 지명을 정중하게 거부한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또한 그사이에 자기의 당선 기회를 계산해보고 여당의 지명과 추후 연방의회에서 수상 선출 사이의 기간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후보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절차는 무책임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절차에 참여할 수 없다.” 절차에 관하여 그는 아데나워와 생각이 같았다. 곧 아데나워는 즉시 결정을 내리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일을 대비하여 비상구를 열어두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에르하르트와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수상으로 선출될 것은 사실상 당연지사였기 때문이었다. 자기 형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아데나워의 권유에 따라 아데나워에게 수상 후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원칙적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비록 원내대표단의 모든 중진이 토론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말이다. 에르하르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릴 때 그 변화에 대하여 적어도 내각에서 논의하고자 한 아데나워의 바람은 무시되었다. 오히려 반대로 훼헬은 그에게 대세를 따라 이제 원내대표단 앞에서 원내대표단 회의의 논의에 따라 자신도 에르하르트를 찬성한다는 뜻을 표명할 것을 요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데나워는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을 정도로 평판이 나쁘다고 말하고 그와 헤어졌다. 다만 그는 여당에서 에르하르트가 과반수의 찬성을 받는다면 투표 결과에 승복한다고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당 대표단 회의가 열릴 때까지 8일 동안 결정을 미루자는 키슬링의 마지막 제안을 거부하였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돌아온 수상이 그날 저녁 한네리제 포핑가에게 속기로 남기도록 한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한 기록에서 아데나워는 이 결정적인 회의가 끝날 무렵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아무도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개별적인 대화까지 있었다.” 이 음울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나고 있다. “나중에 에첼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같으면 당이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예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후계자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 대결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아데나워는 이 패배가 진정한 의미의 해고로 보았다. “세번째 해고가 가장 나빴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에게 불평하였다. 1933년 3월 나치가 그를 해고한 것과, 1945년 10월 영국이 그를 해고한 것보다 더 나빴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는 마지막 남은 충복들인 테오 블랑크, 아돌프 쉬스터헨, 한스 글롭케와 다시 논의했다. 오후 3시 원내대표단 회의가 열렸다. 교묘하게 꾸민 연설에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선출한 책임이 원내대표단 다수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원내대표단은 이제 민주적으로, 곧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여당 의원들이 크게 동요하는 가운데 에르하르트를 반대하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14년 동안 함께 일했고 뛰어난 성과를 거둔 인물이 자신이 원하는 다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제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이 의견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제 귀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귀하에게 말하는 것이 내 의무, 달갑지는 않은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폰 브렌타노는 대표단이 투표할 것을 제안했다. 두프후에스가 당을 위해 이에 동의하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또한 “통합 중심으로 에르하르트 교수를 선택할 것”을 요청하였다. 슈트라우쓰도 찬성 발언을 하였다. 다만 그는 뻔뻔할 정도의 비꼬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곧 에르하르트는 늘 “‘제국의 비밀’(arcana imperii) 접근하고 싶어 했는데 이제 찾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67세의 나이의 그는 “아직도 상당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비밀 투표의 결과는 분명했다. 참석 의원 225명 중 159명이 에르하르트에게 투표했고 47명은 반대하고 19명은 기권했다. 인제야 아데나워는 화해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당 동료 에르하르트 씨, 나는 먼저 귀하가 다득표를 하였고 이 결과는 우리 당에 속한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에르하르트 씨, 나는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독일 국민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귀하에게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에르하르트 자신은 아데나워가 자신이 수상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원한에 찬 싸움을 한 것에 관한 실망을 나타냈다. 그가 에리히 멘데에게 불만을 토로한 바에 따르면 1년 전 에르하르트는 자기와 맞서는 대립 후보가 되는 것을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고무 사자’라고 불렀다. 그가 “아데나워가 사용한 방식대로 역공을 취하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신사적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데나워가 내게 취한 태도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독일 조약의 첫 번째 독회는 이틀 후에 시작되었다. 모든 구름이 깨끗이 흩어졌다. 아데나워는 또 한번 당당하게 등단했다. 그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와 세계에 만약 나치가 ... 그리고 지난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독일과 프랑스 간의 균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잘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조약이 “최고의 사건”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전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물론 그럴수록 승리한 그의 정적들은 그에 대하여 더 크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첫 독일 연방 수상은 자신이 키운 정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해고 되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다수와 자민당(FDP)이 에르하르트 아래에서 연정을 지속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아데나워는 국내 정치적으로 옆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수상은 당내에서 밀려나기에 외교 정책의 지휘권도 내놓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서방 동맹국들의 균형과 조화의 노선을 추구하고자 아데나워 수상은 이제 프랑스와의 긴밀한 동맹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미국, 영국, 에르하르트, 기민당(CDU)의 새로운 다수파, 자민당(FDP) 및 자유주의 언론 -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모두 1963년 봄 그의 추락에 이바지했고 공개적으로나 은밀히 양국동맹의 개념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는 드골이 2월 초에 경고했던 음모였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권력을 빼앗긴 아데나워가 프랑스와의 긴밀한 동맹관계를 고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실질적으로 실각한 이 시기에 보여준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관한 집착은 생애의 마지막 4년 동안 계속 드러났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계속해 나가기는 했다. “정치에 일단 맛을 들인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라고 아데나워가 한 말을 그가 대패한 다음 날 일본인 방문 단체가 들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정치는 악입니다.” 그는 이 악에 계속 빠져있었다. 수상 자리에 있든 말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개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나중에 말한 대로인 ‘팔과 다리’가 잘린 그달의 노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미국 긴장 완화 정책의 희생자입니다.”     


국내 정치의 관점에서 1963년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은 이중의 장애에 봉착했다. 먼저 수상직의 종료가 확실히 정해졌다. 아데나워가 어떤 환상에 빠지게 될까 봐 이번에는 정말로 끝났다는 사실을 적어도 여당에서 이번의 그의 패배로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반면에 그는 앞으로 누가 외교 정책을 주도할 것인지, 그리고 그 여정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영향력이 과도해지고 프랑스라는 선택지가 찬밥이 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1963년 봄에 많이 변화된 세계의 정치적 격변과 관련이 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쿠바 위기에서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핵전쟁의 심연을 직시한 그들은 긴장 완화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1963년 6월 10일 미국 대학에서 한 케네디의 평화 연설이 그러한 신호를 보냈다. 서방과 소련은 같이 사는 지구 위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양측은 실용적인 타협에 대비해야하는 것이다! 긴장 완화를 위해 치를 대가는 이 기조연설에서 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 바로 현상 유지였다.     

그런데 유럽에서 이는 또한 소련이 더 이상 서방 연합군이 통제하는 베를린 지역을 더 이상 압박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는 동독과 장벽이라는 현실을 긴장 완화의 대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했다. 군비 통제 분야에서 미국과 영국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할 자세를 다시 취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금까지 강경했던 독일의 근본 입장을 희생시켜가면서 말이다.     

7월 중순, 에버렐 해리먼이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마침내 지상에서의 핵무기 실험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 및 영국과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간의 불가침조약은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 3대 강대국 모두 처음 시도하는 핵무기 클럽의 제한과 만시지탄이지만 핵무기에 의한 대기 오염의 제한을 연결하게 하려는 독창적인 구상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마련된 합의는 모든 국가가 서명해야 했다.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겨냥하고, 프랑스를 겨냥하고, 또한 독일연방공화국도 겨냥한 것이었다.     

소련이 이 첫 번째 주요 군비통제합의를 통하여 동독을 핵무기 실험 중단 서명국에 포함시켜 세계 국가 공동체에 뒷문으로라도 들어가게 할 좋은 기회로 간주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분명히 미국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독의 서명 참여 문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사이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더욱 심각해질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가 동방과 서방의 긴장 완화 단계에서 독일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처칠의 1953년 봄 계획, 1955년 제네바 정신, 1958년 봄, 1959년 8월 캠프데이비드 정신 - 그는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것은 그가 독일의 이익으로 여기는 것을 자신처럼 의심도 하면서 거칠고 교활하게 방어할 능력이 체질적으로 없는 후계자와 함께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조차도 미국과의 최대한 긴장이 없는 관계를 목표로 다른 모든 실용적인 것은 차선책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슈뢰더는 현실주의자였다. 만약 미국이 긴장 완화 노선을 추구한다면 그대로 따라야 할 노릇이었다. 사민당(SPD)은 말할 것도 없고 자민당(FDP)도 같은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사민당(SPD)을 이끄는 에곤 바르는 이른바 ‘소폭 정치’와 ‘변화를 통한 접근’이라는 구호를 동원하여 1963년 7월 15일 투칭정치아카데미(Politische Akademie Tutzing)에서 그러한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실제로 투칭정치아카데미 설립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초대 손님은 빌리 브란트의 단순한 대변인이었던 에곤 바르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데나워 연방 수상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론이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에곤 바르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물론 당장 내일의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소련과 중국 사이의 긴장을 언급하고 러시아의 식량 부족과 다른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가 공격적인 입장을 자제할 때만 화해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매우 장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의 결론은 바르의 계획보다 정확한 것이었지만 정치적 토론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믿습니다. 다음 세대만이 이 모든 싸움의 결론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까지 “아마 수십 년 동안은 우리가 무장을 하고 군비 강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경고하였다.     

국내 정치적으로 1963년에는 자유주의 시대를 향한 권력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외교 정책 측면에서는 긴장 완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정치 상황은 1963년 아데나워의 외교 정책이 종료 직전 공황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게 된 이유를 말해 준다. 눈에 띄는 불안, 지나친 성급한 반응, 좋아 보이는 기회의 성급한 포착, 정신없어하는 징후 – 이것이 그 한 면이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의 외교 정책에서 오랫동안 특징이 되어 왔던 전술적으로 시간을 끄는 기술과 관련된 인상적인 지속성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간도 부족해서 참을성이 없고 지나치게 근심하면서 전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된 불안한 긴장 완화 정책을 미국, 영국, 소련이 동시에 추진하고 있기에 그는 동시에 반미, 반영, 반소련 정서를 품게 되었다.     

프랑스·독일 조약을 위한 투쟁 중에 그는 이미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관한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긴장 완화라는 새로운 정책이 다시 염장을 지르게 된 것이다. 물론 관련 정부들이 임기 말이 되면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미국, 영국, 소련과 불편한 마음으로 작별을 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외교 정책과 안보 정책의 내적 모순이 드러났다. 외교 정책이라는 것이 원래 모순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국가 운영 기술은 바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로 묶는 것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다 되면 더 이상 기술의 모든 규칙에 따라 게임을 수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명백한 부정성이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눈에 뜨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항상 반대편에서 제기하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늘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탁월한 기술로 그리고 때로는 의심스러운 타협을 통합하여 묶어버려 무력화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멀리 내다보고 합의를 이끄는 자기 계획을 제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연방정부의 외교 정책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인물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거의 어쩔 수 없이 반대 조치, 비판, 이미 수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노골적인 편향성을 드러냈다. 많은 사람은 이것이 노인의 고집불통과 모든 나이 든 남자들이 공통으로 드믈지 않게 보여주는 심술부리는 태도로 여겼다. 이러한 것이 분명히 작용했다. 그러나 1963년의 상황은 그러한 문제가 되는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아데나워의 동유럽에 관한 입장, 반응, 공격에서 일관성을 찾아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이 갑자기 이어지다가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 확실히 국내외적으로 세상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의 나침반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인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1962/63년 겨울 아데나워의 동유럽정책과 동독 정책이 후기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직 아무도 베를린에 관한 흐루쇼프의 오랜 공세가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많은 탐색과 협상을 위한 계획은 아직 남아있었다. 지금도 독일문제와 관련해서는 계속해서 어쩌면 손실이 더 커질 장기적인 소모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는 당분간은 이길 수 없는 싸움으로 보였다. 아니면 아주 먼 미래에나 끝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수년 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는 일시적인 공존 방식을 기반으로 타협하려는 의지와 독일 정책의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렸다. 여기에서 흐루쇼프가 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가 아데나워의 독일 정책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는지의 문제가 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종종 여러모로 우려를 자아내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에 관한 평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 곧 영국과 미국의 독일 정책에 대해 회의가 깊어질수록 그는 독일과 소련이 직접 대화할 가능성을 더 집요하게 검토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소련 위성국들에서 서독이 좀 더 활발한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1963년 초 발터 할슈타인과 한스 폰 데어 그뢰벤이 1월 5일 그에게 유럽경제공동체(EEC)명의로 생일 축하 인사를 전달하러 왔을 때 그가 한 몇 마디 말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갑자기 유럽 연합이 “언젠가는 동유럽을 포함하도록 확장해야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유럽은 “다시 전체의 실제적인 유럽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드골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 또한 아데나워가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늘 그에 초점을 맞추는 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1963년 3월 초 외무부의 주도로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바르샤바 주재 독일 무역사무소의 설립에 관한 협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동방 정책의 유연성을 보이는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에 대하여 모스크바의 반응이 아직 없었다. 프랑스·독일 조약에 관한 소련의 격렬한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미국의 간섭으로 이루어진 파이프 금수조치에 관한 분쟁은 독일·소련 화해 정책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1963년 봄 흐루쇼프는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독일 연방 수상 후임자에 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몇 주 전에 스미르노프 대사가 4월 2일 만찬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독일의 한스 크롤을 초대했다. 크롤은 5월 15일 정년퇴직할 때까지 외무부 본부에서 계속 일할 것이며 연방 수상과 계속 연락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스미르노프는 독일과 소련의 열악한 관계에 대하여 불평하면서 독일과 소련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었다. 이는 크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주요 단어들이었다. 아데나워는 새로운 변화에 관한 정보를 보고받고 1962년 초여름에 독일이 제기했던 평화조약에 관한 소련의 응답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한 크롤을 치하하였다.      

이어서 스미르노프는 아데나워를 직접 찾아와 의사를 전달하였다. 스미르노프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그의 케네디의 방문을 앞두고 흐루쇼프가 먼저 본을 방문하여 아데나워와 독일문제를 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케네디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소련 측의 탐문에 관한 소식을 접했고, 드골은 7월 초 이에 관한 정보를 받았다. 두 국가 정상에게 아데나워는 최대한 기밀을 유지할 것을 요청하면서 흐루쇼프가 크롤이 개인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해 주라고 요청했으며 자신이 이를 승인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그러면 크롤이 흐루쇼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이 두 사람에게 10년 기한의 평화협정에 관한 막연한 구상에 대해서도 알렸다.


케네디와 드골은 모두 신중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독일과 소련의 직접적인 대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자 조심은 했지만, 그 대화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비쳤다. 크롤이 ‘개인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자제해야 했다. 아데나워의 임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서 그의 손이 이제 묶이게 된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진지한 뜻을 가졌다고 해도 아데나워 정부와 효과 있는 협상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데나워가 내부적으로 단호한 반대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예외적으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슈뢰더와 크로네가 동일한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다. 폰 브렌타노 또한 이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화를 냈다.”     

적어도 케네디는 아데나워와의 대화에서 그가 동독의 존재를 일단 받아들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케네디는 아데나워가 지상 핵실험 중지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의 완료에 대하여 요란한 반응을 보인 것에 더욱 놀랐을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위선적인 반응이 아니라 실제로 아데나워 자신이 더 이상 독일 정책의 내적 모순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인가?     

그래서 7월 말과 8월 상반기 서독 언론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기삿거리가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1년 8월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관한 비판적인 어조가 빠르게 퍼졌다. 독일문제에서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강경론자들은 핵실험동 결 조약의 서명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반대로 현재 사민당(SPD)이 다시 관철한 유화 노선을 지지하는 이들은 신속한 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불안의 근본적 원인은 아데나워 자신이었다.     

몰래 평화협정 계획을 알렸던 바로 그 수상이 인제 와서 핵실험 중단 협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최전선에서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 기회에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외무부를 싸잡아 비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무부가 괘씸하게도 흐루쇼프의 방문 계획에 대해 아데나워에게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미국 특사이자 훗날 본 주재 미국대사가 된 마틴 힐랜브랜트가 케네디의 서한과 자세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날부터 아데나워는 엄청난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7월 말 휴가철과 8월 첫 2주 동안 총 6차례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아데나워는 독일 주재 미국 외교관 외에도 미국 국무부 차관인 윌리엄 타일러와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와 두 차례, 그리고 국무장관 러스크와도 회담을 가졌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내는 열정적인 편지와 연방 공보실이 일으킨 언론의 소동이 그의 타오르는 분노를 잘 말해주었다.     

늘 그렇듯이 그는 이제 자신에게 오는 정보가 너무 늦고 불완전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불평했다. 그는 맥나마라에게 모든 것이 ‘받아먹든지 아니면 죽든지’라는 식으로 서독 측에 전달되었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는 외무부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였다. 너무 안이했든지 아니면 앵글로·색슨의 유약한 흐름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외교와 안보 정책의 다양한 주요 목표가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조합을 이루며 문제시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핵실험 중지 협약에서 반드골주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식했다. 게다가 그는 드골에게 프랑스 핵무장군 창설을 서두를 것을 권유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소련만큼 많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프랑스가 조속히 핵무기를 완성하기를 바랐고,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면 감사하겠다는 말도 했다. 이제 핵무기 소유국인 미국, 소련, 영국은 분명히 핵실험 중지 협약을 통해 프랑스에 압력을 가하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핵실험 동결 협약과 관련하여 케네디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미 그는 케네디 자신이 언급했던 함축적 의미를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나는 가입 조항의 표현이 프랑스에 중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서독이 그 조약에 서명하면 필요한 경우 서독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선택지에서 매우 제한받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힐렌브란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데나워 수상으로부터 미국의 핵우산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다는 비판적인 장광설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드골의 발언을 계속 인용하였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아데나워는 분명히 드골 장군을 핵전략에 관한 위대한 권위자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드골의 추종자가 조만간 드골주의적 안보 정책에서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문제였다. 동독의 국제법적 지위는 조약을 통해 ‘완전히 바뀌었다’! 7월 30일 모스크바 협상 상황에 대해 아데나워에게 보고한 타일러 차관은 그가 그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수상은 7월 31일 국무회의에서 조만간 동독의 지도자인 울브리히트와 한 테이블에 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독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의 심리적 영향은 엄청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동독 내부에서 체제에 저항하는 독일인의 의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베를린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그는 또한 동독이 인정되면 서독에서도 저항 의지가 약해질 것으로 보았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유럽 역사에 관한 긴 교훈을 주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군이 언젠가 엘베강 강가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제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동유럽 지역이 오랫동안 소련의 통치 아래에 놓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는 서유럽 전체의 미래가 매우 어두울 것으로 보았다. 제3제국에 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데나워는 미국 국방장관에게 전체주의 독재가 무엇인지를 간곡하게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사람을 뒤틀어 바꾸는 방법, 삶을 궁핍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방법. 그런 것을 독일에서 오래 용납해야 한다는 말인가?!     

처음에 아데나워는 단순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계약을 체결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요청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는 7월 31일 내각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진짜 위험은 동독이 서명하면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재평가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미 서구 열강은 가입을 원하는 국가의 서명이 기존의 세 서명국 가운데 하나에 위탁된 경우에도 유효하다는 데에 동의했기에 동독의 가입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적어도 워싱턴과 런던만이라도 동독의 가입 선언을 거부하고 소련 점령 지역 국가들의 가입이 국제법적 지위 인정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미국과 영국이 공식적으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두 서방 강국은 최소한 세 차례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독일연방공화국이 단독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권리가 있음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과 영국을 이러한 노선으로 사실상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8월 10일에 직접 관련 보증서를 전달했다. 눈에 띄게 안도한 아데나워는 샤움부르크궁에서 만찬을 위해 지하실에서 최고의 술을 가져오게 했다. 이제 곧 그 술들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소유로 넘어갈 것이었다. “내 직무가 충돌로 마무리되었다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아무리 충돌을 좋아해도 말입니다.” 그는 이제 다시 기분이 변해서 만찬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에 대하여 충돌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측근들은 수상이 케네디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그가 정말로 사임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8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수상직을 맡으면서 스스로를 연합국 수상으로 여긴 내가 연합국에 맞서는 수상으로 사임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크로네도 다음날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직무를 그만두고 사무실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케네디 정부가 상원에서 그가 바라는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겼을 때 그런 말을 쉽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철저한 친미주의자인 수상의 14년 임기가 워싱턴과의 격렬한 분쟁으로 조기에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가 이미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애우 큰 우려를 하면서도 핵실험 중단 협약을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간의 불가침조약은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내각에서 동독 정권이 국제법에 따라 지위가 상승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러한 불가침조약이 독일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가 과거에 알자스·로렌에 관해서 했던 것처럼 서독도 통일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내가 14년 동안 싸워왔던 것을 그런 일 가지고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미국과의 마지막 주요 분쟁에서 둘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미국의 긴장 완화를 주장하는 정치인이지만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내각에서의 논쟁은 앞으로 몇 해 동안 지속될 양극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도발적이지 않고 실용적인 노선을 간청하며 미국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여기에서 에리히 멘데와 발터 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내각에서는 아데나워 지지가가 분명히 더 많았다. 하인리히 크로네와 전독문제부의 라이너 바르체가 그 가운데 최전선에 있었다! ‘틀 안에 가두기 구상’은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브루노 헤크와 기사당(CSU) 소속 장관 돌링거, 슈튀켈른, 니더알트도 수상의 우려에 공감을 표했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안에서 아데나워에 관한 지지도 확실했다. 폰 브렌타노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이 점에서 의견이 같았다. 따라서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과 독일을 단독으로 대표하는 것에 관한 그의 강한 주장에 대하여 자기 당에서 다시 한번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동독을 그저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아데나워가 자신이 사실 동의하는 노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에 그가 동독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한 글롭케의 수정 계획에 대하여 비밀 대담을 갖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실 추후에 국민투표가 필요하기는 하여도 결국은 동독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 아니었던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른바 소련과의 평화협정 계획이 단순히 미끼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답할 수 있다. 흐루쇼프, 케네디, 드골은 각각 매우 애매한 구상만을 전달받았다. 다만 크롤은 소련 측의 대화상대에게 다양한 경로로 매우 자세히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러나 외무부가 이 대사의 말을 너무나 자주 부인하여 흐루쇼프조차 크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무엇이 진지한 협상이 가능한 것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아무것도 확정 짓지 않고도 베를린 위기를 견뎌내더니 이제는 긴장 완화 정책의 초기 단계도 극복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협정이나 계약의 형태로 국제법에 따라 공식화된 규정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데나워가 강력한 부인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현실’ 인정을 계속 주저했다는 증거로 여기게 했다. 실제로 경고를 받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도 맞거래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양독 간의 여행 자유가 회복되고 동독 지역에서 [소련의] 독일인에 관한 압력이 눈에 띄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완화된다면 많은 것을 양보할 수 있는 것이다. 1958/59년 겨울 이후 그의 이러한 생각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61년 8월 13일 이후에는 베를린 장벽의 철거가 그 목표에 추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얼마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 그리고 상대방은 또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야 할지 - 이는 전혀 명확하지 않으며 결코 모든 것을 걸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가 말한 것 대부분에서 주로 일정 기간의 평화조약을 수립하는 계획이 그의 생각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동유럽 지역의 독일인들의 공산주의에 관한 저항 의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에서 핵실험 중지 협약은 처음에 독일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꺼이 양보하려던 순진한 앵글로·색슨의 전형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었다. 맥나마라의 연설에 대해 그가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은 모든 것을 너무 싸게 팔아요!”     

여전히 그는 진정한 긴장 완화 이후 소련이 더 이상 동독에 있는 “1,700~1,900만 명의 독일인과 함께하는” 것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매달렸다. 동독을 점령하는 데에는 결국 돈도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 저당물을 어찌할 것인가?! 아마도 10년 후에는 소련이 그러한 저당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이 순간에 서로가 훨씬 가까워진 것인가? 바로 이 시기에 아데나워는 소련으로부터의 가시적인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지를 염탐할 가능성을 갑자기 발견했다고 믿었다. 이와 관련된 신호로 아데나워는 1963년 8월 초에 드디어 흐루쇼프가 본에 올 준비가 되었다는 오겠다는 뜻을 밝힌 사실을 매우 은밀하게 맥나마라에게 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흐루쇼프가 현재 처한 곤경을 이용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서 최대한 짜내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어떤 곤경을 말하는 것인가? 1963년 7월 초 케네디가 본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가 이미 그에게 일련의 요점을 이야기해주었다. 여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어려움, 지난 추수 시기의 시원찮은 작황, 숙련된 노동자의 심각한 부족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케네디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흐루쇼프와 그의 측근은 현재 “소련이 동시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곧 “서방에 맞선 군비 확충, 중화인민공화국에 대비한 군비 확충, 전반적인 경제 개발”을 동시에 추진할 수가 없었다. 몇 주 전에 아데나워는 이미 미국 CIA 국장 맥콘에게 동부 시베리아의 경제적 개발의 큰 어려움을 지적했다.      

그러나 중국 요인에 관한 희망은 이달 들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데나워는 맥콘에게 흐루쇼프가 마침내 중공과 대결하기로 하더라도 이는 유럽에 특히 위험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소련은 최악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서방에 매우 비타협적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야 그들은 합의에 도달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또한 흐루쇼프가 유럽에서 큰 양보를 얻어내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 케네디에게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흐루쇼프를 너무 빨리 풀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핵실험 동결 협정과 관련하여 영국과 미국의 접근 방식에 관한 실망을 밝혔다.     

소비에트 연방이 엄청난 자원을 동원하여 동시베리아에 새로운 산업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에서 바로 고착된 생각이 형성되었다. 사이러스 슐츠버거가 1963년 7월 말에 아데나워를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소련이 이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에 관한 모든 세부적인 내용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다음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긴장, 그리고 중국 – 인도 – 파키스탄 - 소련으로 이어지는 힘의 장도 설명했다! 그는 슐츠버거에게 냉전의 해빙 무드에 관하여 그가 최근에 쓴 글을 인용하였다. “보십시오.” 그것은 “떠도는 빙산입니다.”     

그러나 8월부터 소련이 캐나다와 호주에서 밀을 대규모로 구입해야 한다는 정보도 수집되었다. 심지어 미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해야 한다는 정보까지도 있었다. 아데나워가 수상직에서 완전히 떠나기 전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카데나비아에서 많은 사람의 방문으로 또 한 번 바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언론사 사장인 악셀 스프링거와 자기 신문사의 모스크바 특파원인 베버가 그를 방문하여 동유럽과의 무역 분야에 관한 보이콧 조치에 관한 희망을 더욱 품게 했다. 본 브렌타노, 레르하르트 슈뢰더, 호르스트 오스터헬트, 하인리히 크로네 – 그는 이들 모두에게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 곧 모스크바가 이제 신청인의 위치에 놓여 있개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민당(CDU)의 고위 정치가들 가운데 누구도 이 대화에서 이 어르신의 새로운 변덕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보이콧을 실제로 어떻게 실행한단 말인가? 그리고 독일문제를 어떻게 이것과 실행가능한 방식으로 결부시킬 것인가?     

분명히 아데나워 수상은 평화로운 협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서방의 밀 생산국들이 먼저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한 전사인 아데나워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어 소련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기회를 감지한 것이다. 1963년 9월 30일에 뉴욕 주지사인 넬슨 록펠러를 만났을 때 그는 록펠러의 동의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지금은 소련을 위한 무상 지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대규모 화학단지 조성에 말이다. 아데나워의 노선은 확실했다. 물이 목까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록펠러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곧 자유세계가 긴장 완화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수상으로서 맥클로이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서방의 어느 누구도 소련의 밀 구매와 관련하여 베를린 장벽이나 ‘죽음의 띠’*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다.     

* ‘죽음의 띠’(Todesstreifen, 역자주 –  동서독 국경사이의 10m 넓이의 통제지역, 이 지역을 넘어 서독으로 넘어오던 동독 주민들 가운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지어진 명칭)     

이제 10월 중순이 되자 그는 9월 23일 케네디에게 긴급하게 쓴 편지가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들은 이들은 모두 한 노인의 몽상으로 여겼다. 문자 그대로 마지막 순간에 그가 힘 정치의 신기루가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고 믿는 노인의 꿈 말이다. 하인리히 크로네가 핵실험 금지 협약에 관한 논란의 절정에서 언급한 것이 독일에 유리한 전환에 관한 그 어떤 희망에 비해 아데나워의 동방 정책의 후기의 현실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스크바는 지레의 더 긴 손잡이를 잡고 있습니다. 세계는 평화를 원합니다. ... 우리는 미국의 긴장 완화 정책의 희생자입니다.”  

   

요란한 작별    


아데나워는 늘 지휘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제 사임을 승자의 퇴장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함께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수상실의 유일무이한 인물과 작별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사람들은 그와 마침내 헤어지게 되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영예를 누리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아데나워는 여전히 남 앞에 찬란하게 나서는 것에서 오는 단순한 기쁨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서독을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고, 거기에 더해 해외로 몇 차례 여행하며 1963년 4월 22일과 23일 가을의 추락 이후 그를 사로잡은 막연함과 패배 의식을 잠시나마 잊었다.     

이제 그는 다시 정상적인 상태에 올랐다. 위엄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여전히 약간은 자기비하적이면서도, 존경을 요구하고 또한 존경받는 가부장이었다.     

독일 정부 수장을 위해 이번처럼 일주일에 걸쳐 작별 파티를 하는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갑자기 작별했다. 그러고 나서야 독일의 몇몇 도시나 기업이 그를 그 시대의 방식으로 횃불 행렬이나 환영 행사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 당시 독일제국 주 정부 차원의 작별 인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제대로 된 정부의 수장도 없었고 지도자가 떠날 때 전국적인 차원에서 올바로 경의를 표할 기회도 없었다.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떠나는 마당에 이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최근 독일 역사에서 이는 정말로 독특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의 모든 수상은 정신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오직 연방 대통령에 대해서만 충분한 예우를 갖춘 퇴임식을 거행하는 관행을 수립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그에게 경의를 표한 횟수와 범위에 견줄만한 경우가 없었다. 윈스턴 처칠은 1945년 7월 갑자기 실각한 이후 마지못해 코모호수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물러나 갔다. 그가 81세였던 1955년에 두 번째로 실각했을 때는 환송식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었다. 여왕을 위한 멋진 만찬과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에서 정치 지도자들을 위한 만찬이 다였다. 아데나워는 현재 87세이며 처칠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고 물속의 물고기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커다란 계획을 완수하고 있었다. 맥밀런은 병원에서 그의 임기를 마쳤다. 그의 후임자 로드 홈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 같은 날 총리로 취임했다. 드골도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고 물러났다. 1946년 1월 처음 사임했을 때 그는 자존심에서 모든 격식을 거부하였다. 이는 국민투표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온 후 1969년 4월 28일에 그가 취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위엄 있게 물러나고 그의 후계자의 정치에 관한 소식은 저녁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1960년 11월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한 아이젠하워도 큰 퇴임식을 치를 분위기가 아니었다. 미국은 이른바 ‘유럽 십자군 전쟁’, 곧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요, 8년차 대통령인 그가 게티즈버그에 있는 그의 소목장에서 비교적 차갑게 은퇴하도록 했다.     

이렇게 아데나워의 작별 행사는 정말 독특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적 혼란을 겪는 대통령이 아니라 늘 논란이 되고 그 자신도 다투기를 좋아했던 정부 수반을 떠나보는 것이었다.     

작별의 윤무(輪舞)는 해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사실 아데나워가 7월 초에 국빈 방문을 한 케네디와 함께 행사에 나타난 것에서 이미 작별 분위기가 있었다. 케네디는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훌륭한 노인들을 대할 때 보여주는 정중한 예절로 아데나워 수상을 대했다. 그러나 케네디의 독일 방문 그림자에 드골의 중요한 등장이 가려졌을 때 아데나워는 화가 났다.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바로 미국을 중시하는 이른바 대서양주의의 가시적인 승리였다. 게다가 케네디는 또한 아데나워조차도 그의 그림자로 가려버렸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젊은 대통령 곁에 서자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케네디가 브란트와 아데나워를 옆에 두고 베를린 장벽 앞에 설치한 연단에 오르자, 아데나워 수상은 두 미래의 대표들 옆에 서 있는 먼 과거 늙은이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제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때가 아닌지 몇 주 동안 고민해 왔다. 이번에 또 간다면 이 어르신의 열둘째 미국 방문이 될 것이었다. 핵실험 금지 협약을 둘러싼 충돌 이후 아데나워 수상은 가지 않기로 하였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하는 것은 분명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누구와 작별 인사를 했는지 만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나라가 어떤 것이지도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는 맥밀런과 더 이상 관계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영국의 노동당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리처드 닉슨이 1963년 7월 말에 들은 바에 따르면 헤럴드 윌슨이 수상이 된다면 영국이 중립국이 될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그의 방문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그가 굳이 네덜란드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요제프 룬스 외무장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은퇴한 아데나워를 방문한 딘 애치슨에게 그는 이렇게 씁쓸하게 말했다. “룬스는 유럽 정치 연합을 망쳤다.”     

폴-앙리 스파크와의 우정도 끝났다. 그러나 적어도 벨기에는 작별 윤무에 참석하기는 했다. 독일 국내의 커다란 축제 분위기 가운데에서 기민당(CDU) 소속 주지사인 테오 르페브르가 그를 찾아와서 높은 훈장을 수여했다.     

잠깐이기는 하지만 장 모네도 요령 있게 이때 다시 등장했다. 그는 아데나워가 권력과 작별하여 ‘내면의 상처’를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간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이기에 오스터발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이 말이 아데나워의 귀에 들어갈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아데나워는 드골보다 더 위대하고 트루먼과 덜레스보다 더 위대한 우리 시대의 국가 지도자입니다.” 또한 그러한 이유는 아데나워가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곧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영향과 중요성에 대해 늘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아데나워가 실제로 작별 인사 차원에서 방문한 국가들의 목록을 보면 작은 유럽으로 회귀를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이탈리아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그를 로마로 초대한 1951년 6월은 불과 12년 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정부가 그의 국빈 방문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가 보기에 이탈리아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었다. 또한 그는 카데나비아를 발견하고 소박한 이탈리아인의 아늑한 세련됨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 이래 이탈리아에 대하여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이탈리아는 그의 우려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수상직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강력한 이탈리아 공산당이 위협적이라고 느꼈다. 서유럽 민주주의에 관한 내부 위협에 주목하게 될 때마다 그는 프랑스와 더불어 이탈리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1963년 4월 이탈리아 공산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준 것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이탈리아 기민당(CDU)은 우파와 좌파의 투쟁으로 갈라졌다. 정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왼손 연정’(apertura a sinistra)이 발표되었다.     

아데나워는 전적으로 이탈리아 기민당(CDU) 보수파와 뜻을 같이하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만나고 기민당(CDU)의 우익 진영을 이끄는 안토니오 세니 이탈리아 대통령의 시각을 주로 하여 이탈리아 정치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탈리아 정치가 좌경화한 데 주요 원인을 제공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교황 요한 23세라고 생각했다. 1963년 봄 이 교황은 흐루쇼프의 사위인 알렉세이 아주베이를 만남으로써 다시 한번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데나워는 1963년 6월 초에 사망한 교황을 전혀 애도하지 않았다. 몇 주 후에 아데나워가 맥나마라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교황이 공산주의에 대해 안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고인이 된 교황을 유럽의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미국 국방장관에게 그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교황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교황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이야기도 하였다.     

따라서 4일간의 로마 방문은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신임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황청 국무원장과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시로코*는 건강에 매우 위협적인 것이기에 그는 온 힘을 다해 겨우 교황 알현을 마쳤다. 그런데 그는 자기 경고가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다. 귀국 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그는 새 교황이 다시 공산주의를 좀 더 강력하게 차단하는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낙관적인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주의의 보수 세력의 공산주의에 관한 저항 의지를 강화해주고자 하였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서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선도자로 여기고 있다.     

* 시로코 [siroco, 역자주 - 초여름마다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넘어 이탈리아로 부는 열풍. 아데나워의 약한 기관지에 해가 될 수밖에 없었음]     

이어서 그는 같은 마음으로 드골을 찾아갔다. 그도 소련에 관한 서구 무역 보이콧 구상에 동의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드골의 말은 서방 정부들에게 이제는 그다지 먹혀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미 지난 7월 아데나워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공격성이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소련과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하며, 이미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조치가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제 퇴을 앞둔 아데나워 수상의 마지막 방문에서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싶다고 선언했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드골은 아데나워의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으로서의 이번 마지막 공식 방문을 특별히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파리 근교의 빌라쿠블레 군공항에서 손님을 직접 영접하고, 장군의 시트로엥 전용차로 랑부이에의 사냥성으로 함께 이동했다. 기자들은 따라오지 않았고 양측의 수행원 약간만 따라왔다. 아데나워는 그의 장녀 리아 라이너스와 호르스트 오스터발트가 그리고 이러한 여행과 카데나비아로 휴가를 갈 때는 늘 안네리제 포핑가도 함께했다. 드골 곁에는 그의 부인과 몇 명의 직원만이 함께했다.     

이 마지막 공식 만남의 자리에는 약간 우울한 늦여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 정부에서는 프랑스·독일 조약이 일단 정체되리라는 것을 드골은 이미 그를 괴롭혔던 [조약] 전문에 관한 분란 이후로 분명히 알게 되었다. 1963년 7월 초 본을 방문하기 전에도 그는 빅토리 위고 작품의 구절을 빗대어 말했다. “계약은 어린 소녀와 장미와 같다. 프랑스·독일 조약이 활기에 넘치지 않는다고 해도 이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 오. 내가 몇 명의 어린 소녀들이 죽는 것을 보았는지요.” 장미 정원을 가꾸는 아데나워도 만찬 연설에 이 말을 포함시켜 보려고는 했다. “장미와 어린 소녀들 ... 물론 그들의 때가 있다. 그러나 장미는 –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정말로 잘 압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강인한 식물입니다. 여기저기에 가시가 있다. 그렇다. 신사숙녀 여러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그런데 장미는 늘 겨울을 이겨냅니다.” 이미 말을 토해냈으니 이제 드골에게 용서의 답을 할 기회를 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양국 연합은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라는 것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랑부이에에서의 이 작별은 또한 꿈에 관한 작별이기도 하였다. 드골은 꿈에서 깨어난 인식을 최대한 부드럽게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왕이었던 프랑소아 1세의 사냥성에서 회담을 마치고 그가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는 매우 다정한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에 관한 언급은 조심스럽게 회피했다. 결국 퇴임하는 수상의 마지막 해외 방문이 드골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그런 다음 독일에서 작별 행사가 시작되었다. 때로는 아데나워 자신이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을 초대했고, 때로는 륍케와 게르스텐마이어와 같은 고위 인사가 성대한 만찬과 연회를 개최하였다. 기본적으로 해마다 생일 때 개최한 행진으로 알려진 의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의 3주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일부 주의 행정수도도 방문하였다. 함부르크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함부르크에서 아데나워가 국제원예전시회에서 끝까지 자기 편이 되어주었던 독일농민협회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데나워의 정치 행로는 사실 함부르크 지역 자문위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1953년 승리한 전당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사민당(SPD)이 장악한 시의회도 인색하게 굴지 않고 시청에서 축하 밥을 제공했지만, 너무 과한 것을 피하려고 독일 농민의 날을 맞아 조찬회로 거행하였다.     

또 다른 여행은 이틀 동안 이어진 베를린 방문이었다. 이는 모든 격식을 갖춘 작별 연회이었다. 아데나워는 명예 시민권을 받으며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베를린이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무엇보다도 본의 수상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으니 그렇다. 비록 그런데도 그의 정적들은 그를 계속 베를린의 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시내 행진을 할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환호하였다. 그리고 한 수 아래인 경쟁자 브란트는 새로운 명예시민을 위한 치사를 늘어놓았다. 베를린 지역 기민당(CDU) 사람들은 수상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크로네는 몇 가지 비판적인 말로 그 과정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베를린의 새로운 명예시민에 관한 찬사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어르신은 몇 마디 말로 그것을 개의치 않아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브란트는 아데나워가 자신을 늘 잘 대해주지 않았음에도 은근히 그 어르신을 존경하였다. 《회고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교활한 매력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바이에른에서도 작별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서는 주 정부만이 아니라 기사당(CSU)도 예의를 갖추어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가 예의를 다하여 그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이들은 그 실각한 국방장관과 사임을 강요받은 수상이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볼 정도였다.     

‘뼛속까지 문민주의자’인 아데나워가 그 많은 작별 프로그램이 있어 바쁜 가운데에서도 굳이 독일군 행사를 위해 기어이 반나절을 할애하고자 하였다. 하노버 근처에 공군 기지가 있는 분스토르프에서 진행된 야전 행진은 분명히 그의 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열린 것이었다. 탱크와 기동대가 그의 앞을 지나갔고 150개의 제트전투기가 군사 훈련 지역 위를 포효하며 날아갔고 새로운 어네스트존 미사일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독일군의 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또한 그가 전술 핵무기 발사 체계, 곧 핵미사일의 배치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킨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정확히 31분 동안 행진이 진행되고 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쾰른박람회장에서 열린 기민당(CDU)의 대규모 작별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의 선택도 우연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쾰른박람회장 건설을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게슈타포가 1944년 8월 그를 투옥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거의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몇 주 동안의 깊은 굴욕을 겪은 지 19년이 지났다. 그는 1945년 8월 쾰른 기민당(CDU)에 입당하여 1946년 3월 24일 대학교에서 영국 점령 지역의 기민당(CDU) 대표로서 첫 기조연설을 했었다.     

하이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 나오는 노래로 개막과 폐막 음악이 울리는 사이에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공격적인 연설을 통해 밀을 가지고 소련과 사업을 벌이는 것이 ‘부적절한 시기의 도움’이라고 비판하며 ‘진장 완화의 담론’에 대해 경고하고 자기 추종자들에게 프랑스와의 우정과 유럽의 건설을 독려하였다.      

이 모든 여행, 식사, 연회에서 아데나워는 언론의 격식 있는 관심을 받았다. 계속해서 인터뷰하며, 신문과 텔레비전이 그의 은퇴 이후에도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가 언론인, 출판인, 기타 대중매체 관계자들만을 위한 대규모 만찬 연회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에서도 그의 탁월한 지휘력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독일 연방의회에서 열리는 작별 행사 하루 전인 10월 1일 주독 교황대사는 본의 대성당에서 독일 민족과 조국, 특히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교황 장엄미사에 아데나워를 초대한 것이다. 14년 전 본에서의 활동도 바로 본 대성당에 있는 교황청 사무소에서 시작하였다. 그사이 이미 많은 언론인과 출판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아데나워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수상직을 마감할 무렵,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이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자기 업무를 수행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상기시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아데나워 수상은 연방 대통령이 본의 베토벤홀에서 3천 명의 손님을 초대한 만찬 연회에 가기 전에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을 기렸다. 그는 뤼케 장관과 슈튀켈른 장관에게 ‘연방공로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특히 그와 함께 공직을 떠나는 글롭케 차관과 식사하고 자리를 떴다.     

병들고 정적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글롭케는 그의 모든 힘을 다해 아데나워의 수상직이 끝날 때까지 함께 달려왔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한스 글롭케 없이는 14년을 버틸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3년 8월 8일 글롭케의 65번째 생일에 직접 손으로 쓴 글에서와 같이 그는 종종 이에 대하여 그에게 말하고 글을 썼다. 그는 글롭케 가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귀하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이제 물러나는 아데나워 수상이 이 엄청난 작별 행사를 얼마나 차분하고 힘차며 빈틈없이 수행해나가는지 놀라며 바라보았다. 그는 이것이 정치에 관한 진짜 작별 인사가 아닐 것임을 스스로 감지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1964년에 가서야 기민당(CDU) 당대표 자리를 내놓을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많은 작별 행사를 통해 그의 명성이 특히 언론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높은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미 고별사에서 그는 그가 앞으로는 ‘많은 족쇄에서 자유로워 질 것임’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를 하였다. 에르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내년 봄에 마침내 수상의 교체를 이루게 된 것에 대하여 서로 축하하였다. 9월과 10월에 아데나워는 최상의 상태를 과시하며 자신을 광야로 내쫓은 모든 이들이 부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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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물러나는 수상은 10월 15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열린 송별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똑바로 서서 얼굴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30분 이상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의 찬사를 들었다. 그 찬사의 어조는 이 행사에 적절하였다. 게르스텐마이어는 또한 헤르만 에를러와 테오도르 폰 호이쓰를 위해서도 사용했던 고전적인 찬사를 물러나는 수상에게도 하는 것이 격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콘라드 아데나워는 조국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무력화시키는 데 참여한 주역 가운데 중 한 사람이 인제 와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칭송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은밀한 조롱처럼 들리게 마련이다. “독일 연방 수상 각하께서 100년 후에 ... 격동의 독일 역사에서 유일하게 긴 임기 동안에 패한 적이 없고 평화의 시기에도 상당한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무패와 평화 시기라니! 1876년 아데나워 수상이 태어난 시대의 비스마르크에 관한 언급도 애매모호했다. “귀하와는 달리 평화롭지 않게 직위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작별도 화려해 보였습니다.” 사실 이는 사임 이후 불평이 많았던 제국 수상과는 달리 작센발트에서 조용히 쉬고 있으라는 훈계가 아니던가?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당대표로 남아있으면서 본의 정치 현장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게르스텐마이어 또한 사임을 강요받은 수상의 미치는 정치적 피해의 가능성이 비스마르크보다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고별사에서 그러한 암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보다 통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재미있는 내용을 삽입하여 불쾌한 장면에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는 꾸밈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재건, 발전, 서방과의 유대와 같은 14년 동안에 있었던 주요 사안들을 다시 한번 논했다. “우리 독일 국민은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자유 국가의 무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위대한 업적을 독일 국민이 이룩한 것임을 기억하지만 여기에 더해 헌정질서와 정상의 지도자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인간은 국가의 형태와 “그러한 국가 형태 내적으로는 일종의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통일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다만 이는 장기적인 목표가 되어야 했다. “그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시대 비평가인 아데나워조차도 부담에 대해 말할 때 그의 회의적인 생각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부담은 “현대적인 발전이 인간에게 준 것입니다.” 그는 사회정책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관하여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준 당 동료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일해 준 사람들에 관한 감사 인사도 최대한 일반적인 수준에서 말하고 그것도 필요할 때만 말했다. 그의 경쟁자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에르하르트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사민당(SPD)에 대해서는 그저 해가 없는 조롱만 했다. 그는 사민당(SPD)이 14년 동안 그곳에 있었으며 “의회에서 야당의 의무를 다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거명하기에 합당한 사람, 곧 사민당(SPD)의 카츠를 언급했다. 그는 입법위원회에서 건설적 불신 투표 조항을 헌법에 넣을 것을 특히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것은 “우리 헌법의 가장 가치 있는 업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필요한 경우의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당연히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우리 독일 국민”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든 정당의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동안 의원석으로 갔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것을 품위 있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터 헨켈 스가 베토벤홀에서 열린 연방 대통령의 연회에서 그에게 말을 걸자 아데나워는 요즘 자기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것은 아닐세.”     

결국 그는 더 좋은 시절에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소속 의원들에게 요구했던 여당의 기율을 지켰다. 이튿날 연방 수상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기 옆에 앉아 있던 원내총무인 빌 라스너에게 ‘찬성’이라는 문구가 적힌 투표용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는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정치적 태양계에서 중심에 있는 태양을 대표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새로 선출된 에르하르트 수상을 위한 연방 대통령의 첫 번째 연회에서, 그는 낙마한 본의 거물에게 늘 새롭게 되풀이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찬란히 빛나는 그의 후계자 주변에 모여든 것이다. 반대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그랬다. 많은 사람이 그를 무시하거나 무심하게 대했다. 본의 모든 언론인은 기민당(CDU) 의원과 언론인이 그저 무시한 전임 수상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신사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그의 전임자가 샤움부르크궁에서 일을 천천히 마무리하도록 하며 자신은 경제부 사무실에 잠시 남아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 선출 직후, 크로네와 글롭케는 아데나워가 14년 동안 일한 아름다운 집무실로 전 수상을 다시 방문하였다. 크로네가 아데나워에게 자신이 에르하르트 내각에 계속 머물면서 국방위원회에서 연방 수상의 상임 대표로 계속 일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자 아데나워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이제 당신 자신만의 생각의 포로가 되었군요.”     

그다음으로 존 멕클로이가 나타났다. 아데나워가 수상 직무를 시작할 때 그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제 수상직이 마무리되는 자리에서 그는 다시 아데나워 비평가들의 무리에 섰다. 두 사람은 드골에 대해 큰 토론을 벌였지만 합의할 수가 없었다. 부적절한 통보에 관한 상호 불만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핵실험 중지 협약을, 그리고 맥클로이는 프랑스·독일 조약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물론 각자 부적절한 통보에 대한 불만의 제기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며 서로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소련에 밀을 제공하는 대가로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조건으로 협상할 기회를 놓친 것을 비판하자 맥클로이는 혼란스러워졌다. 아데나워는 드골이 이제 탕자처럼 대우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독일 통일에 대하여 가장 저항했던 인물이 드골 아니었던가?! 결국 프랑스는 베를린 문제나 독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 지는 가장 먼저 미국의 의견을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수상 임기가 분명히 종료된 것만이 아니라, 아데나워가 워싱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도 갔다. 이제 미국인에 관한 그의 신뢰는 크게 흔들렸고, 맥클로이는 아데나워라는 독일의 드골주의자를 만난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요즘 들어온 여러 국가수반과 정부의 수장들이 보낸 약 75통의 편지 가운데, 10월 14일 자의 드골의 사실 짧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담긴 메시지가 있었다. “존경하는 수상 각하, 귀하는 제가 이 순간 귀하와 함께하면서 느끼는 경탄, 신뢰, 우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늘 당신 곁에서 충실한 드골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맥클로이와의 불쾌한 작별 대화 이후 아데나워는 그즈음 피할 수 없는 똑같이 불쾌한 상황에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취임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수상실의 직원들과도 작별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환, 문지기, 정원사, 독일 연방 국경수비대의 부대원, 운전사, 요리사, 관리인, 근로자들이었다. 그다음 이틀 동안 그는 여전히 샤움부르크궁에서 감사 편지와 전문에 서명하고 사진에도 서명하고 작별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다.     

10월 17일 저녁에 그의 마지막 공무 수행 가운데 하나로 안보 담당관인 귄터 바흐만 부국장을 불러 겔렌 부장이 맡고 있는 연방정보부의 고삐를 더 단단히 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그는 연방참사회 건물에 마련된 새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는 그 사무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제 일할 119호 사무실은 본에서의 직무 수행 초창기에 그와 내각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연방의회 회기 도중 그가 쉬거나 대담을 나누기 위해 사용하던 것이었다. 전실은 매우 작고 실제로 아데나워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는 격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은 다소 넓고 햇빛이 넘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으며 라인강의 아름다운 전망이 내려다보였다. 물론 샤움부르크궁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는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4년 더 일하게 되었다.     

새 사무실로 그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본 초기 시절의 거물이었던 딘 애치슨이었다. 이렇게 그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애치슨과의 대화 후, 당무가 이어졌다. 먼저 실무담당 당대표인 두프후에스가 그를 찾았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기민당(CDU) 당대표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사임에 즈음하여 내려진 수많은 평가에 대하여 검토할 여유가 생겼다. 전체적으로 모든 사람은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의견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룩하거나 놓친 것에 관한 의견에서 14년 동안 이어진 긴 논쟁이 다시 부각되었다. 그러나 결국 전체적으로는 1950년대 초반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의 오랜 적이며 그에 관하여 가끔 적대적인 글이나, 존경을 담은 글을 쓰는 아우크슈타인조차도 이번에는 딘 애치슨에서 폴 빌헬름 벵거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권위 있는 그 시대의 인물들에 관한 특집 기사들을 《슈피겔》에 연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이에 매우 감동했다.     

가장 좋은 평가는 종종 그에게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이것이 아데나워가 함부르크의 출판인인 게르트 부체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느끼는 것이었다. 부체리우스의 글들은 아데나워의 근심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이 사람 때문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수상이 되었고 보수적인 가톨릭 세계관이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체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어떤 독일인의 본질도 그만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그 어떤 정치가보다 세계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더 나아가 사랑한다 – 물론 미워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종종 한 때 그를 가장 미워했었다. 그가 강력한 몸짓과 거친 언어로 그들을 침묵시켰을 때 많은 사람은 분노했다. 이 위대한 인물이 사적인 차원에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르스텐마이어가 수상과 그의 집안에 대하여 14년 동안의 아데나워 시대를 위엄 있고 당차게 결산하면서 – 정중한 자세로 이제는 평의원이 된 아데나워를 그의 새로운 자리로 안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감정이 새삼 벅차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의 마음도 이 노인이 이제 – 아주 늦게 – 아주 오래 차지하고 있던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아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많은 근심은 이제 사라졌다. 아데나워는 역사의 판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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