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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3. 2023

은퇴가 없는 상황

아데나워 전기 II

프롱드당원*   

  

* 프롱드당원 [Frondeur, 역자주 – 원래 17세기 중반 프랑스 절대 왕권에 맞서 싸운 세력을 지칭하는 말. 흔히 반정부 인사를 지칭.]     

작별 행사가 너무나 훌륭하고 연설과 주요 기사가 너무 아름다워 아데나워가 정치계를 완전히 떠나기가 사실 쉬울 것으로 보였다. 이는 지난 몇 주 동안 그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했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기민당(CDU)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1963년 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아데나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후 그는 슈마허-헬몬트 기자에게 “손가락을 들고 신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알다시피, 여당은 한마디로 나를 쫓아냈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주 언급한 인생훈을 말했다. “정치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회고록과 관련된 구술 내용에서 그는 이를 더욱 날카롭게 표현하였다. “나는 내 여당의 어리석음에 희생되었다.”     

바로 이래서 그 성대한 작별 행사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1963년 4월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은 가려지고, 물러나는 수상은 이제 조용히 살았으면 하였다. 그가 이러한 메시지를 이해할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 그가 만족할만한 새로운 임무를 찾지 못했는가? 사임 이후 몇 주 동안 그는 기꺼이 회고록을 쓰고 싶다는 말도 했다. 결국 관련된 출판사들처럼 그는 홍보하는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수상이 바뀌는 날 DPA 통신사는 회고록 출판권을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출판협회(DVA)와 파리의 하셰트출판사에 맡겼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보도는 서두른 감이 있었다. 하셰트출판사와의 계약은 1963년 11월에야 최종 완료되었다. 그리고 독일출판협회(DVA)와의 최종 계약은 1964년 6년 2월에 가서야 체결되었다. 그러나 출판업계 밖에서 누가 이에 신경을 쓰겠는가? 출판인과 정치인은 적절한 시기에 냄새를 피우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다. 이제 일반 대중은 아데나워가 은퇴한 모든 중요 정치 지도자들이 거의 의무적으로 하는 일에 열심히 몰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데나워는 뢴도르프 체닉스벡 8a가에 있는 자기 집 옆에 유리로 된 파빌리온을 짓도록 하였다고 적잖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데나워는 마침내 이 건물의 건설 계획을 다룰 여유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사임하기 직전 카데나비아에서 그의 사위인 헤리베르트 물트하웁트에게 줄 대략적인 스케치를 완성하였다. 그것을 보면 그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이네만이 선물한 차를 마시는 파빌리온은 집 위에 있는 자리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는 아데나워가 나중에 회고록을 쓸 유리로 된 파빌리온이 대신 들어설 것이었다. 건축을 하다보면 늘 어려움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1964년 초봄에 모든 것이 마침내 완성되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오랜 법조  기자인 발터 헹켈스는 마리아 라흐의 아이펠산맥이 내다 보이는 ‘요정의 신전’에 관한 서정적인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어르신이 코머호수를 얼마나 편하게 여기는지는 잘 알려진 일이다. 여든여덟 살이 되신 분은 남부에 좀 더 오래 머무는 즐거움에 빠져 마침내 정치를 그의 후계자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당대표직과 관련하여 아데나워의 임기가 1964년 봄에 만료된다는 점을 추가로 강조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런 경우 관례대로 그는 명예 당대표직을 맡을 수 있다. 이는 그가 구속력이 없는 조언만 하는 것으로 기능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963년 가을과 겨울에 아데나워가 정말로 직무에 지쳤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말을 하였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자기 당대표 후계자로 가장 밀고 싶었던 하인리히 크로네 차관은 그에게 여러 차례 그 직책을 맏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런 한편으로 사임한 지 두 달이 지난 다음 그는 개인적인 서한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내 주요 활동은 지금 내가 속한 당을 위한 일과 회고록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가 당무를 최대한 빨리 놓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기민당(CDU) 당대표직 때문에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1964년 1월에 이미 그가 이 직책을 포기할 수 없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만약 그가 당대표직을 유지한다면 그 이유는 당분간 여러 인사정책적인 문제점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가 고삐를 놓지 않아야 한다고 권유하는 것으로 보였다. 연방 대통령 선거는 1964년 초여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선거 결과는 또한 1965년 초가을의 총선 이후 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현명하게도 그의 후계자에게 당분간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장기적인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신임 수상의 프랑스 정책 노선, 특히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정책 노선은 확실히 그의 생각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정책 방향을 반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면, 그가 앞으로 2년 동안 기민당(CDU) 당대표직을 지키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많은 대중이 이 직위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 과장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기민당(CDU) 당대표는 그 직책이 연방 수상이나 원내대표의 권한을 겸하지 않는 한 아무런 힘도 없는 슬픈 모습을 한 기사와 비슷하다.     

당대표에게는 실제로 어떤 정치적 권한이 있는가? 지난 몇 년 동안 아데나워는 당대표는 기민당(CDU) 소속 지방 군주들, 곧 주지사에 맞서 확고한 뜻을 관철하는 데에 연방 수상이나 마찬가지로 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는 또한 1961년 가을 하인리히 크로네가 떠난 이후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을 때도 비슷한 우울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수상직과 당대표직을 겸직한 덕분에 1961년과 1963년 사이에 그의 정치생명이 2년 더 연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무척 힘들었다.     

기민당(CDU) 조직 안에서도 당대표는 단 한 번도 크게 당을 이끌 기회가 없었다. 두프후에스를 직무전담 당대표로 임명하여 그가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당 의장단 회의에서 당대표는 연방 수상,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원내대표, 주지사, 영향력 있는 연방 장관들과 같은 강력한 공직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와 같은 인물이 당대표를 하는 경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연방 수상에게서도 포괄적인 정보를 요청하고 얻을 권리가 있었다. 그는 다른 당들과 협상을 해야 할 때에는 즉각 기민당(CDU) 대표단을 이끌 수 있었다. - 예를 들어 여기에는 연방 대통령 선거 또는 연정 협상이 있었다. 그는 또한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폭넓은 여론과 자기 당의 의견 형성에 발언이나 인터뷰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대표가 연방 수상, 실세 장관, 또는 여당 다수의 견해와 다른 생각을 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벌어졌다.     

아데나워는 평생 충돌을 피하지 않아 왔다. 그는 이 빛나는 원칙을 고수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덕분에 그는 대부분의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상직에 있을 때 엄격하게 지켜온 당의 규율의 근본원칙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유권자가 실망하게 하고, 당의 일꾼들의 사기 떨어뜨리며, 정적들을 기쁘게 하는 데에 당 지도부 내의 불협화음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당대표가 수상이나 외무 장관에 맞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고자 할 때 공개적인 충돌 외에 다른 수단이 있겠는가?     

이 딜레마를 만족하게 해결할 방안이 없었다. 정치적으로 연방 수상은 항상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표는 불화를 일으키거나, 규율로 평화를 유지하거나, 거의 효과가 없는 내부적인 설득을 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당대표는 당연히 뒤로 물러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정부에 맞서도록 재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당내에서 자신을 위하여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추종 세력이 있을 때야 성공이 보장되는 일이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아데나워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때로는 하나씩 그리고 때로는 동시에 시도해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부 논의에서 자기 생각을 관철해 보고자 하였다. 연방 수상인 에르하르트와 대화를 나누고, 누구보다도 하인리히 크로네가 관찰한 바대로 에르하르트 아래에서 총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루드거 베스트릭 차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도움만이 될 뿐이었다. 프랑스 정책과 미국 정책에서의 견해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의견 대립을 절충할 수있을 것으로 여겨진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는 아데나워의 사임 이후 일을 매듭짓기에는 너무 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파고가 높을 때 기민당(CDU)의 당대표인 아데나워는 두프후에스, 크로네, 게르스텐마이어와 원내대표 집단에 홀로 맞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에르하르트나 슈뢰더 또는 폰 하셀은 이 가장 신뢰할만한 당 대표단 회의를 무시했다. 아데나워가 이에 대해 불평하고 더 집중적인 외교 정책 방향을 요구하면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다음이나 그다음 회의에 참석하지만 서로의 입장은 대부분 화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에르하르트가 1966년 봄에 기민당(CDU) 당대표직을 맡은 이후에는 더구나 이상 아데나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1966년 여름 독일의 프랑스 정책이 무너졌을 때, 전 연방 수상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공격하고 에르하르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당 대표단 회의에 몇 번 더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신중한 회의록 작성자인 콘라드 크라스케는 프랑스 정책의 중요성과 독일연방공화국에 미치는 영향이 “서로 다르게 판단되고 있다.”는 정도의 발언으로만 그러한 논의의 특징을 정리하였다.     

에르하르트는 더 이상 당지도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슈뢰더 또한 그랬다. 그리고 새로운 연방 수상이 너무 바쁘면 그가 결국 당대표직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는 특정 지지자를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자기 뜻을 밀어붙이고자 하였다. 1963년과 1965년 사이 내각에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어느 한도 안에서는 그와 협력하려는 장관 집단이 분명히 있었다. 하인리히 크로네, 폴 루케, 테오 블랑크, 브루노 헥이 그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아데나워가 물러난 이후에도 아데나워를 계속 찾아가 내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최신 정보를 전달하고 연방정부 또는 당내에서 특정한 제안에 관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장관들이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이 말하게 된 대로 이른바 아데나워 계파의 장관들은 너무 치고 나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위에서 언급된 장관들과의 협력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내부의 운용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이 계파는 모두 가톨릭 정치인이었다. 이리하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필연적으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교파적 차이를 다시 강화한 것이다. 사실 그는 당 창립 이래 종교적 대립의 극복을 주요 과제로 여겨왔음에도 말이다. 실무당당 당대표인 두프후에스도 당의 가톨릭 계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두프후에스는 지금은 일단 에르하르트가 권력을 잡고 나서 다시 아데나워와 강한 결속을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크로네와 륍케와 같은 정치인과의 협력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둘 다 시간이 흐를수록 앞으로의 가장 어려운 과제는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더 가지게 되었다. 특히 뤼케는 1962년 가을부터 자신을 이 선택지의 대표자로 여겼다. 크로네는 여전히 신중하기는 했지만,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둘 다 연방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아데나워가 이 장관들의 지지를 계속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연정 정치 구상에 단호하게 반대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1961년부터 자민당(FDP)이나 사민당(SPD)이나 비슷하게 힘든 고객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를 전혀 바라지 않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기민당(CDU)의 또 다른 최고 가톨릭 신자 정치가인 하인리히 륍케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더욱 많이 하게 되었다. 륍케만이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 아니면 차라리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흑·적 연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상에 집착한 것이 아니었다. 1961년 6월에 처음으로 프랑스를 자랑스럽게 국빈 방문한 이후, 그는 또한 독일·프랑스 관계를 지속적으로 돈독히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일방적으로 미국에 경도된 것을 싫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데나워가 생각하는 독일·프랑스 양국 연맹의 구상도 너무 나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데나워, 크로네, 뤼케 계파와 륍케 연방 대통령 간의 제한된 협력이 이제는 가능하게 되었다.     

기민당(CDU)의 아데나워 당대표는 에르하르트, 슈뢰더, 폰 하셀에게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민당(CDU) 정치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라이너 바르첼이었다. 1963년에 겨우 39세였던 바르첼의 급격한 부상은 아데나워의 그리고 처음에는 크로네의 격려와 지원이 없었다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특히 아데나워는 바르첼이 당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래 여당이 지금처럼 엄격하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지도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1964년과 1965년에 확신하게 되었다. 에르하르트의 약한 지도력이 바르첼을 통해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바르첼은 기민당(CDU)의 보수·카톨릭 계파에서 정치적 상승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의 그의 제안서는 ‘높은 C’를 호소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는 여러모로 너무 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기민당(CDU)은 여전히 당의 바탕과 유권자에서 ‘가톨릭 대대’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에 아데나워는 이념적으로 확고한 이 차기 정치인이 바람직한 노선 수정을 이룰 것으로 보였다. 그는 또한 그가 주창했던 구호인 ‘자유를 구하자!’가 매우 유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이 때문에 많은 사회주의와 좌파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의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수상 교체기에 바첼을 내각에서 밀어내자 아데나워는 이를 그의 지지자에 관한 복수 행위로 여겼다. 그런데 바르첼은 이 기회에 당내의 자기 지지 세력이 여전히 얼마나 약한지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대표와 매우 강력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당 내에서 자기 지지층을 규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기 나름대로 이 차기 능력자를 점점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젊은 나폴레옹과 비교하고, 다른 이들은 젊은 무솔리니와 비교했다. 그는 1964년 폰 브렌타노의 와병 중에 바르첼이 원내대표 대리 직무를 수행하면서 매우 결단력 있고 효율적으로 일한 것에 대하여 좋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1965년 초 슈마허-헬몰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3~4년 동안 아주 잘 해냈습니다. 그는 아직 어리지만 해낸 것입니다.”     

곧 아데나워는 그가 최고위직에 적합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 오랫동안 바르첼을 단호히 반대해온 하인리히 크로네는 1965년 6월 중순 아데나워가 매우 좋아하면서 바르첼이 차기 수상이 되도록 상황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가 당에 활력을 다시 불어넣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간접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이용한 사람이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이다.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는 거의 동시에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둘 다 케네디 정부가 그들의 [축출] 문제에 관해 아주 결백하지는 않으리라고 의심했다. 두 사람 모두 핵무기의 선택지를 계속 열어두고 싶어 하며, 조만간 유럽 대륙의 핵 억지력의 중심이 될 수 있기에 프랑스 핵무장 군대의 설립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둘 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라는 인물과 정치를 싫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실각에서 자민당(FDP)이 한 역할을 기억하고 있으며 독일 정책과 동유럽 정책에 관한 에르하르트 정부의 정책에 관한 양독일부 장관인 에리히 멘데의 영향을 비난하였다.     

아데나워와 달리 슈트라우쓰는 지나치게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에르하르트 정부도 기사당(CSU)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기사당(CSU) 당대표는 자신이 권력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하기에 그에 맞추어 자기 운신의 폭을 활용하였다. 연방 내각의 일방적인 대서양 편향 노선에 대한 비판은 사람들에게 그를 차라리 다시 정부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만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친절한 내부 경고나 바첼과 슈트라우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도록 에르하르트 정부를 강요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지속적으로 공개적인 싸움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늘 되풀이 하여 인터뷰하거나 그 밖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1965년 총선의 승리는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교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총선 전에라도 어느 정도의 규율이 필요했다.     

모든 공개적인 비판과 비밀 음모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늘 그를 돋보이게 하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이는 오로지 현실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곧 한편으로는 그의 새로운 구상인 프랑스·독일 양국동맹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강하고 신뢰가 덜한 미국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동유럽정책과 독일 정책은 이제 그가 보기에 통일이라는 목표에서 너무 무르고 너무 부족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은 다음 날인 1963년 4월 일본인 방문객들에게 일본의 전임 총리인 요시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데나워는 “정치물을 먹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법입니다.”라고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다. 아데나워와 같이 정치에 집착하는 사람은 직무에서 배제된 상황에서도 계속 자기 모든 능력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켜나간다.      

여기에는 철저한 내적 논리가 있다. 14년 동안 연방 수상의 지도력에 관한 저항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가차 없이 물리쳤던 아데나워가 이제와서는 자기가 속한 정당의 정부에 맞선 반체제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쉬지 않고 싸우는 것은 기꺼이 피했다. 그는 앞으로 돌진했다가 다시 물러나며 때로는 휴전을 맺고 모든 것에서 예측할 수 있고 멋진 합리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 정부와 기민당(CDU)의 경우 아데나워가 이끄는 반대파는 재앙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격렬한 내부 갈등으로 기력을 소진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에르하르트는 전임자의 빈번한 공격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에서 더욱 불안해졌다. 그는 그 공격을 얼음처럼 차가운 복수를 위한 작전이라고 여겼다.     

후계자들 간의 투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1966년 12월 키싱거, 슈뢰더, 게르스텐마이어, 바르첼 등 4명이나 되는 기민당(CDU) 정치인들이 동시에 수상직에 출마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49년과 1961년 사이에 정부와 야당의 관계를 대립 구도로 몰고 갔던 아데나워는 이제 당내에서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대립은 분열로 바뀌고 분열에서 그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방향 감각의 상실과 지도력 부족이라는 슬픈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1966년 가을 에르하르트의 몰락에 그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1966년 3월 기민당(CDU) 당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점점 더 당내 음모에서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관측통들은 에르하르트가 1964년부터 1966년까지의 당내 투쟁에서 그토록 심하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면, 1966년 가을의 국내 정치 위기에서 살아남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내각에 대한 그의 비판을 주로 외교 정책 상황에 관한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론은 그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우리는 아데나워가 그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에르하르트의 요청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거부했는지 보았던 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그의 주요 동기가 음울한 복수심과 질투라고 의심한 것이다. 이러한 인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언론계와 정치계의 많은 이들이 아데나워의 사망 이후 몇 년 동안 독일 제1대 수상에 관한 기억을 거의 또는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1950년대 후반부터 아데나워의 노년기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의견과 결정은 대부분 합리적인 숙고의 핵심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한 생각은 다른 생각에서 나오고, 거의 모든 단계는 이 상황에서 나오며 자체적인 내적 논리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과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데나워는 샤움부르크궁을 떠나자마자 중요한 과정들을 시작했다. 1963년 10월 30일, 그는 마거릿 히긴스와 긴 인터뷰를 했다. 43세의 미국인인 그는 베트남에서 사망하기 3년 전인 그 당시 아데나워가 보기에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데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첫해에 베를린-첼렌도르프에서 히긴스가 자기와 쿠르트 슈마허를 저녁 식사에 한 번 초대한 자리에서 처음 히긴스를 알게 되었다. 에른스트 레머는 당시 히긴스에게 그 두 사람이 전후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히긴스는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왔다. 때로 아데나워의 부하들은 히긴스의 재주를 경계 했다. 히긴스는 아데나워가 너무 쉽게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어쩌면 히긴스 특유의 재주가 다시 한번 발휘된 것으로 보였다. 인터뷰 내용이 1963년 11월 초에 발표되자 격랑이 일었다. 핵 정책에 관한 질문으로 아데나워를 궁지에 몰려던 시도는 아데나워가 잘 피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때 미국이 “너무 미적지근했다.”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결과가 실제로 미국의 성공이었는지 대해 어느 정도 의심이 간다고 하였고 핵실험 금지 협약에 관한 논의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다시 불평했다. 또한 그는 “드골을 위대하고 영리한 사람으로 여깁니다.”라고도 말했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흐루쇼프를 조심할 것을 충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사람은 전혀 믿지 말아야 했습니다.”     

속기록이 보여주는 대로 비교적 신중하게 말한 내용을 가지고 이 기자는 마치 케네디 정부를 날카롭게 공격한 것처럼 작성하였다. 사실 마거릿 히긴스는 케네디 대통령에 관해 보수적 비평가였다. 사민당(SPD)은 이것을 연방의회의 주요 질문의 기회로 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것은 베너에게 다음과 같이 확신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독일 국민은 자기 명성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 떄문에 미치게 되었다.” 사민당(SPD)은 1961년 8월 13일 이후에 아데나워가 얼마나 ‘미적지근’하게 행동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억이 짧아 자기 과거 행위에 대해 잘 기억을 못하는 아데나워는 그 당시 자기 역할에 대해 당연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케네디가 그로부터 3주 후에 살해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불행한 일과 히긴스와의 인터뷰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계기로 미국을 비판하는 논조의 인터뷰를 일단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계기로 삼았다. 새 주독 미국대사인 조지 맥기는 아직 아데나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전임자인 다우링과는 달리 완전히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텍사스 출신의 석유 백만장자인 그는 곧 자신이 식민지 총독이나 되는 듯이 굴었다. 1963년 가을, 그가 회고한 바로는 아데나워와 미국의 관계는 아직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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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는 당분간 침착히 있으면서 이제는 에르하르트와도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3년 11월 중순, 기민당(CDU)의 ‘작은 전당대회’인 연방위원회에서 두 명의 오랜 정적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장하자 당의 사람들은 기뻐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존심을 버리고 지금까지 그가 피해 왔던 말을 마침내 했다. “나는 내 후계자의 정부를 지지하며 그의 충실한 친구로서 그가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도록 그를 도울 것입니다.” 물론 견해차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고 합의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에르하르트는 행복했다. 그는 대중의 높은 기대를 받으며 밀월을 즐기고 있었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도는 50%를 웃돌았고, 1964년 1월에는 55%에 이르렀다.     

이 무렵이 되어 아데나워가 마침내 유언장을 작성하고 싶어 하게 된 것은 그의 멀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살해당했다. 호이쓰 전 연방 대통령은 1963년 12월 12일 사망했다.     

1959년 봄과 여름에 견해차가 있었지만 이후 이 두 노인은 다시 화해를 한 바가 있었다. 호이쓰가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나쁜 소식을 접한 아데나워는 전보를 보내고 여러 차례 전화도 걸었다. 그는 또한 슈투트가르트의 슈티프트키르헤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에리히 멘데 사이에 앉아 그는 키싱거 주지사와 라인홀드 마이어의 추도사를 미동 없이 들었다. 아데나워는 라디오 연설에서 “그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적이 없었고 모두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이쓰가 사망한 지 이틀 후에 에리히 올렌하우어도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두 주 동안 국장에 계속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보다 훨씬 어린 정치가의 공적을 기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젊은 사람들의 무덤 앞에 서 있는데 익숙해졌다.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가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을 보고 그는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고 생각이 깊어졌다. 원내대표는 12월 초 심각한 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제부터 아데나워는 브렌타노와 그의 이전 행동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쨌든 한때의 적들이 질병과 죽음을 맞이하게 돼서야 비로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아데나워가 살아가면서 생겨난 성격이다. 이러한 동정심을 보여주고 나서는 그 상대방과 화해했다.     

아데나워가 마침내 은퇴하고 기민당(CDU) 당대표직을 내려놓을 것을 진지하게 결심한 것은 바로 그가 적절한 시기를 놓친 다음의 일이었다. 그 첫째 이유가 에르하르트 정부와의 정치적 견해차는 아니었다. 그런 차이는 다시 되풀이되었다. 그를 붙잡아 둔 것은 어려운 개인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폰 브렌타노의 수술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그는 크로네에게 이제 물러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로네가 이 결정에 대해 언급한 문장은 결국 그가 물러나지 못한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당대표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됩니까? 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에르하르트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뜻하지 않게 이 해에 아데나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하인리히 크로네였다. 아데나워는 1962년 그를 자기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했다. 크로네가 여당 내에서 당대표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수상직에 오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런 그를 괘씸하게 여겼다. 그렇게 하여 결국 에르하르트에 맞선 불쾌하고 가망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당대표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크로네는 이미 68세가 되었다. 아데나워와는 달리 그는 자신이 꽤 늙고 지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기 세대의 때가 이미 지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1963/64년 겨울 그가 곧 물러날 연방 대통령 륍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 당대표 후보가 되는 것은 부적합해 보일 것이었다.     

어쨌든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가 결코 당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직무를 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두프후에스가 맡아야 했다. 그러나 두프후에스는 그 일을 맡고 싶은 욕망이 진짜로 없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변호사와 공증인으로서의 경제적 독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민당(SPD)의 모델을 기반으로 기민당(CDU)을 어느 정도의 당원과 프로그램 중심의 당으로 만들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을 다음에 그는 기민당(CDU)의 정당 개혁가라는 내키지 않는 과업을 신물 날 정도로 수행해 온 터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콘라드 아데나워 당대표가 당내에서는 운신의 폭이 좁은 것처럼 이제 두프후에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스트팔렌의 지역 기민당(CDU)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연방 차원의 여당에는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아데나워도 두프후에스를 당대표로 삼는 것에 대해 별로 열의가 없었다.     

이제 아데나워가 이미 더 적합한 후보를 생각하고 있다는 징후가 분명했지만, 그는 아직은 업적을 더 세워야 했다. 바로 라이너 브라첼이 그였다. 1963년 12월 초에 폰 브렌타노가 질병을 앓은 이후 빌 라스너가 여당의 원내대표로 직무대리로 선출되어 당분간 폰 브렌타노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가 능력을 보여주고 건강상의 이유로 폰 브렌타노가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면 정식 원내대표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첼이 업적을 쌓은 원내대표로서 당대표 자리에 성공적으로 오르는 것은 아데나워의 추가적인 임기가 만료되는 1966년에나 가능할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브라첼에 유리한 또 다른 점은 그가 에리히 멘데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1945년 11월부터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아서 이미 대학생이 된 전직 소령 멘데가 영국 대학 담당관을 설득하여 전직 조종사 중위였던 라이너 브라첼이 법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 간의 늘 껄끄러운 관계를 고려할 때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64년 1월 중순 아데나워는 결국 당대표직을 2년 더 연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은퇴 전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과 아데나워가 이룩한 것을 보면 아데나워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에르하르트에 맞서는 반대파의 전선이 이미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이 무렵 오래된 악한 적에게 잘 대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차였다. 아데나워의 장관 중 누구도 잊지 못할 1월 5일, 그는 고데스베르크 무도장에서 열린 연회에서 전임자를 축하하기 위해 테건제호수에서 즐기던 휴가를 조기에 중단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이 두 신사는 서로에 관한 호의를 공개적으로 보였고 에르하르트는 선의로 18세기에 출판된 4권짜리 정원 사전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1964년 3월 하노버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에서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는 그 자리에 모인 대표단의 축하를 함께 받았다. 둘 다 사민당(SPD)을 공격하는 신랄한 연설을 했다. 대표단을 기쁘게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에르드뢰베’(Erdlöwe)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는 때로는 파란색, 떄로는 빨간색, 그리고 때로는 자주색으로 반짝이는 동물이었다. 에르드뢰베는 독일어로 카멜레온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가을 베너와 잘 지내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당대표는 한 때 사민당(SPD)원이었다가 회개한 것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어제 숭배했던 것을 오늘 불태우는 사람은 오늘 숭배하는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사민당(SPD)에 맞서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가 함께 공격하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에 관한 국민의 호감도는 이미 떨어지고 있었다. 2개월 만에 지지도는 1월 중순의 55%에서 3월 중순의 43 %로 떨어졌고 사민당(SPD)은 상승했다. 그러나 아직 아데나워는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는 연방 대통령의 후임자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륍케가 그를 얼마나 푸대접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기민당(CDU)이 1964년 봄에 이미 많은 것이 암시한 대로, 1965년에 심각한 선거 결과가 나온다면 연방 대통령의 추천권이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 슈트라우쓰, 바르첼, 두프후에스는 자민당(FDP)은 물론 에르하르트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일찍 륍케를 밀었다. 멘데와 자민당(FDP)은 기사당·기민당 연합(CDU/CSU Union)이 사민당(SPD)과 연정의 문을 열어두고 싶어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봄이 지나면서 아데나워와 일부 여론은 륍케가 정말로 연임을 하기에 적합한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겝하르트 뮐러가 헌법재판소장 후보가 될 가능성은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하인리히 크로네가 대안으로 대두되면서 그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륍케가 연임을 바란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여 이 문제의 매듭을 지었다. 그래서 결국 당 대표단에서 륍케를 지명하도록 강력하게 추진한 사람이 바로 아데나워였다.     

아데나워가 1964년 초부터 륍케를 위해 캠페인을 벌여 왔지만, 특히 1964년 5월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 겝하르트 뮐러, 또는 한스 푸를러와 같은 후보를 거부한 것은 륍케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매우 혐오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에르하르트 정부의 첫 6개월 동안 아데나워는 그를 진정한 검은 악마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크로네와 슈트라우쓰는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데나워에게 프랑스·독일 조약을 파기하려는 이가 슈뢰더라는 의심을 돋우어 주었다. 그래서 륍케는 슈뢰더에게 다시 외무부를 맡기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의 프랑스 정책에 관한 견해차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1963년 12월 아데나워 계파의 압력에 굴복하고 슈뢰더가 원래 제기한 의견에 맞서 에르하르트는 마침내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농업 시장 규정을 승인했다. 이는 파리가 유럽 공동 시장 구축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은 이제  외교 정책과 국방 정책 분야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을 추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964년 6월 프랑스·독일 협상을 계기로 그는 이를 요청하기로 했다.     

케네디의 외교 정책팀을 거의 온전히 인수한 존슨 대통령은 드골의 프랑스 핵무기군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 계획을 전임자인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미국과 프랑스의 견해차는 다시 본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 드골의 편을 들기로 결심했다.     

드골도 나름대로 아데나워 계파가 뜻을 관철할 때만 독일과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상황을 진전시켜야 할지 고민하던 드골 장군은 이제 독일 내각과의 논의를 앞두고 아데나워에게 특별한 영예를 안겨주었다. 1964년 5월 초, 코모호수에서 회고록 작업을 하던 중에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나아갈 방향에 관해 아직 완결되지 않은 투쟁에서의 주요 동맹국, 곧 프랑스의 프랑스연구소(Institut de France) 산하 ‘도덕학과 정치학 아카데미’(Acade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가 그를 준명예회원으로 위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식 위촉식은 1964년 11월에 개최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에르하르트 정부를 이전에 자신이 나갔던 길로 이끌 것을 결심했다. 내부적으로 생각했던 구상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이제 이것을 공론의 장으로 가져왔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산업 클럽에서 그는 유럽의 정치적 통일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이제는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 간의 공동 협의를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유럽 정복을 목표로 하는 소련의 정책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반면 유럽에 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하였다. 그리고 1963년 늦여름과 가을과 마찬가지로 그는 현재에도 서방의 통합된 동방 무역 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동방 무역은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정체된 프랑스 정책을 언급하면서 거의 위협적으로 비스마르크의 말을 인용하였다. “최악의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입니다!”     

《라이니셔 메르쿠어》의 사설도 같은 논조였다. “유럽 정치 연합을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그는 프랑스 대중 신문인 《프랑스 수아르》에서도 똑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연방정부에 대고 공개적인 경고는 하지 않았다. 연방의회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하인리히 륍케는 1964년 7월 1일 베를린에서 연방 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아데나워가 주재하는 회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아데나워, 슈트라우쓰, 바르첼, 두프후에스와 크로네는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에게 마침내 유럽 문제를 주도할 것을 촉구했다. 유럽의 정치 연합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실무위원회 구성이 제안되었다. 폰 구텐베르크가 건의서로 요청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개혁에 관한 또 다른 위원회 구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의 3시간에 걸친 이 회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내부의 ‘대서양주의자’와 ‘프랑스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싸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3일 후 드골은 정부의 핵심 장관들을 이끌고 본에 왔다. 7월 3일 프랑스·독일 내각의 합동 회의에서 그는 미국에 맞선 유럽 정책의 필요성, 극동에 관한 새로운 유럽 정책, 그리고 또한 긴장 완화를 구호로 하는 장기적인 독일의 통일 정책에 관한 자기 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역사상 두 민족이 지금과 같이 함께 일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는 호소로 마무리했다.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드골이 평생 잊지 못할 비난이 쏟아졌다. 드골보다 먼저 발언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리고 ‘애석한 침묵’이 흐른 다음 크로네가 지적했듯이 드골의 제안에 대하여 아무 언급도 없이 회의를 주재하던 슈뢰더는 회의 일정을 하나씩 진행해 나갔다.     

드골은 분노를 거의 억제할 수 없었다. 몇 년 후 아데나워는 한 기자에게 “아무도 그에게 단 한마디도 말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데나워는 이 사달이 날 때 현장에 없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즉시 그에게 보고했다. 프랑스 대사의 공관인 에르미히성에서에서 식사하는 동안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나는 아직 처녀입니다.”(Je suis reste vierge.)라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아데나워와 드골이 체결한 프랑스·독일의 혼인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의 진행에 대한 아데나워의 평가는 둘째 회고록의 처리와 관련하여 간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1964년 여름에 내가 수상직을 내려놓은 이후 드골이 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프랑스·독일 관계가 파괴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그는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독일·프랑스 관계를 열악한 상태로 이끈 주범이라고 단정했다. 언론인들은 그가 외무장관을 혹평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미 1월에 슈뢰더가 “오만하고 눈이 멀었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관한 그의 모든 언급은 이제 이러한 기조에 맞추어졌다. 1964년 6월 슈뢰더는 에르하르트와 자기 외교 정책 노선에 관한 아데나워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아데나워와 마지막으로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상당히 혼이 나간 것 같았다. 슈뢰더는 외무장관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뜻을 또한 슈트라우쓰에게도 전했다. “물론 1965년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새 정부의 충실한 에케하르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과 의심은 재빨리 돌아왔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찾을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게 되었다.     

* 에케하르트 [Ekkehard, 역자주 – 일종의 말장난. 칼날을 의미하는 Ekke와 강인함을 의미하는 Hard가 조합된 것으로 강자를 의미]     

또한 에르하르트와의 관계는 아데나워 수상직의 막바지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흔들렸다. 1964년 7월 8일 아데나워, 슈트라우쓰, 크로네, 두프후에스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 무엇보다 슈트라우쓰는 이제 6개국 공동체의 틀 안에서 유럽 정책의 결정적인 부흥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신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다음 주 일요일 슈트라우쓰는 뮌헨에서 열린 기사당(CSU)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자 했다. 아데나워는 영리하고 적당한 내용을 권유하였다.     

나중에 들은 바와 같이 에르하르트는 사민당(SPD)에 대해 아데나워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반대파에 대해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은 《노이에 루르 차이퉁》의 힐데 푸르빈이었다. 그는 또한 에르하르트가 국빈 방문 중인 코펜하겐으로 보고서를 전송했다는 말을 들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이제 분노하며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서 여론은 그는 편이었다. 에르하르트 친화 언론, 무엇보다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당대표의 ‘반대파’를 공격하고 나섰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없는 사이에 ‘반대파’가 만났다는 것이 특히 의문이었다.     

코펜하겐에서 돌아온 에르하르트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 동맹이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고 확신했다. “두 나라로만 이루어진 유럽은 독일연방정부가 추구하는 유럽이 아닙니다.”  독일 외교 정책의 세 가지 목표가 책정되었다. 첫째, 통일, 이를 위한 모든 서방 동맹국 특히 3개 강국의 지원. 둘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 속의 독일연방공화국의 방어. 셋째, ‘더 크고, 더 강한’ 초국가적 유럽 연합의 목표. 이를 위한 출발점은 6개국 연합이었다. 이의 전제 조건으로 프랑스·독일의 긴밀한 협력을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독일 관계가 부차적인 기능을 지닌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1962년 이전에 위에서 언급한 둘째와 셋째 것과 유사한 구상을 수십 번 했었다. 그는 또한 통일을 최우선은 아니어도 중요한 목표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제 그 우선순위는 결국 바뀌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에르하르트와 슈뢰더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에르하르트와의 긴 대화는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기는 할 것이다. 아데나워는 뮌헨에서 열리는 기사당(CSU) 전당대회에서 슈트라우쓰가 불난 데 부채질하지 말아 주라고 요청했음을 밝혔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의 초점은 이제 드골이 논란이 되는 본 방문 중에 에르하르트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에 파리와 워싱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대화가 여기에 이르자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에게 “수상 각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는 “그건 사실입니다! 드골이 귀하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드골 선생은 미치지 않은 사람입니다.”     

크로네는 또한 에르하르트의 설명을 의심했다. 슈뢰더는 에르하르트가 그 말을 너무 고깝게 들었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 그러자 바르첼은 회의록을 직접 확인하자고 했다. 이날에 이미 바르첼은 회의록에 드골이 그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프랑스의 대사인 드 마제리도 아데나워에게 그런 단정적인 말을 한 것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 앞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주장했다. 당 대표단 회의에 와서야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였다.     

여러모로 볼 때 드골이 양단 간의 선택을 강요하는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양국 내각 합동 회의에서 한 그의 연설에서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나 슈뢰더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그의 제안은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당분간 에르하르트는 반대파에 대한 강력한 반격을 계속했다. 기사당(CSU) 전당대회에서 그는 ‘검은 드골주의자’에 관한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니에 차이퉁》과 《벨트》가 그의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전임 수상인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와 에르하르트를 옹호하는 언론이 그와 대립하는 불편한 처지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 대표단이 수상의 권위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회해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아데나워도 만족할만한 유럽 정책을 지속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제 상호 비방이 모든 민간 언론을 도배하고 있기에 피해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회복되었던 에르하르트의 인기는 7월 중순 53%에서 8월 중순 43%로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11월 중순에는 36%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논쟁을 극단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8월 4일 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주로 자기 회고록을 선전하고자 했기에 큰 소동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6개국 정치 연합에 관한 구상을 계속 내세웠다. 1962년 봄과 같이 6개 국가 가운데 4개 국가가 정치 연합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물었을 때 그는 약간 뻔뻔스럽게 말했다. “아직 낳지도 않은 알에 대해 골치를 썩이지 마세요.” 프랑스와 독일이 앞장서면 다른 나라도 따라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계속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그는 기자회견이나  막후대화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우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64년 10월 말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위촉의 큰 영예를 얻기 위해 파리로 가기 직전 《빌트 암 손탁》에서 반대파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와 드골 측은 모두 이 방문이 과시용이라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연방 수상의 자격으로 파리를 28차에 걸쳐 방문했다고 회상했다.     

드골의 지시로 엘리제궁의 방문과 이어서 열리는 연구소의 행사를 11월 9일이 선택되었다. 거의 100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인이 프랑스 아카데미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에서 여전히 기념되는 11월 11일 휴전일보다 정확히 이틀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데나워 이전에 이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었던 사람은, 1870/71년의 전쟁으로 거의 100년 전에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파괴되기 직전에 베를린대학교 교수 트렌델렌부르크였다. 최근에는 두 명의 다른 정치 지도자가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바로 윈스턴 처칠과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이 명예를 수여하고자 한 것이 자기 생각이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연구소의 높은 돔형 지붕이 있는 홀의 원 중앙에는 프랑스 대통령을 위한 의자가 한 개만 놓여 있었다. 프랑스 내각의 대부분 인사가 이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아데나워의 ‘대부’는 프랑소아-퐁세였다.     

우렁찬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등장한 아데나워가 감사 인사 연설에서 자기의 프랑스 정책의 기본 구상을 다시 한번 제시하면서 88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언론은 놀라워했다. 그는 양국 화해의 프랑스 측 인사 두 명을 직접 거명했다. 로베르 쉬망과 드골이었다. 그는 또한 이 기회에 두 나라의 국민이 함께하면 ‘유럽의 형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여기서도 양자주의는 유럽 차원에서 정당화되고 한껏 치켜세워졌다!     

아데나워는 전체 행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반년 후 그는 본을 방문한 드골에게 자신은 지난 11월에 프랑스가 여전히 지닌 위대한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독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망가졌다’라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1964년 11월 드골과 만난 것은 에르하르트 수상의 설득으로 마련된 것으로 본과 파리의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의도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양측은 서로에게 최대한 존중을 표했지만, 당연히 안보 정책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충분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다.     

농업 정책에서만 진전이 이루어졌다. 1964년 가을의 프랑스·독일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농업 정책의 틀 차원에서의 곡물 가격 문제였다. 여기서 에르하르트의 승인을 받은 아데나워는 독일이 동의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시 한번 본은 앞으로 연방정부의 예산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임에도 유럽 정책을 위한 비싼 선지급을 집행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다변핵국(MLF)이었다. 아데나워가 수상에 재임할 당시에는 드골이 독일의 참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다변핵국이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기에 이제는 이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 핵무기의 상황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매우 사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과연 다른 나라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가? 드골은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이 대답은 회의록의 복잡한 언어로 표현되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끌어냈다. “오늘날, 곧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곧 미국을 통한 연대 이외의 정치적, 군사적 연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그는 프랑스가 자기 핵 능력을 다른 나라와 나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곧 유럽에 집단적 책임을 지고 집단적 정치와 방어를 수행하는 제대로 된 정치 기구가 수립되는 날 프랑스 핵무기는 지체없이 유럽의 방어 수단이 되어 유럽 방어에 사용될 것이다. 유럽 방어는 무엇보다도 독일의 방어를 의미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드골은 이러한 유럽의 공동 방어 정책이 존재하게 되면 독일의 핵무기 생산 문제도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실 완곡한 거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언젠가 미국의 핵우산을 떠나 프랑스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드골은 독일이 프랑스 핵무장 군대를 의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그것을 두고 ‘사하라 폭탄’이라고 비웃곤 했다. 그러나 드골 장군은 프랑스 핵무장 군대가 이미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데사, 스탈린그라드, 키예프를 ‘같은 날’ 파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프랑스의 소련 측에 제공하려는 새로운 차관을 넌지시 언급했다. 그러자 드골은 일부 어려움에 부닥친 프랑스 산업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것이 프랑스가 소련에 기우는 전 단계가 될지 모른다는 그의 우려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드골로부터 ‘해결할 수 없는 경제 문제의 영원한 역사’로 소련은 장기적으로 ‘정권을 포기하거나 (실제로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전쟁을 벌이는’ 것만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데나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항상 소련이 눈을 떠서 자기 진정한 미래가 유럽과 평화를 이루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 연방 수상으로서 그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소련이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사람다운 생활을 보장한다면 독일도 많은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밝혔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소련이 반응한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모스크바에서 흐루쇼프와 나누는 대화였다.”     

그래서 1955년 9월 다차에서 흐루쇼프와 나눈 잊을 수 없는 대화는 그가 중국에 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다시 기억되었다. 흐루쇼프는 그 이후로 실각했다. 브레즈네프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드골은 다소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독일연방공화국과 협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일단 “두려움 없이 그러나 어느 정도 우려를 하는 가운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영예롭게 본으로 돌아왔지만, 속으로는 근심이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한번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음울한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크로네는 말했다. “그 어르신은 언젠가 드골이 모스크바와 다시 관계를 맺을지 모른다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겁다고 계속 되풀이 말했습니다. 이를 막고 독일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그가 드골과 프랑스·독일 협정을 체결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고 하였습니다.”     

글롭케와의 대화 이후 1964년 12월 중순에 아데나워는 자기 두려움을 명료하게 드러낸 두 페이지짜리의 메모를 직접 손으로 작성했다. “소련이 우리를 제치고 프랑스와 화해하게 될 가능성이 임박했고, 프랑스가 독일의 태도에 실망하여 독일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 아니면 프랑스는 독일과 미국에 실망하여 소련에 기울게 된 것이다.”     

미국 측에 대한 전망은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파리를 방문한 지 며칠 후에 맥클로이는 아데나워를 찾아왔다. 그러나 과거의 마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1963년 10월에 만났을 때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맥클로이가 단언했다. “드골은 19세기 사람입니다.” 이어서 맥클로이는 드골과 연계되는 사람은 “케케묵은 프랑스의 주도권 주장에” 압도당하고 만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데나워와 이야기를 나눈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했다. “그 어르신은 미국 측에서 치고 나온 것에 대하여 매우 당황했습니다.”     

수상 재임 시절에 아데나워는 MLF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드골이 독일의 참여를 분명히 반대한 이후 아데나워는 이 계획이 그저 불화의 사과*라고 생각했다.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지상 발사 중거리 미사일이었다. 이것은 소련의 침공 때에 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과거 그는 이미 케네디에게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미군 참모총장 타일러와 독일의 호이싱거 장군도 중거리 미사일의 필요성을 확신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도 지금도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미 러시아와 합의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 무기의 생산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때문에 워싱턴을 의심하며 아마도 서방을 소련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여 동방에서, 곧 중국에 더 잘 맞서고자 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던 것이다!     

* 불화의 사과 [Zankapfel, 역자주 – 그리스신화의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가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날 초대받지 못한 것에 화가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새겨진 황금사과를 결혼식장에 집어 던져 결국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는 사이러스 슐츠버거에게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의 부족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당연히 이는 그의 비판이 미국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다. 중거리 미사일이 없다면 유럽은 방어할 수가 없게 된다. “소련이 원한다면 그들의 전차는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대서양으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존슨 대통령에 대해 비난만 늘어놓았다. 그가 텍사스에 있는 그의 목장에서 파티를 벌인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1961년 봄 텍사스 방문은 별로 돋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존슨이 그 이후로 에르하르트 수상을 그곳에 초청하여 과시하듯이 그를 ‘국가 지도자’로 잔치를 벌이는 일보다 더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하여 늘 그렇듯이 존슨을 보고 이제 그저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엄격한 판단의 주된 이유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점점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유럽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오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이러스 슐츠버거를 통해 미국 대중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베트남이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존슨이 현명하지 못한 극동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전면적인 전쟁의 차원으로 확대되는 초기 시점에서의 그의 예견은 상당한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1965년 2월 5일 슐츠버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국가의 국민이 베트남에서와 같이 매우 먼 지역에서 전쟁을 치러야만 할 때는 심리적 한계에 빠르게 도달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흥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관심을 잃게 된다면 이는 고립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슐츠버거와의 대담 내용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많은 비판이 난무하게 되었다.     

1958/59년 겨울 이후 그동안 베를린이 매우 조용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모든 곳에 위험이, 곧 그가 슐츠버거에게 말한 ‘모레 있을 위험’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여전히 오래된 악몽이었다. 미국의 고립주의와 핵무기 금지 조약에 관한 협상 의지가 커지는 것 외에도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드골의 소련에 다가가려는 의도였다.      

이미 1965년 초에 그러한 징후가 보였다. 1965년 2월 4일, 드골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 자리에서 이미 잘 알려진 아데나워의 장기적인 독일 통일 구상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키워드는 ‘독일 문제의 유럽화’였다. 소련이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고 동유럽 사람들이 다시 더 많은 자치권을 갖게 된다면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유럽의 통일이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데 드골이 이제 그의 조건을 드러냈다. 오더·나이쎄 국경선의 인정, 독일 통일의 핵무기 포기, 통일 과정에 관한 모든 이웃의 동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드골이 1965년 3월 말, 이임하게 되는 소련대사인 비노라도프를 위해 개최한 술자리에서 전통적인 프랑프와 소련의 우의를 기념한 것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공개적으로 자기 입장을 발표했다.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에서 그는 독일에 대한 ‘새로운 포위’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물론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프랑스·독일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드골을 향한 그의 경고조차도 간과할 수 없었다. “우리의 운명은 프랑스의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소련이 우리를 삼켜버리면 프랑스도 삼키게 될 것입다.”     

드골은 이제 그의 처남인 자크 벤드루를 최대한 신속하게 아데나워에게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그에게 ‘새로운 긴장 완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를 노골적으로 물었다. 이에 대해 벤드루는 작별 만찬은 그저 순수한 예의를 표시한 것뿐이라며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데나워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 소련과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방문객의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으면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접근 방식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통일을 위한 매우 진지한 제안’을 두 번이나 했다. 그는 아마도 1958년 봄과 1962년 봄에 있었던 탐색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일을 위한 미끼로 그 지역, 곧 동독 지역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다. 벤드루가 통일이 곧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아데나워는 ‘아니오.’라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러나 1963년과는 달리 그는 이제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유익한 효과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는 모스크바가 ‘서방과 잘 지내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드골에게 긴급 서한을 강력하고도 어느 정도는 공개적으로 요란한 방식으로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에 관한 드골의 대답은 다소 모호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회피하는 듯한 어조로 ‘기본적으로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그는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것이 그 미래에 관한 결정적인 여건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런 맹세는 사실 별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고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프랑스와 소련의 접근은 지속되었다. 1965년 4월 말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파리를 방문하여 포츠담에서 확정된 독일 국경의 불변성과 독일이 핵무기를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관한 명시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동독을 제2의 독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는 독일 조약을 명백히 위배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에서의 화창한 봄날 프랑스와 소련의 대화가 강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하고 우울해’ 했다. 아데나워를 3일간 방문하며 점심때마다 아데나워와 아주 오랜 토론을 한 하인리히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자기 필생의 업적인 프랑스와의 화해가 위험에 처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그는 주의를 당부하면서도 여전히 드골이 본을 다시 방문하여 양국 관계가 다시 호전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에르하르트는 마침내 아데나워 계파의 압력에 굴복하여 1965년 6월 드골과의 만남을 수용했다.     

그러나 본과 파리 사이에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럽 정부 수반들이 모여 유럽 정치 연합에 관한 회담을 재개하자는 에르하르트 정부의 제안은 진전이 없었다. 1965년 4월 중순에 드골은 에르하르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원래 공동으로 합의한 구상이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것으로 여긴다고 통보하였다. 이 두 사람이 다시 모여 이에 관하여 논의해야만 했다.     

아데나워 자신은 다시 한번 유럽 통합에 관하여 가장 커다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유럽 전체가 어려운 시기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드골 정권이 무너지면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인민전선이 형성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한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가 약진했다. 자민당(FDP) 당 동료들의 부탁으로 1965년 8월 중순에 아데나워를 방문한 슈마허-헬몰트는 아데나워의 회의적이고 낙담한 말만 듣게 되었다. 6개국을 틀로 하는 정치 연합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의 사주를 받은 네덜란드는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는 심지어 프랑스가 다수결 원칙을 무력화하기 위해 현재 각료위원회의 회의를 거부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유럽경제공동체(EEC)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작은 룩셈부르크, 곧 쉽게 사회주의화 될 수 있는 벨기에,  쓸모없는 영국의 지원을 받는 네덜란드, 정치경제적으로 흔들리는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입니다.”     

해롤드 윌슨의 노동당이 런던에서 집권한 후 이제는 아데나워만큼 영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잉글랜드. ...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나라는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졌다. 그는 이 나라에서 그저 부정적인 요소만을 보게 되었다. 유럽 통일에 자신 있게 참여하기에는 너무 약한 나라이지만 밖에서 다른 나라를 방해하는 데에는 강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비관적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미국과의 동맹을 고수하고 있었다. “새로운 고립주의는 유럽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유럽이 종말을 고하면 미국의 운명도 그 길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미국인들에게 분명히 알려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서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핵심 국가들만이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현재 유럽경제공동체(EEC)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기에 그의 관점에서 이 또한 유럽 공동체의 중요성의 가치를 절하하는 일이 되었다. 사방에 어려움이 널려 있었다!     

한편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는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했을 때 그들을 식탁에 올려놓았던 ‘중동 정책’이라는 수프를 먹어 치워야 했다. 1958년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은 수상이 내용을 다 알고 승인한 가운데 이스라엘에 극비로 군사 장비를 공급해 왔다. 미국의 압력에 따라 1962년 봄에는 탱크를 인도하기로 했다. 적어도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는 이때 매우 신중히 처신하여 연방 여당의 지도급 의원 몇 명만을 이 일에 참여시켰다.     

처음부터 아데나워는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지원 문제에 대해서는 무조건 동조하였다. 물론 그는 아랍 진영과의 관계에서 손실을 피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인 비밀 정책이었다. 문제는 1964년 10월 말 비밀 무기 공급에 관한 첫 뉴스가 언론을 강타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동독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모두 이 기회를 이용했다.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는 나일강 강가로 초대되었다. 여기에서 이집트는 무기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면 동독을 외교적으로 인정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여기에서 1965년 봄의 위기가 닥치고, 몇 달간의 줄다리기 끝에 1965년 5월 13일 서독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지만 이와 동시에 대다수 아랍 국가와 본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아데나워가 궁극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던 독일의 중동 정책의 이러한 파탄을 얼마나 완벽하게 극복했는지는 놀랍다기보다는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 파탄은 결국 그가 추구한 ‘할슈타인 원칙’*을 훼손하기도 하였다. 사실 프리츠 에를러는 전임 연방 수상을 지나치게 강력하게 비판하지는 않았다. 보상의 기치 아래 이스라엘에 혜택을 베푸는 것은 독일의 각 정당 지도부가 공감대를 이룬 것이기 때문이었다.     

* ‘할슈타인 원칙’ [Hallstein-Doktrin, 역자주 – 할슈타인이 내세운 서독의 외교 원칙으로 동독을 인정하는 국가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 그러나 1970년대 사민당(SPD)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그리스도인과 세계》의 기젤헤르 비르싱이 엉망진창이라고 불렀던 이 외교적인 이른바 ‘나일강의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의 진짜 피해자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실수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외무장관도 일시적으로 힘을 잃었다. 카이-우베 폰 하셀의 지원을 받은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강한 집념으로 위험한 친이스라엘 정책에 맞섰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에르하르트와의 그의 관계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아데나워는 조만간 외무부에서 그를 만나기를 바랐다. 원내대표인 라이너 바르첼과 함께 아데나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에 대하여 기존의 노선과 분명히 일치하지만 직접적으로 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구했다. 그는 나세르가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대통령을 영접하면 이집트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관해서도 그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의 지원을 받았다. 슈트라우쓰의 유명한 소란 피우기의 잠재력은 아데나워의 비판만큼이나 에르하르트의 제1기 정부가 대처해야 할 문제였다.      

동독의 비인정 문제에서 아데나워는 이제 가장 교조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의 자격으로 3월 3일 연방 수상 에르하르트에게 편지를 보내 발터 할슈타인이 브뤼셀에서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우리가 이집트와의 관계를 즉시 끊지 않으면 독일을 단독으로 대표할 권리를 잃을 것이며, 또한 해외에서 우리의 위신이 심각한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 늘 외국인들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덧붙여서 그는 할슈타인이 “아랍 국가가 나세르와 함께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아데나워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할슈타인 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문장에서 아무도 놀라지 않을 예언을 할 만큼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결정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엄청나게 넓은 파급력을 지닐 수도 있고 또 그리될 것입니다.” 마침내 에르하르트는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따른 어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급하게 찾기 위하여 바르첼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의 오래된 소원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1963년에 이스라엘에 관한 외교적 인정으로 외교 정책 업적에 정점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외무부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맞서 자신을 의견을 관철하기에는 이미 너무 약했다.     

예외적으로 아데나워가 중동 정책에서 슈뢰더 파벌인 폰 하셀에 맞서 에르하르트의 편을 들 때가 있었다. 그는 또한 2월과 3월의 끔찍한 상황이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어떻게 갈라놓았는지를 깨닫고 만족해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는 둘 다 직무를 내려놓기를 바랐다. 그럴 가능성은 1965년 처음 몇 달 동안 나쁘지 않다. 1965년 2월, 에르하르트는 34%로 다시 한번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 시점에서 사민당(SPD) 47%, 자민당(FDP) 7%,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 42%였다. 다시 한번 선거 결과가 나빴다. 이에 대해 기민당(CDU) 당대표인 아데나워가 공동 책임을 져야했다.     

이 또한 아데나워가 대중 앞에서 중동을 비판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책과 이집트 정책으로 야기된 심각한 내각 위기에 맞서고, 동시에 정부의 프랑스 정책에 관한 심각한 불만을 지니며 에르하르트의 형편없는 지지도에 놀란 그는 이제 수상과 외무장관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추락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와 더불어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 몰락도 촉진한 꼴이 되었다. 1965년의 권력투쟁에서 에르하르트는 독일 유권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더불어 자기 후계자를 몰아내고 싶었던 아데나워 자신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실각     


몇 달 동안 아데나워의 정치적 운명은 라이너 바르첼의 운명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1964년 12월 이후 공식적으로 원내대표인 바르첼은 에르하르트를 대체하기 위한 모든 구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새 인물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열정, 강인함,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가 수상 자리를 노리고자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 관심을 끌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점점 더 바르첼에 마음을 주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첫 음모는 1965년 3월 5일 내각 위기가 절정에 이르고 에르하르트의 지지도가 바닥을 칠 때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아데나워, 크로네, 게르스텐마이어, 라스너는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 논의하였다. 에르하르트가 물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솔직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늘 그렇듯이 아데나워는 이때 크로네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는 과거의 생각을 다시 꺼냈다. 그러나 크로네는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게르스텐마이어의 야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라스너는 이 작은 모임으로 당이 에르하르트를 몰아내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가 스스로 물러나면 바르첼이 선출될 것이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마침내 위기를 넘겼고 그의 지지율도 곧 상승했다. 그러나 이면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적어도 그 책략의 일부나마 일기에 기록한 하인리히 크로네와 같은 바르첼의 반대자는 이제 막 41세가 된 바르첼이 샤움부르크궁의 에르하르트의 자리를 차지할 첫 번째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아데나워가 그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오로지 바르첼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다면 이는 그의 인사정책적 전술의 모든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965년 봄과 초여름에 갑자기 기민당(CDU)의 하늘 위에 떠오른 이 정치적 신성은 여러모로 주목받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그는 기민당(CDU)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이미 여당 대다수가 그를 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당 내부에서의 게르스텐마이어에 관한 거부감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도 현재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에게 맞서 당내에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연방 대통령이었다. 그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정이나 사민당(SPD)과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연정에 관한 생각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당 내부에서 바르첼을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에 따르면, 바르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곧 자민당(FDP)과의 연정이나 사민당(SPD)과의 연정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문에 따르면 륍케가 한 때 바르첼을 대연정 정부의 수상으로 눈여겨보고 있었다. 또한 연방 대통령은 이미 5년 전부터 대연정을 준비해온 게르스텐마이어를 다시 지지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파울 뤼케의 이름도 수상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대두되었다.     

총선 4개월 전인 5월에 들어서서 기민당(CDU) 지도부는 하인리히 륍케가 대통령으로 재선된 후 에르하르트를 연방 수상으로 추천하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에 관한 자기 정책을 거부한 슈뢰더 또한 그의 마음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런 마음은 1965년 8월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일단 아데나워와 륍케는 현재 일시적으로나마 같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동맹은 자기 직위의 위엄을 끔찍이 여기는 연방 대통령이 뢴도르프로 아데나워를 직접 찾아갈 정도로 진전되었다.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난 작은 사고의 충격에서 회복 중이었다. 5월 7일 카데나비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인골드익스프레스 열차가 코블렌츠를 떠난 직후 세미 트레일러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가 났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거의 3주 정도 쉬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국빈 방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여왕이 보낸 50송이의 장미 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연방 대통령으로부터 “슈뢰더를 절대로 자시 외무장관으로 기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3월부터 1965년 9월 19일 총선까지 아데나워와 륍케는 최소한 여섯 차례 대담을 나누었다. 이렇게 하여 에르하르트에 관한 음모는 매우 공식적이고 최고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아데나워가 이 무렵에 에르하르트의 교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관계자들에게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데나워가 대연정을 추구한다는 의미인가?     

그는 여전히 사민당(SPD)을 매우 불신하고 있다. 그가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국금속노조 위원장인 오토 브레너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 노조 파벌이었다. 그는 사민당(SPD) 안에서 긴급헌법에 관한 반대의견을 관철한 차였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처럼 그도 사민당(SPD)에 대한 정면 공격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주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편 그는 6월 초 전략 회의에서 선거운동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연정은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선거 다음 날 전장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얼마든지 그럴 시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총선 8개월 전부터 무수히 진행한 대담과 관련하여 그를 승계할 당대표 문제가 가시화되었다. 이 자리는 한 가지 목표와 필연적으로 얽힌 문제와 연계해 보아야 했다. 바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모든 예상과 달리 총선에서 승리하더라도 결코 기민당(CDU) 당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기독교 보수 계파의 지도자들은 하인리히 크로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프후에스도 이 판에 뛰어 들었다. 브루노 헤크는 두프후에스 아래 있는 사무총장의 물망에 올랐다.     

그래서 에르하르트의 왕좌의 토대는 아데나워의 매우 열성적인 지원으로 이미 1965년 총선 전부터 그리고 그의 실각이 있었던 1966년 가을 이전부터 오래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르하르트에 맞선 음모가 기민당(CDU) 내부에서 진행되는 동안, 외부적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연방 대통령이었다. 그는 선거 3일 전에 당 대표단 위원 모두에게 매우 이례적인 편지를 썼다. 그는 예상되는 아슬아슬한 선거 결과와 관련하여 음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총리에게 국민 사이에 혼란을 조성할 수 있는 제안을 하거나 그를 지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그가 사민당(SPD)을 포함하는 연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이 편지는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크로네도, 그리고 또한 아데나워도 이 편지가 발송되기 한 달 전에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제안은 헌법적 정책 차원에서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기는 하다. 실제로 위헌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에 따르면 여당의 추천권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륍케의 제안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흡족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상으로 재직할 때는 연방 대통령이 연방의회와 여당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 모든 시도를 차단했었다. 그러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의 싸움은 분명히 모든 뒤집기를 정당화했다! 이 시절에도 아데나워는 원칙이 아니라 권력에 따라 행동했다.     

총선 캠페인의 열기가 고조되는 단계를 앞두고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지지하는 이들도 그들의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구텐베르크, 뤼케, 베너 간의 유대는 단절된 적이 없었다. 1965년 5월 20일에 파울 뤼케는 구텐베르크 남작으로부터 모든 필수 사항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베너는 이전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질문에 대하여 그는 심지어 브란트가 더 이상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게르스텐마이어라는 사람에 관해서도 그는 이전보다 덜 부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외교 정책 분야에서 적어도 사민당(SPD)의 이 중진 의원은 아데나워의 입장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랑스 문제와 관련하여 대화도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베너는 순전히 부정적인 ‘반드골주의’로부터 벗어나 드골에 대해 비난하는 것보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속합니다. 불행히도 사민당(SPD)은 이미 이러한 비난을 해왔습니다. 나는 또한 베너가 슈뢰더의 독일 정책에 대하여 매우 큰 우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슈뢰더는 점점 더 자민당(FDP)이 주장하는 노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질의 시간 참조.)” 그들은 7월 말에 일련의 현실에 관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만날 것에 동의했다. 논의 주제는 선거법, 재정 개혁, 관세 주권 문제, 연방 철도와 연방 체신청의 구조 조정이었다.     

결국 파울 뤼케는 에르하르트 내각의 주택부 장관으로서 그러한 대화를 갖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주저가 없다. 그러나 부모의 친권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뤼케와 구텐베르크는 베너를 만나기 전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이야기할 만큼 똑똑하고 충성스러웠다.     

1965년 7월 말에 베너에게 보고할 놀라운 일이 있었다. 대연정에 대해 가장 단호하게 반대하던 에르하르트가 뤼케와 구텐베르그에게 대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대연정이 이루어지면 총리직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구텐베르크가 베너에게 마침내 7월 26일 다이데스하임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에게 에르하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여러 의미가 담긴 대답을 하였다. “미안합니다.”라고 말이다. 에르하르트의 주변 인물들, 특히 폰 하셀, 슈뢰더 및 슈뮈커 장관이 대연정에 반대했다.     

에르하르트는 적어도 아데나워가 분명히 자기를 자리에서 내보낼 계획에 대해 알고 있고 이를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더 집중적인 사전 탐색이 시작된 5월에 파울 뤼케는 아데나워와 매우 자주 만났다. 5월 3일 그는 카데나비아로 그를 찾아왔다. 8일 후 그는 다시 뢴도르프를 크로네와 함께 찾았다. 6월 초 뤼케·구텐베르크의 작전이 이미 진행 중이었을 때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크로네는 아데나워와 또다시 만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말하지 말 것 :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원과는! 그리고 또한 하지 말 것: ’어떤 경우라도 사민당(SPD)원과 말하지 말 것.‘ 이는 새로운 것임. 나는 이것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선거운동 지도부에 이것을 말하자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민당(SPD)과의 탐색전에서 뤼케는 기민당(CDU)의 문화·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말 것을 콘라드 아데나워가 강조합니다. 세계관, 근본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신과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습을 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대연정을 지지하는 사민당(SPD) 의원들이 기민당(CDU)의 학교정책에서 바라는 바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보였다. 헤르베르트 베너는 개신교로 돌아왔고, 당의 일원이기도 한 게오르그 레버는 저명한 가톨릭 평신도로서 기민당(CDU)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1965년 초여름에 아데나워는 사민당(SPD)과의 연정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들을 격려는 하되 확정하지는 않고 기민당(CDU)이 가능한 한 많은 표를 얻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여기에서 그는 선거전에서는 사민당(SPD)에 정면으로 맞서고 공격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에 에르하르트와 견해를 같이했다.     

결과가 확실해지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자신이 몇 달 동안 추구한 노선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전투에서는 단결하지만, 전투에 참여하기 전에는 우리와 같이 구성된 정당이 단합된 자세로 나갈 것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여든아홉 살의 노인이 이제 총선 선거전에 다시 한번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전국의 모든 유세장에 나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민당(CDU)에서 임대한 메르체데스 600 자동차로 본에서 도달할 수 있는 지역에만 집중하였다. 결국 그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트-팔츠 주, 그리고 헤센 주 북부 지역의 많은 유세장을 찾았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뉘른베르크의 대규모 유세에 그를 초정하는 데 성공했다.     

기민당(CDU) 지지자들에게 그의 매력은 여전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만이 거의 비슷한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선거 연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날카로운 공격과 농담이 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환호했다. 그는 이제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를 지지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브루노 데캄프스조차도 선거 유세에 참여한 아데나워가 날마다 최대 30분 동안 3번의 인사말과 7번의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감탄이 담긴 기사를 실었다. 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는 명료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 열정적으로 위협하는 검지, 그에게 낯익은 혈기로 연설했다. 사람들은 그를 약 72세쯤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5개월 후에 그는 90세가 된다는 사실을.”


그의 선거 유세 참여가 정치적으로 생각해 볼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가 잠시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에 관한 어느 정도의 공개 비판을 연기하기로 한 결정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당대표로서 선거운동에서 단호한 결속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집단심리학의 기본 원칙을 기억한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사실 그는 선거 연설에서 에르하르트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국의 핵무기 비확산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었다. 1965년 8월 17일, 미국은 핵무기 비확산 조약 초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는 소련이 바라는 것과 매우 일치하였다.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이 조약의 모든 당사국은 핵무기를 직접적으로나 아니면 군사동맹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 핵무기를 보유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모든 국가는 핵무기 사용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국가와 기타 조직의 총수를 증가시키는 조처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조약의 당사국인 모든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의 핵무기 제조를 지원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아데나워에게 이것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 정부가 현재 베트남 전쟁에서의 어려움을 소련과 ‘분담’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였다. 이틀 후 그는 뮌스터의 프린치팔마르크트에서 이러한 협약에 결사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것은 ‘기괴하며’ ‘배신’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종말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러시아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었다’. 미국의 계획은 “끔찍하고, 위험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론”이었다. 선거 연설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외쳤다. “나는 이 이야기 때문에 독일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으면 합니다.”     

이는 독일 연방정부 안에 깊은 골이 다시 파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는 매우 현명하게도 공개적인 논쟁을 자제했다. 미국 측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아데나워를 무시해버렸다. 마틴 힐렌브랜트 특사는 8월 30일 미국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슈뢰더를 쫓고 있는 아데나워, 슈트라우쓰, 구텐베르크와 같은 사람들 덕분에 기민당(CDU)은 핵무기 비확산 조약에 관한 협상을 놓고 이제 정치적 축구 경기를 하고 있다.” 기민당(CDU)과 기민당(CDU)을 지지하는 언론에서 힐렌브란트는 계속해서 전 수상을 변호하고자 했다. “그의 나이를 보면 이제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그의 주장이 과장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되었습니다. 그의 비판을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아데나워에게 단순한 선거 캠페인 전략이 아니었다. 핵무기 비확산 조약과의 싸움에서 그는 문자 그대로 그의 임종에 이르기까지 그를 분노케 한, 그의 정치 인생의 마지막 큰 주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을 위해 적어도 핵무기의 자체 생산은 아니어도 적어도 핵무기 공유를 이룩하는 것이 그의 수상직에서 비밀리에 추구된 위대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지가 이제는 긴장 완화의 희생물이 된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가 보기에 이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지나친 신뢰와 불충분한 주의로 추진된 미국 정책의 희생물이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1963년에 도달한 외교정치적 입장에 크게 집착했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대하여 눈이 먼 것은 아니었다. 1965년이 지나가면서 드골이 소련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1965년 9월 7일 독일 총선이 거의 두 주 남은 시점에서 이루어진 프랑스 대통령의 대규모 기자회견은 이러한 경향을 매우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그러나 드골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의 미국에 ‘예속’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럽이 대서양에서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건설적인 화해를 위하여 우리 자기 문제, 특히 독일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 날이 올 것을 주저 없이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가능한 유일한 길은 포괄적인 합의입니다.” 반면에 그는 프랑스·독일 조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조약이 지금까지 여러 측면에서 진심 어린 접근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데나워는 이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9월 13일 열린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드골이 독일과 결별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곧 공개 성명에서 이러한 인식의 일부를 나타냈다. 총선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그는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최악의 공포심을 드러냈다. 1914년 이전의 독일의 근원적인 공포의 용어를 사용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포위 정책의 첫 징후는 프랑스에 대해 취한 외무부의 태도의 결과로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올해 4월 말 그로미코의 파리 방문, 임박한 쿠브 드 뮈르비에의 모스크바 방문, 말리노프스키 제독의 오스트리아 작전 참여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소련과 프랑스가 독일을 포위했다는 신호입니다.”     

이러한 성명은 분명히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외무장관으로 재임명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슈뢰더를 몰아내려는 투쟁은 그의 모든 외교 정책 업적이 무화될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프랑스의 델케시와 포앙카레, 러시아의 니콜라스 차르의 포위 정책의 유령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그는 30세에서 40세로 인생의 전성기에 있었다. 그러나 오류와 재난으로 반백 년을 보내고 난 지금 그것이 되풀이하려는 것이다. 그는 독일의 핵심 국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했지만 말이다! 1963년 1월 22일의 프랑스·독일 선린 조약에 관한 그의 언급은 점점 더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강령술처럼 들렸다.     

이 모든 일들이 이제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그의 에르하르트, 그리고 누구보다도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맞서는 싸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그는 슈뢰더의 정책이 불길한 것이라고 여겼다.     

1965년 봄, 그리고 여름에도 그는 총선 여파로 에르하르트, 그리고 그와 더불어 슈뢰더의 몰락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브라첼이나 게르스텐마이어가 연방 수상으로서 대연정을 맺든 자민당(FDP)과 함께하는 정부를 지속하든 상관없이 현재의 연방정부를 지속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르하르트가 1965년 9월 19일에 예상치 못했던 (과반수보다 단 세 자리가 부족한)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데나워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충격이었다. 이에 따라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구상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기민당(CDU) 당대표 회의에서 확실한 선거 승자에게 당을 완전히 맡기는 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주저하였다. 그가 구실로 내세운 것은 추천권을 침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연방 대통령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 바람은 기존의 헌법에 관한 이해와 최소한 16년 이상 된 독일 헌법사의 정치적 관행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민당(CDU)이 완전히 체면을 잃게 될 것이었다. 기민당(CDU)은 선거 참여 홍보에서 분명히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 관한 지지를 밝혔었다.     

이러한 분명한 입장에서 벗어나려는 아데나워의 의도는 이미 9월 초, 곧 총선 전에 개최된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이미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기민당(CDU)의 고위 정치인들은 그의 뜻이 관철되지 못하도록 하였고 에르하르트를 확실히 지지해 줄 것을 강요했다.     

선거 승리 직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불만이 가득했지만, 아데나워는 연방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수상으로 추천해야 했다. 에르하르트의 승리는 기민당(CDU)에서 이전에는 컸던 아데나워의 정치적 영향력을 종식했으며, 이제는 대중영합주의적인 수상 민주주의 체제의 원래 발명가를 정치적 변두리로 몰아넣었다. 1965년의 정부 구성에서 그는 거의 무시되었다.     

아데나워는 최근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에르하르트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된 선거일 직전에 이미 좌절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이 에르하르트의 지도로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는 다시 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9월 13일당 대표단 회의가 끝난 후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이야기하였다. 물론 그는 이 결정이 1959년부터 1963년까지와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가 총리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이 시기에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항상 호평받은 오토 슈마허-헬몰트는 8월 중순에 아데나워와 비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저는 귀하에게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선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 결과로 자기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던 게르스텐마이어는 이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솔직히 에르하르트를 연방 수상으로 밀 수는 없다는 것에서 그와 생각이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라지는 소수가 되었습니다.” 게르스텐마이어가 지금 아데나워와 긴밀하게 협력하고자 하고 핵무기 비확산 조약에 관한 공개적인 투쟁에서 그를 지원하는지는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거의 희생될 뻔했던 몇 달 동안에 거친 음모들은 9월 19일 유권자들의 의지로 다 날아가 버렸다. 이제 아데나워와 륍케의 전술적 협력은 양날의  칼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륍케는 기민당(CDU), 기사당(CSU), 자민당(FDP)의 실세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사민당(SPD)이 이제 전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방의회의 대다수는 이제 의회의 의석 분표를 볼 때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이 지속은 고사하고 더 이상 진지하게 시도조차 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민주의 연정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이론적 대안은 흑·적 연정일 것이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의 선거 승리 후에 이는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륍케와 아데나워는 이제 일을 망치는 자들로 보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사람들은 이들에게 더 이상 경의를 표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구석에 몰린 아데나워는 이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외무장관이 되는 일을 막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사실 슈뢰더와 에르하르트가 중동 위기 때 서로에 대해 화를 냈기에 이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도 이제는 아데나워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슈뢰더를 대체해야 한다는 말인가? 게르스텐마이어인가? 게르스텐마이어가 외무장관이 되는 것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연방의회 의장이 최근 아데나워와 륍케와 너무 노골적으로 놀아났기 때문이었다. 외무부에서 슈뢰더를 제거하기를 원했던 아데나워와 슈트라우쓰의 협력은 에르하르트가 오히려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했다. 결국 에르하르트는 슈뢰더에 관한 지지를 나타내며 슈트라우쓰를 절반 정도 만족시키고 아데나워와 륍케가 슈뢰더에게 계속 맞서는 것을 우스운 꼴로 만들어 버렸다. 본의 정가에서는 1965년 봄부터 륍케가 연방 대통령의 실질적인 심사권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 여지가 있는 법적 견해를 바탕으로 그는 슈뢰더의 임명을 거부하고자 했다. 슈뢰더는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중요한 전보를 보내어 외교 정책 과정에 관여하도록 하는 것을 합리적인 차원에서 거부하여 륍케를 분노케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륍케를 거부하는 데에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1965년 내내 륍케는 여러 대화에서 그가 어떤 경우에도 슈뢰더를 임명하고 싶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래서 이제 그가 슈뢰더를 막지 못한다면 체면을 크게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륍케는 슈뢰더의 반대파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브라첼과 슈트라우쓰는 이러한 점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여겼다. 둘 다 슈뢰더가 여당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슈뢰더가 외무장관이 될 수 없다면 게르스텐마이어나 키싱거가 반드시 후보군으로 등장하게 될 노릇이었다. 그들 각자는 외무장관으로서 명성을 높일 수 있고 조만간 에르하르트의 후계자가 논의되는 시기가 되면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었다. 결국 자기에게 맞는 외무장관을 추천하는 것은 연방 수상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지난 몇 주 동안 게르스텐마이어를 외무부 수장으로 만나고 싶어 하던 크로네와 두프후에스조차도 궁극적으로 에르하르트의 의지에 반하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나설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여당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뤼케와 헤크와 같은 기민당(CDU) 정치인을 설득하여 슈뢰더에 맞서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내각에 머물고 싶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슈뢰더를 막으려는 절박한 결심을 했어도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지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외교 정책의 노선 수정에 개입하기 위하여, 이때 진행되는 정부 구성을 거의 2년 동안 기다려왔던 터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의 커다란 선거 승리와 슈뢰더와 자민당(FDP)의 강력한 대응책과 관련하여 바르첼, 슈트라우쓰, 뤼케가 자리에 연연하고 있기에 아데나워가 결국 좌절하게 된 것이다.      

그에 남은 유일한 희망은 궁극적으로 이제는 전설이 된 연방 대통령의 성격이었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는 대통령직을 걸 의사가 있었다. 헌법 64조 1항에 따라 그가 슈뢰더 임명서에 서명을 거부할 때 연방헌법재판소에서 행정소송이 진행된다.     

10월 중순에 기민당(CDU)과 여당 연합의 지지가 눈에 띄게 약화하였지만,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는 아데나워와 게르스텐마이어는 륍케가 헌법소원을 제기하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10월 10일 《벨트 암 손탁》과의 기자회견에서 연방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장관 임명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 아데나워가 4개의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기자회견은 역효과를 낳았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0월 19일 아데나워는 연방 대통령에게 필사적으로 손 글씨로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외교 정책에 관한 그의 모든 두려움이 현재 슈뢰더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더 깊어졌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존경하는 연방 대통령 각하!     

또다시 괴롭혀 드려 죄송하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네바 군축회의에서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은 우리를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곧 드골은 당연히 우리에게 실망했습니다. 우리가 프랑스·독일 우호 조약을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급이나 3급의 세력이 되어 결국 러시아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드골은 슈뢰더가 다시 외무장관으로 임명되는 것이 그를 한방 먹이기 위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프랑스와 함께 할 때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슈뢰더의 임명은 우리에게 이러한 전망을 앗아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슈뢰더의 임명을 거절하십시오. 귀하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하십시오!     

간절한 염원들 담아     

아데나워 드림”     

슈뢰더 자신이 독일연방공화국이 ‘2급 또는 3급의 세력’이 되어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자신만의 방식과 방점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아데나워를 설득하려는 생각을 이미 포기했다. 그러나 륍케는 슈뢰더의 정치를 아데나워만큼이나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궁극적으로 연방헌법재판소의 소장인 겝하르트 뮐러만이 연방 대통령과 독일연방공화국이 대통령직의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뮐러는 륍케에게 그가 헌법소원에서 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럴 때 륍케의 사임은 불가피할 것이었다. 사실 륍케가 비교적 일찍 포기했지만, 슈뢰더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강경론자의 역할을 자처했을 것이라는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륍케가 양보하여 1965년 10월 26일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아데나워에게 이는 1963년 4월 패배 이후 둘째로 큰 패배였다. 슈뢰더가 임명되기 전날 그는 그를 카데나비아를 향해 ‘라인골드엑스프레스’에 몸을 실었다.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지키는 글롭케와 크로네, 그리고 바르첼과 새로운 양독일부 장관 그라들이 본 중앙역에서 그를 예전처럼 배웅했다. 그들은 아데나워가 이제 당대표 자리도 내려놓을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이리하여 그는 정치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는 《그리스도인과 세계》와의 대담에서 더 이상 기민당(CDU) 당대표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데나워는 자기 당대표 후임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여기에서 다시 한번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는 1965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슈마허-헬몰트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어려운 시기와, 자민당(FDP)의 출신의 재무장관인 달 그륀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음울한 대답만을 듣게 되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든 것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우울했다.” 하루 전날 프란츠 에첼이 매우 회의적으로 언급한 경제 상황!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민당(CDU)! 여당에 관한 그의 분노가 다시 솟아났다. 자민당(FDP) 출신의 전임 시장은 이제 기민당(CDU) 당대표가 그를 오랫동안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그는 한마디 말만 했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당과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당 지도부에서 그의 후계자의 규제를 추구하다가 또 다른 패배를 경험했다. 1966년 3월 21부터 23일까지 본에서 열린 기민당(CDU) 전당대회에서 아데나워의 후임 당대표를 선출해야 했다. 거의 모든 주요 인사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새 당대표는 여러 이유로 가톨릭 신자인 정치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민당(CDU)의 당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다. 에르하르트 정부가 ‘개신교 편향’이기에 다시 가톨릭 교파의 정치인이 아데나워를 승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해 보였다.


아데나워는 처음에 파울 뤼케를 후보로 점찍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곧 아데나워가 앞으로 있을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965년 말이 되자 그의 자민당(FDP)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매우 두드러졌다. 에르하르트의 제2기 정부는 이미 예산 문제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그 문제의 책임이 정부의 수장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민당(FDP) 출신 재무장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자민당(FDP)과의 불행한 연정을 깨고 싶다면 파울 뤼케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뤼케는 올곧은 사람이지만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부를 구성할 때 그는 자신을 내무부 장관 자리로 유혹한 에르하르트와 이미 합의한 바가 있었다. 이 직책을 그에게 맡길 때 모든 기민당(CDU) 정치인 가운데 파울 뤼케가 비상헌법 통과를 위해 사민당(SPD)을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중요한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뤼케는 에르하르트에게 어느모로 충성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뤼케가 다시 내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아데나워가 별로 기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65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아데나워가 공식적으로 자기 후계자가 될 것을 제안했을 때 뤼케는 기꺼이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두프후에스도 후보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1962년 이후 이 실무담당 당대표를 상당히 힘들게 해왔었다.     

두프후에스는 이에 실망했다. 게다가 그는 건강이 좋지 않고 여전히 공증인 사무실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후보 검색 과정에서 자신이 출마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66년 1월 말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밝혔다. 이때는 당대표 후계 문제를 둘러싼 당내의 싸움이 이미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두프후에스가 당대표 후보로 나서지 읺고, 뤼케는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키싱거와 바르첼이 전면에 나섰다. 둘 가운데 키싱거는 국외자 역할을 했다. 그는 후보군 탐색 과정에서 기민당(CDU) 남부 바덴 지역 기민당(CDU) 지방당 대표인 디흐텔을 추천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본의 고위직을 노린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게으르고 당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르첼의 주장은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관점에서 당대표와 에르하르트의 후계자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바르첼은 1966년 수상의 교체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의 위임을 받아 당대표직 문제를 교통정리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글롭케는 1월 13일에 그가 에르하르트를 이어 연방 수상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말을 그에게 듣게 되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었다. 바르첼은 1966년 7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의 지방선거가 있기 전에 수상 교체 작전을 시작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진술의 타이밍은 놀라운 것이었다. 1966년 불황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방 예산 문제도 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7월에 있었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심각한 선거 패배 역시 미래를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연정이 결코 절망적으로 흔들리지 않았고 에르하르트는 사실 약 3개월 전의 선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첼은 실망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가 앞으로 실패만 거듭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기 생각을 곧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차기 총선이 있기 3년 전인 지금 수상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에르하르트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도에 비추어 바르첼은 특정한 인물을 당대표로 뽑는 것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프후에스는 샤움부르크궁을 노리고 있지 않기에 그가 받아 들일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키싱거는 달랐다. 바르첼은 그가 수상 후보자가 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를 본의 무대에서 멀리하고 싶어 했다.     

아데나워는 바르첼이 에르하르트의 후계 자리를 노리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좋은 일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글롭케를 통하여 그에게 에르하르트의 후계자에게 집중해야하며, 그렇게 하도록 자신이 지원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66년 1월 중순까지도 뤼케를 당대표로 밀고 싶어 하였다.     

바르첼은 이제 몰래 에르하르트를 밀어내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아데나워도 밀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로 그는 에르하르트가 정말로 그렇게 빨리 물러날 것인지 의심했다. 그는 이 시기에 에르하르트가 1969년 6월까지 버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1월 중순에 소식통들은 두프후에스가 더 이상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뤼케도 조심스럽게 후보군에서 물러났다. 이제 바르첼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에르하르트 자신이 기민당(CDU) 당대표 자리에 올라 자기 야망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키싱거도 여전히 후보군에 있었다. 그래서 바르첼은 아데나워에게 모든 것을 걸고 그 자신이 에르하르트를 막기 위해 이제 당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데나워는 사실 직위를 분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뤼케가 후보가 되는 일이 물거품이 된 이후 아데나워는 바르첼에게 전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1959년 이후 계속 등장한 승계 조정에서의 많은 다툼이 있은 이후, 이제 큰 해결책이 나올 것이었다. 곧 조만간 바르첼이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대체하여 수상이 될 것을 예상하면 당대표와 원내대표를 한 사람이 맡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한 세대교체의 문제도 설득력 있게 해결될 것이었다. 전도가 양양한 헬무트 콜은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고, 너무 나대는 팔츠 지역 기민당(CDU) 대표였다. 그러나 그런 콜이 당 대표단 회의에서 새로운 내각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재생 능력’에 대해 뭔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을 요구하여 아데나워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데나워 이에 대해 매우 마지못해 반응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기회에 그는 내각과 여당에 젊은 인물들이 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았다. 다른 정당들에서는 급진적인 세대교체가 이미 이루어진 터였다. 52 세인 빌리 브란트는 당 대표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슈트라우쓰는 이제 막 그의 50번째 생일을 지낸 참이었다. 에리히 멘데는 49세였다. 기민당(CDU)이 41세의 바르첼을 정상에 올린다면 모든 당대표 가운데 막내가 될 것이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종전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충성스럽게 당을 섬겼으나, 당의 지도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늦게 오른 사람들의 거부감을 알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슈뢰더, 폰 하셀이 그러한 주장에 반발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또한 가톨릭 파벌의 지도부 인사들 사이에서 바르첼은 강력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크로네는 바르첼이 빤질거리고 이기적이며 허영심이 많고 너무 깊이가 없는 관리자 유형이라고 여겼다. 글롭케는 이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두프후에스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영 달가워하지 않았다.     

헬무트 콜이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유형의 젊은 사자들은 바르첼이 매우 젊은 당대표로서 오랫동안 최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환영하지 않을 노릇이었다. 콜과 슈톨텐베르크가 차라리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당대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가 진심으로 존경하던 지도자적 인물은 콘라드 아데나워였다는 것이다. 당의 젊은이들은 1950년대 내내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를 위해 싸웠다. 에르하르트가 당대표직에 오른다면 이는 매우 정당한 것으로 보일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너 바르첼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아데나워는 그것을 매우 다르게 보았다. 그는 바르첼이 지금까지 자기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활용한 날카롭고 전술적으로 영리한 접근 방식을 좋아했다. 바르첼은 마침내 에르하르트의 정책은 파국적인 것이기에 역동적인 정당 지도자만이 그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아데나워를 설득했다. 역동성에서도 바르첼이 한 수 위였다. 이 무렵 아데나워가 한 모든 발언을 보면 그는 바르첼이 기민당(CDU)의 가장 유능한 젊은 정치인이며 동시에 당대표인 에르하르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곧 공개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물론 에르하르트는 이 젊은 원내대표가 그를 끌어내릴 기회를 노리는 추격자임을 감지했다. 에르하르트는 바르첼이 아데나워 계파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람임을 제대로 간파하였다. 바르첼이 점점 더 도전 의사를 드러내는 만큼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기민당(CDU) 당대표가 되는 것이 자기 위신을 세우는데 필요해 보였다.     

에르하르트가 자발적으로 후보가 되지 않는다면 바르첼에게는 가장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2월 10일쯤 전당대회에서 결선투표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바르첼이 이 중요한 시기에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가르미쉬로 떠난 것에 대해 화를 냈다.     

기민당(CDU)의 원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에르하르트가 연방정부의 경제부 장관 시절 내내 공식적으로 기민당(CDU) 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데나워는 그 문제로 에르하르트를 몰아치는 데 주저하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논쟁이 절정에 이르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출신 연방 수상에게 그가 기민당(CDU) 당원이 된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묻는 서신을 보냈다.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당원임을 확인했다. 며칠 후 아데나워는 수년 전에 에르하르트가 아직 연방정부 장관이었을 때 이미 그에게 이 문제를 언급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때 에르하르트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고 한다. “귀하께서는 기사당(CSU)에 입당하시겠습니까?” 베스트셀러가 된 《로마 시대의 엘리베이터》의 저자이며 진지한 인물인 루돌프 푀르트너는 1989년 자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에르하르트는 기민당(CDU) 당대표가 되기 하루 전에야 기민당(CDU)에 입당했다고 밝혔다.     

아데나워의 견해에 따르면 에르하르트를 선출하는 것은 단순히 또 다른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일만이 아니었다. 아데나워와 그의 여전히 남은 추종자들은 또한 에르하르트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일부만을 대표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일단 바르첼을 밀기로 그의 마지막 남은 권한을 행사한 후이니, 좋든 싫든 이제 그 입장을 고수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바르첼은 결과를 알 수 없는 채로 전당대회에서 공개 토론을 벌이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에르하르트가 기민당(CDU) 당대표에 단독 출마하는 것에 동의했다. 자신은 직무대리의 역할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이리하여 적어도 기민당(CDU) 당대표의 후계자 선출에서 당의 노선을 자기 뜻대로 정하고자 했던 아데나워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이제 에르하르트에 관한 최종적인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그가 할 일이라고는 기분 나쁜 경기에도 좋은 얼굴을 하고 본의 베토벤홀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명예 당대표 자리로 물러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946년 3월 24일 절반 정도 파괴된 쾰른대학교에서 영국 점령지의 기민당(CDU) 대표로서 첫 기조연설을 한 지 정확히 20년이 지났다. 당시 그는 이미 70세였다.     

1966년 1월 5일 그는 자기 90번째 생일잔치를 맞이하였다. 생일잔치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고 그의 기분은 분명히 좋았다. 본의 모든 사람이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과거 화려했던 수상 시절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의 미사, 천 명이 넘는 손님이 참석한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개최된 축하연, 무도회장에서 개최된 연방 대통령 주최의 만찬, 그리고 끝으로 본의 호프가르텐에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진행된 횟불 행진이 이어졌다.     

그가 하인리히 륍케와 함께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쾰른대학교의 아라파치스(Ara Pacis) 기념물 아래 등장한 것은 이미 자정이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그의 변치 않은 꼿꼿한 모습을 가까이에서나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그를 하나의 기념비처럼 여길 정도였다.     

라인지역의 쾰른대학교에서 공부한 지도 벌써 70년이 지났다. 그 당시만 해도 비스마르크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도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었지만, 지금의 아데나워보다는 훨씬 덜 영향력이 있었다. 20세기의 무시무시한 괴물들, 곧 히틀러와 스탈린은 이 당시 이미 오스트리아와 먼 조지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20세기의 운명을 바꿀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이후로 그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그 영향이 없지 않았다. 학생 시절 아데나워에게 익숙한 모습의 독일제국도 사라졌다. 독일 핵심 국가는 후일의 짧으면 짧고 길면 길 역사 수업을 위해 본에 중심을 두고 세워졌다. 여기에서 독일의 국가 재건과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은 이 본 공화국은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의 작품이었다. 적어도 이에는 그의 친구와 적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시대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존경을 받은 독일 초대 수상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겪어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낯설고, 더욱 낯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느낌에 이미 익숙하고 때때로 이를 분명히 표현했다. 거의 25년 전인 1941년 1월 5일, 그는 65세 생일을 맞아 이렇게 썼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과 사람들을 더 알 수 없게 된다. ... 모든 것이 아주 이상하다.” 그 이후로 사물에 관한 이러한 관점을 수정할 이유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1966년 첫 달은 정치권력과의 마지막 작별을 하는 시기였다. 아데나워가 1966년 3월 전당대회에서 연설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가부장의 모습을 한 그를 보고 경탄했다. 그는 꼿꼿하게 서서 열정을 다하여, 거의 자유발언 형식으로 자기 정치적 유언을 전달했다. “우리의 주요 목표는 서방의 자유 민족들과 유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의 독일 분단에 관한 언급은 당시의 많은 사람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내다보고 한 것이었다. “우리는 독일이 평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소련도 이 독일의 분단, 그에 따른 유럽의 분단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가 오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리한 기회를 가져다주는 순간이 다가오거나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중에 독일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은 그 당시 이미 당대표의 마지막 연설을 듣고 있던 대표단에 속해 있었다. 당시 34세의 그는 14일 전에 라인란트-팔츠 지방 기민당(CDU)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내 기민당(CDU)의 원로들을 몰아내고자 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아데나워로부터 수천 번 들었던 ‘오래된 진리’가 아니라 그의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새로운 어조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에서 소련이 평화를 위하여 중재한 사실을 지적하며 아데나워는 “소련이 평화를 원하는 민족들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담대한 단어”가 옳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사실상 계산된 놀라운 발언의 진의에 대해 많은 추측이 난무하였다. 냉정한 언론인들은 이 발언이 단순히 전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다시 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바로 다음 날 자기의 모든 발언을 번복했다. 그는 소련이 평화가 필요하기에 평화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을 잊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콘라드 아데나워는 세계 정치를 긴장 완화의 징표로 보고 있다. 그레서 우리 독일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아데나워는 아마도 며칠 후 발행되는 연방정부의 ‘평화 구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 말은 아데나워가 열흘 전 파리에서 드골과 두 차례 나눈 대화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드골은 당장은 아니지만 ‘유럽의 긴장 완화’가 언젠가 와서 독일 통일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재삼 상기시켰다. 그러나 드골 자신은 소련을 상대할 때 신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는 아데나워가 그에게 권유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 대화를 위해 아데나워는 드골에게 프리테의 책 《러시아의 영구 운동 기관》을 선물하며 가끔 읽어보라고 권유하였다. 수 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확장 욕망의 역사를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이전의 외교 정책적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법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1966년 8월 말 기민당(CDU)의 당 대표단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과거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1945년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한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주지시켰다. 이 작전은 “기습 공격으로 유럽, 특히 독일을 점령하여 미국의 공수부대를 더 이상 배치할 수 없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 소련의 7개 기갑 사단을 신속하게 배치하기 위한 도로와 철도의 건설, 그리고 중장비를 국경에 배치한 것으로 소련의 전략이 목표로 하는 곳이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독일연방공화국이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에 에르하르트는 미군의 유럽 주둔과 미국의 억제력이 먼저임을 강조하였다.     

물론 아데나워도 이를 알고 있다. 1966년 7월 드골은 독일 연방참사회 부속 건물로 아데나워를 찾아왔다. 드골은 오늘날 소련에 관한 자기 평가가 너무 낙관적이라는 거의 솔직담백한 아데나워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1966년 8월 아데나워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이러스 슐츠버거는 아데나워로부터 유럽이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느냐는 기습적인 질문을 받으면서 커다란 지구본 앞으로 이끌려 갔다. “소련의 크기를 보세요. 유럽에서도 이미 거대하지만, 땅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에 있습니다. 나머지 유럽은 소련에 비해 작습니다.”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 2권에도 이를 암시하는 지도를 넣도록 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미국인 방문객은 독일의 대표적인 이 드골주의자의 입에서 미국의 유럽 주둔에 관한 동의의 말을 듣게 되었다. “유럽은 함께 뭉쳐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없이는 유럽의 통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미국이 우리 편에 서지 않으면 결국 유럽은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이전보다 훨씬 더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나라가 너무 힘든 길에 들어선 사실을 깨닫는다면 물러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는 음울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전 세계가 놓인 상황에 대해 진지하고 매우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위험은 미국이 유럽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결국 유럽은 여전히 미국에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나는 늘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간과한다면, 그래서 소련이 실제로 독일과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다면 우리와 미국의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는 스위스의 언론인인 폰 살리스 교수에게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1966년 8월 초에 나눈 대화에서 폰 살리스 교수는 자신이 미국 정치의 지혜에 대하여 단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지혜라고요?” 아데나워가 비웃으며 외쳤다. “미국은 유럽을 전혀 이해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지혜에 대해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의심했다. 그는 드골이 그 한 가지 예라고 여겼다. 그는 다시 과거의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폰 살리스에게 말하기를 드골에 따르면 독일연방공화국은 공산주의 프랑스, 공산주의 이탈리아,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어 “독일 경제로 소련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만 하게 될 것”이었다.     

마침 이때는 게르스텐마이어가 119호실에 있는 어르신을 가끔 찾아와 그와 함께 그날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앞으로 있을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어느 날 아데나워는 그를 창문으로 끌어와 라인강 산책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때때로 러시아 군인들이 드럼형 탄창을 사용하는 기관총으로 이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순찰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이때와 또 다른 경우에 그는 “소련이 평화를 원하는 민족들의 대열에 섰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에 관한 성찰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기 임기 말년에도 외교 정책에서 많은 모순과 미숙함을 보여준 바가 있다. 사실 이는 궁극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함께 서유럽의 정치적 핵심을 구축하되 미국의 유럽 주둔 자체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소련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긴장 완화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했다! 통일이라는 목표를 고수하되 긴장을 놓지 않는 현상 유지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했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의 임기 말년에 이러한 모순과 다른 모순들 사이에서 중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아데나워의 정치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1966년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몇 가지 목표들을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제쳐 두었다. 이제 영국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1950년대 중후반 독일의 외교 정책 구상에서 강대국으로 여겨야만 했던 나라를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1965년 1월 말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이때가 해마다 기관지에 문제가 생기는 독감의 계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바이리쉐 룬드풍크》 방송국에서 짧은 조사를 읽는 일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는 영국 총리들 가운데 처칠과 가장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영국이 노동당 정부 아래에서 반독일 정서를 강화하면서 [소련과] 온건한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여겼다.     

유럽 경제 공동체의 정치적 잠재력에 관한 그의 의구심도 커졌다. 그는 유럽경제공동체(EEC)가 ‘경제적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경제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발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는 유럽 연합에 따른 가시적인 정치적 발전은 주로 ‘퓨셰 II 구상’(Pouchet II)을 모범으로 한 정치 연합의 형태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66년 7월 메츠에서 거행된 로베르 쉬망에게 기념 훈장 수여식이 있었을 때의 경우처럼 그는 연방주의의 시작에 대하여 아직도 가끔 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1950년대 초 유럽 통합 정책의 선구자였을 때도 초국가적 기구의 수립에 관한 그의 동의는 신중한 실용주의와 연계된 것이었다. 유럽 연방국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장기적인 목표로 보였고, 그의 관점에서 최종 결정은 가까운 장래에 각국의 정부에 맡기는 것이 당연했다. 드골의 영향으로 이러한 실용주의는 더욱 강해졌다. “연방이나 동맹이 수립되든, 법적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 협상, 시작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유럽 경제 공동체의 수립 이전인 1956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가톨릭대회의’(Grandes Conferences Catholiques)에서 ‘유럽의 곤경’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동부 지역의 잃어버린 독일 영토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했다. 그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수상 재임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공식적인 임무를 떠난 후인 1966년 12월 그는 드골 특사에게 모호한 발언을 했다. 프랑스가 독일 통일을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드골이 러시아와 독일의 화해를 이끄는 일에 성과를 거두고, 독일은 프랑스의 안보에 필요한 만큼 엘베강 동쪽 지역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더·나이쎄 국경은 현재대로 두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사실상 평화조약을 유보하겠다는 의미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부 지역의 영토가 확실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데나워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논할 가치가 없다. 다만 그가 이제 외국인을 상대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그는 1962년과 1963년에 이미 도달한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것이 목판화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동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독일의 핵무기 보유 선택지가 아직 유효하다는 것, 프랑스와의 양국동맹 개념의 요구가 그것들이다. 그의 차별화 기술, 모순을 전술적으로 균형 잡는 기술, 참을성 있게 시간을 버는 생존 기술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정보가 없었다. 의사 결정의 중심에 그는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을 하는데 뛰어났던 그가 이제는 그저 완고하게 자기 의견에 집착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노인이 되고 만 것이다.     

외교정책에 대한 그의 냉소주의는 늘 강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폰 살리스에게 생각해 보라고 했다. “역사가로서 잘 알고 있지요? 외교 정책에서는  가장 노골적인 이기주의만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기주의와 어리석음! 그에게 그 좋은 예가 바로 요제프 룬스였다. “멀대같이 키가 큰 녀석이죠. 나는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요. ... 당신은 정치인이 얼마나 멍청한지 모릅니다. 평생 정치에 관여해보면 알 수 있어요.” 그는 이런 식으로 불만을 털어놓고 비판을 가했다. 물론 그가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다. 그가 수상 재임기에 이룩한 외교적 업적이 1966년에 들어서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63년 10월 16일부터 1966년 3월 22일까지의 2년 반 동안의 국내외 정치 활동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는 수상재인 후반기에 거부당했던 것을 당대표로서 강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민당(CDU)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에만 성공을 거두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실패했다.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의 프랑스 정책을 완전히 수정해보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1966년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1964년이나 1965년보다 훨씬 더 나빴다. 심지어 드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프랑스를 탈퇴시키고 독일연방공화국에서 프랑스 군대의 지위에 관한 논란은 가장 불쾌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아마도 아데나워의 끊임없는 중재 노력은 드골의 부정적인 기분을 달래고 에르하르트를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자기 뜻을 관철할 수는 없었다.     

당대표는 매우 약한 지렛대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기민당(CDU) 당대표로서 아데나워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막는 것은 고사하고 1965년 9월과 10월에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외무부에서 몰아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기민당(CDU)의 정상에서 20년을 머문 끝에 당이 그에게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자기 후계자로 선출해야 하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에르하르트는 전혀 제대로 된 기민당(CDU)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마지막 패배 후 아데나워는 투덜거리며 다시 한번 카데나비아를 향해 ‘라인골드’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1966년 6월과 7월에 그가 개인적으로 다시 개입한 마지막 선거운동조차도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기민당(CDU)은 이제 결국 패배했고 아데나워가 서독에서 자기 정당을 집권당으로 이끈 노르르라인-베스트팔렌 주를 나중에 드러난 대로 영원히 잃게 되었다. 더 깊은 의미에서 3월 당대표직 사임이 아니라, 1966년 7월 10일 노르드라 인-베스트팔렌 주에서의 선거 참패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아데나워는 처음에 이 기민당(CDU)의 핵심 주에서 탁월한 선거운동가로 자리를 잡았기에 궁극적으로 유럽 정치 무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1946년 10월 13일 치러진 주의회 선거와 시의회 선거부터 아데나워 시대의 초기 역사가 이루어졌었다. 당시 기민당(CDU)은 46%, 사민당(SPD)은 33.4%의 득표율을 보였다. 그 이후로 기복이 있었지만, 연방정부 차원에서 아데나워 치하의 기민당(CDU)이 권력의 정점에 이르면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의 성공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제 1966년 7월 10일에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사민당(SPD)은 6%p 이상 더 올라 49.5%의 득표율을 보였다. 기민당(CDU)의 득표율은 4%p를 잃어 42.8%로 떨어졌다. 기민당(CDU)에 신들의 황혼*이 찾아온 것이다. 당시 많은 신문들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역자주 –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제4부의 제목으로 주인공들이 모두 죽는 비극적 결말에 빗대어 나쁜 결말을 의미하게 됨]     

본의 많은 사람은 아데나워의 상황 판단에 큰 관심이 있다. 기민당(CDU) 당 대표단은 명예 당대표의 의견을 여전히 존중하기는 했다. 때때로 륍케 연방 대통령이 그를 초대하였다. 프랑스대사 세두와 미국대사 멕기도 그를 잊지 않고 가끔 방문했고, 거의 15년 동안 정기적으로 그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눈 나훔 골드만도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자, 교수, 심지어 위대한 인물을 만나보고 싶은 리제로테 풀버와 같은 배우도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방문객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신화 속의 동물쯤으로 여기며 경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래된 충복들인 한스 글롭케, 하인리히 크로네, 호르스트 오스터헬트, 브루노 헤크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게르스텐마이어와 라스너도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다. 또한 바르첼도 연방의회 건물 별관, 뢴도르프, 카데나비아로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이 원내대표는 2월에 에르하르트에게 무릎을 꿇은 이후 아데나워는 그를 더 이상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바르첼에 관한 당과 언론의 분위기가 매우 비판적으로 변한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은 그의 활동 뒤에 무절제한 개인적인 야망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선거 참패 이후 아데나워는 이제 수상을 바꿀 때가 임박했음을 그 어느 때 보다 확신했다.     

“어르신께서는 에르하르트의 몰락에 착수했다.”라고 크로네가 간결하게 적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추가하였다. “그러나 바르첼이 그의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데나워는 이제 게르스텐마이어를 해결책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게르스텐마이어는 다시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슈뢰더와 폰 하셀이 추구한 노골적인 대서양주의, 곧 미국 중심주의는 수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게르스텐마이어가 그의 남을 대하는 태도로 불필요한 적을 계속 많아 만들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토론에서 게르스텐마이어는 독단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여당의 의원들은 그가 연방의회 의장이 되는 것은 받아들여도 연방 수상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데나워는 게르스텐마이어의 개인적인 자질은 인정했다. 그가 1966년 4월 25일에 게르스텐마이어의 60번째 생일기념 논총에 글을 기고할 준비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글이 보여주듯이 아데나워는 수상 시절의 격렬한 투쟁 끝에 호전적인 이 슈바벤 출신의 인물과 화해를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아데나워가 이미 에르하르트의 후계자에 관한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1966년 11월 에르하르트의 패배 이후 예기치 않게 승계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게르스텐마이어를 지지하는 것을 다소 꺼렸다. 슈뢰더, 바르첼,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가 후보로 부상했다. 아데나워가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1966년의 경험 이후 아데나워는 바르첼을 적극적으로 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바르첼이 수상이 될 만한 그릇인지에 대하여 의심하는 비평가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또한 아데나워는 내각 위기 동안에 게르스텐마이어가 얼마나 소극적인지를 보고 매우 낯설어했다. 1966년 10월 30일, 크로네는 일기에서 아데나워 수상이 바르첼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했다. 그는 게르스텐마이어를 차기 수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너무 수동적이기 때문에 지금은 바르첼을 더 좋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두 사람 모두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이유로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게르스텐마이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인 키싱거는 점점 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가고 있는 전임 수상과의 정치적 관계를 확립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 내각의 마지막 위기가 발발하기 오래전인 1966년 8월 5일 키싱거는 아데나워를 다시 방문했다. 11월 7일 에르하르트 정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는 다시 아데나워를 찾았다. 이는 헬무트 콜이 마침내 기민당(CDU) 당 대표단 회의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에르하르트를 이을 4명의 후보자를 지명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 4명은 라이너 바르첼,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 게르하르트 슈뢰더였다.     

1967년 3월 아데나워는 그 당시 키싱거를 반대하고 게르스텐마이어를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키싱거는 그를 놓지 않았다. 11월 10일 3차 투표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에서 수상 후보로 선출된 이후 그는 때로는 브루노 헤크를 통해, 그리고 11월과 12월에는 여러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긴밀한 연락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억지로 강요한다기보다는 기민당(CDU)의 새로운 인물의 신중함의 표시였다. 정부 위기의 발발이나 그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몰락하기 몇 주 전에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독일출판협회(DVA)가 1966년 10월 27일 그에게 청탁했던 둘째 회고록의 마케팅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였었다.     

아데나워는 11월 10일 여당과 원내대표단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의사 결정 과정과 결정 자체는 다른 곳에서 내려졌다. 곧 당 대표단, 기사당(CSU) 지방당 협의회, 남서독일 지방당 협의회, 라인란트-팔츠, 헤센, 자를란트 주 지방당 협의회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본의 무대로 키싱거가 복귀하게 된 것은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연방주의적 요소가 당 대표단과 원내대표단을 누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아데나워가 구축했던 연방 차원의 여당을 바탕으로 한 연방 수상과 연방 당대표가 중심이 되는 권력 구조는 거의 와해되었다. 아데나워는 그저 관객의 처지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된 기민당·기사당 연합(CDU/CSU Union)의 정치 지형을 바라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흑·적 연정 또는 자민당(FDP)과의 새로운 연정을 결정하는 문제에서도, 그가 끊임없이 전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그는 사민당(SPD)과 함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또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자민당(FDP)과의 새로운 차원의 연정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슈뢰더를 외무부에서 몰아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물론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이 정부 구성 직후 그에게서 들은 것처럼 그는 사민당(SPD)과의 연정에 대해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슈피겔》 사건과 관련된 모든 소송이 마무리된 이후에 아데나워는 1966년 12월 9일 《슈피겔》의 발행인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우크슈타인은 1965년 가을부터 그에게 만남을 요청했었다. 1965년 11월 19일 자 편지에서 그는 아데나워에게 매우 정중한 어조로 처음으로 면담을 요청했다. “많은 일이 일어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저희가 요청한 《슈피겔》과의 면담에 귀하께서 시간을 내주시면 참으로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저희 모두는 귀하께서 시간을 내주실 수 없을 정도로 하실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귀하께서 정하기 나름이라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귀하께서 허락하시면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또한 언론의 태도에 대하여 언짢아하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이렇게 귀하께 편지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우크슈타인은 아데나워 수상에 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수상 각하께, 진심 어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배상.” 이 대화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분명했다. 아데나워 수상은 《슈피겔》에 실린 자기 회고록 ‘제1권에 관한 뵐의 수준 낮은 논평’에 대하여 화가 났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만남을 자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965년 12월 1일자 답신의 초안에서는 “진심을 담아”라는 인사와 더불어 서명했지만 최종판에서는 “경의를 표하며”라는 인사만 하고 서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아우크슈타인에게 간략한 형식으로 자기 뜻을 알린 것이다.     

아우크슈타인은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10일 후에 아데나워 수상과의 ‘조속한 만남’을 이루기 위해 또 다른 시도를 했다. 1965년 12월 10일 그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당연히 “뵐 씨가 무엇을 쓸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또한 “《슈피겔》이 편집하여 발간” 했지만,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서평에 새삼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그 편지는 다시 매우 친절한 어조로 작성되었지만,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1년 후인 12월 9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대화에 관하여 한때 수상을 증오하던 아우크슈타인이 그의 상대방에 관하여 기록한 회고는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이 회고에서는 아데나워가 사민당(SPD)과 함께하는 것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온다. 아우크슈타인은 아데나워에게 새 정부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었다.      

“아데나워: ‘예와 아니오.’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몇 가지 헌법 개정이 필요하기에 사민당(SPD)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많이 돼요, 베너. 그는 아주 고약한 사람입니다. 그가 떨어져 나간다면 ... (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아우크슈타인: 1957년에는 우리 둘이 여기에 이렇게 앉아 서로를 바라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작은 용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양피지 같은 많은 주름살이 보였다.)     

아데나워: ... 베너 씨의 건강에 대해 우려해야 합니다! 특히 당신과 나 말입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말해보세요! (그는 다시 진지해지고 있다.) 브란트는 외무장관이 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슈뢰더 – 슈뢰더 ... (그는 마치 방어하듯이 손을 들었다.)”     

그는 크로네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 “베너가 아프지 말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 민당(SPD) 내의 좌파가 주도할 것이니 말이오.”      

그가 싫어하는 것에는 소선거구제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였다. 자민당(FDP)에 우호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기자는 1967년 2월 말에 그가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은 내가 선거법을 변경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자민당(FDP)과의 연정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는 이 합의가 멍청한 짓이라고 여겼다. 결국 재빨리 약속을 저버리고 상대를 없애버리는 거대 정당이 자민당(FDP)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빌리 브란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외무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키싱거가 연방 수상 후보로 지명된 직후, 그는 게르스텐마이어를 외무장관으로 밀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일단 안장에 오른 키싱거는 아데나워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미하게 줄어들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키싱거는 아데나워에게 충분히 괴롭힘을 당했으니 이제는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통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상 후보는 궁극적으로 외무부를 사민당(SPD)에 넘기는 것을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약점잡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당의 투표 결과는 특히 북독 개신교 파벌에서 슈뢰더가 얼마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2월 2일 아데나워가 키싱거에게 보낸 3페이지짜리 편지는 그가 기민당(CDU)이 외무부를 영원히 잃는 것보다 슈뢰더에게 국방부를 맡기는 것에 대해 얼마나 더 걱정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는 독일 외교 정책의 기본 구조에 대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종합적으로 설명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아데나워는 축하 인사를 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명했다.     

“우리는 새 정부 구성 이전에 나눈 대담에서 단호하고 인기 없는 조치를 해결해야 하는 극도로 어려운 국내 정치 문제 이외에도 특히 외교 정책이 새 연방정부가 성공하는가 아니면 실패하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외교 정책 입장의 개선이 프랑스와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강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데에 우리가 같은 의견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의 미국과의 관계와 프랑스와의 관계 모두 외무부와 국방부 두 부서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는 귀하를 신뢰하며 또한 귀하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부서에 관한 인사 조처에 대해 매우 염려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수상과 장관의 호흡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해당 장관이 수상의 지침을 얼마나 마음대로 어길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외무장관으로서 프랑스·독일 우호 조약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장관이 우리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이웃 나라의 긴밀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서를 장악하게 된다면 과연 이것이 프랑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자문해 봅니다. 나는 그가 외무장관이 되는 것이 귀하의 일과 프랑스에 관한 귀하의 의도를 실현하는 것을 더 쉽게 해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외교 정책의 이 핵심 문제에 관한 해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동방 정책, 특히 소련과의 관계는 프랑스와의 관계와 더욱 연계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가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전망, 그리고 프랑스와의 긴밀한 동반을 통해 주어지는 기회의 뜻을 밝히기 위해 코시긴 소련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한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에도 독일의 통일 문제에 대해 변함없이 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기회는 결국 유럽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 완화 없이는 우리 독일의 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키싱거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최소한 수상실의 연방의회 담당 차관으로 구텐베르크 남작을 임명해 줄 것을 바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이 귀하와 함께한다면 내가 귀하와 함께 공유하는 우려들이 좀 더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임명에 관한 협상은 계속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아데나워가 이미 혼수상태에 들어간 1967년 4월 17일에야 취임했다.     

아데나워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수상직의 끔찍한 종말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정도의 품격은 갖추었다. 물론 그는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같은 언론인에게 앞에서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항상 에르하르트 씨가 정치적 인물이 아니라고 말해왔어요. 심지어 나는 그런 이야기를 글로 그에게 전하기도 했어요! 그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그에게 대접을 잘했기에 자기의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나!”     

그러나 아데나워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벌인 오랜 투쟁의 현실적 결과는 매우 보잘것 업었다. 1957년에 그가 ‘독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으로 두려워했던 사민당(SPD)은 이제 기민당(CDU)의 연정 파트너가 되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사민당(SPD)의 노선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를 배격하지 않고 계급투쟁 노선을 버리고 국유화도 사회주의 원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사민당(SPD)은 마르크스주의 계보의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 가능성 때문에 아데나워의 의심을 샀던 헤르베르트 베너는 이제 새 정부의 핵심 인물로 대접을 받았다. 아데나워가 늘 위에서 내려다보던 빌리 브란트가 이제는 외무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 고데스베르크 강령 [Godesberger Programm, 역자주 – 1959년 11월 15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개최된 사민당(SPD)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     

키싱거가 실제로 에르하르트보다 더 나은 선택인지 여부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믿을만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현재로서는 독일의 제3대 수상에 대해 별로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토 프리드리히는 1967년 3월 중순 아데나워와 나눈 대화에서 받은 인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는 키싱거에게 확고한 태도를 기대할 수 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가 커다란 능력이 – 특히 달변의 능력이 –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키싱거는 아데나워에게 평생 부족했던 재능이 있었다. 그는 달변가였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과연 키싱거가 - 수상으로서 극복해야 하는 - 국제적인 어려움에 당면하여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우 불쾌한 사달을 가져올 수도 있는 그의 정치적 과거의 사건들에 당면하여 잘 대처할 수 있을지를 우려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프리드리히에게 키싱거가 정부를 출범하면서 그에게 때때로 조언을 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차관을 임명할 때 단 한 번 조언을 구했다. 크로네도 아데나워에게서 같은 불만을 들었다. 이렇게 키싱거 수상은 아데나워에게 그의 직무가 만료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는 에르하르트도 똑같이 대접했다. 아데나워가 사망한 지 2년 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전직 장관인 하인리히 크로네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다. 키싱거는 당 대표단 회의에서 만나기만 하면 늘 “곧 한 번 만나야죠.”라고 말했지만, 말뿐이었다는 것이었다. 에르하르트와 아데나워는 “그가 아니라 베스트릭이 수상이었다면” 더 자주 만났을 것이었다. 에르하르트도 이제 외로움을 호소한 것이다.     

권력의 절정에 있을 때의 아데나워를 아는 사람은 이제 그의 주변이 얼마나 조용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짜증 나게 하는 것은 그가 재임하던 14년 동안 외교 정책의 실수, 게으름, 무능함, 부족한 결단을 귀가 따갑도록 탓했던 모든 정치인이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노인네 취급을 받고 있으며 새 수상이 조언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여전히 놀라운 현상은 1967년 1월 5일 91세가 된 이 인물이 여전히 매우 활기차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죽기 한 달 전에 두 시간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매우 이성적인 오토 프리드리히는 그가 관찰한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는 변함없이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화도 활발하게 나누었다. 다만 많은 것에 대하여 매우 특이한 해석을 했다.”     

1966년 8월 마지막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이러스 술츠버거는 한 시간 반이 지난 후에도 아데나워가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의 본질의 승리였다. 뛰어난 청력과 뛰어난 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기억력만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와 오랜 적들이 위대한 정치가에 관한 큰 존경의 말을 하면서도 냉정하게 그가 이제는 사생활에 몰두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을 아데나워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회고록의 저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공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삶의 여정의 끝에 온 영리하고 신중한 아데나워는 회고록에 관하여 출판사가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출판사는 - 물론 엄청난 원고료를 지급했지만 -  이 노인에게 장별로 그리고 절별로 모든 내용을 쥐어 짜낸 것이다. 그는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책을 이용하여 자기 정치적 메시지를 다시 한번 그리고 앞으로 계속 선포하고 싶었기에 그 중노동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회고록을 쓰는 고생     


“나는 그것을 내 회고록에 넣을 것이다!” 이는 1920년대에 아데나워의 가족이 특히 기억에 남는 거나 들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듣던 이야기였다. 그런 농담으로 던진 말에서 아데나워가 그 당시나 그 이후에 후세의 판단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는 아데나워가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그의 삶에 관한 일관된 모습을 후세에게 전달할지 여부와 그 방법은 아직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늘 그러한 질문이 현실화될 때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그러한 순간은 1951년과 1952년, 곧 1953년 총선이 이미 먼 지평선에 다가오고 있던 시기에 도달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데나워가 단지 과도기적 인물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수상의 측근조차도 누구도 이것을 말할 수 없었지만, 글롭케, 렌츠, 폰 에카르트는 이미 1953년 수상의 선거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상도 사람들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인생 경로를 거친 위대한 인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의 정치적 의지와 능력은 1946년 이후 독일인들에게 그리고 1948년 9월 이후에는 국제적인 여론의 관점에서 점점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70년 동안의 삶에 관한 것은 단편적인 정보와 소문만 있었다.     

소문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새삼스럽게 대두되기 마련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가 분리주의자였다는 비난이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아데나워의 단호한 서방 중시 정책이 간단히 분리주의 노선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1946년 봄부터 1947/48년 겨울까지 진행되었던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베를린의 당 지도부와의 싸움도 이와 유사했다.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주제는 또한 독일의 중립화에 반대하여 서방과 연계하려는 대안으로서 선거 캠페인에서 다시 화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대중에게 믿을만한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할 필요성으로 보였다. 살아온 길, 위대한 목표, 국가 지도자다운 태도, 개인적 생활 방식도 노출되어야 했다. 곧 사람들이 감탄할만한 수상, 온전히 신뢰할만한 수상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토 렌츠는 매우 감정적인 관점에서 진행되는 선거 캠페인에서 아데나워의 인간미 넘치는 딸인 로테를 ‘효과적인 여성 맞상대’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 로테 아데나워 씀》이라는 소책자는 ‘엄청난 히트작’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아데나워의 전기에 관한 첫 번째 계획은 아테네움 출판사의 게르하르트 폰 로이터른과 글롭케가 아주 일찍부터 논의가 이루어졌었다. 그 당시 쇼테 교수가 이미 쓴 아데나워의 전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대신 1952년 봄에 《전기적 초록》을 한스 마이가 출판하자는 계획이 대두되었다. 마이는 1950년부터 아데나워의 개인 자문으로 활동했으며 1952년부터는 연방정부의 언론정보실에서 영화, 라디오, TV 담당 부서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8년 3월에 자를란트 방송국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한스 마이는 1952년 6월 7일 자 편지를 첨부한 〈개요 초안〉을 수상에게 보내어 8월에 인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6주 이내에 철저한 감수를 해 주라고 요청했다. “선거 캠페인을 위해서는 늦어도 10월 초에 전기가 전달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매우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수상의 전기가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그는 신중한 편지를 첨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게 시켜준 것이다. “현재 정치 목표에 위해가 가해지지 않도록 귀하의 정치 활동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초안에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행적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마이는 로테 아데나워와 협의한 후에 10~15페이지 정도에 이 시기에 관한 내용을 담아 보완할 생각이었다.     

아데나워는 스위스의 뷔르겐슈토크에서 휴가를 보내며 이 원고를 다듬었다. 이 초안을 검토한 후 그는 8월 1일 자신이 그러한 전기의 구조와 강조점에 관한 의견이 담긴 메모를 작성했다. 그는 “다음의 장들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적었다.     

“① 1906년 지방 공무원이 될 때까지의 청년기.

② 1917부터 1933년까지 지방 공무원, 보좌관, 1등 보좌관, 쾰른 시장으로 활동한 일.

③ 1920년부터 1933년까지의 라인 지역 지방회의 활동, 지방회의 위원장, 프로이센 추밀원에서의 활동, 프로이센 추밀원 의장으로서의 활동.

④ 별책: 분리주의.

라인란트 점령 이후의 모든 활동의 중단. 1919년 2월 1일 또는 2일에 쾰른 시청에서 열린 공식 회의에서 모든 움직임을 한 손으로 통합하여 제어하려고 한 일. 클레망소가 자기 전기에서 나의 활동에 대하여 내린 판단.     

렌텐마르크*가 도입 된 후, 당시 제국 정부는 내가 의장으로 일하던 라인 지방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체적인 주를 수립하여 코블렌츠의 고등위원회에 자체적인 징세권을 청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관한 거친 반발이 있었다. 12시간의 회의 후 휴회했다. 이 결정을 내린 슈트레세만 내각은 해체되었다. 그 사람 다음에 등장한 마르크스 내각은 이 결정을 철회하였다. 뒤셀도르프의 슈미트 차관은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     

* 렌텐마르크 [Rentenmark, 역자주 – 1923년 11월 15일 바이마르공화국이 초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하여 발행한 화폐. 1924년 제국마르크로 대체됨]     

⑤ 나치 시대.

파직, 노동 활동 금지, 베를린 체류, 마리아 라흐 병원에서의 1년 동안의 생활, 노이바벨스베르크에서의 1년 동안의 생활, 라인강 강가의 뢴도르프로의 귀향, 뢴도르프에서의 9개월 동안의 감금 생활.     

1933년 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나의 시장으로서의 모든 활동과 나에게 제기된 모든 비난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수사관의 보고서: 타자기로 작성된 1,000페이지의 보고서. 질책으로 마무리된 재판. 1918년 이후 점령기에 있었던 나의 활동을 문제삼은 프로이센 내무부의 소송 절차. 이 절차의 중단. 룀 사건과 관련하여 1934년 6월 30일 체포된 일. 1944년 8월에 체포되어 쾰른 전시장에 강제 수용소에 갇힌 일.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수용소장이 구해준 일. 병원 탈출. 가짜 이름으로 베스터발트에서 숨어지낸 일. 다시 체포된 일. 아내와 내가 브라우바일러에 있는 게슈타포 교도소에 압송된 일. 내 아내는 14일 만에 석방된 일. 1944년 11월 26일 석방된 일. 게슈타포의 지속적인 감시.”     

이 메모는 그의 생애 초반기와 마찬가지로 1918년부터 1923년까지 그리고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삶에서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은 채 그의 정당 정치 활동에 관한 장과 연방 수상과 외무장관으로서의 활동에 관한 장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분리주의와 나중에 쾰른 시장으로서 위법 행위를 했다는 비난에 관한 반론을 펼치고 싶은 의도가 이 짧은 메모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여기에서 아데나워 자신이 자기 전기를 다루는 데에서 정치적 의미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마이가 쓴 초고의 인쇄는 당분간 연기되었다. 오토 렌츠 주변의 홍보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이 계획을 추진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에리히-페터 노이만이 추진하였다. 그는 원고를 윤전기를 사용하여 십만 부 이상 대량으로 인쇄할 계획이었다. 한스 마이의 원고는 이제 콘스탄츠의 《쉬드쿠리어》 신문사의 편집장인 에리히 게리크에게 보냈다. 그는 그것을 수정하면서, 특히 1949년 이후 몇 년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고 몇 가지 사적인 내용도 포함시킬 예정이었다.     

1953년 2월에 부분적으로 완성된 원고는 자료를 의장, 수상, 유럽주의자, 인물의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게리크는 오토 렌츠처럼 베를린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수년간 야콥 카이저의 출판회사에서 종사하였다. 그는 《노이에 차이트》, 《아벤트》, 《탁》의 편집부에서 일했다. 따라서 아데나워와 카이저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은 1952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 벌어진 일이었다. 게르크는 노이만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 확실히 ‘베를린에 대한 아데나워의 모든 회의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싶어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노이만은 그러한 제안을 불편하게 여겼다. 게리크는 그러한 선전용 책자의 모든 문장이 아데나워의 반대자들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관한 적절한 고려를 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수상직 초기의 이러한 언론인들이 직면한 주요 문제는 이 위대한 인물 삶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작은 부분으로 나뉜 조각들’ 뿐이었다. 특히 아데나워가 ‘공직이 없던’ 시절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리크는 노이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이 12년 동안 그 남자의 현재 모습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무엇이든 알아내려는 모든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괴르델러 음모*에 관한 그의 부정적인 태도에 관한 정보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조차도 별 쓸모가 없습니다.”     

* 괴르델러 음모 [Goerdeler Verschwörung, 역자주 – 라이프치히 시장인 Carl Goerdeler를 중심으로 1938년 히틀러를 상대로 쿠데타를 벌이려던 시도.]     

따라서 매우 성급하게 수집한 자료를 마련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만들어 낸 그의 모습은 게리크의 생각에 “매우 목적지향적이고 강인하며 완고한 사람임에도 매우 강력한 사회적 특성을 지녔다. (민족, 난민, 실업, 노사의 공동결정, 주택 건설 등).” 게리크는 “노조에 관한 아데나워 수상의 호의적인 태도”를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노이만은 이 점에 관해서도 내용을 줄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원고는 노이만의 요청에 따라 언론인인 칼 빌리 베어의 책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오토 렌츠의 선전기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베를린 언론계 출신이기도 했다. 베어는 전문을 이용하여 가족의 추억에 관한 세부 정보를 더 모았다. “1945년 초 뢴 도르프에 있는 수상의 가족은 미국의 공습이 있는 가운데 근접전을 경험했다. 온 가족이 집 뒤에 있는 포도주 저장고로 피신했다. 거기에서 손자들은 바구니에 들어가 천장에 매달렸고, 가족은 8일 밤낮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는 가족이 숨긴 세 명의 프랑스인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작가가 이미 손을 댔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고는 렌츠의 마음에 점점 더 안 들었다. 1953년 4월 초에 그는 콘스탄츠 호수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면서 이 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의 사무실에서 노이만에게 간결한 전문을 보냈다. “완전히 형편없다. 사진이 없다. 엉망진창이다. 마지막 부분인 ‘사인(私人)’만은 훌륭하다. 나머지는 다시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게리크의 원고인 ‘수상’도 이미 오토 렌츠의 마음에 안 들었다. 아데나워는 더욱 못마땅해했다. 그는 오토 렌츠에게 즉시 인쇄를 중단하고 발행된 샘플본을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부정확한 내용’, ‘모호한 일화’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한스 마이는 자기의 원래 원고가 그토록 바뀐 것에 대하여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노이만과 마이 그리고 출판업자 폰 로이터른은 회의하고서 게리크의 소책자는 ‘순전히 선전물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마이 박사의 순수한 전기 형식의 내용이 담긴 책의 형식으로 출판하기로’ 하였다. 이 모든 내용이 1953년 2월 말에 글롭케의 편지에 담겨 전달되었다.     

오토 렌츠 팀의 전기 출판 계획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수상을 설득하기 위해 글롭케와 폰 에카르트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여기에 아데나워의 이웃인 슐뤼터-헤름케스 여사와 그의 딸 소즈비타 슈륄터가 도움을 주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새로운 전기 작가 파울 바이마르가 등장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데나워는 그의 오랜 동창인 막스 프라빌라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오랫동안 발켄부르트에 있는 예수회 대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쳤다. “내 생각에 실트의 캄펜 출신의 유명 작가인 바이마르 씨가 내 이웃인 슐뤼터-헤름케스 박사를 통하여 학술협회 사무총장의 주선으로 나의 전기를 쓰도록 연결된 것으로 보이네. 바이마르 박사에 관한 정보는 볼프 박사에게 들었다네. 아주 훌륭한 것이었네. ... 바이마르는 매우 진지하고 착실한 인상을 주었네.”     

아데나워는 이제 저자의 문제에 관한 결정과 함께 출판사의 문제도 해결해야겠다고 확신했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 글롭케, 슐뤼터 여사와 그의 딸과의 대화에서 그는 킨들러출판사가 적합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막스 프리빌라는 《리뷰》 따위의 화보집을 발간하는 출판사와 관계를 맺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폰 에카르트는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1948년부터 물슈타인-킨들러 출판사의 공동 소유주인 킨들러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날 무렵 게슈타포에 구금되어있었다. 그는 카톨릭 신자이며 스위스 쿠의 ‘도덕 재무장 운동’(Moralische Aufrüstung)을 통해 “종교적 문제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야한다.”는 확신을 얻은 사람이었다.     

‘좀 더 진지한 어조로 바뀌어야 하는’ 《리뷰》를 발간하는 출판사이지만 아데나워 전기의 발췌본을 발표할 기회를 보장하는 곳이었다. “《리뷰》는 60만 부를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그래서 이 화보집에 전기의 일부를 게재하면 당연히 큰 선거 선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953년 5월 말 아데나워는 킨들러 출판사에 보낼 편지를 받아 적게 하였다. 킨들러출판사는 그동안 출간된 사우어브루흐의 회고록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책이 ‘너무 가벼운 글’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 관한 전기가 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다.”라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는 바이마르와의 첫 만남에서 이미 어떤 내용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3개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였다. 곧 1876년부터 1933년까지의 쾰른시대, 제3제국 시대의 12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기간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그는 실제로 ‘올바른 핵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 사람이 여러 다른 연령대를 살더라도 늘 같은 사람이며, 다만 다른 연령대에 따라 기존 성향의 어느 한 면이나 다른 면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데나워는 이 출판사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원고에 흔히 전기에 들어가야 할 만한 개인사의 내용이 그리 많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여기에 들어간다면 시대사를 바탕으로 나에 관한 전기를 쓸 수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적 배경이 내 성격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전기라는 것은 그러한 배경을 통해서만 지속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우연이나 운명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세계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흥하는 것이든 망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역사였습니다. 나는 전기를 쓸 때 늘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 인생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두 가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1953년 봄에 아데나워는 자신이 세계사의 상승 국면에 있었는지 아니면 하락 국면에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또한 그가 고전적인 유형의 전기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주역이란 그가 사는 시대에 중요한 인물을 모범으로 삼아 한 시대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전기에서 기대해야 하는 것은 자서전에도 적용된다.      

일단은 먼저 파울 바이마르가 쓴 아데나워의 삶의 기록을 먼저 다루게 되었다. 1953 년 총선 전인 5월과 6월에 이루어진 바이마르와 킨들러와의 여러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이 계획에 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이 책이 ‘선거 히트 상품’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전기 계획이 정치적 목표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데나워는 1933년 이전과 제3제국 시대의 그의 삶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바이마르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의 큰딸 리아 라이너스, 쾰른에 사는 그의 오랜 친구 엘라 슈미트, 베스트팔렌의 기민당(CDU) 친구인 람베르트 렌싱 또는 우르펠트에 있는 원예가 요제프 기센이 그들이었다.     

이리하여 따라서 파울 바이마르는 ‘공인된 전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바이마르가 다른 유명한 작가와는 분명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주제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을 분명히 인정했다. 그는 자기 딸에게 다음과 같이 그를 소개했다. “그는 본래부터 개신교 신학자이다. 그는 매우 존경할만한 작가이다. 그는 자기 전기를 작성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 그는 독일인이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인물로 여기는 장군을 소개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그는 그런 장군에 맞선 기독교인 국가 지도자를 그려보고자 한다.”     

‘공인된 전기’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바이마르의 원고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살펴보고 보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바이마르는 그의 782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작품을 “많은 부분에서 일종의 자서전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특히 아데나워의 청년기와 학생시절뿐만 아니라 1933/34년 겨울부터 1944년까지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도 해당된다. 바이마르는 또한 아데나워가 주장했다는 분리주의와 쾰른 시장 시절의 아데나워에 관한 나치의 비난과 관련된 내용도 아데나워 자신이 한스 킬브에게 보낸 노트에서 원했던 주장을 반영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쾰른시의 도시 기록 보관소에 있는 이른바 ‘쾰른 파일’은 당시 아직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이마르가 그 문서들을 철저히 검토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거의 전적으로 아데나워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증언에 의존하고 책 소개에서도 이를 솔직하게 공개하였다.     

1955년 5월부터 바이마르의 전기 일부가 《리뷰》에 미리 실렸다. 하지만 조금 뒤에 나온 이 책에 관한 반응은 차가웠다. 바이마르를 저자로 선택한 것이 나중에 가서 실수로 판명되었다. 그는 전문가로서의 명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데나워에게 이것을 알렸어야 했다. 글의 출처는 주관적인 것들이었다. 비록 나중에 가서 세부적인 내용이 여러 가지 점에서 정확했고, 아데나워가 부분적으로 확인했으며, 바이마르가 증인들에게 제때 물어보지 않았다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위대하신 ‘기독교인 국가 지도자’가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너무 낯간지럽게 묘사되고 있었다. 게다가 아데나워 수상이 현대 독일 정치인 가운데 가장 경솔한 인물이라고 믿는 많은 사람은 이 책을 한껏 조롱하였다. 그래서 이 ‘공인된 전기’는 성인전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대중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고도로 발달한 감각을 지닌 아데나워는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가 적극 지원하고 부분적으로는 내용을 쓴 이 책과 거리를 두었다. 로즈비타 슐터와 그리고 초반에는 파울 바이마르와의 얼마나 긴밀한 접촉을 했었는지를 잘 아는 가족 구성원들에게조차도 아데나워는 그 ‘공인된 전기’를 전혀 읽지 않았거나 아주 잠깐만 읽은 척했다.     

그러나 이 ‘공인된 전기’로 재미를 보지 못한 일은 나중에 아데나워가 수상직이 끝날 무렵 자서전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여러 가지 큰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의 전기에 관한 시원찮은 반응에서 아데나워는 뜻은 좋지만 알려지지 않은 유령 작가에게 자기 인생 이야기를 다시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배웠다. 평판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다른 할 일이 많기에 중기적으로 이러한 까다로운 작업을 맡을 수가 없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다. 아데나워의 인생 이야기가 신뢰를 얻으려면 아데나워 자신이 회고록의 저자로서 자기 커다란 명예를 걸고 그 내용의 정확성을 보증해야 했다. 이 이름은 1963년 들어서 10년 전 ‘공인된 전기’라는 장르에 동의한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기가 선거 캠페인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그 자체로 끝나거나 문학적 과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고록》 서문에서 아데나워는 역사에 관한 실용적인 이해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약간 장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우리 시대의 사건들, 심지어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하는 방식으로 그 발전 과정이 과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인식해야 하고, 또한 역사학에서 기대되는 발전을 가리키고 궁극적으로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데나워는 자기 삶에 관한 보고서가 독자의 정치적 정향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오래 살다보면 사람들은 경험을  쌓을 기회가 생긴다. 경험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이는 타고난 지성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특히 정치 분야에 해당된다.” 《회고록》 작성만이 아니라 아데나워의 삶의 후반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안네리제 포핑가는 1970년에 발간한 자기 회고록에서 아데나워의 의도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회고록은 정치를 하고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새로운 도구였다.”     

그러나 회고록의 저자가 경험을 전수하여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철저함이 필요하다. 아데나워는 출처를 제대로 밝힐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그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이마르의 전기는 무엇보다도 자로 그런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수상이 제공 한 정보 외에도 본질적으로 아데나워 자신만이 검증할 수 있는 제3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이다. 평생을 문서를 철저히 검토하는 데 몰두해온 아데나워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의 자서전이 온전히 검증가능한 문서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와 같이, 그는 이러한 일에서 매우 훌륭한 일을 했다. 그는 정확한 기억력을 지닌 탁월하고 꼼꼼한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재능을 자서전을 쓰는 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정치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가장 정확하게 문서화된 보고서가 비록 그 문체에서 수준이 떨어지고 일화적인 부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단점이 있음에도 그에게는 더 안전해 보였다.     

‘공인된 전기’를 출판하려던 그의 첫 시도는 또 다른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데나워의 청년기와 중년 시기에 관한 보고서는 이미 바이마르의 책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를 1876년부터 시작하고자 한다면 이미 바이마르의 책에 나온 많은 내용을 되풀이 말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기 자서전을 1944년의 시기부터 시작하고 나중에 제2권에서 그 이전의 수십 년 동안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 결정은 비록 그 자신이 직접 쓴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이 ‘공인된 전기’의 존재에서 정당화되었다.     

사실 이는 통상적인 회고록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많은 회고록의 경우 관련 경험이 없던 저자가 자기 성장해온 청년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전에 숨겨져 있던 자기 글재주를 가장 빨리 개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류 더미 속에서 살아온 이의 인생 여정에 이르게 되면 종종 평온한 스토리텔링의 리듬을 찾게 된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44년부터 시작하는 것을 선호한 데에는 여러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1946년에 들어서야 본격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4년에서 1948/49년 겨울 사이에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그 당시 아데나워의 삶과 독일 역사의 흐름이 수렴된 것이다. 그리고 물론 대중의 호기심과 그에 따른 출판사의 호기심은 수상 시절에 관한 지금까지 숨겨져 왔던 배경 이야기에 더 쏠리기 마련이었다.     

아데나워가 《회고록》을 쓸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시기는 테오도르 폰 호이쓰가 사망한 때였다. 1963년 10월 중순, 정확히 그가 수상에서 물러나던 시기에 그는 1905년부터 1933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테오도르 폰 호이쓰의 《회고록》 증정본을 받아 보았다. 10월 14일 자의 ‘콘라드 아데나워 각하께’라고 쓴 증정문 서체는 마치 호이쓰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쓴 것처럼 매우 흔들리고 엉망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아데나워는 초대 연방 대통령의 관 앞에 서 있었다.     

아데나워는 늘 호이쓰의 문학적 재능과 그림 그리는 재능을 매우 존경했다. “솔직히 저는 귀하의 풍부하고 풍요로운 정신과 붓에서 나오는 예술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그는 몇 년 전에 그에게서 받은 《눈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호이쓰의 《회고록》을 모델로 삼는다면, 그는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하고도 생생한 회고록을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호이쓰는 최근의 현대사에 관한 설명보다 훨씬 더 흥미를 돋우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 책을 썼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가 1933년까지의 이야기를 먼저 쓴다면 호이쓰와 비교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호이쓰의 운명을 보고 아데나워는 나이 든 저자가 얼마나 빨리 펜에서 손을 놓게 될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1945년 이전의 긴 세월에 관하여 이야기할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수상 시절에 관한 것이 맞았다. 1963년 10월 모든 사람은 아데나워에게 그 시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 역사를 만들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대중은 이 흥미진진한 자서전의 첫 68년을 놓쳤다. 그러나 기준점이 된 1944년 이전에도 비스마르크가 제국을 세운 지 5년 만에 태어난 이 인물은 논란이 없지 않았다. 그가 주로 1962년과 1963년에 이와 관련하여서 했던 인터뷰와 안네리제 포핑가가 그의 이야기를 전한 것은 결코 이 부분을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죽기 1년 전에도 아데나워는 여전히 1933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1963년까지 4권의 회고록 작업이 끝나자마자 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초고조차도 만들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작가로서는 있을 수 없는 길을 택한 것이다.     

어쨌든 아데나워가 수상으로서 14년 동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서 또 다시 회고록 작성이라는 짐을 어깨에 짊어지기로 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사임한 후 회고록을 쓰기로 한 결정은 강제적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 분명해진 1963년 봄에 내려졌다. 그때부터 안네리제 포핑가가 회고록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데나워는 그 작업을 어떻게 시작할지에 관한 명확한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제 그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출판사와 대중은 그에게 어느 정도 빛나는 추억을 기대했다. 궁극적으로 그도 이러한 기대를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위대한 인물들은 고된 삶을 살고 나서도 끝에 와서 회고록을 쓰도록 심판받은 존재인 것 같다. 실제로 특히 그의 출세 과정과 수상 시절에 관한 회고록은 대중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아데나워는 그러한 책이 대중의 의식에 얼마나 강하게 그리고 얼마나 오래 영향을 미치는지를 되풀이하여 확인해 왔다. 그리고 대부분 유명한 회고록 작가들이 그와 어느 방식으로든 접촉했고 여전히 그와 연락하고 있었다.     

1948년과 1953년 사이에 처칠의 6권짜리 기념비적인 작품인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1950년에 클레이 장군이 쓴 《독일에서의 결정》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중반 해리 트루먼이 쓴 신랄한 회고록은 드골의 예술적 스타일의 산문 형식으로 된 회고록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영국과 미국의 그밖의 다른 중요한 동료와 적들도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든의 지루한 회고록은 1960년과 1965년에 출간되었다. 아이젠하워가 자기 대통령으로서 수행한 직무에 대하여 공들여 작성한 회고록의 독일어 번역본은 1964년과 1966년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의 회고록도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따라 하기의 욕망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알마 샤흐트, 프란츠 폰 파펜, 파울 뢰베, 한스 루터가 회고록을 썼고 심지어 한 때 나치 정부 소속 쾰른 의장을 역임했던 문제가 되는 인물인 루돌프 딜스도 회고록을 썼다. 1956년 역사가 게르하르트 리터가 써서 관심을 많이 받은 칼 괴르델러의 전기도 출판되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괴르델러를 그다지 훌륭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그가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기는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출신의 경쟁자였던 루돌프 아멜룬센이 회고록 전집인 《신사들과 마술사들》에서 묘사한 1930년대와 그 이후의 시대에 관한 묘사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어보였다.     

그와 적대적인 주지사들도 이미 세상에 관한 자기 나름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빌헬름 훼그너의 회고록 《어려운 국외자》에서 시작하여 빌리 브란트와 리하르트 뢰벤탈이 함께 쓴 에른스트 로이터의 전기도 근본적으로 마찬가지 영향을 미쳤다. 라인홀트 마이어 또한 대서방조약에 관한 투쟁을 문학적인 측면에서 계속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아데나워는 또한 마이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에 관해 쓴 여러 권으로 된 회고록이 출판되는 것도 보았다. 그 책 가운데 1948년부터 1953년까지의 시대에 관한 책은 사실 아데나워를 비판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아데나워 시대의 외교관 가운데 일부도 이미 책을 시장에 내 놓았다. 빌헬름 하우젠슈타인은 《파리에 관한 기록》을 써서 아데나워 수상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고 빌헬름 그레베는 한 사람의 저자로서 반박할 수 없는 분석 자료를 제시하였다. 이때 이미 회고록을 쓰고 있던 아데나워는 새삼 이 자료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데나워가 그것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을 귀찮아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대 사람들의 회고록이 주는 여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책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87세의 노인이 자신에게 낯선 일로 말년을 보내도록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실 이는 낯설고 근본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회고록을 쓰는 일이 처음에는 그에게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의 시기에 대하여 정밀하게 문서로 뒷받침되는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을 하는 것은 아데나워가 자신이 살아온 현실에 대해 느긋하게 이야기해주는 즐거움을 의도적으로 빼앗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대신 그는 얼마 전에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정신적으로 되새김질을 하여 그 대부분의 내용을 각주가 달린 보고서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슈투트가르트의 전통 있는 출판사인 독일출판협회(DVA)를 선택했다. 독일출판협회(DVA)는 자조적으로 자신을 ‘수상-출판사’라고 부를만하다. 1906년에는 《제국 수상 추 호헨로에 쉴링스퓌르스트의 회상록》을 출판하였다. 마찬가지로 제국수상이었던 막스 폰 바덴, 베트만 홀베크, 구스타프 슈트레세만의 전기도 출간하였다. 1960년 한스 루터 전 수상은 독일출판협회(DVA)에서 회고록을 출간했다. 헤르만 옹켄, 게르하르트 리터, 한스 로트펠스와 같은 역사가들도 이 출판사에서 중요한 전기들을 출간하였고 클라우스 메네르트는 현대사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출간하였다.     

파리의 아쉐테는 아데나워 회고록의 모든 외국어 판본에 관한 권리를 획득하였다.     

1964년 2월 10일의 독일출판협회와의 계약에 따라 제목은 《회고록 I, II》로 정했다. 아데나워가 1945년부터의 일에 관하여 쓰리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반면에 4권으로 발행할지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최종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1 권에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부터의 일을 쓰고, 2권에서는 1945년 말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의 일을 쓰기로 하였다. 1권은 2권보다 먼저 출간될 예정이었다. 필요한 경우 1권, 2권 모두 또는 그 가운데 한 권을 반으로 나누어 출간하기로 하였다.”     

최종 출간 날짜는 계약서에 명기하지 않았다.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출판사가 언제 출판할지는 명확한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독일출판협회(DVA)의 권한에 맡기기로 하였다. “저자가 어떤 이유로든 회고록 1권을 완성할 수 없는 경우 출판사는 다른 적절한 사람이 작업을 완료하도록 할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저자 또는 그의 법적 후계자가 그때까지 준비된 원고를 제공한다.” 독일출판협회(DVA)는 아데나워에게 원고료 선급금으로 10만 마르크를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다만 그 금액의 절반은 I권이 출판될 때 지불하기로 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소매 판매 가격의 15%를 인세로 받기로 하였다.     

파리의 아쉐테와의 계약은 한 가지 점에서 더 정확하게 작성되어 아데나워에게는 더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1964년 12월 31일 이전에 1권의 전체 원고를 전달해야 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1963년 11월 28일에 처한 상황에 따르면 이는 완전히 상상만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는 목차조차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아데나워는 출판사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물론 그를 매우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말이다. 1963/64년 겨울에 그는 다시 정치적인 일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의 집 마당의 파빌리온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64년 2월 초가 되자 회고록 작업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의 사위 헤리베르트 물트하웁트는 다양한 기술적 세부 사항을 언급하면서 장인에게 당장 회고록을 쓰기 시작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활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아데나워는 회고록을 이른 아침과 주말에 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큰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 1945년, 1946년, 1947년의 복잡한 상황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봄에 코모호수에서 쉬는 때 회고록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디르크 슈티커는 그곳에 있는 멋진 그러나 4월에도 여전히 상당히 쌀쌀한 지역인 로베노에 있는 벨레 파지오 저택을 아데나워가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거의 매일 비가 내리고 하늘이 흐리며 추웠다. 아데나워는 정치적인 문제로 화가 나 있어서 회고록 작업에 다시 집중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셰테 출판사의 샤를 오렝고가 아데나워에게 요청한 세계의 많은 출판인을 위한 연회는 잘 진행되었다. 그 출판인들은 그의 딸과 매력 있는 젊은 여성과 함께 있는 기분이 좋은 아데나워가 열정적으로 회고록을 쓰고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것은 정체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아들 파울에게 출판인과의 매우 흥미로운 오후에 관해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읽은 자료를 소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해야만 한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파빌리온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집중해서 글을 써야겠다.”     

로베노에서는 매우 모호한 구상 이상이 것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보치아 놀이하는 것을 더 즐겼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나 손님들과 신과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본에서 전개될 논쟁에 대해 미리 내면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도 작업이 진행된 것은 기적이었다. 모든 관계자가 알고 있듯이 이 기적에는  이름이 있었다. 곧 안네리제 포핑가였다. 1970년에 출간된 《아데나워에 관한 나의 기억》을 통해 그는 그 이전과 이후 통틀어서 노년의 아데나워에 관한 가장 생생한 책을 썼다. 이후로 사람들은 회고록을 작성하는 아데나워의 작업 방식과 그가 얼마나 직접 썼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해진 자료들은 그가 쓴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     

회고록 작업이 시작되었을 무렵, 이 젊은 여성은 이미 아데나워의 측근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외무부 출신으로 도쿄 주재 크롤 대사가 글롭케에게 추천한 인물이었다. 슈마허-헬몰트가 말한 대로 아데나워는 “젊고 아름다운 비서가 자기 주변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아데나워는 많은 사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향을 지녔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 비서들로부터 끊임없는 효율성, 비밀엄수, 강한 대처 능력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상사로서 이 직원들을 대하였기에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난 지 오래된 후에도 그에 관하여 좋게 이야기하였다. 때때로 아데나워와의 대화가 불편한 많은 사람에게 그의 대기실은 지옥문에 들어서기 직전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리고 그 오아시스에 맞갖은 엘리사베트 침머만, 엘리사베트 아렌츠, 한네로레 시겔과 같은 친절한 여성들을 떠올렸다.     

안네리제 포핑가도 처음에는 그런 익숙한 그림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서실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그 팀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아데나워를 도와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수상과 그 신입 사원이 좀 더 밀접한 접촉을 하게 된 데에는 우연이 작용했다. 1955년부터 아데나워는 휴가를 뷔르겐슈토크나 뷜러훼헤와 같은 유형의 대형 호텔보다는 편안한 빌라에서 보내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당연한 결과로 아데나워, 늘 그를 따라다닌 딸들, 개인 고문들, 그밖의 수행원들과 함께 두 비서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업무가 이어지기는 했지만 편안한 휴가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1957년 봄에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를 발견했고 1958년 여름부터는 코머호수는 이 노회한 정치가의 ‘좋은 휴양지’(buen retiro)가 되었다. 상황이 허용할 경우 그는 이제 봄과 가을에 아예 정부 관사를 카데나비아로 옮길 정도였다.     

그 신입 사원도 이 매우 즐겁게 진행되는 휴가에 함께했다. 그리고 원거리인 일본을 포함한 1960년대의 세계 여행에도 함께하였다. 분명히 수상은 자기 목표를 알고,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는 이 활기차고, 투쟁적이며, 감정이 풍부한 이 젊은 여성과 함께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에 그는 곧 아데나워 주변의 고문, 비서, 운전기사, 경호원으로 구성된 독특한 팀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순한 구성원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아데나워의 딸들은 그를 자매처럼 여기게 되었고 거의 모든 해외여행에 함께 했고 카데나비아에 갈 때는 빠진 적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1960년부터 특히 정치적으로 분주한 시기에 포핑가를 주말에도 뢴도르프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 사실 수상이 정치적으로 분주하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  사실 1946년부터 그때까지는 쾨스터가 온전히 개인 비서의 역할을 해왔었다. 그래서 포핑가는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거나 폰 브렌타노가 사임했을 때도 아데나워 곁에 있었다.     

누구나 곧 포핑가가 정치적, 개인적 문제에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늙은 아데나워는 민족적 자부심이 넘치고, 매우 북독일 사람답고, 개신교 신자이기도 한 이 여직원의 날카로운 판단을 좋아하게 되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25세에서 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은 매우 좋고, 35세에서 45세 사이의 젊은이들은 나쁘고, 최악 경우는 45세에서 5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다.” 아데나워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포핑가는 그 ‘매우 좋은’ 젊은이들에 속했다. 포핑가는 아데나워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나이에 관한 아데나워의 끔찍한 비관론을 재빨리 인식하고 그를 격려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1963년에 포핑가는 거의 가족의 일부처럼 샤움부르크궁의 가신이 되었다. 수상실에서 물러 나오면서 아데나워 측근의 규모가 축소되었을 때 포핑가는 개인 고문인 요제프 셀바흐와 함께 작은 참모진의 우두머리로서 추락한 군주의 망명에 함께했다.     

프핑가는 특히 아데나워의 회고록에 관심이 많았다. 포핑가는 상당히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기에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에 맞서 싸우는 것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절망적인 추락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아데나워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포핑가는 아데나워가 그의 회고록을 통하여 서방과의 유대, 특히 유럽과 프랑스에 다가가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포핑가는 아데나워의 수상직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가장 중요한 자료들을 신중하고 열정적으로 수집했기에 회고록 작업을 완수하라는 소명을 두 차례 받은 것으로 느꼈다.     

포핑가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탁월하게 다룰 줄 알면서도 회고록 저술 작업을 정리하는 데 처음에 필요한 신중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 비슷한 시기에 자기 임기에 관한 서술에 몰두했던 미국의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러한 일에 대처하는 방법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임기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이미 그의 곁에 있는 아들 존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아들은 회고록 자료들을 편집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전임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이자 하바드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위릴엄 에드워드, 그리고 더블데이출판사의 편집자를 회고록 저술 작업에 끌어들였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그들의 시각을 강요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에 빠져있었다. 이는 또한 무례한 제3자가 자신이 회고록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에 관한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로마 주재 독일 대사가 된 블랑켄호른은 1964년 봄에 로베노에 있는 디르크 슈티커의 저택에 머물며 회고록 저술 계획에 대해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노인을 찾았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현명한 조언을 하였다. 일단 다른 정치가들의 가장 다양한 회고록을 살펴보고 나서 자신이 쓰고 싶은 회고록의 장르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블랑켄호른은 제국 수상 뷔로프와 리켈리우스의 유언장을 예로 들었지만 말이다. 열정은 있으나 이 일에 더하여 점점 더 회의적이 된 조수도 안목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자기와 동시대 사람들의 많은 회고록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 책 가운데 일부는 뢴도르프의 파빌리온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표현 문제를 해결한 방식을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살펴볼 인내심이 부족했다.     

이 노인만큼이나 자서전 쓰는 일에 경험이 거의 없는 안네리제 포핑가는 마침내 어떻게 일을 진척시킬지를 알게 되었다. ‘유럽문서고’(Europa-Archiv)와 외무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시간표를 마련하고, 일일 계획을 연구하고, 연설문을 발췌하고, 편지와 메모를 편집하여 아데나워에게 자료에 관한 의견을 줄 것을 재촉했다. 이에 관한 그의 의견도 기록했다. 마침내 충분한 자료가 모아지자 그는 어느 정도 집중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그의 부하들이 작성한 연설 초안이나 편지를 수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연한 연필로 여백과 본문에 내용을 추가하고, 지우고 새 페이지나 단락을 삽입하고 받아쓰도록 하였다.     

카데나비아에서 사람들이 그가 1945년에 대해 더 긴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회고록 1권의 문학적으로 감동적인 첫 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스타일은 지속되지 않았다. 1945년 가을에 관한 부분부터는 자신이 가진 자료가 있었기에 아데나워는 본질적으로 기본의 자료에 관한 해석과 논평을 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은 것이다. 영국 점령 지역 기민당(CDU)의 새로 선출된 의장으로서 그는 곧 쾰른 시장으로 재직할 때 했던 방식대로 중요한 회의의 녹취로을 만드는 관행을 도입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행운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표단 회의에 제출된 ‘상황 보고서’를 다시 확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에는 그의 중요한 발언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내용에 관해서는 때때로 그 당시의 1차 자료나 2차 자료에 관한 보고서를 참조하고, 의회위원회와 독일연방공화국 수립에 관한 내용도 정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서한들, 그리고 무엇보다 점령국 고위위원회와의 협상에 관한 남아있는 회의록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의 내용으로 접어들수록 외국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번역한 문서들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는 문학적 틀을 갖추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이지 그 어떤 문학적 스타일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저자와 내용 자체가 충분한 관심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문서 인용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해도 나름의 표현 스타일이 정립되었다. 또한 확보된 1차 자료들의 특성으로 국내 정치 상황은 크게 소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인식하고 제1권 도입부에서 다음 권에서 다루기로 하며 2권에서 그것을 논하기로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래기로 하였다. 연방 공보실의 요제프 셀바흐와 페터 슐체도 이와 관련된 주제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나중에 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구상을 고려하여 아데나워는 회고록의 내용을 굳이 1944년부터 1963년까지로만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안네리제 포핑가에게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내가 수상에 재임할 때로만 나의 기억을 제한하는 것이 옳은가? 난 반대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는 내가 활동했던 기간에 속하네. 그와 마찬가지로 1963년 가을 이후 기간도 그 일부가 되어야 해. 마지막 권에서 내가 여당의 어리석음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안 되어. 독일과 프랑스와 유럽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마무리해야 해.”     

카데나비아에서 7주 동안 머무르면서 열심히 작업한 결과 아데나워가 본으로 돌아왔을 때 회고록 제1권의 13개 장 가운데 3개 장이 거의 완성되었고 3개 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욕실에서 넘어져서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바람에 쉬어야만 했다. 1963년 4월부터 과로해온 안네리제 포핑가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는 바람에 작업이 또 중단되었다. 아데나워의 사임을 둘러싼 일이 마무리된 시점에 포핑가는 정규 업무와 더불어 회고록의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 포핑가는 수석비서 겸 회고록의 연구 조교로 일했다. 사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는 자신이 작업을 못 하는 것에 관한 변명을 늘어놓고 이제 회고록에 관련된 거의 모든 작업을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며 불평하였다. 카데나비아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늘 본의 업무로 돌아갔다. 이 또한 그에게 자서전 저술 작업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주기에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는 출판사를 달래기 위해 회고록 1장을 보냈다.     

안네리제 포핑가가 크리스마스 직전에 뢴도르프의 손님방으로 이사 오고 난 다음부터 1964년 12월부터 점차로 본에서의 회고록 저술 작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자료의 배치와 목차도 마침내 정밀하게 검토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이후의 기간을 위해 족히 3권은 필요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4권으로 바뀌었다.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여러 권으로 나누어 쓰기로 한 결정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1965년 봄에 그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에 관한 권들을 최대한의 속도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야만 여유를 가지고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1965년 가을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권수를 늘리면서 더 이상 1권의 분량을 줄이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생겼다. 자기 원고를 줄이고 싶지 않아하는 많은 저자들의 만성적인 거부감이 그에게도 제대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원고의 초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인내심조차 없었다.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해야 할 마감 기한이 1965년 2월이었다. 독일출판협회(DVA)의 전무 이사인 오이겐 쿠르츠와 아셰테 출판사의 샤를 오렝곤는 이제 제1권을 봄에 출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실 독일출판협회(DVA)는 아데나워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이미 출판을 발표한 터였다. 결국 아데나워는 이제 1965년 5월 중순에 원고의 첫 부분을 그리고 6월 중순에 원고의 둘째 부분을 제출할 것이라고 하였다. 출판사는 유명한 연방 수상도 다른 무심한 작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보낸 원고가 다소 지루한 것으로 판명되었기에 독일출판협회(DVA)는 아데나워의 제안에 먼저 감사한 다음에 2권에서는 1945년 이후의 이야기를 담아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특히 오르텡고는 망설였다.     

동시에 1965년 봄이 되자 아데나워는 총선 이후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잡을 함정을 수많은 대화에서 만들어 놓아야 하기에 그는 굴욕을 당하지 않도록 회고록의 제1권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는 결국 회고록 작업을 위해 주말 이외에도 최소한 반나절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는 봄에 카데나비아에서 제1권을 완성하여 6월 중순에 독일출판협회로 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정해진 계획 없이 일해 온 매우 바쁜 여든아홉 살의 노인이 실제로 거의 9개월 만에 책을 완성한 것은 꽤 훌륭한 성과였다.     

아데나워는 서서히 책 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미 1965년 선거 캠페인 동안 속편의 저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또한 언론인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벨트 암 손탁》의 볼프강 브레트홀츠에게 다음과 같이 한 수 가르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상입니다. 일단 그것이 되면 모든 것이 더 명확해지고 간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나에게 “김나지움 상급반의 독일어 교사가 나에게 늘 말하곤 했지요. ‘아데나워, 구상이 너의 큰 장점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1권에는 좋은 구상이 없었다. 그다음에 나온 두 권이 훨씬 더 나은 모습을 보인 것을 보아 아데나워가 1965년 여름에 들어서서 다음 부분에 대하여 신중한 구상을 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책에 담겨있었다. 강조점을 정하고 중요한 장면을 조명하는 능력이 돋보였고 조수 포핑가가 조사해야 하는 질문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1965년 여름 17페이지 분량의 구상은 여전히 여러 번 수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데나워는 자료를 잘 다루게 되었다. 그는 또한 개별 장에 대하여 관련된 시기 부분에 삽입해야 하는 내용을 구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아데나워가 눈에 띄는 열정을 보인 이유에는 그가 기민당(CDU)의 총선 승리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그가 회고록을 저술하는 데에 연방정부 수상실이나 외무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에서는 1920년대 중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이 불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 재무부의 제왕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세계 위기》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그런데 공문서를 책을 쓰는데 사용한 문제가 정치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제 가스텐스 차관은 독일 연방의회의 질의 시간에 아데나워가 수상직을 떠날 때 외무부로부터 문서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해명해야 했다.     

첫 회고록은 1965년 10월 13일에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1분기에 16만 권 이상이 판매되었다. 아데나워에게 최초의 책 출판은 우울한 우연의 일치였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와 슈뢰더와의 싸움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축소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의적인 서평이 그의 기분을 북돋웠다. 특히 《차이트》의 골로만의 품격 있는 서평이 돋보였다. “예술 작품이나 즐길 거리로서는 이 《회고록》을 논할 수 없다. 이는 경위서(涇渭書)이다. 의도했든지 안 했든지 이 책은 작가의 성격, 그의 정신의 기능, 그의 정치술의 빛과 그림자에 관한 귀중한 증언이다.”     

다음 책은 실제로 더 잘 진행되었다. 큰 성공을 거둔 후 출판사는 당분간 조용했다. 그는 새 책을 더 여유를 누리는 가운데 썼다. 정치적 근심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일정의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그가 정치에서 밀려날수록 회고록이 그의 숙고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966년 4월 카데나비아로 아데나워를 만나러 갔던 골로 만은 안네리제 포핑가로부터 아데나워가 이미 작성한 글을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너무 놀라운 일은 그가 어쩌면 책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일어난 일들에 관한 집착이 현재의 정치에 관한 그의 발언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제1권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1966년 그가 제시한 타협의 여지가 없는 독일 통일 구상은 1952년과 1953년의 복잡한 정치를 사후에 단순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에 아데나워가 지녔던 공포는 또한 1965년과 1966년에 느끼는 공포이기도 하였다. 곧 소련의 팽창주의, 미국의 신고립주의, 독일의 희생과 중립화를 담보로 한 세계 강국의 합의에 대하여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1966년 4월 골로 만은 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통일 이후 중립화된 독일이 가능하다면 이를 바라시겠습니까?” 아데나워는 간단히 답했다.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독일과 프랑스, 더 나아가 서유럽 전체의 중립화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1952/53년과 1966년의 시대 상황이 서로 섞여 들어갔다. 1950년대 초반에 진행된 역사에 비추어 독일의 현재 정책의 몇 가지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민당(SPD)과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회담’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헤르베르트 베너에 대해 다소 호의적인 견해를 밝혔지만 사민당(SPD)에 대한 깊은 불신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1966 년 봄 아데나워는 골로 만에게 사민당(SPD)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좌파 정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소련 점령 지역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위험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제 종종 통일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앞으로 올 것이지만 유럽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과거보다 더 통일이 단지 국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에 관한 것이며 순전히 독일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아데나워는 분단이 극복될 때까지 기민당(CDU)이 다루어야 할 원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점에서 아데나워는 악셀 슈프링거와 견해가 일치했다. 슈프링거는 그사이에 중립화 구상을 버린 참이었다. 수상직 임기 말에 이미 아데나워와 슈프링거는 화해하였다. 그 이후로 슈프링거는 본이나 카데나비아로 그를 자주 찾아와 아데나워 노선에 관한 언론 대담을 주재하였다.     

1966년 봄 회고록을 쓰면서 아데나워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안네리제 포핑가는 종종 그에게서 25년 또는 50년 후 유럽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소련에 관해서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회고록 제2권은 1955년 9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협상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모든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크렘린의 남자들과 함께우리의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1966년 말에 회고록 제2권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그 전 해의 10월에 제1권이 출판되었을 때처럼 아데나워는 책에 관련된 행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시 그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정치가 그의 회고록 저술 작업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까지는 이는 변함이 없었다. 회고록은 몸통만 남아있었다. 일단 그는 최종 편집은 안 된 상태로 1955년부터 1959년까지의 내용을 담은 제3권을 완성했다. 지금까지 나온 세 권의 책 가운데 이 3권이 가장 표현력이 돋보였다. 아데나워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마지막 병에 걸렸을 때 안네리제 포핑가는 아데나워와 3권 가운데 1958년의 프랑스 국가 위기와 아데나워의 전설적인 콜롱베레도제글리세 방문에 관한 내용이 담긴 장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임종을 맞이한 자리에서도 아데나워의 생각은 회고록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마지막 여행    


1966년 3월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제는 그에게 남은 딱 1년의 세월은 많은 제약이 있는 은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카데나비아에서 약 2개월 반의 시간을 보냈다.


빌라 콜리나의 봄 시기는 거의 순수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는 회고록 저술 작업을 하고, 나무가 늘어선 큰 공원에서 산책하고, 함께 거주하는 이들이나 방문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작은 여행을 떠났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방문은 특별한 일이었다. 3주 동안 아데나워는 독일 연방의회의 벽에 걸리게 될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훌륭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80살이 된 화가와의 만남이 진정한 기쁨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했다. 이 만남에 관한 기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 ‘거장’(Giganten)들은 ‘거대한’(gigantisch) 기쁨을 누렸다.”     

아데나워와의 만남은 코코슈카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수상이 사망한 직후 그는 카데나비아에서 만난 날에 관한 스케치를 하면서 그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첫 만남이라도 그에게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카데나비아에 있는 콘라드 아데나워가 머무는 집의 공원 문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부활절 전이었기에 날씨가 좋지 않았고, 아직 시작도 안 된 그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몇 주가 더 걸릴 수도 있었다. 기자들은 기다려야 했다. 빌라 앞의 마지막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콘라드 아데나워의 똑바른 모습이 빗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작은 모자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모자는 그의 엄숙하고 긴 얼굴을 세상에 매우 잘 알려진 모습으로 만들어 인기를 높여준 것이다. 나는 노년기에 그러한 완벽한 예의를 갖춘 모습은 바른 교육이 부족한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좋은 예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요즘 세태가 그런 것은 누구도 놀랄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정치적인 토론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그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날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독일의 미래에 관한 염려로 그 위대한 인물은 종종 잠을 설쳤다. 그의 강청색 눈이 번쩍였다. 그는 전혀 노인 같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라는 체스판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코코슈카가 떠나자 마자 골로 만이 짧은 방문을 위해 도착했다. 아데나워가 말하는 동안 골로 만은 그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얼굴 색깔이 창백해지고 입이 벌어져 있었다. 눈 주의에는 커다란 눈물주머니가 보였다. 눈은 작고 초점이 없이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고령자의 부드러운 도자기 같은 눈, 멀리 바라보는 시선에서 메테르니히가 말년에 찍은 사진을 약간 닮은 것도 같았다. 그가 웃거나 미소 지을 때면 사랑스럽고 노회한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잘 잡힌 주름은 마구 구겨졌다. 특히 저녁 식사 시간에 그의 유쾌하고 지적인 비서인 포핑가가 그를 웃게 만들 때면 그랬다.” 골로 만은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노인에 관한 동정심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고령, 고독, 절제된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경험, 단순한 지혜, 자연스러운 존엄에 따른 가식 없는 모습, 진지함과 유머, 그에게서 발산되는 매력이 있었다.”     

안네리제 포핑가 또한 이에 관하여 쓴 글에서 좀 더 어두운 어조로 아데나워를 묘사하고 있다. 아데나워가 그곳을 떠나기 전 공원을 산책하면서 반대편 강둑에 있는 마을, 집, 성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람! 불멸의 영혼이 없다면 모든 삶은 무의미할 것이야. 이게 보게. 이제 나는 90살이고 아이들도 있지. 고통도 많았고 기쁜 일도 많았어. –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많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에게는 세상이 부패하고, 윤리적 기반이 약화하고, 권위가 사라지고, 가치관 혼란에 빠진 것만 보였다. 그는 근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숨막히고 억압적인 시대”가 신경을 마모시켜 모든 사람을 비생산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미국 우주 비행사들이 발을 딛게 될 달의 물리적 성질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아데나워는 우주여행 시대의 오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과거에 흔히 했던 것보다 더 자주 제삼자 앞에서도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안네리제 포핑가의 찬사를 무시하며 말했다. “나는 완전히 평범한 사람일세.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근면, 인내, 끈기, 일 ...”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평생 일관되고 목적을 의식하며 일해 온 것이 사실 내 최고의 미덕이지. 그리고 거이데 더해 관찰, 건전한 회의, 사람뿐 아니라 사태의 변화에 대해서 말일세.”     

사실 카데나비아에 마지막으로 머무를 때 고별 분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회고하면서만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코코슈카가 강인하고 때로 무자비한 이 남자를 밝고 부드러운 색상으로 그린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 그림이 걸려있는 독일 연방의회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흥분하고 걱정할 만큼 여전히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코머호수를 영원히 떠나기 8일 전인 1966년 10월 초, 그는 브리타 뢰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조용한 가운데 회고록 저술 작업을 하기 위해 당초 계획보다 더 오래 카데나비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본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혼란으로 크게 상심했습니다.” 본에서는 에르하르트 정부가 종말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카데나비아 밖에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아데나워의 우울한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1966년 5월 초에 그가 이스라엘을 대대적으로 방문한 것은 거의 모든 국빈 방문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마치 그가 여전히 연방 수상인 것처럼 보였다. 이 방문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직접 많은 인터뷰를 준비하고 또 그 후속 작업을 했다.     

이 초청은 사실 1963년 사임한 벤구리온 총리가 한 것이었다. 이 방문은 원래 1965년 가을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5년 봄에 중동의 외교적 사태가 벌어진 시기와 맞물리는 바람에 그 시점은 적절치 않게 되었다. 1966년 봄에도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전히 미묘한 상태에 있었다. 아데나워가 도착하기 직전 본에서는 차기 예산 회계 연도에 이스라엘에 제공할 개발 원조에 관한 합의를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전에 아데나워가 벤구리온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스라엘의 바람에 동의를 표하면서, 1960년 봄 뉴욕에서 가진 유명한 회담의 각서와 그 이후 벤구리온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당시 이스라엘에 대하여 추가 지원에 대하여 언급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20억 마르크를 약속한 것에 관해서는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50년 이후 그는 또한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 배상과 독일과의 관계에 대해 매우 논란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벤구리온, 모세 다이안, 시몬 페레즈, 나훔 골드만, 테디 코레크, 펠릭스 쉬나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아데나워의 이스라엘 방문을 관철하고, 준비하고, 품격 있는 진행을 책임졌다. 아데나워를 초대한 의전상의 이유는 레호보트에 있는 카임 바이츠만 연구소의 명예 회원증의 수여였다. 그러나 물론 이 방문은 물론 매우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벤구리온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들은 이제 이스라엘과 새로운 독일 사이의 관계에서 심리적 돌파구를 마련할 때가 왔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수립 된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에 관한 자랑스러운 감사도 표현해야 했다. 독일 측에서는 최초의 이스라엘 주재 독일대사인 롤프 파울스가 이 일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파울스는 어느 모로 최초의 아데나워 인맥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50년 이스라엘과 첫 번째 유대를 맺는 과정에서 이미 블랑켄호른의 참모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용서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모든 단체는 아데나워의 방문에 반대했다. 여기에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와 이스라엘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문 며칠 전부터 벤구리온의 후임자인 레비 에슈콜 총리가 아데나워의 방문을 비판하는 측에 기울고 있음이 이미 분명해졌다.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으로 벤구리온과 달리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지만, 그의 비판적 언행은 의전 차원의 결례를 겨우 범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려고 작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데나워는 깊은 개인적 감동과 정치적 신중함이 혼합된 상태로 이스라엘 방문을 시작했다. 잔뜩 모여든 기자들은 마치 그가 예전의 수상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느끼게 했다. 1966년 5월 2일 공항에서 개최된 환영식에는 195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위해 몇 년 동안 막전 막후에서 노력을 기울여온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벤구리온과 나훔 골드만이었다. 아바 에반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아데나워에게 구약성서식의 인사를 했다. “당신의 오심이 복되나이다!”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흥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벤구리온이라는 족장을 만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자기 삶의 이야기는 결국 유대 민족의 수천 년에 걸친 역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준비된 원고가 없이 낮은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진지한 이유는 특히 여러분의 민족에게 행해진 불의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이 이룩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다시 왔고 독립을 회복한 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는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     

그는 또한 그가 초대된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상이 되고 나서 언젠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도록 초대받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항을 떠나자마자 그는 시위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방문 과정에서 작은 규모의 시위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방문 마지막 날 저녁 파울 대사가 그를 초대했을 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귀국 후에 아데나워는 《슈피겔》의 기자인 슈라이버에게 방문 결과를 설명했다. 그 설명 과정에서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의 머리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많은 시위에 익숙해져서 정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에 대사가 만찬을 개최했을 때 우리 일행 4~5명이 계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누군가를 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단단하게 묶은 전단지를 들고 있는 남자가 그것을 내게 던졌습니다. (눈 옆에 있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 질문: ‘아프셨나요?’ - 아뇨, 충격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나 눈에 맞았다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와 함께 있던 소령이 호텔로 끌려온 그 남자를 때렸고, 그 후 직원들이 다시 그를 때렸소. 슈라이버 씨, 이스라엘에 있을 때 사람들의 우리에 관한 감정이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당연히 귀하의 흥미를 끌 것이오.”     

이스라엘 측은 아데나워의 경호를 위하여 적절히 경찰관을 배치하였다. 앞서 언급한 소령은 이름이 리세였는데 독일 출신으로 1934년 스위스를 거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그 부모는 아들이 같이 가자고 했어도 “독일은 우리 조국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모든 돌 하나까지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권유를 뿌리쳤다. 아데나워는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한 일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오.” 그래서 그는 독일과 이스라엘의 ‘화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삼갔다. 독일과 프랑 사이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늘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그는 나치가 6백만 명의 유대인만 죽인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독일인을 죽인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지적했다. 그리고 1,500만 명의 러시아 희생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은 당연히 유대인만 생각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지적도 잊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죽은 이들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쟁 전에 추방당한 유대인들을 잃은 것에 대해서도 개탄하였다. ‘배상 요청회’*를 방문한 것을 회상하면서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잘생긴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고, 그들이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신은 눈치챘나요?” 텔아비브에서 그는 ‘쾰른 클럽’에 가서 한때 독일동포였던 이들이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즐겁게 파티했다, 그리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아주 오래된 카니발 행사의 노래’를 부른 것을 그는 기억하였다.     

* 배상 요청회’ [Claims Conference, 역자주 – 1951년에 세워진 나치의 희생자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관한 보상과 재산 반환을 위한 협상을 주도하는 단체. 뉴욕에 본부가 있고 프랑크푸르트, 빈, 델아비브에 대표부가 있음.]     

그는 자긍심, 슬픔, 증오가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나치의 만행을 잊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에슈콜 총리의 의도적인 불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문 둘째 날 저녁 에슈콜이 손님을 만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사달이 났다. 만찬 연설 직전에 아데나워는 이미 언론에 배포된 에슈콜의 연설문 원고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독일이 ‘국제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고 있는’ 신호를 찾고 있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보상은 피의 도적질에 관한 상징적인 배상을 나타냅니다. 잔학한 행위에 관한 속죄나 우리의 슬픔에 관한 위로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노력뿐만 20년 동안의 모든 정치적인 업적에 관한 의심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에슈콜의 말을 바로 맞받아쳤다. “선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선의가 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그는 즉각 이스라엘을 출국하겠다고 경고하며 다비드왕 호텔로 돌아 와서 ‘살해 소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했다고 알렸다. 나중에 그는 독일인으로서 이를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에슈콜은은 파울스 대사가 주최한 큰 리셉션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아데나워와의 논쟁에서 다시 반격했다. 그는 대리 참석자를 보내지도 않기로 했다. 이러한 외교적 결례는 도를 넘은 것이어서 결국 이스라엘 총리는 아데나워가 출국하기 전에 다시 만나 사과의 말을 건네게 되었다.     

이러한 한바탕의 격렬한 대립은 개별 사건으로 치부되었다. 아데나워도 이에 대하여 이해를 표할 만큼 이량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 이외에 이스라엘의 관리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친구로 대했다. 아데나워 스스로가 그런 자기 모습을 보여준 대로 말이다.     

그래서 이 노인은 국빈 방문 때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직설적이고, 자신감이 넘치고, 예리하게 관찰하며, 진부한 농담은 전혀 모르지만 초대한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며, 무한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먼저 그는 분단된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도 요르단 지역의 성지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하이파, 갈릴리 호수, 나사렛, 다보르산까지 차로 이동하며 마침내 헬리콥터를 타고 네게브의 스데 보커에 있는 벤구리온 키부츠로 날아갔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활기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그 나라의 미래를 장밋빛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방문 당시에도 그는 그를 초대한 이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언젠가 이웃을 만들어야 합니다. 영원히 총을 들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수년 동안 독일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노력했던 아데나워가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핵무기 제조를 포기하는 것이 현명해 보일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소련의 무기가 이집트와 시리아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묘책은 없지만 서방이 이 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계속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감 있게 독일로 돌아왔다. 감탄해 마지않은 하인리히 크로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르신께서는 전성기 때만큼이나 훌륭했다.” 며칠 후 그는 코코슈카의 그림이 전시될 때 독일 연방의회에서 다시 축하를 받았다. 기자들은 그를 다시 제대로 보았다. 다시 한번 그는 며칠 동안 모든 미디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결국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축출하기 위해 그가 갑작스럽게 회복한 인기를 이용하고 싶어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제 에르하르트에게 외무장관을 해고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때마침 파리와 격렬한 줄다리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드골은 7월 1일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 조직에서 철수한 다음 독일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당대표직에서 물러났지만, 7월에 만 세 차례나 당 대표단 회의에 참석해서 에르하르트, 슈뢰더, 폰 하셀과 더불어 프랑스 정책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선거 캠페인에서도 그는 기민당(CDU)에 불리한 추세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찻잔 속의 회오리였다.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선거에서 기민당(CDU)이 패배했다. 이제 에르하르트 정부도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무너뜨리는 세력 가운데 아데나워가 당 내외에서 하는 비판은 더 이상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드골은 1966년 7월 본을 다시 찾았고 아데나워는 ‘유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유럽이 형식적으로 연합의 되든 연맹이 되든 그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언, 비판, 우려는 존중만 받을 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직후 여론은 다른 영웅들과 다른 말썽꾼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시 회고록 작업에 몰입해야 했다. 9월과 10월에 그는 소규모의 수행원들과 함께 매우 의기소침해서는 카데나바아로 갔다. 그를 가장 잘 따르는 딸도 함께했다. 그의 마지막 날들은 낙원 같은 휴양지에서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완전히 혼자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평소 그가 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빌라 콜리나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적막했다.     

이제 그를 방문하는 이들은 주로 출판인들이었다. 시카고에서 레그너리가 그를 찾아왔다. 아탈리아의 몬다도리 출판사는 밀라노의 프린치페 사보이아 호텔에서 리셉션을 개최했다. 또한 늘 하던 대로 디르크 슈티커와 차를 마시며 담소도 하였다. 과거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일하던 보좌관인 한스 킬브가 그를 방문하였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 환경부 산하의 ‘이탈리아환경보호연구소’(Ispra)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또한 나훔 골드만과 라이너 바르첼도 다시 그를 찾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울한 늦여름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기억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카데나비아를 찾아온 손님들을 만나며 탁자나 정원에서 특정한 체온계를 꼭 가지고 다녔다. 아마도 이는 지속적으로 체온을 측정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재고자 하는 그의 꼼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나 어쩌면 그는 그 체온계에 적혀 있는 글을 늘 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행운은 늘 강 건너편에 있다.”(La fortuna sta semper all altra riva).     

하필이면 1966년 11월, 본에서 커다란 사달이 나고 있을 그는 뢴도르프에서 가을 독감에 걸렸다. 이번에는 3주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을에 계획한 스페인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그는 이를 대신하여 겨울에 여행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67년 2월 14일 늘 함께하는 수행원들과 더불어 마지막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사실 건강을 생각한다면 날씨가 안 좋은 겨울에 스페인을 방문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수상 시절 초반에 그는 프랑코 장군의 스페인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스페인은 서유럽의 심장부이며 프랑코는 현재 상황이 불가피한 만큼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하는 장군이었다. 지리적 전략적 판단 또한 이러한 매우 객관적인 스페인 정책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관점과 초대자의 관점 모두에서 이 여행은 스페인이 유럽에 속하고 언젠가는 유럽 공동체로 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언제나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이 나라를 둘러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프라도, 에스코 리알, ‘전몰자의 계곡*, 엘 그레코의 갤러리가 있는 톨레도를 방문하는 통상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다시 그는 아침 7시에 시작하여 자정까지 지속되는 일정을 소화했다. 이 여행을 마친지 얼마 후에 사망한 것에 비추어 사람들은 아데나워는 느끼지 못했어도 그가 칼 5세의 지하묘를 방문한 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 무렵 아데나워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그것을 제쳐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독일 학교의 교장이 작별 인사를 하면서 장수를 기원하자 아데나워는 풍자적으로 대답했다. “글쎄, 이제 그만 나도 천국을 좀 누리게 해주시게.”     

* ‘전몰자의 계곡’ [El Valle de los Caídos,  역자주 - 마드리드 근처 과다라마 산맥 남쪽 기슭에 프랑코 총통의 지시로 스페인 내전 중 사망한 전몰자 5만 명을 위해 세워진 국립기념물. 인민전선을 중심으로 한 민중봉기를 제압한 국민군만을 위한 것이며 또한 군부 독재자였던 프랑코의 개인 농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비난받음. 프랑코의 무덤도 여기에 있음.]     

스페인 정부는 넓은 레드 카펫을 깔고 이 손님을 유럽의 위대한 어른으로 환대했다. 언론은 화려한 영접을 전 독일 수상을 신격화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아데나워는 프랑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겸손하고, 신중하며,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알았다. 그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와 그리스 출신의 소피아 공주에게서 이미 스페인의 미래를 마주하면서 동시에 자기 과거를 접하게 되었다. 1954년 그리스에서 공주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이때가 그의 해외여행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때만 해도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그의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비해서도 그의 비관론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1966/67년 겨울은 이미 핵확산 금지 조약을 둘러싼 논쟁으로 휩싸여있었다. 이 무렵 아데나워는 미국과 소련의 두 초강대국의 공모에 대항한 매우 가혹한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스페인 방문이 준 주요 매력은 천 명이 넘는 저명한 청중이 ‘마드리드 과학, 문학, 예술 아테네오’*에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였다는 데 있었다. 스페인 정보부 장관인 프라가 이리바르네는 아데나워의 대대적인 마드리드 방문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기 연설을 철저히 준비했다. 사실 그는 그것이 자기 유럽 통합 의지에 관한 유언을 종이에 적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이 연설은 유럽 통합에 관한 간절한 호소를 담고 있었다. 그는 열광적인 스페인 청중들에게 소련은 유럽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럽은 “하나의 커다란 대륙 자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기에 더해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 결국 나머지 모든 나라가 추가적으로 유럽에 속한다고 한 것이다. 곧 6개국 공동체는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스페인도 밖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유럽을 생각한다면 동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마드리드 과학, 문학, 예술 아테네오’ [Ateneo Científico, Literario y Artístico de Madrid, 역자주 - 1835년 스페인 마드리드에 세워진 사립문화기관. 이 안에 있는 두 미술관이 유명함.]     

그가 보기에 소련은 여전히 자유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연설 전체의 요지는 핵무기 비확산 조약을 반대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이 때문에 유럽 에너지 산업에 재갈이 물릴 것이며 이에 따라 유럽의 산업 생존에 결정타가 되는 일이었다. 초강대국에 대한 그의 경고는 이제 드골만큼이나 신랄한 것이었다. 이 조약이 실제로 수립된다면 나머지 국가들은 ‘어느 모로 무의미한 나라가 되고 말 것"이었다. 이 나라들은 “강대국의 뜻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독일연방공화국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코시긴은 조약서에 독일이 서명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를 떠난 아데나워는 드골을 다시 방문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아테네오‘에서의 연설에서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유럽‘이라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었다. 이제 그는 이른바 ’푸셰 플랜 II’(Fouchet Plan II)에 따른 유럽의 정치적 결합의 개념을 재검토하자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1967년 4월 로마에서 열린 유럽경제공동체(EEC) 설립 10주년 기념행사가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드골은 아데나워의 호소에 대해 정중하면서도 약간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무렵 아데나워의 생각은 이제 모든 주요 동맹국의 뜻과 어긋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의 생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언론의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된 것을 기화로 핵무기 비확산 조약에 반대하는 분위기를 뛰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자극적인 구호를 찾았다고 믿었다. 이 조약은 ‘완전한 모겐소 플랜’*이었다. 그는 언론 도구를 선택하는 데 가리는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필 그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슈피겔》과의 대담에서 이러한 소련과 미국 모두에 반대하는 자기 입장을 전개하였다. 이 대담에서도 그는 경제적 영향에 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 뒤에 곧 핵무기 비확산 조약의 숨은 뜻은 독일 경제를 경쟁력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완전한 모겐소 플랜’ [Morgenthauplan im Quadrat, 역자주 – 미국의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 주니어(Henry Morgenthau Jr.)가 1944년 9월 제2차 퀘벡 회담에서 《독일의 항복 이후 계획안》(Suggested Post-Surrender Program for Germany)을 통해 제안한 것으로 종전 이후 독일의 모든 공업 시설을 파괴해 버리고 독일을 농업국가로 만드려는 계획. 그러나 유럽, 특히 영국의 재건에 독일의 산업 능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이는 취소됨. 아데나워는 이 제목으로 1967년 2월 27일 《슈피겔》과 대담하기도 하였음.]     

이제 그는 또한 새 독일 연방 수상과도 충돌하였다. 키싱거는 “핵확산 금지 조약 반대에 관한 과열된 논란”을 비판하면서 아데나워를 명시적으로 거명하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아직은 공개적으로 키싱거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개인적인 편지에서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그러한 비판을 하기 전에 말이나 글로 먼저 입장을 밝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자기 입을 거칠게 만드는 것이 바로 키싱거의 태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귀하와 귀하의 정부가 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미국과 소련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매우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귀하와 귀하의 정부, 그리고 이에 영향을 미치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이 그러한 달콤한 말만 한다면 아무도 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경험을 해온 내 말을 믿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에르하르트가 수상으로 재직할 때 우리가 경험한 것이 나의 생각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키싱거는 아데나워의 공격을 즉각 반박했다. 그의 편지는 ‘정중한 인사말’로만 끝을 맺고 있었다. “우리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곧 논의할 수 있다면 당의 결속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키싱거는 콘라드 알러스에게 아데나워가 독일과 미국의 단절을 계획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데나워는 조약에 반대하는 흔들림 없이 캠페인을 계속했다. 다만 키싱거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 독일재단* 설립 기념행사가 뮌헨대학교의 대강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공개적인 자리에 나선 아데나워는 이를 ‘거세게 항의하고’하고 ‘싸움을 거는’ 또 다른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는 골칫덩어리라고 비난받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 잠든 사람을 깨워서 그가 경계를 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골칫덩어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외치고 싶습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세월을 위해 깨어있으십시오!”     

* 독일재단 [Deutschland-Schtiftung, 역자주 - 독일의 민족주의 보수 세력이 설립한 재단으로 2007년에 해체됨. 그때까지 해마다 ‘콘라드아데나워상’을 시상하고 《독일잡지》(Deutschland-Magazin)를 발행하며 기민당(CDU)에 우호적인 논조를 펼쳤음.]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퀵》과 가진 면담서 아데나워는 《슈피겔》과의 대담에서 한 비판을 강조했다. 그의 생각에 그 조약이 가져올 엄청난 경제적 여파에 대하여 그는 계속해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오’에서 한 연설에서 아데나워는 사실 자신도 핵무기 보유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했었다.     

그는 현재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전임 부통령과의 대화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닉슨은 당시에 자신을 가장 강력한 냉전주의자 가운에 한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다녔다. 닉슨은 아데나워를 만나러 온 미국의 마지막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비밀정보 자료를 바탕으로 닉슨의 눈앞에 소련의 공격 능력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대해 설명했다. 아데나워는 맹세하듯이 말했다. “소련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3월 17일 노부스케 키시가 아데나워를 만나러 왔다. 그도 권력에서 밀려난 거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일본의 검증된 반공주의자를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만약 조약이 체결되면 “미국과 소련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조약은 끔찍한 것이었다. 조약에 서명하면 독일 경제는 “지속적인 통제 아래 놓이게 되어 결국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빈곤해질 것이다! 기아와 실업이 따르고 독일은 좌파에 몰리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드골 이후 인민전선이 대두될 것이었다! 이 조약의 영향을 받는 나라들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기 조약에 맞서 힘을 합쳐야 했다!     

그런 우울한 예언으로 이제 그를 찾는 몇몇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며칠 전까지 그는 소련의 군사력과 미국인의 근시안적인 강대국 이기주의에 대해 우려했다.     

계속해서 그는 키싱거에 관한 의심을 계속 드러냈다. 아데나워는 1967년 3월 중순 오토 프리드리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너는 오늘날 내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다. 키싱거도 먼저 그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을 지경이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만이 아직 희망이라고 여겼다. “핵무기 비확산 조약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내용 변경 없이 수락된다면 다행히도 그가 분명히 내각을 떠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걱정하고, 경고하고, 위협해 보았지만, 본의 정계에서는 뢴도르프에서 좋든 싫든 회고록 저술에 몰두하는 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래전부터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데나워에게 남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3월 말에 그는 또다시 심장마비를 겪었다. 1962년 1월에 이미 심장마비가 발생했었다는 사실은 최측근과 일부 의사들만이 알고 있었다. 3월 29일에 새로운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아데나워가 92세가 될 때까지 의학적으로 돌보며 그를 ‘살려왔던’ 의사 베버-부흐는 심전도 검사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베누스베르크에 있는 대학병원의 하이머 교수에게 연락했다. 아데나워는 폐렴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관지염에도 시달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이전의 더 심각한 질병이 발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의사가 아데나워에게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여전히 정치적인 근심으로 전전긍긍했다. 끝까지 그가 근심한 것은 프랑스와 독일 관계의 위기였다.      

심장마비가 오기 며칠 전에 그는 키싱거에게 긴 편지를 쓰기 위해 마지막 힘을 모았다. 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드골의 마지막 방문을 언급하면서 다시 흥분하며 ‘푸셰 플랜 II’를 다시 한번 시도해보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는 3월 16일 자로 드골이 보낸 전보를 희망에 차서 언급했다. 여기에는 유럽의 위대한 사업을 지속하기 위하여 “우리 두 나라가 화해를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구호가 담겨 있었다. 키싱거 수상에 관한 아데나워의 기분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는 휴가 중인 키싱거와 그의 아내에게 부활절인사를 보낸 것이다. 키싱거는 이러한 신호의 의미를 알고는 친절한 답신을 썼다. 그리고 아데나워의 요청대로 4월 3일 뢴도르프로 그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심장마비가 다시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중병의 상황도 아데나워의 이런 노력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이 대담에서 갑자기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 마지막 대화는 분명히 잘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 바로 다음 날 아데나워가 수상에게 매우 친철한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대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 프랑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3월 31일 세이두 대사를 통해 드골에게 전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간결했지만,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이 노인이 독일 외교 정책의 거의 양립할 수 없는 관련 분야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드골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귀하께서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끄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부통령 험프리가 고데스베르크에서 한 연설에서 착안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정치적 책임의 위임을 통하여 강화하고 그와 동시에 더 강력하고 독립적인 유럽을 건설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4월 4일에 역시 전문으로 도착한 드골의 답변은 실망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메시지에 감사드립니다. 늘 그렇듯이 나는 그 문제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귀하와 마찬가지로 나도 유럽의 통일로 가는 길은 독립성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이어진다고 확신합니다. 수상 각하께 저의 진심 어린 존경을 보내드립니다.”     

드골에게 보낸 아데나워의 전문은 이미 불치병에 걸린 그가 정치적 현실에 관한 감각을 잃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정치적 책임의 위임을 통하여 강화하고 ...” 드골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말이다! 드골이 보낸 메시지에 관한 그의 반응은 또한 그가 이제는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키싱거에게 보낼 편지를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메시지가 매우 훌륭하고 전망이 밝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허락한다면, 나는 귀하가 이 일을 전담하여 더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어제 방문하여 대화를 나눈 것에 감사합니다. 대화가 매우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대화가 매우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던 4월 4일 화요일 그는 이렇게 썼다. 교양이 있는 키싱거는 나중에 이 편지를 읽다가 죽음을 앞둔 눈이 먼 파우스트가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괴테의 작품에서 늙은 파우스트도 여우원숭이가 무덤을 파는 소리를 들으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열어주는 늪을 매립하는 위대한 미래의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고상한 행복/특권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즐기고 있네.”     

아데나워의 힘든 죽음은 그가 살아온 것과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었다. - 곧 브라이베르크 산자락에 있는 그가 어릴 때 쾰른에서 일하던 시절에 이사 온 그가 편히 여기는 뢴도르프의 집에서 자녀들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고해성사를 하고 그의 아들 파울이 마지막 도유를 했다. 그는 죽을 때도 수백 년 동안의 전통대로 보수적인 삶을 살아온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 10일 동안 7명의 의사로 구성된 팀이 필요한 장비와 약물로 그를 간호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안정을 취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매우 불안해하면서 수시로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의 안락의자에 앉아 라인 계곡을 바라보았다.     

1967년의 봄은 늦게 찾아왔다. 그는 정원에 꽃이 피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심장마비를 겪고 깊은 무의식에 빠지기 하루 전에 침실 앞의 튤립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 그는 정치에서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이상 신문을 직접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안네리제 포핑가는 《보너 룬드샤우》에 나오는 낙관적인 논조의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는 로마조약 서명 10주년을 맞이하여 로마에서 회합을 가진 6개국 공동체의 수장들이 모인 것에 관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착란 상태에서 자기 인생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되풀이 떠올려야 했다. 1894년 쿠스토디스와 한하르트와 함께 클림서호른을 등산한 모험이 떠올랐다. 그때 아데나워는 눈이 쌓인 가파른 산허리를 가다가 깊은 계곡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1933년 3월 쾰른 시장에서 쫓겨난 다음 괴링이 찾아온 일이 떠올랐다. 1944년 8월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일이나, 수상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유럽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근심하며 슈트라스부르크로 향하던 장면도 떠올랐다.     

이제 그는 다시 어두운 침실에 누워 있었다. 그가 가끔 일어나면, 그의 눈앞에는 그의 부모의 사진과 십자가에서 내려진 성자를 무릎에 올려놓은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임종을 지킨 그의 아들과 딸들에게 한 것이었다. “도 이트 엣닉스 초 크리쉐”(Do jitt et nix zo kriesche) - 곧 쾰른 사투리로 “울 필요 없다.”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4월 19일 밤에 아데나워의 곁을 지킨 아들 막스와 파울은 그가 평안히 죽었다고 전했다. 마지막 의학 소견서에는 차가운 언어로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마지막 시간 동안 그는 아주 평안하게 누워 있었다. 4월 19일 오후 1시 21분에 호흡과 심장이 멈춘 다음 사망했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의 죽음은 그가 언론과 동시에 일반인의 영웅임을 보여주었다. 전 세계의 사진기자와 인쇄 매체 기자들이 체닉스벡으로 몰려들었다. 친지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미디어 시대의 모든 기술을 활용해 온 사람은 죽을 때 언론 보도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국민은 마치 대부가 죽은 것처럼 그의 질병과 죽음의 소식을 크게 받아들였다. 나라 안의 큰 소동은 그가 정말로 일종의 공화정의 군주처럼 수백만 명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철저한 프로이센식의 공직윤리에 젖은 이 라인란트 출신의 인물과 함께 국가를 옛 독일식으로 이해하던 마지막 대표자가 떠나가게 되었다. 이때가 1967년 봄이었다. 학생 운동이 곧 시작될 무렵이었다. 1969년 아데나워를 반대하던 구스타프 하이네만이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나는 나라를 사랑할 수는 없고 오로지 나의 아내만 사랑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와는 반대로 국가의 위엄에 더 의미를 두고자 했다. 비록 모순되게도 그가 민족국가에서 나아가 국가를 넘어선 공동체로 넘어가는 미래를 보았지만 말이다. 그의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더 깊은 의미에서 한 시대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장례행사를 글롭케 전 차관이 구상한 것이 특기할 만했다. 두 사람 다 국가와 정치가는 존엄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같았다. 그리고 그 존엄은 때로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데나워의 장례식은 그렇게 보여줄 기회였다.     

비슷한 국장의 경우를 찾아보려면 독일 역사의 먼 길을 돌아가 보아야 했다. 빌헬름 1세 황제의 죽음이 이와 비슷한 소동을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지역을 휩쓸었다. 그가 1888년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도 위대한 창시자, 아주 먼 과거의 군주,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한 시대 종말의 현상으로 여겨졌다. 빌헬름 1세 황제의 장례식도 개신교식이기는 했어도 국가와 교회 요소의 독특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도 다양한 국장 행사가 독일에서 열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데나워와 같은 설립자는 없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여전히 삼황제 시대*의 장례식에 관한 기억을 알고 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열두 살이었다.     

* 삼황제 시대 [Dreikaisrjahr, 역자주 –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헴름 2세 황제가 차례로 황위에 올랐던 1888년을 의미함]     

지금까지 독일연방공화국은 테오도르 폰 호이쓰와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위한 비교적 조용한 국장 예식을 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대부분 뭔가 매우 특별한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의 경우 많은 찬사를 받은 모범적인 국장은 2년 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이었다. 그의 나이는 당시 거의 아데나워 정도였다. 글롭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처칠의 장례식을 찍은 천연색 영상을 보았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무리 없이 빌릴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담겨있었다. 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성당에서 거행된 장례 예식, 템스강 위로 이어진 엄숙한 운구,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박한 시민들의 묘지에 매장한 것 등이었다.     

아데나워 삶의 여정은 국가를 대표하는 뜻과 아데나워의 삶의 단계가 서로 맞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신도 뢴도르프에서 샤움부르크궁으로 운구되고, 이어서 쾰른 대성당에 장례 미사를 거행한 다음 라인강을 건너서 다시 뢴도르프의 가족묘로 돌아갔다.     

그의 사망 후 며칠 동안 뢴도르프의 관을 안치한 방에서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그는 하인리히 크로네와 브루노 헤크과 함께했다. 크로네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에르하르트는 거의 울먹였다. 우리는 그와 악수했다. 아데나워는 죽어서도 여전히 본래 대로 족장의 모습으로 거기에 누워 있었다. 1층에 있는 그의 작고 소박한 침실에 관을 안치했다. 죽음의 위엄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의 손은 포개어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체념의 빛이 있었다.”     

4월 22일 토요일부터 이틀 동안 아데나워의 시신은 국가에 맡겨졌다. 연방 국경 수비대와 군대가 그러한 국장에 처음으로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아데나워는 나훔 골드만에게 군대가 “독일이 다시 강대국이 될 기회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아데나워가 사망한 다음 강대국이라는 단어는 금방 기피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만이 대부분은 내부적으로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겸손한 ‘중진국’의 개념이 이제 덜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심지어 독일연방공화국이 경제적으로는 거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왜소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7년에도 독일연방공화국이 어떤 역할을 전개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군대는 자주 국가로서의 독일연방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특히 외부적으로 천명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회와 아데나워의 가족은 국가와 군대의 화려함이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장례식의 전체 의전은 놀랍도록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은 없었지만, 과정마다 강조점이 있었다. 시작과 끝에는 가족이, 본에서는 국가가, 프링스 추기경이 장엄미사를 거행하는 쾰른에서는 교회가 중심이 된 것이다.     

가족들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연방 국경 경찰관이 관을 집 밖으로 날랐다. 그리고 그 관은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밤까지 샤움부르크궁의 커다란 국무회의실에 안치되었다.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6명의 연방 국경 수비대 장교들이 고인의 유해를 지켰다.     

일요일 밤에는 쾰른으로 이동하여 쾰른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쾰른 시민들은 월요일 내내 아데나워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사임한 후 몇 년 동안 그의 주변은 한산했었지만 이제 모두가 국가와 교회가 거행하는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다. 25명의 국가 원수들과 100명 이상의 대사가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이는 자유세계의 커다란 국장 행사였고 국내외적으로서 아데나워 아래서 그리고 아데나워를 통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서방 민주주의 공동체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독일에 도착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 대해 몇 년 전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존슨은 그 누구도 그리고 그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권력에 빠져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퇴짜를 놓았던 이 대통령은 쾰른 대성당 안에서 거의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드골도 작별 인사를 했다. 4월 19일 그는 륍케에게 고전적인 산문 형식의 조전을 보냈다. 그 전문에는 그가 아데나워의 정치적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끔찍한 전쟁 후에 아데나워는 자기 나라를 쇄신했습니다. 그는 쉼 없이 유럽을 구성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선도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존슨과 드골은 서로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서방은 둘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국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독일 연방 대통령이 존슨과 드골이 서로 악수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했지만, 매우 어색한 상황만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데나워가 1959년 여름 륍케를 민 것과 1964년 다시 한번 그를 지지한 것이 그의 인사 정책에서의 결정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다.     

영국의 해롤드 윌슨 총리도 아데나워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이 완고한 노인이 영국에 대해 얼마나 거만하게 나쁜 이야기를 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무너진 세계 강대국, 그 국민은 새로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맥밀런은 영국 대표단에 함께하였다. 이렇게 다시 한번 영국 정치가들이 이날만은 신사가 되었다.     

유대인의 족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이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건국의 인물이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의 장례식에 온다는 것은 그가 독일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한 모든 연설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었기에 이 81세의 인물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 있는 독일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독일 연방의회까지 걸어왔다.     

모든 국빈이 참석한 쾰른 대성당에서 장엄미사가 거행된 것은 이 도시 역사상 가장 큰 행사였다. 특히 아데나워가 자기 의지를 관철했던 독일 핵심 국가의 행사였다.     

독일 해군의 3대의 쾌속정의 호위를 받으며 쾨닉스빈터로 운구하자는 생각은 모든 행사 진행자의 구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4월 25일 늦은 오후, 15,000명의 쾰른 시민들이 라인강 강둑에서 관을 ‘호위’했다. 관은 독일군 깃발로 덮여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수여된 훈장들도 관과 함께 옮겨졌다. 세베린스다리 근처에 배가 다다르자 4대의 야전 곡사포가 예포를 발사했다. 그리고 12대의 스타파이터 전투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강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의 관은 쾰른으로부터 멀어졌다. 강둑을 따라 늘어선 수만 명의 시민들은 운구단이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운구로를 택한 것은 주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뢴도르프의 조용한 묘지에는 밤이 시작될 때야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과 전 세계의 텔레비전 앞에 모인 4억 명의 시청자들은 독일의 정치적 초점을 서빙으로 이끈 라인 지방 출신의 독일 수상이 영면을 취하는 이 과정의 상징적인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독일 핵심 국가의 서방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많은 것들이 이 기회에 다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서방 기독교의 기초, 공화주의 전통, 자의식을 지닌 도시 시민계층, 자유로운 민족들의 세계적인 동맹, 독일연방공화국의 새로운 민주적 전통, 그리고 서방으로의 전환을 실질적, 상징적으로 표현한 본에 수립된 정부 소재지가 있었다.     

본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와 에마 바이어가 1905년 신혼여행에서 ‘시벤게비르게’를 바라다보았던 요새가 있다. 아데나워 가족의 일부가 살았던 군대막사 지구는 보이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공부한 쾰른대학교도 안 보였다. 그러나 운구단은 하머슈미트 빌라와 샤움부르크궁의 정원이 보이는 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연방의회 건물과 바트 고데스베르크의 롤랑슈트라쎄에 있는 륑스도르프 빌라도 지나갔다. 여기에서 1945년 초가을에 아데나워와 프랑스 장교들이 그리 영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와 독일 관계의 유익을 위한 영국에 맞설 음모를 꾸몄었다.     

1950년대 초 어려운 협상의 현장이었던 다이흐만스아우에에 있는 대사관 앞에서 조지 멕기 주독 미국대사는 재규어 쾌속정 운구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963년부터 그는 아데나워가 미국에 대하여 실망하며 제기한 비판에 대응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의 훌륭한 대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있던 대사관 건물 앞을 유해를 실은 배가 안개 속에서 지나갈 때의 바그너의 오페라에 나오는 것 같은 으스스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배 위에 있던 관과 몇몇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독일에 이는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운구단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본 사람에는 토마스 델러도 있었다. 그는 슈마허-헬몬트 부부와 함께 부의장실의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동료에게 깊은 감동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요?” 그다음은 차례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한때 아데나워의 강력한 적수였으나 2년 전에 화해를 한 바가 있었다. 불과 3개월 후 그는 아데나워의 뒤를 이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뢴도르프에 몰려들었다. 숲 공동묘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이미 어둡기때문에 조명을 받으며 뢴도르프의 사냥꾼들이 아데나워를 가족묘로 옮겨야 했다. 오직 가족과 도라 페르드멩게스와 친한 친구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파올라 로다와 카데나비아의 시장도 포함되었다. 자르 지방에서 온 60명의 소년 합창단도 함께했다.


아데나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조각된 가족묘에 에마 아데나워와 구시 아데나워 곁에 묻혔다. 파울 아데나워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뢴도르프의 청년사냥대 취주단은  독일 군가인 ‘내게는 전우가 있었다네.’(Ich hatt’ einen Kamaraden)를 연주했다.     

이렇게 하여 쾰른에서 시작하여 본을 거쳐 뢴도르프까지 이어진 고리가 닫혔다. 아데나워의 세계적 명성과 지역적 뿌리를 이 장례 예식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그의 온전한 삶이 세련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느꼈다.     

아데나워는 자기 죽음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1963년 7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몇 가지 답변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사이러스 슐츠버거였다. 그가 생각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물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다면야! 누구도 그에 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다른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두려움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관한 생각에 상당히 무관심했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과 함께 삶이 그저 무(無)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할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하는 지를 우리 인간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들어보세요.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죽음만큼이나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슐츠버거는 역사적 인물은 이러한 질문에 관한 답도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언제나 나의 최고 법은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각자의 의무를 다하라!”     

그는 자신이 후세에 명성을 남길 가능성에 대해서는 궁극적인 것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그래도 굳이 이야기해야 할 경우에는 자기 비하적인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임하기 몇 달 전에 앞서 언급한 대화에서 슐츠버거는 또한 아데나워가 자기 임기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1949년 8월 21일 뢴도르프 회의에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사민당(SPD)에 맞서 연합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기간의 정책이 확립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성과로 그는 프랑스·독일 조약을 언급했다. “우리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프랑스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슐츠버거가 기억에 남는 실패에 관해 물었을 때 아데나워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주제넘게 들리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독일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강조하였다. “서방에 합류하고, 그러한 합류를 이루고 나서 외교 정책 측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했다. 당시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1967년 4월에 나온 수많은 사설과 그 밖의 성명서에 드러나 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칼 부르크하르트가 쓴 편지이다. 그는 아데나워가 무덤에 묻히기 이틀 전인 4월 23일 칼 추크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데나워의 죽음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를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대화를 나눈 것은 두 번뿐입니다. 이제 그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국제 정치 무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국가 권한을 올바른 위치에 두고 이를 그의 강력한 개성을 통하여 계속 성공을 거두며 그 권한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민주주의적 국가 형태의 근본적인 위험 곧 무정부 상태에 빠지거나 독재로 이어질 수 있는 근본적인 위험을 극복했습니다. 무익한 이론적 토론의 혼란 속에서도 그는 마침내 거의 드믄 일인 건전한 인간 오성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생각, 본능, 행동이 완전한 통일 이룬 덕분의 오래전에 사라졌던 독일에 관한 세계의 신뢰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 모든 가장 정확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몰이해와 방해가 되는 비판에 대하여 그는 활기 넘치는 신선함과 전술적 능력으로 맞섰습니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기존의 관행이 아니아 독창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였고, 인간의 약점을 온전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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