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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14. 2023

시엄마가 왜 가족이냐고?

시엄마는 전우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예비 신랑’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리며 조언을 구했단다. 지난 2월 상견례를 했고 오는 10월 결혼할 예정인 예비 신부에게 “이번 주 금요일이 어머니 생신이니 축하한다고 메시지 하나만 드리면 어떨까?”라고 물었단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금요일에 찾아뵐 건데 뭐 하러?”였단다. 그래서 예비 신랑이 “미리 연락드리면 좋잖아. 가족 될 사이인데.”라고 반론을 제기하니 예비 신부가 “가족? 어머니가 어떻게 내 가족이야. 나는 오빠랑 결혼하는 거다. 혼인신고하고 가족관계증명서 떼면 오빠만 나오지, 어머니는 안 나온다.”라고 했단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당연히 가족”이라고 다시 반박하니 예비 신부는 “그냥 오빠네 어머니일 뿐이다. 왜 대리 효도를 시키려고 그러는 거냐. 지금 나한테 연락하라는 강요가 대리 효도다.”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예비 신랑은 “진짜 진지하게 파혼을 고민 중”이라고 토로했다고 한다.(출처: 세계일보, https://m.segye.com/view/20230903502368?mache=portal)      


이것이 사연을 최대한 요약해 본 것이다. 물론 누리꾼들은 갑론을박하는 모양이다. 뭐 각자의 의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일단 시어머니는 위의 예비 신부가 말하는 의미에서는 가족이 아닌 것이 맞다. 그 근거를 놓고 가족의 의미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를 하기에는 벅차니 그냥 넘어가고 생물학적으로만 파악해 보자. 우리 인간은 모두 인종과 피부색 종교 문화 민족의 차이와 무관하게 약 20만 년 전 지구상에 출현한 homo sapiens sapiens의 후예다. 그런데 모든 인간 수정란의 성염색체는 XX 여성이다. 그러다가 무슨 일인지 착상 전후를 해서 XX 염색체가 XY 염색체로 변한다. 딸이 갑자기 아들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수정 순간에 이미 성은 결정된다. 정자 자체가 X염색체나 Y염색체 하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정자와 수정이 되든지 관계없이 일단 수정란의 성염색체는 모두 XX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Y염색체와 수정된 수정란이 나중에 아들로 변모하는 것이다. 반대로 Y염색체가 X염색체로 변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아담, 곧 남자의 갈빗대에 살을 붙여 이브, 곧 여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판명되었다. 이제 종교는 더 이상 과학을 이기지 못한다. 수학적으로 볼 때로 X염색체가 약 2,000개의 유전자를 지녔고 Y염색체가 80개의 유전자를 지닌 것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많은 것이 줄어들 수는 있어도, 적은 것이 많아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의 유전자와 여자의 유전자가 1대 1로 결합하여 자식이 나오지만, 유전자가 담긴 미토콘드리아는 오로지 모계의 것만 이어진다. 부계, 곧 아버지의 미토콘드리아는 소멸하여 버린다. 그래서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세계에서는 여성이 압도적인 승리자다.     


이러한 생물학적 사실이 고부갈등과 무슨 관계냐고? 당연히 깊은 관계가 있다.     


불교에서 갈파한 모든 인간의 본능에는 식욕, 색욕, 수면욕, 그리고 물욕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게 된 이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 곧 무식해서도 아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음욕, 곧 죄 때문도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대로 살고 싶은 맹목적인 의지(Blinder Wille zum Leben)를 모든 인간이 지닌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맹목적으로 살려고 애쓰는가? 그것은 당연히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유전자의 통제를 받아 그저 그 유전자를 계속 후손에게 전하려는 맹목적인 욕망에 끌려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왜 그러냐고?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 이는 마치 우리 우주의 태초에 왜 빅뱅이 있었냐는 질문과 같이 답이 없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무도 모르는, 인간이 맹목적으로 살아남고 번식하도록 촉발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고부갈등의 근본 원인이 된다. 자연에서도 쉽게 관할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는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고 기를 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강한 수컷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고’ 최대한 많은 씨를 뿌려대느라고 애쓴다. 그런데 이 수컷의 몸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안에 숨은 유전자는 오로지 엄마, 곧 여자의 것만 있다. 유전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수컷의 엄마가 자기 아들을 이용하여 자기 유전자를 최대한 뿌려대는 것이다. 이는 매우 효율적인 번식 방법이다.   

  

통상 여자는 제한된 숫자의 난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다시 말해서 여자는 태어나는 순간 평생 생산할 난자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 이에 비하여 남자의 정자는 무한대로 생산된다. 물론 영원무궁은 아니지만, 파바로티, 앤서니 퀸,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그리고 한국의 김용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는 70이 넘어도 얼마든지 생식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50살 전에 이미 폐경기에 이르러 더 이상 생식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자는 기껏해야 1년에 1명의 후손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종족 보존, 특히 많은 씨를 뿌리는 데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여자도 사람인지라 종족 보존의 본능에 충실하다. 그래서 색을 밝힌다. 그러나 색을 밝힌 결과 임신과 출산을 하는 동안에는 종족 보존 활동을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남자는 다르다. 여자와 똑같이 색을 밝히지만, 임신할 필요가 없기에 아내가 임신하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씨 뿌리기 활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무한 생식 활동을 할 수 있다. 딸을 낳아봐야 자기처럼 ‘겨우’ 1년에 한 명을 낳고 그 한 명도 2~3년 길러야 생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출산과 양육은 종족 보존에 필수적이지만 여자의 측면에서 볼 때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통상 남자보다는 여자가 아들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로빈 베이커가 쓴 <정자 전쟁>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여자가 종족 보존의 본능에 충실하여 어떤 남자와 섹스하고 아이를 뱄는데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또 섹스하고 그 다른 여자가 임신한다면 첫 번째 여자의 종족 보존에 경쟁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가 첫 번째 여자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을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더구나 그 둘째 여자가 더 매력적이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남자의 맘에 더 들게 될 때는 첫 번째 여자의 종족 보존이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여자는 일단 남자를 만나면 일부일처 제도의 올가미를 남자에게 씌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남자가 착한 아빠 착한 인간이라는 도덕적 굴레로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아내, 모든 며느리는 이렇게 남편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생존 본능에 달린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나 남편의 엄마, 곧 그 며느리 시엄마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엄마가 자기의 미토콘드리아를 지닌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통해 자기 유전자를 최대한 퍼뜨릴 가능성이 커진다. 시어머니의 처지에서는 아들의 씨를 뿌릴 때 굳이 한 여자에게만 집중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아들이 최대한 많은 여자와 성관계를 가져 최대한 많은 후손을 보도록 하는 것이 엄마의 처지에서는 최상의 상황이 된다. 종족 보존에서는 다다익선 아닌가?     


이렇게 자기의 후손만 수호하려는 며느리와 자기 후손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는 시어머니가 만나면 당연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시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를 대체할 새로운 미토콘드리아를 지닌 며느리가 등장했으니 더욱 그렇다. ‘내 새끼’인 아들이 이제 생판 모르던 집안의 유전자를 지닌 여자의 종족 보존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쉽게 참아낼 시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고부갈등을 이런 어쭙잖은 생물학적 지식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 더해 유교적 남성중심주의에 절어 있는 사회에서 억압당해 온 여자의 처지에서 남자의 엄마와 시엄마와 며느리의 역학 구도를 형성하게 되면 그 충돌의 강도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워킹맘이 대세인 현실에서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과거의 며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엄마가 보기에는 대가 ‘센’ 며느리만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제 시엄마가 며느리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유전자의 전쟁에서 양보는 없는 것이 근본원칙이니 말이다. 아무리 윤리·도덕이나 법과 제도를 말해도 인간의 본성을 이기는 경우는 없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난 이기주의자다. 그래서 시엄마가 며느리에게 양보하거나 지고 들어간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시엄마와 며느리가 이리 대립하는 구조가 만들어졌을까? 그 이유는 당연히 진화 때문이다. 모든 씨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 대결을 벌여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유전자의 보존에 가장 이롭기 때문이다. 그런 구조 안에서 시엄마와 며느리는 대립할 숙명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론을 안 믿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에게는 이 모두가 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성경에서 예수는 당신이 세상에 와서 콩가루 집안이 생긴다는 말은 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누가 12, 53) 그런데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은 이 말세가 이제야 온 모양이다. 이제야 고부갈등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서양은 고부갈등이 없나? 천만의 말씀이다. 다만 그들은 핵가족화가 완성되었고, 혈연을 굳이 중시하지 않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표면화되지 않을 뿐이다. 장가가기도 훨씬 전인 18세, 곧 성인이 되면 아들은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된다. 대부분 대학교 생활과 더불어 이러한 분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물론 예수가 말한 대로 완전히 갈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독일에서 살면서 직접 관찰한 고부 관계는 일종의 계약 관계였다. 그중에 내가 직접 목격한 경우는 한국 간호사와 독일 남자가 결혼한 집안이다. 독일의 대부분 집과 마찬가지로 시모와 며느리는 떨어져 살았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시엄마와 며느리가 만나는 경우는 생일, 성탄절 정도다. 그런데 그런 특별한 날이 아닌 때 며느리 집을 찾는 경우 시엄마는 반드시 식비를 들고 왔다. 곧 음식 대접을 받고는 그에 대한 ‘합당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한국 사회와 같이 체면과 정을 따지는 나라에서 살던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알게 되면서 그러한 독일 시엄마의 태도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른바 ‘대리 효도’, 더 나가 억지 효도를 강요하는 유교 문화권의 가부장제가 판치는 한국 사회가 더 위선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독일의 모든 고부가 이런 계산적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좋은 고부 관계가 독일에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독일은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이기에 며느리의 사생활을 시엄마가 건드릴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왜 일방적인 효만 강조하는 기형적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리고 그 효를 정말로 ‘가족’이 아닌 며느리에게 당연히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왜 한국 사회는 효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물론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에 이르게 된다. 부모가 나를 최소 3년은 길러주었으니 나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은 치러야 효가 아니냐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결국 받았으니 돌려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상거래에서 효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문화권이고 공자 자신도 죽고 난 다음의 세계에 대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고 고백한 터이기에 유교 문화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생활에서의 거래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며느리의 효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내 아들은 내가 낳아 길러준 공로가 있지만 며느리는 생판 모르던 다른 사람의 자녀다. 유교의 논리라면 그 며느리는 시엄마가 아니라 친정엄마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내가 자라는 데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시엄마는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엄마가 그 며느리에게 위에서 말한 유교적 거래를 요구하는 것은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위에 예를 든 예비 신부가 말한 대로 시엄마는 내 가족이 아니다. 며느리의 처지에서는 한 남자와 결혼하여 이제 새로운 종족 번식 사업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시엄마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적 차원에서도 거래의 대상이다. 그런데 가부장제의 며느리 착취 구조가 여전히 남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며느리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달을 두고 며느리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하는 데 이는 말이 안 된다. 시엄마는 아들을 낳고 장가를 보냈으면 사실 이 세상에서 생물학적 종족 보존의 소임을 다하고 물러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시엄마가 차지했던 자리에 며느리가 들어설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시엄마가 며느리를 자기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거나 자기가 그동안 아들에게 투자한 것을 회수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며느리에게 뭔가 대가를 요구한다면 생물학적, 역사적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이 된다. 인류가 종족 보존을 최적화하도록 진화해 온 것인데, 더 이상 종족 보존의 기능이 없는 시엄마가 이제 막 종족 보존의 길에 들어선 며느리를 힘들게 한다면 인류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종족 보존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나온 예비 신부가 시엄마는 가족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을 비난하는 의견도 보이는 데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예비 신부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현대의 가족 개념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부모와 자식, 2세대로 이루어진 것을 가족이라고 한다.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동거 가정, 일인 가정, 딩크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것을 가족이라고 한다. 예비 신부도 이런 의미에서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시부모는 뭔가? 서양의 개념으로 이것을 extended family, 곧 확대가족이라고 한다. 이 확대가족에는 조부모와 친척, 친지가 포함된다. 그리고 이 확대가족에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통상적으로 이웃에 사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시엄마는 바로 이런 이웃과 다름없는 존재다. 그러니 위에 나온 예비 신부의 주장은 옳다. 그런데도 어쭙잖은 유교의 효를 들이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폭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시엄마가 효를 강요하는 것은 못마땅하지만 예비 신부가 앞으로 겪을 그 엄청나 고난을 미리 겪은 '전우'에 대한 전우애로 시엄마에게 선행을 베풀면 어떤가 말이다. 억지로 가족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맘에도 없는 억지 효를 하느라고 위선자가 되지 말고. 이러한 충고를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가 인류에게 했다. 예수가 어느 방에서 한참 연설을 하고 있는 데 누가 대뜸 예수에게 말했다. "이봐요. 당신 엄마와 동생이 저 밖에서 당신을 찾는데요." 그러자 예수가 반문을 했다. "누가 내 엄마고 내 동생이냐?" 그리고는 스스로 답까지 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내 형제자매로 엄마다." 곧 혈연관계를 따지지 말고 서로 확대 가족으로 살라는 말이다. 시엄마를 내 엄마도 아닌데 엄마인척 하지 말고 확대가족이자 '전우'로 여기면 얼마나 좋은가? 살기 힘든 이 세상에 태어나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데 기왕이면 서로 좋게 지내는 것이 좋은 거 아닌가? 그 예비 신부도 30년도 안 되어 폐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진화론적으로 '용도 폐기' 되어 사회에서 밀려날 처지에 있게 되는데, 그때의 내가 바로 지금의 내 시엄마라고 생각하면 최소한의 측은지심이 발동하지 않을까? 그래서 억지로 쥐어짠 가짜 효를 하느니, 불쌍한 늙은 전우에게 인심을 베푼다는 생각으로 시엄마를 대하면 훨씬 나은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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