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의 판단은 흔히 주관적인 편견이 개입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도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특히 여자의 아름다움은 50대에 진실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으로서 말이다. 사실 나 개인적인 소감을 솔직히 말하자면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 이순에 접어들어 보니 비로소 ‘미인’이 보인다. 그래서 겸사겸사 아예 ‘미인 열전’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현대 사회가 양성평등의 사회이고, 특히 여자의 외모를 평하는 것은 인권의 침해라는 말도 있으니 조심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홍길동도 아닌 다음에야 아름다운 여인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이 열전을 시작해 보는 것이다.
사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동서양의 구분이 크다. 내가 독일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학생 식당에 줄을 섰을 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앞뒤에 늘어선 금발의 푸른 눈, 그리고 백옥 같이 흰 피부를 지닌 ‘백인’ 여성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로 영화나 광고를 찍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이 너무 커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코는 오뚝하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문자 그대로 ‘colorful’한 다양한 색깔은 마치 흑백텔레비전을 보다가 컬러텔레비전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전혀 다른 세상에 내가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 서양 여인들이 주는 느낌은 단순히 ‘예쁘다’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는 아직 낯설기만 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다 ‘부드러웠다.’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튜빙엔 대학교는 나름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어서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유학을 오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한동안 독일에 있다가 5년 만에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귀가 아팠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여자 아나운서나 김희선의 목소리 톤이 너무 ‘앙칼지고’ ‘강하게’ 들렸다. 그리고 눈은 찢어졌고 입이 너무 작고 립스틱은 쥐 잡아먹고 한참은 된 듯 거무죽죽했다. 동생에게 물어보니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나운서이고 배우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전혀 ‘여성성’을 느낄 수가 없었다. 뭔가 ‘사나워’ 보였다. 독일에서 종종 아시아인들이 ‘도끼눈’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어머니가 해주시는 만두를 먹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나는 만두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매우 좋아했다. 이를 아시는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한국에 온 아들을 위하여 만두를 빚어주셨다. 그런데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마늘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김치 냄새도 참기 힘들었다. 정말로 그랬다. 독일에서는 마늘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 겨우 5년의 세월이 내 입맛도 바꾸어 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의 ‘여자를 보는 눈’도 그랬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거울을 보지 않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5년이 흐르면서 백인 여성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들의 피부에 난 털이 부담스러워 보였고 흰 피부에 가득 얼룩처럼 나 있는 주근깨와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피부의 감촉도 거칠었다. 또한 굵은 뼈대가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들의 독특한 체취가 견디기 힘들게 되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기 힘든 요소들이 많이 보였던 것이다. 역시 지혜는 시간이 흘러 경험을 쌓아야 오는 법이다. 독일 생활 11년을 청산하고 한국에 들어오니 한국 여인들이 다시 보였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였던가.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 한국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 것이다.
흔히 아름다움, 특히 여인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아름다움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어불성설이다. 내적 아름다움은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외적으로 추한 데 내면적으로만 아름다운 여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내면과 외면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여인이 진정한 미인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두드러지면 파격이다.
그런데 왜 50대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20대에는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식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모든 20대의 여성에게는 ‘젊음의 빛’이 난다. 물론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이때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50대의 ‘미인’조차도 능가하는 ‘여성성’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20대에는 미인이 아니어도 배우자를 만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음의 빛은 오래가지 못한다. 30대까지 겨우 버티다가, 40대에 접어들면 그 빛은 거의 다 사라지고, 50대에는 완전히 흔적이 없어진다. 그리고 60대가 되면 아무리 외모를 ‘가꾸어도’ ‘젊음의 빛’은 물론 여성성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사실 이는 여성의 숙명이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초경을 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아니다. 독일어로 표현한다면 정관사가 중성인 Das Mädchen이다. 그러다가 가임기에 접에 들고 나서야 비로소 정관사가 여성인 Die Frau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폐경기 이후에는 그 ‘생물학적 여성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누구나 3단계의 성적 정체성의 metamorphosis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남자에게는 발생하지 않는 독특한 체험이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 종의 번식을 위한 이른바 ‘이기적 유전자’의 놀음이다. 순전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여성은 폐경기 이후에 ‘용도 폐기’된다. DNA는 종족 보존의 ‘기능’을 상실한 여성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50대 이후의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은 대부분 사라진다. 순수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이는 어쩔 수 없는 대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다만 양성평등과 인권 존중의 이념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물학적 정향만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인격 모독’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금기이기에 공개적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주제일 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말해서 이기적 유전자의 ‘가혹한’ 놀음에서 벗어나는 50대에 접어든 여자에게서 참된 내적, 외적 조화를 이룬 여인의 아름다움의 식별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젊음의 빛으로 가려진 참다운 아름다움이 50대의 여인에게서 비로소 발견된다는 사실을 나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지혜는 나이와 더불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미의 으뜸은 조화이다. 우주의 조화처럼 모든 요소의 조화를 이루는 여인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가 미인인가? 미인의 조건은 내적 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쉬운 외적 조건을 이야기해보자.
직관적으로 이목구비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더불어 동양 전통의 관상학 차원에서 오악이 조화를 아름다움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이목구비 가운데 눈, 코, 입은 눈에 바로 뜨이니 비교적 식별이 간단하다. 그런데 귀는 잘 안 보이고 무심코 지나간다. 그러나 귀는 얼굴의 조화에 중요하다. 오악은 코를 중심으로 하여 이마 좌우 광대 턱이니 아무리 이목구비가 잘 갖추어졌다고 해도 오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또한 아름답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것인가? 다시 말해서 미적 판단이 보편타당할 수 있는가 말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증거로 신혼부부에게 자주 제기되는 ‘왜 그런 사람과?’라는 질문을 제시한다. 맞는 말이다. 미적 판단은 주관적인 성향에, 그리고 감정에 많이 좌우된다. 그리고 특히 이른바 적령기의 남녀에게는 ‘콩깍지’가 쓰이기 마련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배우자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객관적 아름다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여인의 미모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모는 먼저 얼굴에서 확인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얼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니 몸의 조화도 중요하다.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적절해야 함은 물론이요, 목과 팔다리의 길이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미녀의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은 길이와 폭과 크기와 부피, 그리고 색깔을 기준으로 측정이 가능하다. 목과 팔다리 머리는 길어야 한다. 반면에 귀와 발과 치아는 짧아야 한다. 이마와 미간과 가슴은 넓어야 하고 입과 허리와 발목은 좁아야 한다. 그리고 유방과 엉덩이와 허벅지는 두텁고 손가락과 콧날 목은 가늘어야 한다. 또한 코와 유두와 머리가 작아야 한다. 피부와 치아는 희고 눈동자와 눈썹은 검어야 한다. 입술과 볼과 손톱은 붉은 기가 있어야 한다. 조건이 만만치 않다. 그러니 100점짜리 외모의 미녀를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고 하겠다.
이런 기준을 내세우면 외모지상주의로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인권과 인격 모독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그러나 외적인 것에 더하여 내적 아름다움이 있으니 너무 화낼 것도 없다. 내적 아름다움은 말씨와 자태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자태는 무엇보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법이다. 내적 아름다움에는 교양이 중요하지만 으뜸은 품성이다. 품성은 교육으로 형성되는 부분인 인성(character)과 결코 바뀌지 않는 개성(personality)으로 나뉜다. 그러니 외모와 마찬가지로 후천적 노력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미인이 되는 길은 험난하다. 그래서 아무나 미인이 될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