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흔히 여성해방주의로 번역된다. 그리고 서양에서 시작된 이 사상은 매우 긴 투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여성 차별, 특히 정치적 참여, 곧 투표권을 위한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한 인간 삶의 전체적인 범주에서의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운동이 되었다. 최근에는 특히 경제적인 활동의 동등한 기회와 보상 체계에 대한 요구가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통계를 보아도 여성의 경제적 활동의 기회는 증가하는 반면에 급여는 남성의 것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동일 노동의 개념과 관하여 최근 언론이 군복무 문제를 들고 나왔다. 군복무는 20대 초반의 남성들만이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제도는 부당하니 여성도 의무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와대에 청원까지 되어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한국적 상황에서 제기될 수 있는 독특한 문제이다. 병역의무 제도가 시행되는 나라 가운에 여성의 병역 의무가 사회적 이슈로 제기된 적인 한 번도 없다. 한국이 유일하다.
도대체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현재 세계적으로 병역의무 제도를 시행하는 선진국 가운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남성들만이 군복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군복무를 거부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남성들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민간봉사(Zivildienst)를 하거나 세금을 내야 한다. 반면에 여성들에게는 이런 의무나 페널티가 전혀 없다. 모병제를 실시하는 미국조차도 Selective Service System을 운영한다. 곧 18세에서 25세의 모든 미국 남성 시민들은 이 기관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유사시에는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런데 2019년 2월 미국 연방 헌법재판소는 남성만 등록하는 것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결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남성만을 등록 의무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등록을 안 할 경우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게 되어 미국의 남자 청년들은 어쩔 수 없이 등록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태어날 때의 성을 기준으로 하기에 트랜스젠더 가운데에서도 남성이었다가 여성으로 성전환한 이들은 등록 의무가 있지만 여성으로 태어났다가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람들은 등록할 의무가 없다. 철저한 성차별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징병제를 실시하는 선진국에서 한국과 같이 여성의 군복무 의무가 논란이 된 경우는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것이 문제로 등장한 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징병제는 인류가 정착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빈부 격차와 더불어 계급이 발생하고 남성 권력자를 중심으로 국가 형태의 세력이 형성되면서 남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적 제도였다. 여성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군대 생활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랐기에 여성에게 그런 보상을 남성들이 허용할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에서 느닷없이 여성의 징병이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논란의 과정을 자세히 보면 언론이 갈등을 조장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들, 특히 MZ세대의 중심인 20대 남성들의 동의를 얻는 것을 볼 때 언론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MZ 세대 남성들에게 군복무는 여전히 피하고 싶은 국가 권력의 강요에 따른 의무이다. 과거 박정희 시절에 국방의 의무는 납세와 더불어 ‘신성한’ 국민의 의무로 선전되었지만 이제는 이 의무가 권력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모병제를 실시하는 미국의 경우 남성과 여성 모두 자발적으로 일정 기간의 군복무 기간은 물론 의무 기간을 완수할 경우 사회적, 경제적으로 돌아오는 혜택은 어마어마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의 남성들은 억지로 해야 하는 군복무를 마쳐도 돌아오는 혜택이 전무하다. 게다가 2년 가까이에 이르는 ‘공백’으로 취업에 지장을 받고 있음에도 그러니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있던 군복무 가산점 제도마저 여성계의 입김으로 폐지되어 남성 청년들의 불만이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복무라는 것이 피해만 주는 제도로 최대한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페미니즘이 사회적 담론의 주제로 자리매김하면서 남성들의 역차별에 대한 인식도 더불어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국의 페미니즘의 고질병이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더욱 악화시켰다. 서양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춘데 비하여 한국의 페미니즘은 특히 유교적인 가부장제도에서 ‘남성’들에게 ‘희생’을 당한 ‘여성’들의 복수의 뉘앙스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권리와 불의한 제도와의 대결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직접적인 충돌의 구도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복무 제도 문제도 그 제도 자체의 인권과 관련된 정당성에 대한 논의보다는 ‘왜 남자만 군대서 뺑이 쳐야 하는가?’ 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런 '뺑이'에 대한 반대급부가 전무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선천적인 생물학적 유약함을 내세워 여성의 군복무의 불가성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남성 역차별논자들은 여성들의 논리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이중성을 보인다고 반격한다. 곧 취업이나 급여와 같은 이익이 되는 분야에서는 철저한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야근, 당직, 육체노동, 그리고 군복무와 같은 ‘고된’ 의무에서는 여성의 육체적, 심리적 유약함을 이유로 뒤로 뺀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는 가운데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남성과 여성들이 원시적인 육두문자를 사용하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배설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남성과 여성이 진흙탕 싸움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바로 정치가들이다. 사실 21세기의 포스트모던 사회를 넘어선 트랜스휴먼 사회의 대한민국에서 매우 고전적인, 더 나아가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징병제라는 제도의 불합리한 점, 인권침해적 요소를 따지고 개선을 위한 논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정작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들과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이 책임지고 나서서 제도의 개선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군복무라는 이슈도 근본적인 인권 차원의 담론 구조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민주적 토론의 장이 마련되고 거기에서 수렴된 의견들이 입법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는 그런 '민주적 프레임'이 없다. 하다 못해 국회의원이 되어 정장을 입지 않으면 가부장들이 입방이 찧는 곳이 바로 한국의 국회이다. 국회의 꼰대들이 그 어려운 일을 왜 스스로 나서서 하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억대 연봉이 나오는 판에. 그래서 정치가들은 손 놓고 남성과 여성의 진흙탕 싸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관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입진보들과 마찬가지로 입페미들은 변죽까지 울리고 있다. 참으로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자들이다.
그런데 정치가들이 이런 식으로 직무유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국 페미니즘의 기형적 도입에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본래 서양의 여성해방운동은 참정권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문자 그대로의 여성들의 투쟁을 처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근세사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해방과 더불어 거저 주어졌다. 피는 고사하고 한 방울의 땀도 안 흘리고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유교적 가부장제도에서 ‘주체성’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살던 여성들이 하루아침에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유권자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서양의 여성들이 피와 눈물의 투쟁으로 얻어낸 것을 거저 얻은 한국의 여성계에서 여성해방운동의 투쟁 목표를 제도 개선보다는 가족이라는 개인적 제도의 억압에서 여성을 해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유교적 가부장제도에서 대다수의 여성들이 문자 그대로 '일자무식'인 상황에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극소수의 그 당시 유학 등을 통하여 신문물의 물을 먹은 이른바 '인텔리' 여성들이 주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소수의 깬 신여성들이 여성들이 다수의 무지한 구시대적 의식에 머물고 있는 여성들의 ‘의식화’의 전위대 역학을 한 것이다. 이는 매우 기형적인 페미니즘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의 여성해방운동은 박해를 직접 받는 여성들 자신이 바닥에서 투쟁을 해 올라온 것이라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먹고사는 것이 전혀 지장이 없는 인텔리들의 지적 유희에 가까운 전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는 마치 러시아 공산혁명 전에 이른바 '우매한 민중'을 이끈 극소수의 '엘리트' 볼셰비키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이른바 ‘페미니즘 볼셰비키’들은 대부분 대학교 교수실, 연구소와 같은 아늑하고 따뜻한 방의 책상 앞에서 그들이 혐오하는 남성들이 만든 구조 안에 안주하고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대부분 말과 글로 선전선동에만 전념한다. 손에 진흙을 전혀 안 묻히면서 말이다.
문제는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여자도 아니다. 문제는 남성성이다. 남성성의 폭력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면 가부장제도가 되고 경제제도가 되면 신자유주의, 곧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된다. 본질적으로 여자는 남자 없이 살 수 없고 여자는 남자 없이 살 수 없다. 사랑 타령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지속 가능성, 더 나아가 Homo Sapiens Sapiens 종의 보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타도의 대상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남성 중심의 폭력과 갑질은 남성의 제거가 아니라 그런 가부장제도와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개혁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생물학적 성을 주제로 한 대결 중심의 페미니즘은 이를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남성의 권력 구조에 편승한 일부 볼셰비키 페미니스트와 표를 의식한 사이비 페미 정치가들이 판치고 있기에 더욱 희망이 없다.
이런 기형적 페미니즘이 결국 21세기 들어와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분노의 배설과 결부되면서 더욱 기형적인 남녀 대결구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오로지 남자의 여자에 대한 성추행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타도가 아니라 폭력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의 개혁을 위한 것임에도 말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속담에 귤이 황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는데 한국의 작금의 페미니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 보니 징병제의 인권 차원의 문제점 지적과 개선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에는 관심이 없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물고 뜯는 원시적인 쌈박질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