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의 꿈은 김대중이고 현실은 정동영이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2표 차이로 통과된 이후 이낙연 테마주가 급상승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낙연도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꿈으로 끝날 것이다. 아마도 자기를 정치에 끌어들인 김대중을 모델로 삼고 싶겠지만 현실은 정동영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무엇보다 이낙연은 호남 출신이다. 지역색이 뚜렷한 한국의 정치판에서 호남 출신은 일종의 천형이나 다름없다. 호남을 대표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전남 신안 출신의 김대중은 1971년 신민당 후보로 처음으로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여 박정희와 맞섰다. 선거 결과는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539만 표를 얻은 김대중이 약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 당시 군소 후보와 무효표를 합치면 68만 표나 되었다. 더구나 무효표가 50만 표에 이르렀다. 그래서 김대중은 즉각 선거 부정을 주장했지만, 나머지 표를 다 얻었다고 해도 당선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남과 호남의 색깔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호남 소외론’을 선거 구호로 들고 나왔고 이에 맞서 박정희는 ‘신라 대통령’을 구호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호남 분열의 시작이었다.
박정희는 민주적 대통령 선거를 3차례 치렀다. 그런데 5대 대선에서는 겨우 1.55%p, 15만 표 차로 윤보선에게 신승했다. 만약 이때 야권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윤보선이 반드시 당선되었다. 오재영의 40만 표와 변영태의 22만 표만 건졌어도 말이다. 100만 표에 이르는 무효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만약 윤보선이 당선되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박정희는 인기가 없었다. 이때 너무 놀란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서 민심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제6대 대선에서 568만 표를 얻은 박정희가 452만 표를 얻은 윤보선을 약 100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때 군소 후보와 무효표를 합치면 143만 표나 되어 이 표가 모두 윤보선에게 모였다면 박정희는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영남에서 박정희에게 136만 표를 몰아주면서 박정희가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게다가 제7대 대선에서도 박정희는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잘 먹고살게 해 주었는데도 국민은 박정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경상도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그래서 화가 단단히 난 박정희가 그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독재에 나선 것이다. 민주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할 바에야 독재를 통해서 영구 집권을 해보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서슬 퍼런 독재도 겨우 8년밖에 못 갔다. 시대정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독재자의 말로는 늘 그런 법이다. 이렇게 박정희는 죽는 날까지 국민의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독재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박정희의 독재가 오히려 김대중을 살려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때부터 김대중은 김영삼과 더불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1971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반 유신 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박정희의 지시로 안기부가 그를 일본에서 납치하여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결국 동교동 근처에서 풀어주었다. 이후 국내에서 홀로 투쟁하던 김영삼과 손을 잡고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그러다가 1977년 수감되면서 단식 투쟁도 여러 차례 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자 풀려난 김대중은 대권을 꿈꾸었지만, 김영삼에게 밀렸고 결국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받은 전두환은 미국과 거래를 했다. 자기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면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겠다고 한 것이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김대중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2년 김대중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보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 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 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 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金大中”
물론 김대중이 겨우 이 탄원서 한 장으로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서방의 많은 국가가 전두환을 비난하고 심지어 바티칸마저 김대중 구명에 나섰다. 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우물 안에서만 활개를 치는 전두환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전두환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김대중의 국제적 명성을 더욱 높여 준 꼴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 망명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한 김대중을 전두환도 더 이상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6.10 시민혁명으로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김대중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나선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의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김영삼에게도 밀린 3위를 하였다. 이때 노태우는 직선제 대통령 가운데 최저인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였다. 단일화만 되었다면 노태우는 당선이 불가능했다. 두 사람의 욕심이 군사정권을 5년이나 더 연장해 준 꼴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김대중은 다시 정계 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2년 후에 다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이때 나이가 지금 이낙연보다 한 살 어린 70세였다.
그래서 김대중은 14대 대선에 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약 1천만 표를 얻어 42%의 득표율을 보인 김영삼에게 거의 200만 표 뒤진 33.8%의 득표율로 졌다. 88.1%를 몰아준 광주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김대중이 완패하였다. 그러자 김대중은 다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정계 복귀를 한 다음 마침내 15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약 이인제가 경선불복하고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면 이회창이 너끈하게 당선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40.2%의 득표율로 이회창의 38.4%에 1.53%P 차이로 신승했다. 이인제가 얻은 19.2%의 대부분은 보수 진영의 것이었으니 이회창은 땅을 칠 일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이때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정적이었던 김종필과 맺은 DJP 연합 덕분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대선 이후 김종필을 책임총리로 임명하고 대통령 임기 2년 차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하여 임기 후반은 김종필이 내각제 하의 정부 수반으로서 국정을 책임지도록 할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이를 믿고 김종필이 협력했지만 대선 이후 김종필은 토사구팽을 당했다. 이로써 김종필은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에게도 토사구팽의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만약 이인제가 나서지 않고 김종필이 돕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절대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가 칭송해 마지않는 천하의 민주 투사인 김대중도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서는 호남 출신 정치가가 자력으로 대통령이 되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국 정치 지형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런데 전남 영광의 빈민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도 사시에 도전도 못 하고 <동아일보>에 들어가 20년 넘게 직장 생활하다가 김대중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전라도를 지역구로 국회의원을 하고, 전남 도지사도 하고, 국무총리도 하면서 꽃길만 걸은 이낙연이 김대중의 길을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낙연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에도 전두환을 두둔하는 글을 쓴 의심을 받은 인물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변인을 했음에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달이 벌어질 때 색깔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무총리로 발탁된 문재인 정부에서도 세련된 자기 이미지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늘 꽃길만 골라 가는 ‘기회주의자’ 이미지도 같이 키운 바가 있다.
이낙연 자신도 김대중은 고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재명 대표같은 투사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에게 패배한 다음에도 깨끗하게 승복하고 돕기보다는 외부에서 계속 이재명을 붙잡고 늘어졌고 잘 알려진 대로 이재명 패배에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그런 뒤끝이 결국 이번에 다시 한번 발휘된 것이다. 이낙연의 목표는 뻔히 보인다. 절대로 탈당이나 신당 창당을 할 생각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 지금 노리는 것은 당권이다. 그리고 당장은 내년 총선에서 공천받는 것이 지상과제다.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뜬금없이 지역구인 종로구를 던져버려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에 한 석을 더 얹어준 배신을 하고 원외가 되고 나니 몹시 허전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내년 공천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재명과 첨예하게 대립해 온 처지에서 친명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언론에 알려진 바로는 어제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직전에 친명 진영과 공천권 문제에 관하여 협상을 벌였으나 만족한 답을 듣지 못하자 결국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과시는 결과적으로 역풍을 불어올 것이다. 종로구를 내 던진 역풍에 비할 바가 아닌 저항에 마주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낙연의 미래는 전북 순창 출신으로 대학 동문인 정동영의 길과 같은 것이다. 같은 대학을 나왔고 언론계 출신이라는 경력도 비슷하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까지 하는 출세를 하고도 결국 노무현 대통령을 밟고 올라가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큰 표 차로 패배한 기록을 세웠다. 결코 그릇이 아닌 자가 욕심을 부리면 어찌 되는지를 정동영보다 더 잘 보여준 예는 없다. 그런데 이제 이낙연이 그 길을 가고자 한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이낙연에게 동년배이자 대학 동문인 이해찬이 좋은 모델이 될 것 같다. 비록 고향은 이해찬이 충남 청양이라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물론 이낙연이 모든 것을 조종했을 리는 없다. 30명 정도 되는 인원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은 전시의 일선 소대장도 잘 못하는 일이다. 어차피 차기 공천의 가망성이 거의 없는 자들이 꼬장이나 부려보자고 저지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낙연 정도의 경력을 쌓은 자가 계속 모호한 중립의 길을 가는 것은 누가 봐도 기회주의자의 모습 밖에 안 보인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에 대한 의견을 묻자, 한 대답이 “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이다. 한 마디로 머리를 잘 굴려보겠다는 소리인데 언제까지 이리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이낙연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해야 하나? 오늘 날은 좋은데 정치판은 엉망인 채로 세월은 흐르고 있다. 마음이 답답하니 마침 핼러윈이 다가오는 참이니 박쥐 사냥이라도 나서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