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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13. 2023

이스라엘 전쟁으로 차라리 세상의 종말이 오기를 바랄까?

인류가 먼저 사라지고 지구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 110만 명을 대상으로 소개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본격적으로 가자지구를 초토화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자지구는 현재 이스라엘의 통제로 구호 단체도 제대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6m 높이의 장벽으로 가두어 놓았기에 이스라엘의 허락이 없으면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자지구 남쪽으로 이동한다면 이집트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이집트가 110만 명의 난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이 안 된다. 결국 다 죽이겠다는 말이다.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볼 때 하마스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양상이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정말로 이번에는 하마스를 완전히 와해시킬 작정을 한 모양새다. 거국 내각을 수립한 네타냐후에게 전권이 주어졌으니 그를 막을 제도적 장치는 이제 전혀 없다. 입에도 담기 싫지만, 유대인이 과거 나치 히틀러에게 당한 genocide를 이제 팔레스타인 주민을 대상으로 실천할 모양새다.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했으니, 2만 명에 불과한 하마스는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날 것이다. 더구나 진작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하여 고사 작전을 펼치고 있으니 인도주의적 재난이 곧 눈앞에 전개될 모양이다. 이 상황에서 헤즈볼라가 참전하고 아랍 국가와 소련도 개입한다면 정말로 제3차 세계대전이 중동 지역 전체로 확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뉴스에는 자주 ‘애국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전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로 모여들고 있다는 ‘감동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나라를 사랑하는 ‘찐’ 애국자들이라는 칭송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애국’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애국은 반드시 다른 나라 사람을 거의 멸종시키는 일이어야 하는가? 그 애국적 전쟁에서 상대방의 임신한 여자와 3살짜리 여자아이를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누가 내렸는가? 물론 군사 전략가들은 그런 것이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라고 치부해 버린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이게 되면 사람들은 왜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게 된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 히스테리다. 그리고 그런 병적 상태에 있는 이들이 하나 같이 내세우는 것이 애국이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애국의 대상은 허상이다. 나라를 지킨다고 하지만 그 나라가 단순히 영토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말한 대로 전쟁이 나면 그 전쟁의 최종 책임을 지고 전쟁을 총지휘하는 정치가와 군 지휘관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권력과 이득이 그들에게 모이면서 적만이 아니라 자국의 인적·물적 피해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한다. 그런 최고의 정치·군사 지도자를 비난하는 것은 바로 이적행위이고 매국노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는 영웅이자 신적 존재가 된다. 전쟁의 최종적 이득을 얻으면서도 결국 칭송을 받고 더 나아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미친 짓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최상부의 정치·군사 지도자들끼리 협상을 하면 상대방이나 자기 나라의 인적·물적 피해를 피할 수 있는데 그들이 전쟁을 지속시키고자 안달이 난다. 과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다 잊어버린다. 한번 이런 광기에 물들면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러다 다 죽는다고 외쳐도 대부분 듣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정학적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석유와 밀과 같은 자원 때문에 실익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자지구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곳에 사는 주민은 문자 그대로 죽지 못해 삶을 연명하는 극빈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오로지 영토확장을 위한 이스라엘의 야욕에서 벌어지는 살육일 뿐이다. 그것도 팔레스타인 국민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땅을 어느 날 갑자기 영국을 등에 업고 들어온 유대인이 벌이는 참극이다. 팔레스타인 국민의 처지에서 볼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져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팔레스타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살육이 벌어지려고 하는데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움을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미국은 당장 포탄 1,000발과 탄약 10만 발을 지원하면서 싸움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포탄과 탄약 앞에서 무방비로 죽임을 당할 팔레스타인 여자와 어린이는 눈에 전혀 안 들어오는 듯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제 막 시작한 이스라엘 전쟁을 바라보면서 뜬금없이 인간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지금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류는, 생물종을 기준으로 볼 때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다. 이 인종은 지구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일구어냈다. 현재 80억 명에 이르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곧 인류의 숫자는 국제연합의 예측에 따르면 2080년에 약 100억 명을 돌파한 이후 서서히 그 숫자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류는 특히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구 자원을 급속히 고갈시키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에 벌써 여러 과학자가 세기말을 예측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자원의 고갈, 기후 변화와 같은 장기적인 것보다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전쟁과 인간을 통해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새로운 질병과 같이 순전히 인간이 만든 원인으로 인류가 결국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면 그러한 외적인 원인보다 인간의 야만적인 본성이 결국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으로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종은 지구상의 다른 많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종족 보존의 본능에 따르는 삶을 살면서 ‘나’와 ‘우리’의 패거리를 규정하는 울타리를 제한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 패거리에 들지 않는 존재는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나의 생존에 적이 되는 존재로 상정되는 순간 더 이상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구상의 다른 생물종들과 공통으로 나누어 가진 근원적인 속성이다. 예를 들어 사자 무리도 자기의 패거리가 아닌 무리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원숭이나 다람쥐와 같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영역’에 다른 종만이 아니라 같은 종이지만 다른 패거리가 들어와도 치열하게 싸운다. 한 사회의 개인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사적 영역’을 침범당하면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라고 해도 쉽게 원수가 된다. 친척도, 심지어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자기 영역’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에 따라 원수의 숫자도 늘거나 줄게 된다.     


그런데 수천 년 전부터 이른바 위대한 철학적 종교적 지도자들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 또는 이성적 존재라고 치켜세웠다. 그래서 짐승들과는 달리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공존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실천할 수 있는 영특한, 문자 그대로 사피엔스, 곧 지혜를 지닌 존재라고 가르쳤고 많은 사람은 이를 믿었다. 그러나 기록에 남은 인류 역사에서 그러한 공존의 지혜를 발휘한 세대는 찾아볼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갈파하신 것처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서서 인류가 특정 지역의 특정 집단의 멸망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멸망을 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인간의 생존 본능은 더욱 강화됨과 동시에 세기말적 전망도 덩달아 강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핵전쟁이나 전 세계적인 전염병, 기후 변화로 인류는 전멸할 수 있다는 냉혹한 과학적 사실 앞에서 당황하면서도 살고 싶다는 욕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과학과 관련된 세기말적 전망과 더불어 정치·경제적인 문제, 곧 이른바 ‘애국심’을 무기로 하는 민족 간의 갈등과 빈부 격차로 사회,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전망이 확인되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이 득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지구는 약 2억 5천만 년 정도 지나면 인류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한다는 전망과 궁극적으로 30억 년 후 태양이 적색 거성으로 변하기도 전에 지구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거의 확실한 전망으로 지구상에서 인류의 미래는 이미 전혀 희망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수억 년 또는 수십억 년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세월 이후에 일어날 일인데 비해 정치·경제적 갈등에 따른 전쟁과 인류 공동체의 붕괴는 당장 10년 안에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더 절망적인 전망을 주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러다 다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강한 나라, 돈 많은 사람은 살아남을 것 같지만 그것은 찰나적인 차원일 뿐, 궁극적으로 인류 공동체의 차원에서 보면 결국 다 죽는다.      


도대체 인류는 그리고 자연의 생명체는 어차피 다 죽을 것인데 왜 이렇게 치열하게 다른 종을 잡아먹어야만 하고, 더 나아가 같은 종을 먹을 것도 아니면서 이리 못 죽여 안달을 내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류가 생존하려면 식물과 동물을 죽여야 한다. 사자가 살려면 다른 동물을 죽여야 한다. 기린도 살려면 식물을 죽여야 한다. 결국 지구상에서 ‘내’가 생존한다는 것은 곧 누군가 다른 존재를 죽인다는 말이다. 하루라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죽는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냉혹한 생존 법칙이다. 매우 지혜로운 줄 알았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마저 이 자연의 법칙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 자체의 공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류가 보유한 약 15,000개 정도의 핵무기를 세계의 모든 주요 도시에 떨어뜨리면 약 30억 명의 인류가 즉시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약 50억 명도 방사능물질에 감염되어 결국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오래 살아남는 인류는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이다. 핵무기 폭발로 발생한 먼지가 태양을 가려 지구의 온도를 낮추어 식량 생산이 불가능해져 남은 인류가 굶어 죽는다. 그리고 강력한 추위로 많은 인간이 얼어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갈등의 궁극적 결과다. 경제적 갈등도 궁극적으로 마찬가지의 결과, 곧 인류 공동체의 소멸을 궁극적으로 초래한다. 어차피 제한된 경제적 재화를 소수가 독점하면 다수는 빈곤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부의 지나친 불균형은 결국 시장을 붕괴시키고 시장 경제 체제 자체를 무너뜨린다. 상품과 용역이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하는데 부가 편중된 사회에서는 부자들끼리만 거래하게 되고 이는 자본주의의 자양분인 잉여이익의 산출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를 부러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다면 부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결국 부자들은 즐겁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가 필요하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이 다 사라진 세상에서 산다면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자는 더욱 많은 부의 축적만 추구할 뿐이다. 이른바 ‘돈귀신’에 들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이 증가할수록 인류의 미래는 더욱 음울한 것으로 확인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에 대한 실망만 더 깊어진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더 영리해질수록 심화되어 왔다. 이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 모순이다. 그리고 그 어떤 생명체도 생존을 추구하는 한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며 적대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맹목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벌어지는 이스라엘 전쟁도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숙명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종의 인류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분쟁과 갈등과 증오와 분노와 전쟁과 질병에 따른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고자 노력할수록 더욱 그런 고통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언제나 그러한 분쟁과 갈등을 일으킨 ‘죄인들’의 죽음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근원적인 부조리다. 태어났지만 죽어가는 인간의 숙명이 야기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부조리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를 피할 방법은 없다. 예수나 부처가 와서 가르쳐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누가 인간을 더불어 사는,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내일 첫 뉴스도 그런 길을 전혀 알 바 없는 이들의 만행과 그들의 만행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여자와 어린이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가 재림하면 이런 인류의 고통이 다 사라질까? 지금 인류의 행태를 봐서는 예수가 다시 와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참으로 우울한 날들이다. 


그래도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 본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고 이른 말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사실 여러분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여러분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늘의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복음 5,44~48)


예수는 분명히 인간이 이기주의자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을 텐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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