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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08. 2024

‘인서울’ 로스쿨과 의대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국은 1등만 살아남는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뉴스를 보니 인서울 대학교의 로스쿨이나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이 명문대로 ‘갈아타기’ 하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비명문대 로스쿨에서는 법학적성시험 날짜에 맞추어 내부 평가 시험을 치르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다른 학교로 전학하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의대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지방 > 수도권 > 인서울 > 명문대로 갈아타기 시전을 하는 의대생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최고를 향한 갈아타기 시전이 지속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취업’이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결국 좋은 로펌에 취업해야 하는데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헤럴드경제>에 나온 기사를 인용해 본다.(링크: https://v.daum.net/v/20240108091055461?f=p)     


“최상위권 선호는 올해 의대 입시에서도 계속됐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올해 전국 39개 의대에서 발생한 수시 미충족 인원 33명 중 지방 의대만 61%(24명)에 달했다. 수도권에선 고려대 8명, 한양대 1명이었다. 의대 재학 중에 수도권에 진학하려는 목적 등으로 중도 탈락하는 규모 역시 적지 않다. 지난 2022년 전국 의대에서 중도 탈락한 인원 179명 중 77.7%(139명)가 비수도권 소재 27개 대학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갈아타기 이유 또한 의대 졸업 후 ‘취업’이다. 사실 ‘취업의’보다 ‘개업의’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와도 사정이 이렇다. 월급 받는 것이 더 안전한 돈벌이가 되는 세상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억대가 넘는 최고의 수입을 얻는 의사도 이 모양이니 나머지 직군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근본적 이유는 당연히 돈이다. 월급이 많은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더불어 이른바 스펙이 좋아야 하고 스펙의 요체는 학력이고 학력의 핵심은 대학교 졸업장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한국은 워낙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다. 산업은 내수보다는 수출 위주의 제조업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국제 경기의 변동에 흔들리는 매우 취약한 경제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구나 반도 국가이기는 하지만 북한에 막혀 있어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그래서 이웃 섬나라인 일본을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2022년 기준 세계 6위(9,210억 달러)의 수출국이고 한국은 9위(8,200억 달러)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일본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인데 비해 한국은 48%에 이른다. 그리고 그 수출 품목도 반도체, 석유 정제, 자동차가 22%나 차지한다. 여기에서도 한국 특유의 편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GDP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의 비중은 9.7%에 불과하다. 반면에 서비스업은 64%나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 취업자도 450만 명으로 16%에 불과하다. 서비스업에는 2,260만 명이나 된다. 결국 국민 대다수가 변호사와 의사를 포함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데 실질적인 GDP에 이바지하는 것은 제조업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는 서비스업에서 벌 수 있는 돈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많이 먹기 위해서는 고소득층에 속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많고 나누어야 할 파이는 작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일류를 추구하는 ‘동료 시민’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 사회의 프레임이 그런 식으로 고착되어 있는데 개인에게 삶의 태도를 고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일류대를 안 나와도 의사 변호사를 안 해도 부유한 삶은 아니어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프레임이 갖추어져야만 국민의 의식도 제고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의 프레임은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고 있기에 비기득권층은 패러다임 전환의 능력도 기회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1등, 일류만 추구하는 엘리트주의는 기득권 세력에 들어서고 싶은 대다수 ‘동료 시민’의 욕망으로 강화되고 있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혁명적 변화가 있기 전에는 그 프레임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피를 부르는 변혁을 가져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리고 그런 변혁에서는 늘 비기득권층의 피해가 가장 큰 법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총선과 대선에서 ‘잘 뽑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정치·경제 제도를 국가의 고유한 상황에 따라 절충해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처럼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지역적 성적, 계층적으로 철저히 분열된 경우에는 민주주의적 선거 제도도 오용될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크게 독재와 민주주의밖에 없고, 경제 제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정치 형태로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가 전부다. 물론 적지 않은 선진국에서는 이런 제도들을 적당히 변형하여 사용한다. 그래서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처럼 이원집정부제를 시행하는 국가가 많다. 그러나 한국처럼 대통령만 되면 독재자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런 대통령에게 아부하기만 하면 출세가 보장되는 상황을 깨뜨리려는 정치가가 나올 리 만무하다. 1등이 최고인 사회적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이런 강력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원내각제나 적어도 이원집정부제로 바꾸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런 제도의 실행은 길고 성숙한 지방자치제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한국은 실질적인 지방자치제를 해 본 역사가 거의 전무하다. 무늬만 지방자치일 뿐 모든 권력을 중앙에서 틀어쥐고 있는 관행은 1등 만능주의, 엘리트주의와 맞물려 변화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것은 서울을, 그것도 강남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기존의 프레임을 깨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일도 강남을 거쳐야 하고, 명품 소비도 강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부동산 가격도 강남과의 거리에 비례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의사나 변호사의 수입도 강남 중심으로 편차가 이루어질 정도다. 조선시대부터 600년 이상 굳어져 온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중주의는 이미 견고한 프레임이 되어버렸기에 패러다임의 전환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위에서 언급한 로스쿨이나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이 ‘갈아타기’를 시전 하는 것도 결국 이런 기존의 프레임에 최적화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일 뿐이다. 기왕 태어나서 강남에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수억 대의 연봉을 받고 호의호식하며 살겠다는 것을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세상인데 그저 그런 지방대의 그저 그런 과를 나와 그저 그런 직장에서 그저 그런 월급 받고 그저 그런 집에서 살다가 그저 그렇게 죽는 것은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특히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인물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연예인과 유명인이 다 플렉스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집단의식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로스쿨과 의대 학생의 ‘갈아타기’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를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바꿀 책임이 있는 이상민 같은 자도 평생을 기대온 민주당을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그 정적이 모인 국민의힘에 들어가 빨간 넥타이를 매고도 큰소리치는 나라 아닌가? 그런 ‘꼰대’가 설치는 나라에서 로스쿨과 의대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특히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 이런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런 진보 진영에 속한 자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미 '강남 좌파'로 살아가는 모습을 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설득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찐 좌파'의 경우 삶의 모습이 '찌질한' 경우가 많기에 사회에 들어서는 나이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혀 임팩트가 없다. 어떤 젊은이가 가난하게 살고 싶겠는가? 결국 사회 제도의 개혁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래서 기존의 엘리트주의를 무너뜨리고 학연·지연·혈연보다 그리고 능력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한 삶을 보장받아야 하는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윤리적 가치관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윤리와 개인윤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인 한국 사회에서 이는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계급 타파를 위한 사회 변혁이 불가능하다면 정신 혁명이라도 해야 하는 데 국민 대다수가 ‘돈 귀신’에 빙의된 현재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mission impossible일 뿐이다. 로스쿨에 가는 이유도 의대에 가는 이유도 다 돈 많이 벌어서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MZ세대가 곧 한국 사회의 주역이 되는 현실에서 말이다. 한 마디로 나라가 정신적으로 너무 빈곤하다. 경제적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1,400여 년 전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어온 계급주의와 600여 년 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엘리트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을 무엇으로 타파할 수 있을까? 오늘도 고민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윤리와 사회적 시장경제가 유일한 대안이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강남 최고급 아파트에서 벤틀리나 롤스로이스 끌고 나오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어보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꿈인 나라아닌가? 세상이 바뀌어야 하고 그 바꾸는 방법도 아는데 실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밖에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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