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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15. 2023

왜 여자가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냐고?

남녀불평등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원시시대에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일했다. 이른바 맞벌이를 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른바 원시 공산사회에서는 여성의 능력만큼 일을 했고 원하는 만큼 공유를 했다, 분배의 정의가 분명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성을 차별하면 출산과 양육의 중심인 여성이 약화하여 clan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남자가 더 착해서 여성을 ‘우대’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의 유지와 번식을 위한 이기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전부이고 그 능력은 노동 강도에 비례하여 발휘된다. 더 어려운 일 더 오래 하는 일을 해낼수록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 그 무한 경쟁 시장에서 임신 출산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이 처음부터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경쟁 관계인 여성의 출산은 경쟁자인 남자의 생존과 전혀 무관하다. 그래서 여자라고 봐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자비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본 낯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남녀 차별은 결코 사라질 수가 없다. 이는 남자의 선의로 해결할 수 없는 제도적 문제이다.     


노동경제학자인 하버드 대학교수 클로디아 골딘이 바로 이 남녀의 노동시장 참여도와 임금 수준 차이의 원인을 규명한 공적으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골딘 교수는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축적된 미국 노동시장 관련 자료를 분석하여 성별에 따른 소득과 고용률 격차의 변화를 추적하고 원인을 규명했다. 골딘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초 서양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전하면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한때 감소했다가 20세기 이후 서비스 산업의 성장으로 다시 증가했다. 여성의 교육 수준도 향상되어 대부분의 고소득 국가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낮고 수입도 남자보다 훨씬 적다. 골딘은 이런 차이가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따른 부담과 능력주의 산업 체계 안에서 노동에 온전히 전념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타난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직후에는 직위와 임금이 비슷하지만 10년 정도가 지나면 남녀 사이에는 임금 격차가 현저히 난다. 같은 직업을 가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이유가 임신·출산·양육이다. 아이는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결국 아내는 언제나 남편보다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시간 외 근무, 주말 근무, 야근과 같은 노동 착취 문화에 잘 적응한 남자들이 돈을 더 벌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으로 이에 최적화된 남자인 남편은 직장에서 일하고 육아로 피해를 보는 아내는 집안일로 사회적 성취의 길이 방해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른바 힘들지만, 임금이 높은 일이나, 회사의 고위직에는 아예 처음부터 여자를 배제하여 여자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린다. 이런 능력주의, 성과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가정을 등한시하게 되고 아내는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이 문제의 해결은 양육을 사회가 분담하고 노동시장을 남녀평등에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이른바 워라벨, 곧 일과 개인의 삶이 양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는 복지가 곧 잉여이익의 최대의 적이기에 현실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여자, 아내는 구조적으로 영원히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전혀 없는가? 있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육아의 부담에서 해방된 여자, 아내는 남자, 남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나가서 성취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투여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여성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중공업이나 석유 시추와 같은 힘든 일에는 그래도 여성이 배제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산업계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노력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는 결국 장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여성, 아내보고 아이를 낳지 말라고 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아내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출산이 가능한 방법은 있다. 이른바 대리모를 두거나 양자를 들이는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임신과 출산만 피할 수 있을 뿐이지 양육 부담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 양육은 여성, 아내의 사회적 성취에 결정적인 핸디캡이 된다. 그러므로 위의 두 방법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것은 임신·출산·양육에 따른 손해를 사회 나아가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임신하는 순간부터 사회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사회와 국가가 치러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더구나 실질 임금이 줄어든 상황에서 맞벌이가 아니면 생계유지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현실에서 여성이 임신·출산·양육으로 사회 활동을 못 하게 된다면 단순히 여성의 불이익만이 아니라 가정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유럽 대륙의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사회 복지 제도를 확충해 왔지만, 여전히 여성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 결과로 서양의 모든 선진국에서 여성은 여전히 커다란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여성이 아예 결혼을 안 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어떤가? 그러나 이 방법은 타당하지 않다. 이미 남녀 차별이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살아가는 것은 결혼하고 임신·출산·양육을 통해 손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을 고스란히 혼자 당해내기가 녹록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여성도 지닌 근원적인 성욕을 안전하게 충족시킬 방법이 혼인 이외에는 마땅하지 않다. 그리고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을 독신의 경우 누리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신·출산·양육을 통해 손해를 볼 것이 뻔히 예상되어도 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성이 혼인하든 독신으로 살든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해결책이다. 그러나 소득의 불균형이 점점 더 극대화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이런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해결할 수 있을까? 현재 세례 여러 실험실에서는 이른바 인공 자궁을 만드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여성의 출세를 막는 결정적 원인인 임신과 출산을 기계가 대신하는 날이 실제로 올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상한다. 현재 과학자들은 인공 자궁을 이미 만들었다. 다만 그 안에서 인간 배아를 14일 동안만 키울 수 있다. 체외 수정된 배아를 인간의 자궁에 이식하지 않고 인공 자궁 안에서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기른 배아를 다시 인간의 자궁 안에 착상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다만 양의 배아를 인공 자궁 안에서 4주 동안 기른 기록이 있다. 현재는 윤리적 문제로 인공 자궁에서 생명체를 길러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불임부부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 언젠가는 허용이 될 것이다.      


사실 그렇게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확되는 세상을 올더스 헉슬리는 이미 1932년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 바가 있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는 근본적으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 책이라서 인공 자궁을 통해 생산된 인간의 미래를 불길하게 보고 있다. 임신·출산·양육의 고통은 사라졌지만, 개성, 감정, 진정한 인간관계의 상실이 만연하는 사회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인간의 조건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고 그 계급에 맞는 활동을 하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소멸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종의 부품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소마(soma)라는 약물을 사용하여 온순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가족과 깊은 인간관계가 사라지고 얕은 관계와 우연한 만남만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과연 이런 사회에서 왜 사는지 모르고 쾌락만을 느끼며 살다가 간다.     


남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방법이 임신·출산·양육을 여성에게만 전담시키지 않는 것이지만 이러한 인공 자궁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근원적으로 ‘인간은 누구인가?’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그 누구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 말이다. 그리고 결국 현대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적인 원인인 임신·출산·양육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여성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는 사회 제도를 함께 바꾸지 않는 한 완전한 남녀평등은 이룩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는 남녀평등을 포함한 모든 평등 문제에도 해당된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연의 원리가 약육강식인 이상 모든 종류의 차별은 극복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인권과 평등과 자유의 존중을 명문화한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이 1948년 채택된 지 75년이 지났다. 인간 세대로 따지면 3세대가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평등만이 아니라 모든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완전한 평등은 가망성이 없다. 인간은 본래 불평등하게 태어났고 사회 구조는 계급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가 수립된 지 약 1만 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은 원시 공산사회나 초기 기독교의 평등한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나온 이기주의적 본성을 이기는 제도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 결국 남녀 차별은 임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영원히 깨질 수 없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 할 정도의 사회 개혁이 일어나야 하는데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와 물질주의에 빠진 인류의 상황을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남녀 차별은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아니라 본질적 차별 구조가 드러난 현상으로 지속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립서비스를 계속하는 정치가들의 선전·선동만이 난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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