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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이 말하는 ‘동료 시민’은 어디에 있나?

국민의힘에는 ‘동료 시민’이 아니라 ‘동료 신민’만 득시글거린다

by Francis Lee

한동훈이 취임사에서 쓴 ‘동료 시민’은 물론 서양에서 온 용어다. 미국 정치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my) fellow citizens를 직역한 것이다. 독일어로는 Mitbürger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시민’이라는 개념조차 아직 낯선 상황에서 동료라는 형용사까지 붙은 정치·사회적 개념은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영 사전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in British English

(ˈfɛləʊ ˈsɪtɪzən IPA Pronunciation Guide )

NOUN

a fellow citizen is a citizen of the same state as the person speaking, writing, or being referred to

We urge our fellow citizens to join us in speaking out against this war.”

- https://www.collinsdictionary.com/dictionary/english/fellow-citizen


“These words are often used together. Click on the links below to explore the meanings. Or, see other collocations with citizen.

fellowadjective [before noun]

UK /ˈfel.əʊ/US /ˈfel.oʊ/

used to refer to someone who has the same job or interests as you, or is in the same situation ...

See more at fellow

citizennoun [C]

UK /ˈsɪt.ɪ.zən/US /ˈsɪt̬.ə.zən/

a person who is a member of a particular country and who has rights because of being born there or because of being given rights, or a person who lives in a particular town ...

See more at citizen”

- https://dictionary.cambridge.org/example/english/fellow-citizen


그리고 동의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compatriot, countrywoman, fellow-countryman, fellow-countrywoman, national

- https://www.thesaurus.com/browse/fellow-citizen


참고로 독일어 Mitbürger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männliche Person, die dem gleichen Staat angehört oder die in der gleichen Stadt, am gleichen Ort lebt, wohnt

BEISPIELE

liebe Mitbürgerinnen und Mitbürger!

er als türkischstämmiger Mitbürger”

https://www.duden.de/rechtschreibung/Mitbuerger


결국 서양에서도 citizen, fellow citizen, national은 동의어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물론 말장난이 직업인 먹물들은 이런 두루뭉실을 싫어한다. 그래서 개념을 면도날처럼 구분해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fellow citizen은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기 이전에 사회적 소수자를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된 사회학적 개념에 가깝다.


한국에 나온 책 가운데 이 동료 시민의 현대적 개념을 매우 적확하게 사용한 제목에 <성소수자 지지자를 위한 동료 시민 안내서>다. 번역서인 이 책의 원래 영어 제목은 ‘A Guide for Becoming a Skilled LGBTQ+ Advocate’다. 원제를 직역하면 <성소수자를 잘 지지하기 위한 지침서> 정도 되는 것을 굳이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사용한 의도가 보인다. 동료 시민은 영미권에서 원래 한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권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해 온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소수자들도 다른 시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민이라는 개념을 서울 시민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한국 사회에서 굳이 시민을 놔두고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의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동료 시민은 매우 낯선 개념이기 때문이다. (my) fellow citizens는 영·미권에서 정치가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고 한국에서는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으로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정도로 번역해 왔다. fellow가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직역해서 ‘동료’라고 하기보다는 한 국가에 속하는 동포의 개념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과 같이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근현대 정치 개념의 시민과 국민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울 시민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민으로 부를 필요도 없고 더구나 동료 시민으로 부를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굳이 한동훈이 이런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 대변인 박정하에게 한 기자가 한동훈이 시민이라는 말 대신 동료 시민을 고수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질문하자 먼저 나온 반문이 다음과 같다. “거슬려요?” 그래서 기가 찬 기자가 시민이라는 개념이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 사회가 등장하면서 근대 국가의 주체로서 나온 것이라는 추가 설명을 하면서 시민을 굳이 안 쓸 이유가 뭐냐고 재차 묻자, 박정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좋게 들렸습니다. 말씀하신 것에 대해 대답할 이유를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날 국민의힘의 수준이다. 시민과 동료 시민을 구분할 지력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 함부로 동료 시민이라는 말을 소비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국민의힘이고 그 당을 완전히 접수하러 들어간 것이 바로 한동훈일뿐이다. 윤 대통령이 영어 잘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한동훈이고 미국 유학까지 가서 미국 변호사 자격시험에도 합격했으니,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시민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거의 오역에 가까운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굳이 들먹인 것은 한동훈의 엘리트주의가 다시 한번 발동된 것으로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의 한국어 번역본을 들고나가면서 굳이 한글로 된 겉표지를 벗겨내고 빨간색의 속표지에 선명하게 나온 그리스어 영어 음가 제목을 기자들 앞에 보여준 것과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언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이 잘난척해도 비난을 받는 법인데 별로 차 있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나대면 다들 비웃기 마련이다. 더구나 학자들 사이에서나 구분해 사용할 만한, 그리고 영미권 정치가들은 거의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fellow citizen을 매우 어색한 동료 시민으로 억지 번역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동훈 특유의 ‘잘난 척’의 일환으로만 보인다.


더 문제는 한동훈이 이 동료 시민이 뭐냐는 <중앙일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링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8957#home)


“한 위원장은 동료 시민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본지에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시민들 간의 동료 의식으로 완성되는 거라 생각한다”며 “재해를 당한 낯선 동료 시민에게 자기가 운영하는 찜질방을 내주는 자선, 지하철에서 행패 당하는 낯선 동료 시민을 위해 나서는 용기 같은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완성하는 시민들의 동료의식”이라고 설명했다.”


한동훈이 이런 대답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가 진실로 동료 시민의 ‘적확한’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런 낯선 이웃을 위해 자선과 용기를 내는 행위는 이미 2,500여 년 전 맹자가 말한 인지단야(仁之端也)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한 것에서 잘 나오는 것이다. 결코 서양의 근대 시민 정신과는 거리가 먼 개념인 것이다. 이는 마치 조선 말기에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양반의 모습과 같은 짓이다. 단어는 서양의 근대 시민 사회의 것을 사용하면서 한동훈의 머리에 들어 있는 해석은 2,500년 된 낡아빠진 것이니 말이다. 동료 시민 개념을 말하고자 한다면 한동훈처럼 저 높은 곳에서 말을 탁 던지고 국민이 알아서 자기들끼리 각자도생 하라고 호령하는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한동훈 자신이 황태자, 차기 대권 주자가 이미 된 듯이 국민 위에서 칙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동료 시민으로서 이 민주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동훈을 뺀 나머지 국민 전체가 동료 시민이 되라고 명령하는 이 ‘오만방자’한 태도로는 현재 구석에 몰린 국민의힘을 더욱 궁지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 윤 대통령이 ‘김건희 특검법’을 거부한 것에 대해 한동훈은 예상한 대로 손뼉을 치고 있다. 이 법이 위헌이라는 것이다. 위헌이라고 한동훈이 말한 바로 그 특검법으로 박근혜를 호기롭게 감옥에 처넣은 것이 바로 윤석열 한동훈 검사였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모양인가? 내가 하면 법이요 남이 하면 위헌이라는, 이른바 ‘내로남불’ 식의 사고는 도대체 어찌할 수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동료 시민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이다.


그런데 더욱 헛웃음이 나올 일은 그런 한동훈의 ‘어록’이 전국을 도배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갑자기 온 사방에 ‘동료 시민’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힌 플래카드가 온 사방에 보인다. 그리고 한동훈이 사용한 단어를 조합한 다른 플래카드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자칫하면 ‘한동훈 어록 암기 대회’라도 열 기세다. 이는 일당 독재 국가인 중공의 마오쩌둥의 말을 모아서 린바오가 편집한 <毛主席語錄>이 홍위병들에게 마치 서양의 <성경> 수준의 책이 되고 북한의 ‘김일성 어록’을 모든 주민이 암송해야만 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런 작태를 보이면서 ‘동료 시민’을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다.


국민의힘은 분명히 국민이 뽑은 110여 명의 국회의원이 모인 정당이다. 그런데 그 정당이 지난 대선 이후 오로지 주군을 태양처럼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주군이 당대표를 맘대로 갈아치우고 비상대책위원회를 3번이나 세워도 아무도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모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자들이 어찌 국민의 특히 ‘동료 시민’의 권리를 대변할 수 있겠는가? 이런 기가 막힌 비민주적인 작태가 2024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국민의힘에서는 단 한 사람도 일어서서 아니라고 외치지 못하고 있다. ‘동료 시민’이 아니라 ‘동료 신민’들로 득시글거리는 모습만 보이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제 한동훈이 토사구팽 당하고 다음 아바타가 등장하면 또 그의 어록을 암기하기 시작할 것인가? 도대체 이런 허수아비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뽑은 ‘동료 시민’은 누구란 말인가? 제발 이번 총선에서는 그런 무늬만 국회의원인 허수아비들은 다 가고 진짜로 시민을 위한 대표가 선출되어 나라를 구하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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