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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20. 2024

기독교 교회에서 신이 사라진 이유는?

신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원래 그리스어 θεός', 라틴어 deus로 일컬어진 신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신은 복수로 존재했다. 그런데 유일신교인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가 서양의 유일한 국교가 되면서 유대교의 신들을 의미하는 단어인 אֱלֹהִים을 그리스어 θεός', 라틴어 deus로 대체해서 사용하였다. 원래 אֱלֹהִים은 ‘신들’이라는 복수를 표현함에도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단수로 처리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기독교의 신이라는 개념을 교파에 따라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나누어 부른다. 하느님은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되기 전에 이미 사용되던 ‘하늘의 신’을 뜻하는 용어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늘을 다스리는 존재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파되고 나서 슬며시 기독교, 특히 가톨릭의 전문 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개신교가 즐겨 쓰는 용어로 같은 단어를 유일신의 개념으로 해석한 것이다. 곧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 세계에서 같은 유대·기독교 신을 두고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밖에 없다는 데 있다. 분열과 파벌을 나누는 것이 DNA에 새겨진 민족답게 같은 기독교마저 이 모양으로 갈라치기에 골몰한다. 게다가 다른 교파를 욕하고 나선다.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이라고 비판을 받는 그 교회도 똑같이 맞받아친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모든 기독교 교회가 이단이 아닌 것이 없어 보일 정도다. 분명히 원래 유대교에서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선언한 야훼를 시대와 문화에 따라 אֱלֹהִים, ,אֵל, θεός', deus, Gott, Dieu, Dios, God로 부른 것을 한국에서만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나누어 부르면서 신조차 파벌에 따라 다르게 불러야 속이 시원해진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민족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유대·기독교의 신이 대한민국에 와서 자기를 하느님과 하느님으로 부르는 자들 가운데 누구에게 답을 할까? 그리고 서로 이단으로 단죄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를 보고 무슨 말을 할까? 답은 자명하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원래 야훼는 유대 민족 종교의 신이니 말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예수를 숭배하는 기독교에서 신으로 차용하면서 유럽인들이 자기들의 용어로 편리하게 부르면서 위에서 말한 신(θεός', deus, Gott, Dieu, Dios, God)이 되었다. 그런데 단일 언어권 안에서 교파는 달라도 신을 부르는 명칭이 같은데 한국에서만 유달리 이런 사달을 부리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교파의 갈등 문제다. 신만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유 명사들도 교파마다 제각각으로 부른다. 바울과 바오로, 시몬과 시므온, 안드레아와 안드레, 필립보와 빌립, 바르톨로메오와 바돌로매, 토마스와 도마. 마태오와 마태, 타대오와 다대오 .... 끝이 없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는 물론 그것을 번역한 라틴어와 유럽의 주요 언어들은 모두 같은 고유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성경 속 인물의 이름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서로 죽자고 싸운다. 그리고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니 다른 교파의 신자들이 서로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분명히 같은 신을 믿는 것인데 한쪽은 하느님을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교회에서는 이미 신이 죽어버린 모양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신앙심 깊은 신자들은 자기는 열심히 하느님,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를 신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적 존재로 여기는 기독교인이 서로 자기가 믿는 신과 예수가 진짜라고 하는 가운데 누가 진짜를 믿는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증명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내밀 수 있는 ‘증거’는 credo. 내가 믿으니 진짜 하느님, 하나님이인 것밖에 없다. 남이 믿는 것이 진짜 하느님, 하나님인지는 알 길이 없다.   

  

신의 존재 증명은 기독교 역사의 시작 때부터 진행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도록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도 신의 존재 증명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서 검증할 수 있는 증명을 해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도록 증명한 사람이 없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간주관성의 확보라고 한다. 그래서 종교는 결국 개인의 극히 주관적인 믿음의 영역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그저 내가 내 맘대로 믿고 기도하고 소망을 비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결과다. 그래서 전 세계 22억 기독교인들은 22억의 신을 믿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유일신교로 교리도 비슷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외아들로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안을 파고들어 가 보면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 세계에 신은 네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내 맘속에 있는 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 그리고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신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신일까?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신이 내게 도움이 되는 신일까?     

 

20세기 이후 이렇게 기독교의 신이 ‘죽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 신이 인간을 버렸다는 데 있다.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 신을 믿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해야 하지만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일을 한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가 유럽의 유일한 국교가 되었지만, 기독교 신자들끼리의 돈과 권력을 놓고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신의 자녀들을 자비로이 돌본 흔적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에서 신은 전혀 평화와 사랑을 위해 개입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의 신의 이름으로 식민지에서 자행한 악행은 신의 자비와 전혀 거리가 먼 짓들이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신은 냉정하다. 아무리 기도해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많은 돈을 벌고, 출세하도록 돕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야훼 신을 믿는 이스라엘 군인이 무고한 팔레스티나의 어린이들을 죽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이 자기가 창조한 것들끼리 살육을 일삼아도 가만히 있다. 물론 이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신학적 변명은 나와 있다. 신의 침묵은 인간의 회개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신은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스를 자유까지 허용하는 완벽한 관용을 베풀어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부조리한 현상을 변명하기 위한 변명이 이처럼 쌓여서 결국 신학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신학은 20세기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양차 대전에서 보인 인간의 잔학함, 비이성성, 그리고 무엇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기독교 교회의 잔악함을 보고 사람들이 치를 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은 죽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사람의 마음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떠나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계에는 22억의 기독교 신자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믿고 예수에게 간청한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기도하는 대상인 신이 정말 신일까? 아니면 자기 맘속에 자기 맘대로 만들어 낸 신으로 여기는 우상일까? 살기 힘든 세상에서 무기력한 자가 정신적인 위로나마 받아보려고 말이다.     

 

기독교의 신은 니체나 리처드 도킨스와 유발 하라리가 죽었다고 선언한 존재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도 많은 기독교 신자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그 신이 살아 있다. 그렇지만 그 신이 정말로 신인지, 아니면 야훼 신인지, 아니면 그 어떤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주관적인 환상인지 어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 교회에서는 신의 보편타당함, 전지전능함. 자비로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교리를 말하는 교회 자체가 보편타당하지도 않고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더구나 자비와는 거리가 멀고 편협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 그런 교회를 보고 신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신을 죽인 것은 과학자도 무신론자도 아닌 신자와 교회 자신이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도 그저 예수와 신을 팔아먹고사는 기업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신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서 그런 교회에 모여 같은 신을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자들이 자신을 신자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진짜 신을 믿고 사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물론이다.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신자라고 할 것이다. 그 진짜 신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이미 예수가 2000년 전에 제시했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그 근거를 예수가 사랑을 설파하고 실천해서라고 한다.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6~40)     


그런데 이는 예수가 처음 한 말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나온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기 19,17~18)     


결국 유대교인이었던 예수는 유대인들 간의 사랑을 강조한 것뿐이다. 다른 민족 예를 들어 지금 유대인들이 죽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예수는 성경 어디에서도 보편적 사랑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안녕과 구원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시작한 기독교가 이를 보편적 사랑으로 확대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보편적인 사랑도 19세기 이후에나 보편성을 획득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에게는 영혼이 없기에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것에 보조를 맞추어 아프리카의 흑인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기독교다. 기독교가 보편적 사랑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그러면서 신도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자비로운 존재로 격상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위에서 말한 대로 신이 한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고 나와만 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믿는 신을 다른 사람도 믿는데 그 다른 사람과 내가 죽고 죽이는 관계에 있게 될 때 과연 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내 목숨을 살릴까? 아니면 내 원수의 목숨을 살릴까?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는 이미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3~48)     


이 구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은 위에 인용한 레위기에 나온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뒤져봐도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은 안 나온다. 성경 저자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그렇다기보다는 마태복음이 예수가 죽고 나서 기독교 공동체가 이미 수립된 다음에 쓰인 것이기에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는 이들을 원수로 지칭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초창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자기를 미워하는 다른 집단에 맞설 힘이 없었다. 그러니 함부로 맞서다가 깨질 것이 분명하기에 싸우지 말고 생존 모드에 들어가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자 다른 모든 종교를 박해하고 그 신자를 죽이고 그 종교 단체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기독교다. 약할 때는 화해하고 강할 때는 치고 나가는 전략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만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의 신이 처음부터 기독교를 전지전능하게 보호한 것이 아닐 뿐이다. 그리고 마태가 생각한 대로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신은 악인 선인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이 보기에 분명히 사악한 존재인데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신은 내게만 도움을 주고 내게 고통을 주는 자에게 벌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의 하느님, 하나님이 아니다. 심지어 남을 위해 내가 고통받고 손해 보고 심지어 죽어야 한다면 내가 그런 신을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예수가 말한 대로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예수의 제자를 지칭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에 대해 요한이 나중에 해석한 구절에 불과하다. 또한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라고 한 것도 예수가 죽고 나서 수립된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 전략에서 나온 말이다. 초대 교회가 워낙 약해서 생존 모드로 버티는 상황에서 다른 집단과 맞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기에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목숨만 유지하라는 실존적 충고다. 그런 말을 예수의 입을 빌려 한 것은 당연히 공동체의 결속과 생존을 위한 것이다.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8~42)     


이 구절도 예수가 죽고 예루살렘이 망한 다음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 전략을 말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가 초창기 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굴욕적인 생존 방식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300년 가까이 버틴 끝에 마침내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거의 1700년 넘게 가까이 유럽, 아니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독교의 신이 이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인끼리 서로 치고받는데도 무엇보다 교회 성직자라는 자들이 십계명을 어기는 데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변명은 이미 나와 있다. 신의 심판의 때가 이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나 벼와 가라지를 갈라버리니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악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양새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고 개인주의와 세속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21세기에 이런 기독교적 생존 모드는 설득력이 약하다. 더구나 기독교가 과거 1700년 동안 보여준 반기독교적인 행태는 기독교의 신에 대한 신뢰를 더욱 잃게 했다.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지고지선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만을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신을 무엇하러 믿어야 하는 것인가? 위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대로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인이나, 불의한 자나 악한 자나 골고루 돌보아 주는 존재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신은 죽은 것이다. 신이 죽고 난 다음에도 껍데기만 남은 제도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에 붙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성직자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조직이 조만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동산 재벌인 기독교 교회가 그 재산을 무기로 삼고, 수백만 명에 이르는 성직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 당분간 그 위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신이 없어도 버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이 떠난 자리를 슬며시 성직자가 차지했으니 더 오래갈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인 성직자를 하느님, 하느님으로 여기는 신자들도 여기에 한몫한다. 그러나 그러면 뭐 하나? 어차피 신은 죽었는데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 그렇게 예수가 불러온 기독교의 신을 교회와 성직자와 신자가 힘을 합쳐 몰아낸 것이다.  이제 다른 신이 그 자리를 대체할 날도 올 것이다. 과연 어떤 신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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