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기독교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절이다. 이때에는 아무리 교회에 무심한 유럽의 신자들도 교회를 찾는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교회법으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도록 규정했는데 바로 이때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 고해성사도 보고 미사에도 참석한다. 그리고 방송에서도 기독교 분위기의 음악을 더 많이 내보낸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은 단연 Matthäuspassion, 곧 ‘마태 수난곡’이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토대로 바흐가 작곡한 작품이다. 명색이 신학 박사이기에 제도 교회에 분노하고 멀리하고는 있지만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처지라서 부활절만은 뜻깊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부활절에는 예수에 대한 관상에 몰입하려고 노력한다. 그 가운데 관상과 묵상을 하면서 즐겨 듣는 것이 바로 ‘마태 수난곡’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리아 가운데 내가 가장 즐겨 듣는 것이 2부에 나오는노래인 Erbarme Dich, mein Gott, 곧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라는 곡이다. 여러 렌디션이 있지만 단연 Jos van Veldhoven가 지휘하고 Netherlands Bach Society 악단이 연주하는 가운데 카운터테너 Tim Mead가 노래한 것이 압권이다. 이 부분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는 사람이 2018년부터 5년 동안 Netherlands Bach Society 악장과 예술감독을 역임한 일본인 슌스케 사토다. Tim Mead는 영국 출신 가수다. 일본인 사토가 이탈리아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네덜란드 지휘자 판 펠드호펜이 지휘하는 교향악단의 연주를 배경으로 영국인 미드가 독일인 작곡가 바흐의 곡을 독일어로 노래한다. 언제 들어봐도 ‘마태 수난곡’을 탁월하게 해석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감상하기를 바란다.(링크: https://youtu.be/Zry9dpM1_n4)
이 아리아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매우 심플하다.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Schaue hier, Herz und Auge
Weint vor dir bitterlich.
Erbarme dich, erbarme dich!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
제 눈물을 보시어!
여기 보소서, 제 마음과 눈
당신 앞에서 고통스럽게 울고 있나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일반적으로 독일어로 눈물은 Tränen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에서는 니더바이에른 지방 사투리인 Zähren을 사용하여 뭔가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베드로다. 베드로는 교회의 전통에서 예수의 1등 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심지어 가톨릭교회에서는 나중에 그를 제1대 교황의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다. 그리고 바티칸의 교황청에 있는 대성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른바 베드로 대성전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왜 이리 징징대는 것인가?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다. 예수의 수난이 시작되기 전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는 자리에서 예수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 31~35)
그런데 예수가 잡혀가고 재판을 받는 동안에 재판정 안뜰에 앉아 있던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이들에게, “이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 69~75)
베드로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라 한국으로 비유한다면 함경도 사투리를 썼을 것이니 금방 표가 났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가 잘 나갈 때 따라다니며 으스대기도 해서 얼굴이 제법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신의 외아들인 예수만 믿고 따르면 만사형통이 될 것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가 조금 있으면 최악의 중죄인이 받는 십자가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도 유대교에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신성모독의 죄로 말이다. 예수가 그런 처지에 놓일 줄 전혀 상상도 못 한 베드로는 재판정 앞까지는 어찌어찌 따라왔지만, 도저히 예수와 한패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함께 죽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세 번이나 강력히 부인하고 나서는 곧바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흐느껴 울게 된 것이다. 이다음에 베드로가 바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는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회개한 것 같지도 않다 만약 회개했다면 예수와 같이 죽지는 않아도 적어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러 골고다 언덕에는 와 봤을 것인데 성경 어디에도 베드로가 죽어가는 예수를 찾아왔다는 내용이 없다.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한 1등 제자라는 베드로가 이 모양인데 나머지 기독교 신자는 어떨지 불 보듯 환한 일 아닌가?
예수가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베드로가 왜 이 모양이었을까? 바흐도 그것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을 모르니 성경에 나온 구절인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런 노래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 나오는 그저 그런 보통 예언자가 아니라 신의 아들, 그것도 외아들이다. 그리고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능력도 있었다. 게다가 모든 질병을 치유하고, 심지어 악령도 쫓아내기까지 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베드로는 그런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운 자였다. 그런데 결국 배신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행동에 나서기보다는 구석에서 징징 짜기만 했다. 정말로 이토록 형편없는 제자를 둔 예수가 인복이 참으로 없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베드로만이 아니다. 배신한 유다만이 아니라 나머지 11명의 예수의 직제자, 이른바 ‘사도들’이 한 명도 안 남고 모조리 도망갔다. 그런 자들이 예수가 부활하고 나서야 다시 모여 다락방에서 모임을 시작한 것이 기독교 교회의 시작이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제자들에게 징징 짜기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더 나아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다. 그 사랑의 실천 강령까지 세세히 말해주었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3~48)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 가운데 성경의 이 구절을 읽고 감동하여 기독교 교회를 찾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와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이런 예수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떠나버리기 일쑤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한 말을 실천하겠다는 말인데, 기독교 신자라도 입으로 떠들면서 예수가 한 말은 지독히도 안 듣는다. 그러니 누가 기독교를 신뢰하겠는가? 차라리 믿는다고 떠들지나 말 것이지. 그저 입으로만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형제님, 자매님...’ 이런 헛소리나 뿐이다.
그런데 그런 무늬만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베드로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도망가고 심지어 예수가 죽는 자리에도 와보지 않았지만, 그는 어찌 된 일인지 용서를 받았다. 죽을죄를 지은 중죄인이 용서를 받았다. 어찌 된 일인가?
신학적인 해석으로는 이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 지은 죄는 인간의 힘으로 용서받을 길이 없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인간이 지은 죄를 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무한히 자비로운 신의 은총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선행이 용서와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흔히 한심한 기독교 신자가 말하는 대로 내 멋대로 살다가 예수만 믿고 천국에 가면 그만이란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선행은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표징이다. 인간 차원의 시간적으로는 선행이 앞서지만 신의 섭리에서는 은총과 구원이 먼저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된다. 마래에 구원을 받았기에, 말하자면 영어 문법에서 미래 완료 시제로 구원받은 자이기에 지금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가 말한 대로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39~43)
죄인도 신의 섭리로 낙원, 곧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신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 죄인은 이미 미래에 이루어질 신의 통치를 미리 맛보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현재에 존재하지만 이미 미래완료 시제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섭리다.
예수가 말한 대로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 이에 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4~15)
여기서 말하는 καιρὸς, 곧 ‘때’는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적절한 순간을 말한다. 신이 인간에게 약속한 구원의 때가 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 곧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상태다. 곧 신이 통치하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예수는 회개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제시했다. 선행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μετανοέω, 곧 회개는 이미 지은 죄를 반성한다는 것보다는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지옥 같은 세상에 잘 적응해 잘 먹고 잘살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천국에 살자면 마음을 바꾸어 천국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εὐαγγέλιον, 곧 복음은 좋은 소식을 말한다. 무슨 좋은 소식인가?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어겨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이후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이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사실 80 전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불로장생을 한다는, 그것도 μακάριοι, 곧 복된 삶을 누리며 영생을 할 수 있다는 소식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천국이 예수의 강생으로 이미 이 세상에 왔고, 그것을 확신하도록, 곧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하도록 해준 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부활절을 성탄절과 함께 기념하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가 타락하여 세간의 욕을 먹고 심지어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기독교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세상이지만, 여전히 예수가 선포한 천국의 임재는 분명한 진실일 수밖에 없어야 한다. 그 천국은 이미 이 지상에 도래했다. 다만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천국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καιρὸς, 곧 신의 때는 왔지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kρόνος, 곧 물리적 시간의 차원에서 인간의 때가 오지 않아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니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인간은 그때가 완성되기를 바라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여전히 베드로처럼 예수마저 부인하고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애쓰고, 그러는 가운데 탐진치, 곧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신은 왜 이런 인간을 용서하고 구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죄인인 인간이 의인으로 부활하기를 바라며 무한의 인내로 기다리는 신의 뜻은 도대체 알 수 없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여전히 mysterium fidei, 곧 신앙의 신비로 머물 수밖에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