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Dec 22. 2024
24.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이별
혼자 가는 길은 멀 수밖에 없다.
남편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난 눈치였다. 내 고집을 잘 아는 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이혼 수속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결심이 섰으니, 하루라도 빨리 실행에 옮겨야 했다.
남편이 둘째에게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킨 다음 품에 안고서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남편의 품에 안긴 아이가 귀여운 소리를 낸다.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남편의 여윈 등으로 눈길이 갔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혼잣말을 하게 된다.
“불쌍한 사람...”
그렇다. 나와 같은 여자를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내가 추구하는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처음부터 나에게는 결혼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에게 결혼을 ‘요청’했다. 그는 타고난 성격대로 내게 청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결혼을 서두른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이혼을 ‘요청’ 한 것이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내는 것이 당연하다.
남편에게 잘못이 없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삶’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다. 나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내가 아니라 그 어떤 여자라도 결혼을 ‘요청’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에고’라는 것이 없었다. 이른바 무한한 수용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성격의 바탕에는 그의 종교성이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 그리고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거의 ‘마조키스트적인 삶의 태도’라고 부를만한 성격을 만들었다.
나는 그런 남편의 성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왜 ‘나의 인생’을 살 생각이 없다는 말인가? ‘나’의 인생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모든 것을 준다고? 이른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고?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정도의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살다가는 제명에 살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살려면 뭐 하러 태어났다는 말인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남편은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남에게 당하는 삶을 살려는 남자와 평생을 같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런 남편을 다른 이들은 ‘선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선한 인간’이라고 부르면 무엇하나? 내게는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니 말이다. 더구나 내가 추구하는 ‘의미 있는 삶’에 맞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는 내게는 답답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과 하루도 더 같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아직 어린아이를, 그것도 둘이나 되는 ‘내 자식’을 ‘버리는’ 일을 쉽게 결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 또한 그 아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없다. 그럴 능력과 의지가 내게는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모성 본능’, ‘엄마의 의무’라는 가부장 제도에서 만들어 낸 윤리적 덕목에 나를 묶어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은 잠든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홀로 서기, 아니 진리를 향해 나가는 결심을 한 것을 내가 더 이상 말릴 수는 없겠지.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찌 살아갈지는 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법적으로는 남편이니 말이야.”
“글세. 내가 어찌 살든 그것은 내 일이니 당신이 굳이 자세히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물론 부부라도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니 당신 말이 맞지. 그러나 당신은 법적으로나 사회적 관습으로나 아내이자 엄마야. 그리고 당신이 어떤 길을 가든지 우리와 맺은 인연을 무화할 수는 없는 일이지. 당신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은 남은 우리에게도 어떤 식으로라도 영향을 미쳐. 당신이 가는 길이 잘 되어야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 우리와 떨어져도 당신이 힘들면 우리도 힘들어. 가족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로 맺어지든 죽을 때까지 끝을 수 없는 운명이거든.”
“나는 생각이 달라.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도덕론자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어. 가족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서 만났지만 언제든 헤어질 수도 있는 거야. 그리고 아이가 있지만 그 아이도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지. 내가 그 아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일이야. 길지 않은 인생을 남편과 아이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 당신의 생각을 더 이상 바꾸려고 설득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은 사회생활 능력도 없고, 도와줄 친구도 없어. 그런데 무턱대로 독립을 하면 당장 어디서 살지. 어떻게 먹고살지 막막해 보여서 그래.”
사실 남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내게는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당장 잘 집도 없다. 그렇다고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남편에게 경제적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의존하는 삶을 살아온 결과다. 그것은 남편 잘못은 아니다. 내가 너무 나이브한 삶에 안주해 오면서 정작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지 못하고, 그 길을 갈 준비를 안 한 탓이다. 그러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현재의 삶을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다.
“여보. 우리 연애할 때 즐겨 들은 노래 생각나?”
느닷없는 내 말에 남편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무슨 노래?”
“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
“아, 그 노래. 당신이 참 좋아했지. 그런데 그 가사는 Led Zeppelin의 Robert Plant가 쓴 거잖아. 내가 알기로는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쓴 거라고 하던데. 맞나?”
“맞아. 그 노래에 나오는 여자는 천국의 계단을 사려고 하지. 그런데 문제는 그 천국을 지상의 보화로 사려고 한 데서 발생한 거야. 천국은 천국의 것으로 사야 하는 것인데. 그리고 천국은 상점의 물건처럼 살 수 없는 것이야. 그럼에도 그것을 사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이 있어.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나야. 말만 잘하면 천국을 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확신이 안 섰어. 그동안. 그러나 이제 알았어. 확신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그 기회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확신이 없어도 가야 해. 이 노래 가사대로 내 영혼이 나를 재촉하고 있어 나는 떠나야 한다고. 이제 나는 오래 참고 가야 할 길에 들어설 거야. 이 집은 그동안 나의 정원이었어. 너무 아늑했지. 그래서 결단이 늦어진 거야. 당신의 공으로 내가 이리 편하게 살 수 있었어. 참 고마워. 그러나 내 맘은 여전히 불안해. 만족이 안 되어. 아무리 당신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나의 이 빈 마음을 다 채워주지 못해. 그래서 나는 떠나는 거야.”
내 생각을 단숨에 쏟아내자니 숨이 차올랐다. 내가 말을 잠시 쉬자 남편이 말을 시작한다.
“그래. 그 노래는 내가 먼저 좋아해서 당신에게 가사를 설명해 주었지. 그런데 당신이 이제 그 가사대로 집을 떠나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하네. 그런데 나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당신이 말하는 그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마 깨달음의 길을 말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잘 모르겠어. 그리고 더구나 당신이 결혼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고. 그 아이 가운데 한 아이는 아직도 말도 잘 못하는 나이인데. 아무리 당신의 길이 소중해도 이 아이들의 삶도 소중한 것 아닌가? 적어도 이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는 당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길’이 아닐까?”
“여보.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잖아. 내게 윤리 도덕 강의를 또 하려고 하지 말아 줘. 나는 그 가족의 덫에 걸려서 여기까지 왔어. 특히 당신 가족과의 갈등으로 그 덫에 걸린 상처가 너무 커져서 이제 치유가 안 되어. 내가 낳았지만 결국 당신 집안의 성을 딴 당신의 아이자나. 당신이 나의 책임까지 지면 되는 일 아냐? 내 생각이 이기주의만은 아니야.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태는 결국 허상이야. 거기에는 가족도 포함되어. 많은 사람이 마치 가족이라는 것이 신성불가침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라. 가족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면 인류의 스승이라는 예수나 부처가 가출 또는 출가를 했을 리가 없지. 가족을 계속 지켰을 거야. 예수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길렀을 거야. 부처도 아들을 낳고 라훌라, 장애라고 탄식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 말이 맞아. 그러나 그분들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지.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잖아.”
“또 나오네. 그 남자 이야기. 도대체 여자가 진리를 찾아 나서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 거지. 왜 여자는 결혼하고 살림하고 애 낳고 길러야 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냐는 말이야. 왜 여자는 자기의 길을 가면 안 되는 거냐고.”
내가 약간 흥분하자 남편은 늘 그랬듯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내 길을 갈 거야. 그러니 이 이야기는 더 이상하지 말자고.”
“그래 알았어. 그러나 어찌 되었든 당신은 나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엄마이니 당신이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그 길을 가게 둘 수는 없어. 어디를 가든 거처가 있어야 하고 생활은 해야 할거잖아. 그래서 내가 돈을 좀 마련했어. 은행을 찾기도 불편해하는 당신이니 현금으로 준비했어. 원래 집을 장만하려고 모은 돈인데 당신이 이렇게 나가면 집이 꼭 필요하지 않으니 당신에게 줄게”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해서 말문이 막혔다.
“3억 원이야. 어디 가서 작은 집을 얻고 당장 생활하는 데 모자라지는 않을 거야. 집은 다시 천천히 모아서 사면 되니까. 니와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고, 당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봐. 그리고 당신이 집을 나가면 이혼은 불가능하니, 요즘 유행한다는 졸혼을 하는 것으로 할게. 당신이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기다리고 있을게.”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었다. 눈물 나게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 남자와 평생을 같이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길, 내 인생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 고마워. 돈을 일단 받을게. 사실 나도 막상 새 삶을 시작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아. 없다면 거짓말이지. 일단 쓰고 내 길에 들어서고 나서 남으면 다시 돌려보낼게. 아마 돈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다음날 아침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별과 신발 두 켤레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와 수건이 전부였다. 그래도 싸고 보니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가득 찼다. 남편과 마지막 아침을 함께 먹고 문을 나서려는데 남편이 묻는다.
“어디로 갈 거지? 역으로 가나? 거기까지 일단 차로 데려다줄게.”
“아니야. 택시 불렀어. 곧 올 거야.”
택시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뜬다.
“나오지 마. 그냥 이렇게 갈래. 내가 어디 가서 뭘 하든지. 연락을 안 할 거야. 당신은 아이를 무척 사랑하니까 잘 기를 거야. 난 믿어.”
“그래 당신이 찾는 그 ‘길’을 찾기 바라. 그러나 만약 힘들거나 찾지 못하거든 언제든 돌아와. 나는 아이들과 여기 이렇게 있을 거니까.”
끝까지 착한 남편으로 남는 이 사람을 두고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가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내 길을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이별의 과정이 필요하다.
택시에 트렁크를 싣고 뒷자리에 앉았다.
“손님 서울역 가시죠? 출발합니다. ”
“네 출발해 주세요.”
회색빛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무심히 움직이는 와이퍼가 물방울을 씻어낼 때마다 거리가 선명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흐려진다. 내 앞길이 어떨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 순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순간에는 흐릿한 그 길 말이다. 그러나 이제 들어섰으니 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다. 무소의 뿔처럼 나 혼자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시작할 용기를 도저히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무지’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길을 절대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 나의 운명일 뿐이었다.
1부 '천국의 계단' 끝. 제2부 ‘무소의 뿔처럼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