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Nov 30. 2024
“나는 아내와 엄마가 되기 전에 여자이고. 여자 이전에 사람이고 사람 이전에 나야. 그 나 이외에는 모두 제도적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틀이야. 그리고 그 틀이 나를 숨 막히게 해. 당신도 잘 알잖아. 내 몸은 초신성 폭발의 잔해이고 초신성은 사실 에너지의 변화 현상일 뿐이자나. 그런 물리적 현상에 나를 환원할 수는 없어. 인간이 죽으면 벗어버리는 탈에 불과한 몸이 나일 수는 없단 말이야.”
내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차분하게 말을 시작한다.
“맞아. 다 맞아. 그러나 현실은 현상만이 아니야. 손을 베면 피가 나고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죽으면 지금 여기의 나는 다시는 존재하지 못해. 윤회해도 그 존재는 지금 여기의 내가 아냐.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유일무이한 것이고 그래서 매우 소중한 것이야. 더구나 부부의 인연은 언제든 인위적으로 마감할 수 있지만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전혀 다른 것이야. 숙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지.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 둘의 만남은 우리 둘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끝낼 수 있어. 그러나 아이는 우리가 결단한 것도 정한 것도 아니고 신이든 운명이든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힘으로 주어진 것이야. 그래서 그에 대한 책임은 역설적으로 더 무한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남편도 열이 나기 시작한다. 이런 대화를 우리는 수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마치 철로처럼 우리는 단 한 번도 의견을 수렴한 적이 없다. 서로의 고집이 강해서만이 아니다. 남편은 사실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내 의견을 존중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혼, 아니 내가 가족과 분리되어 ‘독립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했다.
“나는 당신이 없어도 혼자 아이들을 기를 수 있어. 양육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나 아이들이 당신과 맺은 인연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리고 그 인연은 당신이 아이들과 합의한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연? 그래 모든 것은 인연법에 따라 맺고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아이들과의 인연도 내가 모르는 그리고 남편도 이해 못 하는 어떤 ‘법’으로 풀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인간은 80년 정도 살면 이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인연을 좀 더 일찍 마무리한다고 무슨 대수란 말인가? 더구나 내가 ‘나의 길’을 가겠다는데 말이다. 부처조차도 아들을 낳고 그를 ‘라훌라’ 곧 장애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구도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자식이라도 인연을 끊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아이는 아이 대로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야. 그러니 그 아이들이 엄마가 없다고 해도 그 또한 그들의 운명이야. 내가 이렇게 나 자신에 깊이 빠져 있는데 아이를 잘 기를 수 있겠어? 오히려 엄마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야. 나의 길을 가는데 아이가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늘 하는 엄마와 사는 아이들은 오히려 불행할 거야. 내가 자유로워지는 만큼 그 아이들도 자유로워질 수도 있어. 나는 이런 결혼 제도에 처음부터 맞지 않는 여자였어. 내가 그것을 미리 깨달았다면 당신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측면에서는 나의 책임이 있어. 그리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나의 능력으로 어찌 되지 않아. 그래서 그냥 손을 놓기로 했어.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내 맘을 속에서는 비명이 들려. ‘아무래도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나는 탈출해야 한다.’ 그런 비명이 들려. 물론 당신 잘못이 아니야. 아이들 잘못도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잘못도 아냐. 나도 모르겠어. 어떤 힘이 나를 이끌고 있어. 나는 당신이 뭐라고 해도 이제 가야 해. 그러니 나를 이제 놔줘. 당신이 말한 대로 내가 없어도 당신이 아이들을 잘 기를 거야. 나는 알아,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남편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의 확신을 알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아이냐 아내냐의 궁극적 상황에 몰리면 아이를 선택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잡는 이유도 나에 대한 사랑보다는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놓아도 그는 살 이유가 있다. 아이가 그의 삶의 전부이니 말이다. 그리고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전념할 수 없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나라는 존재를 떠나보내면 그의 삶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나를 놔줘. 나의 길을 이제 가고 싶어.”
남편은 갑자기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둘째가 보채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가서 분유를 타기 위해 물을 끓이고 팬트리에서 분유통을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침대로 들어가 누워 생각에 잠겼다. 남편 걱정은 안 들었다. 그는 잘 해낼 것이다. 오히려 큰소리친 내가 더 걱정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지 않았다. 둘째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낸 다음 남편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당신 뜻대로 하자.”
갑자기 남편이 이런 말을 하다니. 밤새 무슨 생각이 들었나?
“고마워.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정말로. 그러나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나는 그냥 알아. 내 의견을 존중해 주는 자기는 지상에서 나의 마지막 인연이야.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당신은 늘 내 마음에 남아 있을 거야. 비록 그것도 극복해야겠지만...”
여기까지 말하는데 갑자기 나답지 않게 목이 메었다. 막상 헤어지려니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남편과 처음 만나던 때부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함께 겪은 그 많은 고생들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나 이별은 짧고 단호해야 한다. 감정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길이 정해졌다면 가야 한다.
“그런데 여보. 나의 결심을 굳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법적으로 이혼을 해야 할 거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법적으로 맺어진 혼인이니 법적으로 마무리해야 해.”
이번에도 남편은 순순히 동의했다.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둘째와 함께 법원을 향했다. 운전하는 남편을 문득 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을 이렇게 남편 옆에 앉아서 다녔는지 모른다. 내가 조금만 우울한 기색이 보이면 남편은 휴가를 내서라도 내 기분을 달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열흘간 연휴를 내어 외국도 나가 보았다. 그러나 나의 근원적인 우울증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발견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이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법원에 가서야 처음 알았다. 서류 준비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 숙려 기간이 강제로 주어진다. 3개월이나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법은 법이다. 친권과 양육 협의는 필요 없는 일이니 큰 문제가 안 되었다. 나는 3개월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혼 의사를 밝히는 것은 개인의 자유인데도 국가가 구속하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계속 칭얼대었다. 무엇을 알고 있나? 그러나 아이를 달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편은 초조해하면서 차를 빨리 몰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달래고 분유를 타 먹였다. 그제야 아이가 조용해진다.
이제 이별 연습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남편만 정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무심히 여겼던 그 모든 것과 이별을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도 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집착하던 식물들과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만큼 이혼 숙려 기간이 짧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