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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09. 2024

22. 남편과 헤어질 결심

운명은 늘 잔인하다.

혜담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의 ‘과거’를 남편에게 다 이야기해 주었다.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아주 힘들었구나...”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정말 힘들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모진 운명의 사슬이 주어진 것인가?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안고 있던 둘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아이를 아기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의 여윈 등을 보는 순간 그도 참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도 좀 더 편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다. 나의 길을 생각하기에도 벅찬 것 아닌가?     


“여보. 나는 정말 심각해. 이제 나의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어.”

    

남편에게 상황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 당신의 길이 있다면 가야겠지.

그런데 그 길이 도대체 뭐야?

그리고 그 길을 가야 한다면 왜 진작 안 간 거지?”    

 

평소 과묵하기 짝이 없던 남편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나도 아직은 잘 몰라.

내 길이 분명히 있는데.

아직 확신이 안 들어.”     


그렇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내 길이 무엇인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모를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신의 길이 있겠지.

나에게 나의 길이 있듯이,

모든 인간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어.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 길이 더 이상 나만의 길이 아니어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남편다운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결혼이 모든 것을 무화시킬 만한 제도로 정착한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아이가 중요하지만 '나'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 아닌가? 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부모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결혼은 사실 종족 보존, 더 나아가 인류의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사실 인류의 종족 보존은 이미 그 끝이 보이는 일일 뿐이다. 우주적으로 본다면 지구의 나이가 유한하고 태양 또한 수명이 유한한데 인간의 생명 연장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사실 수억 년을 기다릴 것도 없다. 환경 파괴, 전쟁, 질병으로 인류의 생존은 충분히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 전쟁은 인류 역사 이래 그친 적이 없다. 질병은 늘 인간의 방어력을 넘어서면서 새롭게 더 강력하게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손을 잡고 지원을 착취하면서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환경 파괴는 결국 인류의 생존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런 지구에서 인류가 생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인류가 하루 더 생존하면 자연환경은 그만큼 더 파괴될 뿐 아닌가? 지구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해야 하는데 과연 소비문화를 통해 즐기는 쾌락에 이미 깊이 중독된 인간이 그 욕망을 버릴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인류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그런 미래가 분명히 보이는 데 무엇하러 헛수고를 할 필요가 있나?


유교나 유대교에서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마치 신이나 하늘의 숭고한 명령인 것처럼 도그마를 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가부장 제도에서 여성을 단순히 아이 낳는 도구로 전락하도록 만든 것뿐 아닌가? 그리고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나면 주체적 인격이 말살되는 상황에 밀려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남성도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인생 자체가 자녀 생산과 양육에 저당 잡혀야 하는 엄마의 기능으로 환원되는 여성의 삶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 아닌가?     


물론 나의 남편은 가부장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 점에서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특히 21세기에도 여전히 가부장 제도적 요소가 사회 모든 곳에 스며있는 한국의 상황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남편도 결국 인류가 처한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아무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아내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 또한 가부장 제도가 집단의식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사는 한 남자일 뿐이다.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내 남편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으로 대하기에는 어려운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성실함과 나에 대한 무한한 관용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근본적인 선함이 나의 결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나는 분명히 남편에게 부채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다. 나의 14살 때부터 시작된 저주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가 단지 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공동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한 것이었다. 그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길을 가야 하는 데 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주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런 결단 말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남편과 제대로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여보. 오늘은 그만 이야기하자.

나도 좀 더 생각해 볼 테니까.”     


언제나처럼 남편은 내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래. 그만하지 뭐. 아이 목욕할 시간도 된 것 같으니.”     


그 말을 마치고 남편은 그새 잠이 깬 아이 목욕을 위해 아기 욕조에 물을 담으러 안방 욕실로 향한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과연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남편이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일찍 일어났어?

아침 안 먹었지?”     


“응 당신이 일어나면 같이 먹으려고.

첫째는 아까 어린이집에 보냈어.”     


육아 휴직 제도가 이렇게 고마운 것인 줄 몰랐다. 내가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는 데 나라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러나 이런 나른한 소시민적 행복은 나의 운명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나는 진작부터 느껴왔다. 그럼에도 이렇게 버텨온 것은 남편의 우유부단함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결심을 하고 싶어도 남편의 ‘선함’이 나를 막았다. 그의 무한한 인내와 수용성은 나를 살아있게 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어차피 내 길이 아닌 데 결혼 제도에 나를 묶어 두고 내가 현모양처가 되기를 무의식적으로 강요해 온 것이다. 왜 여자는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 남자에게 평생 묶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나만의 길’을 찾으려고 가정을 나서면 당장 가정을 버린 패륜녀로 매도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는 단순히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해만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종특이었다. 수십만 년 동안 나의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기초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내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태어난 이 세상에서 사춘기가 지나 생식능력이 생기고 나면 남녀가 만나 미친 듯이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기른다. 그리고 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차피 착취 구조를 지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돈의 노예가 되어 개미 쳇바퀴 도는 삶을 강제적으로 산다. 그러다가 60살이 되어 사회에서 은퇴하며 아예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준비가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80을 넘기면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과연 이것이 ‘의미 있는’ 삶이란 말인가?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보람이 있는 삶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삶에 떠밀리다가 결국 인생에서 떠밀려 나가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의 길’을 찾지 않으면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 그 나의 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결혼, 가정, 양육의 챗바퀴는 분명히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른한 가정생활을 끊어야 했다. 여기에 너무 길들기 전에 말이다.     


문제는 그동안 ‘정’이 든 남편이다. 아이들은 언제든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첫째는 마음에 전혀 안 들었고, 둘째도 전생의 인연이지만 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나는 그를 선택했고, 결혼 이후 그는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왔으니 말이다.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를 안 내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을 동원해 온 사람이다. 아무리 나의 길이 소중하다고 해도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나의 발목을 잡아왔다.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라는 것이 익숙해져 내 정신이 나태한 탓과 더불어 말이다.    

  

“여보. 당신에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어.

그리고 당신은 나를 살게 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는 나의 길이 아니야.

나는 갈 길이 따로 있는 사람이야.

내가 집을 나가도 당신에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야.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사람이 아니야.

두 아이를 낳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책임해 보이겠지만

진심이야.

이것은 내 길이 아니야.”     

 

남편은 말없이 그리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둘째 아기를 안고 달래며 내 이야기를 계속 듣고만 있었다. 하긴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미 나를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당신도 잘 알자나.

인생 별거 없어.

그런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사실 의미 없어.

나도 알아.

그러나 의미가 없기에 의미를 만들고 싶어.

어차피 부조리한 삶이야.

노력해서 성취해도 결국 삶은 무로 돌아가.

그러나 그 무로 돌아가는 길을 내가 정하고 싶어.

운명이라든지, 팔자라든지

그런 것에 매달리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해.

내가 내 운명을 통제하고 싶어.

그래서 어떤 깨달음에 이르고 싶어.

이런 이야기 우리 많이 해봤잖아.

그런데 이제 정말로 때가 온 거 같아.

아직 확신은 아닌데

그냥 느낄 수 있어.”     


남편이 잠든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나서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당신의 깊은 속을 나는 알 수는 없어.

그러나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는 해.

왜냐면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있으니까.

결혼 제도가 억압하는 것은 아내만이 아냐.

남편도 이 구속이 힘겨울 때가 있어.

나도 때로는 숨이 막혀.

그러나 당신과 나, 둘만 있는 것과

우리 아이가 둘이 더 세상에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야.

물론 당신은 책임감이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을 계속했지.

그리고 그런 책임감이 당신의 근원적인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어.

그러나 무엇이 자유이고, 무엇이 참된 길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야.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자유를 위한 선택이 ‘너’자유를 해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지.

‘나’만 생각하는 것은 쉬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한 ‘나’는 나 홀로 존재하지 않아.

의식하든 아니든 ‘나’의 생존은 ‘나’ 이외의 모든 ‘너’에 철저히 의존해.

당신은 그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잖아.”     


우리 부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오죽하면 내가 다니는 정신과 의사가 나와 남편의 대화를 듣고는 우리 부부가 철학과 심포지엄에서 토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을까? 부부는 결국 닮은 사람끼리 만난다는 속설이 맞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남편이 꺾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편은 나를 이겨본 적이 없다.     


“당신의 논리는 내가 다 알아.

그러니 더 이상 설교하지 않아도 되어.

애들에 대한 나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러나 그 아이들의 자유는 그 아이들 스스로 찾아야 해.

내가 엄마라고 해서 그들의 자유를 책임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나는 나야. 아이들은 아이들이고.

우리는 모두 결국 혼자 태어나서 혼자 세상을 떠나.

그 누구도 나의 삶과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어.

내가 추구하는 길을 당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아이들도 나의 길에 동반자가 될 수 없어.

그리고 부처가 아들이 태어나자 ‘라훌라’를 외친 이유를 당신도 알잖아.

결국 자식도 남이고 나의 길에 장애가 될 뿐인 거야.

그런데...”     


그러자 갑자기 남편이 내 말을 끊고 들어 온다.     


“그 이야기는 여러 번 되풀이 한 거니 새삼스럽지 않아.

그런데 부처에게 아들이 장애였다면,

그 아들에게도 부처가 장애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왜 무시하는 거지?

나의 행동이 결국 남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나의 길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용기 아닐까?

삶의 문제는 어차피 쌍방과실이야.

내가 당신에게 늘 이야기 한 대로,

최소한 영화 <the Others>에 나온 엄마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옳다는 확신으로 한 행동이 결국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그 아이들의 영혼이 엄마의 고집으로 저승에도 가지 못하는 식의 상황은

비극이 아니냐고?

특히 당신이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는 과정을 지속하는 가운데 내린 결정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잖아.”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또 내 우울증이지. 또 <the Others>고.

결국 당신은 내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니

그 어떤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도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나 나도 잘 알아.

지금 내가 집을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하겠지.

더구나 아이가 있는데 애까지 버리고 나간 파렴치한 여자라고 하겠지.

나도 다 알아.

그럼에도 나는 나가야겠어.

거기에는 어떤 다른 이유도 없어.

나는 이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단순히 가부장적 제도에서 희생당하는 여자의 삶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냐.

나는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어.

그래서 다시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유롭게 되어서

세상의 악을 물리쳐서 내 아이, 내 남편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좀 더 선한 삶을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남편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남편의 우유부단함이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은 맺고 끊는 것이 없다. 그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그 점이 너무 못마땅했다. 그런 남편의 뒤에 대고 내가 선언했다.     


“여보. 나는 나갈 거야.

그리고 오늘부터 각방을 쓰고 싶어.

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나 혼자서 말이야.”    

 

남편은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오늘 아침을 아직 안 먹었다. 아이들 식사는 남편이 늘 챙겨 주었으니 걱정을 안 했다.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 재료를 주섬주섬 꺼낸다.     


“나는 안 먹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베개와 이불을 들고 서재 옆에 있는 건넌방으로 갔다.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니 앞산이 많이 푸르러졌다. 시간이 없다. 결심을 해야 한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렇게 나는 이제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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